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늑대왕 루프스-12화 (12/16)

Chapter 12. 말들의 땅, 소니페스 호무스 [Sonipes Humus]

“알렉스. 일은 어떻게 됐어?”

레이라는 오랜 진통 끝에 예쁜 딸을 낳았다. 프레드릭은 잠든 아기와 레이라를 남겨두고 방 밖으로 나왔다. 알렉스가 지친 듯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프레드릭은 레이라를 보살피기 위해서 자신의 권한을 알렉스에게 위임하고 그를 통해서 일의 진행사항을 주고받았다.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렉스는 당장이라도 전쟁을 하려는 듯이 군사훈련 하고 군비를 늘렸다. 렉스 휘하의 장군들은 전쟁에 우호적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개선의 여지는 보였다. 수인들이 내전의 상처에서 빠르게 회복하는 모습에 겁을 먹은 몇 장군들이 전력차로 렉스의 의견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일단, 상황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전력 차를 대면서 전쟁을 반대하는 게 어느 정도 먹혀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쟁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 설마 마법사들까지 동원해 가면서 무기들을 만들어냈을지는 몰랐지. 그래도 우리 쪽으로 돌아선 사람들도 있어. 덕분에 여유가 좀 생겼고.”

“그럼 전력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방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것이니까. 설마 헤르티아를 설득하는 것으로 시간을 번 것은 아니지?”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프레드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프레드릭은 두 손을 모으고 깍지를 꼈다. 일단 라일라의 죽음에 숨겨진 진실을 밝히면 렉스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이다. 렉스가 지금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것은 로보로 인해 라일라가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죽은 연인의 문제도 있었지만 동생을 아꼈던 그에게는 동생의 죽음이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그 일이 로보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면, 렉스의 분노는 갈 곳을 잃을 것이고, 그렇게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라일라의 유지를 그가 다시 이으려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강경파들의 기세가 꺾이게 되는 것이다.

루프스도 아버지의 억울함을 알게 되면,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고 포트리스에 보다 유화적으로 나와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헤르티아였다. 헤르티아가 루프스와 적대하는 것을 그만두면, 운이 좋아 헤르티아가 루프스와 화해를 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포트리스에 이득이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 헤르티아는 루프스와 대립하기 위해 군소 일족을 끌어들이려 의도적으로 포트리스와 척을 지는 중이었다. 그런 헤르티아가 루프스에 대적하는 것을 멈춘다면 포트리스도 한숨 돌리게 될 것이다.

여우 일족은 이 스티폴로르에서 늑대 수인 다음가는 세력이었다. 헤르티아가 포트리스의 우방이 되어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서로의 죗값을 치르기 위한 교류를 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화합은 가능할지도 몰랐다. 대륙은 전쟁으로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 되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가시는 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 스티폴로르로 온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수인들을 몰아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러니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그 원인을 정확히 규명해야했다.

“렉스 스승님을 대표로, 강경파 측에서 두 명, 온건파 측에서 두 명이 울피누스 호무스로 가기로 했어. 나는 갈 거고, 형은 어쩔 거야? 또 레이라를 남겨 두고 가겠다고 하는 건 아니지?”

프레드릭은 산후조리를 도우면서 레이라와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프레드릭, 만일 여우 일족의 땅으로 가야 한다면 가도 좋아.’】

레이라는 환히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레이라의 부드러운 손이 프레드릭의 손을 감싸고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잠깐의 불안은 견딜 수 있다고 자신에게 생사를 알려주는 마법만 걸고 가달라는 레이라에게 프레드릭은 너무 미안했다. 프레드릭에게 레이라는 언제나 너무 과분한 존재였다.

“내 이름도 올려.”

“뭐? 형, 진짜 미쳤어?”

“어찌 되었든 우리는 여우 일족의 땅에 한 번은 가야 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야. 렉스 경을 따라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야.”

알렉스는 프레드릭을 타박하려다가 그의 꽉 움켜쥔 손을 보았다. 알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프레드릭도 사람인데 아내와 딸을 두고 먼 길을 가는 것이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알렉스. 포트리스의 사람들은 대륙에서 핍박받던 사람들이 살기 위채 도망쳐 온 곳이야. 레이라도 마찬가지야. 레이라는 전쟁에 휩쓸려 포로로 잡혀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겨우 도망쳐서 이곳으로 왔어.”

레이라가 결혼 전에 털어놓은 이야기였다. 대륙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혀서 상상하기도 힘든 끔찍한 생활을 한 달가량 하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했다고 제게 말했다. 그때 레이라의 나이는 열셋이었다. 레이라 같은 사연을 지닌 이들은 이 포트리스에 수두룩했다. 살기 위해서 위험한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왔는데 그들은 이곳에서도 편하게 살지 못했다. 병에 걸려도 약초를 구할 수 없어서 죽어나갔고 겨울에는 식량이 부족해서 굶어죽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인 이곳을 나는 더 좋게 만들고 싶어. 그래, 강경파의 말처럼 수인들을 모두 쫓아내면 우리가 스티폴로르를 차지할 수 있지. 하지만 그동안 전쟁으로 고통받는 포트리스 사람들은? 그리고 아무 죄 없는 수인들은? 나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결말을 찾고 싶었어. 수인들과의 화합을 통해서 우리도 스티폴로르의 일원이 됨으로써 포트리스 사람들을 안전하게 만들고 싶었어.”

알렉스는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 딸에게, 내 아내에게 이런 세상을 주고 싶지 않아. 내 한 몸 다 바쳐서라도 내 딸과 아내에게 배곯지 않는 세상, 쉽게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어. 나는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는 세상을 원해. 그러니 가야 해. 지금 이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가진 사람은 우리뿐이야.”

알렉스는 프레드릭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렉스와 바론 그리고 알렉스와 프레드릭이 여우 일족의 땅에 사절단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다.

* * *

“프레드릭, 그래서 언제 떠나는데?”

레이라는 레베카에게 젖을 물리며 물었다. 프레드릭은 자신과 레이라를 반반씩 빼닮은 딸을 보면서 답했다.

“아직 멀었어. 가기로 한 사람만 결정했을 뿐 언제 움직일지는 정하지 않았어. 이제 오월의 여왕 축제가 시작되었으니까. 아직은 가기가 좀 일러. 빨라도 일, 이 주 뒤야. 그러니 지금은 불안해하지 마. 이번 일은 지난번처럼 위험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프레드릭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레이라를 돌봐줄 아이를 찾았다. 헤임달과 관련되지 않은, 이제 막 스티폴로르에 도착한 고아 여자아이였다. 이름은 베키였다. 프레드릭은 그녀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로 했다.

새근새근 잠이 들자 프레드릭은 레이라를 불렀다.

“레이라. 잠깐 보여줄 것이 있어.”

“어딘데?”

프레드릭은 몸을 푼 지 얼마 안 된 레이라가 불편할까 걱정되어서 그녀를 안아 들었다. 레이라는 작게 웃으며 프레드릭의 목을 팔로 감았다.

프레드릭은 부엌으로 레이라를 데리고 가 그녀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그는 레이라와 손목을 뒤집어 자신의 손목과 겹치고 스펠을 읊었다. 레이라의 손목과 프레드릭의 손목에 끝이 이어진 리본 모양의 선 무늬가 새겨졌다.

“이게 뭐야?”

“우리가 서로 살아 있는지, 다쳤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거야. 그게 선명하면 내가 아주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이고, 그게 일부가 사라지면 내가 다쳤다는 거고, 그게 완전히 사라지면……. 알지?”

차마 제가 죽었다는 뜻이라는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를 믿었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니, 프레드릭은 이번에도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나도 네가 걱정되어서 하나 만들었어.”

프레드릭은 자신의 손목에 새겨진 무늬를 가리켰다.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프레드릭은 바닥에 깔린 러그를 들추었다.

“클라위스.”

프레드릭의 말과 함께 갑자기 바닥에 문이 하나 생겼다. 레이라의 눈이 커졌다. 프레드릭이 그 문을 열어젖히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고 불이 켜졌다. 비밀 지하실이었다. 프레드릭이 입을 열었다. 키르케가 포트리스가 불안했던 시절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몰래 만들어놓은 시설이었다.

“키르케님이 만드신 거야. ‘클라위스’라고 말을 하면 숨겨져 있던 문이 나타날 거야. 이 안에는 족히 일 년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로 내려와서 내가 찾으러 올 때까지 숨어 있어.”

“무슨 일?”

“만일을 대비해서야. 난 헤임달이 두려워. 내가 없는 동안 너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무서워. 물론 헤임달에게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로 레베카와 베키를 데리고 내려와서 숨어. 아무리 마법에 능통한 자라고 해도 ‘클라위스’란 단어를 모르면 이 문은 알 수도 없고 열 수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여기가 포트리스에서 가장 안전해. 안에는 밖의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마법을 걸어놨으니 그걸 확인하면 돼.”

“알았어, 프레드릭.”

프레드릭과 레이라는 서로를 마주 안았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온기, 향기, 촉감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온몸에 새기고 있었다. 프레드릭이 레이라에게 속삭였다.

“어릴 적에 사라 할머니가 말해준 적이 있어. 그분의 뜻 모를 예언이 거의 다 맞아들어 갔던 것을 보면 아마 이것도 맞을 거야.”

고양이 일족의 고유 속성은 예지로 각 개체마다 정확도는 가지각색이었다. 아주 잘 맞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예 못 맞추는 이들도 많았다. 하워드 형제를 잠시 길러주고 그들을 포트리스에 데려다주었던 사라는 꽤나 정확한 예지를 하는 고양이 수인이었다.

“뭔데?”

“나와 알렉스는 분쟁을 불러오면서 동시에 분쟁을 잠식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고.”

레이라의 이마에 닿았던 프레드릭의 입술이 그녀의 콧날을 훑고 내려갔다. 레이라는 눈을 감았다. 프레드릭의 입술이 레이라의 입술 앞에서 멈췄다. 서로의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레프스로 분쟁을 일으켰으니까 이제 분쟁을 잠식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겠지.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의 위험은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

프레드릭이 레이라의 손을 꽉 잡았다.

“나는 너를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는 거야. 얼른 포트리스와 수인 사이의 분쟁을 끝내서 너에게 이 스티폴로르를 보여줄게. 우리 레베카가 이 좁은 땅에서 약초를 얻지 못해 치료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게 만들어 줄게. 당신과 레베카가 나에게는 세상의 전부야. 난 너를 위해서, 우리 레베카를 위해서 꼭 성공하고 돌아올게.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줘.”

“기다릴게. 난 여기서 널 기다릴게. 내가 선택한 남자인데 내가 믿어야지. 그러니까, 꼭 돌아와. 기다릴게.”

프레드릭은 약속의 의미로 레이라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목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서로의 입술을 음미했다. 그들 사이에 이별은 영원히 없을 것 같았다.

* * *

“크흑!”

“엄살이 느셨습니다.”

오르페가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루프스의 왼팔의 상처를 소독했다. 오르페는 허락만 된다면 루프스를 상대로 연구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왼팔만 계속 낫지를 않았다. 신체 다른 의 재생력은 그대로인데 왼팔만은 상처가 나으려 하질 않았다. 그런 중에 계속되는 부상으로 그의 왼팔은 마레 위르 수준으로 약해져 있었다. 오르페는 다시 붕대를 감아주었다.

“다시 한 번 드리는 말씀이지만, 왼팔은 쓰지 않으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그러시는 분이 유채 양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주신다는 명목으로 단도를 건네주십니까?”

수인들은 전투시에 날붙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단단한 피부가 마레 위르의 날붙이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레 위르에게는 그런 무기가 필요하기에 루프스는 유채에게 마레 위르들이 쓸 법한 단도를 주었다. 그리고 그 단도를 이용하여 공격하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당연하게도 루프스는 그로 인해 자잘한 자상들을 입었다. 유채가 단도를 잘못 다루어 다칠 것 같으면 날을 제 손으로 대신 잡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르페, 올해 나이가 몇인가?”

“이제 일흔을 향해갑니다.”

“그럼 그대의 지혜를 구하지. 내가 아주 많이 잘못을 한 어떤 이가 있어, 그이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고, 또 그이가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용서를 바라십니까?”

오르페는 루프스가 누구를 마음에 품고 저런 말을 하는지를 알았다. 루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없다고 말하면 거짓이겠지. 그런데 내가 저지른 일이 너무 커서 감히 용서를 바라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그이는 그 화와 분노를 가슴에 품지 않고 다 털어버리고 편해졌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그자가 나에게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 충분히 사과받고 있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화가 풀리면, 혹여나 자신 때문은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쌓은 인연들이 그리워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도 결국은 제 이기심인지라 루프스는 아직도 이러는 자신이 한심했다. 모든 것은 유채의 선택에 달렸는데 그 선택에 제 희망을 불어넣고 싶어 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이 늙은이가 드릴 말씀은 하나입니다.”

오르페가 의료 도구들을 챙기면서 입을 열었다. 뱀 수인 특유의 쉬잇거리는 소리가 적막 속에서 울렸다.

“잘못을 하셨고 그것을 아셨다면 온 마음을 다해서 용서를 비세요. 그리고 용서를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용서를 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기를 바란다는 진심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를 빈다는 표현보다는 사과를 한다는 말이 더 맞습니다. 용서를 빈다는 것은 피해자가 아닌 자신을 위하는 말이니까요. 어찌되었건, 중요한 것은 진심입니다. 잘못을 아셨거든 그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세요. 수인이 수인을 용서하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그 수인의 마음에 맡길 뿐, 사과를 하는 이는 그 수인을 위해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나도 아는 소리를.”

“원래 가장 기본이 가장 어렵습니다.”

루프스는 오르페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단검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던 때를 회상했다.

* * *

유채의 칼날에 볼이 찢겼다. 붉은 실금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루프스는 손을 들어 피를 닦았다.

“괜찮다. 이 정도는 금방 낫는다.”

루프스의 말대로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유채는 지쳤는지 단검을 검집에 꽂아놓고 자리에 앉았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물을 건넸다. 유채는 나무그늘에 앉아서 땀을 식혔다.

루프스는 유도, 주짓수 비스하게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더니 이제는 도구를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봉이었고 다음에는 옷으로도 대체 가능한 천쪼가리였다. 그러고는 오늘은 단검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왜 단검을 가져온 거예요?”

피와 땀을 닦던 루프스가 입을 열었다.

“라일라님이 대륙에 계실 때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단검을 호신용 삼아 가지고 다녔다고. 마레 위르에게, 특히 너처럼 연약한 마레 위르에게는 단검을 잘 다룰 수만 있다면 그보다 나은 무기를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당신 심장이나 목줄을 찌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말했지 않나? 나는 쉽게 죽지 않는다고.”

루프스는 곧 사라질 것만 같은 웃음을 지었다. 유채는 기시감에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그 말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깨달았다. 에클레시아에서. 그래, 에클레시아에서 들었던 말이었다.

【‘네가 나를 때려서 분이 풀린다면, 아니, 지난번처럼 칼을 꽂아도 괜찮다. 네가 주는 벌이라면 모두 달게 받을 테니, 소원을 빌어서 돌아와 주면 안 되나? 돌아와 준다고 약속만 하면, 네가 찾는 게 무엇이든 도와주겠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때리거나 상해를 입히면 내가 당신을 용서할 거라 생각했나요?”

물을 마시려던 루프스는 얼른 물병을 내려놓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생각한 적 없다. 나는 그저 네 몸의 안전을 바랄 뿐이다. 네가 나를 연습 상대로 써서 후련해진다면 그게 내게는 더 다행이다.”

루프스는 유채가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랐다. 유채의 용서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불편해요.”

유채가 드디어 그동안 담고 있던 말을 털어놓았다. 유채는 그의 모든 행동이 다 불편했다. 그냥 그가 예전처럼 굴었으면 하였다. 지금 이렇게 설설 기는 듯한 그가 더 보기 싫었다.

“난 당신의 이런 행동들이 모두 불편하고 가증스러워요. 사람은 원래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나는 당신이 곧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냥 예전처럼 굴어요. 내가 편하기를 원한다면서요. 나는 당신이 차라리 예전처럼 굴었으면 해요.”

루프스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유채에게 전한 적이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변하기로 했다고. 그런데 변하지 말라는 말은 제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말로 느껴졌다. 유채가 제 사랑을 받아주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제 사랑이 부정당하지 않기를 원했다. 제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아주기만을, 진심으로 그것만 소망하였다. 그런데 유채는 아니라고 부정한다. 거절은 견딜 수 있지만 부정은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괜히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당신과 함께 축제를 보러 나간 건 그저 방법이 당신밖에 없어서예요.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리고 내가 그런 것으로 당신에게 마음을 풀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너의 마음을 얻기 위해 데려간 곳이 아니었다. 그저 너에게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루프스는 알렉스가 했던 말을 기억해 내었다.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는 그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제가 유채에게 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녀를 힘들고 아프게 한 일밖에 없는 자신은 죽어도 유채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스티폴로르에서의 좋은 기억을 그녀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 네가 이곳에서 즐거워하고 이곳과 맺은 인연을 생각해서 다시 돌아와 주지 않을까 하는 이기심이 아예 없었다고는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너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네가 기뻐했으면 했다. 그뿐이었다. 정말 그 마음 이상의 것은 없었다.”

“내가 아는 말 중에 최고의 복수는 그냥 잘 사는 거란 말이 있어요.”

유채가 루프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아요. 사과요? 들으면 고맙죠. 하지만, 당신과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왔어요. 나는 돌아가서 당신하고 겪었던 일은 과거로 남겨둔 채 잘 살 거예요. 내 삶이 있는 그곳에서. 그러니 당신은 이곳에서 살아요. 그게 나한테 용서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에요.”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가지 말라고, 나는 너 없이는 죽을 것 같다고, 제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렇게 가족이 그리우면 차라리 네 가족과 같이 이곳으로 오라고, 내가 네 가족을 위해서 뭐든 다 제공할 테니, 한 번만이라도 다시 돌아온다는 선택지를 골라볼 생각이라도 해주면 안 되냐고, 내가 평생 사과할 수 있을 기회를 주면 안 되냐고 빌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 마음을 유채에게 강요하는 행위였다.

유채는 그의 마음을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 그의 마음은 그 혼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루프스는 목이 메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이곳에 있는 동안은 계속 용서를 빌고 싶다. 그러니까 사과를 하고 싶다.”

“마음대로 해요. 아직도 내게 이동의 자유를 주지 않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루프스는 유채가 떠나기를 바란다면 언제든지 쉽게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것도 그녀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그는 유채가 잠시 머무르는 동안 최선을 다해야 했다. 유채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기를 바라야 했다.

【‘불편해요.’】

그래도 루프스는 그 말에 희망을 품었다. 유채가 그래도 변한 자신을 인식한다는 말이었다. 부질없는 희망이라 할지라도 루프스는 그 희망에 의지했다.

루프스는 일이 있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니페스 호무스(말 수인 일족의 땅)에 갈 것이다. 너도 따라갈 건가?”

“예?”

유채는 눈을 크게 떴다. 유채는 당연히 그가 저를 끌고 갈 줄 알았다. 매번 가지 말라고 하면서 저를 붙잡아두려고 하기에 당연히 이번에도 끌고 갈 줄 알았다. 말 수인 일족의 땅으로 출발할 날이 얼마 안 남은 상태였다.

“변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면 내 의견만 밀어 붙이면 안 되지. 그러니 묻는 것이다. 같이 갈 생각이 있나?”

루프스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숨겨가며 물었다. 유채가 소니페스 호무스의 일을 마지막으로 제게서 도망치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지막 기회였다. 변하기로 했으니 유채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다.

“같이 갈 텐가?”

* * *

“루프스님, 케릭스입니다.”

헤나가 케릭스의 도착을 고했다. 루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릭스가 들어오고 루프스의 고갯짓에 따라 헤나는 밖으로 나갔다. 케릭스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거절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마레 위르에 대해 적대감이 강하신 분이라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토스 호무스의 여론은 조금 바꿨습니다. 한 곳씩 바꾸어 나가면 레티티아님도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케릭스는 갈라진 입술에 침을 축였다.

“하지만 소니페스 호무스로 이동하는 것은 조금 무리입니다. 최근 군소 일족 측에서 마레 위르에게 간을 뜯겼다는 피해가 많아서 레티티아님에 악감정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마레 위르의 간이 수인의 동물화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레티티아님의 간을 노릴 이들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파렌티아가 있는데도?”

“원래 급박하면 못 할 일이 없는 법입니다. 루프스님의 보복보다는 당장에 제 친족들의 안위가 중요한 법이지요.”

루프스는 눈썹을 쓸었다. 동물화는 오래전부터 기록돼 온 병이지만 아직도 해결책이 없었다. 그나마 수인 내전 이전에는 괜찮았지만, 수인 내전 이후에 더욱더 극심해졌다. 어쩌면 마레 위르들은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프레드릭이 연구한 내용을 본 의사들과 마법사 놈들도 마레 위르 관점에서의 독특한 해결책을 보곤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었다. “그래도 내가 없는 궁보다는 안전하겠지. 그리고 포트리스와 연락은 가능한가?”

“렉스가 워낙 엄중하게 지키고 있는지라 페드로나 필립 같은 이들과 접근이 힘듭니다. 노력은 해보고 있습니다. 소니페스 호무스에 들어가면 보다 적극적으로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그리고 보석상을 알아보는 건 어떻게 됐지?”

루프스는 유채가 찾는 것이 라일라의 결혼 선물이라고 추측했다. 그가 유채보다 알고 있는 것이 많았기에 알아낸 정보였다. 어릴 적 라일라가 그것은 여우 일족의 수장고에 있던 물건이라고 귀띔해 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대륙에서 신녀였으니, 그것이 신물임을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붉은 루비 조각은 라일라가 죽은 뒤에 사라졌다. 베니니타스가 암컷 늑대 수인을 죽이면 항상 목 부근을 살펴보고 주머니를 샅샅이 뒤진다는 말을 들었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라일라의 죽음에 관여한 이일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그랬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일단 늑대 수인이 관여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수인은 일이 심각해지니 보석을 팔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베니니타스가 노리고 있으니,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없애려 했을 것이다. 보석을 처분하는 데는 당연히 보석상을 이용했을 것이고 말이다.

“아직 정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찾으면 그저 루프스님께 가져오기만 하면 됩니까?”

“그래. 가져와.”

루프스는 유채가 지난번에 인신매매단에 잡혀갈 뻔하고 우는 것을 보고 호신술을 가르쳐 주면서 분명히 깨달았다. 유채는 이런 험한 일과 어울리지 않았다. 저를 때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힘을 뺐다. 단도를 쓸 때도 제가 피를 흘리면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곱게 자란 아가씨인데, 이런 일이 무서운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유채가 제 어깨를 찌르고 도망갈 결심을 하게 만든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수인이었는지를. 곱디곱게 자란 유채에게 그런 잔혹한 일을 하게 만든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놈이었는지를 알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루비 조각을 찾으면서 그런 고생이나 험한 일을 하지 않기를 원했다. 유채를 저와 같은 곳으로 떨어뜨릴 수 없었다.

“내가 필요해. 내가 내 죗값을 치르기 위해 필요해.”

그러니 유채가 그것을 찾으러 가기 전에 자신이 찾아줄 것이다. 소니페스 호무스에서 유채를 도우면서 그 조각을 찾아서 건넬 것이었다.

나는 변했다고, 네가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그러니 제발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주면 안 되냐고.

“돌아와 주면 안 되나.”

루프스는 다시 혼자 남은 방에서 그의 소망을 털어놓았다. 사랑이란 것은 한없이 이타적이면서 이기적이었다. 루프스는 놓지 못한 제 이기적인 소망을 털어놓았다.

소니페스 호무스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안전을 생각해서 수인들이 가장 꺼려 하는 길로 이동했다. 카날리스 호무스(개 수인 일족의 땅)를 지나고 펠레스 호무스(고양이 수인 일족의 땅)를 지나는 길이었다. 대다수의 수인들은 펠레스 호무스를 저주받았다고 싫어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펠레스 호무스를 통과하기보다는 빙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 정도로 기피하는 땅이었다. 그러나 수인들이 피하는 길인 만큼 유채에게 안전한 길이었다. 하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그동안 잘 버티던 유채의 몸이 탈이 난 것이었다. 유채는 갑작스러운 몸살감기로 앓아누워 버렸다.

“그래서 봤어? 얼굴?”

카날리스 호무스와 펠레스 호무스의 접경지역에 있는 카니스의 별장에서 일하는 개 수인 궁녀와 궁관이 유채의 시중을 드는 궁녀인 실비의 허리를 찌르며 물었다. 유채의 몸 상태 때문에 일정을 늦추어 이곳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빅터가 바실리사 대신해서 별장으로 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루프스는 그를 피하며 떨떠름한 기색을 표했으나 유채의 상태 때문에 그냥 넘겼다. 실비는 미지근해진 대야를 조심스럽게 들면서 대답했다.

“어. 당연히 봤지.”

“그래서 정말 소문대로냐? 진짜. 루프스쯤이나 돼야 품을 수 있는 암컷이야?”

궁관인 세드릭이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심미안인 세드릭에게 저 멀리 토스 호무스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정말 꿈만 같은 것이었다.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집안 사정으로 궁관이 된 세드릭은 미인의 초상화를 그려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때마침 스티폴로르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미녀가 나타나 세드릭은 그런 미녀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다면 영광일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였다.

대야를 들고 있던 실비의 입술이 움직였다.

“더럽게 예뻐.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뽀얀 피부에 이국적인 분위기까지. 얼굴만 보면 마레 위르 창녀가 아니라 루프스님의 비(妃)라고 해도 믿겠더라고. 딱 수컷들의 정복욕을 들끓게 하는 얼굴?”

“근데 소문으로 저 마레 위르가 정말 루프스님의 비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왜, 오페라티오에서 루프스님의 옆에 섰다잖아.”

세드릭 옆에 서 있던 얌전한 인상의 궁녀가 말을 걸었다. 실비는 고개를 흔들면서 들고 있던 대야를 쭉 내밀었다.

“그렇게 얼굴 보고 싶으면 찬물 좀 떠와. 열을 식히려고 찬 수건을 이마에 계속 올려놓아야 하는데, 힘들다. 마레 위르 창녀 주제에 받는 대접은 진짜 루프스님의 비 수준이라니까.”

“알았어! 얼른 떠올게.”

세드릭이 대야를 대신 들고 찬물을 가지러 갔다. 얌전한 인상의 궁녀는 루프스가 몇몇 궁녀들을 제외한 이들의 접근을 막았다는 것에 굉장히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혹시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 그녀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고 뒤로 빠졌다. 세드릭이 찬물이 넘실거리는 대야를 들고 오자 둘은 주위를 살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콜록, 콜록.”

유채는 끙끙대면서 오한에 이불을 끌어안고 있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려 베갯잇을 흠뻑 적셨다. 열이 오른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실비가 마지막으로 올리고 간 수건은 벌써 미지근해졌다.

세드릭은 대야를 내려놓고 ‘오!’ 하는 탄성을 질렀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미녀다웠다. 절벽에 핀 한 송이 백합 같은 외모에 세드릭은 넋을 놓았다.

“하여간. 수컷들이란.”

실비는 끙끙대며 앓고 있는 유채의 이마에 다시 찬물에 적신 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수건으로 땀을 흘리고 있는 유채의 얼굴이나 팔 등을 닦아주었다.

세드릭은 신이 난 얼굴로 종이와 목탄을 꺼냈다. 이런 미인의 얼굴은 후손들을 위해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늑대나 개 수인 암컷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낭창함과 저 아련한 분위기는 박제를 해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그 사이 유채의 시중을 들고 있던 실비가 뒤를 획 돌아보았다.

“너. 내가 큰 위험을 무릅쓰고 데려왔으니까. 꼭 보답해야 한다. 알지?”

“알았어. 알았어. 지난번에 본 노란색 옷이면 되는 거잖아. 나 이번에 녹봉도 오르니까…….”

“엄마야!”

실비가 비명을 지르면서 엎어지자 세드릭도 무슨 상황인가 뒤를 돌아보고 당장에 바닥에 엎드렸다. 인기척도 없이 루프스가 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둘은 루프스의 명을 어겼다는 것에 벌벌 떨었다. 침이 마르다 못해서 침샘에 있는 침까지 증발해서 없어질 지경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내가 요새 좀 너그러워졌다고 기어오르는 것이냐, 아니면 빅터를 믿고 이러는 것이냐?”

유채는 앓고 있는 중이라 모르는 일이었지만, 개 수인 일족의 땅을 지나는 동안에도 군소 일족의 수인들이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몇 번이나 공격을 해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안전 문제로 날이 서 있어 한껏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달달 떨고 있는 개 수인 수컷을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그게 아니오라 제, 제가 파, 팔에 쥐, 쥐가 나서. 저 치, 친구에게 대신 대, 대야를 들어 다, 달라고 부, 부탁했습니다.”

실비가 덜덜 떨면서 변명을 둘러대었다. 날카로워진 루프스의 눈이 세드릭을 향했다. 그는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느끼고 납작 엎드렸다.

“맞, 맞습니다. 무겁다고 해서 들어준 것입니다.”

“그럼 바로 나가지 않고 무엇을 했지?”

루프스는 유채가 끙끙거리고 고생하고 있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어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살기를 내뿜지도 않았지만, 그 특유의 위압감에 둘은 벌벌 떨었다. 덜덜덜 떨던 실비의 손에서 떨어진 목탄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모두의 시선이 목탄으로 향했다. 루프스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그의 눈썹이 실룩거렸다.

“네가 그린 것이냐?”

루프스가 궁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 예! 송구합니다. 그, 그저 레티티아님의 아름다움에 탄복하여서…….”

세드릭은 땀이 난 손을 바지에 닦았다. 루프스는 궁관의 그림 실력에 놀라 그의 얼굴을 한번 보았다.

“이름이 뭔가?”

“세드릭이라 합니다.”

“이 그림을 제대로 그려서 완성해 오면 네게 죄를 묻지 않겠다.”

세드릭의 눈이 번뜩였다. 루프스는 그에게 종이를 돌려주고는 나가라고 눈짓을 했다. 세드릭이 얼른 방을 빠져나가고 실비는 머뭇거리고 있다가 나가라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루프스는 의자를 끌어다 앉아서 유채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고 찬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주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긴장을 놓게 된 것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오르페가 유채를 진료하고 한 말에 루프스는 안심했다. 유채가 긴장을 놓았다는 것은 적대감이든 불편함이든 뭐든 조금이라도 놓았다는 뜻이 아닌가 싶었다. 유채는 아파서 끙끙 앓는데도 고작 그 생각에 들떴다가 그런 저를 발견하곤 한심해하기도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뺨과 목덜미를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이렇게 약해서야.”

유채는 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목을 가졌고 조금 긴장이 풀렸다고 이렇게 앓을 정도로 약했다. 그렇게 약한 주제에 심지는 굳어서 언제나 당당했고 저보다 남을 더 생각하고 위했다. 그래서 제가 동경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저는 예전의 일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버린 약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오늘 빅터를 만났다.”

공적인 일로 종종 만난 적도 있는 수인이었지만, 이렇게 사적으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와 아버지의 친구인 그와도 가깝게 지냈었다. 루프스에게 그는 베니니타스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이었었다. 그런 그가 냉랭하게 변한 것은 블랑카의 죽음 이후였다. 아버지와 스승을 잃고 루프스는 마지막으로 빅터에게 의지하려 했지만 빅터는 정말 냉정하게 그를 내쳤다.

의지할 수 있었던 어른들에게 모두 잃은 후에 루프스는 억지로 어른스러운 척을 하느라 마음이 서서히 닳아갔다. 그 졸아가던 마음이 완전히 터져 버린 것은 에리카의 죽음 이후였다. 그렇게 반쯤 미쳐서 떠돌아다니다가 빅터를 만난 것은 열넷과 열다섯 사이의 어느 날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 시절은 누군가 거대한 발톱으로 긁어놓은 것 같아서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는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아직 어렸던 그때의 루프스는 빅터를 다시 만났을 때 무언가를 기대했었다. 그것이 위로이든 동정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빅터는 루프스를 만나자마자 이런 말을 했다.

