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사냥, 베노르 콩레수스[Venor Congressus]
“으아아아아악!”
젤다는 비명을 질렀다. 젤다의 시중을 들던 다람쥐 수인이 흠칫 놀라면서 몸을 사렸다. 저 성질 고약한 늑대 수인이 화를 낼 때는 멀리 있는 것이 좋았다. 운이 좋지 않으면 손찌검을 당하거나 머리털이 뽑힐 수 있었다.
젤다는 정말로 속이 터지는 중이었다. 솔직히 인정해서 그 건방진 마레 위르의 외모는 정말 반반했다. 그래서 할 줄 아는 거라곤 다리 벌리는 일밖에 없는 천한 암컷이 루프스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 같아서 끔찍했다. 젤다는 쿠션을 찢을 기세로 움켜쥐었다. 그 천한 암컷이 결국 저를 온 토스 호무스의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루프스의 비(妃)로 적당한 수인은 젤다 자신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권력도 그렇게 적당한 나이대의 암컷 중 자신만 한 인물이 없었다. 서른이 가까워지는 루프스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꽤나 심각한 문제였다. 젤다는 진심으로 루프스를 사랑했다. 남들은 오만이라고 주장해도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사랑했다. 늑대 수인 수컷의 순정만 강조되서 그렇지, 암컷의 순정도 상당하였다. 그 예로 루크레치아님이 계시지 않은가? 그랬기에 젤다도 자신이 루크레치아처럼 사랑을 쟁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다른 일족들과는 달리 그렇게 결혼을 해도 제 부인에게 충실한 편이었기에 젤다는 루프스가 계속 결혼을 미루면 결국 자신이 그의 비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암컷 마레 위르가 제 자리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마레 위르가 수장의 비가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생각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였겠지만 이미 선례가 있었다. 다른 군소 일족이면 모르지만 여우 일족의 전대 울페스 베니니타스의 부인인 라일라가 바로 마레 위르였었다. 명분도 있겠다, 루프스가 밀어붙이면 정말로 못 할 것도 없었다. 젤다는 탁자를 내리쳤다.
“아아아악!”
분해서 못 참을 것 같았다.
“베노르 콩레수스, 거기서 보자고.”
젤다는 이를 갈았다.
* * *
“유채 양, 다시 한 번 설명하지만, 이곳에서의 마법은 자신의 마력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마력을 지배, 가공하여 부리는 술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마력을 지배하는 방법에 따라서 마법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에어리얼과 스펠로 나뉩니다. 마법사의 정의는 고유 스펠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에어리얼을 쓸 줄 아는 자입니다.”
프레드릭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무시하고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벌써 몇 번째 수업이지만, 유채는 마법에 재능이 없었다. 몇 번이나 마법을 부려보라고 시켜보았지만, 유채는 번번히 실패했다. 프레드릭은 혹시 이론을 이해 못한 탓인가 싶어서 다시 처음부터 설명을 시작했다.유채가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마법이라는 것이 재능에 많이 좌우되는 학문이기에 학문적 머리보다 재능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었다. 재능과 노력이 더해져도 마법의 모든 분야(고어의 이해, 마력 컨트롤, 고유 스펠 습득 등)를 능숙하게 익히려면 아무리 천재라도 적어도 칠 년은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에어리얼은 특정 속성의 마력을 무한대로 공급받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즉 에어리얼을 열 수 있고 그 공간을 유지시킬 마력만 있다면 에어리얼의 속성에 따른 마력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힘드시다면, 특정 속성의 마력을 공급받는 주머니 정도로 충분합니다. 마법사들은 에어리얼에서 해당 속성의 마력을 공급받음으로서 고질적인 마력 부족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에어리얼은 다른 말로 신이 인간에게 지배를 허락한 자신의 권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프레드릭은 자신의 능력인 에어리얼 화염을 열어 손가락 끝에 불이 맺히게 하였다.
“모든 사람은 각각 에어리얼을 한 개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두 개에서 세 개를 가진 이들도 존재하죠. 에어리얼을 이용할 줄 아는 마법사는 자신의 에어리얼을 열어서 그 속성의 마력을 이용해서 마법을 구현합니다. 에어리얼을 통한 마법의 구현은 상상력과 창의력, 응용력에 의존함으로 개인의 숙련도나 마력 컨트롤에 따라 효과가 천차만별입니다. 사실 에어리얼 그 자체의 능력보다 에어리얼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응용하느냐가 마법사의 강함을 결정합니다.”
유채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드릭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에어리얼을 사용하면서 마법을 쓰는 것의 가장 큰 이점은 마력의 절약입니다. 스펠이 100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 자신의 마력을 100을 이용 한다면, 에어리얼은 에어리얼을 여는 데 필요한 마력이 시간당 10이라면, 같은 시간 동안 에어리얼을 통해서 100의 효과를 내는 마법을 부리든 40의 효과를 내는 마법을 부리든 소비되는 마력의 양은 10입니다.”
“그럼, 효과가 큰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무조건 이점이 아닌가요?”
“이건 극단적인 비유입니다. 실전에서 사용해 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100의 마력을 이용하는 마법은 40의 마력을 이용하는 마법보다 완성되는 시간도 한참 걸리고 마력 컨트롤도 섬세하게 해야 해서 실패 확률이 높습니다. 자신의 능력치에 알맞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드릭이 말했던 대로 에어리얼을 다루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본인의 숙련도였다.
“에어리얼의 또 다른 이점은 해당 속성 내에서의 마법의 다양성입니다. 에어리얼에서 공급받은 마력을 통해 본인의 상상력으로 마법이 구현되기에 일일이 주문을 만들어야 하는 스펠과 다르게 빠르고 즉흥적이죠. 그렇게 때문에 에어리얼을 열어놓은 상태에서 그 속성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이용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할 것인지가 마법사에게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프레드릭은 예시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제 에어리얼은 화염계의 불입니다. 가장 흔한 에어리얼 중 하나죠.”
에어리얼은 크게 일곱 가지 계(界)로 구분하였다. 화염(火焰)계, 수(水)계, 암(巖)계, 풍(風)계, 전격(電激)계, 정신(精神)계, 특수(特殊)계. 이따금 전격계는 풍계와 동일 취급되기도 하였다.
“화염 계열은 파괴력이 있어 공격 마법으로 최상의 에어리얼이나 그렇다 하여 화염 계열 에어리얼이 무조건 마법 대련에서 우위를 차지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숙련도이지요.”
“알아요. 전에 예를 말해주었잖아요. 베아트리체 여제인가?”
역대 가장 강한 마법사이자 전사로 평가되는 것은 거의 혼자서 대륙을 통일시켰다고 하는 고대 헤르미네아의 여제 베아트리체였다. 그녀의 에어리얼은 가장 흔하고 에어리얼 중 활용도 최악이라고 불리는 강화였다. 여제는 그 강화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자신의 몸을 반불사로 만들어 단신으로 군대를 격파했다. 이처럼 에어리얼의 종류보다는 숙련도가 강함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숙련도가 엇비슷하다면, 결론적으로 상황의 특수성과 에어리얼 자체 속성의 우열 관계나 그 자체의 강함으로 결판이 납니다.”
유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많은 에어리얼 중에서도 최강이라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가 있지요.”
“하늘. 바다. 대지. 부패. 네이밍.”
유채의 대답에 프레드릭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풍계의 하늘, 수계의 바다, 암계의 대지, 특수계의 부패와 네이밍은 세계의 법칙을 침범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강력합니다. 특히 하늘, 바다, 대지는 각각의 특수 속성을 가지고 있지요.”
“하늘은 공간, 바다는 시간, 대지는 생명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그중에서 하늘은 범용성 최강의 에어리얼이라고 불리고, 대지는 하늘에 버금가는 범용성과 생명을 다룰 수 있다는 특수 속성으로 인한 살상 에어리얼로 유명하죠, 바다는 범용성은 떨어져도 다른 두 에어리얼에 비하여 특수 속성의 사용이 쉽다는 점이 있습니다.”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에어리얼의 이름은 에어리얼이 공급해 주는 마력의 속성을 의미합니다. 공급해 주는 마력 속성에 따라서 다룰 수 있는 마법이 달라집니다. 그러니, 해당 속성의 마력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이용하는지가 중요하지요. 공급받는 마력 속성에 대한 응용법은 하늘을 통해서 다시 설명해 드리지요.”
하늘은 기후와 연관되어 있으니 하늘 에어리얼은 기후를 다룰 수 고 당연히 그에 따라 물, 전격 관련 마법까지도 다룰 수 있고, 하늘에는 산소가 있음으로 연소반응을 통해서 화염계 마법 역시 사용할 수 있었다. 과학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하늘이 다를 수 있는 마법은 무궁무진했다. 공기와 물에 의한 일그러짐인 신기루를 만들 수 있으므로 정신계인 에어리얼인 환영의 마법 역시 흉내 낼 수 있었다. 암계 관련 마법과 특수계와 정신계의 마법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흉내 낼 수 있는 범용성 최강의 에어리얼이었다.
“그리고 에어리얼은 말장난도 가능합니다. 솔직히 말해 어떻게 상상력을 이용해서 끼워 맞추느냐죠.”
프레드릭은 종이에 손을 베여 피가 난 유채의 손가락에 제 손에 피운 불이 옮겨 붙게 하였다. 유채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거두었다. 불은 금세 화르륵 소리를 내면서 사라졌고 손의 상처는 사라져 있었다. 프레드릭이 웃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불은 치유 마법에 이용될 만한 특징이 없습니다.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에어리얼은 생명을 표방하는 대지가 속해 있는 암계 속성이나 물, 그리고 특수계의 치유나 정신계의 환영인데,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상처를 태워서 낫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저는 에어리얼 불로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들을 때마다 창의력이 정말 중요한 분야라고 생각되네요.”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사실 에어리얼은 열기만 하면 무궁무진하게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만 그 한 번 여는 것이 힘듭니다. 여는 조건도 알려져 있지 않아서 거의 복불복입니다. 마력이 차고 넘치도록 많아도 못 여는 사람이 있고, 마력이 간신히 에어리얼을 수 분간 유지할 정도라고 해도 에어리얼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본인의 의지와 절박함, 생존 욕구와 같은 강렬한 감정이 영향을 미친다고는 하나 그 정도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여하튼 여는 사람도 드물다 보니, 연구된 것도 적어서 에어리얼에 관한 학문은 체계적이지 않죠. 오히려 그런 점에서는 스펠 쪽이 학문적으로는 더 발달해 있습니다.”
에어리얼을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라면 스펠은 말로써 자연의 마력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에어리얼을 다룰 수 없는 자들이 차선으로 만든 것이 바로 스펠이었다. 스펠도 두 분야로 나뉘었다. 고유 스펠과 빌려 쓰는 스펠. 고유 스펠은 말 그대로 사람마다 가진 특수한 시동어를 의미했다. 특수 시동어와 고어의 조합으로 스스로 주문을 만들어낸 것을 고유 스펠이라고 하였고 다른 사람의 고유 스펠을 계약을 통해서 빌려와 쓰는 것이 빌려 쓰는 스펠이었다. 빌려 쓰는 스펠은 고유 스펠 다음에 계약의 언(言)인 [Recurro]를 붙였다. 고유 스펠을 얻는 것도 운이 필요한 일이었다. 리카르타라는 원형의 진 안에서 수련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발음하는 단어가 바로 고유 스펠이 되었다. 에어리얼은 마력의 절약이라는 이점이 있었으나, 에어리얼이 제공하는 마력에 따라 마법사가 쓸 수 있는 마법의 종류에 한계가 생겼다. 예를 들어 에어리얼 불은 죽었다 깨어나도 물 마법이나 흙 마법 등을 쓸 수가 없었다. 프레드릭처럼 창의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지만, 창의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분명이 존재했다. 반면에 스펠은 마력의 소모가 심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에어리얼과 달리 다룰 수 있는 마법 종류의 한계가 없었다. 에어리얼을 이용할 수 있는 마법사더라도 자신의 에어리얼이 구현하지 못하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스펠을 익혀두곤 했다.
고유 스펠은 에어리얼을 열려고 하는 것보다 쉽게 얻을 수 있었기에 에어리얼을 쓰는 마법사보다 스펠을 다루는 마법사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쉬운 운용과는 별개로 에어리얼에 비해서 마력 소모가 심하다는 단점과 고어(古語)를 배워야 한다는 장벽이 존재했다. 물론 능숙해지면 무영창이라는 방식으로 영창 없이 생각만으로 스펠을 운용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고유 스펠을 다루는 것에 능숙해진 이후에 오랜 시간을 더 수련을 거쳐야 했다.
프레드릭은 고유 스펠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리카르타를 그릴 만한 공간도 없는 상황이기에 유채와 계약을 맺어서 자신의 스펠을 빌려 쓰게 만들어주었다. 빌려 쓰는 스펠은 고유 스펠의 절반도 되지 않는 효과였지만 오랜 수련을 거치면 고유 스펠을 쓰는 마법사나 에어리얼을 쓰는 마법사도 능히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 수준에 이르러서야 그들도 마법사로 인정을 받았다.
“다시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유채는 프레드릭이 알려준 대로 스펠을 읊었다. 바람을 불게 하는 마법이었다. 프레드릭의 고유 스펠은 고어로 보라색 꽃을 의미하는 [Ianthis]였다.
“Zephyrus Flo, Ianthis. Recurro.”
스펠을 읊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프레드릭은 마법사이자 학자로서 유채를 연구하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재능 없는 인간이라도 빌려 쓰는 스펠은 모두 사용 가능했다. 그런데 유채는 전혀 마법을 부리지 못했다. 만일 유채의 에어리얼이 아무런 조건 없이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열릴 수 있는 에어리얼인 강화와 무효화 중,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무효화라면 이해해 볼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치유 마법이라든지 여타 다른 마법이 멀쩡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유채는 프레드릭이 머리를 쥐어뜯는 것을 보면서 미안해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판타지 소설에서는 차원을 이동하는 주인공들이 마력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지만, 유채의 경우는 아닌 것 같았다.
“유채 양. 혹시 무의식중에 마력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까?”
“예?”
“일반적으로 사람의 몸은 마력을 담는 그릇입니다. 사람들은 본인의 마력을 피부에 있는 마력 필터를 통해 자연 마력을 걸러서 만들어냅니다. 사람마다 본인의 마력을 담을 수 있는 크기가 다릅니다. 마법을 쓰면 자신의 마력은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그 빈 공간을 다시 피부에 존재하는 마력 필터를 통해 자연 마력을 걸러서 본인의 마력으로 변환시켜 채웁니다. 그러니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면 다시 마력이 차오르지요. 일반적으로 마력이 차오르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러니 만일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마력을 쓴다거나, 마력이 자연방출 되는 양이 많은 체질이라면, 마력 부족으로 마법을 못 쓰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혹시 유채 양. 무의식중에 마력을 쓰는 곳이 있습니까? 아니면 체질적으로라도?”
프레드릭이 답답한지 물었다. 유채는 딱히 해줄 말이 없어 겸연쩍게 웃었다.
“제가 재능이 없나 보지요.”
유채는 머리를 긁적였다. 슬슬 루프스가 정해준 한 시간이 다 되어가기에 유채는 주섬주섬 방에 돌아가 읽을 책을 챙겼다. 프레드릭도 유채가 책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지난번까지는 이니투스더니 이번에는 에클레시아에 대한 것입니까?”
“아무래도 이제는 다른 쪽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요.”
유채는 프레드릭에게 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저는 아르젠인도 아니고 대륙에서 오지도 않았으며, 완전히 다른 곳에서 왔다는 정도만이었다. 프레드릭은 미심쩍어 하는 눈치였지만, 유채가 진지하게 말하자 그녀를 믿는 것인지 제 연구로 바쁜 와중에도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유채는 프레드릭의 조언에 따라서 책을 고르곤 했다.
“아무래도 은가연의 자료는 아르젠이 아닌 이상 구하기 힘드니 에클레시아라도 살펴보는 것이 옳겠군요.”
프레드릭도 유채의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채는 프레드릭에게 시간을 내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도서관을 나왔다.
걸을 때마다 발목에서 발찌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채는 그것이 제 발목에 채워진 족쇄라고 생각했다.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돌아가면 블루벨이 많이 그리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유채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생각만으로 이곳을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유채는 이제 점점 한계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불편하게 쪽잠을 자는 것도, 루프스의 귀찮을 정도의 스킨십도. 모두가 저를 지치고 메마르게 했다. 차라리 이젠 누군가가 저를 죽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이히힉!”
블루벨의 이상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상념에 빠져 있던 유채는 요상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카니스 바실리사가 블루벨의 작은 몸을 들어 올려서 또 괴롭히고 있었다.
“아. 블루벨. 너 너무 귀여운 것 같아! 우리 카날리스 호무스로 올래? 그럼 내가 맛있는 것도 주고 월급도 많이 줄게. 응? 내 말동무만 되어주면 돼.”
“싫어요!”
블루벨이 버둥거리면서 바실리사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블루벨은 유채에게 쪼르르 뛰어오더니 그녀의 뒤로 몸을 숨겼다.
“전 유채님이 좋으니까. 유채님 하고 있을 거예요!”
“바실리사님은 한 번도 유채 양한테 못 이기시네요.”
에릭이 키득거리자 바실리사가 고개를 돌려서 그를 쏘아보았다.
“뭐? 내가 뭐가 매일 져?”
“외모도 안 되시고, 몸매도 안 되시고, 블루벨도…….”
바실리사의 다리가 에릭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유채는 에릭은 사서 매를 버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매번 뺀질거리는 말을 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널 때릴 권력은 있어! 짜샤.”
에릭을 응징하고 나자 기분이 풀린 것인지 바실리사는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엉덩이에 달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유채에게 왔다. 여자임에도 180cm에 달하는 거구인지라 유채는 그녀의 앞에 설 때면 항상 위축되었다. 바실리사는 상냥한 얼굴을 하고서 유채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있잖아, 유채. 블루벨을 설득해서 내게 보낼 의향이 없어? 난 저렇게 귀여운 생물체는 처음 봤어!”
“유채님…….”
블루벨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끼이잉 소리를 내면서 유채의 허리에 매달렸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을 하고 올려다보는 모습에 유채는 바실리사에게서 손을 빼내 블루벨의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블루벨이 원하면 보내 드리겠습니다만, 블루벨이 아직은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쩝. 할 수 없지.”
바실리사가 안타까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블루벨인 기쁜 것인지 유채의 등에 제 얼굴을 비볐다.
바실리사는 엄마 미소와 함께 두 암컷을 바라보았다. 이 주간 유채를 가까이에서 보면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좋은 마레 위르. 말을 해보니 교양 있고 사교성 있으며 남에 대한 배려심도 있었다. 자존심이 조금 강한 것이 흠 아닌 흠이었지만, 그래도 같이 지내면 유쾌한 마레 위르였다.
바실리사는 마레 위르에게 호의적인 수인이었다. 그런 것을 감안해도 바시리사는 유채를 라일라만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만나는 동안 헤르티아가 걸어놓은 마법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루프스도 저와 비슷한 이유로 호감을 가진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둘 사이에 이렇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나저나 유채 양은 정말 보면 볼수록 예뻐지네요. 옷걸이가 괜찮으니 옷이 화려해도 미모가 더 살아나는 것 같고.”
에릭이 유채에게 넌지시 칭찬의 말을 건네었다. 바실리사도 물끄러미 유채를 보았다. 예쁘긴 예뻤다. 그래서 라이가 아끼는 것인가 싶더라도 유채보다 나은 미인이 없었던 것도 아니라 이내 아닐 거라 고개를 저었다. 더 나은 미인들도 있는데 굳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유채에게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에릭. 네가 그러니까 그 나이 먹을 때까지 암컷이 없는 거야. 예쁜 암컷만 보면 사족을 못 쓰니.”
“예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좋아하는 암컷은 있다고요. 그런데 그 암컷이 더럽게 눈치가 없어서 티를 내도 몰라서 이제는 방법을 바꿔보려고요. 그리고 바실리사님도 제게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지 않으십니까?”
