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높은 성벽 위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제국의 앞날에 무한한 광영을!”
“다시 하나가 된 제국에 평화룰!”
황궁의 성벽 아래 까마득하게 몰린 사람들이 환성을 내질렀다.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이 손을 들어 올리자 더더욱 커진다.
엄마, 아빠가 하는 것을 지켜 본 악트시온이 제 두 손을 번쩍 치켜올렸다.
“우아아아아!”
“황자 전하!”
“황자 전하 만세!!”
이번 외침의 끝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미소지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사람들 의 얼굴에서 전란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다.
적대 관계를 끊어 내는 경사였던 아리스티네와 타르칸 국혼에 기뻐하며 환호하긴 했지만,그건 어딘지 절박함이 묻어 있는 환 호였다.
이 혼사가 평화를 가져오길 바 라는 절박함.
그렇기에 더더욱 두 사람을 응원하고,결혼 생활이 무탈하고 좋게 흘러가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우러러보 는 백성들의 만면에는 희망과 기대,행복만이 가득했다.
예전의 절박함은 찾아볼 수 없 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이 유지 될 거라는 안도와 신뢰를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아리스티네는 제왕학을 배운 적도 없었고,황제의 후계로서 길러지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을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고 제 이름을 연호하며 환히 웃는 사람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지키자.’
황제로서 사람들의 행복을 지 키고,아리스티네로서 남편과 아들의 행복을 지키자.
마치 그 마음이 전해진 것처럼 타르칸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같이 행복하자고,행복을 향해 나아가자는 듯이.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살짝 들자 그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갈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딜?”
“우리 둘이서만 놀러.”
대관식이 시작하기 전에 했던 말의 연장선이다.
아리스티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
“지금.”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향해 씩 웃었다. 소년 같은 미소였다.
“못 말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성벽에서 뒤돌아선 그녀는 유모에게 악트시온을 넘겨 주었다.
“뭐 해?”
그러곤 새침한 얼굴로 남편을 돌아보며 물었다.
“침대 쓰는 법 복습하러 가야지.”
아내의 말에 눈을 깜빡거리던 타르칸이 제 커다란 손으로 얼 굴을 덮었다.
정말이지, 이 여자에게는 당해 낼 수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이다.
“복습은 철저히 해야 하는데.”
타르칸이 아내를 안아 들며 귓가에 속삭였다.
뜨거운 숨결에 아리스티네가 어깨를 움츠렸다.
두 뺨이 발긋 하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도발적으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가느다란 팔이 타르칸의 목을 감싼다.
“나는 배움에 일가견이 있잖아.”
“그럼 어디 얼마나 잘 익혔나 볼까.”
키득키득,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웃었다.
아리스티네가 얼굴에서 웃음기 를 지운 채 남편에게 속살거렸다.
“응용도 가능해. 침대 말고 다른 곳에서.”
그녀의 손가락이 타르칸의 턱을 스윽,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타르칸의 표정 이 무너져 내렸다.
거친 욕망이 그의 눈동자 속에 서 일렁인다.
“우애!”
유모의 품에 안긴 악트시온이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번만큼은 아리스티네의 귀에도,타르칸의 귀에도 닿지 않았다.
즉위를 마친 두 황제의 첫 업 무는 침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 * *
네프테르는 귓가를 먹먹하게 물들이는 환호성 소리에 눈을 감았다.
자신을 향한 함성도,자신의 즉위식도 아닌데 온갖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장 뛰어난 자식인 타르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도 더 빠르게 타르칸은 자신의 세력을 넓혀 나가며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결국 타르칸은 왕위를 이어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제 아이루고와 실바누스는 하나의 제국으로서 자리매김하고,타르칸은 아리스티네와 함께 두 나라의 계승자로서 제국의 공동 통치자-황제 가 되었다.
이 승계 구도를 한 번에 정리 하기 위해 네프테르는 예정보다 더 이르게 선위했다.
‘이뤄 냈구나.’
양국의 화합은 마냥 먼일 같았다.
