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탈출
알렉스는 차가운 밤바다를 헤엄쳐 지난번에 왔었던 그 해안에 도착했다. 몰래 잠입하는 것이기에 알렉스는 혹시나 공중에서 경비를 하고 있을 독수리 수인들의 눈을 피해서 바위 뒤에서 긴 머리에 고인 물기를 짜냈다. 알렉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저들의 감시를 통과해 토스 호무스로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빌어먹을. 루프스.
알렉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헤임달을 만나서 그의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봐야 아는 것이지.”
알렉스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 * *
“윽.”
프레드릭은 감옥의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면서 신음을 토해내었다. 그때 이후로 다시 추국이 열리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자백을 받아내려는 고문의 빈도가 늘어났다. 프레드릭은 추운 냉궁에서 몸을 웅크렸다. 매일이 구타와 고문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밥이라도 주니 다행이었다.
“레이라…….”
프레드릭은 로켓을 움켜쥐었다. 몸이 약해지니 마음이 약해졌다. 부어터진 두 눈에서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프레드릭은 로켓을 움켜쥐고 흐느꼈다. 레이라가 보고 싶었다. 레이라와 자신의 아이를 보고 싶었다. 그때,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알렉스가 말릴 때 그 말을 들을 것을. 프레드릭은 모든 것이 후회되었다. 프레드릭은 손톱이 빠져서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으로 로켓을 열었다. 레이라의 얼굴이 보였다. 레이라의 머리카락에서 그녀의 향기가 났다.
“레이라…… 레이라…… 레이라…….”
프레드릭은 로켓을 보면서 오열했다. 그 웃음이, 그 얼굴이, 그 향기가 모든 것이 그리웠다. 레이라를 보고 첫눈에 반했던 때가 떠올랐다. 비가 오는 날, 비를 맞으며 뛰어가면서도 밝았던 레이라가 그는 좋았다. 고아임에도 씩씩하고 항상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내는 레이라가 그는 좋았다. 프레드릭은 너무 아파서 이젠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 몸을 웅크리고 울었다.
똑. 똑.
누군가가 감옥의 돌바닥을 두드렸다. 프레드릭이 뻐근한 고개를 돌렸다. 웬 나이든 뱀 수인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뱀 수인은 쉬잇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속삭였다.
“저기 간수들 눈치채기 전에 빨리 이쪽으로 기어와.”
프레드릭은 뱀 수인의 말대로 겨우 몸을 기어서 움직였다. 뱀 수인은 손을 뻗어서 프레드릭의 몸에 치유마법을 불어넣었다. 그는 저 뱀 수인이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오르페였다.
“지, 지금?”
“유채 양이 부탁한 거야. 미안하다고, 제가 어떻게든 구해주겠다고 기다려 달라더군.”
프레드릭은 저 대신 채찍을 맞고 루프스의 손에 끌려간 유채를 기억해 내었다. 본인의 일만으로도 힘들 것인데, 저까지 신경 쓰는 것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확실히 수인의 마법은 우리들의 마법과 많이 다르군요. 프레눔에 비교적 덜 영향을 받으니.”
“프레눔? 그건 뭐야?”
오르페가 중얼거렸다. 프레드릭은 감옥의 천장과 창살을 훑어보았다. 대륙에서는 구하기 힘든 프레눔으로 떡칠을 해놓은 감옥이었다. 애초에 마력 저항력이 강해 제대로 마법 비슷한 것을 구현하는 수인이 몇 없음에도 감옥은 모두 프레눔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니투스가 세운 감옥이니 마법의 두려움을 아는 그가 미리 대비를 한 것으로 보였다.
프레눔은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었다. 프레눔이 가까이에 있으면 돌이 마력을 흡수해 어떤 마법을 써도 발휘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법사들을 구속할 때 목과 팔목에 프레눔으로 만든 구속구를 채우는 것이었다. 스펠은 목에서 마력이 발산되고 에어리얼은 손목에서 발산되니 그곳에 프레눔을 채워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통제했다.
프레눔은 보통 근거리나 접촉된 마법만을 흡수하는데, 지금 이 감옥처럼 프레눔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곳이라면 마력 양이 상당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오르페는 수인이라 마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른 것인지 비교적 수월하게 마법을 사용했다.
“시간도 없고, 여긴 이상하게 마법이 잘 안 되는 곳이라 이 정도밖에는 못했네.”
몸이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살 만한 수준은 되었다. 빠진 손톱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기력도 되찾았다. 오르페는 간수들이 있나 눈치를 살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온도가 낮아서 중요한 약초를 저장해 놓거든, 나중에 핑계 대고 한 번 더 오겠네. 그때까지 몸조리 잘하시게.”
“감사합니다.”
프레드릭이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채 양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알겠네.”
오르페는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페는 냉궁에 들어온 핑계대로 제가 저장해 놓은 약초를 한 움큼 집어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지키고 서 있는 병사들에게 약초 한 뭉텅이를 보여주고 냉궁을 빠져나왔다.
【‘이거 정말 걸작이군. 사랑에 눈이 멀어서, 저를 죽이려고 했던 자를 변호해?’】
토모스의 말을 루프스가 헛소리로 넘긴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유채가 프레드릭의 이야기만 꺼내면 루프스는 격하게 반응하였다. 그리고 그것에 피해를 입는 것은 유채였다. 프레드릭 이야기를 잘못 꺼냈다고 루프스는 블루벨의 출입을 막았다. 그 가여운 아가씨의 유일한 낙이 귀여운 토끼 꼬마를 보는 것인데 그걸 막아버린 것이었다. 그 덕분에 유채는 눈에 띄게 불안해하였다. 몸도 안 좋은 아가씨가 마음까지 불안정해졌으니 큰일이었다.
요즘 루프스의 기세가 무시무시해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오르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실리사님.”
“응?”
추국이 있은 지 일주일을 넘어 이 주를 향해 가고 있을 때였다. 이제 삼월이 되었고 아직 날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봄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바깥과 달리 유채의 마음은 찬바람만 부는 겨울이었다. 바실리사와 티타임을 가지던 유채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혹시 말이에요. 만약의 경우에 블루벨을 루프스로부터 보호해 주실 수 있나요?”
“갑자기 왜?”
“요즘…… 조금 불안해서요. 루프스가 블루벨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루프스는 유채를 협박하는 데에 블루벨을 이용했다. 이번에도 정말로 블루벨의 출입을 막았는데 나중에는 블루벨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겠다고 협박할 것이 두려웠다. 루프스는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유채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블루벨을 보호해 주세요.”
“알겠어. 그럴게.”
바실리사는 간절한 유채의 표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루프스보다 약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만만하지는 않았다. 블루벨 하나 정도는 그 녀석으로부터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내가 더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하지.”
바실리사는 유채의 초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혈색이나 몸의 상태 같은 것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루프스가 그녀의 회복을 위해 들인 약재와 음식들의 덕이었다. 베노르 콩레수스가 막 끝났을 때보다 훨씬 나았다. 유채의 회복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블루벨이나 오르페였다. 또 돌아갈 이유가 생긴 유채의 회복 의지도 그녀의 몸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너무 잔인했다. 바실리사는 유채가 불쌍했다. 지금 닥친 일만으로도 힘든 아이에게 또 다른 무거운 짐을 어깨에 올려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실리사는 유채의 가늘게 떨리는 팔을 보았다. 프레드릭일로 블루벨을 만나지 못한 유채의 몸 상태는 꽤나 악화되어 있었다. 크게 상심한 탓인지 유채는 요즘 음식을 통 먹지를 않았다. 루프스도 눈에 띄게 마르는 유채가 걱정인지 그녀에게 여러 보양식을 구해다 주었다. 바실리사는 루프스에게 뭐가 진짜 문제인지 말을 해주려다가 그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입을 다물었다.
유채를 힘들게 하는 것은 루프스의 집착이었다. 기억을 찾은 유채가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원한 뒤로 그의 집착이 보다 심해졌다. 궁녀들이 떠드는 말을 듣기로는 유채를 만나기만 하면 품에서 떼어놓지를 않는다고 하였다. 제 무릎에 유채를 앉히고 연인 대하듯이 귀에 속삭이거나 뺨에 입술을 맞추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지분거려서 보는 수인들이 민망할 지경이라고 하였다.
유채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루프스는 그녀를 향한 소유욕을 보였다. 그게 유채를 힘들게 했다. 언니를 위해서 돌아가야만 하는 유채를 막는 루프스의 집착이 유채를 힘들게 했다. 유채는 정신적으로 지쳐 갔다. 토스 호무스의 궁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 것이 유채였지만 그 속은 아니었다. 바실리사는 유채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유채는 한 손으로 떨리는 다른 손을 꼭 붙잡아 떨림을 감추고 있었다.
“난 네가 마음에 들어.”
바실리사가 유채의 떨리는 손을 감싸 쥐었다.
“그래서 미안해. 난 네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펠릭스 다우스는 루프스의 소유물이고 난 엄밀히 말하면 그에게 복속된 신하거든.”
“괜찮아요. 저 때문에 피해 입으실 수도 있으니까 이해해요.”
“언제 한번은 꼭 도와줄게, 내가 정말 미안해.”
유채는 바실리사의 따뜻한 말에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채가 방을 나서자 헤나의 일을 도우며 유채를 보기 위해 바실리사의 방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블루벨이 폴짝폴짝 뛰어 유채에게 달려왔다. 유채는 블루벨을 꼭 끌어안았다.
“잘 지냈어?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예! 헤나님 일을 도우면서 지냈어요. 유채님은요?”
“난 괜찮아.”
유채는 블루벨의 작은 손을 잡았다. 유채는 독을 먹고 깨어난 그날 이후로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제가 늦게 돌아가면 언니가 죽을 수도 있다. 확실한 때를 기다리겠다며 늦장부릴 여유는 더 이상 없었고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 수 없었다. 일단 이 궁부터 빠져나가야 했다.
“블루벨.”
