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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171화 (171/183)

171 화

끼이이익,쇠가 긁히는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웅크려 있던 왕후는 고개를 들 었다.

누구라도 진저리 칠 소음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천상의 음악보다도 더 달콤하게 들렸다.

자신의 몸조차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린 문은 평소와 달랐다.

철문뿐만 아니라 쇠창살까지 열리고 있었으니까.

눈을 끔뻑거리던 왕후는 허겁 지겁 문 앞으로 기어갔다.

한없이 거만했던 자신이 품위를 잃고 거리의 부랑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자각은 없었다.

창살 너머의 세 개의 문이 전부 다 열려 있다.

왕후의 가슴에 기대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병사는 경멸에 찬 눈으로 왕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오시오.”

나갈 수 있다는 기쁨에 병사의 말이 건방지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끔찍했던 공간으로부터 한 발 짝,한 발짝 멀어진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다가 환해지는 빛을 보며 서서히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그다음에는

‘그래,거사가 성공한 거야!’

확신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 되바라진 계집이 드디어 명을 달리한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속이 시원했다.

당장 그녀의 시체 앞에 달려가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그런데 꽤 빠른걸.’

아리스티네와 실바누스의 국정을 수행하고 있는 아리스티네의 오라비까지 한 번에 죽으면 커다란 혼란이 찾아온다.

양국 모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공백이 생길 터.

그때를 틈타 상황을 전복시키려고 했다. 그러면 자연스레 자신 역시 복권될 테니.

아니, 복권뿐이랴. 이전보다 더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부친과 실바누스 쪽이 준비를 철저히 한 것일까.

‘하긴,다 이겼다고 방심하고 있었을테니 더 쉬웠겠지.’

어쨌거나 일분일초라도 빨리 저 정신 나갈 것 같은 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던 그녀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왕후를 호송하던 병사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제 아들을 잡아먹고서도 좋아 하는 꼴이라니……”

낮게 짓씹는 목소리는 왕후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뭐?”

그러나 병사는 왕후의 되물음 에 답하지 않았다. 말도 섞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릴 뿐.

왕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 아들을 잡아먹었다니,그게 무슨……’

가슴이 불안하게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설마,아니야. 아닐 거야.’ 왕후는 차가워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윽고 세 개의 문을 지나 그 녀는 탑 밖으로 나왔다.

잎을 다 떨궈 앙상한 나뭇가지 와 짙푸른 빛으로 뒤덮인 저녁 하늘.

얼음그림자 탑의 주변은 황량 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왕후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끝없 는 공백 속에 있다가 드디어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며 나무가 있고 바람이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불안마저도 다 사라졌다.

깊게 숨을 들이켜자 한겨울 특유의 내음이 가슴속에 밀려들어 왔다.

그때,마차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왕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차는 허름한 게 꼭 짐수레, 아니 죄인을 호송할 때나 쓰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지금 내게 이딴 것을 타라는 것이냐!”

왕후의 일갈에 병사들이 얼굴 을 일그러트렸다.

“폐하의 자비에 감사하시오.”

“뭐?”

“그래도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배려니까.”

그게 무슨…….

왕후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녀는 병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멈춰 있는 사이 병사가 거칠게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호송 마차에 집어넣었다.

왕후는 웅크린 채 몇 번이나 물어뜯어 피투성이가 된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니야,아니야, 아니야,아니 야. 아니야!’

하미르가 죽었다.

왕후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나를 속이려는 거냐! 감히 나를 기만하려 하다니!”

양팔을 붙잡힌 채 끌려가면서 왕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광했다.

“그딴 망언을……!”

회랑을 지나 커다란 홀에 들어 서는 순간,그녀의 발광이 멎었다.

네프테르의 굳은 표정. 오열하는 예니카리나,침잠한 표정의 왕족들.

무엇보다 흰 천에 뒤덮여 누워 있는 사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애써 단단히 마음먹었던 가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틈새로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온다.

“아,아…….”

왕후는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힘이 빠져 무릎이 덜컥 꺾였다.

그녀의 양팔을 붙들고 있는 병사들 덕에 그나마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다.

달려가 천을 걷어 확인하고 싶 으면서도 영원히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리가 절로 움직였다.

