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늑대왕 루프스-8화 (8/16)

Chapter 8. 과거의 편린과 자각

“프레드릭!”

레이라가 프레드릭의 품에 안겼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부푼 배를 조심하며 그녀를 꽉 껴안았다. 모진 고문을 받는 동안 한 번도 잊지 못했던 레이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레이라는 주먹을 말아 쥐고 프레드릭의 가슴을 내리쳤다.

“나쁜 새끼. 정말 나쁜 새끼!”

레이라는 펑펑 울면서 프레드릭을 주먹으로 계속 때렸다.

“레이라. 나 아파. 많이 아파.”

프레드릭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 레이라의 밝은 금발을 매만졌다. 진짜로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레이라가 가볍게 치는 주먹에도 아팠다.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말에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눈물만 쏟았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얼굴을 감싸 쥐고 그녀의 눈물을 입술로 훑었다. 레이라는 그제야 프레드릭이 제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야윈 얼굴을 손등으로 쓸었다.

“많이 다친 거야? 어디 아픈 곳은 없어?”

“괜찮아.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레이라.”

“알렉스는?”

“도와줄 사람이 있어서 좀 더 있다가 오겠대.”

프레드릭은 레이라를 품에서 놓고 지도를 찾았다. 프레드릭의 스승인 키르케의 에어리얼은 추적이었다. 그녀의 에어리얼로 만든 것이 바로 이 지도였다. 늘그막에 제자로 들인 사고뭉치 형제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겨 있는 지도였다. 키르케는 형제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지도에 형제의 위치와 상태 등을 표시하는 마법을 걸어놓았다. 프레드릭은 키르케의 유품으로 지도를 물려받아서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프레드릭이 지도 위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쓸자 지도가 빛을 내면서 몇몇 사람들의 이름을 띄웠다. 프레드릭과 레이라는 포트리스에 표시가 되어 있었고, 알렉스는 펠레스 호무스의 사크로 산 근처 마을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부상을 입었다는 표시가 반짝이자 레이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알렉스는 괜찮은 거야?”

“……괜찮을 거야.”

레이라에게 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습윤하고 낮게 가라앉은 말이었다. 만일 스승님이라면 알렉스의 상태를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을 테지만, 프레드릭의 재주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프레드릭은 부디 알렉스에게 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기를 희망했다. 알렉스를 억지로 끌고 돌아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되기를 빌었다. 프레드릭은 알렉스를 믿었다. 알렉스는 반드시 살아 돌아올 것이다.

“레이라.”

“응. 프레드릭.”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등을 쓰다듬어 위로하며 대답했다.

“헤임달이 혹시 와서 무어라 하지 않았어?”

“물고기 몇 가리 가져다주면서 수인들 사이의 소문을 알려준 적은 있어.”

“무슨 소문?”

“수인들이 저들 사이에 돌고 있는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간을 노리고 있다고 조심하라고 경고해 주고 갔어. 실제로 최근 포트리스 사람들이 실종되고 해서 뒤숭숭하거든.”

“하.”

레이라는 프레드릭이 짜증을 내는 것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프레드릭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헤임달은 사람들의 마음이 약해졌을 때를 노리고 말 한마디로 그들을 조종했다. 이제 그의 수법을 알 것 같았다.

“레이라. 나 지금부터 조금 위험한 일을 하나 할 거야.”

프레드릭이 레이라의 어깨를 감싸 쥐고 말했다. 레이라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임달이 수상해. 그가 뭔가를 숨기고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에 대해 조사해 볼 생각이야.”

“그게 왜 위험하다는 거야, 프레드릭.”

“해임달이 뭘 숨기고 있는 건지 모르거든.”

적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가장 큰 공포이자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 상대가 무슨 패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면 공격하는 사람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 라일라님의 죽음에 대한 사건을 다시 캐보려고 해.”

라일라는 과거 이 포트리스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부패한 신전에서 도망쳐서 자유를 찾아온 그녀는 성력(聖力)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치료해 주며 스티폴로르에 정착했다. 포트리스를 위하여 베니니타스를 설득하기 위해 자청해서 울피누스 호무스(여우 수인들의 땅)로 갔으며, 베니니타스를 설득하고 그의 마음까지 얻었다. 라일라는 베니니타스의 부인이 되었고 그것은 포트리스의 안정을 불러왔다.

“그걸 왜? 이미 증거도 없고, 렉스님도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실 텐데.”

라일라가 죽고 그녀가 평화와 화합을 위해 노력했던 것 모두가 물거품이 되었다. 그 누구도 라일라의 죽음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없었다. 프레드릭은 그녀의 죽음에 뭔가 더 숨겨져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최대한 노력해 볼 거야. 그리고 만약, 아주 만약에 말이야.”

프레드릭은 유채가 말해주었던 가설을 떠올렸다. 시신을 태운 건 살해 방법을 감추기 위해서이거나 진짜로 누가 죽은 건지 감추기 위해서일 거라고 했다. 프레드릭은 후자에 좀 더 타당성을 두었다.

“베니니타스의 두 아들인 벤자민과 프리드가 살아 있다면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프레드릭? 벤자민과 프리드가 살아 있다고? 그게 무슨.”

실낱 같은 가능성이었다. 만일 벤자민과 프리드가 살아남았다면? 이유가 있어 정체를 감추고 있거나 혹 기억을 잃은 채 포트리스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들을 찾아내면 그날의 진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라일라를 죽인 그들은 벤자민과 프리드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고, 확인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들은 형제가 살아 돌아와 그들을 방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죽은 것으로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시체까지 발견됐으니 형제가 살아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게다가 베니니타스의 아들의 얼굴을 아는 이들까지 드물었다. 게다가 형제는 동물형으로 변하지 못하는 혼혈이었음으로, 인간들을 싫어한 수인들에 손에 제거되는 것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 레이라.”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그토록 그리웠던 입술이었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에게 깊게 입을 맞추곤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알렉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레드릭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 *

“그래서, 이제 이쪽은 거의 다 진압된 건가?”

루프스가 지도를 짚으며 물었다.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 수인 일족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압되었다. 쥐 일족과 토끼 일족 특유의 인해전술과 늑대 일족의 전투력을 그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루프스의 압도적인 강함이 적들의 사기를 꺾어놓은 것도 주요했다.

“발란테스 카르멘은 겁쟁이처럼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고.”

루프스는 카르멘이 있을 곳의 위치를 가늠했다. 제 몸 챙기는 것으로 유명한 암컷이니, 분명히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숨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루프스는 적당한 곳을 추측해 보았다. 양과 염소 일족의 땅은 평원에 위치했다. 이 땅에 딱 한 곳, 스티폴로르를 관통하는 산맥의 자락이 닿는 곳에 진입로가 하나밖에 없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루프스는 턱을 쓸었다.

분명히 소수의 호위만 데리고 그곳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발란테스 카르멘의 한심한 실력은 그가 가장 잘 알았다. 카르멘과 그녀의 호위부대는 종이병사와 다름없었다.

“발란테스 카르멘은 어디 있다고 생각되나?”

“이쪽의 산맥에 있는 요새에 있을 거라 추정됩니다.”

카신이 대답했다.

“양 수인 일족의 잔당은 얼마면 처리될 것 같나? 혹시 내가 개입해야 할 정도인가?”

“아닙니다. 저와 아리아면 충분히 해결 가능합니다. 혹시 소 수인 일족 측으로 합류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이유나 들읍시다. 내 아들을 도대체 왜 죽인 겁니까! 내 아들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내 아들을 도대체 왜 죽인 겁니까!’】

발란테스 카르멘이 죽은 아들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피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그는 그저 기분이 나빠서라고 대답했다. 카르멘의 아들인 드미트리는 생각할 때마다 죽여 버리고 싶은 놈이었다.

루프스는 이제 죽을 암컷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자비를 베풀어 줄 생각이었다.

“카르멘에게는 내가 간다. 요새의 정확한 위치가 어딘가?”

“예? 그건 안 됩니다!”

“왜? 내가 카르멘과 그녀의 호위를 못 막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오라…….”

아리아가 말끝을 흐렸다. 아리아는 결코 루프스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었다.

“저…… 만에 하나라는 것이.”

“그런 것 무서워했다가는 아무것도 못 한다.”

루프스가 지도를 가리켰다. 양 수인 일족이 마지막까지 버티던 곳이었다. 아리아는 결국 요새의 위치를 표시했다. 루프스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귀찮은 놈들을 더 이상 상대 안 해도 되겠어.”

루프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리아와 카신은 지금 토끼 수인과 쥐 수인, 그리고 우리 늑대들을 이끌고 이들을 상대해라. 그 후에 이 요새로 와. 발란테스 카르멘을 처리해 놓을 테니 여기서 합류해서 소 수인 일족의 뒤를 치지.”

“하오나…….”

“내 실력은 내가 가장 잘 알아. 소 수인 일족은 어떻게 됐나?”

“초반의 기세와는 다르게 저희 쪽이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바실리사님과 에릭의 공이 컸습니다. 지금 거의 독수리 일족의 땅에서 몰아낸 상태입니다.”

“잘되었군. 다시 말하지만, 양동작전이다. 너희는 양 수인 일족을 치고, 난 발란테스 카르멘을 친다. 불만 있나?”

카신과 아리아는 루프스에게 더 이상 반발하지 못 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루프스가 이동을 한다면 아무래도 걸리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럼. 지금 그, 레티티아님은…….”

“루프스님!”

늑대 수인 병사 하나가 막사에 들어와서 고개를 숙였다. 늑대 수인 병사는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레티티아님이 음식을 드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는 최대한 말을 골랐다. 유채는 단순히 식사 거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루프스를 불러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떠올리면서 늑대 수인 병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루프스는 예상한 일인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늑대 수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겠다. 가봐. 가서 네 일을 봐라.”

루프스는 다시 한 번 더 아리아와 카신에게 작전을 상기시키고 막사를 나섰다. 유채는 그와 같은 막사를 사용했다. 그가 천막을 걷고 들어가자 유채가 그를 쏘아보았다.

“안 먹어요, 이거.”

유채가 제 앞에 놓인 묽은 죽 같은 음식을 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유채는 요즘 제정신으로 깨어 있는 날이 얼마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기운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도 고된 일을 당하다 보니 체력이 떨어져 잠이 많아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곧 유채는 제가 지속적으로 수면제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밥만 먹으면 쓰러지듯이 잠이 들고 눈을 뜨면 또 새로운 곳에 와 있는데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당신이 먹어보지 그래요?”

“네가 먹을 음식을 내가 왜? 배고프지 않나?”

“당신이 못 먹을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유채는 루프스를 쏘아보았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여기에 수면제를 섞어놓았잖아요. 한참 걸렸어. 물에 섞은 건지 밥에 섞은 건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어서. 왜 이런 짓을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망갈 것 아닌가?”

루프스가 유채의 턱을 잡아서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당당한 눈동자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도망가겠다는 의지를 아직도 꺾지 않은 것이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먹어. 묶어놓을까 하다가 보다 신사적인 방법으로 바꿔준 거니까.”

“신사적인 방법?”

유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당신이 뭘 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내가 모르는 새에 알렉스…….”

“그놈의 알렉스!”

루프스가 버럭 소리 질렀다. 매번 유채는 알렉스만 찾았다. 그는 괜찮으냐, 다친 건 얼마나 나았느냐, 새로 다치진 않았냐. 루프스는 처음에는 참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 자식이 뭐라고 제게 알렉스에 대해서만 묻느냔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얌전히 있으면 알렉스를 살려준다고 약속해 주었음에도 그녀는 믿지를 못했다.

유채는 저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루프스는 깊은 물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저는 약속을 지켰다. 알렉스를 치료해 주고 그의 목숨을 붙여놓았다. 하지만 유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루프스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분명 네가 떠나지만 않는다면 살려준다고 약속했는데. 왜 그리 나를 못 믿는 것이지?”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당신이 나 몰래 알렉스 씨를 죽이고 사소한 걸로 내가 약속 어겼다고 자기는 정당하다고 우기면?”

“날 그렇게 치졸한 놈으로 보는 건가!”

루프스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를 버럭 냈다가도 유채가 움찔하면 그는 금세 마음이 약해졌다. 루프스는 무릎을 굽혀서 유채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럼, 네가 나에게 신뢰를 주어봐. 내가 떠나지 말라고 했는데도 너는 떠나려는 생각밖에 안 하지 않나? 그러니 내가 이렇게 나오는 것이고. 그러니 내가 너를 믿게 만들어봐. 그럼 저런 짓 더 이상 하지 않지.”

“……당신은 정말로 내 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죠? 내가 떠나려는 이유를 아직도 몰라요?”

“알아. 하지만 안 돼. 그냥 잊어.”

네가 없으면 내가 이상해지는 기분이라서 그래. 루프스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렇게 걱정되면 보여주지. 아주 잘 살아 있다. 멀쩡하게 살아서 아주 잘 싸우고 있지.”

“뭐라고요! 왜 알렉스 씨를 전쟁터에 내보내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유채가 또 알렉스만 걱정하자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지금 그만 싸우러 나가는 게 아니고 저도 맨 앞에서 적들과 맞선다. 그런데도 제 걱정은 눈곱만큼도 하질 않는다. 루프스는 제가 서로 절절히 사랑하고 있는 연인을 억지로 갈라놓는 악역이 된 기분이었다. 루프스는 이를 물고 대답했다.

“본인이 하겠다고 한 거니 토 달지 마라. 그리고 나도 전투에 나가고 있어.”

“아니, 왜 알렉스 씨가…….”

“입 다물어. 그렇지 않으면 알렉스고 나발이고 아무도 안 보여줄 테니까.”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깍지를 껴서 잡았다.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꽉 잡았다. 유채는 알렉스를 위해서 그의 손을 참아냈다.

루프스는 유채를 데리고 알렉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수많은 시선이 유채에게 꽂혔다. 이 전쟁의 원인이 유채라고 생각하는 수인들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저를 향해 쏟아지는 적대감을 고스란히 느꼈다.

알렉스가 있는 곳은 야영지의 후미로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그는 검을 허리에 매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알렉스가 뒤를 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유채 양?”

“알렉스 씨!”

유채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알렉스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이었다. 셔츠가 약간 불룩한 것으로 보아 붕대를 감고 있는 것 같아 유채는 그에게 미안해졌다. 유채는 알렉스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안 되지.”

루프스는 저를 앞서가려는 유채를 뒤로 잡아당겼다. 루프스의 팔이 유채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알렉스를 보자마자 제 앞에서는 잔뜩 구기고만 있던 표정을 풀고 환히 웃은 것이 정말로 보기 싫었다.

“여기서 말해. 확인만 시켜준다고 했지 않았나?”

루프스는 고개를 숙여서 유채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맞추고 작게 속삭였다. 유채는 제 허리를 감고 있는 루프스의 팔을 치워내고 싶었다. 하지만 수틀리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인간이라 꾹 참고 알렉스만 보았다.

“괜찮아요? 몸은 정말 괜찮은 거예요?”

“예. 보시다시피 많이 나았습니다.”

“이 싸움엔 왜 꼈어요? 당신하고 관련된 것도 아닌데…….”

“이 전쟁은 수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 수인들 때문에 포트리스도 난리가 났을 거예요. 난 포트리스의 안정을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알렉스는 유채를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는 루프스를 힐끔 보면서 거짓말을 했다. 전쟁을 오래 끄는 것보다 빨리는 끝내는 것이 확실히 포트리스에도 이득이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전쟁에 참여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유채였다. 루프스가 유채의 처벌 수위를 가지고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루프스의 협박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생각 때문에 결국 루프스의 제안에 동의했다. 알렉스도 루프스의 막사 안에서 좀처럼 나오지 못하던 유채를 볼 수 있어서 안심했다. 다행히 그녀도 어디 아픈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몸은 괜찮아요?”

“저도 괜찮아요. 알렉스 씨, 다행이에요. 그리고 정말 미안해요.”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인데요.”

알렉스는 유채를 위로하기 위해서 손을 뻗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였다.

알렉스의 손은 루프스의 손에 의해서 가로막혔다. 루프스는 알렉스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유채에게 속삭였다.

“이 정도면 됐지. 확인했으니까 가서 밥이나 먹어. 배곯지 말고.”

