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실바누스와 아이루고.
오랜 세월에 걸쳐 온갖 부를 다 쌓은 두 강대국에서도 가장 귀한 것들이 아리스티네에게 주 어졌다.
영약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먹고,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도 몸을 보하는 것들을 두르고 있으니 회복은 빠를 수밖에 없 었다.
무엇보다 타르칸에게서 신의 힘을 전해 받으면 몸이 가뿐해 졌다.
아리스티네는 천천히 입술을 떼며 눈을 떴다.
곧장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키스의 여운에 살짝 상기된 얼 굴, 아쉬움이 짙게 남은 황금빛 눈동자.
‘신의 축복 정말 최고다.’
신의 힘을 전해 줄 때 가장 효 율 좋은 방법이 짙은 신체 접촉 이라니.
비스나테프도 참 뭘 아는 신이 었다.
“리네……”
한숨 섞인 음성이 아리스티네 를 불렀다.
귓가에 닿는 더운 숨결과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아리스티네 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시선이 오가고 다시금 타르칸 의 입술이 아리스티네의 입술로 향했다.
스르록, 아리스티네의 눈이 감 기는 순간.
“흐에,우애애앵!”
어김없이 악트시온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티네는 화들짝 놀라 악트시온이 누워 있는 요람으로 다가갔다.
물론 타르칸을 뒤돌아보는 일 따윈 없었다.
홀로 남은 타르칸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저 아들놈이 아는 게 분명해.’
키스로 신의 힘을 넘겨줄 때는 울지 않는데 꼭 스킨십을 목적으로 하면 저런다.
“왜 그러니, 시온?”
“심심하신가 봅니다. 아직 배도 부르실 테고 아무 문제도 없는 데.”
아가를 돌보던 궁인들의 말에 아리스티네가 “어휴, 그랬어요? 심심했어요?” 하면서 아들을 안아 들었다.
악트시온을 둥기둥기 달래는 모습을 본 타르칸이 미간을 찌 푸렸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꽉 차고 흐뭇해지는 광경이었지만,그렇지만.
“우리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 야.”
그 말에 아가를 달래던 아리스 티네가 남편을 돌아보았다.
깜빡,깜빡.
몇 차례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결국 푸하하하하,웃음을 터 트렸다.
진심을 담은 말이었는데 능담 취급을 받았다.
아리스티네는 픽 웃으며 타르 칸에게 아가를 넘겨주었다.
엄마 품에서 벗어나는 게 싫은 지 악트시온이 칭얼거리며 아리 스티네에게로 손을 뻗었다.
아리스티네는 그런 아들의 뺨에 키스해 주었다. 몰캉몰캉한 게 정말 사랑스럽다.
“아빠랑 잘 놀고 있어요. 아빠 랑도 친해져야지.”
아가에게 속삭인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고 타르칸에게 말했다.
“그런 농담 하지 말고 우리 애나 잘 돌보고 있어. 나는 할 일 있으니까.”
타르칸은 대답 없이 불퉁한 표 정을 지었다.
뭐,아리스티네가 생각하기에도 분위기가 좋아지려고 하기만 하면 꼭 악트시온이 울어 대긴 했다.
저 가슴팍에 달린 거대한 빵 덩어리를 농락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아리스티네로서도 조 금 아쉽긴 했다.
하지만 아기는 원래 시도 때도 없이 울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타이밍이 맞았을 뿐이다.
‘흠……’
심통 난 표정의 남편을 바라보 던 아리스티네의 눈이 묘해졌다.
‘귀여워.’
결국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남편의 귓가에 속삭였다.
“돌아와서 마저 하자.”
타르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더 반응하기 전에 아리스티네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악트시온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타르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지만, 느껴지지도 않았다.
환복한 후,감옥으로 간 아리스티네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 겼다.
몸을 꽤 회복했으니 아기의 태 교를 위해 미뤄 두었던 일을 할때였다.
바로 황궁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싹 다 정리해야지.’
당연하지만 아리스티네는 폐주 알피어스와 레타나시아를 이대로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 지경이 되었으면서도 라우넬리안의 목숨을 노렸다.
실패로 돌아간 데다 협력자였던 스키엘라 공작과 폐후 로아스텔까지 잃었지만,그렇다고 또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애초에 반성하고 후회할 거라 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리스티네가 직접 정리할 생각이었다.
라우넬리안도, 타르칸도, 악트 시온도 모두 자신이 지킬 것이다.
이윽고 그녀의 앞에 거대한 문 이 열렸다.
“레타나시아.”
