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늑대왕 루프스-7화 (7/16)

Chapter 7. 시간의 호수, 아이타스 라쿠스[Aetas Lacus]

【‘저…… 저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근데, 하얀 머리의 이상한 마레 위르처럼 생긴 누나가 나타나서 거기 있던 모두가 사라졌어요.’】

“빌어먹을. 오라클라 리네아.”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그는 이니투스의 자손이었다. 관심 없는 것에는 무식한 구석이 있던 아버지이었지만 그는 이니투스의 자손으로서 자신과 에리카에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는 해주었다. 물론 별 관심이 없어 의무라 억지로 알려준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말이다.

아무튼 아버지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라클라 리네아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성력(聖力)을 이용해서 다 죽어가는 수인을 살렸고, 잘린 팔다리가 다시 자라게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심지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이들을 붙여주었다.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녀로 신출귀몰한 능력마저 지닌 그녀라면 여러 명을 데리고 공간 이동을 하는 것 정도야 쉬울 것이다.

허무맹랑한 전설로 치부했었다. 신께 중요한 임무를 받아 그 임무를 이룰 때까지 불노불사의 몸을 가졌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런데, 신화의 시대에나 나올 법한 신녀가 생존해 있었다. 루프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루프스님.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카신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뿌리는 루프스에게 물었다. 카신은 본인의 이름을 직접 명단에 적어서 루프스에게 제출하였고, 그와의 가벼운 언쟁 끝에 결국 여기까지 쫓아왔다.

“찾아.”

루프스가 주먹을 말아 쥐며 말했다. 한 군데,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루프스는 카신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펠레스 호무스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레티티아를 찾아.”

“하, 하지만 루프스님!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카신이 당황한 얼굴로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싸늘한 미소를 흘리더니, 저 멀리 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카신은 숨을 삼켰다. 저곳은 고양이 수인들이 신이 있는 산이라 여기면서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지켰던 사크로(Sacro) 산이었다.

“저 산을 샅샅이 뒤져.”

오라클라 리네아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가 예상할 수 있는 곳은 사크로산뿐이었다. 시간을 빨아들이는 죽음의 호수이자 시간의 호수, 아이타스 라쿠스(Aetas Lacus)가 있는 곳이었다. 리네아가 신의 말을 들었던 곳으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고양이 수인들의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반드시 찾아서 내 눈 앞으로 데려와.”

루프스는 그 말을 끝으로 은빛의 늑대로 변했다. 청회색의 눈이 번들거렸다. 유채는 결코 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봐라. 뛰어봤자 제 손바닥 안이지 않은가?

* * *

“일어나셨습니까?”

이른 아침에 리네아가 동굴 바닥에서 불편하게 자던 유채와 알렉스, 프레드릭, 유채를 공격했던 남자인 펜리를 깨웠다. 넷 다 각자의 이유로 잠을 설친지라 벌게진 눈으로 일어났다. 리네아와 그녀를 도와주는 아일라는 각자에게 따뜻한 스튜와 약차를 주었다.

리네아가 무릎걸음으로 펜리에게 다갔다. 펜리는 제가 지은 죄를 알아서 그녀를 슬금슬금 피했다. 리네아가 펜리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대는 그대의 잘못을 압니까?”

“……예.”

펜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네아의 손이 펜리의 망가진 얼굴을 덮었다. 밝은 빛이 리네아의 손에서 번쩍였다. 그리고 그 빛이 꺼지자 펜리의 얼굴이 멀쩡하게 돌아왔다. 펜리는 놀란 얼굴로 열심히 제 얼굴을 더듬었다. 리네아는 아일라를 불렀다. 아일라가 작은 병을 건네주자 리네아는 그것을 펜리에게 주었다.

“성력(聖力)이 항상 만능은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의 의지가 악기를 해결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의지가 길을 발견하기 전까지 성력(聖力)은 그 길을 도와야 합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프레드릭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제 힘을 담은 물입니다. 악기를 잠시 밀어내어서 전염병의 진행을 막을 것입니다. 한 방울 정도면 병을 해결할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하, 하지만. 말씀하시기를 그 전염병은 오염된 조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알렉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신의 힘이 개입되어 있는데, 그걸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모든 병은 고치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죠. 리와인더 조각의 악기가 만들어낸 병도 예외는 아닙니다. 단지, 처음 보는 것이며 기존에 나타나던 것들과 양상이 다른 병이기에 고치는 방법을 찾는 데 오래 걸리는 것뿐입니다. 제 몸이 온전하고 이 저주만 아니었더라면 직접 찾아가서 성력으로 낫게 해드릴 수 있으나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신 드리는 것입니다.”

“감…… 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펜리가 동굴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리네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가 흘린 눈물로 바닥이 젖어 들어갔다. 유채는 그 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단지 딸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곳까지 온 아빠였다. 비록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부정만은 결코 폄하할 수 없었다.

리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트리스로 향하는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편히 쉬고 계세요.”

“저, 리네아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유채가 리네아의 옷자락을 잡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리네아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유채에게 말했다.

“우선 포트리스 분들에게 문을 열어드리고 난 뒤에 셀레네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편히 쉬십시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채는 다시 앉아서 스튜를 깨작거렸다. 알렉스는 프레드릭에게 말했다.

“이번 기회에 얼른 포트리스로 돌아가. 레이라가 형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

“알겠어.”

자못 심각한 얼굴의 프레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물병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펜리에게 닿았다.

리네아는 준비를 끝내고 유채 일행을 모두 동굴 밖으로 불러내었다. 리네아가 손을 뻗자 마치 종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찢어졌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포트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펜리는 품에 물병을 꼭 끌어안았다.

“여기를 통과하면 포트리스로 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펜리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심호흡을 크게 하며 어깨를 들썩이고는 유채에게 다가왔다. 펜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했다.

“미, 미안합니다, 아가씨. 내가 잘못했습니다.”

유채는 예상하지 못한 사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말이 맞아. 그 수인은 아무 잘못 없어. 잘못을 한 건 나였지.”

유채는 잘못을 인정하고 어려운 사과를 하는 그를 보았다.

“포트리스로 오면 내가 꼭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정말 고맙고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유채는 손사래를 쳤다. 유채는 그에게 사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부모의 심정을 알기에 그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프레드릭도 유채에게 인사했다.

“유채 양,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내가 더 도와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지금까지 충분한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니 괜찮아요. 집에 가셔서 몸조리 잘하시고 레이라 씨 잘 봐주세요. 많이 힘들어 했을 거예요.”

“난 포트리스로 돌아가서 베니니타스의 아들들을 찾아볼 생각이에요. 그리고 헤임달에 대해 조사할 생각이고요.”

“……헤임달이 누군가요? 옛날 일은 왜 다시 조사하시려는 거예요?”

“간단히 설명하면, 유채 양 덕분에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을 통해서 결론을 내린 겁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하지요.”

프레드릭이 책 속에 나오는 귀족같이 완벽한 예법으로 허리를 숙여서 유채에게 인사했다.

“부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게요, 유채 양.”

프레드릭이 알렉스에게 이제 네 차례라며 눈짓을 하자 그는 오히려 유채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프레드릭에게 말했다.

“난 안 가, 형.”

“알렉스 씨?”

“형 먼저 돌아가. 난 유채 양을 좀 더 도울게.”

알렉스가 유채의 팔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알렉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유채에게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프레드릭과 가벼운 언쟁 뒤에 알렉스는 결국 유채와 함께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다. 프레드릭은 반드시 돌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찢어진 공간 사이로 사라졌다. 리네아는 남은 알렉스와 유채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두 분이 이제 남으신 건가요?”

“뭐. 그런 셈이죠.”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유채가 리네아에게 물었다.

“리네아님, 알렉스 씨도 나중에 다시 포트리스로 보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지금 제 상태로는 힘들겠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리네아가 손을 한번 휘젓자 숲속의 풍경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호수의 수면 위에 떠 있게 되었다. 유채는 깜작 놀라 옆에 선 알렉스에게 매달렸다가 이내 그것이 환상임을 깨닫고는 머쓱해하며 떨어졌다.

유채가 보기에 호수는 마치 칼데라 호처럼 생겼는데, 물이 깊은 것인지 물속이 온통 까맣게 보일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 호수라고 하지 않고 검은 물이 넘실거리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면 유채는 그냥 깊은 구멍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예전에 강원도 수학여행 때, 석회동굴에서 보았던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구멍을 보았던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리네아가 손끝으로 호수의 중앙에 있는 하얀색의, 폐허가 된 신전을 가리켰다.

“저 신전은 제가 신탁을 받기 위해 셀레네님께 제를 올리던 곳입니다. 이런 몸이 된 뒤로는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으로도 벅차서 가지를 못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신전과 그리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들은 정말로 이것이 신이 창조물이라는 것을 믿게 만들 정도로 신비했다.

“이 신전은 우리 고양이 수인들이 신성하게 여긴 사크로 산의 정상 가까이에 있는 시간의 호수 아이타스 라쿠스(Aetas Lacus)에 있습니다.”

“제가 이 신전에 가야 한다는 말이신가요?”

“예. 이 신전에 가셔야 합니다. 마침 제 어머니께서 이모님께 드렸던 목걸이도 가지고 계시니 일이 편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목걸이요?”

유채가 빅터가 준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리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 오라클라셨던 제 어머니가 개 수인과 결혼한 이모님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이타스 라쿠스(Aetas Lacus)로 향하는 길을 알려줄 겁니다.”

“아.”

유채는 뜻밖에 행운에 마음을 들떴다.

“신전에 가시면 셀레네님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곳은 셀레네님이 강림하실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심하셔야 합니다.”

리네아가 손짓하자 호수의 물이 넘실거리더니 알렉스와 유채를 덮쳤다. 호수 속은 아무런 빛도 통하지 않고 그저 검었다. 아무 생명체도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사해처럼 죽은 호수, 아니, 정확히는 물이 굳어 있는 것 같았다.

“이 호수는 시간을 가두는 호수입니다. 이 호수 안에 오래 있으면 시간을 빼앗기고 호수 속에 동화되어서 사라집니다. 이 호수모든 것을 잡아당깁니다. 어지간히 강한 수인이 아니면 물에 빠져서 살아 돌아올 수 없지요.”

그 예시를 보여주려는 것인지 리네아는 작은 상자를 만들어 그것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상자는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한 십 분가량이 지났을까? 상자가 마치 얼음처럼 얼어붙더니, 검게 변해 곧장 물로 흩어졌다. 유채는 오싹한 기분에 팔을 쓸었다.

“그러니, 절대 호수에 빠지시면 안 됩니다. 부디 조심해서 건너가시기를 바랍니다.”

리네아가 손짓을 하자 신기루처럼 눈앞에 모든 것이 흩어지고 다시 원래 있던 숲속이었다. 리네아는 능력을 과도하게 쓴 것인지 숨을 몰아쉬었다. 아일라가 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주었다.

“호수에 가까이 갈수록 제 힘이 약해집니다. 제 힘이 허락하는 한 그 호수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목걸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십시오. 그러면 신전을 찾을 수 있으실 겁니다.”

“목걸이가 방향을 가리킨다고요?”

