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펠릭스 다우스[Felix Davus]
어깨에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유채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찢겼던 어깨는 깨끗한 붕대로 감싸여 있었다. 흐릿한 초점을 맞추었다. 화려한 천장이 보였다. 유채는 그나마 멀쩡한 왼쪽 팔로 침대를 짚으면서 일어섰다.
“일어났군.”
잘 알고 있는 낮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바로 옆에 증오스러운 남자인 루프스가 누워 있었다. 그의 청회색의 짐승의 눈이 유채를 담았다. 유채는 몸을 뒤로 빼려고 하였으나. 루프스(Lupus: 늑대 수인의 수장이자 수인들의 왕의 호칭)가 빨랐다. 루프스는 유채의 왼쪽 팔을 잡아당겨서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였다. 유채는 루프스의 가슴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루프스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유채의 목선을 쓸었다. 루프스의 손끝에 유채의 목에 걸려 있는 금색의 고리가 걸렸다.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재미?
유채는 실소를 터뜨렸다.
“당신한테는 사람 목숨이 오고가는 게 재미인가요?”
죽을 뻔했다. 자신과 블루벨 모두 끔찍하게 죽을 뻔하였다. 자신은 둘째 치고 블루벨이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남자의 변덕이 아니었으면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 암컷 토끼는 죽든지 살든지 내 알 바가 아니지만, 나는 내 펠릭스 다우스가 망가지도록 두지는 않아. 레티티아.”
유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람의 죽음과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듯이 구는 루프스의 오만함이 첫 번째 이유였고, 펠릭스 다우스가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멋대로 바꿔 부르고 자신의 목에 개 목걸이 같은 것을 걸어두고 사람을 제 소유의 물건인 양 다루는 루프스의 뻔뻔함이 두 번째 이유였다.
“난 레티티아가 아니라! 한유채예요! 그리고 난…… 아악!”
루프스가 아직 다 낫지 않은 유채의 오른쪽 어깨를 억센 손으로 눌렀다. 유채는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수그렸다.
“마레 위르(수인이 아닌 보통 인간)들은 말이야. 너무 오만방자해.”
유채의 어깨를 누르는 루프스의 손의 힘이 강해졌다. 유채는 너무 아파서 이제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 상처가 다시 터질 것 같았다.
“같잖은 자존심에 제 처지도 자각 못 하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지.”
루프스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유채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레티티아. 너처럼.”
루프스의 입꼬리가 비웃음을 품고 올라갔다. 유채의 어깨를 감싼 하얀 붕대에 핏방울이 번지기 시작했다.
“멍청하고 한심한 나의 레티티아에게 내 친절히 설명해 주자면 펠릭스 다우스는 나 루프스의 살아 있는 소유물을 뜻하지. 마레 위르의 말로 하자면…… 애완동물쯤 되겠군.”
루프스가 마치 개를 다루는 것처럼 유채의 턱을 만졌다. 보통 때였다면 유채는 굴욕적인 대우에 그의 손을 쳐 내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가 누르고 있는 어깨가 너무 아파서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그저 마지막 자존심으로 저 증오스러운 남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내가 너의 옷을 찢어발겨서 배를 맞추고 너를 품어도 아무도 무어라 할 수 없고, 내가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누구도 내게 뭐라 할 수 없지.”
꽤나 잔혹한 말이었다. 루프스는 눈을 곱게 접었다.
“나는 잔혹한 만큼 너그럽고 자애롭지. 나는 내 마음에 드는 펠릭스 다우스에게는 상을 내려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다. 레티티아.”
유채는 헛웃음을 뱉었다. 너그럽고 자애로워? 지금 다친 어깨를 누르고 있는 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결코 어울리는 말도 아니었다. 사람을 애완동물 취급하는 이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건방진 눈동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름지기 펠릭스 다우스는 제게 공포심을 가지고 복종해야 했다. 제 앞에 있는 암컷 마레 위르는 공포심은 차치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표독스러운 눈으로 제게 대들고 있었다.
건방져도 너무 건방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어깨를 더 강하게 눌렀다. 이미 어깨의 상처는 다시 터진 지 오래였다. 루프스의 악력에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붕대을 누르고 있는 루프스의 손끝에도 묻었다. 유채의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루프스의 입아귀가 비틀렸다. 역시 수인이나 마레 위르나 동물이나 맞아야 말을 잘 듣는다. 누군가를 복종시키는 데 폭력과 공포가 가장 효과적임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루프스는 유채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한없이 약한 암컷 마레 위르이지 않은가? 루프스는 유채의 다친 어깨를 쥐고 있는 손의 악력을 더 강하게 했다.
“아악!”
“그러니, 내게 아양을 떨어봐. 레티티아.”
마침내 유채의 입에서도 울음소리가 났다. 어깨의 고통이 참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유채의 입술에 피가 배어나오고 나서야 루프스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애완동물이면 애완동물답게 주인한테 꼬리도 흔들고 재롱도 부리고 아양도 떨어야지? 안 그래, 레티티아?”
루프스는 잔인한 말을 속삭였다. 유채는 어깨의 고통에 루프스의 말에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자신의 가슴팍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련한 레티티아. 미안하지만, 나는 우는 암컷은 별로 안 좋아해.”
루프스는 피가 배어나온 유채의 입술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나는 내 물건에 흠집이 나는 것도 싫어해.”
“……당신이 한 것이잖아.”
유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 남자의 장단에 놀아나기 싫었다. 자신은 저 남자의 애완동물도 아니고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짓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갑작스럽게 이 이상하고 요상한 세상에 떨어진 막 수능을 끝낸 평범한 여고생일 뿐이었다.
루프스는 아직도 고분고분해지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피를 끓게 하는 무언가는 오랜만이었다. 저 건방진 눈동자가 제 앞에서 유순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한 수인으로서의 정복감을 느끼고 싶었다. 저 건방진 암컷 마레 위르가 제게 복종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레티티아. 너는 복종하는 법부터 배워야겠군.”
루프스는 유채의 목에 걸려 있는 구속구를 손으로 쓸었다. 장수를 잡을 수 없을 때는 말을 쏘는 법이었다.
“레티티아. 네 시중을 들어주던 암컷 토끼. 이름이 블루…… 벨? 이었던가? 그 아이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있나?”
유채의 눈에 갑작스럽게 광채가 돌았다. 그러고 보니, 유채는 블루벨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지 못했다. 씨알도 안 먹히는 발악이라는 것을 알아도 유채는 루프스에게 소리쳤다.
“블루벨이 잘못되면……!”
“내 명을 어긴 그 건방진 암컷 토끼는 지금 지하 감옥에 있지, 춥고 더럽고 험한 곳에 말이야.”
루프스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덕분에 그의 몸 위에 있던 유채도 움직이게 되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상처가 터진 어깨는 욱신거렸다.
“약하디약한 토끼 일족은 그 지하 감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에는 죽겠지.”
“블루벨이 뭘 잘못했다고 그 애를 죽이려고 해!”
유채는 멀쩡한 왼쪽 팔로 루프스의 멱살을 잡았다. 블루벨은 저자의 명에 따라 삼 일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자신에게 물과 약간의 먹을 것을 가져다 준 잘못밖에는 없었다.
“여기 내 침실에서 머무르며, 나를 만족시켜 봐. 레티티아.”
루프스가 유채의 팔을 떼어내면서 속삭였다.
“재롱을 떨든, 애교를 피우든, 암컷인 것을 이용하든 상관없으니, 나의 펠릭스 다우스로서 주인인 나를 즐겁게 해봐. 그럼 그 암컷 토끼를 풀어주지.”
유채의 눈빛이 흔들렸다. 루프스는 그런 유채의 눈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결국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다. 저 건방진 암컷 마레 위르는 자신의 펠릭스 다우스로서 굴복할 것이다. 그가 키운 사나운 맹수들도 그에게 굴종했는데, 힘없는 암컷 마레 위르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건방진 눈을 도전적으로 바라보았다.
“어디 한번 애교를 떨어봐. 나의 귀여운 펠릭스 다우스 레티티아.”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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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늑대들의 땅, 토스 호무스[Thos Humus]
“아악!”
유채는 루프스가 방에서 나간 뒤. 아픈 어깨를 감싸 쥐고 큰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않고는 이 답답함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펑펑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운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언니와 야식을 먹기 위해서 치킨을 사러 밖에 나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이상한 세상에 떨어졌고 판타지 소설 속에서나 보던 늑대인간에게 애완동물 취급을 받게 되었다. 대관절 자신이 뭘 잘못했길래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솔직히 말해 유채는 평범하다면 한없이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삼학년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평범한 건 또 아니었다. 유채는 단지 조금 특이하게 생겼을 뿐인, 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유채의 어머니는 외국인이었다. 우크라이나계 혈통이 섞인 우즈베키스탄인이었다. 고아였던 그녀는 고아원에서 쫓겨난 뒤 일본에 일자리를 알선해 주겠다는 말에 한국까지 앞뒤 재어보지 않고 전 재산을 털어 날아왔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녀의 돈만 가로채 잠적했고,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식당의 단골이던 약사인 유채의 아버지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결혼하여 두 자매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어머니가 외국인이고 한국말이 어눌하다는 것은 두 자매의 학창시절을 조금 괴롭게 하긴 했지만 그렇다 하여 자매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란하기만 하던 가정에 위기가 찾아왔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언니 유하가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백혈병은 불치의 병도 아니지만 의대를 다니던 유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유하는 투병 생활을 시작했고 유채는 고3이 되었다. 수험 생활로 바빠 자주 문병갈 수 없다는 것이 미안했지만 언니는 괜찮다는 말로 유채를 위로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채는 외국인인 어머니와 백혈병을 앓고 있는 언니를 둔, 대한민국에 흔한 평범한 소녀였다.
유채가 기억하는 한국에서의 마지막은 수능이 끝나고 가채점 결과를 보고하러 병원에 갔던 날이었다. 유채는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의 의대에 다니는 유하만큼 공부를 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날 운이 좋았던 것인지 보통 때보다 점수가 무려 50점이나 높게 나왔고 언니만큼은 아니지만 서울의 이름 있는 유명 대학의 화학공학과에 지원할 수 있는 성적이 나왔다. 유채는 결과에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유하는 기분이 좋았던 유채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여, 치킨 사먹을 돈을 주었다. 병원에서 대놓고 치킨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유채는 밖으로 직접 사러 나갈 채비를 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유채는 술을 먹고 싶다 유하를 졸랐다. 유하는 수능 끝난 기념으로 술을 살 돈까지 주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유하는 유채에게 흔쾌히 주민등록증을 건네주었다. 유채와 유하는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매다 보니 비슷한 부분들이 많았다. 편의점 알바생이 유채의 얼굴과 유하의 주민등록증을 자세히 보지는 않을 테니 나이를 속일 목적으로는 적당한 방법이었다.
유채는 운 좋게도 피곤한 알바생과 언니 주민등록증의 도움으로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 치킨과 함께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유채가 기억하는 한국에서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유채가 어떻게 루프스의 펠릭스 다우스가 되고 어깨를 다쳤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유채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치킨을 사서 병원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넓적한 돌 같은 곳에 누워 있었다.
“악! 몸이 왜 이렇게 쑤시지.”
몸이 마치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쑤셨다. 유채는 속으로 욕을 하며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물렀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에! 여긴 어디야?”
콘크리트 건물과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는 온 데 간 데 없고 드넓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돌로 된 고인돌 같은 구조물들도 눈에 띄었다. 유채가 앉아 있는 곳도 마치 제단 같은 모양의 넙적한 돌이었다.
“스톤헨지인가?”
흡사 스톤헨지와 같아 보였다. 그러나 스톤헨지라고 하기에는 남아 있는 건물들의 모양이 비교적 온전했다. 그리고 이곳이 정말로 스톤헨지라 해도 문제였다. 무려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머나먼 영국 땅에 떨어졌다는 것만큼 어이없는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유채는 다급하게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액정이 왜 박살났지?”
휴대폰의 액정이 박살나 있었다. 매끈했던 표면에 자잘한 금이 잔뜩 생겼다. 누군가 힘을 주어 꾹 누른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유채는 휴대폰을 켜기 위해 깨진 액정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화면엔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거 왜 이래? 배터리가 나간 건가?”
유채는 휴대폰을 두드리다가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불빛이 나면서 배터리가 없다는 표시가 떴다. 유채는 분명 병원에 언니를 보러 가기 전까지만 해도 충분했던 배터리가 잠깐 사이에 나가 버렸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설마 배터리가 공중방전 될 때까지 이곳에 누워 있었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았다.
유채는 욱신거리는 다리를 움직여서 넙적한 바위에서 내려왔다. 늦가을답게 찬바람이 불었다. 유채는 코트를 여몄다. 주위를 둘러봐도 허허벌판이었다. 사람 사는 흔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일단 사람부터 찾자고. 그래야 여기가 어딘지도 알고 집으로도 돌아갈 길을 발견하지.”
여기가 한국인지, 영국인지, 아니면 세계 어딘가에 있는 다른 나라인지 일단은 사람을 만나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채는 일단 이곳이 어디든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무턱대고 움직이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나 어차피 주저앉아 있어봤자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거기 누구냐!”
유채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에 몸을 곧바로 세웠다.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분명,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제가 아는 언어가 아님에도 마치 한국어로 말한 듯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영어도 유창하게 못하는 유채에게는 처음 듣는 언어를 모국어처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유채의 등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꺄악!”
유채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땅으로 주저앉았다. 머리 위로는 여우의 것과 같은 뾰족한 귀가, 허리 옆으로는 털이 북슬북슬한 꼬리 같은 것이 붙은 거대한 남자들의 실루엣이었다. 유채는 벌벌 떨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분명 어떤 고약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변장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믿으면서. 주토피아나 이누야샤 코스프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채는 코스프레라기엔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날 때부터 그렇게 생긴 사람이었다. 한 명은 코와 입이 여우의 그것과 같았고 다른 한 명은 사람의 얼굴이되 머리에는 여우의 귀가, 엉덩이에는 꼬리가 달려 있었다. 게다가 눈마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짐승의 것과 같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유채는 몸을 벌벌 떨면서 제 팔을 꼬집었다.
“아악!”
꼬집은 팔이 아팠다. 여우 주둥이의 남자가 유채의 얼굴에 들고 있는 횃불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유채는 뜨거움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뺐다.
“야! 이거 마레 위르(Mare Vir: 수인이 아닌 일반 인간을 지칭하는 말) 아니야?”
마레 위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어투가 심하게 험악하다는 것에 유채는 그것이 좋은 뜻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맞네. 좀 다르게 생겼어도 마레 위르네.”
또 다른 남자가 유채의 머리채를 잡아채면서 말했다. 유채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할퀴었다.
“꺄악!”
유채는 몸을 버둥거리면서 제 머리채를 움켜쥔 남자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남자가 소리를 비명을 지르면서 유채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유채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에게 손목을 물어뜯긴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내리쳤다.
짝!
엄청난 힘이었다. 그 한 번의 휘두름에 유채의 볼은 붉게 부어오르다 못해 핏기까지 비쳤다. 입안에 피 맛이 돌았다. 한 번도 남자에게 맞아본 적이 없는 유채는 그 엄청난 힘에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어안이 벙벙해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이 미친! 감히 천한 마레 위르 주제에 신성한 에클레시아(Ecclesia)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나를 물어?”
남자가 유채의 머리채를 잡고 몸을 들어 올렸다. 유채는 남자의 손을 손톱으로 할퀴며 저항했다. 하지만 억센 손은 아무리 유채가 애를 써봐도 풀리지 않았다. 유채는 남자의 마치 여우의 이빨 같은 송곳니를 보았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마치 판타지 소설 속에나 나오는 수인족 같았다. 여우의 주둥이를 가진 남자가 유채의 턱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유채는 턱이 아파 비명을 내뱉었다.
“악!”
“야. 이 암컷 제법 반반한데?”
남자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유채를 훑어 내렸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그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해 보였다. 요즘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그의 눈에 곧 죽을 목숨인 암컷 마레 위르는 달콤한 과일과 같았다. 암컷 마레 위르는 하늘에서 떨어진 여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미모였다. 게다가 허리가 얇실한 것이 조임이 상당할 것 같았다. 작고 붉은 입술이 제 것을 물고 있는 것을 상상하자 온몸이 떨렸다.
유채는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남자가 저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이런 상황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바보였다. 대관절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상한 곳에 떨어져서 이 이상한 남자들에게 강간당할 위기에까지 놓여야 하는 것일까.
“당장 안 놔! 당신들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야! 이 미친 새끼들아!”
유채는 씨알도 안 먹힐 발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반항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우리한테 봉사 한번 하고 가게 하는 건 어때?”
여우 주둥이의 남자가 진득한 욕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채는 남자의 말에 소름이 돋았지만 마지막 자존심으로 울지 않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유채는 반항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편이 이 위기에서 벗어날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유채의 반항이 가소로운 것인지 비웃음을 흘리면서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유채는 머리가 뽑히는 것 같은 아픔에 괴로워했다.
“야. 네가 먼저 할 거냐?”
