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늑대왕 루프스-4화 (4/16)

Chapter 4. 카를리티오[Catulitio]

“루프스님, 이 처우는 억울합니다.”

토모스는 통통했던 얼굴이 반쪽이 된 채로 루프스 앞에 고개를 숙였다. 보통 베노르 콩레수스에서 루프스가 자리를 비우면 플로서스가 하루 동안 일을 위임받아야 하나, 플로서스가 집에 칩거하고 있는 덕택에 토모스가 플로서스의 대리로 궁에서 그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베노르 콩레수스에서 루프스의 몰이꾼에 합류하는 것은 큰 영광이라 제 어린 딸이 아리아 대신 가고 싶다고 졸라 무리하게 힘을 써서 몰이꾼에 넣어주었다. 젤다가 돌아오면 주기 위해서 예쁜 머리 장식도 하나 사놓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건만 돌아온 것은 처참한 시신이었다.

예쁘고 고운 얼굴은 날카로운 늑대의 이빨에 반이나 찢겨 나갔고 머리는 터져서 뇌수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팔이나 다리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심지어 내장까지 배에서 쭉 흘러나와 있었다. 아비 된 입장에서야 이것이 딸임을 알아본 것이지, 만일 다른 이였다면 그저 고깃덩어리로만 볼 것이었다. 토모스는 젤다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리고 자존심 다 버리고 케릭스의 다리를 부여잡고 물었다. 도대체 젤다가 왜 이리 되었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레티티아를 건드린 죄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손에 탁 풀렸다. 루프스의 침실에 상주한다는 천박한 암컷 마레 위르였다. 청순하고 순진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밤기술이 좋아서 루프스의 총애를 받는다는 펠릭스 다우스였다. 제 딸이 그 다리나 벌리는 천박한 년 때문에 죽었다고? 토모스는 황당해서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제가 누구인가? 로보 사후, 끝까지 그에 대한 충정으로 지금의 루프스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를 찾았다. 플로서스가 늑대 일족에 보존에 집중했던 것과는 다르게 저는 루프스만 찾았다. 그런 자신을 이렇게 배신하는 것인가? 토모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토모스는 제 딸이 왜 죽었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딸아이에게 딸려 보냈던 수행원에게 자세히 들은 후 꾹꾹 눌러놓았던 화가 폭발했다. 루프스는 제 딸의 시신을 치워 버리라고 말했다! 태워 버릴 뻔했던 시신을 케릭스가 간신히 말려서 그나마 수습해서 가져온 거라고 했다.

토모스는 그 순간부터 눈이 벌겋게 물들었다. 젤다의 장례의 준비를 하니 어느덧 삼 일이 흘렀다. 토모스는 제 딸의 발인 전에 이 한을 풀어주고자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밤을 샜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알현을 청했다. 아직 베노르 콩레수스로 인한 뒤풀이 연회 겸 일족간의 화합의 장이 마련되고 있는 중이기에 루프스는 예정된 시간보다 약간 늦게 도착했다.

“제 딸은 루프스님의 백성이며, 저희 늑대 일족의 소중한 일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하디천한 마레 위르의 목숨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제 딸아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

“내 하나 묻지.”

루프스가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그은 지금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들어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대들의 주인은 누구이며, 그대들이 따라야 하는 자는 누군가?”

“……루프스님이십니다.”

“그대의 딸은 누구의 말을 들었나?”

“상대는 타우루스 헥터입니다. 제 딸이 타우루스 헥터의 협박을 어찌 무시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대는 나보다 타우루스 헥터가 더 두려운 것인가?”

“예?”

루프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묵직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서 토모스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토모스는 루프스의 기에 눌려서 입을 열지 못했다. 루프스의 손이 토모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젊을 적 여우 일족과의 전투에서 얻은 커다란 상처가 남아 있는 그 오른쪽 어깨였다.

“나는 두 번 말하는 게 정말 귀찮아. 그런데 말이야, 요즘 나를 두 번이나 말하게 만드는 수인들이 많아.”

루프스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딸을 잃은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 특별히 다시 한 번 묻지. 나보다 헥터가 더 무서운가?”

“아, 아닙니다.”

토모스가 굳은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루프스는 토모스의 어깨를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예전의 전투로 약해진 토모스의 어깨는 작은 충격에도 금방 욱신거렸다.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럼 젤다는 왜 헥터의 말을 들었지? 내가 내 일족의 목숨을 헥터의 손아귀에서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토모스가 이번에는 신음을 삼켰다. 어깨를 누르는 손아귀의 힘이 상당했다.

“그대의 딸은 타우루스의 꼬임에 넘어가 감히 내 것에 손을 대었고 레티티아는 그 덕에 죽기 직전까지 폭행을 당했다.”

“그깟 마레 위르의 목숨이 제 딸보다 중합니까! 전 로보님께 제 충정을 바쳤습니다. 모두가 찾지 않았던 루프스님을 마지막까지 찾았던 것은 바로 저 토모스입니다. 제 충정은 무엇입니까? 제 충정이 그깟 천박하게 다리 벌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흐억!”

루프스가 토모스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토모스의 발이 허공에서 덜렁거렸다.

“충정? 내가 알기론 베니니타스가 오자마자 도망간 것이 바로 네놈일 텐데?”

루프스는 분명히 기억했다. 아버지와 베니니타스의 싸움이 시작되고, 싸움의 패색이 짙어지자 가장 먼저 자리를 뜬 것이 바로 토모스였다. 저를 먼저 찾았다고? 루프스는 비웃었다.

“네가 나를 찾은 것은 내가 살아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겠지. 네놈의 권력을 위해서. 충정? 웃기는 소리 하고 있어.”

토모스가 저를 찾은 이유는 하나였다. 늑대 일족이 타 일족과 다른 점은, 이니투스를 숭상하여 그의 자손만을 수장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상징성이었다. 물론 이니투스의 자손들은 항상 가장 강했기에 이 전통은 이어질 수 있었다. 바로 그 늑대 수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토모스는 저를 찾은 것이었다. 근래에 들어본 말 중 제 아버지를 향한 충정으로 저를 찾았다는 말만큼 웃긴 것도 없었다.

“미안하지만, 난 네놈의 손아귀에서 놀아줄 생각은 없다.”

루프스가 손을 놓았다. 토모스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토모스는 컥컥거리면서 얼른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 올려다보자 루프스는 그의 어깨를 밟았다.

“그리고 내가 예전에 경고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것을 건드리는 놈은 어떻게 하겠다고?”

토모스는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죽음으로 보답해 주겠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틀렸나?”

루프스는 토모스의 어깨를 밟은 발에 힘을 주어서 눌렀다. 토모스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뚝,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토모스는 어깨를 감싸 쥐고 바닥을 굴렀다. 루프스는 마치 그를 벌레 보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그대의 딸에게 적합한 벌을 내렸다.”

루프스가 무릎을 굽혀서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토모스을 향해 곱게 눈을 접어 보였다.

“그래서 뭐가 잘못됐나.”

루프스는 토모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딸을 잃은 그대의 마음에 심심치 않은 위로를 표하네.”

루프스는 조롱인 것인지 정말 조의를 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건넸다. 토모스는 이를 갈았다. 정말로 딸의 죽음에 대한 조의를 위한 것이라 해도 제 딸을 죽인 이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루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오늘 또 한 가지를 알았어. 이렇게 쓸모없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정말 고마워.”

루프스는 알현실에 토모스를 남겨두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토모스는 분한 듯이 멀쩡한 팔로 바닥을 내리쳤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알현실을 채웠다.

딸각.

헤나가 열쇠를 돌려서 문을 열었다. 블루벨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유채의 땀에 젖은 앞머리를 넘겨주고 있었다. 블루벨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온 인물이 루프스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어떤가?”

“점심 식사 하시고 약 드셨어요. 금방 잠에 드셨고요.”

블루벨이 유채가 무엇을 했는지 설명했다. 마법은 상처를 없애기만 할 뿐 통증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심하게 지친 유채는 말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쉬는 것이 답이었다. 오르페는 유채를 위해서 수면제를 처방했는데, 문제는 그것이 수인들의 기준으로 만들어졌단 것이었다.

유채는 매번 약을 먹자마자 기절한 것처럼 잠에 들었다. 블루벨은 신음을 흘리며 땀을 흘리는 유채를 안쓰럽게 내려다보았다. 수면제의 부작용이었다. 유채가 말하기를 잠들고 나면 악몽을 꿀 때가 있는데 수면제가 너무 독해서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 공포라고 했다. 유채가 신음을 흘리고 땀을 흘리는 것을 보아서 지금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루프스가 다가오자 블루벨은 옆으로 살짝 물러섰다. 루프스는 조금 불편하게 꺾인 유채의 목을 베개에 바로 눕혀주었다.

“땀은 왜 이렇게 많이 흘리나?”

루프스는 유채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요. 삼 일간 종종 그러셨어요.”

“일어나면, 목욕을 시켜라.”

“그건 유채. 아니 레티티아님이 좋아하시지 않으실 것 같아요.”

블루벨은 크게 각오를 하고 입을 열었다. 유채는 지금 온몸에 입은 상처로 목욕하는 것을 괴로워했다. 비누 묻힌 천으로 몸을 문지르는 정도만으로도 몸을 움찔거리면서 욕조의 가장자리를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움켜쥐곤 했다. 가장 통증이 심한 곳은 발길질을 당한 배와 무자비하고 거칠게 다뤄진 가슴이었다. 가슴의 멍이 크고 심해서 유채 본인도 손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 유채에겐 목욕 자체가 괴로운 일이었다. 오죽하면 땀에 범벅이 되었는데도 목욕을 거부하곤 했다.

“어. 오르페님이 되도록 물에 닿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냥 내일 아침에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해라.”

루프스는 선뜻 블루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블루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근 루프스는 유채의 일을 모두 블루벨에게 맡겼다. 또한 블루벨의 공적을 높게 사서 추가적인 보수도 지급했는데 그녀는 제 일 년 치 봉급에 해당하는 액수에 입을 떡 벌렸다.

“수고했다. 나가서 쉬어라.”

루프스의 말에 헤나는 눈짓으로 블루벨을 방 밖으로 불러냈다. 블루벨은 약간 불안한 눈초리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루프스는 의자를 당겨서 침대 가까이에 두고 앉았다. 블루벨이 유채의 땀을 닦기 위해 가져다 놓은 대야가 보였다. 수건이 찬물에 반쯤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세숫대야 옆에 궁녀들이 그가 내린 명령대로 새로운 화병을 찾아 숙면을 도와준다는 라벤더 꽃을 꽂아 놓았다. 루프스는 직접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유채의 이마를 닦았다.

“보기 괴로울 정도로 말랐군.”

루프스는 유채의 목도 닦았다. 원래도 얇고 연약한 목이였지만, 삼 일 사이에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에 비유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충격이 심한지 식사도 잘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루프스가 유채의 손을 말끔하게 닦아주었다. 루프스는 조금 전 보다 고른 숨을 내뱉는 그녀를 보면서 세숫대야에 수건을 대강 던져 놓았다.

유채의 하얀 피부는 더 하얗게 질렸고 손가락은 뼈밖에 남지 않았다. 숨을 쉬지 않았다면 송장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루프스는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은 유채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되기를 한 번도 바란 없었다.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입술에 닿는 손은 마치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았다. 그는 가만히 그 손을 잡고 있었다.

【‘레티티아님은 헥터님과 비슷한 수컷 수인에 대한 공포감이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수인과 닿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유채는 처음에는 수컷이라면 모조리 몸을 떨면서 손을 떨쳐 내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프레드릭을 받아들였고 이내 오르페도 괜찮아졌다. 그러나 루프스는 아니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너 때문에 나도 이상한 것 같다.”

소 수인 일족의 일과 다른 수인 일족 수장과의 일로 바쁜데도 그의 모든 신경은 유채에게 쏠려있었다. 직접 마주하고 이야기하고자 하였으나 유채는 그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소리를 질렀으며 손이라도 닿으면 울음부터 터뜨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그만하라고 윽박지르고 몰아붙이고 싶다가도 눈물이 범벅이 돼서 숨을 헐떡이는 유채를 보면 그만 맥이 풀렸다.

어제도 유채의 비명소리에 잠이 깨 달려왔다. 유채는 얼굴을 손에 묻고 울음을 토해내었다. 루프스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었고 가까이 앞으로 다가갈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유채가 우는 것이 외롭지 않게 지켜봐줄 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문을 닫고 그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와 누워 있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홧홧했다. 아무리 두드려 보아도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맺혀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요즘 가슴이 답답하여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매우 피곤했다.

가만히 누워 있는 유채를 보면 그 답답한 느낌도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루프스는 손에 들어온 유채의 여린 손에 안심했다. 그는 유채의 앞머리를 넘겨서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루프스의 입술이 코를 타고 내려와 코끝에 잠시 머무르더니 살짝 떨어졌다. 그리고 유채의 입술에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겠지…….”

루프스는 유채의 입술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대신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입술 틈으로 옅게 나오는 숨이 그녀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힘든 일을 겪어서 입술은 거칠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달큰한 향은 여전했다. 몸에 열이 오른 루프스의 고개가 다시 조금씩 기울어졌다.

“흑.”

여린 신음소리가 들리자 루프스는 당장 고개를 들었다. 겨우 제정신이 돌아왔다. 지금의 행동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반대편 손, 붕대에 둘둘 감긴 손을 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카를리티오가 아직 이 주나 남았는데 이런 반응은 이상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다시 입술을 맞추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 * *

“라이. 팔에 감은 붕대는 뭐냐?”

루프스는 바실리사와 실없는 수다라도 떨면 나아질까 싶어서 그녀를 찾았다. 바실리사는 한참 에릭을 붙잡아 그 입술을 꿰매기 위해서 포효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실리사는 루프스의 옷소매 안으로 보이는 붕대에 관심을 보였다. 루프스는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팔을 들어올렸다.

“오르페의 유난.”

“아. 그나저나 나하고 단순히 수다나 떨자고 온 건 아닐 테고. 뭔 일이야?”

“베노르 콩레수스가 완전히 끝나도 좀 오래 머물러 줬으면 하는데.”

“유채 때문에?”

바실리사는 차를 홀짝이면서 루프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제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강력한 긍정이었다. 바실리사는 입술을 옆으로 틀었다. 아무래도 그가 유채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헥터를 반죽음으로 만들어놓고 토모스와 척을 질 텐데도 망설임 없이 젤다를 죽였으며 지금은 유채를 위해서 최상의 약재들만 들여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유채를 펠릭스 다우스로 두는 것으로 보아 그녀를 정말 암컷으로 아끼는 것인지 그냥 총애하는 펠릭스 다우스로 보는 것인지가 헷갈렸다.

진짜 마음에 담은 암컷이라면 당장 파렌티아를 회수하고 제 옆에 앉히기 위해서 난동을 부렸어야 했다. 바실리사는 루프스의 마음이 아직 그 정도 마음은 아닌가 싶었다.

“그 팔 왜 다쳤는지 알려주면 남아 있을게. 뭔 일로 다쳤냐?”

“도자기 조각에 찔렸다.”

“응?”

바실리사는 예상하지 못한 이유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프스는 미간을 문지르고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꺄아아아악!”

