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바다 밖 인간, 마레 위르[Mare Vir]
짝.
유채의 몸이 옆으로 날아갔다. 귀가 울렸다. 팔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던 그녀의 눈에 손바닥 쪽으로 돌아간 보석이 보였다.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유채는 반지의 보석에 살갗이 찢겨서 피가 흘러내리는 볼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갈색 머리카락의, 늑대의 귀와 꼬리를 가진 늑대 수인 여자가 무어라고 소리쳤다. 정말, 클리셰란 클리셰는 다 보는구나. 주인공 여자에게 황제가 관심을 보이면 악녀 역할의 높은 신분의 여자가 주인공의 뺨을 치면서 욕하는 장면이 한 번씩은 로맨스 소설에 등장했다.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유채는 맞은 여파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별 욕을 다 들었을 것 같았다.
“감히 그 천한 몸으로.”
블루벨이 예전에 말해준 적 있는 여자였다. 여자 늑대 수인 중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로 강자이며 권력욕이 엄청 강하다고. 이름이 젤다였던가? 참 이름답게 행동하는 여자였다.
유채는 제게 손가락질하는 여자를 눈을 치켜떠서 보았다. 여자의 손이 한 번 더 저를 내려치려고 하는데 옆에 있는 궁녀는 도울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유채는 헛웃음을 지었다.
군소 일족인 다람쥐 일족인 궁녀 아엘은 유채의 꼴을 보며 속으로 쌤통이라고 비웃었다. 솔직히 말해 아엘은 저 펠릭스 다우스를 ‘님’자를 꼬박꼬박 붙여서 부르며 모시는 것이 꽤나 자존심이 상했다. 마레 위르들이 약한 자신들의 일족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떠올릴 때마다 몸이 떨렸다. 그래서 틈만 날 때마다 레티티아를 거칠게 다뤘다. 약하디약한 마레 위르 암컷답게 조금만 힘을 줘도 아프다고 눈을 찌푸렸다.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끝까지 신음은 안 흘리는 것이 더 꼴도 보기 싫어 강도를 높여가는 중이었다.
아엘은 저 거만한 암컷 늑대도 만만치 않게 싫었지만 그래도 마레 위르를 싫어하는 마음이 더 커, 마음속으로 젤다를 응원하며 건방진 암컷 마레 위르의 콧대를 꺾어놓기를 바랬다. 겨우 펠릭스 다우스 주제에 루프스의 침실에 들어앉아 있으니 제가 여왕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눈빛이 당당한 것이 정말 짜증났다. 루프스가 무슨 생각으로 저 암컷을 침실에 들인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싶다가도 그녀의 얼굴을 보면 의문이 사라졌다.
저 늑대도 잘 아니까 더 이 지랄을 떠는 것이었다. 이 펠릭스 다우스는 암컷도 반할 정도로 예쁘게 생겼다. 화려한 장미보다는 우아하고 고전적인 작약이나 목련이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이엘은 젤다가 마치 남편에 정부에게나 할 법한 말을 쏟아내는 것을 들었다.
유채는 여자의 손이 다시 한 번 날아오기 전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저 여자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차라리 맞아도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은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코 저 여자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이다.
젤다가 유채의 말에 놀란 것인지 휘두르려던 손을 멈칫거렸다.
“루프스는 내 허리 놀림을 굉장히 좋아해. 미친년아. 그래서 오늘 루프스한테 한번 속삭여 보려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유채는 그의 방에 있을지언정 그의 침대에는 절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루프스와 살이 닿는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유채는 밤마다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잠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방바닥에 누워서 잤다. 루프스는 유채가 어디서 자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고 억지로 안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유채의 자존심을 비웃으며 얼어 죽지는 말라며 빈정거리면서 담요를 던져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유채가 불편하게 잘 동안 루프스는 넓은 침대에 누워서 잠에 들었다. 그도 악몽을 꾸긴 하는 것인지 이따금 땀을 뻘뻘 흘리며 일어나곤 했지만. 유채보다는 편하게 잤다. 유채는 자세가 불편하니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어서 항상 피곤했지만 루프스는 언제나 생생했다. 유채가 아침마다 피곤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루프스는 그녀의 자존심을 비웃고 제 일을 하러 나갔다.
“천상의 쾌락을 선사해 드릴 테니 거슬리는 암컷 하나 갈기갈기 찢어달라고, 루프스는 내 허리 놀림을 마음에 들어 하니 내 부탁을 들어줄지도 몰라.”
유채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젤다를 똑바로 보았다.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문이 막힌 것인지 유채에게 삿대질을 하며 ‘너, 너’만 계속 반복하였다.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내 앞에 무릎 꿇고 빌어. 잘못했다고.”
유채가 이런 종류의 괴롭힘을 당하고 산 기간이 무려 육 년이었다. 유채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잠시 구부러질 수는 있다. 하지만 영원히 굽히고 있지는 않는다. 그것이 유채의 신조였다.
동서고금을 비롯하여 온실은 돈지랄의 결정체 중 하나였다. 유채는 늦가을에도 푸른빛을 띠는 풀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온실 안은 딱 봄이었다. 다람쥐 수인 궁녀가 유채의 양팔을 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더니 뒤로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아까 한 말의 여파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평소라면 인사는커녕 팔을 더 세게 잡아 상처를 늘렸을 궁녀들이었다.
유채는 욱신거리는 오른손으로 길게 그어진 붉은 실금에서 흘러나온 피를 닦았다. 어깨를 다친 지도 한 달이 지났고 블루벨이 돌아오지 않은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유채는 체념이라기보다는 현실에 타협했다. 일단은 루프스의 기분을 맞춰주기로 했다. 블루벨의 목숨이 걸려 있을 뿐더러, 그 편이 나중에 틈을 만들기 쉬울 것 같았다.
더군다나, 지금 유채는 루프스의 침실에서 생활 중이었다. 탈출하기에는 최악인 상황이었다. 일단 그와 떨어져야 탈출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유채는 그의 비위를 맞출 생각이었다.
온실 안에는 유채도 알고 있는 여러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환경이 지구와 비슷했다. 하긴 물이 있고 산소가 있는데, 비슷하게 진화가 못 일어날 이유도 없었다.
“왔나?”
루프스는 평소와 같았다. 웃옷을 열어젖히고 바지도 느슨하게 입은 채였다. 공식적인 일을 하면 그도 옷을 챙겨 입는 편이었으나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모두 저렇게 입고 다녔다. 유채는 무감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안 오고 뭐하나? 오랜만에 외출일 건데.”
유채에게 외출이 허락되는 경우는 딱 두 가지였다. 한 번은 이렇게 루프스가 불러낼 때, 다른 한 번은 루프스가 기분이 좋을 때마다 불규칙적으로 주는 자유 시간. 유채는 가끔 한 번씩 있는 자유 시간을 이용해서 이 궁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갈게요.”
유채는 붉은색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루프스에게 갔다. 제때에 오지 않으면 오지 않았다고 별별 트집을 잡아서 화를 낼 것이다. 유채가 가까이 다가오자 루프스는 자신의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 앉으라는 소리 같았다. 유채는 눈을 딱 감고 그 무릎에 비스듬히 앉았다. 루프스의 팔이 유채의 허리를 감고 등을 감쌌다.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를 돌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루프스는 유채를 귀여운 강아지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았으니 맞는 표현일 것이다.
“오늘 바른 향유는 백합인가 보군.”
루프스가 유채의 목덜미에 코를 묻으며 물었다.
궁녀들은 유채의 의견은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고 그저 눈앞에 남자의 취향을 고려하여 그녀를 꾸몄다. 어느 날은 목이 부러질 정도로 화려한 장신구를 사용하여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시키기도 하였고 어느 날은 풀어 내리고 그 위에 포인트만 되는 장식을 해주기도 하였다. 바르는 향유도 그때그때 달라졌다. 하지만 옷만큼은 소나무였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 절제된 우아함을 가진 소녀풍의 드레스. 딱 유채의 취향과는 정반대였다. 유채는 인형이 되어서 루프스의 취향대로 꾸미고 그의 앞에 서야 했다.
“백합향도 좋긴 하지만 레티티아 너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궁녀들에게 향을 바꾸라고 해야겠어.”
유채는 자신의 몸을 감고 있는 루프스의 팔이 마치 길고 차가운 뱀처럼 느껴졌다. 소름이 끼쳐 떼어버리고 싶어도 그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옷자락을 잡고 버텼다.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검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긴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것인지, 유채는 상한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어도 그의 취향 때문에 자를 수가 없었다. 그가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요즘 굉장히 얌전하구나.”
루프스는 예전과는 다르게 얌전한 유채에게 말했다. 그녀는 처음 만났던 그때보다는 고분고분했다. 더 이상 자신에게 대들지 않았고, 시키는 일도 군소리 없이 했다. 하지만 루프스는 그녀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아직도 유채의 눈빛은 맹수의 그것과 같았다. 여전히 건방질 정도로 당당한 눈빛이었다.
“그런 상황을 겪었는데도 얌전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도 이성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아직도 그 혀는 매섭군.”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쓰다듬었다. 볼에 생채기가 나있었다. 루프스는 혀로 상처를 쓸었다. 유채는 그 소름끼치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몸을 뒤로 빼지 않기 위해서 유채는 주먹을 쥐었다. 루프스는 떨리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으며 볼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너를 맹수로 생각하지 않아. 레티티아.”
루프스의 눈에 작은 유채의 몸은 마치 강아지 같았다. 작고 하얀 강아지. 루프스는 흉터가 남은 그녀의 어깨를 쓸었다. 유채는 눈을 찌푸렸다.
“너는 뭐랄까. 작은 강아지에 가까운 느낌이지.”
루프스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러니 네가 바락바락 대들지만 않았다면 이런 상처가 생길리가 없었겠지.”
“참 자비로우시네요.”
유채는 모든 일의 근원은 당신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목구멍 깊숙이 숨겼다. 이 말을 했다가 그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유채 자신에게든 블루벨에게든.
유채는 루프스의 손길 아래서 얌전히 앉아 있었다. 루프스는 그녀의 고운 살결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원래 맹수와 귀엽고 연약한 강아지를 다루는 방법은 다른 법이지.”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턱 아래를 강아지 다루듯이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이 유채의 턱선을 섬세하게 더듬다가 볼로 올라갔다. 실금이 그어진 상처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유채는 올 것이 왔다 싶어 눈을 감았다.
“내 레티티아에게 이런 상처를 낸 건 누구지.”
“넘어졌어요.”
“칠칠맞지 못하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루프스의 청회색 눈동자가 유채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뭔가를 감추고 있는 표정이었다. 루프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믿어줄 만큼 눈썰미가 없는 수인은 아니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같잖은 거짓말은 집어치우고 사실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거짓말 아니에요. 내가 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죠?”
유채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더 강하게 조여들어 왔다. 유채의 몸이 루프스에게 딱 붙었다. 루프스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거짓말하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루프스는 자신의 앞에서는 진실만을 속삭이라고 하면서 낮게 속삭였다.
“붉은 방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
유채의 몸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굳었다. 유채는 그 두려운 붉은 방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 * *
“난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냥 열쇠를 가지려고 했을…… 꺄악!”
루프스는 유채를 벽 쪽으로 내던졌다. 벽에 부딪친 유채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채의 머리는 산발이었다. 루프스의 억센 손에 붙잡힌 유채의 손목은 붉게 멍이 들어 있었다. 종아리는 바닥에 쓸려서 벌건 살을 드러냈다. 유채의 검은 눈이 물기에 젖었다.
“그 입 다물어라!”
루프스가 노성을 질렀다. 유채는 몸을 움츠렸다. 루프스가 한쪽 무릎을 꿇어서 유채와 눈을 맞추고 유채의 턱을 움켜잡았다. 유채는 신음을 흘렸다.
“귀엽다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감히 나를 죽이려고 해?”
“아니에요! 난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냥, 나는 방을 나가고 싶어서…… 열쇠를 찾으려고 했어요. 하늘에 맹세코 당신을 노리지 않았어요!”
유채는 울먹였다. 루프스가 싫었지만, 그를 죽이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나가고 싶어서 열쇠를 찾았던 행동이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해석될 수 있는지 유채는 궁금했다.
오늘은 여느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유채는 불편하게 잠을 청했고 루프스는 침대 위해서 단잠을 청했다. 침대 기둥에 기대 선잠을 자던 유채의 눈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유채는 눈을 번쩍 떴다. 이 방을 나갈 수 있는 열쇠 같았다. 유채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 반짝이는 것을 찾기 위해 루프스의 몸을 더듬던 손이 루프스의 목 근처를 더듬었다. 그때였다. 루프스가 벌떡 일어나 유채를 제압했다. 유채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루프스는 분노한 눈으로 저를 시해하려 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유채는 얼른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분노한 루프스는 유채를 질질 끌고 이곳까지 왔다. 유채는 끌려오는 내내 사정을 설명했지만 루프스는 듣지 않았다.
“그래? 오해다?”
유채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을 시해하려고 한 죄로 죽고 싶지 않았다. 루프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루프스가 소름끼치는 손길로 유채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거 아나? 펠릭스 다우스는 원래 내 노예를 뜻하는 말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겁에 질린 검은 눈동자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아마 머리가 나쁘지 않다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번 한 번만 네 같잖은 변명에 속아주지."
“아니에요! 난 정말로 당신을 죽이려 한 적이 없어요!”
루프스는 유채의 등 너머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유채가 비릿한 혈향에 뒷걸음질 치자 루프스는 유채를 방 안으로 우악스럽게 밀어 넣었다.
“살고 싶으면 들어가라. 벌이야.”
“예?”
“이미 토스 호무스에 소문이 퍼졌을 거야. 네가 내 목숨을 노렸다고. 분노한 대신들이 네 목을 치라고 하겠지.”
유채는 그제야 루프스의 뒤에 있는 형형한 기운의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궁에 있는 모두가 이 일을 들었을 것이다. 유채의 목에 소름이 돋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네 변명도 모두 퍼졌을 것이고. 네 변명 인정해 네가 탈출을 시도했다고 하면, 너는 우리의 법에 따라 얇은 쇠로 된 채찍으로 삼 일에 50대씩을 밥도 먹지 못하고 맞아야 하지. 우리는 탈주하려 시도한 노예를 그렇게 처벌했다.”
유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몸이 덜덜 떨렸다.
“네 몸은 그 처벌을 견딜 수 없을 것이지.”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조금씩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유채는 간절한 눈으로 루프스의 팔을 움켜잡았다. 루프스가 고개를 숙여서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이게 내가 최대한 자비를 베푸는 방법이다. 너를 죽이지도 않고 너를 아프게 하지도 않는. 그러니, 내 자비를 감사하게 여겨.”
분명히 대신들이 길길이 날뛸 것이었다. 극악무도한 펠릭스 다우스의 목을 쳐야 한다 할 것이다. 설령 유채의 말을 믿어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유채를 저잣거리에 묶어놓고 삼 일 간을 굶기며 채찍으로 내리쳐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제 아무리 그라도 법과 수인들의 반(反) 마레 위르 감정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루프스에게 반감이 있는 몇몇 수인들이 더 심하게 날뛸 것이다. 특히 헤르티아 같은 이들이. 그러니, 제가 유채에게 내리는 처벌은 엄청난 자비에 가까웠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채는 방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팔을 움켜잡고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런 끔찍한 시체들과는 한 방에 있을 수 없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한번만…… 한번만…….”
유채는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빌었다.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빌었다.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을까? 탈출하려 한 것이 이렇게 큰 죄일까?
“진심에서 우러나와야지. 건방지게 아직도 네가 탈출하려 한 것이 죄라 생각하지도 않지.”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떼어내었다. 유채가 겁에 질린 얼굴로 루프스의 팔을 애타게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잘 반성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방 안에 내던지듯이 밀어 넣었다. 중심을 잃은 유채의 몸이 앞으로 엎어졌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 이 방문을 열지 마라.”
루프스의 마지막 명과 함께 방문이 잠겼다.
“밖에 아무도 없어요!”
유채는 정신없이 방문을 두드렸다. 차마 뒤를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유채는 방문에만 매달렸다. 방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질척이는 피가 유채의 발목을 휘감았다.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서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도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희미한 불빛만이 비치는 이 작은 방 안에는 끔찍한 시체뿐이었다. 유채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다. 피 웅덩이에서 구르고 굴러서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유채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피 웅덩이를 건너갔다.
“열어주세요! 제발……. 열어주세요! 흐흑…… 제발…….”
유채는 문이 부서져라 두드렸다. 저 시체들이 소름끼쳤다. 좀비처럼 살아나서 저를 덮칠 것만 같았다. 유채는 올라오는 역한 기운을 억누르고 정신없이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유채가 울먹였다. 이 괴기스러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유채는 몸을 벌벌 떨면서 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금 이게 내가 최대한의 자비를 베푸는 방법이다. 너를 죽이지도 않고 너를 아프게 하지도 않는. 그러니, 내 자비를 감사하게 여겨.’】
유채는 루프스의 말을 떠올리곤 헛웃음을 지었다. 자비? 미친 소리였다. 열쇠를 찾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열쇠를 찾아서 이 지긋지긋한 방에서 나가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게 잘못된 일이란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유채는 방문에 얼굴을 대고 속삭였다. 미칠 것 같았다. 도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벌을 받아야 할까? 저를 펠릭스 다우스로 삼은 루프스가 먼저 잘못을 했는데. 왜? 저만 이렇게 고통스러워해야 할까?
손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유채는 이제 감각도 없어진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목이 쉬어서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열어…… 주세요…….”
탈진해서 바닥에 엎어진 유채는 숨만 몰아쉬며 눈물만 흘렸다. 유채는 몸을 웅크렸다. 집에 가고 싶었다.
“으흐흑. 집에 가고 싶어…….”
유채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 * *
유채는 비 맞은 새처럼 떨었다. 루프스는 아기를 달래듯이 그녀의 몸을 쓸었다. 유채는 그런 루프스가 가증스러웠다. 그는 손가락으로 유채의 볼에 난 상처를 쓸면서 속삭였다.
“가여운 레티티아. 난 그렇게 잔학한 수컷은 아니다. 사실만 말해준다면 오늘의 거짓말은 넘어가 주지. 왜 다쳤지?”
솔직히 말해 유채도 그 계집애를 감싸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 계집의 이름을 말했다가 펼쳐질 잔혹한 상황이 더 보기 싫었다. 루프스가 벌일 일이 그 계집애보다 더 싫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붉은 방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 더 싫었다.
“말, 말할게요.”
말이 덜덜 떨려 나왔다. 학습된 공포인 것인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유채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에 루프스가 유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붉은 방은 그냥 한 소리였으니, 떨지 않아도 된단다. 레티티아.”
유채는 주먹을 다시 움켜쥐었다. 처음 그 방에 이 남자의 손에 질질 끌려가 갇혀 있을 때의 기억은 그만큼 끔찍했다. 유채는 해야 저 빌어먹을 남자가 되도록 화내지 않도록 이 뺨의 상처를 설명할 수 있을까를 심하게 고민했다.
루프스는 눈을 아래로 깔며, 대답을 고르는 유채를 귀엽다는 듯이 보았다. 솔직히 말해 대강의 상황은 예상이 갔다. 그런데 제 예상보다 상처가 적은 것이 의아해 묻는 것이었다. 젤다가 제 성질을 스스로 죽였을 리는 없을 것이고…….
“협박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 것인데 분위기가 너무 무겁군, 레티티아.”
루프스는 탁자에 놓여 있던 설탕에 절인 딸기를 바라보았다.
“먹으면서 이야기할까? 레티티아. 다람쥐 일족이 이런 면에는 일가견이 있지.”
땅을 얻지 못한 수인 일족에게는 두 가지 길만이 있었다. 일족의 미래를 의논할 수 있도록 일족이 모일 수 있는 작은 거점 마을 하나를 구성한 뒤 이곳저곳에 퍼져 살거나. 아니면 다른 일족에 복속되는 것이다. 전자를 택한 것은 치유라는 독특한 능력을 지닌 뱀들이었고 후자를 택한 것은 너무 약해서 결국 늑대의 보호를 받기로 한 다람쥐였다. 작물을 경작하는 데 특출한 다람쥐 일족은 늑대들의 보호를 받는 대신 그들의 능력을 루프스를 위해 썼다. 이 온실과 늦가을의 딸기 모두 다람쥐 일족의 작품이었다.
유채는 설탕에 절인 딸기를 보며 제 일에 관심조차 두지 않던 다람쥐 수인 궁녀가 생각나 쓴웃음을 지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노예를 둘 형편조차 되지 않아 노예제를 폐지해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 빈민층들이 노예제를 반대한 이유는 자신보다 낮은 이들이 있다는 것에 만족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 궁녀들이 저를 괴롭히는 것도 똑같은 의미일 것이다.
유채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루프스의 입술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 유채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설탕에 절여진 딸기 하나가 보였다.
“입 안 벌리고 뭐하나?”
직접 먹여주려는 것 같았다.
“내가 직접 먹을 수 있는데요.”
“그 짧은 팔로는 멀어서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입 벌려.”
강압적이었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명령조까지 나왔다는 것은 이 이상 싫다 해봤자 제게 득 될 게 하나도 없단 뜻이었다. 유채는 작게 입을 벌리고 루프스가 건넨 딸기를 물었다. 설탕에 절인 딸기에서 끈적한 즙이 흘러나왔다. 루프스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닦아주었다.
“칠칠맞기 못하긴.”
유채는 그 후로도 루프스가 건네는 딸기를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다. 여타 로맨스 소설에서는 이런 행동이 닭살커플의 염장질로 포장되었지만 유채에게는 바퀴벌레가 살갗을 기어 다니는 것보다 더 끔찍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싫은 건 즙이 입가에 묻을 때마다 그것을 손가락이나 혀로 핥는 루프스였다. 유채가 그가 건네주는 것을 입에 넣을 때마다 흘러내리는 즙을 그는 항상 그런 식으로 닦았다.
개와 늑대는 거의 같은 종으로 봐도 상관없으니 늑대가 개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래도 강아지가 그러면 차라리 기분이라도 좋을 것을 저 남자가 저를 끌어안고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유채에게는 끔찍한 악몽 같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유채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 전에 케릭스가 들어왔다.
“루프스님.”
케릭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케릭스는 루프스가 유채에게 뭔가를 먹여주고 있는 기묘한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루프스는 유채를 귀여운 강아지를 다루듯 했다. 그러나 케릭스의 눈에는 검은 뱀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루프스가 유채를 품에서 떼어내고 이유를 물었다. 케릭스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마레 위르 무리가 토스 호무스에 들어왔습니다.”
“미쳤군. 어떤 경로로?”
루프스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유채는 가장 가까이서 그의 사나운 기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유채는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배를 타고 스티폴로르의 해안을 돌아서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스티폴로르는 섬이었다. 유채가 추측하기에 크기는 그린란드와 비슷한 정도로 섬치고는 큰 곳이었다. 마레 위르들이 모여 사는 곳인 포트리스는 스티폴로르의 동쪽 끝에 있었고 토스 호무스는 스티폴로르의 서쪽 끝에 있었다. 적진을 향해 섬을 횡단해서 오는 어려움을 무릅쓸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니 해로를 이용한 것이다.
유채는 마레 위르란 말에 가슴이 뛰었다. 저와 같은 사람들, 마법에 능통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프스는 방금 전까지 죽상이던 유채의 표정에 생기가 도는 것에 속이 조금 뒤틀렸다. 그는 유채의 허리를 감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유채의 몸이 그에게 끌려갔다.
“오늘 외출은 여기서 끝이야, 레티티아.”
유채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루프스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유채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고 싶었지만 지금 그랬다간 저 남자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어 일단은 참기로 하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표정을 보고서 그 속마음을 눈치챘다. 속 깊숙이 무언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돌아가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루프스의 부름에 온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녀들이 들어왔다. 궁녀들은 딸기 즙이 묻은 루프스의 손을 닦았다. 그리고 궁녀들은 유채를 데리고 온실을 빠져나갔다.
유채가 나가자 루프스가 입을 열었다.
“독수리 일족에 무슨 문제가 있나? 마레 위르의 배 하나 못 잡아내고 말이야.”
“왜 내보내시는 겁니까?”
케릭스의 동문서답에 루프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레티티아 말입니다.”
“아!”
루프스는 짧은 감탄사를 뱉고 말을 이었다.
“기껏 다정하게 굴어줬는데 죽을상을 하더니 동족 이야기를 듣고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기분 나빠서.”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공들여 키운 강아지가 나보다 같이 온 손님한테 꼬리 흔드는 것 보는 기분이랄까?”
“요즘 레티티아를 특별 대우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원래 펠릭스 다우스를 그렇게 다루지 않으시잖습니까?”
“맹수와 귀여운 강아지는 다르게 다루어야 하는 법이지. 레티티아는 귀여운 강아지야. 그리고 강아지가 주인 손을 물려 하기에 주인이 얼마나 매서운지를 보여준 것뿐이고.”
루프스는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면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해서 이런 잡담이나 떨자고 온 건 아닐 것이고. 마레 위르가 죽을 걸 알고서도 이곳에 왔으면 뭔가 패가 괜찮은 건데…… 렉스 뮈어라도 왔나?”
루프스는 렉스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발음했다. 베니니타스의 부인인 라일라는 마레 위르였고 그녀의 오빠가 렉스였다. 루프스가 수인들 중 최강의 존재라면 렉스는 포트리스의 마레 위르 중 최강이었다.
“이름이 알려진 인물로는 붉은 머리 알렉스와 마법사 프레드릭 형제가 왔습니다.”
“프레드릭이라면 그 화합인지 뭐인지 이상한 소리 지껄이는 놈이고 붉은 머리 알렉스라면 렉스 놈의 제자가 아닌가?”
렉스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루프스는 오른쪽 다리가 쑤시는 느낌이었다. 그의 오른쪽 다리에는 아주 큰 검상이 남아 있었다. 상처를 치료했던 오르페는 조금만 깊었으면 다리가 잘렸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놈이 아버지인 로보를 언급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검상을 입을 이유도 없었다.
“알아서 죽여 버리고 처치하면 될 것이지 왜 나한테까지 이런 보고가 올라오는 거지?”
“그들이 해안 경비를 맡은 독수리 일족들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하?”
