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세간의 온갖 주목을 받고 있던 연회에서 생긴 일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사람이 셋 이상 모이면 모두 이에 관한 말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분개하 던 사람들은 곧 왕후의 완전한 처벌을 원했다.
공판 없이 얼음그림자 탑에 가둔 것을 두고 과한 처사라고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복잡한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귀족들뿐이고,일반 백성들은 죄를 지었으면 곧 바로 그 대가를 치르길 바랐다.
왕후뿐만 아니라 친정인 스키 엘라 공작가에 대한 불만 역시 하늘을 찔렀다.
스키엘라 공작가의 마차를 보 고 침을 퉤, 뱉는 사람마저 등장 했다.
처벌할 만한 죄였으나 대응은없었다.
여론이 극히 안 좋은 상황이라 스키엘라 공작가에서 침묵한 것이다.
마르텐과 왕후,스키엘라 공작 가를 향했던 혀끝은 마지막으로 하미르를 향했다.
“그런데 왕후가 이런 짓을 꾸민 건 역시 하미르 왕자님 때문 아니야?”
“설마 하미르 왕자님께서도 알고 계셨던 건 아니겠지.”
“뭐가 설마야.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모르셨을 수도 있잖아. 하미르 왕자님같이 상냥한 분이 이런 일을 알았으면 막으셨겠지.”
“뭘 모르는 건 자네야. 정치라 는 건 말이야……”
하미르 왕자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워낙 다정다감한 이미지로 사람들과 소통해 온 사람이라 더더욱 그랬다.
하미르가 연루되었는가,아니면 결백한가.
거기에 대한 결론은 취조실에 서도 나지 않았다.
직접 몸을 움직인 마르텐부터 아리스티네의 휴게실을 지키고 있던 시종들까지.
왕후의 사주를 받아 이 일에 관여한 사람들은 모두 색출되었다.
하지만 하미르 왕자의 이름은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연루되지 않았는지,하미르까지 연루되면 모든 것이 끝나니 밝히지 않는 건지,알 수없었다.
색출된 죄인들은 엄벌을 피하 지 못했다. 네프테르는 이번 일 에 대해 용서가 없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와 다르게 한겨울에도 봄이 온 것처럼 따 스한 기운이 감도는 평화로운 곳이 있었으니…….
아름다운 선율이 마치 천상에 서 내려오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페리아 콰르텟이 봄을 부르는 곡을 연 주 중이었다.
그들은 벌써 보름째 왕궁에 머물며 단 한 사람만을 위해 공연 하고 있었다.
궁 안을 오고 가며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세상에,그 페리아 콰르렛이 단 한 사람을 위해 연주 중이라고?’
‘저번에 후작가에서의 초청도 거부하지 않았나? 소규모 파티라서 관객 수가 적다고.’
‘그 콧대 높은 페리아 콰르텟 이 오직 한 분을 위해 연주라니.’
‘그것도 며칠째 말이야.’
복도를 청소하는 하급궁인들은 덕분에 귀를 호강하게 되었다며 만족했다.
사실 호강하는 건 귀뿐만이 아니었다.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궁 안에는 온갖 기화요초가 매일 싱그 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한겨울인데 대체 이 많은 꽃을 어디서 구해 온 건지.
온실이 많은 궁 안에서 일하는 궁인들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티네의 방 안은 물론이고,그녀가 운신하는 모든 곳에는 향기로운 꽃이 가득했다.
맑고 청량하고 달콤한 향기는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간직해서 그런지 조화롭게 어울렸다.
아리스티네는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요즘 한층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거기에 옆에서 잔잔한 음악까 지 연주하고 있으니 졸음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했다.
아리스티네를 끌어안고 있던 타르칸이 그녀를 토닥였다.
“졸리면 좀 잘래?”
그 말을 들은 페리아 콰르렛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주 속도를 떨어트리며 자장가로 곡을 바꾸었다.
곡을 완전히 멈추지 않고 이어지게 바꾸는 게 그들이 궁에서 연주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닦 달을 당했는지를 알려 주고 있 었다.
“음,그럴까…….”
아리스티네가 무거운 눈을 끔 떡이는데 궁인이 다가왔다.
“비전하, 폐하께서 오셨는데요.”
그 말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리네!”
“아,부왕 폐하.”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에게 기댔던 몸을 세우며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일어날 것 없다.”
네프테르는 그녀를 만류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표정에 왠지 두근두근 설렘이 가득해 보인다.
‘왜 그러시지?’
아리스티네가 의문을 품는 찰 나, 네프테르가 뒤로 숨기고 있 던 손을 짠,하고 앞으로 내밀었다.
아리스티네의 어깨 위로 무언가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폭신폭신한 감촉에 아리스티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프테르는 은빛으로 빛나는 새하얀 모피 망토를 두르고 있는 아리스티네를 보더니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잘 어울리는구나.”