“나는 결혼 따위 안 해. 야들야들한 미남들로 정원을 만들어서 평생을 호강하는 군주나 될 거야.”
바실리사가 에릭의 말에 맞받아쳤다. 볼 때마다 유쾌한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아 유채는 킥킥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유채가 버틸 수 있는 것은 귀여운 블루벨과 이따금 찾아와 즐겁게 해주는 바실리사와 에릭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실랑이를 하던 그들의 만담은 역시나 바실리사의 주먹으로 끝을 맺었다. 목을 얻어맞은 에릭이 컥컥거리는 걸 깔끔하게 무시하고서 바실리사가 유채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어제 들려줬던 이야기 끝이…….”
바실리사의 어깨에 묵직한 손이 내려앉았다. 유채의 얼굴에 매달려 있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실리사는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지만, 바실리사. 그건 안 되겠군.”
루프스가 웃는 얼굴로 곧장 바실리사를 지나쳐서 유채의 어깨를 감쌌다. 유채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루프스의 손가락이 유채의 목선을 더듬다가 파렌티아를 손가락으로 감아 올렸다.
“내 펠릭스 다우스인 레티티아와 내가 지금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유채는 작게 이를 갈았다. 루프스는 간혹 파렌티아를 이렇게 제 손가락에 걸어서 들어 올리곤 했는데, 그것이 저에 대한 소유를 강조하는 행위임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는 유채가 제 소유물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일깨워주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때때로 이렇게 파렌티아를 들어올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바실리사가 루프스에게 건방진 언사를 쓰더라도 용납 받는 것은 그녀가 유일한 그의 가까운 혈육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바실리사는 루프스가 허용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정확히 알았다. 지금은 물러날 때었다.
“저는…… 무엇을 하나요?”
유채가 걱정이 되는 블루벨은 그녀의 곁에 남아 있기 위해서 허드렛일이라도 얻기 위해서 루프스에게 물었다. 그의 싸늘한 청회안이 블루벨에게 내리 꽂혔다.
“없다. 그러니 돌아가라.”
유채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블루벨은 유채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하나 블루벨에게는 이 상황을 타계할 힘도 능력도 없었다. 블루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루프스는 유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방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묵직한 걸쇠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루프스는 유채가 들고 있는 책을 빼앗아 제목을 쭉 훑어보고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지난번엔 이니투스더니 이번에는 에클레시아군.”
그는 중얼거리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턱짓으로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유채는 의자에 앉았다. 대면하기도 싫은 인간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루프스는 나른하게 웃으면서 몸을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었다.
“아까 그 표정 좋았는데, 다시 한 번 해보지.”
“오늘은 힘들어서 안 될 것 같네요.”
“내가 이니투스와 에클레시아에 대한 양질의 가르침을 준다면 할 생각이 있나?”
“내가 스스로 알아가는 것을 더 좋아해서 말이죠.”
유채가 빈정대었다. 루프스는 코웃음을 치더니, 허리를 곧게 세워서 유채의 가까이로 몸을 붙였다. 그의 손가락이 부자연스럽게 올라와 있는 유채의 옷깃을 손가락으로 젖혔다. 옷깃에 가려져 있던 목덜미에는 루프스가 새겨놓은 울긋불긋한 자국이 하나 있었다.
유채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 내고 다시 옷깃을 세워서 자국을 가렸다. 아침마다 저 증오스런 남자가 억지로 목덜미를 붙잡고 손가락으로 긁어서 남긴 자국이었다. 유채는 피부가 약해서 붉은 자국이 쉽게 나는 편이었다. 이런 게 있으니 궁녀들은 정말로 유채가 루프스의 총애를 받는 줄 알고 고분고분해졌다. 실상은 여전히 유채는 루프스를 피해 쪽잠을 자느라 그와는 손끝 하나 닿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게 있어서 요즘 궁녀들이 네게 고분고분할 텐데.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 번잡스럽지만 이렇게까지 해주는 게 아니냐. 나도 참 억울해. 실제로 레티티아 네가 그런 요부도 아니고 이렇게 뻣뻣한 암컷인 것을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극진하게 대접해 주는 것인지.”
“극진한 대접 따위는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서 나가게만 해줘요.”
“싫어.”
루프스가 마치 심통 난 아이처럼 대답했다.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루프스가 들어오라고 하자 궁녀가 온갖 음식을 들고 나타났다. 궁녀들이 가지고 온 음식으로 탁자가 가득 찼다. 유채는 영문도 모르고 그것들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일을 마친 궁녀들이 물러가고, 루프스가 입을 열었다.
“먹어.”
“내가 왜 지금…….”
유채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 루프스가 그녀의 팔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소매가 흘러내리면서 가는 팔이 드러났다. 처음 보았을 때도 살집 있는 몸매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가늘지는 않았었다. 루프스는 이 이상 세게 잡았다가는 유채의 팔목이 부러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몰골을 하고 있으면 나한테 시위하는 꼴밖에 되지 않지.”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쳐 내려고 하였으나 그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토스 호무스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듣고 마레 위르 음식을 잘 아는 여우 수인을 수소문해서 만든 음식이다. 그러니 먹어. 괜히 말라서 베노르 콩레수스 때 마레 위르에게 호의적인 늙은이들이 날 공격할 구색을 만들게 하지 말고.”
사실 루프스는 그런 늙은이들의 말들은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저 유채의 마른 팔이 불쌍해 뭐라도 먹이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이유를 대기에는 제게 아양을 떨지도 않고 비싸게 구는 유채에게 제가 매달리는 꼴사나운 모습이 될 것 같아 적당한 핑계를 대는 것이다.
“그러니, 먹어. 안 그러면 이 음식을 만든 여우 수인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쫓겨날 거야.”
혹시 몰라서 협박성 말도 덧붙였다. 정말 보기 싫은 꼴이지만 정의로운 면이 있는 유채는 자신으로 인해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협박이 먹힌 것인지 루프스가 손을 놓아주자 유채는 숟가락을 들어 김이 나는 고기 스튜를 떴다. 루프스는 팔에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보았다.
유채는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 덕에 음식을 먹어도 체할 것 같았지만 저로 인해서 고생만 하고 대가도 못 받을 수인을 걱정해서 억지로 밥을 먹었다. 사실 제가 밥을 잘 먹지 못한 것은 루프스가 말한 것처럼 이곳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수인의 음식은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향신료가 많이 들어갔다. 본래 향이 강한 음식을 못 먹는 유채에게 수인의 음식은 꽤나 고역이었다. 그래도 이곳의 인간들은 수인들에 비하면 향신료를 적게 쓰는지 먹기에 힘들지 않았다.
“잠깐.”
유채가 고개를 들자 루프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감싸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쓸었다. 유채의 입가에 소스가 묻어 있었다.
“내가 아양 한 번 떠는 것도 비싸게 구는 네게 왜 이렇게 정성을 쏟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의 손가락이 세심하게 유채의 입가를 쓸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게 웃어 보이고, 상냥하게 군다면 나는 네게 언제든지 최상의 것을 제공할 용의가 있어.”
루프스는 다시 턱을 비스듬히 손에 기대면서 말했다.
“그러니, 아까처럼 웃어봐.”
“배부르고 졸려서 안 되겠어요.”
유채는 또 다른 핑계를 댔다. 새장 속의 새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그가 바라는 대로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루프스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 웃어 보였다면 네가 그 어떤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이니투스의 정보를 알려줬을 텐데. 기회를 발로 찼군.”
“그게…….”
“내기를 하나 할까?”
유채가 무슨 얘기냐는 듯 바라보자 루프스는 마저 말을 이었다.
“곧 베노르 콩레수스가 있어.”
블루벨과 바실리사들은 적이 있는 내용이었다. 4월의 마지막 날에 치르는 제사인 오페라티오를 주관할 수인 일족의 수장을 뽑기 위해서 행해지는 사냥 대회였다.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공간 안에서 가장 큰 사냥감을 생포해 오는 자가 우승하는 것으로 수장들의 강함을 볼 수 있는 대회라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것이었다. 에클레시아의 중앙 재단에서 제를 올린다는 것은 큰 영광이라 많은 일족의 수장들이 승리를 원했다. 루프스만 제외하고.
“내가 그곳에서 우승한다면 말이야. 네가 내 소원 하나를 들어주고 내가 우승하지 못한다면 내가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바실리사가 루프스는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우승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제를 올리는 것을 귀찮게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의 성품상 적당한 사냥감을 진득하게 추격하는 것이 서투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채는 루프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바실리사의 말에 따르면 루프스는 그저 귀찮고 흥미가 없어 사냥에 적극적이지 않을 뿐이지 작정하고 참여하면 능히 우승할 만하다고 했다. 전적으로 제게 불리한 내용이었다.
“당신이 가장 강하다면서요? 나한테 불리한 거 아니에요?”
“내 소원을 먼저 말하지, 오페라티오에서 제를 올리는 수인은 옆에 짝이 되는 암컷을 세운다. 그 제를 올릴 때, 네가 내 옆에 서라.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하고서.”
유채는 에클레시아란 말에 멈칫했다. 제가 이기면 그에게 소원을 빌 수 있고, 져도 어쨌든 에클레시아에 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기면 더 좋을 거라 생각하며 유채는 턱을 들고 물었다.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나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루프스의 긍정적인 답에 유채는 간만에 기분이 좋아져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늘어졌다.
“좋아요. 할게요.”
루프스는 유채의 웃는 얼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유채는 정말로 표정 관리를 못하는 마레 위르였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표정에 다 드러났다. 이렇게 가까운 데서 그녀가 웃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웃는 모습이 꼭 아름다운 신기루같이 보여서 흩어져 사라질 것 같았다. 루프스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하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루프스가 그런 내기를 제안한 것은 레티티아에게 비(妃)의 옷을 입힐 만한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오페라티오에서 제를 올리는 암수 간의 관계는 보통 부부이고 미혼의 수장의 경우는 연인이나 친척이 그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고로 그때 입는 복장은 수장 부부의 정식 예복이었다. 루프스는 어머니인 블랑카가 제를 위해 예복을 입은 것을 본 적 있었다. 어머니와 같은 옷을 유채가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베니니타스와 라일라의 전례가 있어서 마레 위르라 안 된다는 반발은 없을 것이다.
베노르 콩레수스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참여해 가며 유채가 예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할 대답은 없었다. 그냥 그 옷이 그녀와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뿐이었다. 유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입혀보고 싶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붉은 예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
단지 그뿐이었다.
“역시, 헤임달의 요리는 최고라니까.”
마틴이 실없이 웃으면서 헤임달이 건넨 술을 받았다. 헤임달은 음식을 더 권하면서 마틴의 기분을 맞추어주었다.
“나야 먹는 사람이 기분 좋게 먹어주면 좋지. 세라, 얼른 가서 음식 좀 더 가져오렴.”
“알겠어요, 아저씨.”
세라라고 불린 근육질 몸매의 아가씨가 앞치마를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 마틴은 술을 홀짝이면서 세라를 보았다.
“자넨 정말 대단해. 어떻게 제 자식 아닌 놈들을 세 명이나 거둘 생각을 해?”
헤임달은 세라를 제외하고 두 명의 아이를 거두었다. 다른 하나의 이름은 리차드로 렉스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에 속해 있었다. 다른 한 명의 아이는 알리사로 다른 아이들과 달리 헤임달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아이였다. 알리사는 일찍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야 대륙에서 죽은 아이들 생각나서. 아직도 그 아이들 생각하면 눈물만 나. 좋은 옷 한 벌 못 입혀줬는데…….”
“에휴! 헤임달 형님. 너무 우울해하지 마시고 이거 드세요.”
헤임달과 같이 사는 알폰소가 그를 위로하면서 맥주를 건넸다. 헤임달은 알폰소가 건넨 맥주를 홀짝였다.
“오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안 그래? 새언니도 이제 잊고 새로 결혼해.”
헤임달의 동생인 헬라가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위로했다. 헤임달은 동생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억눌린 울음소리를 냈다. 마틴은 갑작스럽게 저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된 것 같아서 무안했다. 때마침 세라가 음식을 가져왔다. 분위기를 바꿀 좋은 기회라 생각한 마틴은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세라도 어느새 어른이 됐구나. 예쁘게 자랐다니까.”
“감사해요, 마틴 아저씨.”
세라가 눈을 빛내면서 마틴의 앞에 앉았다. 헤임달이 세라에게 신호를 주었다. 세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빙글 웃으면서 마틴에게 물었다.
“근데, 예쁘다는 소리 들으니까 말인데요, 토스 호무스에 엄청 예쁜 아르젠계 여자애가 있다는 소리가 있더라고요. 그거 진짜예요?”
“응? 사실이고말고.”
알렉스, 마틴, 페드로, 필립 사이에서는 유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혹여나 루프스가 인간을 펠릭스 다우스로 삼았다는 사실에 포트리스 사람들의 수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도 있지만, 언젠가 포트리스로 올지도 모르는 유채를 위한 배려였다. 아무리 피해자라 할지라도 유채가 펠릭스 다우스였다는 소문이 돌면 그리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할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마틴은 술에 취해서 사고가 무뎌진 상태였고 거기다 헤임달이 우울해 보여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유채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밀었다.
“이건 진짜 비밀인 거다. 절대 말하면 안 된다.”
“당연하지, 마틴 형님. 우리 입 무거운 거 몰러? 전에 형님 실수한 것도 아무 말도 안 했잖아. 말 좀 해봐. 얼마나 예뻐?”
“세상에 둘도 없을 정도의 미인이었지. 어지간한 미인들은 이름도 못 내밀 정도의 미모야.”
세라는 마틴이 이야기하느라 정신을 팔린 틈을 타서 그의 뒷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세라의 에어리얼은 특수계 투영이었다. 세라는 마법을 통해서 마틴이 떠올리고 있는 여자애의 이미지를 종이에 투영시켰다. 뿌옇게 물에 번진 것 같은 그림이 점차적으로 선명해졌다. 마틴의 기억이 완전히 투영되자 세라는 그것을 얼른 소매에 감추었다. 그동안 헤임달과 헬라, 알폰소가 효과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적을 달성한 그들은 편히 먹고 마시며 떠들다가 적당한 시간이 돼서야 마틴을 보내주었다.
“세라, 투영은 잘 되었냐?”
알폰소가 세라의 머리를 건드리면서 말했다. 세라는 귀찮은 듯이 알폰소의 손을 쳐 내면서 투영된 종이를 건넸다.
“잘됐어요. 진짜 더럽게 예쁘게 생긴 년이네요.”
세라가 질투가 섞인 표정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알폰소와 헤임달, 헬라는 그림을 보고 숨을 들이마셨다. 마틴이 술에 취해서 과장해서 설명하는 것인 줄 알았건만 정말 그의 말대로 끝내주는 미인이었다. 헬라도 입을 떡 벌리고 세상에, 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장담하건대, 바다에서 이런 여잘 주웠다면 난 타우루스에게 안 가져다주고 내 방에 뒀을 거야. 형님.”
알폰소가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헤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딱, 사내 잡아먹게 생겼네. 사내들이 환장을 하고 못 배기겠어. 오빠는 뭘 그리 보우?”
헬라가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는 헤임달을 팔로 쿡쿡 찔렀다. 자못 심각한 표정이던 헤임달은 손가락으로 그림 속 여자가 입은 가리켰다.
“이거. 블랑카가 입은 적 있는 루프스의 비(妃)의 예복이랑 비슷해.”
“그게 뭔 소리야?”
“원래 늑대 놈들이 짐승치고는 생각보다 예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 특히 복식은 서열과 관련된 것이라 더 난리법석을 떨지. 근데. 펠릭스 다우스 따위에게 여성 예복 중 가장 위의 것을 입힌다고?”
알폰소도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박수를 쳤다.
“설마, 늑대 놈이 그 계집애를 좋아하는 것 아닐까? 형님, 그러면 우리 한 번 더 기회가 생길지 몰러.”
“오빠, 우리가 원래 노리려고 했던 것도 블랑카 아니었소. 블랑카가 워낙 강해가지고 차선으로 라일라를 노린 것이지. 다행히 베니니타스가 부인의 죽음에 이성이 날아가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로보를 의심한 덕분에 일이 잘 풀렸지만.”
헤임달은 이마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심증은 있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다. 확실하게 루프스가 저 계집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만일 그들의 예상이 맞다면 제 여자에게는 완전히 눈이 돌아가서 맹목적으로 사랑을 퍼붓는 늑대의 특성상 십삼 년 전 로보의 때보다 훨씬 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이 스티폴로르는 마력 억제석인 프레눔의 최대 매장지였다. 대륙에서는 구하기 드문 프레눔이 이곳에는 좀 과장해 말해 발치에 치일 정도였다. 프레눔 광산을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수인이 없어야 했다. 십삼 년 전 그들은 프레눔 광산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인들을 들쑤셔 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헤임달의 계획은 현 루프스의 성장으로 박살났다. 반대로 말해, 루프스가 십삼 년 전 베니니타스나 로보의 역할을 해준다면 그의 작전은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수 있단 얘기였다. 헤임달은 턱을 쓸었다.
“형님. 공작에게 지원 요청할까?”
“아니.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자.”
이런 계획은 신중해야 했다. 헤임달이 위험천만한 십삼 년 전과 같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고도 살아남은 것은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그 자신은 뒤에 숨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헬라. 그 미약 성분이 섞인 카를리티오(Catulitio: 수인들의 성욕이 가장 왕성해지는 시기)를 앞당기는 약초 있어?”
“그 쓸모없는 건 왜? 향도 진해서 티도 많이 나는 약초인데?”
“아편에 섞으면 모르겠지, 타우루스을 만나러 갈 준비나 하자고.”
헤임달은 머릿속으로 새 판을 짰다. 그는 종이 속에 투영된 여자아이에게 정말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 * *
베노르 콩레수스를 맞아 거의 모든 수인 일족들은 사절단을 이끌고 토스 호무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직 대회까지는 일주일도 더 남았는데 궁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축제가 벌어지거나 말거나 유채는 프레드릭과의 수업을 위해서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실전은 영 진전이 없어 프레드릭도 이론으로 수업 내용을 바꿔 유채에게 여러 속성의 마법의 원리를 설명해 주고 마법을 이해할 때 필요한 고어들을 가르쳐 주었다. 유채는 그가 알려주는 고어를 모두 처음 보는 것임에도 해석할 수 있었다. 해석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아쉽네요. 고양이 수인 일족은 거의 멸족해서 오지 않는다니.”
고양이를 좋아하는 유채는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프레드릭도 아쉬운 모양이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알렉스를 키워주신 분도 고양이 수인 노파셨는데.”
“예? 포트리스에서 나고 자라신 게 아니세요?”
“아니요. 저희는 고아입니다. 수인 내전에 휘말려서 열 살 때 양친을 잃고 기억도 잃고 떠돌던 것을 한 고양이 수인 노파가 거두어주셨죠. 그리고 그분이 목숨을 바쳐 가며 저희를 포트리스로 데려다주셨습니다. 너무 고마우신 분이죠,”
프레드릭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유채는 왜 프레드릭이 수인과 인간의 화합을 주장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둘은 생김새만 다를 뿐이지, 똑같이 감정이 있고 생각을 하는 지성체였다. 그러니 반목보다는 화해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고양이 일족의 고유 능력은 예지여서 그분께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여럿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함축된 표현이 많아서 이해는 힘들더군요. 벌써 십 년도 넘은 일이라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예지요?”
“고양이 수인 일족은 예로부터 신과 가장 가까운 일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에게 계시가 내려오면 고양이 일족의 수장이 가장 먼저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이니투스가 은가연을 도울 수 있게 한 것 역시 그 당시 고양이 일족의 수장의 힘이 컸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에 가장 가까운 곳에 그들의 땅이 있고요.”
“그래요?”
유채는 턱을 쓸었다. 고양이 수인 일족에 대한 내용을 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프레드릭 씨는 베노르 콩레수스 때 뭐 하세요?”
“저야 연구나 해야겠지요. 나름 진척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루프스가 베노르 콩레수스 당일 날은 와서 구경해도 된다고 자비를 보이더군요.”