루프스가 짜증난다는 듯이 실소를 뱉으며 등받이에 기대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독수리 일족들이 이 정도로 맛이 갔을 줄은 몰랐다. 독수리 일족의 수장이 아무리 평화주의라고 한들 그도 수인이었다. 아무리 명망이 높아도 수인들의 최고 가치는 강함인데 전성기 지난 늙은이의 발끝에라도 미치는 놈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서 짐작은 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저희가 독수리 일족과 계약을 맺은 사실을 아는 것인지 무사히 인질을 돌려받고 싶다면 루프스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하. 빌어먹을 것들. 아주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군.”
루프스는 탁자를 손으로 내리쳤다. 독수리 일족의 수장인 울투르(Vultur) 올리에는 수인치고 성품이 자상하여 루프스의 기준에서 약한 제 일족 하나하나를 포용하는 수인이었다. 독수리 일족 자체가 중립을 표방하여 어느 수인 일족과도 크게 척을 진 적이 없었기에 해안과 인접한 땅을 가진 일족은 독수리 일족의 좋은 시력과 비행 능력을 고려하여 해안 경비를 맡기곤 하였다. 이때 울투르 올리에는 자신의 일족이 인질로 잡혔을 때 안전하게 구해달라는 계약 조항을 넣었다. 그 빌어먹을 조항이 이제 효력을 발휘할 참이었다.
“빌어먹을 노친네.”
루프스가 울투르 올리에보다 강하긴 하였으나 멋대로 조항을 어길 수는 없었다. 울투르 올리에의 명망도 높이고 독수리 일족을 적으로 돌려봤자 좋을 게 하나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블루벨 건처럼 토끼 일족의 수장을 압박하는 것은 먹히지 않을 터였다. 연합을 해서야 간신히 땅을 얻어낸 토끼 일족과는 달리 이쪽은 오랜 강자였다. 독수리 일족이 땅을 차지하고 있던 기간은 늑대 일족만큼 길었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마레 위르를 한번 만나는 것이 독수리 일족을 밀어붙이는 것보다 잃는 것이 적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마레 위르 놈들이 원한 상황일 것이다.
“그 건방진 놈들이 감히 날 움직이려 들어!”
루프스는 연신 탁자를 내리쳤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탁자는 분노한 루프스의 손에 부서지고 말았다. 와지끈, 하며 무너지는 탁자를 본 케릭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루프스님.”
케릭스가 진정하라는 듯 그를 불렀다. 감히 마레 위르의 말에 움직여야 한다는 것에 분노한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그래. 어디 한번 만나주지.”
하나 제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인지 죽음을 선사할 것인지는 온전히 그들의 몫이었다.
* * *
“알렉스, 무슨 생각해.”
프레드릭이 배의 난간에 기대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생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알렉스는 프레드릭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으면서 웃었다. 알렉스의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큰 키에 다부진 몸을 가진 알렉스는 조각 같다는 말보다는 투박하게 생겼다는 말이 어울렸지만, 나름대로 호감형의 괜찮은 외모였다. 구릿빛 피부는 허리춤에 비스듬히 맨 검과 더불어 그가 천생 검사(劍士)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스승님 생각.”
“렉스 뮈어 경?”
“그럼 내게 렉스 스승님 말고 또 다른 스승이 있어?”
알렉스는 프레드릭의 말에 불퉁스럽게 대답했다. 프레드릭은 동생과 달리 짧게 자른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고 동생과 비슷하지만 섬세하게 생긴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동생보다 하얀 피부와 콧잔등에 남아 있는 안경 자국, 닳아 있는 소맷자락에 튄 잉크 자국, 오른손 중지에 박인 굳은살이 그가 학자이며 마법사라는 것을 드러내 주었다.
프레드릭은 등을 난간에 기대었다. 알렉스는 수심에 잠긴 형의 옆얼굴을 보았다. 프레드릭은 목에 건 로켓을 만지작거렸다. 형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아는 알렉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이라는 괜찮아?”
“얼굴만 보고 왔어. 그 이상을 했다간 나도 못 떠날 것 같아서.”
“나 혼자 간다니까. 임신한 부인 곁을 떠나 굳이 따라오는 무심한 남편이 어디 있어, 형.”
알렉스는 프레드릭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형은 제 행복보다 포트리스(Fortress: 인간들이 사는 요새의 이름)의 사람들을 더 생각했다. 물론 그 사람들 가운데 레이라가 있어서였다. 포트리스 사냥꾼 중 한 사람인 레이라는 쾌활하고 털털한 사람이었다. 조용조용하고 사려 깊은 프레드릭과는 정반대의 성격이었지만, 프레드릭은 레이라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고, 길고긴 이 년간의 구애 끝에 두 사람은 혼인을 했다. 그것이 일 년 전이고 프레드릭은 임신한 레이라를 남겨두고 이 토스 호무스의 해안에 도착했다.
“네가 내 도움 없었으면, 저들을 다 상처 없이 잡을 수 있었겠어?”
프레드릭은 눈짓으로 배 안에 묶여 있는 독수리 수인들을 바라보았다. 독수리 수인들은 그들 형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타 일족의 땅에서 용병 일을 하는 독수리 일족의 정예병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나름 강한 편에 속했다. 하나 저 둘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동생, 붉은 머리 알렉스는 수인들 사이에서도 괴물이라고 불리는 렉스의 제자라더니 렉스의 전성기보다 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경험이 조금 모자란 것이 흠이지만, 지금 포트리스의 최강은 저 알렉스란 자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강했다.
“무시하지 마. 나 혼자도 가능했어.”
물론 아무도 다친 곳 없이 잡을 수는 없었을 테지만 알렉스는 뒷말을 삼켰다.
“형. 잘 될까?”
“글쎄. 해봐야 알지. 포트리스에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해.”
프레드릭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알렉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볼을 스쳤다.
【‘너는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알렉스는 스승인 렉스 뮈어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되짚었다.
* * *
바닷바람이 매서웠다.
“알렉스.”
짐승의 발톱에 길게 긁혀서 왼쪽이 흉측하게 망가진 얼굴을 한 남자가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그의 허리에는 검이 하나 걸쳐져 있었다. 알렉스는 자신의 스승이자 이곳 포트리스의 영웅인 렉스 뮈어를 바라보았다. 베니니타스의 부인이었던 라일라의 오빠이자, 수인 내전에서 날뛰는 수인들로부터 인간들을 지켜낸 포트리스의 영웅이었다. 그의 얼굴에 난 상처는 열여섯의 루프스를 단신으로 막아내며 생긴 것이었다. 그 덕에 포트리스는 땅을 지킬 수 있었고 렉스는 루프스의 오른쪽 다리에 깊은 검상을 남기는 대신에 제 왼쪽 얼굴을 바쳤다.
“스승님.”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거냐? 네 형이 하는 그 얼빠진 소리를 믿는 게냐!”
검 손잡이를 움켜쥔 렉스의 팔 근육이 나이에 맞지 않게 아직도 우람했다. 수인과 인간의 공존이라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 렉스는 분노했다. 그 잔학하고 무식한 것들과 인간은 공존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없어져야 했다. 특히 늑대 놈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죽어야 했다. 렉스의 눈에는 복수심이라는 감정이 질척하게 묻어 있었다.
“복수는 복수를 불러올 뿐입니다.”
“아이린의 원통함은 생각하지 않느냐?”
“스승님!”
렉스 뮈어는 알렉스의 역린을 건드렸다. 렉스는 알렉스가 아직도 아이린이 선물로 준 낡은 손수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레드릭은 몰라도 너는 내 마음을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렉스는 미간을 주물렀다. 그는 아직도 그때의 꿈을 꾸었다. 늑대들에게 물려 처참하게 죽은 라일라, 불에 탄 시신으로 남은 조카, 벤자민과 프리드, 절규하는 베니니타스. 아직도 비명을 지르며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일어나게 만드는 악몽이었다. 로보가 죽고 없어도 그날의 악몽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잔혹한 수인들로 인해 나는 내 동생을 잃었고 조카를 잃었고 그리고 연인을 잃었다.”
렉스의 약혼녀인 아리스는 수인 내전에 휘말려 사망했다. 내전에 끼어들기 전, 렉스는 아리스를 가장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곳을 개 수인들이 침략한 것이다. 아리스는 개 수인들에게 붙잡혀 범해지고 말았고 종국에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렉스가 간신히 아리스를 찾았을 때, 그녀는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정신을 놓아버린 아리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절벽 끝에 서 있다 렉스와 눈이 마주쳤다. 렉스는 아리스를 잡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미안해.
그것이 아리스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리스의 몸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잡을 시간조차 없었다. 렉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오열했다. 빌어먹을 수인들이 그의 가족들을 모두 빼앗아갔다. 목이 쉴 정도로 렉스는 오열했다.
“나도 처음에는 믿었다. 라일라가 말했지, 다른 건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은 틀렸어. 그런데 화합?”
렉스는 그 말을 비웃었다. 알렉스는 복수라는 이름을 불을 붙이고 스스로의 몸을 태우는 스승을 바라보았다.
“너는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력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스승님이 수인들에 의해 가족을 잃었듯이 수인들로 인간들에 의해 가족을 잃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사실 이 악연의 시작은 모두 우리 인간들이었습니다.”
스티폴로르에 인간들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거대 제국 코르페네즈가 무너지면서였다. 부패한 거대 제국에서는 약탈과 살인이 성행했고 곧 영주들 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전란의 시대였다. 대륙의 전란을 견딜 수 없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옛 문헌 속에 존재하는 섬을 찾으러 바다를 항해했다. 위험한 소용돌이가 대륙과 섬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대륙에서 죽음을 맞이하나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하나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결국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스티폴로르에 도달했다.
스티폴로르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수인들. 인간이되 동물의 모습이 섞인 사람들, 수인들은 자신들의 옛 문헌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을 환대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들을 배신했다. 인간들은 수인들을 잡아서 동물형으로 만들어 그 가죽을 팔아먹었다. 수인들의 동물형은 일반 동물보다 거대했으며 가죽의 품질이 좋아 고가에 거래되었다.
스티폴로르에 정착한 인간들은 수인들을 잡아서 가죽을 가공해서 그것을 대륙에 팔아 부를 얻었다. 수인들은 인간들의 손에서 도륙되었다. 수인들은 강력했지만 너무 순진하게 인간을 믿었다. 그러던 와중 늑대 일족의 루프스가 인간들을 몰아내기 위해 수인들을 결집시켰다. 늑대 일족을 중심으로 살아남은 수인들은 그들의 강력함을 이용해서 인간들을 몰아냈다. 결국 인간들은 폐허가 된 유적 터에 남아 있는 요새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분노한 수인들은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다행히 포트리스의 성벽이 그들을 막아주었다.
그렇게 수인과 인간 사이에 깊은 갈등의 골이 시작되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또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아 끊어지지 않는 사슬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 사슬을 끊어내고 화합을 해야 했다. 포트리스에 남은 사람들은 이제 대륙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니 수인과의 화합이 필요했다.
“그런 말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샌님들이나 지껄이는 말이지, 아이린을 수인들에게 잃은 주제에 지나치게 이성적이구나. 죽은 아이린이 가엽다.”
“아무리 스승님이라고 하셔도, 한 번만 더 아이린의 이름을 들먹이신다면 저는 그날부터 스승님과 인연을 끊겠습니다.”
참다못한 알렉스가 폭발했다. 이것이 알렉스의 한계라는 것을 아는 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스승님께서 끔찍이 싫어하는 화합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이곳 포트리스 사람들을 위한 일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 약초는 토스 호무스에서만 납니다. 우리는 루프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포트리스에 전염병이 돌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았다. 특히 아이들이 그 병에 더 취약해 심하게 앓았고 목숨까지도 잃었다. 해답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포트리스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약초를 구할 땅도 적어 약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셀레네님이 포트리스의 사람들을 버리지는 않은 모양인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뱃사람인 헤임달이 우연히 가져온 약초가 그 병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포트리스 전역이 뒤집어졌다. 그 약초는 레프스란 들꽃으로 토스 호무스에만 자라는 것이었다.
“스승님은 수인들을 쓸어버리고 약초를 얻자고 하실 것이지만 그러기엔 아이들에게 시간이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게 최선입니다.”
알렉스는 눈을 감았다. 약초의 효능을 알고 포트리스의 장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였다. 누구도 솔선수범해서 그것을 얻어오겠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나선 것이 알렉스의 형인 프레드릭이었다. 그는 포트리스의 중요한 전력이었고 임신한 아내까지 있는 상황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땅으로 가겠다는 하였다. 알렉스는 한숨을 쉬면서 형의 집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형은 레이라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중일 것이다.
“애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 같아.”
레이라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쾌활하게 말했다. 프레드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애틋한 손길로 아내의 볼을 쓸었다.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손을 감싸 쥐었다. 샌님주제에 수 없는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인 남자였다. 심지어 위험한 사냥길에까지 따라와서 사랑한다며 꽃을 주고 가던 남자였다. 싫다고 떨쳐 내도 집까지 쫓아와 꽃이라든지, 작은 책이라든지, 옷 같은 선물을 주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레이라의 일상에 프레드릭은 스며들었고 레이라는 결국 프레드릭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의 결실이 그녀의 배 속에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나 잘 지낼게.”
“……그래.”
프레드릭은 목이 멘 것인지 평소보다 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프레드릭은 아내의 모습을 눈에 새길 기세로 바라보았다. 장밋빛 뺨, 어깨까지 내려오는 구불거리는 금색 머리카락, 금빛 속눈썹 사이에 자리 잡은 고운 청색 눈동자, 그리고 선홍빛 입술.
“……꼭 돌아와야 해.”
울지 않고 걱정되지 않게 잘 보내주겠다고 결심했는데, 임신한 뒤로 풍부해진 감수성은 레이라의 의지를 배반했다. 레이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프레드릭은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이마와 고운 두 눈에 입술을 맞추었다. 짭짤한 눈물의 맛이 났다. 그는 레이라를 품에 끌어안았다. 조금 부풀어 나온 배가 불편할 정도로 꽉 끌어안자 레이라가 프레드릭의 목을 팔로 감았다.
“돌아올게. 꼭 우리 아이 태어나기 전에 돌아올게. 살아서 건강하게 돌아올게.”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뒷머리를 잡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임신한 레이라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무거운 몸을 돌볼 레이라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했다. 프레드릭은 그 누군가가 해야 할 일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라도 그걸 알았다. 레이라가 사랑한 프레드릭은 책임감 깊은 남자였다.
“형.”
알렉스가 두 연인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애틋한 이별의 현장이었다. 이래서 알렉스는 프레드릭이 그 일에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이 형을 대신해서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레이라. 헤임달이 배가 준비되었대요.”
프레드릭과 레이라가 떨어졌다. 레이라는 눈물을 닦으며 평소처럼 알렉스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 사람, 잘 부탁해. 되게 꼼꼼한 것 같아도 칠칠맞지 못하고 허당이니까.”
“알아요. 레이라. 형이랑 내가 같이 산 세월이 얼마인데. 포트리스 사람들은 형이 완전무결한 줄 알지만 그거 순전히 다 뻥이에요.”
“알렉스!”
“난 나가 있을 테니까. 마저 인사 나눠요.”
알렉스는 문을 닫았다. 프레드릭이 레이라의 이마와 볼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입술에도 닿으려던 차에 그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서 레이라의 입술을 탐하면 도저히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프레드릭은 레이라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이 다음은 돌아와서 할게.”
레이라는 다시 눈물이 터졌다.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그만의 약속이었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물기가 어린 레이라의 청안을 머릿속에 새길 듯이 바라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
프레드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알렉스는 저를 지나쳐 가는 프레드릭의 굳은 뒷모습을 보았다. 알렉스는 프레드릭을 따라가기 전 레이라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레이라.”
“알렉스?”
“내가 형은 무슨 수를 써서든 레이라 곁으로 돌려보내 줄게요.”
알렉스는 허리에 맨 검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결심한 듯이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내 실력 알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형만큼은 내가 레이라에게 돌려보낼게요.”
레이라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 * *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겁니까?”
헤임달이 불안한 눈초리로 말했다. 헤임달은 포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뱃사람이며 동시에 정보통이었다. 배를 타고 스티폴로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잘 수집해 왔다. 이곳 토스 호무스까지 독수리 일족 용병의 방해 없이 올 수 있었던 것은 헤임달의 공이 컸다.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 해안을 밟는 것은 우리 측에 불리해서 말입니다.”
알렉스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검을 매만지면서 대답했다. 헤임달은 이래서 내 머리카락이 점점 하얘지고 그마저도 남아나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면서 다시 배를 관리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지금쯤이면 루프스에게서 대답이 올 차례였다. 제 아무리 루프스라도 독수리 일족은 무시하기 힘들 것이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중 해변에 늑대 수인이 나타났다.
“지금부터 전하는 것은 루프스님의 전언이다.”
늑대 수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프레드릭과 알렉스는 반색을 하면서 늑대 수인과 가까운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극악무도하고 오만방자한 마레 위르, 너희들의 조건을 수락하겠다.”
“다행이군.”
프레드릭이 중얼거렸다. 늑대 수인이 마저 말을 덧붙였다.
“하나 각오는 단단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늑대 수인은 숨이 찬 것인지 숨을 골랐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아닐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몸으로 포트리스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나도 장담하지 못하겠군.”
알렉스가 이를 갈았다. 현 루프스는 성질이 포악하다고 하였다. 렉스가 직접 겪고 말해준 것이었다.
“어디 그 오만한 낯짝 한 번 보자꾸나.”
* * *
루프스는 침실로 들어왔다. 다른 늑대 수인들과 오늘 그 빌어먹을 마레 위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온 참이었다. 독수리 일족에게는 계약 조항이 있으니 인질이 된 이들은 구하겠지만 그에 따른 피해는 그쪽에서 보상하라는 말을 보냈다. 빌어먹을 올리에. 루프스는 이번 일을 트집 잡아 계약 내용을 바꾸거나 안 된다면 다른 일족에게 대신 일을 맡길 생각을 했다. 루프스는 복잡한 생각은 지워 버리고 귀염성 없는 유채의 목소리가 들릴 것을 기대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채는 침대에 앉은 채로 옆으로 쓰러져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루프스는 침대에 가까이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유채를 들여다보았다.
루프스는 잠든 유채의 옆에 앉았다. 누워 있는 자세가 꽤나 불편해 보여 그는 유채의 다리를 침대에 올려놓고 머리는 제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다.
【‘관대하십니다.’】
루프스는 유채의 숱 많은 속눈썹을 만지며 케릭스가 했던 말을 되짚었다. 관대하다라, 자신과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해도 유채의 앞에서 제가 관대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평소에는 암컷에게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유채에게서 고른 숨소리가 흘러 나왔다. 루프스는 잠든 유채의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었다.
나이가 몇인지는 모르겠고 알 필요도 없었지만, 곤히 잠든 모습을 보니 하는 행동과는 별개로 어려 보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항상 분노라든지 짜증으로 들끓던 루프스의 마음이 이 순간만큼은 고요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너 지금 정말로 미친놈 같아 보이는 거 알아?’】
어머니의 외가 쪽 친척인 카니스(Canis: 개 수인 일족의 수장) 바실리사의 말이 떠올랐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미쳤다. 열셋의 그날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혼자 있으면 귓가에 에리카의 원망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그가 수인들의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였다. 비명소리 대신 끝없는 불안감을 얻은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펠릭스 다우스를 다루며 없앴다. 그 방법 외에는 몰랐다. 사나운 맹수들이 제 앞에서 꼬리를 흔들 때 비로소 제가 땅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유채도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건방진 마레 위르, 힘도 없으면서 날뛰는 마레 위르. 눈에 어린 그 고결함도 공포 앞에서 사라지는 건 똑같을 거라 생각했다.
【‘잘못했어요.’】
말뚝에 묶여 눈물 흘리던 유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당당한 눈을 하고서 연약한 말을 했을 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제가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루프스는 자신이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감히 왕의 몸에 상처를 내려 한 유채를 수인의 법으로 사형에 처해야 함이 옳지만 그녀를 살려줬다. 그럼에도 펑펑 우는 모습에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은 자신이었다.
루프스는 제 발목을 옥죈 불안감이 예전의 그것과 다름을 알았다. 누군가 제게 복종하는 것으로 사라질 종류의 불안감이 아니었다. 루프스는 그것을 유채를 붉은 방에 가두었을 때 확실하게 깨달았다.
유채는 손이 깨질 정도로 문을 두드렸다. 열어달라고 외치며 열심히 문을 두드렸다. 레티티아는 그 방 안에서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보다 더 불안해한 것은 자신이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가둬둔 내내 계속 붉은 방 앞을 서성거렸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채가 울부짖는 소리가 마치 제 머리를 두들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그때부터 더 불안해졌다. 유채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쓸데없이 계속 복도만 거닐었다. 설마 저 레티티아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유채에게 엄청난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루프스는 어릴 때 이후로 씹지 않던 손톱을 남몰래 씹었다. 저까짓 것이 뭐라고 제가 불안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루프스는 이상하게 여기는 궁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그 복도 근처를 일이 있는 것처럼 서성거렸다. 복도를 서성거리다 심장의 울렁거림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붉은 방의 문을 열었다. 그놈의 따박따박 대드는 대신들 한 번 더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제가 제왕인데 뭐가 문제겠는가. 빛을 발견한 유채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옷을 적셨다.
루프스는 그대로 굳은 듯 멈춰 섰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유채는 소리도 없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피 웅덩이에 젖어 붉은색을 띠는 옷과 살갗이 벗겨져 붉은 살을 드러내고 있는 다리가 보였다.
루프스는 그대로 유채를 안아 올렸다. 평소라면 반항을 할 유채는 그저 몸을 떨며 훌쩍이기만 했다. 궁녀에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명하고 오르페를 불렀다. 유채를 방에 데리고 들어가 오르페의 진료를 받게 하고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은 진수성찬을 주었다. 유채는 루프스 때문인지 밥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다 먹지 못하면 요리사를 벌주겠다는 협박을 했다. 그리고는 궁녀를 불러 유채를 지켜보라 하고 알현실로 돌아와 하릴없이 펜대만 굴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케릭스를 불러서 붉은 방을 치우라 명령 내렸다. 이유는 스스로도 몰랐다. 그냥, 유채의 눈물 젖은 얼굴이 떠오르며 가슴이 선득해졌다. 루프스는 적당한 시간이 지나자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유채는 침대 기둥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루프스는 무릎을 굽혀서 유채의 눈가에 남은 눈물자국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자존심만 강했다. 제가 조금만 자존심을 굽히면, 아마 유채는 더 많은 것을 얻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령 없이 저렇게 뻣뻣했다. 솔직히 아직도 이런 펠릭스 다우스를 버리지 못하고 데리고 있는 자신이 이상한 것이지만. 루프스는 고개를 흔들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루프스는 유채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 옛 동화 속에 나오는 영원한 잠에 빠진 아름다운 공주와 같아 보였다. 루프스는 선잠을 청하기 위해 유채의 머리를 무릎에 놓은 채로 몸을 뒤로 젖혀 누웠다. 내전이 그에게 남긴 흔적이었다. 루프스는 잠을 깊고 편하게 자본 적이 손에 꼽았다. 야습에 대비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거나 선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다.
편히 잠들지 못하는 밤 루프스는 유채가 불편하게 잠을 청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그때마다 뱃속이 뒤틀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고집을 꺾지 않는 그녀를 어디 한번 계속 고생해 보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었지만, 그때마다 뒤틀리는 것은 그의 속이었다. 루프스는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워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간만에 숙면을 취하는 것인지 표정과 숨소리 모두 안정적이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침대 위에 그냥 두고 잠을 청하기로 하였다. 잠이 올지, 안 올지는 그도 모른다. 그리고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유채를 원래 자던 곳에 돌려두기로 했다. 그럼 오늘만큼은 바닥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는 모습을 보면서 울렁이는 속을 견디지 않아도 될 터였다. 침대 기둥에 기대어 자는 유채에게 빈정대고 자존심을 밟는 말을 지껄이는 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울렁이는 제 속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붉은 방 사건 뒤로 유채는 얌전해졌다. 루프스는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유채를 불렀다. 유채는 항상 별 반항 없이 그의 부름에 순순히 응했다.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은 강아지처럼 행동했다. 유채는 따박따박 말대답은 해도 그에게 이전처럼 불손한 언행을 하지는 않았다.
루프스는 주인으로서 펠릭스 다우스를 손에 쥐고 흔들었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저도 모르는 새에 유채의 기분을 살폈다.
발목을 감싼 검은 감정이 짙어졌다. 그는 그것이 그의 평생을 지배한 불안감이 아님을 알았다. 뭔가 다른 것이었다.
그 때문일까?
유채의 건방진 말을 용납했다. 얌전하고 고분고분하게 굴지만 여전히 그에게 굴복하지는 않는 유채를 용납했다.
한편, 유채는 잠에서 깨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루프스의 얼굴이었다. 청회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채는 지금 제가 루프스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예쁘구나.”
루프스의 첫말이었다. 그의 순수한 진심이었다. 유채는 예뻤다.
유채는 예쁘다는 말에 눈썹 사이를 좁혔다. 유채는 스스로의 외모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잘 알고 있었다. 보통 미인은 인생을 편하게 산다는데 유채에게 예쁜 외모는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요인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유채는 저를 내려다보는 끔찍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인정하기로 했다. 잘생기긴 잘생겼다. 그리고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도 인정했다. 잘생긴 남자는 두 부류로 나뉜다. 뭔가 문제가 있거나 임자가 있거나. 루프스의 경우는 미친놈이었다.
“나와 붙어 있기 싫어 곧바로 일어날 줄 알았는데. 내 무릎 베개가 마음에 드는가?”
“루프스님의 얼굴과 부딪칠 것 같아 일어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아시면 비켜주시길 바랍니다.”
“내 귀여운 레티티아는 지나치게 솔직하군. 편해서 그런다고 하면 상을 줄지도 모르는데, 레티티아.”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하나 묻지. 동족을 만나고 싶나?”
“당연한 것 아닌가요?”
루프스의 말에 유채는 반색했다. 그들을 만나면 돌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내 말을 잘 듣는다면, 너를 함께 데려가고 블루…… 벨? 인가 하는 암컷 토끼도 풀어주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채는 일어나 앉아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눈으로 루프스를 보았다. 루프스는 저 생기를 띠는 검은 눈이 못내 불편했다. 끝까지 제 펠릭스 다우스로서 복종하지 않고 하나의 주체로 있겠다는 저 눈이 싫었다.
그럼에도 붉은 방에서의 그 눈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나아, 그는 유채를 용납했다.
