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늑대왕 루프스-9화 (9/16)

Chapter 9. 소들의 왕, 타우루스 [Taurus]

“타우루스님. 곧 방어선이 뚫릴 가능성이…….”

“꺼져!”

헥터는 분을 참지 못하고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소 수인 한 명은 벌벌 떨면서 헥터의 방을 빠져나갔다. 헥터의 방에는 아편의 연기가 자욱했다. 헥터는 헤임달이 쥐어주고 간 아편과 정체 모를 약을 움켜쥐었다. 그는 그것을 입에 털어 넣었다. 헤임달이 고통을 억제시켜 주는 약이라고 했는데, 효과 하나는 뛰어났다. 헥터는 술잔이 부서질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분명히 승기는 제 쪽에 있었다. 헤임달이 준 약을 제 군대에 먹이니, 군사들이 호전적으로 변해서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파죽지세로 독수리 일족들의 땅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 당황한 올리에의 표정이란. 고지식한 영감에게 치욕을 안겨주고 헥터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올리에의 날개 하나를 찢고 독수리 일족을 거의 전멸 상태로 몰아갔다고 생각했을 때, 루크레치아와 토모스가 늑대 수인 일족을 이끌고 왔다.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인 토모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토모스가 정상이었다면 분명히 상황은 배로 악화되었을 것이다.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딸의 죽음이 헥터 탓이라 생각해 마구잡이로 달려들기만 하는 토모스가 전선을 이탈하는 덕에 소 수인들은 간신히 전선을 정비하고 독수리, 늑대, 개 연합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발란테스 카르멘의 죽음과 양 일족의 항복 소식이 들려왔다. 헥터는 카르멘이 그 정도 버텼으면 오래 버틴 거라 생각하고 그래봤자 이쪽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루프스가 이쪽으로 합류하면서 그의 예상과 다르게 많은 것이 바뀌었다. 루프스의 등장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전쟁의 판도를 뒤집었다. 소 일족은 후퇴를 거듭했고 결국 루프스는 미노르 호무스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 계집.”

헥터가 제 옆에 있는 정보부 소속의 소 수인에게 물었다.

“루프스 옆에 있나?”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루프스의 유일한 약점일 것입니다. 제 예상이 옳다면 말이지요.’】

헤임달이 그렇게 말했었다. 헥터는 유채를 떠올렸다. 낭창한 몸과 색기가 돌던 그 얼굴이 떠오르자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루프스 놈의 목줄을 뜯으면 그놈의 곁에 있는 그 암컷부터 깔아뭉갤 생각이었다. 애초에게 제가 이렇게 된 것은 그년이 제게 반항을 한 탓이었다. 좋게 말할 때 제 말에 따랐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

“잡아와!”

“예?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디에 있는지라도 알아와. 그년밖에는 이 상황을 뒤집을 방법이 없다.”

만약 루프스 놈이 그 암컷을 마음에 품었다면 제 아비와 똑같을 것이다. 늑대 놈들이란 제 암컷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어도 행복해하는 놈들이었다. 루프스를 당해내기 힘들다면, 그 암컷의 목줄을 틀어쥐면 된다.

* * *

막사를 지키는 일을 맡은 데릭은 막사 안을 힐끔거렸다. 그 안에는 깊은 잠에 빠진 펠릭스 다우스가 있었다. 발란테스 카르멘을 해결하고 돌아온 루프스의 품에 저 암컷이 안겨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런 전쟁터에 하등 쓸모도 없는 암컷을 데리고 왔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이 궁금해하는, 그 대단하다는 레티티아의 미모에 대한 호기심이 밀려왔다.

데릭은 막사 사이로 힐긋 보이는 얼굴에 광대가 붉어졌다. 상상했던 것을 가뿐히 뛰어넘는 미인이었다. 데릭은 새삼스레 저런 미인을 원하는 때면 언제나 안을 수 있는 루프스가 부러워졌다. 잠든 유채의 얼굴을 힐끔 보다가 얼굴이 더 붉어졌다. 지난번에 언뜻 보았던 광경이 기억났다.

일부러 보려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때만큼 야릇한 광경도 처음이었다. 루프스가 잠이 들어 있는 암컷 마레 위르를 일으켜 세우더니 입안으로 뭔가를 흘려보내 주었는데, 그게 꽤나 야릇하였다. 한 팔로 암컷을 품에 안고 액체를 입에서 입으로 넘겨주고 손가락으로 흘러내린 약을 닦고 다정한 손길로 눕혀주었다. 그 이상을 보았다간 제 목이 달아날 것 같아 얼른 시선을 떼고 보초를 서는 척을 하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혹여나 날지도 모르는 신음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루프스가 아무짝에도 전쟁에서 쓸모없는 암컷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잠자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주위의 모두가 루프스가 제 침상을 덥힐 용도로 저 암컷을 데려온 것이라고 음담패설을 하였었다. 하지만 데릭이 이 막사를 지킨 이후로 한 번도 루프스는 저 암컷과 정사를 치른 적이 없었다.

“어이. 이봐! 뭔 생각을 하기에 늙은이를 세워두고 난리야!”

데릭은 제 눈앞에서 손을 흔드는 오르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매번 생각하지만, 뱀 수인 일족들은 어딘가 소름끼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데릭은 머리를 긁적이며 소리쳤다.

“놀랐잖아요, 오르페님! 오르페님은 본인의 외모가 심약한 수인의 심장을 얼마나 놀라게 할 수 있을지 생각 안 하세요?”

“어린 것이 늙은이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리고 내가 이렇게 생긴 것에 대해 네가 뭐라도 보태줬느냐!”

“제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오르페님. 그리고 조용히 하세요. 만약 안에 있는 펠릭스 다우스 깨어나면 저 루프스님께 목이 달아날지도 몰라요!”

오르페는 끌끌 혀를 찼다. 장담컨대 유채는 겨우 이 정도의 소란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소량의 수면제를 지속적으로 먹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밥에 조금씩 탔고, 그 다음은 잘 때 몰래 먹였다. 수면제라는 것이 정상적인 생활 리듬을 방해하는 것이라 그만 쓰는 것이 좋다고 그렇게 충고를 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쓰겠다고 워낙 고집을 부려서 오르페도 말릴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소란으로는 안 깬다. 그리고 빨리 비키기나 해라.”

“매번 말씀드리지만, 저 걸리면 목이 댕강…….”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 녀석아! 빨리 입 다물고 비켜라, 이놈아.”

오르페가 왕진가방으로 데릭의 옆구리를 쳤다. 데릭은 아픈 옆구리를 문지르며 막사의 입구에서 비켜 서서 오르페가 들어가게 해주었다. 오르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얼른 막사로 들어갔다.

간이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는 유채가 보였다. 유채는 동화책에 나오는 영원한 잠에 빠진 공주처럼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오르페는 얼른 유채의 맥을 짚었다.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오르페는 가방을 뒤져서 침을 꺼내었다. 그는 예전에 늙은 아르젠인가 하는 나라의 배의 난파선의 선의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오르페의 의술 중 일부는 그 늙은 아르젠 출신의 마레 위르 선의에게 배운 것이었다. 오르페는 그가 유품으로 남긴 긴 금침을 깔끔한 헝겊에 몇 번 닦았다. 그리고 유채의 손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수 있으니…….”

오르페가 혀를 끌끌 찼다. 루프스는 유채가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잠에 들게 만들었다. 그러면 도망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늑대 놈들은 사랑 문제에서는 골 때리는 면이 있어서 일반 수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미친 짓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이것도 그런 종류의 미친 짓이었다.

수면제를 과용하다가 중독되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몇 번이나 얘기를 했는데도 귀를 막아버리는 루프스 덕에 오르페는 이렇게 몰래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막사를 지키는 놈과 안면이 있는 사이라 적당한 협박이 먹혀서 다행이었다. 오르페는 유채의 손에 놓았던 침을 모두 빼고 침통에 챙겨 넣었다.

“어디보자. 그게 어디 있더라.”

오르페는 가방을 뒤져서 하얀 가루를 꺼내고 물을 담은 그릇에 그것을 풀어내었다. 새끼손가락으로 약을 찍어서 맛을 본 오르페의 미간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변했다.

“매번 생각하지만 이건 정말 못 먹을 약이야.”

오르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은수저를 꺼내어서 약을 한 숟갈씩 떠서 유채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릇에 담겨 있던 약을 모두 비우고 오르페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유채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에휴. 운명이 이렇게 가혹할 수가 있나.”

애초에 사랑이 양방향이라면 늑대 놈들의 열렬한 사랑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제 순정을 모두 바치는 사랑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는 그 어떤 수인들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이 어긋난 경우라면? 사랑을 하는 늑대 놈도 고역이지만 받는 쪽도 고역이었다. 받기 싫은 선물을 자꾸 안기는 것은 그저 돌멩이를 던져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덕택에 이렇게 전쟁터까지 끌려와서 고생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잔혹한 장면을 보지 못하는 아이가 전쟁터에 끌려왔으니, 얼마나 심적으로 고통스러울 것인지 짐작이 되었다. 다행히 루프스도 나름 배려를 해주느라 예전이라면 제 몸이 피로 범벅이 되어있건 말건 곧장 막사로 돌아갈 수인이, 이제는 피를 닦고 제 몸에 혈향이 배어 있지 않나 확인을 했다.

오르페는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말해 어떤 암컷이 자기를 거의 폐인 직전으로 만들 뻔한 수컷을 마음에 담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유채는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였다. 필연적으로 비극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랑이었다. 루프스나 유채 둘 다에게 좋지 않은 것들만 남기고 끝날 사랑이었다.

“수인 마음이란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오르페는 꺼냈던 물건들을 차곡차곡 가방에 챙겨 넣었다. 루프스의 눈을 피해서 이렇게 조치를 취해놓았으니 빠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쯤에는 정신을 차릴 것이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쯤에는 정신을 차리는 것이 이로웠다.

오르페는 가방을 챙겨들고 다시 막사를 빠져나왔다. 제가 머무는 막사로 곧장 돌아간 그는 막사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긴 머리의 청년을 보았다. 막 전투를 마친 것인지 붉은 머리에는 검붉은 피가 튀어 있었다.

“알렉스 군?”

“오르페님!”

저를 찾는 것이었는지 알렉스는 실랑이를 마치고 달려왔다. 오르페는 프레드릭과 안면이 있는지라 자연스럽게 알렉스와도 가까워졌다. 알렉스는 오르페에게 유채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유채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을 꺼리던 오르페는 알렉스 특유의 친화력에 금세 마음을 풀었다. 그는 알렉스가 유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을 알아보고 이따금 소식을 전해주었다.

“유채 양은 어떤가요? 이제 괜찮나요?”

알렉스는 오르페의 가방을 들어주며 물었다. 이 나이대의 늙은이들이 그러하듯이 오르페도 제게 이렇게 예의를 갖추는 젊은 마레 위르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입니다.”

“아마 오늘에서 내일쯤이면 일어날 걸세. 그리고 거기 있는 게 안전할 거니까 딴 마음 품지 말게.”

막사 안으로 들어온 오르페가 어깨를 두드리니 알렉스는 얼른 그의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오르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안마를 받았다. 오르페는 알렉스를 쓰윽 훑어보았다. 외모도 저 정도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고, 강하고 성격도 좋았다. 마레 위르라는 것이 걸리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윗감으로 큰 흠은 아니었다. 오르페에게는 혼기 꽉 찬 손녀가 하나 있었는데, 그 손녀의 짝으로 알렉스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네 그…… 유채 양에게 가진 관심을 조금 돌려서 다른 암컷에게 쏟아보는 것이 어떤가?”

“예?”

“자네가 사윗감으로는 좋은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참한 암컷 하나 소개 시켜줄 테니 토스 호무스에서 살 생각 있는가? 자네가 요즘 올린 전공 덕에 평판이 나쁘지도 않으니, 적당히 루프스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면 높은 지위에도 올라가고 부와 명예를 쌓을 수 있을 걸세. 솔직히 그 가망 없는 포트리스 보다는 여기가 훨씬 낫지 않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 소중한 인연이 있는 포트리스는 버릴 수 없습니다.”

알렉스가 완곡하게 거절을 하였다.