【‘제 아버지만큼 못난 놈. 제 동생 하나 못 지키는 한심한 놈.’】

동정도 위로도 아닌, 냉대와 타박이었다.

그때, 빅터가 제게 괜찮으냐고 한 마디만 해주었어도 제가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빅터가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어도 해서 제 모든 행동에 면죄부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 빅터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있었다면 뭔가 변했을지도 몰랐다.

루프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때 이후로 그는 빅터가 싫었다.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굴던 그가 저를 사적으로 불러낸 것은 근 십년 만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붙잡았다. 쉬는 동안 몸이 조금 편안해진 것인지 숨소리가 어제보다는 훨씬 편하게 들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제가 열이 날 때마다 어머니가 해주던 것이었다. 입술에 열기가 스치자 루프스는 분주하게 손을 움직여 다시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네게 이러는 것이 염치없음을 알지만, 네게 기대는 것이 정말 뻔뻔한 일임을 알지만…….”

루프스는 마치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필요해.”

루프스는 눈을 감았다.

* * *

“왜…… 부른 건가?”

루프스는 빅터가 권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빅터는 대답 대신 온갖 약초가 들어간 것 같은 약차와 과자를 권하였다. 방 안은 마치 약방인 것처럼 약 냄새로 가득 했다. 빅터는 나이가 드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어쩔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루프스는 빅터가 권한 차에 손도 대지 않고 물었다.

“용건만 말하지. 그대랑 나랑 언제부터 이렇게 잡담을 나누던 사이였는가?”

“많이 변했구나, 라이칸.”

“그 이름은 버린 지 오래다. 그대가 내 아버지의 친우였다 할지라도 무례는 나도 참아줄 수가 없다.”

루프스는 되도록 이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었다.

빅터는 약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빅터도 이 자리가 바늘방석이었다. 로보를 눈앞에서 마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라이칸과 로보는 소름끼칠 만큼 닮아 있었다. 그래, 그는 로보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가. 친구임에도 질투에 눈이 멀어서 어리석은 선택을 했고 그래서 죄 없는 아이를 얼마나 냉정하게 내쳤는지. 나이가 들어가면 고개 숙이기 힘들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 후회가 많아진다지.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후회밖에 남지 않은 늙은이가 되어가더군.”

“그런 잡소리나 떠들 거라면 가보겠다.”

“미안하다.”

내가 네게서 어머니를 뺏었다. 질투에 눈이 먼 나의 선택이 네게서 어머니를 뺐었고, 아버지를 뺐었고 종국에는 동생마저 잃게 만들었다. 너희 가족을 무너뜨린 것은 나다. 속에 담긴 말의 많았지만 그는 결국 ‘미안하다’ 한 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기껏 용기를 내서 사과를 함에도 그는 여전히 뻔뻔했다.

“나는 너의 어머니를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해 왔다.”

“그대의 치정사까지 들어줄 만큼 한가한 수인이 아니다. 그깟 이야기를 할 것이라면…….”

“그래서 나는 친구인 로보를 질투했고 로보와 찍어낸 듯이 닮은 너를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 옹졸함이 너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빅터는 진정으로 사과해야 하는 것은 빼고 다른 이야기만 늘어놓는 자신의 한심함에 조소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밝힐 수 없었다. 베니니타스에게 블랑카가 있는 곳을 안내한 것은 자신이라고, 블랑카에게 죽음의 길을 열어준 것이 자신이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루프스는 빅터의 사과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빅터를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깨달았다. 어릴 적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는 것을. 빅터의 사과를 들으며 화를 내야 하나 아니면 별것 아닌 소리 한다고 비웃어야 하던 중 루프스의 머릿속에 섬광 같은 생각이 지나갔다.

너는 이것보다 심했겠구나.

루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급박한 몸짓에 탁자 위의 찻잔이 쓰러져 찻물을 쏟아내었다.

“그대가 내게 사과할 일이 아니다. 내가 사과를 들어야 할 일도 아니고. 그러니 그대와 나 사이에 부채는 없다. 이만 일어나겠다.”

루프스는 정신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그는 모퉁이를 돌아 인적이 드문 곳에 벽을 등에 기대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유채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았다. 미노르 호무스의 꽃밭에서, 에클레시아에서 제가 한 말을 들었던 유채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았다. 얼마나 끔찍했을까? 얼마나 가증스러워 보였을까? 저부터가 빅터에게 괜찮다고 말하기가 힘든데, 유채는 제가 얼마나 위선적으로 보였을까. 루프스는 한참 동안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네게는 내 사과마저 정말 끔찍했겠지.”

일방적인 사과는 그저 돌을 던지는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유채를 위해서라고 하면서 저도 모르게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야 유채가 저를 불편해한 이유를 알았다. 루프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유채의 말대로 하는 것이 이제 유일하게 남은 죄 갚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이기심은 그것만은 부정하고 있었다. 조금만 노력해 보자, 오르페의 말대로 기본을 지키면 유채가 편해질 것이다, 계속 속으로 속삭였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이제는 제가 유채에게 했던 모든 것들이 미안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작은 손을 꼭 잡고 입술을 내렸다. 신에게 빌고 싶었다. 제가 당신의 뜻을 대신 이루어 드릴 테니 시간을 돌려주실 수 없는지, 그렇게 묻고 싶었다. 루프스는 고개를 한참 숙이고 있었다.

“놔…… 요.”

유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말을 하지 않은 덕에 제대로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말이었지만 루프스는 얼른 듣고 고개를 들렸다. 유채가 몸을 일으키려 하나 루프스는 그녀의 등 뒤에 베개를 받쳐 주고 물도 건넸다. 유채는 열로 바싹 마른 입술에 물을 축였다.

“얼마나 지났어요?”

“아직 하루도 안 지났다. 앉아 있지 말고 누워라. 오르페가 해열제도 지어놓았다. 속이 비어있을 테니, 먹을 걸 가지고 오마.”

루프스는 물수건을 올려놓아야 한다며 유채에게 다시 누우라고 권했다. 하지만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떨쳐내며 말했다.

“내일 떠날 거죠?”

“그 다음 날 갈 생각이다. 네 몸이 나아질 때까지 좀 더 쉬는 게 좋아.”

“그냥. 내일 가요.”

유채는 빨리 말 수인 일족의 땅으로 가서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몸은 이제 괜찮아질 것이다. 하루 정도 쉬면 나을 텐데 여기서 하루를 더 버리는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루프스는 내일 바로 출발하자는 유채의 말에 놀랐다.

“지금 네 몸 상태가 어쩐 줄이나 알고 그런 말을 하나? 열이 펄펄 끓어서 정신도 여태껏 차리지 못하고 앓고 있었는데, 여기서 움직였다가는…….”

“헥터에게 막 당했을 때,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니까 날 끌고 그 수인들 앞에 다시 세워놓았잖아요. 그런 적도 있는데, 이것도 못 버티겠어요?”

루프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그건 유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한 일이었다. 유채의 뒤에 제가 있음을 알리면 베노르 콩레수스 때와 같은 일이 없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결국 유채에게는 큰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유채를 위해서라고 말을 하면서 결국에는 제 편할 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다 제 죄였다.

“미안하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잠깐 시선을 던진 뒤에 기침을 크게 했다. 루프스가 얼른 약을 준비해 주자 유채는 열이 올라서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약을 먹었다.

“조금, 조금만 쉴게요.”

“그래라. 편히 쉬어라.”

유채는 지친 얼굴로 도로 누웠다. 그러고는 유채는 금방 잠에 들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땀을 흘리며 몸을 뒤척이는 그녀의 곁에서 루프스는 저녁 늦게까지 병수발을 들어주었다. 그것 외에는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 *

“에쿠우스 단테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소니페스 호무스의 궁에서 수인을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내일 점심쯤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루프스는 병사의 보고에 황급하게 보고 있던 종이를 품으로 감추었다. 루프스는 병사에게 케릭스에게 내리는 명을 전하라 하고 다시 품에 급하게 집어넣은 종이를 꺼냈다. 그 개 수인 궁관인 세드릭이 그려서 바친 유채의 그림이었다. 잠든 모습이라 조금 아쉬웠지만 루프스는 틈날 때마다 그림을 꺼내어서 보았다. 루프스는 애잔한 손길로 종이 위를 쓸었다. 손가락으로 쓸어봤자 까칠한 종이의 감촉밖에는 느껴지지 않음에도 그래도 이렇게라도 유채를 느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할 것이지. 왜 그렇게 고집은 세서.”

힘들면 잠시 멈췄다 가면 그만이었다. 소니페스 호무스에서의 일정이 그렇게 촉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유채는 본인은 괜찮다고 하면서 강행군을 이어갔다. 유채의 몸이 온전치 않다는 것은 도저히 아픈 유채를 케릭스 등 위에 홀로 태울 수 없어서 제가 직접 안고 가고 있었기에 가장 잘 알았다. 유채의 몸은 열로 펄펄 끓었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렇게 급한지 고집을 꺾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픈 유채를 볼 때면 루프스의 마음만 타들어갔다. 루프스는 그림 속 유채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종이를 곱게 접어서 제 품으로 집어넣었다. 루프스는 조심스럽게 유채의 막사의 입구를 들추었다. 유채는 오한에 떨고 있었다.

“뭐예요?”

까칠한 목소리에 루프스는 말로 설명해 봤자 길어질 것 같아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루프스는 은빛 늑대로 변했다. 막사의 크기에 맞게 적당한 크기였다.

[늑대는 체온이 높다. 그러니, 정 추우면 나를 베고 자라.]

“콜록. 콜록. 당신을요?”

[내가 역겨운 것은 알지만, 아픈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루프스는 침대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유채는 눈을 굴리다가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베고 누웠다. 확실히 동물의 체온이 사람보다 높아서인지 금세 추위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유채는 복슬복슬한 털에 몸을 묻고 담요로 몸을 칭칭 감은 채로 눈을 감았다. 열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그나마 잠을 자고 있는 중에는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유채는 요즘 하루 종일 자기만 했다.

[이제 소니페스 호무스 안이다. 여긴 동물화로 인해서 텅 빈 마을이지. 늦어도 내일쯤이면 소니페스 호무스의 궁에 도착할 거니 조금만 더 고생해라. 궁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유채는 잠이 든 것인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루프스도 고개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본능적으로 따뜻한 것을 찾아 바르작거리는 유채가 루프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루프스는 감았던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열에 들떠서 붉어진 볼과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루프스는 저도 모르게 주둥이를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대려다가 화들짝 놀라서 머리를 내렸다. 유채에게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털이 북슬북슬한 발을 올려서 제 머리를 때리고 싶었다.

아직도 제 욕심만 챙기려는 스스로가 한심해 죽을 것 같았다.

* * *

유채는 한결 나아진 상태로 소니페스 호무스의 궁에 도착했다. 이제는 머리도 어지럽지 않고 열도 떨어졌다. 단지 목만은 따끔거렸다.

“콜록, 콜록.”

“괜찮으십니까?”

아리아가 루프스에게 물었다. 루프스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자연스럽게 아리아는 멀쩡해 보이는 유채를 흘겨보았다. 아리아는 진심으로 유채가 싫었다. 그의 기침은 분명히 어제 저 암컷과 같은 막사를 쓴 탓일 것이다. 루프스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충성하는 아리아는 그에게 해만 끼치는 유채의 존재가 너무나 싫었다.

“저…… 루프스님 기침약입니다.”

루프스가 계속 기침을 하자 의관 하나가 기침약을 내왔다. 루프스는 단번에 쓴 기침약을 들이켰다.

“루프스님, 단테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소니페스 호무스에는 궁녀보다 궁관이 더 많이 보였다. 건장한 체격의 궁관이 전하는 말에 루프스는 콜록거리면서 유채에게 말했다.

“나는 단테를 보고 와야겠다. 콜록. 괜히 움직이지 말고 들어가서 편히 쉬어라. 이 궁녀가 방을 안내해 줄 것이다.”

말 수인 궁녀가 유채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루프스와 그 수행인인 케릭스와 아리아는 궁관의 안내를 받았다. 루프스의 모습이 사라지자. 궁녀가 공손하게 손짓을 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티티아님.”

궁녀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앞장서서 걸었다. 루프스가 유채의 안전으로 붙여준 호위 둘이 그녀의 뒤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왔다. 블루벨은 신기한 듯이 소니페스 호무스의 궁을 둘러보았다. 서양식과 동양식이 적당히 혼재해 있는 토스 호무스의 궁과 다르게 이곳은 서양식에 훨씬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유채님이랑 와서 신기한 구경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블루벨이 유채의 팔에 매달리면서 말했다. 유채는 블루벨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너희 일족의 땅은 어때?”

“음? 인키디움 건물 정도요? 그건 좀 신기했어요. 그 근처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어차피 떨어져서 지금은 미련도 없지만요.”

“근데, 블루벨은 인키디움에서…….”

유채는 싸한 기운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토스 호무스의 궁도 인적이 드문 곳이 많이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는 곳은 없었다. 호위로 붙여준 병사들도 뭔가 이상하게 느꼈는지 여차하면 동물형으로 변할 태세였다. 유채는 블루벨을 보호할 요량으로 블루벨을 제 옆구리로 끌어안았다. 막다른 길이 나왔다.

“무슨 짓이죠?”

유채는 자신을 여기로 안내해 온 궁녀에게 물었다. 궁녀는 아무런 표정 없이 유채를 돌아보았다.

“무슨 짓이긴. 내 명을 충실히 따라준 것뿐이란다.”

유채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몸을 돌린 유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길을 막고 선 헤르티아의 옆에는 유채가 스티폴로르에 도착해서 처음 만난 수인인 간니오와 볼프가 서 있었다.

유채는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유채는 손을 덜덜 떨었다. 저를 윤간하려 한 둘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진정을 할 수가 있을까 간니오는 유채의 기분을 안 것인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면 입모양으로 안녕이라고 속삭였다.

【‘뭐, 내가 아랫구멍을 맡고 네가 윗구멍을 맡으면 되지 않겠어?’】

유채는 떨리는 팔을 감싸 안았다. 블루벨도 유채의 떨림을 눈치챈 것인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오랜만이구나. 내 진상품.”

헤르티아가 소름끼치도록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채는 그보다 소름끼치는 미소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죠? 당신하고 나는 이미 볼일 끝난 사이 아니에요? 당신은 나를 루프스에게 바쳤고 나는 당신 덕에 죽을 만큼 고생했어요.”

“고생도 했지만, 호강도 누렸지. 어디 루프스가 한낱 제 펠릭스 다우스에게 저렇게 서열이 높은 군인을 호위로 붙여줄까?”

유채는 뒷걸음질을 쳤다. 헤르티아의 뒤에서 나온 열 명의 수인이 유채의 일행을 에워쌌다. 말 수인 궁녀도 헤르티아의 편인지, 유채가 뒷걸음질 치자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유채는 침착하게 그녀의 손을 떨쳐 내었다.

헤르티아가 유채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루프스가 붙여준 호위가 그르렁거리며 동물형으로 변할 준비를 했다.

“아무리 주인을 향한 충성심이 좋다지만, 그래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알 것 아니나? 너희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헤르티아가 손을 튕기자 화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한 늑대 수인의 옷에 불이 붙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서 얼른 옷을 벗어서 발로 밟았다. 헤르티아는 깔깔깔 웃으며 유채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무영창 마법이란다. 다른 말로는 무언 마법이라고도 불리더구나. 스펠에 아주 능통한 수인만이 오랜 수련을 통해서 영창을 하지 않고 쓸 수 있지. 아직 거기까지는 배우지 않았지? 습득력이 좋은 학생이라고는 들었는데 말이야.”

“당신이 내 일상을 어떻게 알, 알아요?”

“루프스가 너를 꽁꽁 싸매서 보호를 하고 있다마는, 어디나 틈은 있기 마련이지.”

헤르티아는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블루벨은 유채를 보호하려는 듯이 유채의 앞으로 튀어나와서 팔을 벌렸다.

“이런. 나는 그저 대화가 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취급을 받으니 굉장히 섭섭하네. 내가 루프스보다는 인자할 텐데, 이렇게 나오면 내가 굉장히 불쾌하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인원을 끌고 와서 협박해요?”

“루프스가 너를 보내줄 리가 없잖니?”

유채는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유채의 옆으로 간니오와 볼프가 바짝 붙었다. 유채를 보호하듯이 선 블루벨이 헤르티아에게 말했다.

“헤르티아님. 이건 지금 루프스님께 전쟁을 선포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물러나 주세요.”

“아가야, 전쟁을 선포하려면 말이다.”

헤르티아가 블루벨의 팔목을 잡고 비틀었다. 블루벨이 비명을 질렀다.

“블루벨!”

유채가 헤르티아를 막기 위해 튀어 나갔다. 하지만 간니오와 볼프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헤르티아는 간니오와 볼프에게 붙잡힌 유채를 바라보고 싸늘하게 웃었다. 헤르티아는 블루벨을 내동댕이치면서 말했다.

“네 주인을 저 두 놈에게 던져 주고 에클레시아에서 못 한 것을 여기서 마음껏 하라고 했겠지. 루프스의 수하들이 지켜보는 눈앞에서 처참할 정도로 범해지는 것만큼 확실한 선전포고가 어디 있겠나.”

헤르티아는 블루벨의 손목을 지그시 밟았다. 헤르티아는 블루벨의 끔찍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유채를 향해 환히 웃었다.

“내가 조금 과격한 방법을 쓴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마.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너를 만날 수가 없어서 말이지.”

헤르티아는 유채와 눈을 마주했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까? 이야기만 끝나면 네 일행을 모두 곱게 보내주마.”

유채는 주변을 살폈다. 헤르티아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랐으나 목표는 자신이었다. 저만 헤르티아의 말에 따른다면,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유채는 침을 삼켰다.

“갈 테니까. 블루벨부터 치료해요.”

“당연한 말이지. 간니오, 볼프.”

간니오와 볼프는 유채의 양팔을 마치 죄수를 연행하는 것처럼 붙잡았다. 간니오는 유채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헤르티아가 데려온 다른 여우 수인들이 유채의 일행을 붙잡았다. 루프스에게 이 상황을 알리지 못하게 하려는 계략 같았다.

말 수인 궁녀는 헤르티아 앞에서 서서 길을 안내하였다. 원래보다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에쿠우스의 부인만이 기거할 수 있는 내궁이었다. 말 수인 궁녀가 문을 열자 헤르티아와 간니오, 볼프 그리고 유채만이 방으로 들어왔다. 나머지는 다른 여우 수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방 밖에 붙잡혀 있었다. 미리 준비를 해놓은 것인지, 방 안에는 먹을거리와 마실 것이 놓여 있었다. 간니오와 볼프는 마치 취조실에 범인을 앉히는 것과 같은 모양새로 유채를 거칠게 의자에 찍어 눌렀다.

“손속이 거친 것은 이해하거라. 워낙 섬세하지 못한 아이들이라.”

헤르티아는 유채의 맞은편에 앉았다. 간니오와 볼프는 유채의 한 걸음 뒤에서 여차하면 그녀를 어떻게 할 생각으로 서 있는 것 같았다. 헤르티아는 유채에게 음식을 권했다.

“먹지. 듣자하니 아파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친구에게 부탁해서 차려놓은 음식인데.”

“……친구요?”

유채가 의아함에 물었다. 헤르티아는 닭고기의 다리 살을 덜어가면서 대답했다.

“그래, 내 친구 단테. 이 소니페스 호무스의 주인이지.”

헤르티아가 단테에게 부탁한 것은 두 개였다. 자신이 도착한 것을 숨겨주고 루프스를 오랜 시간 붙잡아 달라는 것과 유채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것. 단테는 그녀의 말을 충실하게 따라 루프스의 도착 시간을 늦춰서 이미 소니페스 호무스에 도착해있는 헤르티아가 작전을 정교하게 꾸밀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루프스를 적당한 일로 불러내어서 붙잡아주었다. 헤르티아는 경계심 가득한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유채를 보면서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뭐예요? 당신하고 나 사이에 할 이야기가 있나요?”

“글쎄다. 일단 좀 먹지.”

헤르티아는 느긋하게 유채에게 고기 덩어리가 많이 들어 있는 스튜를 건네었다. 헤르티아는 유채가 초조해하는 것을 보았다. 나이 어린 것들의 약점은 항상 일을 급하게 처리하려 드는 것이었다. 느긋하게 행동하는 것이 승기를 잡는 일이라는 것을 어린 것들은 몰랐다. 헤르티아는 일부러 더 여유롭고 느긋한 태도로 음식을 먹었다.

“왜? 내가 너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루프스가 너를 연모하고 있음을 알아서 내가 너를 이용하려 들까 봐 무섭니?”

“당신은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 아닌가요? 당신이 나를 루프스에게 바친 뒤로 내 삶은 정말 지옥 같았어요.”

“내가 너를 이용하려고 했다면 말이지, 너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데려온 수컷들에게 붙들려 있을 것이란다.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 그리고 나도 루프스가 지척에 있는데 너를 이용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단다.”

헤르티아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유채에게도 권하였으나 그녀는 고개만 저었다.

“하지만, 네 예상은 맞다. 나는 너를 통해서 루프스를 치려고 하니까.”

헤르티아는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늑대 수컷 놈들의 가장 큰 약점은 그들이 마음에 품은 암컷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게 말하면 꽤나 까다로운 약점이었는데, 웃기게도 그놈들은 제 암컷이 다치기만 해도 미쳐서 날뛰었다. 인질로 삼아서 협박까지는 가능하나, 늑대 놈들은 원체 다혈질이라 협박을 당해도 곧장 제 암컷을 구하려 했다. 합리적 판단은 어디 던져 버리는 수준이었다.

반려가 살해당하면 미쳐서 발광한다는 것도 꽤나 위험한데, 이 미쳐서 발광한다는 것은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원수를 향한 살육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되면 굉장히 골치 아파지는 일이 많기에 늑대 수인의 반려를 인질로 잡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잘못하면 배로 더 큰 손실을 입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너를 납치해서 데려간다면, 나는 루프스에게 바로 죽겠지. 이건 내가 장담한단다. 나는 루프스에 비해서 약하니, 이런 곳에서 너를 억지로 끌고 가거나 괜히 루프스를 건들게 된다면 손해 보는 것은 나지. 그러니 네 몸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어도 된단다. 음식부터 먹어라. 배고프지 않니?”

유채는 헤르티아가 집요하게 음식을 권하는 것을 이상해 일부러 손을 대지도 않았다. 헤르티아는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저는 그쪽하고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빨리 용건만 말해주세요.”

“용건이라. 간단하지, 붉은 루비 조각을 찾고 있지 않니?”

“예?”

유채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엉덩이를 떼었다. 그러자마자 바로 뒤에 있던 간니오와 볼프가 유채의 어깨를 눌러서 다시 주저앉혔다. 헤르티아는 유채의 반응에 만족스러워하면서 등을 편하게 기대었다. 혹시나 싶어서 떠본 건데, 이렇게 잘 넘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 올케인 라일라님은 대륙에서 신녀였단다. 모종의 이유로 포트리스로 왔지만 그래도 꽤나 유능한 신녀였다고 하더군, 성력(聖力)을 쓸 수 있는 이였으니. 라일라님은 내 오빠와 결혼하며 울피누스 호무스의 궁에 있는 수장고에서 이것을 달라고 요청했지.”

유채의 옆에 서 있던 볼프가 그녀의 앞에 그림을 꺼내어 보였다. 유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와인더의 조각이었다. 유채는 종이를 움켜쥐었다.

분명 의심 범위에 여우 일족의 땅도 있었다. 하지만, 여우 일족의 땅에서는 이상 현상이 멈췄기에 가능성을 크게 두지 않았다. 유채가 고개를 들자 헤르티아는 와인을 한잔 마시고 계속 설명했다.

“내가 라일라님께 들은 바에 따르면, 그것에는 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신의 힘이 악기로 오염이 되어 있어 울피누스 호무스가 화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성력으로 정화를 하고 있다고 하셨다.”

유채는 머리를 굴렸다. 유채가 울피누스 호무스를 뒤로 미룬 것은 어느 순간 동물화의 정도가 다른 일족의 땅 수준만큼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울피누스 호무스는 토스 호무스만큼이나 동물화의 비율이 낮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상승하였고 또 별 이유 없이 가라앉았다. 그 시기가 라일라가 베니니타스와 결혼한 그때인 모양이었다.

“라일라님은 포트리스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성력으로 동물화가 된 이들을 치료해 보겠다고 인질로 잡혀왔다가 내 오빠와 사랑에 빠진 거란다. 그러니 성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머리가 복잡해진 유채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걸 왜 내게 알려주는 것이죠?”

“내가 가지고 있고 너는 이것을 찾고 있을 테니까.”

헤르티아는 없는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내었다.

“라일라님이 암살당한 뒤, 저 물건이 없어졌단다. 내 오빠는 미친 듯이 목걸이를 찾으려 했고 결국 내가 오빠가 죽은 뒤에 유지를 이어받아서 간신히 찾았지. 늑대 수인들이 보석상에 팔아넘기고 여러 곳을 전전하던 것을 겨우 발견했단다.”

헤르티아는 유채가 의심의 눈초리를 약간 거둔 것을 보고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갔다.

“그것을 네게 주마.”

“이것을요?”

“그래, 우리 울피누스 호무스에 온다면 네게 주마. 이게 필요하지 않느냐? 내 일을 아주 조금만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오빠의 복수를 할 수 있으니 오빠도 라일라님도 그곳에서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도움이요?”

“그래, 루프스가 원망스럽지 않느냐? 너를 그리도 학대한 수인인데, 내가 너에게 그놈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마. 그놈에게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괴로운 삶을 선사할 기회를 주겠다. 너를 고통 속에 몰아넣은 늑대 일족들을 모두 없애주마. 그러니, 나에게 협력하는 것이 어떤가?”

“내가 울피누스 호무스로 넘어가면, 나를 이용해서 루프스를 궁지에 몰 것인가요?”

“그래. 그럴 거다. 늑대 놈들은 제 암컷을 구하겠다고 뛰어올 테니 결국 내전이 일어나겠지. 물론 나에게는 네가 있으니 유리하고 말이야. 걱정 마라. 나는 네 몸에는 손끝 하나 건들지 않겠다. 네가 할 일은 두 가지야. 직접 루프스에게 루프스를 배신했다는 것을 알리고 울피누스 호무스에 머무르면 돼. 내가 루프스를 잡는 동안만. 그럼 네게 그 루비 조각을 주마. 루프스는 평생 제 사랑에 배신당한 고통과 내가 그놈에게 선사해 줄 비참함을 안고 살아가게 해줄 테니. 너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전쟁 때문이지. 한 번 더 전쟁이 일어나면 그 시기가 더 앞당겨질 테니 서둘러야 한다.’】

유채는 셀레네의 말을 떠올렸다. 전쟁이 일어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다. 그건 막아야 했다. 그리고 헤르티아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었다. 헤르티아 말대로 그것이 여우 일족의 땅에 잠시 있었다고 치더라도 지금 그게 거기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다. 유채는 헤르티아를 바라보았다. 저보다 나이도 많고 한 일족의 수장으로서 루프스와 적대하면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있는 여자였다. 저보다 똑똑하면 똑똑했지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 여자의 말에 휘말릴 것 같아 유채는 헤르티아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다른 말을 꺼내었다.

“왜. 당신은 루프스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헤르티아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에 말문을 잃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뭐, 루프스와 몸을 섞다 보니 이제 그에게 길들여지기라도 했나? 이거 걸작이군. 반항적이란 것도 다 쇼인가? 루프스가 다릴 벌리라고 하면 고분고분 벌리기라도 할 것 같군.”

“아니요. 난 그 인간이 끔찍하게 싫어요. 근데, 난 당신도 그렇게 옳은 일은 한다고 보지는 않거든요.”

헤르티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당신 오빠가 죽인 블랑카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나요? 설마 그 죄가 전대 루프스의 아내였다는 것인가요?”

“뭐?”

“베니니타스의 복수는 로보와 시카리우스에 한정이 됐어야 해요. 당신 눈에는 베니니타스가 완전무결한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그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죄 없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지. 블랑카가 라일라를 죽였나요? 아니잖아요.”

“그 입 닥쳐라.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헤르티아가 탁자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베니니타스는 평생 죽은 아이들과 아내 때문에 괴로워했다. 평생을 죄책감만 끌어안고 비참하게 살았다. 말년에 가서는 모든 것을 후회하며 고통스러워했다. 베니니타스는 그날 이후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살았다.

헤르티아에게 베니니타스는 오빠 이상의 의미였다. 여우 수인 간의 권력싸움에서 부모를 잃은 두 남매는 힘겹게 살 수밖에 없었다. 베니니타스는 소년 가장으로서 헤르티아를 먹여 살리기 위해 못한 일이 없었다. 때로는 높은 서열의 암컷에게 몸을 팔기도 했고 높은 서열의 수인의 아이의 대련 상대가 되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베니니타스는 그렇게 번 돈으로 헤르티아를 남부럽지 않게 기르고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서 울페스가 되었다. 헤르티아에게 베니니타스는 오빠이자, 부모였다. 그래서 헤르티아는 평생 용서할 수가 없었다. 베니니타스를 나락에 빠뜨린 로보를, 그리고 그런 베니니타스를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 루프스를.

“네가 감히 무엇을 안다고 그런 건방진 말을 지껄이느냐!”

“블랑카는 로보를 막지 못한 죄가 있다고 억지로 정당화하면, 그럼 루프스와 에리카 남매는 무슨 잘못을 했나요? 그 남매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어린 시절을 모두 도둑맞고 한 명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나요?”

유채는 루프스의 비참한 시절을 동정은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그가 비참한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건 그거고 그가 유채에게 한 일은 별개의 일이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과거는 동정해도 그는 끔찍하게 싫었다.

“복수라는 말이 살인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아요. 당신의 오빠인 베니니타스도 거기서 자유롭지는 않았죠? 로보를 죽이기 위해 라일라와 관련 없는 늑대 수인들을 죽인 것도 복수라는 미명하에 정당화될 수는 없는 거예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마, 찬가지?”

헤르티아의 목소리가 분노로 약하게 떨렸다. 헤르티아는 당장이라도 유채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서 데리고 온 호위들에게 넘기고 겁간하라고 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깟 어린애의 도발에 넘어가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당신의 복수에 정당함은 있나요? 장담하건대 없을걸요? 당신은 그저 분한 것뿐이에요. 오빠의 죽음이 슬픈 것뿐이에요. 그것을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전가해서 엉뚱한 사람에게 풀지 말아요. 당신도 루프스랑 다를 바…….”

짝.

유채는 볼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볼프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뺨을 힘껏 내리친 것이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유채는 의자채로 옆으로 엎어졌다. 코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볼이 찢어졌다. 바닥에 머릴 찧은 탓에 어지럽기까지 했다. 볼프는 바닥에 엎어진 유채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몸을 질질 끌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감히 건방지게 헤르티아님께 그런 망발을 지껄이고 있나! 에클레시아를 침범한 죄로 죽어도 백번을 죽었을 네년을 살려주신 분께.”

유채는 피가 섞인 침을 볼프의 얼굴에 뱉었다.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당신 나 강간하려고 했잖아요? 그리고 헤르티아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내가 스무 해를 살아오면서 들어온 말 중에 가장…… 아악!”

볼프가 유채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유채는 머리카락이 뜯기는 감각에 비명을 질렀다. 볼프가 뒷머리를 손으로 누르자 유채는 마치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뒷머리를 누르는 손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굴욕적인 자세인지라 유채는 기분이 더러웠다.