* * *
궁의 지하 감옥에서 가장 최악의 곳을 고르자면 바로 냉궁이었다. 냉궁은 말 그대로 엄청나게 추운 곳이라 제아무리 수인이라 하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냉궁을 잠시도 버티지 못하는 수인이 있는 반면, 오히려 냉궁의 추운 환경에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수인도 있었다.
케릭스는 두터운 외투를 껴입고 냉궁으로 들어갔다. 그는 거대한 북극 토끼가 갇힌 감옥 앞에 멈춰 섰다. 이 정도 추위는 별거 아닌지 북극 토끼는 팔자 좋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침 토끼가 코를 킁킁대면서 잠에서 깨었다.
“케릭스님!”
순식간에 북극 토끼가 사라지고 작고 귀여운 토끼 수인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하얀 귀를 쫑긋 세운 채 철창 앞으로 달려왔다. 케릭스는 폴짝폴짝 뛰는 블루벨을 보며 귀엽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케릭스는 무릎을 굽혀 키가 작은 블루벨과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온 건 어떻게 알았느냐?”
“음식 냄새로요! 케릭스님은 항상 음식을 들고 오시잖아요!”
블루벨이 손으로 케릭스가 들고 온 것을 가리켰다. 케릭스는 잔뜩 기대 중인 블루벨이 귀여워 얼른 가져온 음식을 그 앞에 내어 보였다. 블루벨은 박수를 치면서 폴짝폴짝 뛰었다. 치마 아래로 보이는 하얗고 복슬복슬한 발이 앙증맞았다.
“연어! 이 귀한 걸 제게 주시는 거예요?”
“나는 많이 먹어서 괜찮다. 어서 먹거라.”
블루벨은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도시락에 들어 있는 훈제 연어를 집었다. 얼른 입에 넣자 붉은 살이 사르르 녹았다. 블루벨은 행복한 듯이 양 볼을 감쌌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경험하지 못한 것이 많은 블루벨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다. 유채가 주는 먹을 것에 홀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산골에서 자라 순진한 면이 있는 블루벨은 제게 음식을 주는 수인은 모두 좋은 수인으로 여겼다. 블루벨은 사랑스런 미소를 지으며 또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케릭스님.”
블루벨의 환한 웃음은 마치 밝은 불빛 같아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듯했다. 케릭스는 그녀를 귀엽게 보다가 폭신해 보이는 길쭉한 귀를 만졌다.
“히익!”
블루벨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귀를 배배 꼬았다. 꽈배기처럼 꼬인 귀를 한 블루벨은 당황한 것인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케릭스는 제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으냐? 내가 뭘 잘못했니?”
“히잉. 토끼는 귀가 예민해요. 건드리면 기분이 이상해요.”
블루벨이 토끼 귀를 잡아 내리면서 끼잉 소리를 냈다. 도저히 품에 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귀여움이었다. 무뚝뚝한 케릭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귀가 예민한 것과 먹는 건 별개인지 블루벨은 키잉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연어를 먹는 손은 계속 열심히 움직였다.
케릭스는 다시 쫑긋 올라온 하얀 귀를 만지작거렸다.
“히익!”
“흐엥.”
“흐히익!”
블루벨은 괴상한 소리를 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고는 케릭스가 만지작거리는 귀를 손으로 잡아서 볼까지 끌어내렸다.
“엄마가 토끼 귀는 성감대라고 함부로 건들게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응?”
이번엔 케릭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저 요상한 소리를 내면서도 연어를 오물오물 먹는 것이 귀여워 손을 댄 것인데 성감대일 줄이야.
“근데요, 케릭스님.”
블루벨의 다음 말은 케릭스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게 만들었다.
“성감대가 뭐예요? 엄마가 그건 안 알려주셨어요.”
케릭스는 열다섯 소녀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 * *
유채는 거대한 회색 늑대로 변한 케릭스의 위에 앉아 있었다. 제 뺨을 때린 수인이라 꼴도 보기 싫었지만, 마레 위르와의 회담에 가기 위해서는 그의 등에 타야 했다. 케릭스도 유채를 태우는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은 지 불만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레티티아?]
케릭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케릭스는 어제 블루벨이 한 말을 다시 생각했다.
【‘있잖아요, 케릭스님. 제 귀 만진 걸 미안하게 생각하시면 레티티아님을 잘 좀 부탁드릴게요.’】
【‘케릭스님은 착하시니까 레티티아님하고 잘 어울리실 거예요. 그러니까, 레티티아님 잘 부탁드려요.’】
케릭스는 과연 제가 이 암컷과 블루벨의 기대만큼 잘 지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블루벨의 부탁이기에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것은 그가 유채를 안 좋게 생각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블루벨이 안부 전해 달라 했습니다. 자긴 잘 지낸다고.]
“블루벨을 알아요?”
유채는 머릿속으로 들리는 것 같은 케릭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릭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금은 압니다.]
케릭스가 블루벨을 처음 본 것은 냉궁으로 그녀를 데려갈 때였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과 달리 작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케릭스에게 블루벨은 딱 그의 취향이었다. 작고 귀여운 데다 토끼 귀는 굉장히 앙증맞아 보였다. 그래서 이 어린아이가 괜히 유채의 일에 휘말려 이런 험한 일을 겪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래서 따뜻한 음식을 챙겨 상태를 살피러 냉궁에 내려갔었다. 거기서 그가 목격한 것은 추위에도 아랑곳않고 쌩쌩하게 돌아다니는 블루벨이었다.
이중 생활을 들킨 블루벨은 기겁하여 제 비밀을 털어놓았는데, 자신은 토끼 중에서도 극지방에 사는 토끼라 추위에 견디는 것이 능해서 오히려 냉궁이 체질에 맞다는 것이었다. 우물쭈물하는 그 표정이 꽤나 귀여워 케릭스는 그냥 눈감아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후로 종종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케릭스와 블루벨은 인연을 이어갔다.
“블루벨은 잘 지내요?”
[북극 토끼라 냉궁 체질이라 했습니다. 자신은 걱정 말고 레티티아님 몸부터 챙겼으면 좋겠다고 전해 달라 하였습니다.]
“본인 걱정이나 하지.”
유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케릭스는 그 말에 동조하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갑자기 내게 이런 이야기는 왜 전해주는 거예요? 당신 나 싫어하지 않아요?”
[블루벨의 부탁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일은 제가 사과드립니다. 레티티아님께서 루프스님께 먼저 죄를 범하시기는 하셨지만, 제가 지나치게 반응했습니다.]
“참 간단하게 사과하시네요.”
[그럼 어떻게 사과드려야 합니까?]
“그걸 사과받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안 되는 거죠.”
케릭스의 사과에 유채는 조금 놀랐다. 수인들은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해서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과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일단 사과를 해주었다는 것에 유채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무튼, 고마워요. 그리고 블루벨에게 잘 대해줘서 고마워요.”
[블루벨에 대한 건, 레티티아님을 위해서 한 건 아닙니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생각보다 루프스의 말을 무조건 따르자는 주의는 아닌가 봐요?”
[때에 따라서는. 저도 아주 융통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루프스님의 명을 거스르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루프스는 블루벨을 냉궁에 데려다 놓으라고 명령했다. 그 뒤에 어떻게 하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케릭스는 루프스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다. 고지식한 케릭스에게도 의외의 융통성은 있었다.
[저 같은 수컷도 융통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레티티아님도 그것을 갖추어보는 것은 어떠십니까?]
“미안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요구하는 융통성은 내가 결코 굽히고 싶지 않은 것을 굽히라는 말과 같아요.”
사람마다 하나씩은 결코 잃거나 굽히지 않고 싶은 것이 있다. 그건 유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난 돌아가야 해요. 그러니, 잠깐은 숙여도 결코 계속 숙이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케릭스가 나지막하게 뱉었다. 저 말이 루프스의 귀에 들어가는 날 유채는 그리 좋은 꼴은 못 보게 될 것이었다.
바다 내음이 났다. 케릭스는 고개를 들었다. 토스 호무스의 해안에 있는 루프스의 별장이 눈앞에 보였다. 마레 위르를 만나는 데에 저런 별장을 쓰는 루프스의 의도가 궁금했다. 케릭스는 그것이 거만함에서 비롯된 허영심이라 치부했다.
유채는 케릭스가 속도를 늦추자 그제야 그의 목을 껴안고 있는 손의 힘을 풀고 상체를 세워 앞을 보았다.
“바다에 있는 노이반슈타인 성 같네.”
유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백설공주 성의 모티브가 되었다던 독일에 있는 성과 비슷하게 생겼다. 하얀 외관과 고아한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케릭스는 별장 안으로 들어가 유채가 등에서 내리기 쉽게 몸을 숙여주었다. 유채는 케릭스의 배려로 수월하게 내렸다. 유채가 내리자마자 케릭스는 건장한 체구의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레티티아.”
먼저 도착해 있던 루프스가 유채의 팔을 잡아서 끌어당겼다. 유채는 반항 없이 루프스에 팔에 끌려갔다. 루프스가 이곳에 자신과 함께 동행하는 것으로 요구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따를 것.
두 번째, 마레 위르와는 이야기하지 말 것.
첫 번째야 그렇다 치는데 유채는 두 번째 조건은 이상하고 마음에 안 들었다. 유채는 마레 위르라 불리는 이들을 통해서 수인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정보를 찾고 싶었고 그들이 마법사라면 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루프스가 그 모든 계획을 막았다. 그래도 일단 마레 위르를 만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기에 유채는 그의 조건을 수락했다. 말만 안 하면 되니 필담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꼼수도 있었다.
“요즘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주는 상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 안고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루프스는 별장 서쪽에 위치한, 덤불로 감싸여 마치 유배지와 같은 작은 별채에 유채를 데려갔다.
“여기가 네가 지낼 곳이지.”
“그쪽도 여기예요?”
“아니. 나는 저쪽의 본채지.”
유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간만에 침대에 등을 붙이고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채가 안도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루프스는 배배 꼬인 심사를 굳이 풀어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다른 마레 위르들도 본채에서 지낸다. 지금쯤이면 도착했겠군.”
루프스가 유채와 함께 지나온 곳을 돌아보았다. 유채도 그가 돌아보는 쪽을 보았다. 그리고 유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보는 저와 똑같은 외양의 사람이었다. 중년 남자 한 명과 나이 지긋한 노인 둘, 그리고 키가 큰 젊은 남자 둘이었다. 젊은 남자 중 한 명은 기사라도 되는 모양인지 케릭스만큼 건장한 체격에 검을 허리춤에 비스듬히 매고 있었다. 허리춤에 검을 맨 남자가 유채가 있는 별채 쪽을 돌아보았다.
“그만. 여기를 봐야지, 레티티아.”
원래부터 유채는 루프스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으며 항상 빗겨서 바라보는 편이었다. 루프스는 그게 내심 거슬렸지만 그냥 넘겼다. 하지만 마레 위르 무리를 저리도 아련하게 바라보는 것은 두고 보아 넘길 수 없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고개를 잡아서 돌렸다. 저를 바라보는 눈은 항상 약간의 독기가 어려 있는 눈이었다. 발목을 검은 감정이 휘감는 것 같았다. 루프스는 애써 그 이상한 감정을 누르고 유채의 볼을 쓸었다. 유채의 눈앞에 루프스의 청회색 눈이 보였다.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이 별채를 떠나지 말 것, 밤에는 커튼을 함부로 건들지 말 것. 그것만 지킨다면 별채는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좋아. 단, 정원은 별채의 뒤편에 있는 곳만 돌아다녀.”
“알겠어요.”
유채가 답을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괜히 파렌티아를 건드려 그녀에게 펠릭스 다우스라는 처지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상을 주지.”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한 번 더 볼에 입을 맞춘 뒤에 별채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과 같이 나섰다. 유채는 루프스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손을 들어서 그의 입술이 붙었던 곳을 벅벅 문질렀다.
* * *
“프레드릭…… 우리 정말 괜찮겠지?”
포트리스의 장로 중 하나인 마틴이 흉흉한 기세의 수인들을 돌아보면서 프레드릭에게 물었다. 나이도 어린 프레드릭이 자원을 했기에 눈치가 보여서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온 마틴이었다. 배에 있을 때도 프레드릭과 알렉스가 독수리 수인을 잡는 동안 마틴은 다른 장로 둘과 선실에 숨어서 살 궁리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계획대로 루프스를 만나기 직전까지 온 상태에서도 걱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건 다른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렉스가 있습니다.”
프레드릭은 자신의 동생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드릭은 사절들을 이끄는 수장이었고 알렉스는 그의 호위 역으로 따라왔다. 듬직한 알렉스는 무인답게 주위를 경계하며 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마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알렉스라면 능히 우리들을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단…….
“건방지게 내 얼굴을 보자 한 놈들을 드디어 만나는군.”
은발의 키가 큰 남자가 걸어왔다. 언뜻 보면 인간처럼 생겼으나 늑대의 것과 같은 눈과 날카로운 송곳니는 그가 온전한 인간이 아닌 늑대 수인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인간의 모습에 가까울수록 강하다는 말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루프스의 위압감은 상당했다. 마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알렉스는 듬직했다. 저 괴물 같은 놈만 없다면.
마틴은 포트리스의 최후의 날이 될 뻔한 그날을 기억했다. 거대한 은색의 늑대. 추풍낙엽처럼 죽어가는 사람들. 수인들의 마법 저항력은 유명했으나 루프스는 정도가 더했다. 그에게는 어지간해서는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은빛 주둥이의 거대한 송곳니에서 뚝뚝 떨어지던 피가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프레드릭도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강하다, 강하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대면한 남자의 강함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프레드릭은 알렉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태연한 표정이었다. 프레드릭은 루프스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프레드릭 하워드입니다.”
“잘 알고 있지. 내게 가끔 편지를 보내던 자가 아닌가? 화합이란 것을 주장했지?”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샌님의 허무맹랑한 소설이라 재미있게 읽고 있지.”
알렉스는 루프스의 무례한 언사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루프스는 한쪽에 서 있는 긴 붉은 머리의 수컷이 거슬렸다. 다른 세 명의 마레 위르는 제 살기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저 수컷만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태연한 표정이었다. 루프스는 벌벌 떠는 세 장로와 악수를 한 다음 건방진 수컷의 앞으로 갔다.
“알렉스 하워드입니다. 스승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 네놈이 렉스의 제자군.”
루프스는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전형적인 무인의 손이었다. 저보다는 키가 조금 작았지만 다부진 몸이 한눈에 보아도 단련한 무인임을 알게 했다.
알렉스도 루프스의 손을 잡아보고서 그가 어쩌면 렉스가 말한 것 이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렉스와 싸웠던 나이가 열여섯이고 지금은 스물여섯이었다. 경험과 연륜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임은 의심할 나위없을 것이다.
“부디 좋게 끝났으면 합니다.”
주어가 없는 의미가 불분명한 말이었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경고에 가까운 말이었다. 루프스는 늑대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고도 당당한 태도가 우습게 느껴져 픽 비웃음을 흘렸다.
“글쎄. 그건 그대들이 내 기분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달렸지.”
루프스의 묘한 미소에 알렉스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이라와 약속했다. 형을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다고. 그 약속은 지켜야 했다. 그리고 그 약속 이전에 프레드릭은 포트리스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레이라 개인을 위해서 그리고 포트리스의 사람을 위해 프레드릭은 돌아가야만 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자. 그럼 난 내 용병들을 돌려받고 싶은데.”
루프스가 그들의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가 끝나면 돌려드리겠습니다.”
프레드릭이 답했다.
“뭐?”
루프스가 한쪽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들어올렸다. 프레드릭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순진하지는 않았다. 프레드릭은 배의 선실에 독수리 수인들을 가둬두었고 헤임달에게 토스 호무스 연안을 돌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적의 아가리 안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그 정도 대비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루프스는 예상했던 일이지만, 마레 위르에게 휘둘리는 상황이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짜증이 났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시겠죠.”
알렉스가 묘한 어투로 대구하였다. 프레드릭이 놀라서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알렉스는 어깨만 으쓱였다.
“그것 하나 예상하지 못하면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지.”
루프스는 알렉스의 빈정거림에 똑같은 어투로 대답했다.
다른 세 장로는 알렉스와 루프스의 신경전에 피가 다 마르는 것 같았다. 원래 무인이라는 족속들은 서로의 강함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놈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인들 사이에서 죽어나는 것은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장로들은 제발 알렉스가 몸을 좀 사리거나, 아니면 루프스가 자비를 베풀기를 원했다.
“렉스 놈에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면 말이야.”
루프스가 알렉스를 향해 위협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알렉스의 목 옆에 들이밀었다. 인간들 모두 숨을 죽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알렉스는 잔뜩 긴장한 채로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려는 것인지 여차하면 검을 뽑을 생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놈의 이야기는 처참하게 깨지고 부서져서 간신히 자존심만 끌어안은 미친 노인의 자위에 지나지 않을 거야.”
루프스는 알렉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알렉스는 싸늘한 시선으로 루프스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스승님은. 당신이 그 오만함 때문에 죽을 팔자라고 하더군요.”
마틴은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바지에 닦았다. 저 미친놈들이 여기서 싸움질이라도 할 모양이었다. 마틴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만, 루프스님.”
아. 심장에 좋지 않아. 마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살벌한 루프스와 알렉스 사이에 끼어들었다. 뒷목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희가 오랜 기간을 항해하느라 많이 피곤한데, 이만 방에서 쉬어도 될까요?”
“아. 내가 주제 파악 못하는 수컷 때문에 무례를 범할 뻔했군.”
루프스는 알렉스의 싸늘한 자주색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건방진 마레 위르 수컷은 한 번도 눈을 피하거나 내리깔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마레 위르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보자마자 싫은 수컷은 처음이었다. 루프스는 손짓으로 궁녀를 불렀다. 다람쥐 수인 셋과 사슴 수인 두 명이 나왔다.
“이 아이들을 따라가면 방으로 안내해 줄 거다. 부디 길을 잃지 않고 잘 따라가기를 바라네. 알다시피 이곳은 포트리스보다 넓은 곳이라 손님들이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되는군.”
루프스는 궁녀들에게 그들의 안내를 맡기고 자리를 떴다. 알렉스는 루프스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무례한 언사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렉스는 허리에 맨 검을 만지작거렸다. 프레드릭이 그의 손을 잡았다.
“신중하게 행동해.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말고.”
“내가 애인 줄 알아? 형.”
“어. 그러니까 아까 그렇게 빈정거렸겠지.”
프레드릭은 드물게 동생에게 화를 내었다. 프레드릭의 눈이 일렁였다. 레이라와의 약속 때문인 것 같았다. 그제야 알렉스는 자신이 너무 감정에 휩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렉스는 멋쩍은 듯 정수리를 긁적였다. 그는 미안한 얼굴로 입술에 침을 축였다. 프레드릭을 꼭 무사히 돌려보낼 거라고 방금 전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무인으로 피가 끓어올라 그만 함부로 행동했다. 루프스의 살기에 반응한 것이 한심스러웠다. 도발에 함부로 넘어가면 안 된다고 누누이 가르쳤던 스승의 당부가 소용이 없었다.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아니야. 괜찮아. 루프스에게 우리에게도 너라는 전력이 있다 알려주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정도를 넘어가지 않는 선에서 까불도록 노력할게.”
“넌 말을 해도.”
프레드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는 자신과는 다르게 호전적이고 장난기 많은 성격이라 걱정이 많았다. 프레드릭은 미간을 쓸었다. 이제부터가 본게임이었다.
“난 장로들하고 이야기를 할 생각이야 넌 무엇을 할 건데?”
“나 같은 천생 무인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보려고.”
프레드릭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한 채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몸조심 하라는 말을 건넸다.
* * *
유채는 별채의 작은 서재에서 책을 몇 권 들고 침실에 올라왔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책을 읽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고3 생활을 끝내면 더 이상 공부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다시 공부였다. 거기다 모르는 말이 너무 많아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도 힘들었다. 모르는 글이 한글처럼 읽힌다고 해도 내용까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유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며칠이나 지난 걸까?’
유채는 손을 꼽아서 날을 세어보았다. 한 달 하고 일주일이 조금 넘은 것 같았다. 그러다 유채는 멈칫하고는 주먹을 꾹 쥐었다.
“오늘 내 생일이네.”
이곳과 그곳의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흐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같은 속도라면 오늘은 제 생일이었다. 유채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갑자기 서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번 생일은 축하해 주는 사람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유채는 생일을 몰라준다고 풀이 죽는 사람을 보았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채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걱정…… 많이 할까? 거기도…… 내 생일일까…….”
당연히 걱정을 많이 하실 것이다. 눈물 많은 엄마는 울고 있을 거고 언니는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을 거고 아빠는 자신을 찾느라 바쁠 것이다. 유채는 세 사람을 생각하면서 무릎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만일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케이크도 잘라 나눠 먹고 선물도 받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을 것이다.
갑자기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책들이 흉물스러워 보였다. 여기 와서 겪은 일들은 다 끔찍한 것뿐이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뭐가 잘못된 걸까?’
혹시라도 힌트가 될 만한 것이 있을까 봐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여전히 기억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치킨을 사 병원으로 돌아가던 길이 기억의 끝이었다. 휴대폰이라도 있으면 그걸 살펴보면서 기억을 되짚어볼 수도 있겠지만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은 루프스에게 뺏긴 상태였다. 돌려달라고도 해봤지만 루프스는 쉽게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 잘 들으면 돌려주지.’】
유채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아. 생일인데 우울하고 정말 최악이야.”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두꺼운 커튼 틈 사이로 이곳이 다른 차원의 세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푸른색의 달이 보였다. 유채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밟았다. 기분이 심란해서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모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기회였다. 유채는 가운을 걸치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 별채의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갔다.
덤불에 둘러싸인 별채는 그 누구의 출입도 불허할 것처럼 폐쇄적인 분위기였지만 그와 다르게 정원은 꽤나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유채는 가운을 여미면서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가능한 별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어갔다.
작은 관목들이 주위를 감싸고 가을꽃과 낙엽들이 쌓여 있는 아늑한 곳이었다. 유채는 다리가 풀린 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채는 고개를 들어서 푸른색의 달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채는 얼른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뭐야.”
막힌 둑이 터진 듯이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유채는 눈물을 닦는 것을 멈췄다. 그래, 자신은 그저 울고 싶었던 것이다. 유채는 고작열아홉 살이었다. 아직은 어리다고 말해도 되는 나이였다.
유채는 그저 속을 게워내듯이 울고 싶었다. 모든 게 다 서러웠다. 오늘이 생일인 것도, 이 개 목걸이 같은 것을 차고 새장 속에 갇힌 것처럼 사는 것도,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도, 그냥 다 서러웠다.
유채는 몸을 웅크리고 소리 내어 울었다.
바스락.
한참을 울고 있는데 마른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유채는 누군가 온 건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붉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남자는 급하게 제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낡은 손수건 하나를 유채에게 건네었다.
“이거.”
유채는 바보처럼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붉은 머리 남자, 알렉스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눈물 닦아요. 아가씨가 왜 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스는 무릎을 굽혀서 유채의 손을 잡고 그 손에 손수건을 놓아주었다.
“이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바람이 유채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밤하늘에 스며들어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 * *
알렉스는 수인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창문으로 빠져나왔다. 수인들이 그들의 행동을 제한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알렉스는 혹시 모르니 수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탈출 경로를 알아보고자 했다.
“거. 더럽게 넓네.”
알렉스는 루프스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넓긴 넓었다. 건물이 크고 넓어서 알렉스에게 이점이라면 숨었을 때 찾기 힘들 거란 것이고 단점이라면 나갈 구멍을 찾는 데 오래 걸릴 거란 것이었다.
알렉스는 기척을 죽이고 수인들을 피해 걸었다. 일찌감치 늑대 일족의 아래로 들어간 것이 다람쥐 수인인 것처럼 궁인들은 대부분 다람쥐 수인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토끼 수인과 쥐 수인, 다람쥐 수인들만큼 늑대 수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슴 수인이 그 다음이었다.
알렉스는 건물 외관을 돌아보며 대강의 도주 루트를 파악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서쪽에 외따로 있는 건물을 보았다.
【‘서쪽 별채에는 출입하지 마시라는 루프스님의 명입니다.’】
방으로 안내해 주었던 다람쥐 수인이 그렇게 말했다. 장로 셋은 몸을 사리면서 별채 쪽은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했고 프레드릭도 괜히 루프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피할 생각인지 그에 대해 따로 묻지 않았다.
알렉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별채를 보았다. 두꺼운 커튼을 쳐 놓아서 안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한 빛이 보였다.
누군가 있나?
알렉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렉스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눈이 좋은 편이었기에 조금만 집중하면 뭔가가 보일 것 같았다.
“아닌가?”
어슴푸레한 불빛이 사그라졌다. 누군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했다. 알렉스는 그 자리에 서서 고민했다. 뭔가 있는 것 같으니 확인해 두는 것이 나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프레드릭 말대로 괜히 루프스의 심기를 거스를 것이 걱정되었다. 알렉스는 눈썹을 긁적였다.
“아이씨!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
알렉스는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별채 쪽으로 향했다. 루프스가 왜 저곳에 접근하지도 말라고 했는지 솔직히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하지 말라는 건 꼭 해보곤 했던 알렉스에게 루프스의 말은 참으로 유혹적이었다. 프레드릭에게 둘러댈 핑곗거리도 생겼겠다, 알렉스는 별채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누구를 가두려고 만든 곳인지 별채의 주위에 덤불이 쳐져 있었다. 함부로 들어가기 힘든 곳이었다. 당연히 입구로 당당히 들어갈 수는 없어 알렉스는 고민을 했다. 결국 그는 나무를 타고 덤불을 넘어갈 계획을 세웠다. 알렉스는 그나마 큰 나무를 찾아 그 위로 올라갔다. 소리 나지 않게 덤불을 넘어가느라 꽤 고생했지만 알렉스는 무사히 별채 안에 떨어졌다. 착지할 때 무게 중심이 흐트러졌는지 발이 저릿저릿했다. 알렉스는 신음을 삼키면서 몸을 일으켰다. 잘 정리되어 있다는 것 외에 별건 없어 보였다.
“으허허헝. 으으흑.”
