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암살자는 지체 없이 검을 치켜 들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선명한 죽음이 아리스티네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단 한 번도 이렇게 허무하게, 갑작스럽게 죽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순간,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죽음이 분명하게 그녀를 겨누었다.
날카롭게 번뜩이는 검이 그대 로 아리스티네를 향해 쇄도했다.
푸욱,붉은 피가 튀었다.
* * *
실바누스에서의 일상은 지루했다.
타르칸은 검자루를 툭툭 치며 하품을 삼켰다.
라우넬리안은 무척 바빴고, 타르칸은 관광을 하러 온 것이 아 니었기에 그의 곁을 지키는 수 밖에 없었다.
어서 빨리 아이루고로 돌아가서 아리스티네를 품에 안고 싶다.
“너 이렇게 사람 쫓아다니냐? 내 동생 질려서 도망갈걸?”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내 동생 프라이버시는 지켜 줘라.”
“부부 사이에 너무 참견하면 꼴사납습니다.”
어째 한 마디를 지지 않지.
라우넬리안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는 흥,하고 코웃음 치곤 다시 서류에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타르칸은 꽤 의외라고 생각했다.
‘기밀 아닌가.’
실바누스의 기밀을 자신 앞에서 이렇게 널브러뜨려 놓아도 괜찮은 것인가.
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과 회동을 가질 때도 라우넬리안은 타르칸을 대동했다.
‘아니,정말 그래도 괜찮은 건가? 나야 상관없지만,내가 돌아 가서 술술 불어 버리면 어쩌려 고?’
“왜.....”
서류를 넘기던 라우넬리안이 타르칸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뭐가?”
“시끄럽게 굴잖아.”
라우넬리안이 신경질적으로 사인을 하며 말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생각이 시끄러워. 얼굴이 시끄럽다고. 방해돼.”
대체 저건 또 무슨 말인지.
하여간,라우넬리안은 이 세상 에서 가장 고귀하신 핏줄답게 까다로운 놈이었다.
“나한테 비밀 없이 그냥 다 데리고 다니는 게 신기해서. 지금 보고 있는 것도 국가 기밀 아닌가.”
그 말에 라우넬리안이 서류 틈 에서 얼굴을 들고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거라고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한숨을 쉰 라우넬리안이 자리 에서 일어났다.
“네가 내 호위를 섰으면 좋겠 다고,리네가 말했잖아. 짜증 나 죽겠지만 네가 내 곁에 있는 걸로 그 애가 안심할 수 있다면 해야지.”
“흐음.”
라우넬리안은 집무실 찬장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타르칸은 자연 스럽게 글라스를 들었다.
착착 호흡이 맞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두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기밀을 이렇게 다 보여 주는 건 좀 그렇지만……”
얼음을 넣은 잔에 위스키를 따 르던 라우넬리안이 어깨를 으쏙 했다.
“뭐, 리네가 네 녀석을 가족으로 인정했으니까.”
한마디로 가족이니 다 보여 준다는 것이었다.
그건 꽤 의외라서 타르칸의 눈매가 살짝 커졌다.
그 모습을 본 라우넬리안이 기 분 나쁘다는 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눈에는 절대 차지 않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지. 그 애가 순진하고 맹한 구석이 있어서 너 같은 놈에게 홀랑 마음을 줘 버렸으니까.”
아리스티네가 순진하고 맹한 구석이 있다니,타르칸은 황당했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타르칸은 이변을 느꼈다.
발목에서부터 순식간에 머리끝 까지 타고 오르는 소름.
단순히 불길하다는 말로는 표 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각.
마치 깊고 짙은 심연이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콰앙!
타르칸이 검을 뽑는 것과 동시 에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라우넬리안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은 칼날이 황금빛 오러와 맞부딪쳤다.
그저 칼날이 맞부딪쳤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파가 주변으로 퍼졌다.
챙그랑,건들지도 않은 위스키 잔이 깨어져 나가고 책상 위에 있던 서류가 파라락 날아다녔다.
그림자가 자신과 맞선 타르칸을 삼킬 듯 날름거렸다.
‘어딜!’
타르칸이 전신의 기혈을 개방 했다.
그의 오러가 어둠을 살라 먹을 듯 환하게 빛났다.
키 이이 잉一!
고막을 긁는 듯한 소음이 쨍하 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로 만들어진 칼날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실패한 저주는 먼지처럼 날아 가고 언제 이변이 있었냐는 듯 라우넬리안의 그림자는 암전했다.