비교적 사람에 가까운 모습을 한 남자가 여우 주둥이 남자에게 물었다. 여우 주둥이 남자의 손가락이 유채의 턱에서 목으로 쓸고 내려갔다. 유채는 겁에 질려 뻣뻣하게 굳었다. 그 손이 가슴을 노골적으로 더듬자 그제야 유채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손으로 저를 붙잡은 남자의 얼굴을 할퀴려고 하자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가 이번에는 그녀의 양 팔목을 우악스럽게 잡고 뒤로 꺾었다. 유채는 관절이 꺾이는 아픔에 크게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뭐, 내가 아랫구멍을 맡고 네가 윗구멍을 맡으면 되지 않겠어?”
“다음엔 반대로 하고?”
둘은 킥킥 웃으며 눈짓을 교환한 다음 유채의 몸을 바위 위에 눕혔다. 여우 주둥이의 남자가 유채의 다리를 잡아 벌려 자신의 다리로 눌러 고정시켰다. 또 다른 남자는 유채의 반항을 막으려 그녀의 양손을 머리 위로 눌렀다. 여우 주둥이 남자가 유채의 바지를 벗기기 위해서 그녀의 허리를 잡고 바지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참 요상한 옷이야. 요즘 암컷 마레 위르는 이런 옷을 입나?”
여우 주둥이의 남자가 유채의 청바지를 벗기며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들아! 그만하라고! 그만해! 너희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유채는 악을 썼다. 두 남자에게 눌린 몸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제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여우 주둥이를 한 남자가 낄낄낄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유채의 바지를 허벅지까지 벗겼다. 맨살에 찬 공기가 닿자 유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남자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그녀의 허벅지를 매만졌다. 여우의 것과 같은 주둥이가 살갗에 닿고 개의 혀 같은 것이 맨살에 닿은 끔찍한 느낌에 유채는 비명을 질렀다. 벌레가 수십 마리 기어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하는 짓들이냐!”
남자가 유채의 속옷을 벗기려 할 때,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남자들이 화들짝 놀라서 유채의 몸에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내가 빛에 대해 알아보라고 시켰지, 계집질을 하라고 했느냐?”
“아닙니다. 울페스(Vulpes: 여우 수인 일족의 수장을 지칭)님. 저희는 그저 신성한 에클레시아에 침입한 마레 위르를 잡았을 뿐입니다.”
유채는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남자들에게서 풀려난 유채는 얼른 몸을 추슬렀다.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추켜올리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 남자들이 여자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도망쳐야 했다. 유채는 주위를 둘러보고 여자와 남자들이 서 있는 반대쪽으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레 위르가 에클레시아에 들어와? 말이 되는 소리냐?”
울페스(Vulpes) 헤르티아가 역정을 내면서 유채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기 도망가는 암컷은 꼬리도 없고 귀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발볼록살이나 발굽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얼핏 봐도 마레 위르였다. 분명 마레 위르들은 해안가에 모여 사는데, 어찌 수인들의 땅 깊숙한 곳에 위치한 에클레시아까지 들어온 것일까?
“간니오. 잡아와.”
헤르티아가 명령을 내리자 한쪽 무릎을 꿇고 읍하고 있던 여우 주둥이의 남자, 간니오가 움직였다. 간니오는 거대한 붉은 여우로 변해 헐레벌떡 달려가고 있는 유채를 뒤에서 덮쳤다.
“꺄악!”
유채는 제 등을 누르는 강한 힘에 앞으로 엎어졌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에 배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유채는 비명을 삼키며 겨우 고개를 돌렸다.
“세, 세상에.”
보통의 여우보다 몇 배는 큰 것 같은 붉은 여우가 한 발로 제 등을 누르고 있었다.
[울페스 헤르티아님이 널 보자고 하신다.]
유채는 머릿속에 들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아까 보았던 그 여우 주둥이의 남자의 목소리란 걸 깨달았다.
간니오는 덜덜 떠는 유채를 주둥이로 다치지 않게 물고 헤르티아에게 달려갔다. 유채는 부지불식간에 헤르티아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간니오가 다시 여우 주둥이를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유채는 제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여우 주둥이를 한 남자가 여우로 변했다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헤르티아가 유채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정말. 암컷 마레 위르구나. 어떻게 이곳까지 발각되지 않고 들어올 수 있던 것이지?”
대답을 바라고 건넨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유채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그래도 비교적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물론 엉덩이 뒤에서 살랑대는 여우 꼬리와 사람의 눈이 아닌 여우의 눈과 짐승의 송곳니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한데, 생긴 것이 이상하네. 분명 마레 위르인데, 마레 위르치곤 생김새가 달라. 이국(異國)적이랄까?”
유채는 마치 자신을 동물 보듯이 쳐다보는 헤르티아의 손을 쳐 냈다.
“당신네들이 말하는 마레 위르가 무엇인진 모르겠는데, 난 마레 위르가 아니야! 그리고 당신들 내가…… 컥……!”
헤르티아가 유채의 목을 움켜쥐었다. 유채는 숨이 막혔다. 여자의 악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헤르티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자상하게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아까 그 두 남자보다 유채에게는 더 무섭게 느껴졌다.
“건방지고 주제모르는 불쌍하고 멍청한 암컷 마레 위르.”
헤르티아는 이국(異國)적으로 생긴 이 암컷 마레 위르가 바다를 건너서 막 수인들의 땅인 스티폴로르(Stipulor)에 도착한 것이라 유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건방지고 겁을 상실한 것과 같은 반응이 나올 수 없었다. 헤르티아는 하얗게 질린 유채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는 이미 우리들의 땅을 침범한 죄로 죽어도 상관없는 암컷이지. 지금 네게 흥미를 느껴서 너를 살려둘 것인지 살리지 않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 차에 그렇게 건방지게 굴면 내가 무슨 선택을 해야 할까?”
말은 상냥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상냥하지 않았다. 유채는 숨이 막혀 이제는 정신이 흐릿할 정도였다. 산소가 부족해진 유채는 손가락으로 헤르티아의 손을 긁는 마지막 반항 끝에 정신을 잃었다.
유채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제야 헤르티아는 유채의 목을 틀어쥔 손을 놓았다. 유채의 몸이 무너지듯이 땅에 떨어졌다.
“죽었습니까?”
생김새가 사람과 비슷했던 여우 수인이 물었다. 헤르티아는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잃은 것뿐이다. 약하디약한 암컷 마레 위르일 뿐이니.”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빙 돌리던 헤르티아는 손을 들어서 볼프와 간니오의 얼굴을 내리쳤다. 간니오와 볼프의 몸이 휘청거렸다. 둘의 볼이 길게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내가 너희에게 보고를 하라고 했는데. 그 명령은 어디다 팔아먹은 것이냐! 너희는 내가 우습더냐!”
“아닙니다, 울페스님. 저희가 실수했습니다.”
울페스란 호칭은 여우 수인 중 가장 강한 이가 받을 수 있었다. 볼프와 간니오는 헤르티아가 내뱉는 살기에 몸을 떨었다.
“하나만 묻자꾸나. 갑자기 에클레시아에 빛기둥이 나타난 뒤, 그곳에 있던 것이 저 암컷 마레 위르뿐이냐?”
“저희가 찾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간니오가 대답했다. 헤르티아는 턱을 쓸었다. 그리고 제 앞에 쓰러져 있는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에클레시아에 나타난 빛기둥 다음에 발견된 암컷 마레 위르라,
“저 암컷 마레 위르를 데려와라.”
헤르티아가 유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암컷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
헤르티아는 막사 안에 앉아 루프스(Lupus:늑대 수인의 수장이자, 수인들의 왕을 지칭)에게 바칠 공물과 탄신일 선물인 진상품들을 흉물스럽게 쏘아보았다. 헤르티아는 이를 갈았다. 제 오라비를 죽인 원수였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늑대 수인이었다. 헤르티아는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서 팔걸이를 긁었다.
수인 내전에서 먼저 죄를 범한 것은 전대 루프스이자 현 루프스의 아버지인 로보였다. 별다를 것 없이 평안히 살고 있던 여우 수인 일족의 땅인 울피누스 호무스(Vulpinus Humus)를 침범하고 들어와 전대 울페스이자 헤르티아의 오빠인 베니니타스의 부인인 라일라와 그의 아들들을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라일라를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던 베니니타스는 분노했다. 베니니타스는 늑대 수인 일족을 무너뜨리기 위한 내전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전대 루프스인 로보의 부인인 블랑카를 처참하게 죽였다. 본디 태어나기를 애처가인 늑대 수인답게 로보는 아내의 죽음에 분노했다. 로보는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었고 역시나 아직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던 베니니타스에게 달려들었다. 결과는 로보의 패배였다.
여우 수인 일족은 수인족의 패권을 잡았으나 늑대 일족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내전은 삼 년간 지속됐다. 그리고 그 내전을 종식시키고 루프스에 오른 이가 현 루프스이자 로보의 아들인 라이칸이었다. 라이칸은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나이로 분열된 늑대 수인 일족을 압도적인 힘으로 통합하고 수인의 왕으로 군림하던 베니니타스의 숨통을 끊었다.
“썩을. 루프스.”
헤르티아는 이를 갈았다. 베니니타스는 좋은 남편이었고 좋은 오빠였고 좋은 아빠였으며 좋은 지도자였다. 그 평화를 아무런 이유 없이 짓밟은 것은 당시 루프스였던 로보였다. 지금 여우 수인들에게 그들의 태도는 적반하장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먼저 그들을 도발했는가는 명백했다.
헤르티아는 베니니타스가 죽던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열여섯의 루프스가 이빨로 베니니타스의 숨통을 끊었다. 몸과 분리된 베니니타스의 머리가 땅 위를 굴렀다. 그리고 그 싸늘한 청회안으로 제 승리를 담담하게 선언했다. 헤르티아는 그 고요한 광기가 돌던 청회안과 오빠의 사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헤르티아는 제 자신의 강력함을 증명함으로써 분열된 여우 수인 일족을 다시 통합했다. 그리고 루프스 앞에 납작 엎드렸다. 다시 도약하여 그의 목을 물어뜯기 위한 발판이었다. 때로는 전진을 위해서 후퇴가 필요했다.
“울페스님. 저 암컷은 어떡할까요?”
헤르티아의 시중을 들던 아이가 물었다. 간니오와 볼프가 데려온 정체 모를 암컷 마레 위르는 바닥에 형편없이 엎어져 있었다. 혹시 몰라서 마레 위르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고 손과 발을 묶어놓았다. 헤르티아는 마레 위르 암컷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조사해 보았다. 처음 보는 요상한 물건들이 있었다. 표면에 잔뜩 금이 간 직사각형의 검은 거울처럼 생긴 것, 녹색과 파란색의 종이가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를 비롯해 정체조차 모를 물건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입은 복장도 요상했다. 다리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청색의 질긴 직물의 바지에 어떻게 저런 색으로 염색을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될 정도로의 꽤나 세세한 색의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신발도 검은 가죽으로 된 높은 굽이 달려 있었다.
“글쎄. 아까 행동하는 걸 보니 여기 오래 산 마레 위르는 아니고. 빛기둥이 나타난 뒤에 나타난 암컷인데, 그렇다고 성흔(聖痕) 같은 건 없고.”
헤르티아가 입가를 쓸었다. 셀레네님의 신전이었던 에클레시아에서 나타났다 하여, 혹 신께서 보낸 성녀인가 싶었지만 성흔(聖痕)도 없었다. 그냥, 좀 이국적으로 생기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겁을 상실한 암컷 마레 위르였다.
“어디 돈 받고 구경이라도…….”
헤르티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헤르티아의 눈이 옆에 쌓아놓은 진상품들로 향했다. 루프스 따위에게 여우 수인 일족의 귀중한 보물들을 줄 수는 없었다. 마침 더 진귀한 것도 생겼고, 루프스는 제 정복욕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큰 상자를 가져와라.”
“예?”
“저기, 진상품으로 가져왔던 것들은 가지고 울피누스 호무스로 돌아가라.”
“그럼. 선물은 어떻게 하시고요?”
헤르티아가 웃으면서 유채를 가리켰다.
“저걸 루프스에게 펠릭스 다우스로 진상할 것이다.”
* * *
유채는 몸의 흔들거림을 느꼈다. 눈을 떠도 시야가 어두웠다. 유채는 손을 움직이려 했다.
“우웁.”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손을 움직이려 했는데 손목도 묶여 있고 발목에도 밧줄이 묶여 있었다. 유채는 몸을 움직였다. 좁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여기저기 부딪쳤다. 게다가 누군가 제 머리에 망태기 같은 것을 씌워놓은 것처럼 눈앞도 깜깜하고 얼굴도 답답했다.
마치 가마에 탄 것처럼 몸이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흔들림이 멈췄다. 그리고 아까 자신의 목을 졸랐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들의 왕이신 루프스시여.”
헤르티아가 늑대 수인 일족의 왕이자 모든 수인의 왕인 루프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붉은 꼬리가 살랑거렸다. 루프스는 삐딱하게 앉아서 턱을 괴고 헤르티아의 인사를 받았다. 헤르티아는 루프스의 앞에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탄신을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헤르티아.”
“아닙니다. 저희는 루프스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긴 네년의 오라비가 내 아버지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그대들이 먼 촌구석으로 쫓겨나는 일도 없었겠지.”
주위에 있던 늑대들이 그 말에 모두 사절로 온 여우 수인 일족을 비웃었다.
헤르티아는 이를 갈았다. 천박하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늑대들이었다.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그저 수가 많아 수인들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늑대들은 지나치게 오만 방자했다. 잔학하고 오만한 루프스는 지배자의 위치에 어울리지 않았다.
헤르티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먹을 쥐면서 간신히 갈무리 했다. 지금은 다음을 위해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저 거만한 루프스의 목을 잘라서 땅바닥에 구르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굴욕은 참아야 했다.
“그래서 저희도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루프스께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서 진상품을 가져왔습니다.”
헤르티아의 뒤에 서 있던 거구의 두 남자가 거대한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급작스럽게 준비된 것인지 포장이 꽤나 엉성하였다. 그리고 격식에도 맞지 않았다. 루프스에게 진상되는 선물은 금박을 두른 포장지로 감싸고 은박으로 늑대 수인 일족의 문장을 새겨 넣은 끈으로 묶어야 했다. 하지만 헤르티아의 선물의 경우는 끈은 격식에 맞았으나 포장지에는 금박이 없었다. 늑대 수인 일족은 이것을 무례라고 생각하였는지 으르렁거렸다.
사실, 갑작스럽게 준비된 선물이라 헤르티아에게 격식에 맞는 포장지가 없기도 했다. 아니, 그런 이유가 없더라도 헤르티아는 루프스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걱정하는 수하들에게 지금처럼 포장하라 명을 내렸었다.
루프스의 측근 중 하나인 케릭스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울페스 헤르티아. 너는 우리들의 왕인 루프스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어찌 그렇게 예의 없는 선물을 감히 내놓느냐. 너희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누구더냐!”
헤르티아는 곱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머리에 든 건 근육밖에 없는 멍청한 케릭스였다. 그 멍청한 머리로 루프스에게 절대적인 충정을 맹세하고 꼬리를 흔드는 개 같은 놈이었다.
“저희는 루프스를 능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도 이 선물을 급작스럽게 준비할 수밖에 없어 차마 예의를 차릴 수 없었던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선물이.”
주위의 으르렁거림에도 입을 다물고 있던 루프스가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좌중이 공포에 질려서 침묵에 휩싸였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너희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헤르티아는 오금이 저렸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지금의 루프스는 그 자리에 꼭 어울리는 자였다.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함으로 루프스가 되었으며 모든 수인의 왕이 되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음에 쏙 드실 것입니다.”
헤르티아가 눈짓으로 뒤에 선 수하에게 명을 내렸다. 그들은 상자를 위로 들어서 벗겨내었다. “세상에! 저건!”
주위에 모여 있는 모든 수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건 마레 위르가 아닌가!”
케릭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양손이 뒤로 묶이고 얼굴에는 검은 망태를 씌어놓은 마레 위르가 있었다. 하지만 그자가 입은 복장이 조금 희한하였다. 단언컨대 이 스트폴로르를 통틀어서 그런 복장을 한 수인이나 마레 위르는 없을 것이었다. 늑대 수인 일족 모두가 그 괴상한 차림새의 마레 위르를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그동안 진상되던 선물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루프스도 흥미를 표했다.
“신기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헤르티아가 눈짓을 하자 간니오가 거칠게 마레 위르의 얼굴에 씌어져 있는 망태를 벗겼다.
“세상에.”
드러난 마레 위르의 얼굴은 신비로웠다. 일반적으로 마레 위르와 수인족의 위르형(수인들의 인간 형태를 지칭하는 말)은 생김새가 비슷했다. 수인의 외모에 동물적 특징이 드러나는 것을 제외하면 큰 위화감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헤르티아가 데려온 마레 위르는 그들과 분위기도 다르고 얼굴 생김도 달랐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 같은 아름다움이 수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새까만 밤하늘 같은 검은 눈과 고운 흑색의 비단 같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고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행색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이곳의 그 누구도 범접할 수없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헤르티아는 신기해하는 수인들을 돌아보고 회심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감히 위대한 루프스님을 몰라보고 오만방자하게 날뛰어 우리 수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 마레 위르들이 아닙니까. 우리 해안을 불법점거하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의 위대함을, 루프스의 위대함을 이 마레 위르를 펠릭스 다우스로 삼으시어 보여주십시오.”