바람에 실려 울음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몸을 굳혔다. 설마 별채에 들어가지 말라 한 것이 유령 때문이었나 싶었다. 하나 바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 유령이 있다면 반드시 들어가 보라고 추천할 위인이었다. 분명 뭔가 다른 게 있다. 혹여 그 이상한 취향으로 마물(魔物: 마력을 다룰 줄 아는 동물들을 총칭하는 말. 마력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생명체) 같은 것을 여기다 가두어두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렉스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갈수록 여인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알렉스는 주위의 관목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등을 반쯤 덮는 긴 검은 머리의 여자가 몸을 웅크리고 울고 있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당황한 탓인지 그 답지 않은 실수를 해버렸다. 낙엽을 밟아 소리가 나자 울고 있던 여자가 알렉스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 이제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아가씨였다. 물기 어린 눈은 하도 많이 울어서 벌겋게 부어올랐고 코끝도 빨갰다. 목에는 금빛의 고리가 걸려 있었고 그 중앙에는 알이 큰 보석이 박혀 있었다. 확실한 것은 수인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알렉스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 여자의 턱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첫사랑인 아이린이 떠올랐다. 아이린도 저렇게 운 적이 있었다. 그는 급하게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아이린이 준 낡은 손수건이 있었다. 알렉스는 다급하게 손수건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이거.”
여자는 멍하니 손수건만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눈물 닦아요. 아가씨가 왜 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스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뼈가 만져질 정도로 마른 손이었다. 알렉스는 여자의 손에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이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유채는 알렉스가 쥐여준 손수건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알렉스의 얼굴을 보았다. 아까 보았던 마레 위르 무리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유채는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알렉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유채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내가 시커먼 사내놈들 하고만 자라서 이런 건 못해요.”
거친 손길로 알렉스는 눈물을 대강 닦아주었다. 아까 전에는 갑작스럽게 우는 아가씨를 만나 안절부절못하느라 생각을 못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곳은 토스 호무스였다. 그런데 이곳에 왜 인간이 있는 것일까? 이 아가씨가 이 별채에 갇혀 있는 것인 게 분명했다.
“아가씨, 이름이 뭐예요?”
유채는 이름을 말하려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지 말 것. 그것이 조건이었다. 여기에 루프스는 없으니 말해도 되지 않을까? 유채의 혀끝에서 자신의 이름이 맴돌았다. 하지만 궁녀들이 혹시나 이 모습을 보고 제가 남자와 이야기를 했다고 루프스에게 말할까 봐 걱정되었다.
“후. 내 이름은 알렉스 하워드예요. 포트리스에서 왔어요.”
알렉스는 아가씨가 겁을 먹어서 말을 못하는 것 같아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겁먹지 말고. 난 아가씨를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알렉스는 되도록 부드럽게 말을 하였다. 유채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손가락으로 목을 가리킨 뒤, 엑스자를 만들어 보였다. 알렉스는 저 몸짓의 의미가 무엇인지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말을 못 해요?”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흙바닥이 아니어서 글을 쓸 수가 없고 종이도 없으니 손짓으로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알렉스는 골치 아픈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머리 좋은 제 형이라면 당황하지 않고 정보를 얻어낼 질문들을 던졌을 것이지만 알렉스는 단순하고 무식한 편이었다. 그는 말 못 하는 아가씨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혀라도 잘린 거예요?”
아, 젠장.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알렉스는 말해놓고 스스로 당황했다. 해도 꼭 저런 소리를…….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란 건지.
알렉스는 제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알렉스는 치열하게 고민을 했다. 아가씨는 누구이며, 이곳에는 어떻게 온 것인지 알아낼 수 있는 질문들이 필요했다. 알렉스는 그냥 단순무식하게 묻기로 결정했다.
“아가씨는 여기 어쩌다 오게 된 거예요?”
유채는 씁쓸한 표정으로 목에 걸려 있는 파렌티아를 손가락으로 걸어서 올렸다.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금색 고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알렉스는 목걸이를 바라보다가 유채의 옷이 살짝 흘러내려 그녀의 가슴골이 보이는 것을 보고 시선을 살짝 올렸다.
“알, 알겠어요.”
알렉스는 당황하여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유채는 저 남자가 제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별다르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가씨, 혹시 아르젠에서 왔어요? 아니지, 아르젠인이 여길 왜 와. 혹시 부모 중에 아르젠 계가 계셔요?”
대륙이 전란에 휩싸인 것이 몇 백 년이지만, 딱 한 나라만큼은 전란에 휩싸이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고대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국가인 아르젠이었다. 아주 오래전 셀레네님의 명을 받고 세계를 구한 검은 머리 이국(異國)의 여인이 세운 나라였다. 신의 축복인지 그 나라 사람들은 대륙 그 어떤 나라의 사람들과도 다르게 생겼다. 그리고 대륙의 다른 나라들이 발전과 쇠퇴를 반복할 때에도 아르젠만큼은 그대로 있었다. 그런 아르젠의 사람이 안전한 곳을 버리고 이곳으로 올 리는 없었다. 하나 눈앞의 여자의 외모는 아르젠인들과 흡사하게 생겼다.
아르젠?
유채는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나라의 이름에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 참. 곤란한데. 여기 오래 있을 수도 없고.”
알렉스는 시선을 맞추느라 웅크렸던 몸을 곧게 펴고는 중얼거렸다. 이 별채에 너무 오래 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그렇다고 여자를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렉스는 다시 한 번 더 무릎을 굽히고 유채의 검은 눈을 마주보면서 말했다.
“여기 있어야만 하나요?”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 지금은 일단 난 가볼게요. 나 혼자라면 아가씨를 데리고 가는 걸 고려해 보겠는데 일행이 있어서 그건 곤란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유채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같이 가자는 고마운 제안을 해도 못 따라 갈 것이다. 유채는 그저 그렇게 말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유채는 손수건을 도로 그에게 내밀었다.
“괜찮아요. 내일 내가 받으러 올게요.”
알렉스는 손을 저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나갈 길을 생각했다.
“이만 가볼게요. 아가씨. 부디 몸조심해요.”
유채는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알렉스는 아까 왔던 길을 되짚어서 덤불을 넘어갔다. 유채는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손수건에는 붉은색 실로 자수가 놓여 있었다.
-아이린이 알렉스에게
연인의 손수건을 빼앗은 것 같아서 유채는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유채는 눈가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였다.
“레티티아,“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단단한 팔이 유채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술이 목에 닿았다. 피가 흐르는 혈관 위로 입술을 세게 눌렀다.
“방금 그 수컷은 누구지?”
유채의 몸이 굳었다. 루프스의 낮은 목소리에 유채는 몸을 떨었다.
“나 말 안 했어요.”
유채는 얼른 입을 열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푸르고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루프스의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가 유채를 향했다. 유채가 움츠러들자 루프스는 손으로 그녀의 눈가에 눈물 맺힌 흔적을 훔쳤다.
“왜. 운 것이지?”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눈가에 닿았다. 유채는 소름이 돋는 것을 꾹 참아야만 했다.
“정말 짜증나는 놈이군.”
루프스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별채 쪽으로 걸어갔다. 웃는 낯의 마레 위르에게 침을 뱉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프레드릭이란 놈은 아무리 빈정거려도 내내 웃는 낯으로 루프스를 대했다. 루프스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쓸데없는 잡담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면서 별채로 들어갔다. 별채에 붙여놓은 궁녀들이 그의 방문에 모두 모였다.
“레티티아는?”
“레티티아님은 정원으로 나가셨습니다.”
별채에 붙여놓은 궁녀 중 가장 높은 지위의 궁녀가 답을 하였다. 루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채를 찾아 그쪽으로 걸었다.
“으흐흑. 으흑.”
울음소리가 들렸다. 루프스는 조금은 조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 정원의 깊숙한 곳에서 유채가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루프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왠지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루프스는 숨어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러면서도 저답지 않은 행동에 스스로 한심해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유채는 결코 아무 이유 없이 우는 암컷은 아니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울려고 하지도 않았다. 항상 그 당당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저렇게 무너진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웅크린 등이 안쓰러워 보였다. 루프스는 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또 다시 발목을 검은 감정이 휘감았다.
움직여야 하는가? 이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가?
쓸모없는 고민만 하다가 그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비웃으면서 덤불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눈물 닦아요. 아가씨가 왜 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본 건방진 마레 위르가 별채에 들어와 있었다. 유채는 눈을 들어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릎을 꿇더니 유채의 손을 잡고 손수건을 들려주었다.
“이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루프스는 싸구려 연극 같은 상황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수인의 귀는 마레 위르보다 훨씬 더 예민하여서 그들이 나누는 말소리가 다 들렸다. 정확히는 마레 위르 수컷의 말소리만 들렸다. 유채는 약속한 대로 말을 하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이거나 손짓으로 제 의사를 표현할 뿐이었다.
검은 감정이 발목을 넘어서 타고 올라왔다.
말을 하지 말라고 시킨 것은 자신이면서도 유채가 말을 하지 않은 상황이 못마땅하였다. 제가 시킨 대로 하고 있는데도 루프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저 수컷과 대화를 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말을 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말을 안 하는 것도 싫은 모순에 루프스는 고뇌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유채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루프스는 문득 유채가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자신이 두려워서는 아닐 것이다. 유채는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제가 마레 위르와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고분고분 들을 암컷은 아니란 말이었다. 그럼 왜일까? 유채는 생각보다 맘이 여렸다. 죽어도 굽히기 싫은 자존심을 굽힌 것도 블루벨이라는 암컷 토끼를 지키기 위해서였고 요새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번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제 말을 어겼다가 누군가 다칠까 봐 걱정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누구일까? 저 건방진 마레 위르 수컷?
검은 감정이 스멀스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그는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힘주어 잡으면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의 힘에 못 이긴 나뭇가지가 부서졌다. 루프스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유채라고 하더라도 처음 본 수컷의 걱정을 할 만큼 오지랖이 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그 블루벨이라는 암컷 토끼?
마레 위르 수컷보다는 나았지만 속이 배배 꼬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암컷이든 수컷이든 유채의 행동을 제한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에 그의 속을 뒤틀렸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랬다. 저는 한없이 그리도 차갑고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왜 약하디약한 이들에게는 다정해지는 것일까.
루프스는 한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제가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덤불 뒤에 숨어서 도둑처럼 저들을 지켜보는 것일까?
왜 저는 유채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몸을 숨겼는가?
그 웅크린 등을 보자마자, 그리고 그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말뚝에 묶여서 눈물범벅으로 쓰러졌던 그때와 붉은 방에 갇혀 덜덜 떨던 모습이 떠올랐다.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다리를 타고 올라온 검은 감정이 어느새 올라와서 제 목을 틀어쥐었다. 루프스는 이를 갈면서 제 목을 뜯어내듯이 움켜쥐었다. 어울리지 않는 꼴사나운 짓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다 유채가 제 속을 꼬이게 해서 생긴 일이다.
루프스는 덤불에서 벗어났다. 그 건방진 마레 위르 수컷은 떠난 것인지 유채는 손수건을 쥔 채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손수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루프스는 뒤에서 유채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작은 몸이 품에 안겨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히아신스 향이 훅 났다. 그 사이로 우유처럼 고소한 특유의 체향이 묻어났다. 그 향과 온기가 좋아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유채의 몸이 안쓰러울 정도로 굳어지자 마음 한구석이 콕콕 찔려왔다.
“레티티아, 방금 그 수컷은 누구지?”
“나 말 안 했어요.”
그 수컷을 걱정하는 속내를 감춘 말에 속이 배배 꼬였다. 루프스는 팔을 풀고 유채의 몸을 돌려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하였다. 루프스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쳐냈다. 정확히는 그 수컷의 손이 닿았던 흔적들을 지워내고 싶었다.
“왜 운 것이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고개를 숙여 입술로 눈물을 훔쳤다. 불쾌한 수컷의 흔적을 지워냈다. 움찔거리는 유채의 목에서 파렌티아가 짤랑거렸다.
그래, 유채는 제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얇은 살갗 너머로 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유채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만이 만질 수 있는 제 것이었다. 건방진 마레 위르 수컷이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채는 몸을 굳히고 루프스의 입술을 견뎠다. 지금 그의 기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혹시나 기분이 나빠져 알렉스란 남자에게 화가 미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루프스의 입술이 나비처럼 가볍게 떨어졌다.
“난 그 남자랑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루프스는 유채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유채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길을 잃어서 들어온 거라고…… 그러니까…….”
유채는 눈을 굴리면서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찾았다. 루프스는 마레 위르 수컷을 변호하는 듯한 유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자 유채는 긴장하고 목을 움츠렸다. 유채의 걱정과 달리 루프스는 그녀의 흘러내린 옆머리를 어깨 뒤로 넘겨줄 뿐이었다. 유채는 그 부드러운 손길이 의아했다.
“그 수컷은 제쳐 두고 묻지. 왜 울었나?”
“예?”
유채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루프스는 벌겋게 부어오른 유채의 눈가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며 귀찮음을 억누르고 다시 물었다.
“너는 이유 없이 울지 않으니.”
“나도 그냥 이유 없이 울 수도 있어요.”
유채는 솔직하게 말했다가 되돌아올 보복이 두려웠다. 다시 붉은 방에 가두겠다고 협박을 한다든가, 블루벨을 꺼내주지 않겠다든가 할까 걱정되었다. 그러니 제가 처한 상황이 비참해서 울었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유채는 입을 다물었다.
“말하기 싫나 보군.”
“이유가 없다니까요.”
유채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무엇보다 제 허리에 감겨 있는 그의 손이 제일 싫었다.
“약속은 지켰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니. 얌전히 있고 말이야.”
“……말했지 않나요? 그런 일을 겪고도 계속 반항적으로 굴지는 않아요.”
루프스는 아까 전에 그렇게 애처롭게 울던 암컷과 제 팔에 안겨 있는 인물이 동일인물인가 의심이 되었다. 아니면 제 앞에서만 이런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선물은 기대했나?”
“선물이요?”
“왜, 내가 상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유채는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을 더듬었다. 루프스는 가볍게 웃더니 유채에게 물었다.
“무엇일 것 같나?”
“글쎄요.”
유채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기대도 하지 않은 일이니 기대치가 낮아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루프스는 귀찮아하는 듯한 유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허리에 감은 팔을 풀어주었다. 유채는 당장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갈 곳이 있으니 따라와.”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고 걸었다. 어차피 힘으로 그를 이길 수도 없고, 그를 거슬렀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유채는 반항 없이 를 따라갔다. 루프스는 그대로 별장을 나섰다.
“호위 없이 떠나도 되는 거예요?”
유채는 조금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나름 왕이라 불리는 이가 아닌가? 호위도 없이 움직여도 되나 싶은데 루프스가 오만한 웃음을 흘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내게 덤벼들 정도로 겁을 상실한 수인은 없다. 그리고 여기가 모두 나의 땅인데.”
유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느끼는 것이었지만 정말 오만한 남자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놓았다.
“갈 곳이 머니, 특별히 너에게 최고의 영광을 주지.”
의미 모를 말에 유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루프스는 은빛의 늑대로 변했다. 유채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정말 거대한 늑대였다. 달빛을 받은 은색의 털은 정말 은으로 만든 것처럼 반짝였다. 늑대가 유채에게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유채는 기겁해서 바닥을 손으로 짚고 엉덩이를 뒤로 움직였다.
[놀랐나?]
거대한 늑대의 머리가 유채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유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몸을 굳혔다. 유채는 늑대의 머리를 밀어내기 위해서 손을 들었다. 손에 닿는 털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타라.]
루프스가 유채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고 몸을 낮게 굽혀주었다. 유채는 케릭스보다도 더 큰 루프스의 등 위에 올라탔다. 루프스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유채는 얼른 그의 목덜미를 팔로 끌어안고 중심을 잡아야 했다. 루프스는 유채가 제 등 뒤에 몸을 딱 붙인 것을 느낀 후에야 안전하다 판단한 것인지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채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 것도 잠시였다. 루프스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우와!”
순수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새하얀 모래사장과 짙은 남색으로 물든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 위로 수많은 별들이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머리 바로 위에도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별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검은 도화지에 반짝거리는 가루를 뿌려놓은 것과 같은 아름다운 밤하늘에 유채는 넋을 잃었다.
루프스가 멈춰 서서 몸을 낮추자 유채는 그의 등에서 내렸다. 루프스는 다시 원래의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유채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느라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이 밤하늘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채가 아빠의 취미인 별보기를 따라다니면서 보았던 별들보다 더 많은 별들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유채는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늦가을 바다와 수평선의 경계에 떠 있는 별들을 보았다.
루프스는 제 평생 동안 수없이 보았던 밤하늘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유채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제 눈에는 별다를 것 없는 밤하늘이었다. 루프스는 심드렁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유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맴돌았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암컷인가 싶었다.
그녀는 순수하게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겁에 질리지도 않았고 증오를 감추려 하지도 않았고 체념한 채 고분고분 굴지도 않았다. 그리고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루프스가 아는 한 유채는 항상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품고 반짝이는 검은 눈을 곱게 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름답다.
처참하게 망가진 때에도 아름다워 보였던 암컷이었다. 그러나 루프스는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화려한 드레스도 입지 않았고 머리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없었다. 하얀 잠옷과 연보라색의 가운만 입은 채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을 내맡긴 유채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아름다운 것은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한 유채였다. 옅게 휘어진 붉은 입술, 장밋빛으로 물든 뺨, 그리고 고결한 정신이 담겨 있음을 보여주는 검은 눈동자. 어떤 화가도 저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루프스는 유채를 잡으려다가 괜히 주먹을 한번 쥐었다 폈다. 그리고 손을 거두었다. 지금 제가 그녀를 잡게 된다면 저 그림 같은 광경이 유리처럼 와장창 깨어질 것을 알았다. 루프스는 반걸음 정도 뒤에서 유채를 보았다.
유채는 긴 머리카락이 불편한이지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지만 다시 바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 광경이 너무 투명하여 유채가 바람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루프스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서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좀 전의 표정은 금세 사라지고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유채가 그를 보았다. 루프스는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뒷머리를 감싸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까 전 그 표정 좋았는데. 계속 짓고 있지?”
“미안하지만, 내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편이어서요,”
유채는 이제는 그의 취향대로 표정까지 지어야 하나 싶어 질릴 대로 질렸다. 다시 우울해졌다. 이상한 세상에 떨어져 생일에 아무도 축하해 주는 이 없이 제 마음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정말 거지같았다. 루프스가 너무나 싫었지만 제가 무얼 하든 저 남자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며, 제가 하는 행동들로 고통 받는 것은 저와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표정은 감정의 창이고 감정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
유채는 의외의 말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또 기분이 나빠졌다며 애먼 사람을 괴롭히려는 게 아닌가 두려웠다.
“방금 전의 표정이 더 예뻐 보여 하는 말이다. 주인으로서 펠릭스 다우스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인데?”
좀 전에 보았던 그 표정을 더 보고 싶다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루프스는 저가 이 정도로 소심한 수컷이었나 스스로를 비웃었다. 어차피 제 펠릭스 다우스다. 윽박지르고 몇 번 경고하면 알아서 표정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고 싶은 것은 억지로 만든 표정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짓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마음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펠릭스 다우스를 왜 데리고 있는 것인지.
루프스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좀 더 강하게 윽박질러 제 뜻대로 하게 만들지 못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으면서 힘도 약한 주제에 마치 세계의 여왕이 자신인 양 저를 당당히 바라보는 눈동자를 왜 용납하는 것인지.
유채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프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제 볼을 쓰다듬고 있는 루프스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내 그는 유채의 허리를 감아 품에 끌어안았다. 유채는 닿는 것도 끔찍한 남자의 품을 버티기 위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루프스는 역시나 제 품에서 굳어버린 유채를 보았다. 저와 닿는 것을 참고 있다는 것이 역력한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 그것에 대해서 언급하는 순간 함정을 밟고 밑으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루프스는 다른 말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요즘처럼 이렇게 고분고분하게만 굴어준다면, 나는 너에게 최상의 것을 제공해 줄 용의가 있다. 그러니 이렇게만 해.”
원인 모를 검은 감정이 더 올라오는 것도 싫었고 유채의 그 텅 빈 듯한 표정을 보기도 싫었다. 유채가 제게 고분고분 굴고 이따금 아까 전의 그런 표정을 볼 수 있는,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노력해 보죠.”
유채는 빈정거리는 어투로 대답했다. 루프스는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곤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제야 유채는 몸에 긴장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 선물은 기대 안 되나?”
“이게 선물 아닌가요?”
유채는 손가락으로 밤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참 소박한 것을 선물이라고 하네. 내가 그렇게 속 좁은 수컷으로 보이나?”
“갇혀 살다 보니 이렇게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선물이 되네요.”
유채가 다시 빈정거렸다. 루프스는 그녀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무릎을 굽혔다. 유채가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루프스는 손을 뻗어서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 이게.”
유채는 여우 수인들과의 첫 만남이 생각나서 하얗게 질린 채 발을 뒤로 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단단한 손은 그녀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유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맞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루프스는 품에서 백금의 몸체에 월장석과 다이아몬드로 장식을 한 발찌를 꺼냈다. 그것을 유채의 가는 발목에 채워주니, 그것을 느낀 유채는 눈을 떴다. 발찌가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유채는 그것이 마치 고양이 목에 걸어두는 방울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 어울리네. 예쁘구나.”
루프스는 일어나서 손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채찍을 썼으니 이제는 당근을 줄 때였다. 그동안 고분고분하게 군 것에 대한 상이 있어야 계속 고분고분하게 굴 것이다. 그리고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는 발목에 걸린 장신구는 꽤나 잘 어울렸다. 흔들릴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이 그녀의 분위기와 어울려서 마음에 들었다.
“좀 걷지. 풍광이 좋은 곳이니 오랜만에 바깥 구경을 하는 너를 위해서 내가 특별히 같이 걸어주지.”
풍광 좋은 이곳에 제발 저 남자만 없었으면 싶었지만 유채는 꾹 참았다. 이제 들어가면 언제 또 나올 수 있을지 모르니 그가 기분이 좋아 보일 때 비위를 맞추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누가 알겠는가. 이번에 기분을 맞춰주면 저를 감시하는 기세가 누그러져서 탈출할 수 있을 틈이 생길지도 몰랐다.
유채가 걸을 때마다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루프스는 가느다란 발목에 걸린 발찌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신비로운 외모의 유채와 정말 잘 어울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발목마저 우아해 보였다. 그러나 유채는 그것이 족쇄 같아 당장에라도 벗어버리고 싶었다. 심란한 기분을 뒤로하고 유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풍광 하나는 정말 멋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 생일은 언제인가?”
“예?”
유채는 예상 못 한 질문에 걸음을 멈췄다. 루프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내가 기른 펠릭스 다우스는 내 펠릭스 다우스가 된 날을 생일로 삼아 챙겨주었다. 너는 진짜 생일이 있지 않나? 그러니 묻는 거다. 언제냐?”
“12월 19일.”
유채는 조금 음울하게 대답했다. 기분이 바닥까지 처박히는 느낌이었다.
“오늘이군. 왜 말을 안 했나?”
“당신은 내게 날짜 같은 걸 한 번도 알려준 적이 없었고, 내가 당신에게 생일을 말해야 할 의무라도 있나요?”
유채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저 남자에게 생일 같은 걸 챙겨 받고 싶지 않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짜증을 내는 것에 화라도 낼까 하였으나 좀 전에 보았던 그 표정을 떠올리고 참았다. 그는 제 참을성이 정말 많아졌다는 것에 스스로 감탄했다.
“그럼 선물로 뭘 갖고 싶나?”
“발찌로 끝난 것 아닌가요?”
“나는 그렇게 속 좁은 수컷이 아니다. 그건 요즘 말을 잘 들은 것에 대한 상이고 네 생일에 대한 선물은 따로 주어야지. 말해봐라, 레티티아.”
유채는 막 던지자는 기분으로 목에 걸린 파렌티아를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이거 풀어줘요.”
“안 돼. 다음.”
“그럼 당신의 방 말고 다른 곳에서 지내게 해줘요.”
“안 돼, 다음.”
요청에 대한 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나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채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바라는 것들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발목을 휘감고 있던 검은 감정이 유채가 입을 열 때마다 위로 올라와 목을 움켜쥐었다. 영원히 제게 속할 유채가 제게서 벗어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다.
“그럼 내 물건 중 빨간 가죽에 싸인 게 있을 거예요. 그걸 돌려줘요.”
휴대폰이라고 말하면 못 알아먹을 것 같아서 유채는 휴대폰의 외양을 설명했다. 그것만이라도 손에 넣는다면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거절했다.
“싫어.”
별것 아니었지만 유채가 콕 찍어서 원하는 물건이라 루프스는 그것을 내어줄 수 없었다. 속이 배배 뒤틀렸다. 유채는 짜증이 가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럼 하루에 한 시간만 그 방을 마음대로 벗어나게 해줘요. 이것도 안 된다면 난 선물 필요 없으니까 당신 마음대로 해요.”
“알겠다. 한 시간 정도 돌아다니게 해주지.”
루프스는 이미 세 번이나 거절한 것도 있고 이번 소원은 달리 생각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라 흔쾌히 허락했다. 불퉁하던 유채의 표정이 조금 부드럽게 풀어졌다.
저 입술이 조금만 늘어지면 괜찮을 텐데.
루프스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유채의 입술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었다. 루프스는 어린애도 아니고 고작 펠릭스 다우스의 표정 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러다 문득 유채가 손에 쥐고 있는 건방진 마레 위르 수컷의 낡은 손수건이 보였다.
“알렉스랬던가?”
유채는 몸을 움찔했다. 유채는 그의 시선이 제 손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손을 뒤로 감추면서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분의 연인이 준 손수건이에요. 내, 내일 가져가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 남자 분은 그저 길을 잃은 거예요.”
유채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우면서 항상 남을 먼저 챙겼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루프스는 제 심장이 수십 개의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픈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그 건방진 마레 위르 수컷은 안 건들지.”
유채가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 가득 안도의 빛을 띠는 것이 루프스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유채의 볼을 감싸 쥐면서 음산하게 속삭였다. 연인이 있건 없건 제 것에 손을 댄 건방진 마레 위르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단, 내일 회담에 나와라.”
바람에 휘날리는 길고 고운 머리카락, 여왕처럼 당당한 검은 눈, 작지만 오똑한 코, 붉은 입술, 가는 몸. 유채의 모든 것은 모두 루프스, 자신에게 속한 것이었다.
“달리 할 건 없다. 그냥 꽃처럼 앉아 있어.”
루프스 그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꽃이었다.