프레드릭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지는 것을 보고 유채는 루프스가 또 어떻게 사람 신경을 긁었을지가 짐작되었다.
“솔직히 요즘은 연구보다 레이라에 대한 걱정뿐입니다.”
라이라는 몇 달만 지나면 이제 산달이라고 하였다. 유채는 프레드릭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프레드릭은 유채의 위로에 애써 표정을 폈다.
유채는 프레드릭이 포트리스에서 가져온 고서의 필사본과 그가 도움이 될 것이라 추천해준 책을 챙겨서 도서관을 나왔다. 바깥은 각 일족들을 모시기 위해 평소보다 배는 더 많아진 궁녀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채는 되도록 다른 수인들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내궁으로 향했다. 이곳의 궁은 외궁과 내궁으로 구분되었는데, 외궁은 말 그대로 공적인 일이나 외부 손님들의 거처로 쓰이는 곳이며, 내궁은 루프스의 개인 공간이었다. 유채가 프레드릭을 만나는 도서관은 외궁에 있기에 조금만 길을 잘못 들면 수많은 수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루프스와 블루벨이 외궁에서 내궁으로 넘어오는 샛길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유채는 발소리를 죽이고 정원의 틈새 길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너구나.”
들어본 적 있는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유채의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헤르티아님!”
유채는 어떤 궁녀가 외치는 이름을 듣자마자 그녀를 알아보았다. 저를 루프스에게 팔아먹은 여우 수인들의 수장이었다. 유채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를 갈았다. 저 여자 때문에 제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생각하면 자다가도 분통이 터졌다.
헤르티아는 유채의 불타는 눈동자를 보면서 웃었다.
“소문의 레티티아로군. 오만방자한 행동에 비해서 꽤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던데.”
헤르티아는 유채의 행색을 살폈다. 루프스가 정말로 아끼는 것인지 고위 수인들도 쉽사리 입을 수 없는 옷을 입고 장신구들을 걸치고 있었다. 헤르티아는 유채의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다. 확실히 반반한 외모였다. 이게 루프스의 취향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유채는 헤르티아의 손에 잡힌 턱이 아파 인상을 찌푸렸다. 밀어내고 싶었지만 수인의 힘을 제가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니 괜한 힘을 쓰지 않기 위해 꾹 참는 것이었다.
헤르티아는 유채가 옷깃을 올려서 숨겨놓은 불긋한 자국을 보았다. 그녀는 가볍게 헛웃음을 지었다.
“내 생각보다 더 예쁨받는가 보구나. 소문에 루프스가 네 밤 기술에 푹 빠져 있다던데?”
“닥쳐요!”
유채는 더 참지 못하고 헤르티아의 손을 쳐 내고 옷깃을 다시 올렸다. 블루벨이 헛소문을 듣고 입에 올렸을 때와는 다르게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때는 당혹스러웠던 것이지만 지금은 치욕스러웠다. 헤르티아는 팔짱을 끼고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넌 내 수행원들에게 험한 일을 당했겠지. 안 그러냐? 내가 그때 너를 구해준 것 같은데.”
“애초에 당신이 그들을 그곳에 보내지만 않았어도 내가 여기서…….”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여우 일족의 수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며, 너그럽게 네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힘없는 암컷의 몸으로 네가 이곳에서 뭘 할 수 있지? 살아남는 것조차 힘들었을 테지. 루프스 아래 있는 덕에 지금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거면서 뭐가 잘났다고 네가 감히 날 비난하지?”
유채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렇게 뻔뻔한 여자가 다 있나 싶었다. 유채는 더 말을 해봤자 통하지 않을 여자 앞에서 화를 낼 재주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 유채의 몸을 돌려 안았다.
“오랜만이군, 울페스 헤르티아.”
루프스였다.
그는 유채의 뒷머리를 꾹 눌러서 얼굴을 돌리지 못하게 하였다. 유채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버둥거렸다.
“루프스시여, 다시 한 번 인사 올립니다. 잠시 산책을 하러 나왔는데 이렇게 여기서 루프스님을 뵐 줄은 몰랐습니다.”
헤르티아는 버둥거리는 유채와 그녀를 안은 채로 저를 향한 경계의 빛을 보이는 루프스를 살폈다. 예전에 로보도 제 부인인 블랑카를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하여 저렇게 안고 있던 적이 많았다. 혼례를 올리기 전에 조급하게 굴던 모습이 딱 지금의 루프스 같았다. 헤르티아는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자 입꼬리를 슬쩍 울려 웃었다.
“그럼 조용히 산책이나 할 것이지, 내 레티티아에게는 무슨 볼일이지?”
“그저 연이 있으니 대화를 해보려고 한 것입니다. 제 오라비의 부인도 마레 위르였으니까요. 그때 기억이 조금 나서 말입니다.”
“마레 위르를 내게 바친 수인이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받아 펠릭스 다우스로 삼으신 루프스께서도 제게 그렇게 말할 처지는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채는 여전히 루프스에게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렸고 루프스는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더욱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헤르티아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애정이 한쪽으로 향해 있는 꼴이었다. 수컷은 열심히 구애하는데 암컷은 필사적으로 거부한다.
“제가 무례를 범했다 느끼셨으면 사과드립니다.”
“됐다. 그만 가지.”
루프스는 유채의 어깨를 감싸 쥐고 허리를 숙인 헤르티아를 스쳐 지나갔다. 헤르티아는 루프스가 지나가자마자 허리를 폈다. 헤르티아는 손에 낀 반지를 돌리며 머리를 굴렸다. 수컷 늑대 놈들은 제 암컷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집착을 보였다. 언제나 루프스의 최대 약점은 그들의 비(妃)라는 말이 있었다. 십삼 년 전 로보도 블랑카의 죽음으로 이성이 나가 최악의 선택을 하여 베니니타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헤르티아는 저를 경계하던 루프스의 싸늘한 청회안과 유채를 내궁, 그것도 제 방에 가둬두고 하루에 한 시간만 외출을 허락한다는 그의 소문을 조합해 보았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만일 루프스가 저 암컷을 마음을 품은 거라면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약점이 될 터였다. 약해 빠졌고, 루프스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 난 암컷. 루프스의 목줄을 틀어잡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레아.”
헤르티아는 제 최측근을 불러내었다. 황금색의 머리카락과 쫑긋 솟은 귀를 가진 귀여운 인상의 여자가 꼬리를 흔들며 헤르티아의 가까이에 섰다.
“적당한 이를 매수해서, 저 암컷과 루프스 사이를 알아와.”
“……쉽지는 않겠지만, 해보겠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심증만으로 날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저뿐만 아니라 저희 일족까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러니 확실한 정보가 필요했다. 헤르티아는 제가 예상한 것이 진실이라면 어쩌면 루프스에게 복수 이상의 것을 선사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 * *
“헤르티아와는 이야기도 하지 마라.”
유채는 루프스의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오자마자 저 이야기를 들었다. 유채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왜요? 나를 팔아먹은 수인이랑 이야기하는 건…….”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마. 왜 그렇게 말에 토를 달아!”
유채는 성마르게 화를 내는 루프스의 말에 어깨를 움츠렸다.
루프스는 궁녀들이 고생을 해서 정리해 놓은 고운 은빛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는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작은 소리로 험한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유채의 어깨를 아플 정도로 움켜쥐었다. 유채가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리자 루프스는 그제야 제가 너무 힘을 준 것을 알고 손의 힘을 조금 풀었다.
“울페스 헤르티아, 타우루스 헥터, 발란테스(Balantes: 양 일족의 수장) 카르멘과는 입도 뻥긋하지 말고 피해라. 특히 타우루스 헥터와는 대면하지도 마라.”
루프스에게는 적이 많았고 그중에서 그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있으며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울페스와 발란테스 정도였다. 타우루스 헥터야 생각 없이 사는 수컷이나, 그는 변태적인 성욕으로 유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소 수인 일족 중 그보다 강한 이가 없다는 것이 불행이었다. 그가 없으면 호전적인 성향의 소 수인 일족으로 인해 또 다른 수인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었다. 루프스는 필요악으로 헥터를 눈감아주고 있었다.
“왜요? 위험해서? 그런 걸로 치자면 당신이 내겐 더 위험하지 않나요? 늑대 밥으로 던져주고 나를 굶겨 죽일 뻔한 남자인데.”
“난 암컷을 강제로 안는 취미는 없다만 타우루스 헥터는 다르지. 그놈은 변태다. 암컷들을 모아놓고 겁간하는 것을 즐기는 놈이지. 그가 그런다고 무어라 할 수인도 없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유채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아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루프스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타우루스 헥터는 워낙 미친놈이라 루프스인 나도 신경도 안 쓰는 놈이다. 그러니까 내가 신경 써주지 못할 때, 네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내가 말한 대로 그 세 수인과는 눈도 마주치지 마라.”
루프스가 유채의 등 뒤로 둘렀던 팔을 풀었다. 헤르티아가 유채와 있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순간 베니니타스에게 당해 처참한 시체로 변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헤르티아가 저에게 발톱을 세우고 싶어서 안달 나 있다는 건 루프스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헤르티아마저 죽였다간 베니니타스에게 충성하던 여우들이 끝까지 저항할 것이 귀찮아서 현실 판단이 빠른 그녀를 살려둔 것이었다. 최소한 헤르티아는 때를 보느라 제게 쉽게 대들지는 못할 것이고 그렇게 벌어놓은 시간 동안 그 암컷을 처리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유채를 건드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네가 뭐가 귀엽다고 내가 이렇게 구는 건지.”
루프스는 유채의 귀에 들리지 않게 낮게 중얼거렸다.
“타우루스 헥터라는 수인이 나한테 관심 보일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내가 당신이 그 정도로 신경 쓸 가치 있나 봐요? 늑대 밥으로 던져줄 수 있는 내가 그 정도 가치인 줄은 몰랐네요.”
유채는 루프스의 말과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병 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우니까.”
그가 유채의 턱을 가볍게 잡아 들어 올렸다. 암컷에 미모에 환장하여 날뛰는 부류는 아니었으나, 그도 외모의 아름다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심통 난 표정만 하고 있지 않아도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게 얻어갈 것이 많을 텐데, 고집스런 유채는 항상 이런 표정이었다.
“수컷은 암컷의 아름다움에 끌리는 족속이거든. 그러니 당분간 밖을 나다니지 말고 내가 부를 때 말곤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필요한 게 있으면 헤나를 시키든지, 아니면 그 토끼 꼬마를 시키든지.”
“나까지 연회에 참석해야 하나요?”
유채는 베노르 콩레수스 전야에 수장들만 모인다는 그 연회에 나가야 한다는 루프스의 말을 전에 들은 적 있었다. 그런 자리에는 죽어도 가기 싫었다. 지난번 별장에서 있었던 일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또 제 자존심을 짓이기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생각을 알 것 같아 가소롭다는 웃음을 흘렸다. 유채가 불쾌해하자, 그는 유채의 턱을 놓고 그녀의 볼을 감쌌다. 그리고 상체를 수그렸다. 유채는 수번의 경험으로 그의 입술이 볼에 닿기 전 고개를 돌렸다.
“내가 요즘 느슨하게 대해줬다고 꽤나 대담해졌네, 레티티아.”
유채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루프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그녀의 턱을 도로 잡고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만들었다.
“장담하건대, 이번 일은 네게 이득밖에 없을 거야. 네가 내 총애를 받고 있다는 걸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거든.”
“애완동물이 사랑받아 봤자…….”
“그 애완동물이 이지가 있고 말도 할 줄 아는 마레 위르라면 얘기가 다르지. 연회에 참석하면, 너는 앞으로 어지간한 수인들이 너에게 먼저 허리를 숙이는 걸 볼 수 있을 거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이렇게까지 너를 생각해 주니까. 비싸게 좀 굴지 마라. 웃어도 보이고 애교도 보이고, 좀 귀엽게 굴어봐.”
유채는 당신이라면 당신을 죽이려고 들고 가둬두고 애교나 부리라고 강요하는 남자가 조금 상냥해졌다고, 아니, 조금 덜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꼬리를 흔들 수 있냐고 묻고 싶은 것을 억지로 억눌렀다.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손등을 꾹 눌렀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괜히 돌아다녀서 남들 눈에 띄지 말고.”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놓고 빌어먹을 일이 많아서 가봐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유채는 루프스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벌레가 문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 * *
“유채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블루벨이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싸고 머리를 흔들었다. 유채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한국에 있을 때도 잘 하지 않는 색조화장을 벌써 몇 번째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연보라색의 옷도 별장에서 입었던 것보다 배로 화려하고, 화려한 만큼 풍성한 옷자락이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고마워. 블루벨.”
연회 기간에는 궁녀들의 복장도 화려해지는 것인지 블루벨의 옷도 짙은 청색에서 밝은 쪽빛에 은실로 수놓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블루벨의 하얀 머리카락과 잘 어울렸다.
“블루벨도 예뻐, 머리카락이랑 옷이 잘 어울린다.”
“유채님한테 그런 칭찬 들으면 부끄러워요.”
블루벨이 몸을 배배 꼬면서 유채의 칭찬에 반응했다. 유채는 블루벨의 도움을 받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장에서의 일 때문에 신발은 굽이 낮았지만 옷 때문에 혼자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블루벨은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유채를 잡아주었다.
“블루벨. 네가 내 옆에 있는 거야?”
“예! 헤나님이 저보고 도와드리래요.”
“그럼 내가 연회 음식을 가져올 필요가 없겠네.”
“어! 음식 가져오려고 하셨어요?”
블루벨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벨은 볼을 발그레 붉혔다.
“정말 감동이에요! 진짜 제게는 유채님밖에 없어요.”
블루벨이 신나 하는 얼굴이 너무 귀여웠다. 유채는 블루벨을 꼭 안아주었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정말로 이곳에서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채는 블루벨이 너무 고마웠다. 돌아가게 된다면 블루벨이 가장 그리울 것 같았다.
블루벨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유채의 목에 매달렸다. 헤실헤실 웃던 블루벨이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 얼른 유채에게서 떨어졌다. 유채는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블루벨이 눈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유채는 뒤를 돌아보았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군.”
루프스가 유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채가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귀찮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찾아서 잡았다.
“수인을 무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아끌었다. 블루벨이 그 사이에 눈치껏 유채의 옷자락을 정리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한껏 꾸민 유채는 역시나 아름다웠다. 유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루프스의 손을 쳐 내었다. 인형 취급당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당신 체면 생각해서 가만히만 앉아 있을 거니까, 걱정은 말아요.”
“그렇게 말하니 그 이상을 보고 싶은데?”
루프스는 손짓으로 헤나를 불렀다. 헤나는 루프스에게 베일을 하나 가져다주었다. 루프스는 그것을 유채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베일이 얼굴을 완전히 덮었다.
“지금처럼 그렇게 불만스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내가 뭐가 되겠나. 그러니까 그걸로 가리고 있어.”
베일은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쓰고 있는 사람은 바깥을 보는 데 무리가 없는 재질이었다. 유채는 베일을 손으로 들추면서 의아한 듯이 물었다.
“이걸 씌워놓으면 수인들이 나를 알아봐요?”
“마레 위르들과는 다르게 시각이 뛰어난 수인들은 윤곽만으로도 대강은 알아볼 거다. 그리고 파렌티아가 있는데,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말이 안 되지. 내가 내 펠릭스 다우스를 아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니까 베일 정도는 쓰고 있어도 좋아. 그리고 내가 적이 좀 많아서, 네 얼굴까지 팔리면 네 목숨만 위험할 거다.”
루프스가 베일의 주름을 정리해 주었다. 유채는 차라리 이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으면 신경을 덜 쓸 수 있을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았다.
“가지.”
블루벨이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유채의 옆을 따랐다.
연회장에는 이미 모든 수인 일족들의 수장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땅을 가진 일족들이 가장 상석에 앉았고 땅을 가지지 못한 일족들이 그 다음이었다. 연회장 중앙에서는 무희들이 춤을 추면서 흥을 돋우고 있었다.
루프스가 들어서자 앉아 있던 수인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과 인사를 나눈 루프스가 자리에 앉자 모두 자리에 앉았다.
유채는 블루벨의 도움을 받아서 루프스의 아래쪽에 앉았다. 유채는 곁눈질로 루프스를 보았다. 특유의 오만함은 어디 가지 않는 것인지, 그는 건방지게 보일 정도로 나른한 태도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스스로 적이 많다고 말한 주제에 사서 반감을 사는 성격인가 싶었다. 유채는 제가 알게 뭔가 싶어서 나와 있는 음식들이나 보았다. 유채를 배려한 모양인지, 향신료를 최대한 적게 사용한 음식이었다.
“베노르 콩레수스를 위해서 먼 곳에서 오느라 수고했다.”
유채는 제 앞에 놓인 음식들이나 살폈다. 뭐라도 먹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제가 움직이면 안 그래도 연회장에서 유일한 인간이라 안 그레도 집중된 관심이 더 많아질까 부담스러웠다.
“먼 길 오느라 배가 고플 것이니, 먼저 식사부터 들지.”
유채는 눈치를 보다가 모두가 음식에 손을 대자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역시나 예상대로 제게 쏠리는 시선에 동물원의 동물이 된 기분이 들었다.
“유채님. 저분이 양 수인 일족의 수장이신 발란테스 카르멘님이세요.”
블루벨은 유채에게 수인들의 수장을 소개해 주었다. 힘으로 결정된다는 말처럼 수장들의 대부분이 귀라든지 뿔이라든지 아니면 꼬리 정도를 제외하면 인간에 가까웠다. 새삼스레 꼬리도 귀도 없는 루프스가 이질적으로 보였다.
유채는 그곳에서 수인들의 세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람쥐 일족은 늑대 일족에게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아부를 떨어댔고 뱀 일족은 독수리 일족과 친한 것인지 뱀 일족의 수장은 독수리 일족의 수장과 이야기를 길게 주고받았다. 늑대 다음으로 강하다는 여우 일족의 수장인 헤르티아와 소 일족의 타우루스 헥터는 다른 수인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헤르티아와 비슷한 수준의 강함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에쿠우스(Equus: 말 수인 일족의 수장) 단테는 굉장히 점잖은 성격인지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선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카니스 바실리사는 연회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양, 보좌로 따라온 에릭과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궁녀들이 술을 나르기 시작했다. 유채는 술을 보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술만 아니었으면 제가 여기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채의 눈에는 술이 악마의 음료로 보였다. 유채가 궁녀들이 나르는 술을 보면서 속으로 한탄을 하고 있을 무렵 루프스가 그녀의 눈앞에 술잔을 들이밀었다. 유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루프스가 몸을 기울여 그보다 아래에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마실 생각 있느냐?”
“아니요.”
언니 앞에서 술을 마실 생각을 했던 것은 실수를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프스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실수를 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괜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유채는 고개를 흔들었다.
“왜? 술을 좋아하지 않나? 나도 쓴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단맛이 나는 과실주를 마신다. 그러니까, 이 술은 마시기 수월할 것이다.”
“나이가 안 돼서 못 마셔요.”
타우루스 헥터가 독주를 마시다가 베일을 쓰고 있는 마레 위르 암컷에게 술을 권하는 루프스를 보았다. 그 예쁘장한 얼굴을 보나 싶었는데, 저 빌어먹을 늑대 놈이 베일을 씌워놓아 기분을 잡치게 만들었다. 타우루스 헥터가 술잔을 내려놓고 큰 소리로 외쳤다.
“루프스님. 스티폴로르 전역에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루프스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락부락해서는 군주라기보다는 산적이라 하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외모를 가진 수컷은 하나였다. 루프스는 타우루스 헥터의 말을 받았다.
“내가 알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가?”
“아닙니다. 그저 수컷으로서의 흥밋거리지요. 옆에 있는 펠릭스 다우스에 대한 소문입니다.”