사실 스스로 걷는다고 볼 수 없 는 모양새였지만,그녀는 기어코 사체 앞에 자리했다.

네프테르의 시선에 병사들이 왕후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뗐다.

왕후는 한 번 휘청였지만 침상을 짚고 스스로 섰다.

벌벌 떨리는 손이 천을 움켜잡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이윽고 단호한 기세로 천을 젖혔다.

그제야 드러난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불에 탄 것인지 군데군데 화상을 입은 데다가 화상을 입지 않은 부분도 멀쩡하진 않았다.

배를 꿰뚫은 자상은 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가장 심한 부분은 얼굴이었다.

안면의 대부분이 아예 새까맣게 타 버려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예니카리나의 울음소리가 찢어질 듯 커져 귓가를 멍멍하게 울렸다.

왕후는 그 어떤 상상보다도 끔 찍한 몰골로 되돌아온 아들의 모습에 넋이 나갔다.

“아니야,아니야……. 그럴 리 없어,그럴 리……”

이건 하미르가 아니다.

그 잘생긴 얼굴이 이렇게 엉망 인데,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인 데 어떻게 하미르란 말인가.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루고에서는 거의 볼 수 없 는 백금발.

그 연한 빛깔의 머리카락이 현 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왕후는 달의 조각같이 창백한 빛을 품고 있는 머리카락을 움 켜쥐었다.

“하미르가,내 아들이……!”

왕후의 목소리는 인간이 내는 소리 같지 않았다.

뼈를 갉아 내는 것 같은 목소 리였다.

“아,으,아……

왕후는 아들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었다.

세계가 무너지고 바스라지며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자신이 잃은 것은 아들만이 아 니었다.

왕후의 자리, 권력과 부,다음 대왕의 모후라는 위치…… 그 녀가 가진 가장 강력한 패가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짐으로써 모 든 것이 연쇄적으로 무너진 것 이다.

하미르를 품에 안고 오열하던 왕후의 눈에 네프테르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아리스티네!’

눈에 불꽃이 팍 튀었다.

연행되어 오는 동안 하미르의 죽음에 관해 들었다.

암살당할 뻔한 아리스티네를 구하다가 죽었다고.

언제 주저앉아 목을 놓았냐는 듯 왕후는 벌떡 일어났다.

“네 년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녀 는 아리스티네에게 삿대질하며 달려들었다.

“염치도 모르는 년이 내 아들을 죽이고 감히 이 자리에 있어!”

갈고리 같은 손이 아리스티네의 목을 향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아악!”

병사들이 왕후의 팔을 거칠게 잡아눌렀다.

“이거 놔! 저 살인자를 죽여야 해!”

몸부림치며 고개를 든 왕후의 동공이 흑 좁아들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네프테르가 아리스티네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꺼져 가는 신음처럼 흘러나왔던 목소리는 곧 거센 분노로 불 타올랐다.

실핏줄이 터져 나와 그녀의 눈이 벌겋게 물들었다.

원망 어린 눈이 네프테르를 노려보았다.

“폐하,어째서 저 간악무도한 년을 감싸시는 겁니까! 저년이 폐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저년 때문에! 내 아들이……!”

병사들이 힘을 주어 잡고 있음 에도 왕후의 몸이 들썩거렸다.

“죽으려면 네년이 죽어야지,왜 내 아들이 죽어!”

기어코 뻗어 나온 팔이 아리스 티네를 향했다.

“내 아들이 죽었듯 네년의 자식도……!”

짜악一!

커다란 파열음이 왕후의 목소리를 끊었다.

왼뺨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 웠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왕후가 더듬더듬 자신의 뺨을 움켜쥐었다.

화끈거리고 따가웠다.

그녀가 멍하니 네프테르를 올려보았다.

믿기지 않았다.

“누구 때문에 하미르가 이리되 었는지 정녕 모르는 것이오?”

네프테르가 분노한 음성으로 일갈했다.

“오늘 암살을 사주한 자가 대체 누구요!”

그의 두 눈은 분노보다도 더 깊은 슬픔에 물들어 있었다.

아들을 잃었다.

타르칸을 후계로 생각하며 아꼈지만,그렇다고 하미르를 사랑하지 않았을 리 없다.

