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화
어머니와 외조부,외숙부가 광장에서 돌팔매질을 당하며 처형 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죗값을 치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죄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 탐욕의 중 심에는 하미르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그들이 그런 죄를 저질렀을까?
계속해서 꿈을 꾸었다.
죽은 어머니와 외조부, 외숙부 가 나와 원망하며 그의 목을 졸랐다.
검은 밤에 눈을 뜨면 그런 생 각이 들었다.
저 혼자만 이렇게 살아남아도 되는 것인가.
가끔은 자신을 살린 아리스티네를 원망하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살아도 된다니. 살아서 다행이라니.
루가 고개를 숙여 아리스티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아리스 티네의 몸이 경직되었다.
“조금만.”
흐느끼는 것처럼 자그마한 목 소리에 밀어내려던 아리스티네의 손이 멈칫했다.
“아주 조금만.”
루의 팔은 아리스티네를 감싸 지 않았다. 끌어안지도,몸이 닿지도 않은 채 그저 어깨에 이마 를 기대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무겁게 호흡했다.
아리스티네의 체온,바람에 흩 날리며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그 녀의 머리카락,보드람고 연한 향기.
점차 숨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아리스티네의 곁에 있으면 모 든 것이 그에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떨어지고 싶지 않은 얼굴을 애 써 들었다.
아리스티네가 걱정 가득한 눈 으로 자신을 올려다본다. 운 자 국이 남은 눈가가 애틋했다.
문질러 주고 싶어서 움찔거리 는 손가락을 애써 손바닥 안에 가두었다.
‘살아서 다행이라.’
확실히 그랬다.
이렇게 안전하게 살아 있는 아 리스티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무사한 서로를 보며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난당신이…….〉
귓가에 속삭인 목소리가 잦아 들었다. 호흡 역시도.
흔들리는 아리스티네의 눈이 군데군데 피에 젖은 새하얀 은 여우 모피 위에 누운 하미르를 향했다.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이대로 그를 포기할 순 없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러나 지혈을 하며 신관을 기다리기에는 일분일초가 급박했다.
〈일어나요. 평생 용서하지 않 아도 좋다니.〉
아리스티네는 드레스 안감을 상처 부위에 넣어 절단면을 압박했다.
천이 다 들어가자 한 손으로 막으며 하미르의 뺨을 두드렸다.
〈당신을 기억이나 할 것 같아요? 뒤돌아서는 순간 다 잊을 거야. 당신의 죄도,당신이 날 구해 주었다는 것도,당신의 유 언도!〉
눈물이 방울방울 하미르의 얼 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너무 행복하진 말라니 나는 보란 듯이 행복할 거라고요. 그 러니까 일어나!〉
하지만 하미르에게서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윽…….〉
순간적으로 아랫배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어 아리스티네는 배를 감싸 쥐고 몸을 굽혔다.
사실 이런 환경이 산모에게 좋을 리가 없었다. 아까 세게 넘어 졌던 것 역시 마음에 걸렸다.
‘아니야, 괜찮아. 내 아이는,타르칸과 내 아이는 이렇게 약하지 않아.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자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리스티네는 천천히 몸을 폈다.
바닥을 짚는데 철퍽,질척한 것이 손바닥을 적셨다.
아리스티네는 자신이 짚은 피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찻물도 가능한데 피라고 안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리스티네는 홀린 듯 그 피 웅덩이 위로 고개를 숙였다.
새빨간 웅덩이에 엉망이 된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연결할 수 있을까.’
〈개화〉상태가 아닌 때,아리 스티네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제왕안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아니, 있긴 있다. 라우넬리안의 죽음을 보았을 때.
그러나 그건 끝나려 하는 발현을 억지로 붙들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때 그녀의 옆에는 타르칸이 있었다.
그의 피에 깃든 신의 힘이 그 녀의 피에 깃든 신의 축복을 일깨웠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곁에는 타르칸이 없었다.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하미르를 향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야. 해내야 해.’
