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늑대왕 루프스-11화 (11/16)

Chapter 11. 오월 여왕

“어때, 뭐 발견한 것 있어, 알렉스?”

프레드릭은 최근 펜리를 이용하여서 헤임달의 주의를 돌리고 있었다. 알렉스와 프레드릭은 그 사이에 헤임달을 뒷조사했다. 헤임달은 의심쩍어 하는 눈초리가 있었지만, 딱히 무어라 할 말이 없었기에 펜리를 내쫓지도 못하고 그대로 두는 편이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어. 헤임달이 드나드는 창고는 다 가봤는데, 거의 다 포트리스 공용 창고고 딱 하나만 헤임달 건데 소금 창고야. 헤임달이 물고기 절이려고 만든 창고라던데.”

“소금 창고?”

“응. 형, 근데 대체 아편이 뭐야? ”

“마약이야. 대륙에서 이용하는.”

스티폴로르에서 나고 자란 세대는 잘 모르는 것이지만, 대륙에서 넘어와서 산 이들은 다 아는 마약이었다. 프레드릭은 스승에게 아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스승인 키르케는 약초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마약? 그건 또 뭐야? 형 좀 자세히 좀 설명해 봐. 키르케 할머니가 나는 멍청하다고 독초랑 먹어도 되는 풀만 구분하라고 해서 풀떼기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고.”

“간단하게 말해서 중독성이 있는 약초야. 적당히 쓴다면 진통제나 마취제로 쓸 수 있는데 과하게 쓰면 환각에 빠지고 중독돼서 위험해지는 약이야. 당연히 몸도 상하고 머리에도 문제가 생기고.”

프레드릭은 팔짱을 끼고 탁자에 엉덩이를 기대었다.

“그럼 형은 헥터가 헤임달과 거래를 틀 수 있었던 이유가 마약 때문이라고 보는 거야?”

“그래, 여자들을 바치면서 거기다 아편까지 넘긴 거지. 헥터는 아편에 중독되어서 헤임달과 거래를 끝을 수 없었을 것이고.”

“말이 되네.”

“거기다가 마약을 이용해서 다른 수인들에게 정보를 얻어냈을 것 같아. 최근 발견된다는 수인들의 시체도 뭔가 이상했어.”

프레드릭은 포트리스 부근에서 발견된다는 수인들의 시체들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반항한 흔적이 아예 없다고 했는데 수인들이 순순히 죽어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포트리스의 사람들 중 수인들을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는 실력자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포트리스가 수인들의 공세에서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은 마법으로 만든 무기의 영향이 컸다. 그것들이 도움이 없으면 군인도 아닌 일반 포트리스 사람들이 수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무력이라면 렉스가 있지만 그가 범인이라면 그렇게 간만 빼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제가 수인을 죽였다는 사실을 숨길 이유도 없었다.

“아무튼 형의 말대로라면 다 설명이 되기는 해. 어떻게 물고기나 잡는 뱃사람인 헤임달이 그 많은 정보를 알아내고, 포트리스에 필요한 물건들을 재깍재깍 가지고 나타나겠어? 레프스 건도 이해가 가고.”

“문제는 심증만 있다는 것 아니야?”

레이라가 부른 배로 뒤뚱거리면서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레이라, 무겁게 이런 걸 왜 들고 와.”

“프레드릭, 팔불출 짓 그만해. 어울리지도 않게 뭐하는 거야?”

“내가 언제부터 당신을 걱정 안 했다고…… 줘. 내가 들게. 알렉스, 넌 레이라에게 왜 이런 걸 시켜?”

“나는 시킨 적 없어. 사람 억울하게 하지 마.”

프레드릭은 레이라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혔다. 그녀는 이제 정말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몸이 무거워 적극적으로 형제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에 라이라는 굉장히 아쉬워했다. 임신한 몸만 아니라면 무기를 들고 형제를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약을 이용했던 사실을 밝혀낸다고 해서 헤임달을 벌을 줄 수 있을까? 그게 난 더 걱정이야, 프레드릭. 오히려 제 한 몸 바쳐서 수인들을 마약에 중독시키고 자신들을 도와줬다고 옹호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은데”

“나도 레이라 말에 동의해, 형. 헤임달이 돌보는 고아들이 몇이고 물고기를 나누어준 것이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나도 형이 헤임달을 의심한다는 소리를 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

레이라와 알렉스의 말에 프레드릭은 기록 하나를 꺼냈다. 레이라는 목을 길게 빼고서 그것을 보았다. 장로들만 열람할 수 있는 서고에 있는 자료였다.

라일라가 사망한 날 드나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렉스가 베니니타스에게 받아온 울피누스 호무스에 있는 출입기록 사본은 아직도 포트리스에 남아있었다. 라일라는 울피누스 호무스로 시집간 후에도 종종 포트리스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녀가 마지막으로 만난 이는 헤임달과 그 가족들이었다. 그때 헤임달은 스티폴로르에 도착한 지 오륙 년 정도 되었었는데, 대륙 사람이라서 그런지 신녀 출신이라는 라일라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었다. 헤임달은 렉스와 친분을 쌓았고 그의 주선으로 라일라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하나, 헤임달은 정말 그녀와 잠시 만났다가 나왔고 그것은 울피누스 호무스 궁의 기록으로 분명히 남아 있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헤임달이 라일라에게 적대적인 세력에 협력을 했다면, 헤임달이 손님으로 그곳에 가는 척을 하면서 적대 세력이 라일라에게 접근하는 것을 도와줬을 수도 있었다. 베니니타스는 포트리스 사람들에 한해서는 감시를 조금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헤임달이 라일라님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헤임달이 라일라님을 왜 죽여. 죽일 이유가 없잖아!”

“전에 토스 호무스의 궁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말이야. 감옥 전체를 프레눔이 감싸고 있었어. 헤임달이 노리는 게 그거라면?”

“프레눔이라고? 그 귀한 걸로 감옥을 지었다고?”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프레드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감옥을 프레눔으로 지은 것을 보면 이 스티폴로르에 프레눔 광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오르페의 반응을 보아서는 수인들은 프레눔의 특성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수인들은 강한 마력 저항력으로 마법을 쓰는 경우가 드물고 대륙과 떨어져 마법을 접할 기회가 더 드물어졌으니 프레눔에 대해 잊어버렸을 수 있었다. 수인들은 그냥 특이한 돌 취급을 하는 프레눔은 대륙에서는 억만금을 줘야 구할 수 있는 귀한 것으로 나라에서 관리할 정도였다.

“만약 스티폴로르 전역에 프레눔이 묻혀 있고 그것을 헤임달이 알았다면, 전쟁은 그에게 가장 좋은 기회가 아닐까?”

잦은 내전으로 수인들의 세력이 약해지면 포트리스에서 그 땅을 차지할 확률도 높아진다. 만에 하나 수인들이 내전을 벌이다가 공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주인 없는 빈 땅을 거저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레눔은 채굴하기 어렵지 않은 광석이니 땅만 차지한다면 그것을 얻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게 얻은 프레눔을 대륙에 가져다 파는 것이지. 알잖아. 헤임달은 대륙과 스티폴로르 사이의 소용돌이를 통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야.”

레이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면 아편도 설명이 돼. 스티폴로르에서는 양귀비가 자라지 않아. 아편을 가져오려면 대륙으로 가야 한다는 건 사실이지. 프레눔을 판 돈이면 충분히 아편을 사고도 남았을 거야.”

“그럼, 이 모든 일이 프레눔 때문이라는 거야?”

“정확히는 돈 때문이지. 프레눔이 대륙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뻔하잖아. 지금 대륙은 전쟁 중이라고.”

“헥터에게 아편을 거래하고 얻은 것이 프레눔일 수도 있겠네. 수인들에게는 프레눔은 그냥 검은 돌덩어리일 뿐이니까.”

레이라가 덧붙였다. 알렉스는 기특하단 듯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괄괄한 여장부인 레이라는 프레드릭이 자신을 여동생 취급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팔꿈치로 그의 배를 세게 찔렀다. 프레드릭이 억 하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수그렸다.

“까불고 있어.”

“큭. 아직도 형은 레이라에게 한 번을 못 이겨보네.”

알렉스가 모처럼 배를 움켜쥐고 박장대소를 하였다. 최근 그는 머리도 복잡하고 우울하기도 했다. 루프스의 손에 토스 호무스로 끌려간 유채가 걱정되고 또 그녀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게다가 요즘 렉스가 자꾸 강경파로 회유하는 중이라 그를 피해 다니는 것도 꽤 피곤했다. 강경파들은 당장이라도 전쟁을 할 준비를 갖추었다. 알렉스가 렉스의 후계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포트리스에 도발하려는 그들의 행동을 막고 있었으나 언제까지 그게 먹힐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잡혀 살지.”

프레드릭은 아픈 배를 문지르면서도 큭큭 웃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울피누스 호무스로 갈 거야. 오래되었지만 아직 증거가 남아 있을지 몰라. 라일라님이 죽은 장소를 살펴봐야겠어.”

“어떻게 거길 갈려고? 형, 그건 힘들어.”

“렉스가 지금 헤르티아를…… 레이라!”

“아, 아파…….”

레이라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다리 쪽이 물에 젖어들고 있었다. 예정일 보다 빨랐다. 벌써 진통까지 시작된 모양새였다. 알렉스는 놀라서 허둥지둥 했다.

“알렉스, 가서 산파를 불러와!”

“알, 알았어. 형!”

알렉스는 다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몸을 안아 얼른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아파. 아파. 프레드릭. 너무 아파…….”

“괜찮을 거야, 레이라. 괜찮아.”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는 몸을 떠는 레이라의 손을 꼭 잡고 연신 괜찮을 거라고만 중얼거렸다.

* * *

“헤임달 아저씨, 여기 편지 왔어요. 란텔 오빠인 것 같아요.”

헤임달은 물고기로 가득 찬 상자를 끌어내린 후 세라가 건넨 편지를 받았다. 란텔이 헤르티아의 일정을 상세하게 적어서 보낸 것이었다. 헤임달은 바닷물에 흠뻑 젖은 손으로 코를 문질렀다. 이제 늙기는 했는지 허리가 욱신거렸다. 빨리 일을 끝내고 대륙에 돌아가 모든 것을 결착 짓고 싶었다.

“형님. 란텔 녀석은 어디에 이용하시려고요? 헤르티아 암살?”

“미쳤나? 헤르티아가 얼마나 강한데 란텔을 이용해? 란텔이 시카리우스에 들어갈 정도로 강해도 헤르티아에게는 못 당해.”

헤임달은 손을 바지에 문지르고 세라에게 편지를 다시 돌려주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하워드 형제가 무언가를 눈치챈 것인지 요새 프레드릭 놈이 저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 헤임달은 이를 갈았다. 레프스 사건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조금 잃었다 하지만, 프레드릭과 알렉스는 여전히 포트리스에서 명망이 높았다. 헤임달은 입꼬리를 올렸다.

“곧 렉스가 울피누스 호무스로 갈 것이고 아마, 하워드 형제가 동행을 하겠지.”

그는 프레드릭이 라일라에 죽임에 관해 캐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라일라에 대해 알아보려면 당연히 울피누스 호무스로 가는 길을 택할 것이다. 헤임달은 사라에게 말했다.

“세라, 알렉스와 프레드릭의 모습을 종이에 옮기고 란텔에게 편지를 써.”

원래 전쟁은 사소한 계기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무고한 희생자 정도면 그가 바라는 대로 일을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희생자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라면 말이다.

