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아리스티네는 잠시 말없이 루 를 바라보았다.
일어나지 않았고,앞으로도 일 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실제로는 어떨지 절대 알 수 없는데 일어나지 않을 가정에 매달리게 되니까.
그러나 그런 것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루의 심정이 절절히 느 껴졌다.
아리스티네는 망설이지도, 고민 하지도 않았다.
“우린 좋은 친구가 되었겠죠”
루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까.
“지금 당신과 나처럼.”
그럼에도 물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하.”
루는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을 먼저 만났다면,당신과 결혼했다면 당신을 사랑했을 거야.
그런 입에 발린 말조차 하지않는 게 참 아리스티네다웠다.
날카로운 가시덩굴이 가슴을 헤집으며 자라나는 것만 같았다.
아프다.
하지만 겉으로 내비칠 수 있는 것은 웃음뿐이었다.
한참을 웃고 나니 머리가 깨끗 해졌다.
루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이 선명했다.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그 얼굴을 새길 듯이 바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구로서 당신의 행복을 빌어 줄게요.”
그렇게까지 가라앉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다행이다.
루는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 게 말을 보탰다.
“너무 행복하지 말라는 말은 취소야.”
아리스티네가 눈매를 찡긋한다.
루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 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행복해져요. 세상에서一.”
가장.
루는 잠시 말을 멈췄다. 호흡이 멸렸다.
“……두 번째로.”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잘되 지 않았다.
“첫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내가 될 거니까.”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너무하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눈가를 찡그리며 장난스럽게 맞받아쳤다.
떨리는 그의 숨결이나 아프게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모르는 척.
그렇기에 루는 웃음을 흐트러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너무하긴 하지만 나도 친구로서 당신의 행복을 빌어 줄게요.”
“고마워요.”
아리스티네는 잠시 말없이 루 를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얼굴이 이렇게나 슬 퍼 보일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그에게 손을 뻗어 줄 수 없었다.
그녀의 연민이 그에게는 고문이 될 테 니까.
흐르는 시간과 근사한 인연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루가 바라는 것은 해 줄 순 없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입을 열 었다.
“친구로서 당신의 행복을 위해 조언해도 될까요.”
“당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리스티네는 목을 가다듬은 후 조심스레 운을 뗐다.
“부왕 폐하께는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루의 얼굴이 한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하미르 왕자는 죽었어요.”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목소리 가 단호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분의 아들이에요.”
“리네, 이 이야기는……”
“그분은 당신이 왕자가 아니더라도,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당신을 아들로 생각할 테니까.”
하미르는 입을 다물었다.
저를 꾸짖고,칭찬하고,혼내고,달래던 부왕의 모습이 떠올 랐다.
아이루고의 왕,네프테르는 타 르칸을 아꼈다.
그렇기에 왕후를 비롯한 하미르의 세력을 견제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인 네프테르는 아들인 하미르를 사랑했다.
가쁘게 흘러가는 정쟁과, 모친 과 외가의 죽음에 어느새 그 사실은 지웠다.
“물론 선택은 당신의 몫이죠.”
하미르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진중한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건방지 다고 생각했을 텐데.
“……어쩌면 말할 날이 오겠죠”
저 눈동자에 순식간에 가슴이 말랑해져 선.
“내 삶을 찾고,세상에서 첫 번째로 행복해지진 않아도, 그럭 저럭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면.”
하미르가 미소 지었다.
“그때는 아버지와 내 동생을 찾아갈게요.”
아리스티네는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렸다. 방금 하미르의 대답으로 깨달았으니까.
‘죄책감을 가지고 있구나.’
폐후와 스키엘라 가문의 일에 대해서,그의 잘못이 아니어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함께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사라졌지만,나는 하미르 왕자님께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요.”
아리스티네가 그를 똑바로 바 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구해 주어서,내 아이를 구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루一하미르는 잠시 숨을 멈춘 채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담고 있는 커다란 눈동자,진심이 가득한 입술,생기 있는 뺨.