루프스는 레티티아의 비명소리에 잠에서 깼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레티티아는 항상 악몽 때문에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서 비명을 질렀다. 처음에는 가서 달래려고 했었지만 이젠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소리가 잦아들기만 기다렸다. 제가 가면 유채는 더 심하게 오열을 하고 탈진하여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오르페가 당부한 사항이었다. 당분간은 유채가 비명을 질러도 그녀를 찾지 말라는 것이었다. 유채는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고 지금 그녀에게 루프스는 공포 그 자체일 뿐이었다. 유채의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얼굴을 보이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오르페의 말도 있고 해서 루프스는 방에서 꾹 참고 기다렸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루프스는 당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이 너무 다급해서 여러 번에 헛손질 끝에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침대에서 떨어져 내려서 아픈 발목을 감싸 쥐고 몸을 벌벌 떠는 유채였다. 유채의 초점이 흐릿한 눈이 루프스를 발견하자마자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버둥거렸다. 루프스는 레티티아의 발목이 잘못될 것 같아서 다급하게 외쳤다.

“가만히 있어!”

“오지, 오지 마요! 오지 마!”

유채가 비명처럼 외쳤다. 유채는 루프스가 다가가자 또 다시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다가 그 몸부림에 침대 옆에 있던 탁자가 쓰러졌다. 탁자가 쓰러지면서 꽃병이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도자기 파편이 유채의 볼에 긴 실금을 만들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도자기 파편에 다칠까 봐 걱정되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푹.

“윽.”

루프스는 팔에 통증을 느끼곤 신음을 삼켰다. 유채가 어느새 도자기 조각을 움켜쥐고 그를 향해 휘두른 것이었다. 날카로운 파편 탓에 그것을 쥔 유채의 손에서도 피가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루프스는 제 상처보다 유채의 손바닥이 더 걱정이 되었다.

“놔요.”

유채가 너무나도 연약한 얼굴을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제발. 놔줘요……. 제발. 놔줘요…….”

유채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서 흐느낌으로 번져 갔다. 루프스의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하얀 가운을 붉게 적셨다. 루프스는 여전히 도자기 조각을 구원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움켜쥐고 있는 유채가 걱정되었다. 그녀의 손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네가 도자기 조각을 놓으면 놔주겠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채는 벌벌 떨면서 손에서 힘을 뺐다. 바닥으로 떨어진 도자기 조각을 루프스는 발로 차서 멀리 밀어냈다. 그리고 약속대로 유채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유채는 양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쥐고 벌벌 떨었다. 그녀의 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 루프스는 손을 뻗었다가 멈칫하여 그대로 거두었다. 유채가 그의 손을 거부하며 몸을 살짝 뒤로 빼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작은 방이 유채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다시 루프스의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아파왔다.

“미안하다.”

루프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우는 유채를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유채는 계속 오열했다.

새벽부터 온 체력을 다 쏟아부은 후에 탈진한 유채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집에 가고 싶어.”

유채는 가슴에 진득하게 묵혀놓은 소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을 놓고 쓰러지는 유채의 몸을 루프스가 끌어당겨서 안았다. 가는 어깨를 안자 축 늘어진 그녀의 얼굴이 루프스의 목덜미에 놓였다. 루프스는 너무나도 말라서 가여운 몸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루프스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엇 미안하다는 것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유채에게 계속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안아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에 흐르는 피를 대강 닦은 뒤에 갑작스런 소동에 잠이 깨서 달려온 궁녀를 잡아 오르페를 불러오라고 일렀다. 오르페는 늙어서 한 번 깨면 잠도 쉽게 안 온다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허둥지둥 달려왔다.

“일단 손부터 봐라.”

오르페는 유채의 찢어진 손바닥을 살폈다. 매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참 제 몸을 힘들게 만드는 암컷이었다. 오르페는 그것이 애잔하여 혀를 차면서 유채의 손바닥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궁녀가 받아온 물을 천에 적셔서 남은 피를 닦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발목은 혹여 덧나지 않았나?”

“한 번 봐야 알겠습니다.”

오르페는 유채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발목을 손으로 만져 살폈다. 실신한 상태로도 고통이 느껴지는 것인지 유채가 움찔거렸다.

“다행히 어디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래 걷는 것과 같은 발목에 무리가 가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마법이란 것은 말 그대로 임시방편인지라 완전히 뼈가 붙을 때까지는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잘못했다가는 뼈가 뒤틀려 붙을 수 있습니다.”

오르페는 유채의 치맛자락을 다시 내려주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오르페는 유채가 가여워서 부어 있는 눈에도 마력을 쏟았다. 급한 처치를 끝내고 돌아서는 오르페의 눈에 피를 흘리고 있는 루프스의 팔이 보였다.

“루프스님, 팔이…….”

“아, 이거?”

루프스가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오르페의 조금 당황한 얼굴에 루프스는 팔을 돌려서 상처 부위를 살폈다. 그가 보기엔 그렇게 심각한 상처가 아니었다. 예전 전쟁터를 홀로 떠돌아다닐 때는 이보다 더 심한 상처도 입은 적이 많았다. 이 정도는 가만히 둬도 나을 정도인 것이다.

소 수인이 수인들 중 가장 힘이 강하다면 늑대 수인들은 빠른 회복력을 자랑했다. 루프스는 블랑카의 혈통 때문인지 다른 늑대들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수인들에 비해서는 월등하게 회복력이 빨랐다. 루프스는 제 치유력 때문에 이 정도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편이었다.

“혹시 작은 도자기 조각이 박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처를 보여주시지요.”

오르페가 유난을 떨었다. 루프스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오르페 고집을 부렸다. 루프스는 결국 귀찮다는 얼굴로 팔을 내밀었다. 오르페는 불을 밝히고 상처를 찬찬히 살폈다.

“도자기에 묻어 있는 유약이 독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오르페는 루프스의 상처를 붕대로 감아주면서 경고했다. 마력 저항력이 심각하게 강한 루프스에게는 마법도 통하지 않아 약을 통한 치료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루프스는 오르페의 유난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았다.

“당분간은 레티티아님을 만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팔의 치료를 끝낸 오르페는 벌을 맞을 것을 각오하고 루프스에게 말했다.

“지금 레티티아님은 수컷의 접촉에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너와 에릭 놈은 괜찮던데?”

“정확히는 제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수인 수컷에 대한 공포입니다. 헥터님과 비슷한 건장한 체격의 수인 수컷들을 헥터님과 같게 보는 것이죠.”

오르페는 유채의 증상을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사실 유채는 수인의 수컷에게 공포감을 느끼기는 하였지만, 참을 만한 수준으로 천천히 회복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야 괜찮아지는 수준이라 무의식적으로 몸을 떠는 것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과거 어떤 방식으로든지 제게 해를 입힌 수컷에 한해서는 거의 까무러칠 수준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루프스의 손이 닿기만 하면, 아니, 그를 보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고 탈진할 때까지 우는 이유였다. 루프스가 과거의 한 짓이 유채에게는 그이 언제 헥터처럼 돌변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건드리게 하는 스위치가 된 것이었다.

“악몽을 꾸는 것은 해결 가능한가?”

“무의식의 영역은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예 꿈을 꾸지 않게 하려면 굉장히 독한 수면제가 필요한데 잠깐은 모르겠지만 오래 복용하면 결국 몸에는 좋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은?”

“한번 상처를 입으면 몸보다 회복하기 힘든 것이 마음이고 정신입니다. 정신도 회복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몸이 낫는 것과는 달리 언제 어떻게 회복될지 모릅니다. 신이 아닌 이상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지금은 되도록 안정된 상태에서 몸부터 회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뒤에 정서적인 면도 다스린다면 유채 양도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당분간 나는 레티티아의 눈에 띄지 말라는 건가? 주인 보고 오라 가라 하는 건방진 펠릭스 다우스는 처음이네.”

말의 내용은 거칠기 짝이 없었으나 막상 루프스의 말투나 얼굴 표정에는 동정의 기색이 섞여 있었다. 오르페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왕진 가방을 챙겼다. 그러고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그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을 했는데도 움직이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저. 루프스님?”

“먼저 나가봐라.”

루프스가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오르페가 걱정과 당혹이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냉소를 흘렸다.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나가봐. 내가 설마 레티티아를 덮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아무리 개망나니 같아도 최소한의 선은 있다.”

“아, 아닙니다. 나가보겠습니다.”

루프스는 허리를 숙이고 종종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루프스는 착잡함이 섞인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얌전히 누워 있는 유채를 보았다. 오르페가 숙면에 좋은 수면제를 먹여 그녀는 마치 죽은 마레 위르처럼 미동도 없이 잠이 들어 있었다.

【‘레티티아님 때문에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는 것은 알지만, 부디 아주 조금만 참아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금 제일 괴로우신 분은 레티티아님입니다.’】

헤나가 옷시중을 들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수면을 방해받은 것은 맞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채에게 윽박지를 생각은 없었다. 그가 좋은 수인이고 인정 많은 수인이어서 그녀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 놓아버린 것과 같은 얼굴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공허한 눈동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 유채의 그런 눈을 볼 때마다 죄스러웠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싫어…… 싫어…….”

잠꼬대인지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루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채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침대 시트를 주름이 질 정도로 꽉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턱을 살짝 눌러서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 것을 막았다. 악몽 따위는 꾸지 말고 잠들라는 오르페의 배려가 아무런 소용도 없었는지 유채는 겁에 질린 채 고개만 저었다.

“레티티아, 괜찮다.”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루프스는 유채의 고개를 잡고 말했다. 유채는 뭐가 무서운 것인지 몸부림을 치며 쉬이 진정하질 못했다. 루프스는 오르페를 다시 불러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였다. 고민 끝에 루프스는 이불을 들추고 유채의 옆에 비스듬히 누워 그녀를 끌어안았다.

“지금 여기에 너에게 해를 입힐 자들은 없다. 그러니 괜찮아.”

루프스는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릴 적 악몽을 꿀 때마다 블랑카가 해주던 것처럼 유채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톱이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유채의 몸부림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루프스는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귓가에 괜찮다고 계속 속삭여 주고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유채는 그의 품을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이내 진정되었다.

“흑.”

유채는 잠을 자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루프스의 잠옷이 유채의 눈물에 젖었다. 루프스는 흐느끼는 유채의 허리를 당겨 안아서 괜찮다는 말을 계속 속삭였다.

“엄마.”

유채의 입에서 여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루프스는 그녀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보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유채는 계속 돌아가고 싶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루프스는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에 걸린 파렌티아가 보였다. 유채는 영원히 그의 것이며 그녀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물건이었다.

한참 후에야 유채는 숨을 쉬는지 의심될 정도로의 옅은 숨을 뱉으며 잠이 들었다. 루프스의 손가락이 파렌티아의 걸쇠 부분으로 향했다. 이것을 풀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이것을 풀어주면 유채는 더 이상 그의 펠릭스 다우스가 아니었다.

루프스는 제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유채를 보았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계속 보느니 차라리 이것을 풀어주고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에 유채는 밥도 먹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살아 있는 마레 위르인지 유령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유채를 볼 때마다 왼쪽 가슴이 욱신거렸다.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이런 이상한 감정과 싸울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가슴의 통증도 없어질 것 같았다. 모든 혼란은 이 건방진 펠릭스 다우스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없어지면 모두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의 손끝이 파렌티아의 가장자리를 쓸었다.

【‘집에 가고 싶어.’】

유채가 정신을 잃기 전에 중얼거린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는 파렌티아에서 손을 뗐다. 유채의 집은 이곳이고 그녀가 머무를 곳도 이곳이었다. 제가 왜 유채를 펠릭스 다우스에서 풀어주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은 오히려 큰일을 당할 뻔한 유채를 여럿과 척을 지면서까지 구해주었고 지금도 그녀의 회복을 위해서 최상의 것들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귀엽지도 않고 고분고분하지도 않은 그저 예쁘기만 한 펠릭스 다우스를 위해서 제가 어떻게 하고 있는데, 왜 제게 온 선물을 놔줘야 한단 말인가.

유채는 영원히 제 옆에 머물러야 하는 제 것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따뜻하고 작은 몸을 깊게 끌어안았다. 가슴에 옅은 숨이 닿자, 심장이 뛰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를 바르게 눕혀주고 속눈썹에 맺혀 있는 눈물방울을 손으로 훔쳤다.

유채의 잠을 방해하지 않은 채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유채는 이제야 깊은 잠에 든 것인지 미동도 없었다. 루프스는 그녀의 볼을 손등으로 쓸었다.

놓아준다? 개소리였다. 유채는 제 것이다. 울페스 헤르티아가 제게 바친 선물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에 걸린 파렌티아의 매끄러운 표면을 쓸었다.

* * *

“공포에 빠진 유채가 휘두른 도자기 조각에 다쳤다고? 근데 그걸 그냥 두었어?”

“그래.”

루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치고 자비로운 결정이네? 안 그래?”

“자비는 무슨. 아픈 암컷을 몰아붙일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다.”

“그럼, 그런 너그러운 마음으로 젤다도 감옥에 투옥하는 정도로 처리해 주지 그랬어.  같잖은 자존심에 상처입고 생각 없이 저지른 짓인데 한 번 정도는 봐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감옥에 한 오 년 투옥하는 것으로 끝내지 그랬냐? 누구를 죽인 것도 아니고, 괜히 토모스와 척을 질 필요도 없고.”

“나는 경고했다. 내게 속한 것을 건드리면 죽음으로 보답해 주겠다고.”

“젤다도 어떻게 보면 네게 속한 것이지, 네 일족이잖아. 넌 그 일족의 수장이고. 둘 다 똑같이 네 것 아닌가?”

“젤다를 레티티아와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나?”

루프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젤다와 유채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유채가 더 중요한 것이 당연하다.

바실리사는 더 이상 말이 안 통할 것을 알고는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렇게 유채를 아끼면 집으로 돌려보내 주지? 그렇게 고생하는 것 보면 불쌍해 죽겠어. 곱게 자란 아가씨가 지금 얼마나 힘들겠어. 그렇게 아끼면…….”

쾅.

바실리사는 갑작스런 큰 소리에 놀라 움찔거렸다. 내내 조용히 있던 에릭도 반사적으로 튀어나와서 바실리사를 보호하려고까지 했다.

찻잔이 탁자에서 떨어져서 산산조각 났다.

“한 번만 더 그 이야길 입 밖에 내이면 친히 네 혀를 잘라주지.”

바실리사는 얼음처럼 차가운 청회색의 눈동자에 제가 단단히 잘못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실리사는 저를 보호하려고 제 앞에 서서 팔을 벌리고 있는 에릭을 가볍게 밀어내었다. 에릭이 돌아보자 그녀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티아의 집은 여기야. 토스 호무스의 궁. 전쟁 중인 대륙? 포트리스? 레티티아에게 이곳만큼의 안전한 곳이 있나? 제 몸을 생각해서라도 레티티아는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지.”

“유채는 대륙에서 온 마레 위르가 아니야. 너도 귀가 있으니까 들은 것이 있으면 알 거 아니야.”

“그게 뭐? 실없는 소리나 지껄일 거라면 대답만 듣고 갈 것을 그랬군.”

루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실리사는 다급하게 루프스의 팔을 잡았다. 번들거리는 청회색의 눈동자가 바실리사를 노려보았다.

“하나만 묻자. 넌 유채를 펠릭스 다우스로서 총애하는 거야, 아니면 암컷으로 보는 거야?”

