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에클레시아 [Ecclesia]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CCTV에 목격되지도 않고 증발하냐고! 대한민국에 깔린 CCTV가 몇 개인데! 어떻게 근처에 있는 CCTV 하나에도 걸리지 않고 사라지느냐고!”
병원 복도에서 중년의 남자가 경찰의 멱살을 붙잡고 고함을 질렀다. 경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남자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애를 썼다.
“아버님, 고정하십시오. 저희도 열심히 찾아보고 있습니다. 혹시 그 사이에 전화는 없었습니까?”
“없, 없어요. 우리, 유채…….”
유채의 엄마는 흐느끼면서 복도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유채가 사라진 지도 이제 이 주가 넘어갔다. 언니의 병문안을 왔던 유채는 치킨을 사러 나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딸이 어디서 위험에 처해 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유채의 엄마는 가슴을 치면서 오열을 했다. 경찰과 멱살잡이를 하고 있던 유채의 아빠는 같이 온 경찰이 뜯어말리는 것에 격하게 반항을 하면서 삿대질을 하였다.
“니들, 일 제대로 안 하면 근무태만으로 고소할 거야! 내 딸 찾아내!”
“저희도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 유채 양을 찾고 있습니다. 아버님, 혹시 몰라서 유흥가도…….”
경찰들은 사진으로 본 유채의 얼굴이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꽤나 반반하여 혹여나 요즘 성행하고 있는 인신매매단에 납치됐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갖고 있었다. 유채의 아빠는 유흥가란 말을 듣자마자 눈에 핏발이 선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닥쳐!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말고 찾으라고!”
그에게 유채는 소중한 막내딸이었다. 이방인인 부인과 몸이 약한 유하를 바쁜 자신 대신해서 돌본 유채는 그에게 유달리 아픈 손가락이었다. 밝고 씩씩하게 자라주어서 너무나도 대견스런 딸이었다. 언제나 유채는 이름처럼 꽃길만 걸어야 했다. 유채의 아빠의 언성이 높아져가자 병원의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유하는 병실 안에서 문틈으로 소란을 훔쳐보았다. 유하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다 자신 때문이었다. 유채를 그때 보내서는 안 되었다. 가지 말라고 할걸. 왜 유채를 그때 보냈을까. 유하는 유채가 사라지고 나서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제가 몸이 약해서 제대로 챙겨준 적 한 번도 없는 동생이었다. 오히려 유채가 언니를 챙기기 위해 동분서주했었다. 언제나 미안했다. 언니가 되어서는 언제나 유채에게 의지만 하는 게 정말 미안했다. 유하는 흐느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채야, 어디 있는 거야…….”
유하는 제발 유채가 무사하기를, 어디 다친 곳 없이 돌아오기를 빌고 또 빌었다.
* * *
“악취미야.”
셀레네는 유채의 가족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뒤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긴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동양식의 의복을 입은 서른 초반의 남자가 걸어왔다.
“케이카인.”
죽음과 파괴의 신이자, 본래 은가연이 살던 차원의 신인 그는 혀를 찼다.
“저 조각을 빨리 회수하지 못하면 네가 아꼈던 이니투스의 일족들의 땅이 멸망할 거야. 오라클라 리네아가 지연시킬 수 있는 범위를 진작 넘었어. 아주 약간의 계기만 있어도 저건 저 섬을 지도에서 지워 버릴 거야.”
“알고 있어.”
“그러니 또 가련한 아이를 보냈겠지. 얼마나 가여워. 아무런 잘못한 것 없이 이곳으로 끌려와 고통만 받고 있으니.”
케이카인이 손을 휘두르자 유채의 가족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토모스에게 채찍을 맞는 유채의 모습이 보였다. 유채는 눈을 까뒤집고 경련했다. 셀레네가 입술을 씹었다.
“신은 인간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 그래. 그게 규칙이지. 그리고 애초에 규칙을 어긴 것은 너이고. 그 덕에 톱니바퀴가 어긋났지.”
셀레네는 그 톱니바퀴를 고치는 중이었다.
“천향(天香)이 말했지. 우리는 그들을 감정적으로 헤아림과 동시에 이성적으로 판단해야한다고.”
케이카인의 손이 셀레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너는 인간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여 이 사달을 초래했고 그 결과 죄 없는 이들이 목숨을 잃고 피해를 보았다. 지금 저 소녀도 마찬가지야. 네가 아무리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도 저 소녀가 받은 피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알아.”
“그렇다면, 부디 운명과 시간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옳은 판단을 하기를 바라. 나의 형제여.”
케이카인은 자신의 차원으로 돌아간 후 셀레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과오였고 자신은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만나야 해.”
셀레네가 중얼거렸다.
* * *
“잘하셨습니다. 그렇게 응용하시면 됩니다.”
프란체는 유채가 프레드릭의 스펠을 빌려 써서 만든 환영을 보면서 칭찬을 하였다. 환영마법만큼 마력의 강약 조절, 섬세한 마력의 컨트롤에 도움이 되는 마법은 없었다. 늑대 수인으로는 이례적으로 마법사로 유명한 프란체는 루프스의 명을 받아 유채를 가르치기 위해서 궁으로 왔다. 처음에는 루프스의 총애를 받는다는 천한 마레 위르 따위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정말 싫었다. 하지만 유채를 가르치기 시작한 지 삼 일이 지나고 유채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감사합니다. 언제나 제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네요.”
직접 만나본 유채는 예의바른 아가씨였다. 밝고 참한 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학생이라 가르치는 보람도 있어서 프란체는 소문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소문과는 달리, 유채가 한 번도 루프스에게 몸을 내어준 적이 없다는 것도 그녀는 이미 간파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몸도 성하지 않은데, 무리해서 마법을 사용하면 좋지 않을 겁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채는 기품 있게 인사했다. 프란체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소 수인과 양 수인과의 전쟁이 이 암컷 때문이라고 수인 사회가 몰아가는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저 피해자에 불과했다. 마레 위르에 대한 악의적인 편견이 이 착하고 참한 아이의 본질을 가리고 있었다. 나이대 비슷한 아들놈의 짝으로 딱이었지만 루프스의 암컷이기에 프란체는 입맛만 다셨다. 그 깐깐한 오르페 영감이 이 아가씨에게 친절하게 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예.”
차르릉. 배웅을 하려고 유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쇠사슬이 저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치마를 잡아 내려서 발목에 걸린 족쇄를 가렸다.
토스 호무스로 돌아오자마자 감히 루프스의 어깨를 찌르고 도망간 펠릭스 다우스에 대한 처벌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루프스는 토모스가 저 아이를 고문하여 그 대가를 치렀으니 더 이상의 처벌은 필요 없다고 하였고, 당연하게도 반발이 나왔다. 그들은 유채에게 매질을 해야 한다고 했고 냉궁에 가둬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솔직히 말해 프란체도 루프스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의 논의 끝에 결론이 났다. 루프스와 수인들이 한발씩 물러난 결과, 발에 족쇄를 채우고 침대 기둥에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처벌이 결정 났다.
“……배웅을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앉아 계세요.”
프란체는 유채를 만류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어머나. 루프스님!”
프란체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프스를 보고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예를 갖추어 허리를 숙였다.
“다 끝난 건가?”
“예. 들어가셔도 됩니다.”
프란체는 옆으로 비켜섰다. 루프스는 다과를 들고 있는 궁녀들을 데리고 유채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채는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유채는 궁녀들이 분주하게 과자나 차를 탁자에 준비하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루프스가 유채의 옆에 앉았다. 침대의 매트리스가 푹 꺼지면서 쇠사슬이 차르릉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유채는 신경질적으로 치마를 잡아내렸다.
“무슨 책을 읽고 있나?”
“표지에 적혀 있잖아요.”
유채는 루프스를 바라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단지 유채와 대화를 하고 싶었던 루프스는 시무룩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미노르 호무스에서 제 진심이 닿기 위해서는 좀 더 유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녀의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 루프스였지만 유채가 이렇게 밀어낼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서 호감을 얻기 위해서 별의별 방법을 다 생각을 해보았다.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선물을 주기 위해 그가 알고 있는 암컷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머니와 라일라, 에리카, 바실리사가 무엇을 좋아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에리카는 꽃을 좋아했고, 라일라는 잘 모르겠고, 바실리사는 빛나는 것을 좋아했다. 어머니인 블랑카는 사소한 선물들을 좋아했다.
루프스는 일주일간 유채에게 매일매일 선물을 했다. 옷과 장신구, 방을 꾸밀 꽃 등 유채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가득 안겼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할 것을 기대하였지만 유채는 언제나 똑같은 태도였다. 장신구가 든 보석함은 열어본 적도 없는 것 같고, 옷은 무엇을 주던 궁녀들이 입혀주는 대로만 입었다. 방 안 곳곳을 장식한 꽃에도 관심 두지 않았다.
기대를 하고 실망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유채는 언제나 저렇게 쌀쌀맞았다. 그는 그럼에도 그녀와 마주보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바쁜 중에도 짬을 내서 유채가 좋아하던 간식을 가지고 와 먹이려고 했다. 여러 번 말을 걸어야 겨우 한두 마디 대답이 돌아오는 삭막한 대화뿐일지라도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에 대해 알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냥 이야기 해주면 무슨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나.”
루프스는 툴툴거리면서 유채의 손에서 책을 뺏어서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았다. 유채는 또 시작이구나 싶어서 귀찮은 표정으로 몸을 움직였다.
“앗.”
유채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발목을 붙잡았다.
“괜찮나?”
유채가 말릴 새도 없이 루프스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그녀의 발목을 살폈다. 유채의 왼쪽 발목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족쇄가 걸려 있었다. 족쇄에 쓸려 피부가 벌겋게 까져 있었다. 유채가 루프스를 밀어내기 위해서 다리를 버둥거리다 보니 방 안에 짤랑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루프스는 유채발목을 들어 무릎에 올리고 궁녀에게 오르페를 불러오라 명을 내렸다.
“살갗이 약해 자꾸 상처가 나는군.”
“족쇄를 풀어주면 된다는 생각은 없나요?”
유채는 입술을 짓씹었다. 수인들이 난리를 쳐서 제가 루프스를 찌른 데에 대한 벌이 이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유채는 여기에 분명히 루프스의 욕심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원망이 담긴 눈동자를 보면서 볼 안쪽의 살을 물었다. 유채가 도망가는 것이 두렵고 유채가 다시 위험해질까 봐 걱정되어 원래 쓰던 방이 아닌 내궁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족쇄는 그녀에게 불만을 가진 수인들의 반발을 막을 수단이기도 했지만 제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부르셨습니까.”
루프스의 부름을 받은 오르페가 달려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발목을 보였고, 근 일주일 만에 족쇄가 풀렸다. 유채는 오르페가 연고를 발라줄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거나 눈을 감았다 떴다. 오르페는 원칙적으로 루프스의 궁의였다. 언제 루프스의 몸에 이상이 생길지 알 수 없었기에 오르페는 유채에게 생긴 사소한 상처 같은 경우는 마법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붕대를 감는 것으로 치료가 끝나자 루프스는 다시 그 위에 족쇄를 채웠다.
“오르페님, 옥타비아는요?”
유채가 옥타비아를 돌볼 상황이 아니라 옥타비아는 오르페가 맡고 있었다. 유채에게서 쥐 수인 소녀를 떼어내기 위해 루프스가 오르페에게 강제로 맡긴 탓도 있었다.
“많이 나아졌네. 이제 금단현상에 시달리지는 않아. 혼자 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유아 수준의 어휘력도 나아졌지.”
“다행이다.”
유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루프스는 옥타비아를 생각하며 안도하는 유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다정한 이가 저에게는 항상 쌀쌀맞았다. 이제는 그 별 볼일 없는 쥐 수인 꼬맹이마저 부러울 지경이었다. 제가 옆에 있는데도 오르페와만 이야기하는 것에 심술이 났다.
루프스는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유채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오르페가 헛기침을 하였고 유채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렇게라도 유채의 시선을 뺏을 수 있다는 것에 루프스는 만족하며 유채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나가봐, 오르페.”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안아 의자에 앉혀주었다. 오르페는 유채의 치맛자락을 정돈해 주는 루프스의 모습에 못 볼 꼴 본 듯한 얼굴로 물러갔다. 루프스는 유채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픈 곳이 있으면 말을 해. 혼자서 끙끙 앓다가 괜히 일을 키우지 말고.”
“알아서 할 거예요.”
“머리카락 많이 길었네.”
유채의 머리카락은 이제 허리까지 닿을 정도였다. 유채는 귀찮은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찻잔에 차를 부어주고 설탕을 한 스푼 넣어서 저어주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제 생각에 빠졌다.
토스 호무스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이대로라면 내내 방에 갇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게 생겼다. 지금은 루프스에게서 벗어나기 힘드니 여기에서 충분히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이곳은 지구의 중세와 비슷한 환경으로 모든 책은 필사로만 만들어졌고 당연히 귀한 것이라 궁 같은 곳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었다. 토스 호무스 어딘가에 분명 스티폴로르 어딘가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이 기록된 책도 있을 것이다. 방에서 나가지 못하는 대신 루프스는 책은 마음대로 읽어도 된다고 약속했으므로 유채는 그렇게 정보를 찾는 동안 셀레네가 준 능력을 갈고 닦아서 몸을 지킬 방법도 강구하기로 했다.
“뭘 그리 깊게 생각하나?”
루프스가 유채가 멍하니 찻잔만 쳐다보고 있는 걸 보면서 물었다.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알렉스 씨가 포트리스로 안전하게 돌아갔나 불안해서요.”
루프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왜 자신에게는 저렇게 무정할까 싶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제게 보이는 호의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만 했다. 원하는 정보만 얻으면 그의 호의를 이용해서라도 이곳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유채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이곳이, 저를 둘러싼 환경이, 루프스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알렉스의 소식은 곧 바실리사가 전해줄 거다.”
루프스는 바실리사를 시켜 알렉스를 포트리스로 보냈다. 유채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제 입으로 알렉스의 이름을 꺼내었다. 매번 유채가 저를 믿지 않고 끔찍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바실리사 씨는 안 돌아와요?”
유채는 미노르 호무스에서 알렉스와 같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바실리사를 떠올렸다. 어깨에 붕대를 두르고도 밝게 웃던 바실리사의 얼굴이 생생했다.
“빅터가 돌아와서 카날리스 호무스로 돌아왔다고 하니 당분간은 자리를 지켜야 할 거다. 개 수인들은 빅터를 좋아해서 바실리사가 카니스 자리에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럼 어쩔 수 없고요…….”
유채가 작게 중얼거렸다. 루프스는 처음으로 바실리사가 부러워졌다.
“한가해지면 찾아올 거다. 정 보고 싶으면 내가 카날리스 호무스에 데려다주마. 시찰을 하러 간다고 핑계를 대면 될 거다.”
“참 자비로우시네요.”
유채가 빈정거리자 루프스는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짠 맛이 나는 쿠키는 안 좋아하나?”
유채는 크림을 올린 머핀을 집었다. 그리고 그 위에 가득한 크림을 걷어냈다.
“안 좋아해요.”
“단 것은?”
“좋아해요.”
“그럼 크림은 왜?”
유채는 계속되는 질문에 신경질적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넘겼을 텐데 발목도 아프고 짜증이 나서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난 담백한 것 좋아해요. 당신네들처럼 느끼한 것 못 먹어요!”
“왜 귀찮게 계속 물어봐요? 내가 당신이 황송하게 차려준 간식에 제대로 반응을 안 보여서 귀찮게 구는 거면 이제부터라도 일일이 반응해 줄게요. 그럼 돼요?”
루프스는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는 그저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유채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사소한 취향을 물으면서 조금이라도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유채는 그저 귀찮아 하기만 할 뿐이라 심장이 욱신거렸다.
“나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됐어요.”
마치 어수룩한 아이처럼 말끝을 흐렸다. 유채는 듣기 싫은지 말을 딱 잘라 버렸다. 그리고 신경질적인 태도로 포크로 머핀을 조각냈다.
루프스는 어떻게 해야 찬바람만 쌩쌩 부는 유채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인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어떤 선물에도 기뻐하지 않고 말을 붙여도 저에게 조금의 관심도 흘려주지 않는 유채를 대하는 게 막막했다.
“앞으로는 크림은 조금만 올리라고 해두마.”
루프스는 애써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유채는 듣는 둥 마는 둥 조각낸 머핀을 입에 넣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앞으로 다른 케이크를 밀어주었다. 유채는 제 눈치를 보는 루프스의 행동에 오히려 더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레티티아님을 구하신 것은 루프스님이십니다.’】
아리아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루프스가 그녀를 호위로 붙여준 터라 유채는 아리아와 이따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루프스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아리아는 이따금 유채에게 까칠하게 말을 건네곤 하였다.
【‘그분께서 레티티아님을 구하셨습니다. 그 바람에 팔에 깊은 상처까지 입으셨지요.’】
은혜도 모르고 건방지게 군다는 듯한 말투였다.
유채는 루프스를 살폈다. 이제 오월이 다 되어가는지라 그의 옷도 짧아지고 얇아졌다. 왼팔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아직도 시간 핵의 영향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마워요.”
유채의 앞으로 접시를 밀어주던 루프스가 멈칫했다.
“그때, 구해줘서 고마워요.”
아무리 싫어도, 아무리 미워도 그는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때, 그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유채는 그것만큼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마워하기로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한 줄기 빛이 내려온 것 같았다.
루프스는 순간 놀라서 유채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채에게 고맙다는 말이 나올지 몰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경황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어요. 미안해요.”
유채는 저를 멍하니 바라보는 루프스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체했어요?”
“아, 아니다.”
“그럼 사람 무안하게 왜 빤히 봐요?”
“그냥.”
루프스는 차마 네 한마디에 가슴이 떨렸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루프스는 가만히 제 뛰고 있는 심장 위를 눌렀다. 유채의 한마디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유채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표정으로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손가락에 닿는 아이 같은 피부가 좋았다. 이렇게 유채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고 있으니 그녀의 연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채는 귀찮다는 듯이 루프스의 손을 쳐냈다.
“칠칠맞지 못하게 이런 거나 묻히고.”
“먹다보면 묻힐 수밖에 없어요.”
유채는 손가락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루프스는 유채가 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이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유채의 앞에 앉아 그저 그녀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유채의 머리카락에 뭔가 묻으면 손가락으로 가만히 닦아주거나, 유채의 머리카락을 다정한 손길로 정돈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연인을 대하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유채는 루프스를 훔쳐보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부드러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배불러요.”
유채는 루프스가 제 옆에서 계속 이렇게 알짱거리는 것이 불편했다. 포크를 내려놓는 유채의 손목을 붙잡은 루프스는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은 얇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더 먹어라.”
“이따 저녁 먹을래요.”
루프스는 더 강요할 수가 없었다. 유채가 일어나자 쇠사슬이 움직이며 차르랑 거리는 소리를 냈다.