라우넬리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타르칸은 저주의 기척이 완전 히 사라진 것을 느끼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아니,정확히는 풀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전신에 차가운 소 름이 돋는 감각은 여전했다.
오히려 더 강해질 뿐.
‘리네.’
황금빛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했다.
* * *
아리스티네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새액,새액. 숨이 지날 때마다 목에서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났다.
아리스티네는 그녀의 몸을 흥건히 물들인 피를 어찌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벌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아,흐으……”
울컥울컥 붉디붉은 피가 흘러 나오는 상처 부위를 차마 어찌 하지 못한 채 그 주변을 맴돈다.
“괜,괜찮아요.”
커다란 손이 방황하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 손 역시 아리스티네의 손과 마찬가지로 피에 젖어 있었다.
아리스티네의 흔들리는 시선이 상처를 지나 그를 향했다.
“하미르”
아리스티네의 부름에 하미르가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미소 지었다.
언제나처럼 느긋하고 여유로운 웃음을 만들려 했지만 자꾸만 눈가와 입꼬리가 경직되었다.
그 얼굴을 보고 아리스티네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 충격에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리스티네를 향해 검이 쇄도하는 순간,누군가 달려들어 그녀를 감쌌다.
순식간에 기울어지는 시야 속에 백금발이 겨울 햇살에 창백하게 반짝거렸다.
긴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어지럽게 물결치고.
살이 갈리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와 동시에 따뜻한 무언가가 확 터져 나와 가슴과 배를 물들였다.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쇠 냄새.
하지만 아리스티네의 피가 아니었다.
커다랗게 확장된 아리스티네의 눈동자에 튀르쿠아즈빛 눈동자가 비쳤다.
찰나의 순간이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리스티네를 덮은 몸이 덜컥거렸다.
복부를 꿰뚫은 검이 회수된 것이다.
잦아들었던 피가 후드득 튀어 나와 새하얀 망토에 붉은 꽃을 피웠다.
그는 하얗게 질린 입술 끝을 깨물었지만, 신음 하나 내지르지 않았다.
땀이 배어 나온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아리스티네를 바라볼 뿐.
어떻게든 그녀를 안심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공격한 게 누군지 깨달은 암살자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달아났다.
하미르의 시신이 발견되는 순간, 자신들이 왕후나 스키엘라 공작의 보호를 받지못 할 것을 깨달은 것이다.
상황을 정리한 아리스티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진정해. 할 수 있는 것을 해’
아리스티네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망토의 끈을 풀었다.
자신의 품에 기대있던 하미르를 조심스레 바닥에 깔린 망토 위에 눕혔다.
플레어의 정수와 사나티스의 정수를 하미르의 가슴팍 위에 얹었다.
하미르는 눈매를 찡그리며 웃었다.
“안 돼요. 춥,잖아요.”
불안정한 호흡으로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지금 이렇게 피를 흘리면서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아리스티네는 기가 막혀서 코 끝이 시큰해졌다.
“죽는,다면 당신 품이…… 좋은데.”
“조용히 해요.”
죽긴 누가 죽는다는 말인가.
‘이런 커다란 자상의 지혈은 상처의 절단면을 직접 압박해서.’
전사인 남편을 두고 메스 같은 의료 기기 사업을 하다 보니 알게 된 상식이었다.
아리스티네는 드레스 안감으로 바깥쪽의 피를 훔쳤다.
드러나는 상처 부위를 보고 목에서부터 뺨까지 소름이 돋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눈앞에 최악의 상황이 그려졌다.
아리스티네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을 꾹 주며 그 광경을 떨쳐 냈다.
소리 지르고 눈을 돌리는 대신 그녀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감염은…… 사나타스의 정수가 막아주길 바라는 수밖에.’
“아파도 참아요.”
경고와 함께 아리스티네가 상처 부위에 손수건과 함께 손을 쑤셔 넣었다.
그때까지 억지로든 웃어 보였던 하미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리스티네의 얼굴 역시 잔뜩 찌푸려졌다.
하미르가 끔찍한 고통을 맛보고 있을 건 알지만,배 위를 눌러 압박해 봤자 아무 효과도 없다.
절단면의 잘린 혈관을 압박해 직접 지혈을 해야 그나마 효과가 있다.
‘안 돼. 손수건이 너무 작아.’
손수건은 이미 새빨갛게 흠뻑 젖었다. 마른 천이 필요했다.