유채가 의아한 듯이 묻자 리네아가 목걸이의 기하학적 문양을 보는 법을 알려주었다. 화살표와 비슷한 문양이 호수가 있는 쪽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유채는 목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곳에 가서 내가 신을 만나면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게 맞나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셀레네님께서 제게 명하신 것은 유채 양을 인도하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렉스 씨는……”

“이 공간을 사일 동안 열어놓겠습니다. 처음 도착한 곳으로 오셔서 다시 한 번 공간을 건너서 제게 오시면 제가 포트리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리네아는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다시 공간이 찢어졌다. 유채는 침을 삼켰다. 알렉스는 긴장한 듯한 유채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걱정 말아요. 모두 잘 될 거예요.”

유채와 알렉스는 리네아와 아일라에게 인사를 하고 손을 꼭 붙잡고 공간을 넘었다.

“부디, 원하시는 바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리네아와의 마지막이었다.

공간을 넘어 도착한 곳은 깊고 세가 험한 산속이었다. 알렉스가 돌아가기 편하도록 지나는 나무마다 검으로 자국을 남기면서 산을 올랐다. 둘은 숨을 몰아쉬면서 목걸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열심히 걸었다. 산이 험하기도 하고 목걸이가 가리키는 방향이 굉장히 복잡하여 두 사람은 금방 지쳐 버렸다.

산속의 밤은 금방 찾아왔고 유채와 알렉스는 적당한 곳에 잠시 짐을 풀고 하룻밤을 묵었다. 아침이 밝자마자 그들은 다시 산을 탔다. 다행히 험한 곳은 다 지났는지 평탄한 길이 쭉 이어졌다. 저 멀리 리네아가 환상으로 보여주었던 호수가 보였다.

알렉스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유채를 보면서 피식 웃곤 그녀에게 물병을 건네었다.

“마셔요.”

“감사합니다.”

유채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또 다시 그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유채 양.”

알렉스가 유채의 말을 끊었다. 알렉스는 리네아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던 유채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글거리는 불빛에 비친 그녀의 표정이 마치 바늘처럼 그의 마음을 쿡쿡 쑤셔왔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제게 건넨 말을 알렉스는 회상했다.

【‘고마워요. 제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주셔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유채 양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유채는 조심스럽게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방긋 웃더니 유채의 지저분한 단발을 헤집었다. 유채는 오빠가 있다면 알렉스와 같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미안하단 말 좀 그만해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미안하단 말을 들으면 괜히 울적해져요.”

“아. 죄…….”

유채는 얼른 입을 막았다. 알렉스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유채의 머리를 가볍게 콩 때렸다.

“내가 근육머리라고 불리는데, 유채 양도 그런 거 아닌가 싶네요. 얼른 가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알렉스는 유채에게 편한 길을 내어주기 위해서 앞장서서 걸었다. 앞에 낮은 비탈이 나타나자 알렉스는 뒤로 돌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쏴아아아.

알렉스는 몸을 굳혔다. 바람이 바뀌었다. 알렉스가 덜컥 굳은 듯 움직이지 않자 유채는 의아해했다. 그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조심스럽고 빠르게 움직이는 뭔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눈을 감고 온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손은 허리에 맨 검에 가져다 대었다. 알렉스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읽었다. 유채를 무턱대고 도망보내기는 위험했다. 적이 어느 쪽에서 오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유채의 뒤.

알렉스는 눈을 떴다. 그리고 오는 자가 누구인지를 보았다.

“고개 숙여요!”

“예?”

유채는 알렉스가 검을 뽑는 것을 보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알렉스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유채는 제 허리에 또 다른 굳은살이 박인 손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애송이, 비켜라.”

낮고 울림이 있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유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제 앞을 막고 선 알렉스의 어깨 너머로 은빛 머리카락의 루프스가 보였다.

유채는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루프스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라도 늦지 않았다, 레티티아.”

루프스가 유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지금이라도 손을 잡으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는 인자한 모습이었다. 유채는 그 손을 보면서 벌벌 떨었다.

“아니, 어떻게 신사가 돼서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하지? 이 아가씨 이름은 유채지, 레티티아가 아닙니다.”

알렉스의 말은 들은 척 만 척하며 루프스는 유채만을 보았다.

“내게 돌아온다면, 내 앞을 막아선 저 건방진 놈을 죽이지는 않으마. 그러니, 이쪽으로 와.”

“유채 양!”

알렉스가 크게 소리쳤다.

“저놈 말에 속지 말아요. 그리고 난 괜찮아요.”

알렉스가 뒤를 힐끔 돌아보고 속삭였다.

“그러니, 뛰어요. 내 걱정 말고. 민폐 끼치지 말고.”

알렉스가 루프스에게 달려들었다. 루프스는 알렉스의 검을 피하며 유채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알렉스가 검을 기묘하게 움직여 루프스의 진로를 방해했다. 루프스는 알렉스를 보면서 이를 갈았다.

알렉스는 루프스의 체술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가 수인들 중 가장 강하다는 말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검을 피해내고 있었다.

루프스는 이를 갈면서 알렉스 너머에서 벌벌 떠는 유채를 보았다. 놈을 죽이고 얼른 유채를 제 품으로 데려와야 했다. 루프스는 날카로운 손톱을 세웠다. 그의 손톱이 검을 찢을 듯이 내리눌렀다. 알렉스는 온 힘을 다해 루프스의 힘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반동을 이용해서 검을 크게 휘둘러 그와의 거리를 떨어뜨렸다.

알렉스는 뒤를 힐끔 보았다. 유채는 안절부절못하며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유채는 강하고 지혜로웠지만, 정이 많았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뭐해요! 유채 양!”

알렉스가 크게 외쳤다. 유채는 몸이 움찔했다.

루프스는 유채가 달아나려고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기껏 마레 위르 놈 하나를 상대하면서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에서 또 유채를 놓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한시라도 빨리 저놈을 처치하고 유채를 품에 안아야 했다. 제 품에 꽁꽁 싸매서 가둬야 했다.

루프스가 이를 갈았다. 그는 거대한 은빛 늑대로 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알렉스는 명령처럼 유채에게 외쳤다.

“뛰어요!”

유채는 눈을 질끈 감고 뒤돌았다. 정신없이 뛰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 일어나서 뛰었다. 몇 번을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다가 팔이며 다리며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호수에 도착했다.

유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슬렀다. 호흡을 고르며 유채는 알렉스의 모습을 애써 떨쳐 내곤 이를 악물고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유채는 호수 위의 징검다리에 발을 디뎠다. 생각보다 다리의 간격이 넓었다. 유채는 너무 많이 뛰어서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었다. 신전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이었다.

[레티티아!]

머릿속에 소리가 울렸다. 유채는 몸을 돌렸다. 은빛의 반짝이는 털에 군데군데 피를 묻힌 루프스가 보였다. 거대한 늑대는 유채를 향해 성큼성큼 징검다리를 밟아왔다. 유채는 다급한 마음에 도움닫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음 디딤돌로 발을 옮겼다.

“꺄악!”

착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유채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레티티아!”

유채는 루프스가 다급하게 저를 향해 뻗는 손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풍덩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호수 아래로 잠겨 들어갔다. 리네아의 경고대로 유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물 아래로 계속 끌려 내려갔다. 뇌에 산소가 부족해지자 정신이 흐릿해졌다.

[이거,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군.]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갑자기 숨을 쉴 수 있게 되고 까만 물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서 오거라. 미안하고 미안한 나의 사자(使者)여.]

유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으음.”

유채는 눈을 뜨자마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보곤 곧 제 몸을 내려다 본 유채는 놀래서 눈을 비볐다. 유채는 벌떡 일어났다. 이곳에 처음 떨어졌을 때 입고 있던 옷이었다. 체크무늬의 셔츠와 스키니진에 워커.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숙인 고개 앞으로 머리카락까지 길게 내려왔다. 목에는 파렌티아도 없었다!

“이, 이게…….”

유채는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웬 동굴 같은 곳이었다. 유채는 제가 죽었나 싶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서서히 두려워지기 시작할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혼란스러운가 보구나.”

유채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어떤 여자가 뒤에 서 있었다. 여자는 화려한 금발을 하나로 틀어 올려서 질끈 묶어놓았다. 회색 정장 치마에 시스루 재질의 하얀색 블라우스는 여자와 잘 어울렸다. 유채는 예상 못한 복장을 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크게 놀랐다. 명랑해 보이는 미녀의 연녹색 눈동자가 유채를 응시했다.

유채는 그녀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누구세요?”

“일단, 따라와 보렴.”

여자가 앞장서서 걸었다. 유채는 그녀를 따라서 걸었다. 동굴 같은 길을 한참 걸으니, 판타지 영화에서 흔히 본, 작은 동굴 연못이 나왔다. 여자는 유채를 돌아보고 싱긋 웃더니 연못으로 발을 내디뎠다.

“잠깐, 거기는 물인…… 데?”

여자는 물 위에 올라서 있었다. 여자가 유채에게 손짓했다.

“올라오거라.”

유채는 머뭇거리면서 연못 위로 올라왔다. 밖에서 볼 때는 작게 보이던 연못이 올라와서 보니 바다만큼 넓게 보였다.

“나는 너와 구면이지만, 너는 나와 초면이겠구나.”

“그게 무슨 소린가요?”

“내 이름은 셀레네. 위대한 그분께서 직접 간택하신 열둘의 신 중 하나이며, 시간과 운명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유채의 눈이 커다래졌다. 드디어 만났다 만감이 교차하여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를 왜 이곳으로 데려왔냐고 물어야 할까? 아니면, 다 필요 없으니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어야 할까? 유채는 입만 벙긋거렸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겠지. 그래도 일단 내 이야기부터 들어줄 수 있겠느냐?”

“……알겠습니다.”

셀레네는 유채의 대답에 바닥을 가리켰다. 유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물 아래에는 한 여인의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여인의 금빛 머리카락이 물의 흐름에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 딸이란다.”

“예?”

유채가 이곳의 신화를 읽을 때, 셀레네의 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여타 판타지 세계처럼 신화가 곧 진실이라면 왜 셀레네의 딸에 대한 기록은 없는 걸까 하는 의문이 찾아왔다. 신답게 유채의 의문을 알아차린 것인지, 셀레네는 자세한 설명을 하면 이야기가 하염없이 길어질 것이니, 자세하게 말해줄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말을 하였다. 유채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네는 이해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저 아이가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보내었던 악기를 몸으로 대신 받아냈단다. 어미의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을 막으려 제 목숨을 걸었지. 그래서 이렇게 영원히 깰 수 없는 잠에 빠졌고.”

셀레네의 표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슬퍼 보였다.

“나는 내 딸의 희생을 무시할 수 없었단다. 내 아들을 죽인 이들이지만, 또한 내가 창조한 피조물이니 내가 책임을 져야 했지. 그래서 나는 내가 저지른 잘못을 수정할 방법을 찾았단다.”

“잠깐만요. 아들이요?”

“나에게는 인간 여자를 사랑하여 스스로 인세로 내려간 아들이 하나 있단다. 그 아들을 인간들이 죽였고, 그것이 내가 그들을 벌하기로 결정한 이유란다.”

셀레네가 조근조근 설명했다. 그녀가 손을 흔들자 공중에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옛날 중국 황실의 복장과 비슷해 보이는 옷을 입은 여자가 검에 목을 찔린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가연이란다. 은가연. 내가 이 세상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서 데려온 죽음과 파괴의 신인 케이카인의 차원의 아이란다.”