루프스는 유채가 편안하게 기댈 수 있도록 침대에 푹신한 베개들을 정리해 주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협탁에 놓은 책을 다시 들고 읽기 시작하였다. 루프스가 궁녀들을 불러서 탁자를 치우게 하자 유채는 이제야 그가 나갈까 싶어서 한시름을 놓았다.
루프스는 망설였다. 유채를 생각하면 나가줘야 했다. 그러나, 그는 유채와 오래 있고 싶었다. 유채와 함께 보내는 눈이 부시게 빛이 나서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불안이 사라졌고 작은 입술에서 나오는 고운 목소리를 들으면 황홀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선택을 했다.
“안 바빠요?”
유채는 루프스가 나가지 않고 옆에 앉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는 아리아나 오르페, 궁녀들에게 매일 질리도록 듣고 있는 내용이었다.
“별로.”
루프스는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지금 오페라티오(Operatio)에 유채를 데려가기 위해서 대신들을 몰아붙이는 중이기에 조금 한가한 편이었다. 전쟁 후 뒷정리도 어느 정도 끝나가는 시기였기에 예전만큼 바쁘지 않았다.
“고어가 많다. 모르는 건 내가 알려줄 테니까 물어봐라.”
“필요 없어요. 다 이해해요.”
유채는 이곳의 글자는 무엇이든 한글을 읽는 것처럼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셀레네가 덕분에 얻은 능력 같았다. 이것마저 없었으면 고생을 두 배로 했을지도 모른다.
루프스는 유채가 저에게 무언가를 물어봐 주기를 기대했다. 토스 호무스에서 그만큼 고어에 대해 잘 아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를 배반하듯이 유채는 막힘없이 책을 읽었다. 루프스는 방법을 바꾸어서 유채가 읽고 있는 부분에 필요한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유채는 귀찮아 하면서도 그만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루프스는 살짝 우쭐해져서 그녀의 관자놀이에 간간히 입술을 맞추곤 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조근조근 설명을 하던 루프스는 어깨가 묵직해지자 고개를 돌렸다. 유채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루프스는 책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깰까 봐 조심스레 팔을 뻗어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수없이 보았지만 유채가 잠든 모습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매번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그녀가 아기처럼 얌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때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좋은 꿈을 꾸라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곤 했었는데, 루프스는 그때 그녀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유채가 꿈에서도 편안하기를 바랐다.
유채는 뒤척거리면서 루프스를 향해 돌아누웠다. 루프스는 유채가 편히 침대에 누울 수 있도록 살펴주었다. 그는 유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마와 볼에 차례대로 입을 맞춘 그의 눈에 유채의 입술이 보였다.
루프스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녀의 입술 가까이 다가갔다. 이미 여러 번 닿은 적 있는 저 입술이 자신을 유혹하는 것 같았다. 그때 그를 방해하는 소리가 있었다.
“루프스님.”
헤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프스는 화들짝 놀라서 유채에게서 얼굴을 뗐다.
방 안으로 들어온 헤나는 루프스와 유채를 보곤 로보와 블랑카를 떠올렸다. 항상 블랑카를 품에 안고 잤던 로보는 아침잠이 많은 블랑카를 배려하여 아침마다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었다. 참 그리운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가?”
“카니스 바실리사님이 선물이 저녁쯤에 도착할 거라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바실리사가?”
루프스는 제가 유채를 위해서 준비한 선물이 곧 도착한다는 말에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유채의 족쇄를 풀어준 다음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 품에 안긴 유채는 너무 가벼웠다. 이대로 가다간 아무 때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몸에 좋은 보양식이며 살찌우는 데 좋은 음식을 가져다주어도 도통 제대로 먹질 않으니 걱정이었다.
“바실리사가 보낸 수인이 도착하면 내게 알려라. 내궁의 정원에 있겠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레티티아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셔도…….”
“되었다. 내가 같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그리고 기왕의 재회라면…….”
헤나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아는 루프스는 그녀를 뒤로 하고 방을 나섰다. 그가 중얼거린 말끝은 너무나 작아 헤나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 * *
“흐음.”
유채는 눈을 깜박였다.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눈앞에 천장이 아니라 노을 지는 하늘이 보이자 유채는 깜짝 놀랐다.
“일어났나?”
유채는 고개를 돌렸다. 몸이 갑갑하다 하였더니만 루프스가 저를 안고 있었다. 유채가 버둥거리면서 일어나려고 하자 루프스가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선물이 있어서 데리고 나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볼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런 후 그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채는 루프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고개만 기울였다.
“여기 잠깐만 있어라.”
루프스는 유채만 남겨두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유채는 루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인가 하였다.
“유채님!”
익숙한 목소리에 유채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유채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블루벨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깡충깡충 뛰어왔다.
“블루벨?”
블루벨이 유채의 품에 와락 안겨 헤헤 웃었다. 반갑다고, 그리웠다는 말하는 블루벨을 마주 안은 유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왔어? 위험하게 여기는 왜 왔어!”
유채는 블루벨의 어깨를 잡고 울었다. 블루벨은 바실리사의 보호 아래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는데 다시 여기에 오다니……. 그리웠고 반가운 마음 위로 그녀에 대한 걱정이 솟아올랐다.
“유채님이 좋아서요.”
블루벨이 씩 웃으면서 유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카날리스 호무스에서 일하는 것도 괜찮았는데, 바실리사님이 계속 귀찮게 굴어서 조금, 아주 조금 마음에 안 들었어요.”
블루벨은 유채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른 몸에 속이 상했다. 크게 다쳤다는 소식에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블루벨은 아이를 달래듯이 유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라는 쥐 수인 애가 제 자리를 위협한다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유채님 옆은 제 자리인데. 심지어 그 애는 유채님이랑 같은 침대에서 잤다고도 하고……,”
블루벨은 귀를 잡아 내려서 제가 많이 속이 상해 있다는 것을 티냈다.
“유채님의 가장 친한 친구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 돌아왔어요. 저 잘했죠?”
블루벨이 손을 놓자 귀가 뿅 하고 튀어 올랐다. 유채는 눈물을 닦으면서 실없이 웃었다.
“그게 뭐야. 겨우 그것 때문에 돌아온 거야?”
“그게 뭐냐뇨? 저에게는 엄청, 엄청 중요한 문제예요!”
블루벨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유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유채는 고개만 끄덕였다.
“저는요, 유채님이 원하는 곳으로 돌아가셨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인사하지 못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미안해.”
“그렇게 떠나셨으면 아프지나 마시지, 이렇게 말라서 돌아오시면 어떡해요.”
“많이 먹고 빨리 몸 회복할게. 걱정하지 마.”
유채는 블루벨을 꼭 끌어안았다. 블루벨도 유채의 다친 등이 아프지 않게 마주 안았다. 블루벨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토스 호무스가 더 월급이 많아요. 바실리사님은 정말 짠순이세요.”
유채가 파핫, 웃음을 터뜨렸다. 블루벨은 우울해 보였던 유채의 표정이 밝게 변하자 저 역시도 방실방실 웃었다.
“월급이 그렇게 중요했어?”
“당연하죠! 제가 집에서 쫓겨난 이유도 돈 때문인데!”
블루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장연설을 했다. 블루벨 꼭 잡아주는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유채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유채님, 어리광이 느셨어요. 덕분에 유채님 돌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월급도 빵빵해지고 유채님이랑 놀 수도 있고, 얼마나 좋아요.”
“나도 블루벨이 와서 좋아.”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저 여기에 방금 도착해서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블루벨은 다시 토스 호무스의 궁녀가 되었으니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블루벨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깡충깡충 뛰어서 사라졌다. 유채는 블루벨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블루벨이 보이지 않게 되자 유채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기쁨과 미안함, 반가움이 섞인 복합적인 눈물이었다.
“블루벨도 만났는데, 왜 우나?”
다시 나타난 루프스는 유채가 우는 것에 매우 당황했다. 그녀가 좋아할 줄 알았다. 블루벨과 다시 만나서 그녀의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래서 블루벨을 불렀는데 이렇게 우는 걸 보니, 제가 또 뭘 잘못한 것 같았다.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있게 해주고 좋은 것만 먹이고 입게 해주면 이곳을 좋아하게 되어 여기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 같았다. 저는 유채가 이곳에 남고 싶어 할 이유가 될 수 없을 테니 블루벨을 옆에 붙여두고자 했다. 선택받지 못함이 슬펐지만 그게 유채를 떠나보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슬퍼하지 않기를 원했다.
“돌아가자.”
루프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유채의 몸을 안아 올렸다. 유채는 루프스의 품에 안겨서 눈물만 닦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루프스는 그녀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그리고 눈물 자국이 선명한 유채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울지 마라.”
울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왜 또 이렇게 된 것일까.
“블루벨이 곧 올 거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회포도 풀고…….”
유채가 갑자기 루프스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힘을 준 것인지 가늘고 마른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블루벨 건들면, 당신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아아. 잔인한 나의 여왕님이여.
현실은 잔혹했다. 루프스는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그녀를 위해서 데려온 블루벨이었다. 블루벨을 이용해서 유채를 협박할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채는 잔인했다. 그의 마음을 몰라주고, 그의 의도를 곡해했다.
“내가 뭐든, 할 테니까 블루벨은…….”
유채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그의 손에 닿았다. 루프스는 그 눈물이 얼음송곳이 되어 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좀 더 부드럽게 대해줄 것을. 좀 더 다정하게 대해 줄 것을. 그럼 제게 한 번이라도 더 웃어주었을까? 제 진심을 곡해하지 않았을까? 제 마음을 받아들여 주지는 않더라도 부정하지는 않았을까?
유채가 루프스의 손을 잡아 제 가슴으로 이끌었다. 빠른 속도로 뛰는 유채의 심장이 느껴졌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떨쳐 내고 제가 원하는 건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겨우 네 몸을 탐하려고 블루벨을 데려온 것이 아니라고, 그저 네가 웃기를 바랐다고……. 하지만 울음 섞인 유채의 목소리에 그의 입술은 굳게 닫혔다.
“제발, 그 애만은 건들지 말아줘요. 난 그 애에게 빚진 게 많아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나를 가엽게 봐줘요, 제발.”
“……알겠다. 블루벨은 결코 건들지 않으마.”
루프스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결국은 또 이렇게 눈물만 보게 되었다.
“……편히 쉬어라.”
루프스는 더 이상 그 눈물을 지켜보고 있을 수 없어 유채를 두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 같았다. 토스 호무스에 돌아오자마자 유채와 이름이 같은 꽃이 피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유채가 그 꽃을 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 그 꽃을 보면 웃을 것 같아서, 내궁의 정원에 옮겨 심으려 했는데 이미 꽃은 다 지고 푸른 풀만 남아 있었다. 루프스는 그것이 꼭 유채와 자신의 관계 같았다. 자신은 항상 너무 늦었고 유채는 그를 외면했다.
“루프스님. 오페라티오 참석 명단입니다.”
헤나가 오페라티오에 참여할 늑대 수인의 명단을 가지고 들어왔다. 루프스는 탁자에 앉아 명단을 찬찬히 읽어 내렸다. 딱 한 곳이 비어 있었다. 베노르 콩레수스의 우승자로서 제사를 주관해야 할 루프스의 비(妃)의 자리였다. 루프스는 그 자리에 유채의 이름을 적었다.
[루프스의 비(妃) : 한유채]
유채가 남기고 간 그 이상한 물건에 붙어 있던 이름표 같은 것에 적혀 있던 글자였다. 유채의 이름인 것 같아 유채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유채는 맞다는 대답을 하였다. 그 뒤 몇 번이나 그 괴상한 글자를 연습했다.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글자가 루프스의 이름 옆에 적혔다. 헤나는 그 글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유채가 언제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쓴다고 말하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루프스님, 이것은 법도에 어긋납니다.”
“이렇게 한다. 가져가.”
“대신들이…….”
“그놈들이 반발을 하든 말든.”
루프스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젓자 헤나는 그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깨닫고 파란을 예고할 종이를 들고 물러났다. 루프스는 침대에 누웠다. 제 비(妃)의 자리에 유채의 이름을 써놓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유채는 전혀 바라지 않는 것이고 제게 그런 마음 한조각 주지 않을 것을 알아도, 그는 유채를 제 비(妃)라고 적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얼간이가 되는 거야.’】
그래, 자신은 이미 세상에 둘도 없는 얼간이였다. 그것으로 손가락질 받더라도 그는 유채를 사랑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유채를 사랑하지 않았던 그때보다 사랑하며 아파하는 지금이 더 행복하기에, 그는 이 슬픈 사랑을, 유채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알렉스까지 돌아왔으니.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봅시다.”
프레드릭은 강경파의 지도자격인 바론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돌아오자마자 논의를 한다는 것은 결국 저들도 알렉스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렉스가 선봉에 서서 뛰는 동안 뒷짐 지고 구경만 하겠다는 심보가 아니꼬웠다.
긴 탁자의 양쪽으로 각각 강경파와 온건파 장로들이 줄을 맞춰 앉아있었다. 상석에는 포트리스에서 가장 나이 많은 현자인 티에리 부인이 앉았다. 온건파의 상석에는 패드로가 앉아 있었다.
“일단 전염병 프레드릭 군 덕분에 한시름 돌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차후의 대책을 논의해야 합니다.”
티에리 부인이 운을 띄웠다. 프레드릭이 가져온 물은 전염병에 상당한 효과를 보였다.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고 병의 진행을 늦추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일단 베네딕트 씨의 말을 듣겠습니다.”
포트리스에서 의사 일을 하는 베네딕트가 앞으로 나섰다. 장로들이 병에 대해 앞다퉈 묻는 질문에 베네딕트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필립이 듣다가 귀찮아진 것인지, 베네딕트의 말을 잘라먹고 그의 입장을 정리했다.
“그래서 자네 말은, 치료 방법을 연구하고 싶어도 연구할 만한 약초가 없다는 것이지? 연구할 만한 약초만 있다면 연구를 지속할 수 있고?”
“예. 포트리스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는 모두 효험이 없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니 스티폴로르의 본토를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때다 싶어서 바론이 끼어들었다. 바론의 옆에 앉은 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들의 악마 같음은 이미 보지 않으셨습니까? 레프스의 효능을 알면서도 선심 쓰듯 그것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실종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론의 말에 프레드릭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아직 진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헤임달은 포트리스에서 인망이 두터웠고 프레드릭은 지난번 레프스 일로 입지가 약해진 상태였다. 레프스의 효능을 모르고 루프스에게 넘어가 수인들에게 좋은 일만 해주고 왔다고 강경파가 트집을 잡았던 이유가 컸다. 섣불리 헤임달을 공격했다가 오히려 이쪽의 상황만 안 좋아질 것이 뻔했다.
“헤임달이 말하더군요. 수인들 사이에서 동물화에 대한 문제의 해결책이 인간의 간이란 소문이 돌고 있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포트리스 근처에서 실종자 중 몇이 간이 없어진 상태로 발견되긴 하였습니다. 짐승에게 뜯어 먹힌 것처럼 말이지요.”
만치니는 포트리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소문과 대조하는 중이라 보고를 미루고 있던 사실을 보고했다.
포트리스의 경비를 맡고 있는 렉스의 부하 만치니가 대답했다. 프레드릭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실종된 이들은 헤임달의 말을 믿고 스티폴로르의 내륙으로 갔다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한데, 왜 헤임달이 하는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으시는 것입니까?”
프레드릭이 바론에게 물었다.
“왜냐니? 헤임달은 우리에게 옳은 이야기만 알려주었네. 자네도 알지 않나?”
“레프스 역시 헤임달이 알려준 것인데 잘못된 정보였죠.”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지. 헤임달이 그 일로 포트리스 사람들에게 얼마나 미안해했는지 아는가?”
정치라는 것은 본래 그랬다. 타인의 실수를 또 다른 타인에게 뒤집어 씌워 종국에는 그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바론은 턱을 쓸었다. 그에게 이것이 헤임달의 실수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알렉스를 끌어낼 수 있는 작은 트집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알렉스가 토스 호무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수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인간들이 수인들의 간으로 자신들의 전염병을 치료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칼로 간을 말끔하게 도려낸 시신도 발견이 되었습니다.”
【‘형. 헤임달이 헥터에게 아편을 공급했다고 해. 유채 양이 직접 들었대.’】
알렉스에게 들은 소식으로 프레드릭은 그제야 헤임달이 저쪽의 정보를 어떻게 알아내는지 알 수 있었다. 마약을 이용한 것이다.
“자네 설마, 우리 포트리스 사람들이 그랬다고 믿는가? 증거라도 있나?”
“그럼 바론 장로님은 실종자들과 수인들 간에 상관관계를 증명하실 수 있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그 소문이 있지 않은가!”
“저도 들은 소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헤임달이 전한 소문만 믿으려고 하십니까?”
“그, 그건…….”
“맞는 말이네, 바론. 지금 자네는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어.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페드로가 프레드릭의 말에 동의를 했다. 양측의 열기가 과열되자 티에리 부인이 정리하려고 하였지만 렉스가 먼저 끼어들었다.
“프레드릭, 네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가 있나? 빌어먹을 화합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느냔 말이다.”
프레드릭은 대답을 못 하고 입을 다물었고, 렉스는 벽에 걸린 지도 앞으로 다가가 미노르 호무스를 가리켰다.
“헥터 놈이 날뛰어준 덕택에 지금 미노르 호무스는 불안한 상태일 것이다. 비록 루프스 놈 때문에 안정을 찾았지만, 수인 놈들은 제아무리 루프스라 할지라도 제 일족의 영역에 과도하게 참견하는 것을 싫어하지. 벨라토르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이번 건은 달라. 곧 루프스의 병력이 미노르 호무스에서 철수할 거다.”
렉스의 손가락이 독수리 일족의 땅과 양 일족의 땅, 토끼와 쥐 일족의 땅을 순차적으로 가리켰다.
“생각보다 빠르게 내전이 진압되었다 할지라도 전쟁은 전쟁이다. 이곳들은 굉장한 피해를 입었다. 아직 그들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틈을 타면, 우리는 최소한 독수리 일족과 소 일족의 땅을 얻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수인 놈들을 몰아낼 수도 있다.”
바론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렉스 경.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자료와 약초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얻을 땅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내가 묻지요. 우리도 지금 위기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수가 많은 수인들을 어떻게 이길 겁니까? 이건 도박입니다.”
마틴의 발언에 필립도 덧붙였다.
“맞는 말이지. 겁쟁이 놈이 간만에 말을 잘했네. 자네는 아직도 복수할 생각밖에 못 하는 건가? 냉정하게 생각해, 렉스. 당신이 루프스에게 품은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아네. 하지만 자네는 루프스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도왔어. 자네가 라일라를 잃었을 때의 슬픔을 루프스도 느꼈다는 말일세. 그러니, 너무 자네 생각만 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게. 머리를 좀 식히란 말이야.”