그러나 지금 즉위한 두 황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아이루고인과
실바누스인들이 한데 뒤섞여 같 은 마음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가슴이 빠듯할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뿌듯하다는 말로는 설명 하기 힘들 정도의 감정이었다.
기쁘고, 행복하고, 흐뭇하고, 대견하다.
그러나 왜일까,이 기쁜 날 가슴 한구석에서 먼저 간 첫째 아들의 얼굴이 선명했다.
‘미련한 놈.’
마지막 순간 왕위를 포기하고 아리스티네를 지킬 거였다면.
그러다 그렇게 가 버릴 것이었다면.
‘조금 더 일찍 포기하지.’
왕위도,그렇다고 아리스티네도 포기하지 못한 채 서성거리기만 하다 가 버렸다.
‘불쌍한 놈.’
어떻게든 살아남아 인생을 살면 또 다른 길이 보였을 텐데.
새로운 기쁨을 찾고 새로운 염원을 가졌을 텐데.
그 애에게 평생 주어진 선택지가 왕이 되느냐,그러지 못하느 냐밖에 없던 것이 가슴에 시리게 박혔다.
네프테르는 감았던 눈을 떴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한 인파를 바라보며 상상해 본다.
사실은 아들이 살아남았고,저 틈에서 동생의 즉위를 지켜보고 있다고.
‘우습군.’
네프테르는 자조했다.
왕으로서 그가 가장 경계했던 것이 허황된 상상에 기대어 통 치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제왕의 자리에서 물러 났다고 해도 헛된 망상에 사로 잡히다니.
두 눈으로 직접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시야 끄트머리에 밝게 빛나는 백금발이 언뜻 스쳤다.
그게 확실하다.
거기다가 아이루고와 달리 실바누스에는 밝은 체모를 가진 사람이 넘쳐났다.
지금도 인파 사이사이에 백금발이 눈에 띄지 않는가.
착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네프테르의 눈동자는 아까 스쳤던 자를 찾고 있었다.
‘아.’
심장이 덜컥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저와 똑같은 튀르쿠아즈빛 눈동자가 정확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짧아진 머리칼,실바누스인들과 확연히 차이나는 체구.
수척해졌지만 못 알아볼 리 없는 아들의 얼굴.
사람들의 얼굴이 새끼손톱보다도 더 작게 보이는데도,네프테르는 알아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다.
빙긋, 하미르가 미소 지었다.
멍하니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네프테르가 정신을 차리고 성벽에 달라붙었다.
“상왕 폐하?”
시종이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내려가야 해.”
어떻게든 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만 네프테르의 머릿 속에 가득했다.
“저곳에 하미르가……’
시종에게 손짓하던 네프테르의 말이 멎었다.
하미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가 있던 자리 근처에 백금발을 지닌 남자가 손을 흔 들며 환호하고 있었다. 실바누스 인이었다.
“작고하신 하미르 전하 말씀이십니까.”
시종의 말이 현실을 일깨웠다.
하, 스스로에 대한 원망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숨이 터져 나 왔다.
‘나도 늙었군.’
네프테르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무것도 아니다.”
네프테르는 성벽에서 뒤돌아섰다.
펄럭,묵빛 금의가 무겁게 흔들렸다.
* * *
새 황제의 즉위에 기뻐하는 사 람들 틈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짧게 친 백금발,튀르쿠아즈빛 눈동자.
선이 부드러워 문사 같은 분위 기를 풍겼으나 커다란 키와 단 단한 몸이 주변 실바누스인과는 확연하게 차이 났다.
바로 루였다.
그는 저 높은 곳에서 손을 흔드는 아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잘 어울리네.’
아우에게는 확실히 제왕의 자리가 어울렸다.
온몸을 감싼 대관식 예복도, 머리 위에 쓴 황제의 관도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리네.’
타르칸의 옆에선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는 루의 눈빛이 깊어졌다.
여전히 사랑스럽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어제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았 을 때의 기억이 밀려왔다.
황궁에서 지내면서 루는 단 한 번도 먼저 아리스티네를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제는 예외였다.