“포트리스와 수인들의 사이가 나아져 서로 화합할 수 있다면 그때 오르페님의 손녀를 만나보겠습니다. 그리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속마음이 들켰네. 아쉽군.”

오르페가 머리를 긁적였다. 알렉스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알렉스는 유채를 돌봐준 오르페에 대한 고마움에 정성스럽게 안마를 해주었다. 오르페가 알렉스를 힐끔 돌아보더니 물었다.

“자네는 회의에 참여 안 하나? 자네 정도의 전공이면…….”

“저야…… 용병 주제에 무슨 회의에 참여하겠습니까?”

“그렇지…… 아,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내가 봐줌세.”

“다 나았습니다. 저도 상처가 좀 빨리 낫는 편이라서요. 그리고 크게 다치는 편도 아니고요.”

오르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렉스가 예전에 해줬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기억을 잃고 형과 함께 떠도는 것을 고양이 수인이 발견해서 길러주었다고 했었다. 고양이 수인이 발견할 정도라면, 아마도 포트리스와 멀리 떨어진 스티폴로르 깊숙한 곳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마레 위르들이 모여 사는 해안이 아닌 내륙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오르페는 알렉스를 휙 훑어보았다. 생김새는 그냥 보통의 마레 위르였다. 눈도 수인들처럼 동물 눈도 아니었고 동물의 흔적 따위는 남아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냥 마레 위르라고 치기에는 힘이 강했고 재생력이 너무 좋았다. 수인들과 마레 위르들의 혼혈을 보아온 오르페의 경험에 미루어 볼 때, 알렉스는 수인과 마레 위르의 혼혈로 보였다.

“그. 자네…….”

“오르페님. 급한 환자가 있습니다!”

독수리 수인 하나가 다급하게 오르페를 찾았다. 오르페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한 후 허둥지둥 가방을 챙겨서 독수리 수인의 뒤를 따라갔다. 알렉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유채가 어찌 지내는지 알고 싶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다.

* * *

“아, 목말라.”

유채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밖에서 남자들이 무어라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울려서 그게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았다. 유채는 간이침대에서 일어서서 땅에 발을 디뎠다.

휘청.

기립성 저혈압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던 여파인지, 유채는 휘청거리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탁자를 잘못 건드린 것인지 그 위에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와장창 소리가 났다.

“유채 양!”

“……알렉스 씨?”

유채는 알렉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질어질한 시야가 겨우 진정이 되고서야 침대를 붙들고 일어났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입구의 천 사이로 꼬리가 갈색인 늑대 수인이 알렉스를 막는 것이 보였다. 알렉스는 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유채는 상황을 파악하고 얼른 그쪽으로 가 막사 입구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유채 양, 괜찮아요?”

“예. 전 멀쩡해요. 알렉스 씨는 괜찮으세요? 아, 피가…….”

유채는 피가 튄 알렉스의 얼굴을 닦아주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데릭이 다급하게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언뜻 봤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 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데릭은 제 본분을 잊지 않았다. 이 일이 루프스의 귀에 들어가면 제 모가지가 달아날 것이다.

데릭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했다.

“루프스님께서…….”

“그 인간은 나한테 이 막사를 나가지 말라고만 했어요. 봐요, 내가 밖으로 나갔나요?”

그가 요구한 단 하나였다. 막사에서 나가지 말 것. 그러면 알렉스를 위험한 곳으로 돌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유채는 데릭을 밀어냈고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두 마레 위르 사이를 팔로 막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어디 안 다치셨어요? 저 때문에…….”

“유채 양, 이거 내 피 아니에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나 걱정해서 괜히 루프스에 말에 휘둘리지 말아요.”

“그런 게 걱정이라면 내 눈앞에서 꺼져 주지?”

“루프스님!”

데릭이 루프스의 등장에 오체투지로 땅에 엎어졌다. 루프스는 차가운 눈으로 데릭을 힐긋 보고 제 등장에 굳어버린 유채와 알렉스를 보았다. 루프스는 알렉스를 밀어내고 유채를 끌어안았다. 분명 매일 저녁마다 약을 주었는데도 잠에서 깬 걸 보니 오르페가 저 모르게 수를 쓴 모양이었다. 오르페를 데려다가 경을 칠까 했지만, 그가 유채를 아끼는 마음을 알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유채를 아끼는 몇 안 되는 이 중 한 명을 제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죽이기는 아까웠다.

루프스는 제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바르작거리는 유채의 뒷머리를 눌러서 알렉스의 시선에서 그녀를 감추었다.

“가만 보면 너는 참 남의 물건을 탐을 내는 것 같군.”

루프스의 말에 알렉스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탐을 내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는 것입니다. 부디 제가 그쪽과 같은 비슷한 저열한 생각을 할 거라고 넘겨짚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저열한 생각이라는 말에 루프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유채가 그의 팔을 다급하게 잡았다.

“나 약속 지켰어요. 당신도 약속 지켜요.”

유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프스는 순간 살의가 차올랐다. 도대체 알렉스 저놈이 뭐가 좋아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유채와의 약속이건 뭐건 알렉스를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알렉스를 건드렸다가는 유채가 저를 지금처럼이라도 봐주지 않을 것 같아서 살의를 억눌렀다.

“꺼져.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루프스는 알렉스를 뒤로하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루프스는 침대에 유채를 내려놓았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볼에 생채기가 생겨 있었고 옷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일어났으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움직여서 이렇게 다치는 것인지.”

루프스는 바닥에 쓰러진 물건들을 주워 올리고 수건에 물을 적셔서 유채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당신이 또 약 먹였죠?”

“그래.”

너무 선선하게 답이 나와서 유채는 이제 황당할 정도였다.

“전쟁터 한복판이다. 네 행동이 무모한 것이 한두 번이여야지, 네 안전을 위해서 그랬다.”

“빌어먹을 안전. 도망가면 알렉스 씨를 죽인다고 했는데, 내가 어떻게 도망가요? 안 그래요?”

“네겐 선택지가 하나 더 있지. 알렉스와 같이 도망가는 것.”

루프스는 유채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뒤로 모든 것이 막막했다. 일단 전쟁을 끝내야 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유채를 어떻게 해야 제 곁에 붙들어 놓을 수 있을지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유채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는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 사과를 해야 그녀가 받아줄지 몰라서 막막하였다.

루프스가 유채의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유채는 예전과 다른 따뜻한 손길에 또 다른 공포를 느꼈다.

“내가 장담하지. 알렉스는 여기서 너를 못 지켜.”

루프스는 유채의 왼손을 잡아서 약지에 입을 맞추었다.

“나 정도는 돼야 지키지.”

유채는 강단은 있는 편이어도 마음은 여렸다. 그게 루프스에게 일말의 희망이 되었다. 그녀는 카르멘과의 싸움이 끝난 뒤에 저를 위로해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저를 안아주고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다. 제 곁에 붙잡아놓고 온 마음을 다해서 사과를 한다면, 유채도 제게 마음 한편 정도는 줄지도 모른다.

“그럼 당신한테서 나는 어떻게 지켜요.”

“……아직도 못 믿나?”

루프스는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제가 진 죄가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저런 말을 듣는 것은 속이 상했다. 알렉스 놈과 다닐 때는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면서 제게만 저런 말을 하는 유채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당신이 약속한 걸 지켰다는 것도 못 믿겠어요. 알렉스 씨는 온몸이 피투성이던데 당신은 멀쩡하…….”

“그건 지켰다!”

루프스는 억울함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렉스는 전투시 후방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유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한 일이었다. 오히려 가장 위험한 건 선봉에 서는 자신이었다. 싸움이 끝나면 유채가 무서워할까 봐 피를 깨끗하게 지우고 냄새까지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오해뿐이었다.

루프스는 차마 유채에게 화를 낼 수가 없어서 제 머리만 거칠게 쓸어 올렸다. 알렉스는 보자마자 괜찮냐고 물어보면서 저에게는 한 번도 괜찮냐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어떡하겠는가. 사랑은 더 많이 하는 자가 약자인 것을. 유채의 마음을 여기에 붙들어놓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싫어하는 행동은 피해야만 했다. 루프스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주머니를 뒤졌다.

“정말이라면 오해해서 미안…… 뭐하는 거예요!”

유채는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루프스의 손길에 펄쩍 뛰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가만히 있으라 한 뒤에 머리카락을 붙들고 끙끙거렸다. 루프스의 손이 떨어지자 유채는 손을 들어서 제 머리카락을 만져 보다가 멈칫했다. 머리 장식이 다시 달려 있었다.

“잘 어울리는군.”

루프스가 유채의 머리를 정돈해 주면서 말했다. 머리 장식이 다시 제 주인을 찾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헥터의 궁에 들어가면 할 일이 많아지겠어.”

유채의 지저분하게 잘린 머리카락도 정리해야 하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옷과 신발도 준비해야겠다. 토스 호무스의 물건들이 미노르 호무스의 것보다 훨씬 더 나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미노르 호무스에서 급한 일을 처리한 다음에 토스 호무스로 돌아가서 미노르 호무스 이상의 것을 해주면 된다. 루프스는 유채의 지저분하게 잘린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헥, 터…… 요?”

유채의 몸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굳었다. 셀레네가 정신적인 상처도 치료해 주었다고 하지만, 헥터를 향한 공포감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루프스는 떨리는 유채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라. 그놈이 다시 너를 건드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약속하지.”

루프스의 머릿속에 베노르 콩레수스에서 헥터에게 당해서 망가졌던 유채의 모습을 떠올렸다. 루프스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작고 여려서 때릴 곳도 마땅치 않은 유채를 어떻게 폭행했는지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때 헤르티아가 막아도 헥터 놈의 목숨을 아예 끊어놓았어야 했다. 이제서라도 바로잡을 길이 열렸다. 그는 유채의 몸을 꽉 끌어안고 말했다.

“그놈에게 당한 일이 분하면 그놈에 대한 처벌은 너에게 맡기겠다. 헥터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그건 네 마음대로 해라.”

“당신처럼……. 하라는 거예요?”

유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솔직히 그를 정말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에게 맞으면서 느꼈던 고통과 공포는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살생을 할 수는 없었다. 유채는 불안감에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건 네 마음대로 해.”

루프스가 유채의 몸을 꽉 안으면서 말했다.

“난 네 눈앞에 헥터를 잡아다 줄 테니까.”

유채가 갑자기 헛웃음을 흘렸다. 루프스는 또 유채가 제가 뭔가를 바라고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할까 봐 얼른 덧붙였다.

“고마워서 하는 일이니, 별 다른 생각은 하지 마라.”

유채가 바라는 일이라면 뭐든 못해줄 리가 없었지만, 갑작스럽게 다가가는 것에 놀라서 그녀가 저를 더 멀리할 것이 겁이 나서 다른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 둘러대었다.

“그때, 네가 나를 위로해 준 것, 그것에 대한 보답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약은 더 이상 먹이지 않으마. 그리고 내일은 행군이라 몸이 고될 수 있으니 편히 쉬어라. 다른 생각하지 말고.”

유채가 떠나려는 루프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루프스는 제 손목에 감겨오는 갑작스런 감촉에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유채는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에게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헥터의 처벌을 제게 논할 때부터 유채는 루프스의 말이 황당했다. 마치 자신은 아무 잘못한 것 없다는 양 헥터에 대해서만 처벌을 내릴 거라 하는 그의 말을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분명 그도 헥터만큼이나 제게 심한 짓을 저질렀다. 요새에서 그가 약간 떨떠름한 기색으로 사과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지만 유채는 그것을 그의 사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그건 사과도 아니었다.

“당신은 나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기나 해요?”

유채는 항상 루프스가 저를 독특한 장난감 정도로 보고 있다는 생각밖에는 한 적이 없었다. 유채는 눈을 치켜떴다. 검은 눈동자와 청회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루프스의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렸다. 그는 입을 달싹였다. 유채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선심 쓰듯이 말하지 마요, 나한테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당신이나 헥터나 똑같으니까.”

