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끼이이이익,귀를 긁는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이 열렸다.
하지만 감옥 안에 있던 레타나 시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것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제 아무 렇지도 않았다.
능력을 잃고 비루한 삶을 연명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앞에 긴 그림자가 생겼다.
“레타나시아.”
오랜만에 듣는 이복 오라버니 의 목소리에 레타나시아는 천천 히 얼굴을 들었다.
“하,하하……”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이에요,오라버니. 나를 죽이러 왔나요?”
“글쎄.”
“그래,어서 죽여요. 이렇게 아무 희망도 없이 감옥에서 썩어 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생기를 다 빨린 것처럼 레타나 시아의 얼굴은 빈 껍데기 같았다.
‘계획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 감옥에 갇혀 고신당할 때조차 이렇진 않았는데.’
그만큼 레타나시아에게 능력이 가지는 의미는 컸던 것이다.
능력을 가진 자만이 황위를 계 승할 수 있기에.
“레타나시아, 난 너의 욕심과 야망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말에 레타나시아는 피식 웃 었다. 입술이 찢어지며 찜찔한 피 맛이 났다.
“왜,이 꼴 나니까 날 위로해 주는 거예요? 내가 불쌍해서? 그래, 난 이제 황녀도 뒷도 아니 야. 복권되어 봤자 실바누스의 혈통이라고 할 수 없어! 다 사라 졌다고!”
오열하는 레타나시아를 내려다 보며 라우넬리안이 황당한 목소 리로 말했다.
“내가 왜 널 불쌍히 여겨?”
레타나시아의 눈매가 일그러지 는 것을 보며 라우넬리안은 말 을 이었다.
“위로하는 게 아니라 욕하는 건데. 사람이라면 야망이 있다고 해서 너처럼 다른 사람을 짓밟 아 발판으로 만들지는 않지.”
“사람이 못 되는 자들은 많지만.”
타르칸의 덧붙임에 라우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쁜 것이고,너의 죄다. 혹시라도 야망을 가진 게 잘못이냐고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고. 야망이 나쁜 건 아니니.”
뚜벅,뚜벅.
라우넬리안은 사슬에 묶여 있 는 레타나시아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가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를 마주했다.
“너 때문에 내 동생이 어떤 성 장기를 보냈는지 생각하면 아직 도 치가 떨려.”
“그래? 그럼 죽여.”
그 말에 라우넬리안의 눈동자 에 살기가 스쳤다.
“커헉,으,흐……”
라우넬리안은 손도 대지 않았건만 레타나시아의 목이 움푹 파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 처럼.
“아흑,아,크흑……”
시뻘게진 레타나시아의 얼굴 위로 핏줄이 돋았다.
생리적인 눈물이 비어져 나오고 거품 같은 침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이 뒤집어지려는 순 간,
“커흑,아,흐,허억!”
움푹 파였던 목이 원래대로 돌 아왔다.
폐색됐던 기도로 밀려드는 공 기에 레타나시아가 기침을 토해 냈다.
“내가 왜 널 죽여? 네가 죽는 걸 원하는데.”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타르칸이 레타나시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황제가 되고 싶다고. 그렇다면 당연히 이 힘도 받을 수 있겠지.”
그의 손에서 금빛 오러가 뿜어 져 나왔다.
아리스티네에게는 힘이 되었던 그의 오러가 레타나시아에게 파 고들자 기혈을 뒤틀며 날뛰었다.
신의 축복을 잃은 레타나시아 로서는 신의 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커헉……”
왈칵,레타나시아의 입에서 붉 은 피가 튀어나왔다.
타르칸은 레타나시아의 머리 위에서 손을 뗐다.
“이제 네 주제를 알겠지. 아무 리 더러운 수를 써도 너는 내 아내의 발끝에조차 닿지 못해.”
레타나시아는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바라보았다.
증거였다.
자신은 절대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증거.
갖은 흉계를 꾸며도 결국에는 제자리걸음이었다 .
“왜,왜!”
가슴이 불에 타는 것만 같았다.
두 남자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 를 내려다보았다.
본디 반역을 꾀한 자는 혀와 사지가 잘리고 무덤조차 갖지못한 채 광장에 효수되기 마련 이다.
하지만.
“나는 너를 죽이지 않아. 살아서 평생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 라.”
“끌고 가.”
라우넬리안의 명령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레타나시아는 능력뿐만이 아니 라 성과 이름을 잃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황녀가 아니라,죄를 지은 노예로서.
* * *
아리스티네는 복잡한 마음을 잠시 산책하며 정리한 후,침궁 으로 돌아왔다.
아가가 있는 방으로 가자 남편이 악트시온을 안고 토닥토닥하 고 있었다.