헤르티아는 저놈이 또 시작했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장담컨대, 헥터의 머릿속에 든 것은 여자와 밥 말고 없을 것이다. 타 일족의 수인을 건드려도 저를 가만두는 이유를 제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얼간이였다. 루프스를 비롯한 다른 수인들이 이를 갈지언정 그를 내버려 두는 것은 간신히 내전을 끝내고 이륙한 평화가 깨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호전적이고 실력이 고만고만한 자들이 많은 소 일족이 지도자를 잃고 혼란에 빠지면 포트리스의 마레 위르들이 혼란스런 미노르 호무스를 통해 세를 불릴 가능성이 있었다. 제가 강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그래서 날뛰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임에도 헥터는 멍청해서 그것을 몰랐다.
그래도 옛날에는 최소한 군소 일족만 건드리면서 제 성욕을 채우던 것이 몇 년 전부터는 정말 미쳤는지 땅이 있는 수인들까지 건드리고 있었다. 성격 좋기로 유명한 올리에도 이제 못 참겠는지 계기 하나만 생기면 헥터 놈을 건드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프스님이 옆에 둔 꽃이 이 스티폴로르 제일이라는 말이 돌더라 이 말입니다.”
유채는 옆으로 쳐진 소의 귀에 뿔을 가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듣기 지저분한 소리를 내뱉는 것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블루벨이 중얼거렸다.
“타우루스 헥터님이세요.”
유채는 전에 루프스가 경고했던 그 수인임을 알아채고 그가 왜 그런 말을 했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루프스가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연회 분위기도 좋은데, 그 얼굴 한번 보이는 것 어떻겠습니까? 지난번 생일 연회에 불참한 일족들의 수장도 있는데 말입니다. 듣자하니 그쪽 방면으로 죽여준다는데 얼굴이라도 보고 싶군요.”
유채는 저를 바라보는 헥터의 끈적한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루프스가 베일을 쓰라 한 것이 고마웠다.
평소 헥터를 싫어하는 바실리사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댁의 궁에 가면 미인이란 미인은 다 모여 있다는데, 그 미희들이나 볼 것이지 여기까지 와서 찾습니까? 머릿속에 그것밖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미안하네, 바실리사. 연회에 자네 같은 암컷들만 보니 눈이 피로해서 말이야.”
“자네, 말이 심하군.”
올리에가 이때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미노르 호무스에 용병으로 보낸 제 일족의 암컷이나 수컷이 이따금 죽어서 돌아오곤 했는데 그들에겐 겁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헥터에게 따졌지만 모르쇠로 일관하던 헥터를 벼르고 있던 참이라 그의 어조가 매우 사나웠다.
“그대의 강함이 언제까지 갈 것 같나? 그리 오만방자한 행동은 이제 나이도 있으니 자제할 때가 되지 않았나?”
“노친네는 이제 수장의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내일하시는 분이 그 자리에 있는 게 보기 좋지 않습니다. 흉합니다, 흉해.”
“자네! 지금 어르신께 무슨 망발인가!”
뱀 수인 일족의 수장인 콜루베르(Coluber) 올리비에가 크게 외쳤다. 타우루스는 올리비에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루프스를 향해서 물었다.
“어디 한번, 그 암컷의 베일을 벗겨보심이 어떻습니까?”
“지금 내게 명을 내리는 건가? 언제부터 그대가 나에게 명을 내리게 됐는가?”
기회만 있고 상황만 좋았으면 진작 없애 버렸을 놈이었다. 같잖은 실력으로 제가 강한 줄 알고 날뛰는 미친놈이었다. 제가 눈감아주는 것을 저를 무서워한다고 알고 있는 미친놈이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다. 루프스는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당장에라도 저 목을 따고 싶었지만 애써 화를 억눌렀다. 괜한 분란은 귀찮은 일만 불러왔다. “마레 위르가 꽃은 아니지 않나? 이지를 가진 마레 위르를 그리 취급해서야 되겠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울 텐데 말이야.”
듣고만 있던 헤르티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가 정말 저 암컷을 아껴서 하는 말인가 싶었다. 양 수인의 일족의 수장인 발란테스 카르멘이 싸늘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적인 마레 위르는 끔찍이 아끼시면서 수인들의 목숨은 벌레 목숨으로 보시나 봅니다. 제 아들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산 채로 생식기를 밟고 머리를 으깨서 죽여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카르멘은 한 번도 아들의 죽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가랑이 사이에서 피가 쏟아지고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짓뭉개져 있던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었다. 제 아들이 뭘 잘못했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란 게 제 기분을 언짢게 했다는 거였다. 카르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루프스는 위로의 의미로 엄청난 보상금을 주었지만 그게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제 아들은 파리 목숨보다도 하찮게 여겼으면서 마레 위르를 총애? 카르멘은 이가 갈렸다.
“이러다가 그 징글징글한 마레 위르들이 루프스의 자비를 구걸하며 토스 호무스로 오겠습니다.”
“발란테스 카르멘, 지나친 말은 그쯤 하시지요. 그대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더 논하지 않기로 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미 그대의 일족에게 보상이 충분히 가지 않았습니까?”
에쿠우스 단테가 끼어들었다. 카르멘이 단테를 노려보았다.
“거 에쿠우스는 그리도 이성적이어서 좋겠소? 그대도 동생을 내 아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잃은 것으로 아는데? 그깟 보상으로 마음이 풀어지더이까?”
단테는 뭐라 더 말을 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무덤까지 가지고 가기로 한 비밀을 여기에서 말할 수는 없었다.
루프스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다. 이런 연회가 있으면 일부러 약간의 분란을 일으켜 그들의 반응을 살피곤 했는데 오늘은 타우르스 헥터가 먼저 입을 놀려주어 그가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가 유채를 입에 담은 것은 용서할 생각이 없는 루프스는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수장들 간 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유심히 살폈다.
단테는 힐끔 헤르티아를 바라보았다. 헤르티아를 위해서 이 정도 선에서 끝을 내어야 했다. 루프스가 가장 적대하는 것은 헤르티아였다. 헤르티아가 저를 치려고 하려는 것을 짐작하는 그는 항상 헤르티아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어지면 언제나 다른 수인들을 움직여 판을 뒤집었다. 그나마 헤르티아에게 가담한 세력이 들통 나지 않아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았다. 여기서 더 감정싸움이 나면 헤르티아의 세력이 드러날 위험이 있었다. 단테는 카르멘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천륜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카르멘, 그만하게. 좋은 날에 너무 날이 서 있으면 주름에 안 좋아.”
히르쿠스(Hircus: 염소 일족의 수장) 라피엘이 카르멘을 진정시켰다. 책을 좋아하고 지식을 쌓는 것을 좋아하는 일족이라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그는 저 빌어먹을 헥터 놈 때문에 소란스러워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바실리사가 헥터와 설전을 벌였고 헥터를 따르는 군소 일족은 그의 행동을 두둔하고 루프스에게 잘 보이려는 일족들은 그들을 물어뜯었다. 개판이 따로 없었다. 히르쿠스 라피엘이 힐끔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소란과는 관계없는 수인인 양 혼자서 태평했다.
“들어가라.”
루프스가 유채에게 속삭였다.
“이 소란 통에요?”
“어차피 네가 내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이 소란의 원인이 된 베일을 계속 쓰고 있는 것만으로 증명됐거든. 그러니 들어가도 좋아.”
유채는 잘됐다 싶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루벨도 이 소란에 귀가 아픈지 귀를 붙잡아 소리를 막고 있었다. 블루벨은 얼른 유채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 그녀의 옆에 붙었다.
“거기! 잠깐.”
헥터가 급작스럽게 고개를 들고 삿대질을 했다. 모두의 시선이 유채를 향했다.
“이 소란의 주인공이 자리를 뜨면 쓰나. 이렇게 된 거 그 비싼 얼굴이나 보여주고 가지?”
유채는 본능적으로 저 남자에게 얼굴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프스도 이제 헥터를 더 이상 참아주기 힘들어 입을 열려 할 때 유채가 먼저 나섰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루프스님의 명만을 따릅니다.”
빌어먹을 사실이지만,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걸 인정하는 짓을 해야 했다. 유채는 제게 힘이 있다면 이런 말을 하게 만든 헥터란 자의 턱을 날려주고 싶었다.
“타우루스님은 루프스님이 아니시니, 전 그 명에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유채의 대꾸에 가만히 있던 헤르티아가 박장대소를 했다.
“타우루스 헥터. 그대가 루프스인 줄 아는가? 소가 늑대인 줄 알다니 이거 정말 걸작이군.”
“분란을 일으킨 점 사과드립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유채는 뒤도 안돌아보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비웃음거리가 된 헥터는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박살냈다. 마레 위르 암컷 주제에 제게 저리 굴어? 그러나 한편으로 저런 유채의 모습이 헥터의 정복욕을 부추겼다. 헥터는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며 혀로 입술을 쓸었다.
유채는 침대 기둥 옆에 기대어 앉았다. 연회장에 있었던 건 잠깐이었는데도 그새 진이 빠졌다. 마치 씨름 선수처럼 생긴 불쾌한 인상의 타우르스 헥터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 있는데 궁녀들이 루프스를 부축하고 나타났다. 헤나가 부르자 유채는 엉겁결에 일어나 루프스의 몸을 받았다. 술 냄새가 나고 흐느적거리는 몸짓이 술에 거하게 취한 모양이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쓰러지지 않게 받쳤다. 아무리 마른 편이라고는 하지만 키도 크고 온몸이 근육질이라 상당히 무거웠다. 유채는 헤나를 도와서 루프스를 침대에 눕혔다.
“술에 조금 취하셨습니다.”
“이건 조금이 아닌데요?”
“……제가 다시 돌아오겠으니 그때까지만 잠시 루프스님을 부탁드립니다.”
헤나는 그 말만 남기고 유채가 잡을 틈도 없이 바람같이 사라졌다. 함께 들어왔던 궁녀들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말술인 아빠 덕에 유채는 술 취한 사람을 다루는 것에 능했으나, 루프스를 아빠를 대하던 것처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채는 루프스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앉았다. 그는 답답한지 단추를 뜯어가면서 옷을 풀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이 드러나자 유채는 고개를 돌렸다.
“으악!”
유채는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루프스가 유채의 허리를 감아서 끌어당긴 것이다. 눈을 감고 있지만 묘한 미소를 지은 루프스는 유채의 무릎을 베고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아까 그 말은 참 듣기 좋더군.”
술에 취한 것치고는 발음이 정확했다. 유채는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술 취한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유채는 귀찮은 얼굴로 제 배에 얼굴을 묻은 루프스를 떼어내려고 하였다.
“어차피,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둘러댄 말이었을 거지만, 내가 상이나 줄까?”
루프스가 유채의 배에서 얼굴을 떼어내더니, 손끝으로 그녀의 턱선을 쓸었다.
“아무도 모르는 내 비밀을 말해주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 될 거야.”
영광은 무슨 영광?
유채는 빨리 이 남자가 곯아떨어지기를 바랐다. 술주정뱅이는 잠들었을 때가 처리하기 제일 편했다.
“나는 말이야. 이 나는, 그러니까 나 라이칸은 거기 모인 모든 수장이 무서워.”
유채는 의외의 말에 멈칫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서 최강이라 말하고, 항상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내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었다.
“내 목숨을 노리는 헤르티아도 무섭고, 그녀를 돕는 단테도 무섭고, 헥터도 무섭고.”
“뭐가 무서워요? 당신이 최강 아닌가?”
유채가 빈정거렸다.
“난 내 아버지의 목이 떨어지는 것도 봤고 베니니타스 스승님의 목이 떨어지는 것도 봤어. 강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허상인지 알아. 그래서 나는 내게 발톱을 세우려는 모든 것들이 무서워.”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쓸었다.
“그래서 나는 펠릭스 다우스를 들였어. 말 못 하는 약한 동물들은 밥 주는 자에게 복종하거든. 그놈들이 있으면 나는 두려움을 억누를 수 있어.”
유채는 루프스의 가슴을 덮은 상처들을 보았다. 블루벨이 말하기를 그는 열셋에 양친을 모두 잃었다고 했다. 한국이었다면 고작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부모의 보호 없이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버텼을지 유채는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좀 신기한 너를 들였을 때도 그걸 바랐어. 네가 내게 복종하길 바랐어. 검은 뱀이 항상 내 발목을 휘감고 있어. 내 두려움이 커지면 그 뱀 같은 것이 내 목을 움켜쥐려고 해.”
깜깜한 무저갱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그게 무서워서 필사적으로 저에게 복종하는 자들만 보기를 원했다.
“내게 복종하지 않는 것들을 보면 난 다시 열셋의 그 얼간이가 된 것 같아. 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 동생을 버리고 도망이나 가는 얼간이가 되기 싫어.”
한 번도 에리카의 마지막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근데 너는 그때의 나보다 약한 주제에 바락바락 대들고, 영원히 꺾일 것 같지도 않아. 그 고고한 눈동자로 너보다 강한 자들로부터 모두를 지키려 들어. 그게 정말 거슬려. 난 하지 못했던 걸 하려는 네가 정말 거슬려.”
유채를 볼 때마다 그때의 자신을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더 보기 싫었다.
“그래서 죽여 버릴까 싶더라도 그건 또 싫단 말이야.”
루프스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넌 정말 이상해.”
생긴 것도, 말하는 것도, 사고하는 것도. 제게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까지도 겁도 없이 대드는 것이 눈에 거슬리는 것만큼 눈에 밟히기도 했다. 암컷이 우는 건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특히 레티티아가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조금만 부드럽게 굴어봐. 웃어도 보고.”
그 말을 끝으로 루프스의 눈이 감겼다. 유채는 지난번에 헤르티아가 정원에서 제게 지껄였던 말을 생각해 내고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끔찍하게 싫어.”
상냥하게 굴라고? 당신은 그럼 그 헤르티아와 헥터에게 상냥하게 굴어? 당신이 무섭다고 말한 수인들에게? 유채는 남들이 편하게 지내니 그럼 된 거 아니냐고 말할 때마다 그 입을 쳐 버리고 싶었다. 편하다고? 한 시도 편한 적 없었다. 저 종잡을 수 없는 남자가 언제 돌변해서 저를 다시 붉은 방에 집어넣을지, 늑대 밥으로 던져줄 건지 몰라서 두려웠다.
고분고분하게 굴라고? 유채는 혹시라도 제가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도 걸려서 이곳에 안주할까 봐 두려웠다. 유채라는 이름도 잊어버리고 레티티아라는 이름으로 사는 것을 인정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 아빠, 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더 대들었다. 나는 한유채임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이 세계에 떨어져 재수 없게 이 꼴이 되었지만, 자상한 아버지와 여린 어머니, 소중한 언니가 있는 한유채라는 것을 끊임없이 저 자신에게 되새기고 있었다.
【‘루프스 아래 있는 덕에 지금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거면서 뭐가 잘났다고 네가 감히 날 비난하지?’】
유채는 헤르티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길 잃은 사람을 발견하면 길을 찾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바른 것이다. 길을 잃었으니 주운 사람이 임자라고 하며 좋은 옷을 입혀주고 먹을 것을 준다고 갇혀서 애완동물 취급을 받는 상황에 처했는데 좋다고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유채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집에 가고 싶어…….”
* * *
루프스는 숙취로 더부룩한 속에 그리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베노르 콩레수스라는 행사를 위해서 여러 수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루프스는 그 준비 과정을 지켜보았다. 유채는 어제 썼던 베일을 쓰고 프레드릭과 함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제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유채에게 뭐라 중얼거린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젯밤 기억하는 것은 헤나가 저를 깨웠을 때, 제가 유채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었다는 것과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침대 기둥에 기대어서 자고 있는 유채였다.
뭐가 그리도 서러운 것인지 잘 대해줘도 울었다. 그 눈물 때문이었는지 루프스는 유채를 침대에 편하게 눕혀주었었다.
“루프스님, 베노르 콩레수스에 참여하는 수인 명단입니다.”
늑대 수인이 그에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베노르 콩레수스는 수장들을 위한 대회이나, 빠른 진행과 효율성을 위해서 사냥감을 몰 수인들도 참여했다. 루프스도 케릭스를 포함해서 다섯을 골라놨다.
“젤다? 난 이 암컷을 넣은 기억이 없는데? 아리아는 어디 가고 젤다의 이름이 여기에 있지?”
“아리아님이 몸이 좋지 않아 그 다음으로 강한 암컷 수인인 젤다님이 대신하기로 하셨습니다.”
“껄끄러운 것이 들어오네.”
눈치는 있어 적당하게 들러붙는 암컷이었지만, 그렇다고 거슬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리아가 참여하지 못한다면 젤다를 제외하곤 대체할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루프스는 두루마리를 넘기고 블루벨과 프레드릭 사이에 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유채에게 다가갔다.
유채는 발자국 소리를 듣자마자 입을 다물고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몸을 돌렸다. 루프스가 유채가 쓰고 있는 베일을 걷었다.
“내기 기억하지?”
“기억해요.”
“내 펠릭스 다우스라면 내 승리를 응원해 주는 게 어때? 나도 이번에는 나름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 지면 꽤나 망신이거든.”
“내 소원을 위해서 중립을 지킬 생각이에요. 이 정도면 적당한 타협점 아닌가요?”
“뭐, 너그러이 인정해 주지.”
루프스는 다시 꼼꼼히 베일을 씌워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정리해 주었다.
“혹여 걱정할까 봐 말을 해주자면, 난 전에 걸었던 소원을 그대로 요구할 것이니 걱정마라.”
“알았어요.”
유채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뭐라 한들 내기에 영향이 가는 건 아니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자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안 하는 것이 이상했다. 유채는 조금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 더 할 말 있어요?”
“아니다.”
루프스는 싱겁게 대답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중대한 실수를 한 기분이었다. 루프스는 찝찝한 기분을 뒤로 남기고 다른 수장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갔다. 베노르 콩레수스는 토스 호무스에 있는 레판테 숲에서 벌어졌다. 레판테 숲은 야생 짐승도 많고 커다란 마물도 많았기에 베노르 콩레수스에 적당한 곳이었다.
베노르 콩레수스의 룰은 간단했다. 주어진 세 시간 안에 사냥감을 생포해 오면 끝이다. 그중 가장 큰 사냥감을 잡아온 이가 승자가 된다.
유채는 멀리 서 있는 수인들을 보았다.
“수장들만 참여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요. 잡는 건 수장님들만 할 수 있고 나머지 분들은 몰이꾼이에요. 사냥감을 산 채로 잡아와야 하기 때문에 몰이꾼들이 필요하거든요.”
블루벨이 케릭스가 주고 간 간식을 오물거리면서 대답했다. 유채는 블루벨이 귀여워 말캉한 볼을 쭉 늘였다. 블루벨은 눈을 찡긋거리면서도 그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늑대 수인들은 암컷들이 훨씬 빨라서 몰이꾼으로 암컷을 더 우대한대요. 뭐, 저희 토끼들은 수컷이나 암컷이나 비슷해서 인키디움에서 가장 민첩한 분이 나오셨다고 들었어요.”
블루벨이 귀여운 건 프레드릭도 마찬가지인지 그가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블루벨은 그의 손은 귀찮아 했다. 블루벨은 프레드릭이 헤집어놓은 머리를 작은 손을 바쁘게 움직여서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요번에 케릭스님이랑 아리아님이랑 헤나님이랑 가신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두 분 이름은 저도 가물가물해서 모르겠어요. 아리아님은 워낙 유능한 분이시라 잘하실 거예요.”
유채는 전에 바실리사에게서 아리아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루프스는 제도 귀찮아하고 사냥에도 관심이 없어서 아리아라는 수인을 바실리사에게 빌려주어 그녀를 우승시키고 대회를 빨리 끝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빵!
“우왓!”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블루벨은 비명을 지르며 얼른 귀를 잡았다. 수인들이 일제히 동물형으로 변해서 달려 나갔다.
“우앙. 이거 내가 제일 아끼는 건데.”
블루벨이 울상을 지었다. 유채는 수인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다가 블루벨이 울먹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폭죽 소리에 놀란 블루벨이 움찔하느라 간식을 떨어뜨려 옷이며 바닥이며 온통 엉망이었다. 낙심한 블루벨이 귀가 양옆으로 축 내려왔다.
“블루벨. 상자 안에 하나 더 들었을지도 모르잖아.”
“아니에요. 상자에 이것밖에 없었어요, 유채님.”