“예?”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바실리사님에게 뛰어가.”
“왜요? 왜 무섭게 그런 말을 하세요…….”
“약속해, 블루벨.”
유채가 블루벨의 붉은 눈을 마주보았다. 블루벨은 결연한 빛을 띤 유채의 눈이 너무 두려웠다. 유채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유채는 블루벨의 어깨를 움켜잡으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블루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채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바실리사님께 뛰어갈게요. 약속해요.”
“고마워, 블루벨…….”
유채는 블루벨을 끌어안았다. 블루벨도 유채의 등을 마주 안았다. 너무나도 마른 등이 가여울 정도였다. 블루벨은 지난번 유채와 루프스가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유채의 언니가 아프고 유채만이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이야기에 크게 놀랐다. 블루벨은 유채와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블루벨은 유채가 떠나지 않기를 원했다. 유채가 이곳에 남아서 지금처럼 친구처럼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무리 유채가 좋다고 해도 그녀를 잡을 수는 없었다. 블루벨에게도 엄마와 동생들이 있듯이, 유채에게도 부모님과 언니가 있었다. 헤어지는 것은 슬펐지만, 그래도 유채가 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속에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제가 조금 슬픈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전 유채님 많이 그리워할 거예요.”
블루벨이 속삭였다.
“인사 못 하고 떠나셔도 돼요. 대신에 그곳에 가서도 저 기억해 주셔야 해요? 저도 여기서 유채님 기억할게요. 만약 딸 하나 낳으면 그 딸에게 유채님 이름 줘도 되지요?”
“응…….”
유채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정말 고마워, 난 블루벨이 없었으면 진작 죽었을 거야. 블루벨이 나를 구한 거야. 네가 너무 그리울 거야. 너만은 잊지 않을게. 약속할게.”
“히히, 유채님은 진짜 울보예요.”
블루벨이 유채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유채는 포옹을 풀고 일어나 얼굴 표정을 정리했다.
루프스가 저를 불렀다.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나갈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되도록 그 남자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유채는 자존심을 모두 버렸다. 지금은 자존심보다 언니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유채는 블루벨과 함께 온실까지 걸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채는 궁녀가 열어주는 문으로 온실로 들어갔다. 블루벨과는 그 앞에서 헤어졌다. 온실은 예전에 보았던 것처럼 푸르름이 가득했다.
“악!”
커다란 손이 유채의 팔목을 잡고 잡아당겼다. 유채는 그 힘에 이끌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 이리 늦나?”
루프스였다. 풀밭에 누워 있던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끌어당겨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유채는 루프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애써 표정을 관리하면서 그의 은빛 머리카락을 쓸었다. 머리카락을 만져 주는 것은 루프스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좀 많이 먹지? 일부러 수고롭게 마레 위르들이 먹는 음식들도 구해주는데, 이렇게 계속 마르면 어떡하나?”
“원래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에요.”
“그럼 조금 더 많이 먹든가. 이렇게 말라서는 꼭 나뭇가지 같군.”
루프스는 유채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최근 수상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포옹을 하면 마주 안아주었고 볼에 입술을 맞출 때도 예전처럼 피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부르면 군소리 없이 빨리 왔고, 그의 손길에도 더 이상 과민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도 바보는 아닌지라 유채가 진심으로 그러는 게 아님은 눈치챘다.
처음에는 변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채가 고분고분할수록 루프스는 점점 불안해졌다. 유채는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행동하길 바랐던 것은 자신이기에 이제 와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유채는 손만 대면 바람처럼 흩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불안했다.
유채가 프레드릭의 이야기만 하지 않으면 그는 최대한 그녀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암컷들은 예쁜 장신구를 좋아한다는 바실리사의 수다를 떠올린 루프스는 장인들을 닦달해서 주문한 공예품들을 유채에게 선물했다. 지금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는, 금을 세공해 루비로 장식한 나비 모양의 장식이 그것이었다. 유채와 꽤 잘 어울려 루프스는 장인들에게는 웃돈까지 얹어서 보답하였다.
젤다 사건 이후로는 괜찮지만 혹시나 궁녀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헤나를 통해 경고도 내려놓았고 입는 옷과 먹을 것 모두 유채의 취향에 맞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제 꼴이 마치 암컷에게 구애하는 것만 같았지만, 그는 그냥 넘겼다. 이래야만 그의 마음이 편했다.
“이곳도 살만하지. 레티티아.”
루프스는 유채를 올려다보며 말을 던졌다. 루프스의 은빛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유채의 손끝이 순간 굳었다.
“네가 그곳에서도 잘 자란 건 알겠지만, 여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거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어떤 수인도, 마레 위르도 부럽지 않게 여왕처럼 살 수 있어. 내 비호 아래서.”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매만졌다. 손가락 끝에 감기는 유채의 아기 같은 피부의 촉감이 좋았다.
“그러니까. 돌아가지도 못할 그곳은 잊어. 이곳에 계속 머물러.”
유채는 루프스의 말이 소름끼쳤다. 어떤 게 그의 본모습인지 의심되었다. 술에 취해 동생의 이야기를 꺼냈던 애잔한 그인지, 아니면 제 동생의 죽음에도 무감각한 그인지.
“……알겠어요.”
유채는 루프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루프스는 떨리는 목소리와 지나치게 굳어 있는 몸짓에 그녀가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루프스는 그것이 진심이라고 믿기로 하였다. 제가 얼마나 잔인한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그녀의 눈빛을 외면하기로 했다.
루프스는 일어나 앉아 유채의 턱을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유채의 검은 눈이 그를 약간 비껴서 응시했다.
가족을 잃었던 그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서도 유채를 놓아주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그의 마음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는 이해를 하는데 유채가 돌아가겠다는 말만 하면 눈이 뒤집어졌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를 잠식했다. 루프스는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을 따랐다.
하지만 딱 하나, 알량한 양심은 유채를 보내지 않겠다고 결정한 그를 비난했다. 루프스는 양심의 작은 소리마저 외면했다. 루프스는 이 질척한 감정이 무엇인지 굳이 알려 들지 않았다.
그는 유채의 몸을 끌어안았다. 유채는 헥터의 기억이 떠올라 떨리려는 몸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루프스가 제 얼굴을 유채의 목에 깊숙이 묻었다.
“이렇게만 있어. 그곳이 생각나지도 않게 해줄 테니, 여기에 있어.”
루프스의 낮은 목소리가 유채에게는 뱀이 몸을 휘감는 것처럼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루프스는 입술로 유채의 목의 혈관에서 느껴지는 박동 수를 재었다. 그리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유채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 프레드릭 씨 면회하고 싶어요. 면회하게 해줄 수 없나요?”
“면회?”
루프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프레드릭이었다. 화를 내려한 루프스의 눈에 유채의 비쩍 마른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한 번 쯤은 봐줘도 될 것이다. 루프스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토모스가 말한 거 다 거짓말이에요. 프레드릭 씨는 부인도 있고 곧 태어날 아기도 있어요. 조금만 더 조사해 보면, 프레드릭 씨가 무죄라는 증거가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나 프레드릭 씨 한번만 면회하게 해줘요.”
유채는 루프스의 팔을 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탈출하기 전에 프레드릭의 일은 꼭 해결해야했다. 제가 탈출하면 루프스가 그를 죽일지도 몰랐다. 프레드릭에게 받은 도움이 많기에 유채는 그를 살리고자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간절한 눈을 보았다.
“정말이에요. 토모스는 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걸 알겠어요. 그러니까…….”
“알겠다.”
“예?”
“면회 시켜주겠다고,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유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제 프레드릭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안도감에 유채는 표정을 풀었다. 그 안도감은 기쁨으로 바뀌어서 유채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웃는 얼굴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이 사라졌다.
“한 번 더 그렇게 웃어봐.”
“에?”
“아까처럼 웃어보라고.”
“복사기도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똑같이 웃어요.”
유채는 루프스의 요청에 반쯤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입술이 유채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새의 깃털이 쓸고 지나간 것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루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유채가 일어서는 것을 부축해 주었다. 그는 유채의 왼손에 깍지를 끼고 그녀의 손가락의 둘레를 재었다. 반지를 만들 예정인데, 지금은 마른 상태이니 이보다 크기를 좀 더 키워서 만들면 될 것이다.
“내가 지하 감옥의 간수들에게 말해놓을 테니, 때가 되면 그들을 따라가서 프레드릭을 보고 와라. 삼십분 정도만 주겠다.”
기껏해야 얼굴만 보고 나올 시간을 기대한 유채는 삼십분이라는 예상보다 긴 시간에 유채는 적잖이 당황했다. 루프스가 유채를 끌어안고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밤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줄 게 있으니.”
루프스는 유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유채는 프레드릭을 위해서 그것을 참았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레티티아님.”
유채는 두터운 외투를 입고 늑대 수인의 뒤를 따라갔다. 늑대 수인은 유채를 계속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예쁘다, 예쁘다 소문만 들었지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원래대로라면 간수장이신 리사님께서 안내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지하 감옥 쪽에 수형자들끼리 집단 난투극이 벌어져 리사님께서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급하게 가시는 바람에 그가 단독으로 유채의 안내를 맡게 된 것이다. 지하 감옥에서 일하는 그는 당연히 내궁에서만 생활하는 유채에 대해 무수한 소문만 들었던 터였다. 바깥에서 일하는 아는 병사들과 궁관(宮官 : 남자 궁녀)인 형들이 예쁘다고 난리를 쳐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는 외모였다. 청조한 분위기의 얼굴에 늑대 수인 암컷들 사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낭창한 몸매였다. 확실히 수장이나 되어야 품을 수 있는 암컷 같았다. 간수는 처음으로 루프스를 부러워했다.
“이쪽으로 쭉 가시면…… 흐억!”