남편의 품에서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잠든 아들을 보니 절로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이 광경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겠구나.’
그 어떤 것보다 지금 눈에 담 은 이 모습을 평생 마음속에 간 직하며 사랑할 것이라고.
아리스티네는 방 문간에 서서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볼록한 뺨이 남편의 가슴에 꾹 눌린 채 자고 있는 아가의 모습 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그래,그 가슴이 편하긴 하지.’
아리스티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흐뭇한 건 흐뭇한 거 고,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소유권은 확실히 해야 했다.
‘근데 그 가슴은 엄마 거다. 잠깐 빌려주는 거야.’
아리스티네의 눈이 남편인지 남편의 가슴인지를 향한 독점욕으로 빛났다.
그러다가 남편의 복장에서 무 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칸,어디 갔다 왔어? 옷이 바뀌었네.”
방으로 들어가며 말하자 아들을 토닥토닥하고 있던 타르칸이 고개를 들었다.
“아,더러운 게 묻어서. 우리 아들한테 더러운 게 묻으면 안 되니까.”
“음,그래?”
아리스티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타르칸은 다가오는 아내를 보며 유모에게 아기를 넘겨주었다.
눈치 좋은 유모는 시온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일은 잘 해결했어?”
“응,마지막 처리는 라우넬 오라버니가 자기한테 맡겨 달라고 해서 남겨 두었지만.”
최후의 처분을 어떻게 할지 아리스티네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라우넬 오라버니는 레타나시아 때문에 고생이 많았으니까.
“칸 아니었으면 죽을 뻔도 했고.”
콩,아리스티네가 남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야.”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가만히 그 손길을 받던 아리스티네가 손가락 끝으로 그의 가 슴을 톡 밀쳐 냈다.
“하지만 폐주는 양보하지 못 해.”
머리를 쓸어 넘긴 그녀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 손으로 갚아 주어야지.”
타르칸은 말없이 자신의 아내 를 바라보았다.
아비를 해하려고 하는 모습이 충격적이라서?
복수에 신경 쓰는 모습이 안타 까워서?
전부 아니다.
‘뭐야,너무…… 섹시하잖아.’
아비를 향한 음모를 꾸미는 모습이 이다지도 도발적일 수가있는 것일까.
그는 이미 중증 환자였다.
“크흠,시온도 잠들었는데.”
타르칸이 은근슬쩍 아리스티네 의 허리를 감쌌다.
“흐음?”
“아이가 외동이면 외롭다고 하더라고.”
“둘째를 만들자?”
아리스티네가 픽 웃으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늘 아침 궁의에게 몸이 회복되었으니 부부 관계를 가져도 된다는 말을 들었던 차다.
‘아무리 그래도 듣자마자……. 내 남편이지만 참一.’
물론 싫다는 건 아니었다.
‘一바람직해.’
“아니,그건 안 돼.”
그런데 타르칸이 단호히 고개 를 저었다.
아리스티네는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빨리 생겼어. 아이는 조금 나중에…… 1 년,아니,3, 5 년…… 10년 후에.”
“조금 나중이 아닌데.”
“내가 지난 10개월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10개월이 아 니라 10년 같았어.”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끌어안 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의 향기를 들이삼킨다.
투정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완숙한 남자라는 것이 닿 은 몸으로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곧장 눈이 마주쳤다.
긴 눈매에 담긴 금빛 눈동자에 는 그늘진 욕망이 가득했다.
당장 아리스티네를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
허리를 감싼 손이 느릿하게 움 푹 파인 등줄기를 쓸어 올렸다.
아리스티네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가 뜨겁게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스르륵,아리스티네의 눈이 감 겼다.
그의 짙은 호흡이 그녀의 입술 을 간질였다.
이윽고 입술이 맞닿으려는 순 간,
“타르칸 전하! 시온 님 주무신 다면서요! 이 틈에 오늘 밤을 위한준비를…”
문이 벌컥 열리며 궁인들이 들어왔다.
침묵이 찾아왔다.
딱 달라붙은 두 남녀를 보고 궁인들은 문을 연 자세 그대로 굳었고, 그건 아리스티네와 타르칸 역시 마찬가지였다.
먼저 이 어색한 기류를 깬 것은 궁인들이었다.
“아,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추가로 뭔가 필요하시면 말씀
하시 구요.”
“침대 사용법은 아시죠? 드디 어 쓰시겠네요.”
“침실에 거울 다시 넣어 놓을 게요.”
“그럼,행복을 나누세요.”
쾅, 문이 닫혔다.
방 안에는 다시 아리스티네와 타르칸 두 사람만 남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궁인들이 난입하기 전 분위기로 돌아갈 리 없었다.