렉스 탁자를 쾅 내리쳤다. 이글거리는 눈이 필립을 향했다. 렉스의 손이 분노에 부들부들 떨렸다.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필립 장로! 뭣도 모르면서 몰아붙이지 마시지요!”
“진정하고 앉게. 자네 의견은 충분히 알았네.”
티에리 부인이 렉스를 진정시켰다. 렉스는 숨을 몰아쉬면서 자리에 앉았다.
렉스가 아니더라도 이미 강경파가 세를 불린 상태라 논의는 계속 미노르 호무스를 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프레드릭은 서둘러 다른 의견을 던졌다.
“만일 그 작전이 성공한다고 하면 말입니다. 당장에 울피누스 호무스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우리의 주전력이 미노르 호무스로 빠지게 되면 헤르티아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여우 일족이 라일라님의 영향으로 우리에게 조금 호의적이라고는 하나 그건 우리가 이 포트리스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 얘깁니다. 여우 일족은 늑대 일족 다음으로 강하며 그들은 이번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바도 없습니다.”
“맞는 말이네. 헤르티아는 어떡할 건가? 헤르티아를 막을 방도가 있는가?”
강경파는 금세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바론은 눈만 굴렸다. 암만 생각해 봐도 헤르티아를 이 편으로 끌어들일 방도가 없었다. 한때는 라일라 덕에 사이좋게 지내기도 했었으나 수인 내전 중 여우 일족이 인간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었기에 헤르티아가 그들을 좋게 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제가 헤르티아를 만나보지요.”
모두의 시선이 렉스를 향했다.
“만나자고 하면 내치진 않을 겁니다. 우리가 토스 호무스를 치는 일을 돕는다고 하면 헤르티아도 저희를 도와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렉스의 말에 강경파는 다시 기세등등하여 당장 미노르 호무스로 쳐들어갈 것처럼 떠들어댔고 온건파도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티에리 부인은 토론을 중재하였으나 프레드릭은 그녀가 묘하게 렉스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점점 헤임달의 뜻대로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이 문제는 렉스가 헤르티아를 만나고 난 후에 다시 이어가기로 하고 다른 주제가 나왔다.
“프레드릭 군이 헤임달을 참고인으로 요청했습니다.”
헤임달이 기다리다가 졸았는지 눈을 비비며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장로들이 헤임달을 믿는 것은 저런 허술하지만 순박한 면 때문이었다. 저게 모두 연기라 생각하니 프레드릭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프레드릭이 헤임달은 부른 것은 그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편까지 사용해서 헥터를 구슬렸다면 뭔가 엄청난 것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프레드릭은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면 헤임달의 목적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야 그의 음모를 막을 수 있다.
헤임달을 여기에 불러놓고 있는 동안 알렉스가 그 조사를 하고 있을 터였다. 오늘의 부름은 오직 그것을 위함이었다.
프레드릭은 헤헤 웃는 헤임달을 바라보았다. 순순히 그의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 * *
“잘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헤나의 말에 유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프스가 전에 한 내기를 들먹였다. 그가 바란 것은 에클레시아에 제를 올리러 가는데, 그의 비(妃) 자격으로 동행하라는 것이었다. 유채는 베노르 콩레수스 전에 한 내기를 떠올리며 그때 자신이 너무 경솔한 것이 아니었나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에클레시아를 조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남자의 비(妃)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은 감수해야 했다.
“조금 쉬어도 되나요.”
유채는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머리에 얹은 장신구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유채는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겨우 숨을 돌렸다. 그녀는 지금 헤나에게서 예법을 배우고 있었다. 제사 때 그의 옆에 서야 하기 때문이었다.
유채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루프스는 제 딴에는 배려랍시고 정원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어차피 새장 속에 새와 같은 신세라 밖이든 안이든 그녀에겐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유채는 헤나를 힐끔 보았다. 그녀도 힘든지 물을 벌써 한 통이나 들이켰다.
걸음걸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손을 움직이는 방법까지 다 절차와 예법을 따라야 해서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예복은 무겁고 길어서 거추장스러웠고 머리를 틀어 올려서 꽂은 장신구들도 상당했다. 안 그래도 머리카락이 갑자기 길어져서 무거운데 거기에 장신구까지 더해지니 유채는 이러다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편히 쉬세요.”
유채는 당장에 장신구들부터 뽑았다. 하나하나를 빼낼 때마다 수명이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헤나도 이제 해탈한 것인지 고개만 저었다.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을 고정한 비녀 비슷하게 생긴 것까지 빼내자 긴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며 어깨 아래로 펼쳐졌다. 유채는 가는 끈 하나만으로 머리카락을 질끈 묶었다.
유채는 산책을 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루프스님의 명령이십니다.”
“알아요.”
정원에서 수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대신 그 정원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 루프스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조건은 수업을 받을 때는 블루벨과 함께 있지 말라 하였다. 유채는 루프스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블루벨을 이용하기 위해 내건 조건 같아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오늘도 와 있었네.”
유채는 덤불 뒤에서 은빛 털의 어린 늑대를 보고 반갑게 말했다. 유채는 새끼 늑대를 안아 작은 주둥이에 입을 맞췄다. 새끼 늑대도 유채가 반가운지 그녀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잘 지냈어? 아직 도망친 거 들키진 않았지?”
유채가 새끼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유채가 이 새끼 늑대를 처음 만난 것은 정원에서 수업을 시작하고 삼 일 정도가 지난 날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쉬려고 좀 걷고 있었다. 뭔가가 후다닥 뛰어가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쫓아갔다가 발견한 것이 이 어린 늑대였다. 젖을 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모습에 유채는 안쓰러운 마음에 새끼 늑대를 살폈다.
아무에게도 묻지는 않았지만 추측하기로는 루프스가 기르는 펠리스 다우스인 늑대의 새끼인 것 같았다. 돌봐주는 이 없는 것을 보니 도망을 나온 게 틀림없었다. 유채는 저와 비슷한 처지인 어린 늑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유채는 품에서 마법으로 축소시켰던 우유병을 꺼냈다.
“배 많이 고팠지.”
유채는 환히 웃으면서 가져온 작은 접시에 우유를 부어주었다. 프란체에게 배운 축소 마법 덕택에 이렇게 몰래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우유그릇이 놓인 곳에 늑대를 내려놓았다. 늑대는 접시에 담긴 우유를 할짝였다.
“잘 먹네.”
유채는 새끼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난 지 오래되었지만 이름은 붙여주지 않았다. 이름을 붙여주면 유채라는 멀쩡한 제 이름을 무시하고 새 이름을 붙여 부르는 루프스와 다를 것이 뭘까 싶었다.
“나…… 사실 너무 힘들어.”
유채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동물에게 속에만 감추어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렇게 하나씩 이야기할 때마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힘들다는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유채의 말에 실린 감정을 안 것인지 늑대가 고개를 들었다.
“언니가, 너무 걱정이 되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와.”
유채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토스 호무스에 끌려온 후로 유채는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는 데에 모든 시간을 쏟았다. 하지만 쏟은 시간과 정성만큼 손에 들어오는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수능 공부할 때보다 더 많이 책을 본 것 같아. 그런데도 도저히 모르겠어.”
리와인더의 조각의 악기로 인해 일어났을 만한 큰 사건들을 찾아보았다. 예상대로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모두 원인이 있고 해결이 된 문제들이었다. 동물화와 포트리스의 전염병 문제 말고는 해결이 되지 않아서 혹시나 하고 의심해 볼 만한 일은 찾을 수가 없었다.
책을 보던 중 유채는 스티폴로르와 대륙 사이의 바다에 일어난다는 거대한 회오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유채는 그 회오리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건 에클레시아가 무너지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했다.
“조각을 찾아야 셀레네가 날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는데. 도저히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유채의 눈에서 뚝뚝 떨어진 눈물이 새끼 늑대의 등에 닿았다. 늑대는 유채를 위로하려는 것인지 그녀의 손을 혀로 쓸었다.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어…… 블루벨은 안 돼. 이미 너무 미안한데…… 이런 힘든 일을 도와달라고 어떻게 말해. 그리고 그 남자는…….”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애초에 셀레네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하나였다. 유채만이 리와인더의 조각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이 스티폴로르에서 유채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유채 자신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고 정보도 얻지 못해 유채는 너무나 막막했다.
“분명히 막으려고 할 텐데…….”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면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희망이 생긴 뒤에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 유하에게 제때 돌아가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영원히 이곳에 떠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유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언니가 너무 걱정되는데…… 돌아가야 하는데…….”
할짝. 새끼 늑대가 유채의 어깨로 올라와서 그녀의 눈물을 혀로 핥았다. 유채는 늑대의 작은 위로에 웃을 수 있었다. 유채는 늑대를 안고 콧잔등을 비볐다.
“고마워. 내 이야기 들어주고 위로해 줘서.”
유채는 헤나가 자신을 찾는 소리에 새끼 늑대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유채는 우유가 담긴 접시에 아침식사에 디저트로 나왔던 곡물 빵을 내려놓았다. 헤나가 선물로 준 작은 주머니에 넣어온 것이었다. 유채는 늑대의 마지막으로 쓰다듬어 준 후 내일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덤불을 빠져나갔다.
새끼 늑대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유채가 주고 간 곡물빵과 우유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새끼 늑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은빛 머리카락에 건장한 청년이 나타났다.
“방법을 찾았다.”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유채가 돌아갈 방법을 찾았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셀레네 여신의 이름이 나온 걸 보니 분명 신을 만난 것이었다. 루프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유채가 신과 관련된 곳에 오래 머무른 적이…….
“시간의 호수.”
루프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유채는 신의 힘이 담겼다는 호수에 빠진 적이 있었다. 제가 곧바로 그녀를 빼내긴 했지만 신을 만났다면 그때 그곳뿐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손등에 이상한 흉터가 생긴 것도 분명 그 호수에 빠진 이후였다. 그것이 신과 관련된 것이라고 가정하면 요즘 따라 조용한 유채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셀레네 여신이 그녀에게 뭔가를 준 것이었다.
루프스는 셀레네 여신에게 원망이란 원망은 다 토해내고 싶었다.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비참한 삶에서 겨우 만난 빛인데 그 빛을 도로 빼앗아가겠단다.
루프스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신은 자신에게만 이렇게 가혹한 것일까? 이제 간신히 열셋의 그 겨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야 비로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삶에 축복이라곤 한 번도 내려준 적 없는 신은 유채마저 빼앗겠단다. 루프스는 신을 저주했다.
루프스는 유채와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요즘이 너무나 행복했다. 처음엔 그녀에게 아이 취급을 받는 것이 꽤나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럼에도 매일 이렇게 새끼 늑대로 변해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유채가 그때만큼은 솔직해지기 때문이었다.
숨어서 몰래 수업 받는 모습을 보기만 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고 작은 모습으로 변했던 거였다. 그녀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는 것은 절대 계획에 없었다.
【‘안녕. 넌 어디서 왔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유채는 자신을 그냥 새끼 늑대로 착각을 했다. 하긴 포트리스의 마레 위르들도 눈썰미가 좋지 않으면 수인의 동물형과 동물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하물며 유채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온 마레 위르였다. 게다가 몸집까지 작게 만들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유채는 다른 이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새끼 늑대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그녀의 과거에 대한 것도 있었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도 있었고 루프스에 관한 험담도 있었다. 그 모든 이야기에 루프스는 감사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어릴 적 남들과 조금 다른 외모로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분노했고, 좋아하는 수컷에 대한 이야기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새겨들었다. 다정한 수컷을 좋아한다기에, 루프스는 유채에게 정말 최선을 다해서 다정하게 굴었다. 소리도 지르지 않으려 했고 그녀가 불편한 기색이 보이면 사과하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유채가 제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줄 수만 있다면 성질을 죽이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는 유채를 잡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젠장. 에클레시아!”
루프스는 유채를 에클레시아에 데리고 가기로 한 것을 후회했다. 이미 무너졌다고 해도 그곳은 신의 힘이 담겼던 곳이었다. 결국 제 무덤을 제가 판 것이다.
루프스는 초조해졌다.
“대체 뭘 찾고 있는 거지.”
유채는 정말 중요한 비밀은 어린 늑대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루프스는 그녀가 어떤 물건을 찾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아는 것은 그것이 무언가의 조각이라는 것이다.
“젠장할. 도대체 뭐지?”
만일 유채가 찾는 그 물건을 먼저 찾아 빼돌리거나 없애 버린다면 유채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유채를 그의 곁에 잡아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루프스는 새로운 희망을 잡았다.
【‘나…… 사실 너무 힘들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유채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돌아가지 못한다면 유채는 슬퍼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제게도 아픔일 테지만, 유채가 없다면 그가 죽을 것이다. 그는 살고 싶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붙잡을 방법을, 그녀가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지 고심하느라 종일 멍하게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일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유채가 불렀을 때였다.
“저기요.”
유채가 제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것은 몇 번이 되지 않기에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지금 유채와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머뭇거리던 유채가 입을 열었다,
“전에 말했던 그쪽만 열람할 수 있다는 자료…… 나에게 보여줄 수 있나요?”
유채는 루프스가 무얼 대가로 요구할지 몰라 겁을 먹었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루프스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유채는 책으로 정보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읽는 책에 찾는 물건에 대한 단서가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원하는 대로 책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래야 찾는 물건이 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래.”
“정말인…….”
유채는 선선히 나온 대답에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루프스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단,”
루프스는 조건을 붙였다.
“에클레시아에서 나와 같은 막사를 쓰되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경우 막사에서 꼼짝도 하지 마라.”
유채의 표정이 굳었다.
루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클레시아에는 데려가되 그녀가 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차단해야 했다. 신을 만나서 정보를 얻어도 큰일이고 다른 능력을 얻어도 큰일이었다. 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막을 생각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고개를 붙잡아 제 쪽으로 하고서 상체를 숙였다. 유채는 이게 루프스의 또 다른 조건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마지막 조건이다.”
입술을 살짝 깨문 유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조금만.
루프스는 한 손으로 유채의 턱을 잡고 다른 손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루프스의 품에 갇힌 유채는 곧 이어 몰아닥칠 폭풍 같은 키스를 각오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둘의 입술은 약간의 틈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유채의 입술 틈에서 달큰한 숨이 새어나왔다. 눈을 질끈 감고 손을 파르르 떠는 그녀를 보고서 루프스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곧 그의 입술이 유채의 입술에 스치듯이 닿았다가 곧장 떨어졌다. 그는 잠깐 동안 맞닿은 입술로 유채를 사랑하고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는 제 마음을 토해내었다.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이마에 닿았다. 유채는 각오한 것과는 다른 그의 행동에 당황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꽉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작은 몸이 제 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니, 결코 놓을 수 없다.
유채의 언니가 온다 해도, 부모님이 온다 해도, 심지어 신이 온다고 해도 그는 유채를 놓아줄 수 없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도망갈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자 그녀를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았다. 루프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죽는다 하더라도 놓지 않을 것이다.
루프스는 진득한 감정을 담아 유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유채가 숨이 막힌지 바르작거리자 루프스는 그제야 팔에 힘을 풀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 같은 몸을 루프스는 안은 채로 그녀의 뒷머리부터 마른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 곁에 머물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주겠다. 그러니, 내 곁에 있어.”
루프스는 뭔가를 말하려는 유채를 품에 끌어안고 그녀의 고개를 제 가슴팍에 꾹 눌렀다.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절대 놓을 수 없다.
“헤르티아.”
뜨거운 태양빛을 피하기 위해 헤르티아는 수행원이 펴놓은 양산 아래에 있었다. 단테는 헤르티아 곁으로 다가오자 그녀의 옆에 있던 울피누스 호무스의 궁녀가 얼굴을 붉혔다. 스티폴로르에서 가장 유명한 미남을 고르라면 루프스와 에쿠우스 단테가 뽑혔다. 둘은 완전히 상반된 매력을 가진 미남이었다. 루프스가 귀족적이고 선이 고운 미남이라면 단테는 야성적이고 거친 미남이었다. 재미있게도 둘의 성품은 생긴 것과 정반대였다.
“무슨 일이야, 단테?”
단테는 헤르티아의 옆에 섰다. 저 멀리 헤르티아의 부군의 역할을 하기로 내정된 여우 일족의 이인자가 보였다. 단테는 속으로 쓴물을 삼켰다.
“뭘 할 생각이야?”
“글쎄.”
헤르티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오페라티오에 참여하는 각 수인 일족들이 이제 에클레시아 근처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늑대 수인 일족은 아직이었는데 매년 늦게 도착하는 편이라 이번에도 그럴 모양이었다.
원래 오페라티오는 사월의 마지막 날에 열리지만 이번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월로 미루어졌기 때문에 뙤약볕을 견디는 것이 꽤나 괴로웠다. 루프스에게 인사를 해야만 제 막사에서 쉴 수 있기 때문에 헤르티아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루프스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난 너를 돕지만, 더 이상의 분란은 원치 않아.”
단테의 말에 헤르티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니, 너도 이만했으면 한다. 네가 계속 그럴수록 괴로워지는 것은 너 하나야. 로보가 라일라님을 살해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베니니타스님이 블랑카님을 죽인…….”
“입 닥쳐, 단테. 그딴 소리나 지껄일 거면.”
헤르티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때마침 늑대 일족이 도착했다. 모여 있던 수인들의 눈이 케릭스의 등에 탄, 푸른색의 옷을 입고 얼굴을 베일로 가린 마레 위르 암컷에게 향했다.
수인들이 설마 하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마레 위르가 오페라티오의 주연이 된 경우는 라일라가 있었으니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베니니타스의 부인이었다. 고작해야 펠릭스 다우스인 레티티아가 맡기에는 그 자리는 너무 고귀했다.
수인들의 불만이 커져갈 무렵, 위르형으로 변한 루프스가 케릭스의 등에 앉은 마레 위르를 안아서 내렸다. 루프스의 품에 안긴 마레 위르 암컷은 마치 아이 같아 보였다. 루프스는 마레 위르를 땅에 내려놓고도 제 품에 넣어 꽁꽁 숨기려 했다.
“늦어서 미안하군.”
루프스가 짤막하게 인사를 던졌다.
“올해는 멍청한 두 일족으로 인해서 피치 못하게 늦게 치르게 되었지만, 오페라티오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길 바라네.”
루프스는 늦게 온 주제에 인사도 대강 하고선 유채를 데리고 막사로 들어갔다.
헤르티아는 얼굴을 쓸었다. 정말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놈이었다. 단테는 헤르티아가 루프스의 펠릭스 다우스에게 묘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는 야성적으로 생긴 외모와 다르게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는 유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를 동정한 몇 안 되는 수인이었다. 방금 루프스의 행동으로 단테는 뭔가 엄청난 일이 생길 것을 예감했다. 그런데 헤르티아가 저 가여운 아이를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눈으로 바라보자 단테는 불안해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수인들도 은 루프스의 태도에서 뭔가를 느낀 것인지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나마 레푸스 트레모르만이 이 상황을 예상한 듯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루프스가 저 펠릭스 다우스를 총애하는 것이 단순한 감정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단테는 다시 헤르티아를 보았다. 루프스의 약점이 된 그 아이는 이제 보다 더한 급류를 만나서 휩쓸리게 될 것이었다.