“이게 원래 네 처지야. 루프스의 밤시중으로 총애받는 년에게 지금 같은 대접이 과한 줄 알아야지. 어디서 감히 헤르티아님께 말대답이야!”

볼프는 간니오의 말에 동의하면서 유채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몸을 질질 끌어올려서 다시 의자에 거칠게 앉혀놓았다. 헤르티아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엉망이 된 얼굴을 보며 통쾌한 듯이 웃었다.

“그래도 손님이라고 손속에 자비는 두었구나, 볼프. 돌아가기 전에 내가 치료해서 보낼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야.”

유채는 머리를 찧은 탓에 어지러운 시야로 헤르티아를 보았다.

“안 됩니다. 아악!”

밖에서 궁녀들과 궁관들이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곧 유채의 등 뒤에 있는 문이 부서지듯이 큰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도 유채는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 성큼성큼 들어와서 유채의 팔을 잡아서 끌어안았다. 유채는 단단하고 익숙한 품에 안겼다.

유채가 앉아 있던 의자가 헤르티아의 옆을 스쳐 지나가 벽에 부딪쳐서 박살났다.

“네년이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

루프스는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유채를 끌어안으며 헤르티아에게 이를 갈았다. 헤르티아는 루프스가 던진 의자를 가볍게 피하고 미소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루프스님.”

헤르티아는 제 뒤에서 박살난 의자에 가볍게 시선을 던진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를 취했다. 루프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물잔마저 집어 던졌다.

“헤르티아님!”

헤르티아의 머리에 유리잔이 부딪치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 조각 때문에 그녀의 머리 위로 피가 흘렀다. 헤르티아는 물과 피가 섞여 흐르는 것을 대충 닦고 젖어버린 머리카락도 쓸어 올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제가 루프스님을 기만한 것에 대해 충분한 벌이라 생각됩니다.”

“벌?”

루프스는 유채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려 맞아서 부어오른 뺨을 살폈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 정도였다. 이 작은 얼굴에 때릴 구석이 있다고. 루프스는 유채의 뒤에 서 있었던 두 여우 수인을 보았다. 맞은 볼의 위치로 볼 때, 누가 범인인지 추려낸 루프스는 유채의 눈을 가리고 볼프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쾅. 루프스는 볼프의 머리를 그대로 잡고 탁자에 내리찍었다. 헤르티아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루프스는 볼프의 머리를 탁자에 내리누르고 비틀었다. 볼프의 비명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헤르티아가 무어라 소리쳤으나 이미 눈이 반쯤 돌아간 루프스는 볼프의 얼굴을 짓누르는 데만 집중했다.

“끄아악!”

볼프는 뭉개진 얼굴을 붙잡고 바닥을 굴렀다. 이마가 깨지고 코가 부러졌다. 이가 뽑히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간니오가 볼프를 부르며 그를 부축했다.

“내가 예전에 경고했을 터인데, 나에게 속한 이들을 손대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루프스는 바닥을 구르는 볼프를 마치 쓰레기 치우듯이 발로 굴렸다.

“네년은 어떻게 찢어 죽여줄까? 감히 나를 기만하고 레티티아를 건드려?”

“저는 그저 대화를 하려고 레티티아를 부른 것입니다. 루프스님께서 워낙 레티티아에 관한 접근을 막고 있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저는 레티티아에게 좋은 정보를 전해주려고 했을 뿐입니다.”

“좋은 정보?”

루프스가 코웃음을 쳤다. 유채는 혹시 헤르티아가 제게 말했던 것을 루프스에게 그대로 말을 할까 겁을 내었다. 혹여나 저 남자에게 제가 찾고 있는 물건에 대한 소식이 들어가면 일이 정말로 꼬일 터였다. 유채는 탁자에 놓여 있던, 헤르티아가 건넸던 리와인더의 조각의 그림을 급하게 옷소매에 집어넣었다.

“별것 아닙니다. 곧 비(妃)가 되실 분께 수인들의 세력 판도는 알려드려야지요. 누가 진정한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그런 조언 하나 드리고자 본의 아니게 루프스님을 기만하였습니다. 제가 조금 미묘한 시간에 도착한지라.”

“조언을 하자고 한 것치곤 방법이 너무 거친 것 아닌가? 호위를 모두 다 떼어내고 끌고 와서 이게 과연 조언을 주는 것이라 누가 생각할 수 있지? 게다가 조언받는 이의 얼굴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날 더 이상 농락할 생각 마라, 헤르티아.”

루프스가 이를 갈았다. 헤르티아는 루프스가 유채의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예의를 잘 모르는 레티티아다 보니 제게 사소한 무례를 저질렀고, 제 성실한 충복이 그에 대해 화를 주체 못 하고 무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이정도면 적합한 처벌이지 않습니까?”

헤르티아는 유채의 곁으로 다가왔다. 루프스는 팔로 그녀를 막아섰다.

“비(妃) 되실 분에게 제 죄 갚음을 할 것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헤르티아가 입매를 곱게 접었다. 그녀의 손이 유채의 얼굴에 닿았다. 붉은 기운이 유채의 얼굴을 뒤덮었다. 곧 붉은 기운이 사라진 유채의 얼굴이 상처 나기 전으로 돌아갔다. 헤르티아는 유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어디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나는 함부로 이런 제안을 하지 않는단다. 기회는 한 번뿐이야. 그러니 무엇이 나은지 잘 재어 보거라. 그리고 그동안 그 건방진 말버릇은 좀 고쳐 두고.”

헤르티아는 유채의 멀쩡해진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루프스의 차가운 얼음 같은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헤르티아는 몸을 곧게 펴고 루프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프스는 헤르티아를 여기서 찢어 죽일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문득 그는 시선을 내렸다. 제 소맷자락을 잡고 있는 유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제까지 열 감기를 앓다가 간신히 몸을 추스른 유채였다. 루프스는 일단은 유채를 방으로 데려간 뒤에 단테 놈과 헤르티아를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넌 나중에 보지.”

루프스는 유채를 안아 들고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케릭스와 늑대 수인들이 여우 수인들을 제압하고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케릭스는 부러진 팔목에 부목을 감고 있는 블루벨을 감싸면서 헤르티아에게 분노의 시선을 보냈다. 헤르티아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무시했다. 케릭스는 블루벨을 데려가면서 동시에 군인들에게 여기를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헤르티아는 의자에 다시 앉았다.

“볼프는 괜찮나?”

헤르티아의 찢어진 이마는 수인 특유의 빠른 회복력으로 서서히 나아가고 있었다. 간니오는 볼프의 코뼈를 맞춰주었다. 볼프의 비명이 방을 다시 가득 채웠다. 헤르티아는 반 정도의 성공에 아쉬워하면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방의 구석에서 내내 조용히 있던 레아가 나왔다. 볼프와 간니오가 그녀에게 레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단테가 루프스를 오래 잡아둘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내가 그 애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

“헤르티아님. 그래도 레티티아를 그렇게 다루신 것은 오히려 역효과이지 않을까요? 적당한 시점에서 볼프를 말리셨어야 합니다.”

헤르티아는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헤르티아는 물 한 잔도 마시지 않았던 유채를 떠올렸다. 생각보다 영악한 암컷이었다. 이야기의 중간에 말을 돌리는 기술도 훌륭했다. 헤르티아는 턱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나는 예상할 수 있는 확실한 선택지 하나가 좋아. 여러 개는 너무 신경 쓸 것이 많아서 별로야.”

헤르티아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보면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레티티아는 저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가 할 행동은 단 하나였다. 본래 헤르티아는 두 가지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물건을 받는 대신 이쪽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협력. 두 번째는 물건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직접 물건을 찾으러 오는 것. 첫 번째는 당사자 간에 어느 정도 신뢰가 깔려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의 레티티아는 그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신뢰라는 것은 짧은 시간 내에 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소니페스 호무스에 머무르는 짧은 시간 동안 레티티아에게 신뢰를 주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이제 하나뿐이다.

“차라리 잘됐어. 난 저 애가 나에게 당당하게 오는 것보다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오길 바랐거든.”

볼프와 간니오는 헤르티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아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장고의 경비를 늘리겠습니다. 언제 오든 잡을 수 있게.”

“그래. 수장고에 놓은 덫으로 고양이를 잡아서 이용해야지. 안 그래?”

헤르티아가 밝게 웃었다.

* * *

루프스는 유채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된 이상 유채를 다른 방에 둘 수가 없었다. 헤르티아가 미친년처럼 굴어서 유채에게 무슨 일을 할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유채는 무슨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루프스는 헤르티아의 마법으로 이제는 상처가 사라진 유채의 볼에 손을 가져갔다.

“앗.”

통증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인지 유채가 눈을 찌푸렸다. 루프스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미안하다. 단테와 헤르티아가 친한 것은 알지만, 제 일족의 땅에 나를 들여놓고 너를 빼돌릴 생각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헤르티아는 몰라도 단테는 선을 지키는 편이기에 이런 무모한 짓을 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 더 불편한 곳은 없나?”

“없어요. 여긴 어디고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네가 방으로 들어가면 바로 내게 와서 보고를 하기로 한 호위가 오지 않기에 수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단테가 평소와는 다르게 멍청하게 굴기에 나를 잡아두려고 그러는 것이라 추측하고 바로 나왔다.”

막으려는 단테를 벽에 처박아두고 에쿠우스의 심복들까지 모조리 처치한 뒤에 급하게 달려갔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내궁으로 유채를 데려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달리니 예상대로 궁녀와 궁관들이 길을 방해했고, 예상지 못한 여우 수인들을 보자 눈이 돌아갔다. 그 뒤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형편없는 꼴로 망가져 있는 유채를 품에 안아서야 정신이 반 정도 돌아왔다.

“헤르티아와는 말도 섞지 말고 가까이 가지도 말아라. 네가 나에게 속한 마레 위르라, 너를 이용해서 나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을 들면 헤르티아는 네가 죽든 다치든 아무런 상관없이 나올 것이다. 워낙 영악해서 입에는 꿀을 담고 언제 발톱을 꺼내서 너를 찢을지 모른다. 그러니, 헤르티아와는 말도 섞지 마라.”

루프스는 유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치우고 제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리고 미안하다. 설마 싶었다. 너를 혼자 보내서는 안 되었는데.”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요. 여긴 어딘가요?”

“내가 머무를 방이다. 토스 호무스로 돌아갈 동안은 여기 머물러라. 헤르티아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내가 가까이 있겠다. 나는 바닥에서 자도 괜찮으니 몸도 안 좋은 네가 침대를 써라. 난 괜찮다.”

루프스는 유채가 저를 불편해한다면 늑대가 되어서라도 이 방에 있을 생각이었다. 제 죄를 갚음에는 유채의 평안함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었다. 유채가 괴로워할까 봐 사과조차 조심스러워진 지금에도 유채의 몸만큼은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유채가 꿈에서라도 편할 수 있다면 제 몸 하나 불편한 것은 별거 아니었다.

유채의 눈에 루프스의 오른손이 까진 것이 보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시선이 제 오른손에 닿는 것을 보고 황급히 괜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이건 제 잘못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다.

유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루프스는 당황해서 몸을 굳혔다. 유채의 부드럽고 작은 손이 제게 닿자 루프스는 순간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유채가 스스로 먼저 손을 뻗었다는 것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Beatitas.”

유채가 시동어를 읊자 황금색 빛이 루프스의 상처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루프스의 상처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마력 저항력이 강해서 어지간한 마력을 쏟아 넣지 않는 이상 그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다. 루프스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루프스는 유채가 저를 걱정해 준 것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품어서는 안 되는 욕심이 무럭무럭 자랐다. 루프스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렸다.

“내 마력 저항력이 상당한 편이다. 괜히 마력 낭비하지 말고 쉬어라. 그놈들 문제는 내가 해결하마. 내일부터 일정이 바빠지는 편이라 편히 쉬는 것이 좋다. 블루벨은 걱정 말아라. 오르페가 진료 중이다.”

루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단테와 헤르티아, 두 수인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유채가 이곳에 지내는 동안 조금의 위험도 용납할 수 없었다.

유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당신은 베니니타스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복잡했다. 내 아버지를 죽인 수인지만, 내 스승이었던 분이니.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어. 분노인지, 슬픔인지, 희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베니니타스를 죽이고 난 한없는 슬픔을 느꼈었다.”

루프스의 얼굴이 한 십년은 늙어 보였다.

“그래서 헤르티아를 함부로 쳐 내지 못해.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베니니타스가 생각나서. 벤자민, 프리드, 그리고 라일라님이 생각나서 도저히 쳐 낼 수가 없었다.”

변하기로 하고 나서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제가 그때 품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헤르티아가 제 목숨을 노리고 있음에도 가만히 두었던 이유는 얼마 되지 않는 남아 있는 제 찬란했던 유년시절의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는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바실리사가 저를 라이라 불러도 화를 내지 않았던 것도 그것이었다. 그때가 그리운 것이다. 그 찬란했던 시절이 그리워서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그 시절을 버린 척했지만 진심은 그게 아니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가만히 응시했다.

잊고 살았던 모든 것을 떠올리게 해준 것은 유채였다.

유채에게 못할 짓을 정말로 많이 한 한심한 놈인 주제에 그녀에게 받은 것들은 너무 값진 것들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제가 연모하는 이을 무엇 하나 편히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정말로 비참했다.

“덕분에 별로 많이 안 다쳤어요.”

유채는 엉망이 된 머리끝에 매달린 천을 풀었다. 그리고 루프스의 손에 감아주었다. 루프스는 그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대해주면 계속 욕심을 내게 된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저는 그런 욕심을 품기에는 너무 부족한 이였다. 루프스는 스스로에게 조소했다. 아직은 더 벌을 받아야 한다. 힘들더라도 유채의 책망을 받는 것이 옳았다.

유채가 손을 거두었다. 루프스는 제 손에 어설프게 감겨 있는 천에 두둥실 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가서 그 둘을 처리하고 오겠다. 블루벨은 치료가 끝나는 대로 올 것이니,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만 둘이 이곳에 있어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케릭스에게 말해두고.”

“알았어요.”

유채는 루프스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침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헤르티아의 말을 곱씹었다. 헤르티아가 진실을 말했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돌다리도 두들겨 보라 했다고, 일단 계획한 대로 소니페스 호무스를 뒤지기로 했다. 모든 자료를 조합해 본 결과 리와인더의 조각이 있을 만한 곳은 소니페스 호무스와 그곳의 수장고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도 찾지 못하면 헤르티아의 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손속에 자비를 두었다, 라. 하.”

유채는 헛웃음을 흘렸다. 만일 정말 헤르티아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제게 그것을 순순히 내어놓을까? 헤르티아는 분명히 그것을 무기로 저를 이용하려 할 것이었고, 그로 인해 어쩌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헤르티아가 그 조각을 정말로 준다는 확신도 없고, 정말로 가지고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그저 헤르티아가 보여준 그림이 증거의 전부였다. 헤르티아가 어떤 수인인가. 오늘 저를 대한 것만 보아도 그녀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근데, 정말 헤르티아가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유채는 손등의 권능의 표식을 보았다. 지도만 있으면 울피누스 호무스의 궁으로는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수장고였다. 그런 곳의 위치나 구조에 대한 지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루프스라도 그런 것까지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붙잡히기라도 하면……. 유채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다른 단서가 하나 생겼건만 일이 더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유채님!”

블루벨이 붕대를 감은 손을 흔들면서 들어왔다. 오르페가 조심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블루벨은 알았다고 대꾸를 하고 유채의 무릎에 달려들었다. 블루벨의 토끼 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약해서. 제가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야. 괜찮아. 블루벨, 팔목은 괜찮아?”

“예! 오르페님이 봐주셔서 멀쩡해요. 오르페님이 잠깐만 조심하라고 부목을 대어주신 것이지 뼈는 멀쩡해요. 조금 아픈 것 제외하면요. 유채님은요?”

“나도 괜찮아. 다행이다, 블루벨.”

블루벨이 유채의 미소에 기분이 나아진 것인지 제 귀를 쭉 옆으로 늘렸다. 그리고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이 붉어졌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유채님께 인키디움에 시험 얘기는 말하지 말걸 그랬어요. 엄마가 넌 인키디움의 망신이라고 깔깔깔 웃을 것 같아요.”

유채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블루벨, 너희 어머니가 인키디움에 근무하셨다고 했지?”

블루벨은 갑자기 유채가 자신의 어깨를 잡으니 놀라서 옆으로 늘이고 있던 귀를 놓았다. 마치 고무줄처럼 제 위치로 돌아가려는 귀가 블루벨의 양 볼을 때렸다. 블루벨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볼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채는 시트콤에서나 볼 법한 황당한 사고에 웃음이 터졌다.

“푸하하하!”

“우엥. 유채님! 저 아파요!”

블루벨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울상을 지으면서도 동시에 웃었다. 블루벨의 귀는 어느새 쫑긋 올라갔다. 유채는 마치 고무줄 같은 블루벨의 귀 덕분에 한참을 깔깔대면서 웃었다. 블루벨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기분이 참 간사한 것이 좀 전까지 좋지 않은 일을 당해서 우울했던 기분이 이렇게 통쾌하게 웃었다고 금방 풀렸다. 유채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면서 물었다.

“블루벨 같은 딸을 둔 엄마는 상당히 고민이 많겠어. 딸이 너무 귀엽기는 한데, 어디 내놓았다가 사고칠까 봐 두려울 것 같아.”

“음. 유채님 저희 엄마 같아요. 저희 엄마도 그런 소리 진짜 많이 하셨거든요. 엄마는 인키디움의 전설로 통하는데, 너는 어디 나사 백 개는 빠진 듯하게 군다고.”

“인키디움의 전설?”

“원래 저희 엄마가 허풍이 좀 심하세요. 인키디움에 근무하시면서 웬만한 곳은 다 몰래 잠입해 보셨대요. 심지어는 토스 호무스의 궁의 이니투스님의 물품을 숨겨놓았다는 곳도 들어가 보셨다지 뭐예요. 어차피 허풍이 반인 분이시라 진지하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진짜 실력일지도 모르잖아.”

“설마요. 우리 엄마 같이 괄괄하신 분이 어떻게 레푸스 트레모르님과 한 팀이었겠어요. 엄마는 아직도 비 오면 술 한잔하시면서 트레모르님의 자리는 엄마가 다 만들어준 거라면서, 트레모르는 저를 업고 이 스티폴로르를 돌아도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고 술주정을 하시는데, 보는 제가 다 민망하다니까요. 같이 사시는 까마귀 수인 아저씨들도 엄마가 그런 내용으로 술주정 부리면 입부터 막으세요.”

“매번 생각하지만 정말로 블루벨의 어머니는 심하게 세상을 유쾌하게 사시는 분 같아.”

유채는 도저히 블루벨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카넬리안이 어떤 여자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블루벨의 말에 따르면 키가 크고 늘씬하면서 눈 쪽에 긴 흉터가 있고 항상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까마귀 수인들을 머슴처럼 부려먹는다는 했다. 도저히 블루벨과 연관 지어서 떠올릴 수 없는 인상이었다. 블루벨이 순수한 소녀 같은 이미지라면 카넬리안은 알거 다 아는, 뭔가 퇴폐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언니 같았다. 블루벨과 정반대의 이미지였다.

“뭐 그렇게 유쾌하게 사시지는 않아요. 예전에 크게 잘못하신 게 있다고 그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항상 바쁘신 분이거든요. 좀 괴짜인 구석이 있으신 분이지만, 저희 엄마가 좋아요. 마을에서도 엄마가 인키디움 출신이기도 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하셔서 많은 분들이 저희 엄마를 좋아해요.”

“블루벨의 엄마라면 나도 좋아할 것 같아.”

“엄마도 유채님 마음에 들어 하세요. 제가 이따금 편지 쓸 때마다 유채님 이야기를 했는데, 엄마가 언제 한 번 은혜 갚고 싶다고 만나자고 하세요.”

유채는 블루벨을 무릎 위에 앉혔다. 어쩌면 블루벨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면 헤르티아의 수장고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키디움에 있었다면 분명히 한 번쯤은 그런 곳에 갔을지도 몰랐다. 만일 정말 소니페스 호무스에 루비 조각이 없고 헤르티아의 수장고에 들어갈 일이 생긴다면, 블루벨의 어머니가 다음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유채는 머릿속으로 그동안 생각했던 작전을 약간 수정했다.

* * *

살기등등한 루프스가 걸어가자 궁녀들과 궁관들이 지레 겁에 질려서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루프스는 발소리를 쿵쿵 울리면서 걸었다. 머릿속으로는 헤르티아와 단테 둘을 어떻게 처리해야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헤르티아와의 관계의 개선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지금은 유채의 일을 갚아주는 것이 먼저였다.

루프스의 기세에 눌려서 감히 누구도 그를 막으려 하지 못하는 가운데 한 말 수인 궁녀가 용감하게 그의 앞에 엎드렸다. 용기를 많이 냈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서운 것인지 목소리가 떨렸다.

“에, 에쿠우스님, 님께서 찾, 찾으십니다. 오, 오해가 있으신 것 같다고.”

“오해?”

루프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궁녀는 저에게 날아올 다음 말이 두려워서 몸을 떨었다. 루프스의 잔혹함에 대해서는 능히 알고 있었다. 예전, 피투성이 루프스라 불리던 시절 발란테스 카르멘이 뭘 잘못해 놓고 사과랍시고 제 아래 수하를 보내자 그 수하를 피떡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앞장서서 오기는 하였으나, 사실 두려워 죽을 것 같았다.

“안내해라.”

루프스는 잇새로 말을 뱉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유채 말대로 죄 없는 이들이었다. 언제까지 제 화풀이 상대로 그들을 괴롭힐 수 없는 것이었다.

“예?”

“안내하라 하지 않았나?”

말 수인 궁녀는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앞장서서 걸으면서 루프스의 기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끊임없이 확인했다. 혹여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서 저에게 무슨 짓을 할까 겁이 났다.

루프스는 궁녀는 신경 쓰지 않고 유채를 지키면서 동시에 헤르티아와 단테를 막을 방법을 궁리했다. 대화로 해결해 보기로 했다. 두 번의 전쟁은 있어선 안 된다. 그러니 어떻게든 저들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사실 단테는 상관없었다. 단테는 헤르티아를 사랑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돕고 있는 것이었다. 헤르티아만 설득하면 된다.

루프스가 여러 가지를 궁리하는 사이에 궁녀는 어떤 방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단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테는 우람한 근육에 수인 치고도 엄청나게 큰 키의 소유자로, 루프스가 올려다봐야 하는 몇 안 되는 수인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긴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단테는 천상 무인이었으나 본질은 학자에 더 가까웠다. 말 수인 일족이 동물화를 겪으면서도 고양이 수인 일족보다 덜 심각했던 이유는 단테의 적절한 정책 때문이었다.

루프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헤르티아는 없었다. 루프스는 단테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오해를 논하기 전에 헤르티아부터 불러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제 손님인지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잘난 사랑이군.”

루프스는 단테를 멱살을 잡았던 것을 힘을 주어 뿌리쳤다. 뒤로 밀려났던 단테는 옷깃을 털고 루프스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루프스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내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단테가 직접 나섰다는 것은 헤르티아에게 가는 길을 막겠다는 뜻이었다. 아마 헤르티아는 이미 피신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도 헤르티아를 돕는 이유가 참 눈물겹군.”

“루프스님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레티티아를 위해서 벌써 몇 명과 척을 지셨습니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루프스는 사실 단테를 상대하기 힘들어 했다. 그는 저를 괴롭힌 이의 형이었고 제 과거를 알고 있는 이였다. 일단 단테의 동생을 죽인 것은 저였다. 에리카의 복수를 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드미트리 패거리는 제가 죽여도 골백번을 죽였을 놈들이었다. 하지만, 단테는 카르멘처럼 제게 이빨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저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저를 맞이하는데 불편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었다. 단테는 아직도 부어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초식 동물 계열 수인들은 회복력이 육식 동물 계열보다 느린지라 단테의 얼굴은 제게 얻어맞은 그대로였다.

“개소리 지껄이고 앉았군. 그래, 그렇다고 치지. 하지만 이번 일은 도가 지나쳤다. 도대체 레티티아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엉망을 만들어놓아야 했나?”

“원래 복수에 대상은 상관없는 겁니다. 언제나 자신이 옳은 것이고 자신의 공격은 정당한 것이 됩니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니까요.”

단테는 루프스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어려웠다. 죽은 제 동생의 마지막이 떠올라서 괴로웠으며 동시에 루프스가 말했던 동생이 못난 짓이 머릿속에 울려서 괴로웠다. 단테는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동생이 했던 일은 형이라고 해도 옹호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더 착잡했다. 동생을 관리하지 못한 제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단테는 그 복잡한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은 그저 헤르티아의 일을 돕는 것뿐이었다.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 드리면 제가 반드시 보답을 하겠습니다.”

“보답?”

루프스가 눈을 좁혔다. 단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레티티아 양을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그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이 험한 곳에서 평생 한 번 겪기도 힘든 일들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제가 마레 위르에게 혐오감이 있나 없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수인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당연한 동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루프스는 단테의 말에 입안의 살을 깨물었다. 제 스스로의 잘못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나 남에게 그에 관해서 듣는 것은 썩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루프스는 절로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제가 유채에게 한 잘못이 더 많은데 과연 제가 단테나 헤르티아에게 성질을 부릴 수 있나 의문이었다.

“만일 헤르티아가 레티티아 양을 노린다면 제가 막아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은 단지 헤르티아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해 자리만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헤르티아가 레티티아 양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 같으면 제가 막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막을 테니 부디 이번 일은 넘어가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소니페스 호무스에서의 안전은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너는 헤르티아가 속살거리기만 하면 금방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릴 것이지 않나?”

“루프스님, 저도 수컷으로서 긍지는 가지고 있습니다. 부디 제 진심을 폄하하시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저희가 악연으로 얽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가 어떤 이인지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단테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는 루프스의 손가락을 보았다. 평소라면 지금쯤 뭔가 하나 날아와도 진작 그랬어야 했다. 루프스에게 들켰을 때, 사실 단테는 그와 큰 싸움까지 각오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갈면서도 빨리 방을 빠져나가려고만 했다. 제가 루프스를 말렸기에 그가 제게 주먹질을 한 것이었다.

미래 따위는 없다는 듯이 살던 그가 변했다. 이게 긍정적인 것일지 부정적인 것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단테는 이기적이게도 이런 루프스의 모습이 헤르티아를 조금이라도 설득해 주기를 바랐다. 헤르티아가 그 지옥불에서 빠져나오기를 간절해 바랐다.

“레티티아는 내가 지어준 이름이고 본명은 유채다. 한유채. 몇몇 마레 위르들처럼 성이 있는 이름이더군. 한이 성이고 유채가 이름이라고 했어.”

단테는 루프스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으로 불러라. 토스 호무스에서 나는 노란색 들꽃 이름에서 딴 거라고 하던데, 생긴 것과도 잘 어울리고 예쁜 이름이다.”

몇 번을 연습해 봤지만, 그녀의 앞에서는 도저히 유채라고 불러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불러버리면 영영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채라고 불러 버리는 그 순간에 그녀가 바람에 실려서 제 앞에서 영영 사라질 것 같았다. 유채라 부르고 싶어서 가슴이 벅차올라도 그녀가 흩어져 사라질 것 같아서 이를 깨물고 부르지 못했다. 자신은 겁이 나서 도저히 불러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에게라도 그 예쁜 이름을 많이 들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하겠습니다.”

단테는 루프스가 저의 말을 믿는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했다는 것을 알았다. 비스듬히 앉아 있던 루프스가 말을 꺼내었다.

“이번 일은 넘어가지만, 한 명은 넘겨라. 볼프였던가? 헤르티아가 들인 그 양아치 여우 수인 놈은 내게 넘겨라. 그놈만큼은 내가 직접 작살을 낼 것이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프스는 고개를 숙이는 단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헤르티아로 인해서 위험한 것은 저 하나로 족했다. 유채는 그저 그가 사랑한 모습 그대로 있기를 원했다. 제가 유채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가 타인으로 인해서 괴롭지 않기를 원했다.

제 한 몸을 불태워서 지켜주어도. 제 마음이 바스러져 재가 되어도 그녀는 한 번도 저를 돌아봐 주지 않을 것을 루프스도 알고 있었다. 이 천을 제 손등에 감아준 것도 그제 제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저와 채무관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한 행동일 뿐 저에게 마음을 내어준 게 아님을 분명하게 알았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유채는 그럴 리가 없었다.

유채가 자신의 품에 있는 동안만큼은 안전해야 했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 할지라도 신은 아니었다. 유채에게 닥친 위험을 제때에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제 고집을 접어야 했다. 헤르티아와 단테에게 보복을 하고 싶어도 참아야 했다. 단테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신의는 있는 수인이었다. 제가 한 말은 그대로 지키는 수인이었다. 유채가 안전할 수 있다면 자존심은 내려놓고 단테에게 한 수 접는 것이 옳았다.

“감사는 받지 않지. 그럼 지금부터 동물화 관련 시찰에 관한 일정을 다시 짜기를 원한다.”

단테는 유해진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사랑이란 것은 수인을 변화시켰다. 빌어먹을 방식이든지 아니면 좋은 쪽이든지. 뭐, 자신도 예외가 아닌 주제에 이것을 논하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일 같았다.

* * *

“형~님! 내 색시는 언제 데리러 갈 수 있소?”

알폰소가 덩치에 안 맞는 애교를 부리면서 음식을 차리고 있는 헤임달에게 들러붙었다. 헤임달은 숟가락으로 알폰소의 머리를 내리쳤다. 알폰소는 숟가락으로 맞아서 부어오른 이마를 움켜쥐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는 그만 부려라.”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알폰소 오빠, 그놈의 색시 타령 좀 그만해. 일이 잘 끝나야 색시든 뭐든 생기지.”

“넌 남자의 마음을 몰라. 가슴을 선득하게 만드는 미인을 만났고 그 미인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내가 얼마나 안달이 나겠니.”

“삼촌, 진짜 병신 같은 거 알아?”

세라가 비웃자 알폰소는 노발대발 화를 내면서 그녀와 싸우기 시작했다. 헤임달은 종종 일어나는 일인지라 이제는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헬라는 생선을 넣어서 끓인 스튜를 냄비채로 들고 오면서 헤임달에게 물었다.

“그래서 오빠, 라일라의 목걸이는 어디다 쓰려고.”

헬라는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힐끔거렸다. 헤임달이 나중에 필요할 때 가져가겠다고 헬라에게 말했기 때문에 아직 라일라의 목걸이는 그녀에게 있었다. 최근 대륙에 갔다온 헤임달이 고급 사파이어 목걸이를 사왔지만, 이상하게 헬라는 이 싸구려 루비 목걸이가 더 좋았다. 헤임달이 목걸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듣지를 못하였다.

헤임달은 알폰소와 세라가 싸우고 있는 소란 속에서 헬라가 가져온 스튜를 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란텔에게 헤르티아가 소니페스 호무스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헤르티아의 눈을 피해서 란텔이 행동하기가 더 수월해졌어. 란텔이 라일라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서 라일라의 사망 장소를 찾아간 하워드 형제를 죽이는 데 성공하면 말이야, 우리는 다음 작전에 들어 갈 거야.”

“무슨 작전?”

“당연히 렉스 놈이 분노를 하겠지? 렉스 놈은 하워드 형제와 성향이 다르지만 그래도 그들을 엄청 아끼거든. 그러니 하워드 형제의 복수를 위해서 루프스와 전쟁을 해야 할 것이라고 할 거야. 그럼 우리는 또 다른 바람을 하나 잡아야지.”

헤임달은 스튜 그릇을 각자의 자리에 놓았다.

“대륙에서, 전쟁 초창기에 한 영주가 어느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여론을 선동해 자발적으로 입대한 영주민들을 모아서 전쟁에 참여했지.”