루프스가 알렉스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유채를 잡아끌었다. 유채는 다리에 힘을 주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나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밥 먹어…….”

알렉스가 말을 갑자기 끊더니 검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유채의 몸이 뒤로 빙 돌려졌다. 루프스가 유채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유채는 루프스의 넓은 등 너머로 상황을 보았다. 동물형의 모습을 한 살쾡이 일족의 수인들이었다. 패잔병이 분명한 그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피투성이 병사의 눈에 살기가 가득하였다.

“이제는 자살 특공대라도 보내는 건가.”

루프스가 한심해하면서 말했다. 살쾡이 일족은 이미 박살을 내주었다. 귀찮을 정도로 잦은 습격에 열이 받아서 두 번 다시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짓밟아 주었는데도 그 와중에 살아남은 놈들인 모양이었다.

[네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은 아깝지 않다!]

루프스는 떨고 있는 유채를 힐끔 돌아보았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안고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공격을 피했다. 한 주먹이면 끝날 놈들이지만 지금은 유채가 우선이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저들을 한 번에 처치하겠다고 날뛰면 다치는 것은 유채였다.

어느새 달려온 아리아와 카신이 늑대로 변해서 그들을 포위했다. 어차피 심하게 다친 놈들이고 채 열 명도 안 되는 수로 죽을 각오로 뛰어든 것이라 그들은 눈에 뵈는 것 없이 날뛰었다. 원래 죽음을 각오한 놈들이 제일 무서운 놈들이었다. 그들은 평소의 실력 이상의 실력을 내었다.

루프스가 충분히 보호해 주고 있었지만 유채는 코앞에서 벌어진 전투에 겁을 집어먹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떠는 유채와 살쾡이들을 번갈아 보던 루프스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생각을 바꾸었다. 루프스는 놈들을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서 유채를 놓았다. 빨리 정리하고 유채를 막사로 옮겨놓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위해서 위르형으로 그들을 상대했다.

무려 살쾡이 세 마리가 그를 노렸지만, 그 누구도 루프스에게 이렇다 할 만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루프스는 위르형인데도 그들의 목을 뜯어내거나 다리를 한쪽을 뜯어내는 등에 성과를 올렸다.

피투성이가 돼서 살쾡이들을 도륙하는 루프스의 모습을 본 유채는 충격을 받았다. 더 이상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잔인한 광경에 유채는 벌벌 떨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모두가 전투에 정신이 팔린 새 유채는 점점 경사 높은 비탈 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년이다.]

살쾡이 한 마리가 유채를 향해 달려들었다. 턱이 날아가고 이미 다리 한쪽은 없는데도 살쾡이는 죽을힘을 다해 유채에게 달려왔다. 유채는 도망가기 위해 뒷걸음질을 쳤다.

“꺄악!”

유채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루프스는 살쾡이 한 마리의 목을 찢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가 유채를 공격하는 살쾡이를 뒤에서 덮쳤다. 루프스의 눈에 산비탈로 굴러떨어지는 유채가 보였다. 루프스는 다급하게 산비탈을 미끄러지듯이 타고 내려갔다.

[루프스님!]

아리아가 외쳤다. 루프스는 떨어지는 유채의 팔을 잡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정작 그가 중심을 잃고 고꾸라졌다.

“젠장할.”

루프스는 산비탈을 구르기 시작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최대한 보호하면서 상황을 판단했다. 그는 아리아에게 크게 외쳤다.

“작전대로 한다! 나는 발란테스 카르멘에게 간다!”

소리가 닿았는지는 모르지만 루프스는 유채의 몸이 다치지 않게 최대한 끌어안고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젠장.”

굴러떨어지는 속도에 루프스의 무게가 더해져 그가 붙잡는 나무뿌리마다 족족 부러졌다. 루프스는 욕을 중얼거렸다. 루프스는 산비탈에 기울어져서 자란 굵은 나무를 붙잡았다. 거친 나무껍질에 살이 긁히고 패였다. 나무는 겨우 그 무게를 지탱해 냈다. 루프스는 유채를 안고 있는 팔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위를 올려다보며 루프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더 경사가 가팔랐으면 절벽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하아…….”

루프스는 오른팔로 단단하게 나무를 잡고 왼팔로는 유채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유채는 기절한 것인지 눈을 감고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냥 좀 더 구를 걸 그랬나.”

지금 있는 곳에서 바닥이 멀지 않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가 평지에 주저앉았다.

그는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루프스는 유채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쳤다.

“이번만큼은 도망가서는 안 된다.”

양 일족은 마레 위르에게 당한 것이 많아서 마레 위르에게 적대적이기로 손이 꼽히는 일족이었다. 제 펠릭스 다우스인 유채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분풀이를 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지켜줄 테니. 제발 도망가지 마라.”

루프스가 유채의 귀에 속삭였다. 잠시 쉰 후 루프스는 유채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채의 안전을 위해서, 전쟁의 끝을 위해서 움직여야 했다.

* * *

유채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팔다리가 욱신거리는 것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일어나려고 손을 앞으로 뻗는데 뭔가 북슬북슬하고 따뜻한 것이 만져졌다. 그리고 살랑거리며 간지러운 것이 코와 입을 간질였다.

[정신을 차렸나?]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유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코앞에 은빛의 늑대가 청회색의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루프스?”

[본 적이 있을 건데, 그렇게 낯선 반응을 하면 내가 민망하지.]

루프스가 약간 볼멘소리로 말했다. 유채는 자신의 손이 짚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루프스의 앞다리를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유채는 당황해서 손을 바로 떼었다.

[그리 무겁지는 않다.]

“여기는 어디예요?”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카르멘의 요새 근처일 거다.]

유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둑어둑한 밤하늘이 보였다. 유채는 기억을 되짚었다. 굴러떨어질 때, 루프스가 저를 향해 손을 뻗던 것이 떠올랐다. 유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어두운 숲 속에는 저와 그 단둘만 있었다.

“하.”

[도망갈 생각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아. 여긴 적진 한복판이고 넌 힘없는 암컷 마레 위르다. 분명히 좋지 않은 꼴을 당할 거다.]

“당신하고 있어도 똑같겠죠.”

유채는 손등의 권능의 표식을 보면서 말했다. 루프스와 단둘이라면 그를 따돌리고 권능을 이용해서 에클레시아로 이동할 수 있다.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권능을 이용하면 최소한 도망은 다닐 수 있었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요, 유채 양.’】

알렉스가 있었다. 만일 도망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알렉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알렉스를 찾아야 하는데 이렇게 떨어져 버렸으니 그와 함께 탈출하는 방법은 사용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셀레네의 말대로라면 권능을 이용하여 공간을 이동하는 방법은 리네아가 하던 것처럼 공간을 찢어야 하는 것이다. 유채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원하는 곳 어디든 이동할 수 있냐고 물어봤을 때, 리네아는 가려는 곳의 지명을 정확히 알거나 그곳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이동할 수 있다고 했었다. 유채는 알렉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그를 데리고 탈출할 수 없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손등만 내려다보고 있자 혀를 내어서 손등을 핥았다.

“왜, 왜 그래요!”

유채는 당황해서 빽 소리 지르며 손을 뺐다. 루프스의 침이 진득하게 손등에 묻어 있었다. 유채는 그걸 어디에 닦아야 하나 생각하며 루프스의 털과 자신의 옷을 번갈아 보았다.

[다친 것 아닌가? 흉터인 것 같은데. 피가 멎으라고 한 것이다.]

“피는 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예요!”

유채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네 머리가 가리고 있어서 잘 안 보였다. 날도 어둡고 하니.]

“그리고 지혈한다고 침을 바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늑대 수인 일족의 침에는 지혈 효과가 있다. 전에 너도 효과를 보았을 텐데.]

“그게 언제…….”

루프스가 늑대의 모습에서 다시 원래의 건장한 체격의 은빛 머리의 미남자로 돌아왔다. 그는 유채의 왼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등에 있는 문양을 살폈다. 얼기설기 엮인 회오리 문양 세 개가 마치 꽃처럼 새겨져 있었다. 유채의 말대로 피는 나는 것 같지도 않고 꽤나 오래전에 생긴 상처 같았다. 진작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이상했다.

“알렉스 놈 실력이 얼마나 떨어지면, 이런 흉터를 남기나.”

루프스가 혀를 차자 유채는 제 손을 빼내 뒤로 숨겼다.

“흉터로 치자면 당신이 남긴 게 더 많아요. 등에도 있고 또 어깨도 있고요!”

“등은 네가 잘못 넘어져서 생긴 것이고, 어깨도 내가 아니라 내 늑대가 남긴 것이지. 네가 구해 달라고 했으면 생길 일도 없었겠지.”

“아. 그러세요. 그 늑대 주인이 누구였더라.”

루프스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유채의 어깨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네 어깨를 지혈해 준 것도 나다. 기껏 치료해 주었건만 더럽다는 듯이 바라보면 내 기분도 나쁘지.”

“어깨에? 당신의 혀가 닿았다고요?”

유채는 소름끼쳐 하면서 오른쪽 손으로 어깨를 더듬었다. 그때 바로 기절해서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루프스가 제 어깨를 저렇게 핥았다니, 유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루프스는 자신이 무슨 엄청난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반응하는 유채가 좀 짜증이 났다.

“그리도 침 묻은 것이 짜증나면 닦으면 될 것이지. 뭐 이리 뭐 씹은 표정으로 나를 봐?”

“어디다 닦아요? 내 옷? 당신이 묻혀놓고 내 옷에 닦아요?”

“정말…….”

루프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유채의 팔목을 잡아끌어서 제 옷자락에 그녀의 손등을 닦았다. 유채는 피가 묻은 루프스의 옷자락에 손등을 닦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유채는 손등에 묻은 침이 모두 닦이자 루프스의 손을 뿌리쳤다. 루프스는 별것도 아닌 일에 유난을 떠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이젠 떨지 않는군. 내가 손만 잡아도 달달달 떨더니.”

유채는 당황했다. 그동안 유채는 되도록 루프스의 앞에서 떨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였다. 그리고 루프스가 그것을 모르는 줄 알았다.

루프스는 어색하게 굳어 있는 유채의 목선을 보았다. 괜한 것을 물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예전보다 상태가 나아진 것 같아서 넌지시 던진 말이었는데 저렇게 당황할 줄은 몰랐다. 루프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말하기 싫으면…….”

“오라클라 리네아가 고쳐줬어요. 성력(聖力)으로 이런 것도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유채는 셀레네가 아니라 리네아를 핑계로 대고 둘러댔다. 셀레네와의 이야기는 절대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리와인더의 조각은 사람들을 유혹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위험하다고 알려줘도 리와인더 조각은 결국 사람을 유혹해 낼 것이다. 루프스가 그것을 알고 조각을 찾아서 소원이라도 빌면 끝이었다. 저 욕심 많은 저열한 인간을 유혹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만큼은 리와인더의 조각 이야기를 끝까지 숨기기로 했다.

루프스가 유채의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유채는 귀찮다는 듯이 그의 손을 쳐 내었다.

“그거 다행이군. 오르페가 후유증이 평생을 갈지도 모른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당신이 나를 걱정해요?”

“걱정한다.”

그러니 눈앞에 없으면 계속 생각이 나고 유채가 호수에 빠졌을 때 고민 한 번 하지 않고 구하러 들어갔고, 헥터가 이리 날뛸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채를 구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걱정돼. 그러니 가만히 있어. 도망가지 말고.”

“나는 당신하고 있는 게 더 무서워요. 변덕이 죽 끓듯이 하는 남자잖아요. 당신.”

“그래도 나는 헥터 같은 놈 짓은 안 해. 카를리티오 때는 정말 실수였으니 그건 예외로 하지. 아무튼 그때 일은 진심으로 미안하다.”

“나랑 처음 만난 날 한 말도 예외예요?”

“그건 협박 겸 통보지. 네 주인이 된 자로서 내가 어떤 이인지 알리는 통보이자 협박.”

“참으로 자상한 분이시네요. 신사답고.”

유채가 빈정거렸다. 루프스는 가볍게 웃었다.

“폭군에게 필요한 것이지, 피의 복수, 협박. 안 그런가?”

루프스는 유채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유채와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었다. 언제나 유채는 돌아가게 해달라고만 했고 루프스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협박만 했었다.

루프스는 웃지는 않아도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항상 제 앞에서는 겁에 질려 있거나 무표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었다. 웃지 않아도 예뻤다. 하긴 유채에게는 안 예쁜 구석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본인이 폭군인 건 아나 봐요.”

“말했지 않나? 그렇게 치졸하고 옹졸한 수인은 아니라고…….”

“치졸하고 옹졸하지 않으면, 나 좀 보내주면 안 돼요?”

“안 돼.”

유채의 말에 거의 곧바로 대답했다. 유채는 이를 악물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물어봐라.”

“내가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어서 이러는 거예요?”

유채는 루프스의 화를 받을 각오를 하고 물었다. 어차피 아까 전부터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정도로 건방을 떨어댔으니 이제 와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이제는 그의 비위를 맞추어봤자 가식으로 볼 것이 뻔했다. 유채는 그냥 막나가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난 당신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어요? 독특해서? 독특한 거 수집하는 수집벽이라도 있어요? 아니면 과시용? 차라리 나를 묶어놓고 정부로라도 썼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당신이 나한테 하는 일이라고 억지로 스킨십하고 키스하고 당신 취향대로 나를 꾸며놓고 방에 가두어두는 일뿐이잖아. 도대체 내가 뭐가 마음에 들어서 안 놔주는 거예요? 난 당신 찌르고 도망까지 쳤어요.”

루프스는 자신을 물속에 밀어 넣는 것 같은 유채의 질문을 듣기만 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왜 날 아직도 놓지 않는 거예요? 도대체 나를 왜.”

“……아름다워서 그런가 보지. 나는 탐미주의자다.”

루프스는 대강 둘러대었다.

“예쁘기로 치자면 당신 옆에 졸졸 따라다니는 아리아도 예뻤어요. 예쁘고 강하고, 당신들이 원하는 강한 자손을 낳기에 좋은 여자인데, 아리아나 달고 살지 나는 왜 어디도 못 간다는 거예요? 관상용 첩이라도 되라는 거예요?”

“우리 늑대들은 첩 같은 것 안 둔다. 오직 한 명의 암컷에게만 충실하지. 그 암컷만 바라본다.”

“그래서 당신이 나한테 충실하겠다고 붙잡아두는 것도 아니잖아요.”

충실.

루프스는 유채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들렸다. 왼쪽 가슴이 선득였다. 루프스는 유채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왼쪽 가슴 가까이로 손을 가져가 꾹 눌렀다. 손아래의 느껴지는 심장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빨랐다. 충실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유채의 붉은 입술이 예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원망스러웠다. 그는 유채의 어깨를 잡고 품으로 끌어안았다. 유채는 갑자기 저를 와락 끌어안는 루프스의 행동에 당황하여 반항했다.

“뭐예요! 당장 안 놔요!”

“잠깐만 이대로 있어봐.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왜 그럴까?

루프스도 수백 번 더 생각을 해보았던 문제다. 하지만 뭔가를 알기 위해서 한 걸음 디디면 끝을 알 수 없는 함정 속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 이상의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기에는 진탕의 물웅덩이가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라이칸의 이름을 버리고 루프스가 된 뒤로는 더 이상 복잡한 것은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기분에 충실한 대로 살았다. 유채가 곁에 있다는 것에 루프스는 안심했고, 뭔가 몽글몽글한 것이 가슴 속 깊숙이에서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그 몽글몽글함이 나쁘지 않아 그는 유채를 놓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다. 그것을 알았으면 너도 나도 괴롭지 않았겠지.”

루프스는 유채를 품으로 깊숙이 끌어안았다. 유채를 안을 때면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번민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그를 괴롭히는 죄책감도 더 이상 밀려오지 않았다. 평온했다. 열셋 이후로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평온함이 그를 감쌌다. 그래서 놓을 수 없었다.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겠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뭐든 가져다주겠다. 말만 해. 뭐든 해주겠다. 그러니,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유채는 매번 도돌이표 같은 대화에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안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가득한 하늘은 어둑어둑해져서 한밤중을 향해가고 있었다.