“곧 그 형제가 울피누스 호무스로 갈지도 모른다고 전해. 그들을 만나면 죽여 버리라고 해.”

무고한 희생자로 하워드 형제는 더 할 나위 없었다.

* * *

“그래서 지금 뭐라? 레티티아의 목을 잘라서 포트리스에 보내자?”

루프스는 당장 뭐라도 던지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면서 원로의 오만한 말을 들었다.

“예. 최근 수인들의 간이 중요한 약재로 약탈되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 벨라토르 몇도 살해당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포트리스 가까운 곳에 사는 수인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그것과 레티티아의 목을 자르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경고의 의미입니다. 레티티아의 목을 잘라서 포트리스에 보내 그들에게 경고를 주고 성난 민심을…….”

나이가 지긋한 원로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제 얼굴 옆을 엄청난 속도로 지나간 무언가를 피했다. 힐끔 돌아보니 벽에 부딪친 유리컵이 산산 조각이 나 있었다. 루프스는 단에서 내려와 원로의 목을 잡아서 들어 올렸다. 원로는 숨을 쉬지 못해 발만 버둥거렸다.

“언제부터 너희에게 내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한이 생겼지? 응? 내가 만만한가?”

“아, 아닙니다. 저, 저희는 그, 그저!”

“닥쳐라! 네들은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건가? 경고를 해? 오히려 그들을 자극하는 것이 될 것을 모르나? 또한 그렇게 한다하여 우리가 얻는 이익은 뭐지? 민심 안정? 그딴 개소리를 지껄일 것이면 그 돌 같은 머리를 굴려서 동물화에 대한 해결책이나 알아와!”

루프스는 원로의 몸을 벽으로 집어던졌다. 그의 살기가 굉장했기에 원로는 아픈 것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벌벌 떨었다. 루프스는 다시 단 위로 올라가 나가라는 명령했다. 원로는 제 목을 조여오는 살기에 겁을 먹고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루프스는 눈썹을 긁으며 탁자 위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살펴보았다. 동물화에 대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고양이 일족은 이미 멸족하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말 수인들의 상태가 심각했다. 그 다음은 여우 수인과 소 수인들이었다. 포트리스와 근접한 땅의 동물화가 심각했고 또한 살해당했다 보고받은 수인들 태반이 말과 여우, 소들이었다. 루프스는 골치가 아파 머리를 움켜쥐었다.

헥터가 일으킨 내전으로 스티폴로르 전역이 온전하지 못했다. 말과 여우는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나, 수인화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궁까지 함락된 독수리 일족의 땅은 황폐화되었다. 독수리 일족은 수도 재건과 식량 확보에 모든 노력을 쏟았다. 양 수인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중간에 항복을 한 덕택에 수도가 온전했다. 그럼에도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어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지금은 늑대 일족의 개입으로 안정되었다지만 언제 그들에게 반발하기 위해 폭발할지 모르는 소 수인들도 있었다. 소 수인들은 정치적으로 불안했지만, 전쟁으로 농토가 망가져 식량 수급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포트리스와 전쟁이 벌어지면 버거울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수수방관할 수는 없으니 이미 살해당한 벨라토르에 대한 조사를 위해 시카리우스 몇을 파견해 놓은 상태였다. 정말로 그 모든 일이 포트리스의 소행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그때부터는 정말로 포트리스와 전면전이 벌어질 확률이 높았다.

“헤르티아.”

루프스는 한숨처럼 헤르티아의 이름을 뱉었다. 요새 헤르티아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들은 루프스는 이마를 문질렀다. 최근 포트리스 근처에서 발견되는 변사체들을 빌미로 헤르티아는 군비를 늘리고 군사들을 더 뽑았다. 포트리스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헤르티아까지 끼어들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이 스티폴로르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인 오월 여왕 기간이라는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월 여왕 축제는 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벌이는 축제였다. 여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땅에 피를 묻히지 않아야 했다. 즉,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 이 사이에 빠르게 전략을 수립해야 했다.

“젠장할.”

헥터가 내전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렇게 심각해질 일이 아니었다. 헥터가 날뛴 건 유채를 겁탈하려다가 제게 처참하게 당했기 때문이고, 거슬러 올라가자면 유채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헥터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날뛸 일도 없었을 거란 얘기였다. 루프스는 유채가 없는 하늘을 떠올리면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건…… 원하지 않아.”

유채가 없는 세상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끔찍했다. 그녀로 인해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스티폴로르가 위험해졌다고 하더라도 루프스는 그녀가 제게 온 것에 감사했다.

“루프스님. 케릭스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궁녀가 보고했다. 루프스는 들어오라고 명을 내렸다. 케릭스는 플로서스에게 시카리우스 관한 실무를 배우고 루프스의 명을 받기 위해서 들어왔다.

“전에 말씀하신 물건에 관해서 여쭤보러 왔습니다.”

“아, 그것…….”

【‘당신도 에리카를 잃고 평생을 후회했다며! 그런데 나는 어떨 것 같아요? 언니를 구하지 못했는데 내가 당신 곁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도 괴로웠다며! 나라고 다를 것 같냐고!’】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인정한다. 그는 지금껏 지극히 이기적으로 굴었다. 제가 행복하길 바라서, 유채에게 제가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합리화를 하며 오만하게 굴었다. 유채는 결국 괴로워하고 불행해질 것이었다. 유채가 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그녀가 불행해지는 것은 볼 수 없었다.

“찾으면 내게 가져와라. 바다에 버리지 말고.”

유채는 은가연과 비슷한 경우일지도 몰랐다. 그는 방법을 바꾸었다. 유채가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대신 그녀가 조금이라도 이곳에 미련을 갖고 돌아오고 싶어지게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유채가 동정이라도 할 시간이 필요했다. 유채는 마음이 약하니 어쩌면 돌아와 줄지도 모른다.

【‘죽어버려요! 당신이 죽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타인의 고통에는 연민하면서, 자신에게만 잔인한 유채가 미웠다. 하지만, 다 자신의 죄였다. 그러니 유채의 마음을 제게로 돌려야 한다. 그녀가 찾는 물건을 먼저 얻어서 보관하다가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어주면, 조금의 희망이라도 보이면 돌려줄 생각이었다. 나는 여기서 너만을 기다리겠다고 말을 하며 돌려줄 것이었다.

“무슨 물건입니까?”

루프스는 유채가 찾는 물건을 찾기 위해 토스 호무스의 비밀 서고에서 에클레시아에 관한 모든 자료를 뒤졌다. 그리고 한 가지 정보를 찾아내었다. 본래 루프스가 되면 평생을 늑대 일족에게 봉사하겠다는 뜻으로 자신의 이름을 버리는 의식을 올렸다. 루프스도 그 의식을 올리며 라이칸의 이름을 버렸다. 원래 그 의식에서 전대 루프스가 자신의 이름을 돌려받으며 이니투스님께서 하신 이야기를 전달하였다. 문제는 이니투스 님의 말씀이 칠백년 전 반란 사건을 계기로 정식으로 의식을 치루지 못한 이가 그 당시의 루프스를 죽이며 루프스의 자리에 올라 이니투스의 전언이 모두 실전되었다. 루프스는 이 잡듯이 뒤져서 실전된 전언의 일부를 이니투스의 유품에서 발견했다.

“루비 조각.”

“예?”

“피처럼 붉은, 깨진 유리구슬처럼 생긴 루비 조각을 찾아서 내게 가져와.”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유채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시간이.

* * *

루프스는 유채의 방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궁 밖은 축제를 맞아 온갖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놓았다 반복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를 보고 싶다가도 그녀에게 또 폭언을 들을까 봐 괴로웠다.

유채에게 다가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밥을 같이 먹고 싶어도 역겹다는 소리가 나올까 싶어서 포기해야 했다. 루프스가 유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입맛에 맞는 음식과 좋아하는 간식을 보내는 것뿐이다. 유채가 잠들었을 때 몰래 그 잠든 얼굴을 도둑처럼 훔쳐보거나 어린 늑대로 변해 정원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유채는 작은 늑대로 변한 자신을 반가워했고 여전히 다른 이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도란도란 털어놓았다. 유채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품에 안겨 있을 때마다 그는 유채가 제 품에 안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루프스는 큰 결심을 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레티티…… 아?”

유채는 탁자에 엎드려서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책이 널브러져 있었고 탁자에는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루프스는 그 지도를 살펴보았다.

네 군데에 동그라미를 쳐져 있었다. 펠레스 호무스, 소니페스 호무스, 울피누스 호무스, 미노르 호무스. 거기에 덧붙여 유채는 각각의 땅마다 연도를 표시하고 의미 모를 글자들을 나열해 놓았다. 그리고 울피누스 호무스와 소니페스 호무스에는 강조하려는 의미인지 별 모양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루프스는 손으로 지도를 쓸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채는 여전히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포기하지 않는 유채가 좋았기에 사랑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저를 떠나려는 유채가 원망스러웠다. 루프스는 유채의 다리에 감긴 쇠사슬을 풀어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역겨우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마요.’】

루프스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역겹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너무 괴로웠다. 루프스는 이제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일까지 다 겁이 났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모르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루프스는 유채의 발목을 잡아서 쇠사슬을 풀어내었다. 커다란 덩치로 쪼그리고 있다 보니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루프스는 또 다시 잠든 유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에는 나비 모양 장식이 달려 있었다.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그것만은 마음에 드는지 계속 착용하는 것에서 루프스는 희망을 찾았다. 루프스는 그 머리 장식을 건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이내 유채의 속눈썹에 닿았다.

잠든 모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깨어 있을 때의 모습에 비해서는 한참을 모자랐다. 루프스는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턱을 탁자에 기댄 채 유채의 잠든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장밋빛으로 물든 볼, 숱이 많고 긴 속눈썹과 오똑한 코. 계속 보아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정말 큰맘 먹고 온 것인데.”

루프스는 거절당할 것을 각오하고 찾아온 것이다. 유채가 깨어 있었다면 축제를 구경하러 같이 나가자고 하려던 것인데 곤히 잠든 유채를 깨울 수는 없었다. 루프스는 엎드려 자는 유채가 불편할까 봐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몸이 움직이는 것에 유채는 금세 잠에서 깼다. 잠기운이 가득한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그녀는 저를 안고 있는 루프스를 발견했다. 루프스는 당황해서 몸이 굳었다.

“그러니까 이건…….”

/‘역겨우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마요.’ /(이탤릭)

루프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횡설수설하며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불, 불편해 보이기에 편히 눕게 해주려고 한 것이다. 결코 다른 의도는 없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따라온 쇠사슬이 짤랑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루프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유채의 시선을 피했다.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나는 그저…….”

“됐고. 무슨 일로 왔어요?”

유채는 냉랭하게 말했다. 루프스는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눈동자에 가슴이 얼어붙는 듯했다.

“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쫓아낼 것인가?”

“시답지 않은 이유면 나가요. 나 머리 아파요.”

유채는 더 듣지 않겠다는 듯 손을 앞뒤로 흔들며 나가라는 표시를 하였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채는 그 손을 뭐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머리가 아프다면…….”

이 한마디를 꺼내는 데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유채는 모를 것이었다. 스티폴로르의 문제보다, 수많은 적들보다 그는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녀가 더 두려웠다.

“나와 같이 축제에 나가겠나?”

루프스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싫어요.”

유채는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루프스는 내민 손이 더할 나위 없이 부끄러울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는 머뭇거리면서 손을 거두어야 하는지를 한참을 고민했다.

“이 스티폴로르에서 열리는 축제 중 크고 볼 것도 많다. 가면을 쓰고 하는 축제라 네가 마레 위르라고 해코지 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보고 싶지 않나?”