그 영주가 지금의 베르나도테 공작의 선조였다. 베르나도테 공작이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한 것은 바로 그 엄청난 자원병의 수에서 기인했다. 헤임달은 이제 막 몸을 푼 레이라를 떠올렸다. 레이라는 본래 사냥꾼이었고 포트리스에서도 강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막 아이를 낳은 여자일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였다.

“하워드 형제는 포트리스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들의 죽음에 복수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겠지만 전쟁을 원하지는 않을 수도 있어. 그러니 우리는 그들이 전쟁을 원하게 만들 거야.”

“설마 오빠. 레이라를?”

“그래. 레이라를 자살로 위장하는 것이지. 정말 좋은 얘깃거리 아니냐? 깨소금이 쏟아지는 신혼부부. 막 사랑을 결실을 맺은 젊은 부부에게 닥친 비극적인 최후.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절망하여 어린 젖먹이를 남겨두고 목숨을 끊은 젊은 부인.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지.”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죽음에 슬픔에 취해 있어 경계가 덜할 것이었다. 그러니 그 사이에 레이라의 집에 들어가 목을 졸라 죽이고 레이라가 스스로 목을 맨 것처럼 위장하면 된다. 마침 레이라의 집에 들어간 식모 소녀가 하나 있으니 그 아이가 최초 발견자가 되어주면 금상첨화였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할 거야? 전쟁이 일어났어. 그 뒤의 대책이 있어야지?”

헬라는 십사 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도 헤임달의 계획대로 전쟁이 일어났었다. 헤임달 일가는 펠레스 호무스로 들어가 프레눔을 채굴해서 그것을 대륙으로 가져가 공작에게 바쳤다. 그렇게 공작의 신뢰를 얻고 부를 쌓았다.

헤임달은 전쟁 동안 포트리스와 수인들이 스스로 자멸하기를 원했다. 서로를 죽이면서 세력이 약해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루프스라는 걸출한 강자가 나타나 생각보다 빠르게 내전을 정리하고 스티폴로르에 안정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던 불안한 평화는 한 소녀의 등장으로 깨졌다. 그러니 지금이 몇 안 되는 기회였다.

헤임달은 헬라의 목에 걸린 루비 조각을 가리켰다.

“난 그걸 이용해서 수인들과 포트리스 사람들을 몰살시킬 거다.”

“몰살? 이걸로 어떻게?”

“조사를 좀 해보니 그 안에 엄청난 마력 같은 것이 들어 있더군. 그러니까 그 마력을 이용해서 거대한 폭발 마법을 부릴 거야. 수인들과 포트리스의 사람들이 전면전을 하게 되면 그때 펑 터뜨리는 것이지.”

헤임달은 팔을 크게 벌렸다.

“그렇게 끝이 나면 내 복수도 매듭지을 수 있겠지.”

헤임달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헬라는 자신의 오빠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래 이렇게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륙에서 살 때는 의사였던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고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생계가 어려워져 사냥꾼 일까지 하게 되었어도 의사로서의 긍지는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그런 오빠였다. 그런 그가 변한 것은 그때 사건 때문이었다.

아직도 오빠의 절규가 귓가에 맴돌았다. 목이 꺾여서 죽은 부인과 아들, 딸들을 부둥켜안고 울던 오빠를 아직도 기억했다. 그는 미쳐 돌아가던 대륙의 피해자였다. 헤임달은 범인을 알아도 조금도 보복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부인과 자식들을 죽인 것은 발루아 백작의 심복인 오를레앙 남작이었다. 현재 대륙은 베르나도테 공작과 발루아 백작이 승기를 잡고 있었다. 헤임달이 베르나도테 공작에게 붙은 것은 오를레앙 남작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베르나도테 공작은 당연히 프레눔에 흥미를 보였다. 베르나도테 공작의 골칫거리가 바로 발루아 백작의 사생아였다. 그는 에어리얼 대지의 소유자로 강력한 마법사로 홀몸으로 전쟁의 승기를 뒤엎는 맹장이었다. 마법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응책이 바로 프레눔이기에 베르나도테 공작은 그에게 약속했다. 프레눔만 제게 가져다준다면, 얼마든지 발루아 백작의 심복인 오를레앙 남작을 죽여주겠다고. 그렇게 헤임달은 제 복수를 위하여 스티폴로르를 망가뜨리기로 했다. 의사로서의 신념, 그런 것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 조금 남았어. 이번 일만 성공하면 그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오를레앙 놈을 죽여 버릴 수 있어.”

헤임달이 중얼거렸다. 아내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데,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오를레앙 남작의 말에 속아서 아내가 죽어가는 것을 몰랐다. 그는 한 번도 그 자신을 용서한 적이 없었다. 그는 아내를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악마, 아니, 그 이상의 것도 될 수 있었다. 학살자라 불려도 된다. 지옥에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의 복수만 완성할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오를레앙 남작에게 죽음보다 더 비참한 고통을 선사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 * *

루프스는 단테와 일정을 다시 논의를 하였다. 헤르티아도 이곳에 온 명분은 있었다. 울피누스 호무스도 포트리스 접경지역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동물화가 진행되기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헤르티아 역시 소니페스 호무스의 모습을 보고 제 땅의 해결책을 찾으러 온 것이라는 명분을 둘러대었다. 루프스는 헤르티아가 따라올 것이라는 것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채를 보호해야 하고 동시에 동물화로 고통받는 수인들의 분노를 진정시켜야 하고 그 대책에 대한 실마리도 찾아야 한다.

“일단 민심 진정이 우선이 되겠군.”

이미 동물화로 괴멸된 마을 옆에 있는 곳을 가장 먼저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는 유채가 따라오지 않았으면 했지만, 혹시 제가 없는 곳에 남겨 두었다가 헤르티아가 그녀를 납치할 것이 겁이 났다. 게다가 소니페스 호무스는 울피누스 호무스에 너무 가까웠다. 위험하더라도 제가 바로 옆에서 지키는 것이 나았다.

“하아.”

루프스는 제 방의 문을 열었다. 유채는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졸고 있었다. 유채가 침대에서 편히 잠이 들지 못하고 저러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저를 경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안아 올려서 침대 위에 편하게 눕혀주었다. 유채의 검은 머리카락이 마치 고운 비단처럼 넓게 펴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쓸었다. 왜 신이 루비 조각을 찾으라고 요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유채가 이곳에 따라온 이유는 알았다. 유채는 이곳이 바로 조각을 찾을 수 있는 위치라 여기는 것 같았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제가 그 조각을 찾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면 안 되냐고 말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유채가 스스로 위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다치는 것에 마음을 졸이느니 자신이 찾아줄 테니 그냥 편하게 이곳에 머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연히 유채는 어떻게 그것을 알았냐고 물을 것이고 더 심하게 의심하고 경계할 것이다. 그리고 홀연히 저를 떠날 것이다. 루프스가 예상하는 것보다 빠르게. 지금 이 소니페스 호무스에서의 시간이 유채가 저에게 허락한 마지막임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지금이 유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알았다.

“미안하다. 또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너를 위험에 처하게 하여서.”

루프스는 유채에게 위험하게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녀를 괴롭힌 주체였고, 그녀에게 역겨운 존재였고, 그녀에게 다른 종류의 위험을 불러주는 존재였다. 자신은 결코 유채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좋은 기억이었던 축제에서도 유채는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웠던 광경을 기억할 것이었다. 루프스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가지 마.”

유채에게 닿지 않을 소망일지라도 그는 항상 그 말을 그녀에게 속살거렸다. 이렇게 계속 속삭이면 그녀가 마음을 돌릴지 모른다는 가난한 희망을 품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얼굴만 보고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한 번이라도 돌아 와주겠다는 말을 해주면 안 되나?”

그러면 평생을 그녀를 기다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잔인한 여왕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비참함 속에 죽어가기를 원하기에 인사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유채에게 거짓이라도 들을 수 있는.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유채의 코를 타고 내려갔다. 루프스는 코끝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은빛의 늑대로 변한 그는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동물형으로 잠을 청하기는 사실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동물형일 때는 동물의 본능이 살아나기에 수인이더라도 선잠을 자야만 했다. 내일 분명 피곤해질 테지만 그래도 잠에서 깬 유채가 저로 인해서 불편함을 느끼기를 원치 않았기에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유채 양?”

유채는 말 수인 일족, 여우 수인 일족과 같이 동물화 격리 구역 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루프스보다 크고 훤칠한 키의 남자 수인이 다가오자 유채는 고개를 갸웃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루프스보다 더 그을린 피부에 우람한 체격이었다. 엉덩이에 달린 꼬리로 보아서 말 수인 일족 같았다. 유채는 그가 자신의 본명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서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제 소개부터 하지요. 에쿠우스 단테입니다.”

“단테님이요?”

유채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였다. 헤르티아가 저를 데려갈 수 있게 틈을 내준 것이 에쿠우스 단테라고 하였다. 유채는 더 경계를 하고 뒤로 물러났다. 단테는 유채를 향해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그때 일은 저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잘못한 것을 아시면 애초에 하지 마셔야죠.”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용서하실 수는 없겠지만, 약소하게 보답은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단테는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 세련되게 세공이 된 단도를 받은 유채는 검집에서 꺼내보았다. 날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것이 한번만 스쳐도 피가 날 것 같아 보였다.

“소니페스 호무스는 포트리스와 가까워 마레 위르들의 물건이 많이 있습니다. 부디 다음번에 위험이 생겼을 때, 몸을 보호하는 데에 요긴하게 쓰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소니페스 호무스에 계시는 동안에는 안전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것으로 제 죄를 갚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소니페스 호무스에 계시는 동안에는 평안하기를 빕니다.”

유채는 우락부락한 외모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어투의 단테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단테는 더 오래 이야기해 봤자 불편할 뿐이니 먼저 물러나겠다고 말을 하였다.

“헤르티아와는 더 이상 부딪치지 않도록 조정을 해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유채 양.”

유채는 단테가 준 단도를 만지작거렸다. 날이 서있는 것이 혹시 모를 일이 생기면 꽤나 유용할 것 같았다.

유채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원하는 곳에 도착했으니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아야 했다. 악기가 가장 강한 곳에 리와인더의 조각이 있을 거라고 믿어 동물화가 가장 심한 곳으로 왔다.

여길 찾아봐서 없으면…… 남은 방법은 헤르티아뿐일 것이다. 물론 그녀에게 협력할 생각은 없었다. 루프스가 좋아서도 아니고 그동안 제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도 아니었다. 또한 헤르티아는 믿을 수 없는 여자니 멀리하는 게 답이었다.

그저 그 조각이 전쟁으로 인해 더 많은 악기를 머금고 더 빠르게 오염될 것이 걱정이었다. 제한 시간이 짧아지는 것은 유채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채가 한참 고민하는 사이 누가 등 뒤를 툭툭 건드렸다.

“블루벨?”

유채가 뒤를 돌아보자 루프스가 서 있었다. 더위에 민소매의 예복을 입은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유채에게 물었다.

“갈 준비는 되었나?”

유채는 등 뒤로 단테가 준 단검을 숨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루프스는 피곤한 눈을 문지르면서 늑대로 변했다. 유채는 루프스의 몸체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블루벨은 토끼로 변해서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을 본 유채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럼 이제 출발하지.]

루프스의 말을 신호로 동물로 변한 수인들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말 수인 일족들이 가장 앞에 섰고 그중 몇몇은 여우 수인 일족과 늑대 수인 일족의 중간에서 조율을 하였다.

루프스는 제 목을 끌어안는 유채의 팔의 감촉을 느꼈다. 부드럽고 따뜻한 몸이 맞닿자 꼭 잠에 들 것만 같았다. 어제와 엊그제 모두 늑대로 변해서 밤을 보내 깊은 수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너무나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너무 빠른가? 떨어질 것 같아?]

“괜찮아요. 빨리 달려도 돼요. 천천히 달려서 오래 멀미하느니, 빨리 가고 잠깐 머리 아픈 게 나으니까.”

유채는 속이 더부룩한 것을 꾹 참으며 말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바람대로 빠른 속도로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을 하나가 보였다. 마을 사람들로 보이는 말의 귀와 꼬리를 가진 수인들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다른 수인들과 루프스가 멈춰 서자 유채는 그의 목에서 팔을 풀고 땅 위로 내려왔다.

“루프스님을 뵙습니다.”

노인과 그 주위에 선 이들이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헤르티아와 단테도 앞으로 나왔다. 루프스는 헤르티아를 힐끔 돌아보고 유채를 제 뒤로 감추었다. 유채는 헤르티아가 저를 보고 짓는 미소에 소름이 돋았다. 루프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헤르티아에 대한 평가만큼은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일어나라. 겉치레는 이만하지. 과한 예는 부담스럽다.”

그 말에 마을의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일어났다. 노인은 마을의 상황을 설명했다. 재작년에 괴멸당한 마을보다는 나은 상태였지만, 상대적으로 어린 수인들의 발병이 잦아지고 있었다. 단테가 알려준 해법으로 어느 정도 멈추어놓았으나, 안심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루프스는 가져온 식량을 배분하라 지시했다. 한창 일을 해야 할 나이의 수인들이 발병하여 앓아눕게 되자 자연스럽게 식량도 부족해진 것이다. 그가 가지고 온 식량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헤르티아는 예전과는 다른 루프스의 정책에 적잖이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예전이라면 대강 와서 둘러보고 해결책만 세우는 것에 도움만 주는 이가 본격적으로 민생까지 관리했다. 수인 세계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촌장은 루프스가 가져온 식량을 보고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안내해라. 뱀 수인 일족들도 데려왔으니 치료가 필요한 자들이 있으면 데리고 오고.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 뱀 수인 일족의 치유 속성을 이용하는 것이니. 일단 이곳이 가장 급하며 동시에 많은 사례가 있는 곳이니 어쩌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촌장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몇 개월 전의 의례적인 방문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루프스를 안내하는 노인은 그의 옆에 있는 로브를 둘러쓴 작은 체구의 암컷이 그 유명한 펠릭스 다우스임을 눈치챘다. 이 암컷이 왜 여기까지 따라왔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촌장은 그녀의 정체가 탄로 나지 않게 적당한 거리에서 앞을 가려주면서 걸었다. 혹시나 마을 수인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해코지를 하여 루프스의 심기를 거스를가 싶어서였다.

유채는 촌장과 루프스 사이에서 걸으면서 동물화가 된 수인들을 지켜보았다.

“세상에.”

유채는 외마디의 비명을 질렀다. 동물화라고 하기에 그냥 단순히 동물로 변하는 병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멀쩡한 신체 부위가 동물의 그것으로 변해가는 것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사람의 몸에 피부가 말처럼 변하는 것도 모자라 진물과 피까지 흘렀다. 그것도 모자라 날이 갈수록 증상은 심해지면서 고통 또한 동반하여 비명을 지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조각을 찾으려고만 했지 저들의 병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아니, 정확히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유채는 입을 틀어막았다. 동물화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계속되는 같은 일족끼리의 혼인은 수인들의 병을 심화시켰고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악기에 맞물려 이제는 전체 수인들을 대상으로 동물화가 빠르게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유채는 리네아의 말을 떠올렸다. 유전병에 가까운 것이 동물화였다. 하지만, 그 동물화를 가속화시킨 것은 악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유전병이면 별 대책이 없었다. 유전자의 레벨에서 문제가 생긴 것인데 그것을 수정하는 것은 지구의 현대의학으로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유채가 조각을 찾아 셀레네에게 돌려준다면, 더 이상 악기의 영향으로 동물화가 빠르게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미 일어난 자들은 그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또 앞으로 동물화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상관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눈으로 봐버린 이상, 그리고 그 해법을 조금 아는 이상 유채는 도저히 그들을 무시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채는 촌장이 안내한 거처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성력(聖力)이 항상 만능은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의 의지가 악기를 해결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의지가 길을 발견하기 전까지 성력(聖力)은 그 길을 도와야 합니다.’】

유채는 손등에 새겨진 권능을 만지작거렸다. 리네아의 말을 미루어 생각해 보니 성력(聖力)이면 어쩌면 이 동물화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 혼자 쓰기에도 넉넉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성력을 이런 곳에 소모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유채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일단 원래 계획대로 하자.’

유채는 손을 옆으로 길게 휘둘렀다.

“Beatitas.”

시동어가 끝이 나자 은빛의 늑대가 나타났다. 마법에 관한 자료가 몇 없는 토스 호무스의 도서관을 뒤지고 뒤져서 찾은 마법이었다. 마법으로 시종을 만들어 물건이나 정보를 찾는 마법이었다. 직접 가보지 않아도 이곳저곳을 조사할 수 있는 쓸모 있는 마법이지만 문제는 마법으로 만든 시종의 형태와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유채의 경우는 스스로를 중심으로 한 마을, 무리하면 두 개의 마을까지가 고작이었다. 유채는 헤르티아를 만났을 때 몰래 가져온 리와인더의 조각의 그림을 은빛 늑대 앞에 내밀었다.

“이걸 찾아야 해. 이것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면 나에게 알리면 돼. 알았어?”

마력으로 만들어진 은빛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채가 머리를 쓰다듬으니 늑대는 마치 강아지처럼 달려 나갔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눈에 띠지 않게 투명하게 변하였다.

유채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저 마법에 모든 것이 달렸다. 유채는 탁자에 머리를 기대고 다시 동물화에 대해 생각했다. 이걸 유전병이라고 했을 때 유채는 조금 의문을 품었다. 고등학교 수준의 생물학 지식밖에 지니지 않은 유채가 볼 때도,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좁은 집단 내에서 서로 교배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이런 유전병이 일어나려면 인구수가 엄청 적어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아무리 작은 부족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유전병이 일어나기는 힘들고 그들에게 특정 유전자가 많다는 연구 결과만 나왔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몇몇 부족은 부족민의 혈액형이 거의 같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스티폴로르의 인구는 부족 단위라 하기에는 나라의 단위인지라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감자 마름병.”

감자 마름병은 감자역병균에 의해 감자가 썩는 병이었다. 그리고 아일랜드 대기근에 주요 원인이었다. 유채는 문득 생각난 것을 중얼거렸다. 리네아가 분명히 동물화는 악기가 결합되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했다. 만일 이게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체가 악기의 영향을 받아서 심하게 번진 것이고, 수인들이 아일랜드의 감자 단일 품종처럼 유전적으로 차이가 없어져서 동물화가 집단적으로 발병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었다.

유채의 생각에는 유전병보다는 이게 더 가능성 있어 보였다. 조각이 있던 펠레스 호무스의 근처의 유티티오 호무스와 같이 개체수가 많은 쥐나 토끼 수인들은 피해를 덜 입은 것을 보면 오히려 이게 더 옳아 보였다. 리네아는 현대인이 아니니 셀레네가 설명한 것을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었다.

“근데 이게 무슨 상관이야. 내 코가 석자인데.”

유채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마를 탁자에 박았다. 어차피 그녀는 고등학생 수준의 지식밖에 없었고, 전문가도 아니었다. 여기서 뭘 더 생각한다고 해결책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채는 쿵, 쿵, 이마를 탁자에 박았다. 유채는 제 번민을 지우기 위해서 하던 것을 막은 것은 이마와 탁자 사이에 끼어든 따뜻한 무언가였다. 유채는 고개를 돌렸다. 루프스가 손을 내밀어 이마를 감쌌다.

“네가 저들을 돕지 못해서 미안해할 필요없다.”

“알아요.”

“표정은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 네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 너는 저들에게 빚진 것도 없지 않나.”

루프스는 울적한 표정을 한 유채의 앞에 앉았다. 그는 더운 것인지 겉에 걸친 조끼 같은 예복까지 벗은 채였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전에 블루벨에게 들었을 때, 당신은 그냥 마법사 몇만 데리고 의례적으로만 왔다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왜 다른 거예요?”

“변하기로 결심했으니, 달라져야지.”

루프스는 갑자기 마주한 참상에 마치 제가 죄지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이런 유채를 좋아했다. 유채는 언제나 남의 아픔에 공감을 했고 그들을 돕고 싶어 했다. 그녀가 돕고 싶어 하는 이들의 절반은 모두 그녀를 깔보고 욕한 이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피해자에 불과한 유채를 악녀라 몰아가고 전쟁의 원인이라 지목하며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채는 그들의 고통에 가장 먼저 공감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스스로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유채를 좋아했다. 그래서 변하기로 했다. 유채를 동경했기에, 그래서 사랑했기에 변하기로 했다. 그녀처럼.

“내가 루프스의 자리에 오른 것은 내 이기심을 위해서였다. 나는 두려웠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모두를 지배하면 드미트리 같은 놈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게 지배라는 건 그 정도의 의미였다. 바닥에 떨어진 내 자존심을 높이는 수단으로 나는 내가 가장 최고의 권력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하려 잔혹하게 굴었고 그렇게 살았다. 루프스의 자리에 앉아서 나는 그저 내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에 모든 일을 집중했다.”

유채는 루프스의 말이 불편했다. 그는 유채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느끼곤 그녀를 위하여 돌려 말하기로 했다.

“너를 만나고 과거의 붙잡혀 있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너는 아무리 큰 상처를 받아도 극복하고 나아가는데, 나는 상처를 극복하려 하지 않고 숨어 있는 모습이 한심했다. 그래서 변하기로 한 것이었다.”

유채에게 베푸는 선의는 위선도 아니었으며 순수한 제 사랑이었다. 그녀로 인해서 변했다. 유채의 선택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유채가 부정한 자신의 사랑을 자신의 방법으로 증명하는 것뿐이었다.

유채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루프스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촌장의 부인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루프스는 유채가 불편할 것 같아 자리를 피하려고 하였다.

“앉아요. 나 당신한테 물어볼 것 있으니까. 음식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루프스는 유채의 말에 곧장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촌장 부인은 루프스가 주인의 관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아 보여서 속으로 조금 웃었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높은 분이라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암컷에게 쩔쩔매는 것을 보니 그도 저와 같은 수인이구나 싶었다.

촌장 부인이 내어온 식사는 토스 호무스와 다르게 담백한 곡물 위주의 식단이었다. 향신료도 별로 들어가지 않아서 유채는 오히려 토스 호무스 때보다 더 마음 편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동물화 문제는 어떻게 처리 중인 거예요?”

유채가 포크를 내려놓고 넌지시 물었다.

“뱀 수인 일족의 치유 능력이 들어가면 상태가 호전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빠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레프스를 처방해서 진행을 늦춘 뒤에 의사들이 최근 개발한 약을 먹이면 그나마 진행이 멈추지. 운이 좋으면 거기서 병의 진행을 멈추고 살아갈 수 있지만. 이따금 정말 극단적인 방법으로는 변한 신체부위를 절단한다. 정말 대책이 서지 않는 경우에 쓴 방법이지만 효과는 확실히 보기는 하였다.”

유채는 밥을 깨작였다. 아빠라면 혹시 아실까 싶었다. 유채의 아버지는 본래 의대 출신으로, 의대를 다니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을 깨닫고 다시 약대에 들어간 케이스였다.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일한 적도 있고 좀 더 편하게 일하려고 약국을 운영하던 중에 유채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한 것이다.

“뭐, 아는 것이라도 있는가?”

“나는 모르고 우리 아빠는 알지도 모르죠.”

“너희 아버지?”

“약사시거든요. 의사가 되려다가 포기하시고 약사 되신 분이세요.”

루프스는 유채가 처음으로 털어놓는 자신의 집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약사가 의사와 무엇이 다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유채의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직업인 것 같았다. 유채가 토스 호무스에 있을 때보다 밥을 잘 먹자 루프스는 그녀의 앞으로 접시를 밀어주었다.

“아니면, 언니는 알려나? 하긴 우리 언니 본과도 들어가지 못하고 아프기 시작했는데, 언니도 모르겠지.”

유채는 울적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제가 이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언니부터 챙겨야 할 때인데 괜히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표정이 우울해지자 그 역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는 유채가 못 보는 사이 표정을 정리하고 우울한 기색을 숨겼다. 그리고 유채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웃었다.

유채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에게 돈이 생겼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정말 소중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약을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신 눈앞에 다른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이 보여요. 돈에 여유가 있어서 나누어주어도 되는데, 잘못하면 약을 살 돈이 부족해질지도 몰라요. 당신은 그 상황에서 어떡할래요? 무시하고 지나칠 거예요?”

유채는 그가 무시하라고 하기를 바랐다. 저 인간이 변해봤자 본성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루프스가 그렇게 말하면 유채도 능력을 쓰는 것을 접을 생각이었다.

“예전의 나라면 지나치겠지만…….”

루프스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힘이 닿을 때까지. 그게 옳은 것이지 않은가?”

유채는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 * *

“여기도 아니네. 여기가 마지막인데.”

유채는 손에 든 붉은 보석을 바닥에 내던지면서 중얼거렸다. 막사에서 잠이 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중 은빛 늑대가 돌아와서 조사한 것을 알려왔다. 유채는 막사 구석에서 늑대로 변해 잠들어 있는 루프스를 한번 힐끔 보고는 은빛 늑대를 따라 권능을 써서 이동했다.

이미 동물화로 텅 비어버린 유령마을이었다. 늑대가 알려준 모든 곳을 뒤졌지만 리와인더의 조각은 나오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난 유채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유채는 셀레네를 요즘 조금 다른 시각으로 생각했다.

죽었어야 할 자신을 살려준 것은 고마웠다. 시간이 지나고 냉정을 차고 나니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셀레네가 이런 식으로라도 저를 살리지 않았다면 언니는 꼼짝없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셀레네에게 마냥 고마운 것은 아니다. 배려 없는 그녀 때문에 덕분에 스티폴로르에서 겪었던 일들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었다. 유채는 불경죄로 잡혀갈 수도 있는 말을 용감무쌍하게 내뱉고 탁자에 기대었다. 잠긴 상자를 열기 위해서 썼던 단테가 준 단도는 옆에 내려놓은 채였다.

‘하아.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소니페스 호무스의 궁의 수장고도 있으니까. 포기는 하지 말자.’

유채는 다시 막사로 돌아가기 위해 탁자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유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유채는 갑자기 저를 덮친 힘에 당황했다. 벽에 부딪친 유채가 상황을 판단하고 대응하려 하기도 전에 긴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허윽!”

여자의 손이 유채의 목을 조였다. 유채는 허우적거리면서 여자를 떼어내기 위해 힘을 주었다. 숨이 막혀서 눈앞이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수인을 상대하는 데 그녀의 완력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상황에는 이렇게 빠져나오면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유채는 루프스가 알려주었던 기술을 떠올렸다. 이판사판이었다. 통하든 통하지 않든 일단 시도는 해봐야했다. 유채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다리를 움직였다. 여자의 중심이 흔들렸다. 유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위에서 내리 누른 여자의 손에 힘이 조금 빠지자 그 손목을 붙잡고 뒤로 꺾었다.

“아악!”

여자의 손이 떨어지자 유채는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신선한 공기를 다급하게 들이마시는 유채의 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나 있었다. 뒤로 나가떨어진 여자는 형형한 눈동자로 유채가 떨어뜨린 단도를 집어 들었다.

“젠장.”

유채는 몸을 낮춰서 단도를 피했다. 루프스가 알려준 동작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빌어먹을 정도로 쓸모없는 남자더라도 이때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루프스는 단도를 쓰다가 상대에게 뺏겼을 때 취해야 하는 동작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채의 볼이 단도에 스쳐서 길게 찢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자의 몸짓은 체계가 잡혀 있지 않고 무작정 휘두르기 식이라 상대하기에 그리 힘들지 않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루프스와 대련하던 것에 비하면 그녀는 쉬운 상대이기까지 했다.

유채는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여자의 팔을 꺾었다. 루프스가 말하기를 완력의 차이는 나도 관절을 공격하는 것은 어느 정도 통할 것이라고 했다. 여자가 팔이 꺾인 고통에 순간적으로 단도를 떨어뜨리자 유채는 몸무게를 실어서 그녀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유채는 얼른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들어 날카롭게 벼려진 날을 여자의 목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당신 뭐야…… 아!”

작은 돌멩이가 유채의 머리를 때렸다.

“우리 엄마 죽이지 마! 나쁜 마레 위르야!”

유채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순간 외마디 비명을 삼켰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의 동물화는 심각한 상태였다. 아이는 동물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팔다리는 모두 말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목이 말의 목으로 변하고 있었다. 온몸에서 피가 섞인 진물이 배어나왔다.

“으허허헝.”

유채에게 제압당한 여자가 통곡을 시작했다. 유채는 당황해서 말도 못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저를 죽이려고 한 주제에 갑자기 통곡을 하는 여자는 뭐고 또 갑자기 나타난 저 아이는 또 뭔지. 어안이 벙벙해진 유채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 여자가 비명처럼 외쳤다.

“나도!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단 말이야!”

비명에 섞여 나온 울음은 구슬펐다. 여자, 올가는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키우는 과부였다. 큰 마을에서 옷을 팔며 아들과 알콩달콩 살던 그녀의 불행은 아들, 필레스의 동물화로 시작되었다. 동물화는 전염이 되는 병이 아니었지만 소니페스 호무스에서는 동물화를 반 정도 전염병으로 취급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마을을 격리 조치하면 동물화의 속도가 늦춰진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상업으로 먹고살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격리되어 살길이 막히는 것을 두려워해서 두 모자를 냉정하게 내쫓았다.

올가는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끌어모아 아들을 치료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돈을 좋아하는 뱀 수인들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에쿠우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격리 구역에 들어가야 하는데 격리 구역은 강하게 통제되고 있기에 올가는 격리 구역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올가는 절망하고 절망했다. 아무 데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던 올가는 결국 아들과 이 유령 마을에 들어왔다. 하루하루 겨우 목에 풀칠만 하던 중 벨라토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마레 위르의 간이 동물화를 치료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올가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이 번뜩였다. 평생을 옷 짓는 일만 하던 올가였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그깟 마레 위르 하나 못 잡을 리가 없었다. 포트리스 주위에 분명히 마레 위르 한둘은 지나다닐 것이었다. 설마 그들 하나 못 잡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살인이라는 것이 주는 공포감에 올가는 며칠을 뒤척이며 고민했다. 그리고 오늘 올가는 유채를 보았다.

“으허허헝. 나도, 당신 죽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우리 아들은! 죄 없는 우리 아들!”

올가는 이제 바닥에 엎드려서 통곡했다. 유채는 그녀와 아이를 번갈아 보곤 입술을 짓씹으며 손등의 권능의 흔적을 매만졌다.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힘이 닿을 때까지. 그게 옳은 것이지 않은가?’】

루프스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채는 스스로에게 작게 조소했다. 그렇게 증오하던 인간도 옳은 결론을 내는데 뭘 고민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것이 옳다. 유채에게 언니가 소중한 만큼 그녀에게도 아들이 소중할 것이다. 제 이익만 채우겠다고 그녀를 무시하면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루프스와 다를 점이 무엇인가.

유채는 어느새 올가의 품에 안긴 아이의 뺨을 감싸 쥐었다. 진물과 핏물로 더러워진 얼굴이지만 그런 것은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올가는 경계의 눈초리로 유채를 노려보았다.

“성공할지 어쩔지는 나도 몰라요. 하지만, 도울 능력이 있는데도 지나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니까.”

“예?”

“도와준다고요.”

유채의 손에서 빛이 나왔다. 그 빛이 필레스를 감쌌다. 빛이 닿는 부분마다 허물이 벗겨지듯이 원래 사람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올가의 눈이 커다래졌다. 유채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빛이 사라지고 필레스는 쓰러지듯이 올가의 품으로 쓰러졌다. 올가는 필레스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치료할 수 없다는 동물화가 말끔하게 치료되었다. 올가는 유채의 손을 부여잡고 울었다.

“감, 감사합니다. 이, 이 은혜는 죽, 죽어서도 갚겠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갚으실 필요 없…….”