“단테.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날지도 모르겠어.”
헤르티아가 작게 웃었다. 유채를 동정함에도 결국 단테 역시 그녀를 이용하는 세력이 될 것이었다. 헤르티아의 검은 눈에 사로잡힌 뒤로 그는 영원한 헤르티아의 포로였다. 헤르티아를 위해서라면 제 신념도 꺾을 수 있었다. 복수에 미친 헤르티아가 저를 돌아봐 주지 않기에 그는 더 그녀의 시선을 갈구하며 그녀의 말을 따랐다. 헤르티아가 그것을 이용함을 알면서도 단테는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게도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 * *
“갑갑했지.”
막사로 유채를 데리고 들어온 루프스는 그녀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벗겼다. 곱게 치장을 한 얼굴이 드러났다. 루프스는 시중을 드는 궁녀가 가져온 찬물을 유채에게 건네었다. 목이 말랐는지 유채는 금세 물 잔을 비웠다, 루프스는 잔을 다시 궁녀에게 건네고 유채를 의자에 앉혔다. 루프스는 유채의 땀에 젖은 앞머리를 빗어주었다.
“오페라티오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과 오늘 밤에 있는 수장과 그 반려들이 모이는 자리에만 참석하면 된다.”
“알겠어요.”
유채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유채의 머릿속은 지금 어떻게 하면 에클레시아에 들어갈 수 있을지에 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자료도 포기할 수 없고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에클레시아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루프스의 일정은 대강 알고 있으니 그가 다른 일을 하는 잠깐의 틈을 이용해서 에클레시아에 몰래 들어가야만 한다.
“아!”
유채는 볼에 차가운 게 닿자 깜짝 놀랐다. 루프스가 얼음주머니를 대준 것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에 얼음주머니를 넘겼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블루벨을 부를 테니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있어라. 잠시 다녀올 테니.”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볼과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루프스가 나가자마자 블루벨이 총총 들어왔다. 블루벨은 더위를 견디기 힘든지 귀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블루벨은 혀를 쭉 내밀고 유채의 무릎에 기대앉았다.
“유채님, 저 너무 더워요. 죽을 것 같아요.”
“그래? 이건 어때?”
유채는 블루벨의 볼에 얼음주머니를 대어주었다. 블루벨은 금세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유채는 입을 헤 벌리고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 블루벨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시원해요, 유채님. 유채님은 안 더우세요?”
“난 괜찮아. 내가 살던 곳은 이곳의 오월만큼 여름에 더운 곳이었거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늘에 있으면 괜찮아.”
“유채님은 설마 열지옥에 살다 오신 건 아니죠?”
“그런 더운 나라도 있기는 한데, 내가 살던 곳은 아니야.”
유채는 블루벨의 귀가 여전히 축 늘어져 있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원해지면 귀가 쫑긋 올라올 줄 알았는데 그녀의 귀는 여전히 축 늘어져 있었다. 유채는 블루벨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흐갸갸갸갹.”
블루벨이 요상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떨었다. 귀가 쫑긋 솟았다. 블루벨은 유채의 허벅지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유채님!”
“우울해 보여서 그랬어.”
당황한 듯 블루벨의 얼굴이 굳었다. 동시에 귀가 다시 축 늘어졌다. 유채가 다정하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저…… 케릭스님 만났어요.”
블루벨은 시무룩해졌다. 바실리사를 따라서 카날리스 호무스로 가서도 문득문득 케릭스가 떠오를 때가 있었다. 그는 이미 블루벨의 마음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블루벨은 케릭스를 볼 때마다 뛰어대던 심장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카날리스 호무스에서 정확히 깨달았다. 하지만 블루벨은 케릭스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유채를 다치게 하려했다. 유채는 수인이 아니라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 연약한 마레 위르였다. 그래서 블루벨은 케릭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그리웠다. 듬직한 손과 따뜻했던 눈길이 그리웠다.
“케릭스?”
유채는 오늘도 여기까지 저를 태우고 온 그를 떠올렸다. 그 덩치 큰 남자가 한눈에 봐도 마른 데다 턱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어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나 싶기도 했었다.
케릭스는 유채가 토스 호무스에 다시 돌아갔을 때 먼저 찾아와 사과를 했었다. 유채는 그가 그녀가 다쳐도 좋으니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때의 케릭스가 당연한 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 덕택에 루프스의 손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자신들의 부하를 막은 루프스가 이상한 것이었다.
유채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블루벨이 그녀의 다리를 흔들면서 채근을 했다.
“정말로 케릭스님이 유채님에게 사과를 했어요?”
“응. 그런데 케릭스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화내고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헤어졌어요.”
유채는 블루벨의 볼이 붉어진 것을 보았다. 유채는 그제야 ‘아’ 하는 탄성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블루벨이 종종 케릭스의 이야기를 굉장히 즐겁게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유채는 블루벨이 사랑에 빠진 소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채는 왠지 모르게 뿌듯해져서 블루벨을 끌어안았다.
“어! 왜 그러세요!”
당황한 블루벨이 버둥거렸다.
“딸 시집보내는 엄마가 된 기분이야.”
“예?”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랑 상관없이 네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어.”
유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블루벨은 머뭇거리며 눈을 굴렸다.
“하지만, 케릭스님은 유채님을 해치려고 하셨어요. 전 그런 케릭스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제게는 유채님이 가장 소중해요. 그러니까, 저는…….”
“상관없어, 블루벨. 난 그에게 사과 받았는걸. 그리고 케릭스가 나를 공격하려 했다 해서 그를 원망하지 않아. 오히려 사과하러 온 것이 좀 의외였는걸.”
“케릭스님이 진심으로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아니, 굉장히 정중했어. 그는 자신이 한 짓을 인정했고 그랬어야 하는 이유도 설명했어. 충분히 진심이 담긴 사과였어.”
유채는 블루벨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말하였다.
“블루벨, 사랑을 할 때는 말이야.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돼. 네 마음을 생각하란 말야. 그러니까, 케릭스가 좋다면 그를 좋아해도 난 괜찮아.”
“하지만, 케릭스님은 늑대고 전 토끼인 걸요…….”
블루벨은 말끝을 흐렸다. 일족이 다르다는 문제 말고도 케릭스는 늑대 일족의 명문가 자손이고 그에 반해 블루벨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토끼 암컷이었다.
유채는 오라클라 리네아에게 들었던 말을 설명해 주었다. 블루벨의 눈이 커다래졌다.
“정말이에요?”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유채는 어깨를 으쓱이고 블루벨의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유채는 정말로 블루벨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기를 바랐다.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아내 원래 세상으로 무사히 돌아가고, 블루벨도 아무 위험 없는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해. 케릭스가 좋으면 그에게 달려가면 되는 거야.”
“유채님…….”
블루벨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유채의 목을 끌어안았다. 유채는 블루벨의 등을 마주 안았다.
잠시 후, 유채의 맞은편에 앉은 블루벨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유채도 공부가 바빴던 학생이라 연애에 대한 경험은 전무했기에 열심히 드라마나 소설에서 보았던 내용을 풀어냈다. 블루벨은 성실한 학생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유채의 근본 없는 조언에 연신 감탄했다.
그러다 블루벨은 문득 박수를 딱 치더니 유채에게 물었다.
“유채님. 근데, 이렇게 많은 수인 분들 만나는 것 괜찮으세요? 무섭지 않으세요?”
“괜찮아. 그렇게 무섭지 않아.”
유채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다른 수인들보다 루프스가 더 무서워.”
“왜요? 그래도 요즘은 많이 안 무서우신데…….”
“그가 언제 돌변할지 몰라서 더 무서운 거야. 언제 다시 나를 찍어 누르거나 말뚝에 묶어놓을지 모르잖아. 그리고 너를 데리고 협박할 것이 가장 무서워.”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블루벨이 싱긋 웃었다.
“저를 토스 호무스의 궁녀로 다시 부르신 건 루프스님이에요. 루프스님이 직접 오셔서 제게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 유채님의 말벗이 되어줄 수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제가 평생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거금을 주시면서 유채님의 말벗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뭐라고?”
“사실 루프스님은 토스 호무스의 궁녀 계약 조건을 들먹이시면서 저를 강제로 데려오실 수도 있으셨어요. 근데 저를 직접 만나고 설득하셨어요. 그러니까 전 괜찮을 거예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거 때문에 괜히 유채님이 걱정하는 것, 저 싫어요.”
유채는 루프스의 행적이 두려워질 정도였다. 제가 바실리사에게 부탁한 것이 있으니 그녀는 루프스가 블루벨을 데려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루프스는 블루벨을 데려오기 위해 블루벨을 직접 설득한다는 영악한 작전을 폈다. 유채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는 블루벨을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순진한 블루벨을 돈으로 유혹해서 저를 압박하려는 목적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또 자신 때문에 블루벨이 위험에 처한 것이다. 유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찬에 참여할 준비를 도울 궁녀가 들어왔다. 블루벨은 그 사이에 케릭스를 만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고 막사를 나갔다.
머리를 만지는 것 외에 별다른 치장은 없었다. 궁녀는 유채의 머리카락의 반은 틀어 올리고 나머지 반은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틀어 올린 머리는 비녀와 비슷한 머리 장식으로 정리했다.
“준비는 다 끝났나?”
루프스가 막사 입구의 천을 젖히며 들어왔다. 궁녀는 유채의 입술에 붉은 연지를 발라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다가갔다.
“아름답군. 꽃 한 송이가 내 앞에 피어 있는 것 같다.”
루프스는 유채의 기분을 띄워주려고 생전 해본 적 없는 아부를 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로 유채는 얼굴을 찡그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름이 꽃에서 딴 거라는 말을 들은 후부턴 언제나 꽃을 미사여구로 활용해서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표정을 보고 헛기침을 했다. 그는 손에 든 베일의 주름을 괜히 한 번 더 폈다.
“잠깐만 기다려라.”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베일로 가렸다. 헥터 같은 놈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니 꽁꽁 싸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루프스는 유채를 제 품에 안고 수장들과 그들의 반려나 반려 대리들이 모여 있는 막사로 갔다. 간단한 사교의 자리인지라 술과 안주들이 탁자에 놓여 있었다. 유채와 루프스가 등장하자 안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둘은 상석에 앉았고 루프스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유채를 위해 다른 과일 음료를 가져다주거나 유채가 먹을 만한 향신료가 비교적 덜 들어간 음식을 권했다.
“한데, 말입니다. 루프스님.”
헤르티아가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자리에서 모자나 베일을 쓰는 일은 예의 없는 짓이 아닌가요? 그런데, 감히 펠릭스 다우스 따위가 무례하게 굴고 있는 것을 저희가 그냥 넘겨야 합니까?”
유채에게 고기꼬치를 밀어주던 루프스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헤르티아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에 치를 떨었다. 매번 이런 자리에 나올 때마다 굴욕을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이놈의 수인들은.
“그대는 배려심도 없는가? 레티티아는 그간 겪은 일로 겁이 많아져 그러니 그 입 다물어라.”
“겁이 많다는 분이 참으로 대범하게 루프스님의 어깨를 찌르고 도망갔습니다. 하물며, 제가 겪은 고난은 모두 본인이 자초한 것인데, 그것까지 배려해 주시다니 루프스님답지 않으십니다. 그리도 수인들에게는 잔혹하신 분이 저딴 마레 위르를 위해서는 이리도 자상해지십니까?”
수인들은 루프스와 헤르티아의 신경전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어떤 이들은 이 신경전으로 여우 일족의 세를 가늠하려 했고 어떤 이들은 루프스가 앞으로 마레 위르를 대할 정책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의를 집중했다.
잠깐의 설전이 오가고 루프스가 유채에게 말했다.
“레티티아, 막사로 돌아가라. 몸도 좋지 않은 너를 괜히 이들에게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불러냈군. 돌아가서 쉬어라.”
유채는 드디어 바늘방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멈춰라.”
헤르티아가 유채에게 차가운 어조로 명령했다.
“감히 천한 마레 위르가 어디서 먼저 자리를 뜨려 하느냐. 천한 노예에 불과한…….”
“헤르티아!”
루프스가 탁자를 내리쳤다.
그리고 헤르티아의 볼을 스치고 지나간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루프스가 던진 것이었다.
“입 닥쳐라. 죽고 싶지 않으면.”
루프스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헤르티아가 이러는 의도는 분명했다. 오늘 모인 군소 일족들의 태반은 마레 위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만일 제가 여기에서 유채를 싸고도는 모습을 보인다면 군소 일족 중 배짱이 좋은 몇몇은 헤르티아에게 붙을 것이었다. 헤르티아가 저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니 만일 제가 마레 위르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그녀를 통해서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더 나아가 지난번 그 살쾡이 놈들처럼 유채를 제거함으로써 위험분자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어 그녀가 위험에 빠지게 될 수도 있었다. 유채가 오페라티오에 참여하는 조건에는 이 만찬에 참여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나왔건만, 헤르티아가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얼굴만 보여드리면, 이곳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유채가 차분한 목소리로 헤르티아에게 물었다.
“그것을 어찌 네가 결정하느냐? 네가 그렇게 대단한 이라도 되느냐? 그저 루프스의 소유물에 불과할 것이.”
“레티티아, 나가라.”
“거기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괜한 감정싸움이 나중에 큰 전쟁으로 번지는 것을 역사책에서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헤르티아와 루프스의 사이는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는 중에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조각을 찾는 게 더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되도록 둘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 유채는 허리를 굽혔다.
“천한 펠릭스 다우스가 이런 소란을 일으켜서 사죄드립니다. 무식하고 천한 펠릭스 다우스라 예의를 몰랐습니다.”
“레티티아!”
루프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채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베일을 벗었다. 좀 전에 한 굴종적인 말과 달리 유채의 표정은 한없이 당당했다. 수장들은 유채의 미모에 놀라는 한편 그 당당한 태도에 다시 한 번 더 크게 놀랐다.
“예의를 지키지 못한 점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가 언제…….”
헤르티아의 말을 유채가 끊었다.
“제 주인은 루프스님이십니다. 제가 제 주인도 아닌 울페스님의 말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베일을 벗은 예의가 어긋남을 알았기 때문이지 울페스님의 명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제게 명령을 내릴 수 있으신 분은 저의 주인이신 루프스님뿐입니다.”
“풉.”
어디선가 비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헤르티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유채는 제 알바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막사를 나왔다. 언뜻 루프스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유채는 그것을 못 본 척하고 막사로 향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 보았던 스톤헨지로 착각했던 폐허가 된 신전이 있는 풍경이었다. 벌써 다섯 달이 흘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유채 양.”
유채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빅터님?”
“바실리사는 일이 있어 늦게 도착할 예정이라 내가 먼저 와서 그 아이의 대리로 있었지.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셨어요?”
“간만에 궁에 돌아가서 편히 지냈다. 소식은 들었다. 루프스가 너를 찾은 것이 나 때문인 듯하여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어요. 그 정도로 충분해요.”
빅터는 배웅해 주겠다고 하며 유채가 머무르는 천막으로 가는 길에 동행하여 주었다. 유채가 어떻게 거기에서 나올 수 있었느냐고 묻자 빅터는 나이 많음의 이점을 이용했다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현명하게 대처했더구나. 루프스의 권위를 세워주면서 동시에 헤르티아가 얼마나 옹졸한 이인지를 잘 보여주었어.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대처였다. 헤르티아는 그것으로 트집을 잡을 수도 없을 것이고, 마레 위르를 싫어하는 수인들에게는 네가 아직도 루프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루프스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었지.”
“전 그냥 그 자리가 싫어서 빨리 나오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런 거창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빅터는 유채의 모습에서 블랑카를 겹쳐 보았다.
“너는 블랑카와 많이 닮았구나.”
“전에 하셨던 말이잖아요.”
“너는 올곧고 당당하며 네 신념을 지키려고 하지. 네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아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루프스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게다.”
그리고 그만큼 불안해할 것이다. 저렇게 홀로 빛나는 이이니, 언젠가 제 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이렇게 싸고도는 것이었다. 빅터는 자유롭게 나는 새를 동경하는 루프스가 결국 그 새를 잡기 위해서 날개를 꺾어버릴까 봐 걱정했다.
“들어가서 쉬어라.”
유채는 빅터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막사로 들어가서 머리를 풀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려왔다. 유채가 돌아온 것을 안 궁녀가 적절하게 세숫물과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들어왔다. 유채는 궁녀의 도움을 받아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에클레시아에서 제를 올리는 삼 일간 이런 종류의 만찬이 계속 있다고 하였다. 반려들까지 참여하는 것은 첫째 날뿐이고 나머지는 수장들만의 모임이라고 했으니 그때만이 루프스를 피해 에클레시아에 들어갈 수 있는 때였다. 유채는 손등에 새겨진 권능을 바라보았다.
“아끼다 똥 된다고 했어.”
일단 마지막으로 리와인더의 조각이 목격되었던 자리를 살펴봐야 했다. 오페라티오는 무너진 신전 안이 아닌 근처의 야외 제단에서 한다고 하였다. 유채는 내일 제를 지내며 신전의 입구를 확인해 놓고 루프스가 만찬에 참여고 있는 동안 그곳으로 이동해 내부를 조사하기로 하였다.
적당한 시간이 되면 다시 막사로 돌아오고 그다음 날에 다시 이어서 내부를 탐험하면 되는 것이다. 유채는 만찬이 끝나고 루프스가 막사로 돌아오는 시간을 재었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아야 루프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레티티아!”
루프스가 막사의 천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루프스는 다짜고짜 유채의 어깨를 붙잡고 외쳤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베일을 벗은 거냐! 또 헥터 같은 놈들에게 걸려서 위험에 처하고 싶은 거냐?”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감싸고 경고조로 말을 했다.
“그놈들이 얼마나 위험한 놈들인 줄 아나?”
“있잖아요, 나는 당신이 더 무서워요.”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쳐 내었다. 블루벨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에 유채는 그에 대한 분노로 이미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뭐?”
“당신이 나를 그놈들에게서 지켜준다면서. 그런데 내가 왜 그놈들을 무서워해야 해요?”
루프스는 유채의 차가운 표정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당장이라도 유채의 입을 막고 싶었다. 그의 직감은 유채가 또 다시 상처가 될 말을 쏟아낼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당신한테서 날 어떻게 지켜요? 말해봐요. 당신이 이곳에서 가장 강한데, 누가 나를 당신한테서 지켜주죠? 당신이 조금만 힘을 주어도 내 목은 가볍게 꺾일 거고, 아무리 애를 써도 당신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나는 당신한테서 어떻게 나를 지켜요.”
“내가 너를 왜 해할 것이라 생각하나. 지켜준다고 했지 않았나.”