검은 물체가 천장에서 뚝 떨어지더니 유채의 앞에 선 간수의 입을 막고 검을 푹 찔렀다. 유채의 얼굴에 뜨거운 피가 튀었다. 간수는 심장을 관통당한 것인지 눈을 감지도 못한 채 바로 즉사했다. 간수의 몸이 뒤로 넘어가고, 유채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꺄……! 읍.”
비명을 지르려던 유채의 입을 굳은살이 가득 박인 손이 틀어막았다. 유채는 뻣뻣한 목을 움직여 얼굴을 들었다. 자수정색의 눈만 내놓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검을 들이댔다. 유채는 죽음에 공포에 제 입을 막은 손을 손톱으로 긁었다. 언니 때문이라도 여기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유채 양.”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복면의 남자는 입술이 있는 부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유채의 목에 겨눈 검을 거두고 복면을 벗었다.
“나예요. 알렉스 하워드. 기억하죠?”
알렉스가 유채의 입에서 손을 떼어내었다. 유채는 여기서 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인물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알렉스 씨. 여, 여기는 어떻게…….”
“형을 구하려고 왔어요.”
알렉스는 죽은 간수의 시체를 뒤져서 열쇠꾸러미를 찾아냈다.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유채를 돌아보았다.
“부탁인데, 조용히만 해줘요. 유채 양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요.”
유채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알렉스는 프레드릭을 구출하러 이곳에 몰래 들어온 것이다. 유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기회였다. 유채는 간수의 시체를 치우려는 알렉스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내가 도울게요.”
“예? 유채 양이 어떻게…….”
“나, 이 궁의 지리를 알아요.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줄게요. 여차하면 나를 인질로 잡아서 써도 돼요.”
유채는 시간이 날 때마다 궁의 지리를 살폈다. 어디서 병사들이 경비를 서는지, 언제 경비를 교대하는지, 어디가 궁녀들이 덜 지나가는지, 어디가 감시가 소홀한지. 덕분에 눈에 띄지 않고 이 궁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낸 지 오래였다. 적당한 기회만 있다면, 당장에 도망칠 수 있도록 준비도 마쳐 놓았다. 그리고 지금이 그 기회였다.
“나도 여기서 데리고 나가줘요.”
지금이 바로 탈출의 기회였다.
“유채 양, 그게 무슨.”
알렉스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간절하고 절박한 눈과 제 팔뚝을 손마디가 불거져 나올 정도로 움켜진 그녀의 손을 보았다. 유채는 다급하게 말했다.
“나, 절대로 민폐 끼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그러니까, 데려가 줘요. 나도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알렉스는 입술을 짓씹었다. 유채를 동정하지만, 애초에 이 작전은 성공하기 힘들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유채를 데리고 나가려다가 오히려 프레드릭과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지금의 상황에서 셋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거기다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자신 혼자였다. 하지만…….
“알겠어요. 따라와요.”
그는 도저히 유채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유채를 볼 때마다 어려운 수인들을 도왔던 아이린이 생각났다. 그래서 유채가 자꾸 눈에 밟혔다. 유채와 알렉스는 프레드릭이 갇힌 감옥으로 갔다. 프레드릭은 알렉스를 보고 경악했다.
“너!”
“입 다물어 형. 나도 죽이고 싶은 거 아니면.”
알렉스는 열쇠꾸러미를 뒤졌다. 같은 종류의 열쇠가 너무 많이 어떤 것이 여기 열쇠인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거예요. 내가 간수가 열쇠를 이걸로 미리 꺼내놓는 걸 봤어요.”
유채가 기억을 되짚어 간수가 쉽게 찾기 위해 미리 표시해 놓은 열쇠를 알렉스에게 가르쳐주었다. 알렉스는 반신반의하면서 그 열쇠를 열쇠구멍에 집어넣고 돌렸다.
알렉스는 감옥 문을 열고 들어가 프레드릭의 몸을 부축했다. 유채의 부탁대로 오르페가 돌봐준 덕택에, 그의 상태는 예상보다 훨씬 나았다. 프레드릭은 알렉스의 부축만으로도 금방 중심을 잡고 걸을 수 있었다. 프레드릭은 뒤늦게 유채를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유채는 손가락을 세워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디로 들어왔어요? 일단 알렉스 씨가 들어왔던 방향으로 모두 나가죠? 저도 삼십 분 정도는 시간이 있어요.”
알렉스는 자신이 들어왔던 방향으로 둘을 안내했다. 프레드릭은 고갯짓으로 오르페를 보낸 유채에게 감사를 표한 뒤, 유채의 뒤에 서서 유채를 보호하면서 알렉스를 따라갔다. 알렉스는 마치 범죄영화에서 하수도를 통해 탈옥하는 것처럼 냉궁의 냉기가 올라오는 통로를 통해서 감옥으로 들어왔다. 그 한기가 너무 강해서 사람이 얼지 않을 수 있을까 의심될 정도였다. 유채가 선뜻 앞으로 나가질 못하자 알렉스가 유채에게 붉은 색의 작은 보석을 건넸다.
“화염 계열의 마법을 담아놓은 마법석이에요. 한기를 막아줄 테니 입에 물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이 통로는 길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요.”
“알겠어요.”
유채는 입에 마법석을 물고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두터운 외투를 벗었다. 알렉스가 길을 안내할 요량인지 먼저 들어갔다. 프레드릭은 유채를 보호할 목적으로 유채를 먼저 들여보내고 뒤따라서 들어왔다. 생각보다 통로가 넓었지만 서서 지나갈 수는 없어 유채는 열심히 이를 악물고 기었다. 마법석이 효과가 있는지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먼저 통로를 나간 알렉스가 밖을 살핀 뒤에 유채와 프레드릭을 끌어올려주었다.
“어디로 나갈 거예요?”
“알렉스, 내가 혹시나 싶어 워프 마커를 새겨놓은 곳이 있어. 그곳으로 이동하자.”
프레드릭은 베노르 콩레수스 때 숲에 마커를 하나 새겨 놓았었다. 만일 유채가 위험한 상황에 있다면 그녀를 구해 탈출하기 위해서 새겨놓은 것이었다.
“그거 다행이네. 나도 그것 때문에 풍(風)계 계열의 마법석을 많이 챙겨왔거든. 풍계 계열 마법석으로 마력을 보충하면 되겠네. 그럼 워프 마커가 있는 근처로 최대한 이동해서 마법진을 그려서 이동하자. 형.”
“어디까지 가야 해요?”
유채가 물었다.
“궁의 동쪽 끝으로 가야 합니다. 베노르 콩레수스가 벌어졌던 숲과 이어지는 메투스(Metus) 산맥 자락이 그 근처에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저도 그쪽이 가장 좋은 탈출 경로라 생각하거든요. 따라와요.”
지금부터는 유채가 길을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겠다고 하자 알렉스가 그것을 만류했다.
“유채 양, 형이 앞장서고 제가 유채 양의 뒤를 따를게요. 이게 가장 안전합니다.”
알렉스가 프레드릭에게 눈짓했다. 가장 앞장서서 가는 사람이 위험한 분명하지만 그래도 프레드릭은 마법사였다. 아무 능력도 없는 유채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유채를 보호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 프레드릭이 얼른 그녀의 앞에 서고 알렉스는 주위를 경계하면서 맨 뒤에 섰다.
유채는 제게 주어진 삼십 분이라는 시간 내에 최대한 멀리 이동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루프스가 선물이랍시고 채워놓은 발찌를 풀어내서 버렸다. 움직일 때마다 짤랑거릴 텐데 귀가 예민한 수인이라면 그 소리를 듣고 저희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여럿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프레드릭을 멈춰 세우고 벽에 몸을 붙였다.
“찾아라. 기껏 해야 삼십 분이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루프스가 유채에게 허락했던 삼십 분이 끝났는데도 유채가 돌아오지 않자. 냉궁 소속의 병사들이 냉궁으로 들어가 유채가 사라진 것과 프레드릭이 탈옥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알렉스는 유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형을 돌아보았다.
“형. 뛸 수 있겠어?”
“다행히도.”
프레드릭은 정말로 오르페에게 감사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붙잡혔을 게 분명했다. 알렉스는 유채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몰래 가는 것은 힘들어요. 그곳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유채 양, 지금부터 나는 유채 양을 인질로 삼고 뛸 거예요.”
알렉스가 낮은 목소리로 작전을 설명했다.
“형의 에어리얼은 하늘이 아니라 직접 공간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어요. 공간을 다루는 것은 신의 섭리를 깨는 것이기 때문에 공간을 다루는 것을 허락받은 소수의 몇 개의 에어리얼을 제외한,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에어리얼 하늘이 아닌 마법사들이 공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법진이 필요해요. 우리는 형이 마법진을 그릴 시간을 벌어야 하고요.”
알렉스는 유채에게 설명을 하면서 프레드릭에게 단도와 마법석을 건넸다. 공간 이동 마법은 마력 소모가 컸다. 그랬기에 마법석의 보조를 받아 마력을 보충 받아야 했다. 마법석의 양이 넉넉하여 그곳까지 가는 데에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알렉스는 유채에게도 단도 하나를 쥐어주었다.
“우리는 형을 먼저 보내고 뒤따라서 달릴 거예요. 당연히 병사들은 우리를 발견할 거고, 나는 유채 양을 인질로 잡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형이 마법진을 그릴 시간을 벌 생각입니다. 그리고 마법진이 완성되면 우리는 그곳으로 달려야 하고요. 지금은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유채는 고개를 끄덕이고 단도를 꽉 움켜쥐었다.
“이건 형의 힘이 담겨 있는 단검이에요. 형은 이중 에어리얼의 소유자로 바다와 불을 가졌어요. 그중 에어리얼 바다의 힘을 담아놓은 것이 이 단검이에요.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 검에 찔린 사람의 몸에 시간핵이라는 것을 심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일단 그걸 숨기고 있다가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써요.”
알렉스는 유채의 손목을 잡아서 어떻게 찌르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유채는 자신이 누군가를 찌른다는 생각에 손이 떨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찔러요. 그럼 잠깐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예요.”