펠릭스 다우스(Felix Davus).
루프스의 소유물, 그중에서도 살아 있는 소유물을 의미했다. 쉽게 말해 애완동물의 의미였다.
헤르티아는 입꼬리를 곱게 접었다. 수인들의 법률상 수인은 펠릭스 다우스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마레 위르는 달랐다. 법에는 마레 위르를 펠릭스 다우스로 들일 수 없다는 조항이 없었다. 마레 위르와의 오랜 전쟁에서 비롯된 증오로 수인들은 마레 위르를 그들과 동등하지 않은 아래 지위로 법에 명문화하였다. 헤르티아가 노린 것이 이것이었다.
수인들과 똑같이 이지를 가졌으나, 수인과 법적으로 동등하지 않기에 마레 위르는 펠릭스 다우스가 될 수 있었다. 마레 위르에게 원한이 깊은 수인들은 저들이 증오하는 마레 위르에게 굴욕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반발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헤르티아의 예상대로 주위가 술렁거리면서 호전적인 그들에게서 긍정적 반응이 터져 나왔다. 원래부터 이곳에 살던 수인족과 대륙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마레 위르들 사이의 반목은 뿌리가 깊었다. 루프스가 마레 위르를 펠릭스 다우스로 삼는다면, 마레 위르가 그의 애완동물이 된다면 결국은 그들의 노예가 된다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글로리아 루프스!”
여기저기서 루프스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편, 입이 막힌 터라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유채는 마레 위르가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저들은 마레 위르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유채는 손발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처음 보았을 때 깜짝 놀랐던 남자들처럼 동물의 특성이 외양에 남은 사람들이 연회장 같은 곳에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서도 늑대의 생김새를 닮은 이들이 가장 많았다. 늑대의 꼬리에 늑대의 귀, 늑대의 주둥이, 늑대의 팔다리를 가진 이들이 한가득이었다.
거기다 좀 더 주위를 둘러보니, 토끼, 사슴, 소, 말 등 온갖 동물들의 모습이 섞인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동물원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기분이었다.
거기다 펠릭스 다우스란 이상한 단어도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 분위기로 봐선 제게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유채는 불안하게 주위를 훑던 눈으로 저를 계속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고운 은발을 늘어뜨린, 스물 초반으로 보이는 조각 같은 미남이었다. 충분히 남자다웠지만, 미소년다운 모습도 있었다. 동물 모습이 섞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정말 사람 같아 보였다. 그에게서는 동물의 꼬리나 귀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외부 활동이 많은 것인지 조금 그을린 피부였고 헐렁한 바지를 아슬아슬하게 허리에 걸치고 있었다. 웃옷은 단추를 잠그지 않고 그냥 걸쳐 입기만 해 탄탄하게 잡힌 가슴 근육과 복근이 다 보였다. 이 이상한 곳에서 유일하게 저와 같은 완전한 인간인 것 같은 그를 보면서 유채는 이유 모를 위화감에 몸을 떨었다.
남자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는 상당한 장신이었다. 남자가 단상을 밟고 내려오자 유채는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마레 위르라고?”
“예. 루프스. 제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 발견한 오만방자한 마레 위르입니다.”
루프스는 벌벌 떠는 유채의 턱을 움켜잡았다. 어찌나 우악스러운 손길인지, 턱이 저릿하게 아플 정도라 유채는 고개를 한껏 젖힌 채로 루프스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제야 유채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청회색의 늑대의 눈을 가졌다. 그가 말을 하자 보이는 것도 늑대의 날카로운 송곳니였다.
유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정도가 다를 뿐이지 저자 역시 이 주위에 많고 많은 이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암컷인가?”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노골적인 시선으로 유채의 몸을 훑었다. 유채는 떨기만 할 뿐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몸이 딱 굳어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생김새며 몸매가 가는 것이 암컷 같아 보이기는 하는데.”
유채는 루프스의 낮은 음성에 몸을 움츠렸다. 루프스가 유채의 턱을 잡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볼에서 목까지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유채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확인을 해봐야 확실하겠군.”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셔츠 앞섶을 움켜잡았다. 유채가 그 의도를 눈치채고 몸을 흔들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턱을 강하게 움켜잡은 것으로 그녀의 반항을 막았다. 유채가 턱의 아픔으로 몸을 움츠릴 때, 루프스의 손이 그녀의 셔츠를 확 잡아 뜯었다.
투두둑.
단추가 우수수 떨어지고 셔츠가 벌어졌다. 깜짝 놀란 유채는 옷을 수습하고 싶었으나 손목이 등 뒤로 묶여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셔츠 안에 반팔 티셔츠를 입었기에 맨몸이 드러날 뻔한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루프스는 마치 품평하듯이 노골적인 눈빛으로 유채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에 유채는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재갈이 막혀 그 소리는 그저 웅얼거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유채의 얼굴이 수치심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눈물만은 참고 있었다.
“가슴이 아직 덜 여문 젖비린내 나는 마레 위르 암컷이군.”
루프스가 유채의 턱을 내던지듯이 놓았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유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루프스를 올려다보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건방진 눈빛에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그는 무릎을 굽혀 마치 강아지를 다루는 양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간질였다.
“길들일 맛이 나는 암컷이군. 하지만 이리 반항적이어서야, 주제도 모르고 주인을 물겠구나.”
주위에서 비웃는 듯한 소리가 났다. 헤르티아는 곱게 웃으면서 루프스에게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반항적인 암컷이 내 발 아래에 얌전하게 복종하는 것만큼 큰 즐거움이 없지.”
긍정의 의미였다.
“너희의 무례를 내 너그럽게 용서하지, 여태껏 가져온 것 중 최고의 선물이다.”
루프스는 유채가 마치 개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프스는 자신과 같이 내려온 사슴 일족의 궁녀에게 명을 내렸다.
“파렌티아(Parentia: 펠릭스 다우스에게 채우는 구속구)를 가져와라.”
사슴의 뿔과 귀, 사슴의 코 그리고 발굽을 가진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물러났다. 루프스는 유채의 생김새를 살폈다. 이 암컷은 여태껏 봤던 암컷 마레 위르 중 가장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가졌다. 실력 있는 화가가 그린 최상의 명작을 보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하얀 피부에 자리 잡은 붉은 입술이 유혹적이었다. 루프스는 재갈을 문 유채의 입술을 살살 쓸었다.
약하디약한 암컷 마레 위르다. 채찍과 당근으로 적당히 길들여 저 입술에서는 제가 시키는 말만 뱉게 할 것이며, 저 붉은 입술로 아양을 떨게 할 것이었다. 이 암컷을 길들이는 것은 무료한 일상에 큰 즐거움이 될 것 같았다. 암컷의 몸에 크게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었으나, 제 아래 깔린 이 암컷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렌티아입니다.”
유채의 눈에 마치 개 목걸이처럼 생긴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목줄만 안 달렸지 생김새가 딱 황금으로 만든 개 목걸이였다. 중앙에는 장식인지 알이 굵은 하늘색의 보석이 달려 있었다.
루프스가 파렌티아의 고리를 열고 유채의 목을 잡아채었다.
“이제부터 너는 내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를 자신의 소유물로 선언했다. 유채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펠릭스 다우스가 뭔지는 모르지만 노예, 혹은 그보다 더 못한 존재를 뜻하는 말 같았다. 유채는 제 앞에 신이 있다면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수인들의 환호성과 함께 루프스는 유채의 목에 파렌티아를 걸었다.
철컥. 자물쇠가 걸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렸다. 금색의 구속구가 유채의 목에 채워졌다. 루프스가 손끝으로 가운데에 매달린 보석을 매만졌다.
“내 펠릭스 다우스가 되었으니 이름이 필요하겠구나.”
루프스는 유채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너는 내 펠릭스 다우스인 레티티아(Laetitia)다.”
루프스의 아름다운 미소가 유채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을 공포스러운 그림처럼 보였다.
* * *
유채는 목에 걸린 파렌티아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파렌티아는 그녀의 목을 조르기만 할 뿐 결코 풀리지 않았다. 유채는 허탈하게 한숨을 뱉었다.
“하.”
그 루프스란 남자가 자신의 목에 이것을 걸자마자 유채는 그의 주변에 있던 사슴과 다람쥐를 닮은 여자들에게 끌려나왔다. 유채는 반항하려 했지만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도 더 센 것 같은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욕실에 도착한 후에 그들은 유채의 손목과 발목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지만 입에 물린 재갈만은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거친 손으로 유채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유채는 따뜻한 물이 든 욕탕으로 집어넣어졌다.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겼지만 유채는 느긋하게 그것을 감상할 새가 없었다. 그들은 유채를 깨끗하게 씻겼다. 그것이 마치 사극에서 보던, 후궁들이 황제의 침소에 들어가기 전에 하는 꽃단장 같아서 불안했다. 씻고 난 후에는 몸에 장미향이 나는 향유까지 바르게 되었고 그 후에야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동양과 서양의 복식이 섞인 듯한 하얀 드레스로 갈아입자마자 그들은 또 유채를 우악스럽게 끌고 거울 앞에 앉혔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 윤기가 흐르게 하고 왼쪽 머리카락을 한 줌 잡아서 보랏빛이 도는 천과 함께 땋아 내렸다
그들은 유채를 다시 호화롭게 장식된 작은 방에 밀어 넣고는 재갈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모두 방을 나가 버렸다. 방문의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에 유채는 얼른 달려가 문을 두드리고 문고리를 잡아 당겼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유채는 포기하고 문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젠장. 젠장!”
유채는 무릎을 세워서 얼굴을 묻었다. 작은 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침대였다. 권력자인 듯한 남자, 그가 선택한 포로로 잡힌 여자. 여자는 깨끗하게 씻긴 데다 단장까지 한 후에 갇혔고 그 방에는 침대가 있다. 이 다음에 벌어질 일이 뻔했다. 여우를 닮은 두 남자에게 범해질 뻔한 것을 피한 줄 알았는데, 결국은 또 다른 남자의 손에 떨어질 운명이었던 것이다. 유채는 주먹을 말아 쥐고 바닥을 내리쳤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자신은 그저, 야식을 사러 나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판타지 소설 속에서나 보았던 수인들의 세상에 떨어져서 뺨을 얻어맞고 성폭행까지 당할 뻔했다. 거기다 성노예 비슷한 것까지 되었다. 유채는 자신이 무결하게 착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해는 끼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왜 이런 최악의 상황이 제게 펼쳐진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호랑이 굴에 떨어져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였다. 어쩌면, 어쩌면 루프스란 남자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힘없이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방 어딘가에 문을 열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있을지 몰랐다. 유채는 얇은 철사 같은 것, 아니면 날카로운 날붙이라도 찾았다. 언제 루프스가 들어올지 몰라서 신경을 곤두세운 채 선반이나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물건을 훑었다.
철컥. 그때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탁자에 있는 물건 아무거나 손에 들고 등 뒤로 감추었다. 문이 열리고 은발의 남자가 들어왔다.
“레티티아.”
유채는 팔을 벌리고 제게 다가오는 루프스를 피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가까이. 유채는 등 뒤에 숨긴 물건을 꽉 틀어쥐었다. 루프스는 점점 가까워졌고, 유채는 온몸에 힘을 준 채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손에 쥔 물건이 유용했으면 좋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뒤꿈치가 벽에 닿자 유채는 땀이 배어나오는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루프스는 손을 들어서 유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요상한 옷을 벗기고 보니 얼굴이 사네. 레티티아.”
루프스는 기대 이상의 외모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궁녀들이 꾸며놓은 모양새가 자신의 취향이었다. 숱이 많은 속눈썹과 검은 머리카락은 조신하고 신비로워 보였고 그와 대비되게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은 퇴폐적이고 색정적인 분위기를 냈다. 거기에 장미향은 그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루프스는 유채가 등 뒤에 숨기고 있는 손을 보았다. 보나마나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누구보다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유채는 사나운 맹수의 눈을 하고 있었다.
“아아. 레티티아.”
루프스는 유채의 팔목을 움켜쥐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악!”
손목을 잡아챈 힘에 유채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던 물건도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강, 소리를 냈다.
루프스는 레티티아의 손목을 잡은 채로 은촛대를 들어올렸다.
“네게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지. 그렇지 않나? 레티티아.”
제 의도를 간파당했다는 것에 입술을 깨물며 유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치켜떴다.
“난 정당방위예요!”
유채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잘못을 한 것이 없으니 변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정당방위?”
“난 당신 물건도 아니고 레티티아도 아니에요. 내 이름은 한유채라고요. 지금 당신들이 저지른 범죄가 몇 개나 되는 줄……!”
유채는 목소리가 떨리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앞에 있는 남자의 위압감이 너무 컸다.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목을 잡았다. 힘을 준 것도 아니고 그저 매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유채는 헤르티아에게 목이 졸렸던 기억으로 몸이 굳었다.
루프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네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은데, 꽤나 곱구나. 종달새 같다고 해야 하나?”
루프스의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그의 손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경고조로 목 정중앙을 눌렀다. 유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난 마레 위르의 법 따위는 모른다. 여기서는 내가 법이고 법이 곧 나다.”
수인들의 왕은 후안무치하고 안하무인이라 해도 그 누구도 무어라 할 수 없었다. 루프스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잘 이용했다.
“그러니, 네가 아무리 네가 알고 있는 법을 들먹여도 내게는 하나도 통하지 않아.”
루프스는 목을 감쌌던 손으로 유채의 볼을 쓸었다. 유채는 그 손을 날카롭게 쳐 냈다. 뱀이 기어가는 기분이었다.
“네 이름이 뭐든. 넌 이제 내 것이 되었으니 새로운 이름을 갖는 것이 옳은 일이지, 레티티아. 예전의 삶은 잊어라.”
“사람이 어떻게 소유가 될 수 있어요!”
“약하디약한 마레 위르는 못해도 나는 할 수 있지.”
나른하게 말한 루프스는 어깨를 떠는 유채를 응시했다. 두려움으로 몸을 떨면서도 눈만큼은 한없이 당당했다. 마치 여왕 같아 보이는 당당함이었다.
“이제부터 너는 나만을 위해 존재할 것이다, 레티티아.”
유채는 청회색의 눈에서 번들거리는 소유욕을 읽었다. 그가 유채의 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유채의 눈앞에서 은촛대를 흔들었다.
“이번만큼은 너그러이 넘어가지만, 한 번 더 내게 이런 물건을 들이밀었다가는.”
루프스는 유채의 심장이 뛰고 있는 곳을 손으로 꾹 눌렀다. 등 뒤의 벽 때문에 유채는 몸을 피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그녀는 제 가슴에 손을 올려놓은 파렴치한의 뺨을 때리기 위해 자유로운 손을 들었다.
“악!”
목적한 곳에 닿기도 전에 루프스가 유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파왔다.
“그 심장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게 될 거야. 장담하지, 나는 생각보다 약속을 잘 지키는 수컷이거든.”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을 돌려 그 안쪽, 맥박이 뛰는 혈관을 입술로 훑었다.
“이런 건방진 행동도 오늘까지만 봐주겠다. 펠릭스 다우스가 된 것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너그럽게 이해하지.”
“그래서 이제 뭐할 건데요!”
유채는 루프스의 힘이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손목에 붉은 멍 자국이 생겼다. 남자의 악력은 사람의 수준이 아니었다. 유채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리고 침대에 시선을 던졌다.
“저기서 나를 찍어 누를 건가요?”
“너를 안을 거냐고 묻는 것이냐?”
루프스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감히 나를 암컷을 찍어 누르기나 하는 수컷들과 비교하다니, 자존심 상하는데.”
루프스가 유채의 허리를 팔로 감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유채는 손으로 루프스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루프스가 어깨의 옷을 들춰내자 유채는 순간 몸을 굳혔다.
루프스는 제 품 안에서 굳어 있는 유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빤히 보였다. 솔직히 말해 루프스는 그녀의 몸에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암컷의 몸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현재 그의 최대 관심사는 반항적인 이 마레 위르가 제 발밑에 엎드려서 복종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알았으니 협박은 쉬웠다.
루프스는 웃으며 유채를 응시했다.
“레티티아 네가 말한 일은 밖에 있는 궁녀를 데리고 와 네 눈앞에서 보여줄 수도 있지. 보여줄까?”
이 남자는 미쳤어.
유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무나 붙잡고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을 굳이 펠릭스 다우스에게 시키겠나. 그런 일을 해줄 암컷은 네가 아니더라도 내 주위에 많지.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내게 무어라 할 놈들도 없고 말이야.”
그 말이 유채에게는 더 공포가 되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었다. 뜨거운 바람이 귓가에 닿자 유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너를 내 명령대로 움직이게 훈련시킬 거야. 내게 철저하게 복종하게 만들 거야, 레티티아.”
루프스는 말에 간극을 두었다. 지배자로서의 오만함으로, 루프스는 제가 유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말을 묘하게 말을 느리게 하였다. 마치 먹이를 잡아놓고 장난을 치는 맹수와도 같은 말투였다.
