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고양이들의 땅, 펠레스 호무스 [Feles Humus]
“아악!”
“유채 양!”
유채는 간신히 나뭇가지를 잡았다. 한국에서 가벼운 등산만 해보았던 유채는 이런 험한 산을 타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유채는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하고 가파른 경사에 발을 딛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팔이 완전히 까져 버렸다. 앞서가던 알렉스가 빠르게 내려왔다.
“괜찮아요?”
“좀 까진 것뿐이에요. 괜찮아요.”
유채는 상처를 뒤로 감추었다. 살이 까져서 쓰라렸지만 지금 알렉스와 프레드릭에게 입힌 직접적인 피해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기에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었다.
알렉스는 한숨을 쉬더니 유채가 뒤로 감춘 팔을 잡아당겼다. 유채는 신음을 뱉었다. 알렉스는 살이 까져서 벌건 속을 드러낸 상처를 살폈다. 유채는 미안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유채 양이 미안할 것이 뭐가 있어요. 다쳤으면 말을 해야죠. 지금 이게 뭐예요.”
알렉스는 가방을 뒤져서 소독약을 꺼냈다. 알렉스는 약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껴 써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상처에 소독약을 떨어뜨렸다. 유채는 상처가 쓰라려서 눈살을 찌푸렸다. 알렉스는 상처 위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프레드릭이 치유 마법을 써줄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그는 지금 마력 리바운드의 여파로 당분간은 마법을 쓰지 않는 것이 좋았다.
“정말 미안해요.”
“유채 양이 사과할 일 아니라니까, 또 그러네.”
알렉스가 붕대를 챙겨 넣으면서 말했다. 알렉스는 유채의 옷차림을 살폈다. 그녀의 옷은 외부 활동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성하고 화려한 드레스였다. 신발 역시 이렇게 가파른 산을 타기에는 적합하다고 볼 수 없었다. 치맛자락 아래로 보이는 발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퉁퉁 부은 발목이 꺾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태였다.
“근처에 인가가 있으면 도둑질이라도 해야겠군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유채도 옷이나 신발만 바뀌어도 더 이상 형제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도둑질을 했다가 자신들의 위치가 들킬 것이 두려웠다. 알렉스나 프레드릭에게 더 이상 피해를 입힐 만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알렉스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유채에게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업혀요.”
“예?”
“업히라고요. 지금 발도 엉망이 됐고 옷도 불편하잖아요. 내가 업고 올라갈게요.”
“아니에요. 더 이상 폐를…….”
“지금 이렇게 고집부리는 게 더 민폐니까. 빨리 업혀요.”
알렉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유채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한숨을 뱉으면서 결국 그의 등에 업혔다. 알렉스는 유채의 다리를 단단하게 받친 다음 걸음을 떼었다. 생각보다 가벼워서 유채를 업고 산을 타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프레드릭이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스, 근처에 물이 있어!”
프레드릭이 큰 소리로 외쳤다.
“멀어?”
“그렇게 멀지는 않아! 거기서 오늘은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알겠어. 형! 금방 따라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알렉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프레드릭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성큼성큼 올라갔다. 유채는 알렉스에게 미안한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나 때문에 거기까지만 가는 거라면…….”
“하아. 그건 아니에요, 유채 양. 물을 확보할 수 있는 곳에서 야영하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이지, 결코 유채 양 때문에 그곳을 선택한 게 아니에요.”
알렉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했다. 유채가 삼 일간 지켜본 결과 알렉스와 프레드릭의 체력은 보통 사람의 범주를 넘어섰다. 아무리 최근 큰일을 겪으면서 체력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자아이치고 운동도 잘하고 체력도 좋은 편이었던 유채도 하워드 형제의 체력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벅찼다. 검사인 알렉스는 둘째 치더라도 책상물림으로만 보이는 프레드릭의 체력도 굉장했다. 유채는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서 정말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예전에 스승님께 훈련받을 땐 지금보다 더 오래 못 잔 적도 많은걸요.”
알렉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유채는 알렉스가 걱정이 되었다. 그는 저와 프레드릭을 위해 매일 밤마다 불침번을 자처했다. 거기다 낮에는 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프레드릭과 둘에 비해서 체력이 현저히 부족한 유채를 돕느라 배로 고생 중이었다. 유채는 알렉스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살던 세상에 드라마라는 게 있어요.”
“드라마요?”
알렉스는 지난 밤 유채와 이야기하면서 그녀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언니를 구하기 위해서 이런 위험천만한 길을 택했다는 것도. 알렉스는 유채가 정말로 가여웠다. 그래서 유채가 하는 말에는 관심을 기울여주고 호응도 많이 해주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설명도 꽤나 흥미진진했기 때문에 알렉스는 유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음. 연극하고 비슷한 건데, 사람들이 연기한 모습을 담은 걸 특별한 장치를 이용해서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거든요. 그게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이야기가 끝이 날 때까지 규칙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드라마라고 해요.”
유채는 되도록 알렉스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보려 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대강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가 말을 계속해달라고 재촉을 하자 유채는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 드라마 중에 도망치는 노예들을 쫓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요. 거기에 언년이라는 인물이 나와요.”
“뭐하는 역할입니까? 노예를 쫓는다는 건 무슨 내용이고요?”
유채는 제가 보았던 드라마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전투 장면도 그렇고 이야기 자체가 남성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만든 드라마다 보니, 알렉스도 꽤나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튼 그 언년이란 인물이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는 애라서 저도 보면서 엄청 욕했거든요. 근데, 지금 내 처지가 딱 언년이 같아져서…… 그때 욕한 게 되게 미안해요.”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제발 자책 좀 그만해요.”
알렉스가 약간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얼마나 큰일을 겪었던 건지 유채는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서는 사소한 것에도 다 미안해했다. 알렉스는 프레드릭이 넌지시 준 힌트로 유채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대강 파악을 했다. 여인으로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포트리스에서도 헥터는 그런 쪽으로 악명 높았다. 솔직히 말해서 베노르 콩레수스 때 겪은 그런 큰 충격에서 이를 악물고 헤어 나와서 탈출할 길을 찾아놓고 적당한 때만을 찾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유채는 대단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한 게, 무력으로 누군가를 보호하는 것만이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난 그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유채 양은 유채 양이 할 수 있는 한계까지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어요. 사실 유채 양이 실질적으로 우리 형의 생명의 은인이에요. 그러니 나도 유채 양을 돕는 거예요. 그 아르젠 말로 상부…….”
알렉스가 어려운 말을 쓸려고 하다가 단어가 가물거리는 것인지 말을 더듬었다. 유채가 웃으면서 답을 하였다.
“상부상조.”
“맞아요. 그 단어! 나도 그냥 유채 양에게 은혜 갚는 중이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말아요.”
“알렉스 씨는 정말 사람이 원하는 말만 들려주시는 것 같네요.”
“저는 아름다운 여성분께만 한없이 친절해집니다.”
“와! 나 보고 아름답다고 해주는 거예요?”
“솔직히 말할까요? 포트리스에서 여자들이라면 물리도록 봤는데 유채 양은 그 여자들 얼굴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예쁩니다. 솔직히 유채 양의 고향에서도 남자들에게 인기 있었을 것 같은데?”
“생각만큼 인기 있지는 않았어요. 편한 옷차림을 좋아하기도 했고, 입만 열면 깬다고 입 좀 다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집에 있는 것만 좋아하기도 했고요.”
알렉스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유채는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버리고 지저분한 단발이 되어 있었다. 단발머리가 움직이기 편하다는 이유로 알렉스의 단검을 빌려서 본인이 자른 머리였다.
“머리카락 아깝지 않아요?”
“언니에게 가발을 만들어줄 생각에 기른 머리카락이어서 아깝긴 한데, 한편으로는 후련해요. 루프스의 취향이 긴 머리라 그 인간 취향에 맞춘다고 궁녀들이 아주 닦달을 해서.”
“생각보다 쾌활하고 직설적인 성격인가 봅니다.”
“그것보단 쌈닭에 가까웠어요. 여기 와서 성격이 많이 죽은 편이죠. 오르페님이 그러더군요. 자존심을 죽이고 루프스의 비위를 맞춰준다면 오히려 편하게 지낼 수도 있고 더 많은 자유를 얻을 수도 있을 텐데 왜 그리 미련하게 구냐고.”
유채는 알렉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 바람에 목에 그녀의 숨결이 닿아오자 순간 알렉스의 몸이 움찔했다.
“근데, 나는 그 인간이 너무 싫었어요.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오르페님의 말이 맞는 데,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을 안 했어요. 그렇게 지내다 현실에 안주해 버릴 것이 두려웠어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잖아요. 그래서 결국 나만 고생했죠.”
“후회해요?”
“아니요. 후회하지는 않아요. 오르페님의 말에 따랐다면 나는 이번 기회를 잡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된 거예요. 난 사실 인간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쯤은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유채 양이 옳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해봐요. 바람둥이죠?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여자들이 원하는 말만 할 수는 없어요.”
“만일 그랬다면 제 주위에 여자들이 한 수레는 더 있었겠죠? 그런데 불행히도 전 한 수레는커녕 한 명도 주위에 두기 힘들었습니다.”
유채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알렉스는 유채가 도란도란 털어놓는 말들을 다 들어주었다. 차분하고 다소곳한 아가씨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생각보다 명랑하며 약간은 푼수기도 있는 그냥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였다. 그런 여자아이를 얼마나 다그쳤으면 저렇게 위축되게 만들었나 싶었다.
잠시 후 알렉스는 프레드릭이 미리 준비하고 있던 야영지에 도착했다. 숲이라 날이 빨리 저물어, 짐승들과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서 장작을 모아서 불을 피웠다.
유채는 신발을 벗고 맑은 물에 발을 담갔다. 물에 닿자마자 발이 너무 쓰라렸지만, 조금 참아내니 냉기에 발이 보다 편해졌다. 알렉스는 유채에게 육포를 건넸다, 유채는 발을 물에 담근 채로 질긴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그녀는 요즘 몽골인들이 전쟁 시 왜 육포를 식량으로 가지고 다녔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유채 양, 잠깐 올래요?”
프레드릭이 유채를 불렀다. 유채는 물에서 나와 발을 닦고 그에게 향했다. 프레드릭은 장작불에 지도를 비추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고양이 일족의 땅과 가까운 곳을 손으로 짚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생각보다 멀리 왔네요.”
“예. 토끼, 쥐의 영토와 고양이 영토의 경계입니다. 보통 이런 곳에는 군소 일족들이 많이 사는데, 여기는 다람쥐 일족이 많이 산다고 합니다.”
“다람쥐요?”
유채는 다람쥐 궁녀들에게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탐탁지 않은 얼굴을 했다. 프레드릭은 고양이 일족의 영토로 들어가려면 다람쥐 수인의 마을을 지나야 한다는 설명했다.
유채는 심하게 긴장을 했다. 제가 인간이고 펠릭스 다우스인 것을 들킨다면, 다람쥐 수인들이 루프스에게 여기 제가 왔다고 일러바칠 것만 같았다. 유채는 도저히 벗을 수가 없었던 파렌티아를 꽉 움켜쥐었다.
“여기 이 마을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고, 일단 고양이 일족의 땅으로 들어가면 문제는 더 없을 겁니다.”
알렉스는 턱을 쓸면서 어떻게 마을을 무사히 지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프레드릭과 나누었다. 유채도 몇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하지만 딱히 해결점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단은 마을의 상황을 보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하고 잠을 잘 준비를 하였다. 유채는 불침번을 서기 위해 준비를 하는 알렉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알렉스 씨, 오늘은 제가 깨어 있을 테니까 좀 눈을 붙이세요.”