블루벨은 정말 속상한 것인지 귀를 끌어당겨서 눈을 가렸다. 프레드릭도 당황했는지 안절부절못하자 유채가 블루벨의 옆구리를 살짝 간지럼 태웠다. 블루벨이 흐갸갹 소리를 내면서 볼을 부풀렸다.
“유채님! 저 속상해요.”
“알아.”
유채가 말캉한 블루벨의 볼을 늘였다. 블루벨이 심통 난 얼굴을 하자 유채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나중에 케릭스에게 하나 더 사달라고 해. 이거 하나에 너무 우울해하지 말고. 정 그러면 내가 사줄까?”
“안 그래도 케릭스님께 만날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손수건 드리려고 만드는 중인데…… 다시 사달라는 건 너무 염치없을 것 같아요.”
“그래? 아무튼 얼른 가서 손 씻고 와. 손 더러워졌다.”
블루벨은 자신의 옷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깡충깡충 뛰어갔다. 프레드릭이 유채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저 토끼 아가씨를 좋아하나 봅니다.”
“예. 블루벨이 없었으면 전 진작 미쳐 버렸을지도 몰라요,”
유채가 중얼거렸다. 프레드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밝고 생동감 넘치는 소녀는 주위를 밝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블루벨은 프레드릭을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는 것인지 약간 경계하는 눈초리를 종종 보내기도 했었지만 본성은 순수한지라 먹을 것을 몇 번 쥐어주니 금세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블루벨은 프레드릭의 일을 도와 수인들의 고어를 해석하는 일을 해주기도 했다.
“일은 잘돼가세요?”
“진척은 있습니다. 과거의 기록을 보니 마법적인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더군요. 원인에 대해서도 적혀 있기는 한데…… 이게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가 없는지라 조금 더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뭔데요?”
“대륙에 구전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신의 선택을 받은 검은 머리의 소녀가 얼어붙은 세상에 나비를 불러온다는 내용인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아르젠의 초대 여제인 은가연으로 추측됩니다.”
유채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제가 책에서 읽었나싶어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다 문득 프레드릭의 복장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이곳은 지구에서 많이 쳐주어보았자, 중세 초반기와 가까웠다. 구전을 기록하던 때가 나름 그런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진 근대나 되어서였다.
“그 이야기에서 하얀 신전에 대한 부분이 있는데, 그 햐얀 신전에 신의 축복이자 저주라고 표현되는, 소망의 구라 불리는 리와인더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리와인더요?”
“라테스페리온, 페르타, 아페텐티아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고도 하지요. 소망을 들어주는 구슬인데, 그 구슬이 순수하지 못한 소원과 만나게 되어서 세상이 얼어붙게 되었고 검은 머리의 여인이 더러워진 붉은 구슬을 파괴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난 힘의 조각들을 봉인했다고 합니다.”
“잠시만요, 그거 이니투스의 루비 조각 이야기…….”
“예, 맞습니다. 이니투스가 에클레시아에 두었다고 전해지는, 은가연에게 선물받아 가지고 왔다는 붉은 루비 조각과 연관성이 보입니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에도 그런 이야기가 오갔고요.”
유채는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만약 그 파편에 신의 힘이 깃들어 있고 구전처럼 소원을 들어주는 기능이 정말로 있다면, 그 파편을 이용하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은가연이 차원을 간섭하는 것은 신의 권한이라고 하였다. 결국 신의 힘을 이용해야만 제가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 파편에 남아 있는 악기(惡器)가 수인의 동물화에 영향을 미쳤고 그것을 해결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지금 그 조각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
유채가 의아한 표정으로 프레드릭을 돌아보았다.
“유채 양은 하나에 집착해서 다른 걸 놓치는 것 같습니다. 고서 말고 역사서를 읽어보았으면 알겠지만, 이니투스 사후 약 이 백년에서 삼 백년 사이에 수인들은 각각의 일족으로 분열했습니다. 그때, 붉은 루비 조각이 사라지면서 에클레시아가 무너졌죠. 그 뒤로 그 조각은 나타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유채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겨우 희망이 생겼다 싶었는데 그것이 사라진 것 같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악기(惡器)때문에 수인들의 동물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어쩌면 전설 속의 붉은 루비 조각이 어딘가에 있는 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저도 확실해지면 루프스에게 알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요?”
“어쩌면 유채 양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신의 힘이 있다면 유채 양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프레드릭은 베일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유채의 음울한 얼굴을 보았다. 열아홉이라고 했다.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스물일 것이다. 아직 어리다고 말해도 되는 나이였다.
“돌아가고 싶습니까?”
“있잖아요. 프레드릭 씨. 전 매일 아침마다 이런 생각을 해요.”
유채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눈을 뜨면 내 방의 밋밋한 파스텔톤 분홍색 벽지가 보이고, 방문을 열면 약국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아빠가 아침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있기를 항상 바라요.”
어머니는 유하의 간병으로 병원에 있었기에, 유채의 아침을 챙겨주는 것은 아버지였다.
“그럼 아빠의 허리를 껴안고 펑펑 울면서 악몽을 꿨다고 말하고 아빠의 맛없는 된장국을 먹으면서 약국 알바비 가지고 실랑이할 수 있기를 바라요.”
수능이 끝나면 아빠의 약국에서 일을 할 테니 용돈을 달라고 졸랐던 유채였다. 유채는 그런 평범한 일상을 보냈었다. 그 일상이 지루하기도 했지만 이만큼 그리워질지도 몰랐다.
“그런데 눈을 뜨면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는 걸 깨닫고 내가 열 수 없는 묵직한 걸쇠가 걸린 방문이 보여요. 그리고 내 목에는 내가 저 끔찍한 인간의 소유물이라는 증거인 파렌티아가 걸려 있죠.”
“…….”
“돌아가고 싶어요. 내 영혼을 악마에게 주어도 좋으니까,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바스락.
유채와 프레드릭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블루벨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서 있었다. 유채는 블루벨이 자신의 말에 속이 상했을까 걱정이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루벨, 그러니까.”
“전요. 유채님.”
축 처진 귀를 한 블루벨이 입을 열었다.
“유채님이 너무 좋아요. 착하시고 재미있고, 그래서 전 유채님이 펠릭스 다우스에서 벗어나면 스티폴로르의 예쁜 곳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블루벨이 마실 거리를 담은 쟁반을 옆에 내려놓았다. 블루벨의 작은 손이 유채의 베일 아래로 들어와서 볼을 쓸었다.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손이 유채의 볼에 닿았다.
“근데, 전 유채님이 행복하기를 더 바라요. 유채님이 편하게 웃으시고 주무셨으면 좋겠어요.”
블루벨의 순수한 진심이었다. 유채가 제가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면 섭섭할 테지만 유채도 저처럼 가족이 있었고 그 가족과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블루벨은 유채가 좋은 마레 위르이기 때문에 그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유채는 블루벨에게 처음으로 생긴 마레 위르 친구였다.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저 떠나실 때, 인사만 해주세요. 그리고 그곳에서 저를 가끔씩 생각해 주시면 돼요. 전 그거면 돼요.”
유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유채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저렇게 생각해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고 미안했다. 블루벨의 작은 손이 유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블루벨의 쳐진 귀가 다시 쫑긋 올라갔다.
“유채님은 정말 은근 눈물이 많으세요. 히힛. 저보다도 더 울보이신 것 같아요.”
블루벨은 유채와 프레드릭에게 색이 고운 음료를 건네었다. 유채의 것에서는 체리향이 났다.
“전 단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러니까 유채님도 단 걸 드시고 기분이 좋아지셨으면 좋겠어요. 저기에 단 과자랑 사탕이 많거든요. 제가 가져올게요. 그동안 그거 드시면서 우울한 것 풀어내세요.”
블루벨은 다시 깡충깡충 뛰어갔다. 유채는 블루벨이 준 음료를 홀짝였다. 혀끝에 체리의 단맛이 났다.
“마냥 어리게만 봤는데 의외로 꽤나 어른스럽네요.”
“그러게요. 저보다 더 어른스러운 것 같아요. 동생들이 많아서 그런가?”
유채는 블루벨의 가슴 따뜻한 위로에 슬프면서 기뻤다.
“혹시 기억을 읽는 마법도 있나요?”
“정신계 마법은 후유증이 상당합니다. 특히 기억을 읽는 종류의 마법은 피시전자의 정신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마법사들마다 자신 없는 마법의 분야가 있었는데, 프레드릭의 경우는 정신계 마법이었다. 열 번을 하면 한 번을 성공할 정도로 재주가 없었다.
“그래요? 그럼 안 되겠네요.”
“기억을 읽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제 기억이요. 계속 되짚어보는데, 기억이 너무 많이 비어 있어요. 이곳에 오기 전의 기억은 둘째 치고 제일 친했던 친구, 좋아했던 학교 선생님, 첫사랑 이런 것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검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까맣기만 해요. 그래서 혹시 이 기억들이 제가 여기 온 계기와 관련 있을까 싶어서요.”
“기억을 읽는 것 힘들지만, 비슷한 것은 할 수 있습니다.”
프레드릭이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어지간해서는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었다.
“에어리얼을 두 개 이상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고 한 것 기억하시죠?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 그걸 왜 말 안 했어요?”
“알려봤자 좋은 건 아닙니다. 혹시 그곳에서 입던 옷이나 물건이 있습니까? 제가 그것들의 시간을 읽을 수 있으면 혹시 유채 양이 잃어버린…….”
으르릉. 짐승의 소리에 프레드릭과 유채가 고개를 돌렸다. 갈색의 늑대가 유채와 프레드릭의 앞으로 걸어왔다. 당연하게 프레드릭은 유채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녀를 자신의 뒤로 감추었다.
[레티티아님.]
유채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동물형으로 변한 수인이었다. 수인들이 동물형으로 변한 뒤에는 이런 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유채가 느끼기에는 마친 텔레파시와 같았다.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울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면 소용없었고 귓속말을 하듯이 특정인에게만 자신의 말이 들리게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프레드릭 씨, 수인이에요.”
“예?”
프레드릭은 늑대를 자세히 보았다. 수인과 동물은 털의 형태가 약간 달랐다. 앞에 있는 늑대는 동물 늑대와 털의 형태가 분명하게 달랐다. 수인이 맞았다. 그는 긴장을 풀었다. 갈색 늑대는 유채에게만 말을 전해야 하는 것인지 그녀에게만 말을 걸었다.
[루프스님이 레티티아님을 부르십니다.]
“나를 왜?”
[저도 모셔오라는 명만 받았습니다.]
유채는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가 묘하게 익숙한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아리아란 여자인 듯싶었다.
“사냥하느라 바쁘지 않나?”
[사냥은 끝내셨습니다. 그러니 저를 이곳에 보내셨겠지요.]
유채는 또 루프스가 제 앞에서 거만을 떨 작정으로 자신을 부르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긴 그 인간은 언제나 제 승리를 당당하게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나있는 인간이었다. 유채는 어차피 져 버린 내기니 그 남자의 거만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거절하려고 입을 달싹이는데 늑대는 유채가 가지 않겠다고 말할 것을 예상한 것인지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가지 않으시면 제가 루프스님께 어떤 꼴을 당할지 모릅니다. 제발 같이 가주시면 안 될까요?]
눈을 아래로 내리깐 늑대의 표정이 애처로워 보였다. 루프스는 아랫사람을 내키는 대로 갈구는 타입이었다. 제가 가지 않으면 저 늑대가 어떤 대우를 받게 될지 뻔했다. 결국 유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프레드릭이 유채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갑니까? 유채 양.”
“루프스가 절 부른대요. 안 가면 안 될 것 같아요.”
“저 숲은 꽤 위험합니다. 안 가면 안 됩니까?”
[걱정 마십시오. 안전한 길로만 갈 것입니다.]
프레드릭은 머릿속에 갑자기 소리가 울리자 깜짝 놀랐다.
“잠깐만 다녀올게요. 블루벨에게 말을 전해줘요.”
유채는 갈색 늑대의 위에 올라타며 프레드릭에게 말했다.
* * *
갈색 늑대는 유채를 한적한 숲속의 빈 공간에 데려다놓았다. 생각보다 깊숙이 들어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모시고 오겠습니다.]
유채는 멀어지는 늑대를 바라보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숲이지만 마물과 무서운 동물들이 많아서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도망칠까?’
감시하는 수인도 없고, 루프스도 근처에 없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먹을 것도, 지도도 없었지만,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생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도망쳐 봤자 다시 루프스에게 걸릴 것이고 그러면 지금처럼 잠깐씩 밖으로 나오는 것도 하지 못한 채 꼼짝없이 갇히게 될 터였다.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니다.
바스락. 마른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유채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머리에 쓰고 있던 베일이 뜯겨나갔다. 그리고 두툼한 손이 유채의 턱을 잡아챘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 예뻐졌는데.”
타우루스 헥터였다.
헥터가 유채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유채는 그 손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으나 헥터가 유채의 팔을 움켜잡았다.
“아악!”
유채는 팔목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에 소리를 질렀다. 소 수인은 모든 수인을 통틀어 힘이 가장 강했다.
“암컷은 수컷의 길들임을 받으면 예뻐지지. 루프스가 밤마다 잘해줬나 봐? 아니, 네가 잘해줬나? 허리 놀림이 예술이라던데. 온 스티폴로르에 소문이 다 퍼졌어. 루프스가 밤 기술 좋은 요물을 하나 침실에 들였다고.”
헥터가 낄낄거렸다.
“당신 뭐야? 당신…….”
“루프스가 올 걸 걱정하는 거라면 그런 걱정은 필요 없을 거야. 매번 농땡이나 부리던 놈이 간만에 열을 내면서 사냥에 열중하고 있거든. 그리고 놈이 있는 곳은 이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유채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순진하긴. 누굴 믿고 여기까지 왔을까? 얼굴에는 이렇게 색기가 줄줄 흐르는데.”
헥터의 두툼한 혀가 유채의 얼굴을 핥았다. 머리에 열이 오른 헥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향긋한 냄새에, 얇실한 몸맵시까지 정말 환상적이었다. 사내를 잡아먹으려고 태어난 게 틀림없었다.
당황해서 몸이 굳어 있던 유채가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이거 놔요! 아악!”
유채가 버둥거리면서 반항하자 헥터가 유채의 팔을 잡아당겼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가 탈골되었다. 유채는 상상도 못 해본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헥터는 숨을 헐떡이는 유채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올렸다.
“난 병신은 안기 싫거든? 그러니 고분고분하게 굴어? 응? 내가 곧 천상을 경험하게 해줄게. 그 계집애같이 생긴 놈이 너를 얼마나 만족시켰겠어? 응?”
“놔! 놓으라고! 이 개자식아…… 읍!”
유채가 멀쩡한 팔로 밀어내려고 하는데도 헥터는 두툼한 입술로 유채의 입술을 덮쳤다. 두꺼운 혀가 유채의 입안을 헤집었다.
헥터의 유채의 허리를 안아 제 몸과 딱 붙였다. 유채의 허리와 그의 하복부가 닿았다. 유채는 제 허리에 닿은 단단한 것인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지했다. 유채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여기서 못 벗어나면 정말로 큰일이 벌어질 터였다.
“아악!”
헥터가 비명을 지르며 유채에게서 떨어져 제 입을 움켜잡았다. 유채는 비릿한 피를 뱉었다. 헥터의 혀를 깨문 것이다. 헥터가 고통스러워하는 사이에 유채는 얼른 도망치려고 하였다. 근처에 다른 수인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헥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수인이라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채는 얼마 가지 못해 다시 붙잡혀 뺨을 맞고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나무에 등을 부딪치고 쓰러진 유채는 신음 소리를 냈다. 전에 케릭스에게 맞았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다. 볼은 불이 난 것처럼 뜨겁고 머리가 어지럽고 등이 욱신거렸다. 귀도 윙윙 울리는 것이 고막을 다친 것 같았다.
헥터가 씩씩거리면서 유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루프스에게 몸이나 파는 계집이 뭘 그리 가려?”
유채는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았다. 등이 욱신거리고 팔 한쪽이 빠졌어도 다리는 멀쩡했다. 유채는 잘 들리지도 않는 말은 무시하고 다리로 남자의 급소를 걷어찼다. 역시 제 아무리 수인이라도 급소는 급소인지 헥터는 제 낭심을 움켜쥐었다. 덕분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유채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멀쩡한 오른쪽 팔로 몸을 일으키고 빠르게 달렸다.
“꺄악!”
우악스런 손이 유채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었다. 유채는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쳤지만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헥터는 유채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다가 유채를 집어던졌다. 유채는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하필이면 다친 어깨 쪽으로 떨어져서 그 고통에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유채가 아찔한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때, 헥터가 유채의 목을 한손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동물도 패야 말을 잘 듣지. 루프스도 네년의 허리 봉사를 받기 위해서 그 난리를 피웠는데, 내가 그걸 깜빡했네.”
숨이 막혀 켁켁거리는 유채의 얼굴에 다시 헥터의 두툼한 손이 날아들었다. 유채는 또다시 얻어맞고 뒤로 날아갔다. 유채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헥터가 멱살을 잡고 이번엔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 입안은 이미 터져서 피로 가득했다. 헥터의 손찌검이 반복될수록 유채의 몸은 바람에 흩날리는 종이처럼 내동댕이쳐졌다.
유채의 얼굴은 이제 너무 많이 맞아서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헥터는 그제야 분이 풀렸는지 흙투성이에 엉망이 된 꼴로 거친 숨만 겨우 몰아쉬고 있는 유채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된 건 안타까웠지만 본인이 자초한 것이었다. 헥터는 유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적당한 크기였다.
“뭐야? 루프스랑 침대에서 뒹군 적이 없나? 설마 처녀냐?”
그가 잠자리를 가진 암컷의 수만 해도 엄청 났다. 헥터는 암컷의 몸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처녀인지 아닌지를 감별해 낼 수 있었다. 지금 제가 안으려는 이 암컷은 한 번도 사내와 몸을 섞은 적이 없는 숫처녀였다.
“이거 걸작이군. 루프스는 고자인가? 침실에 이런 미색의 암컷을 들여놓고 한 번도 안은 적이 없어?”
헥터는 루프스를 비웃었다. 유채는 너무 맞아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헥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헥터는 유채의 저항을 비웃으며 그녀의 뺨을 툭툭 쳤다. 유채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눈을 번뜩이면서 헥터를 노려봤다. 헥터는 유채의 형형한 눈빛에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현명하게 행동해? 죽고 싶어?”
유채는 헥터의 손이 제게서 떨어지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유채는 이로 헥터의 손가락을 물었다.
“악!”
유채는 마치 도사견처럼 헥터의 손가락을 물고 놓지 않았다. 제가 여기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하더라도 이 인간의 손가락은 끊어놓아야지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헥터가 유채를 떼어내기 위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유채는 머리카락이 뜯기는 아픔을 견디며 그럴수록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헥터의 손가락을 물었다. 유채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인지 드디어 헥터의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아악!”
유채는 비명을 질렀다. 헥터가 발로 유채의 발목을 으스러뜨린 것이다. 유채가 그대로 쓰러졌는데도 헥터는 분이 풀리지 않아 유채의 오른쪽 손목까지 발로 밟았다. 손목뼈가 으득 소리를 내면서 부러졌다. 헥터는 유채의 부러진 손목 위에서 발을 비틀었다. 유채는 이제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헥터는 그래도 분이 안 풀린 것인지 유채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유채는 피가 섞인 붉은 침을 바닥에 줄줄 흘렸다. 헥터는 피가 묻은 신발을 유채의 옷자락에 대강 닦았다.
“예쁜 얼굴이 가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돼서 어쩌나.”
헥터가 짐짓 아쉬운 듯이 말했다.
“그 예쁜 얼굴이 가는 건 나중에 보고 오늘은 네년의 몸을 열어볼까?”
헥터는 유채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었다. 그리고 유채의 몸을 뒤집었다. 망가진 암컷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뒤에서 안으면 그만이었다. 헥터가 뒤에서 껴안은 채로 유채의 허리를 들어올렸다. 한손으로 옷을 찢자 하얀 등이 드러났다. 헥터의 두툼한 입술이 날갯죽지에 닿았다. 헥터의 손이 유채의 몸 이곳저곳을 매만졌다.