아리스티네는 얼떨떨한 기분으 로 매끄러운 털을 쓸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처럼 가벼운데 굉장히 포근하고 따뜻
“어떠니?”
“엄청 따뜻해요. 폭신하고 포근한 감촉도 좋고요.”
그 말에 네프테르는 자랑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뮤나 은여우 모피다. 내 직접 사냥에 나서서 잡은 것이야.”
엣헴,네프테르가 콧대를 세웠다.
그럴 만했다.
이뮤나 은여우는 설산 지대에서 서식하는 여우로 무척 희귀 했다.
일단 털색부터가 햇빛에 빛나 는 눈과 똑같아서 발견하는 것 만으로도 대운을 마주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거기다 빠르긴 어찌나 빠르고 숨기는 얼마나 잘 숨는지.
발견했다고 추적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뮤나 은여우를 사냥하는 것 은 숙련된 사냥꾼이라고 해도 힘들었다.
“이 귀한 걸……. 거기다 부왕 께서 직접 저를 위해 사냥하셨다니 더 감동이에요.”
사양하지 않고 받는 아리스티네를 보며 네프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간 ‘사양하지 않는 법’, ‘대가도, 계산도 없이 받기만 하 는 법’을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그 전엔 얼마나 똑 부러지게 계산하려 했는지.’
“밖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 네 건강이 걱정되더구나. 임신 중에는 특히 몸을 따뜻하게 해 야 한다고 들었는데 이 망토가 도움이 될 거다.”
네프테르의 눈짓에 곁에 대기 하고 있던 시종장이 냉큼 말을 보탰다.
“비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이 뮤나 은여우 모피는 무게가 실 크처럼 가벼운데 스스로 열을 내는 발열 효과가 있습니다. 아 름다움만이 아니라 그 효험도 대단하지요. 폐하께서 비전하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정말 깊으신 가 봅니다.”
“부왕 폐하……”
아리스티네가 감격한 눈으로 네프테르를 올려다보았다.
아리스티네는 아비인 황제에게서도 선물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스러운 선물이라니.
아리스티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은 네프테르의 입은 찢어질 것같았다.
“허허,리네 너를 위해서인데 별거 아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타 르칸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기하고 있던 궁인들 역시 콧 김을 흑, 내뿜었다.
질 순 없다!
따악,타르칸이 손가락을 부딪치자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궁인들이 서둘러 상자를 가져왔다.
타르칸은 상자를 건네받아 아리스티네에게 내밀었다.
“나도 줄 게 있어. 원래는 자 고 있을 때 목에 걸어 주려 했지만.”
타르칸이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어머,목걸이네. 예뻐라.”
아리스티네가 벨벳 위에 다소 곳이 놓인 목걸이를 쓸었다.
진홍빛 펜던트는 묘한 빛을 띠 고 있었다.
“스피넬? 루비? 아닌데, 뭔가……
반짝임이 보석과는 달랐다.
빛을 투과해 반사시키는 게 아 니라,저 안에서부터 타오르는것 같은…
“보석이 아니야.”
타르칸이 상자에서 목걸이를 집어 올리며 말했다.
그의 손이 흘러내린 은빛 머리 카락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가느다란 흰 목에 스치는 뜨거 운 손가락에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부쩍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는 불과 쇠 냄새가 났다.
타르칸의 손가락은 목덜미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가 손을 떼고 몸을 다시 물 렸을 때, 아리스티네의 뺨은 조 금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왠지 기분이 묘했다.
이렇게 스치는 것을 넘어 완전 히 끌어안고 기대어 있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항상 하는 일인데.
“역시 예삐.”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쇄골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목걸이를 보며 짙게 미소 지었다.
아리스티네는 괜히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예쁜가……’
아까부터 열이 오르는데 부끄러워서 그러는지,묘한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아니,그냥 열이 오른다고 하기엔 좀 심하잖아?’
난로라도 삼킨 것처럼 전신에 흑흑 열이 났다.
“착용하고 있으면 몸을 따뜻하게 해 줄 거야. 작열의 마수라 불리는 플레어의 정수니까.”
“아,그래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아리스티네는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작열의 마수 플레어?!”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이 마수는 살아 있는 재앙이나 마찬가 지였다.
대마수급은 아니라고 판명 났지만,사람에게 끼치는 피해는 대마수보다 더했다.
지나온 자리마저 까닿게 태우니까.
그런데 그 플레어의 정수라니.
“이걸……”
“예전에 잡았던 거야. 널 다시 만나면 주려고.”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머리칼 을 쓸어 넘기곤 그 끝에 입을 맞추었다.
“칸……”
그를 바라보는 아리스티네의 눈망울이 일렁거렸다.
이 남자가 그 긴 시간 동안 자 신과의 재회만을 기다려 왔다는게 오릇이 느껴졌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확실하지 도 않은,기약 없는 기다림이었 는데.