“케이카인의 차원?”

“열둘의 신은 각자가 만든 차원을 가지고 있지. 네가 온 차원은 유일하게 위대한 그분께서 만든 차원이란다. 우리들은 그곳을 중첩차원이라 부르지. 모든 차원들이 중첩되어 있는 유일한 차원이자, 차원의 이동을 허락받은 인간들이 사는 차원이지. 다른 차원에 사는 이들은 결코 차원 이동을 해서는 안 되지만 중첩 차원에 사는 이들에겐 차원 이동이 허락되었단다.”

유채는 셀레네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당연히 내가 가연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 자체가 그분께서 만든 법칙을 깨는 것이었단다. 하지만 그때 내가 당면한 문제는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가연을 데려와야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가연은 망국의 왕녀로 제 부모를 죽인 이의 부인이 되었다가 남편인 황제의 의처증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상태였지. 나는 가연에게 리와인더(Rewinder)의 회수를 부탁하며 그녀를 원해 살던 곳으로 다시 돌려보내주고 그녀의 과거도 바꿔주겠다고 약속을 했단다.”

“하지만 은가연은 이곳에서 살지 않았나요?”

“가연이 선택했어. 이곳에서 살겠다고. 그 역시 차원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나는 가연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로 인한 어그러짐을 내가 끌어안기로 했지. 아무튼 가연은 내가 부탁한 일을 잘 해주었어. 하지만 작은 실수로 리와인더의 조각 하나가 지상에 남아버렸지. 원래대로라면 내가 조각을 회수해서 정화를 했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단다.”

셀레네가 말을 잠깐 쉬었다.

“나는 세계의 어그러짐과 인세(人世)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어긴 죄로 위대한 그분의 처벌로 상당량의 힘을 잃었단다. 나는 조각을 제외한 리와인더를 정화시키는 일만으로도 벅찼기에 당분간 그 조각을 인간 세상에 남겨두어야 하는 처지였지. 하지만 조각이 대륙에 남아 있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일이었기에 누군가 그것을 안전하게 보관해 줘야 했단다.”

가연의 모습이 흐트러지고 회색 머리카락과 청회색의 눈동자의 건장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때, 이니투스가 나섰다. 그는 내게 수인의 번영과 안전을 약속한다면 기꺼이 그것을 보관하겠다고 했단다. 나는 그에게 조각을 담아 악기를 막는 상아 함과 그것을 감쌀 보자기를 내렸단다. 이니투스는 그 함에 조각을 담고 보자기로 감싸 그것을 가지고 이 스티폴로르, 약속의 땅으로 왔지. 이니투스가 살아 있고 그의 유지가 이어지는 동안은 조각은 안전했단다. 결코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지. 하지만 조각은 다시 세상으로 나왔고 그것이 스티폴로르를 좀먹어가기 시작했단다.”

셀레네는 다시 손을 흔들었고 스티폴로르에 닥친 어려운 상황들이 보였다. 전염병이 도는 마을, 마물들의 습격, 동물화가 된 아이를 끌어안고 우는 수인 부부.

“다행히 나는 힘을 어느 정도 회복했고, 이제 저 조각을 회수해야 할 차례였단다. 하지만 조각을 회수하기는 까다로웠어. 나는 적당한 인물을 찾기 위해서 네가 있던 차원을 떠돌았단다.”

끼이이익. 쿵!

유채는 차가 부딪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귀를 막았다.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아스팔트 바닥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눈은 이미 빛을 잃었다.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아스팔트 바닥이 피로 물들어갔다.

제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는 충격에 유채는 굳어버렸다.

“그때, 네가 내 눈에 띄었단다.”

셀레네의 말과 함께 아스팔트에 누워 있던 유채는 눈을 감았다. 가슴이 더 이상 들썩이지 않았다.

“너는 죽어가고 있었고, 너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명백하여 절박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단다. 그래서 나는 네 몸을 데리고 바로 이 공간으로 왔다.”

유채의 앞에 펼쳐졌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유채는 셀레네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당신이 나를 살린 건가요?”

“그래, 나는 죽었던 너를 살렸다. 나는 시간과 운명을 관장하는 여신. 나는 인간의 탄생 이후의 수명을 결정하는 여신이지. 신은 인간에게 운명을 부여하지 않는단다. 다행히 너는 죽었지만, 아직 영혼이 언니에 대한 미련 때문에 저승으로 향하지 않은 인간이었고 나는 내 권능을 이용하여 너의 시간을 멈춰 너를 살렸단다. 그리고 너를 에클레시아에 보냈지. 그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단다.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나는 지금까지 힘을 회복하고 있었단다.”

“나를 왜 이곳으로 데려온 거예요! 왜 나였냐고요! 나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예?”

유채는 당장이라도 셀레네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자신이 여기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저 여자는 알까. 애완동물 취급받으며 감금당하고, 어떤 쓰레기에게 강간당할 뻔하고, 어떻게든 정신을 추스르고 살려고, 돌아가려고 발악을 했던 괴로움을 저 빌어먹을 신은 알까 싶었다.

셀레네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대신 저 리와인더 조각을 내게 가져다 줄 수 있느냐? 그렇게 해준다면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마.”

“내가 왜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나 말고 여기 인간들 많잖아요. 근데 왜 나여야 하는 건데요?”

“너는 조각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을 테니까. 너는 이 세계에서 태어난 내 피조물이 아니기에 리와인더의 조각이 너를 유혹하지도 못할 테지만, 무엇보다도…….”

셀레네가 손을 저었다. 다시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유채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우는 어머니와 유채의 실종을 조사하는 경찰관과 죄책감에 가득한 유하의 모습이 보였다. 유채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예지라는 것은 가능성으로 가득한 미래 중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란다.”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유채가 셀레네를 돌아보았다.

“한유하의 가장 높은 확률의 미래는 동생의 골수를 제때 받지 못해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서 죽는 것이란다. 맞는 골수를 결국 찾지 못했지.”

“당신!”

유채는 셀레네에게 달려들어서 그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제 참을 수가 없었다. 저를 가지고 장난친 것은 백번 양보하여서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니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참아줄 수 없었다. 이딴 게 신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당장 돌려보내 줘! 당신이 신이라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지금 네가 돌아간다면, 너는 돌아감과 동시에 그 세상에서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와 계약을 맺는다는 조건으로 죽은 이를 살려서는 안 된다는 세계의 법칙을 속이고 너를 살렸기 때문이지. 네가 계약을 파기하면 그와 동시에 너는 죽을 거란다.”

“뭐…… 뭐라고요?”

유채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그래서 그때 시계가 멈춰 있었던 것이다. 유채를 살리기 위해서 셀레네가 시간을 멈췄기에 휴대폰의 시간도 멈춘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유채는 원래 그곳에서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었고, 셀레네가 이곳으로 데리고 온 덕분에 살았으며, 유채가 계속 살아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와인더의 조각은 언제나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지. 가장 간절한 소망으로 그들을 유혹한단다. 아무리 고결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간절한 소망은 있기 마련이거든. 리와인더의 조각은 그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다고 유혹하고 또한 그 소원들을 이루어 줌으로써 사람들로부터의 이기심을, 원념을 수집하여서 자신의 악기를 불리지.”

유채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네 소원은 다르단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네 소원은 나만이, 그러니까 신만이 이루어줄 수 있는 것이란다. 그러니 리와인더의 조각은 너를 유혹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너는 리와인더의 조각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 스티폴로르에서 유일한 인간이란다.”

“하하하.”

유채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재수가 없었던 거네요!”

유채가 악을 쓰듯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이니투스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고, 당신이 싸질러놓은 똥을 치울 사람이 필요했는데, 마침 내가 당신의 조건에 맞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잖아요. 언니 때문에 나는 당신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고, 언니 때문에 나는 리와인더의 조각에게 유혹당하지도 않을 테니, 가장 안전하게 당신에게 조각을 배달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거네요. 내가! 나만이!”

“그렇단다.”

“당신 때문에 내가 여기서 뭘 겪었는지 알아요!”

유채가 벌게진 눈으로 셀레네를 노려봤다.

“난 여기 도착하자마자 여우 수인에게 윤간당할 뻔했어요. 간신히 위협에서 벗어난 것 같으니까 이번에는 애완동물이 됐죠. 아니, 애완동물이 뭐야. 관상용 노예지.”

유채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왔다.

“그 남자는 나를 인간으로 취급하질 않았고 나를 고립시켰고, 내 자존심까지 짓밟았어요. 그 남자의 변덕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고 그 남자의 인형놀이 때문에 나는 강간당할 뻔했어요!”

유채는 오열했다. 제가 겪은 이 모든 일이 그저 자신이 재수가 없어서, 저 신이 바라는 인간의 조건에 맞았기에 이 세계에 넘어와서 생긴 일이라는 것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제가 무슨 잘못을 해서 그랬다면, 납득해 보려고라도 했을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나를 이곳에 던져 놓았다면, 최소한 나를 조금이라도 배려해 줬어야죠. 나는…… 나는…….”

유채는 가슴을 내리쳤다. 너무 원통하고 답답했다. 셀레네가 유채의 몸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미안하구나. 나는 그때, 시간이 없었단다. 내 힘이 온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기에 차원을 넘어서 너를 살려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힘이 벅찬 상태였단다. 그래서 너를 배려해 줄 수가 없었단다. 내가 힘을 회복하는 대로 너를 만나러 가서 도와줄 생각이었단다. 내가 회복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이 먼저일지는 몰랐지만.”

셀레네는 유채의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정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유채는 아이처럼 울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채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셀레네는 유채를 위로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유채가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는 물었다.

“내가 그 빌어먹을 조각을 가져다주면, 나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유채는 냉정하게 상황을 살폈다. 일단 제 눈앞에 펼쳐진 진실을 인정해야 했다. 살아서 돌아갈 방법은 저 여자의 장단에 맞추어 주는 것밖에 없다.

“그래, 그리고 이 세계를 구해준 보상으로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셀레네가 유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원하는 소원을 말하렴. 그 어떤 것이든 들어주마.”

“그곳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나요.”

“원래는 이곳의 시간과 동일하게 흘러가야 하나, 내가 내 능력으로 이곳과 그곳의 시간 흐름을 다르게 했단다. 그곳에선 일주일가량이 흘렀다. 네 언니의 병세가 심각해지는 시점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뭘 하면 되나요.”

유채는 거친 손길로 눈물을 닦으면서 물었다.

“내가 이니투스에게 주었던 상아함에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아 넣어서 보자기로 감싸서 내게 가져오기만 하면 된단다.”

“조각은 어디 있는데요?”

“그걸 네가 찾아야 한단다. 그 이상을 알려주는 것은 신이 개입하는 일이 되어서 세계의 법칙을 깨버리는 것이거든. 내가 직접 회수하는 것은 세상의 법칙을 어기는 일이기에 나는 나에게 그 물건을 대신 찾아서 보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란다.”

셀레네가 손가락을 튕겼다. 세 개의 빛으로 이루어진 구슬이 유채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내 권능을 담은 힘이란다. 네가 내 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마.”

유채는 손을 뻗어 구슬을 받았다. 빛구슬은 그대로 사라졌고 이내 손등에 아릿한 아픔이 느껴지더니 세 개의 회오리 문양이 새겨졌다. 유채는 그 문양을 쓸어보았다.