“……내가 그딴 어리석은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

루프스는 바실리사의 팔을 차갑게 떼어내었다. 그리고 이곳에 남아 있으라고 한 뒤 떠났다.

에릭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실리사에게 다가왔다. 바실리사는 고민할 것이 있는 것인지 손목을 빙 돌렸다. 에릭이 농담조로 물었다.

“설마, 루프스님이 유채 양을 마음에 품으셨을 것이라고요? 수많은 미희에게도 눈길 한 번 주신 적 없는 분이?”

“나랑 네 입을 꿰매는 것 걸고 내기할래? 난 라이가 유채에게 눈이 돌았다는 것에 걸게.”

“예?”

루프스는 유채에게 마음이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분명했다. 이건 유채에게 재앙이면서 축복이었다. 수컷 늑대들은 제가 사랑하는 암컷에 한해서는 열정적인 사랑으로 유명했다. 아마 루프스는 유채가 가지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것을 유채의 발치에 바칠 것이었다. 누가 싫다 하면 다음 날 유채의 앞에 그자의 목을 내놓을 것이다. 그만큼 수컷 늑대의 사랑은 맹목적이었다. 상대의 마음이 어떻든 제 마음을 모두 그 상대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만큼 위험했다. 그 마음이 조금만 어긋나면 세상에 둘도 없을 것 같은 순애가 집착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수인들 사이에 유명한 비극은 대개 늑대 수인의 어긋난 사랑에서 비롯되어 쓰인 것이 많았다. 한 늑대 수컷은 사랑하는 암컷을 붙잡기 위해서 그녀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저를 선택할 것이라는 그릇된 사랑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루프스가 제 마음을 깨닫게 되면 유채를 향한 사랑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컸다.

유채가 차라리 젤다처럼 허영심 많은 암컷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허영심은커녕 바라는 건 오직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 하나뿐인 유채는 루프스의 사랑을 끔찍해할 것이 분명했다. 바실리사가 추측하기에 유채의 집은 루프스가 절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은가연이란 그 전설 속 마레 위르처럼 유채도 다른 차원에서 온 마레 위르 같았다.

그것을 알게 되면 루프스의 취할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유채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녀의 자유를 빼앗고 가두어놓을 것이다. 아직 마음을 깨닫지 못한 지금도 이러는데 제 마음을 깨닫고 나면 그땐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될 것이고, 유채는 루프스의 집착에 말라 죽을 것이다.

늑대의 사랑은 숭고하지만, 괴로운 집착이 될 수도 있었다.

“차라리, 죽을 때까지 제 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게 유채에게는 더 나은 선택지야.”

바실리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루프스! 이 썩을 자식!”

타우루스 헥터는 상처 가득한 몸으로 노성을 질렀다. 팔 하나를 잃어 불구가 된 헥터를 만만하게 여겨 타우루스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헥터는 팔 한쪽을 잃었어도 강했다. 그는 하극상을 저지른 일족들을 모두 죽이고 그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땅에 처박힌 자존심은 회복되지 않았다.

헤임달은 헥터 앞에 납작하게 엎드려서 자신에게 찾아온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에 속으로 웃었다. 그는 헥터가 피우는 아편에 카를리티오를 당기는 약초를 넣었다. 안 그래도 변태인 놈의 카를리티오 기간을 앞당겼으니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무모한 일을 벌일 것이라는 추측이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헥터 놈이 레티티아를 겁탈하려고 시도했다가 미수로 그치고 루프스에게 처참하게 당했으며, 루프스는 헥터를 도운 토모스의 딸 젤다도 죽였다고 했다.

헤임달은 그제야 확신했다. 루프스가 그 검은 머리의 미인을 마음에 품은 것이다. 레티티아를 건드리는 순간 루프스는 눈이 뒤집혀 날뛸 것이다. 난공불락일 것 같은 놈에게 약점이 생긴 것이다. 헤임달은 이제 새로운 판을 짤 준비를 마쳤다.

헤임달은 새로 가져온 약과 아편을 헥터에게 건네었다.

“타우루스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헤임달에게서 아편과 진통제를 건네받은 헥터가 화를 누그러뜨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생각?”

“예. 루프스에게 보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뭐?”

“수인의 수장 자리에 무자비한 루프스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어울리시는 분은 바로 타우루스님이시지요. 타우루스님이 그 자리에 오르고 그 여자도 차지하셔야 합니다.”

헤임달은 헥터 앞에서 아부를 떨었다. 헥터는 헤임달의 사탕발림이 나쁘지 않은지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헤임달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것을 끌어내릴 방법이 있나?”

“제게 토모스를 만날 기회만 주시면, 타우루스님이 그 자리를 차지하실 수 있는 길과 방법을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루프스의 펠릭스 다우스인 계집애를 이용해서 말이지요.”

헤임달은 헥터가 루프스를 이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헥터가 루프스를 이겨 강력한 지도자가 다시 사라져 수인들이 혼란에 빠져 자멸하면 좋겠지만, 그의 실력은 절대 베니니타스에 비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헥터가 잔잔한 호숫가에 파문을 일으켜 주는 돌멩이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 * *

유채는 블루벨의 시중을 받아서 예복을 갖추어 입었다. 베노르 콩레수스가 완전히 끝났다. 유채의 몸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정신도 어떻게든 간신히 수습했다. 아직도 악몽을 꾸지만, 그래도 남자의 손이 닿았다고 그 손을 사납게 떨쳐 낼 정도로 예민하게 굴지는 않게 되었다. 블루벨이 화장을 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유채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옆으로 뺐다.

“유채님.”

블루벨이 애잔한 얼굴로 유채의 손을 잡았다.

“여긴 안전해요. 누구도 유채님을 때리지 않아요.”

유채는 다른 수인의 손이 얼굴 가까이 다가오면 불쌍할 정도로 긴장을 하였다. 헥터에게 얻어맞은 공포가 남아 있어서였다. 유채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벨이 분칠을 해준 후 유채는 은실로 수놓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 유채의 치장이 끝난 뒤에 블루벨은 그녀의 얼굴을 가릴 베일을 씌워주었다.

“루프스님이 데리러 오실 거예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돼요.”

“블루벨.”

유채가 다급하게 블루벨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같이 있어주면 안 돼? 나, 나 너무…….”

블루벨이 유채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괜찮아요, 유채님. 루프스님이 얼마나 유채님을 아끼시는지 모두가 알게 되서 그 누구도 유채님을 해칠 수 없어요. 유채님을 건드린다는 자체가 이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유채님은 이제 안전해요.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블루벨은 유채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유채는 블루벨의 손길 아래서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블루벨이 없었다면 유채는 지금까지도 침대 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벌벌 떨었을 것이다. 그만큼 유채에게 블루벨은 커다란 버팀목이 되었다.

오르페도 유채가 나을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바실리사와 에릭은 문병을 와서 위로해 주고 그녀가 잠깐이라도 웃게 해주었다.

“저는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죄송해요. 루프스님이 오실 거예요.”

유채는 블루벨을 위해서라도 애써 괜찮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벨이 나가자마자 유채는 손을 들어서 얼굴을 묻었다.

루프스가 유채를 구했다고 했다. 루프스가 헥터의 팔을 자르고 뿔을 잘랐고 유채를 그에게 데려갔던 젤다를 죽였다. 정말 싫은 남자였지만, 그것만은 고마웠다. 그리고 그만큼 그가 싫고 원망스러웠다. 그가 아니었으면 제가 그 변태의 눈에 띌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런 험한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채는 스스로도 그것이 억지라는 것은 깨닫고 있었지만, 그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았다. 원망할 대상을 만들어 속을 푸는 것 외에 유채는 제 정신을 추스를 방법을 몰랐다.

“레티티아.”

유채가 그러고 있는 동안 루프스가 들어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겼다. 잠을 자거나 울고 있는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멀쩡한 얼굴은 오랜만이라 왠지 가슴이 설렜다. 고생으로 얼굴이 약간 상했지만, 이렇게 꾸며놓으니 처연한 분위기 때문인지 더 아름다워 보였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의 그림자가 우수에 찬 분위기를 만들었다.

루프스는 저를 바라보지 않는 유채가 불만스러웠다. 그녀의 시선이 제게 닿게 하기 위해서 루프스는 유채의 볼에 손을 대었다.

유채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피해 움직이다가 의자에서 떨어졌다. 유채는 겁에 질린 채로 루프를 올려다보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눈에 어린 공포를 알아보았다.

“레티티아, 걱정할 필요 없어. 너는 그 누구보다 안전하다.”

루프스가 유채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유채는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너는 내가 지킬 것이니 안전해. 그러니 겁먹을 필요 없다.”

그래서 유채는 더 무서웠다.

유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서 유채는 루프스가 더 두려웠다. 헥터를 상대하면서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루프스의 실력은 엄청날 것이다. 그의 말대로 루프스가 자신을 지킨다고 하면 그 누구도 유채를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루프스로부터 안전은?

루프스를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만약 루프스가 헥터처럼 저를 바닥에 찍어 누르고 옷을 갈기갈기 찢고 탐하려고 한다면 그땐 누가 구해줄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 그래서 유채는 그가 무서웠다.

유채의 강했던 정신은 헥터의 폭력 앞에서 한없이 연약해졌다. 깨져 버린 유리그릇은 조각을 이어 붙이면 예전과는 달라도 다시 유리그릇이 될 수 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유채도 이전처럼 살 수 있을 것이지만 지금 유채의 정신은 너무나도 연약해져 있었다.

유채는 루프스를 향해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요.”

루프스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유채의 부러졌던 오른쪽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루프스는 되도록 유채가 겁을 집어먹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의 짙고 어두운 감정을 억누르면서 물었다. 유채는 신음을 흘리자 루프스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집에 가고 싶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네 집은 여기인데, 어디 다른 곳에 집이라도 있나?”

“내 부모님이 계시고 내 언니가 있는 그곳에 가고 싶어요.”

자존심 때문이라도 저 남자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자존심은 아무런 상관없었다. 유채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 눈물이 루프스의 손등에 닿았다.

“여기 있는 게 너무 괴로워요.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유채는 요 일주일간 정말로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힘들었다. 유채는 간절하게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루프스의 청회색의 눈동자가 유채를 응시했다.

“나, 이 정도면 그쪽 위해서 할 수 있는 거 다 했어요. 그쪽 말대로 얌전히 굴었고 그쪽이 나를 데리고 뭘 하든 내 자존심 다 굽히고 따랐어요. 그러니까…… 제발…….”

유채는 루프스에게 손목이 잡힌 채로 무릎을 꿇었다. 허리를 숙인 유채의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제발 보내줘요. 나 정말 힘들어요. 제발. 보내줘요. 제발…….”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유채는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면 제 애원이 통하지 않을까 봐 손을 떨쳐 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억눌렀다.

루프스가 유채의 어깨를 잡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잠깐 사이에 화장이 다 지워질 정도로 그녀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네 집은 이제 이곳이다. 그러니 그곳은 잊어.”

“당신은!”

유채는 제 눈물을 닦은 루프스의 손을 쳐 내고 악에 받쳐서 외쳤다. 벽에 대고 이야기해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끔찍한 기억밖에 없는 곳을 집이라고 여길 수 있어요? 가족 하나 없는 이곳을 집이라고 여길 수 있냐고!”

유채의 몸이 벌벌 떨렸다.

“난 안 된다고! 여기는 집이 아니라 감옥에 불과해요! 창살만 없지 감옥이라고!”

루프스는 유채의 양 손목을 잡았다. 유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다시 애원했다.

“제발. 나 좀 놔주면 안 돼요? 제발.”

유채는 제 몸을 억지로 끌어안으려고 하는 루프스를 밀어내기 위해서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제야 겨우 체력을 회복한 몸으로 그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루프스는 몸부림치는 유채를 끌어안았다. 유채는 비명을 지르면서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돌덩이를 치는 것 같았지만 그에게서 떨어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채를 안은 루프스의 팔에 힘만 더 들어갈 뿐이었다.

“네가 생각을 바꾸고 행동한다면 이곳은 네게 최상의 공간이 될 것이다.”

유채에게 루프스의 말은 공포였다.

“과거가 어쨌든 잊어. 이곳이 네 집이야. 내 펠릭스 다우스가 된 이상 이곳이 네 집이야.”

우는 유채가 한없이 가여웠지만, 루프스는 그녀를 집에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 때문에 제가 이상해지고, 그녀 때문에 이번처럼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유채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유채가 울거나 괴로워하는 기색이 보이면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이 불쾌해서 그녀를 멀리 치워 버리면 괜찮을까 싶다가도 어두운 감정이 제 목을 졸랐다. 그것은 안 된다고 그 검은 뱀이 제게 속삭였다.

반항하던 유채는 이제 거의 기절 직전의 상태까지 도달했다. 힘 빠진 유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절하지 않게 제 마지막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너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고려해 줄 수는 있다.”

루프스가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유채는 눈을 번쩍 떴다.

루프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희망은 마레 위르를 미치게 만들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거짓된 희망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 희망이 동안 그녀는 제 말에 얌전히 따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일부터 네가 집에 돌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들을 내 서고에서 찾아주겠다. 은가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지 않나?”

루프스는 유채가 생각하는 것보다 머리가 좋았고 그만큼 교활했다. 도서관의 사서를 맡고 있는 염소 수인을 이용해서 프레드릭과 유채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유채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바실리사를 추궁해서 유채가 그녀에게 털어놓았던 세계의 관한 정보를 알았다. 루프스는 그의 선조인 이니투스의 친우인 은가연처럼 유채가 이곳의 마레 위르가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했다.

이니투스의 수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연이 말했다. 셀레네 여신님이 말하시기를 여러 개의 차원이 있고 그 차원에는 같지만 다른 위르들이 살아간다고. 나는 가연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가연이 보여주는 놀라운 능력들로 나는 그녀의 말을 믿게 되었다. 가연이 여신님과 계약을 맺어 얻은 신의 권능을 보였을 때, 나는 그녀가 다른 차원의 위르라는 가연의 말을 믿었다. 그러니, 나는 내 후손들에게 말한다. ……(하략)……]

“내일부터 잘 먹고 잘 웃고 잘 잔다면, 네게 나만이 읽을 수 있는 서적들을 주마.”

이니투스는 말했다. 신의 힘이 없다면 차원을 넘을 수 없다고. 루프스는 신실한 신자도 아니었으며 옛 신화 시대와는 달리 이곳에는 신의 힘이란 것을 담은 신물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찾아봤자 나오는 것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유채는 곧 포기하고 그의 겉에 머물 것이었다.

“네가 네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정확하게 말해준다면 너를 돌려보내는 것을 고려해 줄 수 있다.”

고려해 주겠다는 것이지 돌려보내 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도 유채는 루프스의 말만큼은 똑바로 들었다. 루프스는 새하얗게 질린 유채를 놓아주었다. 유채는 온몸에 힘이 풀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을 다시 내려주었다.

유채는 얇은 베일 너머로 루프스의 청회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도무지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루프스의 생각을 알고 싶은 것 이전에 그가 정말 두려웠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난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지.”

루프스가 유채의 몸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유채는 제 발로 서자마자 그를 밀어내었다.

“혼자 설 수 있어요.”

“그런 꼴을 하고?”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마요.”