가슴속에 있었던 응어리가 사르르 풀려 간다.
되었다.
그녀의 인사로 모든 것이 그냥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어쩌면 자신의 세상 을 이렇게 쉽게 쥐락펴락하는 것일까.
하미르가 입술을 부드럽게 휘 며 웃었다.
“고마울 만하죠. 그 왕자 성격에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절대 아닌데.”
커다란 손이 아리스티네를 향해 뻗어졌다.
그러나 차마 닿진 못하고 허공만 움켜쥐고 물러난다.
빈주먹의 아쉬움을 간직한 채, 하미르가 환하게 웃었다.
“목숨을 바칠 만한 상대였거든요.”
초여름의 햇살이 그의 얼굴에 고였다.
* * *
방 밖으로 나온 아리스티네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칸.”
그녀의 남편이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대뜸 말했다.
“칭찬해 줘.”
갑작스러운 요구에 아리스티네는 당황했지만, 곧 생각에 잠겼다.
원래 부부 사이의 요구는 잘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 음 ”
아리스티네는 찬찬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르칸의 전신을 훑었다.
바로 칭찬할 말이 떠올랐다.
“멋진 가슴이네?”
칭찬이 라기 엔 감상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벌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빵빵한 대흉근이 그렇게나 탐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춥지도 않은지 타르칸은 겨울 에도 가슴을 슬쩍 까고 다니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더워진 날씨로 인해 그때보다 더 적극적인 노출을 하고 있었다.
아주 보기 좋았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 의 모습에 타르칸의 미간에 금이 생겼다.
“그건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말 아냐?”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아리스티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싫어?”
“……그건 아니지만.”
타르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 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가슴에 힘을 주었다.
아리스티네는 웃으며 그를 토 닥토닥 위로해 주었다. 물론 가슴을 두드리며.
아리스티네의 손길을 받던 타르칸이 불쑥 말했다.
“나 끼어들고 싶었어.”
혹시 제가 옆에 없는 사이 아리스티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타르칸은 항상 노심초사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방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따라왔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아리스티네와 하미르를 보고 그 사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아리스티네를 제 쪽으로 끌어 당겨 바짝 안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 주고 싶었다.
아리스티네가 하미르를 밀어내는 것을 똑똑히 보면서도 그 충동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런데 꾹 참았어.”
아리스티네는 그제야 타르칸이 무엇을 칭찬해 달라고 한 건지 깨달았다.
‘누구 남편인데 이렇게 귀엽지.’
피식 웃은 그녀가 타르칸을 답삭 끌어안았다.
“그래그래,잘했어. 착하다,내 남편.”
히히,웃으며 올려다보는 아내 의 모습에 타르칸은 순식간에 마음이 풀렸다.
그는 아리스티네의 뺨에 꾹 입을 맞추고 팔을 내밀었다.
아리스티네가 그의 팔을 붙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안 만나도 돼?”
힐끗 루가 있는 방을 눈짓하며 묻는 물음에 타르칸이 고개를 저었다.
“나를 별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한숨처럼 중얼거리곤 덧붙였다.
“언젠가는 만나겠지.”
루가 자신의 삶을 찾았을 때.
지금은 그보다는 곁에 있는 자신의 아내에게 집중할 때였다.
부푼 배 탓에 갸우뚱거리며 걷 는 모습이 혹시 넘어지기라도 할까 걱정되었다.
그 눈빛을 느낀 아리스티네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대신 걸어 주고 싶다는 표정이네.”
“티 나?”
“엄청.”
“그럼 안아 줘도 돼?”
이왕 들킨 김에 묻자 아리스티 네가 키득거렸다.
“음,하지만 우미루 경이 적당 히 운동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완곡한 거절에 타르칸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 대신이라고 할지,마차에 오를 때는 그가 안아서 올려 줬다.
“나도야.”
나란히 앉은 채 기대어 있는데 타르칸이 갑자기 말했다.
‘‘응?”