유채는 갑자기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손에 말을 멈추었다. 오열하던 올가는 유채의 뒤에 있는 수인을 보고 기겁했다. 어깨에 달린 견장이 그가 누구인지를 증명했다. 올가는 필레스를 내려놓고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유채는 뒤를 돌아보았다.

“루, 루프스님…….”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루프스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서 달빛에 반짝였다.

“헉. 헉.”

루프스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선잠 상태에서 그는 유채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눈을 떴다가 혼비백산했다.

분명 침대 위에 있던 그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루프스는 급하게 막사 밖으로 나와 유채의 냄새를 쫓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체취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머릿속에 유채가 전에 지도에 표시해 둔 마을이 기억났다. 분명히 이 근처에 있는 유령 마을이었다. 루프스는 그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이별은 수백 번 곱씹어보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은 원하지 않았다. 최소한 인사는 하고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사라져 버리면 저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왜 제게만 이렇게 잔인한 것인가. 루프스는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마을까지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체취를 감지했다.

갑자기 빛이 번쩍였다. 루프스는 고개를 돌렸다. 저기다! 루프스는 곧장 그 집으로 향해 문을 벌컥 열었다. 비쩍 골아 있는 암컷 말 수인이 아이를 부둥켜안고 유채의 손을 붙잡은 채 울고 있었다.

루프스는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저 유채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안도감에 취해 그것밖에 하지 못했다. 유채가 아직 제 곁에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피부의 부드러운 촉감이며 온기며 그 향기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루프스는 그것 하나에 안도했고 행복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꼭 끌어안았다.

“그, 그러니까, 이건…….”

유채는 갑자기 나타난 루프스에 당황했다. 그가 뭔가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채서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봐 걱정되었다. 유채는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올가는 몸을 달달 떨었다. 그제야 눈앞에 있는 마레 위르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아무리 소니페스 호무스가 다른 일족의 땅보다 상대적으로 포트리스와 가까운 편이라고 해도 울피누스 호무스가 아닌 이상 쉽게 마레 위르를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목에 걸려있는 저것은 파렌티아일 것이었다. 헥터와 젤다가 그 레티티아에게 한 일로 어떤 꼴이 되었는가? 올가는 걱정이 밀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몰, 몰라 뵈었습니다. 이, 이분이 레티티아님인지 몰, 몰랐습니다.”

루프스는 올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제야 유채의 상태를 살폈다. 볼에 난 상처와 엉망이 된 옷가지가 보였다. 거기에 붉게 손자국이 난 목까지. 그의 눈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괜찮은 건가?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난 괜찮아요. 놓아줘요. 부담스러워요.”

유채는 허리에 감긴 루프스의 팔을 떼어내려 했다. 루프스는 쉬이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고 불안해서 머뭇거렸다. 그는 유채의 볼에 난 상처와 벌벌 떠는 말 수인 암컷을 보고 상황을 금방 유추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이 남았다.

마레 위르의 간이 동물화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소문이 돈다는 말은 그도 들었다. 그것 때문에 유채를 공격하려 한 것인가 싶었지만 저 암컷도 그렇고 아이도 그렇고 동물화에 걸린 것 같지 않았다.

루프스의 눈이 여자와 아이에게로 향하자 유채는 다급하게 외쳤다.

“내가 단검을 잘못 다뤄서 스친 상처예요. 저 여자는 아무 잘못 없어요. 여기 사는 여자인데 내가 갑자기 들어오니 놀라서 덤벼든 것뿐이에요.”

“네가?”

루프스는 유채와 암컷을 번갈아 살폈다. 아니었다. 암컷은 공포에 질려서 벌벌 떨었다. 만일 유채의 말이 사실이라면 암컷은 그녀의 말이 옳다고 말을 보태야 했다. 루프스는 유채가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잘못한 것이고 저분은 아무 잘못 없어요. 이곳에 몰래 들어온 내 잘못이에요.”

“그럼 왜 저 암컷이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지? 여긴 모두가 떠난 빈 마을인데?”

“제, 제 아들이 동, 동물화에 걸, 걸려서 마을에서 내, 내쫓겼습니다. 그래서 이, 이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올가는 몸을 납작하게 숙였다. 그녀는 혹여나 유채에게 피해가 될 것을 걱정하면서 다른 말도 덧붙였다.

“레티티아님은 친절하게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제, 제가 자, 잘못을 했음에도, 제 아, 아들의 병,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 그러니. 부, 부디 레티티아님께 자, 자비를 베풀어주, 주십시오.”

루프스는 유채의 왼쪽 손등을 바라보았다. 문양이 바뀌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 지워졌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세 개 중 두 개의 일부가 조금 지워져 있었다. 루프스는 아까 보았던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았다. 유채가 성력(聖力)을 쓴 것이었다.

에클레시아가 무너지고 스티폴로르에는 성력(聖力)을 쓸 수 있는 신관과 신녀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유채는 신과 계약을 했고 그 계약을 이용해서 루비 조각을 찾는 것을 돕는 힘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유채는 지금 그 힘을 사용한 것이었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아나!”

루프스는 반쯤 공포에 사로잡혀서 유채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동물화에 대한 문제로 공포에 질린 수인들은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이 상황에 유채가 성력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녀는 모든 수인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놔요!”

유채가 반항했다. 루프스는 두려움에 질려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잠시만 나가 있어. 밖에서 기다려.”

유채는 루프스의 가슴을 밀어내고 멀찌감치 떨어졌다.

“저분은 아무 잘못 없어요. 그러니까…….”

“안다. 알고 있으니 나가 있어. 이 암컷과 내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유채는 반신반의했지만 올가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나가셔도 돼요. 전 괜찮아요.”

올가는 거듭 괜찮다고 말을 하고 유채를 내보냈다. 마지못해 밖으로 나온 유채는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루프스를 막을 각오를 하고 문에 귀를 붙였다.

루프스는 올가와 단둘이 남자 입을 열었다.

“이름, 그리고 직업이 뭔가?”

“올, 올가라 하옵니다. 옷, 옷 장사를 했습니다. 옷 짓는 재주가 있어서 그 알량한 재주로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해를 끼치지 않으마. 레티티아의 간을 노렸느냐?”

올가는 엎드려서 흐느꼈다. 올가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유채를 죽이려고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잘못은 분명히 제가 했다. 올가는 울먹이면서 제 죄를 고했다.

“노, 노렸습니다. 아,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 그랬는데도 레티티아님은…… 제 아, 아들을 사, 살려주셨습니다.”

루프스는 미간을 문질렀다. 유채다웠다. 저를 죽이려고 한 수인마저도 동정해 버리고 마는 그녀는 너무 동정심이 많아서 탈이었다.

“소니페스 호무스의 수도에 옷가게를 차릴 만한 돈을 주겠다.”

“예?”

올가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루프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대가 이런 일에 내몰린 것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 내가 그 일부분을 책임지겠다. 다시 가게를 차릴 자본을 줄 테니 아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살아라.”

“감, 감사합니다. 정, 정말 감사합니다.”

루프스는 이마를 바닥에 찧는 여인을 일으켜 세웠다. 올가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대신 한 가지 부탁하지.”

루프스는 본론을 꺼내었다.

“네 아들을 누가 치료했는지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라. 그리고 소니페스 호무스의 궁으로 환궁하기 전까지는 레티티아의 시중을 들어라. 은인이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시중은 핑계였고 입단속을 위해 루프스가 직접 감시할 목적으로 유채의 시중을 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알, 알겠습니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올가는 루프스의 자비에 감격했다. 죄인에게는 한없이 잔혹한 이라고 들었다. 루프스는 죄인을 잔혹하게 처벌하여 자신에 대한 공포를 수인들에게 주입하는 군주였다. 올가는 루프스의 너그러운 처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올가의 옆에 누워 있던 필레스가 웅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떴다. 올가는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필레스도 몸이 아프지 않다는 데 깜짝 놀라 제 손과 발을 내려다보았다.

“엄, 엄마. 나, 나 손이 보, 보여.”

“응. 아까 그 마레 위르 누나가 필레스를 고쳐줬어. 엄마가 나쁜 짓을 하려고 했는데, 그 누나가 우리 필레스 고쳐줬어.”

루프스는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모자(母子)를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자는 퀭한 눈에 비쩍 마른 몸이라 그동안의 고초가 짐작하고도 남았다. 루프스는 올가에게 유채와 잠깐 이야기하고 나중에 찾으러 올 때까지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으라고 언질을 주었다. 저와 유채와 같이 이동할 것이니 도망가지 말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루프스는 모자를 남겨두고 문을 열었다.

“악!”

유채는 이마를 감싸 쥐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비명에 놀라 얼른 몸을 굽혔다.

“괜찮나? 왜 문 앞에 바로 붙어 있어서!”

“그냥…… 문에 이마를 찧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호들갑 좀 떨지 말아요. 시끄러우니까.”

유채가 차갑게 말하는데도 루프스는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를 살폈다. 이마도 그렇고 볼의 상처도 크지 않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에 남은 붉은 멍 자국을 애잔하게 쓸었다. 유채는 올가를 걱정해서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몸은 괜찮나?”

“그쪽이 가르쳐 준 호신술 덕분에 다치지 않았어요.”

루프스가 볼에 난 상처를 손으로 훑자 유채는 그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서 주춤거리면서 물러났다.

“남 치료할 힘이 있으면 너부터 치료하지 그랬나? 암컷의 얼굴에 상처가 나면 안 된다고 내 어머니가 종종 말씀하셨다.”

“별것 아닌 걸로 호들갑 떨지 말아요.”

겨우 이 정도 상처에 마법을 쓰기도 뭐했다. 유채는 피만 대강 닦고는 루프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녀를 놓아준 루프스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물었다.

“왜 이리 무모한 짓을 했나?”

“무모한 짓?”

“왜, 저 꼬맹이를 치료한 것이나? 네가 얼마나 위험해질 줄 알고.”

“그쪽이 그랬잖아요.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한다고.”

“하지만, 너는 네 몸은 생각하지 않나? 지금 네가 한 일이 수인들 사이에서 퍼지면 어떻게 될지 몰라 그러는가? 너는 분명 수많은 수인들의 표적이 될 거야. 모두 다 너를 잡아서 동물화를 치료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너를 어떻게 대우할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다. 운이 좋지 않으면 너를 붙잡아 치료하도록 협박할 거고 운이 좋으면 신녀로서 대우하겠지. 하지만 어떤 식이든 네가 위험해질 거라는 건 확실하다!”

루프스는 가슴을 졸였다. 목소리가 절로 격양되었다. 유채가 위험해질까 봐 겁이 났다. 루프스는 유채가 독을 먹고 쓰러졌던 그때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제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루프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이래서 당신 행동이 다 가식 같고 위선 같아요. 결국 당신이 오늘 했던 말도 그저 내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한 말에 불과하단 거잖아요. 내가 남을 도우면 당신의 물건인 내가 망가…….”

“걱정하는 거야!”

루프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채는 루프스의 노성에 입을 다물었다.

“젠장.”

루프스는 작게 욕설을 내뱉고는 제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됐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루프스는 사과했다. 둘 사이에 더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유채는 한 손에 얼굴을 묻은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저런 루프스는 너무 불편했고 낯설었다. 왜 저렇게 괜한 궁상을 떠는지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짜증이 났다.

“나는 너를 걱정할 권리도 없나?”

루프스는 비참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유채는 제 걱정도 가식이라고 위선이란다. 도대체 그럼 제가 어떻게 대해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까? 도대체 무엇을 해야 제 진심을 곡해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줄까?

루프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앞에서 제 처지를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만큼 염치없는 일도 없기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표정을 정리했다. 굳어서 뻣뻣한 입을 움직여서 애써 미소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표정이 마치 울고 있는 피에로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하나 물어도 되나? 네 언니가 어떤 마레 위르를 구해주었는데 그 마레 위르는 적이 많은 이였다. 그래서 그 마레 위르를 구해주었단 이유 하나로 그의 적들이 네 언니를 노리게 되었다. 그럼 너는 네 언니에게 무조건 잘했다고 말할 것인가? 걱정하지 않고 잘했다고만 할 건가?”

“그건…….”

유채는 할 말이 없었다. 아마 그 상황이면 유채도 언니를 걱정했을 것이다. 오지랖 떨지 말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 언니의 행동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나 유채에게 더 소중한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언니니까.

“나도 그냥 너를 걱정하는 것이다. 네가 내 연정을 무시해도 된다. 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게 그 마음까지 품지 말라고 하지는 마라.”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제 가슴 위로 올렸다. 그녀에게 제 마음이 전해졌으면 했다. 루프스는 울 것 같이 일그러진 얼굴을 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굳은 입가를 위로 올리고 눈물을 참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나는 네가 걱정된다.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하고 울지 않았으면 하고 네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루프스가 손을 놓아주자 유채는 손을 거두고 그의 손이 닿았던 팔목을 매만졌다.

그런 유채의 행동에 루프스의 입가에 쓴 미소가 머물렀다. 아직도 저를 꺼리는 그 모습에 비참해졌다. 이제 그만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한번 터져 버린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너를…… 그러니까…… 너를 걱정할 수 있게만 해줘라. 위선도 아니고 너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한 말도 아니다. 그저 걱정이 되어…….”

루프스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젠장.”

루프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유채는 혼자서 신파극을 찍는 것 같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냥…… 걱정만 하게 해줘…… 더 큰 것은 바라지 않을 테니…….”

애원처럼 나온 말에도 유채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를 지나쳐서 두 모자가 있는 집의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유채는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루프스도 유채가 올려다보는 하늘을 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에 가득 수놓아져 있었다. 누가 하늘에 물을 뿌리기라도 한 것인지 뿌옇게 번져 보였다. 루프스는 주춤주춤 유채의 옆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마음대로 해요.”

루프스는 유채의 말에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다리를 쭉 뻗은 유채는 고개를 한껏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루프스는 달빛에 반짝이는 유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말라는 인간도 아니니까. 당신 마음대로 해요. 언제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하지 않은 일이 있었나요?”

루프스는 유채의 까칠한 말에 마음이 다시 바닥에 처박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진심이 무엇이든, 걱정해도 된다고 허락을 해주었다.

“난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느냐고, 그것부터 물을 줄 알았는데요.”

“네가 내 앞에 있으니 됐다. 묻지 않아.”

루프스는 유채가 원한다면 저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만 해도 제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유채의 자비를 바라는 것 외에는.

“다만…… 어디를 가면 간다고 행선지만 말해라. 아니면, 인사라도 해줘.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내게 데려다 달라고 해도 된다.”

루프스는 조심스럽게 제 바람을 꺼냈다.

“어디 있든 내가 너를 지킬 수 있게. 그렇게 해줄 수 없나?”

루프스는 유채의 턱을 잡고 제 쪽으로 돌렸다. 위르형의 상태로는 별로 효과가 없을 테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었다. 루프스는 혀를 내밀어서 유채의 상처를 핥았다. 유채는 더럽다고 질겁하며 그를 밀어내었지만, 그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기에 밀려나지 않았다. 유채는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손으로 뺨을 벅벅 문지르다가 피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문지르는 것을 멈췄다. 확실히 침에 지혈효과는 있는 모양이었다.

“저 모자가 진정할 때까지만 잠시 기다리지.”

“알겠어요.”

루프스와 유채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루프스는 눈을 끔벅였다. 유채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리고 잊고 있던 피곤이 몰려오자 무거워진 눈꺼풀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왔다. 루프스의 몸이 옆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그의 머리가 유채의 어깨에 닿았다. 유채는 제 어깨에 닿는 묵직함에 고개를 돌렸다. 다 큰 사내가 마치 아이처럼 제게 기대 잠이 든 것에 유채는 복잡한 감정이 되었다.

변했다고 생각해도 될까?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언제 그가 다시 돌변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전에도 변덕이 죽 끓듯 하던 남자였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 속지 말아야 했다.

“무거워.”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유채의 시선이 루프스의 얼굴에 머물다가 다시 하늘로 향했다.

“당신도 이런 표정 지을 수 있구나…….”

유채는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루프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루프스는 꿈에서 유채와 만나고 있었다. 그녀는 저를 보고 웃었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단번에 이것이 꿈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벅차도록 행복하여 그는 이 꿈에서 깨지 않기를 원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란텔 형님!”

벨라토르의 신참인 헨리는 큰 소리로 란텔을 찾았다. 헨리는 란텔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라일라가 죽었다는 장소까지 머뭇거리며 들어왔다. 평소 귀신을 무서워하는 헨리는 혹여나 억울하게 죽은 라일라의 귀신이 자신을 덮칠까 봐 겁을 내고 있었다. 헨리는 오밤중에 이렇게 으스스한 곳에서 만나자고 한 란텔을 속으로 욕했다.

“왁!”

“으허허헉!”

헨리는 갑자기 뒤에서 큰소리가 나자 이상한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란텔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면서 헨리를 내려다보았다.

“놀랐잖소, 형님! 정말 이상한 취미가 있다니까!”

헨리는 툴툴대면서 일어섰다. 란텔은 껄껄 웃는 척을 하며 그가 이곳에 오면서 남긴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좀 더 많은 흔적이 필요했다. 란텔은 순박한 얼굴을 하고 저를 잘 따르는 헨리를 속으로 비웃었다. 그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헤임달을 위해서라면 손에 피를 묻히는 일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란텔은 저 멀리서 라일라의 살인에 관해서 조사하고 있을 하워드 형제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주 조금 남았다. 란텔은 헤임달의 숙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형님. 근데 요즘 여기는 왜 이렇게 자주 다니오?”

“어? 네놈 담력 훈련시킨다고 그런다!”

란텔은 그럴 듯한 거짓말을 둘러대었다.

“근데 형님, 우리 저 마레 위르들에 대해 보고 올려야 하지 않소? 벨라토르로서 그냥 두고 보고 있는 거 들켰다가는 우리…….”

헨리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였다. 이런 중요한 일을 보고하지 않은 것을 알면 루프스가 저희를 죽이려들 것이었다. 헨리는 루프스에 대한 공포로 몸을 떨었다. 란텔이 헨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걱정 마.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린 보고 올려도 까일 거야. 왜 그런 줄 알아? 마레 위르들의 침입을 못 막았잖아. 그러니 그냥 입 다무는 게 우리가 살길이야, 헨리.”

하워드 형제 일행이 편하게 울피누스 호무스로 들어온 것에는 란텔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란텔은 헤임달의 보고를 듣고 얼른 벨라토르의 순찰 시간을 조정해 하워드 형제 일행이 들키지 않고 울피누스 호무스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 뒤의 일은 쉬웠다. 렉스와 울피누스 호무스의 고위 서열 수인들은 어느 정도 아는 사이였고, 헤르티아의 측근으로 활동하는 저에게 그들의 처우를 일임한 것이었다.

“아무튼 형님, 담력 훈련이라는 장난은 그만 치고 요즘 여긴 왜 이리 자주 나가 계십니까?”

“글쎄? 옛날 추억 떠올려보려고?”

란텔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수인과 마레 위르 혼혈이라 스티폴로르에서는 배척받다가 포트리스에 들어갔다. 동물형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일찍 발현됐으면 좋으련만 자신은 돌연변이라도 되는지 발현시기가 늦었다. 원래 혼혈이건 정통 수인이건 세 살 때면 모두 동물형을 취할 수 있었지만, 란텔만 돌연변이로 그 시기가 늦었다. 그렇게 포트리스로 흘러 들어왔건만 이제는 동물형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그곳에서도 배척당했다. 양쪽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그를 불쌍히 여겨주었던 것은 라일라 뮈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울피누스 호무스로 가버렸지만. 수인과 마레 위르 양쪽에 원한을 품으면서 자라던 중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 헤임달이었다.

헤임달은 그를 친아들처럼 길러주었다. 동물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그를 받아주었다. 란텔에게 헤임달은 구원자였다. 그러니 헤임달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라일라가 그를 도와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무책임했다. 그녀는 동정만 베풀었을 뿐, 헤임달처럼 책임져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란텔은 그녀를 죽이는 데 죄책감을 갖지 않았다.

란텔은 마지막까지 저를 붙잡으면서 아들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려던 라일라를 기억했다.

“바보 같긴.”

“예?”

헨리가 란텔의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란텔은 헨리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라일라가 마지막 발악 끝에 죽은 뒤에 란텔은 그녀의 아들들을 쫓았다. 아직 어리고 동물형을 취할 수 없는 일반 마레 위르로 태어난 두 형제는 늑대로 변한 란텔에게 금방 따라잡혔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에서 두 형제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아래로 떨어졌다.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 살 확률은 극히 적었다. 그래서 란텔은 그들이 죽었을 거라 믿었지만 라일라의 시신 옆에 형제의 시신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운 좋게 근처에서 놀던 그 형제의 또래의 수인을 발견하였고 죽인 뒤에 꼬리와 귀를 잘라내고 불에 태웠다.

“이제 돌아가자. 그렇게 좋은 기억이 많은 장소도 아니거든.”

“그럼 나는 왜 부르오.”

핸리가 투덜거렸다.

“그만 투덜거려. 내가 술 사줄게, 뭐 먹을래?”

“진짜요? 뭐 마실까…….”

아직 나이 어린 헨리는 그 말에 신이 나서 먹고 싶은 것들을 중얼거렸다. 란텔은 열심히 얼마 안 남은 흔적을 찾고 있는 하워드 형제를 돌아보았다.

마음대로 하라고 그러지.

어차피 죽을 놈들이었다. 진실쯤 알고 가게 해줘도 나쁠 것이 없었다.

* * *

꿀 같은 잠을 자고 난 후 루프스는 제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슬며시 눈을 떴다.

“적당히 잔 것 같은데, 일어나는 건 어때요?”

유채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루프스는 당황해서 눈만 굴렸다. 어느새 그는 유채의 무릎 을 베고 누워 있었다. 루프스는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당황한 나머지 앞을 살피지 못해 그만 유채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큭!”

“아악!”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이마를 세게 부딪쳐서 루프스는 인상을 찌푸렸고 유채도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이마를 감싸 쥐었다. 유채는 몸을 웅크리고서 온갖 짜증 섞인 말을 토해내면서 이마를 문질렀다.

“미안하다. 좀…… 일찍 깨우지.”

“이봐요. 그게 나한테 할 소리라고 생각해요?”

유채는 날카롭게 대답했다. 루프스는 생각해 보니 잘못해 놓고 변명을 하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물었다.

“멍든 것은 마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인가?”

유채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멍든 거 없애는 마법은 몰라요.”

유채는 이마는 오르페에게 부탁하자고 결정을 하곤 다리가 저려서 풀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프스가 반사적으로 유채의 손목을 붙잡았다. 유채는 불쾌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뭐요? 더 할 말 있어요?”

“……왜 그냥 내버려 둔 건가? 깨울 수도 있었을 텐데.”

루프스는 유채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는 것에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란 것은 그녀가 자신을 떨쳐 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답을 기다렸다. 이번은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를 하였다.

“하.”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헛웃음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얼굴을 보기가 겁이 났다.

“나는 당신하고 달라서 최소한의 사람의 도리는 지켜요.”

붙잡은 팔목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와 다르게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감히 올려다보지 못하는 얼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루프스는 암담한 기분으로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복수를 하더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도 안 되며, 내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것이 그것이 내게 남을 해할 수 있는 권리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최소한의 인정을 베풀어야 함을 나도 알아요.”

그래서 유채는 항상 너무 친절했고 자비로웠다. 사실 루프스는 유채가 지금 그에게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욕심이 많고 한심한 이인지는 매일매일 새롭게 깨닫게 되면서 그럼에도 더 많은 자비를 바랐다. 루프스는 자신의 욕심에 조소를 보냈다.

“나는 피곤에 찌들어서 겨우 잠든 것 같은 사람을 내칠 정도로 냉혹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베푼 것은 호의가 아니라 그저 도리를 지킨 것뿐이에요. 착각하지 마요. 그리고 손목 놔요.”

루프스는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유채는 기분을 환기시키고 싶은 것인지 크게 한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루프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은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어. 별똥별이다.”

유채가 긴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별을 보며 말했다. 유채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에 움켜쥐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꿈에서나 볼 법한 얼굴로 웃고 있는 유채를 보고 루프스는 별똥별에 소원을 빌었다. 어차피 다 미신이고 자신의 소원은 그 누구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빌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마 자신은 저 뒷모습만 바라볼 수 있게 허락된 운명일지도 몰랐다. 검은색의 아름다운 천으로 짜인 하늘과 당장이라도 거기에 섞여서 사라질 것 같은 연모하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싶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바칠 수 있을 텐데. 제 영혼이라도 내어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기꺼이 돌아갈 것이다.

“이제 돌아가…… 요?”

유채가 몸을 돌렸다. 루프스는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 것을 보고 제 얼굴을 쓸었다. 손에 눈물이 만져졌다. 루프스는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닦아내었다.

“당신?”

“먼지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 먼지 때문이야. 먼지…….”

루프스는 횡설수설했다. 뭐라고 해야 유채가 덜 불편해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유채가 그의 어수룩한 변명을 믿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루프스는 얼굴을 정리한 뒤 유채의 뒤를 따랐다. 말 수인 모자와 함께 원래 있던 마을로 돌아온 뒤, 루프스는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뜨려야만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주위에 모여 감사하다고 눈물을 쏟으면서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았다.

말 수인 일족은 다른 일족보다 동물화에 대한 통제를 빨리 시도했다. 지원 대상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제일 먼저 고려하는 요소는 치료가 가능한가, 였다. 간단한 치료로도 일상에 복귀할 수 있는 수인들을 우선으로 진료하고 지원하는 것이 원칙이라 병의 진행도가 심각한 수인들은 치료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그로 인해서 동물화가 발병한 마을들은 저도 모르는 새에 환자들의 정도에 따라서 심각한 관리에 들어갔다. 지금 유채의 눈앞에 있는 이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이 지원을 위해서 쫓아낸 중증의 환자들이었다. 이들은 올가처럼 수인들의 눈에 덜 띌 수 있는 펠레스 호무스라든지, 이런 유령마을에 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올가는 그들과 친분이 있었고 그들을 동정했다. 당연히 유채에게 그들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고 유채는 그것을 수락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그들을 돕고 싶다고 부탁했다. 루프스는 그것이 그녀에게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유채의 의지는 확고했고, 루프스는 그녀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유채의 도움을 받은 수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루프스는 혹시라도 그녀에게 닥칠 위험에 온몸을 긴장하고 있었다.

루프스는 방금 치료를 받은 여우 수인에게 가지고 온 식량과 돈을 주었다. 원래 살던 마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이었다. 여우 수인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게 약속할 것은 하나다. 아무리 어려운 수인을 보아도 네가 어디서 어떻게 치료받았는지 말하지 마라. 그것만 지킨다면 나도 네가 무엇을 하든 신경을 쓰지 않겠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우 수인은 덜덜 떨며 말했다. 말로만 듣던 루프스를 직접 보니 오금이 저렸다. 이 일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일이었다. 루프스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여우 수인을 한 번 보곤 여전히 수인들을 치료하고 있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보면 힘든 것이 틀림없었다. 예전에 라일라가 말하기를 성력(聖力)은 신의 힘이기 때문에 신의 육체를 가지지 못한 마레 위르가 성력을 사용하는 것은 몸에 부담을 준다고 하였다. 유채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유채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했다. 저런 모습이 좋아서.

한편, 유채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인들과 혹시 몰라 주위를 살피라 했던 은빛 늑대의 보고를 들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는 리와인더의 조각이 없었다.

유채는 손등의 문양을 살폈다. 루프스를 이용한 덕택에 이동 관련한 권능은 거의 닳지 않았다. 치유 관련 권능도 생각 외로 많이 닳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신으로서 최악이고 쓰레기야.’

유채는 이제 새로운 의문을 가졌다. 조각을 스티폴로르의 멸망을 막았다고 친 후, 현재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제를 한단 말인가? 신이 인간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고 했으니 그녀가 직접 나서 저들을 치료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들은 이렇게 계속 고통받을 것이다. 유채는 생각할수록 셀레네의 뻔뻔함에 몸을 떨었다.

“다 끝났나?”

루프스가 가져온 식량과 돈을 다 나누어준 것인지 유채의 곁으로 다가왔다. 유채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루프스는 분명히 제가 그를 이용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묵묵히 도와주었다. 그는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고개를 돌아보면 있을 것 같은 거리에 서서 도와주기만 하였다.

“끝났으면, 같이 걸을 생각 있나? 근처에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 있다. 네 기억에 남기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지.”

“알았어요. 어차피 머리도 식히고 싶으니까.”

유채는 나무 그루터기에서 일어났다. 권능을 너무 과도하게 쓴 것인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 휘청거리는 그녀의 몸을 루프스가 얼른 붙잡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괜찮나?”

“괜찮아요.”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부축했다. 둘의 시선이 얽혔다. 유채의 팔을 잡은 루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채는 제가 중심을 온전하게 잡았는데도 아직도 제 팔을 잡고 있는 루프스의 손에 시선을 던졌다. 루프스는 그제야 손에 힘을 풀었다.

유채는 곧장 한 걸음 떨어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온기와 촉감이 남아 있는 제 손과 그녀와 저 사이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안타까웠다. 유채는 저기 멀찌감치 떨어져 걸어가고 있었다. 루프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그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비어 있는 손. 이게 그에게 허락된 것이었다.

루프스의 말대로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돌아가도 이만한 풍경은 볼 수 없을 것이었다. 유채는 하늘과 들판 모두를 눈에 담으며 걸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루프스가 유채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와 그녀 사이는 이제 한 걸음 정도가 남아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옆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그는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되나?”

“마음대로 해요.”

유채의 선선한 대답에 루프스는 용기를 얻었다. 그는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뭔가?”

“티라미수요. 그러고 보니까 못 먹은 지 꽤 됐네. 돌아가면 실컷 먹어야지.”

루프스는 처음 들어보는 음식의 이름에 당황했지만, 이내 진정하고 다른 것을 물었다.

“생일에 받고 싶은 것이 있나?”

“글쎄요. 딱히 생각나는 건 없네요. 대학교 합격 통지서? 그거면 되려나?”

유채는 루프스의 말에 문득 셀레네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왕이면 셀레네를 골려줄 수 있길 바랐기에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루프스는 그 사이에 사소한 것들을 물어봤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를 묻고 과거 이야기, 행복했던 때, 스티폴로르에서 가장 기억나는 장소, 가족들이 언제 가장 생각났는지 등을 물었다. 유채는 별 생각 없이 답해주었다. 왜 저런 것을 묻는지 의문이었지만, 딱히 숨겨야 하는 비밀도 아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좋아했던 수컷은 있나?”

유채는 걸음을 멈췄다. 유채는 루프스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있었어요. 옆집 오빠. 착하고 다정하고 훈훈하게 생긴 오빠였는데, 결혼했어요. 결혼식에 초대받아 가서 헤어진 전 여친처럼 펑펑 울었어요. 엄마랑 아빠가 뭐하는 짓이냐고, 부끄럽다고 타박을 했지만.”

유채는 중학교 1학년쯤에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만일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옆집 오빠라는 수컷처럼 대해주었다면 너는 나와 헤어지기를 아쉬워했을 것 같나?”

루프스는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비록 가정형밖에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유채에게 아쉬웠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졸렬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대답을 원했다.

유채가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루프스는 제가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말하기 싫다면…….”

“아쉬워했을 것 같아요.”

루프스는 눈을 크게 떴다.

“내 세계에 찰리 채플린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가 이런 말을 했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 말이 어떤 소리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여기에서의 좋은 기억이래봤자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은데, 막상 떠난다고 생각해 보니 아쉬운 점도 있어요.”