“어차피 아무리 이야기해 봤자 결론은 똑같아.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내일 움직이기 위해서 쉬는 것이 좋다.”

루프스는 거대한 은빛의 늑대로 변해서는 유채를 향해 말했다.

[내 다리에 머리를 베고 눕든지, 아니면 배에 머리를 베고 눕든지 선택해라.]

“내가 당신을 왜 베고 있어야 해요?”

[숲의 밤은 추워. 얼어 죽고 싶지 않으면 내 곁에 누워. 그리고 딱딱한 땅바닥보다 내가 나을 텐데.]

유채는 딱히 부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유채는 주춤거리며 루프스의 몸에 조심스럽게 기대었다. 몰캉몰캉한 물침대에 누운 기분이라 이상했다. 하지만 일단 폭신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것에 만족했다. 유채는 몸을 뒤척이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루프스는 머리를 살짝 들어서 유채가 눕는 것을 보았다.

[불편하지는 않지?]

“물침대 같아서 조금 이상한데, 불편하지는 않아요.”

유채의 머릿속으로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네가 정신 차리면 도망갈 것 같아서 나무 넝쿨이라도 가져와서 나무에 묶어둬야 하나 걱정했는데, 왜 이리 고분고분한 건가?]

“내가 도망가면 알렉스 씨 죽일 거 아니에요? 아니면 반죽음이 될 정도로 고문하거나.”

루프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도대체 그 자식이 왜 좋은 건가? 잘생긴 것도 아니고 부유한 것도 아니고 강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 자식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착하잖아요. 위험하고 짐 덩이밖에 되지 않을 나를 버리지 않고 데리고 다녀주고, 나를 위해 당신을 막다가 다치기까지 했어요.”

[나도 너 구해주다가 다쳤다. 헥터 때는 멍도 들고.]

루프스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채는 눈만 굴려서 루프스의 왼쪽 앞다리를 보았다. 위르형일 때 다친 것은 그대로 동물형에도 나타났다. 아까 전에 옷자락 틈으로 루프스의 왼쪽 팔이 길게 찢긴 것을 보았다. 혹시나 싶어 보니, 왼쪽다리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별 다른 반응이 없자 다시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는 융통성이 없는 거냐, 아니면 지나치게 바보인 거냐. 나 같았으면 진작 알렉스 놈을 버리고 도망쳤을 거다.]

“난 내가 지킬 수 있는 건 지키고 싶어요.”

루프스는 유채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자세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저 그 차분하고 결연한 목소리만 들려왔다.

“그럴 만한 힘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도 나는 죄악으로 봐요. 그러니까 나는 내가 지킬 수 있는 것은 다 지킬 거예요. 언니도, 알렉스 씨도, 블루벨도 모두 지킬 거예요.”

[그래봤자 망가지는 것은 너다. 약한 주제에 욕심만 많지.]

“상관없어요. 내가 약하건 강하건 그런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요.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에요. 그들이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해요. 그러니까 난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후회하지 않아요. 그게 내 정의예요.”

유채의 말이 그의 가슴에 콕 박혔다. 가슴이 다시 불규칙하고 빠르게 뛰었다. 유채가 돌아눕자 루프스는 그녀의 뒤통수밖에 볼 수 없었다.

유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혀를 작게 차더니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루프스는 고개를 번쩍 들어서 유채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유채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몹시 궁금했다.

“나는 별로 많이 안 다쳤어요. 근육통만 조금 있어요.”

아무리 끔찍하게 싫은 인간이라고 해도 최소한 산비탈에서 굴러떨어져 머리가 깨져 죽을지도 몰랐던 저를 품에 안고 대신 굴러준 인간이었다. 이 정도 인사는 괜찮을 것이었다.

“팔에서 피 나던데. 처치 잘해요.”

[너.]

“나 잘 거예요. 그러니까 더 이상 말 걸지 말아요.”

유채는 단호하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이내 유채의 숨이 고르게 변하면서 깊은 수마 속에 빠져들었다. 루프스는 내내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위르형으로 돌아가 어찌 자고 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유채가 깰 것이 걱정되었다. 루프스는 그저 늑대인 상태로 가만히 동그란 유채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루프스는 그 네 자의 말을 속으로 음미했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루프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전에 그 바닷가에서 유채가 올려다보고 미소를 보이던 그 밤하늘과 같았다. 루프스는 저 밤하늘을 볼 때마다 유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별것 아닌 저 밤하늘이, 이제껏 수없이 봐왔던 밤하늘이 아름다워 보였다.

다 유채 때문이었다.

루프스는 고개를 내려서 유채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그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이 떨렸다.

* * *

유채는 루프스의 등에 올라타서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루프스가 목이 졸린다며 자길 죽일 심산이냐고 투덜거렸지만, 유채는 그의 말은 모두 무시했다. 유채의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의 등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이제야 유채는 루프스가 저를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쫓아올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사람에게서 그만큼 도망갔었던 게 천운이었다.

“좀만 천천히 가면 안 돼요? 너무 빨라요.”

[발란테스 카르멘이 그 빌어먹을 요새에서 도망치기 전에 가야 한다.]

“근데, 그런 곳에 나를 달고 가도 되는 거예요?”

유채가 날카롭게 물었다. 루프스가 그제야 속도를 늦췄다. 유채는 한결 느려진 속력에 안정감을 느끼고 루프스의 목을 조를 듯이 감고 있던 팔에도 힘을 풀었다. 루프스는 고개를 돌려서 유채를 돌아보았다.

[무섭나?]

“글쎄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동행하는 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루프스를 버려두고 도망차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알렉스가 걸렸다. 기껏 저 남자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겼건만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묵히고 있는 기분이라 속이 상했다.

[걱정 마라. 그 누구도 네 몸에는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것이다.]

“무슨 자신감이에요?”

유채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넌 내가 지킬 것이니 결코 걱정할 일이 없다. 그러니 얌전히 내 뒤에만 있어. 어디로 도망 가지 말고 눈에 띄는 곳에 있어. 그래야 내가 지켜줄 수 있으니까.]

“병 주고 약 주겠단 거네요.”

유채는 그 말만큼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말도 없다고 생각했다. 루프스는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더니 몸을 아래로 수그렸다.

[내려라.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야겠다. 근처에 물도 있는 것 같으니.]

유채는 조심조심 루프스의 등 뒤에서 내려왔다. 유채가 완전히 땅 위에 내려서자마자 루프스는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금 더운지 손부채질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유채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가만히 서서 석양 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을 걸 구해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심심하면 불 좀 피우고 있든가.”

“먹을 거요?”

“배고프지 않나? 토끼나 사슴 같은 걸 잡아오겠다. 그러니 여기에 있어. 위험한 일 생기면 소리쳐서 부르고, 금방 달려올 테니.”

루프스가 절대 여기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다시 은빛 늑대로 변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유채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유채는 한숨을 쉬면서 다리를 모아 끌어안았다. 일단은 알렉스를 살리기 위해 그와 있어야겠다. 알렉스를 포트리스로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했으니 그때까지는…….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조각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지. 게다가 그걸 찾기 전에 보자기와 함도 찾아야 했다. 이니투스와 관련된 일이니 토스 호무스의 궁에 자료가 있을 것이고, 보자기도 함도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만약 토스 호무스로 돌아가자마자 족쇄를 달고 침대 기둥에 묶인다면 유채는 기껏 권능을 받아서 얻은 능력도 사용할 수 없을 터였다. 침대를 끌고 공간 이동이 가능하지 않은 한은 말이다. 그래도 이건 양반이었다. 만약 루프스가 계속 수면제를 먹여서 재워만 둔다면? 이건 더 해결 방법이 없다.

‘아. 블루벨.’

이 대신 잇몸이라고 알렉스가 없어진 뒤 블루벨을 데리고 협박한다면? 유채는 계속해서 끔찍한 상황들만 머릿속에 떠올렸다. 도망치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정보를 찾은 다음에 빠져나오는 것이 우선일까?

“시간을 늦춰준다고 했지 멈춰준다고는 안 했는데.”

그 말은 여기서 시간을 오래 지체하면 유하를 구할 수 없을 거란 말이었다.

“되도록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유채는 머리를 무릎에 묻었다. 복잡한 생각들을 많이 하니 머리가 아팠다. 유채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근처에 물이 있다고 했지.’

며칠째 제대로 씻지 못한 몸에서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유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여기에 있어.’】

루프스는 돌아오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 인간이라고 사냥에 쉽게 성공하여 돌아올까 싶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물이 있다고 했던 방향 쪽으로 걸었다. 그의 말대로 연못이 하나 있었다.

유채는 무릎을 꿇고 손을 물속에 집어넣었다. 시원함에 감탄하며 유채는 기름기가 한 세 겹은 쌓여 있는 것 같은 얼굴을 씻기 위해서 두 손에 차가운 물을 받아서 세수를 했다.

“매번 생각하지만 더럽게 말 안 듣는군.”

유채는 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유채의 눈앞에 은빛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서 물방울이 뚝뚝뚝 흘러내리는 루프스가 있었다. 떡 벌어진 넓은 어깨와 수많은 전투와 훈련으로 생긴 상처들, 단단하고 조각 같은 근육들이 구릿빛 맨살과 함께 유채의 눈앞에 드러났다. 유채는 차마 루프스의 맨가슴에 시선을 둘 수 없어 눈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거기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면 바로 위에 구릿빛 굵은 허리를 보아선 그 아래쪽도 맨몸일 것이 분명했다.

유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수인 무안하게 뭘 그렇게 빤히 보나?”

“그쪽이 피해요! 그리고 지, 지금 뭐하는 거예요? 뭐, 사, 사냥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끝난 지 오래다.”

루프스는 손가락으로 연못가에 놓아둔 죽은 토끼 세 마리를 가리켰다.

“펠레스 호무스에서의 일이 원망스러워서 쳐다보고 있는 것이면 상체만 보지? 나도 하반신은 조금 민망한데.”

“안 봤어요! 어차피 보이지도 않아요.”

유채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루프스의 젖은 손이 유채의 팔목을 잡았다. 유채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악!”

연못에 빠진 유채는 어푸어푸하며 다리로 짚을 땅을 찾았다. 루프스가 유채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일으켜 세웠다. 유채는 겨우 얼굴을 쓸어내렸다. 루프스가 낮게 웃었다.

“더우면 들어오면 되지 왜 그러고 있는 건지.”

“옷이 젖잖아요!”

유채는 젖어서 달라붙은 옷을 떼어내면서 말했다. 하지만 젖은 옷이 그렇듯 떼어내도 다시 달라붙는 것이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시원함의 대가라기엔 너무 큰 희생이었다. 루프스도 아차 싶은 것인지 얼른 말했다.

“내 옷 주마. 저기에 있다.”

유채는 루프스를 노려보고 연못을 나가려고 물을 헤쳤다. 루프스가 유채의 손목을 잡았다.

“이왕 들어온 김에 좀 더 식히고 가라. 레티티아 너도 며칠간 씻지 못했을 거니까.”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떨쳐 내고 그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세수를 하거나, 몸 이곳저곳에 물을 끼얹었다. 유채는 루프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시간핵이 정말 강력하긴 한 것인지 루프스의 어깨는 아직도 낫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어깨가 아픈 것인지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만지거나 왼쪽 어깨를 돌리곤 하였다. 루프스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유채는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왜 이쪽으로 와요?”

유채는 팔로 가슴을 가렸다. 루프스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유채는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눈만 정신없이 굴렸다. 루프스는 그녀가 귀여워 작게 웃었다.

“도대체 내 말은 어기고 왜 여기로 왔나?”

“그쪽이 안 돌아와서요. 그럼 그쪽은 왜 여기에 있는데요?”

“덥기도 하고 피도 닦아내야 해서.”

루프스는 이제 나갈 생각인 것인지 유채의 뒤로 손을 뻗었다. 유채는 아차 싶어서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먼저 제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먼저 나갈게요.”

“내가 먼저 나가서 옷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라. 내 옷이 어디 있는 줄 알고 나가려고.”

루프스는 먼저 연못 밖으로 나갔다. 유채는 얼른 눈을 가렸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유채는 아예 물속에 머리까지 집어 넣기도 했다. 그래도 찬물에 씻으니 생각이 한결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일단은 알렉스 씨를 보내고 생각하자.’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해결을 하자. 알렉스를 보내고, 블루벨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그 다음 정보를 찾든 직접 발로 뛰든 결정해야 했다.

유채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바닥으로 제 뺨을 쳤다. 그렇게 생각을 대강 정리했을 때쯤 루프스가 돌아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채가 뒤를 돌아보자 루프스가 검은 바지를 입고 무릎을 꿇은 채로 자신의 웃옷을 내밀어 보였다.

“이거 입고 있어.”

“알았어요.”

유채는 연못에서 나와 가슴을 가리면서 조심스럽게 그의 옷을 받았다.

그때 루프스의 옷 사이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유채가 허리를 굽혀서 그것을 집어 올렸다.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이었다. 전에 루프스가 선물해 준 것이고 탈출할 때 제가 흘리고 간 것이었다. 유채는 이게 왜 여기 있는 것인가 싶어서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딴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던 루프스는 유채가 머리 장식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얼른 유채의 손에서 머리 장식을 뺏었다.

“옷이나 입어라. 남에 물건에 손대지 말고.”

“……알았어요.”

유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유채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덤불로 들어가자 루프스는 그녀가 들어간 덤불을 등지고 앉아서 머리 장식을 손가락으로 돌려보았다. 왜 제가 이걸 가지고 나왔는지. 이걸 보면서 유채의 얼굴을 떠올렸고 유채에 대한 그리움을 억눌렀다. 루프스는 바지 주머니에 머리 장식을 쑤셔 넣으려고 하려다가 망가질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했다. 루프스는 머리 장식을 어찌 처리할까 생각하며 눈을 굴렸다.

“와!”

저 멀리서 유채의 감탄사가 들렸다. 루프스는 뭔가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서 제 옷을 입은 유채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아빠 옷을 입은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바로 뒤까지 걸어갔다.

그녀가 감탄하고 있는 것은 한 무더기로 피어 있는 꽃들이었다. 노란색의 작은 꽃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노란색의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아름다웠다.

“유채꽃이네.”

유채가 중얼거렸다. 유채는 아련함과 향수와 약간의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유채는 넋을 놓고 꽃밭을 감상했다. 루프스는 잠자코 있다가 물었다.

“유채꽃?”

유채의 이름이 들어간 꽃이었다. 유채가 귀찮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더니 꽃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면서 말했다.

“네. 유채꽃이에요. 내 이름이 이 꽃에서 딴 거거든요. 엄마가 나 임신하고 제주도에 가서 본 유채꽃밭이 너무 아름다워서 딸이 태어난다면 유채라고 짓겠다고 했대요. 물론 당신은 내가 유채든 아니든 무조건 레티티아라고 부르겠지만.”

유채는 꽃다발처럼 줄기 끝에 모여 있는 작고 노란 꽃들을 손으로 쓸었다. 떠나온 그곳이 생각났다. 제주도도 사월이 되면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으로 가득할 것이었다. 여기 이 꽃밭처럼.

루프스는 꽃밭을 돌아다니면서 꽃의 향기를 맡고 꽃을 어루만지는 유채를 지켜보았다. 이 꽃은 루프스에게도 익숙한 꽃이었다. 어릴 적 자주 나가 놀던 토스 호무스의 들판에 가장 많이 피어 있던 이름 모를 들꽃이었다. 꽃의 이름이 뭔지는 몰랐지만.

루프스는 꽃밭을 거니는 유채를 보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제 옷이 마치 하얀색의 원피스 같아 보였다. 유채가 빙그르 돌 때마다 셔츠 자락이 나풀거렸다. 옛날에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는 요정 같았다. 유채의 조금 지저분하게 잘린 단발이 찰랑거렸다. 달빛과 유채와 유채의 이름을 가진 꽃이 어우러진 풍경은 그가 화가라면 당장에 화폭에 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중에서도 눈에 박히도록 아름다운 것은 유채였다.

달빛과 함께 부서져서 그대로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에 루프스는 저도 모르게 달려가 유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유채가 놀라서 루프스를 올려다보았다. 아까의 그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지만 루프스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았다.