바쁜 와중일 텐데도 아리스티네는 그의 부름에 곧바로 찾아 와 주었다.
품에 꼬물꼬물하는 작은 생명 체를 안고서.
〈시온, 네 백부님이란다.〉
끔렉거리는 커다란 눈동자는 보랏빛이 었다.
루는 한참이나 눈을 못 떼고 그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시온과 엄마를 지켜 주신 분이야. 덕분에 우리 시온이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어.〉
〈빠아!〉
마치 알아들은 것처럼 악트시온이 옹알거리며 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움직이지도 못한 채 아기를 바라보고 있던 루가 무의식적으로 마주 손을 뻗었다.
따끈따끈하고 보들보들한 아기의 손가락이 그의 손에 닿았다.
움찔한 루가 뒤로 손을 물리려는 순간,꼬오옥 아가의 손이 루 의 검지를 쥐었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사용해 붙잡는데도 검지 하나를 다 채우 지 못했다.
끔택끔책, 커다란 눈이 깜빡이 더니 루를 향해 웃었다.
루는 숨이 막혔다. 목에 무언 가가 턱,걸리는 것 같았다.
이 감정을, 이 느낌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너를 살려서,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야.’
루는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리스티네를 구할 때도,구하 고 나서도 오로지 그녀의 안위만 생각했다.
배 속의 아이가 무사한 것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아이가 잘못되었으면 아리스티네가 슬퍼했을 테니 건강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뿐.
그런데 지금 이렇게 이 조그마 한 생명체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 조카.’
무사해서, 살아서,세상에 태어 나서 정말로 다행이다.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는 한없 이 깨끗하고 무구했다.
루는 손을 들어 아기의 눈가를 쓸었다.
〈눈빛이 당신을 닮았어요.〉
기다란 손가락이 아래로 부드 럽게 미끄러져 내려 콧잔등을 톡 건드린다.
〈코가 섬세한 것도.〉
말캉거리는 뺨이 손가락 아래 에서 탱글탱글했다.
〈뺨도.〉
〈내 볼살이 저렇게 많았나요?〉
아리스티네의 말에 루가 새들 새들 웃었다.
〈그건 아니지만. 당신이 어렸을 때는 분명 이랬을 테니까.〉
보지 않았음에도 그려졌다.
루는 잠시 볼살의 촉감을 즐기 다가 손을 뗐다.
진득한 아쉬움이 따랐다.
조금 더 쓰다듬고 안고 어르고 싶었지만 그건 자신의 몫이 아 니었다.
그는 아쉬움을 털어 내듯 입을 열었다.
〈내일 떠나려고 해요.〉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제 몸도 완전히 회복했으니 까 더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죠.〉
아리스티네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사실은 루가 자신을 불렀을 때 부터 그가 떠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요.〉
그녀는 수많은 말을 삼킨 채 친구를 향해 미소 지었다.
〈당신의 여행에 행운이 함께하 길.〉
루는 오랫동안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접히고 꺾이고 부러진 마음이 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미소를 새기고 싶어서.
상념에서 빠져나온 루는 미소 지으며 아리스티네를 올려다보 았다.
‘당신은 내내 빛나기를.’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이 뒤를 돌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직까지 환호하는 사람들 틈 에서 빠져나가려는 순간,성벽의 끝에 서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 먼 거리에서 이 인파 속에 있는 자신을 제대로 보지도 못할 텐데 마치 네프테르가 자신 을 알아본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진짜로 알아보았다.
일그러지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미소 짓는 것밖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깊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네프테르는 자식들에게 아비로 서의 면모보다 왕으로서의 모습 을 더 많이 보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루는 그 어느 때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깊게 느꼈다.
‘건강하시길.’
네프테르가 시종을 향해 고개 를 돌린 순간, 루는 사람들 틈으 로 모습을 숨겼다.
‘언젠가는.’
인생에 수많은 선택지를 발견 하고,그 선택지를 고르며 자신 의 삶을 살게 된다면.