이국적인 건물들, 이국적인 풍습, 때 묻지 않은 자연,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 막상 두 번 다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유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블루벨, 그 귀여운 아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고독으로 진작 미쳤을 것이다. 오르페도 있다. 처음엔 그를 보고 기겁을 했었지만 그는 몇 번이고 제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미 골백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프레드릭과 알렉스 형제에게도 고마웠다. 그들이 아니었음 저는 토스 호무스를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고 셀레네도 만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바실리사와 에릭도, 그들 덕분에 베노르 콩레수스의 충격에서 쉬이 헤어 나올 수 있었다.

유채는 작게 미소 지었다. 막상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아쉽고 벌써 그리워졌다.

루프스는 눈을 감은 유채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음미했다. 저 미소는 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루프스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했다. 헤어짐도 없이 그저 이 순간 속에서만 영원히 살고 싶었다.

모든 것이 멈춘 것 같다고 느낀 순간, 유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루프스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 당신과도 좋은 기억으로 얽혔다면 당신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겠죠.”

오월의 바람이 둘 사이를 휩쓸고 지나같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유채가 그대로 사라질 것 같자 루프스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역사에 만약은 없듯이, 당신과 나 사이에도 만약은 없어요. 이미 일어난 일뿐이죠. 난 당신이 싫고 끔찍해요. 당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봐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아요.”

유채는 말을 하면서도 조마조마해서 그를 보았다. 루프스는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준 건 고마워요. 하지만, 거기까지예요. 난 당신이 아직도…….”

“고맙다.”

루프스가 유채의 말을 잘라먹었다.

“고맙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루프스는 수많은 뒷말을 목으로 삼켰다. 제게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알려주어서, 어릴 적 품었던 꿈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만들어주어서, 제 세상에 새로이 색을 찾아주어서, 제 세계에 빛으로 나타나 주어서, 그리고…….

사랑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찬란하면서도 행복하고 벅차오르는 것임을, 그리고 또 그만큼 아픈 것임을 알려주어서 고맙다고, 제 사랑으로 나타나주어서 고맙다는 그 말을.

“고맙다.”

그 한마디에 모두 담았다.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부담이고 불편하다는 유채에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 벅찬 감정을, 수없이 얽힌 복잡한 마음을 루프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것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평생을 사랑할 것이고 평생을 바랄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채는 제게 고맙다고 말하는 루프스를 올려다보았다.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도 어미 잃은 짐승처럼 비참하고 슬퍼 보였다.

* * *

프레드릭과 알렉스는 라일라가 죽은 숲에 여러 번 들락날락거렸지만, 이렇다 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당연했다. 벌써 십사 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 증거가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프레드릭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곳에 드나들 때부터 머리가 아프고 가슴도 두근거렸다. 왠지 익숙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프레드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알렉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알렉스는 처음 온 울피누스 호무스의 궁에서 길을 찾기까지 했다.

“형. 여기 되게 익숙해 보이지 않아?”

“너도 그래? 사라 할머니가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적이 있나?”

프레드릭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울피누스 호무스에 왔었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검을 옆에 내려놓고 물로 목을 축인 알렉스는 무심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프리드, 하늘이 예쁘지?’】

알렉스는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여자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두통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여기만 있으면 이상하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프레드릭을 부르려고 했는데 그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으악!”

덤불 너머에서 프레드릭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 회색과 검은색이 섞인 털을 가진 애꾸 늑대가 프레드릭을 공격하고 있었다. 프레드릭은 벌써 어께와 다리를 물려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형!”

알렉스는 손을 허리에 대고 검을 꺼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저주했다. 아까 잠깐 쉬면서 검을 내려놓았는데 급하게 뛰어오느라 그것을 잊은 것이었다. 검사로서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알렉스는 하는 수 없이 맨손으로 늑대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늑대의 공격을 피해 프레드릭을 낚아챘다. 늑대는 피 묻은 주둥아리로 알렉스와 프레드릭의 주위를 경계하듯이 빙빙 돌았다.

“형. 괜찮아?”

【‘얘들아, 괜찮니?’】

숨을 헐떡이던 중 프레드릭은 환청 같은 소리를 들었다.

늑대는 형제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알렉스는 두고 온 검이 아쉬웠지만 부상을 입은 프레드릭을 데리고 거기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다. 알렉스는 프레드릭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

“형. 뛸 수 있어?”

【‘벤자민, 프리드! 엄마는 괜찮으니까 얼른 도망쳐. 도망쳐서 레아 누나 불러오는 거야, 알았지!’】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프레드릭은 알렉스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늑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 늑대가 나타났을 때, 그는 당황하기도 했지만 순간 몸이 굳어버릴 정도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저 늑대가 분명히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공포였다.

늑대가 다시 형제에게 달려들었다. 알렉스는 형을 부축해서 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형제는 또 다른 기시감을 느꼈다. 이 길을 예전에도 이렇게 뛰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형, 엄마는? 엄마는?’】

【‘괜찮아. 프리드, 일단, 레아 누나 불러오는 거야.’】

그래, 그때도 알렉스와 같이 이곳을 달렸었다. 뒤를 쫓는 거대한 늑대를 피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져도 살기 위해서 일어났다. 헤르티아의 측근이자 늑대 일족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인 레아를 데려오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서 달렸다. 프레드릭과 알렉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은 이 앞에 무엇이 있을지 직감했다.

【‘형!’】

깎아지르는 높은 절벽 아래로 돌이 굴러떨어졌다. 그 소리가 소름끼쳤다. 알렉스는 프레드릭을 감싸며 뒷걸음질 쳤다. 둘은 높은 절벽의 끄트머리에 섰다.

[이거 묘한 우연이군.]

【이쪽으로 와.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마.】

알렉스와 프레드릭은 서로의 몸에 의지해서 늑대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이런 상황이 과거에도 있었다. 프레드릭은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알렉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형. 우, 우리 어떻게 해.’】

어린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자신이 뭐라고 했던가?

【‘괜찮을 거야. 형이 있잖아.’】

알렉스는 프레드릭에게 속삭였다.

“형. 나 꽉 잡아.”

알렉스는 프레드릭을 감싸 안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차가운 바람에 볼이 에일 듯했다. 그때도 이렇게 절벽에서 떨어졌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스스로 뛰어내렸다. 그때는 프레드릭이 발을 헛디뎌 중심이 흐트러져 어쩔 수 없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나긴 낙하의 끝에는.

풍덩.

차가운 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형제의 몸을 차가운 물이 감싸 안았다. 형제는 비로소 여태껏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형제가 잊었던, 너무 괴롭고 무서워서 잊어버려야 했던 바로 그 기억이었다. 차가운 강물은 그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찾아주었다.

“콜록, 콜록,”

알렉스와 프레드릭은 물에 푹 젖은 몸으로 강에서 빠져나왔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몸보다 괴로운 것은 기억이었다. 강가에 대자로 누운 알렉스와 프레드릭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크아아악!”

두 형제는 답답한 마음을 담아서 고함을 쳤다. 그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었다.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도망치고 모든 기억을 묻고 봉인해 버렸다.

알렉스와 프레드릭은 가슴을 내리치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게 신호가 되었다. 두 형제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그들은 알렉스와 프레드릭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 고아가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으로 수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목숨을 바쳐서 형제를 살렸고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를 오해해서 이 스티폴로르에 피바람을 불렀다. 형제는 부모의 임종을 모두 지키지 못했다. 좋아했고 많이 따랐던 형은 그들로 인해 촉발된 수인 내전으로 수많은 것들을 잃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까지 잃고 허울뿐인 몸뚱어리를 끌어안고 정상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으흑. 헉. 허억. 흑.”

그들의 이름은 벤자민과 프리드였다. 베니니타스와 라일라의 아들, 벤자민과 프리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었다.

그날은 여느 때와 별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조금의 차이라면 베니니타스가 토스 호무스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베니니타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라일라는 엄중한 호위를 받았다. 그녀는 수인과 인간 사이 화합의 상징이기 때문에 마레 위르를 좋아하지 않는 수인들이 그녀의 목숨을 노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수인들은 라일라의 뒤에 베니니타스를 비롯하여 루프스인 로보까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쉽사리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격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라일라와 벤자민, 프리드는 항상 갑갑할 정도로 호위를 받았다.

“엄마. 오늘 우리 산책 언제 가?”

벤자민이 라일라의 무릎에 매달리면서 물었다. 라일라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매일 가던 시간에 가야지.”

베니니타스는 부인의 안전을 많이 걱정했다. 그로 인해 울피누스 호무스 궁 근처의 숲으로 산책을 나가려 해도 라일라는 호위를 달고 다녀야 했다. 남편의 걱정을 알기에 라일라도 답답하지만 그의 말대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으로만 산책을 나가곤 하였다.

“웅…… 토스 호무스에서 라이칸 형이랑 있을 때는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었는데.”

“거긴 토스 호무스잖니. 루프스님도 계시고 블랑카님도 계시니 안전하지만 여기는 아니잖니. 그러니 조금만 참자.”

“핏, 알았어요.”

벤자민이 토라진 얼굴로 책을 읽고 노는 프리드에게 다가갔다. 프리드는 형을 올려다보았다.

“형. 왜?”

“너는 매일 책이나 읽고 지루하지 않아? 이럴 때보면 라이칸 형하고 잘 맞을 것 같은 데, 묘하게 형이랑 많이 싸운다니까.”

“난 라이칸 형하고 안 싸워. 형이 나를 미워하는 거지. 그리고 형이 나한테 이 핀도 줬어!”

프리드는 라이칸이 준 에메랄드 핀을 자랑하듯이 꺼내 보였다. 벤자민은 너 잘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라일라의 옆에 붙었다.

“라일라님. 산책 가실 생각이십니까?”

라일라의 호위를 맡은 여자 여우 수인이 들어왔다. 라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프리드와 벤자민은 신이 나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울피누스 호무스 근처의 산으로 나왔다. 덜 활동적인 프리드도 벤자민을 따라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라일라는 명치 부근을 어루만지면서 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그녀를 보고 호위로 따라온 여자 여우 수인이 물었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아니요. 그냥 요즘 따라 속이 좀 안 좋네요.”

“혹시, 임신하신 것 아니십니까?”

“에이. 설마요?”

“요즘 잠도 많아지지 않으셨습니까?”

라일라는 여우 수인의 말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잠도 눈에 띄게 늘었고, 결정적으로 달거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녀였던 영향으로 그녀는 평소에도 달거리가 불규칙한 면이 있어서 그것만으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목걸이에 들어 있는 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 안에 들어 있는 힘이 자신을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라일라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하려다가 임신이라고 확신한 것 같은 그녀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어 말을 아꼈다. 대신 돌아가서 확인해 보자고 했다.

“만약 임신이라면, 이번엔 딸이면 좋을 것 같아요. 베니니타스가 에리카를 예뻐 하는 걸 보니 딸을 갖고 싶은 모양이에요.”

라일라는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눈을 접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때 한 여우 수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라일라님! 오늘 뵙기로 한 마레 위르가 조금 빨리 도착했습니다. 기다리신다고 하였으나 혹시 이곳으로 모셔오는 것도 괜찮은가 하여 여쭈어보러 왔습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급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보여서요.”

“급해요?”

라일라는 오늘 만나기로 한 이들을 떠올렸다. 대륙에서 이곳으로 온 지 얼마 안 된, 악몽 때문에 도움을 청하던 남매였다.

대륙이 전쟁으로 몸살을 앓게 된 이후 사람들은 더욱 더 성력에 의자하게 되었다. 라일라는 어릴 때부터 신전에 살았기에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신화의 시대의 종말 이후 성력 소유자들이 줄어들면서 그들은 몇 안 되는 신녀와 신관들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다. 아마 지금 찾아온 남매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왔나 싶었다.

“여기로 오시라고 하세요. 그분들이 저를 위협할 분들도 아닌데요.”

여우 수인은 궁 쪽으로 뛰어갔다. 라일라가 성력을 쓸 수 있는 신녀이기 때문에 포트리스 사람들은 그녀에게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베니니타스도 포트리스의 사람들은 크게 경계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엄, 엄마.”

라일라는 벤자민과 프리드를 인질 삼은 헤임달과 헬라, 그리고 알폰소를 보았다. 이미 근접 호위를 맡고 있던 수인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진 후였다. 라일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 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요!”

헤임달은 덜덜 떠는 라일라를 비웃었다. 아들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라일라는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다. 라일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헤임달이 요구하는 것들이 모두 그의 죄를 숨기기 위한 작업들이었다. 라일라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저와 아이들의 죽음이었다. 저는 죽더라도 최소한 아이들은 살려야 했다. 라일라가 모든 일을 끝을 내자 헤임달의 가방 속에서 회색과 검은색이 섞인 털을 가진 늑대가 나왔다. 주둥이에 피가 잔뜩 묻은 늑대는 순식간에 크기를 키웠다.

“란, 란, 란텔? 네가 왜? 아악!”

“엄마!”

란텔은 라일라를 물어뜯었다. 라일라의 한쪽 팔, 팔꿈치 아래가 뜯겨나갔다. 라일라는 아찔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두 아들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 지르지 마. 그랬다간 네 아들놈들의 목숨을 장담 못 하니까.”

헤임달이 벤자민과 프리드의 목에 검을 겨누고서 협박했다. 라일라는 그대로 란텔이 자신의 몸을 산채로 물어뜯는 것을 지켜보아야했다. 라일라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땅을 긁었다. 손톱이 몽땅 빠지는 고통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헤임달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대강의 시간을 추측하더니 헬라에게 눈짓을 했다. 헬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깐만이라고 속삭이고 라일라 앞으로 다가갔다.

“이거 나 가져도 되지?”

헬라는 라일라의 목걸이를 빼앗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아름다운 붉은빛으로 저를 유혹하던 것이었다. 헬라는 탐욕스러운 눈을 빛냈다.

리와인더의 조각은 신에게 부여받은 단 하나의 명령인 세계의 멸망을 방해하는 라일라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리와인더의 조각에게 헬라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리와인더의 조각은 헬라를 유혹했다.

붉은 루비 조각에서 넘실거리는 검은 악기(惡氣)가 헬라를 유혹하는 것이 라일라의 눈에 보였다. 그 악기(惡氣)가 헬라의 탐욕을 먹게 되면 얼마나 강해질지 알 수가 없었다. 막아야 했다. 스티폴로르를 멸망으로 가게 할 수 없었다.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그건 재앙을……. 악!”

“곧 죽을 년이 별 소리를 다해.”

헬라는 라일라의 머리를 세게 치고 목걸이를 가지고 헤임달에게 갔다. 헤임달은 오늘의 증거가 될 수도 있는 목걸이를 가지고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지금 이 상황이 들키지 않는 것은 헬라의 환영 마법때문이라 참고 넘어갔다. 헤임달은 자신을 향한 의심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나머지는 란텔에게 맡겨두고 빠질 생각이었다. 그는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데리고 있던 아이들까지 죽이려고 하였다.

“……도망가!”

헤임달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아이들을 노렸던 그의 검은 라일라의 배를 관통하고 있었다. 원래 라일라가 누워 있던 곳에 두 형제가 쓰러져 있었다. 라일라는 배를 뚫린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때를 보고 있었다. 라일라는 성력(聖力)이 있었기에 마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에르비오네 린처럼 강력한 성력의 소유자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성력은 성력이었다. 성력은 신이 빌려주는 자신의 권능의 일부였고 세계의 법칙을 깨는 힘이었다.

라일라는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짜내 아들들과 자신의 위치를 바꾸었다. 그리고 그때 생기는 빈틈을 노려 품에 숨기고 있던 호신용 단도로 헤임달을 내려찍었다. 란텔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라이라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벤자민, 프리드! 엄마는 괜찮으니까 얼른 도망쳐. 도망쳐서 레아 누나 불러오는 거야!”

라일라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엄, 엄마!”

“아악!”

란텔이 라일라의 등을 물어뜯었다. 라일라는 온 힘을 다해서 헤임달을 찌른 단도를 놓지 않았다. 제가 그와 란텔을 붙잡고 있는 사이에 아이들이 도망칠 수 있기를 바랐다.

“어서! 벤자민!”

벤자민은 프리드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뛰었다. 라일라는 가물거리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면서 시간을 벌었다.

“아악!”

불행히도 란텔의 힘이 더 강했다. 란텔은 라일라를 입에 문 채로 땅바닥에 내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라일라의 목이 꺾였다. 보라색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변했다. 란텔은 확실히 하기 위해서 그녀를 다시 물어뜯으려 했지만 헤임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 꼬맹이들 쫓아가! 저놈들도 죽여야 우리 목적을 이루는 거야. 알지? 우리는 최대한 베니니타스의 화를 이끌어내야 해.”

란텔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 형제를 쫓았다. 헤임달은 헬라의 도움을 받아서 상처를 환영마법으로 숨기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벤자민과 프리드는 정신없이 도망쳤다. 형제의 뒤를 란텔이 무섭게 쫒아갔고, 벤자민과 프리드는 쉴 틈도 없이 혼비백산해서 뛰었다.

공포와 슬픔으로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원수에게 맞서보지도 못하고 도망치기밖에 못하는 자신들이 한심했다. 두 형제는 비탈을 구르기도 하면서 간신히 어두운 숲을 통과했다.

“으악!”

벤자민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한 프리드를 붙잡았다. 절벽은 까마득했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벌벌 떨었다. 란텔이 서서히 다가왔다. 둘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이쪽으로 와.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마.]

두 형제는 그것이 당연히 거짓임을 알았다. 프리드는 떨면서 벤자민을 꼭 끌어안았다.

“형. 우, 우리 어떻게 해.”

벤자민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면서 프리드를 달랬다.

“괜찮을 거야. 형이 있잖아.”

벤자민은 으르렁거리며 다가오는 란텔을 경계하면서 발을 뒤로 내디뎠다. 작은 자갈이 발에 밟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중심이 흐트러졌다.

“어억!”

“으악!”

두 형제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와중에 벤자민은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프리드의 몸을 감싸 안았다. 신도 이 아이들이 가여운 것을 안 것인지 다행히 형제는 날카로운 바위를 피해서 곧장 강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스스로를 벤자민과 프리드로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의식을 잃은 형제는 강을 타고 흘러내려가다가 강가에 살던 고양이 수인 사라에게 발견되었다. 사라는 형제가 깨어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그리고 그 이후는 그들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알렉스와 프레드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내일은 헤르티아가 다시 울피누스 호무스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알렉스는 프레드릭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들은 왜 그렇게 빠른 재생력이 그들에게 있는 건지 알게 되었다. 수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었다. 프레드릭은 수인의 재생력에 치유마법까지 더해 상처를 말끔하게 치료했다.

사라 할머니의 말이 옳았다. 그들이 분쟁을 불러왔다. 그들이 기억을 잃지만 않았어도, 아니, 제때 기억만 찾았더라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베니니타스가 친구를 죽이는 어리석은 선택을 막을 수 있었다.

“형. 그 늑대, 란텔 맞지. 벨라토르이지만 헤르티아…… 고모의 측근이라는.”

“그래, 맞아. 그리고 어머니를 죽인 수인이고.”

프레드릭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디서부터 그놈의 손아귀에 놀아난 것일까? 늑대 수인을 자신의 수하로 부릴 만큼 헤임달이 술수가 좋은 이인 줄은 몰랐다. 란텔을 가까이에 두고 있는 이상 헤르티아도 언제 위험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프레드릭은 이를 갈았다. 대관절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단란했던 가정을, 두 가족을 파탄을 내었단 말인가. 형제는 부모를 잃었고 루프스는 가족을 잃고 고통받았다.

프레드릭이 분노에 몸을 떨고 있을 때,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형. 우리 이제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알렉스는 별로 좋지 않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지금 저희가 다시 찾은 기억도 중요하고 헤임달에게 분노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사이 헤임달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헤임달의 목표는 언제나 전쟁이었어. 헤임달과 란텔이 한패라면 그는 우리를 전쟁의 도화선으로 사용하려는 게 분명해. 당연하잖아. 루프스의 벨라토르로 인해 무고하게 죽은 포트리스의 헌신적인 형제들. 얼마나 사람들을 선동하기 쉬운 주제야.”

프레드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들의 죽음은 헤임달에게 최고의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럼 우리는 누구를 만나야 하지? 렉스 삼촌? 헤르티아 고모?”

“헤르티아 고모. 포트리스는 여우 일족이 협력을 약속했을 때 전쟁을 하기로 했으니 우리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이 돌면 당연히 전쟁을 결정할 거야. 헤르티아 고모는 최근 라이칸 형과 전면전을 준비 중이고 아마 포트리스가 합류 의사를 표명하면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우리는 먼저 헤르티아 고모를 만나 누가 진짜 범인이고 적인지를 알려야 해. 헤르티아 고모가 라이칸, 아니, 루프스에게 가진 잘못된 원한을 없애야 전쟁을 막을 수 있어. 전쟁부터 막고 그 뒤에 모든 진실을 밝혀내고 헤임달의 처벌을 논의하면 돼. 우리가 증인이야.”

프레드릭은 상처는 치료했지만 통증은 남아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알렉스는 급하게 생각난 것이 있는지 프레드릭에게 물었다.

“형, 레이라는? 헤임달이 레이라를 해코지하면 어쩌지?”

“괜찮아. 레이라하고 난 서로의 상태를 공유하고 있어. 레이라는 내 생존 여부를 알아.”

프레드릭은 손목의 문양을 보여주었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그녀가 이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둘 모두 헤임달의 손 위에서 놀아났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레이라에게 헤임달을 조심하라고 알려줬어. 그리고 키르케 스승님이 파놓은 지하실도 알려줬으니까. 여차하면 거기에 숨으라고 했으니 괜찮을 거야.”

알렉스는 미묘하게 떨리는 프레드릭의 목소리에 표정이 안 좋아졌다. 스티폴로르 최악의 범죄자가 레이라의 가까이에 있는 상황인데 남편으로서 걱정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알렉스는 모래를 덮어서 모닥불을 껐다. 식량도 지도도 뭣도 없는 상황이지만 일단 움직여야 했다.

“근데, 형. 우리 이제 이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알렉스? 프리드?”

“네가 편한 쪽으로 해.”

“고민 좀 해봐야겠네.”

알렉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여전히 어두웠다. 기억을 되찾은 뒤, 형제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죄책감과 미안함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 감정에 무너지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일이 더 잘못되기 전에 빨리 바로잡아야 했다.

“정말 다행인 것 하나 알려줄까?”

알렉스가 품에서 에메랄드 핀을 꺼냈다. 어릴 적 루프스가 그에게 선물로 주었던 핀이었고 세상에서 단 하나 있는 핀이었다. 루프스는 이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매일 가지고 다녔거든. 이게 우리가 누구인지 증명해 줄 수 있을 거야.”

“근데, 우리 이제 라이칸 형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글쎄.”

모든 진실이 드러나면 베니니타스는 루프스에게는 죄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형제에게 루프스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된다. 오해로 빚어진 참극이었다. 이 비극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고 서로 오해를 풀더라도 루프스와는 이전과 똑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진실은 밝혀져야 했다.

“일단 만나보면 알겠지. 라이칸 형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분노인지, 미안함인지, 그리움인지.”

“그렇겠지.”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프레드릭은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일단은 헤르티아가 먼저였다.

* * *

“오늘 헤르티아가 떠난다고?”

유채는 루프스와 같이 동물화 발병 지역을 떠돌다가 소니페스 호무스의 궁으로 돌아온 날 헤르티아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테와 루프스의 노력으로 유채는 그간 헤르티아를 포함한 여우 수인들과 부딪친 적이 없었다. 블루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근데, 예의상 나가봐야 한다는데, 유채님은 아프다는 하고 나가지 마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유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소니페스 호무스에서는 조각을 찾지 못했다. 헤르티아가 한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녀를 믿을 수 있을까? 유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루벨. 헤르티아에게 안내해 줘. 그 여자를 만나야겠어.”

“예? 유채님! 안 돼요! 또 무슨 일이 생기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괜찮아. 걱정 마. 이번에는 안 당해.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당한 것이고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갈 테니까. 그리고 이렇게 대놓고 가면 보는 눈이 많아서 오히려 그쪽에서도 지난번처럼은 못 해.”

블루벨은 볼을 부풀리고 귀를 베베 꼬면서 불안해했지만, 유채를 막을 수는 없었다. 블루벨은 유채의 팔을 꼭 껴안고 매달려서 마치 몽구스처럼 주위를 경계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블루벨. 꼭 몽구스 같아.”

“몽구스? 그건 뭔데요?”

“음. 족제비처럼 생긴 동물인데…….”

“카악! 그 재수 없고 얍삽한 족제비들은 입에 담지도 마세요. 족제비 놈들이 얼마나 얍삽한지 아세요? 그놈들은 우리 유니티오 호무스의 골칫거리라고요. 그런 놈들하고 저를 비교하시면 저도 섭섭해요.”

블루벨의 토끼 귀가 옆으로 축 늘어졌다. 족제비 수인들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토끼 수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채는 블루벨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옆으로 축 늘어진 귀를 잡아 올렸다.

“흐갸갸갹!”

블루벨이 귀를 꽉 움켜쥐자 유채는 아차 싶었다.

“유채님!”

“미안해, 블루벨. 내가 깜박했어. 미안해.”

“어머나. 귀여운 아가씨 둘이 여기는 무슨 일인가?”

유채는 헤르티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헤르티아는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배로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유채는 헤르티아를 마주하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헤르티아의 뒤에 서 있던 여우 수인들이 이를 갈았다. 헤르티아는 손을 들어서 그들의 반발을 막았다.

“예의를 배우지 못한 건 참아주마. 또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니 너그러움을 베풀지. 무슨 일로 왔나?”

“지난번 내게 말한 일로 왔어요.”

“아. 그거? 왜, 그것이 내게 있다는 걸 믿을 수 있는 것이냐?”

“아니요. 찾았어요.”

유채는 헤르티아를 떠보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헤르티아는 눈썹만 꿈틀거렸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비웃음을 띠고 되물었다.

“그래? 그럼 왜 여기까지 굳이 수고해서 온 것이냐? 내 제의를 무시하면 될 것을.”

맹랑한 계집애.

헤르티아는 유채가 저를 떠보려고 한 거짓말을 알아챘다. 표정을 잘 갈무리한 것이 다행이었다. 자칫했다가는 모든 것을 망칠 뻔했다. 헤르티아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왜? 알고 보니 그게 가짜 같든?”

유채는 헤르티아의 속을 짐작할 수 없었다. 쉽게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 유채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헤르티아에게 물었다.

“당신이 가짜를 가지고 있는 듯해서 알려주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내게 그런 거짓부렁을 말한 저의가 궁금하기도 해서요.”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착한 것인지. 내가 너를 해하려 한 것은 생각하지 않느냐?”

헤르티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유채는 저와 헤르티아의 사이에 끼어드는 블루벨을 막았다. 헤르티아가 허리를 숙여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된단다, 아이야. 원래 수인이든 마레 위르든 간사한 자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지.”

헤르티아는 유채의 목덜미와 귀를 살폈다. 아무리 표정은 관리할 수 있다고 해도 여기에서는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아직 기회는 있단다, 얘야. 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오렴. 그럼 나는 너에게 루비 조각을, 라일라님의 유품을 기꺼이 보여주지.”

저 맹랑한 계집애가 진짜를 찾았을지, 아니면 가짜를 찾아놓고 의기양양한 것이든, 없는데 저를 떠보려고 한 것이든 헤르티아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배짱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래야 찾은 것을 의심할 것이고 제게 넘어올 것이다.

모험에서 살아남는 자는 조심하는 자가 아니라 담이 큰 자였다.

“아직 기회는 많단다. 그러니, 잘 생각…….”

“내가 경고를 여러 번 했을 텐데.”

헤르티아는 루프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루프스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벽에 처박혔다.

“크헉!”

“헤르티아님!”

헤르티아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서서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았다.

유채는 예정에도 없고 별로 필요하지도 않았던 루프스의 등장에 경악해서 입을 벌렸다. 헤르티아에게 더 캐물어야 하는데, 하필 이 상황에서 등장할 것은 뭐란 말인가!

루프스는 유채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명백히 보호하려는 모습이었다.

“레티티아에게 접근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유채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만나러 왔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선 안 된다고 배웠지만 유채는 괜히 나서서 헤르티아를 두둔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지난번에 그녀에게 당했던 것을 갚아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이제 네 방종을 많이 참아준 것 같은데.”

루프스는 이를 갈았다. 설마, 설마 했더니 헤르티아가 또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헤르티아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계집애의 얼굴을 보자 하니 자기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 듯했다. 루프스 혼자서 지레 겁을 먹고 찾으러 온 것이다. 헤르티아는 루프스가 저 계집애에게 푹 빠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신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복수를 위해서는 루프스는 저렇게 굴어야만 했다. 그는 연인의 배신으로 비참함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오빠인 베니니타스가 겪었던 그 고통의 강도를 그대로.

“그렇긴 하지요. 그 잔혹하신 분이 벨라토르로 그리도 감시를 하시면서 아직까지 제게 별 제재가 없으신 것을 보면 말입니다.”

헤르티아는 루프스가 저를 봐주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헤르티아는 과거 베니니타스의 영광의 잔재였다. 루프스는 잔혹한 성정과 달리 분쟁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가 잔혹한 짓을 하는 이유는 바로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헤르티아가 루프스에게 죽으면 그녀는 베니니타스를 잇는 영웅과 상징이 되어서 여우 일족, 더 나아가서는 루프스를 위협하는 세력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었다. 루프스는 헤르티아를 살려두는 것 하나만으로 루프스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자신의 반대 세력도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헤르티아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간 영악하게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많이도 한 것이고 말이다.

“그대는 그 이유를 알지 않은가?”

루프스는 피를 훔치는 헤르티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헤르티아를 치지 못한 이유는 꽤나 복합적이었다. 정치적인 것을 제외하고 헤르티아는 몇 남지 않은 제 유년시절의 흔적이기 때문에 과감히 잘라낼 수가 없었다. 반쯤 미쳐 살았던 시간에도 베니니타스의 공허했던 그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했던 것이 그의 여동생이었음을 저도 모르게 신경을 썼던 것 같았다.

“글쎄요. 저는 아둔하여 모르겠습니다.”

유채는 헤르티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그녀가 묘한 미소를 짓는 것에 또 놀랐다.

“그대가 미워해야 할 수인은 내가 아닌가?”

루프스는 한숨을 뱉었다. 그는 헤르티아와의 원한을 풀고 싶었다. 스스로를 사로잡고 있던 분노를 떨치고 나니 이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니니타스의 일과 헤르티아는 별개였다.

“그러니, 상관없는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마라.”

루프스는 머뭇거렸다. 어차피 나중에 울피누스 호무스를 비공식적으로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김에 해결을 하고 싶었다. 계속 이렇게 계속 자신이 헤르티아와 험악한 관계로 있다가는 유채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을 수 있었다. 루프스는 근 몇 년간으로 품어왔던 말을 내뱉었다.

“이제 그만 우리 둘도 원한을 풀어야 하지 않는가?”

“원한을 풀어?”

헤르티아는 루프스의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알았다.

“네놈은 가해자이니 그딴 말을 지껄일 수 있는 것이겠지?”

“가해자?”

루프스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내가 묻지. 베니니타스가 내 아버지를 죽인 것, 그것만큼은 내 아버지의 죄에 따른 정당한 복수라고 인정하겠다. 그러면 내 어머니는 무슨 잘못을 했지?”

루프스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헤르티아의 분노는 이해하지만 그녀의 말은 들을수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헤르티아는 입을 다물었다. 루프스는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헤르티아는 여기서 감정 소모를 해보았자 별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고서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표정을 정리해서 싱긋 웃었다.

“무례는 아까 처벌받은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하실 이야기는 없으신 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보는 건 추수제가 되겠군요. 부디 그때 외에는 보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헤르티아는 루프스에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루프스도 더 이상 일을 벌이지 않고 그녀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품에 안고 있던 유채를 풀어주었다.

“헤르티아를 만나면 피할 것이지, 왜!”

“아무 일 없었으면 됐지 그쪽이 무슨 상관이에요!”

