160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공주 님.”
아리스티네는 냄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타르칸은 명실공히 왕위 계승 서열 1위고,제 배 속엔 아이까지 있지요.”
파엘라미엔의 시선이 살짝 아 래로 향했다.
테이블에 가려져 배는 보이지 않았지만.
“같은 배에 타기엔 너무 늦은 상황 아닌가요?”
당신이 없어도 배는 순조롭게 항행 중이다.
“이미 순항 중인 배에 딱히 새 사람은 필요 없죠.”
아리스티네의 말은 분명했다.
파엘라미엔은 아리스티네와 눈을 맞춘 채,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새 사람 덕분에 지름길로 갈 수도 있고,배의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고,암초를 피할 수도 있죠.”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암초를 잘 피해 왔다고 해서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다른 마음을 품고 왔다면?”
아리스티네가 싱긋 웃으며 물 었다.
부드러운 표정과 달리 예 리한 질문이었다.
“이 배를 좌초시킬 생각으로 왔다면 어떻게 하죠?”
파엘라미엔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유리잔을 더듬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차가운 음료가 들었지만,훈훈한 온실 속에서는 딱 좋았다.
파엘라미엔이 빈주먹을 꽉 쥐었다.
“난 모험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주홍빛 눈동자가 아리스티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가장 안전한 곳에 투자를 해 왔죠. 안전한 만큼,내게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왕후의 경계에서 벗어나 안전 을 보장받는 것. 그것 이외에 딱 히 바라지도 않았다.
욕심을 품는 순간 왕후의 표적이 될 테니까.
“거의 평생을 투자해 왔어요.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건 그 시간이 아까워요.”
“그게 투자였나요?”
굴복이 아니라?
아리스티네는 뒷말을 삼켰지만,파엘라미엔의 귀에는 분명하 게 들렸다.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굴복이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 하고,최악의 혼사를 가져와도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보장받았다고 생각한 안전은 몸을 뒤집어 배를 깐 개를 해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 해도 어떤가.
무의미한 정쟁을 피했고,덕분에 자신과 모후,외가는 여전히 평화롭다.
대머리랑 결혼하기 죽기보다 싫었지만,결국엔 수긍했을 것이다.
여태까지 그래 왔듯이.
“하지만 당신은 나를 모험하고 싶게 만들어요.”
다른 가능성이 보였다.
아리스티네는 너무나 당당히 왕후에게 맞섰다.
저러다 곧 꺾이고 부러질 것이라고 생각했건만,오히려 뛰어넘었다.
기반은 자신과 같았다. 아니, 파엘라미엔 쪽이 더 유리했다.
왕후가 처음 파엘라미엔을 경계했었던 것은 그녀의 외가가 쟁쟁한 권력가이기 때문이었으니까.
그에 반해 아리스티네는 아이루고에 어떤 연고도 없었고,타르칸과의 관계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만약 내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또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흘리게 될 피가 아까워,실패할 때 돌아올 보복이 두려워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면 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평생 모험은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손해를 계산하지 못하 는 어리석은 자나,꿈과 희망만 을 바라보며 이상에 물든 자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부러웠던 것이다.
그렇기에 손에 닿지 않는 과실을 덟을 거라고 생각하는 짐승 처럼,모험하는 자들을 우습게 여겼다.
이제라도 파엘라미엔은 아리스티네와 함께 모험을 하고 싶었다.
옆에서 동행하고,일어날 일을 함께 겪으며 뛰어넘고 싶다.
“모험이라고 하기엔 늦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비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배는 순항 궤도 에 접어들었으니까.”
잘 가고 있는 배에 탑승하는 건 모험이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 할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어요.”
파엘라미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리스티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파엘라미엔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어차피 왕후 쪽에서 이대로 아무 짓도 안 할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굳이 배를 바꿔 타겠다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아, 하긴. 하나 분명한 이유가 있었죠.”
아리스티네는 머리카락 한 줄기가 마지막 잎새처럼 매달려 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나랑 손잡으면 원하는 대로 잘생긴 남자랑 결혼할 수 있으니까?”
“제 이상의 남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상대를 마음대로 고를 순 있잖아요. 침대를 부술 남자로 골라요.”
파엘라미엔이 피식 웃었다.
“그거 좋죠.”
