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장례식은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제왕의 적장자에 대한 모든 예 와 조의를 갖추어 달이 차오르 고 기우는 동안 진행되었다.
아리스티네는 새하얀 백합꽃에 파묻혀 있는 화려한 관을 내려 다보았다.
사체의 훼손이 심각했기 때문에 관은 완전히 닫혀 있었다.
관에 걸린 마법은 사체를 보존시켜 줄 뿐,보기좋게 되돌려주진 못하니까.
아리스티네는 눈을 감고 잠시 묵념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는 시야를 반절 가린 검은 망사를 살짝 끌어 내렸다.
구두 굽 소리가 조용한 식장 내에 무겁게 울렸다.
장례식장 바깥으로 나오자 찰 칵거리는 소리가 새의 날갯짓처럼 소란스레 들렸다.
기자들이 조문하고 나오는 아 리스티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지만,검은 망사에 가린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덜커덩,아리스티네의 뒤로 장 례식장의 문이 닫혔다.
이제 하미르의 관은 아이루고 의 젖줄이라 불리는 파뉴강을 따라 왕도를 한 바퀴 돌 것이다.
그 후 장지까지 운구하면 한 달간의 장례식 절차가 모두 끝 난다.
‘……오늘로써 하미르는 완전히 죽은 사람이 되는구나.’
아리스티네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계단 밑에는 마차가 대기 중이 었다.
아리스티네가 다가가자 안에서 사람이 나와 그녀에게 손을 내 밀었다.
“칸,장지에 가 있는 거 아니 었어?”
“내 아내를 두고 갈 수가 있어야지.”
그 말에 어렴풋이 미소 지은 아리스티네가 그의 손을 잡고 마차 위에 올랐다.
파뉴강을 따라 늘어선 사람들 이 강물에 꽃을 던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미르의 관을 품은 조각배 곁 으로 등불이 함께 유영했다.
마차가 다리를 완전히 벗어나 자 그마저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차는 왕가의 장지가 아니라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말 끝까지 안 봐도 돼?”
“내가 가면 왕후가 난리 날 테니까. 유서 깊은 왕가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에서 소란 피우 긴 싫어. 그리고……”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표할 조의는 이미 다 표 했어.”
그 말에 타르칸의 시선이 낮아 졌다.
그가 아리스티네의 배에 손을 얹었다. 조의를 표할 가치도 없는 놈.
“하지만 마지막에 신세를 졌으니까.”
아리스티네의 말에 타르칸이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의 곡소리가 닫혀 있는 창문을 타고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하미르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타르칸과 같은 화려한 전공과 압도적인 힘으로 인한 카리스마는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카리스마가 있었다.
사람들은 부드럽고 친절하면서도 능수능란한 첫째 왕자를 사랑했다.
타르칸과 아리스티네가 왕과 왕후가 되길 바랐지만, 그렇다고 하미르가 죽길 바란 적은 없었다.
“우리 왕자님께서 이렇게 가시다니. 이 젊은 나이에……”
“아직 남은 생이 얼마나 많은 데……”
“왕후가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오래도록 사셨을 것을.”
“왕후가 비전하를 노리고 자객을 보냈는데 하미르 전하께서 그걸 막다 돌아가셨으니……”
“어미가 아들을 잡아먹은 게 지.”
단명한 하미르에 대한 안타까 움과 억울함은 곧 그 원인이 된 왕후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바뀌었다.
“불륜 스캔들도 모자라서 암살 까지…….”
“그 불륜 스캔들의 최종 목적 이 배 속의 왕손이 타르칸 전하의 아이가 아니라는 소문을 내 는 거였다며?”
“뭐? 진짜 가지가지 하네.”
“하미르 전하의 모후이시니 안 좋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군.”
“따지고 보면 왕후 때문에 하미르 전하께서 돌아가신 건데 가릴 게 뭐 있나.”
“계속해서 안 좋은 일을 겪는 데 비전하와 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번 암살 미수 건으로 만약 복중 왕손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면 내가 왕후궁으로 쳐들어갔을 게야.”
“나도 함께였을 걸세!”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던데.”
‘‘응?”
“이번 가을 토벌이 예년과 좀 다르지 않았나.”
“잘은 모르지만 그랬지. 타르칸 전하께서 일찍 돌아오시고……. 비전하께서 평원에 나가시기까지 하고.”
“그게 그때 왕후가 토벌이 실패하도록 손을 써서 그걸 수습하느라 그랬다는 말이 있네.”
“뭐…… 라고?”