유채는 루프스로 인해서 깨진 산통으로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루프스는 되레 화를 내는 유채에게 놀라서 약간 뒷걸음질을 쳤다.

유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헤르티아를 왜 만났는지를 설명했다가는 일이 꼬일 것 같고 그렇다고 무작정 화를 더 내기도 그가 저를 의심할 것 같았다. 유채는 밀려오는 짜증에 발만 굴렀다.

“도와준 건 고마운데, 나는 병아리가 아니에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유난 떨지 말아요. 난 당신이 이러는 것 때문에 더 위험에 처할 것 같아서 걱정돼요. 헤르티아가 나를 노리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면서요. 당신이 이렇게 나오지만 않아도 걱정할 일이 하나는 줄어들 것 같다고요.”

유채의 말에 루프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유채가 걱정이 되어도 그녀를 과보호하기만 하면 당연히 더 위험해질 수 있었다.

“미안하다. 내 생각이 짧았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사과해야 할 일만 하는 스스로가 정말로 한심했다. 왜 자신은 유채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루프스님.”

아까 전부터 함께 있었던 단테는 부부 싸움을 한 후의 부부 같은 냉랭한 둘을 보고는 헛기침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루프스님께서 수장고에 있는 고서를 보고 싶으시다 하여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유채 양도 수장고로 같이 들어가시렵니까?”

“수장고?”

“소니페스 호무스는 고대 수인 유적이 엄청 많아요. 그래서 수장고에 유명한 유물이 많아요. 나름 소니페스 호무스의 자랑거리에요.”

블루벨이 유채에게 설명했다. 블루벨은 일이 다행히 잘 해결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유채가 뭔가 감추는 것이 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블루벨의 눈이 가늘어졌다. 결과야 어쨌든 블루벨은 인키디움의 시험을 통과한 인재였다. 그녀는 전에도 유채가 몇 번 수장고라고 중얼거린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유채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알아야 했다.

“유채님. 한번 보시는 것 어때요?”

“다 보여주시는 건가요?”

“예. 다 보여드리겠습니다. 루프스님도 동행하시는 것 어떻습니까?”

유채가 흥미를 보이자 단테는 이따 안내할 궁인을 보내겠다고 하곤 먼저 자리를 떴다. 헤르티아를 배웅하려는 것 같았다.

유채는 루프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블루벨과 돌아가 버렸다. 루프스는 유채를 붙잡지 못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루프스는 케릭스의 직속 부하인 유안을 불렀다. 유안은 루프스의 앞에 부복했다.

“부르셨습니까?”

“루비 조각은 찾았나?”

“아직 못 찾았습니다. 깨진 유리조각 같은 모양이라 해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위치를 알 수가 없습니다.”

루프스는 알겠다고 하고 유안을 돌려보냈다. 그는 복도에 그대로 서서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토스 호무스로 돌아가면 유채는 떠날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떠날지도 모른다. 루비 조각을 찾아주면 유채의 마음을 돌려볼 기회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루프스는 모든 희망을 거기에 걸었다.

다시 제 삶에 찾아오게 될 공허라는 공포에 그는 쓰게 웃었다.

모두 제가 저지른 죄의 결과였다.

* * *

“유채님, 제게 숨기는 것 있으세요?”

방으로 돌아온 블루벨은 유채를 붙잡고 물었다. 단테가 초대한 것은 유채와 루프스뿐이기에 블루벨은 수장고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숨기는 것 없어.”

“거짓말 마세요. 제가 유채님이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요. 제 눈에는 유채님이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블루벨은 유채의 손을 잡았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유채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시잖아요.”

유채는 볼 안쪽 살을 짓씹었다. 만일 이번에 수장고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이제는 별수 없이 울피누스 호무스로 가야 한다. 그 일에 블루벨의 어머니인 카넬리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블루벨이 자신의 일을 돕다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유채는 머뭇거렸다.

“수장고에 갔다가 돌아오면…….”

유채는 블루벨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때 말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줘.”

때마침 단테의 궁녀가 안내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유채는 그녀를 따라서 방을 나갔다. 단테와 루프스는 이미 수장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테는 먼저 수장고 안으로 들어가고 유채와 루프스는 그 뒤를 따랐다.

“아까는 유난 떨어서 미안하다. 내 행동이 너무 경솔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사과했다. 유채는 수장고를 살피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의 사과를 온전하게 듣지 못했다. 루프스는 유채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제 말이 그만큼 듣기 싫은가 싶어서 다시 한 번 더 기분이 아래로 추락했다. 루프스는 씁쓸함을 삼키며 유채의 뒤를 쫓았다.

수장고 안을 둘러보는 유채의 표정은 금세 심각해졌다. 보석 조각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헤르티아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점점 초조해졌다.

“짝퉁이 여기 있군.”

루프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유채는 루프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는 하얀색의 천에 금실로 자수가 놓인 베일을 보고 있었다.

“짝퉁이요?”

“토스 호무스의 궁에 이니투스의 개인 수장고가 있다. 거기엔 이니투스의 보자기라고 불리는 물건이 있지.”

유채는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그게 상아함을 감싼 그 보자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짝퉁이라고 말한 베일을 유심히 살폈다. 에클레시아에서 셀레네가 보여주었던 상아함 밑에 깔려 있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유채는 손가락으로 베일을 가리켰다.

“저것처럼 생겼나요?”

“비슷하게 생겼다. 이니투스님이 이 스티폴로르에 오실 때 가지고 온 물건이며, 대대로 신의 가호를 받은 신물로 루프스의 비(妃)가 되는 암컷과 결혼식을 올릴 때 쓰는 물건이지. 이니투스님 때부터 대대로 쓰던 물건이다.”

찾았다! 유채는 머릿속으로 복잡한 주판알을 굴렸다. 수장고에도 조각이 없다면 유채는 블루벨과 함께 카넬리안에게 갈 생각이었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울피누스 호무스에 몰래 들어갈 생각이었다. 조각을 찾는 일이 급해져 유채는 애초에 상아함을 감쌌다던 보자기를 찾는 것은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보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는데 그것을 그냥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만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조각을 바다에 버릴 수 없게 되면 에클레시아에 있는 상아함을 이용해야 했다. 그러니 그 보자기, 즉 이니투스의 보자기가 필요했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토스 호무스보다는 소니페스 호무스를 탈출하는 것이 더 쉬울 터였다.

유채가 심각하게 고민할 무렵 루프스가 입을 열었다.

“토스 호무스에 돌아가면, 너를 방에 가두지 않겠다. 그러니 그만 불안해해도 된다.”

루프스는 베일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유채의 얼굴을 직접 바라볼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루프스는 희미한 불빛을 받아 유리창에 비쳐 보이는 유채의 얼굴을 응시했다. 루프스는 제 앞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베일을 쓰고 서 있는 유채를 상상했다. 정말로 고울 것 같았다.

내일이 돌아가는 날이다. 유채의 선택이 남았다. 오늘 유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그녀는 제게 조금의 여지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이 제 마음을 토로할 마지막 기회였다.

“당신, 갑자기 왜…….”

유채는 루프스의 뜬금없는 말에 당황해서 물었다. 루프스는 작게 웃어 보였다.

“사랑한다. 너를 연모한다.”

루프스가 유채에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유채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거리였다. 루프스도 알았다. 이 거리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임을. 제 마음은 이 거리를 넘어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반걸음이라도 좁히고 싶었다. 제 마음을 한 걸음 너머로 전해보고 싶었다.

루프스 청회색의 눈이 유채의 검은색의 눈과 얽혔다. 언제부터였을까?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둘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네 말이 맞다. 그동안 내 사랑은 집착이었다. 이기적인 나의 집착이다.”

유채는 당황해서 어버버거렸다. 루프스는 다시 반걸음을 다가가려다 그 자리에 멈췄다. 이곳이 유채가 제게 허락한 최대치였다. 거절과 부정이 두렵지만 그래도 두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거절과 부정이 돌아올지라도 제 마음을 그 어떤 가감 없이 말하고 싶었다.

“솔직히 난 아직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한 것이 그저 욕심이라는 것은 안다.”

루프스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 유채의 볼이 닿았다. 유채는 그의 손을 피해서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에 루프스는 힘없이 손을 거두었다.

“……나와 같이 토스 호무스에 돌아가자.”

루프스는 차마 유채의 냉정한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어 시선을 내렸다. 저와 같이 토스 호무스에서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은 것을, 이곳으로 돌아와 달라고 빌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제게 모든 원망을 풀어내도 괜찮고 얼마든지 괴롭혀도 괜찮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게 해도 괜찮으니 제발 곁에 남아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어차피 끌고 갈 것 아니었어요?”

유채의 차가운 말이 날아들었다.

“말했지 않았나? 너를 구속하려 들지 않겠다고.”

루프스의 의 시선이 파렌티아에 닿았다. 유채는 그의 시선이 파렌티아에 닿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루프스의 숱 많은 은빛 속눈썹이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토스 호무스로 돌아가면 파렌티아를 풀어주겠다.”

루프스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유채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 고운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각오는 이미 끝을 내었다. 루프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나와 같이 돌아가자.”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각오는 했다지만, 저 고운 입에서 거절을 들으면 버틸 수 있을까? 이미 바스라질 대로 바스라진 심장이었다. 끝없는 후회와 자책과 죄책감에 닳아가고 유채의 거부로 찢겨나간 연심이었다. 그 다음으로 올 상처를 견딜 수 있을까? 유채의 동정을 바라며 제 감정을 책임져 달라고 매달리는 밑바닥까지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굳게 닫힌 유채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유채 양,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사정을 모르는 단테의 부름에 유채는 루프스를 등지고 돌아섰다. 루프스는 멀어지는 유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 유채의 대답이었다. 루프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유채는 수장고를 둘러보고 결론을 내렸다. 소니페스 호무스에는 리와인더의 조각이 없다.

진짜 헤르티아가 가지고 있는 건가?

한참 머리를 굴리던 유채는 자신의 뒤를 비 맞은 강아지처럼 터덜터덜 따라오는 루프스를 돌아보았다. 세상의 짐이란 짐은 다 짊어진 것 같았다.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몸을 굳혔다.

“토스 호무스로 갈게요.”

유채는 루프스의 눈이 커다래지는 것을 무시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모르는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파렌티아도 풀어주겠다고 했으니 토스 호무스에서 잠깐 머무르면서 이니투스의 보자기를 찾아 그 뒤에 떠나는 안전한 길을 택하기로 했다.

“정말인가?”

루프스가 뒤에서 유채의 어깨를 성마른 손으로 감쌌다. 루프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유채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희망이 보였다.

유채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루프스는 그녀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선 것이라 믿었다. 유채가 저를 이전만큼 역겨워하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희망이 보였다. 유채의 마음 한켠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제가 그 물건을 가져다주면 제 마음을 부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채가 돌아와 줄지도 모른다.

루프스는 헛된 망상에 불과할지라도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잡고 싶었다.

유채는 금세 아이처럼 웃는 얼굴이 된 루프스를 힐끔 보곤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순박한 시골 청년을 등쳐먹는 꽃뱀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저 인간이 저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 이건 약과였다.

유채는 아직도 소년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루프스를 보았다.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소년 같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수인 내전이라는 끔찍한 일이 없었더라면 그가 가졌을 본래의 얼굴이 이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으흑, 흑.”

렉스는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삼켰다. 란텔이 가져온 보고는 산 같은 사내를 무너뜨렸다. 란텔은 그도 잘 아는 이로, 늑대 수인과 인간의 혼혈이며 헤임달의 밑에서 자랐고 지금은 벨라토르로서 헤르티아의 옆에서 일하는 이였다. 란텔의 배려로 울피누스 호무스에서 묶고 있는 렉스는 란텔이 가져온 늑대 수인 벨라토르의 시신과 이후의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헨리라는 놈이 프레드릭과 알렉스를 살해하였다는 것이었다. 란텔이 헨리를 발견했을 때는 그가 둘의 시체를 절벽에서 치우고 있을 때였다고 했다. 란텔은 헨리를 체포하려다가 그가 반항하는 것 때문에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렉스는 그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란텔의 도움을 받아서 그곳으로 향했다. 절벽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 핏자국은 절벽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렉스는 믿기지 않는 사실에 경악했다.

“아흑.”

렉스는 알렉스와 프레드릭과 가치관의 문제로 많이 다투기는 했지만, 그들 형제를 아꼈다. 그 아이들을 처음 본 것은 수인 내전이 끝이 나고 몇 년 이 지난 뒤였다. 그 아이들을 보자마자 렉스는 놀랐다. 벤자민, 프리드와 똑같은 붉은 머리색에 라일라의 보라색 눈동자를 빼닮은 형제였기 때문이었다. 나이도 똑같았다. 열넷과 열셋. 렉스는 순간 두 형제가 살아 돌아온 것이라고 믿었다. 정말 그 순간만큼은.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그 두 아이에게서 소중했던 이들의 흔적을 찾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죽었다. 제가 시신도 확인했다. 그저 제 망상에 불가했다. 그럼에도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벤자민과 프리드를 떠올렸다. 렉스는 당시 친하지도 않았던 키르케 하워드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두 아이와 친분을 쌓았다. 아이들에게는 못할 짓이지만 그는 두 아이들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하고 있었다. 지키지 못한 조카들을 떠올리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었다.

프레드릭은 마법에서 두각을 보였다. 어린 나이에도 에어리얼을 다룰 수 있었고 스펠을 다루는 것에도 꽤나 능통했다. 그 늙은 마녀도 프레드릭의 재능을 높게 평가한 것인지 늘그막에 그를 제자로 들였다. 그리고 알렉스가 열넷이 된 겨울 무렵이었다.

얼굴에 커다란 푸른 멍을 달고 온 알렉스가 다짜고짜 검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렉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알렉스는 제 형을 잘 따랐기에 마법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던 평범한 남자아이였다. 그런 애가 갑자기 검을 가르쳐 달라는 것에 렉스는 당연히 거절했다. 알렉스의 나이 열넷으로 검을 배우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알렉스는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매일 아침 제 집에 와서 사정을 했다. 렉스는 알렉스를 포기시키기 위해서 안 되는 이유를 나열하며 냉정하게 그를 내쳤다. 그러나 알렉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고 결연한 눈동자로 말했다. 알고 보니 얼굴에 멍을 달고 와 처음 검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그날, 두 형제는 갑자기 나타난 짐승에 의해서 위험에 처했었다고 했다. 프레드릭의 기지와 키르케의 마법으로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그 덕에 등이 찢어졌고 알렉스 역시 다쳤다. 나중에 키르케에게 듣기로는 알렉스가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방에서 혼자 벌벌 떨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알렉스의 눈빛과 표정에서 렉스는 라일라를 떠올렸다. 울피누스 호무스로 가던 그날 그녀는 환히 웃었었다. 포트리스의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하던 그 보라색 눈동자에 얽힌 결의가 라일라와 똑같았다. 렉스는 알렉스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정말 노력했다. 검을 배우기에 늦은 나이였지만 뛰어난 신체능력으로 빠르게 실력을 늘렸다. 말 그대로 천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그의 노력이었다.

그때마다 렉스는 알렉스에게서 라일라를 겹쳐 보았다. 라일라와 그는 신전 근처의 빈민촌에 살던 남매였다. 고아였던 그들 남매는 술집에서 일을 도우면서 생계를 이어갔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면 자라서 라일라는 빈민가의 여느 소녀들과 다르지 않게 몸을 팔았을 것이고 렉스는 마약 조직에 몸을 담았을 것이었다. 남매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술집에 찾아온 한 신관이 라일라에게 성력(聖力)이 있다는 것을 안 후였다.

신화의 시대가 끝이 나고 신관과 신녀들이 성력을 다루는 것을 보기가 드물어진 때였다. 신전에 성력을 다루는 신관이나 신녀가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이득이기에 그 신관은 어린 라일라를 신녀로 들였다. 렉스는 신전 기사단에 입단했다. 둘은 굶는 것이 일상이었던 빈민가에 삶에서 벗어난 것에 기뻐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라일라의 나이가 열다섯이 되었을 때, 신전에서는 유력 권력자인 베르나도테 공작에게 아부를 떨어야 할 일이 생겼다. 신전에서는 라일라를 베르나도테 공작의 망나니 막내아들에게 접대를 목적으로 바치기로 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렉스는 그곳에 난입해 베르나도테 공작의 막내아들을 죽였다. 그리고 라일라를 데리고 신전과 베르나도테 공작의 추격을 받으며 대륙을 떠돌다가 스티폴로르로 왔다. 라일라는 그런 험한 일을 겪었음에도 강했고 자신 스스로보다 남을 위했다. 그런 라일라의 모습이 알렉스에게 겹쳐 보였다.

알렉스가 저를 스승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삼촌’이라 불리기를 수십 번을 바랐다. 프리드와 알렉스는 얼굴만 비슷할 뿐 성격이 달랐고, 프레드릭과 벤자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렉스는 알렉스를 프리드에 벤자민을 프레드릭에 대입시키며 모종의 이유로 성격이 바뀐 제 조카들을 상상했다. 제가 프리드에게 검을 가르쳐 주고 헤르티아가 벤자민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 이런 일상이 어쩌면 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렉스는 자신이 잃어버린 일상을 두 아이에게 투영했다. 꼭 자신의 조카 같아서, 렉스는 그 두 아이를 아꼈다. 프레드릭이 레이라와 결혼하던 그날 그는 프레드릭의 아버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그래도 그는 그 아이들이 좋았다.

“아흐흑.”

렉스는 눈물을 흘렸다. 그 아이들이 얼마나 원통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란텔은 렉스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일이 조금 꼬였다. 하워드 형제가 확실하게 죽은 것인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프레드릭 놈은 마법사이니 분명히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전에 최대한 빨리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란텔은 헤임달의 지시를 받아 전쟁의 도화선을 만들었다. 란텔은 헨리를 죽여서 범인으로 위장하고 렉스에게 증거들을 보여주었다. 슬픔과 분노로 판단력을 상실한 렉스에게 조잡한 증거들은 확실하게 먹혀들었다.

“란텔님. 헤르티아님께서 환궁하셨습니다.”

여우 수인 궁녀 하나가 렉스의 방 앞에 있는 란텔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란텔은 알았다고 말을 하고 렉스의 방의 문을 두드렸다. 렉스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란텔을 돌아보았다.

“헤르티아님께서 환궁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렉스님을 뵙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환궁?”

렉스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래, 루프스와 그 휘하의 늑대 수인들은 상종할 수 없는 악질이었다. 그들은 저들을 이해해 보려고, 포용해 보려고 노력했던 그 착하디착한 죄 없는 아이들을 죽였다. 이 이상은 참아줄 수 없었다. 다 루프스 그놈이 초래한 일이었다. 렉스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포트리스가 돕겠다고 하면 헤르티아는 루프스를 치기 위해서 움직여 줄 것이었고 그녀가 움직이면 단테도 함께할 것이다. 개 수인들을 제외한 다른 수인들은 지금 다시 전쟁을 할 상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상황도 이쪽에 유리했다. 렉스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래, 이제 전쟁이다. 전쟁.

* * *

“그래. 사돈이 왔다고?”

헤르티아가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헤르티아가 다리를 꼬자 궁녀들이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헤르티아는 턱을 괴었다. 렉스 뮈어는 나름 친했던 마레 위르였다. 그는 동생을 과보호하는 구석이 있어도 호탕한 성격이었다. 문제는 라일라의 죽음 이후부터는 괴팍한 구석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루프스를 치기 위해 헤르티아는 의도적으로 포트리스를 배척하였기에 렉스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렉스 경께서 오셨습니다.”

그는 대륙에서 신전기사단 출신이었기에 다들 그를 ‘경’이라는 존칭을 붙여서 부르곤 하였다. 헤르티아는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궁녀들을 무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헤르티아가 들어오라는 말을 전하자 궁녀가 문을 열었다. 렉스가 안으로 들어오고 헤르티아는 그에게 의자를 권했다. 헤르티아는 렉스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도 충혈되어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경.”

“오랜만입니다, 헤르티아.”

렉스는 뻑뻑한 두 눈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헤르티아는 그에게 차를 권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렇게 쉬이 우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포트리스의 하워드 형제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 그 형을 베노르 콩레수스에서 본 적이 있지요. 붉은 머리에 자색의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아닙니까.”

헤르티아는 베노르 콩레수스에서 스치듯이 보았던 건장한 체격의 학자 타입의 청년을 떠올렸다. 보는 순간 얼어버렸다. 오빠의 젊었을 시절을 닮은 얼굴이었다. 순간 오빠라고 부를 뻔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젊은 얼굴에 자신이 착각한 것임을 깨달았다. 오빠의 가족들은 모두 죽었다. 제가 확인했다. 그저 그리움이 만든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헤르티아는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한참을 뒤척였다. 벤자민이 살아서 자랐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청년이 프레드릭 하워드임을 알았을 때는 기분이 묘했다.

“이번에 그 형제들도 이곳에 왔습니다만, 헨리라는 이름의 벨라토르가 살해했습니다.”

“벨라토르가 살해했다고요?”

헤르티아는 눈을 크게 떴다. 벨라토르는 루프스의 명에 따라 치안 유지 그리고 혹시 감시를 하는 자들이었다. 제가 손님으로 마레 위르를 들인 것을 알았으면 보고만 할 수 있지 그들을 살해하는 것은 명백한 헤르티아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헤르티아는 이를 악물었다. 루프스 저놈이 겉으로는 원망을 풀자 하면서 뒤로는 제 목을 죌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포트리스에는 둘도 없는 인재였으며 제게는 아들 같았던 아이들입니다.”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포트리스는 루프스를 칠 생각입니다.”

렉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예상 못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갑작스럽게 나온 말에 헤르티아는 놀라서 말을 하지 못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같이 할 생각이 있습니까? 루프스에게 협력할 일족들은 개 수인밖에 없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하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일족도 참여하게 됩니다. 싸우고 싶지 않아도 말이지요. 또한 준비는요?”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되도록 몸을 사릴 것입니다. 루프스가 그 여자아이에게 빠져 있다는 소문이 돌며 그로 인해 불만이 많은 수인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들의 반발을 이용하면 어쩌면 큰 피해 없이 오로지 루프스만 칠 수 있습니다.”

헤임달의 말을 듣고 렉스는 루프스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펠릭스 다우스라면 쉽게 말해 노예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노예로 들인 인간 계집을 아끼다 못해 다른 수인들까지 물어뜯기를 서슴지 않은 그는 제 약점을 그대로 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수인들의 불만을 키웠다. 헥터까지는 수인들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토모스는 달랐다. 토모스는 수인들에게 명망이 높은 자였다.

“준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포트리스는 항시 전투태세에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준비를 끝마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포트리스의 마레 위르들을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전에 내전에서도 수인들에게 원한이 깊은 몇몇 마레 위르들이 돌발 행동을 하여서 결국은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그것을 막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는 배로 토스 호무스를 칠 생각입니다.”

헤르티아는 의외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애초에 늑대 일족의 땅으로 곧장 들어간다면 돌발행동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마레 위르들은 수인들 보다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이 항해술로 토스 호무스의 뒤통수를 친다면 가능성이 있다. 헤르티아는 의자에서 몸을 곧추세웠다.

“미노르 호무스에 있는 간자를 통해 루프스가 그곳에 방문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루프스가 토스 호무스를 비우는 그때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저희가 토스 호무스로 가면, 헤르티아 당신은 저희를 처단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움직이십시오. 명분이 있으니 다른 일족들이 길을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토스 호무스로 편히 진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헤르티아는 머리를 굴렸다. 토스 호무스의 궁에는 그 레티티아가 있다. 루프스가 미노르 호무스에 갈 때 그녀를 데려간다면 일이 달라지지만 만일 그 아이를 두고 간다면, 레티티아를 포로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헤르티아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 작전 실행 가능합니까?”

“몇 년에 걸쳐서 짠 작전입니다. 최소한의 병력을 가지고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헤르티아는 그 계집에게 밑밥은 충분히 깔았다고 생각했다. 본래 계획은 제가 토스 호무스의 궁에 심어놓은 여우 수인에게 레티티아가 탈출을 하려 하면 제 이름을 대면서 데려오라고 명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직접 토스 호무스의 궁에 들어가서 그녀를 데려올 수 있다면 상황은 더욱더 유리해질 것이다.

“협력하겠습니다. 작전을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렉스는 헤르티아의 말에 반색했다. 이제 라일라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두 형제의 원한도 갚을 수 있다. 이제 포트리스의 여론도 바뀔 것이다.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작전에 한 가지만 추가하지요.”

헤르티아는 궁녀가 건네준 종이에 레티티아의 모습을 투영시켰다. 렉스는 종이에 그려진 아름다운 외관의 여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미희의 목에는 파렌티아가 걸려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얼굴은 처음 보았다. 렉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인 모양이었다. 저 계집의 외모는 나라 하나는 너끈히 결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르젠 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였다.

“만일 토스 호무스의 궁에 들어간다면, 함락시키지 않아도 괜찮으니 이 암컷만 납치해서 오십시오. 루프스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헤르티아와 렉스는 세부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 *

토스 호무스로 돌아오는 것은 소니페스 호무스로 갈 때보다 훨씬 빨랐다. 궁으로 돌아온 루프스는 유채에게 제가 했던 약속을 지켰다. 방은 더 이상 잠기지 않았다. 궁녀들이 당당히 궁을 활보하는 유채를 보고 놀랄 정도였다. 유채는 여우 일족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피곤해져서 정원에 나와 있었다. 블루벨은 볼을 부풀리고 유채에게 다가왔다.

“유채님! 진짜 이러실 거예요?”

“뭐를?”

“뭐긴요. 소니페스 호무스에서 말씀하신 것 있으시잖아요. 그거요, 그거 얘기 안 해주실 생각이세요?”

유채는 그제야 블루벨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를 알았다. 유채는 블루벨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블루벨은 유채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침을 삼켰다.

유채는 머뭇거렸다. 블루벨에게 이미 진 빚이 많았다. 그런데 거기에 또 빚 하나를 추가하기에는 미안한 감정이 컸다. 하지만 블루벨 말대로 카넬리안이 정말로 술주정만큼 뛰어난 수인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유채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내가 찾는 물건이 있는데, 그게 좀 위험한 곳에 있어.”

“설마, 이니투스님의 수장고요?”

“아니. 다른 곳. 울피누스 호무스.”

블루벨은 더 눈을 크게 떴다. 토스 호무스의 수장고는 들키더라도 루프스라면 그녀를 용서해 줄 것이었다. 하지만, 헤르티아는 아니다. 들키면 정말로 죽을 것이다.

“유채님! 거긴 더 위험해요. 정말 죽고 싶으신 거예요?”

“알아. 하지만, 그래도 난 가야 해.”

“혹시 돌아가는 일과 관련 있는 물건인가요?”

“응.”

유채의 단호한 대답에 블루벨은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블루벨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엄마가 실없는 분이시긴 해도, 믿을 수 없는 분은 아니에요. 예전에 인키디움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 준비를 할 때, 제게 많은 것을 알려주셨는데, 그게 시험에서 놓는 함정들이었는데, 관계자가 아니면 알 수 없던 것이었어요. 아마 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성공할지도 몰라요.”

“블루벨…….”

“도와드릴게요. 제가 저희 엄마 설득해 볼게요. 그러니까 돕게 해주세요.”

“고마워, 블루벨. 나는 너에게 해준 것이 얼마 없는데…… 미안해.”

“아니에요. 저는 유채님 덕분에 목숨을 구한 수인이에요. 그러니까 유채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언제 하실 건가요?”

“다음 주에 루프스가 미노르 호무스로 가면, 그때 빠져나갈 거야. 같이 가자.”

“알겠어요. 도와드릴게요.”

“케릭스는…….”

블루벨은 싱긋 웃어 보였다.

“제게는 유채님이 더 중요해요. 케릭스님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전 유채님을 먼저 돕고 싶어요.”

유채는 계속 사과와 고마움을 표시했고, 블루벨은 괜찮다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유채를 달랬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유채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촉박하게 결정하셨어요?”

“거의 다 준비가 끝났거든.”

빨리 움직일 이유가 생겼다. 유채는 손톱을 깨물었다. 그를 믿어도 될까 싶었던 제 자신이 바보고 멍청이에 머저리였다.

* * *

돌아온 날부터 루프스는 일이 끝나면 유채에게 와서 이야기를 나누든지 같이 걷자고 하면서 들러붙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귀찮았지만, 그래도 뭔가 뜯어낼 것이 있을까 싶어서 일단 그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유채는 엊그제도 도서관에서 울피누스 호무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루프스가 자신에게 자료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했기에 최근의 자료도 구할 수 있었다. 라일라가 베니니타스의 부인이 된 뒤에 동물화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유채는 헤르티아가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헤르티아가 조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유채는 이니투스의 보자기 문제도 생각을 했다.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문제였다.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유채는 의자의 뒷다리 두 개로만 버티고 책상 모서리를 잡은 채 흔들의자처럼 앞뒤로 흔들었다. 몸을 최대한 뒤로 젖힌 다음에 머리를 뒤로 꺾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위험하다. 뭐하는 것인가?”

유채의 얼굴 위로 루프스의 청회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당황한 유채는 그만 중심을 잃고 책상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으악!”

나무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유채는 바닥에 부딪칠 거라 생각하고 눈을 감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채는 슬며시 눈을 떴다.

“괜찮나. 왜 괜히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나.”

루프스가 받쳐 주고 있었다. 루프스가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자 유채는 흘러내린 치맛자락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고마워요.”

“복잡한 일이 있으면 깐 쉬는 것도 좋아. 좋은 곳이 있는데, 보러 갈 생각이 있나?”

유채는 그의 말대로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할 바에는 잠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루프스는 조금 이따 데리러 올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유채는 도로 의자에 앉아서 책상을 쓸었다.

“꼭 이렇게 사람 기분 묘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

루프스의 행동을 요 며칠 생각해 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의 호의는 호의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은 그저 가만히 있는 속물의 전형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냉정하게 내칠까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저 남자가 협력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유채는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속삭였다. 그래도 왼팔에 입은 상처로 고생하면서 자신에게 원망 한 마디 하지 않는 루프스를 보면 가슴이 콕콕 찔려왔다. 유채는 머리를 흔들어서 잡생각을 털어내었다. 오늘은 그를 구슬려 수장고의 위치를 알아내야겠다. 다음 주까지는 확실하게 어떻게 이동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유채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을 책장에 꽂았다.

“왜 이렇게 이건 높아.”

유채는 짜증을 내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책을 꽂기 위해서 노력했다. 늑대 수인들의 키가 크다보니 책장자체의 높이가 꽤나 높았다. 유채의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늑대 수인들의 키가 지나치게 컸다. 펄쩍 펄쩍 뛰어보고 까치발도 디뎌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귀찮지만 의자를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줘봐라.”

뒤에서 루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에서 책을 뺏어 책장에 꽂았다. 유채는 루프스와 책장 사이에 갇혔다. 그는 유채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밖으로 나가는 일이라 미리 헤나에게 일러두고 오는 길이다.”

“어디로 가는 건데요?”

“토스 호무스의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그렇게 멀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루프스는 궁의 북쪽으로 유채를 데려갔다. 유채는 처음 와보는 곳이라 신기해했다. 궁의 북쪽에는 작은 언덕이 있었다. 서쪽에 있는 산자락에서 이어지는 곳이라고 했다. 루프스는 유채를 돌아보았다.

“다리 아프면.”

“나 그렇게 약골 아니에요. 혼자 걸어갈게요. 높지도 않구만.”

유채는 루프스를 지나쳐서 완만한 경사의 언덕을 올라갔다. 루프스는 얼른 유채의 뒤를 따라왔다. 오월도 거의 끝이 나고 있었다. 여름이 찾아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았다. 그것을 닦아줘야 하나 고민을 하는 사이에 유채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루프스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뭐예요?”