“알겠어요.”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요. 걱정 말아요. 잘될 거예요.”
알렉스는 유채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유채는 단검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망을 보던 프레드릭은 적당한 때를 발견한 것인지 알렉스와 유채에게 손짓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드릭은 시야에 병사가 보이지 않자 앞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인간치고 빠른 속도로 달리는 편인 하워드 형제답게 프레드릭은 몸을 단련하지 않는 학자이면서도 꽤 빠르게 뛰었다. 알렉스도 유채의 손목을 움켜잡고 뛰었다. 유채는 알렉스를 따라가기 벅찼지만, 이를 악물고 뛰었다.
이번에 들키면 두 번째 기회는 얻기 힘들 터였다. 발에 족쇄를 달겠다고 하던 소름끼치는 청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두 번 다시는 바깥구경은 꿈도 꾸지 말라고 속삭이고 방 안에만 가두어놓을 남자였다. 영원히 갇혀 그 남자의 인형으로만 살아야 할 것이다.
유채는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유채는 제 다리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들은 발각되었다.
“저기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병사들이 유채와 알렉스의 뒤로 따라붙었다. 프레드릭이 아직 안 된다고 고개를 젓자 알렉스는 유채를 뒤에서 끌어안고 그녀의 목에 검을 들이대었다. 유채는 알렉스가 준 단검을 등 뒤로 숨겼다.
“멈춰.”
알렉스의 경고에 병사들이 모두 움찔하며 그 자리에 섰다. 유채는 긴장한 척하는 연기를 해야 하나 걱정했지만, 목에 닿은 서슬 퍼런 검의 기세에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절로 긴장이 되었다.
알렉스는 영화 속에 나오는 악당처럼 유채를 거칠게 대하는 척하면서 병사들을 위협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이 여자는 죽는다.”
늑대로 변한 늑대 수인 병사들의 발이 움찔거렸다. 루프스가 아끼는 펠릭스 다우스가 다치면 저희들이 큰일 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 펠릭스 다우스 하나 때문에 젤다는 죽고 토모스까지 화를 입었다는 것은 이미 유명했다.
알렉스는 병사들을 분석했다. 이미 늑대로 변해 있는 놈들은 잔챙이들이고 아직 위르형인 놈들이 실력자들이었다. 알렉스는 좀 더 유채의 목에 검을 들이대었다.
“이 여자의 목이 붙어 있기를 바란다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알렉스는 유채의 팔목을 잡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늑대 수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알렉스가 유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유채 양, 뛰어요.”
알렉스는 검을 거두고 유채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유채는 또 다시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어떻게 합니까?]
늑대 수인 한 명이 상관에게 물었다. 분대장은 이를 갈았다. 저놈이 소문으로 듣던 알렉스란 놈이었다. 렉스를 능가할지도 모르는 실력자였다. 어차피 마레 위르 하나가 다수의 수인을 상대로 오래 버틸 리는 없을 것이나, 문제는 레티티아가 인질로 잡힌 것이었다. 그녀가 잘못되면 바로 자신의 목숨이 간당거릴 것이다. 그는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케릭스님을 불러라.”
이럴 때는 높은 놈에게 결정을 미루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못 찾았다?”
루프스는 앞에 서 있는 간수장 리사를 보면서 이를 갈았다. 유채를 보낸 뒤에 해안 경비를 맡기는 독수리 일족과의 계약을 수정하기 위해 올리에와 이야기 중이었다. 지루한 이야기 중 갑자기 리사가 알현을 청하더니, 놀라운 이야기를 꺼내었다. 면회를 하러 들어간 유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간수는 심장이 찔려 즉사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놀랄 지경인데, 프레드릭 역시 탈옥을 했다는 것이었다. 리사는 간수에게 남아있는 상흔으로 보아 마레 위르의 범행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올리에는 보고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육로(陸路)를 통한 마레 위르에 대한 보고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해로(海路)였다. 해로를 맡는 것은 바로 독수리 수인들이었다. 이건 독수리 일족의 잘못이었다.
“이거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울투르(독수리 수인 일족의 수장) 올리에가 얼굴을 들지 못했다.
“면목이 없다면, 그놈들의 처분권을 내게 넘겨라. 그 쓰레기 같은 놈들을 내가 직접 처리하지.”
“그것은…….”
“그대들의 일족이 지금 나에게 끼친 피해가 얼마나 큰지 내가 지금 친히 말해주어야 하나?”
루프스의 말에 올리에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지금 내가 네 목을 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내가 너를 잘 참아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루프스는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의자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면서 참아내고 있었다. 화를 참지 못 했다가는 올리에를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소 수인들 만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독수리 수인의 문제까지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헤나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헤나는 루프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루프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다. 이 일은 내가 나중에 다시 추궁하지.”
루프스는 경고조로 말하곤 빠르게 방을 빠져났다. 루프스는 헤나가 전한 소식을 곱씹었다. 침입자는 알렉스이며, 유채의 외투가 냉기를 올려 보내는 통로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채는 그들에게 인질로 잡혔다고 했다.
“그래서. 어디라고?”
“지금 궁의 동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메투스 산맥을 탈 생각이군.
루프스는 올리에를 만나기 위해서 입고 있던 예복을 벗어 던졌다.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헤나는 새로운 상황을 보고했다.
“지금 케릭스님이 저격이 전문인 궁병들과 정예병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궁병?”
루프스가 수인 내전을 빠르게 정리하고 포트리스를 몰아붙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수인과 마레 위르의 혼혈 중 동물화를 할 수 없는 이들을 받아들여서 그들을 궁병으로 길렀기 때문이었다. 원래 수인들은 무기를 쓰지 않았고, 검과 활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루프스는 원거리 공격의 이점을 알아보고 그들을 거두어 궁병으로 길렀다. 마레 위르나 수인 양쪽에서 천대받던 그들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로 약속한 루프스에게 충성을 바쳤고 그들은 수인 내전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그럼, 레티티아도 위험하지 않나!”
루프스가 노성을 질렀다. 그는 유채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많이 나았다고는 하지만 유채의 몸은 아직 정상이 아니었다. 루프스는 성마르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알렉스라면 지난번 그 건방진 놈이었다. 레티티아에게 눈독을 들이더니 결국은 제 이익을 위해, 제 편의를 위해 그녀를 이용하려는 놈이었을 뿐이었다.
루프스는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곧 은빛 늑대로 변했다.
[내가 직접 가지.]
그 알렉스란 놈의 얼굴은 제가 찢어주어야 맘이 편할 것 같았다.
* * *
“거기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케릭스를 필두로 한 부대가 궁의 동편에 있는 메투스 산맥 자락의 산비탈에서 알렉스들과 대치했다. 알렉스는 잔뜩 긴장을 하고 유채의 목에 다시 한 번 더 검을 겨누는 척을 했다. 병사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저기 숨어 있는 저격병의 화살은 어찌어찌해서 피한다고 해도, 케릭스란 놈은 골치 아팠다. 그는 늑대 수인 중 서열이 여섯 번째이지만 실제로는 네 번째인 루크레치아와 엇비슷하거나 더 높고, 특정 부분은 아버지인 플로서스를 능가한다고 평가받았다. 이미 루프스와 함께 늑대 수인 일족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유채를 데리고 상대하기는 곤란한 놈이었다. 프레드릭이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시간을 좀 더 끌어야 했다.
“글쎄? 저기 숨어 있는 화살이 내 머리를 먼저 뚫을까, 아님 내가 먼저 이 여자의 목을 벨까? 내기 할래?”
케릭스는 입안으로 욕을 했다. 여기까지 오기 전, 딱 한 번 저 놈을 끝장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저놈이 유채의 몸으로 앞을 막고 있어서 잘못했다가는 그녀가 위험해질 수 있었기에 공격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케릭스는 유채가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를 안전하게 구하기 위해서 저격이 전문인 궁병 셋과 정예병들을 데리고 왔다. 육탄전으로 가면 분명히 알렉스 놈이 유채를 방패막이로 이용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그렇게 되면 유채가 크게 다칠 것이었다. 궁병들이 탐탁치는 않지만, 방법이 없었다. 저격이 전문인 궁병 셋은 근처 지형지물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알렉스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란 놈도 케릭스가 숨어있는 궁병을 이용해서 저를 저격할 것을 눈치챈 것인지 유채를 돌 위에 올려놓아 저와 키를 맞추는 방법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저격병들이 케릭스에게 힘들다고 고개를 저었다. 화살로 알렉스란 몸이나 머리를 노리기에는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다. 유채가 저격수의 시야를 가려 노릴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 케릭스는 이를 갈았다. 알렉스란 놈이 유채를 방패막이로 사용할 가능성이 너무 컸다. 상황이 정말 거지같이 돌아갔다.
“지금 당장 뒤로 물러나.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의 목숨은 없어.”
알렉스가 경고조로 유채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당겼다. 서슬 퍼런 검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듯싶으냐?”
“그럼 이 여자에게 문제가 생기고 나면 네놈들의 목숨도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알렉스의 검이 유채의 목에 붉은 실금을 그었다. 쓰라린 통증에 유채는 눈을 찌푸렸다. 그가 진심으로 이러는 게 아님을 아는데도 무서워졌다.
케릭스는 유채의 목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어금니를 물고 명령을 내렸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케릭스는 정예병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그 역시도 한 걸음 물러났다. 알렉스는 유채를 끌고 뒷걸음질을 치면서 케릭스에게 외쳤다.
“더 뒤로 물러가 그렇지 않으면…….”
[더 뒤로 물러나면 네놈들의 목을 따주지.]
커다란 은빛의 늑대가 유채와 알렉스 앞으로 뛰어들었다. 유채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알렉스 역시 긴장하여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루프스가 왔다.
그는 은빛의 늑대에서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루프스는 오른쪽 어깨를 풀며 느긋한 태도로 알렉스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알렉스가 유채의 목에 검을 단단히 겨누었다. 탈출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채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루프스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다가오면…….”