유채는 짙게 가라앉은 루프스의 청회색 눈에 공포심을 느꼈다. 그가 저런 눈을 하면 항상 일이 터졌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다. 루프스가 유채를 끌어 당겨서 안았다. 유채의 이마가 그의 맨가슴에 닿았다. 루프스가 유채의 뒷머리를 꾹 눌렀다. 유채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루프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루프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유채의 그 복잡 미묘한 표정에서 루프스는 그녀의 그리움을 읽어냈다. 떠나온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유채의 표정에 짙게 배어나왔다. 그는 유채가 그곳을 추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가 다시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달빛에 부서져서 유채가 사라질 것만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유채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때리고 밀어내었다.

루프스는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맞대고만 있을 뿐이었다. 루프스는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루프스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유채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루프스가 먼저 손목을 붙잡았다.

유채는 이를 갈면서 팔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난 당신 장난감이 아니에요!”

유채는 루프스와 닿았던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다.

“당신 정말 동생인 에리카를 아꼈어요?”

에리카란 이름에 루프스의 눈이 사나워졌다.

“그 입 다물어라.”

“당신이 에리카를 아꼈다면, 나한테 이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당신도 동생을 잃은 슬픔을 알 거 아녜요! 형제를 잃은 적이 있으면서 나한테 이래서는 안 되는 걸 알잖아요!”

루프스와 수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유채는 그의 입맞춤에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진득한 소유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저를 여전히 소유물로 생각하고 인형처럼 가지고 놀겠다는 표현이었다. 유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로 딱 한 번만 제게 동정을 품어준다면 좋을 텐데.

“닥쳐!”

루프스가 고함쳤다.

머리로는 수없이 유채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가슴은 그렇지 않았다. 유채에 한해서 그는 얼간이가 되었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채가 얽히면 항상 그는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다.

루프스는 가슴께를 눌렀다. 가슴이 선득선득 뛰었다.

“넌 내 펠릭스 다우스고 난 내 펠릭스 다우스를 놓아주지 않아. 그러니, 어딜 갈 생각하지도 마라.”

“조금만 나를 동정해 주면 안 돼요? 당신 동생을 정말 사랑했다면…….”

“한 번만 그 입에서 에리카 이야기가 나오면 재갈을 물릴 거니까. 입 다물어.”

“정말 당신 비정한 오빠네요. 어떻게 동생…….”

“입 닥쳐!”

루프스가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유채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따라와, 저딴 꽃밭은 토스 호무스에 널렸어. 토스 호무스에 가면 질리도록 보여줄 테니까. 따라와.”

그는 유채를 무자비하게 잡아끌었다. 그는 두려웠다. 유채가 이곳에 더 있다가는 사라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 갈 것 같아서 두려웠다. 루프스는 반항하는 유채를 무시하고 이를 악물었다.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얼간이가 된 기분이었다.

* * *

“카르멘님.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양 수인 한 명이 쩔쩔매면서 요새에 숨어서 상처를 치료 중인 카르멘에게 보고했다. 카르멘은 보고를 듣자마자 그 수인에게 돌을 집어 던졌다. 수인은 간발에 차이로 돌을 피했다.

“나가!”

양 수인은 얼른 밖으로 빠져나갔다. 카르멘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리고 증오스러운 루프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소중한 아들인 드미트리를 그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죽인 루프스의 모습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카르멘은 분노했다. 드미트리는 결코 루프스 같은 이에게 무례하게 굴 아이가 아니었다. 얼마나 착한 아들이었는지 모른다. 제 아버지만큼 강해지고 있었고 머리도 좋았다.

“드미트리.”

발란테스 카르멘은 아들의 유품인 펜던트를 만졌다. 헥터를 도와 루프스를 죽여서 드미트리의 원한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원통하게 죽었을 드미트리를 위해서. 그녀는 일족의 운명보다 죽은 아들을 위해서 움직였다.

카르멘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루프스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이곳으로 직접 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예전에도 그랬던 놈이니까. 발란테스 카르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릭.”

그녀는 최측근인 데릭을 불렀다. 데릭은 카르멘의 앞에 부복했다. 카르멘이 핏발선 눈으로 명령했다.

“요새에 남아 있는 병력을 모두 모아 데리고 나가. 루프스가 올 거야.”

“예?”

“죽을 때 죽더라도 옥처럼 찬란하게 부서져 죽어야지. 안 그래?”

카르멘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과 루프스와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았다. 여기 있는 병력으로는 절대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래도 죽기 전까지는 발악해 봐야 아는 것 아닌가? 제 한 몸은 죽어도 상관없었다. 루프스를 죽일 수만 있다면. 카르멘은 비장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루프스는 등에 타고 있는 유채가 매우 신경 쓰였다. 그녀는 너무나 조용했다. 어젯밤 이후로 둘은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던 유채는 더없이 냉랭해졌다. 루프스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열심히 달리기만 하였다.

유채는 만일 토스 호무스로 끌려가게 된다면 탈출할 시나리오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이 남자는 저를 놓아줄 생각이 없으니 유채는 스스로 탈출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을 무렵 루프스가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섰다.

[내려.]

유채는 의아해하며 루프스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루프스는 몸을 낮춰서 유채가 내리기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등에서 내렸다.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유채를 보면서 루프스가 낮게 속삭였다.

[몸을 숨기고 있어라. 카르멘이 온다.]

루프스는 크기를 더 키웠다. 유채는 얼른 덤불 뒤에 숨어 주위를 살폈다.

루프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멀리서 살기가 느껴지고 땅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루프스의 예측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대한 양떼가 루프스의 앞에 나타났다. 카르멘은 오랜 전투로 몸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 배짱인가? 아니면 오기인가?]

[배짱도 아니고 오기도 아니다. 그저 복수지.]

발란테스 카르멘이 루프스의 빈정거림에 답했다.

[그대 아들을 생각해서 살려줄 수도 있는데? 이쯤하고 항복하는 것 어떤가?]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아들을 조롱하지 마라!]

분기탱천한 카르멘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루프스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럼 즉결 처분을 원한다는 것이군.]

[기꺼이.]

카르멘 직속 정예병이 루프스에게 달려들었다. 루프스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그들을 도륙했다. 양들은 루프스의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수인들 중 방어력 최강이라 불리는 양 수인의 북슬북슬한 양털은 루프스의 이빨과 발톱을 조금도 막지 못했다.

일대가 피로 물들었다. 양 수인들은 마지막 발악으로 그들의 속성인 식물을 움직여 루프스를 붙잡아두려고 하였으나 루프스는 그것들을 모두 완력으로 뜯어내었다. 루프스는 마지막 수인의 목을 물어 날려 버렸다.

루프스의 주위에 피 웅덩이가 생겼다. 피투성이가 된 루프스가 싸늘한 미소를 카르멘에게 날렸다.

[아들만큼이나 겁쟁이시로군, 여왕님. 숨어 있지 말고 덤비시는 것이 어떨는지.]

루프스가 빈정거리자 발란테스 카르멘이 괴성을 지르면서 루프스에게 달려들었다. 그 덩치만큼이나 육중하게 돌진해서 들어오는 카르멘의 공격을 유채 때문에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내느라 루프스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렸다. 뼈가 부서질 것 같은 충격이었다. 루프스의 털에 돌고 있는 전격은 카르멘의 두툼한 양털에 막혀서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루프스는 뒷다리로 버티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카르멘의 얼굴을 덮쳤다.

[아악!]

카르멘의 오른쪽 얼굴이 길게 찢겼다. 루프스가 힘으로 밀어내는 대로 카르멘은 뒤로 밀려났다. 카르멘은 몸을 뒤로 굴리면서 식물을 이용해서 넝쿨을 만들었다. 넝쿨들은 루프스의 몸을 구속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루프스는 제게 달려드는 넝쿨을 족족 이빨로 잘라내었다. 그 사이 카르멘은 루프스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카르멘은 발을 구르고 루프스에게 돌진했다.

[이봐 카르멘, 돌진이 왜 안 좋은 것인지 알아?]

카르멘의 머릿속에 루프스의 말이 울렸다. 카르멘은 그제야 제 앞에 루프스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가속도가 붙은 몸을 선회할 수가 없었다.

[아악!]

루프스가 카르멘의 옆구리를 이빨로 물었다.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른 그녀는 다급하게 앞발로 루프스를 후려쳤다. 루프스가 카르멘의 살점을 베어 문 채로 뒤로 날아갔다.

카르멘의 옆구리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지고 내장이 흘러나오려 했다. 뒤로 날아갔던 루프스는 얼른 일어나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카르멘은 다시 루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악!]

하지만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카르멘의 공격은 루프스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는 카르멘의 앞다리를 물어뜯었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놓치지 않고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루프스의 은빛 털이 온통 붉어졌다. 카르멘은 마지막 발악으로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앞으로 계속 고꾸라지기만 하였다.

[보기 추하군.]

루프스가 중얼거리곤 다시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그의 온몸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카르멘의 돌진을 막아내느라 오른쪽 가슴이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죽음을 앞에 둔 카르멘 역시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카르멘은 한 팔과 남은 두 다리로 땅을 질질 기어서 루프스의 다리를 꽉 움켜잡았다.

“추…… 해?”

“그래 추하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추하군.”

“난 평생을 이렇게 살았어!”

카르멘이 울분에 차서 소리 질렀다.

“드미트리를 잃고 평생을 지금 이 꼴과 같은 상태로 살았다. 그런데…… 그런데…….”

카르멘은 오열했다. 그녀의 목에서 피가 꿀럭꿀럭 흘러나왔다.

“네놈은 동생의 죽음에도 비정한, 차가운 놈이라…… 허억!”

루프스가 카르멘의 목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카르멘이 손톱으로 루프스의 팔을 긁었다.

“내가 내 동생의 죽음에 비정하다고?”

루프스는 실소를 흘렸다.

“어차피 죽을 년이니 선물 겸 알려주지. 내가 네놈의 아들을 죽인 이유를.”

루프스의 손이 분노에 부들부들 떨렸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고 억눌린 목소리로 그날의 일을 뱉어냈다. 평생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그날의 기억이었다.

“넌 네년의 아들이 둘도 없이 착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네놈의 아들은 둘도 없는 망나니였다! 아? 그것도 모르겠군. 네 아들놈, 비역질하는 걸 계집질하는 만큼이나 좋아했다는 거.”

아버지를 잃고 에리카와 단둘이 떠돌아다닐 때, 단테의 동생인 테오도르와 카르멘의 아들인 드미트리 패거리를 만났다. 루프스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그들의 따까리 노릇을 했다. 말이 좋아서 따까리였지 루프스는, 아니, 라이칸은 그들의 장난감이었다. 그들의 기분에 따라 얻어맞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아나 궁금하지?”

루프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도 그때의 악몽을 꾸었다. 그놈들이 제 몸을 누르고 뒤에서 덮쳐 오던 그날의 기억은 잊을 만하면 꿈으로 나타났다. 그때마다 그는 펠릭스 다우스를 들였다. 저는 그때의 라이칸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그렇게 확인하고 안심했다.

“내가 네년 아들 밑에 깔려봤거든. 에리카를 위해서! 그놈이 에리카를 욕심내서 내가 내 동생 대신 네년 아들 밑에 깔렸어!”

루프스가 절규하듯이 외쳤다. 루프스는 에리카를 보호하기 위해 동생과 헤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에리카를 찾으려고 했다. 루프스는 그때마다 드미트리를 막기 위해서 그의 밑에 깔렸었다.

빌어먹을 그 열세 살의 겨울. 그는 점점 메마르고 지쳐 갔다. 에리카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폭행을 견디고 있었지만, 점점 그는 지쳐 갔다. 아무것도 못하고 짐만 되는 에리카가 부담스러웠고 미웠다.

루프스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적인 사실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카르멘에게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놈들 패거리는 결국 에리카를 찾아내더군.”

너무나 지쳐서 제 뒤를 밟은 수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탓이었다. 루프스는 에리카의 붙잡아 옷을 찢고 낄낄거리는 드미트리 패거리들을 보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덤불 뒤에 숨었다. 루프스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열셋의 꼬마였고 그들은 스물이 넘은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에리카가 외쳤다.

【‘오빠! 살려줘! 구해줘!’】

드미트리가 에리카의 작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리고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야. 네 오빠가 여기 와봤자 우리 손에 죽기밖에 더 해? 너 찾으려고 데리고 다녔는데 이제 이용가치 다했으니 죽여야지. 안 그래?’】

루프스, 아니, 라이칸은 덤불 뒤에 숨어 나가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휘감았다. 에리카는 계속 살려달라고 외쳤다.

“네년 아들이 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지? 그 어린애에게!”

루프스는 그곳에서 도망쳤다. 그는 지쳐 있었고 에리카를 원망하고 있었다. 스스로 할 만큼 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살기 위해서 도망쳤다. 한참을 달리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흙투성이가 된 채로 그는 엎드려서 오열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에, 자신의 비겁함에 오열했다. 그리고 일어섰다. 다시 달렸다. 에리카를 구하러 돌아갔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동생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목이 꺾인 에리카의 시신이었다.

“놈들은 그 아이를 잔인하게 가지고 논 것도 모자라 목을 꺾어서 죽여 버렸어!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에리카가 죽었어!”

“그, 그럴…… 리…….”

카르멘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부정했다. 제 착한 아들이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내가 네년의 아들을 죽인 이유로 충분하지 않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카르멘의 목이 꺾였다. 그리고 마치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루프스의 무릎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프스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미친 듯이 웃었다. 한 번도 그날의 무력감과 비겁함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에리카의 모습을 잊은 적이 없었다. 루프스는 피웅덩이 가운데에 선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조했다. 자신같이 비겁한 놈에게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자박자박. 누군가 피웅덩이를 건너오는 소리가 들렸다. 루프스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유채가 다가오고 있었다.

“껴져. 그 이상 가까이…….”

유채의 피로 범벅이 된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이 유채의 배에 닿았다. 루프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굳었다.

“당신은 잘못 없어요.”

유채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잘못이 없어? 어쭙잖은 위로 하지 말고.”

“그때, 당신은 어렸으니까. 열셋 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요. 당신은 잘못 없어요.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왜 이리 다정하게 구나?”

“어제, 무정한 오빠라 말한 거 미안해요. 난 몰랐어요.”

“…….”

“내가 있던 세상에 이런 제목의 책이 있어요.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루프스가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유채는 가만히 있었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도 되는 것인지. 유채는 스스로의 행동에 조소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것은 루프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열셋의 라이칸을 위한 행동이었다.

“운명이 잘못했다는 소리예요. 당신은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너는…… 너는!”

루프스가 절규하듯이 외쳤다. 유채는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열세 살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좀 더 심지가 굳었던 것뿐이에요. 그래서 지키려고 발악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아.

루프스는 찬물을 한바가지 맞은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다. 그의 머릿속에 예전에 아버지가 해주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얼간이가 된다는 것이야.’】

이제야 알았다. 자신이 얼간이 같이 군 이유. 유채에게 웃어달라고 한 이유. 유채가 알렉스를 언급할 때마다 화를 낸 이유. 유채가 프레드릭에게 정답게 굴 때 화를 낸 이유. 카를리티오 때 이성을 잃은 이유. 유채가 저를 찌르고 도망갔음에도 그녀가 보고 싶었던 이유. 가지 말라고 절박하게 애원하면서 손을 뻗었던 이유. 수면제를 먹여 가면서까지 잡아두려고 하였던 이유.

그가 탐미주의자여서도 아니었고, 유채가 독특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유채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유채가 그가 갖지 못한 것을 가져서였다.

유채는 에리카를 버리고 도망간 열세 살의 자신과 달랐다.

그때의 저보다 훨씬 약하면서 끝까지 제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고 하였다. 블루벨을 구하기 위해서 늑대 떼들 한복판으로 들어갔고 알렉스를 구하기 위해서 자존심을 내놓았다. 프레드릭을 구하기 위해서 독에 중독되었다 막 회복된 몸을 움직였다. 형제의 안전한 탈출을 위해서 제 몸을 인질로 기꺼이 내어주었다.

그래서 유채는 빛이 났다.

에리카의 죽음 이후 미쳐 버린 그의 세상에서, 온통 무채색인 그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빛이 났다.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유채가 있어준다면, 치유받는 기분이었다.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환히 빛나는 유채를 그래서 놓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구는 심장, 유채만을 쫓았던 눈, 유채가 좋아한 밤하늘이 저 역시 좋아졌던 그 모든 것이, 얼간이처럼 굴던 자신이, 말하는 것은 하나였다.

