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는 가운 데 마르텐의 말이 계속되었다.
“저는 당연히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어찌 형의 아내이자,아이루고의 왕자비이자,제 조카를 임신한 여인에게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의 말은 곧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협박을 당했어도 이런 일에 가담했다는 것은 제 평생 의 수치이며 죄입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왕후가 있다는 확인 사살.
“왕후께서 협박까지 했다고?”
“그래,아무리 마르텐 왕자가 여색을 밝힌다고 해도 말이 안 되지. 가족이잖아.”
“세상에,어쨌거나 비전하는 왕후 폐하의 며느리 아닌가요?”
법도상 왕후는 곧 모든 왕자와 공주들의 어머니였다.
“다른 아들에게 며느리를 겁탈하라 사주하다니……”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하긴,마르텐 왕자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어리석진 않겠죠”
“마르텐 왕자가 잘못하긴 했지 만,저렇게 뉘우치며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왕후가 어떤 협박을 했을까 그게 더 소름 끼치네요.”
쑥덕대는 목소리는 왕후의 귀 에 들릴 정도로 분명했다.
마르텐의 못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일단은 그의 허물을 덮고 왕후에게 모든 초점을 집중하고 있었다.
본디 모든 일을 꾸민 배후가 가장 죄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타르칸이 처음 지목한 게 왕후라는 이유가 컸다.
왕후와 타르칸의 싸움에 사람 들은 명백히 타르칸을 택한 것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게 어 떻게든 연을 대려 안달복달하던 것들이……!’
왕후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녀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며 타르칸에게 물었다.
“그래서,내가 마르텐 왕자를 사주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
“굳이 물을 필요 없이 알고 계신 사실 아닙니까.”
“네가 정적인 나를 제거하기 위해 마르텐을 사주한 게 아니라?”
그 말에 타르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왕후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아 움 직일 수도 없고,입을 열면 신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등 뒤에서부터 시작된 소름이 뺨까지 올라왔다.
얼음송곳으로 척추를 긁는 것 만같은 감각에 평정을 되찾으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당신 따위를 없애겠다고 내 아내에게 이딴 일을 겪게 했다고?”
타르칸의 황금빛 눈동자가 타 오르듯 일렁였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타르칸은 왕후에 대한 최소한의 예도 갖추지 않고 있지만,그 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타르칸의 분노를 받고 있지 않 는 귀족들조차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였다.
그의 살기를 정면에서 받고 있 는 왕후는 물론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리는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 운데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제는 추태여도 상관없으니 차라리 주저앉고 싶었다.
지금 제게 쏟아지는 숨 막히는 살기만 지워 버릴 수 있다면.
그러나 주박에라도 걸린 것처 럼 주저앉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응? 대답해.”
파엘라미엔의 협력으로 왕후의 계획을 알았을 때부터 타르칸은 이 일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고 싶었다.
단 한 순간이어도 술주정뱅이 의 벌레 같은 손이 제 아내에게 닿는 것을 참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리스티네의 뜻이었다.
타르칸은 그녀의 뜻이라면 밤 의 태양과 낮의 달도 따다 줄 수 있었다.
그래서 겨우 목 끝까지 솟아오 른 생각을 집어삼켰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자신의 사 주라고 하다니.
어떻게 감히.
그의 금안이 분노를 삼켜 더 짙게 물들었다.
“나,나는,헉,으윽……”
겨우겨우 입을 연 왕후가 꺽꺽 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목에 핏줄이 돋았다.
“칸.”
그때,자그마한 목소리가 타르칸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왕후를 향해 날카롭게 휘몰아치던 위압이 뚝 끊 겼다.
흔적도 없이,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리네.”
봄볕처럼 다정한 부름이었다.
아리스티네가 작게 미소 지으 며 그의 뺨을 쓸었다.
그리고 왕 후를 돌아보았다.
“왕후 폐하, 제 남편을 이리 모욕하다니 증거는 있으신 거겠죠?”
그 말에 궁인의 부축을 받으며 숨을 몰아쉬고 있던 왕후가 고개를 들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 증거라는 단어만 빙글빙글 돌았다.
증거 따윈 없다. 도발이었으니까.
“네? 그렇게 주장하신 근거를 꼭 듣고 싶은데요.”
“그,그건……”
더듬거리던 왕후가 정신을 차 렸다.
“먼저 나를 모함했으니 한번 내 입장이 되어 보라고 한 말이다. 억울하게 몰린 내 심정을 느껴 보라고. 타르칸이 내게 한 짓과 똑같지 않으냐.”
“어머나?”
아리스티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그게 같나요? 칸은 현 행범으로 붙잡힌 마르텐 왕자님의 진술을 토대로 왕후 폐하가 저지른 죄에 대해 말한 건데.”