“아닙니다, 유채 양. 유채 양 몸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더 자요.”
유채와 알렉스는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결국 유채의 고집을 꺾지 못한 알렉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세 시간 정도 후에 교대하자는 타협점을 제시했다. 알렉스는 검을 베개 삼아서 누웠다. 정말 피곤했던 것인지 알렉스는 눕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유채는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집어넣거나 장작으로 모아놓은 나뭇가지에 붙은 나뭇잎을 떼면서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었다.
【‘가지 마.’】
유채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루프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저를 놓치게 되었으니 분명 분노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유채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눈동자는 헤어지는 연인을 잡는 것 같은, 아니, 마치 떠나려는 엄마에게 매달리는 것 같은 그런 절박함이었다.
유채는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에 볼을 기대었다. 정말로 싫은 남자인데도 그의 마지막 표정에 제가 잘못한 것 같다는 기분을 들어 불쾌해졌다.
“아. 그래도 그건 좀 미안하네.”
헥터에게서 저를 구해주었음에도 유채는 그에게 제대로 된 감사 인사 한 번을 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그건 조금 미안했지만, 그동안 그 인간이 제게 한 짓이 있으니 똑같다고 생각했다.
유채는 제가 여기까지 와서 왜 루프스를 떠올리고 있는 건가 싶어서 지저분하게 잘린 단발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렸다.
바스락. 쿵. 쿠구궁.
유채는 갑자기 나는 큰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채는 긴장을 하고 다시 귀를 쫑긋 세웠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나무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유채는 놀라서 알렉스의 어깨를 흔들었다.
“알렉스 씨. 알렉스 씨.”
유채는 조용하지만 다급하게 알렉스를 부르며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오랜만의 잠에 깊게 빠져 버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유채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소리에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유채는 차선책으로 프레드릭을 돌아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 저보다 체력만 나았지, 쉬어야하는 병자였다.
유채는 장작불 가까이 다가가서 불이 붙은 장작 하나를 꺼내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짐승들은 불을 무서워한다고 하였다. 불붙은 장작이면 어쩌면 짐승 하나 정도는 쫓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채는 불붙은 장작을 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소리로 보니 두 마리쯤 되는 것 같았다. 유채는 장작을 붕붕 휘두르면서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꺄악!”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풀숲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덮치듯 튀어나오자 유채는 순간 눈을 감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유채는 제 머리 위로 뭔가가 넘어간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벌벌 떨었다.
아그작. 아그작.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유채 양!”
알렉스가 검을 뽑아 들고 달려와서 유채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유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네 발 달린 동물이 거대한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검은 액체가 주둥이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알렉스는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마력 리바운드로 고생하고 있는 프레드릭과 유채를 보호하면서 싸워야 했다. 거기다 저렇게 커다란 덩치의 마물을 씹어 먹는 괴물이었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마물을 씹어 먹고 있던 동물이 몸을 돌렸다. 불빛에 비친 그것은 거대한 개 한 마리였다. 유채 세상의 기준으로 개의 품종은 아이리쉬 울프하운드였다. 개의 눈동자가 커졌다.
[파렌티아?]
주둥이에서 검은 피를 뚝뚝 흘리며 개는 천천히 다가왔다. 알렉스는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개 수인을 경계하며 검을 든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개 수인은 유채를 빤히 보더니 순식간에 위르형으로 변했다. 바실리사와 닮은 지저분한 회색 머리카락에, 축 늘어진 개의 귀를 가진 중년의 남성이었다. 알렉스의 검이 중년의 개 수인의 목을 겨누었다.
“누구냐?”
“너, 펠릭스 다우스냐?”
알렉스의 물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유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세간에서 모두 그녀를 펠릭스 다우스라고. 루프스의 것이라 말해도 유채 자신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알렉스, 당장 검을 내리고 물러서!”
프레드릭이 개 수인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외쳤다.
“오. 프레드릭 군인가?”
서로 안면이 있는 것인지 개 수인은 프레드릭에게 아는 체를 하였다. 프레드릭은 고개를 숙여서 개 수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카니스 빅터.”
“카, 니스…… 빅터?”
유채가 떨리는 눈으로 중년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유채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렇단다. 레티티아.”
알렉스가 검을 거둠과 동시에 카니스 빅터는 유채의 몸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알렉스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이미 카니스의 자리를 내버렸음에도 여전히 카니스라 불리는 개 수인 일족 부동의 최강자였다. 로보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블랑카의 소꿉친구였던, 이전 시대에 베니니타스 다음가는 강자였으며, 지금의 루프스와 그나마 대등하게 대결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남자. 물론 절대적인 실력은 루프스가 우위를 점하겠지만, 수많은 세월에서 비롯된 연륜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니스 빅터는 하워드 형제와 유채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손바닥을 비볐다.
“이거, 라이칸의 궁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는 아가씨와 포트리스의 가장 유명한 형제의 조합이라. 꽤나 신선하군.”
빅터는 예쁘장한 얼굴의 유채를 바라보았다. 찢어진 옷자락과 엉성하게 잘린 머리카락으로 보아서 분명히 탈출을 한 것이었다. 배짱도 큰 아가씨였다. 전투에 대한 감각은 좋았으나 다른 부분에서는 약간 무식한 구석이 있던 로보와는 달리 라이칸은 꽤나 명석한 아이였다. 명석한 머리는 수인 내전을 지내면서 뒤틀린 성격과 만나 악랄함을 만들어냈다. 펠릭스 다우스를 들여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길들이는 괴악한 취미를 갖고 있는 라이칸이 유독 싸고돈다는 암컷이었다.
그렇게 싸고돈 암컷이라면 쉽게 탈출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텐데…… 배짱도 좋고 머리도 좋은 것인지…… 빅터는 유채가 흥미로워 보였다. 빅터는 턱을 쓸면서 유채와 그 일행들이 짐을 풀어놓았던 불 가까이 다가가 마치 그도 일행인 양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이야기나 들어보지. 요즘 오래 산을 타고 있어 내가 바깥소식에 어둡거든.”
“지금…….”
“프레드릭 군의 다혈질 동생 알렉스 군. 지금 나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들을 도와줄 것인지를 결정할 거야.”
빅터는 연륜과 실력에서 비롯된 위압감으로 그들 모두를 침묵시켰다.
“산보다는 수인들의 땅들을 직접 지나가는 것이 편하지? 그렇지 않은가?”
빅터가 빙긋 웃었다.
“그러니 이야기 해봐, 도대체 이런 신선한 조합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유채는 바실리사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 침을 삼켰다.
* * *
“정말 더럽게 안 낫는군.”
루프스는 어깨상처의 붕대를 갈면서 이를 갈았다. 유채가 찌르고 간 어깨의 상처는 정말 낫지를 않았다. 붕대를 갈 때마다 피가 배어나왔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치유되고도 남을 시간임에도 이 상처는 도저히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차선책으로 오르페가 치유 마법을 쏟아 부었다. 워낙 마력 저항력이 강한 루프스인지라 효과는 미미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루프스는 욕지거리를 뱉으면서 더러워진 붕대를 막사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그의 예상대로 발란테스(양 일족의 수장) 카르멘도 소 일족에 동조했다. 소 일족이 독수리 일족을 치고 늑대 일족을 노리기 시작했다면 발란테스 카르멘은 가장 가까운 토끼 일족과 쥐 일족의 땅을 치기 시작했다. 중간에 낀 군소 일족들은 누구의 편을 들을 것인지 지금 굉장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개중 늑대 일족에게 앙심을 품은 일족들은 헥터와 카르멘에게 동조했다.
루프스는 타 일족의 땅을 침략하는 자들이 있으면, 늑대 일족은 침략당하는 일족을 돕겠다는 수인 협정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방에 틀어박힌 플로서스 대신에 토모스의 막내아들을 인질로 잡아 그를 선봉으로 세워 독수리 수인 일족의 땅에 보냈다. 루프스는 아리아와 함께 소규모의 정예병으로 발란테스 카르멘을 노리러 가는 중이었다. 근처에서 게릴라 작전이라도 펼치는 모양인 군소 일족들과의 전투가 있었지만, 금방 제압되었다.
“빌어먹을 것들.”
루프스는 중얼거리면서 간이침대에 몸을 뉘였다. 어차피 토모스가 헥터를 처리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죽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토모스가 소 수인 일족과 헥터의 힘을 빼주는 사이 그는 발란테스 카르멘을 정리하고 헥터를 죽이러 갈 생각이었다. 더 이상 그를 보아 넘겨줄 수 없었다.
【‘안 가요.’】
“젠장.”
그는 욕을 지껄이면서 간이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가장 심각한 사항은 타우루스 헥터와 발란테스 카르멘임에도 그는 그들보다 유채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았다. 그 찢어 죽일 마레 위르 수컷에 품에 안겨서 먼지처럼 사라졌던 유채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옷을 더듬어 품에서 나비 모양 머리 장식을 꺼내었다.
【‘예쁘네.’】
유채가 유일하게 반응한 선물이었다. 장인이 이것을 바친 날,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카락에 직접 머리 장식을 달아주었다. 섬세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손끝이 투박한 편이라 유채의 머리에 머리 장식을 달아주기 위해서 그는 꽤나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그리고 유채를 거울 앞에 세우고 생색을 내며 자랑을 하려고 하는데 그녀가 그때 중얼거렸던 것이다.
【‘예쁘네.’】
유채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머금어졌었다. 루프스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유채가 웃어서 아름다운 것인지, 아니면 머리 장식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유채는 그가 보았던 어떤 미녀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한유채.”
그는 손에 머리 장식을 말아 쥐고 유채의 이름을 되뇌었다. 제 몸이 고장난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기분이 널을 뛰었다. 슬플 때도 있었고 분노했을 때도 있었다. 눈을 감으면 유채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저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어 그저 옆모습으로만 기억하는 밝은 얼굴부터, 잠이 든 모습까지. 제가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눈만 감으면 유채의 모습이 떠올랐다.
“젠장.”
발란테스 카르멘을 처리하는 일은 그가 직접 나설 만한 것은 아니었다. 발란테스 카르멘 정도라면 토모스와 루크레치아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가 움직인 이유는 딱 하나. 이 길이 고양이 일족의 땅으로 가고 있을 유채를 잡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얼굴을 성마르게 쓸어내렸다. 발목에 넘실대는 검은 뱀 같은 감정들이 날뛰었다. 당연했다.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들이 많아졌으니까. 다시 모든 것이 무료해졌고, 무료해진만큼 검은 뱀들이 극성을 떨어대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슴 떨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오라클라 리네아? 얼어 죽을.”
하루에도 몇 번씩 유채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이고 결국 체념하고 제게 돌아올 것이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채가 영영 떠날 것아 두려웠다. 그래서 동물형으로 변해면 위르형일 때 입은 상처에 계속 자극이 감을 알면서도 그는 동물형으로 변해서 일정을 재촉했다.
루프스는 유채가 떨어뜨리고 간 머리 장식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젠장할.”
루프스는 팔로 눈을 가리면서 누웠다. 거울에 비쳤던, 미소를 띠고 있던 유채가 도저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머리 장식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 * *
빅터는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보며 그 너머로 잠이 들어 있는 세 명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유달리 많이 머무는 곳은 유채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을 써도 될 정도로 구구절절했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으며 어떻게 펠릭스 다우스가 됐으며, 그에게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곳을 탈출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었다. 물론 말만 담담했다. 말을 하는 동안 유채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빅터의 예상대로 배짱 있는 아가씨였다. 빅터는 유채에게 물었다.