유채는 양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루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베노르 콩레수스에 참여했던 수장들을 배웅하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면 제가 할 일은 끝이었다. 유채는 그 말을 전해주러 온 헤나를 붙잡고 빌었다. 제발 안 가면 안 되겠냐고, 도저히 나갈 수 없으니 당신이 루프스에게 부탁해 주면 안 되겠냐고 빌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되었다.

유채는 입술을 씹으면서 루프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마법이란 것이 참 신기한 게, 한국에서라면 몇 주간은 깁스를 해야 했을 골절도 한 번에 뼈를 붙였다. 그러나 통증은 해결할 수 없는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유채는 아픈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천천히 걸으면서 몸무게의 대부분을 오른쪽에 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절룩일 수밖에 없었다. 유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루프스가 일부러 천천히 걸어주었음에도 유채는 그를 따라가기가 벅찼다. 유채는 벽에 손을 짚었다.

“아직도 많이 안 좋은가?”

루프스가 유채의 치맛자락이 들어 올렸다. 유채는 겁을 집어먹고 한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하려 했지만 루프스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손을 떨쳐 내기 위해 유채는 발목을 흔들었다.

“오르페가 슬슬 걷는 것이 회복에 좋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아직도 많이 아픈가?”

“멀쩡하니까. 놔요. 그냥 오래 걸으니까…… 아악!”

유채는 루프스가 발목을 잠깐 지그시 누른 것에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았다. 루프스가 유채의 발목을 놓았다. 손에 거의 힘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티티아는 아파했다. 루프스는 베일 너머로 보이는 유채의 고통을 삼키는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정 힘들면 내가 안아서 데려가 줄 수 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유채는 벽을 짚고 일어나 다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루프스는 그녀의 옆에 섰다. 안아서 데려가면 그녀도 편하고 저도 편할 텐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는 유채의 발목을 잡았을 때의 미묘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그 떨림에 유채가 벌벌 떨면서 울었던 밤이 떠올랐다.

루프스는 기껏 궁녀들이 열심히 정리해 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대관절 제 심장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때의 생각만 하면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루프스는 귀찮은 것도 싫고 느릿한 것도 싫지만, 유채의 그 창백한 표정이 그것보다 더 싫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옆에서 그녀가 넘어질 것 같으면 부축해 주는 것밖에 해주지 못했다. 그마저도 금세 유채가 내치는지라 걷는 속도는 한없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겨우 도착한 목적지에서 유채는 숨을 몰아쉬면서 자리에 앉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옆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루프스와 다른 일족의 수장들뿐이었다. 그곳에 모인 수인들은 전처럼 유채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노골적으로 그녀를 불쾌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베노르 콩레수스 역사상 희대의 사건이었다. 한 일족의 수장이 다른 일족의 수장을 잡아서 우승했다고 선언했다. 그 사건의 근원이 바로 마레 위르였다. 루프스는 압도적인 실력 차로 헥터를 이겨 버림으로써 제 강함을 보였고 그에 아무 말 하지 못한 수장들은 대신에 유채에게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냈다.

저 마레 위르 때문에 여태껏 지켜왔던 미묘한 평화의 균형이 깨어졌기 때문이었다. 유채는 오로지 피해자였지만 차마 루프스를 험담할 수 없는 수인들의 입장에서는 만만한 것이 유채였다. 그들은 유채를 험담함으로써 루프스에 대한 불만을 풀어냈다.

“그러니까, 저게 지난번 내 자존심을 꺾게 만든 그 마레 위르란 말이지?”

레푸스(토끼 일족의 수장) 트레모르가 옆에 앉은 인키디움의 부수장, 벤야민에게 물었다. 벤야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결론적으로 그런 셈입니다.”

트레모르가 손으로 턱을 쓸며 유채를 살폈다. 입고 있는 옷이 여간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짙은 남색에 은실로 수놓은 옷은 루프스의 직계 가족이나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농업이 주가 되는 유니티오 호무스(쥐와 토끼 연합 일족의 땅)를 다스리는 그는 고품질의 농작물이나 약재들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는데. 최근 약재들은 모두 토스 호무스에서 소비했다. 뻔했다. 저기 앉은 암컷의 몸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루프스가 지시한 일일 것이다.

“잠자리 시중드는 정부도 아니고, 한 번도 안은 적도 없으면서 저렇게 끼고 산다고?”

트레모르가 중얼거렸다. 유채가 한 번도 루프스에게 안긴 적이 없다는 정보를 얻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늑대들은 본디 일부일처의 결혼 생활을 하지만 결혼하거나 연인이 생기기 이전에는 다른 수인들과 같았다. 차라리 저 암컷을 총애하는 것이 밤 기술의 문제라면 차라리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면서 타우루스 헥터와 토모스를 적으로 돌려가면서까지 아낀다는 것은 꽤나 이상했다.

트레모르가 인키디움의 말단에서 수장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던 데에는 파트너 복이 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인키디움의 수장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파트너 복 만큼이나 트레모르에겐 통찰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상황을 조금 다르게 보았다.

수인들은 모일 때마다 루프스가 자신들의 자존심을 누르기 위해서 마레 위르를 이용한다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트레모르는 그들과 다르게 생각했다. 루프스는 오만하기는 했지만 수인들 전체의 자존심을 누르는 것을 즐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세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뒤에서 일족 간의 감정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힘으로 수인들을 찍어 누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 성격이 달랐다.

“벤야민, 저 암컷에 대해서 알아봐.”

트레모르는 유채를 가리켰다. 루프스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그녀를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결국은 궁녀를 불러 함께 나가게 했다. 그를 본 수장들이 이를 갈았다. 그들에게 루프스의 행동은 마치 그들이 저 마레 위르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당연히 그들은 분노했고 모멸감을 느꼈다.

트레모르는 생각이 달랐다. 그가 저 암컷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뒤에 제가 있으니 한 번만 더 건드리면 헥터 꼴이 날 것이라는 간접적인 경고인 셈이었다.

“어디 출신이고 어디서 발견되었는지, 그리고 루프스와의 관계도. 아주 중요한 정보가 될 거야. 이게 있으면 헤르티아와 루프스 사이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거든.”

“카넬리안이나 돼야 루프스의 사생활을 캘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그 녀석만큼 배짱 두둑하고 능력 좋은 수인도 없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미친년. 카넬리안.”

카넬리안이 제 눈앞에서 손가락 욕을 내밀고 인키디움을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 레푸스는 카넬리안일 것이었다. 그만큼 카넬리안은 인키디움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유능한 암컷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트레모르의 인키디움 파트너였다. 트레모르가 인키디움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공적의 절반은 모두 카넬리안이 쌓아준 것이었다. 카넬리안은 정말 별난 년이라 공적을 쌓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후, 당시 레푸스의 면전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트레모르는 레푸스의 자리에 오른 뒤에 카넬리안을 찾아봤지만 그녀의 행방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카넬리안이 있다면 이런 건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알아와. 루프스가 저 암컷을 마음에 품었다면, 장담하는데 우리는 엄청난 무기를 손에 쥐는 거야.”

트레모르는 정보 장사를 하는 수인이었다. 정보야말로 상대적으로 약한 토끼 일족을 보호해 준 엄청난 무기였다. 그리고 이번에 쥐게 될 무기는 무려 여우 일족과 늑대 일족을 휘두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 * *

“누님! 저 돌아왔어요.”

카넬리안의 명대로 블루벨에게 편지도 전해주고 그녀가 부탁했던 임무도 끝마친 피터가 돌아왔다. 겨울이라 당분간은 농사지을 일이 없어 한가한 카넬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이리 늦어. 새대가리라서 길도 잊어먹었냐?”

“아닙니다. 왜 이리 날카롭게 구세요. 저 블루벨의 편지도 받아왔어요.”

피터는 덩치에 맞지 않는 애교를 부리면서 카넬리안에게 블루벨의 편지를 건넸다. 카넬리안은 곰방대에 담뱃잎을 집어넣으면서 블루벨의 편지를 읽었다. 과연 제 배에서 태어난 아이가 맞는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순수함이 가득한 편지였다.

“내 딸이지만 뇌가 표백된 것 같아.”

“그럼 뇌가 오염될 것들을 알려주지 그러셨어요.”

“내가 죄짓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다. 근데 이게 또 가련한 늑대 수인 하날 낚은 모양이네. 그것도 거물을 낚았어.”

“불안하세요, 누님?”

피터는 카넬리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안마했다. 카넬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견해서. 이런 곳에는 뒷배가 필요한 법이야. 이럴 땐 내 딸 같다니까.”

카넬리안이 담배 연기를 피우면서 물었다.

“그래서 내가 부탁한 건? 알아왔어?”

“예. 예상하신 대로 벨라토르로 지원했던 늑대 놈들이 같은 곳으로 다시 지원을 나가는 정황이 파악되었습니다.”

“모두 미노르 호무스와 울피누스 호무스 같은, 포트리스에 비교적 가까운 곳이고?”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카넬리안은 탁자에 펼쳐 놓은 지도를 보았다. 지도에는 붉은색의 잉크로 추정 경로와 같은 것들이 그어져 있었다. 피터가 지도를 보면서 침을 삼키곤 물었다.

“정말 누님은 라일라를 죽인 것이 로보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것입니까?”

“어, 그래. 내가 그때 베니니타스의 의뢰를 받아서 그 사건을 조사했으니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베니니타스는 아내의 시신에서 늑대의 흔적을 보고 바로 눈이 뒤집히지는 않았다. 울페스 베니니타스, 그 당시 루프스였던 로보, 카니스 빅터는 수인들 사이에서는 드물게 일족이 다른 친구들이었다. 베니니타스는 감정적으로 행동하기 전에 머리를 썼다. 그는 사건을 감추고 인키디움에 조사를 의뢰했고 그 조사를 한 것이 카넬리안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베니니타스는 친구를 믿고 있었기에 간신히 이성을 유지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시 카넬리안은 남편의 일로 조금 바빴던 터라 조사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여 대충 보이는 증거만으로 늑대가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베니니타스는 분노했다.

“근데 어떻게 로보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영 찝찝해서 나중에 다시 조사하니까 블랑카 옆에 있던 불에 탄 시신이 베니니타스의 아들들이 아니란 걸 알았거든. 그 아이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어. 그들의 마지막 흔적은 절벽이었거든. 아마 거기에서 몸을 던진 것 같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다른 시신을 구해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흔적만으로도 죽였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로보는 생각보다 섬세한 자였다. 정말로 그가 라일라와 아이들을 죽였다면 대놓고 자신이 한 것을 광고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치밀하게 흔적을 지웠을 놈이었다. 그러니, 이건 다른 누군가가 로보의 짓으로 꾸며 만든 것이 분명했다.

카넬리안은 이 사실을 알자마자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레푸스에게 보고를 올렸지만, 진실이 알려진 뒤에 책임질 일이 두려웠던 레푸스는 그것을 감췄다. 카넬리안도 수인 내전이란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자 제 가족에게 닥칠 일이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난, 그때 진실을 감춰서는 안 됐어.”

카넬리안은 레푸스의 지시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이 사건을 조사했다. 그러자 당시 레푸스는 당연히 카넬리안의 행적을 두려워했고 그녀를 제거하거나 그녀의 가족에게 해를 입히려고 하였다. 그 결과 카넬리안의 남편이 죽었다. 카넬리안은 그날로 레푸스의 면전에 사표를 던지고 아이들을 데리고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홀로 조사를 계속했다. 십삼 년 전 일을 캐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포트리스에 주목하십니까? 그곳에 감히 울피누스 호무스에 침입할 만한 인물이 있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십삼 년 전에는 수인들 중 가장 강했던 세 명의 수장이 서로 친했기 때문에 서로 화합하고 옛 이니투스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 돌았어. 그리고 라일라가 수인들과 마레 위르의 사이를 조율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인과 마레 위르의 사이도 좋았고. 오죽했으면 마레 위르가 수인 일족으로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돌았겠어. 다시 말하면 마레 위르와 내통한 수인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그래서 포트리스를 주목하시는 것입니까?”

“수인 내전으로 이익을 얻은 일족은 없어. 전쟁은 어차피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 그런데 전쟁을 일으켰다? 분명 이득을 얻는 놈이 있었다는 거야. 수인 중에 없다면 포트리스에 있겠지. 우리는 포트리스를 모르니까 그곳에서 이득을 얻은 놈이 있더라도 파악할 수 없는 것이고.”

카넬리안은 탁자를 두드렸다. 토스 호무스만큼 풍요로운 땅도 없었다. 그래서 늑대 일족은 어지간해서는 토스 호무스를 떠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런데 몇 번이나 벨라토르로 자원하여 나가는 늑대들이 있다는 건, 그곳에서 얻을 것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놈들이 향하는 곳이 포트리스에 가깝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포트리스에 수인 내전의 원인을 만들이고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는 놈이 있었다.

“그나저나 곧 카를리티오지? 늑대 놈들의 카를리티오는 말들처럼 난잡하지 않아서 괜찮은 데.”

“설마 문제가 생길까요?”

“네가 늑대 놈들을 몰라서 그래. 그놈들은 제 암컷이라면 눈이 돌아.”

카넬리안이 걱정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경고를 해놨으니까 블루벨도 나름대로 대처할 것이다. 개가 좀 순진하기는 해도 멍청한 건 아니니까 분명 괜찮을 것이다. 카넬리안은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담배를 피웠다.

* * *

루프스는 열이 올라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얼음으로 식히고 있었다. 카를리티오 기간이었다. 이제 삼 일째인가? 사춘기가 지나고는 항상 일 년에 한번 일정한 주기로 찾아온 기간이지만 이번처럼 극심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개체마다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루프스가 겪는 카를리티오의 강도는 딱 평균보다 아래였다. 카를리티오마다 휴가를 쓰고 제 집에 스스로 갇히는 케릭스에 비하면 거의 없는 일처럼 지나간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수인들은 동물이 아닌지라 카를리티오에 사고를 치면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 오히려 카를리티오라서 그랬다는 핑계를 대면 괘씸죄로 처벌의 강도가 더 강해졌다. 그러니 카를리티오에는 본인이 알아서 잘 처신해야 했다. 각 일족마다 카를리티오에 취하는 행동 강령이 정해져 있었는데 루프스도 어릴 적 배운 대로 행동했다.

루프스의 카를리티오는 매번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환장할 정도로 심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큰 사고를 칠 것 같아 나름대로 해결해 보려고 고급 접대부를 들이기도 했지만 몸이 동하지 않아서 그냥 돌려보냈다.

“끄응.”

카를리티오의 증상은 간단했다. 평소보다 왕성해진 성욕으로 인해 몸에 열이 올랐다. 성욕을 참으면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오는 것이다. 접대부마저 돌려보낸 루프스는 이마에 얼음을 올려놓고 어떻게든 뜨거워진 몸을 식히려고 하였다.

“루프스님. 서고에서 말씀하신 책을 가져왔습니다.”