유채가 루프스의 손목을 놓았다. 루프스의 눈동자가 어두운 빛을 잠깐 띠더니 그는 마른세수를 하고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긴 뒤에 막사를 나갔다. 루프스는 데릭을 물리고 막사 밖에 우두커니 서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유채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고 그녀의 원망을 모두 들어줄 각오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나 헥터나 똑같으니까.’】

이 말은 가슴에 박히도록 아팠다.

* * *

“형님. 근데 그 약쟁이 수인 놈들은 정말 그렇게 처리하실 생각이오?”

알폰소가 창고에 쌓아놓은 아편 정리를 하는 헤임달을 도와주며 물었다. 헤임달은 땀을 닦으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럼, 너는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 건데?”

“솔직히 더 써먹을 구석이 있지 않을까?”

“미친 소리하고 자빠졌어. 그거에 중독된 놈들은 곧 폐인이 돼. 그리고 죽기도 쉽게 죽고 말이야. 써먹을 구석은…… 얼어 죽을. 그게 제일 나아.”

헬라가 면박을 주자 알폰소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시 아편을 정리했다. 요 근래 헤임달은 아편에 중독된 수인들을 죽여서 그 간을 파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신을 잘 보이는 곳에 버렸다. 알폰소는 헤임달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의 작전에 따르고만 있었다.

“헬라, 너는 형님이 뭘 하고 싶은지 아냐?”

알폰소가 헬라의 허리를 쿡 찌르면서 물었다. 헬라는 알폰소의 뒤통수를 크게 내리쳤다.

“그것도 모르는 등신이 어디 있소?”

헤임달이 껄껄 웃으면서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알폰소?”

헤임달은 가지고 온 담뱃잎을 곰방대에 넣어서 불을 붙였다. 천천히 연기를 들이마시는 헤임달 가까이로 알폰소는 궁금하단 얼굴을 하고서 다가갔다. 헬라는 그 꼴을 보고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인간은 너무 쉽게 믿는다는 거야. 얄팍한 증거를.”

심증만 있어도 사람들은 사실을 넘겨짚고 믿으려 했다. 베니니타스가 그랬다. 로보가 저를 잡아두었다는 것과 늑대의 이빨이 선명히 남은 라일라의 시신을 보고 그가 그랬을 거라고 결론을 내려 버렸다.

원래 사람은 제가 어림짐작하고 있는 사실에 아주 조금의 근거가 돼줄 증거가 있으면 조작된 진실이라 하더라도 쉽게 믿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믿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배로 더 많은 진짜 증거들이 필요했다. 가짜 믿음을 없애기 위해 진짜 증거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수인들 사이에 인간들이 수인들의 간을 노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때, 실제 간만 없어진 수인의 시체가 나온다면, 수인들은 그 소문을 더 믿게 되겠지. 안 그래?”

“그래서 형님이 얻는 것은 뭔데?”

“공멸. 포트리스가 약해 보여도 생각보다 강해. 수인들이 어태까지 포트리스를 제압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이런 소문으로 시작된 균열은 결국 수인과 인간들 모두의 공멸을 불러오겠지.”

“그럼 왜 소 수인들을 부추긴 것이야. 그건 이 일과 상관이 없잖아.”

헤임달이 짜증난다는 얼굴로 곰방대로 알폰소의 뒷머리를 가격했다. 뜨끈한 것이 뒤통수에 닿아 머리카락이 타는 느낌을 받은 알폰소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형님!”

“이 등신아. 세력의 균형을 맞춰야 할 것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아직 포트리스가 전력상 밀리는데, 세력 균형을 맞춰야 둘이 싸우다 같이 죽을 거 아냐? 원래 전쟁이란 것은 진정한 승자가 없는 법이야. 전쟁에서 승리한 놈도 병신이고 진 놈은 더 병신 되는 거야. 장담컨대. 이번 전장에서 늑대 수인 놈들은 토모스를 잃을 거야. 그럼 늑대 놈들의 전력도 약회되겠지.”

“그래서 토모스를 움직이셨소? 역시 형님이야.”

“에휴.”

헤임달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토모스는 루프스의 시선을 돌려 소 수인 일족이 전쟁을 벌일 틈을 만들어주는 역할이었다. 벨라토르를 통한 루프스의 감시가 철저하기 때문이었다. 토모스 놈이 그 계집애를 건들면 루프스 놈이 날뛰느라, 벨라토르를 통해 헥터 놈을 감시하는 것이 느슨해지는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토모스가 발각당한 덕택에 늑대 놈들의 전력까지 줄어들었으니 일석이조였다.

“근데, 왜 헥터 놈에게 헤르티아를 건들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거야?”

“그건 헤르티아가 절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거라서 그런 거지.”

헬라가 짜증나는 것인지 끼어들고는 그를 향해 아편을 집어던졌다. 헤임달이 헬라에게 아편을 험하게 다루지 말라고 충고를 하자 헬라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티아는 꽤나 영악해서 제게 득이 될 일이 없으면 나서지 않아. 그러니까 전쟁이 일어나도 헥터가 대놓고 제 영토를 침입하지 않으면 안 움직일 거야. 헤르티아의 추종자인 단테도 가만히 있을 것이고, 헤르티아는 가만히 앉아서 늑대 놈들이 제 전력을 깎아먹는 꼴만 지켜보면 되는 것이지. 그 뒤에 늑대 놈들을 치면 되거든.”

“그러니까, 형님은 늑대 놈들의 전력을 깎아먹고 포트리스와 수인들 간의 갈등을 키우는 게 목적이구만. 그러면 헤르티아가 늑대 놈들을 칠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걸 이제 알았수.”

헬라가 툴툴 거리면서 헤임달 앞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으면서 물었다.

“근데 오빠, 프레드릭 녀석이 라일라의 죽음에 대해서 캐고 다니는 건 알아?”

헤임달이 눈썹을 찡긋거리는 것으로 긍정의 대답을 하였다. 알폰소가 손뼉을 짝 쳤다.

“그게 뭔 걱정이라고 십삼 년, 아니, 이제 해가 지났으니 십사 년 전이겠구만. 이미 증거도 없어.”

“하나 있긴 하지.”

헤임달이 담뱃재를 털면서 말했다.

“설마 베니니타스의 아들놈들이 살아 있으려고? 확인했잖아. 그놈들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그놈들이 살아 있었다면, 진작 나타나서 진상을 밝히려고 했겠지.”

“그놈들의 시신이 발견된다면, 증거가 될 수는 있겠지.”

헤임달이 중얼거렸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그 형제의 시신 외에 이렇다 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그것들도 이미 사라지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곁눈질로 알폰소와 헬라를 보던 헤임달의 시선이 문득 동생의 가슴께에 머물렀다. 헬라가 당황한 얼굴로 제 목에 걸려 있는 루비 목걸이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건 절대 안 내놔! 오빠.”

“네가 그걸 가지고 있다면 증거가 될 순 있겠네. 그건 베니니타스가 라일라에게 결혼 선물로 준 거니까.”

“설마. 그냥 주웠다고 하면 되지요? 렉스 앞에서는 저것도 항상 감추고 있잖아. 렉스도 언뜻 보고도 모르고 넘어갔잖아. 괜찮겠지.”

헤임달은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 저 목걸이를 보았을 때는 라일라가 결혼 선물로 요구한 것인지라 뭔지는 모르지만 귀한 것일 거라 생각했다. 헬라도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달라고 하도 졸라대서 죽은 라일라의 시신에서 떼어온 것이었다. 주웠다고 둘러대도 될 테지만, 의심을 품은 사람에게는 그것마저도 수상할 것이다. 헤임달은 헬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헬라. 어차피 그거 나중에 쓸데가 있어서 써야 됐어. 대륙에 돌아가면 그것보다 알이 더 큰 걸로 사줄게.”

“됐어, 오빠! 그때가 될 때까지는 내가 가지고 있을 거야.”

헬라가 목걸이를 숨기고 내놓으려 하지 않자 헤임달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일라가 저걸 왜 결혼 선물로 달라고 했는지 궁금해서 대륙에 있을 때, 마법사의 딸이라 마법에 조예가 깊은 세라와 함께 조사하다 보니 저 안에 굉장한 힘이 담겨 있는 걸 발견했다. 세라가 우연하게 제 마력을 저 붉은 돌에 흘려 넣다가 발견한 사실이었다. 압축된 힘을 개방시킨다면 마법 폭탄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의 힘인지라 나중에 요긴하게 쓸 예정이었다. 헤임달은 졌다는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폰소는 두 남매의 실랑이를 지켜보다가 가만히 물었다.

“근데, 형님 프레드릭 놈을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니야? 만약을 위해서?”

“그래야겠지.”

헤임달이 무릎을 손가락으로 치면서 고민을 하였다. 이 일을 맡을 적합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헤임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폰소, 란텔에게 연락을 넣어 만나자고 해.”

“란텔 녀석? 그 녀석 올 수 있을까, 오빠? 울피누스 호무스에 있을 거잖아.”

“그 녀석 외에는 적합한 놈이 없어. 그리고 이 기회에 프레드릭도 처리하자고. 귀찮은 걸림돌은 없애야지.”

장담하건대, 약간의 정보만 흘려주면 프레드릭은 증거를 잡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쓸 것이었다. 그럼 그 후의 일은 란텔에게 맡기면 된다.

헤임달은 턱을 쓸면서 알폰소와 헬라를 챙겨서 창고를 나왔다. 창고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고 있는데 저 멀리서 렉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프레드릭이 신녀에게 받아왔다는 물로 병세를 늦추어 강경파의 입지가 잠시 줄어든 참이라 현재 렉스의 행보가 굉장히 중요해진 때였다.

“헤임달! 내가 바쁠 때 온 건가?”

렉스가 헤임달에게 손을 내밀었다. 헤임달은 건장한 렉스의 손을 잡고 반갑게 악수를 하였다.

“아닙니다, 렉스 씨. 렉스 씨는 언제나 환영이지요. 오늘 잡은 싱싱한 물고기가 있으니 그걸 안주 삼아서 술 한잔합시다.”

헤임달은 헬라에게 술과 안주를 부탁했고 렉스에게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최근 실종자가 늘어서 말이야. 혹시 수인들 사이에 도는 소문 중에 아는 것 없나?”

헤임달은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서 고생했다. 그의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실종되는 사람들, 수인이 인간의 간을 노린다는 소문. 얼마나 완벽한 조건인가. 렉스는 약간 툴툴대는 투로 중얼거렸다.

“프레드릭 놈은 아직도 화합 타령이야. 그놈들을 기른 키르케랑 고양이 수인이 총망한 청년들을 다 버려놨어. 안 그래?”

“그런가요? 그래도 키르케님께 배운 만큼 아는 것도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골치 아프지만 헤임달은 모르는 척 칭찬했다.

“그래서 소문은 있나?”

“저도 조금 이상한 얘기를 듣긴 했는데 말입니다. 워낙 괴소문이라 믿기가 힘들어서. 사실 뜬소문 같기도 하고…….”

헤임달은 배 속에 검을 감추고 입에는 꿀을 담았다.

* * *

“오늘은 여기서 멈추지.”

루프스가 지쳐서 잠이 든 유채의 몸을 안아 올렸다. 소 수인들의 최후의 방어선까지 뚫은 이후 행군은 순조로웠다. 간혹 무슨 목적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노리고 달려드는 인물들이 몇 있기는 했다. 다행히도 그런 이들은 일반 병사들에 의해서 쉽게 처리가 되었다. 루프스는 막사가 지어지자마자 유채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잘 버텼으나 며칠간 이어진 행군에는 결국 이겨내질 못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루프스님. 냉수 들여왔습니다.”

데릭이 막사의 앞에서 말했다. 루프스가 들어오라고 하자 데릭은 막사 안으로 들어와 탁자 위에 냉수를 담아놓은 대야를 내려놓고 물러갔다. 루프스는 깨끗한 수건에 물을 묻혀서 유채의 얼굴을 닦아주고 갑갑해 보이는 옷의 단추를 풀어주었다. 찬 수건이 얼굴이나 목, 손에 닿자 유채도 시원함을 느끼는 것인지 표정이 풀어졌다.

루프스가 유채의 얼굴을 다 닦아준 후에 작은 입술 사이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유채의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가락 차가운 파렌티아에 닿았다.