【‘결국 펠릭스 다우스가 맞으면서 왜 아니라고 했나.’】
【‘저는 그 남자의 소유물이 아니니까요. 저는 그저 저 자체로 존재해요. 레티티아가 아니고 한유채예요. 그 사람이 나를 아무리 윽박지르고 구속해도 나는 여전히 한유채예요. 그의 펠릭스 다우스가 아니라.’】
그렇게 힘든 일을 겪고도 꽤나 당당한 눈동자였다. 결코 자신에 대한 자주성을 놓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그 단단한 눈동자를 보니 블랑카가 떠올랐다. 늑대도 아니고 개도 아니어서 양쪽에서 배척받던 블랑카도 그렇게 당당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밝았다. 그래서 좋아했다. 그가 가장 후회하는 일은 로보에게 마음을 준 블랑카를 막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많이 닮는다고 했나?”
로보의 열렬한 구애는 결국 블랑카의 마음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제가 줄 수 있는 부를 모두 보여주는 방식으로 시작해서 종국에는 그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오만하다는 평가까지 듣던 로보가 무릎을 꿇고 블랑카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정신적인 구애까지 모두 이루어진 다음에야 블랑카는 로보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로보의 아들인 라이칸도 별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똑같은 암컷 취향에 소름끼치도록 비슷한 구애 방식까지.
“블랑카.”
그의 입에서 습기를 잔뜩 머금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벌써 네 아들이 이렇게 컸어.”
빅터는 한 번도 블랑카를 잊은 적이 없었다. 제게서 블랑카를 뺏어간 친구 로보를 미워했으며, 블랑카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으며 그녀를 죽인 친구 베니니타스를 증오했다.
“너와 비슷한 암컷을 좋아하는 그런 나이가 됐어.”
블랑카의 아들임에도 그는 도저히 라이칸에게 정을 줄 수가 없었다. 소름끼치도록 로보를 닮았고, 블랑카를 가장 많이 닮았던 에리카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든 유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블랑카와 닮은 구석이 없는데도 자꾸 블랑카가 보였다. 그래서 그는 유채를 돕고 싶었다. 늑대에게 제 암컷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잘 알면서도 그는 블랑카를 닮은 유채를 돕고 싶었다.
“그러니, 부디 나를 용서해, 블랑카.”
그가 나지막하게 허공에 속삭였다.
유채는 차가운 아침바람을 맞으며 빅터의 등을 타고 있었다.
날이 밝자 알렉스 대신 불침번을 섰던 빅터가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유채와 알렉스, 프레드릭은 그의 제안을 거절할 만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선택에는 빅터와 안면이 있는 프레드릭의 설득이 주요했다.
프레드릭은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던 빅터를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그 후에는 프레드릭이 위험에 처했을 때 빅터가 구해준 적이 있어 인연이 생긴 것이다. 프레드릭은 빅터가 인간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수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유채도 빅터의 친척인 바실리사를 떠올리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빅터는 거대한 아이리쉬 울프하운드로 변해서 유채와 알렉스, 프레드릭을 태우고 달렸다. 빠른 속도도 속도거니와 유채는 무엇보다 발이 편하고 몸이 힘들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알렉스 역시 그동안에 피로가 상당했던지라 빅터의 등 위에서 졸고 있었다. 프레드릭이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다. 나도 라이칸 녀석이 고약한 취미가 더 이상 꼴 보기 싫어서 말이다.]
빅터가 대충 이유를 둘러대었다. 유채는 고개를 기울이다가 손뼉을 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전대의 루프스였던 로보와 울페스였던 베니니타스와 친분이 있으셨나요?”
[우리 셋은 친구였다.]
“정말 실례되는 말일 수 있지만, 한 가지 여쭈어도 되나요?”
[뭔가?]
“정말 전대 루프스인 로보가 베니니타스의 부인인 라일라를 죽였나요?”
“유채 양!”
프레드릭은 유채의 무례에 가까운 말에 놀라서 소리쳤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으면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알렉스가 깨어나서 뭔 일이 생긴 줄 알고 검을 뽑으려고 했을 정도였다. 프레드릭은 피곤한 동생을 진정시켜 다시 졸게 한 다음 유채에게 이건 무례한 짓이라며 혼을 냈다.
[잠깐, 프레드릭.]
빅터가 프레드릭의 말을 끊고 유채에게 물었다.
[아가씨의 말은 마치 라일라를 죽인 범인이 로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
“시체의 처리 방식이 너무 달라서요.”
유채는 블루벨이나 바실리사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 계속 품고 있던 의문점을 털어놓았다.
“어린아이 둘을 형체를 몰라볼 정도로 태울 시간이 있었다면 자신들이 침입한 흔적도 모두 지울 시간이 있었을 텐데, 굳이 흔적도 지우지 않았고. 또 라일라의 시신은 태우지 않은 것도 이상해요. 마치 우리가 했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유채 양. 어린아이의 시신은 모르지만, 다 큰 어른의 시신은 태우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난 애들 시신을 태우느니 내가 들어온 흔적을 지우겠어요. 이빨을 가진 동물형을 가진 일족은 여우도 있어요. 여우 일족 중 라일라에게 반감을 가진 일부가 그랬다고 뒤집어씌울 수도 있으면서 굳이 수고롭게 왜 시신만 태우고 도망갔느냐 말이죠. 또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도 이상해요. 시신이 타고 있는 동안 멍하니 그것만 지켜보고 서 있어요? 그 시간에 흔적을 지워야죠.”
[정확히 말해서 로보가 라일라를 죽인 것이 아니라, 루프스 직속 암살, 첩보 부대인 시카리우스(Sicarius)가 한 일이지. 그들은 루프스의 명만 받드는 놈들이거든.]
빅터가 부연설명을 하였다.
[솔직히 말해 내가 늑대 일족과 혈맹인 개 일족의 수장이었던 것은 맞으나, 나도 그 당시의 자세한 사항은 모른다.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죽음 뒤에 은밀하게 움직여서 블랑카를 죽임으로써 로보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그게 수인 내전의 시작이었지. 그때 로보는 이미 이성이 끊긴 상태라 나는 진위 여부를 묻기도 힘들었어.]
빅터 역시 유채의 말을 듣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많은 것 같았다. 로보가 라일라를 죽여서 얻는 이득이 없음에도 괜히 라일라를 건드려 내전을 발발시켰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 당시에 빅터도 블랑카의 죽음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라 앞뒤 정황을 따지기보다는 베니니타스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수인 내전이 끝난 뒤로는 그 어떤 수인들도 다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 내막에 대해서는 파헤치기를 꺼려하며 논의 자체를 피했다. 빅터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을 괴로워하여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예요. 나라면, 일단 그 세 명을 죽인 뒤에 세 명의 시체에 불을 질러서 시신에 남아 있는 살해 흔적을 지우는 동안에 내가 들어왔다는 흔적을 지울 거예요. 암살이란 것은 흔적이 남지 않아야 하는 거잖아요? 근데 이건 마치 ‘우리 늑대가 했다’ 수준으로 광고를 했잖아요.”
프레드릭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로보의 이유 없는 돌발 행동은 수인과 인간 사이에 있던 라일라로 인해 조성되던 화합의 기운이 사라지게 하였다. 그리고 수인 일족들을 지금처럼 다시 대립하게 만들었다. 그 누구도 이 전쟁에서 이득을 얻은 이가 없었다. 서로를 향한 증오에서 촉발된 전쟁은 마치 누군가의 정교한 말판에 놀아난 것과 같았다. 그런데, 만약 만약에 그 일이 누군가에 의해서 꾸며진 일이라면?
“그럼 유채 양은 왜 아이들의 시신만 불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추리소설에서 보면 시신을 태우는 이유는 보통 크게 두 가지예요. 살해 방법을 감추려고 하거나, 아니면 살해당한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감추려고 하는 것.”
“누가 죽었는지 감추려고 하는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베니니타스의 아들들이 살아 있다는 말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가씨.]
“그건 모르겠어요. 만일 살아 있다면, 어머니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서 아버지와 접촉하지 않았을까요? 기억이라도 잃지 않았다면 말이에요.”
유채는 더 생각하다가 말을 더 붙였다.
“아니면, 죽이긴 했는데 시신을 찾기 힘들어서 일부러 확실하게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시신을 가져왔다거나.”
프레드릭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수인과 인간 사이에 쌓였던 울분은 라일라가 풀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으로 시작된 수인 내전은 다시 포트리스 사람들의 마음을 단단히 돌리게 해버렸다. 그 대표적 이물이 바로 라일라의 오빠인 렉스 뮈어였다. 렉스 뮈어는 단신으로 베니니타스의 복수를 도움과 동시에 자신의 복수를 이루었다.
로보의 죽음에 렉스 뮈어가 개입했다는 사실에 수인들의 분노는 포트리스로 향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수인들에 적대적이던 강경파는 렉스 뮈어를 제 편으로 끌어들여 수인 내전에 뛰어들었다. 라일라의 참담한 죽음으로 이 스티폴로르는 화마에 뒤덮였다.
그런데 라일라의 죽음이 누군가가 정교하게 꾸며낸 일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로보에게 뒤집어 씌웠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어쩌면 인간과 수인들 사이의 원한이 어느 정도는 풀릴지도 몰랐다. 서로를 원망하기보다는 이 일을 꾸민 다른 이에게 원망이 옮겨갈 것이다. 물론 서로에게 잘못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시 화해를 꿈꿀 수 있는 분위기는 조성될 수 있었다.
“아무튼, 유채 양은 그것이 이상해 보인단 말이죠?”
“뭐, 나는 제삼자의 입장이니까요.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가씨의 가설 중 하나대로 베니니타스의 아들들이 살아 있어서 그 상황을 증언해 주기 전까지는 그냥 허무맹랑한 소리이지, 그리고 진실이 밝혀진다고 무엇이 달라지나?]
“달라질 수 있지요. 최소한 로보와 블랑카가 억울한 피해자였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수인과 인간 사이에 앙금을 풀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요.”
프레드릭이 조용하게 읊조렸다. 한참을 달리던 빅터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옛 이야기는 그만하고, 저기가 너희가 고양이 일족의 땅을 지나기 위해서 지나야 하는 다람쥐 마을이다.]
저 아래에 농업을 생계로 삼고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 보였다. 다람쥐 수인 특유의 복슬복슬하고 돌돌 말린 꼬리들이 보였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내 부하들이 되는 거다. 그럼 너희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하암! 저기 수인들과 아는 사이라도 됩니까?”
졸다 일어난 알렉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물었다. 빅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주 들르던 마을이다. 안면 있는 수인들이 많지.]
빅터의 말에 유채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로브의 목 부분을 꽉 조였다. 파렌티아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빅터는 주의 사항을 전달한 다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워낙 경사가 가파른 곳이라 유채 혼자 내려가려 했다면 발이 다 까지거나 어디 한 군데는 다쳤을 게 분명했다. 빅터는 적당한 위치에서 멈춰 서서 유채와 프레드릭, 알렉스를 내려주고 다시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여기 이걸 둘러라.”
빅터는 유채에게 갈색 목도리를 건네었다.
“파렌티아를 감춰야하지 않겠느냐?”
“아, 감사합니다.”
유채는 지저분한 목도리에 한숨이 푹 나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제 마음을 다독이면서 그것을 목에 둘렀다. 파렌티아가 완벽하게 감추어졌다.
빅터가 앞장서서 산길을 내려갔다. 그는 이미 중년과 노년의 나이에 걸쳐 있음에도 유채는 물론이거니와 알렉스나 프레드릭보다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그들은 다람쥐 수인의 마을에 도착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 분위기가 났다. 유채는 처음으로 보는 보통 수인들의 생활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책에서 본 유럽 중세시대의 영지와 제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의 농업 마을을 섞어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다람쥐 수인들은 모두 빅터를 알고 있는지 마치 영주를 본 것처럼 고개를 깊이 숙였다. 빅터도 익숙한지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길을 걸었다. 유채는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오랜만입니다, 카니스 빅터님.”