이게 사랑이었다.

“가지 마.”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후회와 환희가 섞인 눈물이었다. 그는 유채를 펠릭스 다우스로 삼았던 것을 후회하는 동시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유채를 이렇게 가까이 두지 못했을 테니까. 그제야 유채에게 했던 수많은 행동들이 후회가 되었다.

아아. 너무 늦게 알았다.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제발. 가지 마.”

네가 내 세상이다. 그러니 네가 떠나면 내 세상도 없어진다.

“가지 마.”

아아. 이게 사랑이었다. 유채가 그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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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Chapter. 열셋, 열넷 그리고 겨울.

유채의 위로를 받고 난 후 분위기는 당연히 어색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맙다.”

뒤에서 잠자코 따라오던 유채는 입술을 셀죽이 내밀면서 답했다.

“당신을 위해서 한 건 아니에요. 단지, 당신의 어린 시절을 위해서 한 것이지.”

“그게 그거 아닌가?’

“달라요. 내가 당신을 동정하면, 그건 내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거예요.”

“스톡홀름 증후군?’

“있어요. 납치당한 피해자가 납치범에게 동질감을 느껴서 그를 변호하게 되는 미친 짓.”

“내가 납치범인가?”

루프스는 씁쓸했다. 제가 한 짓을 알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었으나, 그래도 그녀에게 납치범 취급을 받는 것은 괴로웠다. 유채는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내 세상 기준으로 당신은 감옥에 가야 할 범죄자예요.”

“미안하다.”

루프스의 사과에 유채의 눈이 동그래졌다. 유채는 그 사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였다. 둘 사이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그는 카르멘의 요새에서 옷을 뒤져서 유채의 몸에 맞을 것 같은 적당한 원피스 잠옷을 하나 찾아내었다. 유채는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데에 소박하게 만족하며 씻으러 갔고 그 역시 다른 욕실로 가서 몸을 씻었다.

루프스는 피에 젖은 몸을 씻고 간만에 따뜻한 물에서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양 수인 일족과의 싸움 후 그는 유채를 데리고 카르멘의 요새를 찾아냈다. 작고 단출한 곳이었지만, 나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하루 정도 지내고 가기에 나쁘지 않아 여기서 묵고 가기로 하였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루프스는 낯선 발음의 말을 중얼거렸다. 입가에 쓴웃음이 달렸다. 유채가 차라리 스톡홀름 증후군인가 하는 것에 걸려서 저를 동정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유채의 진실된 마음이 아니기에 행복한 결말은 될 수 없을 터였다.

그는 얼굴을 쓸어내리고 욕조에서 나왔다. 그는 수인치고도 체격이 큰 편이라 갈아입은 옷은 소매가 짧았다. 루프스는 혀를 차면서 방으로 돌아왔다.

“레티티…….”

유채를 부르려던 루프스는 그녀가 침대에 기대어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루프스는 무릎을 굽혀서 유채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에리카가 애지중지하던 도자기 인형과 같이 손대면 금세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유채의 턱선을 쓸었다. 마레 위르와 수인의 체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길이 유채에게는 고됐을 것이다. 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편하게 자지도 못했을 것이니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는 유채의 작은 몸을 안아 올렸다. 어찌나 말랐는지 몸이 지나치게 가늘고 가벼웠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이 꺾이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아서 바르게 눕혀주었다. 그리고 그 옆에 모로 누웠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루프스는 하얀 잠옷 아래 드러난 유채의 발목을 보았다. 저기에 족쇄를 채운다면……. 그는 돌아가면 유채의 발목에 금으로 만든 족쇄를 채워서 침대 기둥에 묶어 방에 가두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못할 짓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는 끝까지 저에게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었다. 유채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보낼 수가 없었다. 유채가 제게 원망을 쏟아내더라도 기꺼이 받아줄 용의가 있었다. 제 곁에 붙잡아놓을 수만 있다면, 그는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유채의 마음을 돌려놓을 시간, 유채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게 만들 시간, 유채가 저를 용서할 시간, 유채가 저를 사랑하게 만들 시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유채가 떠나면 안 되었다. 어떻게든 유채가 그의 곁에 오래 있어야 했다.

갑자기 과거의 모든 것이 후회되었다. 유채의 목에 파렌티아를 채우고 방에 가두어놓은 것도, 유채를 말뚝에 묶어놓은 것도, 유채의 어깨를 망가뜨린 것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유채를 붙잡아 억지로 입을 맞춘 것도, 그 모든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면서도 또 다시 그녀를 가두어놓을 생각만 하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그것밖에 할 수 없는 것도 절망스러웠다.

유채가 몸을 뒤척이며 루프스 쪽으로 돌아누웠다. 고아한 얼굴의 옆선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부드러운 곡선을 따랐다. 손가락이 도톰한 입술에 닿았다. 그는 유채의 붉고 도톰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 입술에서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그의 곁에 있겠다는 소리가 나오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일 것 같았다.

잠이 든 유채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루프스는 제가 한 어리석은 생각에 조소를 흘렸다.

그는 유채가 기억을 잃었으면 하였다.

과거에 제가 했던 모든 일도 있고 제가 어디서 왔고 누구인지도 잊었으면 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고 유채를 계속 이곳에 붙잡아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와 저는 첫눈에 반한 연인이라 하고 사랑을 퍼부어 영원히 제 곁에 묶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게 없, 없으면 우리 언, 언니 죽, 죽을지도 몰, 몰라요.’】

루프스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그건 그의 이기적인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유채는 그를 싫어했고 언니를 위해서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유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작은 몸이 그의 품에 안겨왔다. 그는 유채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고소한 체향을 듬뿍 들이마셨다. 저를 위해서 만들어진 암컷 같았다. 따뜻한 체온이, 부드러운 몸이, 향긋한 체향까지 모두 저를 유혹했다. 그는 유채를 꼭 끌어안았다. 절대 놓고 싶지 않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에 걸려 있는 파렌티아를 보았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유채는 더 이상 펠릭스 다우스가 아니었다.

제 비(妃)가 될 암컷이었다. 파렌티아 같은 치욕적인 물건을 차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오를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저 파렌티아만이 유채를 붙잡을 수 있었다. 저것을 목에 두르고 있는 이상 유채는 펠릭스 다우스로서 제 곁을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그는 대신에 유채가 입고 걸치는 모든 것을 비(妃)의 지위에 맞추어서 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유채를 함부로 여기는 수인은 없을 것이다.

그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내 옆에 계속 남아주면 안 되겠나?”

그가 작게 속삭였다.

“그 어떤 이보다도 행복하게 해주겠다.”

그는 자신 있었다. 제 모든 것을 걸고라도 유채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유채의 뒷머리를 잡아서 제 가슴에 당겨 안았다.

“네가 내 세상인데. 그날 이후 빛을 잃어버린 내 세상에 찾아온 빛이 너인데.”

루프스는 잠든 유채의 귓가에 제 과거를,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됐는지를 나지막하게 털어놓았다.

* * *

[14년 전]

“오빠! 어디 있어? 오빠!”

숨바꼭질에서 술래가 된 에리카가 결국 라이칸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입 옆에 손을 붙이고 오빠를 불렀다. 라이칸은 발소리를 죽이고 에리카의 뒤로 다가갔다.

“왁!”

“에엑! 오빠!”

에리카가 화가 난 것인지 복슬복슬한 흰색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라이칸을 내리쳤다. 라이칸은 항복한다는 의미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항복. 에리카, 항복!”

“오빠 나빴어. 진짜 나빠. 오빠는 나처럼 꼬리도 없어서 찾기 힘들단 말이야.”

에리카는 다리가 아픈 것인지 주저앉아서 라이칸의 다리를 때리면서 말했다. 라이칸은 실실 웃으면서 에리카의 작은 주먹을 가만히 맞아주었다.

“알았어. 오빠가 미안해. 이번엔 오빠가 술래 할게.”

“진짜? 오빠. 진짜지!”

에리카가 폴짝폴짝 뛰면서 박수를 쳤다. 혼자만 계속 술래를 하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에리카는 환하게 웃으면서 라이칸에게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럼 오빠, 나 숨을게. 찾아봐!”

에리카는 그 말을 마치고 달려갔다. 라이칸은 에리카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딱.

“등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를 얻어맞은 라이칸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바실리사를 돌아보았다. 바실리사는 마치 동화책 속의 공주님처럼 분홍색의 드레스를 입고 팔짱을 끼고 라이칸을 내려다보았다. 라이칸은 오랜만에 만난 바실리사가 반가워 헤헤 웃었다.

“왔어, 바실리사?”

“넌 호구냐? 매일 에리카에게 져 주기나 하고.”

“에리카가 좋아하잖아. 그럼 됐지 뭐.”

라이칸은 엉덩이를 털면서 일어났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라이칸을 바실리사는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위르형이 마레 위르에 가장 가깝게 태어났다고 모든 수인들의 기대를 듬뿍 받더니만 이렇게 동생에게 다 져 주기만 하는 호구 짓만 하고 있었다. 라이칸은 분명 재능이 있었다. 그는 민첩하고 빨랐으며 그 나이대 수인들보다 월등히 전투 감각도 좋았다. 하지만 라이칸 자체가 싸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라이칸은 책을 읽고 글 쓰는 것을 더 좋아하는 딱 학자 타입이었다. 그의 꿈은 대륙을 여행하고 여행기를 적는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라이칸은 마법도 배우고 싶어 했지만, 그놈의 강력한 마력 저항력 때문에 마법을 배우는 것은 포기했다. 그 대신 루프스님의 소개로 베니니타스님과 라일라님에게 종족 고유 속성을 이용하는 하여 마법을 배우는 등 여타의 수인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근데, 바실리사. 왜 왔어?”

“샌드백 찾으러.”

“또 대련이야? 싸움 같은 건 왜 하는지 모르겠어.”

라이칸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바실리사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라이칸을 바라보았다.

“말로 해결할 수도 있는 거잖아. 굳이 싸워야 하는 건가? 다치기밖에 안 하잖아. 서로 이야기해서 해결하면 모두가 다치지 않을 수 있잖아.”

“너 수인의 탈을 쓴 마레 위르지?”

“아니야! 바실리사!”

라이칸이 버럭 소리 질렀다. 라이칸은 라일라를 잘 따랐기 때문에 마레 위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수인들이 하도 라이칸을 마레 위르로 오해하였기에 그런 소리를 듣는 것에 굉장히 예민하게 굴었다. 바실리사는 킥킥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자꾸 마레 위르 취급을 받는 거야. 본때를 보여줘. 그럼 누가 너를 마레 위르라고 하겠냐?”

“그래도 싫어. 난 누군갈 다치게 하기 싫어. 차라리 내가 다치고 말지.”

“하여간 호구야, 호구. 넌 나중에 마음에 드는 암컷은 어떻게 지키려고 그런 소리를 하냐?”

바실리사의 말에 라이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내가 뭐든 내어줘서 지킬 거야. 내가 좋아하는 암컷인데, 모든 것을 걸고 지킬 거야.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할 수 있게 해줄 거고,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어디에 있든 간에 모두 가져다 줄 거야. 세상에서 둘도 없이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야.”

“그러려면 힘이 필요하겠지, 라이칸.”

“스승님!”

라이칸은 베니니타스의 목소리에 종종거리며 그에게 달려갔다. 붉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호남형의 베니니타스는 라이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라이칸은 로보를 많이 닮았지만 성품은 블랑카를 더 많이 닮았다. 사납고 오만한 성격인 로보와 다르게 다정하고 친절한 아이였다. 여우 수인치고 온화한 편인 베니니타스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어.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울피누스 호무스는 괜찮은 거예요?”

“라일라가 답답해하는 것 같기에 잠깐 놀러 왔다. 왜, 오늘도 나와 라일라에게 배우고 싶은 것이 있느냐?”

“아니요. 그냥 스승님이 반가워서요! 저 이제 온몸에 전격을 두를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거 잘되었구나. 나도 네 아버지에게 비법을 알려주었지만, 네 아버지는 하나도 흉내도 못 내던 것을 그렇게 잘 따라하다니, 넌 신동인가 보구나.”

“헤. 부끄러워요.”

라이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베니니타스는 제 바짓가랑이를 당기는 손에 라이칸을 내려놓았다.

“벤자민, 프리드!”

라이칸은 땅에 내려오자마자 베니니타스의 아들들인 벤자민과 프리드를 반갑게 맞이했다. 벤자민과 프리드는 베니니타스에게 물려받은 붉은 머리카락에 라일라의 보라색 눈동자를 빼닮은 귀엽게 생긴 형제였다.

“나 왔어, 라이칸 형아.”

“오랜만이야, 벤자민.”

벤자민이 라이칸과 웃으며 인사하는 중에도 부끄러움이 많은 프리드는 베니니타스의 다리 뒤에 숨어서 빼꼼 고개만 내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벤자민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라이칸 형, 에리카 누나는 어디 있어?”

“안 알려줄 거야.”

라이칸은 입술을 빼죽이 내밀었다. 프리드는 붉어진 얼굴로 라이칸에게 말했다.

“나 에리카 누나 만나러 왔는데. 에리카 누나 보고 싶어.”

“안 돼. 프리드가 더, 더 강해져야지 에리카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거야. 지금처럼 스승님 다리 뒤에 숨어 있는 겁쟁이라면 에리카가 어디 있는지 안 알려줄 거야.”

라이칸은 귀여운 여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오빠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에리카를 데려갈 수컷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용감하고 현명해야 했다. 아버지의 다리 뒤에 숨어 있는 프리드는 그 조건에 조금도 부합하지 않았다.

“피. 라이칸 형도 약하면서.”

프리드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라이칸 형도 바실리사 누나 보다 작고 약하면서 나한테만 왜 그래. 난 언젠가 우리 아빠보다도 강해지고 형보다도 강해질 거야!”

“그럼 그전에 아버지 뒤에서나 나와라, 프리드.”

벤자민이 핀잔을 주었다. 베니니타스와 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 특유의 조숙함으로 남자아이들을 한심하게 보는 바실리사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벤자민과 프리드, 라이칸은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저들끼리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멀리서 에리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리카는 블랑카의 품에 안겨서 라일라와 같이 오고 있었다. 라일라를 좋아하는 라이칸은 라일라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라일라님 오랜만에 뵈어요!”

“그래, 라이칸. 나도 반갑단다. 그동안 잘 지냈니?”

라일라가 무릎을 굽혀서 라이칸과 시선을 맞추었다. 라이칸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블랑카가 에리카를 내려놓고 라이칸의 볼을 길게 늘였다.

“요거, 요거. 벌써부터 암컷 얼굴 밝히는 거야? 이 엄마가 있는데 아는 척도 안 하고 라일라부터 봐?”

“아니에으요.”

라이칸이 고개를 지었다. 블랑카는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라이칸의 이마를 콩 때렸다. 라이칸은 이마를 움켜쥐고 블랑카를 올려다보았다.

“아파. 엄마 미워!”

“엄마도 라이칸. 미워. 매번 엄마는 이렇게 안 반겨주고. 라일라만 이렇게 반겨주니. 엄마 섭섭해.”

“오랜만에 절 보아서 반가워서 그럴 거예요, 블랑카님. 못 본 지가 벌써 세 달이나 흘렀잖아요.”

라일라가 라이칸의 은발을 쓰다듬으면서 그의 편을 들었다. 라이칸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요고, 요고. 라일라가 편들어주니까 기고만장해 가지곤. 엄마가 좋아? 라일라가 좋아?”

“당연히 엄마가 좋아요!”

라이칸은 블랑카의 목을 끌어안았다. 블랑카는 우쭐한 표정으로 라이칸의 몸을 안았다.

“역시, 이래야 우리 아들이지. 라이칸은 누구 아들?”

“우리 엄마 아들!”

라이칸은 블랑카의 가슴에 볼을 비볐다. 바실리사가 블랑카의 아래에서 불평했다.

“블랑카님이 자꾸 받아주니까 라이가 어리광만 늘고 약한 거예요! 좀 더 강하게 키우셔야 한다니까요!”