【‘당신은 나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기나 해요?’】

청회색 눈동자가 짙어졌다. 맹세코 그는 유채를 자신의 소유물이라 여기지 않았다. 소유물이라 여겼다면 이렇게 번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채는 이것을 계속 걸고 있는 이상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없으면 나는 너를 무엇으로 붙잡아둘 수 있지?”

파렌티아를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게 없으면 그는 무슨 구실로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 수인들이 흔히 그를 보고 겁이 없다 하지만, 자신만 한 겁쟁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제 앞에 있는 작고 약한 마레 위르 암컷이 너무 무서웠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움직였다.

“이미 너는 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데.”

놓아달라는 말만 제외하면 그는 무엇이든 기꺼이 들어줄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을 한다면 얼간이가 된다는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평생 이러고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는 유채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사과는 해야겠지.”

루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채가 약하게 신음을 흘리자 루프스는 얼른 손에 힘을 풀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괜찮다고 속삭였다.

유채가 다시 깊은 잠에 빠지자 루프스는 그녀에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보석을 줄까? 아니면 꽃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유채의 이름과 같은 그 노란 들꽃을 꺾어다 줄까? 정원을 그 꽃으로 온통 채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제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구할까?

당연히 사과를 해야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냉랭하게 저를 무시할 유채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제 진심을 담은 사과도 모두 거절해 버리면 일말의 희망도 남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일단 선물을 한 아름 안겨주고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어지는 것을 기대해야 할까? 유채도 제가 조금 더 자상하게 대한다면 제게 조금 누그러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유채에게 사과를 하면 사과를 받아줄지도 모른다.

“루프스님.”

막사 밖에서 아리아가 그를 불렀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현 상황에 대한 보고를 드리기 위해 모두 사령부 막사에 모여 있습니다.”

아리아는 천막 입구 사이로 얼핏 보인 유채를 아니꼽게 생각했다. 감히 루프스의 어깨를 찌르고 도망까지 쳤던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루프스의 막사를 차지하고 배짱 좋게 잠이나 자는 것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었다. 아리아는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억눌렀다.

“레티티아님에 대한 벌은 언제 내리실 것입니까? 감히 루프스님의 어깨를 찌르고 도망간 펠릭스 다우스입니다. 그 죄에 대한 적합한 벌을 내려야 합니다.”

“내가 언제 네게 내 것에 관한 처벌을 논하는 것을 허락했나?”

루프스의 냉랭한 대꾸에 아리아는 몸을 사렸다. 솔직히 아리아는 지금 자존심이 상당히 많이 상해 있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어머니인 루크레치아는 늑대 수인 중 네 번째로 강한 수인이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세력가였다. 그런 어머니의 딸인 자신이 기껏 저 천한 마레 위르의 호위나 맡고 있는 것에 싫었던 것이다. 아리아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주제넘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루프스가 모두 기다리고 있다는 막사의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루크레치아와 토모스, 카신이 그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토모스의 첫째 아들도 함께였다. 토모스의 첫째 아들은 루프스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부인에 대한 걱정에 눈이 퀭했다. 토모스는 여전히 루프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제가 어찌 할 수 없는 그의 강함에 분노의 방향을 제 딸을 꾀어낸 헥터 쪽으로 틀었다.

“헥터의 향방이 모호합니다.”

루크레치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도 위 미노르 호무스의 궁을 짚었다.

“정찰병과 남아 있는 벨라토르를 이용해서 알아본 결과 헥터가 궁에 없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미노르 호무스는 산지가 없어서 요새도 없고 숨을 곳도 없을 것인데…….”

루프스가 턱을 쓸었다. 함정인 것일까? 미노르 호무스의 궁이 있는 곳은 평지라 이렇다 할 만한 매복지가 없었다. 딱 한 곳. 타우루스의 별장이 있기는 하나, 워낙 포트리스와 가까워 헥터가 그곳으로 이동했다면 포트리스에서 반응이 있어야 했다.

“쥐새끼. 궁에 숨었나.”

루프스는 간만에 머리를 쓴 것 같은 헥터의 잔머리에 속으로 감탄을 하였다.

“궁이라니요?”

“궁에서 나오는 것도 못 봤다, 궁에도 없다. 그러면 궁 어딘가에 처박혀서 숨어 있다는 것이지. 미노르 호무스의 궁은 그 자체로 요새다.”

루프스는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서 미노르 호무스를 방문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라일라가 보여준 마레 위르의 요새들과 닮아 있었다. 성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 성벽 사이의 빈 공간에 군대를 포위할 수 있었다. 루프스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사냥감을 잡으려면 일단 굴에 들어가야겠지.”

“궁에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카신이 넌지시 물었다. 루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쟁은 헥터 놈이 죽어야 온전하게 끝이 날 수 있었다. 불씨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꺼뜨려야 했다. 그리고 지금 소 수인 놈들의 상황으로 보아 헥터가 죽으면 곧 미노르 호무스 안에서 저들끼리 치고 박고 싸울 가능성이 컸다. 당분간은 미노르 호무스에 머무르면서 질서를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야만 한다.

“토모스. 궁 안에 남은 병력은 어느 정도로 추정되나?”

“정예병 몇 외에는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럼 그놈이 노리는 것은 나겠군.”

아리아가 얼른 미노르 호무스의 궁의 지도를 책상에 펼쳤다. 미노르 호무스의 궁은 토스 호무스의 궁보다 배는 컸다. 따로 숨을 곳이 없는 평지의 마지막 요새 기능을 할 목적으로 지어진 탓이었다. 고대 수인 내전에서 궁지에 몰린 소 수인들이 모두 이곳에 틀어박혀서 결사 항전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었다.

루프스는 출입구를 찾았다. 남쪽과 북쪽 중에 지금 루프스가 향하는 방향에서 가장 가까운 출입구는 북쪽이었다. 루프스는 북쪽 출입구를 가리켰다.

“토모스, 루크레치아, 카신을 선두로 궁으로 들어간다. 만약 매복한 놈들이 있다 하더라도 수는 많지 않을 것이고 위협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예상대로 매복이 있다면 이쪽의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실력자들을 내세워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았다.

토모스가 두 개 지점을 짚었다.

“안전하게 들어간다면 조를 나누어서 궁을 수색하겠습니다.”

“그래. 그놈은 우리의 생각만큼 머리가 좋지 않은 놈이라 어딘가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을 수도 있다. 그놈을 찾아라. 나는 그동안 단독행동을 하겠다.”

“호위가 없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리 한 짝, 뿔 한 짝 없는 놈이 무엇이 무섭다고.”

루프스가 루크레치아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루프스는 문득 유채가 헥터의 이름을 듣고 무서워하던 게 기억났다. 혹시 모르니 준비를 해서 나쁠 것 없었다.

“그 호위. 레티티아에게 붙여라. 그리고 궁에 들어가자마자 안전한 방을 찾아서 넣어놔.”

“예?”

카신과 루크레치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토모스는 이를 갈았다. 또 그놈의 마레 위르였다.

* * *

“힘들 것 알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헥터를 잡고 소 수인들의 질서를 잡을 때까지만 기다리면 토스 호무스의 궁으로 너를 데려가겠다.”

안전하게 궁으로 들어와서 저를 이곳으로 밀어 넣기 전에 루프스가 제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으면서 이 말을 건네었다. 자신에게는 감옥밖에 되지 않는 그곳을 마치 안전한 보금자리처럼 여기는 루프스의 말이 소름끼쳤다.

“그 감옥을 또 들어가라고요?”

유채가 빈정거리자 루프스는 속을 알 수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유채는 그의 손을 치워내려고 했지만 그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와 같이 토스 호무스로 돌아간다면 알렉스를 포트리스로 돌려보내 주겠다.”

“그 말 진짜예요?”

“……그래.”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애가 타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그런 시선이 오히려 더 불안하였다.

“알렉스는 포트리스로 돌아가고, 너는 나와 토스 호무스로 돌아가서 여태처럼 같이 지내는 거야. 같이 산책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여전히 제 자유를 구속하겠다는 말밖에 하지 않는 그였다. 유채는 루프스의 빈틈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나와 헥터가 동급일지는 몰라도……”

루프스가 손가락으로 유채의 턱을 들어올렸다. 유채는 매번 보던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가 아닌 약간 애잔한 빛을 띤 청회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루프스는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잘못을 안다. 최소한 헥터처럼 후안무치하지는 않아.”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볼에 닿았다. 그리고 유채를 호위의 역할을 할 늑대 수인에게 넘겨주었다.

“나중에 마저 이야기하지. 일단 저들을 따라가 안전하게 있어라.”

루프스는 그 말을 마치고 루크레치아와 함께 늑대로 변해서 어딘가로 뛰어갔다. 유채는 루프스가 호위로 붙여준 늑대 수인의 손에 이끌려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여기서 기다리시라는 루프스님의 명이십니다.]

늑대로 변한 늑대 수인이 유채를 방에 밀어 넣고 방문을 닫아 잠그면서 말했다. 유채는 제법 호화로운 세간이 가득한 방 안에 홀로 던져졌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고 양팔을 감싸 안았다. 헥터의 궁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등에 소름이 돋았다. 베노르 콩레수스에서 구출받지 못했다면, 그에게 붙잡혀 와서 이곳에 갇혀 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유채는 온갖 쇠사슬과 채찍, 성인 용품으로 보이는 것들이 가득한 한쪽 벽을 보면서 몸을 떨었다. 침대에는 사지를 결박시켜 놓을 도구인 것인지, 침대 기둥마다 족쇄가 달려 있었다. 유채는 점점 더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채는 루프스가 제 잘못은 안다고 했던 말을 곱씹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정치인들이 잘못이 탄로났을 때만 사죄드린다고 고개 숙이는 쇼를 보는 기분이었다.

“미친. 어!”

갑자기 앉아 있는 바닥이 훅 꺼졌다. 두꺼운 손이 유채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유채가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였다.

유채의 발목을 잡고 끌어당긴 남자가 그녀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알싸한 냄새를 맡음과 동시에 유채는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유채는 본능적으로 반항했다. 혀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가 유채의 머리를 돌 벽에 박았다. 유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은 유채의 몸을 어깨에 들쳐 멘 남자는 돌계단을 밟아 내려가면서 제가 열어젖힌 바닥을 닫았다.

유채의 이마에서 흐른 피가 계단에 동심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 * *

“그쪽이 협력 안 했으면 어려웠을 거야.”

유채는 기분 나쁘게 웃는 남자의 목소리에 조금씩 눈을 떴다. 어깨가 뻐근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 위에서 굳었는지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눈을 깜박이며 유채는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두 남자가 보였다. 유채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읍.”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유채는 당황했다. 그제야 손목의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두 손이 천장에서 내려온 갈고리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는 천 덩어리가 들어와 있었다. 입안에 들어 있는 천 덩어리에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갈고리의 사슬이 흔들렸다. 짤랑거리는 소리에 두 남자가 유채를 돌아보았다. 유채는 눈을 깜박여서 초점을 맞추었다.

“일어났어?”

“으읍!”

유채는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헥터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유채는 몸부림을 쳤지만 갈고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만 앞뒤로 흔들릴 뿐이었다.

헥터의 두터운 손가락의 유채의 볼을 건드렸다. 유채는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완벽하게 구속된 상태라 헥터가 무엇을 하든 반항조차 할 수가 없었다. 유채의 눈이 공포에 질려서 헥터의 손가락을 좇았다.

“우리 구면이지?”

유채는 정신없이 머리를 저었다. 헥터가 낄낄거리면서 그녀의 상체를 손으로 쭉 쓸어내렸다. 유채는 벌벌 떨었다. 베노르 콩레수스 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걱정 마. 네년의 처음은 아직 안 가져갔어. 루프스가 아껴 먹으려고 한 걸, 내가 그렇게 쉽게 먹으면 아깝지. 안 그래?”

헥터의 혀가 유채의 볼을 핥았다. 유채는 반쯤 울음소리가 섞인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이 와중에 옷이 벗겨져 있지 않았다는 데에 감사해야 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무력했다.

헥터가 유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유채의 몸이 크게 튀어 올랐다. 헥터가 낄낄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봐, 토모스. 네 덕이 커. 네놈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귀한 인질을 어떻게 잡았겠어.”