* * *
유채는 아침부터 궁녀들의 손에 이끌려서 곱게 치장을 해야 했다. 매일 겪는 일과 다를 바 없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꾸미느라 시간이 배로 걸렸다. 옷도 그냥 드레스가 아니라 넓게 펴지는 치마 위에 겹겹이 옷을 걸쳐 무슨 행사에서나 입을 법한 예복 수준이었다. 그나마 코르셋을 입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서양과 동양이 오묘하게 섞인 이 세계에 다행히 코르셋은 없는 모양이었다.
간신히 옷을 다 입었다 싶었더니 이제는 화장이었다. 유채는 그 나이대 소녀치고 꾸미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머리카락도 매번 짧게 자르고 다니다가 언니 유하가 백혈병이 걸린 후에야 겨우 기르기 시작했다. 오직 언니에게 가발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유채는 수인 궁녀들의 우악스런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면이라도 쓴 것같이 두꺼운 화장이 얼굴이 얹어지고 난 후 궁녀들은 저희들끼리 무어라 쑥덕거리더니 이번엔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절반을 틀어 올려 은으로 세공한 비녀로 고정시키고 그 위해 다른 장신구들을 찔러 넣었다. 마지막으로 꽃까지 꽂아 장식을 마쳤다.
“이걸 신으시면 됩니다.”
쥐 수인 궁녀가 무릎을 꿇고 유채에게 굽이 높은 신발을 내밀었다. 유채는 신발을 신었다. 온갖 장식을 꽂은 머리는 무겁고 풍성한 치맛자락과 높은 신발 때문에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궁녀들은 유채를 부축한다는 명목으로 그녀의 양팔을 움켜쥐었다.
유채는 궁녀들의 손길에 이끌려서 별채를 나섰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옷과 신발 때문에 몇 번이나 옷자락을 밟고 넘어질 뻔하였다. 그때마다 양팔을 잡고 있는 수인들 덕분에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본채에 들어가자 루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레티티아.”
항상 웃을 풀어 헤치고 있던 것과 달리 오늘 그는 정장과 비슷한 검은색 예복을 입고 있었다. 은발과 검은색은 꽤나 잘 어울렸다. 궁녀가 유채의 팔을 놓았다. 루프스가 유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코를 묻었다. 유채는 움찔거리면서도 몸을 뒤로 빼려 하지는 않았다.
“예쁘네.”
유채가 입은 옷은 루프스의 비(妃)가 될 이가 입는 복식에서 간소화된 버전이었다. 정식 비가 아니기에 유채에게 그 옷을 입힐 수 없기에 택한 차선이었다. 루프스는 반쯤 충동적으로 입히라고 한 옷임에도 잘 어울리는 그녀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루프스님, 이제 가보셔야 합니다.”
헤나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을 하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에서 손을 풀었다. 유채는 그 틈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나는 뭘 하면 돼요?”
“아무 말 하지 않고 앉아 있으면 돼.”
루프스가 유채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헤나가 말을 덧붙였다.
“잡일을 도우셔도 됩니다.”
싱긋싱긋 웃으면서 비위나 맞추라는 건가? 유채는 이 세계의 여성 취급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인권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과한 것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럼 가지.”
루프스가 유채를 에스코트하듯이 이끌었다.
“정말 거만하기 짝이 없는 놈이야.”
장로 필립이 언짢은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수인들에게서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며 구시렁거렸다. 그의 불평불만에 성격 좋은 프레드릭마저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알렉스는 속으로 필립을 욕했다. 이런 협상에서 필립은 쓸모 있는 존재이기는 했지만 꼬장꼬장한 늙은이라 여러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위인이기도 했다.
“거. 필립 장로님. 조용히 하시죠?”
알렉스는 참다못하고 외쳤다. 당연히 필립은 반발했다.
“어디서 어른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나! 이래서 부모 없이 자란 놈들은……. 쯧쯧.”
“저희가 부모 없이 자랐어도 주위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정도로 중얼거리시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저. 고얀 놈. 부모 없이 자란 것들은 위아래가 없어 문제라니까.”
“필립 장로님께서 저희가 부모 없이 자란 것에 보태준 것이 없으시면 그런 말 그만둬 주시죠?”
프레드릭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알렉스는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괜한 벌집을 들쑤셨다. 필립은 알렉스의 말에 더 자극을 받은 것인지 아까 전보다 험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틴은 필립과 알렉스 사이에 끼어서 좌불안석이었다. 빨리 포트리스로 돌아가고 싶었다. 기왕이면 목이 멀쩡히 붙어 있는 상태로.
“늦어서 미안하군.”
이런 난장 속에 루프스가 거만한 말투와 함께 들어왔다. 필립도 루프스가 등장하니 구시렁거림을 멈추었다. 마틴은 상대하기 싫은 루프스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그의 뒤로 들어오는 여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포트리스에도 미인은 많았지만 저런 미희는 처음 보았다. 아르젠인보다도 더 이국적으로 생겨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늘씬한 몸맵시와 뚜렷하고 우아한 이목구비에 검은 눈과 머리카락이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이었다. 화려한 복장이 오히려 미모에 묻힐 정도였다.
마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꼬장꼬장한 필립도 할 말을 잃은 것인지 미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얼굴에 미소 한 점 없는 미희였기에 웃으면 얼마나 예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렌티아?”
프레드릭이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여자의 목에 걸려 있는, 푸른 보석이 박힌 금색의 고리는 분명 파렌티아였다. 마틴이 프레드릭의 중얼거림을 듣고 그녀의 목을 살폈다. 마틴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저 미희가 펠릭스 다우스란 말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그녀가 수인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
알렉스는 크게 놀랐다. 어제 본 그 아가씨였다. 어젯밤보다 화려하게 꾸며놓았어도 확실히 그 아가씨였다. 놀람이 가시기도 전에 프레드릭의 노성이 들렸다.
“설마 저 아가씨를 펠릭스 다우스로 삼았습니까!”
알렉스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알렉스는 좋지 않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형이 말한 펠릭스 다우스와 파렌티아가 무엇인지 생각해 냈다. 곧 그는 머리가 열로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펠릭스 다우스는 즉 루프스의 애완동물이었다. 사람을 펠릭스 다우스로 삼으면 노예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지금 주제넘게 내 펠릭스 다우스에 대해 떠들려는 건가?”
루프스는 굽 높은 신발을 신어서 비틀거리는 유채를 부축하며 자리에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는 그대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니 주제넘다고는 할 수 없지요, 늑대왕.”
이제껏 과묵하게 앉아 있던 장로 페드로가 입을 열었다. 그는 수인 내전에서 아들 내외를 모두 잃고 손녀 하나만 살아남았음에도 프레드릭의 화합론을 옹호하는 장로였다.
“그대는 수인을 펠릭스 다우스로 삼은 적이 없지 않소? 그런데 인간을 펠릭스 다우스로 삼는다는 것은 우리를 그대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않소?”
페드로의 말이 방 안에 울렸다. 그의 눈이 유채를 향했다.
“그렇지 않소? 아가씨.”
유채는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람 자존심을 이렇게 처박는 방법도 있구나 하면서 순수하게 감탄마저 나왔다. 입만 꾹 다물고 있자니 종잇장처럼 구겨진 자존심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유채는 예쁘게 꾸며 도그쇼에 나온 개와 같은 제 처지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저에 대해 무어라 떠드는 것이 듣기 좋을 리도 없고, 루프스는 저를 딱 전리품 취급하고 있었다.
유채는 참담한 기분에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을 참는 것이 전부였다. 차라리 그때 화를 내지, 왜 여기까지 끌고 와서 이렇게 바닥에 처박히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 그가 더 원망스러웠다.
“거. 중요한 이야기하러 와서 하찮은 계집애에게는 왜 신경 쓰나?”
필립이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필립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고지식한 프레드릭과 페드로는 눈치 못 챈 모양이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저 늑대가 입을 여는 것을 금지시켜 놓은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필립이 꼬장 부리는 불쾌한 늙은이로 여기지만 그가 장로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었다.
필립은 루프스와 펠릭스 다우스라는 여자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읽었다. 루프스가 저 여자애를 데려온 것은 자신들의 기를 죽여놓으려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필립은 알렉스를 힐끔 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제 형보다 먼저 분노할 놈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늑대 놈의 시선이 알렉스를 향해 있었다. 간밤에 저 여자애와 알렉스 사이에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저 늑대 놈의 심기를 건든 것이고.
“루프스께 묻지. 저 계집애가 칙칙한 사내놈들 분위기 밝혀주는 것 외에 다른 할 일이 있나? 말도 못 하는 계집이라 애교도 못 부리지 않나? 화병 속 꽃 역할도 못 할 것 같은데?”
“필립!”
“필립 장로님!”
페드로와 프레드릭이 외쳤다. 필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루프스의 청회안을 보았다. 저건 분명히 사내가 제 계집에 대한 소유를 주장하는 눈이었다. 사랑과는 다른 질척한 감정을 눈치챈 필립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대강의 관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하긴 저런 미희라면 보쌈해 집에 가둬둘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쯧, 가엽구나.
필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아가씨는 머리도 좋고 자존심도 강했다. 그래서 여기 끌려나온 이유도 안 것 같았고 그 높은 자존심에 상처도 입은 것 같았다. 수인들은 어차피 다른 존재구나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지만 같은 인간이라면 그런 핑계도 댈 수 없을 터였다.
사람이라는 게 꽤나 영악하여 자신보다 다르거나 위에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 앞에서의 굴욕은 온갖 핑계를 대어 자기를 보호할 구실을 마련하지만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 앞에서의 굴욕에는 더 심하게 타격을 입곤 하였다. 필립에게도 그녀 또래의 손녀가 하나 있었기에 눈앞의 아가씨가 가여워 보였다.
하나, 저런 눈빛을 한 사내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필립은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이 상황을 타계시킬 근본적인 해결책은 저 아이가 펠릭스 다우스에서 풀려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일단 더 자존심 상하는 일 없게 이 자리에서 뜨게 해주자 한 것이다.
“기껏해야 화병의 꽃 노릇할 아가씨가 여기서 뭘 하겠다고. 쯧. 천박하게. 불편하니 내보내는 게 어떻겠소, 늑대왕.”
유채는 거슬리는 말만 하는 노인이 정말 싫었지만 그래도 이 방을 나갈 기회를 주는 그가 고마웠다. 유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될 대로 되라는 심경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 있어봤자 분란밖에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채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녀를 보았다. 유채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감정을 억눌렀다.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먼저 나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채가 높은 신발 때문에 비틀거리자 루프스가 잡아주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유채는 그 손을 쌀쌀맞게 쳐 내고는 책상을 붙잡고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이거 감사했습니다.”
유채는 알렉스 방향으로 손수건을 밀었다. 알렉스는 여전히 당황했는지, 아니면 화가 났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유채는 누군가 자신을 불러 세우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유채는 복도로 나와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악!”
결국 발목이 꺾인 유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옷이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신발을 벗어버린 유채는 발을 살폈다. 잠깐 사이에 발가락이 짓무르고 뒤꿈치는 살갗이 벗겨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유채는 엉망이 된 발이 마치 제 처지 같아 서러웠다.
뚝. 뚝.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유채는 다리를 모아서 끌어안았다. 여러 사람 앞에서 루프스의 정부 취급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울고 있네요, 아가씨.”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알렉스와 그가 내밀고 있는 손수건이 보였다.
“눈물 안 닦고 뭐해요? 나 지금 오줌보 터지기 직전이라고 둘러대고 나온 참이니까, 빨리 잡아요. 그 늑대 기세가 심상치 않아서 오래 못 있어요.”
“감사합니다.”
“목소리도 얼굴만큼 예쁘네요.”
유채는 알렉스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알렉스가 몸을 굽히더니 유채와 눈을 맞추었다. 자주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제 눈치 없이 군 건 미안해요, 아가씨. 근데 나 하나만 다시 묻죠. 이름이 뭐예요?”
“한유채요. 이름이 유채. 성이 한이에요.”
“얼굴만큼 예쁜 이름이네요.”
알렉스는 손을 뻗더니 유채의 입가를 잡아 위로 올려주었다.
“웃어요. 울면 계속 슬퍼지기밖에 안 해요. 힘든 일이 있어서 웃는 게 힘든 건 알지만, 그래도 웃어요. 그래야 이런 거지같은 상황도 이겨낼 방법을 찾죠.”
알렉스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형 말에 따르면 난 근육 바보라 이렇게밖에 위로를 못 하겠네요. 미안해요. 그리고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 거 미안해하실 필요 없으세요. 손수건 감사했습니다.”
유채는 눈물을 닦고 알렉스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알렉스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것을 받지 않았다. 유채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눈물 날 일 별로 없는 남자이지만, 유채 양은 눈물 흘릴 날이 나보다 많을 것 같아요.”
알렉스는 조심스럽게 유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유채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았다.
“그러니까, 유채 양이 가지고 있어요.”
알렉스는 조금 어눌한 발음으로 유채의 이름을 말했다. 유채는 오랜만에 타인에게 듣는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거…… 연인분께 받은 거 아닌가요?”
“괜찮아요. 아이린도 이해할 거예요.”
알렉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섰다. 투박한 외모와는 다르게 알렉스는 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방을 나가는 유채를 두고 볼 수가 없어 쫓아 나온 것이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는 날 돌려줘요. 그때는 내가 포트리스를 구경시켜 주고 적당한 데 집도 마련해 줄게요.”
“감, 감사합니다.”
유채는 그 말에 다시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다정한 말이라 유채는 그가 너무 고마웠다.
“미안해요.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하지만 하나 약속할게요. 유채 양. 내가 꼭 도와줄 테니까 요. 너무 우울해하면 정신이 피폐해져요. 힘든 것 알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힘내봐요.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해요.”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의미 없고 무책임한 위로라 해도 유채는 이 낯선 곳에서 처음 듣는 그 말이 너무 고마웠다.
알렉스는 말주변이 없어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면서 루프스의 의심을 사기 전에 들어가 봐야 한다고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유채를 뒤로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 * *
“레티티아.”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유채는 무릎을 껴안고 한참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목이 들리자 인상을 찌푸렸다. 청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유채는 될 대로 되라는 심경으로 입을 열었다.
“약속 어겼어요. 그래서 이번에 무슨 벌을 내릴 건가요?”
루프스가 으르렁거리면서 유채를 보았다. 그녀의 행동 전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분고분하다가도 이렇게 가시를 드러내고 한 손으로 쥐기만 해도 부서져 버릴 것처럼 연약하면서 다른 이들을 걱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우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그 건방진 수컷에게 유채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주려고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정말 거지같이 흘러갔다. 루프스는 유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쥐어진 손수건을 보았다. 그는 이를 갈면서 손수건을 빼앗았다. 유채는 손수건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지만 루프스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건 필요 없는 것 아닌가?”
“필요해요!”
“네가 울 일이 무엇이 있다고? 요즘처럼만 굴면 나는 네게 최상의 것을 줄 수 있어. 장담하는데, 저 포트리스에서 온 마레 위르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있지. 아니 넌 이미 저 놈들보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지. 내가 너를 이곳의 여왕이 된 것처럼 만들어줄 수 있어.”
루프스가 유혹하듯이 말을 하였다. 그의 손가락이 유채의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닦았다.
“그쪽의 장식장 속 인형으로 있는 건 거절할게요. 난 레티티아가 아니라 한유채예요. 당신의 애완동물이 아니라고요.”
한유채, 한유채. 하도 들어서 이제는 그 이상한 발음의 이름을 외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불리기 원한다면 한 번쯤을 불러줄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막상 말을 하려고 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유채를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레티티아란 이름을 통해서 제 처지를 알려주기를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에게 둘러대는 변명이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채란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그의 레티티아는 사라질 것 같았다. 그것을 생각하니 루프스는 뱃속에 나비가 백 마리쯤 퍼덕이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발치에서 머물던 검은 감정이 짙어져서 그를 끌어당겼다. 그래서 부르지 않았다. 부르기 싫었다. 유채는 그냥 그의 레티티아로 존재하면 되었다.
“……이 파렌티아를 벗는 날이 온다면 그 이상한 이름으로 불러주지. 그때까진 너는 내 것이고, 나의 레티티아야.”
루프스가 유채의 볼을 쓸었다. 유채는 그 손이 정말 소름끼쳤다.
“자. 그럼 내 약속을 어긴 건 어떻게 할까? 블루벨을 계속 그곳에 넣어둘까?”
“차라리 내가 냉궁에 들어갈 테니 블루벨은 이제 그만 돌려줘요.”
“레티티아. 자발적으로 받겠다고 하는 건 벌이 아니야.”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미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꾸며놓으니 어지간한 미인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루프스는 어젯밤에 본, 은은하게 웃던 그녀가 더 예뻐 보였다. 환히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웃어.”
“예?”
“웃어보라고. 그러면 이번 일은 넘어가 주지.”
【‘웃어요. 울면 계속 슬퍼지기밖에 안 해요.’】
유채는 자연스럽게 알렉스의 말을 떠올렸다. 웃으라는 말이 아까는 위로가 되었었는데 지금은 협박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웃을 기분도 아니었고 협박에 기분을 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들을 바에야 몸이 힘든 쪽이 나았다.
“지금 발이 아파서 못 웃겠어요.”
유채는 핑계를 둘러댔다.
루프스는 유채의 거절에 실망했다. 입안이 쓴 약을 한 움큼 털어 넣은 것처럼 썼다. 그는 혀를 차면서 레티티아의 치마를 들추었다. 유채는 놀라서 엉덩이를 뒤로 뺐다.
“궁녀들을 가만 두지 않아야겠군.”
루프스가 짓무른 발을 살피느라 상처를 건드리자 유채는 신음을 흘렸다. 루프스는 레티티아의 무릎 아래에 손을 넣고 등을 받쳐 안아 올렸다.
“나 혼자 걸을 수 있으니까 내려놔요!”
루프스는 유채의 몸부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헤나. 궁의를 불러와.”
“내려놓으라고! 혼자 걸을 수 있어!”
헤나는 루프스를 따라 별장에 온 오르페를 찾아 뒤로 돌았다.
헤나가 블랑카님과의 인연으로 전투 일선에서 물러나 루프스의 전담 궁녀로 산 지가 팔 년이었다. 요즘 그는 참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행동은 모두 저 암컷 마레 위르와 관련되어 있었다. 미색이 같은 암컷도 홀릴 수도 있을 정도로 빼어나다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를 것 없는 마레 위르였다.
그럼에도 루프스는 저 마레 위르에게 참으로 관대했다. 다칠 때마다 꼬박꼬박 궁의를 붙여서 치료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도 용서하고 살려주었다. 평소라면 혀를 자르라고 명할 건방지고 무례한 언사도 용납했다.
게다가 오늘은 루프스의 비(妃)나 입을 수 있는 옷까지 입히려고 들었다. 제가 목숨을 걸고 말리지 않았다면 오늘의 일로 크게 난리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쯤 되니 헤나는 이제 걱정이 앞섰다. 헤나는 마레 위르를 증오하지는 않았다. 마레 위르가 그녀의 부모를 죽였으나 그녀를 살려준 것 역시 마레 위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 작은 소녀를 불쌍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제는 그 소녀가 두려웠다.
수컷 늑대는 평생 한 암컷만 보고 산다. 루프스가 지금 평생의 암컷으로 저 마레 위르를 택한 것이라면. 헤나는 몸을 떨었다. 큰 폭풍이 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형! 미쳤어?”
알렉스는 검을 침대에 내던졌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프레드릭의 턱에 주먹이 날아갈 것 같았다.
“안 미쳤고, 귀도 잘 들리니까 조용히 말해.”
“차라리 내가 남을게. 왜 형이 이곳에 남아! 레이라는 어쩌고!”
알렉스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뒤로 쓸어 넘겼다. 유채의 일로 잠깐 회담장을 나가있는 사이 프레드릭이 사고를 친 것이다. 포트리스에 필요한 약초를 얻는 대신에 볼모로 토스 호무스에 남겠단다.
“네가 남는 것보다 내가 남는 것이 레이라에게는 더 이로워. 네가 있어야 포트리스가 안전…….”
“안전 그딴 거 집어치워! 형 부인이 애를 낳는다고! 형이 아버지가 된다고! 레이라가 걱정 안 돼? 태어날 애는?”
“알렉스, 이성적으로 생각해.”
“지금 이성이 중요해?! 생각해 봐, 응? 여기 혼자 남는다는 건 늑대 아가리에 목을 들이미는 행위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수인들의 동물화? 그걸 형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알렉스는 프레드릭이 가져온 어처구니없는 회담의 결과에 분노했다.
* * *
“난 말이 짧은 것을 좋아하지. 간단히 말해서 지금 토스 호무스에서 자라는 레프스가 필요하다는 것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프레드릭이 대답했다. 루프스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레프스는 토스 호무스에서 나는, 토끼를 닮은 하얀 들꽃의 이름이었다. 레프스는 약초로 사용기도 했는데 병의 진행을 늦추는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급성으로 병이 발전했을 때 속도를 늦추어 치료할 시간을 버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 솔직히 말해 병 자체의 치료에 효과 있는 약초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복용하면 부작용이 있어 정말 급박한 환자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 약초였다.
“레프스는 포트리스에서 나지 않으니 나를 찾아온 건가?”
“그렇소, 늑대의 왕.”
페드로가 대답했다. 이어 마틴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포트리스에 전염병이라도 도는가 보지?”
마틴이 몸을 움찔거렸다. 루프스는 넌지시 던진 말에 겁 많은 수컷 마레 위르가 반응하는 것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루프스에게 확신을 주었다.
“맞나 보군. 이거 어쩌나. 좁디좁은 곳에서 전염병이라니.”
“어차피 들통 난 김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맞소. 포트리스에 전염병이 돌고 있고. 그래서 그 약초가 필요하오.”
“그래서. 독수리 일족과 약초를 교환하자?”
“그런 셈이지. 머리가 달렸다면 그걸 굳이 다시 말해서 확인을 받을 필요가 있나?”
“필립!”
페드로가 빈정대는 필립에게 경고를 주었다. 필립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전염병에 대한 것이 들통 난 이상 회담의 향방은 루프스의 마음에 달렸다. 그럴 바에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배짱을 부릴 필요가 있었다. 본디 협상이라는 것은 가진 것이 많은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닌 조급하지 않은 자가 이기는 법이었다.
“머리를 숙여도 모자랄 판에 그리 건방지게 굴어도 되는가? 늙은이?”
“빌어도 주지 않을 거 아니오?”
“요즘 나를 너무 잔학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많아진 것 같아.”
루프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그냥 내어주어도 상관없는 풀이다. 보나마나 이들은 레프스로 인해 병의 진행이 멈춘 것을 치료에 차도가 있다고 여긴 것이 분명했다. 좀 더 오래 지켜보면 그것이 그리 효과가 없음을 알았을 텐데, 상황이 급박하니 오래 두고 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되먹지도 않은 협박을 하면서. 불판 위에서 이리저리 뛰는 생쥐를 보는 것 같아 나름 즐거웠다.
“그럼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냥 주기에는 내가 손해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아.”
마틴은 한숨을 쉬었다. 저들 입장에서는 손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순순히 약초를 내어줄 리가.
“내가 레프스를 주지 않으면 포트리스는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을 것이고 그러면 손쉽게 너희를 몰아낼 수 있을 텐데? 겨우 독수리 수인 때문에 그 기회를 포기할 것 같은가?”
“올리에와의 관계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프레드릭이 물었다.
“올리에도 머리가 있는 영감이라면 대의에 따른 희생 정도는 이해하겠지. 안 그런가? 그 영감이 유한 편이기는 하나 그 영감도 제 딸을 마레 위르 때문에 잃었어. 그것도 렉스 뮈어의 손에.”
“그래서 주지 않으실 겁니까?”
“그대들의 노력이 가상하니 기회를 하나 더 주지. 다른 조건을 제시해 봐라. 레프스를 내어주면 내게 뭘 줄 것인가?”
루프스는 한쪽 팔로 턱을 괴면서 물었다. 프레드릭이 대답했다.
“요즘 수인들의 동물화가 일어나는 정도가 빈번해졌다고 들었습니다.”
루프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마 전 다녀왔던 말의 일족 일도 그와 관련된 일이었다. 루프스는 조금 언짢은 기분으로 프레드릭의 말을 들었다. 포트리스의 인간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면 수인들의 땅에서는 원인 모를 병으로 수인들의 동물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멀쩡한 수인들이 이지를 잃고 동물로 변해갔다. 원인도 모르고 전조 증상도 없었다. 수인들에게는 불치병이었고 최근 들어 발병률이 높아진 상태였다. 이미 고양이 수인은 그 병으로 멸족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펠레스 호무스(Feles Humus: 고양이 일족의 땅)는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
“아직은 우리 포트리스보다 상황이 낫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그 문제가 심각해질 겁니다.”
“그래서, 그걸로 날 협박이라도 하려고?”
“도와드리겠습니다.”
프레드릭의 말에 오히려 필립과 마틴은 놀란 표정을 지었었다. 페드로가 프레드릭을 도와 설명했다.
“우리 인간들이 스티폴로르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르젠의 서적에서 나온 빛을 짊어진 수호자에 관한 이야기에서였지.”
페드로는 스티폴로르를 처음으로 찾은 인간의 자손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해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운 좋게 아르젠의 고서를 얻었다. 그중에는 아르젠의 초대 여제였던 은가연의 친서도 섞여 있었다. 약속의 땅(스티폴로르)에서 수인을 이끄는 수장과의 대화였다. 완벽하게 해석되지는 않았지만, 친서의 내용은 수인의 동물화에 관련된 것이었다. 페드로는 재킷의 안쪽 주머니에서 낡은 종이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이거면 믿겠는가?”
페드로는 종이를 펼쳐서 초대 여제의 인장과 수인들의 수장이었던 자의 인장이 찍혀 있음을 보여주었다. 루프스는 놀랐지만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턱을 쓸었다. 이니투스의 인장이었다. 이니투스는 수인들의 영원한 지도자이자 영웅으로, 대륙에서 스티폴로르로 일족을 이끌고 온 루프스의 조상이었다. 또한 전설 속에 등장하는 수인들의 영원한 친구로 일컬어지는 아르젠 여제의 인장 역시 진짜였다.
“이 인장들은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이지.”
편지를 확인한 루프스는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걸로 뭘 하겠다는 건가?”
“배에 아르젠의 고서가 있습니다. 그 고서는 모두 빛을 짊어진 수호자, 세계를 구했다 전해지는 아르젠의 초대 여제인 은가연의 친우였던 당신들의 위대한 영웅인 이니투스와 관련된 책들입니다.”