그때 다시 만나 뵐 것이다.
그때는 조카에게 목말을 태워 주고,아우와 옛사랑을 마주하며 그런 적도 있었지,하고 지난 일 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황궁에서 멀어지는 루의 발걸 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Epilogue. 어느 황제 부부의 아침
커피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침대에 쓰러져 있던 아리스티 네의 의식이 점점 수면 위로 올 라왔다.
“으.......”
입을 열었으나 나오는 것은 앓 는 소리뿐이었다.
엄청난 노동에 시달린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삐걱거리고 팔다 리가 무거웠다.
그녀의 등에는 붉은 열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리네.”
남편의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 럽게 울렸다.
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부드럽 게 지압하며 올라온다.
근육이 풀리는 감각에 머리끝 이 쭈뼛거린다.
끙끙거리자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손이 견갑골을 눌렀다.
아리스티네는 가물거리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남편을 바라 보았다.
“괜찮아?”
타르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머리 위로 추욱 처진 귀 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시무룩한 연하 남편이 귀여울 법도 하건만,아리스티네의 눈빛은 뾰족해졌다.
타르칸이 서둘러 물었다.
“커피 마실래? 홍차랑 꿀차랑 오렌지 주스도 있어. 우유도 있으니까 넣고 싶으면 말해.”
아리스티네는 황제인 남편이 손수 가져온 베드 트레이를 바 라보았다.
어찌나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 아침에 아리스티네가 한 번이라 도 찾은 음료가 전부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의 눈초리는 풀리지 않았다.
타르칸이 아내의 눈치를 살피 며 허리 근육을 꾹꾹 눌러 주었다.
“입욕할래? 온도도 맞춰 놓았으니까 입욕제만 고르면 돼. 손 하나 까딱하지 마. 내가 다 씻겨 줄게.”
“그다음엔 마사지해 줄게.”
필사적인 남편의 말에도 아리 스티네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 웠다.
“내가……”
겨우 그녀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목소리가 완전히 다 갈라져 있었다.
타르칸이 얼른 물을 내밀었다.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아리 스티네가 타르칸을 노려보았다.
“내가 어제 그만하자고,몇 번 이나,몇 번이나……”
끝에 가서는 목소리가 벌벌 떨 렸다. 서럽고 원망스러웠다.
타르칸은 멈출 줄을 몰랐다.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죽을 뻔했다.
사인이 복하사라니 상상만으로 도 수치스럽고 창피했다.
“……하지만 결국엔 네가 ‘응’ 이라고……”
“그럼 그 상황에서 어떻게 싫다는 말이 나와!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였으면서!”
웅얼거리며 변명하는 타르칸의 모습에 아리스티네가 빽 소리를 질렀다.
괴로울 정도로 몰아붙이고,몰 아붙이고,몰아붙여서…….
타오르지도,꺼지지도 않는 불 씨에 결국에는 타르칸이 원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몸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남편은…… 연하라서 그런 건지,몸이 좋아서 그런 건 지 아니면 둘 다이기 때문인지 정말…… 절륜했다.
“미안.”
결국에는 타르칸의 입술에서 사과의 말이 나왔다.
“너무 좋아서 자제할 수 없었어”
아리스티네는 새초롬한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좋았다니까 또 마음이 사르르 르 풀어지려 했다.
분노가 가라앉자,남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운으로 대강 여미고 있는지라 탄탄한 가슴팍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그 발달된 대흉근에는 간밤의 흔적이 적나라했다.
입술 자국과 손자국으로 붉은 울혈이 얼룩덜룩한 것으로 모자 라 깨문 자국까지 보였다.
‘음……’
그걸 보고 나니 화낸 게 조금 미안해졌다.
따지고 보면 타르칸 혼자 즐긴 게 아니라 아리스티네 역시 함 께 즐기지 않았는가.
아리스티네는 착,하고 팔을 벌렸다.
타르칸이 냉큼 알아듣고 그녀 를 안아 올렸다.
“입욕하고 나면 좀 나아질 거야.”