유채는 헥터의 뒤에 서 있는 토모스를 보았다. 유채의 눈이 커다래졌다. 토모스가 내통자였나?

“루프스가 마음에 품은 암컷이라 그런지, 꽤나 호위가 심했어. 몇 번을 시도했는데, 하는 족족 막히더군. 적당한 놈 매수해서 납치를 하려는 데 그놈 막사에 머물러서 실패하고, 이동 중에 납치하려하니 아리아가 호위 중이고. 그놈의 약점은 너밖에 없는데 말이야.”

헥터는 유채를 잡아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를 인질로 삼은 뒤, 루프스의 추적을 따돌릴 계획이었다. 어차피 늑대 놈들은 제 암컷에 눈이 돌아가는 놈이니 유채를 붙잡고 있으면 제게 막무가내로 나올 수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동안 저 암컷을 제 것으로 만들고 적당히 체력과 세력을 회복한 뒤에 루프스를 다시 칠 생각이었다. 하나, 그 인질을 잡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루프스는 무려 아리아를 호위로 붙여놓고 제 막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유채를 보호했다. 그래서 헥터는 방법을 바꾸었다.

“딸의 복수를 하게 해주겠다고 하니 기꺼이 협조해 주겠다고 하더군. 그래서 토모스는 너를 내 유희실로 데려왔지.”

유채는 아까 그 방이 유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헥터는 유채가 가엽게 떨고 있다고 속살거리면서 재갈이 물린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쓸었다. 유채는 이게 다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끔찍한 상황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유희실에는 내 하렘의 암컷들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지. 나는 그 통로로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야.”

헥터의 뒤에 선 토모스가 마치 벌레를 보듯이 유채를 쓱 훑어보았다. 유채는 몸부림을 치면서 반항했다. 헥터는 유채의 얼굴을 꽉 움켜잡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양쪽으로 거칠게 흔들었다. 그러곤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토모스를 돌아보았다.

“네놈이 나한테 이년을 넘긴 걸 보면 이걸로 복수가 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억울하지 않아?”

헥터는 제 발밑에 있는 채찍을 발로 툭 차서 토모스에게 넘겼다. 토모스는 그 채찍을 주웠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네 딸이 겪었던 고통을 맛보게 해주고 싶잖아?”

“네놈이 저년의 몸에 관심이 많은 줄 알았는데?”

“내가 관심 있는 건 이년의 몸이지, 등짝이 아니야.”

헥터가 유채의 몸을 빙 돌렸다. 갈고리가 돌아가면서 유채는 토모스에게 등을 내놓았다. 헥터가 유채의 상의를 죽 뜯었다. 실오라기 하나 없는 맨 등이 드러났다.

“으읍! 으으으읍!‘

유채는 반라의 상태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유채가 몸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비명이라도 질러 제가 여기 있다고 알리고 싶었지만 입에 물려 있는 재갈 때문에 억눌린 소리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유채의 눈앞으로 헥터가 잘린 팔을 들이밀었다.

“네년이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도 갚아줄 테니 기대해.”

헥터의 두툼한 혀가 유채의 얼굴을 쓱 핥아 올렸다.

“읍읍읍읍읍!”

유채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헥터가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벌서부터 기대하는 거야? 그럴 필요 없어. 느긋하게 은신처로 가서 품어줄 테니까. 기대만 하고 있어.”

짝!

“읍!”

헥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채의 맨 등에 토모스가 휘두른 채찍이 날아왔다. 그 한 번만으로 유채의 등이 깊게 파이고 피가 흘렀다. 유채는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채찍이 공기를 가르면서 유채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늑대 수인이 휘두르는, 고문용으로 만든 채찍이라 유채는 한번 맞을 때마다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 차라리 불행일 정도였다.

등에 채찍이 닿을 때마다 유채의 허리가 꺾이고 목이 꺾였다. 금세 채찍에 살점과 피가 묻어났다. 토모스는 미친 듯이 유채의 등을 때렸다. 유채는 기절하지도 못한 채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몸을 꺾는 것이 고작이었다.

헥터는 유채의 경련하는 몸을 보면서 낄낄거렸다.

유채의 등은 이미 붉은 속을 드러냈다. 토모스는 채찍질을 계속했다. 그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유채의 등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에 피가 흥건하였다.

유채는 축 늘어졌다. 토모스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채찍에 유채는 눈이 뒤집힌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토모스가 채찍을 손에서 놓곤 이마의 땀을 닦았다. 토모스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유채의 꼴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나는 이걸로 만족하는데.”

“아직 하나가 남았지.”

헥터는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유채의 몸이 좀 더 위로 올라갔다. 유채의 허리가 제 눈앞으로 올 때까지 헥터는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그는 쇠사슬을 벽에 고정하고 화로에 정체 모를 가루를 한 포대 부었다.

“헤임달 녀석이 준 거지. 아편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이걸 마시면 아무리 반항적인 암컷이라도 고분고분해져.”

헥터는 가루에 불을 붙였다. 고된 채찍질의 여파로 거의 정신을 잃었던 유채는 아편이란 말에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헥터가 말한 아편이 제가 아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바로 마약이었다.

불이 붙은 가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작은 방은 곧 연기로 가득 찼다. 유채는 연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도망갈 수도 없는 상태에서 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기에 연기를 들이마시고 말았다. 이미 아편에 상당량 중독이 된 헥터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연기를 들이마셨다. 토모스는 약간 불쾌한 기분이 되어 주위에 몽롱한 연기를 손으로 흩었다.

“일단 저년을 이걸로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서 은신처로 데려갈 거야. 저년이 입은 옷과 핏자국이면 루프스 놈이 미쳐서 펄쩍 날뛰겠지.”

헥터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유채는 헥터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 두려웠다. 어떻게든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마법은 영창을 해야 하는 데, 입에 재갈을 물고 있으니 영창을 할 수 없었다. 꼼짝없이 묶여 있는 상태라 권능을 이용해서 공간을 찢어 이동할 수도 없었다. 제가 너무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헥터는 아편의 연기를 계속 흡입하면서 몽롱한 기분으로 말했다.

“저년을 끼고 있으면 루프스도 함부로 날뛰지 못할 거야.”

“이 이상한 가루는 언제까지 태울 건가?”

헥터는 유채를 가리켰다.

“저년의 몸이 달아오를 때까지. 이 연기를 마시면 고분고분해지고 수컷에 환장하게 되거든. 단, 너무 오래 흡입하면 죽더라고. 아마 저 안에 들어있는 가루가 다 타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일반적으로 반 정도 태우면 반응이 오더라고, 근데 몇은 저게 거의 다 탈 때까지 반응이 안 오는 경우가 있어서 반응 보다가 데려가야지.”

“그거 잘됐군.”

토모스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갈색 늑대로 변했다. 토모스는 약에 취해 반응이 늦은 헥터를 방에서 끄집어내었다. 헥터의 몸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토모스는 헥터를 따라 나온 다음 유채가 묶여 있는 방의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가 나면서 걸쇠가 잠겼다. 헥터는 토모스의 갑작스런 태세변화에도 약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뒤늦게 노성을 질렀다.

“뭐냐! 토모스!”

[내 딸의 복수다!]

토모스가 크게 으르렁거렸다. 토모스는 결코 헥터 놈에게 완벽하게 협력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억울한 젤다의 죽음을 갚아주는 것. 그래서 헥터에게 협력하는 척하며 유채를 빼돌렸다. 헥터를 도와 루프스에게서 유채를 빼돌리면 그녀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루프스에게는 사랑하는 암컷을 잃은 죽음보다도 깊은 고통을 선사해 줄 수 있고 또한 제 딸을 죽음으로 몰아간 마레 위르에게도 복수할 수 있었다.

토모스는 굳게 닫친 철문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연기가 가득 차면 저 암컷은 무력하게 죽어갈 것이다.

[ 복수?]

[그래. 그 복수에는 너도 있다.]

젤다가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헥터였다. 헥터가 아니었다면 젤다는 살아 있을 것이다. 토모스는 한 번도 제 딸의 억울한 죽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가슴에 묻은 딸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제 복수는 유채가 죽고 헥터가 죽어야 완성될 수 있었다.

헥터가 강하기는 하지만, 지금 그는 다친 상태이고 뿔을 이용해 몰아붙이는 공격을 주로 하는 소 수인은 이렇게 협소한 공간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토모스는 이를 악물었다.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오랜 시간을 붙잡아두어서 저 철문을 못 열게만 해도 성공이었다. 지금쯤이면 마레 위르 암컷이 없어진 것에 놀라서 루프스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을 것이었다. 루프스도 바보는 아니니 금방 찾으러 올 것이고, 분노한 루프스가 헥터를 죽일 것이 분명했다. 그 사이 저 마레 위르 암컷은 서서히 죽어갈 테니, 어떤 방향으로 가든 그의 복수는 완성될 수 있었다.

[이것들이. 팔 한짝 잃었다고 나를 뭘로 보는 거냐!]

거대한 소로 변한 헥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의 코에서 뜨거운 콧김이 쏟아져 나왔다. 토모스는 이를 드러냈다. 그의 인생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으으읍흡흑.”

유채는 울음 섞인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흔들었다. 방 안은 너구리굴처럼 뿌연 연기가 가득 찼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자 유채는 제 모든 감각을 등에 집중했다. 사정없이 제 등을 채찍으로 내리친 토모스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등의 통증이 아니었다면 이미 연기에 중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편의 효과인지 점점 등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채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쇠사슬은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흐흑.”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언니에게 돌아갈 방법이 생겼는데, 여기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다. 유채는 모든 힘을 짜내서 몸을 양옆으로 움직였다. 쇠사슬이 차릉거리는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벽에 고정된 쇠사슬도 풀릴 듯이 움직였다. 저 쇠사슬만 벽에서 떨어뜨리면 자연스럽게 유채는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다. 그 후엔 손목을 묶은 밧줄을 불에 태우고 이 방을 탈출하면 되는 것이다. 유채는 아편에 취해 힘이 빠지는 몸을 애써 열심히 움직였다.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다.

“흐흑.”

유채는 눈물을 흘렸다. 이젠 더 이상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머릿속이 몽롱해지고 눈앞이 흐려져만 갔다. 유채는 자꾸만 감겨가는 눈을 뜨기 위해서 노력했다. 몸이 계속 늘어졌다. 온몸이 무거웠다.

유채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방 안은 연기로 가득 차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유채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미약하게라도 공중에 매달린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몸을 흔드는 시간보다 축 늘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져갔다. 유채의 고개가 자꾸만 뒤로 꺾였다. 이제는 목도 가누기가 힘들었다.

유채는 이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깨어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습관처럼 아주 잠깐 정신이 들어올 때마다 습관처럼 몸을 움직였다. 이제는 그냥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유채의 목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쾅! 쾅! 쾅!

철문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유채는 머나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못하고 지나치게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 깔았다. 유채의 몸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

철문에 쾅쾅거리며 부딪치는 충격이 작은 방을 흔들었다. 그 충격에 벽에 고정되어 있던 쇠사슬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장에 매달린 도르래가 차르륵 소리를 내면서 움직였다.

[레티티아!]

루프스는 문을 부수고 들어서자마자 유채를 불렀다. 루프스는 얼른 위르형으로 돌아와 바닥으로 떨어지는 유채의 몸을 받아내었다. 그녀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넘어갔다. 루프스는 유채의 입에서 재갈을 풀었다. 입안에 있는 천 덩어리를 빼내고 가는 손목을 감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손목은 벌건 자국이 남은 것도 모자라 진물 섞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프스는 헥터와 토모스를 향한 분노에 이를 갈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 그녀가 있던 방에서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찾아냈다.

[내가 들어가서 토모스와 헥터를 찾을 테니 너희는 통로의 출구를 찾아서 원천봉쇄해라.]

루프스는 늑대로 변해서 지하통로로 내려가기 전 부하에게 명을 내렸다.