아리스티네가 단호한 눈으로 피 웅덩이를 응시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그녀의 머 리카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손끝이 저릿하며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멈추지 않고 감각을 끌어올렸다.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안압이 높아진다는 게 스스로 도 느껴졌다. 눈이 터질 것 같다.
아리스티네는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를 그에게 데려다줘!’
임신 중인 아리스티네를 위해 타르칸이 떠나기 전 그녀에게 넘겨주었던 힘이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마치 따스한 햇볕에 감싸인 것 처럼 떨리던 몸이 점차 가라앉는다.
휘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에 황금빛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그녀의 보랏빛 눈에 연둣빛이 일렁거렸다.
새빨겠던 웅덩이에 새파란 하 늘이 비치기 시작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갓 돋은 신록. 창문 너머의 모습이다.
정교하고 화려한 실내가 비쳤다. 실바누스의 양식이다. 그리고.
타르칸.
아리스티네는 주저 없이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손이 웅덩이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순간이었다.
키 이 이잉 一.
날카로운 이명이 머릿속을 울리는 것과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이전에 한 번 찾아왔던 감각이 아리스티네를 덮쳤다.
임신하고 쓰러졌을 때,온몸을 뒤흔들었던 거대한 파동.
타르칸이 넘겨준 힘을 다 소진하면서 그때와 같은…… 아니, 아이가 자란 만큼 그때보다 더 맹렬한 파동이 아리스티네의 온 몸을 울렸다.
〈흐…….)
질끈 깨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빠르게 정신이 멀어 졌다.
‘안 돼.’
아리스티네는 남은 한 팔을 하미르에게 뻗었다.
꽉 붙든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 탓에 실제로 어떤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놓치면…… 안........’
마치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의식이 흑 꺼졌다.
* * *
라우넬리안은 무사하다. 그림자 칼날도 완전히 깨졌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잘 해결 되었다.
그런데도 타르칸은 불안한 기 분을 지울 수 없었다.
시꺼먼 칼날이 자신의 뒷덜미를 노리고 있는 것만 같은 불길함.
그는 검 자루를 꽉 붙잡으며 남은 기척을 살폈지만,아무것도 없었다.
아리스티네에게 연락해 라우넬 리안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릴까,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눈앞의 허공이 일렁였다.
그리고 새빨간 피에 젖은 손이 그를 향해 뻗어져 나왔다.
〈꺄아아아악!〉
〈무,무슨…….〉
겨우 저주의 칼날을 부수었다고 생각했더니 이제는 피 칠갑을 한 손이 튀어나왔다.
아까 일어났던 소동을 듣고 집무실에 들어오던 시녀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소란 속에서 타르칸은 제게 뻗어지는 손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저주인지 몰라도 공격하기 전에 검으로 베어 내는 게 맞다.
그런데 타르칸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검 자루를 놓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채앵一,검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타르칸은 피에 젖은 팔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리네!〉
기겁한 라우넬리안이 달려왔다.
새하얀 아리스티네의 몸이 피에 젖어 있었다.
아리스티네를 받아 낸 타르칸 은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을 살폈다.
그녀의 몸 어디에도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멈췄던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그제야 아리스티네가 꽉 붙들 고 있는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하미르?’
정신을 잃었는데도 온 힘을 다 해 꽉 붙들고 있는 게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아리스티네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상처가.’
너무 깊다.
이미 피도 너무 많이 흘렸다.
의사는 아니어도 수많은 상처를 봐 온 타르칸은 이미 늦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을 살피던 타르칸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차갑게 식어 굳기 시작해 야 할 하미르의 몸이 따스했다.
그의 가슴팍에 있는 플레어의 정수와 사나타스의 정수를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대강 깨달았다.
지금 하미르는 꺼져 가는 목숨에 생명 유지 장치를 힘겹게 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과연 회복할 수 있는 가?
〈살려야 해.〉
라우넬리안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내 동생이 무리를 해서라도 살리려고 했던 놈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
그가 시종과 시녀들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만으로 무슨 뜻인 지 알아듣고 부산스레 달려가기 시작했다.