헤나가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루프스는 얼음을 이마에서 치워내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유채가 달라고 한 책이었다. 그녀는 도서관에 없는 역사서를 요구했다. 에클레시아의 붕괴 직전과 그 이후의 것이었다. 루프스는 의아했지만 약속한 것이니 그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유채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그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빌었다. 뭐든 할 테니 제발 보내 달라고 빌었다. 그는 유채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쿡쿡 찔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열이 끓어올랐다. 왜 제게서 도망치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항상 그녀에게는 토스 호무스에서도 최고의 것만 주었다. 그럼에도 뭐가 아쉽다고 도망치려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유채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침대 기둥에 그녀를 사슬로 묶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유채의 눈물 그렁그렁한 눈에 간신히 그런 충동은 억눌렀다. 대신에 약속된 산책 시간을 없애 버리고 블루벨의 출입을 제한하여 경고를 주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경고를 알아들은 것인지 요즘은 그런 말을 뱉지 않고 얌전했다.

루프스는 유채가 얌전해졌다는 것에 안심했다. 그녀는 제게서 떨어질 수 없다. 영원히 그의 곁에서 그를 기다려야 하는 펠릭스 다우스였다. 유채에 대한 생각을 하자 심장박동 수가 흥분한 것처럼 빨라졌다.

“레티티아는?”

“외출을 나가셨다가 방금 방에 돌아오셨습니다.”

루프스는 책을 손에 들고 유채의 방으로 향했다. 떠올린 김에 그 고운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어차피 유채의 방은 그의 방과 멀지 않았다. 유채는 이제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해서 평소처럼 잘 먹었고, 그 전보다는 잠도 편안하게 잤다.

하지만 아직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악몽을 꾸느라 비명을 지르면 매번 달래주러 가는데도 유채는 기겁을 하면서 저를 피했다. 루프스는 그게 불만이었다. 그는 유채가 우는 것도 싫고 저를 피하는 것도 싫었다.

헤나가 열쇠를 돌려서 유채의 방문을 열었다. 유채 혼자 침대에 앉아서 가벼운 복장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루프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뭐예요?”

카를리티오가 시작된 이후 유채를 볼 때마다 몸이 달아올랐다. 절대 풍만하지 않은 몸의 굴곡이 유별나게 유혹적으로 보였고 붉은 입술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왠지 그녀에게서 복숭아의 달큰한 향도 나는 것 같았다. 옷이 갑갑해 보인다는 생각에 그 옷을 벗겨 버릴 생각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상태가 삼 일이나 지속되니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전해줄 책이 있어 왔다.”

유채는 루프스를 경계했다. 다친 사람을 배려하는 예의는 있는지 예전보다는 부드러워졌지만 그럼에도 유채는 루프스가 언제 변할지 몰라서 두려웠다. 유채는 루프스가 건넨 책을 받았다. 집에 보내 달라고 빌어봤자 자유만 빼앗기고 블루벨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걸 깨닫고 유채는 나약한 소리는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하였다. 그럴 때마다 루프스의 기운이 난폭해진다는 것도 싫었고, 일단 유채는 별다른 조건 없이 귀한 자료를 얻게 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루프스의 손이 갑작스럽게 눈앞으로 다가오자 유채는 몸을 움츠렸다. 저도 모르게 벌벌 떨렸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이건 세포 수준으로 공포가 각인된 것인지 얼굴 가까이로 오는 손만 보면 머리가 얼어붙었다.

“몸이 찬 것 같다.”

카를리티오로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자신과 달리 유채의 몸은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다. 루프스는 저 몸을 꼭 끌어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찬 것과 뜨거운 것이 닿으면 미적지근한 온도가 되니 좋을 것만 같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유채는 몸을 옆으로 뺐다.

“……거기 가만히 있으면 안 되나요?”

유채의 말은 루프스의 귀에 제대로 닿지 않았다.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볼을 감쌌다. 유채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동시에 그의 손이 지나칠 정도로 뜨거운 것을 깨달았다.

“아픈 이가 몸이 차면 쓰나.”

루프스는 제 머리가 어떻게 됐음을 분명하게 알아버렸다. 유채를 끌어안고 싶었다. 몸속을 들끓는 열기가 그녀를 원했다. 유채를 침대에 눕혀서 그녀의 몸을 갑갑하게 감싸고 있는 옷을 끌어내리고 싶었다. 그의 눈에 비친 유채는 그 어떤 요부보다 유혹적이었다.

루프스의 티끌 정도로 남아 있는 이성이 그를 채찍질했다. 그도 최소한의 도리는 알았다. 유채의 몸이 차가우니 안아주고 싶다는 건 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변명이었다. 겁간당할 위기에 처했던 암컷을 상대로 그런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성을 배반한 손은 공포에 몸을 잘게 떠는 유채의 볼을 쓸었다.

유채는 평소보다 배는 이상한 것 같은 루프스에게서 도망가기 위해서 손으로 뒤를 짚었다.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손을 덮었다. 서늘한 체온이 마음에 든 루프스는 다른 손으로 유채의 허리를 감고 몸을 끌어안았다.

유채는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요! 제발!”

유채는 몸부림을 치면서 흐느꼈다. 머릿속에는 헥터가 저에게 했던 일들이 방금 일어난 일처럼 재생되었다. 유채는 겁에 질려서 울면서 빌었다. 제발 떨어져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이미 눈에 초점조차 사라진 루프스의 귀에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루프스는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을 찾듯이 유채를 끌어안았다. 서늘하고 폭신한 몸이 제 뜨겁고 단단한 몸과 꼭 어울리는 짝 같았다. 어제 불러들인 요염한 암컷의 몸에도 동하지 않던 마음이 유채의 빈약한 몸에 동했다. 루프스는 반항하는 유채의 손을 잡아 고정시켰다. 유채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지만 루프스의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에는 그녀의 입술만이 보였다. 붉고 두툼한 것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유채는 루프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쳤다. 머릿속에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제발. 제발. 나, 나, 무서……. 읍!”

루프스의 지나칠 정도로 뜨거운 입술이 유채의 서늘한 입술을 집어삼켰다.

유채는 입술이 불에 타는 것 같은 뜨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뜨거움만큼이나 공포에 휩싸였다. 헥터가 제게 억지로 키스하던 게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게 사람 체온일까 의심될 정도로 뜨거운 몸으로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위에서 누르고 그녀의 가는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유채의 입안을 헤집었다. 유채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혀를 깨물려고 하였으나 루프스의 손 턱을 단단히 잡혀 그럴 수가 없었다. 루프스의 육중한 체중이 유채를 압박했다. 무자비한 입맞춤을 받으며 유채는 눈물만 펑펑 쏟았다. 어떻게든 저항하고자 했지만 위에서 누르는 루프스의 힘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서늘한 체온을 느끼면서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유채가 울면서 떠는 것도 모자라 어떻게든 저를 밀어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이성이 끊긴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루프스 유채의 입술을 열심히 탐했다. 그의 유일한 배려는 유채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약간의 틈을 주는 것뿐이었다. 지친 것인지 유채가 이제 반항 없이 몸만 떨자 루프스는 그녀의 손을 놓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유채는 자유로워진 팔로 주변을 더듬었다. 그러는 중에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입술을 탐했다. 유채가 제 어깨를 때리는 것도 무시했다. 얼간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의 목에서 거친 신음이 끓어올랐다. 루프스는 뒷머리를 감싼 나머지 손으로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른 몸이 한 팔에 감겨왔다.

“흑.”

울음소리가 들렸다. 루프스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빌어먹을 카를리티오에 제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다. 짐승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루프스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입술을 떼었다.

쨍그랑.

루프스는 꽃병에 얻어맞는 충격과 함께 차가운 물을 뒤집어썼다.

“흑.”

유채의 손에서 깨진 꽃병의 나머지가 떨어졌다. 급한 나머지 손에 잡히는 것으로 루프스의 머리를 내리쳤는데 그것이 꽃병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기절하고도 남았을 충격에도 그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벗어나기 위해서 다급하게 움직였다.

“잠깐.”

루프스는 얼른 침대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유채를 붙잡았다. 침대 아래에 떨어진 날카로운 도자기 파편을 밟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유채가 손톱으로 루프스의 팔을 긁었다.

“놔! 놓으라고, 개자식아!”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억지로 잡아서 침대에 눕혔다. 유채는 발버둥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놓으라고! 개자식아! 이 쓰레기 자식아!”

“내가 잘못했으니, 잠깐만 기다려라.”

루프스는 꺽꺽 울기 시작한 유채를 두고 침대 위에 흩뿌려진 도자기 조각과 꽃을 치웠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유채는 가슴 앞에 팔을 모으고 그를 경계하면서 표독스럽게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그러니까…….”

루프스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변명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유채는 미친 여자처럼 고개를 흔들면서 소리 질렀다.

“나가! 나가라고!”

유채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러웠다. 지난번에는 그 개새끼에게 정신없이 얻어맞고 강간 직전까지 갔더니, 이번에는 저 남자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입맞춤 이상까지 갈 수도 있었다. 유채는 헥터 때의 기억과 지금의 일로 덜덜 떨었다. 루프스의 키스는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던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유채는 무릎을 세워서 몸 가까이 끌어당겼다. 깨진 꽃병과 물에 젖어서 엉망이 된 이부자리가 제 처지인 것 같아서 보기가 싫었다. 유채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내가 미안하다.”

루프스는 서럽게 우는 유채를 끌어안으려고 하였다.

“듣기 싫으니까! 나가! 나가라고!”

유채는 루프스가 차라리 더 이상 저를 참아주지 말고 죽여주기를 원했다. 이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지쳤다.

루프스는 유채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그는 비에 젖은 아기 새처럼 떠는 유채를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 바라보았다. 카를리티오로 달아올랐던 몸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우는 유채를 보니 다시 달아오를 것 같았다. 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 지금 저렇게 무섭다고 떨고 있는 유채를 보고서 몸이 동하는 제가 미친놈이고 한심한 놈이었다.

루프스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아래로 떨어진 화병 조각들과 꽃들이 보였다.

“미안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정말 미안하다. 그러니. 쉬어라.”

루프스는 유채의 방에서 나갔다. 유채는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루프스는 궁녀를 불러서 유채의 방을 치우라고 명을 내렸다.

작정하고 안으려고 불러온 암컷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상해서 볼품없어진 유채의 몸에 이렇게 된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이렇게 이성까지 끊겨서 암컷을 안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암컷에 집착해 본 적이 없었다. 루프스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하. 내가 정말 미쳤나.”

입안에 아직도 그녀의 향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팔에 감겼던 부드러운 살의 감촉도 그대로였다. 유채의 검은 눈이 습윤해지고 제 목에 그 가는 팔을 감는 것을 상상했다. 그 망상 중에 좀 전에 보았던 유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젠장.”

물기 어린 눈동자, 거친 키스에 부풀어 오른 입술, 가늘게 떨리던 몸, 슬픔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

유채에게 미안해졌다. 떨리는 몸을 달래주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대관절 그녀가 무어라고 저를 이렇게 얼간이처럼 만드는 것일까?

그럼, 그냥 죽여. 죽여 버리면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였다.

“라이! 뭐하냐?”

바실리사가 루프스의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루프스는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바실리사.”

“왜? 헤나 말을 들어보니 네 카를리티오가 꽤나 심하다던데? 그렇게 심하면 얼음주머니나 머리에 올리고 처박혀 있든가. 왜 지나가는 궁녀들 겁먹게 그러고 서 있냐?”

“궁녀들이 보이면 예를 좀 갖추지.”

루프스가 으르렁거렸다.

“시간 남아돌면 레티티아에게 가봐. 나보다는 네년이 더 좋을 것 같으니.”

루프스는 바실리사에게 이 말만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에릭이 바실리사에게 속삭였다.

“설마 유채 양 때문에 이번 카를리티오가 심하신 것일까요?”

“아마. 늑대 놈들은 원래 사랑하는 암컷이 생기면 카를리티오가 비정상적으로 심해지거든.”

“설마 유채 양에게 뭔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요?”

“설마가 수인을 잡지.”

바실리사는 얼른 유채의 방으로 갔다. 궁녀들이 깨진 화병을 치우고 있었고 침대 위의 유채는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시간만 그대로 멈춘 것 같아 보였다. 바실리사가 유채를 불렀다.

“유채야!”

유채는 바실리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유채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바실리사를 보았다. 부푼 입술과 여기저기 구겨진 옷을 본 바실리사는 혀를 찼다. 정말 설마가 수인을 잡았다.

그나마 옷을 보니 억지로 입을 맞춘 선에서 정신을 차리고 물러난 것 같았다. 바실리사는 유채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유채는 바실리사에 배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만 훌쩍이면 속이 풀리나. 소리 내서 크게 울어. 소심하게 울지 말고.”

그 말이 스위치가 되어 유채는 소리를 크게 내면서 엉엉 울었다. 유채는 바실리사의 허리를 끌어안고 제 감정을 토해내었다. 바실리사는 유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바실리사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를리티오로 성욕이 왕성해지는 것은 생리적인 반응임을 알기에 루프스가 스스로 어찌할 수 없었을 거라고 그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헥터에게 당할 뻔했던 아이에게 이성을 잃고 덤벼든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조금만 더 참을 것이지 그 조금을 못 참아서 이 사달을 만들었는지. 자각한 것도 아니라 더 앞뒤 못 가리고 행동하는 것 같았다.

유채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바실리사는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루프스가 카를리티오라고 일을 냈구나.”

“카를리티오?”

“뭐, 마레 위르 말로 바꾸자면 발정기 정도? 암수를 가리지는 않지만, 늑대나 개, 말과 소는 수컷들이 카를리티오를 심하게 겪고, 양이나 염소, 고양이들은 암컷들이 심하게 겪고, 독수리나 쥐는 암수 모두 비슷해. 아무튼 수인들 사이에서 이따금 문제가 발생하는 기간이지. 물론 카를리티오 기간이라고 누군가를 겁탈한다면 당연히 벌 받아.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수인이니까. 카를리티오라는 것이 핑계가 될 수 없거든. 그리고 늑대 수컷들은 보통 이때 성욕이 왕성해 지는 편이야.”

물론 연인 한정이지만. 바실리사는 그 말은 삼켰다. 알아봤자 유채만 괴로워질 일이었다. 루프스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봤자 유채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바실리사는 제가 짐작한 사실을 감추기로 결정한 지 오래였다.

늑대 수인들은 다른 수인들에 비해서 카를리티오가 심하지 않아 말이나 소 수인들에 비하면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암컷이 있는 수컷이라면 상황은 달라졌다. 카를리티오의 강도가 말이나 소 수인의 수준으로 올라가고 몸은 또 제가 사랑하는 연인에게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정 불안하면 내가 지켜줄게.”

“언…… 언제 끝나는데요…….”

“라이의 경우는 이번 주 마지막 날? 보통 카를리티오는 일주일 정도 지속이 되거든.”

“그러니까. 내가 지금 재수가 없었다는 것이네요.”

유채는 말을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이제는 헛웃음만 나왔다. 헥터의 일도 제가 재수가 없어서, 루프스의 일도 제가 재수가 없어서란다.

“그건 아니지. 이건 라이가 잘못한 거니까 넌 재수가 없었던 게 아니야. 넌 아무 잘못 없어.”

바실리사는 유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고는 그녀를 달랬다. 바실리사는 큰 손으로 유채의 결이 고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리 수인들이 짐승도 아니고. 보통 카를리티오가 심해도 그걸 참는 수인들이 훨씬 많아. 태반은 알아서 잘 조절해. 그런데 참지 못한 루프스가 잘못한 것이지, 넌 잘못한 거 없어. 네가 재수 없다고 이런 일을 운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지. 너는 아무 잘못 없어. 잘못한 건 라이야. 안 그래?”