“카니스 일은 내려놓은 지 오래다, 알렌.”
빅터는 여관이라 붙여놓아서 겨우 여관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허름한 삼층집 안으로 들어갔다.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꽤나 깔끔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도저히 여관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유채는 지극히 현대인의 기준으로 여관이라 쳐주기도 힘든 이곳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주인인 다람쥐 수인 알렌은 두툼한 꼬리로 먼지를 털어내면서 카운터로 추정되는 곳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한번 카니스님은 영원한 카니스님이죠. 빅터님, 아무튼 오랜만에 뵙습니다.”
“손님은 많이들 다녀갔는가?”
“에효. 원래는 말 수인 연구팀 예약이 있었는데, 최근에 소 수인들하고 양 수인들이 전쟁을 일으켜서 취소했습니다. 그놈의 소하고 양들 때문에 밥줄이 끊기게 생겼습니다.”
“전, 전쟁이요?”
유채가 놀라서 반사적으로 물었다. 알렉은 갑자기 들린 암컷의 목소리에 놀란 것인지 유채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 유채는 빅터가 건네준 목도리를 단단히 조였다. 알렉은 후드 아래로 언뜻 보인 유채의 미모에 감탄하였다. 개 수인과 늑대 수인의 수컷 중에는 미남이 많았지만 암컷들은 좀 미묘한 편이었다. 개 수인들 중에 저런 미인이 있었나 싶었다.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고양이 수인이나 소 수인 암컷 같아 보였다.
“예. 뭐, 어차피 여기는 시골 중 시골이라 전쟁의 화마가 닿지는 않겠지만, 들은 바에 따르면, 베노르 콩레수스의 일로 기분이 나빠진 타우루스 헥터가 루프스에게 앙심을 품고 선전포고를 하였고, 발란테스 카르멘이 거기에 동조했답니다. 히루크스(염소 수인의 수장)가 발란테스를 열심히 말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답니다. 지금 일단 양은 유니티오 호무스(토끼와 쥐 일족의 땅)의 초입에서 대치 중이고, 소들은 이미 독수리 수인 일족의 땅을 절반이나 밀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빅터가 잡소리 그만하고 열쇠나 달라는 말과 함께 동전을 건넸다. 알렌은 동전을 받고 싱글벙글한 얼굴로 열쇠를 두 개를 내어주었다.
“아무튼 원인은 루프스가 들였다는 그 마레 위르 펠릭스 다우스 때문 아닙니까? 어디서 천박하게 몸으로 루프스를 꼬여내 가지고는. 아무튼 마레 위르들은 있어봤자 하등 쓸모가 없는 것들이라니까요.”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한 거짓말의 여파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말을 듣는 것이 괴롭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천박하다느니, 창부라느니 등의 경멸적인 표현은 듣기에 괴로웠다. 알렉스가 그녀를 위로하려는 듯 긴 로브에 가려진 유채의 손을 잡아주었다. 유채가 고개를 들었다. 알렉스가 웃으면서 입모양으로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하였다.
빅터가 열쇠를 챙기면서 중얼거렸다.
“헥터 놈에게 불만이면 헥터에 대한 욕을 하거라. 괜히 만만한 암컷 하나 잡고 욕하는 양아치 짓 하지 말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빅터님…….”
알렌이 빅터의 말에 겁을 먹은 것인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알렉스와 프레드릭 유채를 쓱 둘러보면서 물었다.
“한데, 이들은 누굽니까? 그리고 이 예쁜 아가씨는 누구고요?”
“내 수행원들이다.”
“수행원이요? 원래 그런 거 잘 안 들이지 않습니까?”
“목적지가 비슷해 동행하던 중에 같이 가기로 하면서 나를 좀 수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더 궁금한가?”
“아! 아닙니다. 그냥 오랜만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들을 봐서 말입니다.”
알렌이 셋을 조금 수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알렉스가 유채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제 부인이 몸이 좀 약합니다. 그리고 언뜻 보셨다시피, 너무 예뻐서 수컷들이 하도 많이 탐하려 하여, 이제는 공포감까지 가지게 되어서 얼굴을 밖에 내보이는 것을 꺼려 합니다.”
“하긴 저런 미인이라면 탐내는 이가 많겠소. 한데 자네들은 왜 그리 답답하게 뒤집어쓰고 있는가?”
“아무래도 제 부인만 이리 뒤집어쓰고 다니면 더 시선이 쏠려서, 저와 형도 같이 이렇게 쓰고 다니는 겁니다.”
유채는 알렉스의 능숙한 거짓말에 놀라서 그를 보았다. 알렉스는 유채의 후드를 정리해 주는 척하면서 마치 진짜 부부인 양 다정하게 굴었다.
“뭐, 아름다운 부인을 둔 수컷의 숙명이지요. 궁금증은 해결되셨습니까?”
“그렇다면 뭐. 아무튼 많이 누추한 곳이지만 편히 쉬시지요.”
알렌은 이제는 늙어서 움직이는 게 힘들다고 투덜거리면서 방은 2층이라고 말했다.
방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벼룩 같은 것은 없을 것 같아 유채는 그것만으로 감사했다. 애초에 위생관념도 제대로 서 있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뭘 원하나 싶었다. 유채는 뒤집어쓰고 있던 답답한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 목도리도 풀고 목에 걸린 파렌티아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벗겨지지 않았다. 이걸 볼 때마다 그 끔찍한 남자가 저를 아직도 억압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똑. 똑.
“안에 있나?”
빅터가 문을 두드렸다. 유채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문을 열었다. 빅터는 목을 가리키면서 파렌티아를 가리라는 충고를 주었다. 유채는 얼른 빅터가 준 목도리로 다시 목을 가렸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시커먼 수컷 놈들은 쉬라고 내버려 두고 네 옷이나 보러 가자꾸나. 네 옷이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겠느냐?”
빅터는 유채의 드레스 차림이 마음에 걸린다는 듯 말했다. 유채는 그 말에 동의했지만, 이 시골 마을에 옷을 파는 상점 같은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빅터가 유채의 의문을 알아챈 것인지 설명했다.
“옷을 파는 상점은 없지만, 이 마을 수인들의 바느질감을 맡아 소일거리를 하는 과부가 있는데 그 과부가 이따금 천 조각을 모아서 옷을 만들어 판다. 그 과부에게 네가 입고 있는 그 옷을 주면, 적당한 옷을 골라줄 것이다.”
“아. 다행이네요.”
유채는 빅터와 함께 여관을 빠져나왔다. 서로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 사이인지라 어색한 침묵이 둘을 휘감았다. 침묵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빅터였다.
“원래 이 스티폴로르의 수인들은 루프스나 그와 비슷한 지위에 있는 것들에게 생긴 불만을 그들의 정부를 욕하면서 풀어낸다.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말거라.”
“아닙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옛날 프랑스 절대 왕정 시절에도 백성들은 국왕의 정부를 욕했다고 했다. 하지만 마담 퐁파루트나 뒤바리 부인은 그 누구도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유채는 아니었다. 왠지 더 울적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에 들었던 가설은 꽤나 신선했다. 그 누구도 더 이상 건들기 싫어서 묻고 있던 일을 그렇게 생각하려 든다는 것이 용감했다.”
“전 외부인이니까요. 원래 어떤 일을 겪은 이들은 그것을 쉬쉬하려 하거나 자신들의 피해만 강조하려 하거든요. 이런 일은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아야 더 확실한 편이지요.”
“너는 진실이 있다면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어떤 혼란을 가져오더라도?”
“그럼 빅터님은 거짓말을 해도 좋다고 배우셨나요?”
유채가 가볍게 물었다. 빅터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나쁜 진실, 좋은 거짓 따위는 없어요. 그저 힘 있는 놈들이 자기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 하는 헛소리일 뿐이에요. 아무리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진실이더라도 밝혀져야 해요. 그래야 인간은 모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니까요.”
【‘서로의 잘못은 솔직하게 밝히고 인정해야 하는 거야, 빅터. 누가 먼저 잘못했는가를 따지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잘못을 한 게 있으면 누가 먼저 했든 간에 사과를 해야 해.’】
유채의 모습에서 블랑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블랑카도 올곧은 성격이었다.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고 싶어 했던 그런 수인이었다. 그래서 빅터는 블랑카를 좋아했다. 로보도 그래서 블랑카를 좋아했다.
막나가는 망나니였던 로보는 블랑카를 만난 뒤에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수인들의 민생을 생각하게 되었고, 약한 것은 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로보는 수인 일족 간의 화해를 주도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는 마레 위르와의 화합도 생각하였다. 로보의 변한 모습을 통해서 그가 좋아했던 블랑카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빅터는 도저히 블랑카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사랑했던 모습들을 여전히 로보의 옆에서 보여주고 있기에 그는 블랑카를 잊을 수 없었다.
“너는 블랑카를 많이 닮았구나.”
“예?”
“늑대개라 따돌림받던 블랑카도 너처럼 힘든 상황에 처했어도 언제나 심지가 굳은 나무처럼 곧았단다.”
“저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한 말은 그냥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이고요. 저는 지금 제가 돌아가는 것이 중요한 그냥 이기적인 인간이에요.”
“네가 정말 이기적이고 영악했다면 그 토끼 수인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그건…….”
“거창한 것을 해야 착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지키는 것이 올바른 것이고 착한 것이다. 그래서 너는 블랑카를 많이 닮았다.”
빅터는 유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블랑카가 매력적이긴 했으나 유채만큼 예쁘게 생기지는 않았다. 라이칸의 미모는 로보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유채는 여자의 직감으로 뭔가를 깨달았다. 빅터가 여태껏 결혼하지 않은 것은 루프스의 어머니인 블랑카 때문이었다.
“그럼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나요? 솔직히 루프스는 싫지만, 그는 꽤 미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미모를 물려준 수인과 닮았다고 하니?”
“아니, 블랑카는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니었다.”
“……되게 민망해지는 기분이네요.”
빅터가 얼굴이 구겨진 유채를 보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그래, 어쩌면 블랑카가 자신을 택하지 않은 것은 로보보다 그가 더 비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로보는 망나니였지만, 블랑카를 만나고는 제가 저질렀던 과거의 과오들을 모두 인정했다. 블랑카가 저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빅터와 유채는 한결 유해진 분위기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다 보니 곧 그가 말했던 과부에 집에 도착했다. 과부는 유채의 체형을 훑어보더니 적당한 옷과 신발을 내주었다. 옷은 바실리사가 입고 다니던 것처럼, 엉덩이를 덮는 긴 상의와 바지로 활동하기 편해 보였다.
“이거면 제 딸아이에게 드디어 번듯한 옷 한 벌 해줄 수 있겠네요!”
과부는 유채가 벗어준 옷을 보면서 싱글벙글하였다. 워낙 험한 일을 겪느라 여기저기 망가져 있었지만 고치면 좋은 옷 한 벌을 해줄 수 있다고 그녀는 기뻐했다.
딸을 아끼는 엄마의 마음은 세상 어딜 가나 똑같은 것 같았다. 유채는 과부를 보자 엄마가 생각나 울적해졌다. 유채는 신발도 그녀에게 주었고 빅터는 과부에게 추가로 삯을 더 얹어주었다.
유채는 조금 울적한 기분으로 여관으로 돌아왔다. 식량을 사러 갔다 온 프레드릭과 알렉스는 그것을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가방에 정리하고 있었다.