〈넌 어서 리네한테 힘이나 넘겨줘.〉
그 말에 타르칸이 아리스티네 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황금빛으로 일렁거리는 힘이 그의 입술을 통해 그녀의 입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차가워졌던 아리스티네의 몸이 순식간에 따뜻해지고,이윽고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잘게 떨 렸다.
* * *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이 아이루고로 귀환하는 틈에 섞여서 함께 돌아왔다.
사경을 헤메던 하미르가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 했던 말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살아나더라도 자신이…… 하미르 왕자가 죽은 것으로 해 달라는 말.
실바누스로 옮겨서 치료 중이라는 것을 밝힐 수 없기에 아리스티네를 습격했던 자객을 하미르로 꾸몄다.
“그때 잠깐 깨어났을 때 당신이 내게 화를 냈었죠.”
“무리해서 살릴 필요 없다고, 죽어도 괜찮다는 말을 했으니 까.,,
아리스티네의 대답에 하미르가 웃었다.
“나는 그때 정말 죽었어도 좋았어요.”
“루”
“당신을 지키다 죽었다면 그걸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요.”
“그것도 좋은데.”
하미르의 말에 아리스티네의 눈빛이 뾰족해졌다.
농담인 척 웃은 하미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살았어도 하미르 왕자는 죽었어요. 그 결과 아이루고를 위험에 몰아넣는 정쟁이 끝났죠”
그의 말대로였다.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이 막지 않았다면 아이루고는 마수의 습격을 받거나 실바누스와의 전쟁을 다시 치러야 했을 테니까.
아리스티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 자신이 아이루고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죽기로 결심한 거예요?”
“내가 죽어야 해결될 일이었으니까.”
“다른 방법도 있었어요. …폐후도 당신이 죽고 나서는 깊게 후회했어요.”
그 말에 하미르가 날카롭게 웃었다.
“내가 죽은 것보다 쓸 수 있는 패가 완전히 사라진 것에 충격 받은 것이겠죠.”
아리스티네는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과연 그녀가 뭐라 할 수 있겠 는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에 는,부모의 애정을 무조건 신뢰 하기에는 그녀 역시 힘든 삶을 살았다.
“부왕께서 와 계셔요.”
대신 그렇게 말했다.
“폐후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지만,부왕께서는 아들을 잃어 슬퍼하고 계세요. 그리고 예니카도.”
정말 밝히지 않을 거냐는 물음에 루가 웃었다.
그 웃음이 곧 사라질 것처럼 연약해 보여 아리스티네는 그의 팔을 붙들었다.
“살아요.”
“살면.”
튀르쿠아즈빛 눈동자가 아리스티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면 좋은 일이 생기나요.”
아리스티네는 그 물음 이면에 매달린 마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대답했다.
“그건 내게 달린 게 아니라 당신에게 달렸지요. 당신과 나는 친구일 뿐이니까.”
하미르가 웃었다.
나를 책임질 생각도 없으면서 살려 주시다니 잔인도 하셔라.
“그냥 살아요. 살다 보면 좋은 일만 생기는 건 아니지만,나쁜 일만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살다가 사랑도 해요.”
그 말에 하미르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아픔이 맺혔다.
어떻게 나한테 사랑을 하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리스티네의 말에 숨이 막혔다.
내 마음을 알면 그런 소리 못 해.
죽어서라도 당신의 마음에 남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게.
아리스티네의 눈을 본 순간 하미르는 깨달았다.
‘아니구나.’
내 마음을 알아서,그래서.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구나.’
여지조차 주지 않다니 참 잔인 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하미르의 눈동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응,사랑할게요.”
그가 말했다.
“당신보다 더 예쁜 사람 만나서 오순도순.”
“그래요.”
“당신보다 자식도 많이 낳을 거야.”
“응,그럴 거예요.”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미르는 미소 지었다. 아픈 미소였다.
“그러기 전에,그러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물어볼게요.”
대답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할은 그가 말을 이었다.
“타르칸이 아니라 나와 결혼했 다면 당신이 나를 사랑했을까.”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