“레티티아의 목을 따겠다? 아주 뻔한 레퍼토리군? 삼류 악당이 되고 싶다면 좀 더 그럴싸한 대사를 골라오지 그랬나?”
알렉스는 다급하게 유채의 몸을 끌고 뒤로 물러섰다.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질 뻔한 유채가 휘청거리자 알렉스는 얼른 검을 거두고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감고 있는 알렉스의 손을 노려봤다. 저 손을 잘라내 뼈 채로 씹어 먹어버리고 싶었다. 그는 이를 갈면서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인질을 소중하게 대하는 삼류 악당은 처음 보는군.”
루프스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유채는 몸을 떨었다. 알렉스가 유채를 붙잡고 다시 두 걸음을 물러났다.
“정말 치졸한 놈이군. 암컷 뒤에 숨질 않나, 남의 것을 뺏으려 하질 않나.”
“내가 치졸한 것은 둘째 치고 네놈은 왜 그리 너그러워졌지? 인질의 목숨도 신경 써주고 말이야? 언제부터 제 물건을 그리 아끼는 놈이었나?”
“……네놈만큼은 찢어서 죽여주지.”
루프스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유채가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왔다.
“악!”
유채는 비명을 질렀다. 알렉스의 검에 팔을 베인 것이다. 루프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옷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알렉스는 유채의 귓가에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루프스를 멈추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유채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움켜쥐었다. 알렉스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유채의 하얀 목에 검이 닿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협박이 되었다.
루프스는 그 자리에서 멈추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뒤로 물러났다.
“네가 레티티아를 그 썩은 눈깔에 담은 줄 알았는데?”
루프스가 당당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알렉스가 유채를 마음에 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알렉스를 싫어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알렉스는 비소를 흘렸다.
“여자와 내 목숨을 저울에 올려놓으면 내 목숨을 선택하는 실용적인 인간이라. 너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유채는 뒤로 젖혀진 목의 통증에 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루프스는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유채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그녀의 눈이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흑.”
유채의 입에서 작은 울음소리마저 새어나왔다. 탈출하지 못할까 봐 너무 불안했다.
유채의 울음소리에 루프스는 이를 악물고 더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붉은 피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유채에게 상처를 입힌 저놈은 반드시 찢어 죽여 버리겠다. 그러나 지금은 유채가 우선이었다. 그는 두 손바닥을 펴서 들어올렸다. 뒤에 있던 케릭스와 정예병들이 놀라서 헉하는 소리를 내었다.
“보내주겠다. 너희 형제를.”
루프스는 제 자존심을 죽였다. 그깟 자존심보다 유채가 더 중요했다. 그의 눈에는 유채가 알렉스에게 붙잡혀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항복의 뜻으로 손을 들어 올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니, 레티티아를 넘겨라.”
“내가 이 여자를 넘기면, 너는 우릴 공격할 것 아닌가?”
알렉스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알렉스는 대치하는 척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유채에게 속삭였다.
“내가 루프스만 따로 저 병사들 무리에서 떨어뜨릴게요.”
유채는 되도록 루프스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표정 관리에 모든 힘을 썼다.
“아까 준 검으로 루프스를 찔러요. 시간핵이 몸에 심어지면, 루프스는 당분간 움직이지 못하게 될 거예요.”
시간핵의 효과는 좀 더 다양했지만 지금 그걸 다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알렉스는 시간핵이 처음 심어지면 신체의 움직임이 정지한다는 것만 믿고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루프스에게 잡히면, 곧장 루프스를 찔러요.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그리고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바로 달려와요.”
알렉스는 루프스의 기세를 살폈다.
“그럼, 늑대왕. 당신만 나를 따라와. 당신 부하들과 거리가 멀어지면, 그때 이 여자를 넘기지.”
알렉스는 유채의 끌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루프스님!”
케릭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여기서 기다려라. 한 놈이라도 움직이면 찢어 죽여주지.”
루프스는 케릭스에게 명을 내리고 혼자서 알렉스를 쫓아갔다.
알렉스는 뒤를 살폈다. 아까 유채의 달리기 속도와 마법 저항력이 높기로 유명한 루프스에게 프레드릭의 마법이 어느 정도까지 통할지 고려해 보았을 때 가장 최적의 자리를 골라서 멈췄다.
유채는 등 뒤에 감춘 단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과연 제가 그를 찌를 수 있을까. 유채는 떨리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유하를 지키기 위해다. 유채는 자신의 행동을 애써 합리화시켰다.
알렉스는 제 안전이 먼저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다리를 최대한 뒤로 빼고 유채에게 겨누고 있던 검을 되도록 늦게 떼어내었다. 알렉스는 곧바로 프레드릭에게 달려갔다. 혹여 저격수가 형을 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알렉스가 떨어지자 루프스가 서둘러 달려와 유채를 꽉 끌어안았다. 유채는 단검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있었다.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그는 유채의 얼굴 곳곳에 키스의 비를 뿌렸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유채의 입술에 닿았다. 유채는 단검을 쓸 기회를 노려야 했기에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입맞춤을 가만히 받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제 곁에 있다는 것을 그렇게 확인했다.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입술에 오래 머무르다가 떨어졌다. 그는 유채를 다시 한 번 더 꼭 끌어안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나? 팔과 목 말고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루프스의 성마른 손길이 유채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는 다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팔을 단단하게 움켜잡았다.
“가자. 오르페에게 그 상처를 보여야겠다.”
“안 가요.”
유채는 루프스의 앞에서 완강히 버텼다. 그가 당황하여 그녀를 돌아보는 사이, 유채는 몸을 뒤로 뺐다.
“난 당신하고 안 가요.”
“그게 무슨…… 윽!”
유채는 숨기고 있던 단검을 꺼내 루프스의 왼쪽 어깨에 찔러 넣었다. 혹시나 싶어 온 힘을 단단히 팔에 실었던 터라, 그리고 루프스가 유채는 경계하지 않았던 덕에 단검은 그대로 꽂혀 들어갔다. 루프스가 신음을 삼키면서 다른 팔로 그녀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검에 걸린 마법이 작용한 것인지 루프스의 움직임은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난 레티티아가 아니라 한유채야! 당신 애완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유채는 다시 온 힘을 다해서 검을 빼냈다. 상처에서 터진 피가 유채의 얼굴과 옷에 튀었다.
“당신의 애완동물 노릇. 두 번 다시는 안 해!”
유채는 루프스가 다시 움직이기 전에 정신없이 뛰었다. 의도하고 누군가를 찔렀다는 것에 손이 벌벌 떨렸다. 유채는 어쩔 수 없었다고 속으로 속삭였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 끔찍한 곳을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루프스님!”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불호령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쫓아온 케릭스는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굳어 있는 루프스와 피 묻은 검을 들고 뛰는 유채를 보았다. 그는 이를 갈았다. 유채가 하워드 형제와 한패였던 것이다. 루프스를 배신한 것이다. 그는 유채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벌을 받아야 했다. 감히 루프스를 시해하려 한 범죄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채는 루프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였다. 늑대 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루프스가 그녀에게 비정상적으로 애정을 쏟아 붓고 집착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죽이고 싶었으나, 그래도 블루벨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 점만큼은 높게 사서 죽음만은 면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당장 쫓아가서 잡아!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다쳐도 상관없다. 숨만 붙어 있게 잡아!”
케릭스의 말과 함께, 케릭스를 따라온 병사들이 늑대로 변했다. 케릭스 역시 거대한 회색 늑대로 변했다. 케릭스의 이빨이 무시무시했다.
하워드 형제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다. 분명히 유채는 저 혼자서 탈출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분명히 언젠가 하워드 형제와 합류할 것이다. 유채가 가는 길에 하워드 형제가 있다. 유채를 잡으면 하워드 형제를 잡을 수 있었다. 유채를 쫓는 것이 우선이었다. 케릭스와 병사들은 늑대로 변해 유채를 쫓기 시작했다.
루프스는 케릭스를 막기 위해 소리를 치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고 목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하워드 형제뿐만 아니라 유채까지 노리려 하는 케릭스에게 분노했다. 그녀는 스스로 탈출할 수 없어 하워드 형제와 동행하기를 택한 것이었다. 하워드 형제만 없으면 유채는 달아날 수 없다. 약하디약한 유채는 작은 상처에도 죽을 수도 있었다!
루프스는 빌어먹을 마법에서 풀려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최소한 혀라도 움직이려고 했지만 돌처럼 굳은 몸은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루프스는 모든 신경을 손가락에 집중했다. 얼음 속에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프스는 눈을 굴렸다. 케릭스와 그 휘하의 병사들이 무서운 기세로 유채를 쫓았다. 케릭스의 기세가 무서웠다. 케릭스가 입을 벌렸다. 케릭스의 거대한 이빨이 유채의 다리뼈를 부러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루프스는 마음이 급해졌다.
“멈춰라!”
루프스의 말소리가 케릭스의 귀에 들렸다. 루프스가 늑대의 모습으로 케릭스의 뒤를 쫓았다. 루프스가 케릭스의 몸을 덮쳤다. 갑작스런 습격에 중심을 잃은 케릭스의 몸과 루프스의 몸이 같이 굴렀다. 뒤에서 케릭스를 쫓아오던 병사들마저 그에 휘말려 같이 휩쓸려 산비탈을 굴렀다. 병사들이 뒤엉켜 크게 다쳤다. 루프스는 케릭스를 제압한 뒤에 몸을 일으켰다. 마법의 영향인지 몸이 동물형에서 위르형으로 저절로 돌아왔다. 케릭스는 해명을 위해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마법을 억지로 풀은 탓인지 통증이 밀려왔다. 루프스가 몸을 움츠리고 신음을 흘렸다.
“큭!”
“루프스님!”