[만일 레티티아가 헥터에게 인질로 잡히게 될 시에는 너희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루프스는 부하들을 협박하고서 통로로 급하게 내려갔다. 루프스는 제 어리석음을 탓했다. 토모스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놓고 있었기에 딴 마음을 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토모스는 권력욕도 많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족의 번영을 위해서 노력하는 충신이기도 했다. 비록 로보의 마지막 전투에서 도망갔을지라도 그도 플로서스와 함께 무너져 가던 늑대 일족을 마지막까지 지킨 충신 중 하나였다. 그랬기에 늑대 일족을 배신하고 설마 헥터에게 붙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젠장할. 빌어먹을. 멍청한 놈.]

루프스는 스스로를 책했다. 다 자신이 안일하게 생각한 탓이었다.

지하는 마치 미로와 같아 루프스는 길을 잃고 빙빙 돌면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 루프스는 욕지거리만 뱉었다. 마음은 급한데 길은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들쑤시고 다니던 중 눈앞에 갈림길이 나왔다. 루프스는 어느 쪽으로 갈지 한참을 고민했다.

[저건?]

루프스는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오른쪽 길로 가자 바닥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떨어져 있었다.

“이건…….”

유채의 머리 장식이었다. 이게 여기 떨어져 있다는 건 유채가 이 방향으로 끌려갔다는 말일 것이다. 루프스는 곧장 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이게 함정이면 어떡할 것인가?

만일 이게 저를 따돌리기 위한 함정이라면 유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루프스는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에 처참하게 망가졌던 유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모습을 두 번은 볼 수 없었다. 유채는 그저 웃어야만 했다.

루프스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밑져야 본전이지.”

루프스는 다시 늑대로 변해서 오른쪽 통로로 정신없이 달렸다.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루프스는 제가 옳은 선택을 했음을 깨달았다. 정신없이 달려가니 토모스와 헥터가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루프스는 상황을 살폈다. 토모스가 필사적으로 철문에 접근하는 헥터를 막고 있었다. 저곳이다. 저기에 유채가 있다.

루프스는 토모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는 루프스, 헥터, 유채 모두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 셈이었다. 유채를 죽임으로써 분을 풀고 동시에 루프스에게 복수를 하고, 헥터까지도 노려서 복수를 끝맺을 생각이었다. 헥터와 싸워 유채를 구하려는 척 위장하여 제 가족들의 안위를 보장하려 했을 것이다. 루프스는 토모스에게 이를 갈았다.

[토모스!]

루프스는 헥터와 토모스 사이에 난입했다. 토모스는 예측하지 못한 변수에 당황했다. 루프스가 지금 나타나는 건 그의 계산에 없는 일이었다. 분노한 루프스가 토모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헥터의 공격을 피하여 몸을 움직였다.

[윽.]

엉덩이가 벽에 닿았다. 공간이 너무 협소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헥터와 토모스의 공격을 피하지 말고 받아내야 했다.

토모스와 헥터는 공공의 적인 루프스를 먼저 없애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인지 협공을 시작했다. 루프스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거나 역공을 했다. 루프스만큼이나 좁은 공간이 약점이 된 헥터와 이미 헥터에게 당해 상처가 깊은 토모스는 루프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크악!]

루프스는 토모스의 심장을 뜯었다. 새빨간 피가 은빛 털에 튀었다. 루프스는 이제 남은 헥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채에게 그의 처분을 맡기고자 하였으나 지금 유채를 구하기 위해서는 헥터를 제거해야 했다. 루프스는 피투성이의 헥터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악!]

헥터의 하나 남은 앞다리를 뜯고 머리를 박살냈다. 그리고 서둘러 철문으로 다가갔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기 위해서 미친 듯이 몸을 부딪쳤다. 열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 미친놈처럼 무식하게 철문에 몸을 박았다. 부딪칠 때마다 상처가 벌어져 피가 철철 흘렀지만 상관없었다. 그리고 철문이 뜯기듯이 떨어지자. 그의 눈에 유채가 들어왔다.

* * *

루프스는 유채를 찾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아무 미동 없는 유채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레티티아! 레티티아!”

루프스는 유채를 깨우기 위해서 그녀의 볼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유채는 축 늘어진 채로 그의 손길에 따라서 힘없이 움직일 뿐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미약한 숨이 느껴졌다.

“유채! 한유채! 정신 차려라! 유채!”

루프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프스는 한쪽에서 타고 있는 정체 모르는 가루를 발견했다. 이 방 안에 있는 연기의 원인이 바로 저 가루인 것 같았다. 루프스는 화로를 걷어차 불을 끄고 혹시 몰라 가루를 한 줌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러다 발치에 걸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고문용 채찍이었다. 루프스는 다급하게 유채의 몸을 뒤집었다.

까득.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유채의 등은 완전히 까진 것도 모자라 살점까지 뜯긴 상태였다. 등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채찍을 휘둘렀다는 것을 눈치챈 루프스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늦어서. 미안하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안았다. 유채의 숨이 점점 잦아들어 가는 것 같아서 루프스는 얼른 제 상의를 벗어서 그녀의 벗은 몸을 감싸고 방을 나섰다.

[크악!]

“큭!”

죽은 줄 알았던 헥터가 동물형으로 기어서 루프스를 노렸다. 루프스는 유채를 감싸고 피하느라 왼쪽 팔을 내어주어야 했다. 헥터의 이빨이 루프스의 왼팔을 물었다. 루프스는 고통을 억누르며 유채를 제 어깨에 기대게 만들고 오른팔을 움직였다.

“버러지 같은 것들!”

루프스는 오른손으로 헥터의 턱을 뜯어내었다. 드디어 숨이 끊긴 헥터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위르형으로 돌아온 헥터의 시신은 양팔과 한쪽 발이 없고 턱이 뜯기고 머리의 반쪽이 날아간 참혹한 모습이었다. 루프스는 이를 갈면서 한 팔로 유채를 안고 걸음을 옮겼다.

“루프스님, 팔이…….”

지하에서 한 팔로 유채를 끌어안고 올라오는 루프스를 발견한 아리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왼팔에 상처가 깊었지만 루프스는 아리아의 걱정을 무시하고 큰 소리로 고함쳤다.

“오르페를 불러와!”

“예?”

“당장 오르페를 불러와!”

아리아는 대강 눈치를 채고 얼른 움직여서 적당한 방의 문을 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축 늘어진 몸을 얼른 침대에 눕혔다. 하얀 침대의 시트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오르페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당장 살려내! 지금 당장!”

루프스가 몸을 떨면서 외쳤다. 오르페는 심각한 상황에 놀라서 얼른 유채에게 다가갔다. 숨이 옅었다. 전에 독에 중독되었던 때랑 비슷해 보였다. 오르페는 해독을 하기 위해서 몸을 살피다가 붉게 물든 시트를 보고 유채의 몸을 뒤집었다.

“세상에!”

오르페는 유채의 등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엉겁결에 뒷걸음질 쳤다. 루프스는 성난 얼굴로 오르페를 다그쳤다.

“쓸데없이 놀라지 말고! 얼른 치료해!”

“알, 알겠습니다.”

오르페는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거의 죽기 직전처럼 숨도 옅고 얼굴도 창백하고 몸도 차가웠다. 축 늘어진 유채를 보면서 루프스는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유채를 혼자 둘 생각을 한 자신이 멍청했다. 위험하더라도 데리고 다니면서 제가 보호해야 했다. 헥터가 유채를 노릴 거라는 생각을 했어야만 했다. 루프스는 심장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급한 처치를 마친 오르페가 땀을 닦았다. 다 죽어가는 유채를 일단 이승에 붙들어놓았다.

“혹시 유채 양이 뭘 마시거나 먹었습니까?”

“이걸 태운 연기를 흡입했다.”

루프스는 유채가 갇혀 있던 방에서 나온 가루를 오르페 앞에 건네었다. 가루의 냄새를 맡은 오르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루프스님.”

아리아가 루프스의 오른팔을 잡아당겼다. 아리아는 루프스가 유채 때문에 오르페의 진료를 받지 않을 것을 알고 다른 군의관을 불러서 데려왔다. 아리아에게는 무엇보다 루프스가 우선이었다. 그녀는 루프스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왼팔을 가리켰다.

“그 상처를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제가 여기서 유채 양을 꼭 살릴 터이니, 루프스님은 왼팔의 상처를 치료받으십시오. 상처를 오래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오르페도 아리아를 거들었다. 유채의 옆에 있으려 하는 루프스와 오르페가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오르페는 루프스가 곁에 있으면 방해되어서 유채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냈다. 루프스는 오르페의 말에 입을 다물고 아리아가 데려온 군의관을 따라서 나갔다. 제 팔의 사소한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오르페를 끌어내어 유채의 치료를 지연시키느니 이렇게 하는 것이 나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있는 방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어두운 표정으로 아리아가 데려온 궁의관의 진료를 받았다. 헥터에게 물린 팔은 붉기보다 검은 빛깔에 가까운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군의관은 약을 뿌리고 혹시 모를 독에 대비하여 해독 작용이 있는 약초를 상처 위에 덮은 다음 붕대를 감았다.

저 멀리서 소 수인 궁녀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녀의 품에는 깨끗한 의복이 들려있었다. 소 수인 궁녀, 엘가는 루프스의 앞에 벌벌 떨면서 몸을 숙였다. 헥터의 암컷들을 시중들었다는 이유로 루프스의 명을 듣고 끌려나온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루프스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여러 암컷들의 시중을 들었다지.”

“예. 그러합니다.”

“가서 레티티아의 시중을 들어라.”

엘가는 벌벌 떨면서 몸을 일으켜 침을 꿀꺽 삼키며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만일 레티티아에게서 조금이라도 불편하다는 말이 나오거나, 레티티아의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엘가는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네년의 목줄을 친히 끊어주마.”

“며, 명심하겠습니다.”

엘가는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루프스는 아리아와 군의관을 모두 물리고 유채가 있는 방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는 주먹을 말아 쥐고 오르페가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실력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오르페이니, 반드시 유채를 살릴 것이다. 루프스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는 것인지 위로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르페가 엘가를 데리고 다시 나온 것은 둥근 보름달이 거의 남쪽에 떠 있을 쯤이었다. 유채의 상처가 너무 깊어 치료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루프스는 이제 괜찮다는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오르페는 눈치껏 방문을 닫았다.

루프스는 성큼성큼 유채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아.”

루프스는 외마디의 탄식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전히 창백하기는 했지만 아까보다는 혈색이 많이 좋아진 얼굴이 보였다. 아까는 정말 죽은 줄로만 알았다. 지금은 고른 숨을 내쉬며 살아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옷 틈으로 붕대가 보였다. 차마 침대의 시트를 갈 시간은 없었던 것인지 유채의 아래 깔린 시트는 여전히 붉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아 입을 맞추었다.

“미안하다.”

이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지켜준다고 해놓고 지키지 못했다. 약속을 잘 지킨다고 말해놓고 정작 중요한 약속은 못 지켰다. 루프스는 미약한 온기가 도는 유채의 손을 제 볼에 붙였다. 살갗 너머로 느껴지는 박동에서 유채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유채의 얼굴을 비추었다. 찬란하게 부서지는 달빛아래 유채의 얼굴은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그래, 저렇게 아름다우니 다른 수컷들이 탐을 내는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만 꽉 움켜잡았다. 수컷 모두 다 입을 모아서 세상에 둘도 없을 미인이라고 이야기 할 만큼 유채는 아름다웠다. 수컷이란 모름지기 아름다운 암컷만 보면 군침을 흘리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헥터 같은 놈들이 꼬이는 것이다. 젤다 같은 같잖은 것들이 유채를 질투하여 이리 괴롭히는 것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토스 호무스로 돌아가면…….”

토스 호무스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궁 가장 깊숙한 곳,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에 유채를 숨길 것이다. 또 다시 헥터 같은 미친놈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자신만 드나들 수 있는 곳에 유채를 숨기고 지킬 것이다. 유채는 제 화원에 활짝 핀 곱고 여린 꽃이어야만 고 제 새장 속에서 지저귀는 작은 종달새여야만 한다. 루프스는 유채의 앞머리를 넘기고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이게 없었으면. 늦었을지도 모르지.”

루프스는 품에서 나비 모양 머리 장식을 꺼내고 중얼거렸다. 이게 없었다면 유채를 찾는 데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윽.”