“피곤해요.”

유채는 루프스의 말을 무시하고 침대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그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

“가고 싶으면 말해라. 축제는 일주일 동안 열리니, 가고 싶다고 말하기만 하면 데려다 주겠다.”

“필요 없어요.”

루프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유채의 위로 이불을 덮어주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유채가 그를 향해 돌아눕는 바람에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유채는 그가 잡고 있는 이불을 빼앗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날 위하는 척 위선 떨지 말아요.”

“…….”

“당신이 뭘 하든, 내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인심 쓰는 척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루프스는 여기서 말을 더 붙여봤자 추접한 자기변명 외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조용히 일어났고, 유채는 그게 더 꼴 보기 싫어서 더 말을 세게 쏘아붙였다.

“손은 왜 내밀어요? 내가 잡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또 다시 사과했다. 유채는 마치 비 맞은 개처럼 처량해 보이는 얼굴을 한 그를 보고 기가 찼다. 유채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쓰고 다시 옆으로 돌아누웠다.

“나가요. 당신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니까.”

루프스는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유채의 방을 나왔다.

루프스는 제 왼쪽 어깨와 팔을 문질렀다.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왼쪽 팔의 상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오른팔과 다르게 조금만 힘을 써도 근육이 결렸고 상처를 입으면 쉽게 낫지가 않아서 고생을 배로 해야 했다.

“이게 벌인가.”

루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채는 자신 때문에 더 오랫동안 고통받으면서 고생했다. 루프스는 뻐근한 왼쪽 어깨를 주무르면서 제가 한 짓에 대한 죗값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루프스는 제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큰 용기를 낸 것이었는데 거절당한 것이 매우 아쉬웠다.

열두 살 이후로 루프스도 축제를 즐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수인 내전 기간에는 축제가 열리지 않았고, 열렸다 하더라도 한가하게 축제를 구경할 여유 따윈 없었다. 루프스의 자리에 오른 초기에는 세력을 정리하기 위해서 바빴고 한가해진 후에는 축제 따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당신 변태예요?’】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유채에 거절에 수없이 아파하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하고 또 상처 입을 것을 알면서도 매번 이러는 것을 보면 변태가 맞는 것 같았다.

* * *

“그래서, 잘 다녀왔어? 블루벨,”

“예! 케릭스님이 맛있는 사탕도 많이 사주시고 재미있는 것도 많이 봤어요. 유채님도 구경 가시면 좋을 텐데요.”

블루벨이 축제에서 사온 거라고 하면서 꽃차를 쪼르륵 따라주었다. 유채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됐어.”

“저하고 케릭스님이 동행한다고 하면 루프스님도 허락해 주실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같이 가요. 네?”

블루벨이 조르는데도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유채는 블루벨의 볼을 잡고 늘였다. 단발머리가 된 블루벨은 예전보다 훨씬 더 귀여웠다.

“눈치 없게 내가 너랑 케릭스 사이에 왜 끼어? 그러니까 둘이서 즐겁게 노세요.”

“피. 전 유채님이랑도 놀고 싶은데.”

블루벨이 입술을 샐쭉이 내밀고 턱을 탁자에 기대자 유채는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블루벨은 유채가 가져온 수많은 책과 지도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입을 내민 채로 툴툴거렸다.

“유채님은 저런 것만 보시니까 안 나가시려는 거예요. 근데 저건 왜 읽으셔요?”

“물건을 찾으려고.”

“물건이요? 뭘 찾으시는데요? 파는 건가요? 책을 읽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직접 찾아보시는 게 낫지 않나요?”

“파는 건 아니야. 나도 나가서 찾고 싶긴 한데 그러기 힘드니까.”

“왜요? 루프스님이 붙잡아놓으셔서요?”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런 게 있어.”

유채는 부드러운 블루벨의 하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잠시 후 헤나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루프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전쟁이 끝난 후 뒤처리로 바쁜지 그는 요 근래에 복장이 꽤나 단정한 편이었다. 유채는 그를 한번 힐끔 보고는 이후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블루벨은 둘 사이에 긴장감이 돌자 괜히 침을 삼켰다. 루프스도 별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유채의 발목에 묶인 족쇄만 풀어주었다.

“블루벨, 산책 가자.”

유채는 미리 챙겨놓은 우유와 빵, 고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루프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루프스는 블루벨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가는 유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헤나. 나도 쉬고 올 테니. 일이 있으면 잠깐 뒤로 미뤄라.”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루프스는 헤나를 뒤로하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 * *

“어. 오늘도 왔구나.”

유채는 환하게 웃으면서 은빛 늑대를 손으로 들어올렸다. 블루벨이 케릭스를 만나러 뛰어가자마자 이곳으로 걸어왔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젖을 막 뗀 것 같은 크기였는데 그새 이렇게 들어 올리는 게 묵직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라 있었다. 유채는 늑대의 코에 자신의 코를 비볐다. 요즘 따라 이 늑대가 축 늘어져 보여서 꽤나 가여웠다. 유채는 늑대를 품에 안고 자리에 앉았다.

“너도 내가 이렇게 끌어안고 만지는 게 싫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한테 하는 행동들이 그 남자가 나한테 하는 행동하고 같아 보여서. 싫어?”

루프스는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려 했다가 멈칫했다. 지금은 동물인 척을 해야 했다. 펠릭스 다우스인 늑대들도 제 말을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프스는 대신에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정수리에 그녀의 따뜻한 손이 닿았다. 루프스는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유채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접시에 우유를 부어 주었다.

“동물을 키워본 적은 없어서…… 이런 것 줘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좋아하는 건 맞지?”

루프스는 대답하는 대신 우유를 할짝였다. 유채는 빵조각과 고기도 주위에 놓아두었다. 루프스는 그것들을 한번 보고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유채는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웃고 있었다. 저를 보고 웃고 있지만 저게 정말로 저를 향한 것은 아니기에 서글프면서도 이렇게라도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음에 그는 감사했다.

“블루벨이 물건을 찾으려면 나가야 하는데 왜 책만 읽느냐고 했어. 대답할 말이 없어서 대충 둘러댔지 뭐야.”

유채는 늑대의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과 따뜻한 몸이 기분 좋았다.

“블루벨도 이제 케릭스가 지킬 것이고, 나도 혼자서 떠날 수 있는데 여기 계속 머무르고 있어. 아, 너를 걱정해서 떠나지 않는 건 아니야.”

루프스가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유채가 가볍게 웃으면서 늑대를 안고 뺨을 비볐다.

“왜 실망했어? 나도 너 좋아해. 근데 상황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니까.”

루프스는 유채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머리에 새기며 들었다.

“예전 일 때문에 겁이 조금 많아졌거든, 그래서 수인들이 무서워. 근데, 그 물건을 찾으려면 수인들이 많은 위험한 곳을 돌아다녀야 하거든. 그것도 아주 많이.”

루프스는 뜻밖의 말에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아는 유채는 항상 당당했기에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무서워하는지 몰랐다. 유채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되게 이상하지? 그렇다고 엄청나게 싫어하는 인간 뒤에나 숨어 있고, 그를 이용하고 말이야. 근데…… 나한테도 사정이 있어.”

유채는 무릎을 세워서 얼굴을 묻었다. 언니를 위해서라면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제 어느 정도 정보도 많이 모은 상태였다. 셀레네가 준 권능 두 개를 모두 이동하는 데에만 쓴다면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는 건 예상보다 쉬워질 수도 있었다.

셀레네의 치료로 헥터의 일을 떠올려도 트라우마는 겪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헥터와 토모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해서 저를 윤간하려 했던 여우 수인들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유채는 수인들이 무서웠다.

능력이 있다 해도 그 능력을 활용하는 것은 자신의 역량에 달린 것이었다. 힘을 다루는 데 미숙해 그런 놈들에게 다시 잡힐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좀 더 확실하게 조각이 있을 만한 장소를 추려내기 위해 신중을 기하려는 것도 있었다.

지금 가장 의심이 가는 곳은 두 군데였다. 말 수인 일족의 땅과 여우 수인 일족의 땅. 두 일족 모두 고양이 수인의 땅을 침략한 경험이 있었고 현재 이상 현상을 겪었다. 여우 수인 일족은 어느 순간 그 이상 현상이 끊겼고 말 수인 일족들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유채는 말 수인 일족의 땅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 여우 수인 일족의 땅에 있던 리와인더의 조각이 수인 내전의 혼란에 휩쓸려서 말 수인 일족의 땅으로 간 것이다. 이제 그것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이번 축제가 끝나면 동물화 문제 때문에 루프스가 말 수인 일족의 땅으로 간다고 하였다. 가능하면 같이 가서 유채는 권능의 소모량을 줄일 생각이었다. 지난번 에클레시아에서 한번 써본 결과 이동 거리에 따라 소모되는 권능의 양이 정해지는 것 같았다.

“의심되는 곳을 찾았으니, 난 이곳을 떠날 거야.”

떠날 거야.

유채의 말에 루프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유채는 풀이 죽은 듯한 은빛 늑대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다정하게 속삭였다.

“미안해. 나도 너랑 헤어지는 거 무지 섭섭해. 네가 얼마나 좋은 친구였는지 몰라.”

유채는 늑대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루프스는 그 입술의 감촉을 오랫동안 곱씹었다. 저 품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얼마나 부드러웠는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유채는 쫑긋 세워져 있던 늑대의 귀가 조금 쳐진 것을 발견하고는 늑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걱정 마. 지금은 안 떠나. 아직 좀 더 찾아봐야 할 게 있거든. 떠나게 되면 너에게 인사는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루프스는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유채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인사를 받는 그때가 되면 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옆에 붙어서 떠나지 못하게 붙잡을까, 아니면 그냥 보내줄까, 찾는 물건을 먼저 찾아서 네게 줄 테니 조금만 여기서 머물러 달라고 부탁할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답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유채가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까? 루프스는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만 계속 스스로에게 던졌다.

유채를 사랑했다.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유채를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유채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다. 종국에는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채가 있는 이 삶이 행복해서 억지를 쓰고 떼를 써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근데, 너도 밖에서 한다는 축제에 대해 아니? 재미있을까? 블루벨이 엄청 자랑을 해대서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을 방해할 수는 없잖아.”

루프스는 내심 부러워하는 듯한 유채를 보면서 생각했다. 시간이 그냥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 * *

루프스는 정원에서 돌아온 유채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주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가는 발목을 애잔하게 바라보면서 최대한 느리게 족쇄를 채웠다. 루프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머뭇거리며 물었다.

“오늘도 축제가 갈 생각이 없나?”

어제처럼 손을 내밀 자신은 없어 넌지시 묻기만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당신들도 혹시 호구(戶口) 조사 같은 것을 하나요?”

“한다.”

“그것에 관한 자료를 줄 수 있어요?”

루프스는 유채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민간에 공개하지 않는 자료를 요구하는 그녀에게 무어라 해야 할지 대답을 골랐다.

“그걸 주면, 오늘 밤에 같이 나가줄게요.”

그 말은 루프스에게 마치 주문 같은 말이었다. 루프스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저녁을 먹은 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하곤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밖에서 만난 수인들이 모두 그를 보고 놀랄 정도였다.

하루 일정을 마친 후 루프스는 헤나를 불렀다.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토스 호무스 토박이인 철딱서니 없는 궁녀 하나만 불러와.”

“예? 그런 궁녀는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으니 일단 불러와라.”