케릭스가 놀라 소리쳤다. 루프스는 번뜩이는 눈으로 감히 유채를 해하려 한 케릭스의 턱을 한 대 쳤다. 루프스는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유채를 잡기 위해서 달렸다.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다. 마법의 영향인지 달리는 속도가 평소보다 현저하게 느렸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근육이 터질 것 같이 아파왔다. 그는 유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반드시 잡아야 했다.
“레티티아!”
지금 여기서 놓치면 유채를 영영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채는 벌써 루프스가 쫓아온다는 데에 겁을 먹고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법 때문에 그가 달려오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었다.
알렉스가 유채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외쳤다.
“형, 얼른 스펠을 외워!”
바로 그때 달리던 유채가 돌부리에 걸려서 앞으로 넘어졌다. 유채는 네 발로 기면서까지 루프스와 멀어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알렉스는 제 예상보다 빨리 쫓아온 루프스에 화들짝 놀라서 유채를 데려오기 위해서 산비탈을 미끄러지듯이 타고 내려갔다.
유채를 쫓던 루프스가 그녀가 넘어진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면서 경고했다.
“지금이라도 내게 돌아오면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해주마.”
루프스는 유채가 본인의 의지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랐다. 억지로 붙잡기보다는 그녀 스스로 제 품에 안기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블루벨이든 너를 꼬여낸 저 두 놈이든 네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지.”
그새 알렉스가 무릎이 깨져서 피를 흘리는 유채에게 달려와서 그녀의 팔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유채가 알렉스의 품에 반항 없이 안기는 것을 본 루프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프레드릭의 마법진이 발동을 시작한 것인지 빛을 내었다. 알렉스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알렉스가 유채를 한 팔로 안고 프레드릭을 향해 달려갔다. 루프스도 다시 유채를 붙잡기 위해서 달렸다.
“가지 마!”
루프스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그는 마법의 영향을 받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느라 근육이 파열되는 것 같은 고통을 억누르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절박한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알렉스가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고 마법진으로 들어왔다. 유채는 제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는 루프스를 보았다.
“돌아와!”
루프스는 자존심을 집어던졌다. 유채를 잡기 위해는 그딴 것 버려도 그만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렸다. 전쟁터에서 대군을 맞닥뜨렸을 때도,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때도 무서워한 적이 없는 그는 작고 여린, 손에 힘만 주면 부러질 것 같은 암컷이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생전 처음 경험하는 공포가 되었다. 지금 유채를 놓치면 그녀는 그가 잡을 수 없는 세상으로 사라져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었다. 유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그가 선물한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이 닿았다.
툭.
머리 장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채의 몸은 빛에 감싸여서 알렉스, 프레드릭과 함께 사라졌다. 루프스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손을 움켜쥐었다.
“크아아아악!”
그는 분노에 차 고함을 질렀다.
* * *
“크헉! 헉!”
프레드릭은 피를 토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마력 리바운드(무리한 마법의 사용 부작용으로 마력이 시전자를 공격하는 것)가 찾아온 것이다. 역시 거리가 지나칠 정도로 멀었고, 에어리얼 하늘의 소유자가 아닌데 공간 마법을 사용하느라 몸에 무리가 된 것이다. 알렉스도 공간 이동의 여파로 울렁이는 속을 억누르면서 프레드릭을 살폈다. 유채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유채 양은?”
“기절한 상태야.”
프레드릭이 그녀의 목에 걸린 파렌티아를 보았다.
“파렌티아 때문이야. 파렌티아에 마법이 닿으면 전기충격을 주어서 차고 있는 사람을 기절시키도록 만들어 놓았어.”
공간 이동 마법이 유채의 몸을 이동시키며 동시에 파렌티아도 이동시켰기 때문에 유채의 파렌티아에서 전기 충격이 유채를 기절시킨 것이었다. 알렉스는 유채를 똑바로 눕히고 자신의 셔츠를 찢어 팔의 상처를 감쌌다. 알렉스는 프레드릭을 돌아보며 물었다.
“마력 리바운드 왔어?”
“어. 그런 것 같아.”
프레드릭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마력 리바운드로 온몸이 쑤셨다. 그는 숨을 고르면서 제 몸을 열심히 공격하고 있는 마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마법진과 워프 마커가 프레드릭의 부담을 나눠가졌기 때문에 다행히 피해가 적었다.
“형. 유채 양은 왜 이렇게 마른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알렉스는 뒤늦게 프레드릭에게 물었다. 살집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처음 보았을 때도 마른 편이었지만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더 마른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세한 건 설명하기 힘들어. 그리고 유채 양도 말하기 싫어할 텐데 내가 굳이 너한테 말해줄 필요를 못 느끼겠다, 알렉스.”
헥터의 일을 프레드릭이 대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으로 유채가 얼마나 괴로워했고, 그 기억을 잊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는 프레드릭은 제삼자에게 알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보았다. 프레드릭은 가물가물한 정신을 애써 추슬렀다. 알렉스가 주머니를 뒤져서 마법석을 꺼내었다.
“치유 마법이야. 담아 왔어.”
“오랜만에 준비성 한번 철저하네. 나 말고 유채 양 먼저 쓰게 해.”
“이미 했어. 형 차례야.”
프레드릭은 마법석에 담긴 치유 마법을 운용해서 최대한 몸을 회복하고 마력 리바운드를 치료하는 데 사용하였다. 마력 리바운드의 최고의 해결책은 스스로의 마력이 진정될 때까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프레드릭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고.”
“미안하면 살아서 레이라한테 돌아가. 레이라가 형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아이 낳을 때는 옆에서 지켜줘야지.”
프레드릭은 목에 건 로켓을 움켜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으윽.”
기절해 있던 유채가 정신이 드는 듯 신음을 흘렸다.
“일어났어요, 유채 양?”
알렉스가 유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유채는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는 지끈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바로 앞에 알렉스가 있는 걸 보니 루프스에게 도망치긴 한 모양이었다.
“여긴 어디예요?”
“베노르 콩레수스가 열렸던 숲입니다.”
“……그, 숲이요?”
유채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라 유채는 저릿한 손으로 치마를 꽉 움켜쥐었다.
알렉스는 지나치게 불안해하는 유채를 걱정하면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놔, 놔주세요…….”
유채는 손을 들어서 알렉스를 밀어냈다. 이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숲에 다시 들어오니 그날의 기억이 다시 생생히 떠올랐다. 유채는 심호흡을 하면서 불안감을 억눌렀다.
“고마워요. 어려운 부탁 들어주셔서.”
“아닙니다, 유채 양. 유채 양 덕분에 오히려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알렉스가 손사래를 쳤다. 알렉스는 가져온 짐에서 로브를 꺼냈다. 아까부터 마법석도 그렇고, 유채는 알렉스가 허리춤에 맨 작은 가방에서 저렇게 많은 물건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압축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럽니다. 수인들과 달리 우리 인간들 사이에는 생활 마법이 발달되어 있어서 저런 종류의 물건이 많습니다.”
프레드릭이 신기해하는 유채에게 설명해 주었다. 유채는 알렉스가 건네준 두꺼운 로브를 걸쳐 입었다. 로브의 모자 부분에는 마치 동물의 귀 모양처럼 솜을 채워놓은 것이었다. 남성용이라 좀 컸지만 유채는 얼굴을 가리기에는 이 편이 낫다고 생각하며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썼다.
“혹시 몰라서 여분으로 하나 더 가져왔는데, 그게 선견지명이었네.”
“정말 너 간만에 준비성 철저하다, 알렉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나도 할 수 있는 한 다 챙긴 거지. 너무 대견해하지 마, 형.”
알렉스가 투덜거리면서 로브를 입었다.
“유채 양은 우리랑 같이 포트리스로 가는 건가요?”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여기까지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전 고양이 수인 일족의 땅으로 가보려고 해요.”
“그럼 같이 가죠.”
프레드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안했다.
“포트리스로 가려면 양과 염소 수인 일족의 땅을 지나는 것이 더 빠르지만 거기는 경계가 너무 삼엄합니다. 고양이 수인 일족의 땅으로 돌아서 가는 것이 더 안전해서 저희도 그쪽으로 갈 생각입니다.”
“하지만…….”
알렉스가 부연설명을 하였다.
“이 산맥은 마물들이 들끓어요. 유채 양 혼자서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저희랑 같이 가는 것이 유채 양의 안전에도 좋습니다.”
“그럼 제가 너무 많이 폐를 끼치는 것인데…….”
“아닙니다. 유채 양은 이미 저희가 탈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어요. 유채 양이 아니었으면 루프스를 막을 수 없었을 거고, 형이 마법진을 그릴 시간도 벌 수 없었을 거예요. 모두 유채 양 덕분입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은혜를 갚아야지요. 그리고 유채 양이 제게 오르페 씨를 보내주지 않았습니까?”
프레드릭이 알렉스의 말에 동조했다.
“유채 양이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러니 우리랑 같이 가요.”
알렉스가 유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유채는 정말 기뻤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이 터졌다. 유채는 울면서 웃었다.
“왜 울어요? 유채 양?”
유채는 훌쩍이면서 눈물을 닦았다. 그동안의 고생과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그 남자에게서 벗어났다는 기쁨이 한데 섞인 눈물이었다.
“기뻐서…… 정말…… 기뻐서…….”
가슴을 막고 있던 돌덩어리가 이제야 없어진 것 같았다. 유채는 굳이 눈물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유채는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울면서 그동안의 일을 털어냈다.
알렉스는 유채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뼈가 만져질 정도로 마른 등이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프레드릭 역시 유채를 가엽게 바라보았다. 그는 그동안 유채가 겪은 일을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다. 루프스는 그녀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으나 정신적으로는 학대했다. 사지 멀쩡한 여인을 아무 이유도 없이 방에 가둬 두고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막았다. 일정 시간 외에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고 제 취향대로 행동하기를 강요했다.
루프스가 오라고 하면 유채는 가야 했고, 무슨 행사가 있으면 루프스의 전리품인 양 끌려 나가서 꽃 취급을 받았다. 드디어 그에게서 벗어난 지금 그녀의 눈물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유채는 한참이나 눈물을 흘린 뒤에야 진정했다.