“내가 혹시라도 너를 만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어도……”
아리스티네는 힐끔 타르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 러나 아리스티네의 손을 붙들고 있는 손에는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 었을 거라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귓등과 뺨이 붉었다.
아리스티네는 웃었다.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녀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열 살 때 잠깐 본 나를 10년 가까이 잊지 못해서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너도 참 조숙했다니까.”
놀리는 듯한 말에 창문을 보고 있던 타르칸이 휙 고개를 돌렸다.
새빨간 얼굴에 아리스티네가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소나무 같은 취향이야.”
일부러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타르칸은 조금 심통난 얼굴이 되었다.
“하여간 로맨틱한 걸 모르는 여자라니까.”
“너는 잘 알고?”
투덜거림에 되받아치자 타르칸이 입을 다물었다.
어찐지 삐진 것 같았다.
아리스티네가 남편에게로 팔을 뻗었다.
“네 말대로 나는 로맨틱한 걸 잘 모르지만,그래도 아는 게 하나 있어.”
가느다란 팔이 단단한 목을 휘 감는다.
콩,이마가 맞닿았다.
“지금이 키스할 때라는 거.”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다. 그 틈 으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온다.
타르칸은 언제 삐졌냐는 듯 아내를 갈구했다.
Chapter 41. 황위를 계승 중입니다
‘좋아,평원에 가도를 설치하는 건 잘 진행되고 있고.’
완공까지 제법 시간이 걸리겠 지만 현재까지의 진행은 순조롭다.
‘이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거야. 물자 유통부터 시작해서 양국 간의 교류 전반에.’
아리스티네는 리트렌과 아세나 가 보내 준 서류를 착착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삿길에 오를 때, 아리스티네는 마법으로 강화된 마차를 탔다.
약 한 달간의 여정이었다.
‘하지만 가도가 생기면 시간이 훨씬 단축될 거야.’
강화 마차로는 빠르면 보름, 일반 마차로는 한 달 정도를 예상했다.
실바누스는 대륙의 전반에 걸쳐 있는 대제국인지라 워낙 땅 덩어리가 넓다.
그 때문에 제도에서 변방까지 한 달 이상 걸리는 거리도 있었다.
‘국가 간에 이 정도면 거리감이 확 줄어.’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자 놀고 있는 세 남자가 눈에 들어 왔다.
어쩐지 나만 일하는 거 같은데.’
사실 아리스티네보다 더 바빠야 하는 자들이 아닌가.
네프테르는 옆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고 있고,라우넬리안은 곡을 연주하고 있는 연주가들에게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대충 들어 보니 ‘아이의 뇌 발달에 도움이 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을 시켜 주는 동시에 산모 를 건강하게 하는 곡’을 만들어 서 연주하라는데…….
악단의 얼굴을 보니 황자라서 참는다,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오라버니지만 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입에 포도가 쏙 들어왔다.
잊을 만하면 타르칸이 입에 먹 을 것을 쏙쏙 넣어 주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정사를 돌봐야 할 사람들이.
한숨이 나왔다.
아리스티네가 실바누스에 온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로 하미르를 만나는 것.
두 번째로는 라우넬의 목숨을 노린 폐주를 만나는 것.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황위 계승에 관한 논의였다.
라우넬리안은 아리스티네를 위 한 대관식을 준비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준비 중이었다.
즉,그녀가 모든 결정을 마칠 때까지 실바누스의 황위는 공석이라는 소리였다.
이 문제는 당연히 나라 안팎으로 집중을 받게 되었다.
국제 사회는 과연 다음 대 제국의 황좌에 누가 오를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내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야.’
아리스티네는 아이루고의 왕자 비-그것도 계승 서열 1위인 타르칸의 왕자비였다.
즉,그녀의 황위 계승에는 아이루고 역시 연루될 수밖에 없다.
아리스티네가 황제에 오르지 않으면 그냥 간단할 문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리스티네는 결심을 마쳤으니 까.
그리고 말을 안 꺼낼 뿐,모두 가 알고 있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