“마레 위르들도 강아지를 기르며 훈련시키지 않나? 그것과 같은 거라 보면 되는 거야.”
유채는 자신이 강아지와 비교된다는 것에 헛웃음이 나왔다. 펠릭스 다우스란 것인 노예는 아닌 것 같았지만, 최소한 그와 준하는 취급을 받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처럼 내 말에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할 거야. 내가 바라는 외관으로 꾸미고 내가 오기만을 이곳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지.”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허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싫다는 암컷을 강제로 안지 않아. 레티티아, 너를 품는다면 네가 내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펠릭스 다우스가 되고 스스로 원할 때쯤이 되겠지. 지금처럼 이렇게 길들어지지 않은 야수 같은 모습이 아니라.”
루프스의 팔이 허리에서 떨어지자 유채는 그를 손으로 밀었다. 하지만 루프스는 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히려 밀려난 것은 유채였다.
유채는 벽에 등을 부딪치고 신음을 삼키면서 주저앉았다. 루프스의 몸은 마치 거대한 돌덩이 같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귀엽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면서 무릎을 굽히고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이렇게 나를 몰라서야.”
수인들의 힘은 수인 각 개체마다 달랐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리 약한 수인이라도 마레 위르 수컷보다 최소 배는 더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루프스는 그런 수인들의 정점이었다. 루프스의 힘은 감히 마레 위르의 기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루프스는 자신에 대해 마치 백치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유채의 반항적인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배워야겠지. 앞으로 일주일간 나를 기쁘게 할 것들을 가르칠 선생들이 올 거야. 천박한 마레 위르의 교양은 집어치우고 새로운 교양을 배워야지. 네가 저 침대에 관심이 많다면 수컷을 안달 나게 만드는 방중술 선생도 붙여주마.”
루프스는 유채의 도톰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유채는 고개를 돌려서 그의 손을 피했다.
“당신의 말이 법이건 아니건 내겐 상관없어요. 난 당신의 레티티아도 아니에요. 난 한유채고 인격을 가진 인간이에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는 인간이라고요! 당신 뜻대로 가지고 놀 인형이 필요하다면 다른 인형 찾아봐!”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목소리였음에도 루프스는 저 목소리가 노래를 부른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저 입술에서 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면 천상의 노래를 듣는 듯한 기쁨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말은 무시하고 노래를 가르칠 선생을 붙일 생각을 하였다.
유채는 루프스가 제 말을 듣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이보다 덜 답답할 것 같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상식을 말해봤자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 이전에 이 남자를 인간으로 보아도 되는지부터 의심이 갔다. 외양은 인간과 같아도 아까 보았던 그 여우주둥이의 남자처럼 언제 동물처럼 변할지 몰랐다.
“아. 내 귀여운 레티티아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중요한 일을 잊을 뻔하였군.”
루프스는 옷 주머니에서 작은 갈색 병을 하나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유채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마셔.”
“내가 이걸 뭔지 알고 마시죠? 독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내가 귀한 선물을 그렇게 쉽게 죽일 리는 없지 않나, 레티티아.”
“죽음을 쉽게 입에 담길래, 마음에 안 들면 쉽게 죽이려 들 줄 알았죠. 귀한 몸이라고 하니 최소한 죽지는 않겠네요.”
유채가 빈정거리자 루프스의 눈이 사나워졌다. 병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루프스는 이번 한 번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했다. 보통 때라면 이런 무례를 참고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루프스는 굳어가는 입가를 억지로 풀었다.
“이건 레탈리스(Letalis)다. 네가 차고 있는 파렌티아와 짝이 되는 것으로, 파렌티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인식시켜 주는 것이지.”
“다시 말해서 내가 저걸 마시면 당신이 채워준 개 목걸이와 짝이 되서 당신의 물건이 된다 이거네요? 그럼 내가 그걸 왜 마셔요.”
루프스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본디 흥미 없는 일은 귀찮은 일로 취급했으며 귀찮은 것을 싫어했다. 물보다는 불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특유의 오만함이 그 불 같은 면모를 조금은 느긋하게 바꾸어서 그렇지, 그는 조금만 수가 틀리면 가차 없는 불 같은 늑대 수인이었다. 좀 전까지는 새롭게 들어온 멍청한 마레 위르를 귀엽게 생각하여 조금 봐준 것이었다. 그랬더니 겁을 상실한 것인지 이젠 기어오르려고 하는 것이다.
루프스는 저를 귀찮게 만드는 소리를 뱉는 유채의 입술을 보았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하여 잡아 뜯이고 싶게 만드는 혀와 달리 얇실하지도 않고 두껍지도 않은 적당히 도톰한 붉은 입술이었다. 닿으면 말캉하니 부드러운 촉감과 달큰한 맛이 날 것 같은 입술이었다. 루프스는 손에 든 약병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루프스가 병뚜껑을 열자 유채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는 유채의 기대와 달리 약병을 들어 제가 입에 털어 넣었다.
“당신 지금 뭐하는…… 읍!”
유채가 당황하는 사이, 루프스는 그녀의 입술이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는 그대로 달려들었다.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입술을 눌렀다. 루프스는 벌어진 틈으로 들어가 자신의 혀로 누르고 그녀의 혀를 누른 채 머금고 있던 레탈리스를 밀어 넣었다.
액을 다 넣어준 후에는 삼키지 않으려는 유채의 목을 뒤로 젖히고 손가락으로 코를 막았다. 숨을 쉴 수 없게 되자 유채는 꺽꺽거리면서 입으로 넘어온 액체를 모두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남은 것 하나 없이 모두 삼킨 것을 확인한 순간, 유채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루프스는 제 품으로 쓰러진 유채를 안아 올려서 침대에 눕혔다. 루프스는 무방비하게 풀린 유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입술을 비벼서 가뜩이나 붉은 입술이 더 붉어졌다.
“루프스님.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늑대 수인의 궁녀가 문 밖에서 말했다. 루프스는 혼절한 유채를 내버려 두고 방을 나왔다. 밖을 지키던 궁녀가 금색의 열쇠를 꺼내어 방문을 잠갔다.
* * *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욕탕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루프스는 가운을 벗어서 헤나에게 건네었다. 헤나는 가운을 건네받고 시선을 내렸다.
완벽하게 나신이 된 루프스의 몸은 자잘한 근육들로 덮여 있었다. 마른 편이라 태가 잘 나지는 않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에 지방이 없는 단단한 근육 잡힌 등은 신화 속의 영웅들처럼 매끈하게 뻗어 있었다.
루프스가 욕탕 안으로 들어가 앉자 헤나는 천을 들고 그 옆에서 목욕 시중을 들었다.
“닦겠습니다.”
헤나는 천에 물을 묻혀서 루프스의 몸을 닦아 내렸다. 신이 빚어낸 것 같은 단단한 육체는 수많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등과 어깨에는 이빨 자국과 발톱에 할퀸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모두 수인 내전에서 생긴 상처들이었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열셋의 소년이 단 삼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늑대 수인 일족을 통합하고 수인 내전을 종식시키고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피로 가득했을지는 머리만 있다면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었다. 루프스의 몸에 있는 상처는 모두 그 시절의 고통을 보여주었다.
“헤나.”
“하문하십시오.”
“레티티아를 가장 가까이서 돌보기로 한 궁녀가 누구냐?”
“아무래도 루프스님을 두려워하고 마레 위르에 대한 적대감이 적은 이가 레티티아님께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토끼 일족 의 새로 온 아이에게 맡길 것입니다.”
루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인이 마레 위르에게 갖는 적대감을 잘 알았다. 그의 궁에는 마레 위르에게 부모를 잃고 살길이 막막하여 궁녀가 된 수인들이 꽤 많았다. 그런 수인들에게 유채는 좋은 분풀이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선생들은 준비되었는가?”
“예. 말씀하신 대로 레티티아님께 그 어떤 정(情)도 주지 않으며 대화하지 말라 말씀드렸습니다.”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마레 위르든 수인이든 사회적 동물에 속했다. 고립되면 정신적으로 괴로워할 것이 당연했다.
루프스는 나른하게 웃었다. 유채도 그럴 것이다. 몸단장에 붙여놓은 노련한 아이들은 저들이 가진 마레 위르에 대한 적개심을 은근하게 표출할 것이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면 의지할 것을 찾기 마련이다. 그렇게 야수 같은 펠릭스 다우스는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의지할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고독은 마레 위르를 나약하게 만들지.”
루프스는 궁녀가 건넨 와인을 홀짝였다. 삶이 무료했다. 열셋에 양친과 동생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서 발악했다. 그 후로는 부모와 동생의 복수를 위해서 아득바득 살아왔다. 베니니타스의 목줄을 물어뜯었을 때, 그 쾌감과 허탈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본 베니니타스의 눈은 평온했다. 그 잔잔한 평온함이 저를 미치게 만들었다. 평온함은 제 복수가 복수가 아니게 만들었다. 자신이 한때 존경했던 이였다. 제 스승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다. 그렇게 복수를 했음에도 남은 것은 착잡함과 허탈감뿐이었다. 복수가 끝이 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그에게 찾아온 것은 끝없는 무저갱의 어둠이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일임에도 지루하고 무료했다. 번쩍이는 황금과 보석들도 의미가 없었다. 그때 나타난 것이 유채였다.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무채색이던 그의 삶에 활기가 돌아왔다.
“펠릭스 다우스라.”
사나운 검은 눈과 도자기 인형과도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따뜻한 욕탕에 등을 기대었다. 삶이 갑자기 즐거워질 것 같았다.
“책은 남겨두고 가겠습니다, 레티티아님.”
입과 다리와 발이 새의 것처럼 생긴 여자가 유채에게 책을 넘겼다. 그녀가 방을 나가자마자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면서 잠겼다. 유채는 신경질적으로 책을 던졌다. 그리고 목에 걸려 있는 파렌티아를 손가락으로 잡고 흔들었다.
“하. 인형놀이라도 하자는 거야?”
말 그대로 인형놀이였다. 아침이면 궁녀들에게 끌려가 몸을 씻고 루프스란 작자의 취향인 것으로 보이는 드레스를 입었다. 그렇게 장장 두 시간 동안 치장을 하였다. 그러고 나면 선생이라는 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가르치는 입장이면서도 제 할 말만 했다. 그 어떤 질문에 대한 답도 하지 않고 저들이 알고 있는 것을 쏟아내기만 했다.
유채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었다. 제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다는 것은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작은 일에도 불안해졌고 약해졌다. 그렇다고 몸이라도 편한 것은 아니었다.
유채는 그동안의 일로 마레 위르가 저 같은 일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동물의 모습을 한 수인들과 마레 위르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다는 것 역시도.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유채가 입고 있었다. 루프스의 명으로 시중을 드는 수인 궁녀들이 그녀를 적대시했고 티가 나지 않는 교묘한 방법으로 괴롭혀 댔기 때문이었다.
몸단장을 할 때, 상처가 남지 않을 정도로만 교묘하게 힘을 준다던지, 음식에 일부러 소금을 과하게 넣는다던지, 아주 가끔은 음식에 마치 실수처럼 유리 조각이 섞여 있을 때도 있었다. 유채는 궁녀들의 장난질에 유리 조각을 삼켜 혀와 볼이 찢긴 뒤로는 숟가락으로 꼼꼼히 유리 조각이 있는지를 살폈다.
먹는 것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몸도 마음도 모두 힘들어진 상태에서 마음을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면 유채는 돌아버렸을 것이었다.
“레티티아님.”
철컥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이 열렸다. 하얀 토끼 귀가 유채의 눈에 들어왔다. 유채는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유채는 입을 열었다.
“블루벨.”
블루벨이라 불린 소녀는 토끼 수인 궁녀였다. 부양할 동생들이 너무 많아서 보수가 좋다는 루프스의 궁녀가 되기로 하고 토스 호무스(Thos Humus:늑대 수인 일족의 땅)로 상경한 아이였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여 궁녀가 됐다고 자랑했던 아이는 하얀색의 토끼 귀와 앙증맞은 꼬리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발은 복슬복슬 하얀 털로 뒤덮인 토끼의 발이었다.
블루벨은 들고 온 쟁반을 유채의 앞에 내려놓았다.
“수업은 괜찮으셨어요?”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블루벨은 볼을 부풀렸다. 꽤나 귀여운 얼굴이었다.
블루벨은 루프스가 유채의 시중을 들이라 붙여준 궁녀로 올해 열다섯이라고 했다. 루프스의 명으로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던 블루벨을 유채는 먹을 것으로 꼬여내었다. 블루벨은 아주 깊은 시골에서 자라서 못 먹어본 것이 많아 유채가 음식으로 꼬여내는 것에 그대로 넘어갔다. 그리고 유채에게 가장 좋은 정보통이 되었다.
“난 블루벨의 수업이 더 좋아. 그러니까, 어제 못한 이야기 계속해 줘.”
유채는 블루벨에게 달달한 과자를 건네었다. 블루벨은 앙증맞은 손으로 그것을 잡고 우물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수인들은요. 이런 위르(vir)형의 모습이 마레 위르와 가까울수록 힘이 세요.”
블루벨이 말한 위르형이 지금 같은 인간의 모습을 말하는 거란 것을 알아차린 유채는 ‘위르’가 ‘인간’이란 뜻으로 짐작했다. 동물의 흔적이 적은, 인간과 가까운 모습일수록 강한 힘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즉, 유채가 저와 같은 인간이라고 착각했을 정도인 루프스는 정말로 강하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루프스님이 태어나셨을 때 모두들 놀랐대요. 아무리 위르형이 마레 위르에 가까워도 귀나 꼬리 둘 중 하나는 갖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루프스님은 그런 것도 없었대요. 전대 루프스이신 로보님도 귀는 늑대의 것이었거든요. 그분에 필적하던 베니니타스님도 마찬가지고요.”
유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블루벨이 준 정보로 수인들에 관한 것을 하나씩 알아갔다. 수인들은 평소에는 위르형으로 생활하고 전투 시에는 동물의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는데 강자일수록 동물형이 덩치도 크고 강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만큼 상처 회복력도 빠르다고 하였다. 전대 루프스는 팔이 부러져도 하루 만에 나을 정도였단다.
“그럼, 마법 같은 것도 존재하는 거야?”
“예. 마레 위르들은 에어리얼이라는 걸 사용하는데 저희는 그런 것 없이 종족별로 가진 속성으로 마력을 운용해요.”
블루벨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늑대 일족은 전격, 여우 일족은 불, 소 일족은 암석, 개와 말 일족은 바람을 타고난다. 그리고 종족 속성으로 타고나는 것 외에도 스펠이란 것을 이용해서 마법을 쓸 수 있다. 수인들은 스펠을 이용하는 이들을 마법사라고 불렀는데, 마레 위르들 중에는 마법사의 수가 꽤 되나 수인들 사이에는 마법사가 드물어서 그에 관하여는 블루벨도 잘 몰랐다.
“저희가 마레 위르보다 마력 저항력이 강해서 어지간한 마법은 듣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있잖아. 종족이 다른 수인끼리도 결혼할 수 있어?”
“일반적으로 안 해요. 원래 다른 종족끼리는 별로 사이가 안 좋아서 잘 만나지도 않았거든요. 이렇게 섞여 살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어요. 저는 서로 다른 종족이 통혼한 경우 본 적이 없어요.”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간 잡종인가?”
유채는 중얼거렸다. 이과생으로서 과학 수업 중 생물을 공부했던 유채는 짧은 지식을 중얼거렸다. 수인들은 인간과 비슷하니 다른 종끼리도 혼인이 가능한 줄 알았다. 하나, 여기도 종간 잡종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예외는 있어요. 개의 일족하고 늑대 일족은 서로 혼인을 해요. 두 일족은 혈맹 사이일 정도로 사이가 좋거든요. 전대 루프스님의 비(妃)셨던 블랑카님은 늑대개셨어요. 그래도 루프스님은 늑대로 태어나셨죠.”
“개와 늑대야, 공통 조상에서 갈라진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뭐, 어차피 개는 회색늑대의 아종이고. 당연히 상관없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몰라도 돼. 이거 먹고 계속 말해봐.”
블루벨은 유채가 넘긴 고기조각을 우물거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강력한 일족들은 각자 자기 땅을 가지고 있어요. 늑대, 여우, 소, 말, 양과 염소, 저희 토끼와 쥐, 개, 고양이, 독수리. 이렇게 아홉 개의 땅으로 나뉘어요.”
“응? 일족은 열한 개인데 땅을 아홉 개로 나뉘어?”
“몇몇 부족은 연합해서 땅을 얻었거든요. 예를 들어 저희 토끼랑 쥐 일족, 그리고 양과 염소일족이 연합해서 땅을 얻었어요. 돼지와 닭, 뱀 사슴들은 땅을 뺏겼고요. 그래서 네 일족들은 우리 같이 연합해서 땅을 얻은 일족에게 이를 갈아요. 저희토끼 일족은 사슴 일족과 사이가 안 좋아요.”
유채는 이곳을 중앙집권체제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중앙집권제와 연합왕국의 중간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절대적인 왕에게 복종하되 자치권을 가진 각 일족의 수장이 땅을 관리하고 조세를 거두어 바쳤다. 얼핏 보면 콩가루에 중앙으로 힘이 모일 것 같지 않지만 수인들의 왕인 루프스의 존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강함을 제일로 치는 수인들이 가능 강한 왕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채는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저었다. 어차피 길게 있을 곳도 아니고 자신은 이과생이라 정치학 같은 걸 배운 적도 없어 더 어렵게 느껴졌다.