“맞습니다. 저도 얼마나 잘 참는데요. 우리 개 일족은 늑대 일족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도가 셉니다. 그러니까, 루프스님이 잘못하신 것이 맞습니다.”

에릭이 맞장구를 치자 바실리사가 그를 돌아보았다.

“너도 카를리티오를 느끼기는 하냐? 카를리티오 기간에도 별 변화가 없기에 난 너 고자인 줄 알았는데.”

“왜 그러세요, 바실리사님. 저 신체 건강한 수컷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운데 다리가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에릭이 바지를 풀어 내릴 자세를 취했다. 바실리사가 에릭의 구레나룻을 잡아당겼다. 그는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됐어. 나는 네 그 흉물스런 것 보기 싫어.”

“흉물스럽다니요. 어찌 그런 가슴 아픈 말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바실리사님이 아직 혼인을 못 하시는 것입니다.”

“닥쳐. 내가 결혼을 못 하는 건 모두 내가 너무 예뻐서 말을 못 거는 겁 많은 수컷들 때문이거든. 너나 걱정해. 좋아하는 암컷 있다며, 카를리티오 기간에 찾아가서 열 오르는 마음을 담아서 고백이라도 하든지.”

“제가 그 연모하는 분을 카를리티오 기간에 찾아갔다가는 전 그날로 이 세상 수인이 아닐 겁니다. 전 바실리사님처럼 추접한 육체적인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숭고하고 순결한 사랑을…… 악.”

“그래, 너 잘났다! 나는 추접하게 수컷들 몸이나 훑고 다니고 넌 암컷들 마음이나 원하니. 그래, 너 잘났다.”

바실리사가 베개를 움켜쥐고 에릭을 향해 연타했다.

“하하하!”

유채는 간만에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그동안 참 웃을 일이 없었는데 바실리사와 에릭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가 보기엔 분명히 에릭이 바실리사를 좋아하는 것인데, 바실리사는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게 안타까웠다.

한참 에릭을 구타하던 바실리사는 유채가 웃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확실히 웃으면 누구도 못 이길 정도로 예쁘네요.”

에릭이 중얼거렸다. 바실리사는 루프스가 왜 유채에게 웃으라고 강요를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왜 유채를 데리고 나갈 일이 생기면 얼굴에 베일부터 씌우는지도. 늑대 특유의 집착이 벌써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다.

“하. 정말 이거.”

바실리사는 유채가 가여웠다. 그동안의 일로 유채의 마음이 루프스에게 향할 리는 없었다. 솔직히 유채에게 루프스는 최악의 수컷일 것이었다. 루프스는 이미 집착의 전조증세를 보일 정도로 유채에게 빠진 상태고. 늑대 수인의 사랑이 어긋나면 그 사랑의 끝은 파국일 뿐이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놓지 않을 것이고 유채는 도망가려 할 것이다. 놓아주는 것이 최선의 선택임을 알아도 루프스는 죽어도 그것만큼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피해를 입는 것은 유채일 것이다.

신은 왜 이리 잔인한 운명을 주신 것인지.

바실리사는 한숨을 뱉었다.

블루벨은 우울해서 귀를 축 늘어뜨렸다. 케릭스에게 주려 한 손수건이 완성되었지만 정작 그가 없었다. 요즘 케릭스는 블루벨 앞에 잘 나타나지도 않았다. 블루벨은 그것이 너무 슬펐다. 블루벨은 요즘 너무 우울해서 귀만 축 늘어뜨리고 다녔다.

“블루벨.”

블루벨은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그, 케릭스가 뒤에 서있었다. 블루벨은 환하게 웃으면서 케릭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케릭스는 당황해서 손을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케릭스님! 보고 싶었어요. 지난주 내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 되게 슬펐어요.”

블루벨이 심장이 쿵쿵 뛰었다. 블루벨은 케릭스의 허리를 감았던 손을 풀었다. 케릭스의 눈에 볼이 붉게 물든 블루벨이 귀여운 얼굴이 보였다. 정말 이런 외모는 반칙 아닌가? 귀엽게 생겨도 이렇게 귀엽게 생길 수는 없었다. 케릭스는 블루벨의 뺨을 늘였다.

“내가 보고 싶었냐?”

카를리티오가 심한 케릭스는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집에 틀어박혀서 찬 물에 몸의 열기만 내내 식혔다.

“예. 엄청, 엄청 보고 싶었어요.”

블루벨은 팔을 크게 벌려 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서 서툰 손으로 완성한 손수건을 케릭스에게 건네었다. 케릭스는 한눈에 봐도 엉성해 보이는 손수건을 받았다.

“이게 뭐냐.”

“그동안 제게 음식 가져다주신 것이 감사해서 만들어봤어요. 여기 케릭스님 이름을 수놓았어요.”

회색 실로 삐뚤삐뚤 수놓아놓은 케릭스의 이름이 하얀 손수건 구석에 있었다. 케릭스는 블루벨이 이 손수건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을지가 느껴져서 그녀의 작은 몸을 꼭 안아주었다.

“우왓!”

블루벨이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고맙다. 잘 쓰마.”

블루벨의 볼이 달아올랐다. 케릭스의 낮은 목소리에 블루벨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케릭스는 다시 블루벨을 내려주었다. 블루벨은 타는 것과 같은 볼을 차가운 손으로 식혔다.

“고마우시면, 저 자주 찾아와 주세요. 저 케릭스님 정말 많이, 많이 좋아해요.”

“그래, 알겠다. 그런데 오늘은 레티티아님과 같이 있지 않구나? 무슨 일이 있니?”

“아니요. 유채님은 오늘 프레드릭님 수업 받으러 가셨어요. 유채님이 저 쉬라고 하셨고요. 전 책을 싫어하거든요.”

“그렇구나.”

케릭스가 중얼거렸다. 루프스도 지금 도서관에 간 것으로 아는데, 혹여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기를 케릭스는 간절히 소망했다.

* * *

루프스는 책상 앞에 앉아서 얌전히 책을 읽고 있는 유채를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다. 카를리티오는 어제 끝이 났고 그의 이성도 완전히 돌아왔다. 제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닫고 스스로를 한심해했다. 그리고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유채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무시하려고만 하는 유채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도 억울하다고 다그치려고도 했다. 그러나 벌벌 떨던 유채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꼭 예전에 어머니에게 혼나고 쩔쩔매던 꼴 같았다. 도대체 제가 왜 펠릭스 다우스에게 이렇게 휘둘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는 스스로가 한심하지만 일단 잘못한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루프스는 책을 읽고 있는 유채에게 다가갔다.

“무슨 책인가?”

유채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책상에 손을 짚은 루프스가 유채가 읽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내게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텐데, 어려운 고어로 된 책을 꽤나 잘 읽는군.”

“나, 책 다 읽었어요. 지금 블루벨이랑 산책 갈 거예요.”

유채는 루프스가 제 옆의 앉으려고 하자 책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앉아.”

루프스는 유채의 팔목을 잡고 잡아당겼다. 유채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손목 놔줘요.”

유채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잡힌 손목을 빼내려 애썼다. 혹여 그가 저를 바닥으로 내리누르고 그때와 같이 굴 것 같아서 몸이 떨렸다. 루프스는 놓아주자 유채는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문질렀다.

루프스는 제 시선을 집요하게 피하는 유채에게 보면서 다시 한 번 사과했다.

“그땐, 내가 미안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만해요. 떠올리기도 싫으니까.”

유채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의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내가 다시 사과하마. 그때 일은 정말 미안하다. 내가 정말 미안하다. 이유가 뭐가 됐든 내가 무조건 잘못했다.”

“내가 당신 사과를 어떻게 믿어요? 당신이 거짓말 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당신이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라고 내가 어떻게 믿어요?”

“미안하다. 이건 사과의 선물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눈앞에 그녀가 돌려달라고 말했던 물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유채의 눈이 커졌다. 유채는 휴대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잠깐.”

유채의 손이 닿기 전 루프스는 휴대폰을 다시 가져갔다. 유채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그제야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유채의 눈에 흡족했다. 유채의 검은 눈이 공허함이 아닌 생기를 띠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한 번 말하마. 그때의 그 일은 정말로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 내가 잘못했다.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사과이다. 정말이다. 정말 미안하다.”

“알았으니까. 내 휴대폰 내놔요.”

유채는 루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휴대폰을 건네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대충 고맙다고 하고는 얼른 휴대폰의 가죽 덮개를 열었다. 분명 엉망으로 깨졌던 액정이 멀쩡했고 배터리도 100%를 가리켰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유채는 찬찬히 휴대폰을 살폈다.

“왜…… 시계가…….”

유채는 제 눈을 의심했다. 액정에 표시된 날짜와 시간이 수능을 보았던 바로 그날에 멈춰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혹시, 다른 세계의 물건이라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던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시계에 관한 것은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 일단 다른 것부터 살펴서 이곳에 넘어오기 전의 마지막 기억을 찾아야 했다.

“내가 그 건방진 마레 위르 수컷에게 부탁해서 고쳐 온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고민은 알지 못 한 채 제가 무엇을 했는지 설명했다. 사과를 위해 나름대로 고민한 방법이었다. 유채의 옷과 소지품 중에서 빨간 가죽의 이상한 물건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찾은 물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망가진 모양새에 자존심이 조금 상해도 마레 위르 수컷을 불러서 고치게 했다.

호기심에 레티티아의 물건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지만, 그가 알아낸 것은 이걸 누르면 까맣던 표면이 환해진다는 것과 거기에 유채와 그녀의 자매로 보이는 이의 그림이 담겨 있다는 것뿐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단발머리의 유채였다. 그녀가 밝고 쾌활해 보인다면 그녀 옆의, 닮은 암컷은 매우 다소곳하고 차분해 보였다. 그녀가 바로 유채의 언니인 듯했다. 둘 다 예뻤지만 루프스의 눈에는 유채가 훨씬 더 예뻤다. 제 앞에서는 울거나 무표정한 표정만 짓는 것과 달리 그 이상한 물건 속의 유채는 환하게 웃고 있어서 루프스는 그 그림을 갖고 싶었다.

루프스는 얼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을 건드리는 유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쁘다. 웃으니 정말로 예뻤다. 그의 가슴 한편이 봄바람이 볼을 간질이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유채의 저런 얼굴은 그 어떤 수컷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항상 저렇게만 웃어준다면 마냥 좋을 것 같았다.

“아아악!”

유채가 비명을 지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유채 거친 숨을 내뱉느라 거기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유채의 얼굴이 한껏 찡그려졌다. 루프스는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유채의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왜 그러는가! 잠깐 너. 피.”

유채의 입가에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렸다. 유채는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손등에 피가 묻어났다.

“……피?”

그렇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입에서 핏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유채가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음에도 그 손을 넘쳐서 피가 흘러내렸다.

“레티티아!”

유채의 몸이 기울어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이 바닥에 닿기 전에 그녀를 받아내었다. 바닥에 유채가 쏟은 피가 흥건했다.

루프스가 다급하게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유채는 그게 도통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유채는 제 아래에 가득한 피 웅덩이를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유채의 입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왔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지끈거리는 머릿속으로 잊고 있었던 기억이 흘러넘쳤다.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 눈이 부시게 밝은 헤드라이트 빛,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처박힌 몸, 온몸의 뼈가 부러진 것처럼 아프고 머리가 깨져서 피가 흘렀다. 그렇게 흐른 피가 지금처럼 주위에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내가 왜 이걸 잊고 있었지.

그래, 그랬다. 치킨을 사서 병원으로 돌아가던 그 밤. 이 이상한 세상으로 떨어졌던 그날, 유채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다가 뺑소니를 당했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졌다. 그래서 에클레시아에서 깨어났을 때 온몸이 쑤셨고 휴대폰 액정도 박살나 있었던 것이었다. 쿨럭, 피를 쏟으며 유채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채야. 문자가 늦어서 미안하다. 아빠가 오늘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생각나서 문자를 보낸다. 의사선생님이 너와 유하의 골수가 일치한다고 하더구나. 유채 네 수시 일정만 괜찮다면 수술 날짜를 내일 조정하자고 의사가 그러더구나.]

유채는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그 문자의 내용만 떠올렸다. 그래, 제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유하는 골수 이식이 필요했고 유채는 언니에게 골수를 줄 수 있었다. 유채의 눈앞이 까맣게 흐려졌다. 그럼에도 유채는 한 가지만은 필사적으로 제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반드시 꼭 살아서 돌아가야만 한다. 언니를 위해서.

* * *

의식이 가물가물해진 유채가 눈을 느리게 깜빡일 때, 루프스는 눈을 감지 말라고 절박하게 외쳤다. 유채의 눈이 감기고 축 늘어졌을 때는 순간 정신이 멍했다. 루프스는 오르페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유채의 몸을 안아 올렸다. 그때 마침 오르페가 도서관에 도착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루프스는 오르페를 앞에 두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루프스의 옷은 이미 유채가 흘린 피로 엉망이었다. 분명히 멀쩡했던 유채가 갑자기 피를 울컥 쏟으면서 쓰러졌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꼭 죽을 것만 같았다.

“독에 중독되셨습니다.”

오르페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답했다.

“독?”

뱀 수인 일족은 절대 독에 중독되지 않았으며 의사인 오르페는 특정한 독의 맛을 본 적이 있다면, 독의 맛을 보고 그게 무슨 독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유채의 피를 찍어 맛을 본 것으로 오르페는 독인 것을 확인했다.

“무슨 독?”

“제가 맛본 적이 없는 독이라 무슨 독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유채님이 드시거나 마신 모든 것을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채의 숨이 점점 잦아들었다. 다급해진 오르페와 루프스는 유채를 도서관의 책상 위에 눕혔다. 오르페는 유채가 토한 피가 기도를 막을 걱정에 그녀의 고개를 옆으로 틀어 기도를 확보한 뒤에 맥을 짚었다. 지나치게 불규칙했다. 게다가 유채의 피는 선홍색이 아닌 검붉은 색이었다. 그 뒤 오르페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해독했다. 유채가 고른 호흡을 되찾자마자 루프스는 그녀를 안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루프스는 제가 무슨 정신으로 그녀를 안고 제 방까지 왔는지 기억나지가 않았다.

루프스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레티티아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

“예?”

“레티티아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빨리 가서 알아봐!”

루프스의 노성에 오르페는 늙은 몸을 허둥지둥 움직였다. 루프스는 열이 올라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유채의 이마를 짚었다.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대로 있다가는 고열에 몸이 상할 것 같았다. 루프스는 궁녀들을 불렀다.

“얼음물을 가져와! 빨리!”

다람쥐 궁녀들은 작은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유채의 소식을 들은 블루벨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유…… 아니 레티티아님은요!”

블루벨은 땀을 흘리며 신음하는 유채의 모습에 탄식을 뱉었다. 블루벨은 다급한 손길로 유채의 옷을 벗겼다. 두꺼운 겨울드레스를 벗겨내니 유채는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 되었다.

다람쥐 궁녀들이 얼음물을 받은 목욕통을 낑낑대면서 들고 들어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통 안으로 옮겼다. 물이 넘치면서 바닥이 흥건해졌다. 블루벨이 다른 궁녀가 가져온 수건에 물을 적셔서 유채의 얼굴을 닦았다. 차가운 얼음물 덕에 유채의 체온도 조금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고, 유채의 몸의 열기에 오히려 얼음이 녹고 물도 점차 미지근해졌다. 다람쥐 궁녀들이 얼음을 더 가져와 통에 부어넣었다.