“하나는 내게 조각을 올려 보낼 때 사용해야 하는 것이고, 나머지 둘은 네가 자유롭게 쓸 수 있단다. 하지만 처음에 쓰기로 한 힘과 같은 것만 쓸 수 있다. 만약 네가 누군가를 치료하고 싶어 치유의 힘을 쓰면 문양 하나는 치유의 힘으로 정착될 것이다. 그리고 그 문양에 담긴 힘이 다 소진될 때까지는 그 힘을 쓸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니까 두 가지 신의 능력을 빌려 쓸 수 있는 것이네요. 문양에 담긴 힘만큼.”

“그래, 오라클라 리네아가 힘을 쓰는 것을 보았지?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너도 할 수 있다. 단, 내 힘은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해치는 것에 사용할 수는 없단다.”

“그럼, 내 몸은 어떻게 방어하나요.”

“너는 이계의 사람이기에 마력이 없지. 네게 마력을 주마.”

거대한 힘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자 유채는 그 충격에 숨을 헐떡였다.

“그 마력이면, 네 몸은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위협에도 말이지.”

유채는 몸속에서 요동치는 기운을 느꼈다.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유채는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주위가 부서지기 시작하였다. 유리 조각이 떨어지듯이 공간이 깨지는 것을 본 유채가 다급하게 셀레네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네 몸을 호수에서 끌어내고 있구나.”

셀레네가 손을 크게 휘둘렀다. 무너지던 공간이 얼어붙은 것처럼 멈췄다. 셀레네가 재빨리 설명했다.

“이곳은 내가 휴식을 취하고 몸을 회복하는 공간이란다. 네가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신전에서 나를 만나는 것보다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고 더 많은 힘을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단다.”

셀레네는 유채에게 빅터가 주었던 목걸이를 다시 내어주었다.

“이건 리네아의 어머니, 전대 오라클라이자 고양이 수인의 수장이었던 렌이 동생을 위해, 그리고 너를 위해 만든 물건이지. 혹시라도 자신이 신전에 있는 동안 자신을 찾아온 동생이 호수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까 봐 호수의 힘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물건이야. 이 물건 덕에 너도 호수에 빠지고도 안전하게 나를 만날 수 있었던 거란다. 그리고 후에 조각을 찾으러 이곳에 올 너를 위해 만든 물건이지.”

다시 공간이 조각조각 부서지기 시작하였다.

“조각은 살아있는 기생물과 같단다. 조각은 자신을 파괴하러 온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지, 그래서 너를 직접 만나게 된다면, 너를 공격하려 할 것이란다. 리네아처럼 만들려고 하겠지. 조각맨손으로 잡는 건 위험하니 보자기를 쓰렴. 하지만 그 목걸이가 있는 한 아주 잠시 동안은 맨손으로 잡아도 괜찮단다.”

셀레네의 모습도 마치 유리가 깨진 것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우선 상아함과 보자기를 찾아라. 그리고 함에 조각을 넣고 보자기로 감싸서 에클레시아로 가져오면 된단다. 에클레시아의 신전 안, 리와인더의 조각이 원래 놓여 있던 곳이다.”

셀레네의 손가락이 유채의 이마에 닿았다.

“이건 내 마지막 선물이란다. 네가 입은 모든 정신적, 신체적 상처를 회복시켜 주마. 이제 그 일로 네가 괴로워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유채의 몸을 빛이 감싸 안았다. 셀레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이 일은 꼭 내가 보답하마. 정말 미안하다.”

유채의 눈앞이 새까매지고 의식이 흐려졌다.

[행운을 빈다.]

* * *

“야, 그거 알아, 늑대왕?”

알렉스가 루프스의 발톱을 피하면서 말했다. 볼 살이 약간 찢겨 나갔다. 알렉스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유채는 과연 도착했을까?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남자가 너무 달라붙으면 인기 없어. 아무리 잘생겨도 말이야.”

[입 다물어라.]

루프스가 이를 갈았다. 루프스는 정신없이 산을 뒤지다가 유채를 발견했을 때를 생각해 내었다. 저 빌어먹을 마레 위르 놈이 유채의 손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당장에 달려가서 두 연놈들을 찢어놓고 싶었다.

유채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자마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루프스는 제 앞을 가로막은 마레 위르 놈이 싫었고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유채가 도망갈 것 같아서 살의를 억눌렀다. 용서해 주겠다고까지 했는데 유채는 또 그를 버리고 도망갔다.

루프스는 알렉스의 검의 궤적을 피하면서 알렉스를 몰아붙였다. 변칙적인 검술을 구가하던 렉스 놈의 제자답게 알렉스 역시 검이 어디로 향할지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루프스는 알렉스의 검을 피하다가 콧잔등을 베였다. 루프스의 발톱은 알렉스의 어깨를 노리고 들어갔다. 알렉스는 기이하게 검을 꺾어 루프스의 발톱을 막았다. 루프스는 힘으로 검을 내리 눌렀다.

“당, 당신. 유채 양이 당신을 얼마나 싫어하는 지 알아?”

알렉스가 힘을 주고 검을 휘둘러서 루프스를 떨쳐 내었다. 알렉스가 헐떡이는 만큼 루프스도 상처를 입었지만 대부분이 사소한 생채기 수준이었다. 알렉스는 루프스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옆구리가 길게 찢겨 지금 움직이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왜 렉스가 루프스를 조심하라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루프스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알렉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릿한 손을 폈다가 다시 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고마워요. 제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주셔서.’】

“유채 양은 당신 때문에 괴로워했어. 아니, 당신이 호의랍시고 한 일이 유채 양에게는 괴로운 기억으로만 남아 있어.”

얼마나 좋은 기억이 없었으면, 제게 그런 말을 할까싶었다. 알렉스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포트리스로 돌아가는 것도 미루고 유채의 곁에 남았다. 좋은 기억은 더 만들어줄 수 없어도 지켜주고 싶었다.

“당신에게 일말의 양심이란 것이 있다면 유채 양을 보내줘. 알잖아, 당신도. 유채 양의 언니가 지금 위독하다는 거. 그런데도 유채 양을 붙잡을 거야?”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는 놈이군.]

루프스가 일갈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제 옆에 있던 동안이 유채에게는 하나도 좋은 기억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제가 이렇게 유채를 붙잡으려는 짓이 그녀에게 정말 못할 짓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놓을 수가 없다. 유채는 그의 곁에 있어야 했다. 이게 광기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이게 무엇이든 루프스는 유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 경고다. 비켜라. 비키지 않는다면 죽이겠다.]

“원하는 바다.”

알렉스가 두 손으로 검을 움켜잡았다. 루프스는 끝까지 제 앞을 막아서는 알렉스를 바퀴벌레 보듯이 했다. 그는 강했다. 자존심을 세우고 위르형으로 상대했다면 제가 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경험이었다. 이미 내전이라는 전쟁을 경험한 루프스와 달리 알렉스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루프스는 마음을 바꾸었다. 우아하게 이기는 것보다 때로는 실리를 차리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그는 몸집을 줄였다. 덩치가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속도를 내기에 더 좋았다. 알렉스 놈의 목적은 저를 최대한 이곳에 오래 붙잡아놓는 것이었다.

루프스는 알렉스를 덮치듯이 달려들었다. 알렉스는 루프스의 공격을 힘겹게 막았다. 큭, 신음을 흘리며 알렉스는 놓칠 뻔한 검을 단단히 감아쥐었다. 힘으로 돌파하려다가 생각을 바꾼 것인지 몸집을 줄이고 속도전을 시작한 그를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였다. 알렉스의 몸 여러 군데에 발톱에 찢기고 이빨에 물어뜯긴 상처가 생겼다.

몇 번을 부딪치고 멀리 물러선 루프스와 알렉스의 입에서 거친 숨이 새어나왔다.

[이봐. 수컷.]

공격에 대비하던 알렉스가 머릿속으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너와 나의 차이가 무엇인 줄 아나?]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지 루프스는 뒷다리에 힘을 주고 높이 도약했다. 알렉스는 제 몸을 넘어가려는 루프스를 막기 위해서 검을 높게 들었다. 루프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마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할 작정인가?

알렉스는 급하게 검을 거두어들이고 도움닫기를 하여서 몸을 뒤쪽으로 움직였다. 그의 목적은 루프스를 막는 것이지, 루프스를 상처 입히는 것이 아니었다. 몸을 뒤로 빼는 잠깐 사이에 루프스의 모습을 놓쳤다. 당황한 알렉스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순식간에 루프스가 그를 덮쳤다.

“끄악!”

알렉스가 비명을 질렀다.

“너와 나의 가장 큰 차이는 경험이지, 애송아.”

루프스는 알렉스가 검을 거둔 그 순간 바로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물형으로 뛰어들었던 그 자리 바로 아래에 착지할 수 있었다. 알렉스 놈이 저를 찾기 위해 시선을 잠깐 돌린 그 틈을 타서 그의 옆구리를 손톱으로 찌르고 비틀었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 검을 꽉 움켜잡아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렉스가 알려주지 않던가? 수인들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하면, 땅으로 착지하기 위해 바로 위르형으로 돌아간다고.”

동물형에서 위르형으로 돌아올 때, 동물형이 공중에 있다면 위르형은 동물형이 있던 공중아래 땅에서 모습을 드러내도록 되어있는 것이 수인들의 동물형과 위르형 간의 변환법칙이었다. 그리고 루프스는 다른 수인과 다르게 그 조건을 전투에 잘 활용하는 편이었다.

알렉스의 옆구리는 이미 다쳤던 곳에 더 큰 상처를 입고 벌건 피를 흘렸다. 루프스는 알렉스의 손목을 비틀어 검을 뺏어서 저 멀리 던졌다.

“그동안 레티티아의 신변 보호를 해준 대가로 목숨만은 살려주지.”

루프스는 마치 인형을 집어던지듯이 알렉스를 산비탈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알렉스가 비명을 지르며 신음을 흘리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보았다. 루프스는 다시 은빛의 늑대로 돌아갔다. 얼른 유채를 따라잡아야만 했다. 루프스는 제가 달릴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빠르기로 달렸다.

[레티티아!]

그는 징검다리를 거의 건넌 유채를 향해 외쳤다. 벌써 저만큼이나 가버렸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 호수에 대한 이야기는 그도 알고 있었다. 위험하지만 유채를 잡기 위해서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따라잡기 위해서 징검다리를 건넜다. 동물형이기에 유채보다 빠르게 징검다리를 건넜다.

“꺄악!”

[레티티아!]

루프스가 소리 질렀다. 유채가 호수에 빠졌다. 루프스는 유채를 잡기 위해 얼른 위르형으로 돌아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유채의 몸은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라이칸. 그 호수는 정말 위험하단다. 물에 빠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에 있는 모든 시간을 뺏기고 죽게 되지.’】

루프스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약한 유채는 혼자서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루프스는 망설임 없이 호수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물이 몸을 휘감았다. 그는 어두운 물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루프스는 유채를 찾기 위해서 물이 끌어당기는 것보다 빠르게 더 아래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유채는 죽더라도 제 곁에서 죽어야 했다. 유채의 죽음도 그의 것이 되어야만 했다. 결코 이딴 호수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제 것이다. 저의 유채였다.