유채는 무거운 체중으로 저를 덮친 헥터를 떨쳐 내고 싶었지만, 몸은 성한 데가 없었다. 사지는 다리 하나를 제외하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유채는 눈물만 흘렸다.
도대체 내가 뭐를 잘못했다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유채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꼴까지 당해야 하는 것일까? 혹여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싶었다. 진짜 전생의 잘못 때문이라면, 기억하지도 못하는 전생의 일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것이 억울했다. 유채는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빌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한번만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헥터의 손에 치마까지 찢겨져 나갔다. 유채는 비참함에 눈을 감았다. 유채는 이제 자포자기했다. 헥터의 손이 속옷에 걸렸을 때였다.
[유채님!]
‘블, 루벨……?’
블루벨의 목소리였다. 블루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자마자 유채를 내리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쾅!
굉음과 함께 나무가 밑동을 드러내면서 쓰러졌다. 토끼의 모습에서 다시 위르형으로 돌아온 블루벨이 얼른 유채에게 달려갔다. 블루벨은 처참한 유채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늘어진 왼쪽 팔, 기괴하게 뒤틀린 오른쪽 손목과 왼쪽 발목, 원래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풀고 터진 얼굴. 블루벨은 망가진 구체 관절 인형 같은 유채의 꼴에 눈물을 흘렸다. 블루벨은 유채의 상체를 되도록 아프지 않게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죄송해요. 제가 그때 자리를 뜨면 안 됐는데…….”
“루프스, 이 개자식아!”
블루벨의 울먹거리는 말은 헥터의 분노에 찬 외침에 묻혔다. 헥터는 나무에 부딪쳐 깨진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거칠게 닦았다. 유채는 가물가물한 시야로 전에 본 적 있는 은빛이 들어왔다.
[내가 경고했던 것으로 아는데?]
으르렁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 내 것을 건드리는 놈은 가만두지 않는다고.]
유채의 앞에 거대한 은빛 털을 가진 늑대가 서 있었다.
블루벨은 축 늘어진 유채를 보듬어 안았다. 눈앞에는 살벌한 기세의 루프스와 타우루스 헥터가 있었다. 유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루프스와 헥터의 살기까지 느껴져 몸을 잘게 떨었다.
블루벨은 유채가 떨지 않도록 그 몸을 소중하게 보듬어 안으면서 제 어리석음을 탓했다. 그때, 먹을 것을 가지러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 * *
“어, 프레드릭님. 유채님 어디 가셨어요?”
유채가 좋아하는 초콜릿으로 만든 간식을 한아름 들고 온 블루벨이 자리에 없는 유채에 대해 물었다.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프레드릭이 얼른 대답했다.
“갈색 늑대가 루프스가 부른다고 데려갔습니다.”
“루프스님이요? 네? 잠깐만요! 갈색 늑대요?”
블루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프레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늑대 수인이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블루벨 양.”
“저. 루프스님은 웬만한 개인적인 명은 헤나님을 통해서 내려요. 그런데 갈색 늑대라고요?”
“헤나? 그 하얀 머리의 중년의 여자를 말하는 겁니까?”
수인들의 머리색은 동물형의 털색과 같았다. 블루벨은 흰 머리카락이라 하얀 토끼이고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케릭스는 회색 늑대이다. 루프스가 은발에 은빛 늑대인 것처럼. 즉, 헤나가 루프스의 심부름을 온 것이라면 당연히 하얀 늑대여야 했다.
“맞아요. 헤나님은 하얀 늑대세요.”
“루프스가 다른 늑대에게 시킨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아리아라고 했던가요.”
“아리아님은 회색 늑대세요. 갈색이 아니라고요!”
프레드릭은 그제야 덜컥 놀랐다. 그럼 아까 전의 갈색 늑대는 뭐란 말인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더라니 그녀를 더 말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아니면 동행하겠다고라도 했어야 했다. 프레드릭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블루벨은 발을 동동 굴렀다.
“혹시 어디 잘못되신 건 아니겠죠? 마레 위르에게 앙심을 품은 늑대가 보복하려고 유채님을 데려간 걸까요. 아니면 발란테스 카르멘님이 연회 때 일로…….”
블루벨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베노르 콩레수스가 시작된 곳을 돌아보았다. 사냥이 끝날 때까지 이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기에 벌써부터 도착해 있는 수장들이 보였다. 레푸스 트레모르, 에쿠우스 단테, 발란테스 카르멘, 히르쿠스 라피엘, 포르쿠스(Porcus: 돼지 일족의 수장) 발렌틴, 콜루베르 올리비에를 비롯해 몇몇의 군소 일족의 수인들이 보였다.
“루프스님, 카니스님, 타우루스님, 울페스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어요.”
“남아 있는 늑대들은 수는 이전하고 같아 보입니까?”
프레드릭은 다급하게 물었다. 블루벨이 열심히 수를 세어보았다. 하지만 너무 수가 많아서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무리였다.
“비슷한 것 같아요. 어떡하죠?”
“블루벨 양. 나는 수인이 아니라 수인들의 상황을 몰라요. 혹시 지금 저 숲에 남아있는 일족 중에 유채 양에게 위험한 일족이 있다면 어느 쪽일 것 같습니까?”
“울페스님이랑, 타우루스님이요. 근데 두 분 다 강하기로는 손에 꼽히시는 분들이라…… 어떡하죠?”
“다른 늑대에게 도움을 청해보는 건 어떨까요?”
“안 될 거예요. 전 늑대들이 얕보는 토끼 일족이라 늑대들 누구도 저를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지난번 일로 미운털이 박혀서 더더욱 그럴 거고요. 타 일족 수장님들도 선뜻 나서주실 분이 없으실 텐데.”
프레드릭은 냉정하게 제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에어리얼 화염은 공격에 꽤나 유용한 편이었으나, 프레드릭은 방어 마법 쪽에 재능이 있어서 그쪽으로 능력을 길렀다. 인간에게 악감정을 품은 늑대 수인 일부가 벌인 일이라면 방어 마법으로도 유채를 구할 수 있을 테지만 이 일의 배후에 타우루스 헥터나 울페스 헤르티아가 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망갈 시간을 벌 수나 있을까 의문이었다.
“프레드릭님, 제가 가서 루프스님이나, 카니스님을 찾아볼게요. 그분들이어야 유채님을 도와주실 수 있어요.”
“하지만 저 숲에 혼자 들어가는 건 위험합니다. 블루벨 양, 차라리 내가…….”
“프레드릭님은 유채님이 계실 만한 곳을 찾아주세요. 제가 루프스님하고 바실리사님을 찾아볼게요. 저 토끼 일족이고 인키디움의 체력 시험도 합격했어요. 저는 빠르기만 하고 약하니까, 얼른 달려서 루프스님이나 바실리사님을 데려올게요. 그동안 프레드릭님이 유채님을 찾아주세요. 그리고 찾으시면 아주 잠시만 보호해 주세요. 제가 얼른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모시고 올게요.”
“블루벨 양. 그럼 블루벨 양이 위험해요. 블루벨 양은 두 분을 찾기 위해서 숲을 헤집어야 할 것이고 그러면 마물들이 공격할 위험도 높아지고, 혹여 그 갈색 늑대 수인이 블루벨 양을 노리면 어떡합니까?”
“이게 최선이에요. 프레드릭님. 저는 괜찮아요.”
프레드릭이 말리는데도 블루벨은 작은 토끼로 변했다. 혹여 이곳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블루벨이 프레드릭의 어깨로 뛰어올라서 그의 목덜미의 냄새를 맡았다.
[냄새 알았어요. 이 냄새로 찾아갈 테니까, 어서 유채님을 찾으러 가주세요. 저도 빨리 움직여서 루프스님이나 바실리사님을 찾을게요.]
블루벨은 얼른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인키디움의 체력 시험에 합격했다는 말처럼 정말 빠른 속도였다. 프레드릭은 이를 악물었다. 고심 끝에 악수를 둔다고 하였다. 블루벨 말처럼 지금 이 방법밖에 없었다. 프레드릭과 알렉스는 수인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육체적 능력이 좋았다.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프레드릭은 유채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었다.
* * *
[젤다, 어디 갔다 온 거야!]
하얀 털의 헤나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갈색의 털의 젤다는 애써 성질을 억누르면서 대강 둘러대었다. 헤나는 젊을 적 전성기 때에는 굉장한 수인이었다. 젤다는 스승이기도 한 헤나에게 억지로 고약한 성질머리를 죽여가면서 예의를 지켰다.
[젤다. 여긴 너희 아버지도 없고, 너도 이제 어른이야. 좀 어른스럽게 굴어. 책임감도 갖고.]
헤나는 수많은 수인들을 가르쳐 보았지만, 젤다만큼 질릴 정도로 싫은 아이도 처음이었다. 토모스가 늘그막에 얻은 고명딸이기도 하고 아내가 젤다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 죽기도 했으며 젤다가 제 아내를 쏙 빼닮았기 때문에 워낙 오냐오냐하며 기른 탓에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다. 젤다의 오빠들도 제 아비와 다를 바가 없어서 어린 동생을 떠받들었기 때문에 젤다는 오만하고 저만 잘난 줄 알았다.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났고, 당연히 암컷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사고를 치기도 했다. 헤나는 그 성격을 고쳐 보려고 노력하다가 질려서 포기했다. 베노르 콩레수스에서까지 농땡이나 부리는 젤다에게 헤나는 이를 갈면서 일을 시키고 다른 쪽으로 뛰어갔다.
[다 늙은 암컷이 나한테 왜 명령이야. 짜증나게.]
멍청한 년.
젤다는 헤나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감히 제 무릎을 꿇렸던 암컷이 눈앞에서 사라지게 될 텐데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타우루스 헥터가 제 소문을 들었는지, 제게 그 암컷을 넘기는 일에 협력해 줄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젤다는 그 제안을 수락했다. 타우루스 헥터가 어떤 쓰레기인가? 그의 침실에 들어간 암컷 중에서 제정신으로 나온 암컷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건방진 마레 위르가 타우루스 헥터의 손에 넘어간다면 암컷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헤르티아는 귓가에 유채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들떴다. 마레 위르 창부는 창부답게 그에 걸맞은 상대가 필요했다. 타우루스 헥터야말로 제격이었다. 원래는 베노르 콩레수스가 끝난 뒤에 일을 벌일 생각이었지만, 헥터가 전야제 동안 몸이 잔뜩 달아오른 것인지 베노르 콩레수스에서 데려가겠다고 막무가내로 굴었다.
운이 좋게도 아리아가 몸이 아파서 못 온다는 말이 나왔고 젤다는 아버지인 토모스의 권력을 이용해서 아리아의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마레 위르들은 동물형으로 변한 수인이 누구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 암컷 토끼만 아니면 제가 누군지 쉽게 찾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젤다는 토끼가 사라지자 멍청한 마레 위르를 꾀어내어 타우루스 헥터와 약속된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나머지는 헥터의 일이었다.
젤다는 알리바이를 위해서 다시 루프스가 사냥을 위해서 몰이를 명한 곳으로 돌아왔다. 그 건방진 암컷을 버려두고 온 곳은 숲에서도 꽤나 깊숙한 곳이었고 루프스와도 거리가 가장 멀었다. 아무리 도와달라고 소리쳐 봤자 소용없을 장소였다. 건방진 암컷이 두툼한 뱃살 아래 깔려서 비명만 지를 것을 상상하니,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통쾌함이 밀려왔다.
바스락.
그때 아주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인 작은 소리가 들렸다. 젤다가 몸을 굳혔다. 저 멀리 덤불 속에서 하얀색 토끼귀가 솟아올랐다. 토끼는 소리를 들으려는 것인지 귀를 쫑긋 세웠다. 젤다는 숨을 쉬는 것을 멈췄다. 토끼가 코를 땅에 박고 킁킁대었다. 젤다는 덤불 밖으로 드러난 토끼의 얼굴을 보았다.
블루벨이었다.
마레 위르 암컷 옆에 딱 달라붙어 있은 토끼 꼬마 년이었다. 젤다는 몸을 굳혔다. 저 토끼가 여기 나타났다는 것은 제가 한 짓이 발각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젤다는 등을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지금 루프스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 암컷이 헥터의 손아귀에서 돌아온다면 저는 어떤 꼴을 당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젤다는 몸을 수그렸다. 저 토끼를 없애야 했다. 젤다는 때를 기다렸다.
블루벨은 땅에 남아 있는 냄새를 맡았다. 늑대 특유의 체취가 났다. 근처에 늑대 일족들이 사냥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블루벨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예민한 귀에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블루벨은 눈을 굴렸다. 나무 뒤에 갈색 늑대 한 마리가 저를 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누군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지만, 저를 노리는 행동으로 볼 때 유채를 데려갔다는 갈색 늑대 같았다.
블루벨은 애써 못 본 척 태연하게 행동했다. 늑대는 한눈에 보기에도 강했다. 블루벨은 뒷다리에 힘을 주었다. 심장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필사적으로 뛰어야 했다. 블루벨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지금이다.
블루벨은 줄였던 몸집을 원래 크기로 되돌리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젤다는 블루벨이 알아차린 것을 깨닫고 얼른 뛰쳐나갔다.
블루벨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무리 늑대가 빠르다고 해도 토끼의 주력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토끼와 말은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일족이었다. 블루벨은 다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뛰었다. 블루벨은 선회력이 좋지 않은 늑대 일족의 특성을 이용해서 좌우를 왔다갔다 하며 뛰었다.
뒤에서 블루벨을 쫓는 젤다는 그 뛰는 방식에 이를 갈았다. 어느새 거리가 제법 벌어졌다. 젤다는 이렇게 가다가는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젤다는 뒷다리에 힘을 주었다. 토끼 놈들만 점프에서 비거리가 좋은 것이 아니었다. 젤다는 적당한 디딤돌을 이용해서 크게 도약했다.
[윽!]
블루벨의 등에 젤다의 발톱이 박혔다. 등이 찢기는 고통에도 블루벨은 이를 악물었다. 늑대의 이빨에 물리지만 않으면 살 수 있다. 등의 상처야 어떻게 버틸 수 있다. 블루벨은 온 힘을 다해서 뒤에 매달린 젤다를 걷어찼다. 젤다가 켕, 소리와 함께 멀리 날아갔다. 블루벨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의 고통도 아랑곳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멀리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루프스님!]
은빛 늑대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하얀 토끼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헤나가 토끼를 보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블루벨?]
블루벨은 루프스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르형으로 돌아와 엎드렸다. 블루벨의 작은 등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헤나가 놀래서 블루벨에게 다가갔다.
[너. 등이!]
“괜찮아요. 제 등을 노린 갈색 늑대는 뒷발로 갈겨줬어요. 저보다 유채님, 아니, 레티티아님이 위험해요! 살려주세요, 루프스님!”
[그게 무슨 소리냐?]
블루벨은 여기까지 제가 오게 된 경위를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설명했다. 일 분, 일 초가 급한 일이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루프스의 살기가 짙어졌다.
헤나가 루프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루프스는 이런 대범한 짓을 벌일 만한 미친놈을 추려보았다. 바실리사가 아무리 장난기가 많은 성격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머리가 돌진 않았다. 단테는 애초에 소심한 놈이라 이런 짓은 벌이지 못한다. 헤르티아? 이걸로 무슨 이익을 얻는다고, 헤르티아는 철저하게 제 이익에 따라서 움직였다. 그럼 하나 남았다.
정말 미친놈 한 명.
[헤나. 케릭스를 만나서 나머지 놈들을 챙겨서 돌아가라. 이런 장난 같은 사냥은 끝났다.]
진짜 사냥의 시작이었다.
헥터는 여기서 가장 먼 곳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제가 어디로 향하는지 봤거나 아니면 여기 데려온 일행 중에 배신자가 하나 있거나.
블루벨이 형형한 루프스의 청회색의 눈동자를 보며 침을 삼켰다.
“제가 루프스님을 등에 태우고 모실게요. 위르형으로 돌아와 주세요. 전 인키디움의 체력 시험도 통과한 토끼예요. 인키디움의 시험을 통과한 토끼는 그 어떤 늑대보다 빨라요. 그러니까. 제가 모실게요. 제 등에 타세요.”
블루벨이 다시 커다란 토끼로 변했다. 루프스의 눈에 잔뜩 헤집어진 블루벨의 등이 보였다.
[몸을 굽혀라.]
[예?]
[네 녀석은 토끼면서 귀가 정말 안 좋구나.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블루벨은 루프스의 싸늘한 말에 엉거주춤하게 몸을 굽혔다. 커다란 늑대의 혀가 블루벨의 상처에 닿았다.
[흐갸갹!]
블루벨이 요상한 비명을 뱉었다. 그리고 이내 루프스의 의도를 짐작하고 가만히 있었다. 늑대의 침에는 지혈 성분이 있다. 상처에서 피가 멎었다. 루프스는 이제 되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위르형으로 돌아와서 블루벨의 등에 올라탔다.
“빨리 뛰어라. 네가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로 죽고 싶지 않으면.”
목숨을 굳이 위협하지 않아도 블루벨은 전속력으로 뛸 생각이었다. 블루벨은 말 그대로 바람처럼 뛰었다. 그리고 다행히 유채가 최악의 상황에 놓이기 전 그녀를 구해내었다.
* * *
헥터는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는지를 생각했다. 저 건방진 암컷이 너무 오래 반항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탓이었다. 헥터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대강 닦았다. 루프스의 눈이 형형했다. 내뿜는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었다. 어차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다. 저와 실력이 차이나 봤자 얼마나 차이날 것인가?
“유채 양!”
블루벨의 뒤에서 프레드릭이 소리를 치며 나타났다. 프레드릭도 한참을 달렸는지 단정했던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었다. 프레드릭은 처참한 꼴의 유채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축 늘어진 몸에선 성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발목의 상태가 가장 좋지 않았다.
루프스는 셋에게 시선을 던졌다. 헥터 놈의 기운을 보자 하니 저와 한판 벌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레티티아를 데리고 멀리 피해라.]
“예. 알겠어요.”
블루벨은 유채의 몸을 프레드릭에게 대신 부축해 달라 부탁하였다. 하지만 유채는 성치 않은 몸으로 몸부림을 치면서 블루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프레드릭은 유채의 이상 행동의 원인을 파악했다. 블루벨은 믿을 수 있고 여자이니까 두렵지 않지만, 프레드릭은 남자였다. 헥터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기억이 끔찍해 그와 같은 남자인 프레드릭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유채가 몸을 보기 흉할 정도로 떨면서 블루벨에게 기대었다.
“블, 블루벨…… 나…… 나…….”
“유채님.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해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제가 얼른 다시 안아드릴게요. 지금은 프레드릭님이 유채님을 부축해야 해요. 프레드릭님이에요.”
유채는 블루벨의 말에도 불안한 눈으로 고개만 세차게 저었다. 프레드릭은 낮은 신음을 뱉었다. 혹시 몰라서 본격적으로 유채를 찾기 전에 레판테 숲 어귀에 워프 마커를 새겨두었다. 워프 마커를 사용하면 공간 이동 마법 시전 속도가 월등하게 빨라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는 사용하기 적절하지 않았다. 워프 마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마법진이 필요했다. 지금은 마법진을 그릴 시간이 없었다.
“고막이 터져서 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것 같습니다.”
프레드릭은 유채의 반항을 무시하고 일단 그녀를 안아 올렸다. 위험천만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유채는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유채는 프레드릭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성치 않은 몸으로 반항했다. 유채가 버둥거릴 때마다 부러진 손목과 발목이 심하게 뒤틀렸다. 프레드릭은 얼른 유채를 블루벨의 등 위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유채의 떨림이 멎어갔다. 유채는 몸을 벌벌 떨면서 블루벨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유채님 몸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세요.]
쾅!