“유채 양. 우리는 내일 고양이들의 땅으로 들어갈 거예요.”
프레드릭은 유채에게 일정을 설명해 주었다. 빅터는 고양이 일족의 땅에는 갈 생각이 없는지 여기서 헤어지기로 하였다. 이 하루 동안 그에게 받은 도움이 커서 그들은 빅터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서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알렌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혹시 펠레스 호무스로 가십니까?”
“예. 연구할 것이 있어서요.”
“조심하십시오. 가뜩이나 멸족당한 일족의 땅이라서 저주받은 땅이라 불리는데, 요즘 거기서 어린아이들이 많이 실종됩니다.”
“어린아이들이요?”
“예. 어린애들이 호기심에 펠레스 호무스로 들어가서 놀다가 사라져 버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개중에는 짐승에게 뜯어 먹힌 것과 같은 시체로 발견되는 이들도 있고요.”
유채는 갑작스럽게 서늘해진 팔을 쓸었다. 알렌은 조심하라는 연신 당부하고 저녁을 내어왔다. 알렉스와 프레드릭이 심각한 얼굴이라 유채는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어두워서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프레드릭은 몇 숟가락을 뜨다가 입맛이 없다고 다시 올라가 버렸다. 유채는 눈짓으로 알렉스에게 물었다.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요. 유채 양과 관련된 건 아니에요. 우리 포트리스의 일이지.”
알렉스도 더 이상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아서 유채는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유채는 오랜만에 간단하게 씻은 다음 침대에 누웠다. 만감이 교차했다. 드디어 내일이면 고양이 일족의 땅으로 들어간다. 부디 그곳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이 왜 여기에 왔으며, 돌아갈 길은 있는지,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기를 원했다. 유채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언니, 조금만 기다려.”
유채는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꼭 돌아갈게.”
* * *
“루프스님, 어깨의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아리아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물었다. 루프스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어깨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루프스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저었다.
아리아는 전시 상황을 되짚었다. 카르멘은 본대가 토끼와 쥐들의 인해전술로 막히자 평소 좋게 지냈던 군소 일족들을 꾀여내서 루프스를 상대로 유격전을 펼쳤다. 물론 루프스가 그런 약소 일족들의 치고 빠지는 공격에 쉽게 무너질 이는 아니었다. 루프스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이동하는 때는 제외하고는 전투 시에는 모두 위르형으로 그들을 도륙하였다. 아리아는 그에게 경외심을 품었다. 왜 어머니인 루크레치아가 루프스의 강함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것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펠릭스 다우스가 내어놓은 상처 때문인지 루프스는 예전과 다르게 온전한 힘을 낼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진짜 더럽게 안 낫는군.”
루프스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지휘관으로 따라온 수인들이 막사에 하나둘씩 자리 잡았다. 막사 중앙에 놓인 탁자에는 지도가 한 장 펼쳐져 있었으며, 그 지도에는 각 세력의 상황이 적혀 있었다.
“루크레치아님의 말에 따르면 생각보다 고전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 수인들이 조금 이상하다고 합니다.”
아리아가 어머니의 전언을 말했다. 전언의 내용은 이랬다.
<소 수인들이 미친 것 같다. 그들은 상처를 입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소 수인들이 다리가 잘려도 미친 것처럼 돌진해 와서 오히려 아군들의 사기가 꺾이는 지경이라고 하였다. 루크레치아는 소 수인이 무슨 약을 복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다.
“다행히 카르멘 쪽은 지금 인해전술에 막혀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버틸 것 같습니다.”
늑대 수인 일족의 서열 다섯 번째인 카신이 입을 열었다. 원래 그는 토스 호무스의 방어를 하는 수인이었으나 워낙 소수로 부대를 꾸리다보니 여기에 합류하게 되었다. 루프스는 이를 갈면서 물었다.
“울페스 헤르티아나 에쿠우스 단테는 참전한다고 했는가?”
“울페스는 본인들의 땅으로 들어올지도 모르는 소 수인 일족들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고, 에쿠우스 역시 제 일족들의 동물화 문제가 시급해 어렵다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히르쿠스는 현재 양 수인들과의 맹약으로 인해서 힘들지만, 최대한 지원을 하겠다는 입장입니다. 히르쿠스 자체가 움직이는 것을 꺼려하는 입장이라, 이정도면 꽤나 괜찮은 것으로 보입니다.”
“카니스님도 지금 원병을 독수리 일족의 땅으로 보냈고 후발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헤르티아랑 단테 놈은 언제나 이런 일이 있으면 발을 빼는 놈들이니 기대도 안 했다.”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헤르티아 입장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누가 이기든 그녀에게는 해가 될 것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열렬한 추종자인 단테 역시 헤르티아를 따를 것이 자명하였다.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앞으로 펼칠 작전에 대한 논의가 끝을 향해갈 쯤, 갑자기 늑대 수인 병사 하나가 종이쪽지를 들고 들어왔다.
“루프스님! 까마귀 수인을 통해서 쪽지가 왔습니다.”
“고해라.”
“며칠 전 고양이 일족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에 카니스 빅터님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카신이 역정을 내자 루프스가 손을 들어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턱짓으로 계속 말하라는 신호를 주었다. 늑대 수인 병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카니스 빅터님이 세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오셨다고 합니다. 로브의 후드를 푹 눌러쓴 수인들이었는데 고양이 일족의 땅을 연구하러 왔다고 했답니다. 암컷 한 명과 수컷 둘로, 수컷 둘은 형제이고 암컷은 그 형제 중 한 명의 부인이라고 했답니다.”
“부인?”
“예. 떠도는 말로는 언뜻 보이는 얼굴만으로도 상당한 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몸이 약해서 목도리로 목을 둘둘…….”
“그만 이야기하고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것은 잘…… 아마도 펠레스 호무스로 가지 않았을까요?”
루프스는 턱을 쓸더니 카신에게 명령을 내렸다.
“먼저 토끼 놈들하고 쥐 놈들에게 합류해라. 나는 잠시 펠레스 호무스에 다녀오겠다.”
“에? 갑자기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설마 너희들이 너무 한심해서 그 양 놈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면, 그 어떤 반론도 받지 않겠다. 카신, 너는 적당한 실력자 다섯 명만 추려내서 명단을 내게 올려라.”
카신은 루프스의 돌발행동에 당황했다. 카신은 루프스를 설득하려 했고 아리아도 그에게 동조했지만 루프스의 의견은 확고했다. 결국 양측 모두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수장을 혼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으니 펠레스 호무스 근처의 마을에 잠시 주둔하고 있기로 합의했다. 그동안 루프스는 펠레스 호무스에 다녀오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루프스는 막사에 들어와서 욱신거리는 어깨의 붕대를 갈고 간이침대에 누웠다. 버릇처럼 루프스는 품에서 나비 모양 머리 장식을 찾았다.
그 셋은 분명 유채와 찢어죽일 그 형제였다. 후드를 뒤집어쓴 이유는 뻔했다. 수인인 척을 해야 하는데, 귀가 없으면 위장하기가 힘들었겠지. 유채가 목도리를 두른 이유는 파렌티아를 감추기 위해서일 것이고. 너무나도 빤히 보이는 변장이었다. 카니스 빅터가 옆에 있으니 대놓고 의심할 놈은 없었을 것이다.
무슨 수로 빅터라는 거물을 움직였는지 알 수 없었다. 루프스는 빅터를 생각하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어머니의 소꿉친구이자, 아버지의 친우로 만났던 그였지만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저를 내친 이였다. 솔직히 말해 이제는 별로 좋은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부부라……. 빌어먹을. 썩을 것들.”
프레드릭 놈은 고지식해 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유채를 제 부인이라 둘러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알렉스 놈이다. 알렉스의 품에 안겨 있던 유채가 떠오르면서 가슴 속 깊숙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가 안을 때는 항상 뻣뻣하기만 하고 매번 불안해 죽을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으면서 그 수컷 놈에게는 아무런 반항 없이 안겨 있던 유채에게 화가 났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채를 한 팔에 안고 가던 알렉스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것. 감히 제가 뭐라고 유채를 제 부인이라 칭한다 말인가?
루프스는 미친놈처럼 날뛰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다 머리 장식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손에 힘을 풀었다. 루프스는 머리 장식이 제 힘에 망가진 구석이 있나 찬찬히 살폈다. 문득 그는 제가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그것을 아무렇게나 옆에 내려놨다. 하지만 이내 다시 눈앞에 보이도록 가슴 위에 올렸다.
“너를 어떻게 할까?”
루프스는 답이 안 나오는 질문만 계속 스스로에게 던졌다. 예전부터 스스로가 미쳤다는 생각을 했지만, 요즘 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변했다. 모든 일에 집중도 되지 않았다.
“젠장.”
그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헥터에게 밟혀서 기괴하게 뒤틀려 있던 유채의 발목과 피딱지가 내려앉을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괴로워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는 한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요즘 그의 심장은 그의 어깨보다 더 심하게 고장난 것 같았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떠오르는 유채의 얼굴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유채의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루프스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멍하니 머리 장식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나는 너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그는 중얼거렸다. 열심히 궁리를 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말뚝에 묶어놓고 채찍으로 때리는 것도 아니었고 팔목과 발목을 꺾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죽어도 인정하기 싫던 한 가지 사실을 드디어 인정했다.
유채가 보고 싶었다. 떠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젠장. 네까짓 것이 뭐라고!”
루프스는 머리 장식을 바닥에 내던질까 하다가 결국 던지지 못했다. 루프스는 굳은살과 자잘한 상흔이 가득한 손으로 머리 장식을 유채라도 되는 양, 가만히 쓸었다. 그녀를 만나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왜 그녀를 이렇게 애타게 쫓는 것일까?
유채를 만나면 그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 싶었다. 그가 입술만 맞추면 얼음처럼 굳어버리는 유채의 부드럽고 달콤한 입안을 탐하고 싶었다. 루프스는 제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는 손을 뻗어서 살아 있는 듯이 생생해 보이는 나비 장식을 눈앞에서 빙 돌렸다.
“나는 도대체 네게 뭘 하고 싶은 걸까? 유채.”
허공에 흩어지는 바람 같은 질문을 뱉었다. 당연히 답이 돌아오지 않을 말이었다. 대답을 해줄 이는 그의 곁에 없었다. 또한 루프스 답을 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다.
루프스는 다시 품 안에 머리 장식을 넣고 옆으로 누웠다. 눈을 감으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웃던 유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문질렀다.
도대체 너는 무엇이기에 나를 이렇게 얼간이 같이 만드는 것이냐.
계속되는 물음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루프스는 결국 결론을 지었다.
그저 유채를 만나보면 그때 알 것 같았다.
* * *
“나와는 여기서 헤어지지.”
빅터는 생각보다 유채의 일행과 오랫동안 동행해 주었다. 원래는 펠레스 호무스의 초입에서 헤어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채가 오랜 여행길에 힘들어한 기색을 본 빅터는 펠레스 호무스에 들어와도 근 이틀 정도 그들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 덕택에 그들은 수인하나 없는 휑한 펠레스 호무스를 보다 빠르게 들어올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유채가 고개 숙여서 인사했다.
“아니다. 심심하던 와중에 말벗도 생기고 나쁘지 않았다.”
빅터는 목에 걸고 있던 이상한 문양의 목걸이를 유채에게 건네었다. 유채는 그것을 받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어머니의 물건이다. 고양이 일족을 만났을 때 주면 무엇이든 해준다고 하더군.”
“이게 뭔데 그런 가치를 갖습니까?”
알렉스가 유채가 들고 있는 목걸이의 문양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그의 눈에도 이 문양은 꽤나 독특한 것이었다. 빅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잘 모른다. 그저 어머니의 유품으로 받은 것이다.”