프레드릭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대륙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고서들이었다. 고대 마법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자료들이었다.
“그걸 나에게 넘기겠다?”
“예.”
“그래서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는가? 물론 수인의 고어라면 우리가 너희보다 빨리 해석하겠지만. 너희가 이걸 가져온 것을 보면 결국 이것이 고대의 마법적 전승과 관련된 일이라고 추측했을 텐데?”
수인들은 마력 저항력이 강했다. 어지간한 고위 마법이 아닌 이상 효과가 없었지만 동시에 그들도 마법을 사용할 때 제한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인간은 10의 마력을 사용해서 8의 마법을 만들 수 있다면 수인은 100의 마력을 사용해야 8의 마법을 만들 수 있는 식이었다. 물론 종족 개인이 가진 속성에 따른 마법은 예외였으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마법이라 부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많은 마력을 타고난 소수의 이들만 마법을 배울 수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인들 사이에는 마법이 발달하지 못했다. 즉, 수인의 동물화가 마법과 관련된 일이라면 수인 측에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그대들은 전염병을 치료하고 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해결할 수는 있으나 언제 열 수 있을지 모르는 선물 상자를 얻는 꼴이 아닌가?”
“배에 있는 것들은 필사본입니다. 수인의 동물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저희 포트리스 측도 도울 겁니다.”
프레드릭은 표면적으로는 레프스를 얻으러 온 것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수인들과의 사이를 더 좋게 만들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들 사이의 앙금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인이 인간의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를 제공하고 인간은 수인의 동물화에 대한 해결책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면 장벽이 허물어질 수도 있었다.
“그대들이 성실하게 돕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우리야 혹시 모르는 일 때문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대들은? 과연 그럴 수 있나?”
루프스의 삐딱한 대꾸에 마틴은 초조해져서 신경질적으로 손톱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이건 어떤가? 토스 호무스에 마레 위르를 하나 보내라. 인질로서 말이지.”
루프스는 턱을 쓸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렉스 뮈어는 어떤가?”
“지금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요!”
필립이 노성을 질렀다. 렉스 뮈어는 포트리스의 구심점과 같은 존재였다. 렉스 뮈어를 토스 호무스에 보낸다는 것은 포트리스의 사기를 꺾고 그들의 전력을 줄이겠다는 말이었다. 필립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렉스 뮈어 정도는 되어야 그대들이 성실하게 일하겠지, 난 마레 위르들의 알량한 약속은 못 믿어.”
페드로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렉스 뮈어를 루프스의 손에 넘긴다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했다. 렉스는 제 여동생인 라일라의 죽음에 분노하여 블랑카의 살해에 동참하였으며, 로보와 베니니타스의 결전에서 로보의 패배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자였다. 게다가 루프스 개인과도 악연이었다. 그의 다리를 잘라먹을 뻔하지 않았는가. 루프스가 렉스 뮈어를 가만 두지는 않을 것이다. 말이 인질이지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심한 꼴이 날 것이 뻔했다.
“……제가 남겠습니다.”
프레드릭이 입을 열었다.
“전 포트리스의 대학자이자 마법사였던 키르케의 제자입니다. 키르케 스승님은 루프스도 아실 거라 생각하십니다.”
“그 기분 나쁜 마법사라면 나도 알지. 죽었다고 들었는데.”
“전 그분의 유일한 제자이며, 방금 드린 고서의 해석에도 참여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남아 수인들과 동물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겠습니다.”
“자네!”
페드로가 프레드릭의 팔을 잡았다. 페드로는 프레드릭을 높게 평가했다. 똑똑하고 인망이 두터운 그는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포트리스의 장로의 자리에 추대될 정도였다. 이런 인재를 위험한 곳에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오호. 천애 고아라고 들었는데. 그대가 과연 포트리스의 인질이 될 수 있는가?”
“형.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잠깐 화장실을 가겠다면서 나갔다가 이제 들어온 알렉스가 인질이라는 말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루프스는 알렉스를 보고 피식 웃었다. 정보 수집으로 유명한 토끼 일족을 통해 알렉스란 수컷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렉스 뮈어의 제자로 차후 포트리스의 국방을 책임질 인재로서 곧 포트리스의 군권을 쥐게 될지도 모르는 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아이기에 형과의 우애가 돈독하다고 하였다. 사방이 적으로 포위된 상황에서 군권만큼 강력한 권한도 없었다. 저 어수룩해 보이는 건방진 마레 위르가 군권을 틀어쥘 놈이라면 그의 형인 프레드릭을 데리고 있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프레드릭 하워드라고 했나?”
루프스가 드물게 마레 위르를 풀네임으로 불렀다. 알렉스와 프레드릭 모두 루프스를 돌아보았다.
“네가 토스 호무스에 인질로 남아서 동물화에 관한 연구를 해주겠다면 나는 너희에게 레프스를 원하는 만큼 내어주지. 원한다면 종자까지도 주겠다.”
“약속하십니까?”
“물론. 그대가 그리하겠다 결정을 내리면 당장 그대들이 돌아갈 배에 실어주겠다.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거든.”
“형!”
알렉스가 큰소리를 외쳤다. 루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까지 결정해서 알려주길 바란다.”
프레드릭은 고개를 숙였다.
아. 아. 레이라. 레이라.
“형.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알렉스의 외침과 페드로 그리고 필립, 마틴의 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 * *
“그럼 이것 외에 약초를 얻을 방법이 있어?”
프레드릭이 노성을 질렀다. 프레드릭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회담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빌어먹을 루프스는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도 머리가 좋았고 영악했다. 그는 왜 그가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증명해 냈다. 그의 오만과 허세는 스스로의 실력과 능력을 믿기에 나온 것이었다. 렉스 뮈어의 말이 사실이었다. 포트리스를 위기에 빠뜨린 것은 루프스 개인의 지략이었다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루프스는 능구렁이처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회담을 이끌었다.
“젠장. 젠장.”
프레드릭은 신경질적으로 외치면서 발을 굴렀다. 루프스는 무시할 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진실로.
* * *
“아가씨. 인생 편하게 살고 싶으면 그냥 굽혀.”
오르페가 유채의 발에 붕대를 감아주면서 충고했다. 유채는 오르페의 뱀 같은 서늘한 체온에 발을 움찔거렸지만 저를 몇 번이나 고쳐 주었다는 수인이기에 무례가 될까 봐 그러지 않으려고 몸에 잔뜩 힘을 준 채 긴장하고 있었다. 매번 정신을 잃고 있을 때 그의 치료를 받았기에 유채는 이번에 그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래서 오르페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의 외양에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래도 인간처럼 보이기라도 하는 다른 수인들과는 다르게 뱀 수인은 딱히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뱀처럼 생겼다. 목에 선명한 뱀 비늘이며 파충류 특유의 세로로 동공이 긴 눈동자, 그리고 끝이 갈라진 긴 혀에서는 쉬잇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채는 언젠가 포유류는 유전자에 각인된 수준으로 뱀을 무서워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건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
유채는 그의 치료를 믿을 수 있는지 반신반의하면서 파충류 같이 서늘한 손을 견뎠다. 그래도 제 등을 치료해 준 수인이라고 하였으니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오르페는 붕대를 감으면서도 고작 이런 상처에 붕대까지 쓸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괜찮다고 넘어갔다가는 루프스가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다고 화를 낼 것 같아 할 수 있는 건 다 하기로 했다.
“아가씨, 내가 아가씨를 치료한 것이 이번으로 네 번째야.”
오르페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는 마레 위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마레 위르 아가씨는 볼 때마다 불쌍하고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아가씨 때문에 마레 위르 전문의라는 이름을 얻고 싶은 생각이 없어.”
오르페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아가씨가 자존심이 강하다는 건 여태까지의 일을 봐서 알겠어. 하지만 이러다 망가지는 것은 아가씨 몸이야.”
유채는 오르페의 말을 얌전히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아가씨가 루프스님께 받는 대우는 포트리스에 살고 있는 마레 위르들과는 비교도 안 될 거야. 그리고 웬만한 수인들보다도 호화롭고 편하게 살고 있지. 조금만 굽히면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대체 왜 그러는 건가.”
“하나만 물어봐도 되요?”
“뭔가?”
“수인들도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가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먹을 거 제때 먹고 위험하지 않다는 이유로 자유를 잃고 새장에 갇힌 새가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흠…… 그건.”
“사람마다 굽히지 못하는 것이 있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저도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가 왜 지금에 만족해야 해요? 돌아갈 곳이 있는데 돌아가지 못하고 단지 호화롭게 살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오르페는 유채의 눈을 보았다. 항상 정신을 잃은 모습만 보아서 볼 수 없었던 유채의 검은 눈을 오르페는 똑바로 마주보았다. 여왕 같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눈이었다. 같잖은 자존심이라 폄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르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저런 이가 꺾이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오르페는 붕대를 다 감고 마무리를 한 후 주변을 정리했다.
“어디 아픈 데가 있으면 내게 오게.”
오르페는 몸을 일으키며 뻐근한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레티티아 말고 진짜 이름은 뭔가?”
“유채요. 한유채.”
오르페는 요상한 발음의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입에 어느 정도 붙은 것인지, 작게 발음해 보았다.
“그럼 몸조심하게, 유채 양.”
오르페는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루프스가 들어왔다. 유채가 치료받는 동안 옷을 갈아입은 것인지 평소 같은 차림새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발에 감긴 붕대에 시선을 던졌다.
“발은 괜찮나?”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에서 화장이 번진 부분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유채는 고개를 살짝 돌려서 그 손을 치워내었다.
“의사 부를 정도로 유난떨 정도의 상처는 아니에요.”
“아파서 웃지도 못한다는 것은 핑계였나 보군.”
유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루프스는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유채는 치마를 내려서 발을 감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루프스는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루프스는 유채의 가는 발목에 걸려 있는 발찌를 가볍게 건드렸다. 맑은 소리가 났다.
“그래서 웃지 않을 건가?”
“다른 걸로 할게요. 내가 블루벨 대신 그 감옥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쉿. 말하지 않았나. 스스로 받기를 청하는 건 벌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왜 항상 너는 남 걱정을 우선으로 하는 거냐?”
루프스가 발목을 놓아주자 유채는 얼른 다리를 당겨 발을 치마 속에 숨겼다. 루프스는 유채의 옆에 앉았다.
“장담하는데, 그 암컷 토끼는 그곳에서 너보다는 오래 버틸 거다. 나이가 어려도 너보다 모든 신체 능력이 우월하지, 그리고 그깟 암컷 토끼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너를 희생하려 드는 거냐? 그냥 무시해 버리면 편할 텐데.”
“블루벨은 제가 책임져야 하는 아이니까요.”
유하는 몸이 약하고 마음이 여렸고 유채의 어머니는 이방인이었다. 아버지는 약국 일로 바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유채는 애교 많은 막내딸이 아니라 엄마와 언니를 도울 수 있는 애어른이 되어야 했다. 스스로의 일은 혼자 해결했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범위, 아니, 설령 도울 수 없는 범위의 일일지라도 유채는 엄마와 언니를 위해서 언제나 노력했다. 그게 유채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자신의 사람들만큼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것. 그 범위에 블루벨이 들어왔으니, 유채는 블루벨도 지켜야 했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된 아이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나 하나 편하자고 그 아이를 버릴 수는 없어요. 내가 지켜야 하는 거예요.”
【‘오빠! 살려줘!’】
루프스는 에리카의 환영을 보았다. 심장 한구석이 바늘에 찔린 듯이 아파왔다. 루프스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다가 망가질 거다.”
“상관없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난 상관없어요.”
꺾으려고 해도 꺾을 수 없는 그녀는 태산과 같았다. 유채는 지나칠 정도로 고고했다. 그 점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루프스는 그녀를 놓아주기는 싫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오른쪽 볼을 손으로 감쌌다. 언제나 유채를 만날 때면 제게 복종하지 않는 자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녀가 제 말에 얌전히 복종하게 되면 괜찮아질까 생각하다가도 또 그것이 제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불편한 암컷이라면 차라리 죽여 버리라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떠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면 제 품에 끌어안고 영원히 제 것이라고 속삭여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아름다운 암컷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미모 때문에 제가 휘둘릴 리는 없었다.
유채는 계속 제 볼을 감싸이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루프스의 시선이 불편했다. 유채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자 루프스가 볼을 잡았던 손으로 턱을 들어 올렸다.
“나도 요즘 많이 관대해졌어. 애교도 없는 펠릭스 다우스를 이렇게 예쁘게 봐주다니 말이야.”
“관대요?”
유채는 그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당연한 말이 아닌가? 웃으라고 했는데도 웃지 않고 뻗대는 펠릭스 다우스를 봐주고 있는데, 관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하.”
“좋아. 벌을 바꾸지. 분명히 말하는데, 이번이 마지막이다. 만일 이것도 거부하면 블루벨을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뭔데요?”
유채는 불안해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와 닿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의 레티티아에게 꼭 맞는 벌이지.”
루프스는 한손으로 유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잡았다. 유채의 입술에 루프스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유채의 눈이 커졌다. 루프스는 그녀의 입술을 굳이 벌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루프스의 입술은 그저 유채의 입술에 닿아 있을 뿐이었다. 유채의 입술에서 달큰한 향이 났다. 유채는 입을 꾹 다문 채 눈만 굴렸다. 루프스의 혀가 가볍게 입술을 쓸었다.
루프스는 입술을 떼어내고 유채의 가는 등을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유채는 반사적으로 루프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서 그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반항하면, 블루벨이 냉궁에 있는 시간을 늘리겠다.”
유채는 그를 밀어내는 것을 멈췄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당겨 더 세게 안았다.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유채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뒷머리에서 등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말랑하게 굴어. 내가 안아줄 때 뻣뻣하게 굴지 않고 이렇게 얌전히 있으면 블루벨을 꺼내주지.”
오늘의 향유는 히아신스였나 보다. 루프스는 그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유채가 제게 이상한 감정을 불러오든 말든, 제가 유채 때문에 이상하게 행동하든 말든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유채는 제 것이고, 저만이 만질 수 있었다. 부드럽고 폭신한 몸은 제 품에만 안길 수 있었다. 그 건방진 마레 위르 수컷은 함부로 만질 수도 없는 제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춘 뒤 귓가에 속삭였다.
“토스 호무스에 너의 동족이 머물게 될 거야.”
“예?”
유채의 몸이 움찔거렸다. 유채를 안고 있는 루프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마 프레드릭이란 녀석이 올 건데, 그 수컷과 가까이 지내지 마. 이건 경고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놓아주었다. 유채는 팔이 풀리자마자 얼른 몸을 뒤로 빼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아까 뺏었던 알렉스의 손수건을 내밀었다.
“돌려줄 테니, 내 앞에선 그 손수건 쓸 생각하지 마. 그러니 생글생글 웃어.”
저 손수건이 젖게 되면 루프스는 울 일이 많을 것이라는 이유로 손수건을 준 건방진 수컷에게 지는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돌려받은 손수건을 애틋하게 만지는 유채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레티티아님!”
블루벨이 돌아온 것은 유채가 루프스의 별장에서 돌아온 지 약 이 주 만의 일이었다. 토스 호무스에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블루벨이 깡총깡총 뛰는 모양새로 유채의 품에 달려들었다. 유채는 블루벨을 꼭 껴안았다. 하얗고 몽실몽실한 블루벨의 귀가 재회의 기쁨에 여느 때보다 쫑긋 세워져 있었다.
“몸은 어디 아픈 데 없어?”
“괜찮아요! 추위는 익숙한걸요!”
블루벨은 루프스가 제게 관심이 없어 냉궁에 갇히는 벌을 받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하였다. 유채는 그 말에 잘 됐다며 웃어야 하는지 아니면 미안하다고 울상을 지어야 하는지 고심해야 했다.
“레티티아님.”
블루벨은 작은 손으로 유채의 얼굴을 만졌다.
“전 괜찮아요. 레티티아님이 죽을 뻔한 저를 살려주시고 이렇게 냉궁에서도 꺼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안 지으셔도 돼요.
“미안해. 블루벨…….”
“괜찮아요.”
블루벨은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감옥에서 겪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간수들의 눈을 속여 비실비실한 척하여 스프를 더 얻어먹은 일이라든지 케릭스가 이따금 찾아와서 비싸고 귀한 음식을 주고 갔다든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블루벨. 근데, 네 동물형은 어떻게 생겼어? 난 토끼가 싸운다는 게 상상이 잘 안가.”
토끼라고 하면 귀엽고 작은 동물이라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기에 유채는 힘이 최우선인 수인들의 세상에서 토끼가 땅을 차지했다는 것이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블루벨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불퉁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지금 저희 일족이 그저 귀엽게만 생겨서 약할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니야. 난 블루벨 말 믿어.”
“에이. 아니시잖아요. 저는 눈을 보면 알아요.”
블루벨은 귀를 추욱 늘어뜨렸다.
“저희 일족이 보기에는 귀여워 보여도 되게, 되게 강하거든요! 그래서 땅도 얻어낸 거라고요! 무, 물론 수가 많은 것도 있기는 한데…….”
그게 토끼 일족과 쥐 일족이 연합한 이유였다. 두 일족은 수로만 따지면 당해낼 일족이 없었다. 육체적 약함을 두 일족이 연합해 수로 보완하여 얻어낸 것이 바로 두 일족의 땅이었다.
“흐잉. 늑대들도 우릴 무시하는데 레티티아님까지 그러시면 저 섭섭해요.”
블루벨이 토끼 귀를 끌어당겨 눈물을 닦듯이 눈을 가렸다. 유채는 허둥지둥 블루벨을 위로해 주었다.
“아니야, 아니야. 난 블루벨 믿을게, 블루벨은 강해.”
“힝. 안 믿으시면서.”
블루벨은 잡았던 귀를 놓았다. 토끼 귀가 아까 전만큼 높게 솟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솟아올랐다.
“레티티아님, 산책 언제 나가세요? 그때 제가 보여 드릴게요! 만날 도서관만 가지 마시고요. 정원도 걷고 그러세요.”
“내가 도서관에 간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
“헤나님이 알려주셨어요. 레티티아님을 잘 모시라고 요즘 뭐 하시는지 알려주셨어요.”
유채는 루프스의 전담 궁녀인 헤나를 떠올렸다. 그녀가 궁녀들 중 가장 지위가 높다고 했다. 들리는 말로는 늑대 수인 여자들 중에도 강한 축에 속해 어지간한 수인들은 헤나에게 꼼짝도 못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헤나는 유채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루프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그녀의 편의를 봐주는 편에 속했다. 유채도 딱히 헤나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그래? 근데 나 도서관에만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헤나님이 두 시에서 세 시 사이에 산책을 하신다고 잘 따라다니라고 하셨어요. 곧 가실 거죠?”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이 되면 헤나가 와 방문을 열어주었다. 유채는 그제야 방에서 나갈 수 있었다. 매번 겪을 때마다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준 시간을 최대로 이용해서 이곳에 관한 정보도 찾고 빠져나갈 길도 궁리해 보고 원래 집으로 돌아갈 방법도 찾아보았다. 도서관에서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을 이해하느라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소득은 있었다. 자신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수인들의 영웅이라는 이니투스의 친우라는, 검은 머리 이국의 여인이라 불리는 은가연이라는 여자였다. 그녀가 밝히기를, 자신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며 신의 대리자로서 이곳으로 넘어왔으며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신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돌아가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달리 말하면 돌아가는 길이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또 중요한 것은 그녀가 신과 계약을 맺어 차원을 넘었다는 것이다. 즉, 제가 이곳에 온 것도 신이 개입했을 확률이 컸다.
유채는 기억을 열심히 되짚어보았지만 신 비슷한 것을 만난 적은 없었다. 여전히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게다가 뭔가 생각날 듯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유채는 떠오르지도 않는 기억들은 제쳐 두고 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은가연이란 여자와 이곳 스티폴로르의 성역들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다행히 이곳에는 고대의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블루벨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 예정된 시각이 되니 문이 열렸다. 유채는 블루벨의 손을 잡고 방을 나왔다. 밖에 서 있던 헤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입을 열었다.
“루프스님께서는 카날리스 호무스(Canalis Humus: 개 수인 일족의 땅)에서 오신 카니스 바실리사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레티티아님을 그분과의 저녁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다섯 시까지 데리러 갈 테니 그동안 산책을 하시라 하셨습니다.”
“알겠어요.”
유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또 다시 그 남자의 허영심으로 인한 보여주기 시간이 될 모양이었다. 신기한 동물을 철창 안에 가두이고 돈을 받고 구경을 시키는 서커스단처럼, 그도 유채를 그렇게 이용했다. 그래도 방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 이렇게 밖에 나오는 것이 좋았기에 유채는 기꺼이 그 굴욕을 감내했다.
블루벨은 유채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손을 흔들면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 레티티아님, 오늘은 오래 밖에 계실 수 있으시겠어요.”
“파물라(Famula: 궁녀 중 가장 말단) 블루벨. 레티티아님께 그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아, 괜찮아요. 헤나 씨. 제가 허락했어요.”
유채는 헤나의 일침에 찔끔하여 떠는 블루벨의 어깨를 팔로 끌어안았다. 헤나는 블루벨을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유채의 곁을 떠났다. 블루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헤나님은 화나시면 꽤 무서우셔서. 저 죽는 줄 알았어요.”
“블루벨, 파물라가 뭐야?”
유채는 처음 듣는 단어를 궁금해했다. 블루벨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우며 입을 열었다.
“궁녀의 계급이에요. 가장 말단이 파물라, 헤나님 같이 상위의 궁녀를 페디세콰(Pedisequa)라고 해요. 저 같은 파물라는 이렇게 한 분, 한 분 옆에 붙어서 뒤치다꺼리를 하거나 잡일을 하고 페디세콰님들은 루프스님을 시중을 들고 저희 같은 말단 궁녀를 지휘, 감독하세요. 헤나님은 페디세콰 중에서도 가장 높으신 분이라 루프스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고 페디세콰 분들을 지휘하시는 분이고요.”
“아무튼 블루벨은 말단이라는 거네?”
“잉. 사실이라도 그런 말 들으면 기분 상해요.”
블루벨의 귀가 다시 축 늘어졌다. 블루벨의 토끼 귀는 블루벨의 기분에 따라 축 늘어지거나 쫑긋 솟거나 했다. 그 모습이 옛날에 본 애니메이션 속 토끼 캐릭터와 닮아 있어 너무 귀여웠다. 유채는 블루벨의 말랑말랑한 볼을 쭉 늘였다. 찹쌀떡 같은 볼이 쭉 늘어났다.
“아이구. 귀여워라.”
“아으파아으요.”
유채는 블루벨의 볼을 놓아주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단 도서관부터 가자.”
블루벨이 곁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유채는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블루벨은 발개진 볼을 문지르면서 유채를 따라왔다.
* * *
“레티티아님은 공부 좋아하세요?”
블루벨이 유채가 건네는 책을 받으면서 물었다.
“아니. 취미는 아니야. 그래도 필요하면 꼭 해.”
솔직히 말해서 대학 안 가고 성공하는 방법이나 약대에 가지 않고도 약사가 되는 방법이 있었다면 유채는 고3 시절을 그렇게 치열하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유하처럼 공부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다른 아이들처럼 소설 읽는 것과 노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그래도 대단하세요. 전 인키디움(Indicium: 토끼 일족의 정보부) 떨어지고 공부 놨거든요.”
유채는 블루벨에게 마지막 책을 건네면서 되물었다.
“인키디움?”
“토끼 수인 일족의 출세길이에요.”
“뭐하는 덴데?”
블루벨은 자신의 쫑긋 솟은 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정보부예요. 저희 토끼들은 귀가 크잖아요.”
토끼 수인 일족은 상대적 약함을 많은 수와 정보력으로 극복했다. 정보력으로 줄을 잘 타고, 치고 빠지는 유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인키디움을 설립,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수집하여 늑대, 여우, 소 같은 강한 일족 일족에게 제공하여 그들의 힘을 등에 업고 본인들의 땅을 지킬 수 있었다. 물론 쥐 일족과 연합을 통해서 부족한 전력을 매꿀 수 있었던 것도 컸다. 그것이 능히 토끼 일족을 쓸어버릴 사슴 일족이 여태껏 토끼 일족에게 이를 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인키디움은 토끼 일족의 권력의 중심을 장악했고 인키디움이 수장이 곧 레푸스(Lepus: 토끼 수인 일족의 수장)가 되었다.
“인키디움에 들어가면 출세길도 보장되고 돈도 많이 버니까 저도 지원했었어요. 사실 저희 엄마도 인키디움 출신이시거든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저희를 돌보기 위해서 인키디움을 나오시고 농사일에 매진하고 계시지만요.”
“블루벨은 왜 인키디움에서 떨어졌어?”
“너무 순진해서 안 된대요. 엄마가 결격사유 듣고 분기탱천해서 밥충이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셔서 그 길로 짐 싸서 토스 호무스로 와서 궁녀 시험 쳤어요. 합격하고 첫 월급 보내드리니까 자랑스러운 우리 딸이라고 편지 보내주셨어요.”
“……뭔가 비범하신 분이네, 블루벨의 어머니는.”
“예. 마을 사람들도 저희 엄마만 한 여장부도 없대요. 듣기로는 예전에 까마귀 일족 도적패들을 부엌칼 하나 들고 쓸어버리는 데 굉장히 큰 공헌을 하셨대요.”
유채는 블루벨의 어머니가 상상이 되지가 않았다. 한 손으로 식칼을 붕붕 휘두르는, 여장부? 블루벨과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근데, 다 이니투스님에 대한 책이네요?”
“어. 그게 필요해서. 블루벨도 이니투스에 대해 알아?”
“당연히 알죠. 저희 수인들의 영웅인 분이신대요. 근데 이니투스님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루프스님께 묻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실 텐데요?”
유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루벨은 뜻밖의 말을 했다.
“루프스님은 이니투스님의 직계 자손이시거든요. 다른 일족들은 한 가문이 수장 자리를 독점하지 못했지만, 늑대 수인 일족은 이니투스님의 혈통이라서 그런지 이제껏 한 가문이 수장 자리를 독점했어요. 그래서 이 궁 안 루프스님만 갈 수 있는 서고에 이니투스님에 대한 정보가 많이 있다고 했어요.”
이니투스가 늑대 수인인 것은 알았지만, 이니투스의 자손이 루프스인 것은 몰랐다. 유채는 의외의 정보에 적잖이 놀랐다.