루프스는 점점 힘이 빠져 가는 몸을 정신력으로 움직였다. 숨이 조금 차기 시작할 때 유채가 보였다. 유채의 몸은 힘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루프스는 얼른 유채를 붙잡았다. 힘없이 감긴 눈에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입술을 맞추고 제 숨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유채의 몸을 끌어안고 팔과 다리를 정신없이 움직였다. 순수하게 힘만으로 잡아당기는 힘을 무시한 채 위로 올라가야 하기에 온몸의 근육이 터질 것 같았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었다.

지켜야 한다.

루프스는 드디어 품에 안은 유채의 얼굴을 힐끔 보고 온 힘을 다해서 몸을 움직였다.

“푸핫.”

물 밖으로 겨우 고개를 내민 그는 징검다리 위에 유채 먼저 올리고 자신도 빠져나갔다. 알렉스의 검에 배인 상처가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었다. 그는 유채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레티티아! 레티티아!”

숨을 쉬는 것인가 걱정이 되어서 유채의 코에 귀를 가져갔다. 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목 옆을 손으로 짚으니 맥박도 느껴졌다.

“하.”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프스는 거친 숨을 고른 뒤에 유채의 몸을 안아들고 일어섰다. 축 늘어진 유채의 몸은 아무런 저항 없이 안겨왔다. 그는 유채의 몸을 빈틈없이 꽉 안았다.

루프스는 정신을 잃은 유채를 안고 천천히 왔던 길로 내려갔다. 카신과 그를 따라온 정예병들이 알렉스를 포박해 두었다.

알렉스는 루프스의 품에 안겨 있는 유채를 보았다. 그녀는 마치 거미줄에 포박된 가련한 나비 같았다.

“이 개새끼야! 그렇게까지 유채 양을…… 아악!”

루프스가 알렉스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카신이 손날로 알렉스의 뒷목을 가격했다. 알렉스는 정신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떻게 할까요?”

카신이 물었다.

“일단 산 아래에 있는 버려진 마을로 가자.”

루프스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곧 날이 저물 때였다.

“저 녀석의 처치는 나중에 결정하지.”

루프스는 유채를 고개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맞추었다.

해가 질 무렵 루프스는 마을에 도착했다. 버려진 마을에서 가장 멀쩡하고 좋은 집을 골라서 하루를 묵기로 결정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안고 제가 머무를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안은 채로 침대에 앉았다.

“자. 이제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루프스는 유채의 고운 입술을 쓸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던 얼굴이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번민하게 만든 얼굴이었다. 다시 잡으면 어떻게 할까 수없이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루프스는 물에 빠진 덕에 체온이 떨어져 몸을 떠는 유채를 꽉 안았다. 작은 몸은 그에게 꼭 맞춘 것처럼 맞았다. 부드럽게 안겨오는 몸이 그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유채의 볼에 입술을 맞추면서 다시 물었다.

“내가 너를 어찌해야 좋을까.”

막상 유채를 보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유채의 지저분하게 잘린 머리카락을 만졌다. 유채에게는 긴 머리카락이 더 잘 어울렸다. 궁에 가면 오르페에게 머리카락을 길게 만드는 마법을 걸라고 명령을 내려야겠다.

그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유채를 품에 안은 순간 그동안에 그가 품고 있던 모든 불안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숨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흐읏.”

숨이 막혔는지 작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루프스는 팔에 힘을 풀었다. 유채의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루프스는 유혹적인 입술을 애써 무시하고 유채를 침대에 눕히고 그 옆에 누워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없는 동안 네가 뭐라고 나는 너만 생각했다.”

스티폴로르가 전쟁에 신음하고 있음에도 그에게는 그 전쟁보다 유채가 더 중요했다. 그는 유채를 좀 더 당겨 안았다.

“너를 다시 만난 순간 머릿속이 온통 하얬다.”

유채를 다시 본 순간 그는 그냥 얼어붙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유채의 앞에서는 항상 백치가 되었다.

“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아니, 네 죽음조차도 내 것이니 너는 영원히 내 곁에 있어야 한다.”

루프스는 담쟁이 넝쿨이 벽을 휘감는 것처럼 유채의 힘없는 몸을 꽉 끌어안았다. 진득한 감정이 유채의 몸을 뒤덮었다. 그의 청회색 눈에는 진득한 소유욕이 가득 담겼다. 작고 부드러운 여체도, 아름다운 얼굴도, 검은 머릿결도, 고운 목소리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모두 루프스의 것이었다. 유채의 모든 것은 바로 그의 것이다. 그가 유채의 코끝에 제 코끝을 맞추었다.

“너는 나를 영원히 떠날 수 없어.”

진득한 집착의 말이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그가 수없이 번민한 끝에 나온 결과였다.

* * *

짹. 짹. 짹.

유채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밝은 햇살이 눈을 찔렀다. 창틀에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앉아서 지저귀고 있었다. 유채는 멍하니 참새를 바라보고 있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곤 벌떡 일어났다. 어깨 아래로 이불이 흘러내렸다. 유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회가 떨어지는 벽, 먼지 쌓인 물건들. 유채는 초조하게 손톱을 씹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

유채는 왼쪽 손등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발견했다. 셀레네를 만난 건 꿈이 아니었다. 유채는 이를 갈았다. 물론 제 목숨을 살리고 언니를 살릴 기회를 준 것은 고마웠다. 하지만 이렇게 무책임해서는 안 되었다.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겠다는 말은 정말이었는지, 헥터의 일을 떠올렸는데도 이젠 무섭지 않았다.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이다. 하지만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유채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근데 여긴 어디지?”

유채는 침대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에 발을 꿰었다. 신발은 아직도 젖어 있어 축축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채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여 루프스에게 붙잡힌 것일 수도 있으니 되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일 생각이었다. 유채는 방문을 살짝 열었다.

“그래서. 제일 심각한 곳이 소 수인 놈들이 있는 독수리 일족 측이라는 것이지.”

“예. 올리에님도 되도록 루프스님께서 직접 와주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일단 바실리사님께 연락을 드려서 먼저 움직여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유채는 루프스를 보고 입을 틀어막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 신체 능력으로는 루프스를 따돌릴 수 없었다. 무조건 마법의 도움이 필요했다. 제가 은신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루프스의 시선을 따돌릴 수 있었다. 또 마법으로 잠긴 문을 빠르게 열 수도 있었다. 셀레네 덕분에 마력은 얻었지만 유채는 재능이 없다는 평가 아래 마법을 배우다 말았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는 법에 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프렉드릭의 수업 초반에 몇 번 들었던 주문들은 라틴어 비슷한, 전혀 익숙하지 않은 언어라 외우지도 못했다. 기껏 기억나는 것은 바람을 불게 하는 스펠 하나였다. 유채는 못 한다고 일찍 포기한 자신이 한심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알렉스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 가둬놔. 나도 생각 중이니까. 그리고 나도 같이 가지. 잠시 레티티아 좀 확인해 보고 오겠다.”

유채는 발소리를 죽이고 후다닥 움직였다. 유채는 얼른 신발을 아까처럼 가지런히 벗어두고 이불을 덮고 누웠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잠든 척을 했다. 루프스의 손이 볼에 닿는 순간 움찔할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묶어놓고 가야 하나.”

유채는 루프스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인지 유채의 손목을 가만히 쥐었다. 유채는 속으로 열심히 빌었다. 제발, 제발. 그가 그냥 나가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목이 놓이고 루프스의 숨결이 귓가로 다가왔다.

“얌전히 쉬고 있어.”

그는 유채의 볼에 입을 맞춘 후 방을 나갔다. 유채는 루프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후에야 가슴을 꾹 누르면서 일어났다. 긴장으로 참고 있던 숨을 급하게 내쉬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유채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은 저 남자에게서 다시 달아나야 했다. 그리고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아야 하고, 그 전에 그것을 담았다는 상아함과 보자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증거가 남아 있을 만한 곳은 있었다. 에클레시아. 유채는 손등에 있는 권능의 표식을 보았다. 리네아가 썼던 힘은 치유, 저주 대신 받기, 공간 이동, 이 정도였다. 그중 두 개를 잘 골라 써야 하고 또한 사용할 힘의 양도 조절해야 했다.

유채는 초조하게 손톱을 씹었다. 이 힘은 일단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무분별하게 남발했다가 정작 필요할 때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유채는 축축하게 젖은 신발을 들고 방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꽤나 오래된 집인지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 있었다. 유채는 창가로 다가가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일단 이쪽에는 루프스는 없는 것 같았다. 유채는 신발을 창밖으로 집어던지고 창문을 넘었다. 유채는 나름 민첩하게 행동했다. 일단 알렉스의 무사함을 확인해야 했다. 저 때문에 피해 입은 알렉스를 도와야만 했다.

죽이지 않았다면 어딘가에 가두어두었을 것이 분명한데 어디일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유채는 속으로 고민했다. 루프스는 오만하고 제 자랑하기 좋아하고, 잔혹하고…… 아무튼 그런 인간이었다. 그가 알렉스를 어디에 가두어놓았을까 싶었다.

“감시하기 편하려면 이 근처일 텐데…….”

유채는 빠져나온 집 주변을 휙 돌아보았다. 그러다 외따로 떨어진 창고 같은 건물을 발견했다. 저기다! 유채는 얼른 창고로 다가가서 창살로 막아놓은 창문을 까치발을 딛고 들여다보았다.

“알렉스 씨!”

예상대로 그 안에 알렉스가 있었다. 척 봐도 상처가 심각했다. 옆구리와 어깨가 찢어져 피로 범벅이었고 손목도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었다. 저렇게 많이 다친 사람을 이렇게 지저분한 곳에 가둬두다니. 제대로 상처 치료도 못한 몸은 세균이 금세 감염될 위험이 컸다.

“유, 유채…… 양?”

알렉스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유채는 알렉스가 걱정되어서 발만 동동 굴렀다. 알렉스는 팔과 다리가 묶여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엉덩이를 질질 끌면서까지 움직이려 하자 유채는 화들짝 놀랐다.

“움직이지 마세요. 거기 계세요. 제가 열어드릴게요.”

“유채 양, 그냥 나는 버리고.”

“안 돼요. 절대 그렇게는 못 해요.”

유채는 자물쇠가 걸린 창고의 문으로 달려갔다. 지렛대를 문틈에 끼워 넣어서 열거나 자물쇠를 부술 수도 있지만, 그러면 큰소리가 들려서 저들에게 들킬 위험이 컸다. 그럼 다시 도망가지도 못하고 잡힐 것이다.

“아니지. 추적은 피할 수 있어.”

유채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리네아처럼 공간을 찢어서 이동할 수 있다면, 알렉스를 빼낸 다음에 포트리스로 바로 이동하면 된다. 하지만 여기서 포트리스까지는 꽤 멀고 이 문양에 담긴 힘이 얼마나 소모될지도 정확히 몰랐다. 유채는 일단 문부터 열기로 하고 주위에서 적당한 크기의 짱돌을 찾았다.

“유채 양, 그냥 나는 버리고 가요. 지금이 기회예요.”

“싫어요.”

알렉스의 말을 무시하고 저런 조잡한 자물쇠 정도는 한 번 내리치면 부술 것 같은 단단한 검은 돌을 찾았다. 유채는 체중을 실어서 자물쇠를 내리쳤다. 자물쇠가 걸려 있던 고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채는 얼른 창고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자욱한 먼지가 쏟아져 나왔다.