하지만 그뿐이었다면,아리스티네가 처음 제의했던 그 순간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비전하께서 주신 유예 기간 동안 천천히 나 자신을 되돌아 보며 생각해 봤어요.”
파엘라미엔이 손끝으로 접시 끝을 훑었다.
“그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납작 엎드려 살아서 몰랐는데 나도 한 성격 하더라고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나직하게 말한 그녀가 고개를 들고 씨익 웃었다.
“당하고만 사는 건 재미없죠.”
“특히 그 말로가 못생긴 마지막 잎새와의 결혼이라면요.”
일전에는 정략혼에 상대의 외모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던 아리스티네였지만,이제는 그 중 요성을 잘 알았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남편의 미모와 체력이었다.
마지막 잎새라는 말에 쿡쿡 웃은 파엘라미엔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 라지며 진지해졌다.
“비전하라면 제 말에 귀를 기울이겠지요.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성실히 생각해 주실 거고.....”
아리스티네는 자신을 바라보는 파엘라미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주흥빛 눈동자가 마치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다섯 살부터예요. 제가 살아 남기 위해서 왕후의 밑에 납작 엎드려서 살아온 게 그때부터라고요.〉
〈그간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 아무것도.〉
〈나도 왕족이에요. 대단한 야망이나 포부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러면 경계를 살 테니까.〉
파엘라미엔이 울고 있었던 날, 그녀가 쏟아 내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같은 사람인데,이상하게 그때 그녀의 눈과 지금 그녀의 눈은 달랐다.
희미하게 꺼져 가던 불빛과 주변을 비출 만큼 환하게 타오르 는 불.
“예쁘네.”
아리스티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예?”
갑작스러운 말에 파엘라미엔의 눈이 동그래졌다.
얼굴이 화르록 달아오른다.
파엘라미엔은 저도 모르게 뺨 을 감쌌다.
정적으로 적대시했을 때도 아리스티네의 눈부신 미모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예쁘다고 툭 던지다니.
“있죠.”
아리스티네가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몸을 앞으로 기울 였다.
아까보다 한층 친밀해진 태도였다.
“하고 싶은 거요?”
되물으며 파엘라미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스텐부터 메스,방책까지.
벌이는 일마다 입이 떡 벌어지는 결과를 내 온 아리스티네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대체 어떤 일일까.
‘혹시 실바누스와 관계된 일인가? 아니,나한테 말하는 걸 보면 아이루고 내부의 일일 가능성이 커. 방책을 이용해서 무역 로를 개척하자는 것일까?’
굉장한 결과를 가져올 사업이었다.
파엘라미엔의 심장이 쿵쿵 뛰 었다.
이윽고 아리스티네의 입술이 열렸다.
“치킨에 맥주를 함께 먹는 거요.”
그리고 파엘라미엔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치킨…… 에 맥주를 함께 먹는 거요?”
“지금은 임신 중이라 술을 마시면 안 되니까.”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농담 하나 없이 한없이 진지했다.
아니,오히려 열망마저 느껴지 는 게 진심으로 그렇게 먹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파엘라미엔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맛있을 거 같지 않나요?”
그 물음에 파엘라미엔은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이 닭튀김을 치킨이라고 했다.
혀끝에 그 고소하고 바삭하고 촉촉했던 치킨의 맛이 절로 되 살아났다.
짭조름한 치킨에 시원한 맥주라면…….
저도 모르게 침이 꿀끽 넘어갔다.
파엘라미엔은 아이루고인답게 술을 즐겼다.
그녀의 반응을 본 아리스티네 가 씨익 웃었다.
“그때 우리 같이 먹을래요?”
동맹의 성립이었다.
* * *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어깨에 터억,얹어지는 무게감 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쪽,하고 입술에 뽀뽀가 돌아왔다.
바로 떨어지는 입술에 아리스티네가 눈을 깜빡이자,다시 입술이 닿았다.
눈을 감자 뜨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달콤했다.
타르칸이 아쉬운 듯 입술을 때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가 생긴 건 정말 좋지만……”
왜 그렇게 빨리 생겨야만 했는 가.
그것이 그렇게나 원통하고 억 울할 수가 없었다.
커다란 쿠션에 기댄 타르칸이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아리스티네를 그 사이에 앉혔다.
그리고 푹 끌어안는다.