“옛날에는 자기 일족의 땅에만 살았지만 요즘은 다른 일족 땅에 들어가 살기도 해요. 그래도 각 일족의 땅에는 그 일족 수인들이 가장 많아요. 땅이 없는 군소 일족들이야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요.”
유채는 밥을 깨작거리면서 블루벨의 말을 들었다. 유채가 있는 곳은 늑대들의 땅이자 수인들의 지배자가 사는 땅인 토스 호무스라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처음으로 발견됐던 곳은 고양이 일족과 여우 일족의 땅의 경계에 있는 고대의 신전이자 수인들에게는 신성한 땅인 에클레시아란 곳이라고 했다.
유채는 입맛이 뚝 떨어져 손을 놓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여기는 지구가 아니었고 이곳에는 수인이라는 이상한 종족들이 살았다. 저와 같은 모습의 인간, ‘마레 위르’도 있는 것 같은데 지금으로선 그들을 보기 힘들 것 같았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오는 차원이동이란 황당한 일을 겪은 것이었다. 제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유채는 올 수 있었다면 돌아갈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돌아갈 방법을 찾는 데 한계가 있어.’
유채는 벙싯벙싯 웃으면서 쓸 만한 정보를 털어놓는 블루벨을 보았다. 처음에는 친해져서 몰래 열쇠를 빼앗고 이 방에서 나갈 도구로 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없던 상황에 마음이 약해져 유채는 어느새 블루벨에게 정을 주고 의지하게 되고 말았다.
블루벨을 이용한다면 아무런 힘없는 이 아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제 욕심으로 제게 신경을 써준 아이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블루벨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너는 루프스의 명을 어기는 것이 무섭지 않아?”
블루벨이 조금 주저하더니 말했다.
“저희 엄마가요, 예전부터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것이 있어요. 어떤 위협이 있어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라.”
블루벨이 곱게 눈을 접었다.
“루프스님이 무섭기는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레티티아님과 이야기하는 일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레티티아님이 외로워하시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블루벨은 말을 하고서도 객쩍은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예의 그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채는 블루벨을 따라 웃었다. 이래서 블루벨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블루벨은 짙은 청색의 궁녀복의 치마를 툴툴 털면서 일어났다.
“오래 있으면 오해받아요. 지난번에 궁녀장님이 절 의심하셨거든요.”
“아. 미안해.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저야 괜찮아요. 오히려 레티티아님이 걱정이지요. 저야 나름 영토도 있는 일족이라 쫓겨나는 것으로 끝날 수 있지만, 레티티아님은 루프스님께 무슨 일을 당하실지 모르니까요.”
“나는 상관없는 거 아니야?”
“레티티아님과 대화를 하지 말라고 명하신 건 루프스님이시고, 레티티아님도 관련 있으니까요. 괜히 레티티아님께 불똥이 튈 수 있어요.”
“그래.”
유채는 말끝을 흐렸다. 블루벨은 도로 쟁반을 방을 나갔다. 유채는 짧은 만남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빛기둥.’
에클레시아에서 빛기둥이 생긴 뒤 제가 나타났다고 여우 수인들이 말했었다. 제가 이쪽 세계로 넘어온 것이 누구, 혹은 무언가의 힘과 관여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곳은 바로 그 에클레시아란 곳일 터였다.
‘일단 에클레시아로 가야 해.’
에클레시아는 고대의 수인들이 이 스티폴로르(Stipulor)에 도착하고 주신인 셀레네를 위해 지은 신전이라고 하였다. 모종의 이유로 파괴되고 폐허가 되었으며, 루프스를 비롯한 다른 수인 일족들의 수장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제를 올리기 위해서 출입한다고 하였다. 유채가 발견된 곳은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로 중심부만큼 엄격하게 출입이 통제되지는 않지만, 각 일족의 수장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주변부에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허락 없이 출입을 할 경우, 수장의 즉결 처분으로 죽을 수도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블루벨은 울페스 헤르티아가 엄청난 자비를 베푼 것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예전에 소 수인 일족의 수장인 타우루스 헥터가 어린 수인들이 에클레시아의 주변부에서 놀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아이들의 목을 잘랐다고 하였다.
에클레시아뿐만 아니라 마레 위르라고 불리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도 가봐야 했다. 유채는 제가 겪은 이 이상한 일은 마법이란 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레 위르 중에는 마법사의 수가 꽤 된다고 하였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유채를 버리려는 것은 아닌지, 두 곳은 인접하여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걱정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블루벨은 수인들과 마레 위르 사이의 반목이 너무 심해 만약 유채가 루프스의 보호 없이 밖으로 나갔다가는 마레 위르에게 가족을 잃은 수인에게 찢겨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위험하더라도 가봐야 해.’
유채는 손목을 들어 이제는 흔적만 남아 있는 멍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은발에 청회색 짐승의 눈을 가진 남자가 움켜쥐었던 흔적이다.
루프스는 유채를 이 방에 둔 채로 찾아오지 않았다. 일주일 넘게 이 방 안에 가둬놓고 방치했다. 유채는 그와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블루벨의 말이 옳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마침 루프스가 궁을 떠난 상태라고 하였다. 유채는 그가 이곳에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어떻게 나갈 것인가 수없이 고민을 했다.
“돌아오는 날이 내일이라고 했지.”
유채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은촛대로 루프스를 위협하려고 했던 일로 방 안에는 금속제의 물건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유채는 그날의 실패를 아쉬워하며 대신 꽃병을 손으로 쓸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유채는 한 번도 사람을 해쳐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떨림이었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예법을 가르치는 늑대 수인 궁녀가 들어왔다. 그 궁녀가 이 방에 들어오는 수인 중 가장 유채와 몸집이 비슷했다. 옷을 훔쳐 입고 궁녀들이 쓰는 머리두건으로 머리를 가리면, 어쩌면, 안전하게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궁녀가 필요했다.
유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꽃병을 들었다.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차 꽃병이 손에서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유채는 머릿속으로 몇 번씩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문 뒤에 숨어 있다가 궁녀가 들어오면 꽃병으로 머리를 내리치면 된다.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그 정도 충격이면 쓰러질 것이다. 유채가 이 같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궁녀로 들어오는 수인들은 수인들 중에서도 약한 개체라고 블루벨이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탁. 탁. 탁.
신발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유채는 얼른 문 뒤에 몸을 숨겼다. 유채는 눈을 감고 속으로 계속 자기 합리화를 하였다. 어쩔 수 없다. 정당방위다. 유채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유채는 꽃병을 몸 가까이 끌어안았다.
철컥, 걸쇠가 돌아갔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유채는 눈을 질끈 감고 꽃병을 휘둘렀다. 도저히 얼굴을 보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채에게는 그것이 불운으로 작용했다.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하.”
루프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제 어깨를 가격하고 아래로 쏟아지는 도자기의 파편을 보았다. 말 수인 일족과의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 오랜만에 펠릭스 다우스를 보러 온 참이었다. 환영 인사 한번 거창했다. 항아리로 환영인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루프스는 속으로 아주 놀라워하고 있었다.
유채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버티고 선 이가 누군지를 확인하자마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유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루프스는 예의 그 차가운 미소로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화가 난 것인지, 가소로워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유채는 루프스에게서 쏟아지는 위압감에 몸을 떨었다. 바닥을 더듬던 손에 날카로운 도자기 파편이 잡혔다.
유채는 손이 상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조각을 움켜쥐었다. 화난 남자의 손에 죽나 반항하고 죽나, 어차피 개죽음이었다.
루프스가 몸을 굽혀서 유채와 눈을 마주했다. 유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운이 좋다면 루프스를 인질로 삼아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채는 그을 위협할 목적으로 조각을 들이밀었다.
“악!”
하지만 루프스가 빨랐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낚아채 비틀었다. 유채는 도자기 조각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힘을 주어서 밀었다. 유채의 몸이 깨진 꽃병 조각 위로 넘어갔다. 루프스는 여유롭게 유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제 아래 깔린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떨렸다. 하나 공포에 질릴지언정 체념은 하지 않았다.
“좀 더 힘을 주지?”
루프스는 바르작대는 유채를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조롱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아악!”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아 유채는 결국 쥐고 있던 조각을 놓았다. 날카로운 도자기 조각 위에서 구르느라 등도 아프고 손은 이미 피로 범벅이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손을 움직일 수 없도록 그녀의 머리 위에 손목을 고정시켰다.
“내가 경고하지 않았나?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수컷이라고.”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볼을 타고 내렸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궁녀를 기절시킨 뒤 열쇠를 빼앗아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었겠지. 생각한 것보다는 대담한 행동이었고 생각한 것보다는 단순하고 대책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가소로웠다.
“괜찮으십니까?”
케릭스가 달려왔다. 케릭스는 루프스 아래에 깔린 유채를 보았다. 그리고 주변에 널린 도자기 조각과 루프스에 어깨에 박혀 있는 조각을 보았다. 둔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 케릭스도 이 상황을 곧장 이해했다. 저 건방진 펠릭스 다우스가 루프스를 해하려고 한 것이었다.
“난 괜찮은데. 내 레티티아는 어쩔지 모르겠군. 케릭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잡아서 올렸다. 유채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루프스의 손을 쳐 내었다. 그러자 케릭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감히 나를 해하려고 한 펠릭스 다우스를 말이야. 법대로 처분할까? 하지만 법대로 처분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진귀한 펠릭스 다우스인데?”
유채는 새된 소리로 외쳤다.
“죽이든지 말든지!”
짝.
유채의 몸이 붕 날아가 탁자에 부딪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유채는 잠깐 까무러쳤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볼이 붓다 못해 찢어져서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도자기 파편 위에서 구르느라 화끈거리는 등을 포함해 온몸이 욱신거렸다. 뺨을 맞았을 뿐인데 입술이 터지고 볼이 부어오르고 코에서는 피까지 났다. 눈두덩이도 부어오르는지 시야가 흐릿했다. 유채는 이를 악물고 부들거리는 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감히 펠릭스 다우스 주제에!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란 판국에! 감히 루프스님을 해하려 하고 뭐가 그리 당당한가!”
케릭스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유채를 때린 케릭스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루프스는 그를 보고 비소를 흘렸다. 자신의 충신은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힘 조절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약하디약한 마레 위르 암컷을 배려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유채는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을 억눌러 참고 이판사판이다 하고 외쳤다.
“당신이 루프스든 수인의 왕이든 나한테 이렇게 할 권리는 없어! 내가 이곳에 동물처럼 갇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루프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난 당신들 물건도 아니고 레티티아도 아니고 한유채야! 한유채! 나도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다보니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도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짓을 당해야 하지? 설사 잘못을 했다 한들 그것이 마치 강아지라도 되는 양 이 작은 방 안에 갇혀 있어야 할 정도로 큰 죄였을까?
유채의 꿈은 소박했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 수능이 끝난 뒤 공부에 얽매이지 않고 즐겁게 놀아보는 것 그게 전부였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자신에게 왜 갑자기 이런 시련이 닥친 걸까.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는 절대 안 해! 평생을 해봐, 내가 당신 뜻대로 움직이나! 차라리…… 하악!”
유채의 목에 걸려 있던 파렌티아가 작아졌다. 파렌티아가 유채의 숨통을 쥐었다. 유채는 파렌티아를 목에서 떼어내기 위해서 손톱으로 목 주위를 긁었다. 목에 붉은 선이 그어지고 손톱에 살점이 묻어나왔다.
“죽여 달라고 하면서 죽음은 무서워하는 구나. 하긴 암컷 마레 위르 주제에 그냥 해본 소리겠지. 레티티아.”
루프스가 파랗게 질린 유채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파렌티아가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유채는 신선한 공기를 급하게 마셨다. 머리가 핑 돌았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북받친 설움은 기어코 눈물이 되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우는 얼굴을 보았다. 눈물은 흘리고 있어도 특유의 당당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잘못했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하겠다는 각오가 눈에 비쳐 보였다.
“내 발밑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기는커녕 바락바락 대들다니. 참 신선한 선택이군, 레티티아.”
루프스는 소름끼치도록 다정한 손길로 유채의 다친 볼을 쓰다듬었다. 케릭스가 정말 무식하게 때려서 볼은 찢어졌고 붉게 멍이 들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주었다. 뼈가 함몰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자. 그럼, 제 죄도 모르는 내 귀여운 레티티아에게는 무슨 벌을 줘야 할까? 난 레티티아를 죽이기는 싫은데 말이야.”
루프스는 유채에 등에 박힌 도자기 조각을 빼내면서 말했다. 조각이 박혔던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유채의 옷은 원래의 흰빛을 잃고 붉게 물들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등에 박힌 조각을 뺄 때마다 유채는 흐느낄 뿐 비명은 지르지 않고 몸만 움찔거렸다. 루프스의 눈에 고통을 참기 위해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주먹이 보였다.
유채는 저 남자 앞에서 비명은 지르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을 쥐고 있는 쪽의 손톱이 이미 찢어진 살로 파고들었다.
“케릭스. 지난번에 세워놓았던 말뚝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던가?”
루프스는 예전에 읽었던 동화를 생각해 내었다. 말뚝에 박힌 아기 늑대 이야기.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인 유채에게 자신의 힘을 각인시켜 주기에는 그보다 적합한 벌은 없어 보였다.
“예. 있습니다.”
“그럼, 제 잘못을 모르는 레티티아를 거기에 묶어놔. 지금 당장.”
루프스가 유채의 턱을 놓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중심을 잡지 못한 유채의 몸이 바닥으로 형편없이 내동댕이쳐졌다. 곧장 케릭스가 다가와서 유채의 오른팔을 잡고 거칠게 들어 올렸다. 유채는 오른쪽 어깨가 빠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케릭스의 손에 휘둘렸다.
“원래 짐승은 먹이 주는 쪽을 주인으로 알고 복종한다지.”
루프스는 유채를 힐끔 바라보았다. 형편없는 꼴로도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루프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내게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그 말뚝에 묶어놓고 먹을 것을 주지 마라.”
루프스가 유채의 번뜩이는 눈을 마주했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굶어 죽으면 그만이고 살고 싶다면 내게 엎드려 빌면 되겠지. 안 그런가? 레티티아.”
루프스가 유채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유채는 눈앞의 남자를 증오스럽게 바라보았다.
케릭스의 손에 질질 끌려온 유채는 마치 개처럼 말뚝에 묶였다. 파렌티아에 줄을 달아서 말뚝에 묶이고 등 뒤로 팔을 돌려서 말뚝에 팔을 묶어놓았다. 묶여 있는 자세도 고역이었지만, 루프스는 유채의 상처를 전혀 치료해 주지 않았다. 유채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유채는 이제야 제가 갇혀 있던 곳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성이었다. 전체적인 외관이나 형태는 서양의 것에 가까우나 군데군데 동양의 것도 보였다.
궁인들이 유채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루프스님께 벌 받는 중이라는데?”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유채의 귀에도 들렸다. 유채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 잘못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 죄 없는 사람은 가두는 것은 불법이다.
촤악!
유채의 얼굴로 구정물이 한바가지 날아왔다. 얼굴과 머리카락을 타고 더러운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유채는 물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레티티아님. 제가 청소를 하다가 실수를 했습니다.”
다람쥐 수인이 웃으면서 유채에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미안한 얼굴이 아니었다. 명백한 고의였다. 다람쥐 수인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곤 같은 일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은 유채를 곁눈질하면서 큭큭거리며 웃었다.
“참 창의성 없네.”
유채의 어머니는 동양계와 우크라이나계 백인의 혼혈이었다. 그랬기에 유채도 혼혈치고는 동양인에 가까운 외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보면 분명한 이국(異國)적인 면이 남아 있어 어릴 적 유채의 동급생들은 그녀를 마치 신기한 동물을 보는 것처럼 힐끔거리고 수군거렸었다. 어린아이들에게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이었다. 거기다 유채의 어머니가 외국인이고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며 한국어까지 어눌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괴롭힘은 시작되었다. 괴롭힘은 집요했다.
잡종. 거지. 네 나라로 돌아가.
이런 종류의 말이 퍼부어졌다. 화장실에 있다가 양동이 물에 젖는 것은 기본이었다. 지금의 상황도 유채에게는 별다를 일이 아니었다.
“어디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자고.”
유채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왕따를 당하면서도 유채는 꿋꿋이 버텼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었다. 유채는 마음을 좋게 먹었다. 유채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절대 저들에게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지도 않을 것이다. 유채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분명 가족들이 제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돌아가야 했다.
‘아. 뭔가가 더 있는데……’
유채는 눈을 찡그리면서 먹물을 뿌려놓은 것 같이 군데군데 비어 있는 기억을 헤집었다. 한국에서의 기억을 되짚을 때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뭔가 잊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
딱.
기억을 되짚고 있는 중에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부딪쳤다. 유채의 이마가 깨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어머, 죄송합니다. 레티티아님. 제가 걷다가 실수를 해서.”