“찾았습니다!”

오르페가 헉헉거리며 달려와서는 숨을 몰아쉬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들어올렸다. 침대에 눕힌 유채의 옆에서 오르페는 손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블루벨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발만 동동 굴렀다. 루프스는 형형한 눈을 한 채 오르페와 블루벨을 유채의 곁에 남겨두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헤나.”

“하명하십시오.”

“독이 차에서 나온 것이 맞나?”

“예, 차에서 독이 나왔습니다.”

“찾아.”

헤나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궁 전체를 병사들이 이 잡듯이 뒤졌다. 궁의들이 근무하는 약재실이 가장 먼저 수색을 당했고 그 다음은 궁의 주방이었다. 유채가 먹고 마시는 것에 독을 넣을 수 있다고 추정되는 곳이 뒤집어졌다. 궁녀들이 기거하는 곳과 프레드릭이 머무는 곳은 가장 나중에 수색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오르페는 유채를 완전히 해독했다.

프레드릭은 유채의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못했다. 몸이 나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독을 마셨으니 몸이 또 얼마나 상했을까 걱정이 되었다. 프레드릭은 걱정으로 방 안을 서성였다. 그때 병사들이 프레드릭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프레드릭은 선선히 수색에 응했다. 병사들은 그의 거처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병사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찾았습니다!”

프레드릭은 깜짝 놀라서 그 병사를 돌아보았다. 그의 손에는 검은 액체가 든 병이 들려 있었다. 프레드릭이 무어라 변명을 하기도 전에 늑대 수인 병사가 프레드릭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무릎이 꺾이고 동시에 프레드릭의 머리가 아래로 눌렸다. 병사들이 프레드릭의 손을 뒤로 돌려서 수갑을 채웠다.

“감옥으로 데려가라!”

“잠시만! 나는 유채 양의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 윽.”

프레드릭이 해명을 하기 위해서 소리를 질렀으나 병사 하나가 그의 뒷목을 강하게 가격했다.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프레드릭을 병사 둘이 양쪽에서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 * *

“프레드릭 하워드의 방과 한 사슴 수인의 궁녀의 방에서 독이 발견되었습니다.”

케릭스가 루프스에게 말했다. 루프스는 의외의 인물의 이름에 되물었다.

“프레드릭?”

“차에서 독이 발견되었는데, 레티티아님과 차를 같이 마신 것이 프레드릭입니다. 그의 방을 수색한 결과 프레드릭의 방에서 차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종류의 독이 발견되었습니다.”

루프스가 화를 참듯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래서 그놈은 뭐라 말하던가?”

“자신은 억울하답니다.”

“뻔하지. 무슨 짓을 해서든 제 죄를 토해내게 만들어. 사슴 수인이든 프레드릭 놈이든, 배후가 누군지 알아야겠다.”

케릭스는 루프스의 살기에 몸을 떨었다. 루프스는 지금 굉장히 분노해 있는 상태였다. 그는 온갖 것을 다 부수고 싶은 심정을 주먹을 말아 쥐는 것으로 참았다. 제가 여기서 난동을 피워봤자 유채의 휴식에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었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고 말을 씹듯이 뱉었다.

루프스는 케릭스를 보내고서 자신의 침대에 누운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밀랍 인형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유채는 마치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숨도 쉬는 것 같지 않아서 루프스는 유채의 코 아래에 몇 번이나 손을 가져다 댔는지 몰랐다. 그때마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숨소리에 안심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쓸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봤을 때, 그는 그녀가 죽는 줄만 알았다. 축 늘어져 가쁜 숨을 토해낼 때, 루프스는 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유채 때문에 그의 간장이 졸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대체 네가 뭐가 특별해서.”

오르페가 말하기를 정신을 차리려면 삼 일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루프스는 이불을 들추고 유채의 옆에 누웠다. 그는 옆으로 돌아누워 한쪽 팔꿈치에 체중을 싣고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그는 잠든 유채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펠릭스 다우스였다. 자존심도 강하고 귀엽게 굴지도 않는 유채가 그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프지 않기를 원했고 울지 않기를 원했고 그녀가 계속 제 곁에 있기를 원했다. 유채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한곳이 묵직해졌고 드물지만 그녀가 제 앞에서 부드럽게 굴이면 가슴이 간질거렸다.

“예쁘기만 한 게 뭐가 좋다고.”

루프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유채의 몸을 끌어안았다. 유채의 마른 몸이 그의 품에 안겨 들어왔다. 그는 유채의 등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뼈밖에 남지 않은 마른 등이 고스란히 만져졌다. 그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지켜주겠다.”

루프스는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거슬리고 신경 쓰인다고 죽여 버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유채가 사라져 버리면 오히려 더 가슴이 저릿할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과 유채에게 휘둘리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곁에 계속 머물러주기를 원했다. 유채가 이렇게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은 혼란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항상 그의 발치에 넘실거리던 검은 뱀 같은 감정은 그녀를 볼 때만큼은 고요해졌다. 유채가 웃을 때는 그 검은 뱀들이 사라지기까지 했다.

“그러니, 곁에 있어라.”

루프스는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유채의 몸을 끌어안았다. 잠든 유채의 몸을 세게 끌어안고 루프스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무엇이든 해주겠다. 원하는 것은 뭐든 가져다주마. 그러니, 곁에 있어.”

그게 유채가 제 곁에서 없어지는 것보다 나았다.

* * *

“흐으음.”

유채는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루프스의 방이었다. 유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억해 냈다.

“언니!”

유채는 얼른 일어났다. 침대 아래로 발을 딛자마자 어지럼증을 느끼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채는 그대로 주저앉아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은 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아아악!”

유채는 크게 소리쳤다. 그래도 답답한 속은 풀리지 않았다. 유채는 가슴을 쳤다. 군데군데 비어 있던 기억은 이것이었다. 유하의 항암치료는 실패로 끝났다. 의사는 유하에게 남은 방법이 골수 이식 외에는 없다고 했다. 유채의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의사는 유하는 반일치가 힘들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조혈모세포는 언제나 50%만 일치할 뿐 100% 일치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형제자매는 달랐다. 25%의 확률로 조혈모세포가 동일할 수 있었다. 유채는 그 25%의 확률을 믿었다.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그 25%의 확률을 믿어보기로 했다. 유채는 시간을 내어 조혈모세포 검사를 받았고 유채의 수능 날이 그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유채는 언니의 병문안을 갔고 치킨을 사서 병원으로 돌아가던 중 아빠의 문자를 받았다.

수능 시험에 방해될까 봐 아버지는 유채에게 연락하는 것을 미루고 있었고 약국 일을 정리한 후에야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유채는 그 문자를 보고 자신이 찻길 위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리에 우두커니 서버렸다. 언니가 살 수 있다. 자신이 언니를 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쁨도 잠시, 유채는 클랙슨 소리와 헤드라이트 빛을 그제야 인식했다. 그 순간 차가 덮쳤다.

“아아아아…….”

유채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만 쥐어뜯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언니는 어떻게 됐을까? 유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죽고 싶다는 말도 이제는 사치였다. 유채는 돌아가야만 했다. 살아서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유채는 이를 악물었다.

“유채님!”

문을 열고 들어온 블루벨이 유채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블루벨은 유채의 몸을 끌어안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훌쩍거렸다.

“정말로 잘못되시는 줄 알았어요! 유채님, 제발 이제 아프지 마세요!”

“블루벨?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

유채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블루벨의 훌쩍거림에 의아해서 물었다. 블루벨은 벌게진 눈으로 훌쩍거리면서 설명했다. 블루벨은 유채는 삼 일 간 사경을 헤맸다는 말로 시작했다. 유채가 도서관에서 독을 마시고 쓰러졌고 마침 가까이에 있던 루프스 덕분에 오르페가 빨리 와서 유채의 목숨을 구했으며 프레드릭과 사슴 수인 한 명이 용의자로 잡혔다는 것이었다.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서 프레드릭과 사슴 수인을 고문을 했고, 사슴 수인이 토모스가 배후라고 밝혔으며 지금 루프스는 토모스와 프레드릭을 유채가 루프스와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추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레드릭 씨가 왜? 그분이 뭘 잘못했다고!”

유채는 잊고 있던 기억을 찾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방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프레드릭이 고문받고 있다는 말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프레드릭 씨 방에서 독이 나왔는데 그 독이 유채님이 마신 차에서도 나왔대요. 사슴 수인이 유채님께 꾸준히 먹이던 독약하고 그 독약이 반응해서. 유채님이…….”

“아, 아니야. 난 프레드릭 씨가 준 차, 다 마셨어. 그건 사슴 수인이 새로 가져다 준 거야.”

“예?”

유채는 당황한 블루벨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 일간 가만히 누워만 있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채는 힘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유채는 블루벨이 말리는 것도 무시하고 다행히 열려 있는 문 밖으로 나갔다. 헤나가 놀란 얼굴로 유채의 팔을 잡았다.

“어디 가십니까?”

“놔요! 나, 지금 그 잘난 루프스가 약속한 산책하러 가는 거예요!”

유채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몸부림을 쳤다. 헤나는 유채의 몸에 무리가 갈까 봐 얼른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유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추국은 유채가 루프스를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채는 맨발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 * *

프레드릭은 이제 눈을 뜰 힘도 없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밧줄에 쓸린 손목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다. 형틀에 묶여서 허공에 매달린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이제 어깨에는 감각이 없었다. 몽둥이가 그의 등을 다시 한 번 내리쳤다.

“헉!”

비명을 지를 힘도 없었다. 프레드릭은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프레드릭은 늑대 수인이 뿌린 차가운 물 한 바가지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는 제 옆에, 저와 똑같이 피로 범벅이 된, 악에 받친 눈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보았다. 그는 토모스가 했던 말을 회상했다.

토모스는 제 딸이 죽은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유채를 독살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두 개의 독을 이용했는데, 하나는 사슴 수인이 먹인 독이고 하나는 프레드릭의 방에서 발견된 독이라고 했다. 자신은 프레드릭에게 그를 포트리스로 돌려보내 주는 조건으로 일을 부탁했고 프레드릭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진술했다. 프레드릭은 당연히 부인했다. 그는 제 방에서 나온 그 약을 그날 처음 보았다. 그는 억울했다.

“프레드릭이랬나?”

냉정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루프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음산한 목소리에 주위의 수인들 모두가 긴장했다.

“다시 묻지, 토모스의 말이 사실인가?”

“아, 아닙…… 니다…….”

프레드릭은 다시 한 번 부인했다. 피가 섞인 침이 줄줄 흘렀다. 루프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너 외엔 출입한 적이 없는 네 방에서 이 독약이 발견된 것과 네가 준 차에서 독약이 나온 이유를 말할 수 있나?”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정말. 전…… 억울합니다…….”

루프스가 눈짓을 하자 늑대 수인이 채찍을 들었다. 프레드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채찍과 몽둥이 중 고르라면 몽둥이가 나았다. 몽둥이는 묵직하게 아픔이 남는다면 채찍은 살갗을 찢기 때문에 고통이 두 배였다. 프레드릭은 눈을 감았다.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아악!”

“레티티아!”

프레드릭도 예상한 고통이 없고 루프스가 난데없이 유채를 찾는 것에 놀라 눈을 떴다. 유채가 형틀의 왼쪽 기둥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프레드릭 대신에 채찍을 맞은 유채는 어지러운 머리와 화끈거리는 팔의 아픔을 뒤로하고 입을 열었다.

“프레드릭 씨는 아무…… 잘못없어요!”

토모스는 유채와 천한 마레 위르의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루프스를 보면서 조소를 흘렸다. 그리고 분노했다. 그에게 독약을 전해준 마레 위르가 그렇게 말했다. 루프스가 펠릭스 다우스로 들인 암컷을 연모하고 있다고.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다. 루프스라는 작자가 저깟 암컷에 눈이 돌아가서 제 딸을 죽인 것이었다.

토모스는 이를 갈았다. 루프스가 저 마레 위르 암컷에게 눈이 돌아간 것을 일찍 알았다면 제가 직접 갈기갈기 찢어서 죽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늑대들에게 연인을 잃는 것만큼 더한 고통은 없었다. 괜히 그 마레 위르 놈의 말을 반신반의했다가 제대로 복수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혹여나 실패하신다면, 그 마레 위르 암컷이 프레드릭 놈을 사랑하고 있으니 제 딸과 똑같이 사랑하는 이의 손에 죽게 하려 했던 거라고 하십시오. 루프스 놈의 눈이 제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푸하하하!”

토모스의 웃음이 추국장을 가득 채웠다. 유채에게로 향하던 루프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거 정말 걸작이군. 사랑에 눈이 멀어서, 저를 죽이려고 했던 자를 변호해?”

토모스가 번뜩이는 눈으로 유채를 바라보았다. 독에 된통 당한 것인지 초췌해진 얼굴이 딱 봐도 병자의 꼴이었다. 비록 죽이지는 못했어도 저렇게 엉망인 꼴을 보니 기분이 조금 풀렸다.

“이봐 암컷. 내가 왜 저 수컷에게 독을 줬는지 아나?”

유채는 토모스가 제게 뿌리는 살기에 몸을 움츠렸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토모스의 눈에는 진득한 악의가 가득했다.

“내 딸이 루프스의 손에 죽었거든. 그 앤 루프스를 사랑한 죄밖에 없었어! 그래서 너도 그렇게 죽어보라고, 악!”

루프스는 말뚝에 양손이 묶인 토모스의 머리를 힘을 주어서 꾹 눌렀다. 토모스는 머리가 바닥에 눌리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루프스가 한 자, 한 자 씹어서 말을 뱉었다.

“이렇게 떠들 줄 알았으면, 네놈의 혀부터 자를 것을 내가 너무 너그럽게 굴었군.”

루프스는 토모스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렸다. 그는 악에 받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토모스의 눈 위에서 날카로운 손톱을 꺼냈다.

“끄아아아악!”

“어차피 죽을 놈이니, 눈 한쪽은 없어도 괜찮겠지.”

루프스는 토모스의 오른쪽 눈알을 잡아 뜯어서 악력으로 터뜨렸다. 토모스의 텅 빈 오른쪽 눈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루프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토모스를 뒤로하고 유채 쪽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쓰러진 토모스는 병사들의 몽둥이세례에 비명을 질러댔다.

유채는 루프스의 손에서 떨어지는 피에 겁을 집어먹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유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가 프레드릭에게도 똑같이 할 것 같아서 겁이 났다. 유채는 루프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다급하게 말했다.

“프, 프레드릭 씨는 아니에요! 동, 동기도 없고…… 정황상 증, 증거만…… 있잖아요! 무, 무죄 추정, 정의 원칙에…… 따라서…… 아니에요…….”

루프스는 그저 유채가 걱정되었을 뿐인데 그녀가 이렇게 절박하게 프레드릭을 변호하는 것을 보자 속이 뒤틀렸다. 루프스의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가 유채를 응시했다. 유채는 자꾸만 바싹 바싹 마르는 입술을 침으로 축였다.

“나, 나…… 프, 프레, 드릭 씨가 준 차, 다 마셨어요…… 도…… 독이 나온 차, 차는 다른 수인이…….”