아리스티네가 픽 웃었다.
“내가 곰 인형이야?”
“곰 인형이면 차라리 낫지.”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배를 살살 쓸며 답했다.
“착한 생각을 되뇔 필요 없으니까.”
겨우 하룻밤 보냈을 뿐이다.
타르칸도,아리스티네도 처음으로 이어지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같이 있으면서 참아야 하다니.
타르칸의 가슴에 기댄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아니,너 은근히 색골이구나해서.”
“뭐?”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색골? 색고올?!’
타르칸은 기가 막혔다.
“내가 뭐가 색…… 이야! 결혼 하고 매일 밤 함께 한 침대에서 자면서 아무 수작도 안 부렸는데!”
가슴을 슬쩍 더 까며 아리스티네의 손이나 등에 붙이긴 했지만,그 정도는 수작이 아닐 것이다.
그냥,그냥…… 좁은 침대에서 자다 보니 어느 한 군데는 붙어야 하니 그런 것이지.
“다른 남자 같았어 봐. 나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야!”
열변을 토하는 타르칸을 보고 아리스티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라고 들었는데.”
그 중얼거림에 타르칸은 더 속 이 터졌다.
이젠 하다 하다 못해 아내에게 색골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진짜로 색골 짓 하고서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타르칸은 지금 머릿속에 있는 것 5조 5억 개 중 겨우 하나 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하고 첫 날밤에 궁인들이 무슨 다 비치는 망사 란제리를 주면서 그게 네 취향이니 입으라고 했어.”
“아니,그거 내 취향 아니거든? 절대 아니야.”
“응? 취향 아니었어?”
아리스티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타르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타르칸은 그런 아내를 빤히 내 려다보았다.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있는 모 습 위로 슬금슬금 다른 모습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궁인들이 현란하게 팔랑팔랑 흔들었던 란제리…….
저게 속옷으로서 기능은 제대로 하는 것인가 의심될 정도로 천의 면적이 없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던 란제리…….
이렇게 제 다리 사이에 앉아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리스티네가 그 란제리를 입고 있다면......
코로 피가 몰렸다.
타르칸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고개 숙인 그의 귓등과 목이 시뻘겠다.
“뭐야? 왜 그래?”
아리스티네가 당황해서 그를 불렀다.
“어디 아파?”
아프긴 아팠다.
유일하게 치료해 줄 수 있는 아내가 지금 치료해 줄 수 없는 상태라 그렇지.
타르칸은 오러 수련을 할 때처럼 심신을 정갈히 하며 착한 생각을 중얼거렸다.
‘나는 애 아빠다. 할 수 있다!’
후,하고 숨을 몰아쉰 타르칸이 화제를 돌렸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근데 이 서류는 뭔데?”
아까부터 아리스티네가 보고 있던 서류를 턱짓으로 가리키자, 그녀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순순히 답해 주었다.
“파엘라미엔 공주가 주고 간 거야.”
그 말에 타르칸이 미간을 찌푸렸다.
“걔랑은 또 언제 친해졌어?”
“으음,여자들의 비밀.”
마지막 잎새랑 결혼하기 싫어해서 친해졌다는 말은 할 수 없 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해서 대답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타르칸의 미간에 파인 주름이 더 깊어졌다.
아리스티네는 찌푸린 미간을 톡톡 두드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모발이 풍성해서 참 다행이야.”
뜬금없는 말에 타르칸이 얼굴을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머리가 풍성해서 좋다는 소리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아리스티네가 좋다고 하니 타르칸도 좋았다.
“앞으로 모발 관리 잘해.”
타르칸은 기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슴을 단련하기 위한 푸 시업 외에도 모발을 단련하는 운동을 따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모발 단련은 어떻게 하지?’
몸을 단련시키는 것에는 이골 이 난 타르칸이었지만,모발을 단련시켜 본 적은 없었다.
타르칸은 고민하며 아리스티네를 푹 끌어안고 배를 살살 쓸었다.
그러고 있으니 아리스티네의 고개 너머로 서류가 보였다.
아주 간결하지만,중요한 내용은 다 포함이 되어 있는 보고서였다.
파엘라미엔의 능력이 돋보이는 정리였다.
그리고…….
“왕후가 아주 작정을 했군.”
서류를 다 읽은 타르칸의 눈매 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