“토벌에 실패했으면 죽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 아닌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 같은 양민들은 다 죽어도 된다는 건가?”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이 왕후와 스키엘라 공작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 * *
하미르의 장례식이 마무리되고 보름 뒤,왕후의 공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죄목은 명백했다.
왕자비를 시해하려고 한 죄.
왕자비를 모함한 죄.
왕손의 출신을 더럽혀 아이루고 왕실의 기강을 뒤엎으려고 한 죄.
군사 기물을 고의적으로 망가트려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 죄.
제왕의 앞에서 위증하고 위증을 사주한 죄.
외척의 힘을 빌려와 왕실을 좌지우지하려 한 죄.
외척의 힘을 빌려 왕족을 시해 하려 한 죄.
외척의 힘을 빌려 국가 안보를 위협한 죄.
끝없이 이어지는 나열에 공판 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이 분노로 떨렸다.
죄에 대한 증거가 하나하나 나 오고,증인들이 증언할수록 그 왕후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내렸다.
“더 들을 것 있습니까!”
“당장 사형시켜도 모자람니다!”
“작고하신 하미르 전하의 모후라 해도 선처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얼음그림자 탑에 갇히고서도 흉계를 꾸민 자입니다. 또 무슨 짓을 꾸밀지 누가 압니까!”
“이 일을 함께 주도한 스키엘라 공작 역시 극형을 피해 가서는 안됩니다!”
“자자,정숙하시오!”
흥분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쉬 이 가라앉지 않았다.
몇 번 더 정숙을 외친 후에야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 소란 가운데 당사자인 왕후 는 오히려 조용했다.
끝의 끝까지 발악하며 흉계를 꾸미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
하미르가 죽으면서 그녀가 손 에 넣길 원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예니카리나를 왕위에 올릴 수는 없다.
모든 것을걸었던 단 하나의 패.
그 패가 사라진 지금,아무런 의욕도 나지 않았다.
단 하나,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아리스티네에 대한 증오심이 타오를 뿐.
비쩍 마른 얼굴에서도 형형하 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증인석에 있는 아리스티네를 노려보았다.
‘저년이 오고 모든 것이 망가 졌어……!’
작년 초까지만 해도 하미르가 가장 왕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리스티네가 오고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잃어도,자신이 죽더라도 저년을 고통스럽게 하고 싶다.
아리스티네의 부푼 배가 눈에 들어왔다.
“으아아아아!”
왕후가 발광하며 아리스티네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철컹거리는 쇠사슬 소 리만 날 뿐,그녀는 아리스티네 의 가까이에 다가가지 못했다.
병사들이 왕후를 찍어 눌렀다.
“저,저런……!”
“끝까지 반성을 모르는군!”
“부끄러움과 수치도 없어!”
“비전하,괜찮으십니까?”
겨우겨우 조용해졌던 공판장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대들의 말대로 더 들을 것도 없군.”
싸늘하게 중얼거린 네프테르가 지체 없이 판결을 내렸다.
“죄인 로아스텔을 왕후의 자리 에서 폐하고 공개 처형한다. 이 일에 관여한 스키엘라 공작과 그 아들인 타메른 후작 역시 처형하며,스키엘라 공작가를 귀족 원에서 제명하고 재산을 몰수한다.”
하얗게 질린 스키엘라 공작이 항변했다.
“폐, 폐하! 제 죗값은 치러도 가문은…….”
“닥쳐라! 멸문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하미르를 봐서 다른 식솔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는 것이니.”
마음 같아서는 스키엘라의 이름을 쓰는 모든 자들을 처형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이들의 핏줄인 하미르가 왕자비와 왕손을 지키다 유명을 달리했으니 선처를 베푸는 것이다.
“끌고 가라!”
네프테르는 차갑게 뒤돌아섰다.
* * *
날카로운 통증이 이마를 후려 갈겼다.
폐후 로아스텔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넋을 놓은 채 미는 대로 끌려 오다 보니 어느새 단두대 위에 서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 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분노와 경멸,멸시로 일그러진 얼굴.
‘왜?’
왜 자신을 이런 눈으로 바라본 단 말인가.
“폐후를 죽여라!”
“스키엘라 공작을 죽여!”
“권력을 위해 백성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다니!”
날아온 돌멩이가 계속해서 온 몸을 두드렸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자신은 고귀한 존재였다.
이들은 응당 자신을 우러러보고 모셔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침을 뱉는가.
대의를 위해서라면 백성은 얼 마든지 희생될 수 있는 것 아니 었던가?
그때, 그녀의 눈에 데구루루 구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아비의 목이었다.
자신의 미래이기도 했다.