프레드릭은 뒤를 돌아보았다. 루프스와 헥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흑우로 변한 헥터가 루프스를 뿔로 들이밀었다. 루프스는 피할 수 있었음에도 셋의 안전을 위해서 헥터의 공격을 받아내었다. 힘이 장사인 헥터라 루프스도 뒤로 밀려갔다. 루프스는 앞발을 들었다.
[얼른 안 가고 뭐하나!]
[예!]
블루벨은 뒤도 안돌아보고 달렸다. 다시 굉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헥터의 몸이 나뒹굴었다. 블루벨은 뒤의 소란은 필사적으로 무시하고 유채를 위해서 빠르게 달렸다.
* * *
“이번 베노르 콩레수스는 제가 우승인 거죠?”
바실리사가 턱을 거만하게 치켜세우고 제가 잡아온 거대한 마물을 보여주었다. 나머지 수장도 떨떠름한 얼굴로 바실리사가 잡은 사냥감의 크기를 인정했다.
“에이. 바실리사님. 루프스님이…… 우억!”
바실리사가 에릭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너는 왜 내가 자랑 좀 해보겠다는데 꼭 초를 치냐? 응? 눈치는 뒀다가 뭐에 쓰게?”
“국에 넣고 끓여먹게요.”
“너, 내가 돌아가면 친히 바늘을 잡고 너의 입술을 아주 단단하게 꿰매줄게. 기대해라. 한 번만 더 입을 벌려봐라!”
“저…… 바실리사, 님…….”
에릭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실리사의 뒤편을 가리켰다. 바실리사는 에릭이 또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하고 화를 낼 작정으로 입을 벌렸다.
“너! 내가 봐주니까!”
콰쾅쾅!
땅이 갈라졌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바실리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블루벨이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닌 유채를 등에 태우고 달려왔다. 그리고 블루벨의 등 뒤에서 숲의 나무들이 차례대로 쓰러지고 있었다. 바실리사의 눈이 커졌다. 다른 수인들도 놀란 것인지 만일의 상태를 대비해서 몸을 긴장시켰다.
[바실리사님! 오르페님 어디 계세요!]
“블루벨? 유채는 왜 그러고? 이건 무슨 일이야?”
[지금은 자세히는 설명을 못 드리고요. 오르페님은요?]
“저기 하얀색 막사에. 근데 이게 뭔 난리…….”
바실리사는 경악했다. 숲에서 이 난리의 근원인 은빛 늑대와 검은 소가 나타난 것이다. 늑대의 주둥이와 발톱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늑대는 뭔가를 질겅질겅 씹는 것 같더니 뿔을 뱉어냈다. 검은 소는 배의 살점이 한 뭉텅이가 뜯겨서 벌건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처가 깊어 뼈까지 희미하게 드러난 모습에 비위 약한 수인들은 구역질을 억지로 참았다. 소 일족의 가장 큰 무기인 뿔은 바닥을 굴렀다.
“라이?”
바실리사는 입을 떡 벌렸다. 루프스와 헥터였다. 바실리사는 아까 본 유채의 처참한 상태와 지금의 광경을 종합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파악했다. 바실리사는 이를 갈았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헥터가 일을 친 것이다.
바실리사는 루프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헥터를 보면서 통쾌해했다. 헥터는 한 번도 루프스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을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팠을 테고 말이다.
헥터는 루프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멀쩡한 루프스에 비해 헥터는 피투성이가 된 것이 그 증거였다. 분노한 헥터의 울음소리가 숲을 가득 메웠다.
“하! 저것들이 미쳤나? 둘이 싸우면 여기는 어떤 꼴이 되라고!”
울페스 헤르티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빈정댔다. 옆에 선 단테가 헤르티아에게 물었다.
“말릴 거야? 헤르티아?”
“지금 말려봤자 들어먹지도 않아. 좀 이따 루프스가 헥터를 죽이는 것만 막으면 돼. 지금은 저 싸움의 여파가 크지 않게 만드는 것이 먼저야.”
그 말과 동시에 소 일족의 고유 마력 속성인 암석에 의한 돌덩어리들이 날아들었다. 헥터가 날린 돌들이 루프스를 덮쳤다. 루프스는 빠른 몸놀림으로 돌들을 피했다. 그러나 미처 돌을 피하지 못한 수인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헤르티아가 손을 뻗었다. 거대한 불기둥들이 그물처럼 엮이면서 돌을 막아내었다. 헤르티아가 자아낸 불에 돌들이 녹았다. 루프스가 그 사이 흐트러진 자세를 정비했다. 다시 돌들을 조종해서 루프스를 공격하려했던 헥터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헤르티아가 짧은 비웃음을 흘리자 헥터가 발을 굴렀다.
“마녀 헤르티아.”
누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헤르티아는 오빠의 부인인 라일라에게 마법을 배웠었다. 그녀는 수인들에게 흔하지 않은 마법사이면서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헤르티아가 돌조각을 막는 사이 루프스와 헥터가 충돌했다. 헥터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루프스의 털에 도는 전기 때문에 헥터의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헤르티아는 헥터를 비웃었다. 루프스는 제 오빠인 베니니타스의 제자인 동시에 전대 루프스 로보의 아들이다. 루프스는 베니니타스의 마법을 이용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전투 방식과 제 아버지의 민첩함과 날카로운 발톱, 이빨을 이용하는 전투 방식을 결합시켜 활용했다. 장점만 결합하여 만든 루프스 특유의 전투 실력은 아무리 헤르티아라 하더라도 감탄할 정도로 대단했다.
루프스는 전투 중에는 늑대 수인의 고유 속성인 전격을 몸에 둘렀다. 루프스의 몸에 도는 전격은 수인을 기절시킬 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강력한 통증을 주었다. 그 전격이 루프스의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완력을 보완해 주었다. 루프스의 몸에 돌고 있는 전기로 인해서 힘으로 그를 몰아붙이는 종류의 공격이 어느 정도 무력화되었다. 그렇게 수인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면 루프스는 로보의 전투 방식으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치명상을 입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헥터가 더 이상 루프스의 전격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떨어뜨리자 루프스의 발톱이 헥터의 왼쪽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두툼한 살점이 땅에 떨어졌다. 헥터의 옆구리가 뼈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깊게 파여서 붉은 속을 드러냈다.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이 개자식아!]
[말밖에 못 하는 시시한 놈인가?]
헥터가 크게 발을 구르자 땅이 갈라졌다. 루프스는 갈라지는 땅을 피했다.
[젠장.]
하지만 그 사이 헥터가 부린 다른 수작에 걸렸다. 갈라진 땅 틈으로 돌덩이가 올라와서 루프스의 발을 감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헥터는 온 힘을 다해서 루프스를 뿔로 받아버릴 생각이었다. 상대적으로 완력이 떨어지는 루프스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헥터의 노림수를 알아챈 루프스는 그가 돌진하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수인 내전 동안 소 일족의 이런 공격은 수없이 당해봤다. 돌진은 강력했지만, 그만큼 빈틈이 많았다. 루프스는 때를 기다렸다. 헥터는 발을 구르고 루프스에게 돌진했다. 루프스는 제 발을 감싸고 있는 암석들에 전기를 내리쳤다. 암석들이 쩌적 소리를 내면서 깨졌다. 루프스는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헥터의 공격을 흘렸다.
투두둑.
[끄아아아악!]
헥터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루프스의 주둥이에는 소의 다리가 물려 있었다. 루프스는 헥터의 다리를 씹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려 퍼졌다. 루프스의 주둥이에서 피가 뚝뚝뚝 떨어졌다. 루프스는 헥터의 오른쪽 앞다리를 씹어뱉었다. 루프스의 주둥이와 헥터의 주위에는 피가 흥건했다.
[개인적으로 말이야.]
루프스가 어슬렁거리면서 헥터에게 다가갔다. 헥터는 남은 세 개의 다리로 앞으로 고꾸라지기만 하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웠다.
[난 소의 앞다리가 맛이 없더라고 남들은 다 맛있다고 하는데.]
그때, 단테는 헤르티아의 기운이 변하는 것을 눈치챘다. 루프스는 헥터의 앞에 서서 계속 말을 이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난 그 부위가 맛이 없다고 생각해. 나는 사실 소의 머리 고기를 가장 좋아하거든.]
루프스는 붉은 아가리를 벌리고 헥터에게 달려들었다. 헥터는 덜덜 떨면서 눈을 감았다.
쾅.
[헤르티아!]
헥터가 눈을 떴다. 헥터의 눈앞에는 붉은 털의 여우가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서 있었다.
[네가 열여섯 꼬맹이면 헥터를 죽이는 것을 말리지 않겠지만 말이야.]
루프스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수인들의 수장인 루프스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저 녀석을 제거해서 폭탄 하나를 터뜨릴 작정이야? 미안하지만 난 미노르 호무스와 가까운 나의 땅에서 소들이 날뛰는 꼴을 볼 생각은 없는데?]
[비켜라, 헤르티아.]
[싫은데? 잘 결정해. 네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열여섯의 꼬맹이가 아니라면 말이야. 지금 헥터를 죽인다면 넌 확실하게 나와 단테를 적으로 돌리게 될 거야. 다시 한 번 더 내전을 발발시키고 싶다면 나도 말리지 않지.]
[예의라고는 어디 팔아먹었나?]
[싸움터에 예의가 어디 있나? 그리고 나보다 한참 어린 꼬맹이가 반말 하는 거 나도 듣기 싫어.]
루프스가 으르렁거렸다. 헤르티아가 동물형을 취했다는 것은 싸움을 불사하겠다는 의지였다. 헤르티아와 헥터를 이 좁은 공간에서 동시에 상대했다가 피해가 너무 커질 거였다. 그리고 이 작은 싸움이 더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다. 루프스는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그는 오른팔을 들어올려, 입에 덕지덕지 묻은 피를 닦아냈다.
“이번 베노르 콩레수스는 내가 이긴 것 같군. 내가 잡은 저 타우루스 헥터보다 더 큰 사냥감이 있나?”
루프스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헥터를 향해 싸늘한 비웃음을 흘리면서 오르페의 막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헤르티아는 몸을 돌려서 헥터의 잘린 다리의 절단면을 발로 꾹 눌렀다. 헥터의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야, 이 병신아. 이제 현실 좀 직시해. 내가 널 가만히 둔 건 네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네가 없어지면 뛸 똥물이 싫어서야.]
헤르티아는 더 강하게 헥터의 잘린 다리의 절단면을 압박했다. 헥터가 숨을 헐떡거렸다.
[이제부터 뿔 하나와 다리 하나 없는 병신을 아랫것들이 노릴 거야. 네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꽤나 탐나거든? 근데 난 그놈들의 실력이 고만고만해서 내게 똥물이 튈까 끔찍해. 내 앞에 무릎 꿇고 ‘전능하신 울페스 헤르티아님이시어, 이 미천한 소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면 내가 도와줄 건데? 할 거야?]
헤르티아는 헥터의 상처를 밟으면서 그의 속을 뒤집었다. 헥터는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 * *
오르페는 프레드릭의 도움으로 유채의 끔찍하게 뒤틀린 발목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처치를 끝낸 상태였다. 그러나 마법으로 뼈를 붙이기 전에 수행되어야 하는 발목뼈를 바로 잡는 작업이 쉽지가 않았다. 발목의 통증이 심해 유채가 몸부림을 쳤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유채의 몸을 고정한 상태에서 발목뼈를 맞출 수도 있었지만, 유채가 그때마다 발작처럼 몸을 떨며 울었다. 우는 유채가 가엽기도 했지만, 유채의 몸부림이 심해서 잘못했다가는 상처가 덧날 수 있었다. 오르페와 프레드릭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떤가?”
루프스가 막사로 돌아왔다. 아까보다 유채의 모습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눈앞이 시뻘겋게 물드는 느낌이었다. 그 빌어먹을 소의 지위를 망각하고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머리가 열로 차올랐다.
오르페는 자초지종을 루프스에게 설명했다. 루프스는 난생 처음 오르페의 무능함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당장 안 하고 뭐하는 건가!”
“유채 양의 몸부림이 심합니다. 블루벨 양이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저와 오르페님의 손이 닿기만 하면 발작처럼 몸을 떱니다. 블루벨이 와야…….”
“됐다. 내가 잡을 테니 얼른 발목뼈나 맞춰라,”
루프스가 유채의 위로 올라와서 그녀의 몸 양옆에 무릎을 두고 손으로 유채의 팔목을 눌렀다. 유채는 루프스의 손이 닿자 당장 몸부림을 쳤다. 루프스는 유채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과 다리로 몸을 고정했다. 유채는 흐느끼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악! 제발…… 제발…….”
유채는 오열했다. 오르페는 유채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일단 치료가 먼저였다. 오르페가 유채의 발목을 잡았다.
“아악!”
유채의 상체가 튀어 올랐다. 고통에 입술을 깨무느라 유채의 입술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루프스는 한손으로 유채의 턱을 눌러 벌린 다음 그녀의 입안에 제 팔목을 들이밀었다. 유채의 이가 살점을 뜯어먹을 기세로 루프스의 팔목을 파고들었다. 루프스의 팔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그 사이 오르페는 발목을 옳게 맞추었고 프레드릭은 마력을 쏟아부어 발목을 붙여놓았다. 마법에 의한 치료는 완벽한 것이 아니기에 오르페는 유채의 발목에 부목을 감아서 고정시켰다. 유채는 힘이 다 풀렸는지 루프스의 팔목을 놓았다. 루프스는 움찔거리기만 하는 유채의 몸 위에서 얼른 내려왔다.
“루프스님, 젤다를 잡아왔습니다.”
어린 늑대 수인이 막사 앞에서 외쳤다.
“레티티아는 걸을 수 있나?”
“아직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오르페가 답했다. 루프스는 자신의 옷을 벗어 유채의 몸을 감싸주었다. 한 팔로 유채의 엉덩이를 받쳐서 들어올렸다. 유채의 상체는 자연스럽게 루프스의 어깨에 기대게 되었다.
이제야 정신이 든 유채는 몸에 닿는 남자의 감촉에 소름이 돋고 공포가 치밀어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떨어지고 싶었지만 힘이 없어서 몸만 덜덜 떨었다.
막사 밖에는 엉망인 꼴로 잡혀온 젤다와 펠릭스 다우스인 식인 늑대 다섯 마리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젤다의 입가는 세리아(수인의 동물화를 막는 독약)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루프스님! 저는 억울합니다!”
젤다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외쳤다. 루프스는 나지막하게 유채에게 물었다.
“이 목소리냐? 너를 데려갔던 게?”
유채는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젤다는 발악하며 외쳤다.
“루프스님! 저는 토모스의 딸입니다. 제 아버지와 척을 지실 생각이십니까?”
“네 아비가 무서워하는 것이 나다. 내가 왜 네 아비를 무서워해야 하지?”
젤다는 말문이 막혔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늑대들의 기세에 절로 몸이 떨렸다.
“왜! 저 천한 암컷에게 이리 대하십니까? 저 암컷은 마레 위르고 저는 루프스님과 같은 일족이며 루프스님의 백성입니다. 어찌 저렇게 천한 마레 위르의 목숨이 제 목숨보다 귀합니까!”
“젤다.”
루프스가 화를 꾹꾹 억눌러 참는 목소리로 젤다를 불렀다. 젤다는 희망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루프스를 올려다보았다.
“내 땅에는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늑대는 필요 없다. 네가 나의 백성이라면, 왜 헥터의 명을 들었지? 너는 소 수인인가?”
젤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젤다는 납작하게 엎드려서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저는 헥터님의 협박에…….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젤다는 비참하게 빌었다. 그러나 그런 젤다를 바라보는 루프스의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루프스는 떨고 있는 유채의 몸을 제 품에 안고 그녀의 뒷머리를 지그시 눌러 얼굴을 제 가슴팍에 묻게 하였다.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Exagito(물어).”
그 말과 동시에 루프스는 유채의 귀를 막았다. 유채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이에 젤다는 다섯 마리 늑대에게 산 채로 잡아먹혔다. 유채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젤다의 숨통이 끊어지고 머리뼈가 부서져 뇌수가 튈 무렵 유채는 간신히 쥐고 있던 의식을 놓았다. 유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저거. 치워.”
루프스는 젤다의 처참한 시신을 제대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실신한 유채의 몸을 부드럽게 안아 막사로 돌아갔다.
* * *
“블루벨. 들어간다.”
케릭스는 숨을 헐떡였다. 갑작스럽게 폭풍처럼 너무 많은 일이 몰아쳤다. 루프스와 헥터의 싸움에 기겁하고 그 충격에서 벗어날 틈도 없이 젤다를 잡아와 그녀의 신병을 인도한 뒤에 소 수인 일족에 가서 이쪽의 입장을 전해주고 왔더니만 젤다의 처참한 시체를 발견하고 혈압이 올라서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루프스가 강하다 할지라도 제 일족의 강자 한 명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칩거하고 있는 제 아버지인 플로서스보다 영향력이 강한 것이 토모스였다. 그리고 토모스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 젤다였다. 토모스가 어떻게 나올지는 분명했다. 케릭스는 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랠 사이도 없이 헤나에게 블루벨이 젤다에 의해서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루프스의 배려로 블루벨이 궁의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케릭스는 혼비백산해서 뛰었다. 궁의에게 진료받을 만큼 상처가 심각한 것인가 싶어서 걱정이 앞섰다.
“예! 케릭스님? 잠, 잠시만!”
케릭스는 천막의 천을 올렸다가 바로 내렸다. 블루벨은 막 상처를 치료받은 것인지 반라의 상태였다. 케릭스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어색하게 손으로 얼굴만 쓸어내렸다.
“들, 들어오셔도 되요.”
블루벨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케릭스는 크게 헛기침을 하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블루벨도 심하게 당황했는지 빨개진 얼굴로 하얀 귀를 축 늘여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블루벨은 모포를 끌어안고 있었다.
“궁의님이 등에 발라놓은 약 지워질 수 있으니까, 옷 입고 있지 말라고 해서요…….”
블루벨이 부끄러운 것인지 케릭스와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나, 아무것도 못 봤다.”
거짓말에 어색한 케릭스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거짓말을 해보았다. 블루벨은 순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지라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눈을 가리고 있던 귀를 슬며시 치웠다.
“정말요?”
“그래. 하나도 못 봤어.”
케릭스는 언제나 정직하라고 가르치셨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어겼다. 블루벨이 히힛 웃으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다행이다. 저 무지 걱정했어요. 엄마가 이유 없이 수컷한테 맨몸을 보이면 그 수컷한테 시집가야 한다고 해서…… 설마 케릭스님한테 시집가야 하나 했어요.”
케릭스는 얼굴이 붉어졌다. 헛기침을 한 케릭스는 말을 돌렸다.
“그래서 등은 괜찮은 거냐?”
블루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페는 루프스의 전속 궁의라 다른 여성 궁의가 상처를 봐주었는데 생각보다 상처가 깊지 않다고 했다. 당분간은 물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라고만 했다. 약을 바른 상처가 계속 화끈거리고 아팠지만 참을 만하였다.
“저 예전에 나무에서 떨어져도 멀쩡했어…….”
블루벨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케릭스의 손이 블루벨의 등에 닿았다. 순간 블루벨은 사고가 완벽하게 정지했다.
케릭스는 블루벨의 작은 등에 남 상처를 보았다. 젤다 그것이 꽤나 꽉 움켜잡은 것인지 꽤나 깊게 파인 곳이 있었다. 뼈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케릭스가 이를 갈았다. 늑대의 먹잇감으로 던져 주는 것으로 끝내는 처형은 젤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끝까지 괴로워하다가 죽었어야 하는데. 케릭스는 좀 전까지 루프스가 젤다를 죽여서 일이 꼬였다고 욕을 했던 것도 잊은 채 루프스의 관대한 처형 방식에 관해서 한탄했다.
“네 몸이나 챙길 것이지 뭐 하러 나서서…….”
“유채님이 저 구해주셨잖아요. 지난번에.”
블루벨이 고개를 돌려서 케릭스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케릭스의 시선이 제 등에 닿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았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구해 드려야지요. 토끼도 은혜는 갚을 줄 알아요.”
“그래도 몸은 조심하거라. 운이 좋아서 산 것이지, 잘못했으면 네 목숨이 위험했다.”