이번에는 사슴 수인이었다. 아까 전의 다람쥐 수인은 최소한 대놓고 웃지는 않았었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눈으로 들어왔다. 손을 쓸 수가 없으니 그것을 닦을 수도 없어 유채는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 뒤에도 시비조로 몇몇 궁인들이 유채에게 돌을 던진다든지 다 들리도록 험담을 하고 가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 세계 어디, 아니, 전 차원을 통틀어 참 이런 일은 창의성도 없었다.
밤이 찾아왔다. 배는 생각보다 고프지 않았으나 목이 말랐다. 유채는 억지로 침을 짜내어서 목구멍으로 넘겼다. 얇은 옷 사이로 늦가을의 찬바람이 불자 몸이 차갑게 식었다.
“벌써부터 물어보는 것은 실례인가? 레티티아.”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루프스가 유채를 불렀다.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루프스는 어깨에 긴 옷을 걸치고 나와 있었다. 사극에서 보던 한량 같아 보였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서 반짝거렸다. 유채는 몸을 움츠렸다. 루프스가 무릎을 굽혀서 한 손가락으로 유채의 턱을 들었다.
“등. 아프지 않나?”
유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 남자 앞에서 약한 모습 따위는 보이기 싫었다.
“악!”
루프스는 유채의 등을 지그시 눌렀다. 유채는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루프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유채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빌면, 내가 친히 안고 들어가 치료해 주지. 어떠냐?”
“난 잘못한 거 없어!”
루프스의 손가락이 피가 굳은 유채의 깨진 이마를 훑었다. 예상한 일이었다. 마레 위르에게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은 수인들은 때는 이때다, 하며 유채를 괴롭혔음이 분명했다. 루프스가 유채를 굳이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 묶은 이유였다. 그녀에게 비참함을 안겨줄 수 있는 것도 루프스 자신뿐이며 온갖 위험에서 보호해 줄 수 있는 것도 자신이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려고 하였다.
“미련한 것인지, 자존심이 센 것인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루프스는 유채의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꼴이 엉망임에도 본연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았으며 저 당당한 여왕 같은 눈도 조금도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미련스럽게 굴지 말거라. 그러면 너만 힘들어질 것이다.”
루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채는 악에 받친 눈으로 루프스를 노려보았다. 루프스는 그 눈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질척한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순간 저 눈을 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이번 일을 통해 그 눈을 내리까는 법부터 배우는 것이 좋겠구나, 레티티아.”
루프스는 어둑어둑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평소처럼 나른하게 말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뒤로하고 걸었다.
* * *
말뚝에 묶인 지 사흘이 지나고 유채는 이제 슬슬 한계를 느꼈다. 루프스의 명을 받은 궁녀들이 유채에게 꼬박꼬박 소량이라도 물을 주었기에 목숨에는 지장이 없이 버틸 수 있었지만, 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어제는 비까지 내려서 몸이 차갑게 얼어버렸다. 유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입술은 파래졌다. 자존심 때문에 유채는 루프스가 찾아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채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었다.
“레티티아님.”
밤중에 자신을 몰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고개를 들 힘도 없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몸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괜찮으세요?”
블루벨이 울먹였다. 유채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해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 회를 칠한 것처럼 창백해진 피부와 퍼렇게 변한 입술, 삼 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바싹 마른 몸과 퀭한 눈. 제때 치료받지 못한 몸 여기저기 피가 굳어서 피딱지가 붙어 있었다. 지탱할 힘도 없는 것인지 말뚝에 묶인 채 축 늘어진 몸은 비에 쫄딱 젖고 그대로 말라 더 처참해 보였다.
“블…… 루, 벨?”
유채가 힘겹게 입을 달싹였다. 블루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건에 물을 적셔서 엉망이 된 그녀의 몸을 닦아주었다. 블루벨은 따뜻하게 데워 온 물을 유채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어주었다.
유채는 블루벨이 주는 물을 남김없이 마셨다. 따뜻한 물 하나 마셨다고 살 것 같았다. 얼어붙은 몸도 조금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블루벨은 다시 물에 적신 천으로 유채의 몸을 닦아주었다.
“세상에…… 등…… 괜찮으세요?”
블루벨은 유채의 등을 보고 놀라서 숨을 삼켰다. 등의 상처는 곪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등은 이미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블루벨은 울먹이며 말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하세요. 이러다 돌아가시겠어요.”
눈에 초점이 풀린 유채는 딱 쓰러지기 직전으로 보였다.
유채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넌. 가봐…… 이러다…… 걸리면…….”
유채는 블루벨을 걱정했다. 블루벨은 고개를 저었다. 블루벨은 가져온 묽은 스프를 유채에게 먹였다. 삼 일이나 굶었으니 갑자기 음식물을 섭취하고 탈이 날 것을 걱정한 배려였다.
“드세요. 일단 사셔야죠.”
유채는 블루벨이 입에 대어주는 묽은 스프를 먹었다. 삼 일 만에 먹는 음식이었다. 유채는 부어터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안 그랬다가는 울음이 날 것 같았다. 따뜻한 스프 한 숟가락에 그간의 설움이 터지려고 했다.
바닥을 바라보던 유채의 눈에 익숙한 신발이 보였다.
“에그머니나!”
블루벨이 깜짝 놀라면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덕분에 들고 있던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스프가 쏟아졌다.
유채는 뻑뻑한 목을 들었다. 루프스가 아주 흥미롭다는 빛으로 유채와 블루벨을 내려다보았다. 유채는 황급히 블루벨을 돌아보았다. 겁에 질린 아이가 머리를 숙이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루, 루프스님을 뵙습니다.”
“레티티아, 네가 토끼와 가까워졌다는 것을 몰랐는데.”
루프스는 블루벨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블루벨은 살기를 느끼고 쫑긋 귀를 세웠다. 루프스가 블루벨의 손을 발로 밟았다.
“아악!”
“블루벨!”
“이름까지 알고 있어?”
어쩐지 유채가 심리적으로 크게 불안해하지 않는다고 했다. 진작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저 암컷 토끼는 건방지게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 그리고 그것이 유채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이 멍청한 암컷 토끼가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내 명령을 어긴 이는 사형으로 처벌하는데…… 말이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블루벨은 살려달라고 외쳤다. 이대로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 들키면 벌을 받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유채에게 온 것이지만 막상 루프스에게 들키자 무서웠다. 블루벨은 납작 엎드려서 빌었다.
유채는 모든 힘을 짜내어서 외쳤다.
“내가 시켰어! 이 아이는 아무 잘못 없어!”
까칠한 목이 쉴 정도로 쩌렁쩌렁 외쳤다. 어떻게든 막지 않으면 블루벨이 죽을 것 같았다.
루프스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유채의 눈에 절박함이 어려 있었다. 루프스는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블루벨의 손을 밟고 있던 발을 떼었다. 루프스 주위에 있는 궁녀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루프스는 타 일족의 수장과 신경전을 벌일 때나 보여주는 살기를 블루벨에게 쏟았다. 루프스는 손을 움켜쥐고 신음을 삼키는 블루벨을 냉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자. 내 명을 우습게 여긴 암컷 토끼를 어떻게 해야 할까?”
“저는 잘못된 일을 하지 않았어요.”
블루벨이 신음을 억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레티티아님은 착해요. 마레 위르이셔도 착해요.”
블루벨은 유채가 보여준 호의를 기억했다. 제가 들어온 마레 위르와는 다르게 항상 자신을 걱정해 주었고 신경 써주었다. 마레 위르들은 욕심이 많고 수인들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판다고 했었다. 수인들을 동물 취급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유채는 그러지 않았다. 힘이 약한 토끼 일족이라 땅을 가진 다른 일족에게도 무시받는 블루벨을 무시하지 않았다.
낯선 타지에서 블루벨에게 유채는 언니이며 동생이 되었다. 블루벨의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블루벨은 유채가 받던 취급들을 기억해 내었다. 유채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몰리고 있었다. 이건 아무리 유채가 펠릭스 다우스라도 받아서는 안 되는 대우였다. 유채도 인격을 가진 마레 위르이기 때문이었다.
“레티티아님은 제게 시키지 않으셨어요. 제가 했어요. 레티티아님은 잘못 없으세요. 제가 레티티아님이 가여…… 헉!”
루프스는 가증스런 말을 뱉어내는 블루벨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블루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유채는 블루벨의 죽일 기세로 그녀의 목을 틀어쥔 루프스를 보았다. 그는 기묘하게 뒤틀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블루벨!”
블루벨은 숨을 꺽꺽거리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채는 있는 힘을 짜내어서 외쳤다.
“잘못했어요!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그와 동시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한번 터진 눈물은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멈추지 않고 새어나왔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다 내 잘못이니까…… 블루벨은 놔줘요. 블루벨은 아무 잘못 없어요.”
유채는 마지막 힘을 짜내서 오열했다.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다.
루프스는 오열하는 유채를 보면서 블루벨을 손에서 놓았다. 블루벨은 이미 기절한 것인지 눈을 감은 채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벌건 손자국이 블루벨의 목에 선명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과 정신이 한계에 달한 것인지 무너져 내렸다. 어깨를 바르르 떨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꼴이 처참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밀랍인형이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루프스의 손끝이 잠깐 차갑게 굳었다. 유채는 마치 시궁창 속을 구른 구체관절 인형보다도 못 볼꼴이었다. 그도 이렇게까지 되는 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가 생각한 것보다 유채의 몰골은 처참했고 그의 머리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식었다.
“블루벨…… 으흑…….”
유채는 온몸에 수분이 빠져나갈 것처럼 울었다. 저대로 있다가는 울다가 죽을 것 같았다. 루프스의 손짓에 궁녀들이 유채의 손목을 묶었던 밧줄을 끊었다. 파렌티아에 걸린 줄도 풀어주었다. 몸을 말뚝에 지탱하고 있던 유채는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유채의 몸이 땅에 닿기 전에 루프스가 그녀를 받아 안았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루프스는 반사적으로 유채를 받아놓고서도 스스로 놀랐다. 유채는 긴장이 풀린 것인지 정신을 놓았다. 루프스의 팔 안에서 유채가 축 늘어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이 꺾이지 않도록 고쳐 잡았다.
“레티티아?”
유채의 몸이 지나칠 정도로 차가웠다. 얇은 옷 뒤로 비치는 다친 등의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루프스는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기력이 다한 것인지 유채의 숨이 옅어졌다. 루프스는 쓰러진 유채를 안아 올렸다.
“오르페를 불러라.”
“예?”
“귀가 먹었느냐? 아니면 멍청한 거냐? 내가 두 번을 말해야 하나!”
“예…… 예! 알겠습니다. 오르페님을 불러오겠습니다.”
궁녀 한 무리가 급하게 움직였다. 루프스의 기세가 사나워서 그들은 당황했다. 벌을 준다고 하여 계속 내버려 둘 줄 알았다. 예전에 펠릭스 다우스로 들인 늑대 한 마리도 벌을 준다고 저런 꼴로 만든 뒤 방치하다가 나중에서야 치료해 주었다. 그 늑대는 당연하게도 그 누구보다 루프스의 명령을 잘 따랐다. 그랬던 루프스이기에 유채가 쓰러졌다고 궁의를 찾는 것은 궁녀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궁녀들은 혹시 모를 화를 피하기 위해 걸음을 보다 빠르게 재촉했다. 다람쥐 일족 궁녀가 덜덜 떨면서 루프스에게 다가왔다.
“저…… 저 아이는 어찌할까요?”
루프스의 싸늘한 시선이 땅에 쓰러져 있는 블루벨에게 향했다. 루프스는 제 계획을 모조리 틀어놓은 블루벨에게 이를 갈면서 궁녀에게 명을 내렸다.
“냉궁에 가둬라. 그중에서도 가장 춥고 어두운 곳에.”
“처벌은 어찌할까요?”
“나중에 결정하지.”
루프스는 유채를 안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품에 안은 유채의 몸은 지나치게 차가웠으며 지나치게 가벼웠다. 루프스는 그답지 않게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불안해했다.
* * *
뱀 수인 일족의 궁의인 오르페는 유채의 맥을 짚었다. 가늘고 약했다. 한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비를 맞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오르페는 은테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는 원래 마레 위르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직 어려 보이는 암컷 마레 위르가 이렇게 처참한 몰골을 하고 누워 있으니 가엽기는 하였다. 오르페는 뱀 일족의 치유 속성으로 일단 기력부터 회복할 수 있는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뒤에 선, 무시무시한 기세의 루프스를 힐긋 보고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고를 꺼냈다.
“일단 기력이 쇠해져 마법으로 기력을 보충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친 부위에 연고를 발라야 할 것 같습니다.”
케릭스에게 맞은 볼은 사흘이 지나면서 붓기는 빠졌지만 상처는 아직도 심각했다. 오르페는 연고를 두툼하게 상처에 발랐다. 그가 궁의 경력을 걸고 만든 특제연고라 효과는 탁월하였다.
“등. 등도 상처가 있다.”
루프스가 등에 도자기 조각이 박혔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르페에게 말했다. 오르페는 쩔쩔매면서 루프스에게 말을 올렸다.
“제가 감히 루프스님의 펠릭스 다우스인 레티티아님의 옷에 손을 대어도 되는지요.”
“아니.”
“그럼 어찌…….”
루프스가 유채의 목을 받치고 허리를 끌어올려 몸을 일으켜 세웠다. 루프스는 익숙하게 드레스의 옆의 여밈을 풀어내었다. 유채의 하얗고 동그란 맨 어깨가 드러났다. 오르페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서 눈만 굴렸다. 유채의 옷이 허리까지 떨어져 내렸다. 루프스는 손을 뻗어 여성용 속옷인 가슴가리개까지 풀었다. 가슴가리개가 바닥에 떨어지고 유채는 맨가슴을 드러낸 반나체가 되었다.
루프스는 저 뱀 수컷에게 유채의 맨가슴을 보여줄 수 없어,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뒤집어서 내려놓았다. 유채의 맨가슴이 그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인 특유의 말캉한 느낌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루프스는 드러난 레티티아의 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이구.”
늙은 궁의의 입에서도 안타까운 탄식이 새어나왔다. 곪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피부는 원래의 색이 무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그죽죽했다. 오르페는 아마 이 암컷 마레 위르는 제 등에서 감각을 느끼지 못한 지 오래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르페는 깨끗하고 따뜻한 물로 유채의 등을 닦았다. 검게 굳어있던 피들이 닦이고 상처들이 보다 명확하게 보였다. 다행히 도자기 조각이 상처에 남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르페는 연고를 한 움큼 떠서 상처 위에 내려놓았다. 유채가 아픈 것인지 몸을 움찔거렸다.
“계속해라.”
오르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연고를 상처 위에 덕지덕지 발랐다. 그 후에는 붕대를 꺼내었다.
“이걸 두르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등인지라 연고가 쉽게 벗겨질 것 같습니다.”
오르페는 되도록 유채의 몸에 손이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붕대를 둘렀다. 붕대가 유채의 가슴의 위치까지 올라오자 루프스는 오르페의 손에서 붕대를 빼앗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에 붕대를 끝까지 매어주었다.
“당분간은 상처에 물이 닿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몸의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잘못하면 독한 감기에 걸리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다. 나가봐.”
오르페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루프스는 유채의 등이 침대에 닿지 않도록 눕혀주었다. 흘러내린 옷은 아슬아슬하게 허리에 걸쳐져 있었다. 유채는 미약한 신음소리를 냈다. 꼴이 아까 전 안아 올렸을 때보다는 나았다.
‘잘못했어요.’
그 암컷 토끼의 목줄을 움켜쥐자마자, 유채는 여태껏 그가 들어본 목소리 중에 가장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프스는 그 모습에서 또 다시 기시감을 느꼈다. 그 기시감 때문에 가슴에 돌이 찬 것처럼 무거워졌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약한 마음 따위는 그때 이후로 가진 적이 없었다. 루프스는 긴 손가락으로 유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임기응변은 훌륭했다고 하지.”
그 암컷 토끼를 살리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자존심이 상해서 운 것이고. 참 한결같은 암컷이었다. 꺾일까 싶어도 꺾이지 않았다.
“자. 그럼. 너는 어떻게 해야 네 자존심을 꺾거나 내게 무릎을 꿇을까?”
동물을 길들이는 데에는 채찍과 당근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채찍의 역할이 가장 컸다. 어떤 채찍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것이 동물을 길들이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채찍의 강도가 약한 것인지, 아니면 적절한 채찍을 사용하지 못한 것인지. 분명한 것은 이번에 루프스가 사용한 채찍은 유채에게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프스는 예전보다 윤기가 없어진 레티티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하!”
루프스는 부지불식간에 조금 전에 제게 아주 살짝 스치고 갔던 가슴의 감촉을 떠올렸다. 꼴에 암컷인가 싶었다. 그 역시 이미 죽었지만 암컷 형제가 있었고 골칫덩어리에 좀 가까운 암컷 친척이 있었기에 수컷으로서 시선을 위로 들어서 그 반라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예의를 지켜주었다. 유채는 그의 펠릭스 다우스이므로 그런 예의는 지킬 필요 없음에도 그리했다.