“이건 저도 뜬소문처럼 들은 건데요. 어릴 적 루프스님은 굉장히 다정하고 따뜻하신 분이셨대요. 그리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셔서 공부도 정말 잘하셨대요. 로보님, 블랑카님, 에리카님의 죽음 이후로 저렇게 되셨지만, 정말 똑똑하셨대요.”
“그건 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어. 블루벨.”
생각 없이 사는 남자 같아도 의외로 꽉 짜인 계획대로 움직이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 계획을 세우는 것은 루프스 자신이고 말이다. 가끔씩 루프스가 방에 일거리를 가지고 와서 처리를 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었다. 각 일족의 세력의 균형을 미묘하게 조절해서 타 일족들이 연합하여서 늑대 일족을 노릴 수 없게 하는 것도, 자신의 일족 내에서도 세력 균형을 조절해서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게 만드는 것에 능한 남자였다. 비유하자면 태종 이방원의 폭군 버전이랄까?
“그러니까. 한번 여쭤보시는 건 어떠세요?”
“아니. 그건 싫어.”
제가 부탁을 하면 루프스는 그것을 대가로 분명히 뭔가를 요구할 것이다. 블루벨을 풀어준 것도 유채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할 수 게 된 후였다. 유채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차라리 스스로 알아내고 말지, 그의 장단에 놀아나기는 싫었다.
“궁녀들이 루프스님이 레티티아님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고 저보고 부럽다고 하던데요. 레티티아님의 허리 놀림이…….”
“블루벨! 그 말 누구한테 들었어!”
유채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소리를 빽 질렀다. 어차피 궁의 도서관에는 사서 한 명과 유채, 블루벨이 전부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일이 없었다. 그래도 유채는 제가 한 거짓말을 블루벨이 알게 되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로 당황했다.
“예? 그냥 뜬소문이에요. 저도 허리 놀림이라는 게 뭔지 몰라서 케릭스님께 여쭤봤는데, 케릭스님이 얼굴이 시뻘게지셔서는 더 크고 오면 알려주시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뜬소문이니 믿지 말라고 하셨는걸요. 그런데 다른 궁녀들이 열심히 떠들더라고요. 이제 레티티아님이 루프스님의 총애를 받아서 궁의 실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유채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왜 블루벨이 인키디움에서 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유채는 새빨개진 볼을 찬 손으로 식히면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거 거짓말이니까 무시해도 돼. 그냥 내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야.”
유채는 전과 달리 요즘 궁녀들의 손길이 묘하게 부드러운 것이 그 이유 때문이란 것을 그제야 알았다. 겨우 젤다 하나 무릎 꿇렸다고 이렇게 대우가 달라졌나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레티티아님이 그러시니까 믿을게요.”
블루벨이 환하게 웃었다.
“그 대신에 이 책 방에 두시고 저랑 정원에 산책 가요! 제가 제 동물형을 보여드릴게요.”
“그래.”
정원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유채는 외투를 단단히 여몄다. 북극 토끼라는 말은 사실인지 블루벨은 유채보다 가벼운 복장으로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유채는 폴짝폴짝 잘도 뛰는 블루벨의 뒤를 쫓아갔다. 블루벨은 적당한 곳을 발견한 것인지 멈춰 섰다.
“히힛. 제가 이제부터 보여드릴 테니까. 놀라지 마세요!”
블루벨은 씩 웃으면서 돌아보자 유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벨이 서 있던 자리에는 유채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하얀 토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헉.”
유채는 숨을 들이마셨다. 거대한 토끼의 머리가 유채의 얼굴 앞으로 내려왔다.
[강하게 생겼죠?]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강하다기보다는 토끼 인형이 크기만 커진 것 같아 보였다. 굳이 전투력을 매기자면 심장을 폭행하는 듯한 귀여움이랄까. 블루벨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희 초식 동물 계열은 동물형하고 위르형 외에 하나 더 형태가 있어요. 이게 무지무지하게 강해 보여요.]
블루벨은 몸집을 유채보다 작게 줄였다.
“아, 크기도 줄일 수 있어?”
[다른 수인들도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귀찮아서 줄이지 않는 것뿐이거든요. 저희는 다른 형태를 취하기 위해서는 크기를 줄여야 해요.]
몸집이 줄어드니 더 귀여웠다. 유채는 나중에 블루벨에게 집토끼만큼 줄어들어 보라고 시킬 생각이었다. 정말 귀여울 것 같았다. 블루벨이 몸집을 줄이더니 앞발을 들기 위해서 낑낑댔다.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워서 유채는 블루벨의 콧잔등을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블루벨이 앞발을 간신히 들어 올린 순간 갑자기 누군가 나타났다.
“으억!”
“프레드릭 씨!”
블루벨의 앞발이 프레드릭을 덮쳤다. 프레드릭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블루벨도 놀라서 얼른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유채가 프레드릭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아. 괜찮습니다, 유채 양.”
프레드릭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그의 손에는 로켓이 들려 있었다. 유채는 프레드릭이 또 레이라를 생각하러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회담 결과 프레드릭은 알렉스의 말을 무시하고 토스 호무스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알렉스를 여기에 남겨둬 포트리스의 전력을 약화시켜 포트리스의 사람들을, 궁극적으로는 레이라를 위험하게 처하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프레드릭은 곧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포트리스의 높은 성벽 너머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인과의 화합이 먼저였다. 아내의 출산을 지키지 못하는 못된 남편이 되더라도, 프레드릭은 태어날 아이에게 자신이 겪은 세상보다 더 안전하고 좋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남기로 했다. 이건 희생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족을 위한 이기심이었다.
루프스는 그를 손님 자격으로 궁에 머무르게 하였고 프레드릭은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며 연구를 하고 있었다. 루프스는 생각보다 그를 신사적으로 대해 그의 행동 반경에는 제약이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유채도 도서관에 자주 들락날락거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프레드릭과 만날 수 있었다. 프레드릭은 펠릭스 다우스가 된 유채의 처지를 동정하였고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소심한 면이 있는 프레드릭은 일주일 전에서야 용기를 내서 유채와 직접 이야기를 했다. 유채는 알렉스의 형이라는 프레드릭의 소개를 듣고 그에게 묘한 든든함을 느꼈다. 프레드릭은 도서관에서 유채가 읽는 책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블루벨도 아직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던 유채는 그렇게 프레드릭과 가까워졌다. 프레드릭은 좋은 사람이었다.
“오늘 내 수업을 안 듣겠다고 한 이유가 이 귀여운 토끼 아가씨 때문인가요? 유채 양.”
프레드릭이 안경을 고쳐 쓰면서 물었다. 프레드릭은 유채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유채는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것이기에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라 씨가 걱정 많이 되시나 봐요.”
“예. 레이라는 눈을 정말 좋아했는데. 포트리스에도 눈이 올까요? 거긴 따뜻해서 쉽게 눈을 볼 수 없는데…….”
프레드릭의 눈에 아련함이 어렸다. 유채는 프레드릭의 저런 눈을 볼 때마다 말로만 들은 레이라가 부러웠다. 유채의 이상형은 다정하고 따뜻한 남자였다. 역시 옛말은 틀린 게 없었다. 좋은 남자는 늘 임자가 있다고, 유채는 로켓 안의 초상화로 본 쾌활한 미녀인 레이라가 너무 부러웠다.
“레티티아님.”
블루벨이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유채는 블루벨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블루벨은 귀를 축 늘어뜨린 채로 우울함과 배신감이 섞인 표정으로 유채를 바라보았다.
“유채가 뭐예요?”
“내 이름. 이름이 유채고 성이 한이야.”
“왜…… 저한테는 안 알려주셨어요?”
“응?”
블루벨은 유채가 갑자기 미워졌다. 유채의 가장 가까운 수인은 자신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건만. 제게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블루벨은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귀를 추욱 늘어뜨린 블루벨은 손으로 귀를 끌어당겨서 제 눈을 가렸다.
“레티티아님, 미워요! 저는 레티티아님이 가장 친한 분이고 아끼는 분인데. 저한테만 그런 거 안 알려주시고…… 정말 미워요!”
프레드릭과 유채는 동시에 풉 하고 웃었다.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블루벨의 칭얼거림이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왜, 웃으세요! 저 진짜 화났어요.”
“어유. 우리 블루벨 삐졌어?”
유채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블루벨의 말캉한 볼을 늘렸다. 블루벨이 너무 귀여웠다. 열다섯이라면서 하는 행동은 딱 초등학생 같았다. 인키디움이 블루벨을 뽑지 않은 것은 손해였다. 이런 귀여운 정보원이라면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 블루벨. 그럼 내가 그 누구도 모르는 내 비밀을 블루벨에게만…….”
유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누군가 유채의 몸을 뒤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손으로 유채의 눈을 가렸다. 탄탄한 가슴이 등에 닿고 단단한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입술이 유채의 귓가에 닿았다.
“그 비밀이 뭔지, 나도 알고 싶은데.”
유채의 몸이 굳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레티티아.”
루프스였다. 유채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 * *
루프스는 제 품에 갇힌 레티티아가 몸을 잘게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비 맞은 새처럼 몸을 떠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지만, 레티티아의 행동이 괘씸하여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눈을 가렸더니 유채는 공포를 느꼈는지 몸의 떨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덜미를 입술로 꾹 눌렀다. 얇은 살갗에서 불안감에 뛰는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레티티아, 비밀이 뭐지?”
루프스는 얇은 살갗을 이로 물었다. 그나마 송곳니가 닿지 않게 하는 것이 배려였다. 루프스는 제가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는 입술을 유채의 목덜미에 붙였다.
유채는 그 야릇한 감각에 주먹을 쥐었다. 차라리 맞는 게 이보다 더 나을 것 같았다.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이 가려진 처음에는 무섭기도 했고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 같아 싫었지만, 이제는 차라리 눈이 가려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프레드릭과 블루벨 앞에서 이런 꼴을 당하는 것 자체가 치욕스러운데 그들의 표정까지 보았다면 더 비참했을 것이다.
목에 붙어 있던 루프스의 입술이 떨어졌다. 작은 접촉에도 쉽게 붉어지는 유채의 피부는 그새 붉은빛을 띠었다. 목덜미에 입술이 다시 붙었다 떨어지고 귓가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질문을 바꿔야겠군.”
낮은 목소리에 유채는 바르르 떨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내가 누굴 죽이기라도 했나. 왜 이리 몸을 떠는 것이지? 레티티아.”
유채는 당장에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은 혀를 억지로 억눌렀다.
루프스는 바로 앞에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프레드릭과 블루벨을 싸늘한 눈으로 보았다. 어린 토끼 암컷은 정말로 놀란 것인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시선을 조금 옆으로 던지자 바실리사가 어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루프스는 오늘만큼 귀찮은 바실리사에게 고마워하기로 했다. 바실리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어이없는 광경은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질문을 다시 바꿀까?”
검은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와서 머리를 점령한 것 같았다. 루프스는 얼음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차분해진 스스로에게 놀랐다.
“어찌해서 내 펠릭스 다우스가 내가 아닌 타인들에게 이렇게 생글생글 웃으며 애교를 떨고 있는 것이지?”
루프스는 가장 화가 나는 점을 물었다. 유채의 말캉하고 따뜻한 몸이 어린 짐승처럼 떨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바실리사는 루프스에게 붙잡혀 떨고 있는 유채를 보면서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단지 루프스가 들였다는 마레 위르를 만나고 싶다고 한 것뿐인데 저렇게 가여운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바실리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지금 루프스는 눈이 약간 돌아간 상태였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바실리사는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 뒤를 되짚었다.
* * *
“너나 나나. 간단한 거 좋아하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루프스는 카니스 바실리사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바실리사는 어머니인 블랑카의 사촌의 딸로 루프스에게 유일하게 남은 혈육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외동딸인 블랑카와 가까웠던 바실리사의 어머니가 바실리사를 데리고 토스 호무스에 자주 들락날락거린 탓에 어릴 적부터 자주 만난 사이였다. 그만큼 친했고 격식 없는 사이라 주변에 다른 수인이 없으면 바실리사는 루프스에게 종종 말을 놓았다.
“당장 카날리스 호무스에서 벨라토르(Bellator)들 치워.”
“싫어.”
즉답에 바실리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벨라토르 은 루프스가 즉위하고 나서 새로 만든 집단으로 다른 일족의 땅에 파견되는 토스 호무스 소속의 군인 늑대들이었다. 그들은 치안 유지의 임무를 맡아 다른 일족의 땅을 돌았다. 물론 이건 표면적인 것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베니니타스와 같은 반란을 막기 위해서 루프스가 보낸 감시 역들이었다. 내전 종료 후 루프스의 기세가 매서웠고 내전 기간 동안 수인들의 땅에 숨어든 마레 위르 잔당이 남아 있었기에 명분도 있어서 다른 수인들은 루프스의 말을 꼼짝없이 따라야 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개 일족은 너희의 따까리라고 불릴 정도로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굳이 감시가 필요해?”
“예외가 생기면 모두가 반발하겠지? 안 그래, 바실리사?”
루프스는 차를 홀짝였다.
“어차피 개 일족의 장로들의 등쌀에 밀려서 왔으면 이쯤하지. 내 친족이라 해도 이 이상 떠들면 나도 봐줄 생각이 없어.”
“뭐,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바실리사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다리를 꼬았다.
“어지간히 인정도 못 받는군. 한심하게.”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 장로들 한번에 쓸어버릴 수 있거든?”
카니스의 지위에 오른 만큼 바실리사도 충분히 강했다. 영토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은 현존하는 수장들 중 강함의 순서를 매기면 바실리사는 다섯 번째로 꼽혔다. 루프스와 동갑의 나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만하면 충분한 무력이었다. 그럼에도 카니스 바실리사는 장로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오직 개 수인 일족 안에 바실리사 이상의 강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봤자 개 수인들 중 이인자지.”
“빅터님이 카니스 자리를 때려치셨어. 내가 이 귀찮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서 오른 줄 알아?”
루프스의 아버지인 로보와 동세대이자 로보의 친우였던 빅터가 개 수인 일족의 일인자였다. 수인 내전이라는 혼란 속에서 개 수인 일족이 늑대 수인 일족이 무너졌음에도 자신들의 세력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루프스였던 로보, 베니니타스 다음으로 강한 빅터의 영향이 컸다. 현 루프스에 의해 수인 내전이 끝나고 당시 카니스였던 빅터는 카니스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빅터 다음의 강자였던 바실리사가 카니스의 자리에 올랐다.
개 수인 일족은 일족의 영웅인 빅터를 존경했기에 빅터의 양보로 카니스의 자리에 오르게 된 바실리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바실리사가 얼마나 강한지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빅터는 루프스와 단독으로 붙어서 그나마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 평가받는 강자였다. 루프스에게 도전장이라도 내밀 수 있는 것이 빅터였다.
“그럼 그 건방진 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든가. 말을 따르지 않는 놈들에게는 피만이 답이지.”
“그랬다가는 나 빅터님께 혼날 거야.”
“그러니까. 네가 호구 취급받는 거야.”
루프스가 바실리사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바실리사는 열셋에 로보의 죽음으로 헤어졌다가 열다섯이 될 때쯤 다시 만난 루프스의 모습을 회상했다. 어릴 적의 그 순한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잔혹하게 변해 있었다. 바실리사는 다시 만난 루프스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저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드는 모습에 바실리사는 아연실색했다. 당시 카니스였던 빅터님이 아니었다면 바실리사는 루프스의 이빨에 목줄이 뜯겼을 수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두 번 다시 항명할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밟아줘야 해. 아예 뿌리 끝까지 밟아야 건방진 짓을 못 하지.”
“그래? 그런 것치고는 도는 소문에 네가 그 마레 위르 암컷에게 굉장히 자비롭다는데? 어지간히 네 침대를 따뜻하게 덥혀주나 봐.”
“아! 그거?”
루프스는 실소를 흘렸다.
젤다와 레티티아 사이에 있던 일을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사실 조금만 파헤쳐 보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날 일들이 아직까지도 사실인 것처럼 떠돌아다니는 이유는 루프스의 전담 궁녀들이 철저하게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유채가 내내 루프스의 침실에 머무르고 있으니 소문은 점점 더 사실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루프스도 딱히 그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소문을 부정했다가는 유채를 향한 괴롭힘이 보다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채가 울어서 그 마레 위르 수컷이 준 손수건을 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루프스는 터무니없는 소문에 침묵했다.
“성향이 바뀐 거야? 원래 억지로 암컷을 안지는 않잖아? 아니면 그 마레 위르 암컷이 먼저 달려든 거야?”
“그 입 다물어. 난 레티티아와 잔 적 없다. 그리고 그 소문에 대해서는 입 다물어.”
“역시 그 대단하신 레티티아가 젤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한 헛소리구나. 대단하네, 그 젤다를 무릎 꿇리다니.”
젤다는 늑대 수인 암컷들 중에 강한 축에 속했고, 그녀의 아버지인 토모스는 늑대 수인 중 세 번째의 강자였다. 젤다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 거만하고 허영심이 많았다. 카니스인 제 앞에서도 얼마나 허영을 떨어대는지 바실리사는 그 암컷의 뺨을 갈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니까 더 궁금하네. 레티티아라는 암컷, 떠도는 소문으로 엄청난 미인이라던데?”
“내 생일날 오지 그랬나?”
“나도 나름 바쁜 수인이라. 그 이야기 듣고 정말 아쉬워했다니까.”
바실리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손에 턱을 괴면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물었다.
“얼마나 예뻐? 설마 나보다 더 예쁜 건 아니지?”
“하!”
“풉!”
루프스와 바실리사의 보좌 겸 호위인 에릭이 동시에 헛웃음과 비웃음을 뱉었다. 바실리사는 주먹으로 에릭의 배를 쳤다. 에릭이 복부의 충격에 허리를 꺾었다.
“카니스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네 존재 자체가 잘못이야. 이럴 때는 아부 좀 떨어봐. 그래야 예쁨받는 신하라도 되지.”
“입이 찢어져도 카니스 바실리사님이 예쁘다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요.”
“너는 저 건방진 보좌를 왜 달고 다니는 거냐?”
루프스가 능글맞은 표정을 하고 바실리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성스럽게 말대답하는 에릭을 가리키며 물었다. 보좌라면 케릭스처럼 과묵하고 우직한 것들이 좋았다. 저렇게 말 많고 능글맞은 것들은 달고 다니기 불편했다. 바실리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갈구는 재미가 있어서.”
“누구를 때리는 것에 희열을 느끼시는 성격이셨습니까? 바실리사님.”
“너. 좀 전까지는 라이(루프스의 아명, 라이칸의 애칭)가 무섭다고 내내 입 다물고 있다가 왜 지금에서야 입이 터졌냐?”
“그야 루프스님의 훌륭하신 안목에 감탄을 해서 입이 터졌습니다. 제가 그 마레 위르를 보았는데 그런 미인은 정말 찾기 힘들죠. 제가 카니스님 대리로 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봤는데,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더군요.”
“그래서 내가 예뻐, 그 암컷이 예뻐?”
“당연히 레티티아님이죠.”
바실리사는 발로 에릭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바실리사는 꽤나 예쁨받으며 자란 공주님이었다. 루프스의 비인 블랑카의 사촌의 딸인 것과 더불어 당시 바실리사의 아버지가 개 수인 일족의 이인자였고 카니스 빅터의 조카였기 때문에 제가 최고인 줄 알고 자란 것이다. 오죽했으면 수인으로서의 이명도 공주였다.
“아. 저녁까지 못 기다리겠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암컷이기에 다들 그렇게 천상에서 내려온 것처럼 생겼다고 말하는지 나도 알아야겠어,”
“어차피, 베노르 콩레수스(Venor Congressus) 때까지는 있을 것 아닌가?”
바실리사는 장로들의 닦달을 피해서 베노르 콩레수스 때까지는 토스 호무스에 있을 계획이었다. 1월의 마지막 날에 열리는 베노르 콩레수스가 얼마 남지도 않은 마당에 귀찮게 두 번 움직이기 싫었다.
“그래도 빨리 보고 싶은데? 어차피 우리 둘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잖아. 우리 둘이 열다섯 이후로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잡담을 나누던 사이는 아니잖아? 어디 그 예쁜 암컷이나 소개시켜 줘봐.”
바실리사와 루프스는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바실리사 의 떼에 질린 루프스가 먼저 항복했다. 유채는 정원에 있다고 하였다.
정원은 눈이 쌓여서 꽤나 볼만하였다. 바실리사는 정원의 풍경보다 유채를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도대체 얼마나 예쁘면 수컷들이 그리도 유난을 떠는 것인지 궁금했다. 에릭이 토스 호무스에서 돌아와 마레 위르의 미모를 한참을 찬양을 해댔었다. 역시 루프스쯤 되는 수컷이어야 그런 암컷을 취할 수 있는 현실에 좌절했다고 중얼거리는 것이 꼴 보기 싫었었다.
“풉.”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실리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의 피부가 하얀 암컷이 서 있었다.
젠장.
바실리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럽게 예뻤다. 풍만하지는 않지만 우아한 몸맵시, 흑단 같은 고운 머리카락, 마치 신이 제 능력을 모두 쏟아 부어서 조각한 듯한 얼굴, 청초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붉어서 색정적으로 보이는 적당한 두께의 붉은 입술. 미인도 저런 미인이 없었다. 곱게 휘어진 눈과 입매가 꽤나 아름다웠다.
같은 암컷임에도 유채를 본 바실리사가 감탄하고 있을 때, 에릭이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바실리사는 에릭을 잠깐 돌아보고는 그의 눈짓에 그제야 루프스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뒷모습이 뭔가에 화가 난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라이.”
바실리사가 루프스를 잡기 전 루프스가 마레 위르 암컷을 뒤에서 껴안았다. 그리고 바실리사는 루프스가 진득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바실리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 * *
루프스는 아무 말하지 않고 떨기만 하는 레티티아에게 화가 났다. 제게는 웃어 보이지도 않고 이름을 기억할 가치도 없는 암컷 토끼 궁녀와 마레 위르 수컷 따위에게는 환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에 속이 뒤틀렸다.
제가 얼마나 극진하게 대해주었는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어지간한 수인들은 평생 벌어봐야 입을 수도 없는 고급의 옷감으로 만든 것이고, 몸에 걸치고 있는 장신구들은 엄선한 장인들이 만든 정말로 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 궁에서 궁녀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궁의인 오르페의 치료까지 받고 있었다. 제가 저를 위해서 해준 것이 얼마인데, 제가 아닌 다른 암컷과 수컷에게 꼬리를 흔드는 꼴이 정말 보기 싫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돌려 안았다. 그녀의 감정 없는 검은 눈이 보였다.
“네가 나에게 이렇게 굴면 안 되지. 네 주인이 누군지를 잊으면 안 되지.”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제 주인이 누구인지 망각하고 다른 놈들에게 꼬리를 흔든 내 레티티아에게는 무슨 벌을 줘야 할까?”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유채의 볼을 쓰다듬던 루프스는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입 벌려.”
유채는 반대로 입을 꽉 다물었다.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루프스가 짜증난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유채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앗.”
아픔에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틈으로 루프스의 혀가 들어왔다. 그는 한 손으로는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고 턱을 잡았던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눌렀다. 그의 혀가 유채의 입안이 마치 제집인 양 헤집었다.
유채는 루프스를 밀어내기 위해서 주먹을 쥐고 그의 어깨를 쳤지만 돌덩어리를 때린 듯 제 손만 아플 뿐이었다.
루프스는 고개를 틀어서 유채의 입안을 깊숙이 탐했다. 유채를 배려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자꾸 입을 다물려는 유채의 입술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찢었다. 유채는 신음을 흘렸다. 넘나드는 타액에 유채의 피가 섞였다.
루프스는 유채가 숨이 막혀 할 때만 잠깐 쉬게 해주었을 뿐키스를 멈추지는 않았다. 유채의 치열을 훑이고 입천장을 쓸기도 하면서 그녀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입안을 탐했다.
유채는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치욕스런 짓을 당하고 있다는 것에 눈을 질끈 감았다. 더 비참한 것은 이 강압적인 키스가 유채에게는 첫키스라는 것이었다.
유채는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상 유채는 제 허리를 감고 있는 루프스의 팔 힘에 지탱해서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항하던 손도 이제 지쳐서 축 늘어졌다. 루프스는 반항이 멈춘 유채의 늘어진 몸을 가까이 끌어당기고 짙은 입맞춤을 이었다.
루프스만 제외하고 모두가 당황스런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프레드릭이었다.
“루프스님!”
루프스의 청회안이 프레드릭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지금 유채 양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입 다물어라, 마레 위르 수컷.”
루프스는 그제야 유채에게서 입술을 떼어내었다. 유채의 입술은 찢어지고 쓸려서 부어올라 있었고 더욱더 붉은빛을 띠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찢어진 입술을 혀로 쓸고 그녀의 뒷머리를 눌러 제 가슴팍에 얼굴을 숨기게 하였다.
“레티티아는 내 펠릭스 다우스고 어떻게 다룰지는 내 권한이지. 건방지게. 주제를 알아라.”
“하…… 하지만 루, 루프스님…….”
블루벨이 축 늘어진 유채의 손을 보고 애써 용기를 내었다. 오늘이 여태껏 본 중 유채가 가장 밝았는데, 그것을 루프스가 다 망쳐 버렸다. 블루벨은 유채가 너무 가여웠다.
“유…… 아니, 레티티아님이 힘들어…….”
“너도 입 다물어라.”
루프스는 으르렁거리면서 블루벨의 말을 끊었다. 블루벨이 루프스의 서슬 퍼런 기세에 놀라서 귀를 추욱 늘어뜨렸다.
“아양 한 번 떠는 데 비싸게 구는 레티티아가 널 냉궁에서 꺼내기 위한 한 걸 생각해서라도, 다시 감옥에 가고 싶지 않다면 입 다물어야 할 것이다.”
“예?”
블부벨은 유채가 루프스와 살이 닿는 것조차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블루벨 자신을 위해서 희생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블루벨은 눈물이 핑 돌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귀여운 친구를 위한다면 지금부터 가만히 있어.”
유채가 주먹을 말아 쥐는 것과 동시에 루프스는 그녀의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서 안아 올렸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서 말도 못 하고 서있는 바실리사를 불렀다.
“가자. 소개시켜 달라고 하지 않았나.”
“아. 으응.”
바실리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루프스를 따라갔다.
* * *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바실리사는 자리에 앉아서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릭이 바실리사의 건너편에 앉으면서 물었다.