“알겠어요. 그동안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유채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프레드릭을 제외하고 알렉스와 유채는 빅터와 인사를 나눈 뒤에 헤어졌다. 빅터는 말 수인의 땅으로 가서 다시 개 수인의 땅으로 돌아갈 거라고 유채에게 귀띔해 주었다.
빅터와 헤어진 후 자못 심각한 표정의 프레드릭 덕택에 셋은 어색한 분위기로 걷고 있었다. 유채는 이 어색함을 깨보고자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알렉스 씨, 시간핵이 뭔가요?”
딱히 생각나는 주제가 그것뿐이라 유채는 늦어도 한참 늦은 지금에야 알렉스에게 물었다. 알렉스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짓다가 프레드릭을 힐끔 바라보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시간 마법의 일종입니다. 전에 말했다시피 우리 형은 이중 에어리얼 소지자인데 그중 하나가 시간을 담당하는 바다입니다. 물론 물마법도 담당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대지나 하늘보다는 범용성이 떨어지는 편이기에 보통 시간을 담당하는 것으로 유명한 편이지요.”
“근데, 그거랑 에어리얼 바다와 무슨 상관인가요?”
“시간 마법은 시간을 정지하거나, 느리게 혹은 빠르게 흐르게 하든지, 아니면 되감는 형태로 이용됩니다. 물론 이 세계 자체의 시간을 그렇게 하는 일은 세계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마법을 쓰는 즉시 사망합니다.”
대지나 하늘에 비해 바다는 특별한 고유 속성의 사용이 쉬운 편에 속했다. 하나 시간 자체가 신의 힘에 근접한 힘이라 몸에 부담이 가는 마법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에어리얼의 특수 속성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된 편에 속했다. 망가진 물건의 시간을 돌려 망가지기 전으로 되돌린다든가 상처를 입기 전의 시간으로 돌려 치유 마법을 한 것처럼 효과를 내는 식이었다. 프레드릭은 시간 마법을 동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핵이었다.
“단검에 형이 시간 마법을 아주 작은 씨앗 형태로 뭉쳐서 담아요. 그걸 우린 시간핵이라고 불러요. 전투 도중에 상대의 몸에 단검을 찌르면 시간핵이 그 상처로 들어가 마법이 발동하죠. 유채 양이 경험한 것처럼 공격당한 자의 몸의 시간이 멈추는 거예요.”
유채는 루프스가 자신을 잡으려고 하다가 얼어붙은 것처럼 멈췄던 모습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시간핵은 세 가지의 역할을 합니다. 치유와 재생 속도의 감소, 움직임의 둔화, 과거 상처의 부활.”
수인은 인간보다 힘도 강하고 민첩하며, 재생력과 치유력이 빨랐다. 특히나 늑대 수인과 여우 수인은 싸우는 도중 자잘한 상처 정도는 그대로 나아버리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간은 상처로 계속 지쳐 가는 데 반해 수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는데 이 마법으로 수인의 재생과 회복력이 느려지고 몸놀림이 둔해진 수인과의 싸움에서 인간은 제대로 맞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과거 상처들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수인들의 전투력 약화에 기여하였다.
“마법 저항력이 약하면 세 가지를 모두 겪게 되고, 마법 저항력이 수인 평균 수준이면 과거 상처 부활을 제외한 두 가지를 겪고, 마법 저항력이 상당한 수준이면, 치유력과 재생력의 둔화를 겪게 됩니다.”
“그럼 루프스는…….”
“아마 상처가 낫질 않아 고생하고 있을 겁니다.”
“근데 그게 얼마나 지속되나요?”
“저도 잘 몰라요. 형이 시간핵에 얼마나 마력을 많이 담아놓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되거든요. 저는 마법에는 워낙 젬병이라 잘 모르겠어요, 유채 양.”
알렉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알렉스는 무효화 에어리얼의 소유자가 아님에도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형의 스승이 말하기를 알렉스는 인간치고는 심하게 마력 저항력이 강해서 마법을 쓰기 힘들 것이라고 하였다. 프레드릭 역시 인간치고는 마력 저항력이 심한 편이었으나 그에 비례하여 마력이 많았다. 그게 알렉스와 달리 프레드릭이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시간 마법이란 거 신기하네요. 그것 말고 다른 것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유채 양도 봤어요. 형이 유채 양의 물건을 고쳐 줬다고 하던데요?”
“예?”
“형이 유채 양의 물건은 난생 처음 보는 거라 시간을 돌려서 고쳐놓았다고 하더라고요. 고장 나기 직전.”
“아. 그래서…….”
되짚어 생각해 보니, 휴대폰의 날짜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배터리까지 사고를 당한 날 아침으로 표시되어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상하다 생각하고선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는 바람에 그대로 뒤로 넘겼던 문제였다.
알렉스는 유채의 멍한 표정이 귀여워 보였다. 보면 볼수록 참 표정도 풍부하고 생기발랄한 아가씨였다.
“으악!”
앞서가던 프레드릭이 비명을 질렀다. 알렉스와 유채는 놀라서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프레드릭은 주저앉아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저…… 저…….”
“꺄악!”
유채는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반쯤 부패한 다람쥐 수인의 처참한 시신이었다. 누가 뜯어먹기라도 한 것인지 배 쪽이 엉망이고 썩은 내장이 줄줄 흘러나와서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알렉스는 셋 중 가장 침착하게 시체를 살폈다.
“죽은 지는 조금 됐는데, 뜯어 먹힌 지는 얼마 안 되었어.”
알렉스는 조심스럽게 시체를 살피다가 검이 배를 가른 것 같은 상처 자국을 발견했다. 알렉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멸족한 일족의 땅이라 군데군데 빈집들만 보일 뿐 황량했다. 알렉스는 유채를 돌아보았다.
“유채 양,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줄래요. 나랑 형이라 지금 가봐야 할 곳이 있어요.”
“위험한 일인가요?”
“아니요. 위험하지는 않지만, 우리 포트리스에 중요한 일이에요.”
알렉스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어 설명했다.
“최근 포트리스에 소문이 하나 돌고 있어요.”
알렉스는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때를 생각하면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오죽했으면 그런 소문까지 도는 건가 싶었다.
“포트리스에 도는 전염병에 수인들의 간이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었어요. 지금 이 수인을 죽인 건, 우리 포트리스의 인간일지도 몰라요.”
알렉스가 유채의 어깨를 짚었다.
“여기는 이제 수인이 살지 않는 곳이에요. 일족의 태반이 수인의 동물화로 죽어버린 곳이죠. 모두가 저주받은 땅이라고 피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수인들이 유채 양을 공격할 위험은 없을 거예요.”
알렉스는 유채에게 단검 하나를 손에 쥐어주었다. 유채는 그것을 알렉스처럼 허리춤에 매어놓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줘요. 금방 돌아올게요. 오래 안 걸려요.”
“알겠어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알렉스는 복잡한 생각에 정신이 없어 보이는 프레드릭을 추스르고 시신을 대충 수습하여서 치웠다. 유채는 핏자국이 검게 굳어 있는 곳에 앉았다. 누군가가 죽은 곳이라는 게 소름끼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 온 뒤로 이런 끔찍한 시체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무서워서 공포영화도 제대로 본 적 없는데 여기에선 잊을 만하면 시체를 보게 되었다.
유채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요.”
유채는 조용히 읊조렸다. 수인에게 그렇게 당해놓고도 유채는 수인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블루벨이나 바실리사, 에릭, 오르페 같은 이들이 있고, 특정한 수인에게 당한 일을 수인 전체가 그런 것이라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루프스에게 지독하게 당했다고 다른 늑대 수인들을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했다.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지만.’
유채는 되도록 떠날 곳이라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 무시한 감이 있었지만, 이곳의 수인과 인간 사이의 증오는 상당한 정도였다. 인간에게 부인을 잃고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수인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인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특정할 수 없는 증오를 보다 큰 집단으로 돌리는 것은 어디에서나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증오를 서로를 향해서 계속 쏘아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유채도 겪었던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 왕따 피해자였던 유채는 중학교에 가서는 그저 방관자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왕따 피해자는 유채를 괴롭힘으로써 초등학교 시절을 힘들게 했던 아이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때 유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왕따를 당하는 것을 방관하였다.
그러다 문득 유채는 깨달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괴롭혔다 해서 자신이 그들을 괴롭힐 권리는 없다는 것을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던 그 아이의 공책을 본 후였다. 유채가 유별나게 착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품은 증오는 결국 자신만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최선의 복수는 그냥 잘 사는 거라고. 그래서 유채는 그때부터 증오를 놓았다. 그들을 용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해코지 당하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그 아이가 지금 유채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유채는 그저 그렇게 살았다.
“에이! 이런 생각만 아니었어도 마음이 백배는 편할 텐데.”
유채는 시간핵에 대해 괜히 물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정당방위였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알렉스 씨는 왜 이렇게…….’
“살려주세요!”
어디선가 어린 남자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잠시 고민하던 유채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렸다.
* * *
“헉. 헉.”
유채는 나무에 한 손을 짚고 숨을 골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비명소리를 쫓아 숲까지 들어온 유채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읍읍읍.”
무슨 소리가 나자 유채는 나무에 몸을 숨기고서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왜소한 체격을 가진 상처투성이의 다람쥐 수인 남자 아이를 향해 식칼을 뻗고 있었다. 유채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요!”
“컥!”
유채가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쳐내었다. 남자의 몸과 함께 유채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불시에 공격당한 남자는 체격은 왜소해도 남자는 남자인 것인지, 금세 정신을 차리곤 유채를 한 손으로 밀쳐 내었다.
“비켜!”
남자는 엉금엉금 기어서 칼을 다시 집어 들려고 하였다. 유채는 남자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남자는 유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유채는 죽을힘을 다해서 남자를 잡고 늘어졌다.
남자가 다른 발로 유채의 배를 걷어찼다. 유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다행히도 유채가 칼이 떨어져 있는 방향이었다. 유채는 배의 통증을 참아내면서 발로 칼을 멀리 찼다. 칼이 비탈을 타고 쭉 내려갔다.
“아아악!”
남자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짐승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유채가 배를 움켜잡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남자는 그녀를 바닥으로 다시 누르고 목에 손을 가져갔다.
“악!”
“넌 뭐야! 뭔데 나를 방해해!”
남자는 분노에 차서 울부짖었다. 유채는 컥컥거렸다.
“지금. 저. 아이를……!”
“수인이야! 수인! 인간이 아니라고!”
“그래도 죽이면 안 되는 것이죠! 어떻게……!”
“안 그러면 내 딸이 죽어! 내 딸이 죽는다고!”
유채는 그제야 그 남자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심하게 마르고 맹수들에게 공격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한쪽 얼굴은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남자가 울면서 소리 질렀다.
“난 내 딸마저는 못 잃어! 안 잃을 거야!”
남자의 손이 유채의 목을 강하게 졸랐다. 숨이 막힌 유채는 방어본능으로 그의 배를 걷어찼다. 남자의 몸이 뒤로 물러났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피를 토했다. 여자의 공격으로도 쉽게 충격을 받을 정도로 그는 약해진 상태였다.
유채는 얼른 일어나서 허리에 매어둔 단도를 꺼내 나무에 묶인 다람쥐 수인 아이를 풀어주었다.
“안 돼!”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수인 남자아이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남자가 그 아이를 쫓으려고 하자 유채는 그을 뒤에서 덮쳤다.
“아직 어린아이예요! 죽여서 무엇을 어떻게 하시려고!”
“내 아내는, 내 아들은 수인 놈들 때문에 죽었어!”