“유채 양!”

저를 부르는 알렉스의 목소리에 유채는 먼지 때문에 콜록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뒤에!”

“예? 아악!”

억센 힘이 유채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았다.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유채의 손등 위로 손을 겹치면서 깍지를 끼었다.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얌전히 쉬고 있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유채는 그 목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바람이라도 불게 하는 마법을 써서 루프스를 쫒아내야 하는 것일까. 수상한 낌새를 알아챈 것인지 루프스가 유채를 뒤에서 당겨 안으면서 속삭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저 마레 위르 수컷 놈의 목은 없을 것이다.”

루프스의 입술이 창백하게 질린 유채의 볼에 닿았다.

“궁금하면 보여줄까?”

루프스가 카신을 불렀다. 검은 늑대 한 마리가 아가리를 벌리고 알렉스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늑대가 알렉스의 다친 어깨를 물었다.

“아아악!”

알렉스는 비명을 질렀다.

“알렉스 씨!”

유채는 루프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돌덩이 같은 루프스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돌려서 안았다. 유채는 주먹으로 루프스의 가슴을 쳤다.

알렉스는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그 옆에 늑대로 변한 카신이 버티고 서 있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당신에게 최소한의 인정이라도 있다면 당장 그만둬요! 알렉스 씨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유채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루프스는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아아. 레티티아.”

루프스의 손이 유채의 볼로 다가왔다. 유채는 그의 손이 닿는 것이 끔찍하여 고개를 미친 듯이 저어댔다. 루프스는 인내심이 바닥이 난 것인지 이를 갈았다.

“난 내 것을 훔친 이에게 당연하게 보복을 하는 것뿐이야. 저 마레 위르 수컷이 나에게서 너를 훔쳐 갔는데.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죄임에도 너그럽게 살려주고 있다는 걸 모르나?”

“내가, 내가 데려가 달라고 했어!”

유채가 소리 질렀다.

알렉스는 자신을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부탁한 것은 유채였다. 뭐든지 하겠으니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한 것은 자신이었고, 돌아갈 수 있음에도 저를 지켜주겠다고 남아서 저렇게 된 것도 모두 제 탓이었다. 유채는 알렉스가 시간을 벌어준 덕택에 빌어먹을 셀레네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뭐든 하겠다고 했어! 빌어먹을 당신하고 더 이상 같이 있기 싫으니 데려가 달라고 했어!”

유채가 악을 썼다.

“뭐든?”

“그래! 뭐든! 누구든 나를 그곳에서 데리고만 나가준다면 몸도 팔 수 있었어! 내가, 내가 뭐든 하겠다고 데려가 달라고 했어!”

유채는 루프스의 팔을 쥐어뜯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굳은 얼굴의 그를 보면서 유채는 쾌감을 느꼈다. 제 말이 저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유채는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다 털어놓고 싶었다. 빌어먹을 인간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얼마나 역겨웠는지를.

“당신 닿는 것 모두가 다 끔찍했어! 나는 당신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못 할 게 없었다고!”

유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느라 잠깐 컥컥대었다. 유채는 제 감정에 취해서 루프스의 청회색의 눈이 어떤 분노에 차 있는지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알렉스 씨는 아무런 죄도 없어! 괴롭히려면 나를 괴롭혀! 내가 알렉스 씨를 꾀어내고 당신 어깨에 칼을 박아놓고 도망쳤어!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 괴롭히지 말고!”

“입 다물어.”

루프스가 내뿜는 살기에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유채는 거의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카신마저 움찔할 정도인지라 이미 기력이 쇠약해져 있던 알렉스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알렉스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알렉스 씨!”

뭔가 쓰러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알렉스가 기절한 것을 본 유채가 다급하게 외쳤다. 루프스가 그녀의 고개를 잡아서 억지로 제 쪽으로 돌렸다. 유채는 루프스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입을 벙긋하면, 저 수컷의 목이 땅에 굴러다니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유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유채는 어깨가 탈골될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통증을 느꼈다.

“따라와!”

그의 성난 걸음에 유채는 하릴없이 끌려갔다. 질질 끌려가다 보니 자주 넘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루프스는 유채가 중심을 잡게 해주는 정도의 배려만 해주었을 뿐 억지로 잡아끄는 것은 그만두지 않았다.

유채는 좀 전에 빠져나왔던 방 안에 다시 내동댕이쳐졌다. 유채는 바닥에 엎어졌다가 간신히 다시 일어섰다. 루프스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유채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악!”

등이 벽에 부딪쳤다. 아픔을 온전히 느낄 시간도 없이 루프스가 유채의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양 볼을 감싸 쥐고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그의 입술이 곧장 유채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유채는 입을 벌리지 않기 위해서 입술에 힘을 주었다. 유채의 입술을 열기 위해 루프스가 송곳니로 입술을 깨물었다. 유채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입술을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루프스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손으로 유채의 턱을 움켜쥐고 힘으로 그녀의 입술을 벌렸다. 유채의 입안으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유채는 루프스를 밀어내기 위해서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있는 루프스가 몸부림을 방해했다. 그는 유채의 손목을 잡아서 벽으로 내리누르면서 고개를 틀었다. 더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 입술에 유채가 도리질을 쳤다.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초식동물을 잡는 짐승처럼 입술을 탐했다.

예전에는 숨을 쉴 수라도 있게라도 해주었다면, 이번에는 그런 배려도 없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고개를 트는 그 잠깐 동안 공기를 급하게 들이마셔야 했다. 유채는 벽과 루프스의 몸 사이에 갇혀서 꼼짝없이 휘몰아치는 키스를 받아내야 했다.

유채의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붉어진 유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루프스의 혀와 입술은 무자비하게 유채의 입안과 입술을 유린했다. 유채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이 제 입안을 자유로이 누비고 있는 루프스를 당장이라도 쫒아내고 싶었다. 유채는 큰 결심을 하고 루프스의 혀를 물었다.

“윽.”

루프스가 약한 소리를 내면서 입술을 뗐다. 입술이 멀어졌다. 유채는 그의 얼굴이 멀어지자마자 온 체중을 실어서 그의 뺨을 쳤다.

짝! 날카로운 마찰 소리와 함께 루프스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루프스의 볼에 할퀸 자국이 남고 입술도 찢어져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는 손으로 입술을 훔치곤 거기에 묻어나온 피를 보고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유채는 씩씩거리며 루프스의 어깨를 밀어냈다. 루프스는 손을 셔츠에 닦고는 유채의 양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침대 위로 집어던졌다.

“꺄악!”

루프스가 셔츠를 벗어서 바닥으로 벗어던졌다. 뭔가 집어던질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면 제가 미쳐서 날뛰다가 유채의 목을 조를 것 같았다. 단단한 상체가 드러났다. 유채가 검으로 찌른 왼쪽 어깨는 아직도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유채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화를 삭이고 있는 루프스에게 외쳤다.

“자, 이제 협박할 차례죠? 뭐예요? 이번에는!”

“뭐?”

루프스는 갑작스런 말에 머리가 식었다. 유채는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면서 말했다.

“알렉스 씨를 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라고 협박할 때 아니에요? 아. 이제는 내가 대가를 제시해야 하나?”

유채는 빈정거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당신 손에 다시 잡혔으니까 그 빌어먹을 방으로 끌려가겠네요. 블루벨은 해당사항이 없고, 그럼 그쪽이 요구할 것은 하나겠네?”

유채가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루프스는 당황해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루프스는 침대 위에서 유채를 아래에 깔고 그녀의 팔을 붙잡아 눌렀다. 루프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너는…… 도대체!”

“놔! 놓으라고!”

유채는 잡힌 손목을 풀어내기 위해서 요동쳤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몸부림치던 유채는 결국 포기하고 숨만 헐떡였다. 루프스에게 잡힌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당신하고 한 번만 자주면…… 당신도 나한테 흥미가 떨어질 것 아니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루프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젖은 눈이 애잔해 보였다.

“날 놔주면 안 돼요? 데리고 있어봤자 당신 바라는 대로 애교도 안 떨고 울기만 할 건데…… 데리고 있어봤자 당신 손해잖아. 그러니까 놔주면 안 돼요?”

루프스의 입장에서 저는 데리고 있어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제게 왜 이러는가. 유채는 그가 저를 버리기를 바랐다.

유채의 손목을 잡고 있는 루프스의 손아귀의 힘이 강해졌다. 유채는 신음을 흘렸다.

“어차피 당신 나를 잡아두는 이유도 그냥 흥미잖아. 당신 원하는 대로 다 하고 나면 나한테 흥미 떨어질 것 아니야!”

유채는 악에 받친 소리를 질렀다. 유채의 물기 진 습윤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루프스는 제 아래에 있는 유채가 마치 망가진 인형처럼 보였다.

“난 그쪽과 있으면 너무 괴로워요! 언제 당신이 변해서 나를 괴롭힐까? 아니면 갑자기 나를 안으려들지 않을까? 그곳에 있는 내내 두려워서 잠도 편하게 자본 적이 없어요!”

당연한 공포였다. 붉은 방 이후로 그에게 신체적으로 해코지를 당한 적은 없지만 언제고 그가 자신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공포가 되었다. 저 남자는 한 손만으로도 저를 죽일 수 있음을 알기에 그가 언제 돌변해서 다시 괴롭힐지 모른다는 공포에 미칠 것 같았다.

“고독이 얼마나 정신을 피폐하게 하는지 모르죠?”

작은 방에 갇혀 만나는 이라곤 시중 들러오는 궁녀나 루프스가 부를 때에만 오는 헤나, 선생이랍시고 와서는 자기들 얘기만 하고 가는 자들밖에 없었다. 블루벨을 만나기 전까지는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다. 블루벨이 없었다면 유채는 진작 미쳐 버렸을 것이다.

“죄책감이 얼마나 사람 미치게 만드는지도 모르죠?”

유채가 루프스에게 밉보이면 피해 입는 사람은 모두 그녀의 주변 사람이었다. 블루벨은 냉궁에 갇혔고, 프레드릭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았고, 알렉스는 크게 다쳤다. 언니의 목숨이 언제 위독해질지 모르는데 이곳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그게 유채를 정말 괴롭게 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참을게요. 그냥……. 흥미로 안고 버려두고 가도 돼요.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고 가도 돼요. 그러니까…… 그냥 나랑 알렉스 씨…… 그냥 보내줘요.”

유채는 너무나도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유채의 손목에 멍이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유채의 벌어진 옷 사이로 봉긋한 가슴과 마른 허리가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볼품없는 몸이었다. 풍만하지도 않고 마르기만 해서 예쁘지도 않은 몸이었다. 루프스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런 몸에 반응하는 제가 한심하고 그녀의 말대로 데리고 있어봤자 좋을 것 하나 없는 빌어먹을 암컷을 버리지도 못하는 자신이 천치 같았다. 루프스는 속으로 화를 삭였다.

“나…… 돌아가고 싶어요.”

유채가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담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본 루프스는 저도 미칠 것 같았다. 유채를 들인 뒤 손해를 본 것은 자신뿐이었다. 정치적으로 입지가 위태로워졌고 전쟁까지 벌어졌다. 이럼에도 왜 그녀를 놓지 못하는지.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으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 목을 부러뜨리면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기만 했을 뿐 힘을 주지는 못했다. 굳은살이 박인 손에 감기는 여린 피부의 감촉이 선뜩했다. 유채가 체념한 것처럼 눈을 감는 순간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겼다.