그 끔찍함에 숨을 들이마시는데,
“와아아아아-!”
“역적을 죽였다!”
“아이루고 만세!”
환호 소리가 들렸다.
왕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병사들의 손짓에 단두대 위로 고개를 숙였다.
철컥,소리와 함 께 목이 고정된다.
공작 영애로 태어나 최고의 권 력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왕후가 되었고,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
큰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희생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순간,죽은 아들의 모습이 눈 앞을 스쳤다.
‘어쩌면 내가一.’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깨끗이 잘린 머리가 단상을 굴렸다.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고 자신 의 아들마저 죽인 죄인의 죽음에 환호 소리가 더욱 커졌다.
* * *
아리스티네는 멀리서 울리는 환호 소리에 창밖을 보았다.
궁 안에서 광장이 보일 리 없지만,일어난 일을 알 수 있었다.
‘죽었구나.’
고개를 돌리자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는 예니카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리스티네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지? 날 원망 하려면一.”
“원망하지 않아요.”
부들부들 떨고 있음에도 예니 카리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모후…… 어머니와 외조부,백 부께선 본인의 죗값을 치르는 거니까.”
의외였다.
아리스티네의 눈빛을 느꼈는지 예니카리나가 변명하듯 입을 열 었다.
“우리 오빠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돕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었죠.”
하미르는 자랑스러운 오빠였다.
예니카리나는 하미르가 왕이 되고,동복 누이동생인 자신이 그 옆에 당당히 서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누군가를 죽이면서까 지 그러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아리스티네는 가만히 예니카리 나를 바라보았다.
예니카리나는 주저하면서도 한 발짝,한 발짝 아리스티네에게 다가왔다.
“이제 안심하세요. 나는…… 힘 을 잃었지만, 그래도 비전하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테 니까. 미약하지만 그래도 아주 도움이 안 되진 않을 거예요.”
평소와 다른 말투와 다른 얼굴 이었다.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강 단이 있었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네.’
예니카리나를 바라보던 아리스 티네가 툭 내뱉었다.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싫어해요.”
즉답이 었다.
“처음부터 진짜 마음에 안 들 었어요. 나는 내가 가장 주목받 고 사랑받길 바랐어요. 그런데 그걸 한순간에 채 갔으니 법지 않을 리가요.”
예니카리나가 분하다는 듯 주 먹을 꽉 쥐었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당신이 아니었으면 어머니께서 저 지경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피해자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건 안 좋은데.”
“알아요! 하지만 그런 생각이 아예 안 들 순 없다고요!”
씩씩거리는 예니카리나의 숨이 방 안을 메웠다. 튀르쿠아즈빛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런데도 나와 내 아이를 지키겠다고?”
예니카리나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리 오빠가 목숨을 바쳐 지킨 아이니까.”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은 의외였다.
후드득, 예니라키나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비전하께서도 우리 오 빠의 명예를 지켜 주었으니까.”
예니카리나가 고개를 들고 아 리스티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략용 통신석을 고장 내서 마수 토벌을 방해하려고 했던 일에 하미르가 관여한 것.
그걸 밝히지 않고 숨겨 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덕에 하미르는 예우를 갖춰 왕가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예니카리나 역시 폐후의 자식 이나 하미르의 공적을 높이 사 여전히 공주로서 궁에 있을 수 있었고.
“……그냥 내가 원해서 한 일 일 뿐이야.”
어찐지 마주 보기 부담스러워 서 아리스티네는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 는 예니카리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예니카리나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고마워할 줄 은 생각도 못 했다.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린 아리 스티네가 예니카리나를 바라보 았다.
“그럼 우리 애가 멜론을 먹고 싶다는데.”
흘러나온 말에 예니카리나가 기가 막힌다는 눈빛을 보냈다.
차라리 이편이 편했다.
‘지켜 준다며?’
그런 눈빛을 보내자 예니카리나가 팩 고개를 돌렸다.
“기다려요.”
아리스티네의 눈이 커졌다. 진짜 가져다주려나 보다.
“뭐가요. 어쨌든 간에 내 첫 조카이기도 하잖아요.”
예니카리나가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후다닥 방을 나섰다.
그녀로서도 슬픔에 잠겨 있는 것보다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게 마음 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조금 마음이 쓰이긴 했다.
“어쩌나……. 나는 곧 실바누스로 돌아갈 건데.”
홀로 남은 아리스티네가 중얼 거렸다.
“아버님께서도 함께 가자고 하셨는데 예니카리나까지 따라오겠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면서도 불안했다.
라우넬리안과 타르칸 그리고 네프테르.
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 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