알렉스는 지도를 꺼내 지금 자신들의 위치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스트폴로르를 크게 가로지르는 산맥을 쭈욱 따라갔다.
“우리는 여기로 이동할 생각이에요. 마물의 서식지라 위험하지만, 그만큼 수인들의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에요.”
“루프스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곳인가요?”
유채가 확인 차 물었다. 유채도 탈출 계획을 세울 때 이 산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마물과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상대할 자신은 없으니 가능하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비교적 인가와 가까운 산길을 쓸 생각이었다. 마법도 그것 때문에 배우려 했었다.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지만.
“메투스 산맥을 타고 가다 보면 분기점이 하나 나오는데, 우리는 고양이 일족의 땅인 펠레스 호무스로 이동할 겁니다. 거기에 유채 양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줄 인물이 있지요.”
“설마 형…… 사라 할머니가 얘기한 그 무녀를 말하는 거야?”
알렉스가 조금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하워드 형제를 보살펴 준 고양이 수인인 사라는 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었다. 그중에는 이니투스와 절친이자 앙숙이었다는 고양이 수인 수장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녀는 고양이 수인 일족의 수장이자, 동시에 셀레네님의 선택을 받은 신녀였다. 그녀, 렌은 이니투스가 은가연을 따라갈 수 있도록 신의 신탁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렌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리네아란 이름의 그녀는 신녀로서의 직책인 오라클라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어딘가에 은둔하면서 살아 있다는 이야기였다.
“오라클라 리네아. 그녀가 여기 펠레스 호무스에 생존해 있다고 전해집니다.”
“형. 오라클라 리네아가 지금까지 살아 있으면, 이 여자는 거의 천년을 넘게 생존해 있다는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갑자기 오라클라 리네아를 왜 찾아?”
“오라클라 리네아를 만나면, 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 이 스티폴로르에서 셀레네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신녀는 그녀가 유일할 겁니다. 그녀 이후로 그 누구도 신녀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니까요.”
유채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프레드릭의 말대로 펠레스 호무스로 가서 오라클라 리네아를 찾아야겠다. 정말로 그녀가 전설처럼 살아 있다면, 그녀를 만나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채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형. 둘만 아는 얘기는 그만하고 나한테도 좀 설명해주지? 오라클라 리네아 얘기는 또 뭐야? 전설 속의 여자는 왜 찾는 거야?”
“제가 집으로 돌아가려고요.”
유채가 알렉스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언니가 많이 아파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어요.”
“…….”
“그러니까 지금 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설이라도 믿어보는 거예요. 오라클라 리네아라면 제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유채는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유채 양. 열아홉이라고 했지요? 이제 스물인가?”
“그런데요?”
알렉스는 유채의 볼을 잡아 쭈욱 늘였다. 유채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는 싱긋 웃으며 볼을 놔주었다.
“유채 양이 먼저 무슨 일인지 말하기 전에는 더 묻지 않을게요.”
알렉스는 유채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그리고 뒷머리를 잡아 품에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요. 유채 양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나도 도울게요.”
알렉스는 처음 유채를 본 후로 한 번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제가 지키지 못한 아이린을 떠올리게 해서인지, 아니면 우는 모습이 눈에 밟혀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따금 별이 많이 뜬 밤, 포트리스의 언덕에 올라가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유채가 생각이 났다. 잘 지내고 있는지, 울진 않는지, 자신이 준 손수건은 한 번이라도 사용했는지. 알렉스는 유채의 큰 검은 눈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러니, 그만 울어요.”
그는 유채가 울지 않기를 원했다.
“내가 도와줄게요.”
유채는 알렉스에 따뜻한 말에 다시 눈물을 쏟았다.
* * *
“루프스님.”
케릭스는 사나운 기세로 유채의 머리 장식을 한 손에 움켜쥐고 걸어오는 루프스에게 다가갔다. 루프스의 주먹이 케릭스의 턱을 강타했다. 케릭스는 그대로 맞고 나가 떨어져 한참을 굴렀다.
“윽!”
케릭스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루프스가 그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공중에 매달린 케릭스는 숨이 막혀서 얼굴이 붉게 변해갔다.
“내가 언제부터 네게 군사 명령권을 쥐어줬지?”
“루프스…… 님의 몸, 을 해하려고…… 한…….”
“너는 내가 정사 중에 등을 긁혀도 그 암컷을 죽이겠군? 안 그런가?”
“저는……. 그게…… 허억…….”
한계에 달한 케릭스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졌다. 루프스는 케릭스를 내던졌다. 나무에 부딪친 케릭스가 헉, 숨을 몰아쉬었다. 케릭스가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본 병사들 모두 긴장하여 납작 엎드렸다.
“고민 중이야. 너를 친구의 정을 보아 그냥 둘지,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그 혀를 잘라 버릴 것인지.”
루프스가 턱을 쓸었다. 케릭스는 욱신거리는 몸으로 연신 쿨럭거리면서도 그의 앞에 몸을 숙였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잡아와.”
루프스가 잇새로 말을 뱉었다. 그는 유채에게 선물로 주었던 머리 장식을 부서질 듯이 움켜쥐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서 날뛸 것 같았다.
“레티티아를 사지 멀쩡한 온전한 모습으로 내 앞에 데려와!”
분명 말했었다. 제게 돌아온다면, 순순히 돌아오면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고. 감히 제 어깨를 찌르고 저를 배신하고 도망간 암컷에게 그렇게 후한 조건을 제시했다. 모든 일을 잊어주겠다고까지 했는데 남은 것은 볼썽사나운 저 하나였다.
루프스는 케릭스를 내려다보면서 다시 말했다.
“레티티아를 데려온다면, 네놈이 그렇게 끼고 사는 블루벨이란 토끼 암컷을 네 눈앞에서 찢어 죽이지는 않아주마!”
“루프스님!”
케릭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왜? 내가 너와 그 토끼 꼬마의 관계를 모를 것 같았나?”
루프스는 케릭스를 뒤로했다. 병사들은 루프스가 자신들의 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곤 한마음으로 외쳤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상관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네놈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지.”
루프스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병사들은 루프스의 하얀 예복이 피에 젖어서 붉게 변한 것을 공포스럽게 바라보았다. 루프스의 살기가 그들의 목줄을 옥죄었다. 병사들은 몸을 벌벌 떨었다.
“한 달간 감봉이다. 너희는 레티티아를 놓친 죄로 케릭스와 함께 레티티아를 찾아라.”
루프스는 명령을 내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으로 걸어갔다.
【‘가지 마!’】
뭐가 그렇게 절박했을까? 저를 찌르고 도망가는 암컷이 뭐라고. 도대체 왜? 자존심마저 다 던지고 왜 그렇게 외쳤을까?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유채의 얼굴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마레 위르 수컷의 품에 안겨서 공포와 두려움이 점철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본 순간, 그는 아주 잠깐 멈칫거렸다. 잡을 수 있었다. 유채를 그 빌어먹을 마법진에서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 그 눈빛을 본 그 순간 그는 멈칫했다.
심장 한가운데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유채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왔다. 그녀가 향이 강한 음식을 꺼린다는 것을 알고, 마레 위르의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요리사를 찾다가 가장 싫어하는 여우 수인 요리사까지 고용했다. 그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마레 위르들이 먹는 식재료를 구해오게 시켰다. 그래도 계속 마르기만 하는 몸이 걱정이 되어서 오르페에게 원기를 회복시키는 약을 지으라고 명까지 내렸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바실리사처럼 그녀도 좋아할까 싶어 옷과 장신구를 구했다. 물론 거기에 제 취향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최대한 그녀를 배려했다. 외로워하는 것을 보기 싫어 건방진 토끼 꼬마와 귀찮은 바실리사가 얼쩡거리는 것도 허용해 주었다. 그는 그렇게 유채를 품에 넣고 싸고돌았다.
모두 펠릭스 다우스를 위해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귀여운 애교도 떨지 않고 제 앞에서 예쁜 표정 한번 짓지 않는 유채를 위해서 그는 열과 성을 다하였다. 단언컨대, 유채는 궁에서 그 어떤 수인들도 경험할 수 없는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유채 때문에 헥터와 싸웠고 그냥 벌을 주고 넘어가도 되었을 젤다를 죽였으며 토모스까지도 건드렸다. 그 덕택에 그는 몇 배로 바빠졌다. 마레 위르를 감쌌기 때문에 그를 적대하는 세력까지 늘어났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유채를 위해서 한 일의 결과였다.
“크악!”
그가 노성을 질렀다. 가장 한심하고 비참한 것은 그렇게 처절하게 배신당해 놓고도 지금 유채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입맞춤을 떠올린다는 사실이었다. 살기를 폴폴 풍기는 그에게 헤나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루크레치아님이 알현을 청합니다.”
“루크레치아가?”
벨라토르를 담당하는 루크레치아가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중요한 사안일 게 분명한지라 루프스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루프스는 애써 화를 억누르며 루크레치아가 기다리고 있는 알현실로 들어갔다. 짙은 초콜릿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한쪽 팔이 없는 중년의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루프스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손잡이를 꽉 움켜잡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타우루스 헥터가 미노르 호무스의 벨라토르를 모두 죽였습니다.”
“뭐?”
루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우리 늑대 일족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루프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에 놓여 있던 유리잔을 집어 던졌다. 루크레치아가 움찔거리면서도 날아오는 유리잔을 피하지 않았다. 루프스는 미친 수인처럼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탁자까지 바닥으로 던져서 부숴버렸다. 그 바람에 칼에 찔렸던 그의 어깨에서 다시 피가 흘러내렸다.
“루프스님. 피가…….”
“닥쳐, 루크레치아. 네년의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볼썽사나운 모습을 다 보이고도 유채를 놓쳤고, 헥터 놈은 제게 반기를 들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지난번 사건 때문에 앙심을 품은 것이다.