바실리사의 어린애다운 생각에 블랑카와 라일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바실리사는 영문을 몰라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라일라가 네가 기특해서 그런 것이라면서 바실리사의 손을 잡았다.

라이칸은 블랑카의 품에 안겨서 힐끗 에리카가 있는 곳을 보았다. 프리드가 에리카의 옆에 달싹 들러붙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라이칸의 입술이 비죽이 튀어나왔다. 블랑카가 튀어나온 라이칸의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프리드가 싫어?”

“프리드는 너무 약해요. 에리카를 못 지켜줄 것 같아요.”

라이칸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블랑카는 아들의 고민에 웃음이 터졌다. 동생에 관해서는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아들이 귀여워 블랑카는 라이칸의 볼에 연신 뽀뽀를 해주었다.

“아들. 암컷과 수컷이 사랑하는 건 말이야, 지켜주는 것 이상의 의미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중에 우리 아들에게 사랑하는 암컷이 생기면 알게 될 거야. 사랑을 한다는 건 말이야, 누군가를 지켜주고 아껴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이 걸어가 주는 것이거든.”

라이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랑카가 아들의 볼에 자신의 볼을 부비면서 말했다.

“우리 귀여운 아들이 언제 커서 엄마한테 이 암컷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조를까? 그때가 오면 엄마 무지 섭섭할 것 같아.”

“내가 어떤 암컷을 만나 결혼해도 난 영원히 엄마 아들 할게! 그러니까 엄마 섭섭해하지 마!”

“으이구. 말이나 못하면.”

블랑카가 라이칸의 관자놀이를 꾹 누르면서 말했다. 여느 때와 같은 행복한 오후였다.

* * *

“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동화책을 읽어주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걸걸한 목소리였지만 로보는 최선을 다해서 아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일이 바빠서 이런 때가 아니면 라이칸을 챙겨줄 시간이 없었다. 라이칸은 로보의 동화책을 읽는 실력이 형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언제나 기쁘게 들어주었다. 그날도 라이칸은 이불 밖에 눈만 빼꼼 내밀고 눈을 굴리고 있었다.

“라이칸. 잠이 안 와?”

“아빠. 아빠는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어땠어요?”

라이칸은 오후에 블랑카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엄마가 사랑을 하는 건, 같이 걸어가는 거래요. 아빠도 그렇게 생각해요?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어땠어요?”

로보는 동화책을 덮고 라이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열셋이었다. 벌써 이성에 관해 관심을 생길 나이인 것인지, 뭔가 시원섭섭하였다. 로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엄마를 만났을 때, 아빠는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었단다.”

블랑카의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로보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블랑카를 제외한 모든 것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머릿속에 종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셨어요?”

라이칸은 늠름하고 잘생긴 로보를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블랑카도 로보의 그런 모습에 반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엄청 바보같이 굴었어.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민망한 상황의 연속이었단다.”

들꽃을 좋아한다고 해서 열심히 들꽃을 꺾으러 갔다가 벌에 쏘여서 퉁퉁 부은 얼굴로 꽃을 전해준 일도 있었고, 잘 보이겠다고 베노르 콩레수스에서 무리하다가 다친 적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민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한 거예요? 멋있지도 않은 아빠랑.”

“아빠가 엄마와 같이 걸어가는 방법을 알아냈거든. 사랑이란 것은 말이다,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배려해 주는 것도 아니란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저 네 감정을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그럼, 사랑은 뭔데요?”

“서로 눈을 맞추고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것이 사랑이란다. 사랑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같이 걸어가는 거야.”

“모르겠어요. 서로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사랑이 아니에요?”

“아니,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얼간이가 된다는 것이야.”

로보는 라이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수인을 사랑하기에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고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 자연스럽게 제 가장 못난 모습들만 보여주게 된단다.”

“얼간이요? 그런데 그런 모습을 어떻게 사랑해요?”

“가장 한심하고 가장 바보 같아졌을 때 진심이 전해지는 것이거든.”

라이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어요.”

“아직 어려서 그래. 아직 사랑한 암컷도 없고.”

로보는 벌써 제 품을 떠나려는 것 같은 아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굴리는 라이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꼭 닮은 청회색의 눈이 서로를 다정하게 응시했다.

“더 크면 알게 될 거야. 잘 자거라. 좋은 꿈꾸고.”

“안녕히 주무세요.”

로보가 문을 닫고 나갔다. 라이칸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 말을 곱씹으며 작은 머리로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몸을 뒤척였다.

* * *

“우와! 굉장해요, 헤르티아 누나!”

헤르티아가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바위 뒤에서 라이칸이 두 눈만 쏙 내밀고 박수를 치고 있었다. 헤르티아는 바위 뒤로 성큼성큼 다가가 라이칸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올렸다.

“우왁!”

“너, 언제 내가 몰래 훔쳐봐도 된다고 했어!”

“하지만……. 나도 마법 보고 싶어요. 헤르티아 누나 마법은 신기하단 말이에요.”

라이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헤르티아는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이기는 했지만 눈매가 사나운 편이라 이렇게 앙칼지게 말할 때면 꽤나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라이칸은 집게손가락을 서로 부딪치면서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못 보게 하면, 베니니타스님께 단테 형이랑 헤르티아 누나 뽀뽀한 거 말할 거예요.”

“너! 그거 언제 봤어!”

헤르티아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그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라이칸은 바닥에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지난번 울피누스 호무스 때, 단테 형이랑 헤르티아 누나랑 정원에…….”

“그거, 누구한테 말했어?”

헤르티아가 라이칸의 어깨를 잡고 다그쳤다. 라이칸은 머리가 앞뒤로 흔들려서 어지러운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한테도 안 말했어요.”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헤르티아의 얼굴이 시뻘겠다. 아무리 일족들 간의 분쟁이나 갈등이 줄어들고 있다지만, 아직 서로 다른 일족간의 통혼은 허용이 되지 않았다. 분명히 손가락질 당할 것이다. 게다가 단테는 차기 에쿠우스가 될 수인이었고, 헤르티아는 울페스인 베니니타스의 동생이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여파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헤르티아는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깨물었다.

“누나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요.”

라이칸이 헤르티아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헤르티아가 라이칸을 돌아봤다. 라이칸은 볼을 긁적였다.

“누구를 좋아하는 게 죄가 되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건 죄가 될 수 없어요.”

“얼씨구. 그럼 너는 그걸 가지고 나를 왜 협박하냐?”

“음. 그걸 말하면 누나가 내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아서요. 절대로 전 누나가 잘못했다 생각하지 않아요.”

헤르티아가 팔짱을 끼고 라이칸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제 이마로 꽁하고 라이칸의 이마를 때렸다. 라이칸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힝! 누나 나빠!”

“헤르티아. 애를 괴롭히면 어떻게 해.”

라일라가 라이칸을 들어 올렸다. 눈물을 찔끔 흘린 라이칸은 라일라의 목을 끌어안았다.

“얘가…….”

헤르티아가 변명을 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변명을 해보았자 저만 손해일 것 같았다.

“미안해, 라이칸.”

“핏. 특별히 용서해 줄게요, 누나.”

라이칸이 입술을 쭉 내밀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 사이 블랑카가 다가왔고 라일라는 그녀에게 라이칸을 넘겨주었다. 라이칸은 블랑카의 품에 폭 안겨서 헤르티아를 바라보았다.

“벤자민이랑 프리드는 그렇게 끔찍이 여기면서 라이칸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헤르티아.”

블랑카가 라이칸을 달래면서 헤르티아에게 물었다.

“귀찮게 굴잖아요. 블랑카님.”

“블랑카님. 그래도 헤르티아가 라이칸 많이 아껴요. 이번에 올 때 가져온 간식들 모두 헤르티아가 라이칸 주겠다고 가져온 거라니까요.”

“라일라 언니!”

헤르티아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블랑카와 라일라가 킥킥 웃었다. 라이칸은 헤르티아에게 방긋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거 누나가 나 준 거예요?”

“너. 내가 그거 줬다고 내가 널 예뻐한다든가 하는 생각 마라. 프리드 좀 더 아껴주라고 주는 거니까.”

“프리드가 강해지면 아껴줄 거예요! 아직 프리드는 에리카를 지킬 만큼 강하지 않잖아요!”

“우리 라이칸은 에리카를 이렇게 아껴서 어떡할까? 이러다 에리카 시집 못 가는 것 아니야?”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도 우리 오빠가 그렇게 유난을 떨어도 결국은 시집왔잖아요.”

라일라가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라일라를 끔찍이 아끼는 렉스 뮈어는 당연히 동생의 결혼에 반대했다. 동생이 수인과 결혼해서 수인들에게도 따돌림 당하고 포트리스의 인간들에게도 따돌림 당할 것 같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결국 부모 이기는 자식이 없는 것처럼 여동생 이기는 오빠는 없는 것인지 라일라는 렉스를 설득하고 베니니타스와 결혼을 하였다. 그 후로 지금까지 여우 수인들과 포트리스 인간들 모두를 어우르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러네, 라일라. 우리 라이칸 어쩌나, 에리카도 그렇게 될 텐데.”

블랑카가 라이칸의 볼을 제 볼로 비볐다. 라이칸은 간지럽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피했다. 다정한 모자의 모습을 보고 있던 라일라에게 헤르티아가 물었다.

“그런데, 라일라 언니는 왜 겨우 그거 하나 받고 오빠에게 더 예물 안 받았어요. 우리 오빠가 가진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거 하나 받고 만족해요? 게다가 다른 비싼 목걸이도 오빠가 많이 사줬는데, 그걸 무시하고 그것만 하고 다녀요?”

헤르티아가 라일라의 목에 걸려 있는 붉은 루비 조각 목걸이를 가리켰다. 라일라가 웃었다.

“이게 제일 좋아서요. 딴 이유는 없어요.”

라일라는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블랑카는 라이칸을 땅에 내려놓고 라일라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일 돌아간다고 했지 않았나?”

“예. 아무래도 저랑 애들은 먼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이도 같이 돌아가려고 했는데, 루프스님이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시네요.”

“저도 오빠 때문에 여기 남아 있어야 해서. 언니랑 애들만 먼저 떠날 것 같아요.”

“위험하지 않을까? 호위는?”

“호위는 있어요. 걱정 마세요.”

헤르티아는 호위들 모두 실력자라고 추켜세웠다. 블랑카도 그제야 안심한 것인지 오늘 편히 쉬다가 무사히 돌아가라는 말을 건넸다. 라이칸도 섭섭하지만 여름에 꼭 찾아뵙겠다고 인사를 했다.

에리카와 벤자민과 프리드는 각자 제 엄마를 찾으러 온 것인지 달리기 시합하듯이 달려서 서로의 엄마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오빠, 내가 제일 빨랐지!”

에리카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라이칸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벤자민은 분한지 제 무릎을 쳤다. 에리카가 프리드를 놀렸다.

“프리드는 꼴찌다, 꼴찌!”

프리드가 속이 상한 것인지 라일라의 다리를 붙잡고 훌쩍였다. 라이칸은 프리드가 제가 말한 것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프리드.”

라이칸은 프리드의 이름을 불렀다. 프리드는 눈물 젖은 자수정색 눈동자를 들었다. 라이칸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제가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인, 블랑카가 처음으로 공예를 배우면서 만들어준 핀을 그에게 건넸다. 좋아하는 암컷이 생기면 주라고 블랑카가 라이칸에게 준 것이었다. 프리드는 에메랄드가 박혀 있는 작은 핀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이거 너 줄게.”

라이칸은 프리드의 손에 핀을 쥐어주었다. 프리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거 우리 엄마가 만든 거야. 그러니까 네가 엄청 강해졌을 때 다시 돌려줘. 알겠지?”

“우와! 프리드 허락받았네!”

블랑카가 무릎을 굽혀서 프리드의 볼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헤르티아도 약간은 새침한 표정으로 라이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하는 행동은 마음에 드네.”

“자. 그럼 우리 맛난 거 먹으러 갈까? 헤르티아가 특별히 라이칸을 위해서 가져온 간식이 있다니까.”

“블랑카님!”

헤르티아는 또다시 얼굴이 붉어져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블랑카는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계속 헤르티아를 놀려대었다. 라일라가 중간에 중재를 했지만, 그녀 역시 재미있다고 생각해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라이칸은 헤르티아의 붉어진 얼굴과 난처한 표정을 보면서 웃음 지었다. 헤르티아가 조금 까칠하기는 해도 정이 있는 누나라는 것을 알기에 라이칸은 그녀의 소녀 같은 모습에 활짝 웃었다.

* * *

“라이칸, 섭섭하냐?”

로보는 라이칸을 무릎에 앉히고 놀아주면서 말했다. 라이칸은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보는 라이칸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 옆구리를 간질였다.

“흐에엑!”

라이칸이 몸부림쳤다. 라이칸은 로보를 돌아보았다.

“다음에 보면 되지. 일이 한가해지면 울피누스 호무스에 데려다주마, 그러니 얼굴 풀고. 사나이는 언제나 어떻게 해야 한다고 내가 말했지?”

“씩씩해야 한다고 했어요!”

“옳지. 그럼 씩씩하게 공부하러 가야지. 오늘 아빠랑 대련할까?”

“아빠랑 하면 아픈데?”

“바실리사랑 해도 아프잖아.”

“그래도 바실리사 주먹은 맞아도 그렇게 아프지 않아요. 하지만 아빠한테 맞으면 진짜, 진짜 아파요.”

“그래?”

로보는 턱을 쓸었다. 라이칸은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가능하면 대화로 해결하고자 하는 편이었지만 항상 상황이 좋게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지키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해야 할 때가 있었다.

“라이칸.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나쁜 게 아니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된단다.”

“왜요?”

“때로는 말만으로는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오거든, 그때를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란다.”

로보는 라이칸을 무릎에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라이칸의 손을 잡았다.

“그런 의미로 우리 대련할까?”

라이칸은 대련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바쁜 아빠가 저와 놀아주는 시간이라는 것이 신나서 눈을 반짝이면서 폴짝폴짝 뛰었다. 로보는 라이칸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루프스님!”

갑자기 늑대 수인 하나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로보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지우고 냉철한 루프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늑대 수인이 라이칸을 보고는 로보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로보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로보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라이칸에게 미안한 말을 전했다.

“라이칸.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아빠는 나가 봐야겠다. 그러니까 내일 놀아줄게.”

“알았어요.”

라이칸은 섭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보는 미안한 얼굴로 라이칸을 위로하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늑대 수인과 함께 나갔다. 라이칸은 그런 아버지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라이칸이 마지막으로 본 로보의 자상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일 다시 놀아주겠다는 로보의 약속은 영영 지켜지지 못했다.

* * *

“오빠!”

에리카가 라이칸의 손을 부여잡고 울었다. 라이칸은 피 칠갑을 한 채로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로보는 블랑카의 시신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블랑카의 시신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라이칸은 몸을 벌벌 떨었다. 로보의 절규가 이곳을 가득 채웠다.

라이칸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로보의 목을 끌어안고 울먹였다.

“아, 아빠. 미, 미안해. 내, 내가 약해서…….”

라이칸이 오열을 했다. 라이칸은 로보의 옆에 주저앉아서 울었다. 에리카도 라이칸 옆으로 다가왔다. 라이칸은 에리카를 끌어안고 울었다.

베니니타스 스승님이 설마 그럴 줄은 몰랐다. 라이칸은 베니니타스의 차가웠던 검은 눈을 떠올렸다.

* * *

[라이칸 도망가!]

블랑카는 하얀색 늑대개로 변해서 분노한 베니니타스를 막아섰다. 라이칸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머니와 산책을 나와서 눈꽃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라이칸은 갑자기 나타난 베니니타스를 보고 의아했지만 그 전에 오랜만에 만나는 스승님이 반가웠다. 하지만 베니니타스는 갑자기 거대한 붉은 여우로 변해서 그들을 공격했다. 라이칸은 베니니타스를 말리기 위해서 소리를 질렀고 블랑카도 그를 막기 위해 늑대개로 변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베니니타스에겐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너! 너! 너희는!]

베니니타스는 잔뜩 분노하여 계속 블랑카를 몰아붙였다. 블랑카는 루프스인 로보 바로 다음가는 실력자인 베니니타스를 막을 수가 없었다. 블랑카의 옆구리가 길게 찢겼다. 블랑카가 숨을 헐떡였다.