남자가 유채를 떨어뜨리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외쳤다. 그는 수인 내전 때 사슴 수인들의 손에서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남은 것은 갓난아이인 딸뿐이었다. 그는 엄마 없고 오빠 없는 딸을 애지중지 기르면서 어떻게든 살아왔다. 하지만 이내 포트리스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았다. 그리고 그 병은 제 딸마저 집어삼켰다.
처음에는 그도 프레드릭의 말만 믿고 기다렸다. 그는 수인들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알렉스가 약초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는 딸을 끌어안고 울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약초는 쓸모없는 것이었고 딸은 다시 사경을 헤맸다. 그러던 중 헤임달이 그에게 소문을 하나 물어다 주었다. 수인의 간이 전염병에 특효약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는 헤임달이 알려준 길로 온갖 고초를 겪어가면서 이곳으로 왔다.
“그놈들이 내 가족들을 죽였는데! 나는 그놈들을 죽이지도 못해! 난 정당해! 정당한 복수야! 내 딸이 죽어가! 내 딸이 죽어간다고! 얼어 죽을 화합!”
그는 유채의 몸을 떨쳐 내었다. 유채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렸다. 그의 팔목을 바닥에 잡아 내리며 외쳤다.
“그래서요! 저 수인 소년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세상은 정말로 잔혹했다. 피해자에게 너그러운 세상은 없다. 유채도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괴로운 것은 피해자들이고,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피해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피해자라고 하여도 이건 아니었다.
“저 수인 소년이 당신의 아내를 죽였어요? 아니면 당신의 아들을 죽였나요?”
유채는 숨을 골랐다.
“당신이 수인들에게 가족을 잃었다고 해서 저 아이를 죽일 권리를 갖진 않아요! 이건 복수가 아니에요! 그저 자기 합리화일 뿐이지!”
“네가 뭔데! 네가 내 심정을 알아? 내 아들이, 내 아내가 죽었을 때, 그때의 심정을 알아?”
“몰라요! 하지만 나도 수인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어요! 나도 나한테 그런 짓을 한 늑대 수인과 소 수인이 죽을 만큼 싫어요! 하지만, 내가 그 둘이 싫다고 해서 그 둘과 같은 일족의 수인을 죽여도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제 증오를 관련 없는 다른 사람에게 풀어내는 것은 그 어떤 때라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유채와 남자는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의 힘을 이기가 쉬운 것이 아닌지라 곧 유채와 남자의 위치가 뒤집어졌다. 남자는 유채가 방해된다고 생각된 것인지 목을 졸라서 죽이려고 하였다.
“유채 양!”
프레드릭과 알렉스가 달려왔다. 남자는 일이 꼬였다고 생각했는지 유채가 놓친 단검을 주워 들고 그녀의 목을 노렸다. 유채는 눈을 감았다.
“멈추세요,”
어디선가 묘령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유채의 위로 남자의 무거운 무게가 그대로 눌려왔다. 유채는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헥터가 생각났다. 숨을 쉬어보려고 노력해도 누군가 제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귓가로 헥터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온몸에 개미가 들러붙어 있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감각이 밀려왔다. 피부에서 헥터의 손이 닿았던 감각이 올올이 살아났다. 유채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유채 양, 괜찮아요?”
알렉스가 남자의 몸을 치우고 유채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떠는 유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눈에는 눈물이 핑 고였다. 알렉스는 유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펜리 씨?”
프레드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채를 달래던 알렉스가 프레드릭의 말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도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포트리스의 어부인 펜리였다. 레이라와 같은 배를 타고 스티폴로르로 넘어온 사람이었기에 형제 모두 펜리와 친분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 펜리 씨가 여기 있어? 포트리스의 성벽 출입 허가 내드린 적 없는데?”
포트리스의 성벽 총 책임자인 알렉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성벽은 개미 새끼 한 마리 드나들 수 없도록 감시했고 포트리스의 안전을 위해 주민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했다. 그리고 성벽을 어찌어찌 넘었다 해도 여기까지 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리로 봐서 네가 출발하게 전에 허가를 냈어야 해. 알렉스, 너 펜리 씨에게 허가 준 적 한 번도 없어?”
“없어, 형. 알잖아. 나 이런 쪽 허가는 잘 내주질 않아.”
두 형제는 펜리에 대해 의문을 표하며 실랑이를 벌였다. 유채는 헥터의 일이 생각나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계속 헥터의 잔상이 떠올랐다. 유채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제때 마중 나가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유채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유채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백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인간인가 싶었지만 마치 루프스처럼 위화감이 도는 외모였다. 유채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알아챘다. 고양이의 눈을 한 고양이 수인이었다.
묘령의 고양이 수인은 유채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셀레네님의 입인 오라클라 리네아. 신의 사자(使者)께 인사를 올립니다.”
리네아는 유채의 손을 잡아 올려서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유채와 눈을 맞췄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채님.”
유채가 찾던 오라클라 리네아였다.
* * *
“펜리 씨, 도대체 왜 이러신 겁니까!”
프레드릭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펜리를 다그쳤다. 펜리는 초췌해진 얼굴로 울먹였다.
“프레드릭 씨, 제 딸이 죽어가요. 제 딸이.”
펜리는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애원했다. 헤임달이 죽었다고 한 프레드릭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저는 포트리스의 법에 따라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 가엾은 제 딸은 어떡하나 싶었다. 그와 동시에 울분이 차올랐다.
“저는 더 이상 화합이고 뭐고 못 믿겠습니다. 레프스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차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더니 시간이 지나니 다시 병이 심해졌습니다. 제 딸도 다시 사경을 헤맵니다.”
펜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그러다 눈을 번뜩이며 프레드릭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프레드릭의 몸이 나무에 부딪쳤다.
“그 빌어먹을 뜬구름 잡는 소리 때문에 포트리스의 모두가 죽어가게 생겼습니다! 렉스님 말이 옳아요. 그리고 헤임달의 말을 시험…….”
“잠깐, 헤임달이요?”
프레드릭이 놀라서 되물었다. 프레드릭은 왜 그에게 잡혔는지 모를 만큼 강한 힘으로 펜리의 손을 풀어내고 그를 다그쳤다. 펜리는 프레드릭의 기세에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헤, 헤임달이 그, 그랬습니다. 수인의 간을 아이들에게 먹, 먹이고 애들을 낫게 한 부모들이 있, 있다고.”
“헤임달!”
프레드릭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 프레드릭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의 근원에 헤임달이 있었다. 헤임달이 레프스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프레드릭은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별 효능도 없는 약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여 병을 낫게 할 때를 놓쳐 버렸다. 또 수인과 인간과의 관계는 레프스 건으로 악화되었다. 누가 봐도 이건 루프스가 알면서 일부러 포트리스를 전멸시키기 위해 정보를 감추고 약초를 내어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펜리 하나만으로 포트리스가 수인들에게 악감정을 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헤임달이 확인되지도 않은 괴소문을 물어온 탓에 포트리스의 사람들이 스스로 사지에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펜리는 천운으로 펠레스 호무스에 왔지만, 수없이 많은 포트리스의 사람들은 오는 길에 죽어나갔을 것이다. 또 이로 인해 다시 포트리스의 반수인 정서가 강화될 것이다.
헤임달은 넉살좋고 쾌활하고 정이 많은 사람으로 포트리스에서 유명했다. 식량이 부족해서 배를 곯는 포트리스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잡아와서 무상으로 나누어주었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거두어 들였다. 언제나 본인만 알고 있으면 큰 이익이 될지도 모르는 정보를 나누어 주었다. 위험한 부탁을 무조건 흔쾌히 들어주는 것은 아니었으나 언제나 성실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었다. 그랬기에 포트리스 사람들은 그를 믿었다. 착한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포트리스의 사람들에게 위해를 끼칠 리가 없으니까. 착한 사람은 그냥 아무런 목적 없이 선행을 베풀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도대체 헤임달은 왜 그렇게 착하게 구는 것일까? 그가 지나칠 정도로 착해서? 그리고 그 수많은 정보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헤임달이 뭐라고 했습니까? 증거가 있답니까?”
프레드릭의 다그침에 펜리는 겁에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그, 헤임달이 예전에 대륙에 있을 때 의, 의사 노릇을 조금 했답니다.”
“의사요?”
프레드릭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면 헤임달이 스티폴로르에 온 이유를 명확하게 들은 적이 없었다. 그가 대륙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도 말이다. 그는 하나뿐인 동생 헬라와 이곳으로 왔고 아내와 아이들은 전쟁에 휘말려서 사망하였다고 했었다. 대륙에서 여기까지 무사히 건너올 정도로 바다를 잘 알고 물고기를 잘 잡는 그를 모두가 뱃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헤임달이 돌, 돌보는 고아 아이들 중에도 한 아이가 굉장히 아팠습니다. 제가 봐서 압니다. 근데 헤임달이 우연히 해안가에 떠밀려온 죽은 수인의 시신을 발견했고, 예전부터 동물의 간은 명약으로 사용하곤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간을 달여서 먹여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나았다고 제게 귀띔해 주었습니다. 저도 죽네 사네 하던 그 아이가 멀쩡하게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고요.”
“혹시, 펜리 씨 말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헤임달이 제 사정이 딱하다고 제게만 귀띔해 준 이야기입니다.”
【‘형, 최근에 수인들 사이에 이런 소문이 떠돌고 있대.’】
프레드릭은 오후에 알렉스가 한 말을 떠올렸다.
【‘동물화가 진행되고 있는 수인에게 인간의 간을 먹이면 그 증세가 완화된다더래. 최근 포트리스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어. 포트리스 사람들은 수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수인들이 자신들을 잡고 있다고 덜덜 떨고 있고.’】
만약, 헤임달이 절박한 부모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수인들의 땅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들을 그곳으로 보냈다면? 무단으로 포트리스를 벗어나는 것은 불법이다. 아픈 아이를 둔 부모들은 제 자식만 살리기 위해 헤임달의 정보를 저만 알고 혼자서 포트리스의 성벽을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이곳에서 살아남기란 힘들다. 마물을 만났거나 인간에게 적대적인 수인과 부딪치기라도 했다면 당연히 목숨을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포트리스에서는 사람들이 없어졌으니 실종으로 치부할 것이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실종되는 와중에 수인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돈다는 사실이 퍼지면?
당연하게도 그들은 실종된 사람들을 수인들이 데려갔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프레드릭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펜리 씨, 제가 이번 일은 뒤를 봐드리겠습니다.”
그에게는 아군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스파이가.
“그 대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포트리스를 위해서 헤임달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 * *
“저, 이걸 바르세요.”
아일라는 벌겋게 손자국이 남은 유채의 목에 바를 연고를 가져왔다. 유채는 고맙다 인사를 하고 연고를 목에 발랐다. 유채는 작은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가운데 장작불이 타고 있고, 주변에는 단출한 옷가지들과 소박한 세간들이 있었다. 오라클라 리네아는 유채에게 약차를 건넸다.
“피로와 내상 회복에 좋은 차입니다.”
“감사합니다, 리네아님.”
“리네아라고 편히 부르세요.”
리네아는 유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프레드릭은 유채를 덮쳤던 남자를 조사하기 위해서 동굴의 밖에 있었고 알렉스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리네아는 정말로 고대의 신녀인 것인지, 손짓으로 공간을 찢어서 통로를 만든 뒤 그들을 단번에 이곳으로 이동시켰다. 오라클라 리네아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유채를 바라보았다.
“저…….”
“압니다, 저를 왜 찾아오셨는지. 셀레네님께서 말씀해 주셨고, 저는 그분의 말씀을 전해 드리기 위해서 유채님을 모셔왔습니다.”