“말했잖아요. 나에게는 헥터나 당신이나 똑같다고.”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상해를 제외하고도 루프스는 강제로 입을 맞췄고 강압적으로 끌어안고 가두어두었다.
“내 세상에선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키스하면 죄가 되고, 사람을 가두어놓는 것도 죄가 되요. 당신 세상에서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유채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그를 보았다. 눈물에 일그러져 보이는 루프스의 얼굴이 마치 울고 싶은 사람처럼 구겨져 있었다.
“난 당신이 카를리티오 때처럼 돌변해서 나를 찍어 누를까 무섭고, 언제 다시 블루벨을 해치겠다고 협박할지 몰라서 무섭고, 당신이 역겨워요.”
역겨워요.
루프스는 끝이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역겹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진심이었다. 다정하게 대해주면 조금이라도 자신을 좋게 생각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자신이 제일 무섭고 역겹다는 데에 루프스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
루프스는 낮게 중얼거리면서 유채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유채는 고개를 돌렸다. 명백한 거부였다. 루프스는 이보다 더한 나락으로도 추락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어떤 배려와 호의도 그녀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건방지게 굴어서 당신 신경에 거스른 건 미안해요. 내일은 원래대로 펠릭스 다우스 노릇 해줄 테니까. 오늘은 피곤해요. 졸려요. 자고 싶어요.”
“……그래, 쉬어라.”
루프스는 목이 메어 울컥하는 것을 억누르고 애써 멀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당연하게 받아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고 감히 그녀의 사랑을 바란 것도 아니었건만.
이런 거부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루프스는 두터운 담요 위에 누워서 새근새근 잠든 유채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저에 대한 경계심이 짙은지 제가 자는 척을 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제야 잠이 들었다. 루프스는 등이 배길 것이 걱정이 되어서 그녀를 안아 침대로 데려왔다. 제 팔을 베개로 내어주고 그는 몸을 돌려서 유채를 바라보았다.
딸각 소리와 함께 파렌티아가 풀렸다. 루프스는 파렌티아를 걷어내고 그녀의 매끈한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유채.”
그의 입술에서 자연스러운 발음으로 유채의 이름이 나왔다. 수없이 연습했던 이름이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온전한 발음으로 이름을 불러주기 위해서. 그는 유채를 끌어안고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두근두근,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다.
“유채. 한유채.”
루프스는 마치 아이처럼 유채의 이름만 불렀다. 그녀가 깨어 있을 때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으로 부르면 그녀를 영영 보내게 될 것 같아서, 그녀가 영영 떠나 버릴 것 같아서, 그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아서 도저히 불러줄 수 없었다.
“나는 무서워, 유채.”
파렌티아를 풀어주면 유채는 저를 용서하지는 못하더라도 사과는 받아들여 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파렌티아를 풀어줄 수 없었다. 그것마저 없으면 그녀가 그의 곁을 훌훌 떠나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네가 떠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루프스는 유채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이 온기를 놓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유채의 세상으로 따라가는 방법이 있다면 그는 루프스의 자리를 내어놓고 그녀를 따라갈 것이다. 유채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 무엇도 필요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유채뿐이었다.
“너는 착하고 친절하니까…….”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염치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소망이었다.
“나를 한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되는가?”
루프스는 유채의 작은 손을 부여잡고 애원조로 말했다.
“내가 잘하겠다. 평생 그때의 일로 미안해하며 살겠다. 너를 이곳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
목에서 애끓는 울음이 올라왔다. 그의 눈물이 유채의 손을 적셨다.
“그러니 한 번만 기회를 줄 수는 없나?”
루프스는 눈물을 흘리며 유채의 귓가의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며 애원했다.
* * *
오페라티오의 첫째 날이 지났다. 루프스는 제 손목에 매여 있던 리본의 감촉과 유채를 떠올렸다.
그는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잠시 풀었던 파렌티아는 아침에 유채가 깨어나기 전에 다시 채워놓았다. 제 팔을 베고 누운 유채를 바라보며 진실로 자신의 부인이 된 유채를 상상했다. 그 상상은 제를 올리기 위해서 리본의 한쪽 끝을 제 왼손에, 다른 끝을 유채의 오른손을 매는 것을 보면서 더 대담해졌다. 끈으로 서로의 손목을 연결하는 것은 부부의 상징이었다.
오페라티오는 부부가 한 쌍으로 올리는 제이기에 서로의 손목을 끈으로 연결했다. 유채는 혼례복으로도 쓰는 하얀색 예복을 입고 제 옆에 서 있었다. 루프스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와 제가 혼례를 올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수인들의 혼례는 남편의 오른 손목과 부인의 왼 손목을 끈으로 연결하고 남은 손목도 똑같은 방법으로 연결해서 지내었다. 서로가 이어진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손목을 묶은 채로 신방에 들어가 혼례주를 서로에게 먹여주고 남편이 아내의 왼손에 묶인 끝을 풀고 부인이 남편의 왼손에 묶인 끈을 풀면 혼례는 끝이 났다.
루프스는 저와 끈 하나에 묶인 채 수줍게 웃을 유채를 상상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결코 일어날 수 없을 일이었다. 저를 역겹다고 생각하는 유채가 그렇게 웃어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루프스는 제를 지내는 동안 그런 상상만 계속하다가 바보 같은 실수도 저질렀다. 저 고운 이가 정말로 제 부인이기를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오르게 행복하면서 한없이 슬퍼졌다.
“젠장.”
루프스는 만찬장으로 향하다 말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유채의 역겹다는 한마디 말이 그를 이렇게 비참하고 초라한 수컷으로 만들었다. 루프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어.”
루프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너진 에클레시아 입구에 있어서는 안 될 이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유채가 있는 천막은 개미새끼 한 마리 드나들 수 없도록 감시를 세워두었다. 한데, 어떻게 유채가 저기 있는 것이란 말인가? 루프스는 초조해졌다. 에클레시아로 들어가면 유채가 제 품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건 안 된다. 그것만은 안 된다.
“루프스님. 이러시다가 늦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넋 놓고 살더니 오늘은 갑자기 덥수룩한 수염을 밀어버리고 다시 말끔해진 케릭스가 루프스의 팔을 잡았다. 루프스는 케릭스의 팔을 떨쳐 내고 다급하게 외쳤다.
“난 지금부터 아픈 거다. 네가 대신 참여해라.”
“예? 그게 무슨…….”
루프스는 케릭스의 대답을 듣지 않고 유채가 들어가 버린 신전 입구 쪽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늑대로 변하면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음에도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는 효율적인 생각을 못했다. 루프스는 빠르게 달려서 어두운 신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 유채가 보였다. 루프스는 당장에 뛰어가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유채는 갑자기 저를 끌어안는 손길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루프스?”
“누가 너보고, 헉…… 여기에, 헉……. 들어오라고, 했지. 헉헉.”
루프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루프스는 토끼처럼 놀란 눈을 한 유채의 손목을 힘을 주어서 당겼다. 유채는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당장 나와!”
“싫어요! 나는……!”
쾅. 콰콰쾅.
유채의 말을 웬 굉음이 삼켰다. 약간의 달빛이라도 있어 그나마 밝았던 곳이 순식간에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루프스가 유채의 손목을 끌어당겨서 제 품에 끌어안았다. 완전한 암흑이 둘을 감싸 안았다.
입구가 닫혔다.
“어! 이게 뭐야!”
유채는 놀라서 버둥거렸다. 루프스는 움직이지 말라고 말한 뒤 그녀를 데리고 무너진 에클레시아의 벽을 더듬으면서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늑대 수인들은 밤눈이 좋은 편이라 루프스는 앞을 볼 수 있었다. 웬 거대한 돌이 입구를 막아버렸다. 힘으로 통할 문제가 아니었다.
“갇혔군.”
유채는 어둠속에 갇힌 채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에 몸을 떨었다. 셀레네가 준 권능의 힘이 있으니 다시 이용해서 나갈 수도 있지만, 그럼 루프스에게 이 힘을 들킬 게 분명했다. 게임에서 모든 패를 내어 보이는 것은 패전으로의 지름길이었다. 유채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머리를 잡아 뜯었다. 어둠 속에서 루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법으로 이 주위에 빛을 밝힐 수 있나?”
“예?”
“마법을 배우지 않았나? 야광주처럼 빛을 낼 수 있는 마법이 있을 텐데?”
유채는 아. 하는 짤막한 감탄사를 뱉고 프란체가 가르쳐 주었던 마법을 되짚었다. 마력 흐름 조절을 연습했던 것을 떠올렸다. 빛의 밝기를 조절하는 마법이었다. 유채는 작은 공의 모양의 생각하며 주문을 읊었다.
“Lumen Ianthis. Recurro.”
유채의 손에서 조그마한 빛의 구가 생겼다. 빛의 구는 마치 전구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강한 빛으로 주변을 밝혔다. 유채는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찌푸렸고 루프스는 금세 거기에 적응을 하고 유채의 손을 잡아 에클레시아의 안쪽으로 이끌었다.
“반대쪽에 출구가 있다. 걸어서 신전을 통과하면 돼.”
“여기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요?”
유채가 겁을 먹고 움직이지 않으려 하자 루프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그토록 원하는 이니투스에 대한 자료들 중엔 이 신전에 대한 것도 있고 나는 어릴 적에 이곳에 들어와 본 적이 있다. 뭐, 들어온 곳으로 다시 나왔었지만.”
“그럼 나가는 길을 알아요?”
“중앙에 있는 석실을 통과하면 빠르지만 그곳은 함정이 많아 통과하기 힘들다. 함정을 피하려면 신관장의 목걸이가 필요한데, 지금 그게 없으니까 돌아가야지.”
동굴처럼 어두운 길을 루프스가 앞장서서 걸었다. 어느 순간 길이 끊기고 아래쪽으로 커다랗게 뚫린 공간이 나왔다. 루프스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나 살펴보았다. 비교적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길게 늘어진 치마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기에 좀 위험해 보였다.
“꺄악!”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잡고 제 어깨에 들쳐 멨다. 유채는 놀라서 발과 주먹을 움직여 루프스를 때렸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계단이 가파르니까 가만히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루프스의 경고에 유채는 몸부림을 멈췄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단단히 고정하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에클레시아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는데 지반이 흔들리면서 신전이 땅 아래로 꺼진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신전과 이어진 계단은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 무너져 여전히 아래로 꺼진 신전과 연결 통로가 되어주었다.
루프스는 땀을 뻘뻘 흘렸다. 유채가 가볍다고는 해도 아예 무게가 없는 건 아닌지라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럽게 딛는 동시에 그녀의 안전까지 확보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아야 했다. 세월이 오래 되어 군데군데 부서진 곳도 있어 잘못하면 떨어질 수도 있었다. 바닥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루프스는 거리를 가늠해 보더니 곧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윽.”
유채를 우선하다 보니 착지를 잘못해서 발목에 충격이 갔다. 루프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유채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려줘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루프스가 내려주자 유채는 혹시 몰라서 메고 온 작은 가방에서 물을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땀을 닦던 루프스는 물을 마시고 다시 유채에게 주었다.
“고마워요.”
“고마우면 약속이나 지키든지. 내가 분명히 막사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루프스는 시선을 피하는 유채의 턱을 잡아서 들어올렸다.
“도대체 여긴 왜 온 것인가? 이니투스의 자료보다 중요한 것이 이 위험한 곳에 있나?”
“그냥 왔어요. 내가 이런 고대 유적지를 좋아해서요.”
셀레네가 혹여 여기로 오라고 했을까? 아니면 찾는 물건이 이곳에 있을까? 루프스는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유채가 제게 입술까지 내어주려고 하면서 찾으려고 한 것이 이니투스의 자료였다. 그런데 그것도 제쳐 두고, 제게 들킬지도 모르는데 이곳까지 왔다. 분명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그리고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지? 분명히 개미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을 텐데?”
“막사 뒤편의 천을 들추고 나왔어요.”
유채는 대강 둘러대었다. 하지만 루프스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그렇게 허술한 방법으로 막사를 나오는데 들키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애초에 막사의 천이 쉽게 들춰지는 것도 아니었다. 유채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루프스의 눈에 유채의 손등 위 문양의 형태가 바뀐 것이 보였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의 예상대로 저 문양이 셀레네 여신과 관련 있는 것이다. 루프스는 눈을 감았다. 지금 이것을 걸고 넘어가면 유채는 제게 더 많은 것을 숨기려들 것이었다. 유채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지금은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넘겨야 했다.
“그래? 그럼 널 감시하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한 병사들에게 벌을 내려야겠군. 태형이면 되려나?”
“왜 그 사람들을 해치려고 그래요? 잘못한 것은 나예요!”
유채는 자신 때문에 애먼 사람이 다칠 것이 걱정되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감싸 쥐고 그녀의 턱을 들어서 저와 시선을 맞추게 하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다시 묻지. 여기에 온 이유가 뭐야?”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에 자신이 없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거짓을 말하지 못할 바에는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된다.
“돌아갈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요. 신녀나 신관들이 기거했던 곳이니까, 신의 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꽉 쥐었다. 그동안 유채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하여 아는 것과 그녀에게 직접 듣는 것은 기분이 사뭇 달랐다. 결연한 유채의 얼굴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떠날 것이라는 각오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루프스는 파렌티아를 잡아당겼다. 유채는 뒷목이 압박당해 약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루프스 쪽으로 끌려갔다. 루프스는 파렌티아에 입을 맞추고 유채에게 물었다.
“네 주인은 누구지?”
“……빌어먹을 당신이지요.”
“네가 역겹다고 생각하는 나이지.”
루프스는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유채를 잡아두기 위해서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면, 원망을 듣더라도 어쩔 수 없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모든 불안감이 사라졌다. 그래, 아직 이 작고 따뜻한 몸은 아직 제 곁에 있었다.
“그러니 가지 마라. 내가 허락하지 않아.”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쓰다듬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그녀를 바라보면서 루프스는 입을 열었다.
“네가 약속을 어겼으니 이니투스에 대한 자료는 주지 않겠다. 내 명을 어긴 벌은 찬찬히 생각해 볼 테니. 일단 여기나 벗어나자.”
“마음대로 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여기서 주저앉을 것 같아서 유채는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다. 점점 언니에게 빨리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고 루프스를 원망스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일렁이는 눈을 애써 무시했다. 유채가 저런 눈을 지으면 그의 가슴이 아팠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깍지를 껴서 잡았다. 크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 작고 부드러운 손을 감싸 쥐었다.
“에클레시아는 신물을 지키기 위해서 세워진 신전인지라 원래부터 함정이 많다. 고위 신관이나 신녀들 아니면 그들의 허락을 받은 수장들이 아니라면 들어왔다 죽어서 나갈 수 있는 곳이지.”
유채는 불현 듯 몸을 떨었다. 책에는 그런 말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루프스가 토끼처럼 긴장하고 있는 유채의 몸을 확 끌어당겼다.
“걱정 마라. 이니투스가 이 신전의 설계에 관여했기 때문에 토스 호무스에는 이곳의 자료가 남아 있는 편이다. 안다고 해서 다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는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어릴 적에 내가 몇 가지 함정은 없애기도 했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에리카가 함정을 밟은 적이 있다. 화살과 단도가 날아왔었지. 그건 모두 부쉈었다.”
루프스는 증거라도 보여준다는 듯이 유채에게 팔뚝에 남아 있는 희미한 상처를 보여주었다.
“더 이상 여길 관리하는 신관이나 신녀도 없으니 함정이 복구될 일도 없을 것이고 그때 그 흔적만 따라서 지나가면 쉽게 갈 수 있다.”
“에리카가 살아 있을 때면 십사년도 전의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넌 나를 너무 무식하게 보는군.”
루프스가 유채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시간의 호수에 간 너를 내가 어떻게 찾았을 것이라 생각하나?”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여서 이마를 붙였다.
“의심 가는 몇 곳을 추려서 그곳에 대한 보고를 받고 네가 있을 위치를 찾아낸 것이지.”
유채는 시선을 약간 들었다. 그는 앞뒤 생각 안 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에 비해서 머리가 좋았다. 루프스는 유채와 시선을 맞추면서 말했다.
“그러니 나만 믿고 내가 딛는 곳을 잘 보고 따라와. 그러면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걸었다. 유채가 마법으로 만들어낸 빛에 의해 훤히 보이는 내부는 거대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동굴 같았다. 신전이 아래로 꺼지면서 옆으로 기울어진 것인지 유채가 밟는 것은 때로는 벽이었고 천장이었고 아주 가끔은 바닥이었다. 루프스는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서 걸음을 옮겼고 간혹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곳이면 유채를 멀찌감치 두고 먼저 지나가 보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제대로 제 뒤를 밟고 있는지 확인하랴 함정의 위치를 기억하랴 정신없이 걸었다.
중요한 함정을 하나 피하고 루프스는 힐끔 유채를 돌아보았다.
“잠깐!”
루프스가 크게 소리쳤다. 저는 밟지 않을 수 있어서 가볍게 지나친 함정을 유채가 밟은 것이었다. 루프스는 얼른 달려가서 유채를 벽으로 밀치고 제 몸으로 감싸 안았다. 등에 꽂힐 고통을 기다리는데 일초, 이초, 삼초…… 십초가 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루프스는 슬며시 눈을 뜨곤 헛기침을 하면서 몸을 뒤로 뺐다.
“뭐, 그 좋은 기억력도 때로는 오류가 날 수도 있는 거죠. 그렇죠?”
유채가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루프스는 겸연쩍은 듯 애꿎은 바닥만 발로 굴렀다.
끼익. 휙.
뭔가가 열리는 소리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루프스는 다시 유채를 뒤로 넘어뜨리면서 그녀의 위를 제 몸으로 덮었다. 날카로운 것이 등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에 장검이 깊게 박혔다.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루프스와 유채 모두 치명상을 입었을 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저기…… 비켜주면 안 되나요?”
“아! 미안하다.”
루프스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몸을 움직이자 잊고 있던 고통이 느껴져 눈을 찡그렸다. 등을 베인 것 같았다. 유채는 넘어지며 부딪친 등과 뒷머리가 아파서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쓸었다.
“함정에 무게를 따라서 작동하는 기능이라도 있어요? 그리고 운이 좋아서 작동 안 한 것일 수도 있는 걸 왜 건드려서 일을 크게 만들어요?”
“그런 기능은 없다. 그런 걸 만들 기술이 그 당시에는 없었을 테니까. 미안하다. 네 말대로 내가 일을 크게 만든 것 같다.”
루프스는 등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다행히 스친 것 같았지만,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어도 여전히 날이 날카로웠는지 손끝에 꽤 많은 피가 묻어났다. 루프스는 제 상처는 뒤로하고 눈을 찌푸리고 뒤통수를 매만지는 유채를 보았다. 머리가 울린다고 투덜대는 그녀가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일으켜 세웠다.
“목에 걸린 그 이상한 목걸이는 무엇인가?”