“당장 군사를 모아서 두 개로 조직해.”
“예? 어째서 두 개입니까?”
“너는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가?”
루프스가 빈정거렸다.
“하나는 미노르 호무스로 보내고 하나는 부대는 라나투스 호무스(Lanatus Humus: 양 수인 일족의 땅)로 보내라. 그리고 되도록 빨리 라나투스 호무스의 벨라토르를 철수시켜.”
“발란테스 카르멘이 헥터와 동맹을 맺을까요?”
“그 암컷은 멍청하고 성질이 급하거든 헥터가 내 감시를 피하는 것을 성공했으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할 암컷이야. 장담하는데, 내일이면 그 암컷도 내게 발톱을 내밀 거야.”
“그럼, 각 부대의 지휘관은?”
“미노르 호무스로 갈 부대는 너와 토모스가 맡아라.”
“토모스……. 말이십니까?”
“제 딸의 일로 헥터에게 열 받아 있을 놈이니 이럴 때 이용해야지. 그리고 그 다친 몸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서 헥터의 손에 죽어야 지금 내게 적대적인 수인들의 불만이 헥터 놈에게 향할 거다. 또한 전쟁은 빨리 끝낼수록 좋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토모스라는 전력이 필요하지. 대신 그놈 가족들의 신병을 확보해 둬. 여차하면 인질로 삼겠다.”
“그렇다면, 라나투스 호무스로는…….”
“나와 아리아가 맡는다. 그쪽으로는 최소한의 정예병만을 끌고 가 발란테스 카르멘과 결판을 짓겠다.”
“예? 그게 무슨!”
유채는 분명히 펠레스 호무스로 향할 것이다. 전에 분명히 고양이 수인 일족의 땅에 가면 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낼지도 모른다고 하였었다. 그리고 그곳은 유채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에클레시아와 가장 가까운 땅이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지나야 하는 땅이고, 또한 메투스 산맥을 경계로 라나투스 호무스와 가장 가까운 땅이었다.
루프스는 루크레치아의 말을 무시하고 명을 내렸다.
“당분간 토스 호무스의 일은 케릭스에게 맡긴다. 이번 전쟁은 내가 직접 출정한다.”
그래, 어디 한번 도망가 봐라. 그래봤자 다시 내 손에 넣을 테다. 그 다음의 너의 처우는 나도 장담할 수 없으니.
루프스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어디, 도망갈 거면 최선을 다해 도망가 봐. 레티티아.”
* * *
“블루벨!”
케릭스는 루프스의 협박에 놀라서 정신없이 블루벨을 찾았다. 블루벨을 숨겨야 했다. 그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찾는 블루벨은 카니스 바실리사와 같이 있었다. 케릭스는 바실리사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블루벨을 와락 껴안았다.
“블루벨. 무사하구나…….”
“……놔주세요, 케릭스님.”
블루벨이 전에 없이 낯선 목소리로 케릭스를 거부했다. 바실리사가 둘 사이를 막아섰다.
“이 아이는 나와 같이 내 일족의 땅으로 가기로 했네. 그러니 내 아랫사람에게…….”
“바실리사님, 저 케릭스님이랑 잠깐만 이야기하고 올게요.”
블루벨은 결연한 눈으로 바실리사를 보았다. 축 처진 귀가 블루벨의 심정을 보여주었다. 바실리사는 한숨을 쉬면서 허락했다. 블루벨은 케릭스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갔다. 케릭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갑자기 네가 왜, 바실리사님과…….”
블루벨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케릭스를 보았다.
“루프스님이 유채님을 괴롭힐 때, 그 누구도 루프스님을 막지 않았어요. 그래서 유채님은 정말 많이 다쳤고 힘들어 했어요.”
블루벨은 바실리사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유채가 루프스의 어깨를 찌르고 탈출했으며, 케릭스가 늑대로 변한 것도 모자라서 정예병을 투입하여 유채를 제압하려 했다고. 케릭스는 수인이라 제 힘을 잘 실감하지 못했지만 루프스가 막지 않았다면, 유채는 케릭스의 발톱에 찢겨서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산비탈에 머리가 깨져서 죽었을 것이다. 거기가 유채가 다치는 것은 상관없다고까지 말을 했다.
“유채님은 살기 위해서, 언니 분을 살리기 위해서 발버둥치셨어요.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서 힘들어 하던 분께, 그렇게 했어야만 하셨어요? 유채님은 마음도 여리시고 눈물도 많아요. 그분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선택을 하셨을지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보셨어요?”
“그건. 블루벨…….”
“듣기 싫어요. 케릭스님.”
블루벨이 케릭스의 손을 쳐 냈다. 블루벨은 눈물을 닦고 코를 훌쩍이면서도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저. 케릭스님 정말 많이 좋아했어요.”
열여섯 소녀의 마음에 불어온 첫 봄바람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블루벨은 고개를 숙였다. 케릭스의 눈에 이 모든 광경이 마치 소설 속 그림처럼 보였다.
“안녕히 계세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블루벨은 그대로 돌아섰다. 케릭스는 블루벨을 잡지 못해서 손만 꽉 움켜쥐었다.
* * *
오르페는 루프스의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감았다. 회복력이 좋기로 유명한 루프스인데도 어째서인지 회복 속도가 너무나 느렸다.
“치료가 끝났습니다.”
“나가봐.”
루프스는 뻐근한 왼쪽 어깨를 만지면서 차갑게 말했다. 오르페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갔다. 루프스는 오르페가 나가자마자 서랍 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는 그 것을 들고 유채의 방으로 갔다. 루프스는 방으로 들어가 탁자 앞에 섰다. 그 위에 그녀가 흘리고 간 머리 장식과 망가진 발찌가 놓여 있었다. 그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녀가 두고 간 것들이 모두 제 처지 같아 보였다. 무시당한 제 정성들이었다.
루프스는 가져 온 상자를 탁자 위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가 들어 있었다. 블랑카의, 루프스가 유일하게 지켜낸 그녀의 유품이었다. 레티티아의 희고 고운 손가락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장인에게 크기를 줄이라 명을 내렸었다. 루프스는 반지를 꺼내서 매끈한 표면을 만졌다.
[Meus Ignis(내 사랑)]
아버지가 직접 반지의 안쪽에 새긴 문구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준, 길고긴 구애의 시작이 되었던 선물이었다. 그런 의미 있는 물건을 그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이유로 유채에게 주려고 했을 정도로 그녀를 아꼈다.
“도망갈 수 있을 때 도망가 봐.”
유채를 다시 찾으면, 제가 그녀에게 어떻게 할지 그 자신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채를 발견하면 그 즉시 손발을 묶어서 이 토스 호무스로 돌아와 그녀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서 감금할 것이다. 아니, 양손에 수갑을 채워서 제 방 침대 기둥에 묶어놓겠다. 문은 결코 열어주지 않을 것이고 그녀와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만으로 한정할 것이다.
그렇게 저만 보고 저만 의지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제 손길에, 제 말 한마디에 매달리게 만들 것이다. 저만을 위해서 입을 열이고 저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펠릭스 다우스로 만들겠다. 더 이상의 배려는 없을 것이다.
【‘안 가요.’】
루프스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유채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제 어깨를 찌른 유채가 싫지 않았다. 그녀가 밉지도 않았다. 그가 싫은 것은 유채가 저를 떠난 바로 이 상황이었다.
루프스는 그녀가 두고 간 또 다른 물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전처럼 이리저리 살펴보고 눌러 보니 표면이 밝아지더니 유채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발머리의 환하게 웃는 유채의 얼굴을 보니, 저를 찌르고 배신하고 도망간 암컷임에도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고운 얼굴을 바라보고 가는 몸을 끌어안고 달콤한 향이 나는 말캉한 입술을 탐하고 싶었다.
“돌아간다…….”
분명 그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루프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자도, 신의 힘을 담은 물건도 없었다. 유채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유채는 절망할 것이고 결국 그에게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불안했다.
루프스는 침대로 가서 유채의 냄새가 배어 있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유채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가지 마.”
그는 작게 되뇌었다. 그리고 알고 있지만, 부르기 싫었던 그 이름을 불렀다.
“유채.”
낯선 발음임에도 꽤나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평소와 달리 습윤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 * *
“오라클라 리네아님!”
고양이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를 흔들면서 아일라가 리네아에게 뛰어왔다. 리네아는 난롯가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일라는 리네아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고양이 특유의 눈동자와 날카로운 송곳니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리네아를 수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리네아는 그만큼 마레 위르와 흡사하게 보였다.
“왔구나, 아일라.”
아일라의 집안은 대대로 오라클라 리네아를 모시고 있었다. 아일라는 아주 어릴 적부터 리네아를 보아왔다. 리네아는 그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아일라의 곁에 있었다.
은가연과 동시대를 살았으니 최소 천 년은 훌쩍 넘어가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리네아는 겨우 스물다섯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일라는 꽤나 심각한 표정의 리네아의 옆에 붙어 앉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곧 손님이 올 거야.”
리네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리네아가 이제껏 살아 있어야 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녀에게 오고 있었다.
“신의 운명에 휘말린 가여운 여인이 올 거야.”
“그게 무슨 말이세요?”
“이니투스님이 평생을 짊어지셨던, 그리고 우리 수인들이 짊어지고 있었던 가연과의 약속을 해결해 줄 여인이 올 거야.”
리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굉장한 희생을 감수하기로 했던 이니투스의 마지막 부탁. 제 일족의 번영과 안전을 바라며 이니투스는 리와인더의 마지막 조각을 짊어지고 모든 일족을 이끌고 이 스티폴로르로 왔다. 가연과의 약속이자, 그녀의 마지막 짐을 덜어주기 위해, 일족의 번영을 바라며 이니투스는 이 스티폴로르로 왔다. 그리고 이제 그 희생의 끝이 보였다.
“또. 검은 머리 이국의 여인이군.”
리네아가 조용히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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