리네아는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 외모가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리네아가 유채에게 물었다. 동물의 귀나 꼬리가 없는 수인은 루프스 말고 처음이라 신기했다.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이 수인들의 원래 모습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위르형이 얼마나 인간과 가까운가는 수인의 강함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닙니까?”
알렉스가 놀라서 물었다. 리네아는 고개를 저었다.
“강함이 아니라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주는 요인입니다. 동물에 가까운 위르형일수록 그 수인은 병이 든 겁니다. 셀레네님의 말에 따르면 유전병이라고 하더군요.”
“유전병이요?”
유채가 반문했다.
“수인들의 동물형은 그들의 일족을 결정하거나 종을 결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싸우기 위해 뒤집어쓰는 외피에 불과합니다. 종이 다르다 하여 교잡종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 중 누구의 외피를 물려받느냐에 따라서 동물형이 결정되는 것이지요. 늑대 부모와 여우 부모의 외피 중 여우의 외피를 물려받을 수도 있고 늑대의 외피를 물려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뭐라고요? 그런데, 그걸 수인들은 왜 모르고 있는 겁니까?”
알렉스가 놀라서 물었다.
“셀레네님은 예전에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하셨습니다. 신은 인간의 세상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깨고 차원에 관여를 하셨지요. 물론 세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셀레네님은 아주 교묘한 수를 하나 쓰셨습니다.”
리네아가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 사건에 대해 온전하게 아는 것은 자신과 에르비오네 린, 에비올가 테루뿐일 것이다. 셀레네님은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하게 들을 수 있는 신녀를 간택하셨다. 에르비오네는 인간 중에서 선택이 되었고 에비올가는 눈의 귀족, 오라클라는 수인이었다. 이들은 셀레네님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에 따라 신탁을 내렸고 셀레네님이 세계를 유지하시는 일을 돕기 위해 모든 운명을 안배했다. 원래 이는 계승되는 직책이었으나 은가연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 때문에 그 당시의 선택받은 에르비오네, 에비올가, 오라클라는 마지막 에르비오네, 에비올가, 오라클라가 되어 영겁의 세월을 살았다.
“그 자체로 세계라 말할 수 있는, 여기 지금 이 차원을 구성하는 근원의 힘, 세계를 유지하는 힘을 담은 구슬을 자신의 신전에 보냈습니다.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구슬, 리와인더(Rewinder)라는 이름을 붙여서 말이지요. 세계를 유지하는 힘을 담은 그 구슬은 너무나 고결하여, 이기심이 섞인 소원이 닿게 되면 망가지고 말지요. 그리고 그 구슬이 망가지면, 이 세계는 멸망합니다.”
유채는 프레드릭이 말해주었던 구전이 생각났다. 리네아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어떤 소원이든 이기심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기에, 신관들은 그것을 꽁꽁 싸서 봉인을 해두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결국 리와인더(Rewinder)는 오염되었고, 리와인더에 깃든 신의 힘은 그대로 세상을 멸망시키는 악기(惡氣)가 되었습니다. 리와인더의 깃든 악기(惡氣)에 의해 세상은 멸망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태양과 달은 빛을 잃었고 대지에는 겨울이 찾아왔다. 푸른 초원이 가득하던 대륙은 눈으로 뒤덮이고 호수의 물은 모두 얼어붙었다. 강력한 마물들이 날뛰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노약자들을 죽였다. 세상은 종말을 향해가고 있었다.
“하나, 한 신녀의 희생으로 멸망의 시기는 늦춰졌고 셀레네님은 본인의 가혹함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한 번에 기회를 더 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신은 이 세계에 개입할 수 없었으므로 그분은 검은 머리의 이국의 여인을 신의 사자(使者)로 보냈습니다.”
리네아의 손이 유채의 볼에 닿았다. 더할 나위 없는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분이 바로 은가연님이셨습니다. 유채님처럼 다른 차원에서 오신 분이셨지만, 유채님과는 다른 세계에서 오신 분이셨습니다.”
리네아는 아련한 기억 속 가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릴 적 보았던 가연의 얼굴을 손끝으로 떠올렸다.
“가연님은 이 세계를 구원하셨고, 리와인더(Rewinder)는 다시 셀레네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리네아는 유채의 볼에서 손을 거두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나, 가연님은 최선을 다하셨지만 한 가지 실수를 하셨습니다. 그만 리와인더의 오염된 조각이 하나 남고 말았던 것이죠.”
리네아는 그때의 이니투스를 기억했다. 회색 머리카락과 청회색의 눈동자를 지닌 그는 인어, 눈의 귀족, 인간, 수인, 용 그 누구도 나서서 그 조각을 맡겠다 하지 않을 때, 기꺼이 희생을 자처했다. 제 일족의 번영과 안전을 보장해 준다면 기꺼이 그가 희생하겠노라 나섰던 그 당당한 뒷모습을 그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니투스님은 그 조각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신의 힘이 담긴 상자와 보자기에 담아서 이 스티폴로르에 가져와 에클레시아에 그것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삼백년이 흘렀습니다.”
리네아는 제 몸을 감싸고 있던 옷을 풀어 내렸다. 알렉스는 깜짝 놀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유채도 당황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리와인더의 조각이 머금고 있던 오염된 기운인 악기(惡氣)는 결국 수인들을 유혹했고 한 수인이 결국 에클레시아에서 그것을 훔쳐 소원을 빌었습니다. 조각은 이 작은 땅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각의 악기(惡氣)를 대신 받아내고 그 시기를 늦추는 일뿐이었습니다. 제 몸에 악기를 가두어서 봉인하는 일 외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곳에 남아서 틈 날 때마다 새로운 악기를 제 몸에 가두어두고 있지만, 제 몸이 가둘 수 있는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비명을 삼켰다. 리네아의 몸은 시체의 그것과 비슷했다. 검게 썩어 들어가고 군데군데 뼈도 다 드러나 보였다. 유채의 손짓에 벌게진 얼굴을 똑바로 한 알렉스도 헉하는 소리를 내었다. 리네아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옷을 다시 여몄다.
“제 몸은 보시다시피 이렇게 썩어가기 시작했고, 저는 이 저주의 진행을 막기 위해서, 즉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은둔했습니다. 저는 제 모든 힘을 이것에 쏟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수인들이 지금의 형태와 된 것과 관련 있는 것입니까?”
“에클레시아 붕괴 이후 수인들 사이에는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편을 가르기 시작했죠. 원래 인간들이라는 것이 보이는 것에 따라 나누는 동물인지라, 외피에 따라서 일족을 나누었습니다. 서로의 화합을 바라던 이들은 모두 죽어갔고, 서로를 향한 감정의 골이 깊어졌으며, 각자의 일족과만 혼인만을 지속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개체군의 크기가 작아 본의 아니게 발생한 근친혼이 계속되면서 발생한 유전병으로 인한 결과가, 바로 지금의 모습이란 것인가요?”
유채는 제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서 물었다. 리네아는 유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그렇다고 답을 해주었다.
“제가 고양이의 외피를 지녔고 저주를 대신 받아내서인지, 악기가 저와 같은 외피를 지닌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에 따라 그들은 모두 고양이로 변이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수인들의 동물화.”
알렉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계속되는 같은 일족끼리의 혼인은 수인들의 병을 심화시켰고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악기에 맞물려 이제는 전체 수인들을 대상으로 동물화가 빠르게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결국 수인들의 일족끼리의 다툼과 그 조각의 악기가 빚어낸 것이 동물화라는 말씀이시군요?”
유채가 물었다. 리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기는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곳에 쌓인 사람들의 증오와 원념으로 조각은 제 악기를 불리고 있습니다. 결국 그것도 소망의 일부이기 때문이죠.”
“설마 우리 포트리스도?”
알렉스는 포트리스의 전염병도 모두 리와인더의 조각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 인간들의 수인을 향한 원념, 수인의 인간을 향한 원념이 조각의 힘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젠 제가 막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리와인더의 조각은 스티폴로르를 파괴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수인들은 동물화로, 인간들은 전염병으로. 그 다음은 이 땅 자체를 파괴합니다. 그것이 원래 리와인더가 목적한 세계 멸망의 순서니까요.”
리네아는 목이 마른 듯이 찻잔을 들어서 입을 축였다.
“본래 수인들을 스스로를 위르(Vir)라고 불렀습니다. 인간들의 언어로 사람이란 뜻이지요. 수인들이 부르는 마레 위르 역시 뜻을 풀이하자면, 바다 밖에서 건너온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종임에도 서로를 증오하는 수인과 인간들의 원념이 모두의 불행을 초래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그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와 관련이 있나요? 그리고 난 신과 만난 적도 없어요!”
“제가 셀레네님께 들은 전언은 과거를 이야기하고 유채님을 자신에게로 인도해 달라는 말씀뿐입니다.”
리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셀레네님께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리네아는 그저 신의 말을 듣고 전하는 신녀였다. 리네아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였다.
“오늘은 일단 편히 쉬시지요.”
아아. 어린 소녀를 휘감은 가혹하고 가혹한 운명이여.
리네아는 속으로 깊은 탄식을 뱉었다.
“얘야?”
세실은 공놀이를 하던 중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건장한 체구의 은빛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눈의 형태로 보아서 늑대 수인인 것 같았다. 세실은 그 남자의 잘생긴 외모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왜요? 잘생긴 아저씨?”
“그 옷 어디서 났니?”
세실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얼마 전 어머니가 예쁜 옷을 이리저리 잘라내고 바느질을 해서 만들어준 옷이었다. 옷이 얼마나 예쁜지 마을 애들이 모두 세실을 부러워했다.
“엄마가 만들어주셨…….”
“세실!”
유채에게 옷을 만들어주었던 과부가 달려와 세실을 부둥켜안고 몸을 납작 엎드렸다. 루프스를 알아본 과부는 몸을 떨었다.
“루프스님! 이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제가 지어준 옷을 입었을 뿐입니다.”
“그 옷을 준 암컷을 보았나?”
“예, 예…… 카니스 빅터님이 데려오신 개 수인분이셨습니다.”
“정말 귀가 있던가? 혹여 마레 위르로 보이지는 않던가?”
“그건 저도 잘…… 내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그저 예쁘장하단 것만 알았습니다.”
“네 딸이 입은 옷을 입고 있던 마레 위르 암컷을 찾고 있는데, 어디로 갔는지 아는가?”
루프스의 물음에 갑자기 이질적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누나 나쁜 마레 위르 아니에요!”
꾀죄죄한 꼴의 다람쥐 수인 소년이었다. 소년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선 아이들이 소년을 뜯어말렸다. 그러나 겁 없는 소년은 루프스 앞으로 다가갔다. 소년 주위에 몰려 있던 아이들은 걱정스런 마음 반 동경하는 마음 반으로 소년을 보았다. 그들은 소년이 펠레스 호무스에서 겪은 모험을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나가 나 구해줬어요! 절대 나쁜 마레 위르 아니에요! 나쁜 놈에게서 저 구해줬어요! 루프스님.”
루프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소년과 눈을 맞추었다. 소년의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반짝이는 눈으로 영웅 바라보듯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위대한 루프스님이 기껏 다람쥐 수인 소년을 위해서 몸을 굽혀주신 것이었다.
루프스는 성질을 죽이고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그 마레 위르가 아주 대견스러운 일을 해서 보답을 하기 위해서 찾고 있는 것이란다.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아주 대견스러운 일이지, 감히 제 어깨에 검을 박고 제 애원도 무시한 채 도망쳤으니.
“무슨 보답을 주시려고 하는데요?”
소년이 물었다. 루프스는 다정하지만, 오싹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나도 만나봐야 알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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