후,하고 미소 지은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타르칸과 네프테르의 시선이 마주쳤다.
으르릉,아리스티네가 못 보는 동안 수백 마디의 말을 담은 시선이 오갔다.
그때 였다.
아리스티네가 앗,하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여기 만져 봐!”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손을 끌어 제 배 위에 얹었다.
통통,안에서 두들기는 듯 귀 여운 진동이 울렸다.
타르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움직여……”
안에서 거품이 톡톡 터지는 것 같은 태동이 느껴진다는 말을 아리스티네에게 듣긴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느껴지지 않 을 정도로 미약한 것이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이가 움직이는 것을 직접 느껴 본 건.
너무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타르칸은 그 이상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아리스티네의 배에 손을 대고 있었다.
평생 이렇게 손을 대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행복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처럼 분명하게 그를 감쌌다.
네프테르는 자기도 만져 보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아리스티네의 곁을 맴돌면서 서 성거 렸다.
그걸 눈치챈 아리스티네가 웃 으면서 네프테르를 재촉했다.
“부왕 폐하도 어서요.”
그 말에 네프테르가 기다렸다 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막상 배에 손이 닿기 직전에는 머뭇거렸다.
아이가 여럿인 만큼 태동을 느 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리 떨리는 지.
자식과 손주는 또 달랐다.
망설이던 네프테르의 손끝이 아리스티네의 배 위에 살포시 닿았다.
툭,그 손길에 화답하듯 안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네프테르의 눈이 커졌다.
제왕의 눈시울이 천천히 붉어졌다.
아리스티네가 후후,웃었다.
“이렇게 겉에서 느껴질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건 처음인데……. 선물이 좋나 봐요.”
붉어진 눈을 깜빡인 네프테르가 씨익 웃었다.
“그래,내 손주는 역시 내가 직접 사냥해 온 이뮤나 은여우 모피를 좋아하는구나. 벌써부터 보는 눈이 탁월한 게 딱 내 핏줄이야.”
“과연 내 자식. 보는 눈이 높아. 보통 사람은 평생 한 번 보 기도 힘든 마수의 정수를 알아 봤구나. 거기에다가 플레어의 정 수는 이게 유일하지.”
타르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게 그 희귀함과 값 어치로 따지자면 플레어의 정수가 이뮤나 은여우 모피보다 더 진귀했다.
아들의 자랑질에 네프테르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저놈이. 마수의 정수같이 귀한 신물이 너한테만 있냐? 나도 있다. 나 이 나라 왕이야.’
다른 나라도 아니고 아이루고의 제왕이다.
마수 평원의 지배자.
마수의 영역에 경계선을 그은 자.
모두 아이루고 제왕을 일컫는 말이었다.
일반적인 마수에게는 정수가 나오지 않는다. 격이 높은 마수 에게만 나오는 게 정수였다.
그만큼 희귀하고 구하기 힘들 어 다른 나라 왕실에조차 정수 가 하나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아이루고 왕가의 보물 에는 당연히 있었다. 그것도 하 나가 아니었다.
네프테르는 그중 가장 귀하고 효과가 좋은 것을 떠올렸다.
아까워서 역대 왕들도 쓰지 못 했던 것이다.
“그거 가져와라.”
네프테르의 말에 시종장이 눈을 깜빡였다.
“예에?”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었다.
수십 년 네프테르를 옆에서 보 필해 온 자답게 ‘그거’라는 애매 모호한 말도 무얼 뜻하는지 철 석같이 알아들었다.
알아들어서 문제였다.
“하,하오나 폐하,그 귀물.........”
네프테르의 시선에 시종장은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예,예,알겠습니다.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시종장이 서둘러 방을 나갔다.
워낙 귀한 것이라 다른 시종을 시킬 수 없고 그가 직접 가져와야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네프테르는 흡족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와중 시선이 느껴져 고 개를 돌리니 타르칸이 까칠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뭐,왜. 내가 이 나라 왕인데. 억울하면 네가 왕 하든가.’
‘치사하게.’
‘내가 왕인데,뭐. 왕인 내가 왕가의 보물을 꺼내 쓰겠다는데. 이거 내 재산이다.’
‘치졸합니다.’
‘그러게 왕 시켜 준다고 할 때 냉큼 좋다고 하지 그랬냐? 물론 선위는 나중에 할 거라 그래도 내 재산이었겠지만.’
네프테르가 승리의 미소를 지 었다.
타르칸은 지금 당장 마수 평원에 가서 대마수라도 하나 더 잡아와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였다.
아리스티네의 눈에 수반 속 물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제왕안의 징조였다.
지금은 수면 거울을 통과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발현 능력이 개화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아리스티네는 집중해서 수면 거울 위로 떠오르는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은 길지 않았다. 오히려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은 영상을 확인한 아리스티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