‘아,쪽팔려.’
마수 평원에서 첫날밤을 보냈을 때도 그렇고,왜 이렇게 우리 잔다고 광고하게 되는 걸까.
“구,궁인들 다시 불러와서 우리…… 깍!”
갑자기 타르칸이 자신을 안아 드는 바람에 아리스티네는 비명 을 질렀다.
“가자.”
아리스티네는 눈을 깜빡거렸다. 가자니 어딜?
“침대 사용해 보러.”
이 대낮부터?
물론 그런 말은 아리스티네의 입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남편의 두꺼운 목을 꽉 끌어안을 뿐.
“흠흠,침대 사용법이 조금 궁 금하긴 하네.”
새침하게 말하며 아리스티네는 남편의 가슴에 기댔다.
그리고 그녀는 이때 이 짐승 같은 남자를 말리지 않고,고삐를 풀어 준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 * *
한풀 꺾인 더위에 이른 아침 공기는 꽤 싸늘했다.
부산스러운 느낌에 아리스티네 는 침대에 축 늘어진 채 끄응, 하고 신음했다.
분위기를 보니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에,우리 비전하.”
궁인들이 늘어진 채 정신을 못 차리는 아리스티네를 보며 기함했다.
하지만 익숙한 상황이기도 한 지라 그녀들은 빠르게 찜질을 시작했다.
“비전하,힘들 땐 안 된다고 말씀하시라고 하셨잖아요.”
“안 돼요,싫어요,피곤해요. 이 세 마디를 달고 사시라고 말 씀드렸는데.”
궁인들이 마사지하며 부드러운 수건으로 조심스레 아리스티네 의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그러자 웅얼거리는 답이 아리 스티네에게서 새어 나왔다.
“응……. 그치만 하다 보면 또 기분이 좋아져서……”
“아앗……”
궁인들이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그렇다면야……”
기분이 좋다면 어쩔 수 없지.
원흉이 타르칸 전하 혼자인 줄 알았는데 부부가 모두 원흉이었다.
* * *
타르칸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 며 아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갈기 같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야성적인 등에는 붉은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기분 좋았어?”
“응”
자그마한 대답에 타르칸의 눈 매가 가라앉는다.
그가 누워 있는 아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침이건만 어째서인지 침실에는 깊은 밤 같은 기류가 흘렀다.
“안 됩니다!”
기겁한 궁인들이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 대관식 날이라고요!”
“지금 준비해도 모자라요! 비 전하께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시는데!”
“적어도 어젯밤은 참으셨어야 지! 그렇게 신신당부 드렸는데!”
궁인들의 원망이 타르칸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리스티네 역시 원망을 피할 수 없었다.
“비전하도 비전하예요. 아무리 기분 좋아도 그렇지, 힘들지도 않으세요?!”
“음……. 그렇긴 한데 또 매일 매일 고영양을 섭취하니까.”
잘 먹인 우리 탓이구나.
타르칸,라우넬리안,네프테르.
이 무소불위의 권력과 힘을 가 진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몸에 좋다는 것은 전부 다 바쳤다.
그럼 궁인들이 좋다고,우리 비전하 먹여야 한다고 신나게 주방을 볶았다.
솔직히…… 두 사람이 열심히 밤운동 하라고 볶은 게 맞았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궁인들은 스스로를 원망했다.
“일단 찜질부터 다 하고,고영 양을 섭취하도록 하죠.”
“그럼 대관식 잘 치르실 수 있 겠죠. 그보다 더한 운동도 그 고 영양 섭취로 견디시는데.”
어쨌거나 자신들의 잘못도 있 으니 대관식을 잘 치르도록 최 대한 보좌해야 했다.
“밤일 때문에 대관식에서 맥을 못 추는 황제라는 말을 들으면 안 되니까요!”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눈을 번 쩍 떴다.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갑자기 들었다.
“헉! 오늘 대관식이었지!”
절대 그런 오명(?)을 받을 수 는 없었다.
“그러게 내가 어제 그만하자고 했잖아!”
남편을 탓하자 타르칸이 숙 고 개를 돌렸다.
“기분 좋다고 했으면서.”
결국 탓할 건 자기 자신이었다.
마사지와 찜질을 받고,온갖 에너지원을 섭취한 뒤,아리스티 네는 되살아났다.
타르칸에게서 신의 힘을 전해 받은 덕도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관복을 입은 자신은 완벽한 새 황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좋아.’
“칸,나 잠시 어디 다녀올게.”
“지금?”
“응,아직 시간 남았잖아.”
아리스티네가 그를 보며 생긋 웃었다.
“이 모습을 꼭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티네의 손에는 자그마한 유리병이 쥐어져 있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