쥐와 바퀴벌레를 피해 구석진 곳에 웅크려 있던 레타나시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상대는 빛을 등지고 있어 바라 보기 눈부셨다.
하지만 레타나시아는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천천히,아리스티네가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고 눈이 아리도록 찌 르던 빛은 사라졌다.
그러나 아리스티네의 모습은 여전히 눈이 부셨다.
빛을 머금은 것 같은 찬란한 은발,은은히 빛나는 새하얀 피 부 그리고.
오직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황제의 인장이 수놓아진 드레스.
레타나시아의 연둣빛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눈을 감는 것도 잊은 채 그 드 레스를 바라보았다.
“저런, 꼴이 말이 아니구나.”
아리스티네의 음성이 머리 위 에 떨어지고 나서야 레타나시아 는 흠칫,고개를 들었다.
아리스티네의 눈에 비친 제 초 라한 모습이 부끄러웠다.
레타나시아는 이를 악물고 아 리스티네를 노려보았다.
“지금 보란 듯이 내게 자랑하 려고 온 건가요?”
“응? 내가 왜?”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기울였다.
기사가 커다란 의자를 가져와 아리스티네를 위해 놓아 주었다.
‘저런 배려는 원래 내가 받았는데……!,
“너한테 자랑해서 내게 득 되 는 게 뭐가 있다고.”
아리스티네가 푹신한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저를 상대조차 안 하는 모습에 레타나시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네게서 가져갈 것이 있어서 왔단다.”
“가져갈 것……?”
멍하니 되물은 레타나시아가 하,하고 기가 찬 웃음을 뱉어 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잃었어! 네가 다 가져갔잖아! 그런데 여기서 더 뭘 바라서!”
“그러게 그 꼴이 되었으면 얌전히 있었어야지.”
아리스티네는 눈 하나 깜짝하 지 않고 발작하듯 몸부림치는 레 타나시 아를 내 려 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언제 네 것을 가져갔다고 그러니?”
그 말에 레타나시아의 말문이 막혔다.
지금 아리스티네는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지만,저 의자는 알현실의 황좌는 아니었다.
그러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 도로 몸을 기댄 채 앉아 있는 아리스티네에게선 마치 황좌에 앉은 것처럼 제왕의 위엄이 흘 러나왔다.
레타나시아가 그렇게도 원했던 황제의 자리.
그건 애초에 그녀의 것이 아니 라 아리스티네의 것이었다.
아리 스티네가 레타나시아에게서 빼앗을 필요도 없는.
“하……”
허탈했다.
레타나시아는 픽 웃으며 아리 스티네를 노려보았다.
“아,내 목숨을 가져가겠다?”
이제 아리스티네가 자신에게서 가져갈 것은 단 하나였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봐. 어차피 이렇게 패배자로 사는 것보 다 죽는 게 나으니까.”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의문스러운 표정 을 지었다.
“내가 왜 네 목숨 따위를 탐내?”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레타나시아,넌 그 정도는 아니야.”
그 말에 레타나시아의 얼굴이 확 굳었다.
‘또다.’
그때도,아까도, 지금도.
아리스티네는 자신을 적수로조 차 보지 않는다.
자신은 계속 아리스티네를 경 계했는데,정작 그녀에게는 경계 할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 이,그것이 가장 화나고 분하고 원통했다.
“먼 옛날,제왕안을 통해 자신이 동생에게 죽임을 당할 거라 는 것을 안 황제가 있었지.”
아리스티네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걸 알면서도 자신의 기사를 마수의 땅에 보내고,동생에게서 신의 축복을 거두어 가지 않았어.”
레타나시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옛날이야기 라니.
“그게 황제가 본 여러 가지 미래 중에서 최선의 미래였기 때문이지.”
아스라한 옛 기억을 더듬듯 손바닥만 한 감옥의 창을 바라보며 말하던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나는 다르거든.”
보랏빛 눈동자가 제 손을 바라 보았다.
“이미 보았던 미래 중에서 최선의 미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내가 내 손으로 최선의 미래를 만들어 갈 거야.”
주먹을 꽉 움켜쥔 아리스티네 가 고개를 들었다.
“레 타나시아.”
아리스티네와 눈이 마주친 순 간,레타나시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리려다가 실패했다.
딱딱한 감옥의 벽이 그녀를 막 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티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레타나시아에게로 다가 갔다.
그저 걸어오는 것일 뿐인데, 레 타나시아는 아리스티네에게 완전 히 압도된 채 움직이지 못했다.
아리스티네에게서 빛이 흘러나 오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금의 아우라가 아리스티네를 휘감고,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에 금빛이 깃들었다.