유채는 가슴을 모포로 감싸고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오르페가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다. 풀어낸 붕대에 진물과 피가 묻어나왔다. 오르페는 다시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치유 마법까지 썼다. 유채의 상처는 너무 심해 마력 부족으로 한 번에 치료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수인들은 인간에 비해 마력량도 얼마 되지 않았고 거기에다 본인들이 가진 마력 저향력 때문에 마력 컨트롤이 잘 되지 않아 마법을 시전해도 공기 중에 손실되는 마력량이 너무 많았다. 베노르 콩레수스 때는 프레드릭 덕택에 한 번에 치료가 가능했으나, 지금 상황은 오르페라도 한 번에 치료하기 너무 힘들었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갔다. 이렇게 조금씩 나아지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어느 정도 나아지자 상처 부위에 딱지가 앉지 않도록 다시 붕대를 둘러주었다.

오르페를 포함한 세 명의 뱀 수인이 열심히 치료 마법을 쏟아 부은 효과인지 유채의 상처는 빠르게 낫고 있었다. 모두가 루프스가 유난 떤다고 수군거렸지만, 유채의 등의 상처는 심각한 수준이었기에 결코 유난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프레드릭이 있다면 좀 더 빠르게 낫게 할 수 있겠지만, 의학에는 뛰어나도 치료 마법에는 뛰어나지 못한 오르페의 한계였다. 유채는 매번 치료를 할 때마다 힘든 것인지 침대 시트를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움켜쥐었다.

유채는 거치적거리는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서 앞으로 넘겼다. 마레 위르들의 치유 마법은 상처에만 영향을 미쳤지만 뱀 수인들의 치유 속성은 그 만큼 섬세하지 못해서 다른 곳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인은 마력 저항력으로 마력 컨트롤이 완벽하지 못했기에 시전된 마법에서 마력 손실이 발생했다. 쉽게 말해 오십의 본인 마력으로 만든 마법이 마력 컨트롤 부족으로 이십 마력의 마법으로 변하고 삼십의 본인 마력은 공기 중으로 손실되는 현상이었다. 재생력을 빠르게 하는 마법을 사용해서 등의 상처를 치료했기에 해당 마법에서 손실된 마력은 유채의 머리카락도 상처가 낫는 것만큼 빠르게 길어서 가슴까지 내려왔다. 유채는 길어진 머리카락이 익숙하지 않은지, 손으로 열심히 정돈했다.

“내일이면 외상은 다 치료될 걸세. 조금 이따 다시 붕대를 갈면서 다른 수인이 치료 마법을 써줄 거야. 알지?”

“예. 감사합니다.”

옆에서 유채의 시중을 들어주는 소 수인인 엘가가 달달 떨면서 약을 건넸다. 아편의 독소를 빼주는 약이라고 하였다.

“거기 쥐 수인 아가씨는 어떤가?”

오르페가 유채의 옆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몸집의 쥐 수인 소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유채는 자신의 팔을 구원줄처럼 붙잡고 있는 쥐 수인 소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소녀는 웅, 하는 소리를 내면서 유채에게 파고들었다.

“똑같아요. 아직 정신이 온전치가 않아요.”

헥터의 하렘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여자였다. 유채가 잡혀 있던 곳과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하렘에 있던 여자들의 시신들이 발견되었는데, 마레 위르부터 수인 일족 여성들의 시신들이 한데 엉켜 있었다. 그 와중에 죽은 척을 하고 시신 틈에 뒤엉켜 있던 열일곱의 쥐 수인 소녀가 알렉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루프스나 다른 수인들은 헥터나 소 수인 일족의 상황을 알기 위해 소녀를 심문했지만, 헥터의 성적인 학대 때문에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도 어눌했고 열일곱으로 보이는 나이와는 다르게 열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유채는 그 소식을 듣고 억지로 소녀를 데려왔다. 그 뒤로 소녀는 유채가 제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옆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오르페는 성치도 않은 몸으로 소녀를 돌보는 유채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듣자하니 저 쥐 수인 소녀가 밤에는 더 무서워해서 품에 꼭 안고 잔다고 하는데, 그러면 당연히 등의 통증이 보다 심해질 것이었다. 그럼에도 유채는 소녀를 최대한 배려해 주었다. 오르페가 짐을 정리하면서 물었다.

“이름은 뭔지 알아냈나?”

“옥타비아요. 팔월에 헥터의 하렘에 들어와서 옥타비아라고 이름을 받았대요. 고아라서 애초에 이름은 없었다고 하구요.”

유채는 새근새근 잠든 옥타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헥터의 성적 학대로 정신이 무너진 상태였으나 그래도 이따금 두서없지만, 제정신에 가까운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옥타비아는 전쟁 때문에 부모와 형제를 잃은 고아로 열다섯 살 때까지 시장바닥을 전전하며 구걸로 먹고 살다가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혀 헥터의 하렘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헥터의 총애를 받아 유희실에 가장 많이 끌려갔고 온갖 변태적인 취향을 다 받아주면서도 쥐 수인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 덕택에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유채는 헥터의 변태적 행각에 머리가 아찔했다. 정말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옥타비아가 완전히 미쳐 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끔찍한 행위들이었다.

“알렉스 씨에게 제 이야기 전해주셨어요?”

“당연하다마다. 헤임달이란 이름을 듣더니 정말로 그 이름을 들었냐고 너한테 되물어달라고 하더구나.”

“예. 분명히 들었어요. 헤임달이란 작자가 헥터에게 아편을 주었다고 했어요.”

“아편이란 건 대륙에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도 실제로 봤을 때 꽤나 놀랐다고.”

예전에 저에게 의술을 알려줬던 아르젠인 선의 스승이 알려준 마약이었다. 전쟁 중인 대륙에서는 싸울 병사가 모자라 아직 어린 소년들까지도 이용하며 고통을 잊게 할 용도로 아편을 악용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스승은 오르페에게 보는 즉시 없애버리라고 말하며 이를 갈았다.

“포트리스의 일이니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네 몸이나 챙겨라. 알렉스 놈도 걱정 말고 몸 회복에 집중하라고 하더구나.”

오르페는 알렉스가 제 사위 제안을 거절한 뒤에 약간 꽁해 있었다. 그래도 그가 꽤나 마음에 든 것인지 루프스 몰래 소식을 전해주었다. 오르페가 눈짓으로 옥타비아를 가리켰다.

“저 아이 좀 깨워라. 아편 중독 치료를 해봐야 하니.”

옥타비아 역시 아편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다. 오르페는 옥타비아를 가엽게 여겨서 남는 시간마다 그녀도 치료해 주고 있었다. 유채는 잠든 옥타비아를 깨웠다. 옥타비아는 유채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면서 잠에서 깼다.

“옥타비아. 오르페 할아버지가 잠깐 같이 가자고 하시네.”

“싫어. 싫어.”

옥타비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유채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예전 유채가 그랬던 것처럼 옥타비아도 헥터의 학대로 남자를 무서워했다. 옥타비아는 유채에게서 떨어지기를 싫어했다.

“옥타비아.”

유채가 옥타비아의 팔을 풀면서 말했다. 옥타비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싫어. 언니, 좋아. 언니랑. 언니랑.”

때마침 엘가가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왔다. 유채는 침대에서 내려와서 엘가에게서 간식이 담긴 쟁반을 낚아챘다. 엘가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이 들겠다고 했지만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유채는 몸을 웅크리고 달달 떠는 옥타비아에게 다가가 쿠키를 내밀었다. 옥타비아가 눈을 굴렸다. 먹는 것 하나도 의심하고 경계할 정도로 옥타비아의 상태는 심각했다.

“아, 해봐, 옥타비아.”

“아.”

옥타비아가 작은 입을 벌렸다. 유채는 옥타비아의 입에 쿠키를 넣어주었다.

“맛있어?”

“응. 언니.”

옥타비아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유채에게 칭얼대었다.

“더 줘. 더 줘. 저거 좋아. 좋아.”

옥타비아가 구사하는 언어는 딱 유치원생 수준이었다. 블루벨보다 한 살이나 많으면서도 옥타비아는 성적인 학대로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유채는 옥타비아를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그녀를 달랬다.

“오르페 할아버지를 따라가서 치료 잘 받고 오면, 언니가 이거 다 줄게.”

옥타비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치열하게 고민을 하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유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건 너를 위해 내가 만들라 한 것인데, 내 정성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루프스였다. 유채는 겁에 질린 옥타비아를 달랬다. 루프스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유채는 옥타비아를 꼭 껴안으면서 루프스에게 외쳤다.

“당장 나가요! 옥타비아가 겁먹었잖아요!”

“어?”

“당장 나가라고! 당신은 조금 이따 상대해 줄 테니까 일단 나가요!”

루프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유채의 태도가 워낙 단호하여서 루프스는 엉겁결에 도로 방을 나가야만 했다.

유채는 겁을 먹은 옥타비아를 어르고 달래기 위해 손에 과자를 한 움큼 쥐어주었다. 옥타비아가 겨우 진정한 후 오르페는 능숙하게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유채는 욱신거리는 등의 통증에 한숨을 뱉으면서 엘가의 부축을 받아서 침대에 다시 앉았다. 엘가는 유채의 등 뒤에 푹신한 베개를 놓아주었다.

“애를 잘 돌보는군.”

쫓겨났던 루프스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의자를 끌어와서 앉아 유채의 턱을 가볍게 잡고 돌렸다.

“몸은 괜찮나?”

“오르페님 덕분에 괜찮아요.”

“미안하다. 지켜준다고 해놓고 매번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 같다.”

루프스가 유채의 볼을 쓰다듬으며 애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채는 애초에 그 말 따위는 믿은 적도 없었다고 쏘아붙여 줄까 하다가 그냥 접었다. 저 남자로부터 제 몸이나 지킬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 외에는 해본 적도 없었다. 이번에도 저 남자에 의해서 죽기 직전에 구출되기는 했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저 남자를 찾는다는 생각은 한 적도 없었다.

“몸은 빈 대롱처럼 마르기만 하면서 왜 그렇게 다른 이들을 싸고도는 것인지. 네 몸부터 챙겨라. 저 꼬맹이는 그냥 두고.”

루프스는 유채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밖에 있던 이들을 불러들였다. 미노르 호무스 궁의 궁녀들이 온갖 먹을거리를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탁자 위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루프스가 손짓으로 먹으라고 재촉했다.

“아플 땐 많이 먹고 몸을 회복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너는 매번 이렇게 마르기만 해서 어쩌려고.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만들 수 있는 건 다 해오라고 했다. 먹어보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말해라. 더 만들어주마.”

루프스는 가는 유채의 팔목을 보았다. 이렇게 계속 마르다가는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유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자 답답해진 루프스는 빵 하나를 집어서 유채의 손에 쥐어주었다.

“너무 마른 것은 몸에도 좋지 않고 보기도 좋지 않아. 그러니 살을 좀 찌워. 건강해야 하지 않나.”

유채는 루프스가 쥐어준 빵을 깨작거리며 먹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이것저것을 권하며 무엇이 더 맛있냐고 물었다. 엘가가 얼른 차를 내어왔다. 유채는 다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음식을 권하는 루프스에게 물었다.

“헥터랑 토무스는 어떻게 됐어요?”

누구도 그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유채는 루프스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루프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짧게 답했다.

“죽었다.”

“당신이 죽였나요. 둘 다?”

“그래. 토모스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으니 내가 죽였다 하기는 뭐하지만, 일단 그놈의 목숨 줄을 끊어놓은 것은 나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파리한 얼굴과 등의 상처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유채가 느꼈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한 다음 죽였어야 했다. 너무 쉽게 평안을 준 것 같아 분했다. 루프스는 주머니 속 머리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아직까지 전해주지 못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루프스는 그것을 손에 쥔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뭐가 미안한데요?”

“…….”

루프스의 동작이 경직되었다. 그는 입을 달싹이다가 시선을 들어서 유채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 지켜준다고 말해놓고 이렇게 다치게 만들어놓고 헥터를…….”

“예전에 말했잖아요. 나한텐 당신이나 헥터나 똑같다고. 그런 이유라면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아요. 난 당신 인형 아니에요.”