[도대체 라일라가 너희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베니니타스가 고함을 질렀다. 분노로 불타는 눈동자가 살기를 담고 블랑카와 라이칸의 목숨을 노렸다. 라이칸은 겁을 집어먹고 더듬거렸다.

“스, 스승님. 뭔, 뭔가…… 오, 오해가 있으시, 신 거예요…….”

[오해? 얼어 죽을 오해!]

[라이칸! 빨리 도망가!]

블랑카가 라이칸에게 향하는 베니니타스의 앞을 막았다. 블랑카의 비명이 푸른 하늘을 가득 메웠다.

“엄마!”

라이칸이 소리쳤다. 블랑카는 라이칸에게 외쳤다.

[엄마는 괜찮아! 어서 도망쳐, 라이칸! 그리고 아빠를 불러오는 거야.]

“하, 하지만. 엄, 엄마 피, 피가 많이 나.”

[엄마는 어른이라서 괜찮아. 그러니까, 얼른 아빠에게 가. 그게 엄마 도와주는 거야.]

블랑카는 베니니타스의 공격을 막으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베니니타스의 목표는 저와 라이칸이었다.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라이칸은 살려야 했다. 블랑카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블랑카는 뒤에 있는 라이칸을 힐끔 돌아보고 말했다.

[얼른 안 도망가면 엄마한테 혼난다! 그러니까. 얼른 가!]

라이칸은 망설이다가 늑대로 변해서 얼른 다리를 움직였다.

[엄마! 잠깐만 기다려! 내가 아빠 데려올게!]

라이칸은 정신없이 뛰었다. 뛰고 또 뛰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라이칸은 아버지를 발견하자마자 블랑카가 위험하다고 외쳤고 로보는 미친 듯이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놓인 것은 처참한 블랑카의 시신이었으며 베니니타스의 전언이었다.

[ 라일라와 프리드, 벤자민의 목숨. 이리 갚겠다.]

* * *

로보가 베니니타스와 헤르티아를 일부러 토스 호무스에 붙잡아놓고 상대적으로 호위가 약해진 틈을 타서 라일라와 두 형제를 죽여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베니니타스는 당연히 분노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블랑카를 살해함으로써 선전포고를 하였다는 것이다.

라이칸은 도저히 로보가 벤자민과 프리드, 라일라를 죽였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라이칸은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이미 머리가 돌아버려 베니니타스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로보의 귀에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늑대의 사랑은 뜨겁고 격렬했다. 그들에게 사랑하는 연인이란 제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로보는 제 연인을, 제 세상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잃은 것이었다.

라이칸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그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황을 냉정하게 보려고 노력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이라고, 베니니타스가 그런 짓을 저지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삼촌처럼, 스승으로 믿고 따랐던 베니니타스의 배신을 믿기 힘들었던 어린 마음이 깔려있었다.

“친구? 얼어 죽을 친구! 이제 그놈은 적이야. 라이칸!”

토스 호무스는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그동안 라이칸은 블랑카와 프리드, 벤자민, 라일라의 죽음으로 매일 침대에서 눈물로 보내는 에리카를 위로했다. 라이칸은 동생을 품에 꼭 껴안았다. 에리카는 훌쩍이며 물었다.

“이제 엄마랑, 프리드랑 벤자민이랑 못 보는 거야? 오빠. 그런 거야?”

“응.”

라이칸은 목이 멘 소리로 대답했다. 에리카를 위해서 의젓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도 열셋의 어린 소년이었고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다. 스승의 배신,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분노, 자신의 무력감까지 라이칸은 견디고 있었다. 라이칸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만 훌쩍이면서 울었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로보는 저와 뜻을 같이할 수인 일족들을 모아서 전쟁을 벌였다. 까마귀 수인들의 습격으로 토스 호무스의 궁도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어서 두 남매는 아버지를 따라서 전쟁터를 전전했다.

“에리카, 괜찮을 거야. 오빠가 지켜줄게.”

라이칸은 매일을 에리카를 위로하며 보내었다. 전쟁터에는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였다.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했다. 라이칸은 그 끔찍한 광경을, 고통스러운 상황을 로보를 위해서, 그리고 에리카를 위해서 견디고 있었다.

라이칸의 마음은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다. 블랑카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도, 베니니타스를 향한 분노와 슬픔과 배신감도, 벤자민, 프리드, 라일라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털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어두운 감정들이 좀먹어가고 있었다.

아들을 위로해 줘야 할 로보는 이미 복수에만 미쳐 있어서 그를 돌보지 못했다. 라이칸은 서서히 메말라 가고 있었다. 라이칸은 점점 지쳐 갔다.

수인 내전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포트리스의 마레 위르들도 휘말리기 시작했다. 포트리스의 마레 위르들은 베니니타스의 편에 섰다. 여우 일족과 늑대 일족의 싸움은 스티폴로르 전역의 수인과 인간들까지 끌어들여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라이칸은 긴장한 얼굴로 회색 늑대와 붉은 여우를 바라보았다. 베니니타스의 옆에는 렉스 뮈어가 커다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베니니타스와 로보의 실력을 비교하자면 무조건 로보가 베니니타스의 비해 한참 우위에 있었다. 베니니타스가 고유 속성에 대한 응용력이 뛰어나다 하여도 로보의 전투력에는 한참을 밀리는 실력이었다.

로보는 분노로 눈을 번뜩이면서 베니니타스를 노려보았다. 이미 이지가 없는 그에 비해서 베니니타스는 한결 침착해 보였다. 시간의 차이이며, 복수의 유무가 만들어낸 차이였다. 로보와 베니니타스는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오빠.”

에리카는 라이칸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라이칸은 에리카를 꼭 끌어안았다.

“걱정 마, 에리카. 아빠는 강하니까. 꼭 이길 거야. 걱정하지 마.”

라이칸은 이 말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에리카를 달래기 위해서 하는 말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전투는 치열했다. 수인들 중 첫째와 둘째가는 수인끼리의 싸움이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라이칸은 불안해졌다.

로보는 효율적이고 민첩한 전투 방식을 선호했다. 다시 말해서 꼭 필요한 공격만 하는 군더더기 없는 공격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확실하게 급소를 노리기보다는 베니니타스에게 더 많은 고통을 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라이칸은 그것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블랑카가 산채로 사지가 잡아 뜯기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이성을 잃은 로보와 달리 베니니타스는 차분하게 공격을 하였다. 그 덕택에 로보가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누구의 승리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팽팽하게 흘러갔다. 거기다 두 괴물의 싸움에 끼어든 렉스라는 변수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렉스는 중간, 중간에 끼어들어서 베니니타스를 보호해 주거나 로보의 틈을 만들어주는 등 싸움에 굉장한 공헌을 하고 있었다.

라이칸은 손바닥에 배어나온 땀을 바지에 닦았다. 에리카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손가락 틈으로 로보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라이칸은 애써 의젓하게 에리카를 위로하면서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금방이라도 풀려서 주저앉을 것처럼 불안하게 떨렸다.

“이길 거야. 이길 거야.”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전투는 길어졌다. 베니니타스와 로보 그리고 곁다리로 낀 렉스의 숨소리가 모두 거칠어졌다. 이제는 작은 실수 하나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정도가 되었다. 라이칸은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흐억!]

로보의 급박한 숨소리에 라이칸과 에리카는 모두 눈을 떴다. 베니니타스의 이빨이 로보의 목줄을 뜯었다. 렉스가 만들어낸 틈을 베니니타스가 정확히 잡은 것이었다. 에리카가 주저앉았다. 베니니타스의 이빨이 로보의 목을 깊게 파고들었다. 로보가 발악하며 베니니타스의 오른쪽 눈을 파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로보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위르형으로 돌아온 그의 머리가 바닥에 데구르르 굴렀다.

[크아아아악!]

베니니타스의 승리의 고함이 이곳을 가득 메웠다. 여우 수인 일족들이 함성을 질렀다.

“아빠!”

에리카가 비명을 질렀다. 라이칸은 에리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여우 수인들이 그들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지금은 피해야 하는 때였다. 시신조차 지킬 수 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뒤로하고 라이칸은 살기 위해 달렸다.

그리고 늑대 일족은 그날 최대의 패배를 맞이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 * *

에리카는 라이칸이 없을 때에만 눈물을 훌쩍였다. 울면 오빠가 속상해하기에 그의 앞에선 차마 울 수가 없었다.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그는 오늘은 조금 늦고 있었다. 에리카는 혹시 라이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궁금해서 배로 공포에 질렸다. 에리카는 눈물을 닦으며 숨어 있던 곳에서 몰래 나왔다.

“오빠! 오빠!”

에리카는 저 멀리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오는 라이칸을 보았다. 라이칸은 평소보다 배로 어두운 표정이었다. 에리카는 얼른 라이칸에게 달려가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라이칸은 휘청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에리카를 꼭 안아주었다. 에리카는 라이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라이칸의 옷이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걱정했잖아. 왜 이렇게 늦었어…….”

라이칸은 에리카의 정수리를 약간은 메마른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손길로 에리카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라이칸이 무릎을 굽혀서 에리카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걱정했어? 에리카.”

“응. 응. 오빠. 나 정말 걱정 많이 했어. 오빠가 영영 안 돌아와서 나 혼자 남을까 봐 무서웠어.”

에리카가 훌쩍였다. 라이칸은 미안하다며 에리카를 꼭 끌어안아 주고 가져온 먹을 것을 꺼냈다. 말린 과일들과 사슴 고기였다. 과일은 그렇다 치고 사슴 고기는 라이칸이 구하기 힘든 것일 텐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에리카가 눈을 반짝였다. 하루 종일 굶느라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이거 가져오느라 늦었어. 미안해.”

“아니야. 오빠. 오빠도 얼른 먹어. 오빠도 배고프겠다.”

에리카가 다급하게 고기조각을 움켜쥐면서 말했다. 라이칸은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많이 먹었어. 피곤해서 그러는데, 씻고 올게. 먹고 있어.”

“알았어! 오빠 얼른 돌아와야 해.”

에리카가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라이칸은 근처의 연못으로 향했다. 노숙을 할 때 물이 있는 곳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건 베니니타스가 알려준 지식이었다. 라이칸은 그것을 떠올리곤 피식,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로보의 죽음 후 에리카와 라이칸은 로보의 자식이란 이유로 수많은 수인들의 추격을 받았다. 그들 중 일부는 로보에게 원한이 있는 이들이었고, 다른 일부는 로보의 아이들을 굴복시켜 제 낮은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변태였다. 라이칸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 덕택에 플로서스와 헤어졌고 카니스 빅터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라이칸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숨는 것뿐이었다.

라이칸은 옷을 벗고 연못으로 들어갔다. 하반신이 쓰려왔다.

발란테스 카르멘의 아들인 드미트리 패거리를 만난 것은 라이칸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닐 무렵이었다. 드미트리와는 안면이 있었기에 마음을 놓은 것이 원인이었다. 드미트리는 라이칸을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에리카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라이칸은 에리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자신도 동생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인지 라이칸의 말을 믿어주었다.

자신을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던 드미트리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시작은 정말 사소했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일을 그르치게 되자, 드미트리가 라이칸에게 발길질을 하였다. 드리트리는 그에게 주로 몰이꾼 역할을 맡겼다. 몰이 대상은 때로는 동물이었고 때로는 수인이었다. 몰이가 끝나면 드미트리가 추잡스런 일을 벌인다는 것을 알기에 라이칸은 그 이후의 일은 보지 않았다.

어느 날, 라이칸은 공복에 움직이느라 너무 힘들어 동물을 제대로 몰지 못했다. 패거리들이 들러붙어서 라이칸에게 발길질을 했다. 라이칸은 영문도 모르고 스물이 넘는 건장한 청년들의 발에 밟히고 차였다. 늑대 일족 특유의 빠른 회복력이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었다. 라이칸은 입에서 침만 꺽꺽거리며 뱉을 때까지 얻어맞았다. 처음에는 제가 뭔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감내했다. 그들의 폭행은 점점 더 집요하고 지독해졌다. 발로 차는 것은 기본이었고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는 것 역시 별것 아닌 일이 되었고,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면 배로 더 오래 얻어맞았다. 울거나 애원하면 그들의 구타는 더 심해졌다. 그리고 라이칸은 그들의 표정을 보았다.

웃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그들에게 이것은 한 가지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제 욕구를 풀어낼 놀이일 뿐이었다. 로보의 자식에게 굴욕을 주려던 변태들과 다르지 않으며 그들보다 더 악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라이칸은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라이칸을 폭행한 뒤에는 항상 충분할 정도의 식량을 주었고 라이칸은 그것을 배를 곯고 있는 에리카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지독할 정도의 폭행의 대가로 받는 식량. 라이칸은 모든 굴욕을 받아 넘겼다.

라이칸은 입술을 꽉 베어 물었다. 라이칸은 물로 몸을 씻으면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벅벅 문질렀다. 드미트리의 손길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라이칸은 그 더러운 손길을, 그 지저분한 손길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라이칸은 두 손을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오늘도 여느 때와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뭘 먹고 온 건지 정신이 조금 몽롱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마치 미친놈들처럼 낄낄거리더니,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막대기 하나를 건넸다.

【‘너도 피울래? 특별히 하나 줄게.’】

【‘싫, 싫어요.’】

그것이 너무나 이상한 것 같아서 라이칸은 손으로 그것을 쳐 내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드미트리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라이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서 던졌다.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에 라이칸이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드미트리가 다시 배를 걷어찼다. 그리고 숨을 꺽꺽거리고 있는 라이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드미트리는 번뜩이는 눈동자로 라이칸의 청회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너 진짜. 기분 더럽게 만드는 새끼야. 그거 알아? 기껏 죽은 얼간이 루프스 자식밖에 안 되는 주제에 내가 네놈 아래에 있는 놈으로 보이지?’】

라이칸은 고개를 흔들었다. 드미트리가 실실 웃으며 라이칸의 볼을 툭툭 기분 나쁘게 때렸다. 라이칸은 굴욕감에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똑바로 치켜떴다.

【‘이게 어디서 눈을 치켜떠!’】

볼에 불이 나는 것 같은 고통에 라이칸은 눈을 찌푸렸다. 드미트리는 라이칸의 몸을 뒤집어서 제 아래에 깔았다. 드미트리 패거리가 휘파람을 불면서 낄낄거렸다.

【‘오! 오늘은 그렇게 놀게?’】

【‘너도 하려면 하든가?’】

드미트리가 바지를 벗겨내려고 하자 라이칸은 놀라서 몸부림을 쳤다. 드미트리가 라이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바닥에 부딪친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드미트리가 낄낄거렸다.

드미트리가 라이칸의 등을 쓸었다. 드미트리의 손길이 닿는 모든 부분에서 소름이 돋아 라이칸은 반항했지만 위에서 누르는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싫으면, 에리카가 어디 있는지 말해. 그럼 봐줄게.’】

【‘몰, 몰라요.’】

【‘정말 몰라? 매일 두 명 분의 식량을 꼬박꼬박 챙겨가면서?’】

드미트리가 라이칸에게 속삭였다. 라이칸은 움찔했다. 하지만, 에리카를 드미트리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의 본능이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었다. 라이칸은 에리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잡아뗐다.

드미트리는 혀를 차더니 라이칸의 허리를 잡았다.

【‘난 계집질을 좀 더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지.’】

라이칸은 드미트리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 수 있었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라이칸은 땅을 손톱으로 긁으면서 살려 달라고 외쳤다.

드미트리 패거리들은 낄낄 웃으며 라이칸을 비웃기만 했다. 라이칸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도와달라고 외쳐도 그들은 손가락질만 했다.

【‘루프스님은 얼마나 고결하셨는데 그 아들이란 놈은 이렇게 천박하고 더러워서야.’】

드미트리가 라이칸의 등 뒤에서 떨어지면서 낄낄거렸다. 라이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피를 닦고 옷을 챙겨 입는 일뿐이었다. 드미트리는 라이칸을 향해 식량이 든 주머니를 집어 던졌다.

【‘오늘 아주 만족스러웠어. 화대야. 가져가.’】

【‘어이구. 우리 왕자님, 화대도 받으시고 출세하셨네요.’】

드미트리 패거리가 그를 조롱했다.