헤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루프스가 요구한 꽤나 구체적인 조건의 아이를 찾았다. 열일곱 살의 늑대 수인 신참 궁녀가 쭈뼛거리면서 알현실로 들어온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신참 궁녀는 헤나가 일러준 대로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루프스님을 뵙습니다.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오월 여왕의 축제에 자주 참여해 보았느냐?”

“예. 자주 참여해 보았습니다.”

“그럼, 축제에서 암컷들이 좋아하면서도 많이 붐비지 않는 곳을 아느냐? 어떤 곳이든 괜찮다. 아는 대로 고하면 사례하겠다.”

신참 궁녀는 눈을 반짝이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술술 제가 알고 있는 곳들을 주절거렸다. 특별히 철딱서니 없는 이를 콕 짚어 고른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그를 겁내지 않아야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루프스는 궁녀가 말한 곳을 빠짐없이 기억한 후 약속대로 사례를 했다. 궁녀의 한 달 월급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궁녀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알현실을 나갔고 루프스도 만족했다.

분명히 유채도 좋아할 것이다. 조금쯤은 웃을지도 모른다. 루프스는 늑대로 변해 있을 때 본 그녀의 미소를 떠올리며 장밋빛 상상을 하였다.

봄에 하는 가장 큰 축제답게 거리는 갖가지 색의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오월 여왕은 스티폴로르 전역에서 열렸지만 토스 호무스가 중심이 돼서 가장 성대하게 열리는 축제이기에 다른 일족의 땅에서 온 수인들도 많이 돌아다녔는데 가면을 쓰고 동물의 신체가 드러나는 부분은 가리고 다녔다. 이는 오월 여왕이 생김새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모두가 축복받는다는 이념에서 열리는 축제였기 때문이었다. 가면을 쓰면 생김새를 알 수 없어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루프스와 유채는 검은색의 로브를 걸치고 가면을 썼다. 루프스는 유채가 부담스러워 할까 염려되어서 그녀의 한 걸음 뒤에서 떨어져서 걸었다. 유채는 축제를 즐기는 수인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중얼거렸다.

“꼭 베네치아 가면 축제 같네.”

주변에 가면을 쓴 사람들이 많아 꼭 그렇게 보였다. 몸이 건강해지면 같이 베네치아의 가면 축제에 가자고 언니와 약속한 적이 있었다. 유채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곳에도 이런 종류의 축제가 있나?”

“있어요.”

루프스는 대화를 하고 싶어서 축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냈다.

“에클레시아에서 셀레네님께 번영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면, 그것을 기념하고 즐기고자 시작된 축제이지. 힘들고 고된 겨울을 잘 났다는 뜻에서 시작된 축제다. 수인, 마레 위르 모두 차별하기 않고 축복을 내리시는 셀레네님의 뜻을 받들어 축제 참여자들은 스스로 신분을 감추지.” “그래요. 신기하네요.”

유채는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신기한 쇼를 보여주는 어릿광대 앞에서 멈춰 섰다. 어릿광대는 몇 가지 손재주를 보여주더니 아무것도 없던 손에 봄꽃 다발을 만들어서 건넸다. 유채는 신기해하며 박수를 쳤다.

루프스는 기뻐하는 유채의 옆에 서서 광대에게 동전 몇 닢을 주었다. 어릿광대는 그 것을 받아 모자에 감추고 인사한 뒤 다른 수인에게 향했다. 유채는 처음 보는 분홍색 꽃의 향기를 맡았다. 루프스가 유채에게 귀띔하였다.

“축제에는 저런 잡상인이 많다. 모두 상대하지는 마라. 개중에는 질이 좋지 않은 자도 있다.”

유채는 루프스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뒤를 쫓았다. 유채는 가판대에 진열된 아기자기한 공예품을 바라보았다. 한국서는 본 적 없는 스티폴로르만의 독특한 공예품들이었다. 루프스는 아까 궁녀가 말해준, 암컷들은 아기자기한 물건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던 말을 떠올렸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나?”

루프스는 넌지시 물었다.

“없어요.”

유채는 루프스의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루프스는 그녀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작은 열쇠고리를 보고는 유채의 팔목을 잡았다. 곧바로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사주고 싶었다.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내가 살 테니.”

“그래, 아가씨. 이 청년이 사준다고 할 때 사. 어디 수컷이 암컷들에게 물건을 쉬이 사주는 줄 알아?”

가판대의 상인이 넉살좋게 유채를 붙잡았다.

“자네는 어디서 이런 예쁜 아가씨를 찾았나? 아가씨는 그만 튕기고 이 청년이 사준다고 할 때 하나 사. 뭣하면 지금 들고 있는 꽃으로 대신 값을 치러도 되네. 와서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얼른 골라. 오월 여왕 축제를 기념해서 만든 한정판이야.”

유채는 상인까지 이렇게 나오자 못 이기는 척, 노란색 꽃이 유리구슬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열쇠고리를 골랐다. 유채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상인에게 건넸고 그는 꽃의 상태를 살펴보더니 재료로 쓸 수 있겠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루프스는 상인에게 나머지 값을 치렀고 유채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루프스도 그녀를 따라가기 위해서 움직였다.

“잠시만 청년.”

상인은 루프스에게 유채가 가져간 열쇠고리와 쌍이 되는 열쇠고리를 건네었다.

“딱 보니 늑대 수인인데, 저 암컷 때문에 맘고생 심한 것 같아 주는걸세. 나도 소싯적에 우리 부인 때문에 고생깨나 했거든. 동병상련이라 가여워서 주는 거야. 부적인 셈 치고 가져가게.”

“값은 얼마인가?”

“됐네. 나랑 같은 경험하는 놈들에게는 못 받겠더군. 얼른 가 봐. 누가 채가면 어쩌려고.”

상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루프스는 열쇠고리를 들고 유채의 뒤를 쫓았다.

유채는 이곳, 저곳을 구경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보석도 아니고 그렇다고 금이나 은으로 만든 세공품도 아니라 가죽이나 유리 같은 흔한 재료로 만든 공예품들인데도 관심을 보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뒤따라 다니다가 그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녀가 관심을 보였던 물건을 샀다.

간만에 나온 바깥이 그리도 좋은지 유채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황급히 거두었다. 그리고 빈 주먹만 꾹 쥐었다. 저 손을 자연스럽게 잡고 나란히 걸어갈 수 있는 수컷이 자신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루프스는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주제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루프스는 걸음을 멈췄다. 유채의 입가에 미소가 그러져 있었다. 문득, 아무것도 상관없어졌다. 뒤에 있으면 어떻고 닿을 수 없으면 어떻단 말인가. 그녀가 제 앞에 있는데.

사랑하는 그녀가 저렇게 웃고 있는데.

루프스의 사고가 멈췄다. 온 세계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봄바람이 불어왔다. 루프스는 웃고 있는 유채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루프스는 한 걸음 뒤에서 평소와 달리 명랑하게 근심걱정 없이 웃고 축제를 즐기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그는 유채가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그녀를 방해하지 않은 채로 조용히 따라다니기만 했다.

잠시 후, 둘은 인적이 드문 분수대 앞에 앉았다. 조금 전에 퍼레이드가 시작되어서 모든 수인들이 그쪽을 구경하러 가 한산해진 곳이었다.

“이거 받아라.”

루프스는 유채에게 종이봉투를 건네었다. 뭔가 하고 받아서 안을 보니 제가 오늘 구경했던 것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묻는 기세가 사뭇 날카로워 루프스는 볼 안쪽 살을 약간 깨물었다.

“예뻐 보이기에 샀다. 마음에 안 들면 버려도 좋다.”

루프스는 유채가 제 성의를 또다시 거절할까 봐 얼른 말을 덧붙였다.

“마실 걸 사올 테니 잠깐 여기 앉아서 기다려라. 어디 가지 말고.”

루프스는 혹시 몰라서 주위를 휙 돌아보았다. 중심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외진 곳은 아니었다. 상점도 많고 벽에 붙은 등들이 거리를 환하게 밝혔다. 유채가 움직이지만 않으면 위험할 일을 거라고 생각하고 루프스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유채는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보고 혀를 찼다. 제가 조금이라도 쳐다본 건 가리지 않고 다 쓸어 담은 모양새였다.

요 근래 루프스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굴었다. 그 모습에 유채는 기가 찼다. 그가 그럴수록 오히려 제가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꼭 어린아이 같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눈치를 보는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유채는 루프스의 고백을 믿지 않았다.

“하. 대체 언제까지 저럴 거지?”

유채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평범한 사람처럼 시간을 보냈더니 나름대로 기분 전환은 되었다. 우울하던 기분도 나아졌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이 정도 쉼표가 그리 큰 사치는 아닐 것이었다.

“우에에엥. 엄마……. 아파……. 나 다리에서 피나…….”

어디선가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우는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유채의 시선이 어두운 골목 쪽에 닿았다.

유채는 애써 그 울음소리를 무시하려고 했다. 주변에 저 말고 다른 수인들도 있는데 굳이 제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젠장.”

유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골목으로 향했다. 예전에 심리학책에서 보았던 방관자 효과라는 것이 생각나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유채는 골목 앞에 서서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 좁고 또 어두웠다.

유채는 천천히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멎었다. 유채는 자리에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 읍.”

갑자기 튀어나온 손이 유채의 입을 막았다. 깜짝 놀란 유채가 반항을 했지만 네 명이나 되는 장정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등이 벽에 세게 부딪치고 그중 한 명이 손가락을 유채의 입안에 집어넣어 혀를 꾹 눌러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른 둘은 유채양팔을 붙잡아 결박하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가면을 벗겼다.

“이야, 역시 동정심은 가장 좋은 수단이야. 그치?”

“이 정도면 상등품인데? 마레 위르랑 잡종이긴 하지만.”

“이런 미모면 부르는 게 값이겠다.”

어둠속에서 남자들이 말했다. 남자들은 유채를 상품 취급하듯이 훑어보았다. 가면을 벗긴 남자가 로브를 들추고 몸매를 살폈다. 유채는 기겁을 하고 몸을 비틀었지만 남자들에게 단단히 붙잡힌 상태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캬. 몸매도 좋고. 이거 정말 물건이네. 역시 위험을 감수할 만했다. 요즘 벨라토르 때문에 적당한 건수를 못 올렸는데,”

“억!”

순식간에 양 옆에 버티고 서 있던 남자들이 손이 떨어져 나가고 유채는 누군가의 든든한 팔에 안겼다. 그는 로브로 유채의 몸을 감싸 안았다.

“눈 감고 귀 막고 잠시만 기다려.”

루프스의 목소리였다. 유채는 그의 말대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비명 소리가 들리고 피비린내가 났다.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유채는 귀를 막았던 손을 떼고 천천히 눈을 떴다. 루프스가 피가 튄 가면을 내던지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유채의 몸이 잘게 떨렸다. 루프스가 유채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위험하게 왜 이런 곳은 함부로 들어오는 건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놔요!”

유채는 벌벌 떨면서 그를 밀어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자꾸 이런 일만 생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위선 떨지 마요. 당신도 저 새끼들하고 똑같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지 마요.”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채는 자꾸 저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화가 나서 아무 잘못 없는 루프스에게 화를 냈다. 그가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것도 아닌데 유채는 애꿎은 루프스에게 화를 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붙잡고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어 유채는 루프스를 밀치고 걸어갔다. 루프스는 다급하게 유채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쪽이 아니야. 저쪽으로 나가야 한다.”

루프스는 유채를 데리고 얼른 골목 밖으로 나갔다. 유채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본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워선 떨지 마요. 당신도 저 새끼들하고 똑같아.’】

루프스는 제가 유채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저를 계속 보는 게 그녀에게 더 힘든 일일 것이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분수대 앞에 두고 말했다.