“빅터님이 주신 거예요.”
“그때 만나서 받은 건가.”
“알면서 왜 물어요?”
유채는 고개를 숙여 빅터가 준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오라클라 리네아가 선대 오라클라의 힘이 담겨 있다는 말을 해서 혹시나 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유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신관장의 목걸이가 있으면……,’】
“저, 혹시 에클레시아의 마지막 신관이 개 수인이었나요?”
“마지막 신관장이 개 수인이었다. 원래 신관이나 신녀는 고양이 수인들이 많이 되는데, 이례적이었지.”
잘 생각해보면 루프스도 에클레시아에 있는 리와인더의 조각을 몰랐다. 그리고 웬만한 수인들 모두 리와인더의 조각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저 민담 속에서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취급을 하였다. 아마 이니투스는 그것의 위험성을 알았고 철저하게 존재를 감추었을 것이었다. 존재를 아는 것은 소수, 직접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신관장 정도의 인물이나 신과 가까운 존재의 인물들 정도일지 몰랐다.
‘수인들의 동물형은 그저 외피에 불과합니다.’
신관장이 개 수인이라고 해도 그의 조상 중 하나는 고양이 수인이었을 수도 있었다. 만약 신관장이 리와인더의 조각에 홀려 그것을 훔쳐내고 숨겼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유채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움켜쥐고 루프스에게 물었다.
“혹시 그쪽이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땐 함정들이 모두 작동하던가요?”
“내부의 것들은 그랬지. 외부의 것들은 이미 작동한 적이 있어서 기능을 못하는 것들이 종종 있었지만.”
만약 유채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마지막 신관장의 목걸이라면, 신관장이 좋지 않은 심보를 품고 목걸이를 이용해서 리와인더의 조각을 가지고 나왔을 수 있었다. 신관장은 분명히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다른 소원을 빌기 위해서 어딘가에 리와인더의 조각을 감추어둘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디에 숨겼을까? 에클레시아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제게 가장 익숙한 곳에 숨기지 않았을까?
‘제가 고양이의 외피를 지녔고 저주를 대신 받아내서인지, 악기가 저와 같은 외피를 지닌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에 따라 그들은 모두 고양이로 변이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고양이 일족의 땅…….”
“뭐?”
루프스는 맥락을 알 수 없는 유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라클라 리네아의 이모는 개 수인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 목걸이가 가문 대대로 전해졌다면 어쩌면 그 개 수인은 제 선조의 고향인 고양이 일족의 땅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에클레시아와 가장 가까운 곳은 고양이 수인의 땅이었다. 그럼 고양이 일족의 멸족의 이유가 설명이 되었다. 리와인더의 조각이 펠레스 호무스에 사는 수인들의 동물화를 가속화 시켰고 결국 그 악기에 의해서 고양이 일족이 멸족된 것이었다. 뭔가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갔다. 리네아도 고양이 수인 일족이 멸족한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그저 추측만 했다. 고양이 일족의 땅에 리와인더의 조각이 있다는 것을 리네아는 모르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일어나라. 빨리 나가야지.”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유채는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은 모두 추측이었다. 이 목걸이가 정말 신관장의 목걸이일지 아니면 정말로 운이 좋아 함정이 발동하지 않은 것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끼익.
“꺄악!”
“레티티아!”
바닥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유채가 딛고 있던 바닥이 훅하고 껴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에 놀라서 팔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채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꺼진 바닥 아래에는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유채는 아찔한 기분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팔에 힘을 주었다. 반쯤 끌어 올렸을 때,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유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바닥이 꺼진 여파인지, 루프스가 엎드린 바닥에 균열이 생기더니 금세 아래로 훅 꺼졌다. 유채와 루프스는 아래로 추락해 그대로 급류에 휩쓸렸다. 루프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유채의 손을 붙잡았다. 둘은 곧 소용돌이에 휘말려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한 유채가 숨을 쉬지 못해 겁에 질리자 루프스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어 제 숨을 나누어주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넘겨주는 공기를 넘겨받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루프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살이 세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위험했다. 이렇게 물이 흐른다는 것은 어딘가에 출구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면서 헤엄쳤고 유채는 물속에서 간신히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유채는 왼쪽 손등에 남아 있는 권능을 살폈다. 지금은 능력이 들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생사가 걸린 일이었다. 유채가 공간을 찢기 위해서 손을 흔들려고 하는 때였다.
“읍!”
루프스가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유채는 그의 품에 안겨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수면 위로 빛이 비치고 있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손목을 잡고 헤엄쳤다. 유채는 제 모든 힘을 짜내어서 그를 쫓아갔다.
“푸핫.”
“푸핫.”
둘은 거의 동시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안고 헤엄쳤다. 평평한 대리석 바닥이 보이자 루프스는 유채를 먼저 물 밖으로 밀어준 다음 그도 대리석 위로 올라갔다. 이곳은 벽에 붙은 야광주가 아직 빛나고 있어서 주위가 환했다.
루프스는 머리의 물기를 털면서 저처럼 머리카락을 짜고 있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얇은 하얀색의 잠옷 차림이었는데 그게 물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 것도 모자라 치마가 말려 올라가 하얗고 가는 맨다리를 그대로 보였다.
순간 그는 긴장했다. 그 역시 건장한 수컷이었다. 더욱이 유채는 그가 사랑하는 암컷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매일 유혹당하는 듯한 기분인데 밀폐된 공간이서 이렇게 단둘이, 그것도 저런 차림이 된 유채를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 계속 달라붙어.”
유채가 달라붙는 옷이 귀찮은지 가슴 부근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 틈으로 뽀얀 살이 보이자 루프스는 귀까지 새빨개졌다. 동시에 설마 프레드릭이나 알렉스 놈들에게도 저런 모습을 보였던 게 아닌가 하는 질투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또 저런 꼴을 하고서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게 자신을 수컷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인가 싶었다. 루프스는 다시 한 번 비참해졌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곤 겉옷을 벗었다. 젖은 것은 똑같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걸쳐야 속살이 보이지 않을 터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앞으로 가슴을 가리도록 상의를 둘러주고 말려 올라간 치마도 내려주었다.
“도대체 암컷이 돼서 이렇게 무방비하면 어떡하나.”
유채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유채가 저렇게 귀여운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라 루프스는 올라갈 것 같은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수컷으로서 예의는 지켰다.”
“예의라고요? 처음 만나자마자 내 셔츠를 뜯어 속옷 차림으로 망신을 당하게 만든 사람은 당신 아니었어요?”
“……미안하다.”
그는 정말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채에게 잘못한 일은 한도 끝도 없었고 하나씩 곱씹을 때마다 유채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아. 피나네.”
유채는 종아리에서 피가 나자 손으로 꾹 눌렀다. 왠지 따끔거린다 싶었더니만 그새 어딘가에 긁혔던 모양이었다.
그것을 본 루프스는 제 셔츠를 찢어서 유채의 종아리에 꼼꼼하게 감쌌다. 유채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때 루프스의 등이 길게 찢겨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주위로 분홍빛 물이 든 것까지 본 유채는 시선을 내렸다. 그가 제게 덮어준 겉옷도 똑같이 찢겨져 있었다.
‘아.’
아까 검이 날아왔을 때 자신을 감싸면서 입은 상처가 분명했다. 아프다는 내색도 안 해서 몰랐다. 저 정도면 고작 다리 긁힌 제 상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플 것이었다. 유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루프스는 고작 인사 한마디에 기뻐했다. 그는 유채 앞에서 바보처럼 실실 웃을 것만 같아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보는 척을 하면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여기는…… 아마…….”
“저기…… 당신 등도 돌아가면 의사에게 치료받아요, 상처 깊은 것 같은데.”
그 말에 루프스는 누가 봐도 어색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서는 유채를 돌아보았다. 저를 지옥으로 떨어뜨렸다가 다시 천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뿐일 것이었다. 그녀가 제 걱정을 해주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긴 어디예요?”
유채가 묻는 말에 루프스는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듯한 어조로 답했다.
“중앙 석실로 가는 통로 같군.”
“중앙 석실로 가는 통로요?”
루프스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중앙 석실로 갈 수 있는 안전한 길은 이거 하나인데. 운도 좋군.”
루프스는 신기한 듯이 주위를 둘러보는 유채의 손목을 잡고 제 옆구리 쪽으로 당겼다. 제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루프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긴 나도 잘 모른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잠시만 이렇게 있어.”
“함정의 위치는 거의 다 알고 있다면서요.”
“여긴 함정이 없어. 여기까지 오는 길 자체가 함정인데 이 안까지 함정을 만들어둘 이유가 없었겠지. 여기 어떤 신물(神物)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신관장 외에는 출입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몇 없었을 거다.”
유채는 루프스의 말에 자신이 세운 가설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럼 이제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일단 고양이 일족의 땅이 지금 이렇게 된 것이 리와인더 조각 때문이라면, 오랜 기간 그 땅에서 조각이 머무르다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을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다른 일족들이 고양이의 땅을 침범한 기록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이곳은 신전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고 가장 빠르게 나가는 길이 있는 곳이야. 물론 샛길이라 아직까지 온전할지는 나도 장담을 못 하겠다.”
“샛길이요?”
“유사시에 사용하라고 만들어놓은 샛길이 하나 있어. 원래 신전의 진짜 중앙 석실은 지하에 있어. 샛길도 지하에 있고. 온전할 확률이 있기는 한데 문제는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는 거지.”
루프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설계도를 본 적은 있지만 거기에 비밀 통로의 위치까지 나와 있는 것은 아니기에 아는 것이 없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감싸고 중앙 석실로 향했다. 언제 뭐가 나타날지 모르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까이에 붙으니 얇은 옷 너머로 몸의 굴곡이 그대로 느껴져서 루프스는 아차 하며 그녀를 조금 떨어뜨릴까 하였으나 유채가 약간 겁에 질린 채로 제게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루프스는 다신 오지 않을 기회인 것처럼 유채를 안고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충동을 꾹꾹 눌러 참았다.
“중앙 석실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요?”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기록으로도 셀레네 여신의 신물이었다는 것만 남아 있고.”
“형태는요?”
“그런 건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근데 그게 왜 궁금하지?”
“신물이라는데 궁금한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유채는 루프스의 시선을 피하면서 둘러대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찾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신전에 있었던 그 신물임을 눈치챘다. 그래서 이니투스의 자료를 찾고 이곳에 들어오려고 했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물건이 사라진 지가 오래되었고 관련하여 남아 있는 자료도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이니투스의 후손인 자신도 모르는 것인데 그 누가 알랴.
텅!
“엄마야!”
벽에 붙은 야광주가 제 기능을 다한 건지 비교적 어둑어둑한 곳을 지날 때였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지며 큰소리를 냈다. 유채는 겁을 먹고 루프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루프스는 제 허리를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은 유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녀는 강단 있는 성격인 것과 달리 겁이 많았다.
“별거 아니다. 제 기능을 다한 야광주가 떨어진 것뿐이니 무서워할 것 없다.”
유채는 그제야 슬며시 눈을 뜨곤 재빨리 루프스에게서 떨어졌다. 유채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나마 이곳이 어두워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유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섭다고 저 남자에게 들러붙어 안기다니,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유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표정을 갈무리 했다.
루프스는 바닥에 떨어진 야광주를 주워 유채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떨어진 것이다.”
“알겠어요.”
루프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유채의 볼을 손으로 잡고 늘였다. 유채는 얼른 그의 손을 쳐 내곤 더러운 것이 묻기라도 한 것인 양 그의 손이 닿은 곳을 벅벅 문질렀다.
“너도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그런 거 안 키워요.”
유채는 냉랭하게 대꾸하곤 루프스로부터 반걸음 정도 멀어졌다. 루프스는 멀어지는 유채의 손을 깍지를 껴서 꽉 잡았다. 그녀가 손을 빼려고 하자 야광주를 다시 가리키면서 말했다.
“또 놀라서 소리 지르고 싶지 않으면 꽉 붙잡고 따라와. 도대체 겨우 그런 소리에도 겁을 먹으면서 어떻게 여기에 혼자 들어올 생각을 한 건지.”
루프스는 힘을 주어서 유채의 몸을 당겼다. 유채는 휘청거리면서 그에게 끌려갔다.
슬슬 그 신물이 있다는 석실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의 예상대로 통로의 끝에 문이 없는 방이 보였다. 유채는 눈을 크게 떴다. 푸른색의 빛이 요요하게 새어나오는 그곳은 마치 박물관 전시실처럼 생긴 모습이었다. 중앙에 높은 단이 있고 그 위에는 벨벳 쿠션이 있었다. 그 쿠션 위에 상아로 세공된 아름다운 함이 있었다. 유채의 눈이 커다래졌다.
“상아함…….”
저게 바로 셀레네가 말한 그 상아함이었다. 유채는 마음이 급해져 얼른 그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나 루프스그녀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기다려라. 뭐가 있을지 모르니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
루프스는 유채를 등 뒤로 보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유채는 루프스의 뒤를 따랐다. 방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움직이지 말고 여기 있어라. 예전에 듣기로 이 근처에 에클레시아의 출입구와 연결되는 통로가 있으니 금방 찾아서 여기를 나가자.”
“알겠어요.”
유채는 연신 단 위의 상아함만 바라보았다. 저걸 가져야 한다. 여기에서 바로 상아함을 찾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조각을 훔쳐 나간 신관장은 조각은 숨길 수 있었겠지만 상아함까지 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것이 여기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유채는 루프스가 통로를 찾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다가 몰래 단상으로 향했다.
루프스는 예전에 설계도를 얼핏 보았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벽을 따라 걸었다. 분명히 통로는 이 석실의 서쪽 부근에 나있었다. 루프스는 종이 한 장 들어가지 않을 것같이 꼼꼼하게 붙어 있는 대리석 벽면을 손으로 쓸었다. 분명 여기 어딘가에 통로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통로를 찾을 수 있는지 정말 답답했다.
“윽.”
“레티티아!”
루프스는 유채의 신음소리에 뒤를 돌았다. 유채가 대리석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루프스는 다급하게 유채를 안고 그녀를 깨우기 위해서 가볍게 뺨을 건드렸다.
“레티티아! 레티티아! 윽.”
루프스는 팔꿈치에 느껴지는 따끔함에 뒤를 돌아보았다. 단상의 근처에 투명한 무언가가 그것을 보호하고 있었다. 팔꿈치가 닿았던 부분에 균열이 생겼었는데 곧 그 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결계?”
전격으로 이루어진 결계였다. 루프스는 이 결계를 만든 것이 이니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좀 조심할 것이지.”
루프스는 유채를 안아 올렸다. 주위를 둘러싼 결계가 보이지 않은 채로 단상은 그대로였다. 상아함과 벨벳 쿠션 역시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단지 상아함이 약간 틀어져 있었다. 상아함이 있는 곳과 벨벳쿠션이 움푹 파인 부분이 일치하지 않았다. 유채는 상아함을 가지고 나오려다가 주위에 쳐진 전기 결계에 의해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파렌티아에도 비슷한 기능이 있으나, 이것과는 종류가 달라 유채의 몸이 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안고 서쪽 벽으로 데려왔다. 얼른 나가는 문을 찾아야 했다. 루프스는 한 손으로 유채의 몸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벽을 짚었다.
끼이익. 갑자기 벽 한쪽이 거친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루프스는 벽과 열린 문을 번갈아 보았다. 여기는 분명 제가 여러 번 확인한 곳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열리고 안 열리고 할 리가 없었다. 루프스는 불현 듯 드는 생각에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유채의 목에 빅터가 주었다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설마 이 목걸이가…….
신관장의 목걸이는 신관장이 바뀔 때마다 바뀌었다. 일종의 열쇠 역할을 했기에 도난당했을 경우 새로운 신관장을 뽑아 목걸이를 바꾸어 도난당한 목걸이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남아 있는 신관장의 목걸이의 주요 기능은 함정을 무력화시키고 중앙 석실의 보안과 안전한 출입을 보장해 두는 것이었다.
만일 이 목걸이가 신관장의 목걸이라면 이상하게 여겼던 몇 가지 일들이 설명이 되었다. 유채가 밟았을 때는 작동하지 않은 함정이라든지, 중앙 석실로 통하는 통로에 오게 된 것이라든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던 숨겨진 통로가 열린 것까지. 루프스는 유채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툭 끊긴 목걸이를 루프스는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고쳐 안고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히고 야광주들이 빛을 내기 시작하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안고 달렸다. 길이 일직선으로 나 있었기 때문에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위급한 상황에 신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비밀통로였다. 빠르고 신속하게 이동해야 하니 길이 복잡할 이유가 없었다. 오래 달리지 않아서 출구가 나왔다.
루프스는 유채를 어깨에 들쳐 메고 사다리에 올랐다. 유채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흔들려 루프스는 한 팔로 유채의 몸을 감싸고 다른 한 팔로 제 몸과 유채의 몸무게를 지탱해야 했다. 루프스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문을 밀었다. 바깥 공기를 맡자 비로소 몸에 긴장이 풀리고 안심이 되었다.
루프스는 여전히 기절 상태인 유채의 이마를 만져보고 손목의 맥박을 재보기도 했다. 심장도 규칙적으로 뛰고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루프스는 비밀 통로의 문을 닫고 넓은 평원을 돌아보며 숨을 골랐다. 루프스는 빠른 발걸음으로 막사로 돌아갔다. “루프스님!”
막사 앞에 있던 케릭스가 루프스를 보고 외쳤다. 시답지도 않은 핑계를 대고 만찬에 참여하지 않은 루프스 때문에 당연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케릭스는 그 문제를 보고하기 위해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루프스의 품에 유채가 안겨 있는 것을 보고 또 그녀가 문제이구나 싶었다.
“뱀 수인 일족에게 가서 의사를 불러와. 내가 크게 사례하겠다고 하고.”
“알겠습니다.”
케릭스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답이 보이지 않던 블루벨과의 문제를 해결해 준 은인이었다. 그리고 블루벨이 가장 좋아하는 마레 위르이니 그녀가 잘못되면 블루벨은 분명히 슬퍼할 것이었다.
루프스가 유채를 안고 나타나자 막사를 지키던 경비병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분명 개미 새끼 한 마리 드나들 수 없게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마레 위르 암컷이 그와 함께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루프스님!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는 최선을…… 윽.”
루프스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경비병의 손등을 가볍게 밟았다.
“닥쳐라.”
루프스가 막사 안에 들어가자 경비병들은 겨우 일어났고 케릭스는 혀를 찬 후 뱀 수인 일족들의 막사 쪽으로 향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안은 채로 침대에 앉아서 그녀를 살폈다. 외관상으로 별 이상은 없어 보였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술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혹시 체온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품에서 내려놓질 않던 중에 케릭스가 불러온 뱀 수인 의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얼른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려서 보이지 않게 했다.
“저는 뱀 수인 일족의…….”