“크아아아악!”

루프스는 유채를 죽여 버릴 것 같은 눈으로 쏘아보고는 아까 집어 던진 셔츠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부서질 듯한 기세로 쾅 닫힌 후 유채는 힘이 풀려 움직이질 못했다.

유채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권능을 이용하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알렉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루프스는 제가 돌아오도록 협박하기 위해 알렉스를 정말로 죽일 수 있는 남자였다. 이미 한 번 같이 도망가려는 걸 들켰으니 알렉스를 바로 옆에서 감시할지도 몰랐다.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되자 유채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루프스는 셔츠에 팔을 꿰어 넣고 씩씩거리면서 걸어갔다. 악을 쓰면서 했던 유채의 말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가슴 속에서 홧홧한 것들이 끓어올랐다.

“아악!”

쾅! 루프스는 차오르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서 벽을 내리쳤다. 관리를 하지 않은 집은 그 충격에 흔들리고 돌조각들을 떨어뜨렸다. 루프스는 보이는 놈 아무나 잡고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저릿한 손을 쥐었다 피면서 제 속을 진정시켰다.

신께 맹세코, 절대로 유채를 취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같이 지내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벌을 줄 의도로 그녀를 안을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언니가…….’】

루프스는 울면서 애원하던 유채의 얼굴을 뇌리에서 털어내었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잡아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도 가족을 잃어보았고 그 슬픔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안 된다. 도저히 유채가 떠나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었다. 유채가 떠나 있는 동안 갑갑했던 가슴이 그녀를 만나자 뚫린 것처럼 시원해졌다.

【‘그래! 뭐든! 누구든 나를 그곳에서 데리고만 나가준다면 몸도 팔 수 있었어! 내가, 내가 뭐든 하겠다고 데려가 달라고 했어!’】

유채가 알렉스를 구하고 같이 탈출하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솔직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제게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유채라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카신을 불러서 본보기로 협박을 하였다. 하지만 유채가 계속 반항하고 알렉스만 신경 쓰는 모습을 보면서 루프스는 서서히 화가 났다.

【‘몸도 팔 수 있었어.’】

루프스의 눈앞에 벌거벗은 유채와 그런 유채를 물고 핥는 알렉스가 보였다. 나신으로 얽혀서 나뒹구는 둘의 모습에 루프스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 씁쓸한 피 맛이 감돌았다.

루프스는 유채를 방으로 끌고 와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누르고 입술을 맞추고 정신없이 유채를 탐했다. 뭐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헥터와 카르멘이 날뛰고 있는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도 그는 유채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제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름과 동시에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유채는 마치 마약과 같았다. 루프스는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유채를 끌어안고 싶었고 유채에게 입술을 맞추고 싶었다.

정말로 그는 유채를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유채에게 애원을 듣고 싶었다. 유채가 제게 기대는 것을 보고 싶었다. 유채가 한번만 봐달라고 빌었다면, 그는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알렉스를 치료해 주겠다는 말을 하였을 것이다. 그는 그저 유채가 제게 기대고 뭔가를 부탁했으면 했다.

【‘내가 당신하고 한 번만 자주면…… 당신도 나한테 흥미가 떨어질 것 아니야!’】

그 순간 그는 뭔가 툭 하고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때 그가 느꼈던 감정은 순수한 분노였다. 그깟 마레 위르가 얼마나 소중하면 가장 두려워하는 짓까지 하겠다고 하는 것인가 싶었다.

【‘나…… 돌아가고 싶어요.’】

유채의 목을 조르려고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유채의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체념한 듯 눈을 감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 목을 부러뜨렸을 것이다.

루프스는 벽에 등을 기대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밖으로 나온 루프스는 문짝이 뜯긴 창고 안에서 카신의 감시를 받고 있는 알렉스에게 갔다.

저놈 보다 제가 못한 것이 뭐가 있나?

분명히 말했다. 제 곁에만 있어준다면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 말했다. 여왕이 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입맛에 맞는 음식, 고급스러운 옷, 편한 생활, 모든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제가 아니라 약해서 지켜주지도 못할 저 마레 위르를 저렇게 싸고도나 싶었다.

“루프스님?”

루프스는 카신이 손에 든 물병을 뺏어서 알렉스의 얼굴에 뿌렸다. 찬물이 닿자 알렉스는 정신을 차린 것인지 고개를 들었다.

“나가봐. 카신. 내가 할 이야기가 있다.”

루프스가 화를 꾹 억누르면서 말했다.

“하지만, 루프스님…….”

카신이 알렉스와 루프스를 번갈아 보며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비웃음 섞인 쓴 웃음을 지으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여자를 강압적으로 취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알렉스가 빈정거리자 카신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루프스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남의 물건을 강탈해가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처참하게 당하고서도 알렉스는 지나칠 정도로 당당했다. 스스로를 패배자로 인정하지 않는 듯, 그는 루프스를 노려보았다. 루프스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더 지랄 맞은 점은 저 자수정빛 눈이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고 카신에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카신은 알렉스를 힐끔 돌아보고 창고를 나왔다. 알렉스는 루프스의 셔츠 사이로 보이는 붕대를 보면서 비웃었다. 시간핵이 제대로 통한 모양이었다.

“레이라가 예전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네. 얼마나 유채 양이 한을 품었으면 아직도 그 상처가 낫지를 않고 있지? 그 괴물 같은 회복력에?”

루프스는 손으로 알렉스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아까 그 말 때문에 꽤나 열이 받은 것 같은데. 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유채 양을 위해서 말해주는 거야.”

알렉스는 계속 빈정댔다. 그는 언뜻 본 아까의 행동으로 유채가 그에게 무슨 취급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괴로워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여자였다. 매번 저와 형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산 여자였다. 알렉스는 이를 갈았다.

“유채 양은 정말로 나에게 부탁했어. 데리고 나가달라고.”

어깨를 누르는 힘이 강해졌다. 알렉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억지로 입을 움직였다.

“유채 양이 내게 이런 말을 했어!”

알렉스는 유채와 리네아의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 * *

“잠이 안 오나 봐요.”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채의 어깨에 알렉스가 담요를 덮어주었다. 유채는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유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별이 예뻐서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별이요? 매일 볼 수 있는 걸 왜?”

“내가 사는 곳에서는 이렇게 많은 별을 보기 힘들거든요.”

유채가 웃어 보이자 알렉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약간의 어색함을 풀기 위해 말을 꺼내었다.

“근데 유채 양, 이상하지 않아요? 아무리 수인들이 서로 싸우느라 사이가 멀어진 건 알겠는데, 왜 여태까지 통혼을 할 생각은 못한 걸까요?”

“사람의 증오와 편견이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거든요.”

유채가 답했다. 인종 차별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뿌리 뽑히지 않았다. 이곳과 다르게 사람은 다 평등하다는 생각이 퍼져 있고 인권의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임에도 아직도 인종 차별은 만연하였다.

사람은 영악하여 서로 무리를 짓고 그 무리 안에서 강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상대를 폄하하고 혐오해야 한다. 그게 차별과 편견의 기저에 깔린 생각이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무리 지었으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상대를 배척했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로와 섞이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저놈들은 싫다 하던 것이 심해지면서 절대 섞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자리 잡아버린 거죠. 사람들 머릿속에 한 번 새져지면 그거, 지우기 힘들거든요.”

“그래도 늑대 놈들 때문이라도 알지 않을까요? 그놈들은 보통 한 번 반하면 거의 집착 수준으로 구애하는데.”

“내가 사는 세계에 이런 말이 있어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 저들은 최근에서야 서로 조금씩 교류하기 시작했다고 했잖아요. 늑대 일족도 같은 일족만 자주 보았으니 다른 일족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 흔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리고 간혹 있다 하더라도 세간의 시선이 좋지 않으니 어디선가 피해서 살았겠지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깊은 산속이나 여기 펠레스 호무스 같은 곳이요.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았겠어요? 살면서 그들의 아이들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보고 진실을 알게 되었겠지만, 그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무릅쓰고 진실을 알릴 수는 없었을 거예요. 워낙 뿌리 깊은 선입견이라 그들이 오히려 배척당할 테니까. 그저 아이들만 세상에 내보냈을 거예요. 아니면 운이 좋은 케이스라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사실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알렉스는 무릎을 딱 쳤다.

“유채 양은 정말 똑똑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죠?”

“에이. 저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요.”

유채가 알렉스의 칭찬이 부끄러운 것인지 손사래를 쳤다. 유채는 알렉스가 농조로 던진 말에 수줍게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알렉스가 턱을 기울이면서 유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유채는 알렉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약간 고개를 뒤로 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너무 우울해하지 말아요. 예쁜 얼굴이 아깝잖아요. 포트리스의 여자들은 예뻐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고, 예쁘게 보이려고 웃으려고 노력하는데, 유채 양은 얼굴이 아깝게 매일 우울해 하잖아요.”

알렉스가 유채의 흘러내린 옆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잘 될 거예요.”

알렉스를 바라보던 유채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알렉스 씨는 너무 친절하신 것 같아요.”

유채는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에 턱을 기대었다. 유채는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다람쥐 수인 소년도, 펜리라는 남자도, 그 남자의 가족도 모두 피해자였다. 피해자에게 가혹한 세상이란 것은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음에도 두 눈으로 목격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우울해졌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도 난 약간 독특하게 생긴 편이에요. 그래서 따돌림도 많이 당하고 괴롭힘도 많이 받았어요.”

알렉스는 유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유채는 언니와의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나를 괴롭힌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내게 부당한 일을 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그와 관련 있는 죄 없는 사람들에게 해코지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물론 복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복수도 중요하죠. 하지만 그 복수가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내가 겪은 일을 그대로 갚아주는 게 불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짜증나게도요.”

유채는 잠시 말을 멈췄다.

“세상은 피해자에 대해서 정말 무심하고 비정해요. 나는 오늘 그걸 또 봤어요. 그래서 너무 답답하고 우울해요. 그리고…….”

유채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손을 들어서 눈물을 닦은 유채는 애써 웃어 보이려고 했다. 알렉스는 그 모습이 가여웠다.

“원래 이렇게 눈물 많은 사람 아닌데, 여기 와서는 정말 너무 많이 우는 것 같아. 질질 짜는 여주인공들 진짜 싫어하는데 걔네들에게 욕한 거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유채는 농담 섞인 말을 하곤 잠시 한숨을 쉬었다.

“펜리 씨 보면서 너무너무 우리 가족들이 그리워졌어요.”

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넘어온 펜리를 보면서 유채는 너무나도 부모님이 그리워졌다. 유채는 그곳에 남겨두고 온 모든 것을 떠올렸다. 정말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곳이 끔찍한 기억만 있는 곳은 아니지만, 유채는 정말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었다.

“난 아직도 이게 꿈이기를 바라요. 이게 그냥 악몽이어서 잠에서 깨고 나면 아빠가 아침을 만들고 있고, 엄마가 언니 병원에 가기 전에 날 깨우고, 그럼 나는 엄마 품에 안겨서 펑펑 우는 거예요. 나쁜 꿈을 꿨다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는데 정말 나쁜 꿈을 꿨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유채는 잔뜩 잠긴 목으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우리 언니가 너무 걱정돼요.  내가 늦게 돌아가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유채는 갑자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는데.”