조목조목 짚어 주는 사실에 왕후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아리스티네는 절대 그냥 넘어 갈 상대가 아니었는데,잠시 잊고 있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기기만 한 왕후 폐하의 주장과는 다르 죠. 아,이거 얼마 전에 있었던 일 같은 기시감이 드네요.”
아리스티네는 과거를 회상하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병환으로 쓰러지신 국왕 폐하를 제가 독살한 것이라 주장하셨을 때도 이러셨죠.”
왕후가 저지른 최악의 오점을 매끄럽게 꺼내드는 모습에 귀 족들 사이에서 감탄 어린 탄성 이 새어 나왔다.
맥락 없이 과거의 치부를 꺼내면 꼬투리를 잡는다는 느낌이 들기마련이다.
하지만 아리스티네의 언사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꼬투리는커녕,그때의 일과 지 금의 일이 분명하게 겹쳐 보였다.
독살 사건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 왕후의 모든 발언이 어떻게든 정적을 몰아가기 위해 우 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엄청나군.’
‘아직 나이도 어린데 하는 것 을 보면 노회한 정치가 같아.’
‘벌써 이런데 더 경험이 쌓이 면 어떨지……’
‘이래서 신이 내린 황제의 재목이라는 소리를 듣는 건가?’
실바누스의 신문에 난 일은 아이루고에도 퍼졌다.
황가에 관련된 일이 으레 그렇 듯 과장과 비유가 섞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였지만, 어쨌거나 이유가 있어서 그런 말이 나왔을 터였다.
지금 아리스티네가 보여 주는 뛰어난 정치 감각은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래,적절할 때 잘 끼어들기 까지 했어.’
‘그대로 타르칸 왕자가 왕후를 압박하다 왕후에게 문제라도 생겼으면 보기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
‘그렇다고 처음부터 끼어들었으 면 왕후가 이렇게까지 압박을 받지 못했겠지.’
‘압박은 한계까지 주고 거기에 논리로 또 타격을 주다니.’
‘이러면 왕후는 위축될 수밖에 없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클린 샷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켜보던 사 람들의 반응에서 바로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정확한 근거는 하나도 없이 비전하를 독살범으로 몰고 봤죠?”
“일단 끌고 온 뒤에 증거를 찾으려고 했던가요? 그게 뭐가 찾는 거죠? 위증을 만들려고 한 거지.”
“이번에도 또 그러는 것을 보니,참……”
“비전하께도 이러는데 다른 귀족들은 아주 손쉽게 누명을 씌워 제거하시겠어요.”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말을 주고받았다.
왕후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아리스티네 가 또 조목조목 반박할 것 같았으니까.
완전히 위축된 결과였다.
“왕후,많은 권력을 가진 자리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네프테르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무겁게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일시에 말을 멈추고 그에게 집중했다.
“그런데 그대는 그 권력을 휘두르는 법만 알 뿐,책임질 생각은 없는 것 같군.”
네프테르의 말뜻은 분명했다.
너는 왕후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어떻게……”
왕후의 눈앞이 절망으로 까닿 게 물들었다.
“어떻게 폐하께서 제게 그런 말씀을……!”
피 끓는 원망에도 네프테르의 눈은 잠잠했다.
내게 묻지 말고 네가 한 짓을 뒤돌아보라는 둣.
하지만 왕후는 제가 한 짓을 뒤돌아 보며 후회하고 뉘우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독기가 그녀의 눈에서 타올랐다.
‘이미 저지른 실수는 다시 주 워 담을 순 없어.’
하지만 적어도 최악의 상황만 은 피해야 했다.
“……얼토당토않게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 모함받으니 흥분해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까와 사뭇 다른 태도로 말한 왕후가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감정적으로 굴어 내가 순간 말실수를 했구나. 너희에게 미안 하다.”
‘흐음,‘모함’이 아닌 ‘실수’ 라……’
아리스티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일부러 소리 내어 왜 축소시키느냐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왕후의 다음 말이 더 기대되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구신 이유가 있으실 테죠.”
“그래.”
왕후는 마치 아리스티네의 말을 기다렸다는 둣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노기 어린 시선이 마르 텐을 향했다.
“내 배로 낳은 친아들처럼 아끼던 마르텐이 내게 더러운 누명을 씌웠으니까.”
‘그래,이렇게 나와야지.’
곧바로 끝날 것같이 보였던 공방은 왕후가 죄를 마르텐에게 넘기며 길어질 것을 예고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흡족해서 속으로 미소지었다.
왕후가 거짓을 말하고 다른 이를 모함할수록 그 죄가 커지니 까.
‘왕후의 위치도,왕후의 외가도,왕후가 가진 이권도 그녀를 보호하지 못할 만큼.’
이미 타르칸은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그 자리를 확고히 했다.