“울페스 헤르티아가 저 암컷한테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놓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어.”
울페스 헤르티아의 이명은 마녀였다. 마녀 헤르티아. 이명이 말하듯이 헤르티아는 마법에 능한 수인이었다. 바실리사는 좀 전까지 자신의 무릎에 마레 위르 암컷을 앉혀놓고 소유욕을 보이던 루프스를 떠올렸다. 루프스는 마레 위르 암컷을 쓰다듬고 관자놀이나 볼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 암컷은 그게 공포인지 몸을 달달 떨기만 했다. 제삼자가 봐도 그녀가 정말 불쌍할 정도였다.
바실리사 자신도 수인 내전에서 양친과 형제를 모두 잃었지만, 그래도 바실리사는 카니스 빅터의 보호 아래에 있어서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프스는, 그러니까 라이칸은 아니었다. 양친을 잃고 동생인 에리카만 챙겨서 도망간 루프스가 어떤 생활을 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보호자가 없는 어린 수인, 그것도 로보의 아들을 곱게 대우할 수인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몸에 남은 수많은 상처들이 그 시절에 대한 증거였다. 어린 시절의 다정한 아이는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그 성격이 그 험난한 시절의 또 다른 증거였다.
“너도 라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 알지?”
“알다마다요. 카니스님이 얘기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상대를 죽이기 싫어서 제 몸에 상처를 내가면서 제압하고, 대련 중 때리기 싫어서 공격을 다 맞아줬다는, 그 타우루스님이 고자가 됐다는 소리보다 황당무계한 말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거 정말이거든? 나랑 대련할 때, 나 때리기 싫다고 항상 다 맞아줬어. 헤실헤실 웃으면서…….”
“에이. 그런 분이 어떻게 수인 내전에서 그렇게 잔혹한 짓을 했겠습니까. 유명하지 않습니까? 수컷 수인 몇이 살아 있을 때 생식기를 발로 밟아서 터뜨리고 배를 갈라서 내장을 씹어 드셨다는 이야기. 후자야 그렇다 치고라도 같은 수컷이시면서 수인이 살아 있을 때, 생식기를 밟아서 터뜨린다는 그 잔혹한 짓을 한 분이 어릴 적엔 다정했다고요? 그 말을 믿겠습니까?”
“아냐. 진짜야, 어렸을 때는 되게 순진했어.”
제 여동생인 에리카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 오빠였는지 모른다. 에리카의 말이면 끔뻑 죽는 동생 바보였다. 다시 만났을 때, 에리카는 죽고 없었고, 루프스는 에리카에 대한 일을 물으면 화를 내면서 제 목을 조르려 했기에 그녀의 일은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루프스는 암컷에게도 일정 수준 이상의 관심을 표한 적도 없었다. 주변에서 남색이네 고자네 하는 소문이 돌자 가끔 남색도 아니고 사내 구실을 할 수 있는 수컷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식으로 의무적으로 암컷을 침실로 들인다는 것을 바실리사는 알고 있었다.
그는 암컷을 억지로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희망하여 침실에 들어온 궁녀나 고급 접대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못 하겠다고 해도 별 말 없이 그대로 돌려보냈다. 잔혹하기는 해도 암컷과 문제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바실리사에게 지금 루프스가 비정상적으로 마레 위르 암컷에게 집착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싫다는데도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려는 게 평소와 명백하게 다른 점이었다.
또한 루프스는 떠돌아다니던 삼 년간의 일이 뇌리에 박혔는지, 누군가 제 말을 듣지 않는 꼴을 조금도 못 견뎌 했다. 그것이 제게 힘이 없고 지배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겪은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제게 복종하지 않는 수인들은 모두 잔혹하게 찢어 죽였다. 펠릭스 다우스를 거느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루프스는 펠릭스 다우스가 제 말에 복종하기를 원했다. 몇 달을 가르쳐도 반항을 하면 죽여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나…… 여기 좀 예정보다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아.”
“왜요? 왜 서슬 퍼런 여기에 계속 있으시려는 거예요!”
에릭이 절규했다. 바실리사는 저 마레 위르 암컷으로 인해 루프스가 잘못되면 수인들에게 피바람이 불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어 불안했다.
* * *
헤임달은 미노르 호무스(Minor Humus: 소 수인 일족의 땅)의 타우루스(Taurus: 소 수인의 수장)의 궁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써 타우루스를 꾀어내어 레프스를 얻어내었건만 하워드 형제를 모두 제거하려던 계획은 반쪽의 성공으로 끝났다. 그나마 멍청한 알렉스보다 똑똑한 프레드릭이 토스 호무스에 남아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왔는가? 헤임달.”
타우루스 헥터가 벌거벗은 여인을 허리에 끼고 바지를 간신히 추켜 입은 듯한 꼴로 헤임달 앞에 나타났다. 헤임달이 헥터를 꾀어내기로 결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멍청했고 무엇보다 색욕이 상당했다. 무려 여자 세 명을 끼고 잔다는 놈이었다. 제 하렘을 만들고 거기서 여자들에게 제 욕구를 푸는 것을 즐기는 놈이었다. 영악한 헤르티아보다 헥터를 꼬여내는 것이 쉬웠다.
헤임달은 대륙이 전란에 휩싸여 배를 타고 스티폴로르에 오는 대륙민들의 난파선에서 얼굴이 반반한 여자를 건져내어서 타우루스에게 주었다. 소용돌이를 안전하게 통과하는 배보다 그렇지 않은 배들이 많았기에 언제나 여자들을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헥터는 헤임달이 바친 여자들을 과거, 노예가 합법화되어 있던 시절의 대륙의 노예처럼 대우했다. 헥터는 그 여자들을 하렘에 넣고 욕정을 풀었다. 다른 군소 일족의 수인을 잡아와서 하렘에 집어넣는 것보다 헤임달이 바치는 여자들이 효율성도 좋고 다른 수인 일족과의 관계에도 이로웠기에 그는 헤임달을 기쁘게 반겼다. 그렇게 쌓인 신뢰관계로 헤임달은 포트리스 몰래 헥터와 거래를 텄다.
“예. 지난번에 레프스를 구해다 주신 것은 감사했습니다.”
“뭘, 언제나 이렇게 좋은 것들을 구해주는데, 간단한 요청을 못 들어줄 이유가 있나.”
헥터는 허리에 끼고 온 눈이 흐리멍덩한 여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자의 허리가 꺾였다. 헥터가 손가락을 튕기자 궁녀가 헤임달 앞에 마력 억제석으로 유명한 프레눔(Frenum)을 가져왔다. 헤임달은 헥터에게 받은 프레눔을 대륙에 가서 팔고 일부는 베르나도테 공작에게 진상했다. 전란의 시대에 마법을 무효화시키고 마법사들의 구속구로 사용될 수 있는 프레눔은 값비싸게 팔 수 있었다. 멍청한 수인들은 저것의 가치를 몰라서 취할 수 있는 이득이었다.
“왜 이런 쓸모없는 금속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고마워. 지난번에 준 암컷이 정말 좋아. 아주 예술이야.”
헥터가 옆에 끼고 온 여자에 대한 음탕한 평가를 내렸다. 헤임달은 저속한 말을 들으면서 그에게 아편을 내밀었다. 여자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 헤임달은 헥터를 아편에 중독시키고 있었다. 변덕스러운 욕정보다는 마약 중독이 더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헥터는 아편에 중독되었고 헤임달은 그로 인해 보다 안정적으로 그와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아편은 다른 수인과의 거래도 쉽게 만들어주었다. 마약이란 것이 얼마나 독한 것인지 수인들은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헤임달은 수인들에게 아편을 무상으로 제공해 그들을 중독시켰다. 그리고 아편에 중독된 이들이 아편을 요구하면 그것을 제공하는 대신 그들에게서 고급 정보를 얻어내었다. 그 정보들로 헤임달은 포트리스의 장로들에게 유능한 정보통으로 신뢰를 얻어내었다. 물론 헤임달은 포트리스의 안전보다는 제 욕심이 먼저였기에 포트리스에 공개하는 정보는 극히 일부에 속했다. 여하튼 아편에 중독된 헥터는 헤임달이 내민 아편을 기쁘게 받았다.
“역시 헤임달이야. 내가 이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헥터는 담뱃대에 아편을 넣어서 태우고 흡입했다. 흐리멍덩한 눈의 벌거벗은 여자도 벌써 아편에 중독된 것인지 아편의 냄새를 좇았다. 타우루스가 한참을 아편을 태우며 헤임달에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헤임달. 검은 머리에 이국적으로 생긴 마레 위르 암컷을 구해줄 수 없나?”
“예?”
“루프스가 헤르티아에게서 마레 위르 암컷을 선물받았는데, 그 미색이 상당해. 루프스의 아래에만 깔려 있기에는 너무 아깝게 생겼어. 나한테 왔으면 실컷 예뻐해 줄 텐데 말이야.”
검은 머리의 이국적인 외모? 아르젠인인가?
헤임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보다 루프스가 여자를 들였다니 요즘 듣던 소리 중에 정말 신선한 말이었다. 이국적인 인간 여자를 선물로 받아서 그 여자에게 잠자리 시중을 받는다는 말이었다. 헤임달이 알기로 루프스는 여자에게 오래 시중받는 것을 즐기는 수인이 아니었다. 애초에 침실에 여자를 들이는 것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라고? 헤임달은 턱을 쓸었다. 필립이나 페드로는 너무 다루기 까다로우니 마틴을 불러서 그 여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헥터는 그 펠릭스 다우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 밑에 깔려서 달뜬 신음을 내뱉으면서 허리를 비트는 것을 보고 싶었다. 고아하게 생긴 얼굴이 요부처럼 변해서 저를 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정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루프스만 차지하기에는 아까운 암컷이었다.
“이번 베노르 콩레수스가 너무 기대돼.”
헥터가 몽롱한 눈을 하고서 하는 말에 헤임달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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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벨 외전
“피터 아저씨!”
블루벨은 궁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하늘 위에서 커다란 가방을 둘러멘 까마귀가 내려왔다. 까마귀는 내려오자마자 새의 눈과 다리를 가진 검은 머리의 남자로 변했다. 눈이 퀭한 것이 한눈에 봐도 피곤하다는 것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다. 블루벨.”
피터는 땀을 닦으면서 키가 작은 블루벨과 눈높이를 맞추어주었다. 블루벨은 옷소매에서 편지를 꺼내서 건네었다. 피터 역시 메고 있는 가방에서 편지를 꺼냈다. 블루벨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토끼 귀를 옆으로 흔들면서 편지를 받았다.
“엄마는 잘 지내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당연히 누님은 굉장히 잘 지내시지. 열심히 곡괭이 휘두르며 우리들의 등을 위협하시면서 말이야.”
피터는 몸을 떨었다. 블루벨의 어머니인 카넬리안은 정말 지독한 여자였다. 왕년에 인키디움에서도 미친년으로 유명했던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뭔 바람이 불어서인지 순박한 산골 농부와 결혼하고는 남편이 죽은 뒤, 애들을 돌봐야 한다고 만류하는 인키디움의 동료들에게 삼박하게 손가락 욕을 날려주고 유니티오 호무스(Unitio Humus: 토끼 일족과 쥐 일족의 땅)의 산골 마을로 짐 싸들고 떠났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그 산골마을에 카넬리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피터가 속했던 화적패는 결코 그곳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칼 하나를 쥐고서 저들을 끝까지 몰던 카넬리안을 떠올리면 아직도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블루벨 네가 누님께 잘 말해봐. 나 허리 부러져 죽을 것 같아.”
카넬리안은 까마귀 화적패를 종으로 부렸다. 농사일을 시키거나, 애를 돌보게 하거나, 집안일을 시키거나, 지금처럼 돈을 받고 멀리로 편지 배달을 시켰다. 당연히 가장 먼저 와야 하는 곳은 카넬리안의 딸이 있는 토스 호무스의 궁이었다.
“왜요?”
피터는 ‘그야 너희 어머니가 날 부려먹어서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블루벨은 카넬리안 팔남매 중 가장 나이 많은 딸이면서 순진하기는 엄청 순진했다. 분명 이 말을 하면 다음 편지에 피터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아저씨 좀 봐주세요, 라고 쓸 계집애였다.
“아니, 됐어.”
“블루벨.”
두껍고 단단한 팔이 블루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히익!”
피터가 반사적으로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방을 들어 앞을 막았다. 늑대 수인 특유의 얼음 같은 푸른 눈동자가 피터를 노려보았다.
“케릭스님!”
“웬 놈이냐?”
늑대 특유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블루벨은 케릭스의 팔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버둥거렸다.
“피터 아저씨예요. 저희 집에서 일하시는 분이세요. 까마귀 수인이시고요.”
“응?”
블루벨이 케릭스의 팔을 벌리고 빠져나와 피터의 앞을 막아섰다. 피터는 이때만큼 이 맹랑한 꼬마가 고마운 적이 없었다. 피터는 뒷덜미에 오소소 솟아오른 소름을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예. 저는 블루벨의 집에서 반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피터라고 합니다.”
피터는 블루벨의 어깨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케릭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손을 잡았다.
피터는 굉장히 놀랐다. 케릭스가 어떤 수인인가? 늑대 수인 중 이인자이자 로보의 최측근이었던 플로서스의 장남이었다. 플로서스가 카니스 빅터와 마찬가지로 수인 내전의 결과에 회의를 느끼고 기대와 다른 현 루프스에 크게 상심하여 칩거 중이라고 해도 그의 위명은 유명했다. 그가 없었으면 늑대 수인은 여우 수인에게 모조리 전멸당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케릭스 역시 루프스의 명에 절대복종하는 전사로 유명했다. 게다가 늑대 수인을 통틀어 여섯 번째의 실력자였다.
“케릭스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이었다. 블루벨은 소개를 했으니 다 됐다고 생각한 것인지 피터의 팔에 매달렸다. 블루벨의 키가 작다 보니 매미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새였다.
“피터 아저씨 되게 착해요. 먹을 것도 주고, 저한테 매일 편지도 전해주시거든요.”
블루벨에게 착한 수인과 나쁜 수인의 기준은 단순했다. 먹을 것 주는 수인과 뺏어가는 수인. 오죽했으면 카넬리안이 뇌가 표백된 듯한 사고방식에 자신이 뭘 잘못 가르쳤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먹을 걸 주는 게 좋은 거야? 아니면 내가 좋은 거야?”
“먹을 거요!”
블루벨이 헤실헤실 웃었다. 귀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카넬리안과 정말 다른 딸이었다. 카넬리안이 블루벨에게 먹을 것을 쫓아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피터가 보기엔 별 소용없는 것 같았다. 저 늑대의 손에 달달한 간식거리로 추정되는 것이 들려 있는 것과 저를 저렇게 날카롭게 노려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결국 내가 먹을 걸 줘서 좋다는 거구나.”
“아니에요. 저 피터 아저씨 좋아하는데…….”
“여하튼. 거기 피터인가? 블루벨과 더 할 이야기 있나?”
“어휴. 아닙니다. 전 저 편지만 전해주러 왔습니다.”
“그럼, 당장 돌아가라. 더 오래 머문다면 내가 친히 루프스께 이상한 자가 궁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보고를 올리지.”
“……당장 가겠습니다.”
피터는 다시 까마귀로 변했다. 피터는 블루벨과 케릭스를 번갈아 보았다. 블루벨이 또 한 명의 가련한 수컷을 홀린 것 같았다. 블루벨은 지나치게 순진했고 순수했다 그리고 착했다. 그래서 제 태도가 수컷에게는 어떻게 느껴지는 것인지 몰랐다. 카넬리안이 있는 마을에도 여태껏 블루벨이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돈 벌어서 청혼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수컷 토끼가 한둘이 아니었다. 눈치 없음도 죄라고 하면 블루벨은 이미 범죄자였다. 피터는 한숨을 쉬고 멀리 날아올라갔다. 블루벨은 축 늘어진 귀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많이 슬픈 거니?”
케릭스가 블루벨이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너무 매정하게 쫓았나 싶었다.
“아니요. 그냥 오랜만에 본 아저씨랑 헤어지려니까 섭섭해서요.”
블루벨이 귀를 손으로 잡아서 눈을 가렸다. 케릭스는 수많은 경험으로 이것이 블루벨이 우울함을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케릭스는 블루벨의 등을 두드려 주려 하다가 그녀의 등이 너무 작아 제가 두드렸다가는 부서질 것 같아서 손만 멈칫거리고 있었다. 블루벨은 귀를 손에서 놓고 금세 다른 것에 관심을 보였다.
“근데. 케릭스님 그거 뭐예요?”
블루벨이 케릭스가 들고 있는 것을 가리켰다.
“쿠키인데. 먹을 거냐?”
“예!”
블루벨이 신난 듯이 대답했다. 언제 우울했다는 듯이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케릭스는 블루벨이 너무 귀여워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블루벨이 헤헤 웃었다.
블루벨이 케릭스의 손을 잡자 그는 순간 몸을 굳혔다.
“어디서 주실 거예요?”
“궁 안의 정원에서 먹자꾸나.”
“예! 좋아요!”
블루벨은 쿠키를 먹을 생각에 들떠 케릭스의 손을 잡고 궁 안으로 그를 이끌었다. 케릭스는 앉을 만한 적당한 돌을 찾아 손수건을 꺼내서 블루벨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아니요! 괜찮아요. 저. 케릭스님 무릎에 앉아도 돼요? 저 안 무거운데…….”
“응?”
케릭스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벨은 낑낑대더니 케릭스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리고 쿠키 상자를 제 무릎 위에 놓았다.
케릭스는 제 무릎에 블루벨이 앉아 있다는 것에 몸이 굳어서 부자연스럽게 행동하였다. 그런 케릭스를 아는지 모르는지 블루벨은 콧노래까지 불러가면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예쁜 모양의 쿠키가 가득 들어 있었다. 블루벨은 쿠키 하나를 꺼내 케릭스를 향해 내밀었다.
“케릭스님. 아. 하세요.”
“응?”
“사 오신 분이 먼저 드셔야지요!”
블루벨이 케릭스의 입가에 쿠키를 들이밀었다. 케릭스는 입을 벌렸다. 블루벨은 그에게 쿠키 하나를 먹여준 후엔 본격적으로 작은 입을 오물거리면서 쿠키를 먹었다.
케릭스는 작은 손과 입을 움직이는 블루벨이 너무 귀여웠다. 당장 꽉 껴안고 얼굴을 비비고 싶을 정도였다. 케릭스는 문득 블루벨의 머리 모양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블루벨은 주로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서 틀어 올리고 다녔는데 그것이 궁녀들의 기본 스타일이었다. 오늘은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내렸는데 그게 블루벨의 외모와 더욱더 잘 어울렸다.
“머리 모양이.”
“아. 유채님이 땋아주셨어요.”
“유채?”
“레티티아님이요. 원래 이름이 유채인데 꽃 이름에서 따온 거래요. 노란색의 앙증맞은 꽃이라는데, 왠지 유채님을 닮아서 예쁠 것 같아요.”
“그래?”
“근데. 요즘 유채님이 너무 우울해하셔서 정말 슬퍼요.”
블루벨의 토끼 귀가 양 옆으로 축 늘어졌다. 유채는 최근 심하게 우울해하였다. 전에 정원에서 루프스가 억지로 끌어안고 입을 맞춘 그날 이후부터였다. 블루벨이 유채를 시중들기 위해서 루프스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유채를 마치 예쁜 인형처럼 쓰다듬고 볼에 입을 맞추는 루프스를 보았다. 그는 이따금 유채를 품에 안고 먹을 것을 먹이기도 했다. 유채의 표정은 점차 빛을 잃어갔다. 원래부터 그렇게 살집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더 말라가고 있었다. 팔목을 만지면 뼈가 만져질 정도라 블루벨은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그래서 요즘 제가 목욕 시중 들어드릴 때마다 작은 토끼로 변해서 즐겁게 해드려요. 유채님도 귀엽다고 좋아하세요.”
“그래…….”
“케릭스님이 루프스님께 말 좀 해주시면 안 돼요? 유채님 힘들어 보이신다고.”
“……그래. 한번 말은 해보마.”
케릭스는 일단 그렇게 대답했지만 제가 뭐라 한들 루프스가 들어먹을 리 없었었다. 루프스는 원래부터 제멋대로였지만 유채에 관한 일이라면 더 막무가내였다. 오죽하면 케릭스도 이제는 그녀가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루프스가 유채에게 보이는 태도는 관심이 아니라 집착에 가까웠다. 케릭스는 루프스에 대한 걱정과 유채에 대한 동정으로 몇 번을 말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는 귀를 막기라도 한 것인지 듣지를 않았다. 케릭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최대한 유채와 루프스가 마주칠 시간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암컷이 저를 노예 같은 것으로 삼고 길들인다는 명목으로 굶기고 묶어놓고, 가두어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드는 수컷에 유하게 굴 수 있겠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힘들 일이었다.
“그래도 요즘 카니스 바실리사님이랑 에릭님 덕분에 많이 웃으세요.”
바실리사는 유채를 제 처소로 자주 불렀는데 다행히 카니스란 직책의 힘인 것인지 루프스도 딱히 막지는 않았다. 바실리사는 유채에게 마레 위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유채는 바실리사와 만나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여럿 들려주었다.
“유채님이 있던 곳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할 수 있고, 새 수인 일족이 아니더라도 하늘을 날 수 있대요. 유채님도 오랜만에 이야기하는 것이 좋으신지 그때만큼은 많이 웃으세요. 바실리사님이랑 에릭님이 하시는 이야기도 재미있고요.”
“카니스 바실리사님과 에릭은 꽤 유쾌한 조합이지.”
개와 고양이라 불러도 될 정도의 앙숙이며 친구인지 주종관계인지 구분이 안 가는 두 수인이 이야기하는 걸 옆에서 듣고 있으면 꽤나 유쾌할 정도였다. 물론 항상 마지막은 에릭이 바실리사에게 응징당하는 것으로 끝맺었지만 말이다.
“전 바실리사님이 가끔은 귀찮아요.”
블루벨은 저만 쿠키를 먹은 것이 미안했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케릭스에게 쿠키를 주었다. 케릭스가 입을 벌려서 쿠키를 받아먹으면 블루벨은 씩 웃으면서 좋아했다.
“바실리사님이 귀엽다고 막 저 끌어안고 볼을 비비시는데, 높은 분이라 말도 못 하겠어요. 제 귀도 막 조물딱거리시고요. 비명 안 지르려고 정말 필사적으로 노력해요.”
“싫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
블루벨은 다시 케릭스에게 먹여주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는 저 궁에서 잘려요. 그럼 유채님도 못보고 케릭스님도 못 보잖아요. 그건 너무 슬퍼요. 제가 없어지면 유채님이 슬퍼하세요.”
다시 블루벨의 귀가 늘어졌다. 케릭스는 블루벨의 고려 범위 안에 제가 들어갔다는 것에 놀라서 넌지시 물었다.
“너는 내가 좋으냐?”
“예! 케릭스님은 착하시고 잘생기셨어요.”
블루벨의 말에 케릭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케릭스도 제 외모에 대해 알고 있었다. 사실 케릭스는 같은 수컷이라도 반할 것 같은 잘생긴 얼굴의 루프스와 함께 지내다 보니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케릭스는 평범함 그 자체로, 한 번도 빈말으로라도 잘생겼단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케릭스는 손수건을 꺼내서 블루벨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주었다. 생김새답게 피부도 마치 아기의 피부처럼 말캉하니 부드러웠다.
“이런 말을 하려면 입에 침은 바르고 해라.”
“아닌데? 진짜 케릭스님 잘생기셨어요.”
블루벨이 몸을 완전히 틀면서 큰 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정말이었다. 블루벨의 눈에 케릭스는 충분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케릭스는 가볍게 웃고 블루벨의 이마를 콩하고 쳤다. 블루벨은 아픈 듯이 이마를 움켜쥐었다.
“그런 아부 떨지 않아도 맛있는 게 생기면 네게 꼭 갖다 주마.”
“힝. 아니거든요. 저 먹을 것보다 케릭스님이 더 좋아요!”
블루벨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케릭스님은 제 말도 안 믿으시고, 미워요!”
블루벨이 속이 상했는지 토끼 귀를 잡아당겨서 눈을 가리고 우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케릭스는 안절부절못하며 블루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작고 따뜻한 몸이 케릭스의 팔에 감겨왔다.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케릭스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달래려고 하자 블루벨이 잡았던 귀를 놓았다. 귀가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면서 케릭스의 볼과 코를 때렸다. 케릭스는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놀라서 몸을 뒤로 약간 빼었다.
“히힛! 놀라셨죠!”
블루벨이 양 볼에 손을 붙이면서 씩 웃었다. 블루벨 나름의 장난이었다. 케릭스가 허탈해져서 작게 웃었다. 블루벨이 케릭스의 볼에 손을 올리고 쭉 잡아 늘렸다. 얼굴에도 근육이 많은 것인지 그의 볼은 블루벨의 것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케릭스님도 웃으세요. 웃으시면 정말 잘생기셨어요.”
블루벨이 케릭스의 볼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더니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느새 하늘이 깜깜해져 있었다.
“저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제 숙소 통금 시간이에요.”
“그래, 그럼 얼른 들어가라.”
블루벨은 케릭스의 무릎 위에서 뛰어 내리려고 하다가 몸을 다시 돌렸다. 케릭스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블루벨이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케릭스의 차가운 푸른 눈과 블루벨의 루비와 같이 붉은 눈이 서로를 응시했다. 블루벨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쪽.
케릭스의 볼에 블루벨이 작은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그 순간 케릭스의 얼굴을 비롯해서 귀, 목까지 붉게 물들었다. 블루벨은 제가 그에게 폭탄을 던졌음을 깨닫지도 못하고 케릭스의 무릎에서 뛰어내렸다. 케릭스는 블루벨의 입술이 닿았던 볼을 움켜쥐고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이거.”
“동생들에게 그렇게 잘 자라고 인사해요! 케릭스님도 안녕히 주무시라고 그렇게 인사한 건데요? 유채님도 인사 받으시면 좋아하셔서요.”
블루벨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다시 한 번 더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을 남기고 깡충깡충 뛰어갔다. 케릭스는 블루벨이 멀어지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잔뜩 붉어진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정말 블루벨만큼 요망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수인도 없었다. 도대체 뭘 먹으면 저렇게 귀여워질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케릭스는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벌게진 얼굴을 무릎에만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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