“피만 씻고 돌아오마. 다시 궁으로 돌아가자.”

루프스는 유채를 남겨두고 방금 전의 그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유채에게 선물로 준 봉투를 찾았다. 덩그러니 바닥에 떨어진 그것이 마치 거절당한 제 마음 같아서 비참했다. 물건을 챙긴 그는 우물가로 가서 얼굴에 묻은 피를 씻었다. 얼굴에 찬물이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젠장.”

위로도 할 수 없는 처지가 처량했다. 아마 프레드릭이나 알렉스였다면 유채를 안고 위로를 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제가 그랬다가는……. 유채는 그것을 끔찍하게 여길 것이었다.

“윽.”

루프스는 로브를 걷어 왼팔에 물을 뿌렸다. 좀 전의 일로 작은 상처를 입었다. 조용히 처리하려고 놈들이 도망가는 것을 다 막아내려 했더니 그 덕에 팔에 작은 생채기가 남았다. 하필 또 왼팔이었다. 루프스는 상처를 찬물에 씻어낸 후 보이지 않게 숨겼다. 유채가 이것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레…….”

다시 분수대가 있는 쪽으로 나온 루프스는 유채를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유채는 두 손을 얼굴에 묻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루프스는 발을 돌려 손수건을 파는 노파 앞에 멈췄다.

“그 손수건 얼마인가?”

유채는 한참을 울었다. 너무 비참했다. 아무리 능력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해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위급 상황에 쓰겠다고 마법을 배웠는데 막상 그런 상황에 닥치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런 일을 두려워해서 더 정보를 모으려 했던 것이다. 저 혼자 돌아다니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것이다. 그게 너무 무서웠다.

“…… 받아라.”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한참 만에 나타난 루프스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유채는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과자와 사탕, 빵 등 군것질거리가 들어 있었다.

“에리카는 단 것을 먹으면 기분이 풀린다고 했어서…….”

루프스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유채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옆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내 잘못이다.”

루프스는 힐끔 유채의 얼굴을 살폈다.

“수인 내전 후 인신매매가 성행했다. 다들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니 해선 안 되는 짓을 하는 것이지. 난 그걸 알면서도 다른 일들이 더 급하다고 생각해서 그 일을 뒤로 미뤘다.”

유채에게 준 손수건에는 은방울꽃과 라일락이 수놓여 있었다. 틀림없이 행복해진다는 꽃말을 가진 은방울꽃에 루프스는 유채의 행복을 바랐고 라일락으로 제 사랑을 전했다.

“최근에서야 벨라토르를 이용해서 인신매매단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토스 호무스에서는 그간 납치가 일어난 적이 없어 안전하다고 안심했었는데…… 축제를 이용해서 이런 짓을 하려는 놈이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그러니 내 잘못이다. 다 내 잘못이야.”

변하겠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약한 이들, 여태껏 신경 쓰지 않았던 이들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유채를 사랑하기에 변하고 싶었다.

루프스는 가엽게 떨리는 유채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뻗다가 또 다시 멈칫했다. 루프스는 이를 물었다. 그는 허공에 놓았던 손을 거두었다. 어떤 말을 해도 그게 유채에게 위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책하지 말고 나를 때리고 욕을 해. 잘못은 내가 했어.”

위로가 될 수 없다면, 유채가 분을 털어낼 수 있는 대상이 되어도 괜찮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아래로 늘어뜨린 손끝에 조심스럽게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유채는 손수건을 움켜쥐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고 유채의 손을 꼭 감싸 잡았다. 유채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치고 온기를 전해주었다.

이 온기가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한참 후에야 유채는 눈물을 훌쩍이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루프스의 손 아래에서 제 손을 빼냈다. 루프스는 순순히 손을 치워주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자. 내일은 대로 쪽으로 데려가마. 미안하다.”

“내일 내가 나올지 안 나올지 어떻게 알고요?”

유채는 자기도 모르게 까칠하게 대꾸하곤 입술을 깨물었다. 루프스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 상황에서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니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을 정리했고 아무 죄 없는 그에게 화풀이를 한 것은 옳지 않다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말이 툭 튀어나왔다. 유채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짜증이 났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유 없는 짜증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유채는 차라리 그가 제 말에 화를 내주기를 바랐으나 조용하기만 하자 괜히 초조해졌다.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않아도 된다. 오늘은 들어가자. 수인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싫으면 다른 방법으로 데리고 가마.”

“……그게 무슨 방법인데요.”

“네가 잠시 참을 수만 있다면.”

루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궁의 방향을 가늠하고 지붕 위를 살폈다. 유채는 루프스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루프스는 공예품과 간식이 든 봉투를 유채에게 주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손이 닿아도 괜찮겠나?”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와 다리 뒤를 받쳐서 안아 올렸다. 유채는 깜짝 놀라서 작게 비명을 질렀다. 루프스는 유채를 안은 채로 두 다리로 크게 도약해 지붕 위로 올라갔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유채는 고개를 돌려 발 아래에 펼쳐진 축제의 밝고 활기찬 풍경을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다친 왼팔에 무게가 실리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유채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안고 말했다.

“무서우면 내 목을 끌어안아라. 되도록 빨리 갈 테니 조금만 참아라.”

루프스는 지붕 위를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뛰어다녔다. 유채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루프스의 목을 감싸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세에 익숙해지자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얼마 전 전쟁을 겪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 넘치는 광경에 유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한 커플이 보였다. 토끼 귀를 가린 소녀가 키가 큰 남자의 손을 잡고 통통 튀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유채는 블루벨을 떠올리면서 쿡쿡 웃었다.

“엇.”

루프스는 유채의 웃음소리에 정신이 팔려 그만 바보 같은 실수를 했다. 루프스는 보수 중이던 굴뚝에서 튀어나온 못에 긁힌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유채와 엮이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하지도 않던 실수를 했고 평소라면 하지도 않던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루프스는 잠시 멈추어 서서 유채를 고쳐 안았다. 혹여 불쾌해하면 어쩌나 했는데 유채는 웃는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프스는 그녀의 시선 끝을 좇았다.

‘케릭스?’

케릭스 녀석이 옆에 조그마한 토끼 꼬마를 달고 있었다. 워낙 무뚝뚝하고 숙맥이라 연애는 제대로 할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인 모양이었다. 토끼 꼬마가 어리고 순박해서인지 나름대로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유채는 그가 움직이지 않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하다.”

그 바람에 루프스와 코가 부딪쳤다. 루프스는 황급히 고개를 뒤로 뺐다. 유채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다시 지붕 위를 달렸다. 그리고 궁 가까이에 도착하자 유채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루프스는 바닥으로 내려오자마자 유채를 놓아주고 무릎을 굽혀서 그녀의 치맛단을 정돈해 주었다.

“괜찮나?”

“괜찮아요.”

루프스는 잔뜩 울어서 그새 부은 눈두덩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들어가자.”

유채는 고개만 끄덕였다. 루프스는 앞장서서 궁의 쪽문을 열었다.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루프스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루프스와 유채는 내궁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유채는 지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았다.

“혹 호신술을 배우고 싶으면 나에게 말해라. 가르쳐 줄 수인을 소개시켜 주마. 아리아도 있고 루크레치아도 있고 헤나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알았어요. 나 피곤해요.”

“그리고 네가 달라고 했던 자료는 내일 가져올 테니, 나가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알았어요.”

“그럼 쉬어라.”

루프스는 방을 나가려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유채에게 다가왔다. 유채는 또 뭔가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루프스가 품에서 꺼낸 것은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머리 장식이었다. 유채의 시선이 그것에 오래 머물렀다.

루프스는 머리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그에게도 애착이 많이 가는 물건이었다.

“골목에…… 떨어져 있더군.”

유채는 그것을 받아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루프스는 편히 자라고 하곤 방을 나갔다. 유채는 그가 나가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서 얼굴을 쓸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의 안에는 지금 루프스에게 고마운 마음과 조금 미안한 마음이 공존했다. 사실 그의 품에 끌어 안겼을 때 안도했다. 그가 가만히 손을 잡아주었을 때는 고마웠다. 제가 낸 이유 없는 화를 받아준 것에 미안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마음을 품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 동안 저 남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하면 그에게 고마워할 이유 미안해해야 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유채는 저 남자에게 잠깐이나마 의지했다는 것이 한심했다. 가만히 잡아주는 손의 온기에 잠깐 마음을 추슬렀던 자신이 한심했다.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리기 직전의 사람들이 겪는 정신상태 같았다.

유채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게 마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유채는 탁자에 놓인 봉투를 뒤집었다. 반짝이는 공예품들이 쏟아졌다.

“하. 진짜. 스토커도 아니고.”

뒤에서 따라오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저를 유심히 보고 있는 줄은 몰랐다. 유채는 공예품들을 봉투 안에 쓸어 담아 버리려다가 멈칫거렸다. 예뻐서 쳐다봤던 것은 분명하기에 그냥 내버리기에는 아까웠다. 여기에는 엄마와 아빠, 언니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있었다. 유채는 그것을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너를 연모한다.’】

루프스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유채는 분노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것이라 믿고 속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러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미안하다.’】

당연히 진심이 아닐 텐데, 그의 표정에 자꾸만 기분이 묘해졌다.

유채는 아직도 루프스가 무섭고 싫었다. 그런데 왜…….

“젠장. 이게 뭐야! 잘못한 건 그 인간인데 내가 왜 고민해야 해!”

유채는 탁자에 머리를 박은 채로 옆을 돌아보았다. 루프스가 사온 또 다른 봉투가 보였다. 유채는 그 안에서 빵을 하나 꺼냈다.

“……달아.”

전에 아빠가 사온 터키과자처럼 너무 달았다. 유채는 물도 마시지 않은 채로 봉투 안에 있는 과자와 빵을 삼켰다. 복잡한 고민들도 입에 우겨넣고 씹어서 삼켜 버리고 싶었다. 어느새 봉투가 홀쭉해졌다.

유채는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고는 곧장 침대에 누웠다.

“잠깐만…….”

유채는 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도로 일어나 앉았다. 이렇게 움직일 때마다 따라오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유채는 제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루프스는 족쇄를 다시 채우지 않았다.

* * *

“어! 유채님. 유채님도 축제 가셨었어요?”

블루벨이 루프스가 사준 공예품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유채는 간만에 방해물이 없이 자유로이 방 안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블루벨이 열쇠고리나 다른 것들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저랑 같이 가자고 할 때는 싫다고 하셨으면서.”

“그렇게 눈치 없는 짓은 안 할 거라고 했잖아.”

유채가 블루벨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유채는 말 수인 일족의 땅에 가서 해야 할 일을 해 보았다. 루프스에게 부탁한 호구 조사 자료를 참고하면 조사해야 할 위치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말 수인 일족의 궁을 조사해야 할지도 몰라서 쓸 만한 마법들도 알아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유채님은 소니페스 호무스에는 왜 가시려는 거예요?”

“찾을 물건이 있어서. 근데 그건 왜 물어?”

“어. 유채님, 제가 언뜻 듣기로는 유채님은 되도록 바깥출입을 혼자 안 하시는 것이 좋을 거래요. 요즘 수인들 분위기가 흉흉해서.”

“흉흉하다니?”

유채가 노트에 글을 적다가 블루벨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블루벨은 아차 싶은 얼굴로 볼을 긁었다. 유채가 알아봤자 좋은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유채가 들으면 불쾌해할 이야기였다.