라이칸은 물에 목까지 담그고 두 손을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라이칸은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오열했다.

비참했다.

그 누구도 그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열셋의 라이칸은 이를 악물고 살기 위해서 노력했다. 최선을 다해서 에리카와 살아남기 위해서 아득바득 노력했다. 살아야 했기에.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죽고 싶었다.

이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 * *

그날 이후 드미트리 패거리에서 라이칸은 두 가지 대접을 받았다. 단순한 폭행과 성적인 학대. 다른 녀석들은 아직 어린 그를 성적인 대상으로까지는 보지 않았으나 드미트리는 그를 가지고 놀기를 서슴지 않았다.

라이칸은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는 점점 감정을 잃어갔다. 라이칸의 청회색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어제 라이칸은 잠든 에리카의 목을 조를 뻔하였다.

에리카만 없으면 모든 것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가 학대를 받으면서까지 드미트리 패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에리카를 위해서였다. 에리카만 없다면 충분히 혼자 잘 살 수 있었다. 에리카 때문에 그는 이렇게 힘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에리카.

그런 생각을 하고 라이칸은 잠든 에리카의 목에 손을 올렸다. 에리카의 가는 목을 움켜잡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가는 목이 부러질 것이었다. 에리카만 죽으면 모든 게 편해질 것 같았다.

【‘오빠…… 가지 마…….’】

에리카가 잠꼬대로 그를 불렀다. 라이칸은 무릎을 꿇고 울음소리를 억누르면서 오열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고 제 동생이었다. 어떻게 동생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살아봐야 하는 것이다.

아침이 되어 라이칸은 에리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다.

이후의 삶이 힘들어지더라도 드미트리 패거리를 떠나야 한다. 일단 그것만이 답이었다.

라이칸은 오랜 고민의 결론을 짓고 에리카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터벅터벅 걸었다. 저 멀리서 비명 섞인 웅성거림이 들렸다. 라이칸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비명 소리가 들린 쪽은 에리카가 있는 곳이었다.

“아악! 제발. 제발!”

라이칸은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드미트리 패거리들이 결국 에리카를 찾아낸 것이었다. 그들은 에리카의 옷을 찢어내고 그 아이의 사지를 붙잡고 있었다. 라이칸은 그 끔찍한 장면에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몸만 벌벌 떨었다. 에리카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 다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칸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숨어서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에리카의 눈과 그의 눈이 얽혔다. 에리카의 눈이 커졌다.

“오빠! 살려줘! 구해줘!”

에리카가 절박하게 외쳤다.

“아이씨! 입 닥쳐!”

“악!”

드미트리가 에리카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야. 네 오빠가 여기 와봤자 우리 손에 죽기밖에 더 해? 너 찾으려고 데리고 다녔는데 이제 이용가치 다했으니 죽여야지. 안 그래?”

라이칸은 털썩 주저앉았다. 몸이 벌벌 떨렸다. 지금 나가면 죽는다. 라이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라이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스물이 넘는 수인들에게서 에리카를 구해낼 자신이 없었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주제에 막상 죽음에 위협이 다가오자 한심하게도 너무나도 살고 싶었다. 라이칸은 에리카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달렸다. 정신없이 달렸다.

에리카를 위해서 할 만큼 했다. 에리카를 위해서 모든 굴욕과 폭행들을 견뎠다. 그가 그렇게 고통스러울 때, 에리카는 그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었는가? 에리카는 울기만 했다. 라이칸은 제 마음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에리카를 위로해야 했다. 라이칸은 최선을 다했다. 그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라이칸은 스스로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라이칸은 돌부리에 걸려서 앞으로 넘어졌다.

“악!”

무릎이 깨져서 피가 흐르고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라이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그는 그저 에리카가 원망스러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에리카가 싫었다. 에리카가 죽어버렸으면 하였다. 에리카가 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에리카의 오빠였다. 에리카를 지켜야 하는 오빠였다. 프리드가 약해서 에리카를 못 지킬 것 같다고 싫어한 주제에 저는 에리카의 위험에서 도망쳤다.

꽉 쥔 주먹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라이칸은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섰다.

에리카를 지켜야 한다.

라이칸은 다시 미친 듯이 달려서 그곳으로 돌아갔다. 다리는 부러질 듯이 아파왔고 심장은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에리카!”

저 멀리 에리카가 보였다. 라이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리카의 몸을 안았다. 에리카의 목이 아래로 부자연스럽게 축 늘어졌다. 라이칸의 손에 힘이 빠졌다. 에리카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 돼!”

라이칸은 아직 온기가 남은 에리카의 손을 부여잡았다. 이미 목이 꺾였는데도 라이칸은 온기가 남아 있으니 에리카가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희망을 품었다. 라이칸은 에리카의 손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그녀의 손을 꼭 감쌌다. 하지만, 에리카의 손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라이칸은 에리카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비겁하고 비겁하고 또 비겁했다.

도망가서는 안 되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드미트리 패거리에게 덤볐어야 했다. 라이칸은 목이 쉴 때까지 오열했다.

그가 눈물을 그친 것은 밤이 다가온 무렵이었다. 온몸에 있는 물이 다 말라 버린 듯 그는 탈진해서 숨만 몰아쉬었다. 라이칸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겨울이라 얼어 있는 땅을 손으로 열심히 팠다. 돌조각과 딱딱하게 굳은 흙이 그의 손에 상처를 남겼다. 손끝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계속 땅을 팠다. 한참 후 라이칸은 에리카의 몸을 구덩이에 내려놓았다. 에리카가 추울까 봐 그는 낙엽들을 모아서 그녀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미안해. 미안해. 에리카. 내가 약해서.”

이제야 아버지가 말했던 힘이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힘이 있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힘이 있으면 높은 곳에 올라서서 그 누구도 저를 해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에리카의 몸을 흙으로 덮는 라이칸의 눈이 번뜩였다. 에리카의 모습이 흙에 묻혀 사라질 때마다, 라이칸의 안에서 무언가가 하나씩 끊겨갔다. 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에리카와 함께 묻었다.

에리카를 땅에 다 묻었을 때 그는 에리카와 함께 예전의 자신도 땅에 묻었다.

라이칸은 너무나도 원망스러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려왔다. 라이칸은 흘러내린 눈물을 손으로 대강 닦아내었다.

“에리카, 네가 죽은 것이 하늘도 슬픈가 봐.”

꽃을 좋아했던 에리카의 무덤에 꽃 한 송이 못 놓는 것이 한이 되었다. 라이칸은 에리카의 무덤을 뒤로하고 걸었다.

그날은 라이칸이 열네 살이 된 첫 번째 날이었다.

* * *

삼년 뒤

라이칸은 베니니타스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싸움의 결과로 엄청난 상처들을 입은 베니니타스는 마치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로보의 덕에 잃은 한쪽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었다. 라이칸은 예전의 스승을 바라보는 거라기엔 냉정한 눈동자로 베니니타스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싸움이었다. 이 싸움만 이기면, 그 누구도 저를 복종시킬 수 없었고, 모두를 제 발 밑에 둘 수 있었다.

베니니타스의 정예병들과 베니니타스가 단신으로 온 라이칸을 노려보았다.

[삼년간 잘 지냈나?]

베니니타스가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덕분에 아주 잘 지냈습니다, 스승님.]

에리카의 죽음 이후 라이칸은 미친 수인처럼 날뛰었다. 에리카의 죽음은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을 꺼리던 라이칸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선을 넘게 만들었다. 그 선을 넘은 이상 그는 두려울 것이 없는 강자가 되었다. 덤비는 수인들을 물리치고 점점 세력을 넓혀가던 중 라이칸은 어느 날 드미트리 패거리에 있던 놈들을 만났다.

그들은 라이칸의 압도적인 실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애걸복걸하였다. 라이칸은 그때만큼 허탈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그놈들의 생식기를 발로 밟아서 터뜨렸다. 피의 복수가 끝나자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처참한 시신이었다.

힘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모두가 그의 발아래 복종하고 애원했다. 라이칸은 자신이 서서히 미쳐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미친놈 하나 더 있어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렇게 살육을 벌이다 보니, 어느새 그는 루프스가 되어 있었다.

【‘살려줘. 그, 그거, 드미트리가 꾸민 일이야. 난 네 동생 죽일 생각이 없었어. 드미트리가 죽이자고 했어!’】

드미트리 패거리에 있었던 단테의 동생이 그에게 그날의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단테는 자신의 동생이 하는 말을 모두 들었다. 라이칸은 단테의 눈앞에서 그를 죽였다. 제 동생의 죄와 죽음에 아무 말도 못하는 단테를 뒤로하고 그는 드미트리를 가장 처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단테에게 그 일을 함구할 것을 명했다.

라이칸은 에리카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밝힐 수가 없었다. 제 치욕스런 과거, 비겁했던 과거가 밝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에리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져 저들이 더러운 입방아를 찧어 에리카의 죽음을 욕보이는 것이 싫었다. 착하고 가련한 아이가 생각 없는 놈들의 더러운 농담거리로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에리카는 그런 모욕을 받아야 하는 아이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침묵했다. 무정한 오빠라는 말은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 인륜을 저버렸다는 말도 참을 수 있었다. 모두가 그의 업보였다. 라이칸은 그렇게 삼 년을 살아서 다시 베니니타스의 앞으로 돌아왔다.

[삼년간 많이 변했더군.]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삼 년이면 수인 정도는 변해주어야지요.]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전투를 시작했다. 베니니타스의 정예병들이 라이칸에게 달려들었다. 청회색의 눈동자에 광기가 돌았다. 라이칸은 그들을 도륙했다. 그의 발톱과 이빨에 그들은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병사처럼 찢겨나갔다.

라이칸의 전투 방식은 전성기 시절의 베니니타스와 로보의 전투 방식을 장점만 빼와서 조합시킨 방식이었다. 라이칸의 은빛 털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라이칸은 마지막 정예병의 앞다리를 씹으면서 베니니타스의 앞에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베니니타스가 라이칸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두 강자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붉은 여우와 은빛 늑대는 서로의 목줄을 노렸다. 전투가 격해질수록 서로는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예전 로보와 베니니타스의 전투처럼 베니니타스의 빈틈을 라이칸이 파고들었다.

[흐억!]

베니니타스의 비명이 울렸다. 라이칸의 이빨이 베니니타스의 목을 물어뜯었다. 라이칸의 청회색 눈동자와 베니니타스의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베니니타스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수인처럼 평온한 눈빛이었다. 라이칸의 이빨에 베니니타스의 목이 떨어졌다.

그 평온한 눈빛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라이칸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베니니타스 때문에 지금까지 지옥에서 살아왔다. 베니니타스를 죽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수를 한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눈빛 때문에 그는 더욱더 깊숙한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라이칸!”

복수에 불타는 눈동자를 하고 저를 노려보는 헤르티아가 보였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

베니니타스의 시신이 보였다. 라이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수인 내전이 끝났다. 라이칸은 정식으로 루프스의 자리에 올랐다. 꿈꾸지도, 바라지도 않은 자리였지만 그는 루프스가 되었다. 그에게 약한 것은 죄였고 다시는 비참한 라이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는 모든 이들을 제 발 아래 두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루프스가 되었다. 그렇게 십 년을 살았다.

모든 것이 무료했고 두려웠다.

드미트리의 밑에 깔리는 악몽을 꾸었고 누군가 저를 해치고 다시 예전의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의 발아래는 공포란 이름의 검은 뱀들이 우글거렸다. 그는 펠릭스 다우스를 들였고 그들이 복종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는 그것 외엔 사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세상은 그의 눈에 무채색이었다. 어떤 암컷을 보아도 몸이 동하지 않았고, 어떤 유희를 보아도 즐겁지 않았고, 그 무엇도 신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에 유채가 찾아왔다.

신기하게 생긴 마레 위르 암컷. 반항적인 눈을 하고 저를 보는 암컷에 흥미가 생겼다. 저 암컷이 제게 복종하는 것을 보는 것이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유채는 결코 제게 복종하지 않았다. 끝까지 스스로에 자긍심을 잃지 않았으며, 제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제가 지키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계속 눈에 밟혔다.

세상에 둘도 없을 것 같은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외양이 매력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 굳은 신념이, 그 용기가 빛이 났다. 그래서 시선을 잡아끌었다. 빛을 잃어버리고 색을 잃어버린 세상에 유채는 찬란하게 빛이 났다. 그래서 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수컷들이 아름다운 유채의 용모를 보며 힐끔거리는 것이 싫었고 유채의 눈물을 보면 제가 그녀에게 그런 의미밖에 될 수 없는 수인인 것 같아서 가슴이 내려앉았다. 제게는 보이지 않는 웃음을 타인에게 짓는 것을 보면 격렬한 분노가 차올랐다. 유채가 저에게만 웃어주기를 바랐고 저만 바라봐 주기를 바랐고 손을 뻗으면 닿는 곳이 있기를 바랐다. 그 모든 그 이기적인 바람을 그는 그저 펠릭스 다우스를 향한 소유욕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건 소유욕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이었다.

유채가 저를 찌르고 도망간 것마저 용서한 것도, 유채가 없는 동안 그녀를 계속 그리워한 것도, 유채가 예쁘다고 웃어준 머리 장식을 계속 가지고 다닌 것도, 저를 걱정하지 않는 유채가 원망스러웠던 것도, 저를 위로해 준 유채에게 느꼈던 벅차오르는 그 감정도 모두.

사랑이었다.

유채는 제가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순수를, 신념의 결정체였다. 그래서 동경했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유채가 그의 사랑이었다.

짹. 짹. 짹.

루프스는 눈을 떴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니 팔 위에 있는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루프스는 몸을 돌렸다. 유채가 그의 팔을 베고 그를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깰까 봐 다시 조용히 누웠다.

유채는 아기처럼 새근새근 숨소리를 냈다. 숱 많은 속눈썹이 만든 그림자가 유채의 고아한 분위기를 배가시켰다. 루프스는 유채의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은, 눈에 박히도록 고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평생을 같은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금슬 좋은 부부였던 부모님처럼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있다면. 유채의 잠든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수컷은 오직 자신이기를 바랐다. 잠에서 막 깨어난 유채의 눈동자에 담기는 것이 루프스 자신이기를 바랐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당겨 안았다.

“미안하다.”

아프게 해서, 제 감정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못난 수컷이라 괴롭게 하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그리고 유채에게 해주지 못한 일이 많음이 미안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꼭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미안하다.”

유채 행복이 그곳에 있음을 알아도 보내줄 수 없어 미안했다. 유채의 행복이 그녀의 가족이 있을 그곳에 있음을 알아도 보낼 수가 없었다.

유채가 사라지면 제가 죽을 것이다. 유채가 사라지면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릴 것이다. 유채를 향한 그리움에 평생을 앓다가 슬픔에 죽어버릴 것이다. 제가 이기적이고 못난 수컷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끝이 없는 어둠 속에서 살았던 제게 찾아온 유일한 색이고 빛이었다.

여기서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평생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살겠다.”

저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 제가 유채를 사랑하니 상관없었다. 유채와 같은 하늘, 같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손 내밀면 잡을 수 있는 곳에 유채가 있기를 바랐다. 그저 제게 웃어주고 제 곁에만 있어준다면, 유채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제 영혼을 팔아서라도 가져다 줄 수 있다. 암컷에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해도 괜찮았다. 그렇게라도 유채를 잡아둘 수 있다면 뭐든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사랑을 하면 얼간이가 된다.

지금 이 전쟁의 상황보다 유채가 중요했다. 유채가 저를 이렇게 만들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처럼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는 부서질 것 같은 유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어떻게 이 여린 몸에서 그런 강단이 나왔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열셋과 열넷 그 사이의 겨울에 멈춰 있던 자신의 시간을 유채가 움직였다.

“내가…… 너를 연모한다.”

이렇게 한심한 수컷으로 만들어놓고 무책임하게 사라져서는 안 된다.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입술에 닿았다. 맞닿은 입술 사이에 온기가 오갔다. 짧은 닿음 뒤에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니 여기 남아주면 안되겠나.”

루프스는 유채의 귓가에 주문을 거는 것처럼 속삭였다. 그렇게 하면 유채가 저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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