“어디 볼까요?”

알렉스가 몸을 뒤로 빼더니 유채의 엉덩이 쪽을 가리켰다.

“맞네. 맞아요. 정말 찢어졌네.”

“농담도 참.”

“아니에요, 유채 양. 정말 찢어졌어요.”

알렉스가 정색을 하자, 유채는 혹여나 정말로 옷이 찢어졌을까 봐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옷이 멀쩡한 것을 보고 알렉스를 쏘아보았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 여기 오기 전에 시험을 하나 봤거든요. 근데 그게 점수가 엄청 잘 나왔어요. 빨리 돌아가서 그 점수 써먹어야 하는데, 늦어서 재수할까 봐 걱정이에요. 나 한심하게 이런 걱정도 하고 있어요.”

“좋은 겁니다, 유채 양.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살아갈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고 유채 양이 건강하다는 것이거든요.”

유채는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알렉스도 유채를 돌아보았다. 둘의 시선이 얽혔다.

“저 여기서 잊고 싶은 것들도 많지만, 그만큼 잊고 싶지 않은 것도 많아요.”

유채의 눈가에 눈물이 일렁였다.

“저기 무수하게 많은 별들 하고, 블루벨, 오르페님, 에릭 씨랑 바실리사님, 프레드릭 씨, 알렉스 씨. 뭐 이 정도?”

그리고 유채가 알렉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제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주셔서.”

알렉스는 그 말에 순간 얼어붙었다. 유채는 아이린을 떠올리게 했다. 고운 마음을 지닌 아이린은 수인 때문에 크게 다친 적이 있음에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동물화에 걸려 고통받던 수인들을 돌보았다. 아이린의 진심은 전해졌는지, 그들도 아이린을 존경했다. 그러나 아이린은 결국 헥터의 병사들 때문에 죽었다. 알렉스는 아이린을 지키지 못했다. 아이린은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유채의 모습에 아이린이 겹쳐 보였다.

알렉스는 비웃음을 흘리면서 루프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유채를 끝까지 지켜봐 주고자 남은 것이었으니까. 잊고 싶은 것이 많은 세상 속에서 억지로 잊고 싶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어 살아가던 유채의 마지막이 외롭기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주어서 고맙다고 하더군.”

루프스의 손에 힘이 풀렸다. 알렉스는 아픈 어깨를 억지로 움직여서 루프스의 손을 떨쳐 냈다.

“얼마나 끔찍한 기억뿐이었으면, 고작 좋은 기억이 돼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그러겠어!”

알렉스는 고함쳤다.

“네가 들리는 말처럼 유채 양을 총애라도 한다면, 유채 양을 배려해 주었어야지. 유채 양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내게 그런 말을 할까?”

루프스는 알렉스의 자수정빛 눈동자를 뜯어버리고 싶었다. 빌어먹게도 저 눈동자는 억울한 죽음을 맞았던 라일라의 눈동자 색과 똑같았다.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어주는 눈동자에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어떤 사람을 아낀다는 건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배려한다는 의미야. 값비싼 선물 하나 던져 주는 게 그 사람을 아끼는 것이 아니야.”

알렉스는 정말 왕도적인 것을 이야기하였다. 누군가를 아낀다는 것은 그 사람을 배려한다는 의미였다. 그 사람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기준에 자신이 맞추려 하는 것이었다.

“넌 한 번도 유채 양의 마음을 고려한 적이 없겠지. 가슴에 어떤 피멍이 들었을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겠지. 너는 그저 네 기분만 따라서 행동할 뿐이니까.”

알렉스가 일갈했다.

“입 닥쳐라.”

드디어 루프스가 입을 열었다. 바짝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분노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네가 나에 대해, 레티티아에 대해 뭘 안다고!”

“유채 양의 언니의 이름은 아나?”

루프스는 순간 당황하여 입을 열지 못했다. 알렉스는 루프스를 비웃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모르겠지. 넌 그저 유채 양의…… 크악!”

루프스가 알렉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알렉스는 목이 졸려서 컥컥거리면서도 루프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별 같잖은 걸로 유세를 떠는군. 졸부가 천박하게 돈 자랑하는 꼴이야.”

말은 이렇게 하였어도 그의 가슴은 격한 분노로 날뛰고 있었다. 알렉스와 유채가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떠오르자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하나 때문에 유채가 얼마나 힘들어질지 말하고 그를 최대한 비참하게 만들 작정이었는데 결국 그의 도발에 놀아났다.

“네가 모른다고…… 허억!”

알렉스가 몸부림쳤다.

“처세를 잘해야 할 거다. 네 놈의 말 한마디에 레티티아의 처우가 달라질 수 있거든.”

“너…… 유채 양을…….”

“총애하지, 근데 네놈이 말하지 않았나? 나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지. 너에게는 불행하게도 말이야, 난 네놈이 비참함에 몸부림을 치는 것을 보고 싶거든. 레티티아가 그런 기폭제가 돼 준다면, 나야 좋은 것 아닌가?”

“이 개자식!”

루프스는 알렉스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알렉스가 신음을 뱉었다.

“몸이나 회복해라. 네놈을 오래 살려서 데리고 다녀야 네놈이 비참해지는 걸 볼 수 있지. 그동안 나는 네놈 스스로가 얼마나 무능력한 놈인지 깨닫게 해주겠다.”

루프스는 따라온 부하들 중 치료를 할 줄 아는 이를 불러 알렉스를 맡겼다.

“저놈,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치료해라.”

“예?”

“써먹을 곳이 있어서 그러니 잔말 말고 치료해.”

창고를 나가려던 루프스는 문득 드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멍에 좋은 연고가 있나?”

병사는 루프스에게 연고를 건네었다. 루프스는 그것을 받아 창고를 나섰다.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간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유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유채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직도 셔츠의 단추를 여미지 않아 속살이 그대로 보였다.

“……입어.”

“뭐라고요?”

“옷 입으라고!”

그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유채는 몸을 움찔했다. 순간 루프스가 알렉스에게 무슨 짓을 하고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유채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옷 사이로 그녀의 맨살이 보이자 루프스는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알렉스 씨는요?”

유채가 다급하게 물었다.

“알렉스 씨는요!”

목소리가 절로 격해졌다. 유채는 루프스의 팔을 쥐고 흔들었다. 설마 루프스가 정말 알렉스를 죽여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머리를 꽉 채웠다.

“내가 같이 자주겠다고 했잖아!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했잖아!”

유채가 절규하듯이 외쳤다.

루프스는 유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저도 다쳐서 붕대를 감고 있고 그녀가 칼로 찔렀던 어깨의 상처는 아직도 낫질 않았는데도 유채는 제 상처에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알렉스만 신경 썼다. 그리도 착하고 다정하다면서 제게는 단 한 번도 다정하게 군 적이 없었다.

“안 죽였으니, 옷 입어.”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믿어.”

루프스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유채의 큰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믿지 않으면 당장 그놈 목을 가져올 테니.”

루프스는 반신반의하고 있는 유채의 볼을 쓸었다.

“그러니. 입어.”

유채는 입술을 깨물고 셔츠의 단추를 채웠다. 루프스는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유채는 저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싶고 알렉스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꽉 차 단추를 잘못 채웠다.

“칠칠맞지 못하기는.”

루프스의 손이 다가오자 유채는 놀라서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루프스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채가 잘못 채운 단추를 다시 올바르게 채워주었다. 유채는 아까와는 다른 부드러운 손길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품에서 연고를 꺼내어 손목의 멍에 발라주었다.  유채의 피부는 여려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이렇게 쉽게 멍이 들었다. 그가 손목에 이어 팔에도 연고를 발라주는 동안 유채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두려웠다. 루프스는 유채의 바지를 걷어서 다리의 상처에도 연고를 발라주었다.

“아까는…….”

그는 억지로 목소리를 내었다.

“흥분해서 그랬다. 미안하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약속하겠다. 미안하다.”

유채는 루프스의 사과가 낯설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침대에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양 볼을 잡아서 얼굴을 제게 가까이 붙였다, 유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알렉스는 살려주지.”

“정말인가요?”

“그래. 치료를 해놓으라고 했다.”

“그걸…….”

“믿기 싫으면 믿지 말고. 난 상관없다.”

유채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없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던 암컷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꽉 끌어안았다.

“지금 내가 엄청난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군.”

루프스가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부터 나는 발란테스 카르멘과 결판을 짓기 위해서 양들 놈들의 땅으로 갈 것이다.”

유채도 전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루프스는 수인들의 왕이니 군주가 반란을 진압하러 가는 일은 당연했다. 유채는 참혹한 시신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몸을 떨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너는 안전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지켜줄 테니까.”

“지금…… 나도 그곳으로 간다는 거예요?”

“얌전히 내 옆에 붙어서 따라오면 알렉스 놈을 포트리스로 돌려보내주지.”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요.”

“말했지 않나? 나는 약속 잘 지키는 수컷이라고.”

루프스는 유채의 앞에 작은 갈색 병을 내밀었다.

“마셔.”

“이게 무엇인지 알고 마셔요? 독일지, 약일지, 최음제일지…….”

“나는 싫다는 암컷을 억지로 안지 않는다. 정말로 화내기 전에 마셔.”

루프스는 유채가 제게 세우는 벽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잘 대해주려고 하는데도 항상 저렇게 벽을 세우니 뭘 해줄 수가 없었다. 루프스는 이를 갈면서 병을 유채의 손에 쥐어주었다.

“마셔. 마시는 것도 조건에 포함되니까.”

유채는 눈을 딱 감고 병 속 무색무취의 약을 마셨다. 약간 달짝지근한 것이 꼭 시럽형 물약을 먹는 기분이었다. 다 먹고 나니 유채는 머리가 몽롱해지는 기분에 머리를 짚었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힘이 풀린 손에서 약병이 굴러 떨어졌다. 유채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알았다.

수면제였다.

“이거…….”

유채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유채의 이마가 루프스의 가슴팍에 닿았다. 루프스는 그녀를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그는 유채가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제 어깨에 편하게 기대게 했다. 루프스는 잠든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에게도 알렉스 놈에게 구는 것처럼 다정하게 굴어봐.”

지금처럼 뻣뻣하게 굴지 말고.

루프스는 입 안으로 중얼거리며 유채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내일부터 이동이었다. 잠 든 유채는 물론이고 병자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알렉스 놈도 데려갈 계획이었다. 아니, 온전히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놈을 적당히 구슬려 전쟁에 참가시킨다면 나름대로 쓸모 있을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놈은 나름 강하니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주는 것도 희소식이지만, 죽어주는 것도 희소식이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불편한 듯이 몸을 뒤척이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혀주고 그 옆에 누웠다. 그는 유채가 잠들었을 때 외에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제대로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널 데리고 있어서 뭐라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난 왜 너를 놓지 못하는 걸까.”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끌어안았다. 오늘은 쉬고 내일 움직이기로 했으니 낮잠 겸 눈 좀 붙여도 될 것이다. 유채를 안고 있으니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떠나지 마라.”

그가 작게 속삭였다.

“여기 내가 손닿는 거리에 있어.”

그의 말은 바람처럼 흩어져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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