“그, 대부분의 수인들은 이번 전쟁이 베노르 콩레수스 때의 일 때문에 일어났다고 여겨요. 유채님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괜히 루프스님을 움직이게 만들어 헥터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또 유채님이 루프스님을 홀, 홀려서 젤다님을 죽이게 만들었다고도 하고요. 거기다 토모스님도 돌아가셨고 해서, 유채님 때문에 늑대 일족의 중요한 전력을 잃었다고…….”

블루벨은 애써 순화해서 말했다. 수인들 사이에는 침대 위에서 다리 벌릴 줄 밖에 모르는 천박한 암컷 마레 위르가 요망한 밤 기술로 애먼 수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서 죽인 거라는 말이 돌고 있었다. 유채가 들으면 기함하고 상처받을 말이었다.

유채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었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언제나 똑같았다. 어떤 일로 피해를 입으면 가장 만만한 자를 원망했다. 유채는 마치 동네북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거기다 요즘 마레 위르가 수인들의 간을 가져간다는 소문도 돌고 있고요. 마레 위르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수인들을 중심으로 유채님을 벌해야 한다는 상소문들이 들어오고 있다고 해요. 루프스님이 막고 계시는데 놈들이 어떻게 유채님을 노릴지 되도록 몸조심해야 한다고 헤나님이 그러셨어요.”

유채가 뭐라 대꾸하려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루프스였다.

“나와라. 약속 지키겠다.”

루프스는 유채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방 안에는 유채가 요청했던 호구 자료에 관한 책들이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 책은 나와 허락된 몇몇 외에는 읽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이 방에서 조용히 읽고 조용히 나와. 알겠지.”

“알았어요.”

유채는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루프스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방을 나가 알현실로 갔다. 그곳에는 미리 불러놓은 오르페가 기다리고 있었다.

루프스는 오르페에게 왼팔을 보였다. 왼팔에 감긴 붕대를 푼 오르페는 얼굴을 찡그렸다. 팔의 상태는 끔찍했다. 헥터에게 물린 상처 보랏빛을 띠면서 쉽게 아물지 않았는데 오르페가 추측하기로는 헥터가 먹은 온갖 좋지 않은 약들 때문인 것 같았다. 게다가 어제는 또 어디서 다치고 오기까지 했다.

“크윽.”

오르페가 소독을 하기 시작하자 루프스가 잇새로 신음을 뱉었다. 어지간한 고통에는 내성이 있는 그가 이렇게 신음을 흘릴 정도니 오르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소독 후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갈았다. 루프스가 옷을 다시 입자 케릭스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루프스님!”

루프스는 케릭스가 왜 들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루프스는 오르페를 내보내고 케릭스와 독대를 하였다. 케릭스가 격양된 목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헤르티아가 혼란스러운 정국을 이용하여 마레 위르들에게 반감을 품은 군소 일족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않습니까? 그들이 지금 헤르티아에게 협력하는 건 루프스님이 레티티아님에게 보인 호의에 따른 불만입니다. 이 와중에 법까지 어겨가면서 그 자료들을 보여주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군소 일족이 아니라 땅을 가진 일족도 움직일지 모릅니다. 헤르티아는 제 일족의 번영보다 루프스님에게 복수하는 것이 더 중요한 암컷입니다. 기회가 생겼을 때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단 말입니다.”

“레티티아의 목을 베야 한다고 주장하는 늙은이들의 의견에 너도 휩쓸리는 거냐? 그저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쓸데없는 희생양을 만드는 걸? 그리고 베노르 콩레수스에 한해서는 유채는 확실한 피해자이다. 토모스가 벌인 일 역시 마찬가지고.”

“제 말은 그게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조심을 하자는 말입니다. 계속 이렇게 레티티아를 아끼는 모습만 보여주시다가는…….”

“케릭스.”

루프스는 케릭스의 이름을 불렀다. 케릭스는 당연히 노성을 터뜨릴 줄 알았던 루프스가 침착한 태도로 제 이름을 부르는 것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싸우는 것이 싫었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갖는다는 룰이 나는 싫었다. 수인들의 세계는 항상 강자가 모든 것을 차지했다. 난 내가 루프스가 된다면, 그 세계를 바꿔보고 싶었다. 싸움보다는 대화로, 윽박지름보다는 포용으로, 공격보다는 방어로, 약탈과 침략보다는 약자를 향한 보호로. 난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루프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에리카의 죽음 이후로 나는 그게 뜬구름 잡는 소리와 다름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지. 약자를 위한 보호? 얼어 죽을. 대화? 그런 것은 폭력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세상은 강하고 약삭빠르며 교활하고 누군가를 먼저 눌러 지배하는 이가 되어야지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죽이고 남을 죽이고, 그렇게 피 묻은 손으로 여기까지 왔다. 정점에 올라서는 반항하는 이를 죽이고 약한 이를 짓밟으면서 나는 포용보다 압제를 선택했지, 드미트리 놈들이 내게 그걸 알려줬거든, 그게 훨씬 좋은 것이라고.”

루프스는 블루벨을 지키기 위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늑대 앞에 섰던 유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근데 내게 사랑하는 암컷이 생겼다.”

루프스는 손을 턱에 괴고 딴 곳을 바라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내 신념을 버린 건 에리카를 구해야 하는 때에 그 애를 버려두고 도망갔던 그 순간부터였어. 내가 그 아이를 지키지 못하고 버렸을 때, 나는 내 신념을 버렸다. 내 소중한 것을 지키지도 못한 신념 따위 가차 없이 버렸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암컷은 너무 약한 주제에 항상 다른 이를 지키기 위해서 위험 속으로 걸어 들어가.”

케릭스는 루프스가 말하는 것이 유채임을 알았다.

“내게 복종하지 않는 암컷의 기를 죽이고 내 밑에 무릎 꿇리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가진 채로 빛이 나는 게 부러웠던 가지. 수없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포기하지 않고,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나처럼 비굴해지지 않고 비겁해지지 않고 그렇게 계속 살아가. 아무리 힘들어도 무너지지 않고.”

루프스는 케릭스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케릭스는 항상 날이 서 있던 루프스의 청회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린 것을 정말로 오랜만에 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변해보기로 했다. 예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변하지 않으면 내가 그 암컷을 사랑하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추잡한 집착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거니까.”

루프스는 단에서 내려와 케릭스의 손을 잡았다.

“십 사년 만에 돌아온 친구로서 한 번만 부탁할게. 도와줘. 헤르티아의 일도, 포트리스의 일도, 동물화의 일도 다 내가 해결할 테니. 조금만 도와줘.”

케릭스는 자신보다 키가 큰 루프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를 설득하여 주변 여론을 돌려보겠습니다. 마레 위르를 싫어하는 분이시더라도 늑대 일족에 관한 충성심은 가득하신 분입니다. 수인 세계의 안정을 위하는 거라고 하면 기꺼이 도와주실 겁니다. 나머지 일은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말 수인 일족의 땅으로 가서 헤르티아를 비공식적으로 만나봐야지. 정치적 위험이 크니 되도록 은밀하게 진행할 생각이다. 최대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군소 수인들을 설득할 생각이다. 동물화 일로는 일단 포트리스와 관계를 터볼 생각이다. 우리와는 다른 관점을 가진 자들이니 우리가 생각 못한 해법을 가져다줄지도 모르지. 당연히 반발이 심할 테니, 비밀스럽게 진행해야겠지. 포트리스에 의사들을 보내서 전염병에 대해서 도움을 주겠다 제안을 할 생각이다. ”

루프스는 다시 단 위로 올라가 의자에 앉았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벨라토르를 이용해서 지금 치안을 돌보고 있다. 간이 사라진 시신과 인신매매 건을 위주로 조사하라 명령을 내렸지. 피해를 입은 지역에는 구호품을 보내고 있다. 생각보다 효과적이야. 예전에는 무조건 힘으로 누르려고만 해서 처리가 힘들었는데, 이렇게 하니 조금 수고스러워도 빠르게 진정되더군.”

“그것으로 헤르티아에게 돌아선 수인들의 마음을 돌리실 수 있겠습니까?”

“혼란이 진정되면 안정을 원하는 이들은 더 이상의 분란을 만들지 않을 거야. 그들도 안정을 원해. 혼란한 상황에서는 일족의 피해가 더 클 것을 아니까. 헤르티아는 그 점을 이용하는 거야. 아직 상황이 완벽하게 안정되지 않았으니 불안감을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늘리려는 거지. 그러니 나는 보호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돌려야지.”

“힘드실 겁니다.”

“안다. 하지만, 변하기로 했으니 변해야지.”

루프스는 홀가분한 얼굴로 웃었다.

* * *

유채는 루프스가 준 자료에서 말 수인 일족의 땅에서 가장 피해가 심했던 마을 두 개를 찾아내었다. 각각 펠레스 호무스, 울피누스 호무스와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유채는 두 마을의 누군가가 리와인더의 조각을 보관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곳을 우선으로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계획을 세우고 난 뒤에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루프스와 함께 다시 밖에 나왔다. 어제 나왔던 곳과 다른 방향이었는데 이쪽에는 여러 노점들에서 먹을 것들을 팔고 있었다. 노점 옆으로는 길게 늘어진 탁자들이 있었는데 수인들은 그곳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루프스도 자리 값을 지불하고 자리에 앉아 유채의 앞에 음식들을 가져다주었다.

“입맛에는 맞나?”

“그쪽이 맛보고 가져온 것 아니에요?”

“난 예전에 전투에서 머리를 다친 적이 있어서 맛에 조금 둔한 편이다. 혹시 입맛에 맞지 않으면 다른 걸 가져다주마.”

유채는 지금 이 상황이 못내 불편했다. 제게 저자세로 나오면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처럼 구는 루프스가 차라리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가 부담스러웠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날 불편하게 만들어서 괴롭히려는 건가요?”

“그게 아니다.”

“그래요.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요. 그런데,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과연 나에게 사과했을까요? 아니, 당신은 죽어도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가증스러운 짓 그만해요.”

“그래, 맞다. 나는 너를 사랑해서 사과할 생각을 했다.”

유채는 그가 순순히 수긍하자 오히려 놀랐다. 유채가 입을 다물고 있자 루프스는 속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너를 사랑하기만 하는 나였다면 너에게 내 감정만 강요하면서 윽박질렀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변화하기로 했고 사과하기로 했다. 내가 변해야만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일이 아닐 테니까.”

그의 말을 들으며 유채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너는 내가 에리카를 잃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너를 좋아했다. 너를 동경하고 부러워했다. 네 외양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신념을 가지고 있는 너를 사랑했다.”

유채는 바실리사나 블루벨에게 들었던 예전의 루프스에 대해 떠올렸다.

“그래서 노력 중이다. 십 년 넘게 이렇게 살아와서, 아직 화를 참는 것도 힘들고 이렇게 말로 설득하려고 하는 것도 서툴지만…… 배려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위선 떨지 마요.’】

“나는 너의 환심을 사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예전에 지은 죄를 사과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더 사과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잘못하고 있는 거라면, 미안하다.”

루프스는 아무 말이 없는 유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가 요즘 우울해 보이기에 기분을 풀라고 데리고 나온 것이다. 네가 웃었으면 했다. 예전에 라일라님이 웃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불편했다면 미안하다.”

유채는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제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저 남자가 제게 품은 감정이 정말로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가 말한 것처럼 제가 떠날까 두려워서 파렌티아를 풀어주지 못한다는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도 모두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하지는 않으니 이게 저 남자의 사랑인 모양이었다.