네프테르는 그 모든 감정을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것으로 갈무리하곤 입을 열었다.

“하미르를 죽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야.”

침잠한 음성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아니야…….”

왕후는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의 가슴 저 깊은 곳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암살자를 보내지 않았다면, 그냥 포기했다면,승패를 인정했다면.

“당신의 추악한 탐욕과 헛된 야망이 그 아이를 죽음으로 밀어 넣었어.”

“아니야!”

그런 죄책감을 떨칠 수 없기에 오히려 더 강하게 반발하며 부 정했다.

네프테르는 웅크린 채 부들거리며 오열하는 왕후를 내려다보다 돌아섰다.

“장례를 치를 때까지는 탑이 아니라 궁에 연금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대가 저지른 죄에 걸맞은 형을 집행할 것이야.”

“혀,형이라니……”

네프테르가 말하는 형은 일반 적인 형벌이 아닐 것이다.

죽음이 왕후의 목덜미에 드리 워졌다.

“장례를 보게 해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미르를 위해서다. 이런 어미라도 어미 없이 떠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 말만 남기고 네프테르는 아리스티네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아리스티네는 조용히 회랑을 걸으며 네프테르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피로감이 그의 눈가에 그늘져 있었다.

왕이란 참으로 고독한 존재다.

자식을 잃은 슬픔조차 가족과 나누지 못한다니.

“아버님.”

“너도,복중 태아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혹시라도 자책하지 말거라. 건강하게 출산하는 것만 신경 쓰고.”

상실감은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자신부터 챙기는 모습에 아리스티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아리스티네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하지만 정작 나온 말은 네프테르의 말에 대한 대답뿐이었다.

아리스티네는 데려 다주겠다는 네프테르를 만류하고 타르칸의 궁으로 돌아왔다.

저절로 어깨가 처졌다.

한숨과 함께 방에 들어온 순간,

“리네.”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몸이 아리스티네를 포근하게 감쌌다.

익숙한 품,익숙한 체향, 익숙한 목소리.

저절로 몸이 이완하며 깊은 숨이 나왔다.

아리스티네는 남편의 가슴에 뒤통수를 기댔다.

타르칸이 그녀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고개를 들자 이마와 콧 잔등에 꽃비처럼 키스가 내려앉 았다.

“왜 이렇게 처져 있어. 역시 나도 함께 있을 걸 그랬나.”

“아니야. 처리할 일이 있었잖아.”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저으며 빙글 몸을 돌렸다.

타르칸을 푹 끌어안자 좀 살 것 같았다.

커다란 손이 기분 좋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타르칸은 오늘 포털을 통해 실 바누스에서 귀국했다.

당연히 그도 가족으로서 이복 형제의 시신을 보고 애도를 표했다.

다만 아리스티네가 부탁한 일 때문에 왕후가 오기 전에 나왔을 뿐.

“……아버님께는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았을까.”

“우리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

그 말에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때,타르칸의 두 손이 아리스티네의 뺨을 감쌌다.

그대로 힘을 주어 자신을 올려다보게 만든다.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다. 고개 숙인 타르칸의 얼굴이 가까웠다.

아리스티네가 왜 이러나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

“장하다.”

타르칸이 뺨을 문질문질하며 입술에 쪽,하고 키스를 했다.

“칸?”

“아직 칭찬해 주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아리스티네가 의문을 품는 것과 동시에 칭찬이 쏟아져 내렸다.

“훌륭하고 대단해. 멋있어.”

쪽,쪽,쪽.

말할 때마다 뽀뽀가 함께였다.

“뭐야.”

아리스티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타르칸은 그녀의 뺨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눈을 맞춰 올 뿐.

“얼마나 용기 있어.”

쪽.

“혼자서,정말 잘했어.”

쪽.

“잘 지켰어. 너도,우리 아이도 잘 지켜 냈어.”

아리스티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와락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입술이 타르칸의 입술에 닿았다. 뜨겁게,애타게,절박하게.

자신을 지탱해 줄 유일한 존재를 찾듯이.

숨결이 섞여 들며 하나가 되었다.

왕은…… 황제는 고독한 존재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자신이 고독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타르칸이 언제나 항상 함께 있을 테니까.

그녀는 결심을 마쳤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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