보랏빛 눈에 확연히 대비되는 보색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선택받은 존재다운 위엄이 아리스티네에게서 흘러 나왔다.
“〈개화〉한 제왕안의 소유자로서, 신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실바누스의 정당한 황위 계승자로서.”
새하얀 손이 레타나시아의 머 리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은총이라도 내리는 듯한 모습.
“네게 주어진 과분한 신의 축복을 거두어 가겠다.”
그러나 아리스티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 정반대였다.
레타나시아는 입을 벌렸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목소리가 아닌,한없이 공포에 질린 숨결이었다.
‘신의 축복을 거두어 가겠다고……?’
그 말은 곧 레타나시아의 능력 을 빼앗겠다는 뜻이었다.
실바누스 황가의 직계라는 증거이자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계 승권이 있다는 증명.
입술이 벌벌 떨리고 손발이 차가워 졌다.
“아,아,안 돼……!”
레타나시아가 몸부림칠 때마다
쇠사슬이 달그락거렸다.
아리스티네는 별 감흥 없이 손 을 거뒀다.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란다. 내가 결정할 일이지.”
“차,차라리,차라리 날 죽여!”
레타나시아가 실핏줄이 자글자글 올라와 시뻘게진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노려보았다.
이게 전부였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감옥에 갇 혀 평생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더라도 자신이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끈.
실제 황제가 되지 못하더라도, 황가의 직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헛된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네게 그 럴 가치는 없다고.”
“아,안,아니,안 돼…….”
덜덜 떨리는 레타나시아의 손
이 아리스티네를 붙잡으려 했다.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어림도 없다는 듯 그 손을 막았다.
하지만 레타나시아는 신경 쓰 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만이 중요했다.
자신이 능력을 쓸 수 있는가. 타인의 과거를 읽어 낼 수 있는가.
그러나.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레타나시아,어리석은 내 동 생.”
동정하는 목소리에 레타나시아 는 허하게 빈 눈을 들었다.
이 사람은 항상 그렇다.
아비에게 버림받아 유폐당했을 때조차,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 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자신이 어야 하는데!
“처음에 나는 네 신분을 박탈 하는 것 이상의 벌을 줄 생각이 없었단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기 때문일 터다.
어떻게 해도 자신은 아리스티 네와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라우넬 오라버니는 건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그 말에 레타나시아의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었다.
“너희 남매는 항상 그래! 맞아, 너희는 황후 폐하의 태에서 나왔지! 핏줄부터 다르다는 거야? 그래서 나를 이렇게 무시해?”
“네가 한 짓을 돌아보렴.”
흥분한 레타나시아와 달리 아 리스티네는 차분히 답했다.
“분명 우리도 너를 동생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단다.”
“뭐라고……?”
“지금 이 모든 것이 단순히 태생의 한계라고 생각하지 마.”
아리스티네는 더 볼 것도 없다 는 듯이 뒤돌았다.
“네가 선택하고 행동해서 만들어 낸 결과일 뿐이니까.”
쾅,두꺼운 철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레타나시아는 바닥 을 긁으며 오열했다.
이게 내가 만든 결과라고?
그럴 리 없다.
황후의 자식이 아니라서 라우넬리안과 아리스티네가 자신을 싫어했던 거다.
제왕안을 타고나지 못해서,그 래서 황제가 되지 못한 거다.
‘내 탓이 아니야!’
모든 것은 태생의 문제였다.
〈네가 한 짓을 돌아보렴. 분명 우리도 너를 동생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단다.〉
아주 어렸을 적,아리스티네의 기억을 읽었던 때가 떠올랐다.
요람에 잠든 자신을 웃으며 내려다보던 아리스티네의 모습.
“아,아니야……. 난 잘못하지 않았어. 먼저 나를 무시한 ....”
동시에 아비의 귀에 속살거렸던 어린 제 모습이 떠올랐다.
아리스티네를 유폐시키고, 버림 받게 만든 말.
라우넬리안을 저 먼 북방으로 보낸 말.
“아아아아악!”
기괴한 비명 소리가 텅 빈 감옥을 울렸다.
“리네는 완전히 떠난 것 같군.”
타르칸의 중얼거림에 라우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들었지.”
“뭘 말입니까.”
“라우넬 오라버니는 건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내 동생의 말.”
그 말에 타르칸의 눈매가 가라 앉았다.
“내 동생이 이렇게나 나를 사랑하고 아낀다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안으로 들어가기나 하죠.”
라우넬리안은 불만스러운 눈으 로 타르칸을 바라보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내 동생은 다 좋은데 너무 관대하다니까.”
“우리가 처리를 해야죠.”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