유채는 힐끔힐끔 제 눈치를 살피는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당분간 여기 있을 것, 저 남자에게 사과란 사과는 다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게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흔들릴 마음도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호신술 당신이 가르쳐 줘요.”

“뭐?”

“당신이 가르쳐 줘야 실감날 것 같아. 그리고 당신은 때려도 미안하지 않을 것 같고.”

루프스는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제게 마음을 열었기 때문일까? 루프스는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알겠다. 시간 내서 찾아가지.”

루프스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윽.”

루프스는 유채가 호신술을 배우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분을 풀고 싶어 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호신술을 가르쳐 주기로 하고서 바로 다음 날부터 루프스는 유채와 시간을 가졌다. 유채는 몸 쓰는 것에 소질이 있는 것인지 가르쳐 주는 동작들을 잘 따라했다. 제대로만 배운다면 제 한 몸 지킬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전에 돌입하기만 하면 유채는 배운 것은 아랑곳 않고 루프스를 때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지금이야 루프스가 유채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다 맞아주는 것이지만 만약 실제 상황이었다면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유채에게 당할 수인은 없을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 맞나 보네요.”

루프스는 호신술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했으면서 유채가 자랑스레 하는 말에 당황했다. 유채는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 걸 계속 알려달라고 재촉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얻어맞은 곳을 문지르면서 일어섰다. 다음 동작을 알려주기 위해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비틀자 유채의 굽이 높은 신발이 그의 발등을 찍었다.

“악!”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을 놓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유채는 루프스가 알려준 대로 명치를 강하게 타격했다. 그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 생각보다 효과 있네요.”

유채는 뿌듯해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셀레네가 준 능력으로 강화 마법을 실험해 보는 중이었다. 수인들은 어린 소녀라고 해도 모두 유채보다 힘이 셌다. 불리한 완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마법에 의지하려는 것이었다. 마력 소모나 강도를 적당한 수준으로 조절하는 연습으로 루프스와의 호신술 수업은 참 좋은 기회였다.

“신발 굽으로 발등을 찍는 것은 어디서 생각해 낸 것인가?”

루프스는 신발을 벗고 발을 살폈다. 유채에게 찍힌 발등이 벌겋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왼쪽 팔을 공격당하지 않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내가 사는 곳에도 호신술은 있어요. 주워들은 것을 이용한 것뿐이에요.”

유채는 호신술을 핑계 삼아 루프스를 샌드백처럼 때릴 수 있다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통쾌하기까지 했다. 강화 마법도 익히고 호신술도 익히고 기분도 풀고 일석삼조였다.

유채는 땀을 식힐 겸 자리에 앉았다. 이제 오월 둘째 주였다. 에클레시아에 다녀왔던 게 지난주이니 아직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속은 후련한가?”

“예?”

“아니다. 마음은 편하냐고 묻는 것이다. 혹여나 내가 불쾌한가 싶어서 물었다.”

“그래서 당신을 고른 건데요.”

루프스는 궁녀들이 가져다 준 물을 유채에게 건넸다.

“영광이군.”

“별개 다 영광이네요.”

유채는 시원한 물을 마셨다. 이곳도 사계절이 있는 것인지 오월 중순이 되자 날이 푹푹 찌듯이 너무 더웠다.

루프스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저를 때리면서 후련한 표정을 짓던 유채가 이렇게라도 저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풀길 바랐다. 사과는 계속 할 것이고, 유채가 제게 무슨 짓을 하든 그녀의 마음이 더 편해진다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다.

“이제 메치는 걸 해보지.”

“도움이 되는 거라면 알려줘요,”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을 잡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동작을 여러 번 본 후에 유채는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루프스의 손을 잡고 연습을 했다.

“실전으로 해도 괜찮겠나?”

유채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프스는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유채는 곧바로 루프스의 명치를 타격하고 무릎을 세게 친 다음 팔을 잡아서 그대로 땅에 메쳤다. 바닥으로 떨어진 루프스는 등보다 왼팔의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잘하네.”

루프스는 아픈 팔을 주물럭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쉴까 하며 유채에게 넌지시 말을 던졌다.

“지치지 않나? 몸이 벌써 땀으로 범벅이 되었는데.”

루프스는 일을 보다가 온 것이라 예복 차림이라 더 답답했다. 루프스는 겉옷을 벗고 셔츠의 단추도 몇 개 풀었다. 팔도 걷고 싶었지만 붕대가 감긴 팔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다 싶어서 그만두었다. 유채에게 괜히 죄책감 같은 걸 지어주고 싶지 않았다.

“더운 것 외에는 괜찮은데, 왜요? 아파서 쉬고 싶어요?”

유채는 루프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유채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지만, 잠깐 사이에 표정이 다채로워져 있었다. 잘 웃고 장난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다. 루프스는 명치를 문지르면서 답했다.

“나도 괜찮다. 혹시 배는 안 고픈가? 벌써 점심때인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유채는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곳에는 시계는 없어서 유채도 어쩔 수 없이 해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곤 했다.

“움직이기 귀찮으면 여기로 식사를 가져오라고 하지. 괜찮겠나?”

“마음대로 해요. 언제는 그쪽 마음대로 하지 않은 일이 있었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루프스는 유채가 날이 선 말을 할 때마다 항상 억지로 그녀를 끌고 다녔던 것을 후회했다. 자신도 나가기 싫은 곳이 있고 마주하기 싫은 수인이 있던 것처럼 유채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항상 유채를 제멋대로 데리고 다녔다. 지독하게 제 이기심만 채우려고 한 행동이었다.

유채는 제 대답만 기다리고 있는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꼬리만 달려 있었다면 저만 보는 강아지라고 해도 믿을 만한 표정이었다. 유채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면서 말했다.

“여기로 가져오라고 해요. 오는 길에 블루벨도 불러오면 더 좋고.”

“알겠다. 그렇게 하겠다.”

루프스는 헤나를 불러서 명을 내렸다. 헤나는 제 아래에 있는 궁녀들에게 말을 전했고 궁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더 할까요?”

유채는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루프스가 공격을 하면 알려준 대로 하면서 항상 카운터 하나를 더 날리곤 하였다. 주로 턱이나 복부였는데 루프스는 유채의 공격을 그대로 다 맞아주었다.

예상보다 유채의 힘이 세긴 했지만 그가 당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전투 때에는 더한 공격도 더 많이 맞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유채가 주는 것이라면 피하지 않고 다 맞고 싶었다.

“헉. 헉. 헉.”

유채는 숨을 몰아쉬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몸을 계속 움직이는데 지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유채는 이제 그만하겠다는 뜻을 보이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채는 강화마법을 걸었던 팔을 흔들었다. 루프스도 돌조각에 긁힌 상처를 털면서 일어났다.

“당신 침으로 지혈 가능하지 않아요?”

유채가 손부채질을 하면서 물었다.

“위르형일 때는 효과가 별로 없다. 그리고 그냥 긁힌 정도니 지혈할 필요도 없다.”

루프스 역시 더운 듯이 옷을 펄럭여서 바람을 일으켰다.

“호신술은 원래 누군가를 상해 입히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당황시켜서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한 거다. 일단 상대를 제압하면 더 상대하려고 하지 말고 당장 도망쳐.”

유채는 루프스를 획 돌아보면서 말했다.

“나에게 맞는 것이 짜증나서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에요?”

“이 정도 맞은 거에 짜증을 냈다면 난 루프스가 되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이건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너는 원래 전투를 할 줄 알던 것도 아니니 너를 공격하는 자를 힘으로 이기려 하지 말란 말이야.”

루프스는 물을 한 모금 마곤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항상 지켜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하지 않을 것 같으니. 나는 네가 안전하게 몸을 지킬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도망쳐서 나에게 달려오든 몸을 숨기든 해. 그게 네 안전을 위한 최고의 길이니.”

루프스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왼쪽 어깨와 팔을 만졌다. 유채의 눈이 루프스의 왼팔로 향했다. 그는 어지간해서는 몸을 뒤로 빼지 않았지만, 왼팔에 한해서는 주저하거나 무리하지 않으려는 기색을 보였다. 유채는 땀에 젖은 셔츠 안으로 붕대가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틀 전 밤엔 저를 들어 올리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시간 핵의 효과가 언제 다하는지는 프레드릭만이 안다고 하였다. 제가 박아 넣은 것 때문에 여태껏 고생을 하는 걸 보니 당연한 천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죄책감도 생겼다. 유채는 괜히 마음이 불편해져 물만 벌컥벌컥 마셨다. 저건 천벌이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한 것에 대한 적합한 벌이었다.

【‘속은 후련하나?’】

못 들은 척 했지만, 분명히 들었다.

유채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어차피 헤어질 사람인데 마음이 불편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유채가 생각을 털어낼 때 쯤, 차가운 무언가가 볼에 닿았다. 유채는 고개를 들었다.

“더워 보여서 그런다.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그랬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찬물을 적신 수건을 넘겨주었다. 유채는 그것으로 땀을 닦고 몸을 식혔다. 유채의 기분이 또 심란해지려던 차에 궁녀들이 음식을 들고 왔다. 아쉽게도 블루벨은 케릭스와 같이 있다며 나중에 오겠다고 했고 유채는 루프스와 단둘이 밥을 먹게 되었다.

“블루벨이 오지 않은 것이 속상한가? 데려올까?”

“괜찮아요, 괜한 방해꾼이 되기는 싫어요. 그냥 심란한 거예요. 어린 딸 시집보낸 엄마의 기분이랄까. 우리 엄마도 나 시집보내면 그럴까 싶기도 하고.”

“그곳에 있을 때는 수컷들에게 인기 있었나?”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유채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루프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 그를 보고 유채는 한숨을 쉬었다.

“대답해 줄 테니까.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든 답해주마.”

“왜 나한테 족쇄를 안 채우는 건가요? 이게 당신 찌르고 도망갔던 거에 대한 벌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면서 방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똑같고.”

“변하기로 결심했다 하지 않았나. 너를 사랑하기에 강압적으로 잡기보다 네가 스스로 내 곁에 남기를 원하기에 이렇게 했다. 보는 눈이 있어 차마 방문까지는 열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파렌티아는 당분간만 하고 있어라,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그게 네 방어막이 될 거다.”

“나는 떠나야 해요.”

“……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유채에게 수면제를 먹여서 영원히 재워둘까, 아니면 족쇄보다 더한 것으로 묶어놓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변하기로 했으니까. 강압보다는 배려로. 그렇게 유채의 마음을 돌리기로 노력했다.

“넌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도망갈 것이고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려 할 테지. 나는 네가 없으면 죽을 만큼 괴로워할 것이고.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만일 네가 신과 계약을 통해서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다시 내게 돌아오게 만들기로. 그러니, 변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보기에는 아직도 부족해 보이겠지만.”

“…….”

“너에게는 끔찍한 기억밖에 없을 이곳을 더 좋은 곳으로 바꿔볼 생각이다. 포트리스와도 합의점을 찾아볼 것이고 수인들 사이의 갈등도 봉합해 볼 것이다. 너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나 그곳만큼 좋게 만들어볼 생각이다. 이곳에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게.”

루프스는 불편한 표정의 유채를 보면서 제 말이 그녀에게는 거슬리는 것임을 알았다. 루프스는 먹고 있던 것을 대강 정리하고 일어섰다. 어차피 유채에게 자신은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이였다.

“일이 바빠서 먼저 일어나겠다. 잘 먹고 들어가서 쉬어라. 밤에 데리러 가지. 오늘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 볼거리가 더 많을 테니 기대해도 좋다.”

유채는 루프스뒷모습에 입안이 쓰고 마치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그는 변하고 있었다. 집요한 스킨십도 없었고 몸도 자유로웠다.