왕후가 가만히 있었다면 아리스티네 역시 그녀를 내버려 두 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밟아 주는 게 좋겠지.’
태어날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후환은 남기지 않는 게 현명했다.
“무,무슨 소리입니까,왕후 폐 하! 폐하께서 제게 왕자비에게 추잡한 스캔들을 만들라고……!”
“닥쳐라!”
“이렇게 저를 입막음하려 하시는 겁니까!”
“입막음? 내가 너를 왜 입막음 해야 하지?”
“왕후께서 제게 시키셨으니까요!”
“증거라도 있느냐?”
마르텐은 앞을 잘 내다보는 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일에 가담하지도 않았을 터다.
당연히 증거 따윈 없었다.
이런 일에 증거를 만들었다가 나중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증인은 있습니다.”
마르텐이 고개를 돌려 자신이 섭외한 카메라맨과 사내를 바라 보았다.
처음의 계획대로 자신이 방에 들어가지 않고 사내에게 모든 것을 맡겼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들은 왕후 폐하의 사주를 받고 제가 따로 섭외한 자들입니다. 불경한 장면을 찍기 위한 카메라맨과 불경한 장면을 연출할 놈이 필요하다 하셨으니까.”
그 말에 귀족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었다.
하지만 새로 드러난 사실에 가장 분노한 것은 네프테르였다.
‘감히 내 째끼를……!’
마르텐이 아리스티네의 휴게실에 접근한 것도 기함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누런 이빨이 듬성듬성 나 있는 데다가 술에 절어 있는게 분명해 보이는 길거리의 건 달을…….
네프테르는 당장이라도 이 일 에 연루된 모든 이들을 지하 감 옥에 처넣고 싶은 충동을 억눌렸다.
잠자코 있는 며늘아기의 모습 을 보니 계획이 있는 듯했다.
아리스티네는 항상 그를 놀라 게 했으니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을 터.
그는 딸의 재롱…… 아니,계획을 보기 위해 분노를 애써 잠재웠다.
“글쎄,네놈이 데려온 자들이니 위증하라고 했을지 어찌 알지?”
“지엄하신 국왕 폐하의 앞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즉시 혀가 잘리리란 것을 모르진 않을 것입 니다.”
“좋아,일단 들어 보도록 하지.”
왕후의 말이 떨어지자 우물쭈물하던 두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마르텐은 이들을 이 일에 가담시키기 위해 돈을 주고 왕후의 이름을 댔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입에서 왕후의 이름이 나올 터였다.
그런데.
“저어,마,마르텐 왕자님께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왕자님께 유리한 말씀을 드려야겠지만……. 저 같은 놈팡이도 양심이 있는 자라 차마 이 많은 분들 앞에서 거짓을 고하진 못하겠습니다.”
무언가 이상했다.
“마르텐 왕자님께선 혹시 걸릴 때를 대비해 저희에게 왕후 폐 하의 이름을 말하라 말씀하셨습 니다.”
“저희는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증인 역할을 하라고 돈을 받은거였습니다.”
“아무리 돈을 받았다고 해도 저 같은 놈이 어찌 비전하께 그
런 짓을 하려 하겠습니까.....
그냥,그냥 왕후 폐하의 이름만 말하면 된다고 해서 왔는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돈에 눈이 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르텐은 입을 떡 벌린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저들은 왕후와 관계없이 자신이 직접 섭외한 자들이다.
왕후와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연이 없는 자들.
그런데 지금 왜 왕후의 편을 들며 거짓을 고한단 말인가.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왜 진 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마르텐 왕자님,이제 그냥,그 냥 인정하시죠.”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받은 돈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건 누가 봐도 마르텐이 이들을 사주해 왕후를 모함하려 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찌 돌아올 지는 분명했다.
“아, 아니야……. 아니야,아니 야,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하 던 마르텐은 왕후와 눈이 마주 쳤다.
그녀는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두 눈이 마주치는 찰나에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 더 짧은 순간 본 표정이 마르텐의 망막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끝났어……’
왕후는 들킬 때를 대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손을 쓰지 않 고 마르텐에게 시킨 것이었고.
‘이제 다 틀렸어……’
마르텐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왕후의 말은 전부 다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
‘그래,그러게 왜 멍청하게 끝에 가서 날 배신하고 타르칸의편에 선 거냐.’
왕후는 마르텐을 내려다보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뜬 그녀의 얼굴에서는 배신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우월감에 들떠 있을 뿐.
‘물론 네가 배신한 덕에 내게 는 더 잘됐지만.’
왕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은 마르텐 혼자가 아니었다.
타르칸 역시 왕후를 죄인으로 몰았다.
왕후가 소매로 입을 가리며 미 소 지었다.
명백한 그녀의 승리였다.
그때였다.
남편은 됐고, 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