그는 제 실력을 뽐내서 루프스의 궁의로 들어갈 야망을 품고 있었다. 오르페가 곧 은퇴할 나이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오르페가 은퇴한다면 그 자리를 차지할 욕심에 뱀 수인은 저를 소개하려 목소리를 높였다. 루프스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네 일이나 해라.”
“예? 옛!”
중년의 뱀 수인은 허둥지둥 달려와 루프스의 품에 안겨 있는 암컷을 훔쳐보았다. 요즘 스티폴로르에서 가장 유명한 펠릭스 다우스였다. 하지만 저 마레 위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가 한둘이 아니기에 그는 호기심을 죽이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맥박과 체온을 재고 진료가 끝난 후 그는 고개를 숙이고 루프스에게 고했다.
“몸에 이상은 없습니다. 체온이 조금 떨어지셨으나 그리 위험한 수준은 아니고, 기력이 쇠한 것 같으니 영양을 충분히 공급해 주십시오.”
“아무 이상 없다, 그 말인가?”
“예. 루프스님.”
“그거 다행이군. 그럼 종아리의 상처도 좀 보아라. 긁힌 것뿐이지만 마레 위르가 좀 약해야 말이지. 덧나지 않게 치료하도록.”
루프스는 유채의 치마를 들추어 셔츠로 대충 묶어놓은 종아리를 보였다. 뱀 수인은 다리의 상처에 치유 마법을 썼다. 깊은 상처가 아닌지라 흔적도 없이 금세 나았다.
그 후 뱀 수인은 루프스의 등의 상처도 치료하고 막사를 나갔다. 그가 나가자 시중을 들러 궁녀 셋이 들어왔다. 루프스는 유채를 침대에 눕혀두고 옷시중을 받았다. 그 사이 궁녀 둘이 유채의 옷을 갈아입혀 놓았다.
궁녀들까지 모두 나가자 루프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유채를 내려다보았다.
“손이 야무지지 못한 아이들을 데려왔군.”
누워 있는 유채의 옷을 갈아입히기 힘들어 그랬는지, 아니면 귀찮아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채의 가슴 쪽이 꽉 여며지지 않은 상태였다. 루프스는 쯧, 혀를 차곤 직접 끈을 다시 매주었다.
“루프스님.”
케릭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프스는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놀라면서 얼른 손을 떼었다. 루프스는 겸연쩍은 듯이 헛기침을 하면서 막사 입구에 선 케릭스를 돌아보았다.
“이제 전쟁이 막 끝났습니다. 당분간은 분란은 없어야 합니다.”
“내가 만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또 그놈들이 무어라 떠들었나 보군.”
루프스는 유채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며 답을 주었다.
“떠들게 내버려 둬. 그런 것도 떠들지 못하게 하면 또 헥터 같은 놈들이 나올 테니.”
“하나, 그것이 언제 분란 세력으로 변할지 모릅니다.”
“헤르티아가 사사건건 나와 분쟁하려 드는데, 왜 헤르티아는 단테 이상의 거물은 포섭을 못 하는지 궁금해한 적 없나, 케릭스?”
“예? 그것은 저도 잘…….”
“그들은 헤르티아에게 동조하는 척을 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만 할 뿐이야. 그저 나에게 자기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은근히 시위하는 것뿐이지. 그놈들은 헤르티아에게 협력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에게 제일 중요한 건 안정이거든. 내가 이번에 발란테스 카르멘과 타우루스 헥터를 어떻게 부수는지 보았으니, 이것을 빌미로 내가 저들에게 간섭하는 것을 막고 싶어서 저럴 뿐이야.”
혼란을 막기 위해서 루프스는 미노르 호무스를 거의 통치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자치권에 예민한 수인들은 루프스가 미노르 호무스를 계기로 저들의 자치권마저 뺏을까 겁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케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린 그저 약간 눈치를 보는 척하며 저놈들이 안심하게 만들면 된다. 뭐라고 떠들든 반응하지 말고 우리 할 일만 하면 돼. 그럼 저놈들은 알아서 길 거야. 그러니 시답지 않은 걱정하지 말고 발 닦고 잠이나 자.”
루프스는 새삼 멀끔해진 그를 보고 물었다.
“그 토끼 꼬마가 다시 보자든?”
“예?”
“실연당한 수컷처럼 수염도 자르지 않고 생전 마시지 않던 술만 끼고 살더니, 토끼 꼬마가 용서해 주기라도 하던?”
“……개인적인 일입니다.”
루프스는 부끄러운 듯이 볼을 붉히는 케릭스를 보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고 제가 벌인 일은 제가 처리하겠다고 하고 케릭스를 내보냈다. 별거 없을 줄 알았던 오페라티오의 둘째 날이 아주 거하게 지나갔다.
루프스는 침대에 누워 유채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어제는 참 비참하기만 했었는데 오늘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저기…… 당신 등도 치료받아요, 상처 깊은 것 같은데.’】
루프스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유채 끌어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
루프스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다치면 걱정해 줘. 이렇게 내가 안을 수 있는 거리에 있어줘.”
그는 유채를 강압적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자상하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입술에 도둑처럼 입을 맞추었다. 유채의 입술은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가 돌았다. 그는 유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고 코끝을 맞췄다.
“사랑한다. 나를 사랑해 달라고 바라지는 않을 테니.”
루프스는 유채를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안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어제는 그렇게 우울했는데 유채가 걱정하는 말 한 번 해주었다고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이미 유채가 세계의 중심이었다.
“이렇게만 있어줘. 오늘처럼만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줘. 그렇게만 해준다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게.”
루프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유채의 몸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유채는 머리카락을 잡아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다시 머리를 정돈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궁녀들에게 시달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손톱만 깨물었다. 상아함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급하게 움직이다가 바보같이 전기 충격에 기절해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하지만 아예 수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상아함의 위치를 알았으니 나중에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으면 권능으로 다시 그곳으로 이동하면 될 터였다.
【‘이곳 시간을 기준으로 최대 육 개월 정도 남았단다. 네 언니에게도 이 스티폴로르에도.’】
유채는 기절해 있는 동안 셀레네를 만났다. 셀레네는 육 개월이라는 기한이 생겼다고 했다. 짧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길다고 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유채는 초조해져서 계속 손톱을 씹었다.
“레티티아.”
유채는 뒤를 돌아보았다. 루프스가 붉은색의 리본을 들고 서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유채의 표정이 구겨졌다. 오늘 아침에 저 남자의 품에서 눈을 떴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었다. 네 체온이 떨어져서 저체온증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해서 그런 거니, 너무 불쾌해하지는 말아라.”
루프스는 유채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에게 더한 원망을 들을 것 같았다.
“이불을 더 덮어준다는 생각은 안 했나요?”
“이불이 없었다. 그리고 손을 이리 내라. 이걸 묶어야 한다.”
유채는 루프스의 거짓말에 반신반의하면서 손목을 내밀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왼쪽 손목에 리본을 묶기 시작했다.
“옷이 망가져서 문제가 생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나 봐요.”
유채는 루프스가 어제 입었던 예복에 문제가 가서 난리가 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어제와 다른 예복을 입었고 유채도 어제 입었던 하얀색 예복이 아닌 붉은색 예복을 입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에 리본을 묶으며 대답했다.
“행사 시작일 기준으로 첫째 날 입는 옷은 혼례복이고, 두 번째 날과 세 번째 날에 입는 옷은 부부사이에 입는 예복이지. 지금 네가 입은 옷은 내 비(妃)만 입을 수 있는 옷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곱게 치장된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평생을 저 옷을 입고 제 곁에 있었으면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네 왼쪽 손목과 내 오른쪽 손목을 묶는 것은 부부임을 상징하는 것이고.”
리본을 다 묶은 루프스는 이번엔 제 오른손을 내밀었다. 유채는 그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며 리본을 묶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루프스가 조금 뜨겁다 싶은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리본이 묶이지 않은 손으로 유채의 뺨을 감쌌다.
“정말 예쁘군. 꽃이 마레 위르로 화한 것처럼. 영원히 꽃병에 두고 시들지 않게 돌봐주고 싶을 정도로 예뻐.”
루프스는 그녀를 영원히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을 우회적으로 털어놓았다. 유채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미친 거 아냐?’
유채는 이를 악물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괴롭힌 남자가 조금은 가여워 보였다. 스톡홀름 증후군이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그에게 몇 번 목숨을 구함받았다고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힘든 상황에 여러 번 처하니 그때마다 마치 동화 속 왕자님처럼 나타나 저를 구해준 저 남자에게 무의식적으로 기대려고 하는 것이다. 실상은 왕자님이 아니라 나쁜 용인데.
“난 꽃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멀쩡한 사람을 꽃병 속에 꽂아둘 수는 없죠.”
루프스는 다시 냉랭한 유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을 얻는 일은 아직도 멀고 험했다,
“가요. 지긋지긋한 당신 부인 노릇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
유채의 말이 다시 화살처럼 루프스의 가슴에 박혔다. 루프스는 유채의 왼손을 잡았다. 둘의 손목을 묶은 리본은 이어져 있었지만 그 사이는 참 멀기도 멀었다. 이게 그와 유채 사이의 관계인 것 같았다. 루프스는 제 바지 주머니에 든 빅터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 * *
“당신. 당신이 내 목걸이 가지고 있지?”
루프스가 만찬이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유채가 루프스의 멱살을 붙잡았다. 루프스는 순간 당황했고 그의 옷시중을 들러 들어 온 궁녀들도 유채의 무례에 놀라서 멈칫했다. 루프스는 손을 들어서 궁녀들을 내보냈다.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요. 당신이 가지고 있어요?”
유채는 여태까지 모르고 있다가 옷을 갈아입을 무렵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래. 내가 가지고 있다.”
“당장 돌려줘요! 그거 내 물건이에요.”
“내가 왜 그걸 돌려줘야 하지?”
루프스는 유채가 찾으려고 하는 것이 에클레시아 중앙 석실에 있었던 신물이라는 것을 안 이상 신관장의 목걸이로 판단되어지는 목걸이를 돌려줄 수 없었다.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대가로 내놓았다고 생각해라. 왜? 그게 네게 중요한 건가?”
“당신 말 어겨서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붉은 방에 들어가라고 해도 얌전히 말 들을 테니까 그거 돌려줘요. 예?”
“붉은, 방?”
그 방은 이미 치운 지 오래였다. 유채의 입에서 또 다시 붉은 방이 언급되자 루프스는 기분이 상했다. 유채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일어나라. 지금 뭐하는…….”
“돌려줘요. 난 그게 필요해요. 예? 제발…… 돌려줘요…….”
루프스가 일어나라고 하는데도 유채는 바닥에 엎드린 채 빌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예?”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일으키기 위해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뿌리치고 손을 모아서 빌었다.
“우리 언니 살려야 돼요. 그러니까, 제발요.”
루프스와 유채의 사이는 항상 이런 평행선이었다. 유채는 떠나려들었고 루프스는 붙잡으려만 했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었다. 루프스는 차가워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선택해라. 목걸이냐, 그놈들…….”
루프스가 말을 마치기 전에 어떤 병사가 들어왔다. 병사는 눈물 흘리는 유채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경비병들의 처벌이 결정되었습니다. 두 눈을 뽑고 혀와 왼손을 자른 뒤 궁에서 내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눈을 뽑고…… 손을 잘라요?”
유채가 루프스의 팔을 잡고 손을 떨었다. 루프스는 당연하다는 눈초리로 유채에게 설명했다.
“막사를 지키던 경비병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안 그런가?” “안 돼요! 그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요! 왜 나 하나 때문에 그 사람들이 그런 참혹한 처벌을 받아야 해요!”
유채는 루프스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저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루프스는 아무 연관 없는 그들까지 걱정하는 유채의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경비를 섰던 경비병들이 유채에 관한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것을 듣고 크게 경을 치고 감봉에 징계까지 내린 상태였다. 그들은 유채가 이렇게 저희를 위해서 간절하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런 면을 동경하고 사랑했다. 하지만, 유채가 이럴 때마다 스스로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유재는 정말로 그에게 잔인했다.
“나쁜 새끼.”
마음 약한 유채는 결국 목걸이를 포기했다. 유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돌아섰다.
“혼자 있고 싶어요.”
“…….”
“이것도 안 돼요? 아, 죄송해요. 펠릭스 다우스 주제에 너무 건방지게 굴었나요?”
“……나가 있다 오겠다. 쉬어라.”
루프스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막사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루프스는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에클레시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 위에 별이 흐드러지게 빛나고 있었다.
루프스는 바실리사를 찾아갈까 하다가 제 꼴이 우스워 걸음을 돌려 케릭스를 찾았다. 하지만 그의 막사는 비어 있었다. 루프스는 케릭스의 부관에게 자신이 찾는다는 말을 전하라 하고는 제 막사로 돌아왔다. 유채는 바닥에 깐 모포 위에 누워 자고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침대에 눕혀 편히 잘 수 있도록 배려했다.
“부르셨습니까?”
루프스의 부름을 받은 케릭스가 찾아왔다. 잠든 유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루프스는 케릭스를 돌아보았다.
“플로서스가 맡고 있는 시카리우스(Sicarius: 루프스 직속 암살 첩보 부대)에 대한 권한을 네게 넘기겠다.”
“예? 어찌 그런 중요한 중책을 제게 함부로 맡기십니까?”
“내가 가장 신뢰하는 것이 너다. 군말 말고 맡아라. 네 아비도 별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루프스는 의자에 앉아 주머니 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루프스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유채를 협박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협박을 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유채가 저를 더 끔찍해하는 것을 알면서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이틀 뒤, 토스 호무스에 돌아가면.”
【‘제발 보내줘요. 나 정말 힘들어요. 제발. 보내줘요. 제발.’】
【‘그러니까, 백, 백혈병이란 병, 병을 우리 언니가…… 앓고 있는데…… 그 병을 고치려면 조, 조혈모세, 포라는 게 필요한데. 그, 그걸…… 내가, 내가 줄, 줄 수 있어요…….’】
【‘돌려줘요. 난 그게 필요해요. 예? 제발…… 돌려줘요…….’】
루프스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물건 하나를 찾아라.”
잃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음 주는 것도 여태껏 하지 못한 한없이 약하고 겁이 많은 한심한 수컷이 바로 루프스였다. 루프스는 유채를 보내고 찾아올 슬픔과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는 살고 싶었다.
에리카에 대한 죄책감과 스스로를 혐오를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평생을 무저갱의 어둠 속에서 화를 내면서 살아왔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이 더럽고 추잡하고 어두운 가슴에 유채는 과분할 정도로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그게 시카리우스의 수장으로서 네 첫 임무다.”
그는 행복해지고 싶었고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유채가 필요했다.
“물건을 찾아서 바다에 버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얼마든지 유채 모르게 비열해질 수 있었다. 그의 가슴이 죄책감에 욱신거렸다. 유채의 눈에서 떨어질 수많은 눈물에 가슴이 아려왔다.
* * *
루프스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는 잠든 유채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말만 속삭였다.
오페라티오의 마지막 날의 제는 밤중에 치러지기 때문에 오전에는 여유가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와 마주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유채는 빵을 손톱만큼 떼어서 깨작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얼마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먹어라.”
“그만 먹을래요. 입맛 없어요.”
유채는 냉랭하게 말하고서 침대에 누워 루프스를 등졌다. 루프스는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먹어라. 그렇게 굶다가는 몸에 병난다.”
“당신이나 먹어요. 난 생각나면 알아서 먹을 테니까.”
루프스는 유채가 저와 같이 식사하는 게 싫어서 이런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있어서 나가보겠다. 탁자는 치우지 않을 테니 배고프면 먹어라.”
루프스가 막사에서 나간 후에야 유채는 도로 일어나 앉았다. 유채는 초조함에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답답한 가슴만 손으로 내리쳤다.
“빌어먹을.”
유채는 셀레네를 향한 욕설을 나지막하게 뱉어냈다.
“너는 항상 내 예상을 벗어나는구나.”
쓰러진 유채의 몸을 일으켜 세워주면서 셀레네가 말했다. 유채는 셀레네를 다시 만난 데에 눈을 크게 떴다.
“이곳까지 오게 하기 위해서 힘 좀 썼는데, 아느냐?”
“힘을 쓰다니요?”
“에클레시아의 입구를 막아서 네가 이니투스의 후손과 같이 이 중앙 석실로 오게 했지.”
유채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셀레네가 중앙의 단으로 다가가 상아함에 뚜껑을 열었다.
“여기는 내 기억 속이란다. 보거라. 이게 리와인더의 조각이란다.”
유채는 상아함 속에 들어 있는 리와인더의 조각을 보았다. 깨진 구슬 조각이었는데 루비처럼 새빨간 빛이었다. 유채는 문득 책에서 루비 조각에 대해 보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단서가 하나 늘었다.
셀레네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별로 없단다. 이곳 시간을 기준으로 최대 육 개월 정도 남았단다. 네 언니에게도 이 스티폴로르에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앞으로 육 개월 뒤면 네 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 거란 말이다.”
“예? 말도 안 돼요! 우리 언닌 그렇게 심각한 상태 아니었어요! 갑자기 왜……!”
유채는 문득 깨달았다. 셀레네가 시간을 늦췄으니, 여기서 이 년이 그곳에서 육 개월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육 개월 뒤엔 이 스티폴로르도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란다. 리와인더의 조각의 악기가 한계에 달했다. 지금 남은 시간은 그 정도밖에 없어.”
“예?”
“전쟁 때문이지. 한 번 더 전쟁이 일어나면 그 시기가 더 앞당겨질 테니 서둘러야 한다.”
유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리예요. 조각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고 그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다고요!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거예요! 당신 신이잖아! 넋 놓고 보고 있지만 말고!”
“미안하다. 내가 그 분께 받은 벌로 힘이 부족해서 너를 더 이상 도와줄 수가 없단다. 이 이상 간섭을 하게 되면 내 소멸로 이어질 수 있고 내 소멸은 곧 이 세계의 소멸로 이어질 수도 있단다. 그러니…… 나는 너에게 조각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도 너를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도 없단다. 하지만 리와인더의 회수 방법을 쉽게 하는 방법을 하나 만들어 낼 수는 있단다.”
셀레네는 이번에 조금 무리를 해서 움직였다. 세계의 법칙을 다시 한 번 깨기에는 그녀의 힘이 부치는 상태였다. 그래서 우회적인 방식으로 깨었다. 자신의 힘에 매개가 되는 바다를 이용하여 간섭을 할 생각이었다.
“정 시간이 없고 급하면 리와인더의 조각을 바다에 버려라. 그 아래에는 나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용 에퀘레우스(Aequoreus)가 있단다. 그 아이가 내게 리와인더의 조각을 전해줄 것이다.”
“나는 힘이 없어요. 정보를 찾더라도 저 남자에게 벗어날 만한 힘이…….”
“그래서 너를 불렀다.”