‘드레스 안감은……’
상처 부위에서 손을 뗀 아리스티네가 치맛자락을 들치는데 하미르의 손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리네.”
아리스티네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만해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서.
“피가 멎어도,안 돼요.”
그 말을 외면하고 싶어서.
“나는 틀렸어요. 장기가 상했잖아.”
하미르가 웃었다. 그의 입가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내상을 입었다는 증거였다.
아리스티네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의 노려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벌써 포기해요. 지혈하고 신관이 오면……”
하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아리스티네를 바라볼 뿐.
아리스티네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좋다. 당신이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니까.”
마수의 정수를 두 개나 품고있는 덕인지 더 이상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그가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새벽하늘 같던 보랏빛 눈동자에 어두운 수심이 드리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미르가 짐짓 쾌활한 척 웃음을 흘렸다.
“정말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내 보좌도 상처에 천을 쑤실 생각은 못 했을 텐데.”
이렇게 작고 여린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도 대담했다.
밭은기침이 나오려고 해서 하미르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숨을 골랐다.
“혹시 날 의심했어요?”
유난히 선명한 어조였다.
무엇을 의심했냐는 건지 말하진 않았지만,아리스티네는 알아 들었다.
오늘 아리스티네를 죽이려 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 문제라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아리스티네 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왕후나 스키엘라 공작 쪽을 의심했지 하미르를 떠올리진 않았다.
“나를 믿어서?”
“그렇게 멍청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툭,나온 대답에 하미르가 가쁘게 웃었다.
“원하던 대답은 아니지만.”
그가 무거운 손을 뻗어 아리스 티네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래도 기쁘네요. 어떤 의미든 당신이 나를 믿어준 거니까.”
아리스티네의 얼굴에 튄 핏물을 닦아 주려 했으나 오히려 붉은 자국이 더 번질 뿐이다.
아리스티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시선으로 하미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하,나 바보 같죠?”
마수의 정수에도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는지 호흡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하미르는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눈을 깜빡여 시야를 깨끗이 한 후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아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내가 가지지 못하느니 차라리 파괴하는 게 낫다고들 하던데.”
모후가 그렇게 말했을 때, 공감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이다.
아,나는 모후의 피를 짙게 타고났구나.
그렇게 깨달을 정도로 가슴속 저 깊고 어두운 곳에서 추악한 욕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오늘,모후가 정말로 아리스티네를 노린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 하겠어.”
하미르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아리스티네의 뺨을 감싼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차마 힘주어 움켜쥐지 못하고, 소중하고 연약한 것을 다루듯 완전히 닿지도,그렇다고 떨어지지도 못한 채.
아리스티네가 하미르의 손을 콱 움켜쥐었다.
“이렇게 죽는다고 내가 당신을 용서할 것 같아요?”
그녀의 얼굴은 분노에 가득 물들어 있었다.
“마음에 담아 두고 죄스러워하고 고마워할 줄 알아요?”
어림도 없다는 듯 보랏빛 눈동자가 불같이 하미르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타르칸을,이 나라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렸어!”
아세나를 통해 계속 조사한 결과, 전략용 통신석이 고장난 것에 하미르가 관여한 사실을 알 게 되었다.
“하하,들켰네요.”
하미르는 변명하지 않고 웃었다.
그의 손을 움켜쥔 아리스티네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녀의 얼굴이 화난 듯 울듯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살아나서 죗값을 치러요.”
고개 숙인 그녀의 모습에 하미르가 마른 웃음을 흘렸다.
안에 고인 피가 위쪽으로 차기 시작했는지 이제는 웃는 것도 버거웠다.
그래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긴 은발이 폭포수처럼 그에게로 흘러내렸다.
비록 피에 젖어 있지만,그럼에도 아름다웠다.
아마 어떤 모습이든 자신에게는 아름다워 보이리라.
“그것도 좋겠네요. 당신이 평생토록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하미르는 겨우 손을 움직여 아리스티네의 턱을 붙잡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너무 행복하지 마요.”
하미르는 힘겹게 상체를 들어 올렸다.
차가운 입술이 아리스티네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서리 같은 호흡이 스치고 그의 입술이 아리스티네의 귓가에 닿았다.
“난 당신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곧 꺼질 듯 희미했다.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그에게로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손이 채 닿기도 전에 그의 몸이 추락했다.
새하얀 모피 위에 누운 하미르는 온통 피에 젖어 있음에도 정결해 보였다.
아리스티네는 한동안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