그럼에도 스치듯이 보았던 유채의 가슴은 농염한 풍만함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도 경험 없는 숫총각은 아닌지라 나름 여인의 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유채의 가슴은 풍만한 것과 거리가 백만 배는 멀었다. 얼굴에 흐르는 묘한 색기와 달리 몸은 그냥 미숙한 아이와 같았다.
‘요즘 내가 암컷이 궁했나.’
루프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려 있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울페스 헤르티아가 가져온 진귀한 암컷쯤으로 생각했다. 평소 보던 마레 위르 암컷과는 다르게 생기고 신이 빚은 것과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암컷. 하필이면 생일 전날 ‘그 악몽’을 꾸어 불안한 차에 제게 들어온 진상품이었다. 스스로도 약간은 고약한 취미인 것은 알았지만, 맹수를 길들이는 것처럼 마레 위르도 잘 길들여 제 말에 따르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날 꾸었던 악몽이 한동안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단번에 헤르티아의 진상품을 받았다.
그는 수많은 맹수들을 길들여 왔고 길들일 수 있었다. 맹수보다 약한 마레 위르 암컷쯤은 쉬이 다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가두고 세상과 고립시켜 고독의 공포를 알게 하고 제게 굴복시켜 이 상황에 체념하게 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한데, 유채는 그가 알고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마레 위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수인을 제 편으로 만들지 않나, 자신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었는데도 바락바락 대들며 그 눈빛을 꺾지 않지 않나, 잘못을 비는 순간에도 형형한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지 않나.
그리고 그게 자신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바닥에 엎어지게 내버려 둘 암컷을 부축하지 않나, 더 심한 상처들을 보았을 때도 놀라지 않던 심장이 겨우 그 등의 상처를 보고 놀라지 않나.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젠장.”
저 암컷의 가슴이 풍만하기라도 했으면 이해했을 것이다. 수컷 중 가슴 큰 암컷을 안 좋아하는 놈들이 있겠나? 암컷의 큰 가슴에 환장하는 것이 수컷이었다. 그런데 얼간이처럼 제대로 보지도 못한, 풍만하지도 않은 가슴이 팔뚝을 스치고 지나간 촉감을 잠시 떠올렸다고 몸이 반응했다. 몸이 달아올랐다.
루프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손이 잠이 든 유채의 목에 닿았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의식이 없는 중에도 숨이 막히는지 유채는 몸부림을 치면서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래, 이 암컷은 제 손짓 한 번이면 숨이 막혀 죽거나 목이 부러져 죽을 수 있었다. 루프스는 손에 힘을 풀었다. 동시에 몸부림을 치던 유채의 얼굴도 다시 평온해졌다.
모두 이 작은 암컷을 길들이지 못해서 나타난 결과였다. 이제부터는 이 건방진 마레 위르 암컷과 자신과의 자존심 싸움이 될 터였다. 저것이 계속 기어오르니 신경전에서 밀려서 휘둘리는 것이었다. 유채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루프스 그 자신이고 유채를 휘두를 수 있는 것도 루프스 자신이어야 했다. 저것이 길들여지지 않으니 제 몸이 이상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루프스는 고개를 숙여서 잠든 레티티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어나면, 기대해도 좋아. 레티티아.”
유채가 블루벨을 보는 눈을 보았다. 낯선 세상에서 유일한 버팀목을 보는 그런 눈이었다.
“내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지옥을 보여주마. 채찍이 통하지 않았다면 무기를 바꿔야겠지.”
유채는 며칠을 정신도 못 차리고 앓았다. 비를 맞은 여파로 결국 열 감기에 걸렸다. 유채가 정신을 온전히 차렸을 때는 등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 더 이상 붕대를 갈지 않아도 되었을 때였다. 유채는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손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트가 느껴졌다.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유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참. 팔자 좋은 펠릭스 다우스군.”
그 소름끼치게 듣기 싫은 목소리에 유채는 고개를 돌렸다. 루프스가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유채는 몸을 뒤로 빼려고 하다가 주먹을 움켜쥐고 턱을 치켜들었다.
“블루벨은…… 어디 있어요?”
“그 암컷 토끼 일을 내게 말하려면…….”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뒷머리를 꾹 눌렀다. 유채의 고개가 앞으로 꺾였다.
“고개부터 숙이고 해야지.”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꾹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종이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라.”
유채는 처음 보는 이상한 글자를 마치 한글을 보는 것처럼 읽는 자기 자신에 어이없어 하며 글을 읽었다. 그리고 손을 떨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손을 떠는 것을 보고 침대 기둥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면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를 너를 위해 내가 친히 설명하자면, 토끼 수인 일족의 수장인 레푸스 트레모르가 일족의 처분권을 나에게 넘긴다는 내용이다.”
블루벨이 말했었다. 땅이 있는 일족의 일원이 죄를 지으면 처벌은 그 일족의 수장이 내린다고 하였다. 그러니 자신은 안전하다고 했었다.
“내게 죄를 지은 건방진 암컷 토끼는 내가 처분해야지, 안 그렇나? 레티티아.”
“내가,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잖아요…….”
“그건 내 귀여운 레티티아가 내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빈 것이지. 그 암컷 토끼와는 관련 없다고 말해줘야겠군.”
유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루프스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제 펠릭스 다우스는 제 앞에서 저렇게 떨어야 하는 존재여야 했다.
유채는 시트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루프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 그 겁을 상실한 암컷 토끼는 살아 있다.”
유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루프스는 번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루프스의 궁녀들이 들어왔다.
“때를 벗겨내고 곱게 치장시켜라.”
그 말과 동시에 궁녀들이 유채를 제압하듯이 팔을 잡았다.
“고분고분 말을 잘 따르면 그 암컷 토끼를 보게 해주지.”
유채는 입술을 깨물며 궁녀들을 얌전히 따라갔다.
* * *
유채는 막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힘없는 몸으로 거친 궁녀들의 손길을 견뎠다. 치장을 끝내고 그들의 손에 이끌려 루프스가 있다는 곳으로 걸어갔다. 말뚝에 묶여 있기 전과 똑같은 상태였다. 꽃향이 나는 따뜻한 물에 씻고, 장미향이 나는 향유를 몸에 발랐다, 동백기름을 발라서 윤기를 낸 머리에 루프스의 취향인 듯한 하얀색의 옷을 입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머리에 올린 장신구들이 화려해졌다는 것이다.
유채는 왜 조선시대에 가체에 목이 부러져 죽은 사대부 여자들이 생겼는가에 대한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에 갖가지 장신구들이 꽂히니 목이 뻐근할 정도였다.
도착한 곳은 마치 로마의 콜로세움과 같은 원형의 경기장이었다. 루프스는 평소와 별 다를 것 없는 복장으로 유채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원래는 내가 저기에서 봐야 하는데.”
루프스가 유채의 몸을 돌려서 저 위, 넓고 평평한 그늘이 진 공간을 가리켰다. 루프스는 유채의 턱을 손가락으로 잡고 돌렸다.
“마레 위르의 눈이 수인의 눈보다 좋지 않은 것을 고려해서 가까운 자리로 내가 친히 옮겼다.”
루프스는 유채를 이끌고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았다. 주위에는 궁녀들이 시중을 들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다. 유채는 관람석을 가득 메운 수인들을 보며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왠지 싸늘해지는 팔을 감싸며 그에게 물었다.
“이건 뭐죠?”
“보면 알지.”
병사들이 한 남자 돼지 수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곧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채는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와 짐승과의 대결도 왕왕 있었다고 했다. 유채의 몸이 차갑게 굳어갔다.
철창이 열리고 굶주린 늑대 다섯 마리가 튀어나왔다. 보통의 늑대보다 배는 큰 늑대였다. 그 늑대들의 목에는 유채의 목에 걸려 있는 것과 똑같은 은색의 파렌티아가 걸려 있었다.
“내 펠릭스 다우스이지.”
루프스가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낮고 소리로 속삭였다. 굶주린 늑대들은 돼지 수인을 공격했다. 그는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수인은 모두 동물로 변할 수 있고 동물로 변하면 수인인 상태보다 최소 두 배의 힘을 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저 남자는 위급 상황임에도 동물로 변하지 않았다. 늑대들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유채는 그 잔인한 광경에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이러면 안 되지. 레티티아.’
루프스가 유채의 턱을 잡고 콜로세움이 보이는 쪽으로 고개를 고정시켰다. 루프스가 유채의 귓가에 음산하게 속삭였다.
“너를 위해 마련한 자리인데.”
유채는 루프스에게서 벗어나 늑대에게 산채로 잡아먹히는 잔인한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 유채의 입에서 뜻 모를 신음이 새어나왔다.
“아……. 아…… 아……!”
“우리는 범죄자에게 세리아(Seria: 수인의 동물화를 막는 독약)를 먹여서 맹수의 먹이로 던져 주지.”
남자는 사지가 뜯겨나갔음에도 살려달라고 외치며 버둥거렸다. 유채는 몸을 떨었다.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외마디 비명밖에 지르지 못했다. 몸을 떠는 것 이상의 공포가 머릿속에 자리했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루프스가 붙잡고 있어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유채는 눈을 감는다는 간단한 행위도 하지 못하고 루프스의 손에 붙잡혀 몸부림을 치면서 남자의 머리가 뜯기고 뇌수가 터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 아아아아악!”
유채가 루프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의 손을 긁었다. 루프스는 그것이 간지러운 듯이 코웃음을 치고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봐두는 것이 좋을 거야.”
늑대들이 까드득 소리를 내며 뼈를 씹어 먹고 있었다. 늑대들의 주둥이는 수인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겁에 질린 유채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루프스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 그가 입술로 유채의 눈물을 훔쳤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저기에 있는 것은 레티티아, 너일 수도 있다.”
루프스는 유채가 옴짝달싹도 못하게 붙들고 손으로 턱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유채는 그렇게 다섯 명의 수인이 팔이 뜯겨 나가고 머리가 뽑히고 산 채로 다리가 잘려 나가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유채는 눈물범벅이 되어 잔혹한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루프스의 힘이 워낙 억세어 꼼짝없이 그의 품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루프스가 억세게 잡은 턱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루프스는 징그럽게도 제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잘 보라는 말을 계속 속삭였다.
“아. 이번이 절정이지.”
루프스가 빈정거리면서 유채의 턱을 움켜잡고 그녀의 볼에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
“잘 봐둬. 오늘 처형의 절정이 될 마지막 범죄자니까.”
그 말과 함께, 원형 경기장 안에 마지막 수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유채는 그제야 아까부터 엄습하던 불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유채는 넋이 나가서 축 늘어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반항이 멈추자 그녀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이내 유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살기 어린 눈으로 루프스를 바라보며 온 힘을 다해서 악을 썼다.
“차라리 날 괴롭혀! 날 괴롭히라고!”
원형 경기장으로 들어온 마지막 수인은 블루벨이었다.
유채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여리디여린 블루벨이 다섯 늑대들의 밥이 되기 직전이었다.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할 수만 있다면 눈앞의 남자를 목을 졸라서 죽여 버리고 싶었다. 대체 블루벨이 뭐를 잘못했는가!
“차라리 나를 죽여! 나를 죽이라고!”
유채는 목이 쉴 정도로 악을 쓰면서 외쳤다. 그러자 루프스가 그녀의 볼을 소름끼치도록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내가 일전에 말을 하지 않았나?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수컷이라고. 네가 나에게 용서를 빌었으니, 나는 너의 목숨을 살려주었지. 어떻게 내가 너를 죽일 수 있겠나?”
루프스는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유채는 그의 잔학성에 소름이 돋았다.
“잘 봐둬라. 내 귀여운 레티티아의 친구의 마지막이자, 내 명을 어긴 자의 말로이자, 내 경고이니.”
루프스는 넋이 나간 것처럼 눈동자가 텅 비어버린 유채를 바라보았다. 몸이 힘들 때에는 정신적으로도 궁지에 몰리기가 쉬웠다. 딱 봐도 지금 유채는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었다.
늑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루벨은 토끼 수인답게 앞선 수인들보다는 빠른 몸놀림으로 늑대들을 비교적 잘 피했다. 하지만, 늑대들은 너무 컸으며 수가 많았다. 유채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제 옆에서 블루벨의 처형 과정을 마치 놀이라도 되는 모양으로 흥미롭게 바라보는 루프스를 증오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보기 드물게 저에게 신경을 덜 쓰고 있었다.
유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궁녀들도 모두 경기장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유채는 눈물을 닦고 조심스럽게 일어나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자신이 저기에 뛰어들어 블루벨을 보호하면 어쩌면 블루벨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유채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뛰었다.
“어! 레티티아님!”
유채를 발견한 궁녀가 외쳤다. 유채는 담을 한 번에 뛰어넘어 경기장 안으로 엎어졌다. 그 바람에 머리에 꽂았던 화려한 장신구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릎이 깨져서 피가 흘러나왔다. 유채는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무시하고 블루벨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루프스의 늑대가 벌건 아가리를 벌려 유채의 머리를 물어뜯으려고 하였다.
“Resto(멈춰).”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경기장 안을 울렸다. 그 말과 동시에 유채에게 달려들던 늑대가 아가리를 다물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유채는 블루벨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루프스가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유채는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렇게 유채를 내려다보던 루프스가 픽하고 웃더니 궁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마레 위르들이 쓰는 검(劍)을 가져와라.”
궁녀가 검을 찾으러 간 동안 다섯 마리의 늑대들은 유채와 블루벨의 앞에 서서 피가 섞인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유채와 블루벨을 물어뜯을 기색이었다. 유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몸이 떨렸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무너지면 블루벨은 죽을지 몰랐다.
“레티티아님.”
블루벨은 유채가 너무 고마웠다. 블루벨은 두려움과 고마움, 미안함으로 범벅이 되서 울었다. 유채는 블루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미안해 블루벨…… 내가 미안해…….”
“아니에요. 이렇게 위험하신 곳에 뛰어드시면 어떡해요. 레티티아님.”
유채는 자신을 걱정하는 블루벨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유채는 블루벨을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남자로부터 블루벨만큼은 지킬 생각이었다.
관람석의 수인들은 유채와 블루벨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경기가 멈춘 것에 관해 짜증을 내었다. 유채는 블루벨을 끌어안고 그 모든 소음을 견뎠다.
바람이 훅 불더니 알싸한 통증과 함께 유채의 볼 옆을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얀 볼 위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유채는 제 옆에 꽂힌 기다란 검에 시선을 주었다. 유채는 루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프스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입을 열었다.
“변덕이다.”
루프스는 검과 자신의 펠릭스 다우스인 늑대들 그리고 막 이제 회복된 유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레티티아. 네가 내 펠릭스 다우스 중 한 마리에라도 저 검으로 상처를 입힌다면 그 암컷 토끼를 살려주마.”
유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채는 블루벨을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루프스는 자리에 앉아 나른하게 몸을 뒤로 기대었다. 마치 좋은 연극을 관람하겠다는 태도였다.
“말했지 않나?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수컷이라고.”
루프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유채는 땅에 박힌 검을 집어 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묵직한 검이 유채의 손안에 들어왔다. 유채는 어릴 때 호신술로 검도 학원에 다닌 적 있었으나, 그건 이미 십 년 전의 일이었다. 유채는 손에 든 검과 앞에 있는 거대한 늑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인간과 늑대는 생태학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었던 동물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서식지가 겹친다는 것. 그랬기에 늑대 무리가 중세 유럽의 도시를 공격한 적도 있었다. 인간이 늑대에 맞서 본격적으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총이라는 무기가 생기면서였다. 이런 냉병기로는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늑대에게 맞서기는 무리였다.
애초에 사람은 비슷한 체급의 동물에 비해 지구력 외에는 나은 것이 없었다. 비슷한 체급과 비교해도 그 정도인데, 몸집이 몇 배나 크고 무게도 훨씬 무거운 늑대,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다섯 마리와 대적한다? 제 아무리 무기를 쥐어주었다고 해도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해야 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약속 지킬 건가요?”
“레, 레티티아님! 위험해요!”
블루벨이 유채의 팔에 매달렸다. 블루벨은 유채라도 살기를 원했다. 게다가 유채는 약하디약한 마레 위르 암컷이 아닌가? 어떻게 저 거대한 늑대들과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루프스는 유채의 여왕 같은 눈을 마주하며 보기 드물게 호탕하게 웃었다. 참 수컷의 정복욕을 돋우는 눈동자였다.
“약속하지. 그럼 하겠다는 건가?”
유채는 두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말아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루프스는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장담하건대 얼마 되지 않아 유채의 입에서는 살려달라는 비명이 나올 것이다. 자신이 키운 늑대들은 피에 굶주린 잔혹한 놈들이었으며 능력이 출중했다. 오늘은 그저 제게 반항하면 어떤 꼴이 나는지를 직접 보여주기 위해 부른 것인데, 유채는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기대 이상의 짓을 하였다.
루프스는 레티티아와 블루벨이 준비가 된 것을 보고 늑대들에게 명령어를 뱉었다.
“Exagito(물어).”
루프스의 명령과 함께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마음의 준비는 했다지만 유채는 막상 늑대가 달려들자 다리가 굳었다. 늑대 한 마리가 비교적 만만한 유채를 노리고 들어왔다. 크게 휘두른 앞발의 발톱이 볼을 긁어버리려고 달려오는데 블루벨이 유채를 잡아당겨서 그것을 피했다. 블루벨은 수인답게 강한 팔 힘으로 유채를 데리고 달렸다. 혼자 달릴 때보다는 속도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늑대들보다는 빨랐다.