그가 아내를 달래며 침실과 이 어진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품 안의 아내는 무게가 없는 것처럼 가벼웠다.
그는 항상 연 약한 아내가 걱정이었다.
물론 아리스티네는 실바누스인의 기준으로는 무척 체력이 좋은 편이었다.
‘마수 평원에 가서 약재를 구해 와야겠군.’
그러나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타르칸은 전설이라 불리는 영약 을 구해 오기로 결심했다.
‘……그럼 밤에도 좀 기운 나겠지.’
꼭 그것 때문에 구해 오겠다는 건 아니지만.
절대 아니지만.
그렇게 황제가 친정하는 마수 토벌이 급작스럽게 결정되었다.
황제 부부에게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빠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티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저절로 어깨가 굳었다.
“화,황자님,아직 아침인걸요. 폐하는 조금 이따 보셔요.”
“그래요, 황자님. 자아,이거 봐 보세요!”
유모와 궁인들이 어르는 소리 가 그 뒤를 따랐다.
하지 만 엄 마바라기 황자님이 궁인들의 장난감 유혹에 현혹될 리가 없다.
“으,우애,우애애앵!”
“오구오구,황자님, 뚝!”
“자아,황자님이 좋아하는 딸랑이예요!”
“으아아아아앙!”
악트시온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만 할 뿐,그칠 줄을 몰랐다.
굳은 채 문을 바라보던 아리스티네가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어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어,어쩌지?”
“타르칸 폐하께서 트레이 가지고 들어가신 지 꽤 되지 않았어요? 이미 욕실로 들어가셨을 것 같은데.”
“그럼 일단 방문을 열고 안 계신 걸一.”
“안 돼!”
아리스티네가 백 소리를 질렀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악트시 온이 울음을 그치고 “마아?” 하고 옹알거렸다.
“지, 지금은 안 돼……. 좀 이 따 들어와. 그리고 욕실로 가도 욕실까지 따라오려 할 거잖아!”
소중한 아기한테 이런 모습을 보일 순 없다.
“마아? 마아! 마아아아아아”
“아이고 황자님,그러다 떨어지셔요!”
“지, 진정하시고....”
엄마 목소리는 들리는데 엄마 가 보이지 않자 악트시온이 난리를 부리는 것 같았다.
“하아……”
한숨을 내쉰 타르칸이 아리스 티네를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 았다.
그리고 가운을 가져와 그녀에 게 입혀 주었다.
“칸?”
“어쩌겠어. 들여 줘야지.”
“지금 이 꼴로?”
“부모 사이가 좋을수록 아이에 게도 좋은 영향을 미친댔어.”
“그 사이 좋은 게 이런 걸 뜻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나 그렇게 소리칠 때는 이미 침실 문이 열린 뒤였다.
“마아마!”
울던 악트시온이 아리스티네를 보며 손을 뻗었다.
타르칸이 유모에게서 악트시온 을 받아 들고 문을 닫았다.
‘빠아!”
악트시온이 아빠의 품에서 꼬물거리며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붉은 자국이 가득한 가슴을 조그마한 아기 손이 만지는 것을 보고 아리스티네는 죽고 싶었다.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에게 악트시온을 넘겨주었다.
엄마를 보고 방긋방긋 웃는 아이를 보니 왠지 모를 죄책감과 수치심이 밀려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악트시온의 얼굴이 너무나 맑고 순진해 보 여서 더더욱.
괜히 타르칸을 노려보자 타르 칸이 픽 웃으며 아리스테의 입 에 과일을 넣어 주었다.
“뭐 어때,좋아하잖아.”
아무렇지 않은 남편의 모습에 아리스티네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항상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지.’
대체 이게 몇 번째인가.
악트시온이 쁠쁠거리면서 침대 위를 기어 다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리스티 네가 결국 픽 웃었다.
그래, 뭐 어떤가.
과일을 집어 입에 쏙 넣어 주자 오물오물하면서 잘 받아먹는다.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여느 날처럼 세 사람은 침대 위에서 아침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