유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젠장.”

웃는 얼굴에 침 뱉기 힘들다는 말이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축제의 마지막은 마치 촛불이 제 모든 힘을 다해서 발화하듯이 열기가 넘쳤다. 오늘은 여러 가지 놀이들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구경을 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유채는 공을 던져서 과녁을 맞히면 경품을 얻어갈 수 있는 노점 앞에 멈췄다. 루프스는 팔짱을 끼고 유채가 하는 것을 구경했다.

“에이. 아깝게!”

유채는 벌써 아홉 번째 공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은 매번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떨어지거나 맞추더라도 과녁이 넘어가지를 않아서 경품은 하나도 얻지 못했다. 상인은 낄낄거리며 좀 더 잘해보라고 유채를 약 올렸다. 유채는 그를 흘겨보고 마지막 열 번째 공을 던졌다. 이번에는 아예 조준조차 잘못하여 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아깝네, 아가씨.”

“이거 사기 아니에요?”

유채는 상인에게 따져 물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흥분한 것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유채가 분한 얼굴로 쏘아보자 루프스는 표정을 가다듬고 유채 옆으로 다가와 상인에게 돈을 건넸다.

“내가 한번 해보지. 공을 주게.”

“에이, 손님. 손님이 최소 벨라토르가 아닌 이상 힘드실 겁니다.”

상인은 루프스에게 공 다섯 개를 담은 바구니를 주었다. 루프스는 그게 아까 전에 유채가 던진 것보다 더 가벼운 거라는 걸 눈치챘다. 그는 얄팍한 상술에 상인을 힐끔 바라보고는 공을 던졌다.

“어! 넘어갔다.”

유채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상인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힘이 세 보여서 일부러 공도 가벼운 것으로 골라주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가 노렸던 과녁을 모두 넘어뜨렸다.

루프스가공 다섯 개로 다섯 개의 과녁을 모두 쓰러뜨리자 상인은 사색이 되어서 경품을 주고 둘을 얼른 쫓아내었다.

“고마워요.”

“별것 아니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잘난 척은.”

유채는 입을 삐죽이고는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루프스는 유채의 뒤를 따라가다가 조금 용기를 내어서 그녀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채는 그를 힐끔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티를 내진 않았다.

다음으로 유채가 관심을 보인 곳은 뽑기판이었다. 게임은 간단했다. 판에 적힌 번호 중 원하는 번호에 네 개에 판을 놓은 뒤 상인에게 돌려주면 상인이 판을 뒤집었다. 특정 번호를 밑에는 받을 수 있는 경품이 적혀 있었는데. 만일 그 번호 위에 판이 있었다면 해당 경품을 받을 수 있었다. 유채는 심각하게 어디에다 사각형을 놓을지 고민했다.

“이봐요.”

유채가 루프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디에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유채의 물음에 루프스는 적당한 지점을 손으로 짚어주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가리킨 곳에 사각형을 놓고 상인에게 건네었다. 루프스는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인지 딱 정확한 위치를 짚었다. 유채는 경품을 받고 아이처럼 기뻐했다.

“당신도 이럴 때는 쓸모 있는 존재네요.”

“다른 때에도 쓸모 많다. 뭐, 너 호신술 알려주는 것이나.”

루프스의 농담에 유채는 작게 웃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제 말에 웃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여러 노점을 돌아다니다 보니 유채의 손에는 금세 경품이 가득해졌다. 루프스는 그것들을 대신 들어주었다. 유채는 다시 가벼워진 몸으로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러다 지쳐서 잠깐 쉬기 위해 광장으로 나와 의자에 앉았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어딘가에 다녀왔다.

“이거.”

루프스는 유채의 앞에 독특하게 생긴 사탕을 내밀었다. 실처럼 가늘게 뽑아낸 사탕이 막대에 둘둘 감겨 있었다. 루프스도 똑같은 것을 입에 물고 있었다.

“엔젤 헤어란 사탕이다. 설탕을 녹인 것을 길게 뽑아낸 거지. 맛있을 거다.”

유채는 입맛을 다시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설탕으로 만든 것이라 달기는 엄청 달았다.

“아침에 물었던 말 있지 않나? 수컷들에게 인기가 있었냐고…… .”

“아. 그거. 딱히 인기는 없었어요.”

유채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곳 수컷들은 죄다 눈이 멀었나 보군.”

“그래도 남자친구는 있었는데.”

유채는 둘둘 이어진 엔젤헤어를 손으로 떼어내면서 슬쩍 말을 던졌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루프스는 놀란 얼굴로 유채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반응에 고개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거기 애들이 죄다 눈이 먼 건 아니라서요. 설마 내가 당신하고 첫키스를 했을 것 같아요?”

루프스는 유채가 딴청을 피우는 것을 보곤 그게 거짓말임을 알아차렸다. 루프스는 작게 웃었다. 유채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웃어요?”

“아니다. 저기 엎어진 수인 꼴이 볼만하여 웃었다.”

루프스는 굳이 꼬치꼬치 캐물었다가는 유채가 화를 낼까 봐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는 유채가 이런 식으로 장난을 걸었다는 데에 감격했다. 유채는 루프스를 흘겨보면서 엔젤헤어를 먹었다.

“맛있나?”

“사탕이 맛이 없을 리가 있나요. 다 맛있죠.”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간혹 너무 달다고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그때 마치 군악단의 음악 소리처럼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유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퍼레이드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인들이 퍼레이드 행렬 가까이로 다가갔다. 멈춰선 악단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수인들은 하나둘 짝을 지어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축제 마지막 날의 가장 큰 행사지. 춤을 추면서 서로를 축복하는 것이다.”

“아.”

유채는 흥미로운 눈으로 춤추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저기에 참여하고 싶은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유채를 억지로 데리고 나가면 싫어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유채가 관심을 보이는데 이렇게 그냥 두기도 뭐했다.

루프스는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같이 나가볼 생각이 있나?”

“어. 그게…….”

“내가 싫은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나가보는 것도 좋을 거다.”

유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흥겹게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 게 참 즐거워 보였다. 유채는 루프스를 힐끔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오른손을 붙잡고 수인들 틈으로 들어갔다. 루프스는 처음 보는 춤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유채를 적당히 리드했다.

“괜찮나?”

유채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보이겐 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서너 바퀴 정도 돌았을 무렵 음악이 멈추고 악단장으로 추정되는 이가 무어라 소리를 쳤다.

“이렇게 춤을 추고 난 뒤에는 작은 극을 보여주곤 하지.”

주위의 수인들은 극을 보기 위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루프스는 옷을 벗어서 유채가 앉을 자리에 펴주었다. 마치 마당놀이를 보는 것처럼 악단을 중심으로 수인들이 빙 둘러앉았다.

유랑극단은 극을 시작했다. 수인 내전에서 늑대 수인들이 대승을 거두었던 전투에 관한 이야기였다. 루프스는 약간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저쪽이 그쪽인가 봐요?”

유채가 손가락으로 루프스 역을 맡은 뚱뚱한 중년 배우를 가리켰다. 연기력은 볼만했지만, 제 역할을 할 이를 저런 볼품없는 중년을 세워놓았다는 것에 루프스는 기분이 언짢았다.

“난 저렇게 안 생겼다.”

루프스의 볼멘소리를 들은 유채는 비웃음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다시 극에 집중했다. 루프스는 제가 겪은 일은 미화해서 유쾌한 활극으로 바꾸어놓은 이야기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전투는 처절했고 잔혹했다. 조금의 유쾌함도 없는 전투였다.

루프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클라이막스로 향해가는 극을 바라보았다. 유채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보고 있나 싶어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유채의 고개가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옆으로 다가갔다. 유채는 졸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낮에는 호신술을 배운다고 격한 운동을 했고 밤새 축제를 돌아다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어깨를 내어주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어깨에 기대어 편히 잠에 들었다.

극이 끝나자 폭죽이 터졌다. 색색갈의 빛이 하늘을 물들였다. 루프스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깨에 기댄 유채의 얼굴이 여러 빛으로 물들었다. 루프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시카리우스들이 찾아온 루비 조각을 유채에게 건네주고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면, 돌아오겠다는 대답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루프스의 가슴에 차올랐다.

* * *

“란텔님, 편지가 왔습니다.”

신참 벨라토르가 란텔에게 편지를 가져왔다. 신참 벨라토르는 란텔을 볼 때마다 항상 놀라곤 하였다. 약간 잘린 꼬리를 제외하면 마레 위르의 외관과 흡사하여 마레 위르로 보이지만 란텔은 마레 위르와 늑대 수인의 혼혈이었다. 동물형으로 변할 수 있는 혼혈이라 하더라도 수인들과 강함의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란텔은 그 차이를 당당히 자신의 노력으로 이겨내고 벨라토르 중 꽤나 높은 자리에 올라왔다.

“이리 줘봐라.”

회색 머리카락의 란텔은 편지를 뜯었다. 그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헤임달에게 온 편지였다. 헤임달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핍박받던 그를 돌봐주고 많은 것을 가르쳐준 은인이었다. 란텔은 헤임달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애꾸눈의 란텔은 편지를 주욱 읽어 내렸다. 그는 편지를 접어서 품에 집어넣었다. 헤임달은 하워드 형제를 죽이라고 했다. 그것으로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란텔은 헤임달 곁으로 돌아가 그를 다시 지킬 생각이었다.

“무슨 편지입니까?”

“은사님께서 도와달라는 편지다. 별 어려운 것이 아니라 들어드릴 생각이야.”

“아. 그러십니까. 아! 저 울페스 헤르티아님께서 찾으셨습니다.”

“알겠다. 가마.”

란텔은 자신이 혼혈이라 완전히 늑대 수인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처지를 이용해서 헤르티아의 신뢰를 얻어내었다. 다 헤임달에게 배운 기술이었다. 란텔은 자신이 똑똑한 줄 알고 있는 헤르티아를 비웃었다. 헤르티아는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라일라를 죽인 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플로서스님.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저, 라이칸님께 사실을 고하겠습니다.’】

란텔은 토스 호무스에 돌아와 로보의 유화정책의 틈을 파고들어 시카리우스에 들어갔고 플로서스의 신뢰를 얻어냈다. 플로서스의 신임을 얻어내는 것은 간단했다. 혼혈로 마레 위르 어머니에게 학대받아 마레 위르를 혐오한다는 태도를 플로서스 앞에서 드러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처럼 그는 곧 플로서스의 측근이 되었다. 마레 위르에게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플로서스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결국 플로서스는 로보의 명 없이 독단으로 라일라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란텔에게 내렸다. 헤임달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란텔이 임무에 성공한 후 플로서스는 불안해했다. 라일라 암살의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는 뻔하기 때문이었다. 플로서스는 제 지위를 이용해서 진상을 파헤쳐지는 것을 막았다. 그가 만사 제쳐 두고 그 일에만 집중했던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플로서스가 일선에서 물러난 것도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그 덕택에 여태까지 로보의 억울함은 드러나지 않았다.

【‘안 돼! 그렇게 되면 자네나 나나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건가! 입 다물게.’】

전쟁이 끝나고 란텔은 플로서스를 협박했다. 란텔은 신분을 세탁해서 벨라토르가 되어 울피누스 호무스에 자리 잡았다. 헤임달을 위해서 헤르티아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때가 왔다.

“부르셨습니까, 헤르티아님.”

“란텔. 어서 와라. 네게 물어볼 것이 있어.”

란텔은 저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헤르티아를 비웃었다. 모두 헤임달의 손바닥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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