유채는 제가 뭘 기대한 것인가 싶어 스스로를 한심해했다. 유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어나고 난 뒤 이 방을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하루종일 엘가가 옆에서 감시 겸 시중을 들었고 방 밖에는 경비병들이 개미 한 마리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엄중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장담하건데, 토스 호무스에 돌아간다면 방에 갇히고 두 번 다시 바깥구경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었다.

유채는 자신의 무력함에 시트를 움켜쥐었다. 여신이 능력을 주었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마법은 중간에 포기한 덕택에 쓸 수 있는 것 하나 없었다. 저는 무력했다.

【‘루프스가 마음에 품은 암컷이라 그런지, 꽤나 호위가 심했어.’】

유채는 헥터가 한 말을 곱씹으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루프스를 바라보니 그는 제가 한 말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시선을 내리깔고 처연하게 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프스가 저를 사랑한다고? 얼어 죽을 소리.

가두고 윽박지르고 강압적으로 키스하는 것이 사랑인가? 아니 애초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학대하던 사람이 저에게 언제 사랑이란 감정을 느꼈는지 자체가 코미디였다.

“미안하다.”

루프스가 등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게 어깨를 감싸 안고 유채를 제 품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딴 사과…….”

“듣기 싫어하는 것을 알아도 나는 해야겠다. 너를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이마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내가 말주변이 없다.”

루프스는 코끝이 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고 싶어도 자신이 없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다시 나비 모양 머리 장식을 달아주었다. 루프스는 애잔한 시선으로 유채를 보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눈빛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 눈을 보면 헥터의 말이 사실인 것만 같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약간 틀었다.

“쉬고 싶어요.”

“그래. 편히 쉬어라. 곧 토스 호무스로 돌아…….”

“당신을 따라서 얌전히 토스 호무스로 돌아갈 거고, 당신이 나를 감옥에 가두든 어쩌든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 알렉스 씨는 포트리스로 돌려보내 줘요.”

“……알았다. 편히 쉬어라.”

유채는 루프스를 향해 등을 보이면서 옆으로 누웠다. 루프스는 저를 거절하는 듯한 유채의 태도에 가슴 부근에 둔탁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는 유채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 방 밖으로 나갔다. 카신이 소 수인들의 처우를 물어보기 위해서 다가왔다. 루프스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그를 물렸다.

루프스는 제 처소로 돌아가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루프스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붕대가 감긴 팔을 들어올렸다. 헥터가 물어뜯은 상처는 아직도 낫지 않았다. 유채가 제 왼쪽 어깨를 찌른 이후로 왼쪽 팔에 입은 상처들은 다른 부위에 비해서 심할 정도로 낫지를 않았다.

【‘예전에 말했잖아요. 나한텐 당신이나 헥터나 똑같다고.’】

그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유채를 만나면 그의 기분은 널을 뛰었다. 오르페에게 이제 유채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는 말을 아침에 듣고 그녀가 좋아하는 달달한 음식을 만들라고 명을 내렸다. 유채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항상 잠든 모습만 지켜보다가 그녀와 이야기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유채가 쥐 수인 꼬맹이를 달래는 모습을 보면서 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돌보는 모습을 떠올렸다. 쥐 수인 꼬맹이에게 지어주었던 다정한 웃음을 제게 지어주는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유채는 여전히 저를 꺼려했다. 아니, 끔찍하게 생각했다. 다 제 잘못이었다.

【‘알렉스 씨는 포트리스로 돌려보내 줘요.’】

“나도 많이 다쳤는데.”

루프스가 붕대가 감긴 팔과 가슴을 보며 중얼거렸다. 처음 만난 쥐 수인 꼬마나 알렉스에게는 그리도 다정하고 조그마한 상처에도 그렇게 걱정을 해주면서 저에게는 그런 말이 없었다. 분명히 제 팔에 붕대가 감긴 것을 보았음에도 괜찮냐고 물어봐 주지 않았다. 유채도 참 잔인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지하통로에서 찾았던 그때의 일을 회상했다.

“그럼 뭐하나…… 너 다치는 것은 막지 못했는데…….”

루프스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파서 눈매를 찡그리는 유채를 보면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토모스가 계획한 대로 되었다면 뒤늦게 유채를 찾아낸 저는 죽은 그녀의 시신만 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보처럼 토모스가 유채를 구하려 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오르페가 들어와 상처를 좀 보겠다고 했다. 루프스는 귀찮아 하면서도 일어나 옷을 벗었다. 그의 몸은 온통 멍투성이였다. 무식하게 철문을 들이받은 탓이었다.

“몸을 조심히 쓰십시오.”

“됐다. 싸움 할 때 어떻게 몸을 조심히 쓰나?”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레티티아를 구했으니 상관없다.”

루프스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오르페를 내쫓았다. 오르페가 나간 후 루프스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옆으로 픽하고 쓰러졌다.

“한 번만 괜찮냐고 물어봐주면 안 되나?”

루프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딱 한 번,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비탈로 떨어지는 유채를 보호해 아래로 떨어진 후였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던가. 단 것을 맛본 개미가 계속 단 것을 찾듯이 그도 유채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갈구했다. 알렉스나 블루벨에게 하는 것만큼은 바라지도 않으니, 그녀가 저를 걱정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 이유라면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아요.’】

“알아. 나도 네가 내게 무슨 말을 원하는지.”

유채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난 후 그는 이렇게 혼자 남게 되면 온갖 것들을 후회했다. 그를 아프게 한 것, 그녀를 힘들게 한 것. 평생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유채에게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지만, 그녀가 가장 바라는 일만큼은 도저히 해줄 수 없어서 미안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편안해질 수 있을까?…….”

그는 답을 할 수 없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 * *

“뭐예요?”

유채는 바람에 흔들리는 베일을 붙잡았다. 루프스가 커다란 은빛 늑대로 변해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밤중에 궁녀들이 달라붙어서 유채를 꾸미기 시작했다. 루프스가 갑자기 보자고 한 탓이었다. 그리고 궁녀들은 루프스의 명이라면서 연보라색 베일로 유채의 얼굴을 가렸다. 전에 썼던 것과 달리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유채는 궁녀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타라.]

“어디 가는데요? 내일 토스 호무스로 간다면서 쉬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유채는 움직이기 피곤해서 칭얼대듯이 말했다. 하지만 루프스가 계속 몸을 낮추고 있자 한숨을 쉬면서 그의 등 위에 올라탔다.

루프스는 유채가 안전하게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하고 달리기 시작하였다. 유채는 바람에 펄럭이는 베일 사이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광을 보았다. 한 십 분가량 달린 후에 루프스는 멈췄다. 유채는 루프스의 등에서 내려왔다.

베일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유채는 살짝 베일을 걷고 주위를 본 후에야 제가 서 있는 곳이 초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프스가 위르형으로 다가와서 베일을 걷어주었다.

“데려오라고만 했는데, 궁녀들이 과했군. 어지간히 너를 귀찮게 했겠어.”

루프스는 베일 아래 드러난 유채의 얼굴에 심장이 떨렸다. 이렇게 꾸미라고 시킨 적도 없었는데, 궁녀들이 화장까지 해놓은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붉은 유채의 입술이 더욱더 붉어져 있었다.

“여긴 어디예요?”

“직접 봐.”

루프스는 유채의 눈을 가린 채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루프스는 잠시 후 유채의 눈을 가렸던 손을 치웠다.

“와!”

눈앞에 온갖 봄꽃이 가득 핀 들판과 다이아몬드 같이 빛나고 있는 수많은 별들이 수놓인 밤하늘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다. 루프스는 하늘과 들판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유채의 얼굴을 옆에서 곁눈질하였다. 전에 그녀가 밤하늘을 보고 좋아하던 것을 기억해 내고 미노르 호무스를 뒤져 이곳을 찾아낸 것이었다.

소 수인들을 정리하고 있는지라 몸이 곤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루프스는 유채가 좋아할 거란 생각에 잠을 줄여가면서 미노르 호무스 곳곳을 돌아다녔다. 가능하면 그 노란 꽃이 핀 들판을 찾고 싶었지만 미노르 호무스에는 그 꽃이 피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가장 아름다운 들판과 하늘을 볼 수 있는 이곳으로 유채를 데려왔다.

바람에 유채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오르페의 치료 부작용으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마치 바람에 흩어져 사라질 것 같았다. 유채의 머리 장식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맑은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길 뒤로 유채의 가는 목이 드러나면서 목에 걸린 금색의 파렌티아가 보였다. 루프스는 파렌티아를 보자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어 주먹을 움켜쥐었다.

바람, 들판, 밤하늘, 유채. 당장이라도 화폭에 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루프스는 눈에 박히도록 아름다운 유채를 머릿속에 새길 정도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 별똥별이다.”

유채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루프스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소원 빌어야 하는데…….”

떨어지는 별을 보며 소원을 비는 것은 유채가 있던 곳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예쁘네.”

루프스는 꽃을 꺾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금세 유채의 미소가 사라졌지만 루프스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무시하고 그녀의 귀에 꽃을 꽂아주었다.

“저 하늘의 별보다, 이 꽃보다 네가 더 아름답다.”

그가 유채에게 준 이름, 레티티아는 고어로 아름다움을 뜻하는 단어였다.

유채는 진저리를 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을 잡아서 그 자리에 붙잡아두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루프스는 계속 중얼거렸다.

“농담이 아니다. 그 어떤 것보다 내게는 네가 눈에 박히도록 아름답다.”

루프스는 유채의 앞에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 순간을 위해 차려입은 예복이 거추장스러웠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미안하다.”

그는 솔직하게 제 약한 모습까지 그대로 내보였다.

“너를 말뚝에 매어놓고 굶긴 것, 네 어깨를 망가뜨린 것, 네가 싫어하는데도 너에게 억지로 입을 맞춘 것, 내가 너에게 했던 모든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까지…… 모두 다 미안하다.”

유채는 제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오만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여기 온 이유가 이거예요?”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잠깐이라도 휴식이 되었으면 해서 데려왔다.”

굳이 잠을 줄여가며 찾았다고 으스댈 필요는 없었다. 유채가 알아주길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평생 미안해하겠다. 용서는 바라지도 않겠다.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것도 미안하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잡아당겨 제 목에 걸린 파렌티아에 가져다대었다.

“그쪽이 사과를 하고 싶다면요.”

루프스의 눈이 흔들렸다. 유채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 그의 심장을 얼음송곳으로 찔렀다.

“이것부터 풀어주고 말해요.”

유채는 루프스의 사과같지도 않은 사과를 비웃었다.

“당신은 그저 장난감이 심통이 난 것 같으니까 잠깐 그걸 풀어주려고 이러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루프스는 제 진심이 짓밟히는 것 같아 얼른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유채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럼 이건 왜 안 풀어주는 거예요? 당신은 나를 아직도 당신의 애완동물로 보는 거잖아!”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풀어주면 너는 내게서 도망갈 것 아닌가?”

그는 용기가 없었다. 파렌티아가 아니면 그녀를 붙잡을 기회도 없을 거란 걸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강제할 수단이 없어진다면 그는 떠나는 유채를 붙잡지도 못할 것이었다.

그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방법은 알았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유채에게 진정으로 사과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원하는 대로 보내주는 일, 하지만, 그것만큼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유채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당신이 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쳐요. 하지만, 내 눈에 당신의 사과는 당신 만족을 위해서 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아니다!”

루프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몸을 일으켜서 유채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채는 그의 팔을 쳐 냈다.

“그럼 왜 이러는 건데요?”

내가 너를 연모한다. 사랑한다.

그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는 입술만 깨물었다.

겁이 났다.

온갖 잔인한 말로 제 마음을 부정하고 만신창이로 찢어놓을 유채가 겁이 났다. 사과도 받아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마음을 고백하면 그보다 더 잔인하게 저를 내칠 것 같았다.

유채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꿈꾸지도 안았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 마음을 부정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채는 벙어리가 된 루프스를 밀쳐 냈다.

“당신 말대로 토스 호무스로 갈게요. 그러니까 알렉스 씨를…….”

루프스가 유채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는 유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루프스는 계속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유성우가 쏟아져 내렸다. 루프스는 유성우가 만들어내는 긴 꼬리가 제가 차마 염치없어서 유채의 앞에서 흘리지 못한 눈물같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루프스는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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