케릭스는 블루벨이 하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블루벨은 머리카락을 상처를 치료하기 편할 정도로만 틀어 올리고 있었다. 블루벨이 볼을 부풀렸다.
“저도 나름 강하거든요! 유채님이랑 케릭스님은 저를 너무 어리게만 보시는 것 같아요.”
케릭스가 말캉한 블루벨의 볼을 잡아 늘렸다. 블루벨은 케릭스가 저를 마냥 어리게 생각해서 이러는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붉은 눈동자로 그를 흘겨보았다. 케릭스는 보기 드물게 웃는 얼굴을 하고 블루벨의 볼을 쓰다듬었다.
“내가 여태껏 보아왔던 암컷 중에 너만큼 귀여운 암컷은 없어서 그런다.”
블루벨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블루벨은 앞을 가리고 있는 모포를 조금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워요, 케릭스님.”
“머리 묶어줄까? 좀 더 있으면 그대로 흘러내릴 것 같구나.”
“제, 제가 할게요.”
“괜찮다. 여동생이 하나 있어서 많이 묶어봤다. 끈은 이거 쓰면 되나?”
케릭스는 블루벨의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두꺼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고 세 갈래로 나눠서 땋았다. 블루벨은 어색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케릭스는 생긴 것과 다르게 꽤나 섬세한 편이었다. 오히려 조각같이 생긴 루프스가 케릭스보다 섬세하지 못했다. 블루벨은 케릭스가 생각보다 잘하는 것에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했다. 언제나 밝고 쾌활한 블루벨에게 이런 어색함은 오랜만이었다. 블루벨은 어색함을 풀기위해서 입을 열었다.
“저. 동생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어요.”
“동생은 몸이 약하다. 집안에 수치라고 아버지가 한 번도 알린 적이 없지. 대외적으로는 어릴 적에 크게 알아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케릭스의 아버지인 플로서스는 냉혹한 수인이었다. 하나뿐인 아내를 마레 위르의 손에 잃고 마레 위르라면 치를 떨면서 복수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시간이 그를 그렇게 바꾸었다. 하나 있는 아들에게 냉혹하고 엄격했으며 몸이 약한 딸은 집안의 수치로 여겨 별채에 가두어놓았다. 케릭스는 제 아버지의 강함은 존경했지만 아버지의 인격은 존경하지 못하였다. 수인 내전이 끝나자마자 저택에 칩거해서는 나오지 않는 아버지를 케릭스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한심해했다.
“아, 몰랐어요. 괜히 여쭈어봐서 죄송해요.”
“괜찮다. 그것에 상처받을 정도로 내가 여린 수인도 아니고.”
케릭스가 블루벨의 머리를 다 땋고 궁녀들의 예법에 맞게 빙 돌려서 틀어 올려주었다. 블루벨은 케릭스가 제 머리카락을 묶어주는 것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유채도 블루벨의 머리카락을 이렇게 묶어준 적이 있었다.
“아악!”
머릿속에 부끄러운 기억이 스쳐 지나가자 블루벨은 손에 쥐고 있던 모포를 놓고 얼굴을 가렸다.
“블루벨!”
다행히 케릭스는 블루벨의 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앞의 상황은 보지 못했다. 그가 놀라서 외치는 소리에 블루벨은 얼굴을 푹 숙이고는 모포를 다시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유채가 양 갈래로 머리를 묶어주었을 때 블루벨은 그녀에게 성감대의 의미를 물어보았었다. 그리고 제가 케릭스의 앞에서 무슨 민망한 소리를 지껄인 것인지를 그날 분명하게 알았다. 블루벨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게 시집오고 싶나?”
케릭스가 장난처럼 말했다. 블루벨이 기겁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모포는 떨어뜨리고?”
“말 못 해요. 저 케릭스님께 엄청, 엄청 부끄러운 일 저질렀거든요.”
케릭스는 블루벨이 성감대의 의미를 알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민망해하는 블루벨은 정말로 귀여웠다. 케릭스는 블루벨을 품에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블루벨은 내내 민망한 것인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케릭스는 블루벨 앞으로 다가가서 몸을 굽혔다. 케릭스와 블루벨의 시선이 얽혔다.
“오늘 잘했다.”
블루벨이 빨간 눈동자가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너무 너를 혼만 낸 것 같아서 말이다. 오늘 잘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오히려 더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케릭스는 루프스가 유채에게 보이는 집착을 알았다. 그녀가 죽거나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면 오늘 당장 수인 내전이 다시 발발했을지도 모른다.
케릭스는 블루벨의 앞머리를 넘겨서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블루벨의 눈이 커지면서 안 그래도 빨갛던 얼굴이 그 이상 빨개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붉어졌다. 블루벨이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이거.”
“나도 내 동생과 이렇게 인사한다.”
케릭스가 눈을 곱게 접었다. 블루벨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블루벨은 이 심장 소리가 케릭스에게 들릴까 봐 불안했다. 케릭스가 블루벨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쉬고 있어라. 먹을 것 좀 가져오마.”
“예…….”
블루벨은 뒤돌아서 나가는 케릭스의 단단한 근육 잡힌 등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터질 것처럼 뛰었다. 블루벨은 손을 심장이 뛰고 있는 왼쪽 가슴 위에 가져가 가볍게 눌렀다.
쿵쾅쿵쾅.
열여섯 소녀의 마음에 봄바람이 불어왔다.
* * *
루프스는 실신해서 축 늘어진 유채를 다시 간이침대에 눕혔다. 모르는 새에 젤다의 피가 묻은 것인지 검붉은 피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묻어 굳어 있었다. 루프스는 손가락으로 굳은 피를 긁어내었다. 유채는 지금도 괜찮다고 말하기는 힘든 모습이었지만 아까보다는 나은 수준이었다.
루프스는 무릎을 굽혀서 피딱지가 굳어 있는 유채의 입술을 쓸었다. 미련스럽게 아프면 비명을 지를 것이지 왜 입술을 이렇게 만들었나 모르겠다.
“으흑.”
유채가 몸을 뒤척이면서 옅은 신음소리를 뱉었다. 마법은 외상만 치료할 뿐 고통은 어찌해 주지 못한다. 유채는 온몸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끙끙 앓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이 편안할 수 있도록 다시 바르게 눕혀주었다. 그때 치마가 올라가면서 유채의 멀쩡한 발목에 걸려 있는 발찌가 보였다. 발찌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저게 아니었으면 더 늦었을지도 몰랐다. 유채를 찾아 엉뚱한 방향으로 갈 뻔한 그때, 발찌가 짤랑이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 덕분에 제대로 방향을 잡아 유채를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유채는 그 미친놈의 아래에 깔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프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밀랍처럼 굳어 있는 유채의 얼굴을 보며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인가 싶다가도 다친 모습을 보면 갑자기 가슴이 바닥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눈물 자국이 남은 유채의 눈가를 훑었다. 그때, 구하지 못한 에리카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구해냈다.
“라이. 나, 들어간다.”
바실리사가 에릭과 자신의 주치의인 뱀 수인과 마레 위르의 혼혈인 마리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루프스가 유채의 일로 바쁜 와중에 바실리사와 헤르티아, 단테가 베노르 콩레수스를 정리했다.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지만, 일단 이 일은 크게 만들지 않기로 수장들은 합의했다. 상황을 정리한 후 궁으로 돌아가서 원래대로 일주일간의 성대한 연회를 보낸 뒤, 각자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바실리사는 일의 경과도 알려주고 유채의 치료도 도울 겸 마리나를 데리고 온 것이다.
“여기, 옷이 마땅한 게 없어서 우리 일족의 궁녀들이 입는 옷이라도 들고 왔어. 그 찢어진 옷 계속 입고 있을 수도 없잖아?”
“고맙군.”
루프스는 옷을 받았다.
“설마 네가 직접 갈아입혀 줄 거야? 아무리 의식 없는 애라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마리나가 상처 봐주면서 갈아입혀 줄 테니까 잠깐 막사에서 나가 있어.”
바실리사가 고갯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됐다. 오르페가 있어.”
“오르페는 수컷이잖아. 그리고 오르페의 말을 들어보니까, 지금 수컷이 만지면 거의 발작 수준으로 몸을 떤다고 하던데. 그래서 큰 상처밖에 치료 못 했다며. 오르페보다는 마리나가 나아. 얘도 실력 괜찮아. 마레 위르와 혼혈이라 오히려 마법에 훨씬 유능해,”
루프스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서 있는 마리나를 보았다. 녹색의 비늘이 목에 남아 있다는 것 외에는 마레 위르와 똑같았다. 동물형을 취할 수 있는 수인과 마레 위르 사이의 혼혈은 수인에 좀 더 가깝게 태어나거나 마레 위르에 더 가깝게 태어나는 편으로 나뉘는 편이었는데, 마리나는 전자였다. 루프스가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실리사와 에릭은 그를 따라 막사 밖으로 나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호전적인 소들이 이때가 기회다 하고 날뛸 것인데.”
“벨라토르를 확대 배치할 거야. 명분은 충분해. 내게 앙심을 품은 놈이라 반란의 위험이 있으니 그러겠다면 그쪽도 막을 명분이 없어. 또한 치안 유지도 충분한 명분이 되고. 벨라토르를 확대 배치해서 마음에 안 들지만, 헥터 놈이 수장 자리 유지하는 것을 도와야지. 허수아비로 적격인 놈은 아니지만.”
“헥터는 그렇다 치고, 토모스는? 젤다의 죽음에 가장 크게 분노할 텐데.”
“그놈이 무서워하는 게 나야. 감히 내게 딸의 죽음에 관해서 하극상을 저지른다고? 제 분수를 알아야지.”
루프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젤다는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았다. 펠릭스 다우스를 시키느니 사실은 제가 직접 씹어서 먹어버리고 싶었다. 정말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시체도 남지 않는 비참한 죽음은 면하게 해준 것이다. 루프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야. 라이, 잠깐만.”
바실리사가 루프스의 옷자락을 들췄다. 어깨에 멍이 크게 들어 있었다. 루프스는 귀찮은 듯이 바실리사의 손을 치워냈다. 좀 전의 싸움에서 유채의 안전을 위해서 헥터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어 생긴 멍이었다. 큰 상처도 아니어서 무시하고 있던 것이다.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멍이 큰데 오르페한테 안 가고 뭐해?”
바실리사가 떠드는 것을 무시하고 루프스는 막사의 천을 올렸다. 치료와 옷 갈아입히기가 끝났는지 마리나가 유채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루프스가 들어가자 마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어떤가?”
“온몸에 멍과 타박상이 심해 일단 치료하였습니다.”
마리나는 좀 더 설명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등에는 헥터가 살을 깨문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가슴에는 손자국 모양의 시퍼런 멍과 손톱으로 인한 깊은 상처가 있었다. 가슴의 멍은 꽤 심각해 당분간은 멍 때문에 목욕도 하기가 힘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혹시나 말씀을 드리자면, 보통 이런 일을 겪은 암컷들은 큰 후유증을 앓습니다. 불안해하고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간혹 수컷들의 접촉에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예민해집니다. 심할 경우는 정신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레티티아님도 후유증이 상당하실 것으로 예상합니다.”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강간 미수까지 당했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나는 몸의 회복을 돕는 약을 꺼내놓았다.
“당분간은 푹 쉬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유 마법은 물이 쏟아지는 포대를 천으로 대강 기워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회복이 중요하니 당분간은 몸을 움직이지 않으셔야 하고 푹 주무시는 것이 좋습니다.”
마리나와 오르페가 처방한 약에는 수면제가 섞여 있었다. 그러니 잠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마리나, 미안하지만 여기 환자가 한 명 더 있어. 상처 좀 봐줘.”
막사 안으로 들어온 바실리사가 루프스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녀의 성격상 오르페를 부르든 마리나에게 시키든 치료받을 때까지 매달릴 것이 분명하이기 때문에 루프스는 얌전히 상의를 벗었다. 자잘한 흉터가 가득한 탄탄한 상체가 들어났다. 조각 같은 근육질의 상체에 붉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마리나는 손에 마력을 모아서 루프스의 몸에 쏟아 부었다. 루프스는 마력 저항력이 강했기 때문에 마리나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자신이 운용 가능한 마력의 절반 이상을 쏟아 부은 후에야 피멍이 사라졌다. 마리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루프스는 다시 상의를 챙겨 입었다.
“루프스님, 돌아갈 준비가 끝났습니다.”
케릭스가 막사 앞에서 보고했다.
“알겠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안아 올렸다. 되도록 발목이나 손목의 무리가 가지 않게 안았는데도 유채가 약한 신음을 흘렸다. 루프스는 그녀를 달래듯이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이 흔들리지 않게 단단하게 안고 평소보다 부드럽게 움직였다.
막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루프스는 케릭스에게 명을 내렸다.
“가서. 레티티아가 원래 쓰던 방을 다시 준비해 놔.”
“……알겠습니다.”
루프스는 여태껏 보았던 유채의 모습 중 가장 연약하고 여린 모습을 애잔하게 내려다보았다.
* * *
“꺄아아아악!”
유채는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났다. 몸을 버둥거린 탓인지 부러진 손목과 발목에서 아릿한 아픔이 몰려왔다. 유채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무릎을 감싸 안고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몸을 떨었다. 꿈에 헥터가 나왔다. 헥터는 그녀의 사지를 묶어놓고 혀로 몸을 핥아 내렸다. 유채는 그 남자의 손아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유채는 손톱을 세워서 팔을 긁었다. 그 남자의 손이 닿은 곳이 모두 더럽게 느껴졌다.
문이 벌컥 열리고 루프스가 들어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팔목을 잡아챘다.
“아아악!”
유채는 루프스의 손이 닿자마자 몸부림을 쳤다. 유채는 그의 손을 안간힘을 다해서 떨쳐 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반응에 당황하여 팔목을 놓았다. 유채는 몸을 덜덜 떨면서 루프스와 멀어지기 위해 애를 썼다.
“레티티아. 지금…….”
루프스가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갈 때마다 유채는 아픈 것도 아랑곳 않고 몸을 계속 뒤로 빼었다. 그러면서도 보기 불쌍할 정도로 몸을 떨어댔다.
기어코 유채는 침대에서 떨어졌다. 루프스는 심하게 당황해서 얼른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지 마!”
유채는 제 몸을 끌어안으면서 악을 썼다. 유채의 팔을 잡으려던 루프스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섰다.
“오지, 오지 마요. 제, 제발.”
유채는 울면서 흐느꼈다. 옅은 흐느낌은 어느새 엉엉 우는 소리로 바뀌었다. 유채는 몸의 아픔과 제 처지의 서러움에 엉엉 울었다.
루프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가 억지로 손을 대버리면 유채는 약한 도자기 인형처럼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루프스는 명치 부근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루프스가 입을 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유채는 그것도 참을 수가 없어 고개를 뒤로 뺐다. 유채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갈 것처럼 울었다.
“내가 늦어서 미안하다. 그러니.”
그만 울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제 감정을 모두 토해내고 있는 마레 위르에게 그만 게워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무너진 둑을 다시 세우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프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유채가 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달래주려고만 하면 몸을 떨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부러진 발목과 손목이 덧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유채는 허리를 굽히고 오열했다. 공포, 비참함, 자괴감, 온갖 어두운 감정들이 밀려나왔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줄이 툭 끊겨 버렸다. 그 남자에게 뺨을 맞을 때가 생각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계속 맞기만 했다. 다리 한쪽만 남겨두고 사지가 망가졌을 때, 그 남자가 뒤에서 끌어안고 온몸을 그 더러운 손으로 더듬었다. 지금도 그 손이 제 몸을 더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유채는 다리를 끌어안고 웅크려서 통곡하였다.
“내가 미안하다.”
루프스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다. 유채는 이제 지쳐서 나올 눈물도 없는 것인지 꺽꺽대면서 숨을 헐떡였다. 울다가 지친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루프스는 얼른 손을 뻗어서 바닥에 닿기 전에 유채의 몸을 받았다. 유채는 탈진한 것인지 눈을 깜빡이더니 그대로 감았다. 실신한 것 같았다.
루프스는 축 늘어진 유채의 몸을 다시 침대로 옮겨주었다. 지나치게 가벼운 몸이 안쓰러웠다. 루프스는 유채가 흘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마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기력이 떨어지니 감기 기운이 생긴 것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턱선과 볼을 쓸었다. 그렇게 당당했던 유채가 이렇게 한없이 약해진 모습에 루프스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루프스님. 저 오르페입니다.”
눈치 빠른 궁녀 하나가 시키기도 전에 오르페를 불러왔다. 자던 중에 끌려온 것인지 오르페는 우스꽝스러운 분홍색 잠옷 위에 분홍색 가운을 걸치고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다급하게 들어왔다. 오르페는 실신한 유채의 맥을 짚었다. 맥이 옅고 불안정했다. 확실히 기력이 쇠해 있었다. 몸부림을 친 것인지 기껏 감아놓은 부목이 비뚤어져 있어 그것을 바르게 대어주고 체력을 회복하는 마법을 불어넣었다. 혹시 몰라 수면 유도 마법까지 걸었다. 지금은 깊은 잠이 답인 상태였다.
“내 방으로 와라.”
루프스는 치료가 끝난 오르페를 제 방으로 불렀다. 오르페는 루프스를 따라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루프스는 침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루프스님, 볼이…….”
루프스는 볼을 쓸었다. 피가 묻어나왔다. 유채가 팔을 휘두를 때, 그녀의 손톱에 찢긴 상처였다. 루프스는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별거 아니다. 그래서 지금 레티티아의 상태는 어떤 건가?”
“일단 보이는 외상은 다 치료했습니다. 하지만 내상까지 다 치료하고 외상도 완벽하게 치료하기 위해서는 푹 주무시고 쉬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발작은?”
“그것이…….”
오르페가 머뭇거렸다.
“지금 워낙 충격이 깊은 상태이라 발작이 어느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수컷의 접촉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으로 인한 거란 겁니다.”
오르페는 루프스의 표정을 살폈다. 약간 지쳐 보이는 표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르페는 유채를 동정했다. 혹여 루프스가 유채의 정신력을 운운하면서 정신력이 강하면 이겨낼 수 있는 거라고 말하며, 예전처럼 함부로 대할 것이 걱정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유채는 정말 무너질 것이었다. 오르페는 크게 각오를 하고 입을 열었다.
“루프스님, 지금 레티티아님이 겪고 있는 것은 정신력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건장한 수컷도 그렇게 얻어맞으면…….”
“안다. 알고 있어. 그런 건 정신력과 상관없지.”
루프스가 피곤한 듯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르페는 루프스의 의외의 말에 크게 놀랐다.
“치료 방법은 있나?”
“없습니다. 그저 증상을 완화하는 것 외에는.”
“알겠다. 늦은 밤에 수고했다. 돌아가라.”
오르페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루프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넓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좀 전에 본, 겁을 잔뜩 집어먹은 유채의 얼굴을 떠올렸다. 왼쪽 가슴이 묵직하게 아파왔다. 펠릭스 다우스가 제게 복종하기 전에 짓는 표정이 딱 그런 것이었다. 공포, 비참함이 섞여 체념하기 직전의 바로 그 표정.
루프스가 유채에게 처음에 보고자 한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한데, 원하는 표정을 보았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저에게 대들지 않고 무서워하면서 우는 유채를 보면서 루프스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제게 복종하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어도 좋고 빈정대어도 좋다. 지금처럼 죽은 눈을 하고 벌벌 떠는 유채가 아니라 생기 있는, 살아 있는 유채를 원했다.
울어도 좋고 화를 내도 좋고 짜증을 부려도 좋고 심지어 지난번처럼 제가 아닌 다른 수컷이나 암컷에게 웃고 있어도 좋다. 특히 그 바닷가에서의 옅은 웃음도 좋았다. 지금 같은 죽은 눈만 아니면 된다. 그는 묵직하게 아릿한 왼쪽 가슴, 심장이 있는 부근을 꾹 눌렀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는 분명이 알았다.
레티티아의, 아니, 유채의 생기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아릿한 가슴의 통증 사이로 그것 하나만은 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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