“블루벨! 위험해! 차라리…….”
나를 버리고 혼자 도망가라는 말을 하려는데 블루벨은 유채의 팔을 더욱더 꽉 잡았다.
“죽고 싶으셔서 환장하셨어요? 저 늑대들은 루프스님이 심혈을 들여 기른 살인 늑대들이에요. 물리면 죽어요!”
블루벨은 토끼 일족다운 빠르기로 늑대들을 아슬아슬하지만 요리조리 피했다. 하지만 유채는 피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루프스가 내건 조건은 늑대 가까이에 있어야만 이룰 수 있었다. 늑대를 찌르지 못해도 저는 살 수 있다. 하지만 블루벨은 아니었다. 블루벨의 목숨이 제게 달려 있었다.
“악!”
늑대의 발톱이 블루벨의 다리를 긁었다. 블루벨은 앞으로 고꾸라지며 그 바람에 유채의 팔을 놓쳐 버렸다. 유채는 땅바닥을 굴렀다. 거친 맨바닥에 팔꿈치가 쓸렸다. 늑대 한마리가 유채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유채는 몸을 굴려 가까스로 늑대를 피했다. 수인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흘러내린 머리를 넘기면서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세 마리가 블루벨을 쫓고 있었고 한 마리는 제 앞에, 다른 한 마리는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늑대들이 처음과는 달리 배가 부른 상태라 아까처럼 악착같이 달려들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늑대는 유채를 마치 고양이가 잡아놓은 쥐를 데리고 놀 듯했다. 그것이 유채에게 기회라면 기회였다. 유채는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오금이 저렸다. 쓰러질 것만 같은 다리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붙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늑대가 달려들었다.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맘을 먹었지만, 막상 달려오는 늑대를 마주하자 또 다시 덜컥 무섬증이 일었다. 유채는 몸을 돌려서 늑대를 피했다. 장난삼아 공격한 것인지 깊숙하진 않았지만, 발톱은 세우고 있었다.
“꺄악!”
오른쪽 어깨가 발톱에 길게 찢겼다. 유채는 어깨를 감싸고 신음을 삼켰다.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왼손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늑대는 그녀의 오른쪽 어깨만 집요하게 공격했다. 어깨에서 시작된 통증은 이내 유채의 몸을 둔하게 만들었다.
“악!”
“블루벨. 악!”
유채는 블루벨의 비명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가 아차 하곤 자신을 공격하는 늑대를 피하기 위해서 몸을 옆으로 굴렸다. 다친 어깨가 바닥에 눌리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그녀의 주위를 늑대 두 마리가 빙빙 돌았다. 둘은 마치 유채를 놀리듯이 덤빌 듯 말 듯 번갈아가면서 움찔거리고 있었다. 유채는 검 손잡이를 쥐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피할 길도 없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지켜야 하나.’
유채는 늑대들을 보았다. 잘 골라야 했다. 누가 먼저 자신을 공격할 것인지…… 유채는 늑대들이 달려들어도 겁을 먹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마 이게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었다.
“루프스님. 저러다가는…….”
헤나가 늑대 두 마리에게 둘러싸인 유채를 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약한 마레 위르였다. 저런 상황이면 죽을 것이 분명했다. 헤나는 태연한 표정의 루프스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태연했다. 아니, 유채를 죽을 위기에 몰아넣고 죽기 직전에 상황에 처하게 했음에도 그의 표정은 지나칠 정도로 차가웠다. 하나 헤나는 루프스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난간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디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지켜보지.”
독한 암컷.
루프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독해도 너무 독했다. 제 목숨보다 자존심이 소중한 건가? 그는 팔짱을 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늑대들을 훈련시킬 때, 「Exagito(물어)」는 상대의 목숨을 끊을 때까지 공격하라는 명령으로 가르쳤다. 게다가 저 다섯 늑대는 어지간한 수인들도 동물화하여 죽이기 힘들 정도로 강하고 집요하고 잔혹했다. 제가 제때 내려가서 늑대들을 제압하지 못하면 유채는 정말로 죽을 수 있었다. 초조했다. 그는 초조한 손끝을 감추기 위해 손으로 팔꿈치를 움켜잡았다.
헤나는 팔짱을 끼고 제 팔꿈치를 잡고 있는 루프스의 손을 보았다. 그녀는 경기장 안의 유채에게 고개를 돌렸다.
늑대 두 마리는 시선을 교환하고 누가 먼저 공격할지를 결정한 것 같았다. 유채의 앞에 있던 늑대가 먼저 뛰어들었다.
“아악!”
첫 번째 늑대가 유채의 오른쪽 어깨를 물었다. 유채는 제 어깨를 문 늑대가 또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목덜미에 검을 찔러 넣었다. 늑대의 목덜미에서 피가 튀었다. 목을 공격당한 늑대가 도망치는 대신 유채의 오른쪽 어깨를 문 채로 매달렸다. 유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검을 떨어뜨렸다. 어깨의 통증을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Resto(멈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채의 어깨를 물었던 늑대가 뒤로 물러났다. 유채는 앞으로 넘어졌다. 머리가 아득해지고 눈앞이 새까맣게 변한 채로 유채는 정신을 잃었다.
“세상에…….”
블루벨은 자신을 공격하려다 멈춘 늑대들 사이로 루프스를 보았다.
거대한 은빛의 늑대였다.
관람석 안의 수인들이 모두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루프스의 동물형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동물형이 아닌 위르형만으로도 일반 수인의 동물형을 능가할 만큼의 강자였기에 그가 은빛의 거대한 늑대로 변하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거대한 은빛 늑대가 등장하자 그 기에 눌린 펠릭스 다우스인 늑대들이 납작 엎드렸다. 루프스는 어깨가 찢겨져 피투성이가 된 유채의 앞에서 멈추어 섰다.
루프스가 머리를 숙이더니 혀로 유채의 상처를 핥았다. 한번 핥을 때마다 피가 멎었다. 블루벨은 멍하니 그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늑대 수인의 침에 지혈 효과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것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루프스 덕에 유채의 상처가 완전히 지혈되었다. 피가 닦이고 드러난 상처는 찢어진 헝겊조각처럼 처참했다.
[궁의를 대기시켜라.]
궁녀들과 궁관들의 머릿속에 루프스의 목소리가 윙하고 울렸다. 은빛 늑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루프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루프스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고 쓰러진 유채의 몸을 안아 올렸다.
독한 것.
설마 제 어깨를 내어주면서까지 늑대를 찌를 줄은 몰랐다. 조금만 늦었으면 늑대에게 어깨를 뜯기거나 과다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정신을 막 차린 몸으로 이만큼 움직인 것이 더 대단한 것이었다. 유채가 몸을 움직인 원인은 자존심이 아니었다. 루프스는 용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상처투성이의 블루벨을 바라보았다. 유채가 움직인 이유는 저것 때문이다. 저것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루프스는 품 안의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하는 행동거지나 말하는 것 그리고 고결한 정신으로 유추해 볼 때 곱게 자란 아가씨라 보는 것이 옳았다.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는 고생 한번 한 것 같지 않았다. 한없이 약해 쉽게 꺾일 것 같았던 유채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보통 마레 위르면 벌써 미쳤을 일들을 겪고도 꿋꿋했다. 그게 저를 자극했고 정복욕인지 소유욕인지 아니면 아집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가 축 늘어지지 않도록 자세를 고쳐 안아주었다. 곱게 치장시켜 놨건만 다시 꼴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헤나.”
“예. 루프스님.”
헤나는 어느새 루프스의 뒤에 와 서 있었다. 루프스는 싸늘한 시선으로 늑대들의 발톱에 긁혀 엉망이 된 블루벨을 내려다보았다.
“저 암컷 토끼를 케릭스에게 보내서 알아서 적당한 감옥에 두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헤나의 눈짓에 병사들이 블루벨의 양팔을 붙잡았다.
“저! 루프스님!”
블루벨은 불경스럽더라도 루프스를 불렀다. 루프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레티티아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모두 제가…….”
블루벨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살기에 입을 다물었다.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살기였다.
“그러니. 건방진 너에게는 아주 적합한 벌을 내려주마. 기대하거라. 지옥이 무엇이지 내 친히 보여주마.”
블루벨은 다리의 힘이 풀려 축 늘어졌다.
오르페는 속으로 이제는 마레 위르 전문 의사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면서 루프스 앞에 섰다. 등의 상처가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어깨가 으스러져서 돌아왔다. 오르페는 루소리움에서 일어나는 처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피하는 편에 속했다. 그런데 이번에 듣자하니, 저 마레 위르 암컷이 정말 제대로 일을 쳤다고 했다. 오르페는 유채를 치료하며 혀를 찼다. 그냥 굽히면 될 것을, 그 조금 굽히는 것이 싫어 매번 엉망이 되어 돌아오는 유채가 천하에 다시없을 얼간이로 보였다.
“어깨는 상처를 봉합해 두었습니다. 상태가 조금 심각하여 마법을 이용하여 봉합을 했으나, 충격이 가해지면 상처가 다시 터질 것입니다.”
“수고했다. 가봐라.”
오르페는 고개를 숙이고 루프스의 방을 나갔다. 루프스는 이불을 걷어 유채의 옆에 누워 한쪽 팔로 상체를 지탱했다. 당연히 살려달라고 제게 빌 줄 알았다. 아무리 아끼는 수인이라고 하더라도 제 목숨이 가장 소중한 법이었다. 제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살려달라고 외칠 줄 알았다.
“너는 참 신기해. 레티티아.”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생긴 것은 한없이 연약하게 생긴 주제에 고집은 소처럼 강했다. 끝까지 그 건방진 여왕 같은 눈을 죽이지 않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을 보았다. 저 입술에서 제 이름을 부르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고고한 자존심을 꺾는 말을 기대했다.
“너는 내게 지금 꺾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너를 꺾을 방법을 찾아냈지.”
루프스의 손가락이 유채의 도톰한 입술을 쓸었다. 저 고고한 입에서 굴복의 말이 나올 것이다. 이번에 그가 쥔 채찍은 그녀의 약점이었다. 루프스는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유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난 크면 오빠와 결혼할래!’】
부지불식간에 루프스의 머릿속에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루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에리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아이의 마지막도. 저 암컷과 에리카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에리카는 어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에 아버지의 회색 눈을 가졌었다.
【‘살려줘…… 오빠!’】
열셋의 마지막 겨울, 그는 비겁했고 겁쟁이였다.
루프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다 저 암컷이 제게 복종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그때의 비참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루프스가 그 시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든 수인의 위에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수인이 그에게 복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펠릭스 다우스인 유채도 복종해야 했다. 저 건방진 암컷이 제게 반항하니 그 질척하고 어두운 과거가 다시 생각나는 것이다.
“레티티아.”
그가 유채의 잠든 귀에 속삭였다. 그녀는 그 음산한 목소리를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들은 것인지 몸을 들썩거렸다. 루프스는 유채를 진정시키려는 것인지 쉿 하며 그녀의 왼쪽 어깨를 토닥였다.
“일어나게 되면 말이다.”
어깨를 토닥이던 손이 유채의 심장이 뛰고 있는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손에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마레 위르 특유의 느긋하고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었다. 루프스는 그것을 느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루프스는 조용히 유채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유채의 잠든 얼굴이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마르고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 신비로운 분위기는 여전했다. 루프스는 스스로가 암컷이라고 특별히 관대함을 베푸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죽이고도 남았을 짓을 한 펠릭스 다우스임에도 유채를 계속 데리고 있는 데는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는 유채의 볼을 만졌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을 손으로 쓸었다.
그는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이 암컷은 확실히 제 취향으로 생기기는 하였다.
“레티티아. 네가 지금 잠든 것만큼 얌전히만 군다면, 나는 네게 최상의 것을 제공할 용의가 있어.”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고분고분한 펠릭스 다우스에게는 자애로웠다. 루프스는 유채가 깨어나기를 기대하며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유채 어깨 상처가 터지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 * *
루프스는 유채가 악을 쓰는 소리를 들으면서 방을 나왔다. 마레 위르의 속담 중 이런 것이 있다고 하였다. 장수를 쏠 수 없으면 말을 쏘아라. 지금의 상황이 딱 그 꼴이었다. 유채는 제 몸보다 자신이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의 몸을 더 챙겨주는 이였다. 그것이 루프스가 유채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이 소용이 없었던 이유였다. 유채의 목줄을 휘어잡는 법은 예상보다 간단했다. 유채가 아끼는 이들을 인질로 내세우면 된다.
“그 토끼 암컷은 어떻게 했나?”
“일단 타박상만 대강 치료해서 다시 지하 감옥의 냉궁에 집어넣었습니다.”
케릭스가 의자에 앉은 루프스에게 대답했다. 케릭스는 루프스의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는 묘한 광기가 돌고 있었다. 그리고 케릭스는 그런 광기를 본 적이 있었다. 루프스가 열넷에서 열다섯으로 넘어가던 때에도 저런 눈을 했었다. 베니니타스의 죽음으로 나른하게 가라앉았던 광기가 유채를 만나고 다시 생긴 것이다.
“죽지만 않게 해. 레티티아의 목줄이거든.”
빌어먹을. 암컷 마레 위르.
솔직히 말해 케릭스는 그녀가 죽기를 바랐다. 루프스의 눈에 저런 생기에 가까운 광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나타나면서였다.
케릭스는 루프스를 아주 어릴 적부터 보았다. 그의 나이 일곱에 전대 루프스의 아들인 현 루프스 라이칸을 만났다. 로보의 신하였던 아버지가 케릭스를 라이칸과 동갑이라는 이유로 놀이친구로 들여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의 루프스는 절대 지금과 같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늑대 수인 치고는 꽤나 다정다감했었다. 물론 그 나이대의 남자 아이들답게 불같은 면도 있었지만 그만큼 금방 가라앉았으며 그 또래의 천진난만함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진 후, 실종되었던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열네 살의 여름이었다. 케릭스는 똑똑히 기억했다. 위르형만으로 동물로 변한 수인들을 도륙하던 루프스를. 공포 그 자체였다. 루프스의 입가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광기 어린 미소가 물들었다.
【‘오랜만이야, 케릭스.’】
열셋의 다정다감했던 소년은 사라졌다. 피에 미친 광기를 보이는 절대적인 군주가 서 있었다. 그 강함으로 흩어져 있던 늑대 수인을 통일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리카님은….’】
【‘죽었어.’】
그는 잘 따르던 스승, 베니니타스의 목숨을 끊기 위해서만 움직였다. 그 광기 어린 눈빛을 케릭스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결국 루프스는 베니니타스의 목숨줄을 끊었다. 청회색의 눈에 돌던 광기는 가라앉았고 그 자리를 무료함이 메웠다.
그 후, 그는 펠릭스 다우스로 삼은 짐승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제 말을 따르는 식인 동물로 만드는 일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이 토스 호무스는 십 년 간 평화로웠다.
“재미있어. 간만에 재미있었어.”
루프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케릭스는 그 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그 요망한 암컷 마레 위르를 만난 후 루프스의 행동이 미묘하게 변했다. 조금 다르게 생겼다고 하나 결국은 마레 위르였다. 정 마레 위르를 펠릭스 다우스로 삼고 싶다면 미노르 호무스(Minor Humus: 소 수인 일족의 땅)와 울피누스 호무스(Vulpinus Humus: 여우 수인 일족의 땅) 사이의 해안을 무단점거하고 있는 건방진 마레 위르들 틈에서 어린아이를 하나 빼오면 되었다. 원래 동물들은 어린 나이에 훈련을 받아야 주인 말을 잘 듣듯이, 마레 위르 역시 마찬가지임에 틀림없었다.
원래 루프스는 제 말을 듣지 않는 펠릭스 다우스는 가차 없이 체벌하여 죽여 버렸다.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제가 그것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던 상관없었다. 제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녀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대했다.
“케릭스. 오늘 처형된 시신들 모아왔나?”
“예. 명령하신 대로 모아왔습니다.”
“그럼 그걸 붉은 방에 넣어놔. 썩지 않게 보존 마법을 걸어서.”
루프스는 팔에 턱을 괴었다. 운이 좋았다. 그는 유채가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또 하나 알아냈다. 그녀는 수인들의 몸이 늑대에 의해 찢겨질 때마다 몸부림을 치면서 괴로워했다. 공포에 질렸었다.
“그건 왜……?”
“체벌실이라고 할까나.”
루프스가 탁자에 놓인 술잔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케릭스는 머리가 아파왔다.
집착인가 흥미인가.
막 진상된 마레 위르를 보았을 때만 해도 그는 예전과 같았었다. 마레 위르를 대면한 후로부터 미묘하게 하는 행동이 달라졌다. 이걸 펠릭스 다우스에 대한 집착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좀 독특한 것에 대한 흥미로 봐야 할지 케릭스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이상한 마레 위르가 루프스를 망치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케릭스는 주먹을 쥐었다.
죽여야 한다.
때를 봐서 그녀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검은 뱀이 되어 루프스를 감싸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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