“그건 네 추측이지, 레티티아.”

루프스가 유채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에 지나치게 얇은 유채의 옷과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멍이 들고 까진 무릎과 생채기로 가득한 발이 보였다. 루프스는 유채를 이곳에서 내보내기 위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잡아 당겼다.

유채는 이대로 밀려나면 프레드릭의 죽음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유채는 온 힘을 다해서 형틀을 잡고 루프스의 힘을 버텼다.

“프, 프레드릭 씨는 정말…… 아니에요! 아니라고! 그, 그러니까……!”

“거기서 저 수컷을 변호하는 말이 한마디 더 나오면 저 수컷을 네 눈앞에서 친히 찢어 죽여주지.”

루프스가 이를 악물고 하는 말과 그의 살기에 유채는 입을 다물었다.

루프스가 제 옷을 벗어서 유채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아직 낫지도 않은 몸에 찬바람을 맞아 앓을 것이 걱정되었다. 그새 살갗이 빨갛게 얼었다. 한눈에도 유채의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유채는 혹시 루프스가 수가 틀리면 프레드릭을 죽여 버릴까 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가만히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안아 올렸다. 유채가 버둥거렸지만, 루프스는 그녀의 팔과 다리를 손으로 단단하게 감았다.

“저, 저…….”

“추국은 나중으로 미룬다. 저 두 놈은 다시 지하감옥에 가두어놓아라.”

“예!”

프레드릭을 형틀에 매달았던 수갑이 풀렸다. 프레드릭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채는 프레드릭이 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고개를 손으로 눌러서 다른 이의 눈으로부터 감추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헤나!”

루프스는 제 방 앞에서 블루벨을 나무라고 있는 헤나를 분노한 목소리로 불렀다. 블루벨과 헤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내가 언제 레티티아가 방을 나오게 하는 것을 허락했지?”

“산책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내 말보다 레티티아의 말이 중요한가 보군?”

루프스의 차가운 시선이 블루벨을 향했다.

“너는 네가 모시는 주인을 막지 않고 무엇을 했나?”

“그…… 그게 제가…….”

블루벨은 유채를 쫓아가려고 했으나 유채가 나가면서 방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그 안에 갇혀 버려서 그녀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블루벨이 우물쭈물하면서 사정을 설명을 하기도 전에 루프스가 말을 끊었다.

“같잖은 변명을 할 것이면 집어치워라.”

루프스는 유채의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문을 닫으면 자동적으로 잠기도록 되어 있는 방이라 루프스가 문을 닫자마자 철컥 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방문이 잠겼다. 루프스는 덜덜 떠는 유채를 침대에 앉혔다. 찬바람을 맞은 유채의 몸이 차가웠다.

“도대체 몸도 성하지 않은 게 뭔 배짱이라고!”

루프스는 유채에게 화를 냈다. 찢겨진 옷 사이로 선명한 채찍 자국이 보였다. 꽤나 깊게 파인 것인지 벌건 살을 드러나 보였다. 삼 일간 누워 있기만 해 초췌해진 몰골에 바닥에 구르기라도 했는지 머리에는 흙먼지를 뒤집어썼고 다리에는 멍과 생채기가 가득했다. 더 화를 내고 싶어도 그 처참한 몰골에 루프스는 이 이상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오르페를 불러오마.”

유채는 오르페라는 말에 루프스에게 해야 하는 말이 떠올랐다. 유채는 그의 소매를 붙잡고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나, 나…… 돌, 돌아가야 해요…….”

루프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채는 루프스의 냉랭한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울먹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 나…… 여기 오기, 오기 전, 전에 교통사고를 당, 당했는데…… 그러니까 그, 그때 문자를 봤어요…….”

유채는 지금 너무 혼란스러웠다. 저는 죽은 걸까? 아니면 살아 있는 것일까? 옷이나 휴대폰 모두 가져온 것을 보면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살아 있다면, 지금 거기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니는 병이 더 심각해지지는 않았을까? 나 말고 골수가 일치하는 기증자가 혹시, 혹시 나타났을까? 조리 있게 설명하는 건 무리였다. 그저 생각나는 말을 곧바로 뱉었다.

“그러니까, 백, 백혈병이란 병, 병을 우리 언니가…… 앓고 있는데…… 그 병을 고치려면 조, 조혈모세, 포라는 게 필요한데. 그, 그걸…… 내가, 내가 줄, 줄 수 있어요…….”

루프스는 유채가 제 소매를 붙잡고 절박하게 하는 말을 들었다. 교통사고라는 것은 무엇이며 백혈병은 또 무엇이며, 조혈모세포란 것이 무언지는 몰랐으나, 한 가지는 알았다. 지금 유채의 언니를 구할 수 있는 것이 그녀라는 것이었다.

“그, 게 없, 없으면 우리 언, 언니 죽, 죽을지도 몰, 몰라요.”

유채는 꺼억꺼억 울면서 애원했다.

“나, 나…… 해달라는 거…… 다, 다해줄…… 게요…… 몸을 달, 달라면 주, 주고…… 개, 개처럼…… 짖, 짖으라면, 짖을게요. 그러니까……. 제, 제발…… 나, 나. 여, 여기 나, 나가게 해줘요.”

유채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유채는 꺼이꺼이 우는 와중에도 빌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발, 나, 돌아가게 해줘요…….”

루프스는 울면서 비는 유채를 보면서 이를 갈았다.

돌아간다고? 누구 마음대로?

루프스의 발목에 머무르던 검은 뱀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루프스는 어두워진 눈동자로 으르렁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입 다물어.”

루프스는 유채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서 눈을 마주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커다란 검은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손에 잡힌 어깨 역시 바들바들 떨렸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안았다.

유채는 당장이라도 루프스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혹시 그게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이를 악물고 버텼다.

“돌아갈 방법은 아나? 돌아가는 방법을 알면 놓아주는 것을 고려해 준다고 했는데?”

“에, 에클레시아나……. 고양이 일족, 땅. 땅에 가면…… 알 수 있을…… 지도…….”

“그럼 방법은 모른다는 거군.”

루프스는 유채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유채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루프스가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그곳은 잊어.”

루프스의 속삭임에 유채는 눈을 크게 떴다.

“은가연은 신과 계약해서 이곳으로 넘어왔다. 신이 아니면 너를 그곳으로 돌려보내 줄 수인은 없다. 그러니 못 돌아가. 포기하고 잊어. 그리고 내 곁에 있어.”

루프스가 유채의 파렌티아를 당겼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목에 닿았다.

“넌 내 펠릭스 다우스이고 영원히 나에게 속한 존재다. 나의 것이고, 그러니 그딴 과거는 잊고. 여기 있어.”

“어떻게 그래요! 호, 혹시라도. 아주 만약에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고…… 갑자기 상, 상태가 나빠지면 우리 언니는 죽어요! 죽는다고! 당신은 당신 동생의 죽음에 무감각해도 나는 아니라고! 난 돌아가야…….”

“입 다물어!”

루프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내가 너를 어떻게 해버릴지 나도 장담 못 한다!”

“난, 그냥 돌아가게…… 아악!”

유채는 비명을 질렀다. 아까 전 프레드릭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신 맞은 채찍 때문에 생긴 상처가 벌어졌다. 루프스가 화를 삭이기 위해서 유채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준 탓이었다.

루프스는 제 곁을 떠나게 해달라는 유채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냥 비웃고 무시하면 될 일인데, 유채의 일에 한해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유채는 제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반항적이어도 결국 유채는 제 곁을 떠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루프스는 진득한 소유욕을 느꼈다. 그는 유채의 팔을 좀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루프스는 제가 유채의 상처를 더 심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레티티아를 향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급했다.

유채는 너무 아파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저 눈물만 흘렸다. 유채의 옷이 피로 물들었다. 아픔에 울먹이던 유채는 루프스의 이성을 잃은 눈을 보았다.

살과 살 사이에 파찰음이 울려 퍼졌다. 유채가 자유로운 한 손을 겨우 휘두른 것에 루프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뺨에 그어진 붉은 실금에서 피가 흘렀다.

유채는 붉게 상기되고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루프스는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깨달았다.

“나쁜 새끼.”

유채는 반쯤 울음 섞인 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나를 동정한다면, 제발 여,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난 돌아가…….”

“그 입 다물어.”

루프스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루프스는 다짜고짜 그녀를 제 품으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몸에 그는 제대로 힘도 줄 수 없었다. 그녀가 제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화가 가라앉았다. 이 작고 약한 암컷이 왜 자신을 이렇게 들었다 놓았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라면 무례하다고 죽여 버렸을 암컷을 왜 이렇게 손해까지 입으면서 아끼는 것일까.

“놔! 놓으라고! 놔!”

제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유채의 몸짓에 그의 새파란 청회색 눈동자가 명백한 노기를 품고 번들거렸다.

“한번만 더 그 입에서 돌아가겠다, 나가게 해달라는 말이 나오면 그땐, 친히 네 발목에 족쇄를 달아서 침대 기둥에 묶어놓겠다. 블루벨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두 번 다시는 바깥구경 못하게 해주겠어.”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유채는 형형한 기세의 루프스에게 눌려서 벌벌 떨었다.

“오르페를 불러오지. 벌로 당분간은 산책도 없고 블루벨도 네 시중을 들지 못하게 하겠다. 몸이 회복되는 동안은 얌전히 쉬어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내게 말하고. 단, 돌아가겠다, 나가겠다는 말만 빼고.”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루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유채는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악!”

유채의 고함은 점차 물기로 젖어갔다.

“흐어어어엉.”

유채는 가슴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오르페가 오기 전까지 유채는 몸의 수분을 모두 비워낼 기세로 통곡했다.

워낙 토스 호무스가 떠들썩하니 포트리스 근처에 사는 여우 수인 하나가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로 프레드릭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헤임달도 그 이야기를 레이라에게 털어놓았다. 산달이 거의 가까워져 온 레이라는 부른 배를 부여잡고 통곡을 했다. 알렉스는 레이라를 끌어안고 위로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프레드릭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가져온 약초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 약초는 그저 병의 증세를 지연시키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아마 루프스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루프스가 그들을 속인 것이었다. 형을 따라 화합을 지지하는 온건파에 속하는 알렉스도 분노한 판국에 그들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강경파의 분노는 가히 하늘을 찔렀다. 그들의 수장인 렉스는 지금이라도 그놈들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알렉스는 프레드릭이 인질로 잡혀 있음을 이유로 들면서 렉스의 분노를 진정시켰다.

“어떡해. 알렉스. 나. 나. 그 사람 없으면, 죽을 것 같은데…… 나 어떡해……우리 그이는 어떡해…….”

레이라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울기만 했다. 알렉스는 레이라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레이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가 형을 데려올게요, 레이라.”

알렉스는 레이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예전에 약속했잖아요. 형은 반드시 구해오겠다고, 그러니까. 내가 형을 데려올게요.”

“하지만, 알, 알렉스. 그건 위험해! 토스 호무스가 어떤 곳인지 알잖아? 네가 거길 어떻게 가…… 안 돼. 알렉스까지 없으면.”

“레이라, 내 눈을 봐요.”

알렉스가 고개를 흔드는 레이라의 얼굴을 붙잡았다.

“나 알잖아요. 한다면 해요.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형은 레이라에게 데려다 줄게요.”

알렉스는 그 말을 끝으로 짐을 챙겨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수인 내전에 아들 내외를 잃은 미스 캣플릿에게 레이라를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 뒤, 알렉스는 그 길로 헤임달을 찾았다.

* * *

“그나저나, 형님. 그거 진짜 성공할 것 같어?”

알폰소가 배에서 잡아온 생선을 정리하면서 헤임달에게 물었다. 헤임달은 타우루스 헥터의 소개로 토모스를 만났고, 루프스에게 복수하는 방법으로 유채를 죽이라면서 독약을 건넸다.

“원래 늑대 놈들은 제 암컷 일이면 눈이 돌아가. 지금쯤 루프스 놈은 그 계집애에게 온 신경이 쏠려서 원래대로라면 눈치챘을 미노르 호무스의 일을 몰라볼 거야.”

헤임달이 헥터에게 알려준 작전은 간단했다. 루프스의 눈을 돌린 뒤, 그를 칠 전쟁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는 루프스도 무너질 수 있다고 감언이설로 그를 설득했다. 물론 헤임달은 기습이라 하더라도 루프스가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작전은 오로지 수인들 간에 분란의 씨앗을 심고 하워드 형제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레드릭 놈이 우리 예상대로 잡힌 것은 확인되었고. 알렉스 그놈도 움직일까?”

헤임달은 알폰소가 던져준 생선의 머리를 칼로 내리쳐서 잘라내려고 하였다. 뼈가 단단한 놈인지 한 번에 머리가 잘리지 않았다. 헤임달은 속으로 웃었다. 하워드 형제가 딱 이놈의 뼈 같은 놈들이었다.

헤임달에게 화합과 평화는 불행이었다. 프레눔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수인 놈들은 저들끼리 싸워야 했고 인간들은 그들 사이에 휘말려서 공멸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분란의 씨앗이 필요한 법이었다. 화합이니 평화니 강조하는 두 형제 덕택에 그는 이제껏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저 적당한 때를 기다리면서 사전작업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레드릭 놈이 헤임달의 정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가 몰래 양귀비를 기르고 있다는 것이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잠식했다.

“알렉스 그놈도 움직일 거야. 제 형에 관한 일이면 앞뒤 재지 않은 놈이니.”

하워드 형제만 없다면 렉스 뮈어를 움직여서 수인 내전이라든지, 아니면 인간 대 수인의 전쟁을 일으키기가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헤임달에게 그 두 형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나저나, 형님. 그 루프스 놈이 죽으면 그놈이 옆에 끼고 사는 계집애 나 주면 안 돼? 내가 데리고 살게, 형님. 나도 그런 미녀랑 결혼하고 알콩달콩 살아보자. 응?”

알폰소가 손에 묻은 생선 비늘을 바지에 대강 닦아내면서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애교를 떨어대었다. 헤임달이 알폰소의 머리를 들고 있던 칼의 손잡이로 한 대 쥐어박았다.

“잘 끝나면, 공작에게 첩으로 바치지 않고 네놈에게 줄게.”

“진짜지? 약속하는 거다, 형님.”

알폰소가 신나하면서 자발적으로 그물 정리에 나섰다. 헤임달은 신이 난 알폰소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헤임달 씨.”

헤임달의 머리 위로 건장한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헤임달은 고개를 들었다. 알렉스였다. 허리 왼쪽에 검을 매고 오른쪽에는 여러 개의 단검을 맨 알렉스는 가죽 갑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마치 행군을 나가는 병사처럼 짐이 매어져 있었다. 알렉스의 자수정빛 눈이 결의에 불타고 있었다.

“나 좀 도와줘요. 형을 구하러 가야겠어요.”

알렉스는 프레드릭이 유채를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레이라는 프레드릭에 대한 걱정에 펑펑 울었다. 알렉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레이라를 달래는 일뿐이었다. 알렉스는 레이라를 진정시키고 헤임달에게로 온 것이었다.

“나를 토스 호무스로 데려가 줘요.”

헤임달은 속으로 웃었다. 언제나 세상은 그에게 불행한 운명을 쥐어주는 것만큼 그의 뜻대로 돌아갔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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