셀레네는 유채의 이마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거기에서부터 빛이 나더니 유채의 온몸에 고대 문자와 같은 글씨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스펠은 신어(神語)로 시작되었지. 스펠을 통한 마법은 신어(神語)를 시동어로 하여 발동하는 것이 원류였다. 지금은 신어(神語)를 아는 이가 거의 없지. 나는 너에게 신어(神語)를 내리겠다.”
유채는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유채는 무의식중에 입을 달싹였다.
“Beatitas.”
“그게 네 시동어가 될 것이다. 신어(神語)를 얻었으니 복잡한 주문을 외울 필요 없이, 마력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법만 익혀서 사용하면 된다. 네게 얼마 없는 시간을 벌어주는 수단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유채는 입 속으로 제가 얻은 신어(神語)를 연습했다.
“이니투스가 네게 전해주라더구나.”
“이니투스요?”
셀레네가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일단 미안하다고 하더구나.”
이니투스는 호탕하고 의리가 있는 사내였다. 그러니 은가연의 실수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늑대들은 평생 한 명의 여자만 보고 살아가며, 사랑을 거절당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저도 모른다고 하더구나.”
셀레네가 유채의 목에 걸린 파렌티아를 만지작거렸다. 사람의 물건에는 주변 사람의 감정이 묻어나기 마련이었다. 파렌티아에는 루프스가 유채에게 품은 사랑, 집착 같은 감정들이 묻어 있었다. 셀레는 유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감정의 결말이 궁금했다.
“몸은 컸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제 후손이니, 모쪼록 제 후손을 조금만 조심하라고 전해달라고 하였다. 방심했다가는 위험할 수 있다더구나.”
공간이 다시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셀레네의 모습도 조각조각 흩어져 사라져 갔다.
“행운을 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유채는 심연 속에서 정신을 놓았다.
* * *
유채는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씹다가 셀레네가 준 신어(神語)로 마법을 사용해 보았다. 주문 없이도 마법이 발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렇게 되면 마법을 익히는 시간이 짧아졌다. 마력을 응용하고 통제하고 집중하는 방법만 익히면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토스 호무스의 궁을 탈출하는 것이 좀 더 쉬워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유채는 허전한 제 목을 쓸었다.
“젠장.”
리와인더의 조각을 맨손으로 만지려면 목걸이가 필요한데 그것을 빼앗겼다. 만일의 경우 보자기가 없는 상태에서 조각을 찾으면 그것을 목걸이가 꼭 있어야 했다.
‘일단 토스 호무스로 돌아가야 해. 일단은.’
토스 호무스로 돌아가 정보를 더 찾고 조각이 있을 만한 위치를 추려내야 했다. 분명 책에서 붉은 루비 조각에 대한 언급을 본 기억이 났다.
유채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번에 에클레시아에 몰래 들어가려고 했던 게 들켰으니 돌아가면 감시가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 또 무슨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저를 구속하려나 걱정이 되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랬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 정보가 있으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유채님? 유채님?”
생각에 빠져 있느라 유채는 블루벨이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블루벨? 언제 왔어?”
블루벨은 대답은 않고 손으로 유채의 눈가를 쓸었다.
“왜 그래, 블루벨?”
“꼭 우시는 것 같아서요.”
“아니야. 블루벨.”
블루벨은 유채가 물어뜯어서 엉망이 된 손톱에 기겁했다.
“엑! 손톱을 씹으시면 어떻게 해요. 손톱이 못나졌어요. 힝, 유채님 손톱은 제가 항상 예쁘게 관리해 드리고 싶었는데.”
“괜찮아, 블루벨. 나중에 정리하면 되지. 배 안 고파? 나랑 같이 먹을래? 나 아침 제대로 먹지 않아서 배고프거든.”
유채는 음식이 차려진 탁자 앞에 앉았다. 블루벨도 맞은편에 앉아 베이컨을 입안에 넣고 행복하다는 듯이 양 볼에 손을 올렸다. 유채는 블루벨의 귀여운 행동에 웃으면서 아까 전에는 깨작거리던 빵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블루벨.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잘랐어?”
유채는 뒤늦게 단발로 댕강 잘린 블루벨의 머리카락을 지적했다.
“아! 케릭스님이랑 증표 만들려고요.”
블루벨은 기름이 묻은 손을 테이블보에 닦으며 말했다. 원래 등을 반 정도 덮는 길고 구불거리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턱 끝에 닿는 단발이 되어 있었다. 블루벨은 얼굴을 붉혔다.
“음, 스티폴로르에는 연인의 머리카락을 엮어서 긴 끈으로 만들어 그걸 증표로 가지고 다니거든요. 케릭스님은 꼬리털을 자르셔서 저는 이걸로 했어요.”
유채는 사랑에 빠져서 행복해하는 블루벨을 바라보았다. 그래,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블루벨이 있는 이 세상을, 앞으로 블루벨이 살아갈 이 세상을 지키고 싶었다. 유채는 블루벨을 보며 웃었다.
“왜 웃으세요?”
“네가 좋아서.”
고민해서 쉽게 풀리는 문제는 몇 없었다. 일단은 주어진 상황에 힘을 내야 했다. 오늘까지는 약했으니 내일부터는 다시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겠다.
오늘까지만 울자. 오늘까지만.
* * *
“그래서 이제 무얼 할 생각이야, 헤르티아.”
단테는 오페라티오의 마지막 제를 위해 치장하고 있는 헤르티아의 막사로 들어왔다. 헤르티아는 궁녀들을 모두 물렀다.
“루프스가 레티티아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알았으니, 그놈의 목을 자르기 위해서 레티티아를 이용해야지.”
“그 가여운 아이를?”
“걱정 마. 나도 레티티아를 해칠 생각은 없어. 그저 인질로만 잡아둘 거야.”
헤르티아는 지난번 만찬에서 루프스가 평소와 다르게 말로 저를 설득하려는 것을 보았다. 괜히 군소 일족의 심기를 건드려 레티티아가 위험해질까 봐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그 자존심 강한 놈이 먼저 숙이고 들어올 만큼 마음에 깊게 품었다는 뜻이었다. 블랑카를 죽였을 때 로보가 분노로 미쳐 버렸던 것처럼, 루프스도 레티티아의 안위에 이상이 생기면 미쳐 버릴 것이다.
“그 아이, 지금 신과 관련된 힘을 찾고 있다고 레푸스 트레모르가 나에게 귀띔을 해주더군.”
헤르티아는 유채를 꾀어서 데려올 방법을 이미 구상 중이었다.
“신과 관련된 힘?”
“그리고 난 그게 뭔지 알고 있고. 라일라님이 오빠에게 결혼 선물로 요구한 붉은 돌조각에 신의 힘이 담겨 있어.”
【‘여기에는요, 신의 힘이 담겨 있어요. 그런데 악기가 이걸 오염시켜서 지금은 오히려 위험한 물건이에요. 신의 힘이 전부 악기로 변했거든요. 자칫하면 울피누스 호무스가 화를 입을 수 있어서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정화를 하고 있어요.’】
“그걸로 꾀어볼 생각이야. 오월 여왕의 축제가 끝나면 루프스가 소니페스 호무스로 간다고 들었어. 그 집착 심한 늑대가 레티티아를 떼어놓고 갈 리 없을 테니, 그때 내게 레티티아와 이야기할 만한 시간만 만들어줘.”
“그 물건을 네가 갖고 있어?”
“아니, 라일라님이 돌아가셨을 때 사라졌어. 라일라님을 죽인 로보의 명을 받은 시카리우스 소속 늑대 놈이 가지고 있겠지. 뭐, 직접 보여줄 필요는 없지. 모양새와 힘만 설명해 주면 알아서 넘어오겠지.”
헤르티아는 유채를 비웃었다. 그 아이를 이용만 하고 놓아줄 것이었다. 어차피 그 아이도 루프스가 끔찍하게 싫을 테니 오히려 이쪽을 도와주려 하지도 모른다. 헤르티아는 이제야 오빠의 복수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 같았다.
* * *
루프스는 느린 걸음으로 막사로 돌아갔다. 마지막 제가 끝나고 유채는 신경질적으로 손목에 묶인 리본을 풀고 먼저 돌아가 버렸다. 그녀의 표정이 살벌했기에 차마 따라가지 못하고 밖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가 이제야 돌아가는 것이었다.
“흑. 으으흑.”
막사에서 멀리 떨어진 에클레시아의 파편인 돌더미 뒤에서 우는 소리가 났다. 루프스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 돌더미 근처로 갔다.
“흐으으윽.”
유채는 가슴을 두드리며 서럽게 울었다. 오늘까지만 울고 내일부턴 절대 울지 않을 것이다.
루프스는 그녀가 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유채의 앞에 목걸이를 내놓았다.
“가져가라.”
유채의 눈물 젖은 눈이 루프스를 올려다보았다.
“대가는 뭔데요? 아, 이제는 내가 알아서 대가를 말해야 해요?”
“그냥 가져가라.”
“무섭게 왜 이래요. 원하는 걸 말해요.”
“너 우는 게 보기 싫어서 그런다. 그러니 가져가라.”
“왜요? 나 우는 거 제일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잖아!”
“그게 아니다!”
루프스는 입술을 달싹였다. 유채는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 모두 제가 과거에 저지른 짓들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제 마음을 털어놓으면 유채가 조금은 마음을 열어줄까? 하는 고민으로 번민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프스는 머뭇거렸다. 오늘은 얘기를 해야 했다.
“내가 너를 연모한다.”
말하고 나니 후련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네가 울지 않고 웃었으면 한다. 네가 울면 나는…….”
“당신 변태예요?”
유채가 루프스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가 막히고 황당해 역겹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누구를 때리면서 희열을 느껴요? 그리고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그건……!”
루프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채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이럴 줄 알았다. 제 감정을 말해도 저렇게 나올 거란 건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는 일말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아서 제 가슴 위에 올렸다. 그녀를 향해서만 뛰는 심장이 제 감정을 전달해 주기를 원했다.
“내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네가 좋다. 겁이 많고 치졸한 나와 다르게 용기 있고 강단 있는 네가 좋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너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걸 내가 일찍 알아채지 못했다.”
루프스는 유채가 제 진심을 이해해 줄까 싶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하였고 내가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네가 계속 내 곁에 있기를 바란다. 네 사랑을 바라지는 않아. 그저 내 곁에만…….”
“하! 당신 미쳤어요?”
유채는 분노에 차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루프스의 손을 떨쳐 냈다.
“착각도 단단히 하고 있군요! 그건 독특한 것에 대한 소유욕이고 집착이에요! 사랑이 아니라고! 하하! 나 좀 편하자고 당신이 들이대는 걸 그냥 좀 받아줬더니 그게 사랑이라고? ”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이거나 풀고 말해요. 당신 소유물이라는 증거를 떡하니 달아놓고 무슨 사랑? 사랑이 소유에서 나온다는 말은 나도…….”
“그걸 풀어주면 너는 떠날 것이지 않나!”
루프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채는 깜짝 놀라서 입마저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루프스의 청회색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한번 시작된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루프스는 제 밑바닥까지 다 내보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래서 말하기가 두려웠어…….”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가 더 잘 알아. 그래서 너를 사랑함을 깨닫고 나는 너에게 했던 모든 일을 후회했다. 너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염치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어째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루프스는 목이 메었다.
“내가 변하겠다. 더 이상 협박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싫다면 손대지도 않으마. 그러니까, 제발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되겠나. 너는 현명하니, 내게 너처럼 되는 방법을 알려줘.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하겠다. 너도 아직 내게 복수하지 못했지 않나. 평생 나를 괴롭혀도 좋으니까…….”
가지 말라는 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당신 엄청 이기적이네요. 말로만 나를 위해서 뭐든지 해주겠다고 하면서 결국 당신 원하는 대로만 하겠다는 거잖아요?”
유채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로 루프스에게 화살을 날렸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내 언니가 죽어! 당신이 그걸 책임져 줄 거야?!”
유채가 주먹을 쥐고 노성을 질렀다.
“당신도 에리카를 잃고 평생을 후회했다며! 그런데 나는 어떨 것 같아요? 언니를 구하지 못했는데 내가 당신 곁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도 괴로웠다며! 나라고 다를 것 같냐고!”
유채는 숨을 몰아쉬었다.
루프스는 얼굴을 성마르게 쓸어내렸다. 그도 알고 있다. 그랬기에 수없이 고민했다. 유채를 이대로 붙잡아두면은 그녀 역시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할 것을 알고 있기에 수 만 번을 고민했다.
“……네가 없으면 내가 죽을 것 같다.”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그의 물기 어린 눈이 유채의 차가운 얼굴을 담았다.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내게…….”
“죽어버려요! 당신이 죽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루프스는 그대로 덜컥 굳었다. 아. 이럴 것 같았다. 이래서 마음을 고백하기가 두려웠다.
“당신 멋대로 나를 사랑한다면서 그걸 나보고 책임지라고 하지 마요. 내가 언제 날 사랑해 달라고 빌었어요? 왜 나한테 책임지라고 이 지랄인데!”
유채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부모 잃은 아이 같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루프스를 보니 화가 나는 한편으로 통쾌하기도 했다. 유채는 숨을 골랐다. 그녀는 제가 괴로웠던 것을 모두 토로할 작정이었다.
“지금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불행하고 괴로운 사람 같죠? 그렇죠?”
루프스는 묵묵히 고개만 저었다.
“하. 거짓말하지 마요. 있잖아요, 나는 당신 보다 백배는 더 괴로웠어요.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죽고 싶었어. 근데 내가 왜 참았는지 알아요?”
“미안하다.”
“당신의 손이며 입술이 닿는 것이 벌레보다 더 끔찍해도 참았어요. 내 언니 때문에! 우리 언니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난 죽을 수 없어서 참았다고!”
“미안하다. 내가 앞으로 잘하겠다. 네가 싫다는 일은 모두 그만두겠다.”
“당신이 나에게 던지는 건 그저 돌멩이에 불과해요. 당신이 죽을 것 같다고 당신 마음을 내게 책임지라고 하지 말아요.”
루프스는 냉정하게 돌아서는 유채를 붙잡았다. 그의 눈물 젖은 얼굴은 절박했다.
“책임지라고 하지 않겠다. 그저 내 마음이다. 하지만, 그걸 부정만은 하지 말아줘라.”
루프스는 그것 하나만을 바랐다.
“전에 기록에서 본 적이 있다. 신과 계약을 하면 소원을 빌 수 있다고, 나한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블루벨과 헤어져도 괜찮아? 보내주겠다. 그러니, 만일 신에게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이곳에 다시 돌아와라. 제발…….”
유채가 신과 계약을 했다면 당연히 원래 세상으로의 귀환을 소원으로 빌 것이라 믿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 세상에 떨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돌아가기 위해서 신의 일을 맡아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에 유채가 은가연과 비슷한 경우라면, 아주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루프스는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네가 나를 때려서 분이 풀린다면, 아니, 지난번처럼 칼을 꽂아도 괜찮다. 네가 주는 벌이라면 모두 달게 받을 테니, 소원을 빌어서 돌아와 주면 안 되나? 돌아와 준다고 약속만 하면, 네가 찾는 게 무엇이든 도와주겠다.”
“하.”
유채의 차가운 웃음에 루프스는 제 가슴이 타다 못해 부스러지는 것 같았다.
“내가 왜 당신에게 좋은 소원을 빌어요? 진짜 이기적이네. 정말 최악이야! 그리고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나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언제 배신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루프스는 유채의 말에 맥이 풀렸다.
“그리고 나 없으면 죽겠다면서요? 더 간단하고 좋은 복수 방법이 있는데,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까지 해야 해요? 나만 돌아가면 그만이잖아. 그럼 당신은 지옥에 남겨진 것일 텐데 그보다 더 좋은 복수가 어디 있어? 나는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평생 불행하게 살아.”
루프스의 감정이 정말 사랑인지 집착인지는 모르지만 유채는 이제 제가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했다. 사람 감정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가장 싫어하지만, 유채는 이번만은 독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저를 이렇게 잔인하게 만든 건 바로 루프스였다.
“블루벨은? 블루벨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루프스는 절박하게 외쳤다. 제가 아니라 블루벨이 그녀에게 돌아올 이유가 되어준다면 얼마든지 매달릴 수 있었다.
“매번 블루벨을 들먹이는 게 지겹지도 않아요? 저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유채는 경멸을 담은 눈으로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블루벨은 내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돌아가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자길 기억해 달라고 했어요. 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나도 괜찮으니 자길 잊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이게 사랑이에요. 내 행복을 바란다면서 당신은 당신만 살려달라고 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사랑 아니야. 집착이지.”
루프스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유채는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블루벨 때문에라도 지금은 토스 호무스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애꿎은 블루벨 괴롭히기만 해봐요. 당신 가만 안 둘 테니까.”
루프스는 유채가 가져가지 않은 목걸이를 손에 꽉 쥐고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유채가 버둥거렸다.
“집착이 아니다. 사랑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아 손바닥 위에 목걸이를 올려놓았다.
“이게 그 증거다. 가져가라. 네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내 마음을 부정만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를 놓아주었다. 유채는 뒤 돌아서 루프스의 뺨을 세게 쳤다. 얼마나 세게 힘을 줬는지 손을 휘두른 유채가 비틀거릴 정도였다.
“역겨우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마요.”
유채는 그대로 뒤돌아 걸어갔다. 루프스는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이 세상은 동화가 아니고 현실은 잔혹했다. 유채는 매몰찼고 저는 어리석었다. 저 같은 천치도 없을 것이다.
이제 유채의 선택에 모든 것이 달렸다. 끝의 끝까지 몽땅 다 보였으니 더 이상 유채를 강제로 잡아둘 수도 없었다. 너무 오만했다. 진심을 털어놓으면 그녀가 저를 동정해 줄 거라고 믿었다. 모든 것이 후회가 되었다.
헤르티아가 유채를 바쳤을 때, 그때 헤르티아에게 화를 내고 유채를 따뜻하게 품었더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제게 마음을 열었을까? 돌아가지 말라고 애원하면 고민이라도 해줬을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는 진득한 감정을 토해냈다. 둑이 터진 것처럼 그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쳤다. 왜 여태껏 이런 진하고 깊은 감정을 알지 못했을까? 왜 제 마음을 두려워하며 부정했을까? 루프스는 그저 후회하기만 했다. 만약은 없었다. 그저 그가 어리석었을 뿐이었다.
사랑이 찾아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눈이 부시게 빛이 나서 첫눈에 깨닫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이 모르는 것처럼 저도 모르게 빠지게 되는 것이 사랑이었다. 저는 사랑에 젖었으면서도 그게 사랑인 줄을 몰랐다.
이게 사랑이었다.
그 웃음 한 자락, 숨결 하나에 가슴이 떨리는 것이. 이리 가슴에 사무치는 감정이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내가 너를 연모한다.”
루프스는 유채가 사라진 방향으로 제 마음을 털어놓았다. 폐허가 되어버린 옛 신전 터에서 그의 고백이 바람에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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