“이 손수건…….”

루프스가 축제 때 준 손수건이었다. 알렉스의 손수건은 루프스가 이미 뺐어버렸기 때문에 유채는 그가 준 손수건을 쓰고 있었다.

“나 쓰라고 준 거 아니에요? 줬다 뺐기?”

“아니다. 그냥. 익숙해 보여서 그랬다.”

머리 장식 이후로 유채는 제가 준 모든 것을 무시하였었다. 그런데 이렇게 손수건을 쓰는 것을 보니 마음을 조금씩이라도 여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바람에 흩어질 부질없는 기대일지라도 루프스는 그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루프스는 주머니 속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라이도 좋아하는 암컷이 생기면 엄마 반지로 고백하는 거야. 알겠지?’】

수인들에 세계에서 부모님의 유품을 건네는 것은 경애의 표시이며, 청혼의 의미였다. 유채가 자신에게 허락한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이처럼 희망이 있다면 제 마음을 보여도 되지 않을까?

“하아. 힘들어.”

유채는 언덕의 꼭대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멈춰 섰다. 이 정도 언덕도 힘든데 어떻게 그 메투스 산을 그렇게 열심히 달릴 수 있었나 싶었다. 사람의 정신력이라는 것이 참 대단한 것 같았다.

루프스가 유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라. 끌어올려 주마.”

“혼자 갈 수 있어요. 내가 무슨 유리인형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유채는 톡 쏘아붙이고 루프스를 무시한 채 다시 위로 올라갔다. 루프스는 멋쩍어하다가 손을 거두고 유채를 쫓아갔다.

유채는 언덕에 꼭대기에 올라갔다. 어둑어둑해진 밤하늘 아래로 토스 호무스 궁의 전경과 근처의 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축제 때 보았던 것처럼 색색의 등이 켜져 있는 화려한 경관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의 수수함이 있었다.

유채는 후덥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올라온 루프스도 그녀의 옆에 앉았다. 탁 트인 하늘과 경관을 보니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유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밤하늘은 아름답게 빛이 났다.

“고민하던 문제는 괜찮나.”

루프스는 근처의 들풀을 꺾으며 유채에게 넌지시 말을 던졌다.

“예?”

“요즘 표정이 수심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보이기에 기분이나 풀라고 데려왔다. 내가 어릴 적에 가슴이 답답하면 자주 오던 곳이다.”

루프스는 애꿎은 들풀만 뚝뚝 꺾다가 헤나에게 말해서 챙겨온 간식을 유채에게 건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쿠키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약간 바스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모습이 온전했다.

유채는 쿠키를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이 입에 가득 퍼졌다. 루프스도 유채의 옆에서 쿠키를 씹었다. 유채는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것인지 아무 말 없이 앞을 보고만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떠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아직 물건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토스 호무스만큼 많은 자료가 있는 곳도 드물었다. 그리고 유채가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곳도.

그녀가 찾는 물건을 자신이 찾고 있다고 말하면 저를 속였다고 생각해서 멀어질까 봐 감히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유채가 고생하는 것을 보느니, 다시 위험에 처하는 것을 지켜보느니, 스스로를 영원한 괴로움 속으로 밀어 넣는 한이 있어도 직접 찾아서 가져다주고 싶었다. 이미 루프스는 유채를 억지로 붙잡아둘 계획을 버렸다. 루프스는 가만히 유채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민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도와주마.”

“내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 줄 알고요?”

유채는 무신경하게 쿠키를 씹어 먹으면서 대꾸했다.

“집에 돌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아닌가.”

유채는 놀란 눈을 하고선 고개를 돌렸다. 루프스가 종종 저 이야기를 주제로 입을 연 적은 많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드물었다. 그 뒤에는 항상 조건이 붙었었다. 가지 마라. 돌아와 달라. 매번 반복되는 도돌이표 같은 내용들이었다.

“돌아와 달라는 말은 안 해요?”

“그건 네 마음이지 않은가?”

루프스는 손에 남은 쿠키를 입에 털어넣고는 유채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고요했다. 바람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길어서 목을 덮을 정도가 된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은빛의 머리카락은 까만 밤하늘과 꽤나 잘 어울렸다.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면, 유채는 제가 저 남자에게 굉장한 호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와 비교하자면 배우의 뺨을 두 번이나 칠 수 있을 정도로 잘 생긴 외모에 자상한 성격의 남자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은 없었다. 유채에게 그는 종잡을 수 없는 두려운 남자일 뿐이었다. 끔찍하다고 생각하던 예전보다 나아진 것은 이제 그를 이용하려 때 아주 손톱의 때만큼 죄책감이 든다는 것 정도?

“늑대들은 한 여자만 보고 살아가서 집착이 심하다면서요. 갑자기 웬 위선이에요?”

“네 말이 맞다. 평생 한 암컷만을 바라보고 그 암컷이 없으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지.”

심장이 조여들어 가는 아픔이었다. 누군가 제 심장을 손으로 쥐어짜도 그것보다 덜 아플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검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예전만큼의 적대감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마레 위르들도 다 다르듯이 늑대들도 개체 차가 있다. 그러니, 나도 그들과는 또 다르다.”

지금이라도 발을 꺾고 손목을 꺾고 눈을 찔러서 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붙잡으라는 말을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늑대 수인으로서 본능인지 아님 애써 감추고 있는 진심인지, 루프스는 주먹을 쥐었다. 본능이든 제 진심이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루프스는 모든 것을 유채에게 맡겼다.

“너는 어차피 내가 무릎을 꿇고 빌어도 떠날 것이 아닌가?”

그것이 한없이 진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빌어먹게도.

“그러니 방법을 바꾸었다. 네 기억 속에 남기로. 아마 나는 네게 좋은 기억으로는 남을 수 없겠지. 너를 연모하니, 너에게 최악의 기억으로는 남기 싫다. 그러니 도와주겠다.”

도와주겠다는 한 문장이 마치 창과 같아서 말을 할 때마다 목구멍이 찔려왔다.

“네 말대로 나는 여기서 너를 추억하면서 살아가겠다. 네가 원하는 대로 그저 너를 추억하며 살아가겠다. 그러니 너는 그곳에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아라.”

루프스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유채를 바라보았다.

“많이 생각해 보았는데,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가장 많이 바라는 것 같다. 늑대 수인의 사랑은 위험하지만, 나 같은 이도 있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평소라면 그 손을 쳐 냈을 유채가 가만히 있었다.

“그곳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네 삶을 살아라. 행복하게. 수컷을 만나거든 나보다 더 잘난 놈으로 만나고. 내가 나중에 알아도 억울하지 않게.”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농담을 했지만, 루프스 자신에게는 농담이 아니었다. 과연 그 광경을 보고서도 자신은 웃으며 행복해라 말할 수 있을까? 좋은 마레 위르니 잘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루프스는 떨리는 목울대를 억지로 침을 삼켜 진정시켰다.

“그러니, 내가 네게 최악으로 남지 않기 위해, 내 죄에 대한 갚음을 하기 위해서 돕게 해줄 수 있나.”

유채는 루프스를 보았다. 과연 그를 믿어도 될까? 루프스의 도움을 받는다면 위험한 상황에 들어가지 않아도 조각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헤르티아가 조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믿기 싫은 것도, 이 남자를 싫어하면서도 이 남자의 그늘에 머무르는 것도 모두 하나 때문이었다.

아프고 싶지 않았다. 안전하고 싶었다. 저를 이상한 눈으로만 보는 남자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언니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런 것도 참지 못하고 무서워서 벌벌 떠는 자신이 한심하고 위선적으로 느껴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루프스는 종잡을 수 없는 남자지만, 최소한 저를 죽이려 들지 않았고 강간하려 들지도 않았다. 루프스의 도움을 받으면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과연 그를 믿을 수 있을까?

요즘의 행동이라면 믿어도 될 것 같았지만, 이 행동이 모두 저를 속이기 위해 꾸며낸 행동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를 못 믿는 것은 안다. 그러니…….”

“당신을 처음에 봤을 때, 무서웠어요.”

유채는 루프스의 말을 끊었다. 계속 루프스의 말을 듣다가는 그의 말에 홀릴 것 같았다. 안전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 저도 모르게 함정을 밟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에서 엄청난 권력을 가진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무서웠고, 다음에는 증오했고, 그 다음은 끔찍했어요.”

“……그렇겠지.”

“그래도 몇 가지 일은 고마웠어요. 헥터에게서 구해준 것, 비탈에서 굴러 떨어질 때 감싸준 것, 아편에 중독돼서 죽을 뻔한 것을 구해준 것. 축제 때 구해준 것. 고마웠어요.”

루프스는 평소와 달리 덤덤하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난 당신의 말이 진심인지 모르겠고, 진심이라고 해도, 당신을 용서하기가 힘들어요.”

“하기 힘들면 하지 마라. 강요하지 않는다. 사과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지.”

“……머리는 충분히 식힌 것 같네요. 돌아가요.”

유채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과자 고마워요. 잘 먹었어요.”

유채는 루프스를 뒤로하고 먼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머니 속에서 수없이 만졌던 반지를 꺼냈다.

[Meus Ignis (내 사랑)]

아버지가 공을 들여서 새긴 문구가 반지 안쪽에 있었다. 루프스는 손으로 안쪽을 쓸어보았다. 몇 번이나 망설였다. 청혼이 아니라 그저 제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만 알아달라는 의미로 주려고 했다. 유채는 어차피 반지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유채에게 단지 그런 흔적으로라도 남고 싶었다. 사랑하는 암컷 하나 못 알아보고 한심하게 굴어서 결국 그 대가를 받았다는 저라는 수컷이 있었다는 것을 유채에게 남기고 싶었다. 이 정도의 바람은 괜찮지 않은가?

루프스는 어머니의 반지를 가만히 쓸었다. 이것마저 부정당하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루프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마치 물에 젖은 것처럼 일렁거렸다.

* * *

유채는 루프스의 도와주겠다는 제안에 수없이 고민했다. 쉬운 길이 생겼지만, 아직도 그를 믿을 수 없었다. 유채는 계속 뒤척이다가 고민으로 잠이 오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서성이다가 유채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채는 발소리를 죽이고 궁녀들을 피해서 정원으로 나왔다. 밤하늘 서쪽에는 달이 걸려 있었다. 유채는 천천히 정원을 거닐다가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혹시나 싶어서 건물의 벽에 몸을 숨겼다.

“젠장. 엄청난 보석도 아니고 그냥 빨간 루비잖아. 그리고 온전한 것도 아니고 조각난 쪼가리라서 보석으로도 가치가 없는 건 도대체 왜 찾는 것인데?”

유채는 남자 수인의 말에 몸을 굳혔다. 그 옆에 있는 여자 수인이 대꾸했다.

“모르지. 그리고 바다에 버릴 걸 대체 왜 찾으래? 젠장할.”

“이젠 바다에 버리지 말고 가져오라잖아. 도대체 뭐하려고 그러시는 것인지 루프스님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유채는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붉은 루비 조각, 저들이 찾고 있는 것은 바로 리와인더의 조각이었다. 뒷골이 서늘해진 유채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르지. 그것에 대한 정보를 이니투스님의 자료에서 찾아냈다고 하잖아. 뭐, 선조의 물건을 찾자는 것 아닐까?”

“그분이? 차라리 레티티아 주려고 찾는다는 말을 믿겠다.”

“미쳤냐? 지금까지 그년에게 간 보석이 몇인데 기껏 선물로 그런 싸구려를 주겠냐?”

둘은 유채의 험담을 하다가 어느 순간 안개처럼 흩어지듯이 사라졌다. 유채는 벽에 등을 대고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면, 도와주겠다고 하던 것부터가 이상했다. 제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영악함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는 일부러 안락함을 제공한 것이었다. 제가 그에게 마음을 놓기를 원한 것이었다. 말로는 자신을 위한다고 하면서 제 욕심을 채우려 한 것이었다. 저는 거기에 멍청하게 넘어간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그의 도움 따위 생각할 가치도 없이 거절했을 것이다. 그의 말에 고민하며 밤잠도 설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유채는 루프스가 변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에게 호의를 가져서가 아니었다. 그가 불쌍해 보여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가 제공하는 안전이 편했다.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을 것이고 헥터, 헤르티아, 토모스, 젤다 같은 이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루프스가 변했다고 믿고 싶었다. 제 몸의 안전을 위해서.

루프스가 바란 것이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제가 마음을 놓고 조각에 대해 털어놓으면 몰래 찾는 척을 하면서 그것을 숨길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유채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옛날 어른 말씀 중 틀린 것은 없었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고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얼마 안 있으면 루프스가 미노르 호무스로 떠난다고 하였다. 유채는 그 틈을 노리기로 하였다. 잠시 루프스의 비위를 맞춰주고, 그가 저를 믿게 만든 후 그가 없는 틈이 이 토스 호무스를 빠져나가야겠다.

유채는 이니투스의 물품을 보관해 놓은 수장고에서 이니투스의 일기로 추정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루프스가 저것으로 리와인더의 조각의 생김새를 알아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채는 일기장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이쪽으로 와라.”

루프스가 손짓으로 부르자 유채는 걸음을 움직였다. 블루벨과 정원에 있다가 헤나가 데리러 와서 따라와 보니 바로 여기, 이니투스의 수장고였다. 내내 이곳에 들어올 방법만을 찾고 있었던 터라 반가웠지만 유채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이건…….”

이니투스의 보자기였다. 소니페스 호무스에 있던 것을 루프스가 짝퉁이라 부르며 비하한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진짜는 훨씬 아름다웠다.

긴장한 루프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등 뒤로 숨긴 손에는 반지가 들려 있었다.

루프스는 에클레시아에서 부정당한 제 마음을 한 번 더 말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다. 절대 청혼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이 앞에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어제의 일로 유채가 최소한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혼례를 올릴 때, 신부가 쓰는 베일이다. 이니투스님이 신께 받은 신물이라고 하고.”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나는 네가 저 베일을 쓰고 내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수 없이 상상했다.”

루프스의 마음은 유채에게는 그저 가증스런 고백이었다. 유채는 당장이라도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없음을 안다.”

루프스는 등 뒤로 감추었던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반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루프스는 이것이 제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말은 안으로 삼켰다. 유채에게 부담이 될 말은 피하고 싶었다.

“내 마음이다. 받아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말하고 싶었다. 네가 부담스러우면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그냥…… 한 번이라도 더 말해보고 싶었다. 내 마음이 집착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루프스는 묘하게 차가운 유채의 얼굴을 보면서 절망했다. 이번에도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프스는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 어떤 말이든 괜찮으니 제게 답을 주었으면 했다.

유채는 고민했다. 저 반지를 받고 적당히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 그가 방심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노르 호무스에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유채는 반지를 받았다.

“사실 나. 조금은 혼란스러워요.”

입술에 침 한번 바르고 거짓을 속살거리자 루프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유채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먼저 선을 넘은 것은 그다. 저를 속이고 제 뒤통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니다. 굳이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루프스는 유채가 최소한 저를 끔찍한 수컷으로 기억하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에 안도했다. 유채가 저를 사랑하지는 않을 테지만, 최소한 그래도 저를 기억하기라도 해줄 거란 데에 만족했다. 혼자 남겨질 자신에 대한 동정이어도 괜찮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았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괜찮아.”

유채는 반지를 움켜쥐었다. 여지를 내어준 줄 알고 기뻐 하는 루프스를 한없이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사람이 가졌다고 생각했다가 빼앗겼을 때 가장 비참해지는 것이 희망이고 사랑이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거짓으로 희망을 주었다. 그 희망이 거짓임을 알았을 때, 저 남자는 비탄에 빠질 것이다.

유채는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행동을 했지만,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모두 그가 초래한 일이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비탄에 빠져서 절망하기를 바랐다. 저를 속이려고 했던 대가를 그렇게 치렀으면 하였다.

헤르티아의 아가리가 루프스의 아가리보다는 안전할 것이다.

유채는 아이처럼 벙싯거리고 웃는 루프스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베니니타스 외전

“라일라. 벤자민, 프리드.”

슬픔이 극에 달하면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베니니타스는 온전치 못한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고 내일 장례를 치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들의 관 앞에 앉았다. 그는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이게 모두 꿈이기를 바랐다. 일어나면 라일라가 웃으면서 제게 안겨오기를, 사랑스러운 아들들이 제게 달려오기를 수십 번을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바람일 뿐이었다. 베니니타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 * *

베니니타스는 침대 위에 하얀 등을 이불로 가리고 누워 있는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줄곧 거슬리던 암컷이었다. 차분한 자수정색의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저를 흔들어놓던 암컷이었다. 그랬기에 한 번 안으면 이런 감정이 없어질 것 같았다. 암컷이 잠자리에서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나. 다 똑같은 것들이었다. 베니니타스는 그런 마음으로 어제 라일라를 품었다.

문제는 여기 있었다. 제가 아직도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베니니타스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면서 잠든 라일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륙의 신녀 출신이라는 이력 외에 독특한 면은 없었다. 예쁘장하게는 생겼지만, 그렇다고 나라 하나를 결딴낼 만큼 절세미녀는 아니었다. 외모로는 이 스티폴로르에서 최고로 치는 로보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다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미모에 대해서 판단하는 기준이 올라갔다. 베니니타스는 답답한 기분에 다시 베개에 머리를 댔다.

베니니타스는 오른쪽 뺨을 베개에 대고 자는 라일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라일라의 옆선을 훑었다. 약해 보이는 외모였지만, 심지가 굳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 이곳까지 오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일어났어요?”

베니니타스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손을 급하게 거두었다. 라일라가 몸을 돌리면서 눈을 떴다. 라일라의 오른쪽 얼굴은 베개에 눌려서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약간 추운 것인지 그녀는 베니니타스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베니니타스가 몸을 굳혔다. 라일라의 이마가 베니니타스의 벗은 가슴에 닿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왜…….”

“뭐라고요?”

“왜 나와 잤나?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라일라가 졸음이 가득한 눈을 들어서 베니니타스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라일라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원래 남녀가 자고 나면 이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뭐?”

“뜨거운 하룻밤 뒤에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라일라가 이불을 몸에 빙 두르고 몸을 뒤집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라일라의 하얀 등을 덮었다.

“나는 내 생의 절반 이상을 신녀로 살았어요. 그래서 이런 일상적인 것은 잘 몰라요. 그래서 묻는 거예요. 원래 이런 말을 해요?”

라일라가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워서 그의 콧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베니니타스는 몸을 굳혔다. 라일라가 두르고 있는 이불이 울긋불긋한 자국이 남은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베니니타스가 침을 삼키기만 하고 입을 열지 않자 라일라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입을 열었다.

“나는요. 신녀가 되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저 밥을 굶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어린 나이에 오빠와 함께 고아가 되었다. 전쟁 통에도 신전 근처는 비교적 치안이 안전해서 그곳의 빈민가에 자리를 잡았다. 라일라는 술집 접대부의 하녀 노릇을 했고 렉스는 술주정뱅이들에게 재롱을 떨거나 시중을 들어주면서 근근이 먹고 살았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라일라의 잠재된 성력(聖力)을 알게 된 신전은 죽 한 그릇으로 남매를 유혹했다. 너무 배가 고팠던 남매는 죽 한 그릇에 신전에 몸을 의탁했다.

“나는 모험가가 되고 싶었어요. 신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아르젠에 있는 신성한 산에도 가보고 싶었고 용 하르메아가 잠들어 있다는 동굴도 가보고 싶었고…….”

라일라가 말을 길게 늘였다. 베니니타스를 힐끔 올려다보던 그녀가 마저 말을 이었다.

“소용돌이 너머에 있다는 거대한 섬에도 와보고 싶었어요.”

“스티폴로르에?”

라일라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라일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빠랑 신전에서 도망칠 때, 이곳으로 오자고 했어요. 소용돌이 너머 전설 속 섬으로 가자고.”

“그래서 환상이 깨져서 후회하나?”

“아니요.”

라일라의 대답이 단호했다. 베니니타스는 의외의 대답에 눈을 떴다.

“아까 물었던 말에 지금 대답해도 되나요?”

라일라는 갑작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베니니타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라일라는 중구난방으로 말하는 암컷이 아니었기에, 베니니타스는 갑작스런 그녀의 변화에 의아했다. 라일라가 상체를 살짝 들었다. 이불이 약간 흘러내렸다.

“그냥, 좋아서 허락했어요.”

“뭐?”

“그래서 난 이 스티폴로르가 좋아요.”

라일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아니,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말을 이해했다. 라일라의 말을 이해했고 그것에 대해서 묘하게 기뻐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제 이해를 부정했다. 베니니타스는 팔을 뻗어서 라일라의 목에 팔을 감았다. 라일라가 아무런 반항 없이 끌려갔다.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라일라의 부드러운 몸이 감겨오고 깊고 진득한 키스가 계속되었다. 베니니타스는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제 아래에 갇혀 있는, 아직은 미숙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라일라가 너무나도 요부처럼 보였다. 그래서 계속 이상했다. 숫총각처럼 멍청하게도 어젯밤을 계속 생각했다. 어제 라일라가 어떻게 제 목을 끌어안았는지, 저 자수정빛 눈동자가 어떻게 풀려서 저를 바라보았는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멍청하게도 그것을 계속 곱씹어보고 있었다.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손을 손가락을 겹쳐서 잡아 눌렀다. 젠장할. 빌어먹을. 세상에 둘도 없는 천치가 된 기분이었다. 베니니타스의 입술이 라일라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라일라에게서 여릿한 신음이 나왔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암컷이 왜 이리 눈에 밟히는 것일까 고민하면서도 베니니타스의 눈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짙은 보랏빛의 눈동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름답다 느꼈던 것이었다.

* * *

“베니니타스님, 제가 인질이 되겠습니다.”

라일라를 처음 만난 것은 포트리스 근처에서 정찰을 하고 있던 때였다. 식량난을 겪던 포트리스는 미노르 호무스보다는 울피누스 호무스가 만만했는지, 자신에게 찾아왔다. 정확히는 제가 바닥에서 기어올라서 울페스의 자리에 오른 지 몇 년 되지 않은 햇병아리라 별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었다. 포트리스에서 베니니타스가 원하는 무엇이든 제공을 할 테니 제발 식량을 줄 수 없냐고 빌었다. 베니니타스는 사절단 틈에 서 있는 보라색 눈동자의 암컷에게 눈길을 보내었다. 포트리스에 대륙 출신의 신녀가 왔다고 하더니 저 암컷이 바로 그이인가 보았다. 베니니타스는 손가락을 움직여 그 소녀를 가리켰다.

당연하게 렉스는 반발했지만, 라일라는 자신이 가겠다고 했다.

“괜찮아, 오빠. 큰일은 없을 거야.”

베니니타스는 가벼운 흥미로 식량을 보내고 라일라를 얻었다.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의 묘한 분위기의 암컷. 잠자리 시중이나 들게 할까 싶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다른 일을 하겠다고 했다.

“고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죽이지 마요. 내가 할 수 있어요. 이 사람도 당신의 백성이잖아요. 당신은 이 사람들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군주예요. 그러니, 군주의 품격을 보여주세요.”

라일라는 올곧았다. 부상으로 쓸모없어진 수인을 행군에서 버리려고 할 때 라일라는 막아섰다. 이미 남은 성력이 얼마 되지 않기에 힘을 쓰는 것이 엄청난 부담이 되었음에도 라일라는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도왔다. 부상 입은 수인들도,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수인들도, 가난으로 고통받는 수인들도, 그 모두를 도왔다.

그게 이상하게 박혀 들어왔다. 정말 이상하게.

충동적으로 밤을 보낸 이후에 베니니타스는 이따금 라일라의 방을 찾거나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둘은 그렇게 같이 밤을 보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라일라는 베니니타스의 왼팔을 베고 그의 벗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베니니타스는 계속 라일라를 찾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마치 중독된 것 같았다.

베니니타스의 큰 손이 라일라의 벗은 등을 쓸었다. 평소와 다르게 라일라의 표정이 어두웠다.

“왜 그런 표정인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니요.”

“그럼 표정이 왜 어두운가?”

라일라는 입술을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나…… 그쪽 일기장을 봤어요.”

베니니타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성력은 일반적으로 치유에만 이용될 것 같았지만, 상당히 여러 곳에 마법처럼 이용되었다. 라일라는 성력으로 치유를 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물건에 남은 기억을 읽기도 했다. 베니니타스에게 일기장은 하나였고, 그 일기장을 보았다는 것은 제 과거를 모두 읽었다는 것이었다. 라일라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읽고 싶어서 읽은 것이 아니에요. 난 이제 성력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에 대한 통제도 이젠 잘 되질 않아서. 나도 갑자기 읽게 된 거예요.”

“나가!”

베니니타스가 버럭 소리 질렀다. 베니니타스는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 가장 치욕스러운 기억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못 해본 일이 없었다. 몸을 팔기도 했고 비굴하게 권력자의 발을 닦았던 그 시절의 기억을 모두 라일라가 읽었다는 것이다. 베니니타스는 주먹을 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라일라의 목을 졸라 버릴 것 같았다. 라일라는 베니니타스의 주먹을 감쌌다.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요……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나가!”

라일라는 베니니타스의 고함에도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베니니타스는 순간 멈칫했다. 라일라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 나름의 위로였다. 베니니타스의 과거에 대한 그녀 나름의 위로였다. 어려서 가혹한 세상에 떨어져 고목이 되어가던 그를 처음으로 누군가 안아주었다. 라일라가 작게 속삭였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고, 힘들면 힘들다고 해도 돼요. 내가 위로해줄게요.”

“……닥쳐.”

그의 목소리에는 예전과 같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위로에 감동이라도 한 모양인지 심장이 통제를 잃고 뛰었다. 당장 라일라를 밀어내라고 머리가 명령하는데도 몸은 머리의 생각을 배반했다.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는 라일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라일라 역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베니니타스에겐 그게 위로가 되었다.

“당신은 잘해왔어요. 잘…… 살아왔어요.”

저 자신도 싫다고, 더럽다고 부정해 왔던 과거였다. 그런 과거를 위로해 준 것은 라일라 외에는 없었다. 분명 동정심일 것이다. 하지만, 베니니타스는 라일라가 보여주는 것이 동정심일지라도 상관없었다. 베니니타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라일라의 온기를 갈구했다.

사실 그 누구든 상관없으니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베니니타스는 왜 자신이 여태껏 라일라를 대할 때 마음이 이상했는지를 깨달았다. 빼어난 미인도 아닌 라일라에게 왜 시선을 뺐겼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그 자체로 빛이 나고 아름다웠다. 라일락꽃처럼 수수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아름다웠다. 라일라는 그렇게 가랑비처럼 제 마음에 젖어들어 왔다.

이게 사랑이었다.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벗은 몸에 감겨오는 부드러운 여체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동안 요동치던 모든 그 마음의 근원은 사랑이었다. 베니니타스의 손가락이 라일라의 갈색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이제야 알았다. 라일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 * *

베니니타스는 라일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어도 그녀에게 제대로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제 과거를 모두 아는 것이 걱정이었다. 헤르티아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더러운 일들은 다했다. 그런 자신이 너무나 하얗기만 한 라일라에게 감히 마음을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베니니타스는 침대에 누워 붕대를 감고 있는 라일라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제가 라일라에게 시선을 뗀 것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궁 안에만 있는 것을 답답해하기에 울피누스 호무스를 시찰하는 데에 라일라를 데리고 나왔다. 라일라는 답답한 궁을 벗어나게 된 것이 좋은지 들떠 있었다. 모험가라는 꿈을 꾸었던 것처럼 울피누스 호무스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베니니타스는 들뜬 라일라를 바라보다가 저를 찾는 이가 있어서 잠깐 신경을 다른 곳에 쏟았다. 그때 일이 일어났다. 라일라가 납치된 것이었다. 베니니타스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라일라를 찾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로보에게까지 도움을 청했을 정도였다.

블랑카와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던 로보는 당장에 시카리우스를 보내고 인키디움을 협박해서 베니니타스를 도왔다. 로보의 도움이 없었다면, 라일라를 찾는 것은 더 늦었을 것이었다.

범인은 근처의 범죄 조직이었다. 그들의 본거지를 습격해서 라일라를 찾았다. 라일라는 개처럼 개목걸이를 차고 말뚝에 묶여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있는 그녀의 몸에 고문의 흔적이 가득했다. 베니니타스는 다급하게 라일라를 의사에게 데려갔다.

라일라를 납치한 자들의 목적은 그녀의 성력이었다. 그들은 라일라의 성력을 이용해서 돈을 벌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일라의 몸은 이제 더 이상 성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원래 보유하고 있는 양이 적기도 했고, 그들의 고문을 버틸 수 없었던 라일라의 몸은 망가지기 직전이었다. 라일라는 로보의 지원으로 찾아온 뱀 수인 의사들과 수도승들의 도움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인정해야겠지.”

포트리스에는 저보다 더 좋은 수컷이 많을 것이다. 라일라의 행복을 위해서 그녀를 보내주는 것이 옳다. 제 과거 때문에 고백도 못하고, 그렇다고 놓아줄 용기도 없어서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이곳은 라일라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제가 이렇게 계속 어정쩡하게 잡아둔다면, 위험해지는 것은 라일라였다. 그러니 돌려보내야 했다. 베니니타스는 잠든 라일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 * *

“싫어요. 안 돌아가요!”

라일라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소리 질렀다. 베니니타스는 당장이라도 라일라를 품에 안고 싶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힘겹게 라일라를 밀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가슴이 바스러지는 기분이 들더라도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행복을 위해서 그녀를 보내기 위해서 노력했다.

“가! 난 쓸모없어진 것은 버린다. 넌 이제 쓸모없어졌어.”

베니니타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너로 인해서 내가 지금 입은 손해가 얼마나 큰 줄 아나? 지금 내가 로보와…….”

“좋아해요!”

라일라가 절박하게 외쳤다. 라일라의 자수정빛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내가 베니니타스님을 좋아한다구요.”

라일라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

“저를 사랑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지금처럼 생각날 때 한 번씩 들러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제발. 가라고 하지는 말아줘요. 싫어요. 난…… 싫어요.”

라일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멍청하긴. 자존심은 어디다 버렸나? 정말 한심해서 못 봐주겠군.”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고백이 황홀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울피누스 호무스는. 이 스티폴로르는 라일라에게 위험한 곳이었다. 이곳에 머무르면 위험한 것은 라일라였다. 포트리스에서는 외부의 적만 걱정하면 되지만, 울피누스 호무스에서는 내부와 외부의 적 모두를 걱정해야 했다.

“……당신은 날 라일라란 이름의 여자로 봐줬잖아요.”

라일라가 눈물 젖은 얼굴로 베니니타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배고픈 게 싫어서 신전으로 갔어요. 신녀요? 성력을 가진 자비로운 신녀? 봉사하는 신녀? 그딴 건 나랑 어울리지도 않는 말이에요.”

라일라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배가 고파서 신전으로 갔을 뿐이었다. 성력이 없었다면 라일라는 주위의 수많은 여자아이들처럼 술집의 접대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기 싫어서, 마침 기회가 생겨서 신전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신전에서의 삶도 다른 것은 없었다.

“자비? 봉사? 그딴 건 이미 지옥이 된 대륙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이에요. 나는 신전의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았어요. 신전이 유력가들에게 돈을 받으면 나는 그 유력가에게 가서 그들을 고쳐줘요. 내가 고쳐준 이들은 인간 백정이라 불러도 될 정도의 학살자도 있었고, 수많은 가엽은 여인들을 겁탈한 귀족도 있었고, 사람들을 수탈한 탐관오리들도 있었어요. 난 그들의 돈을 받고 그들을 고쳐줬어요.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신녀? 난 그냥 성력을 지닌 장사꾼의 곰에 불과했어요.”

몇몇 신실한 신앙심을 가진 신관이나 신녀들은 라일라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성력은 선함의 증표였기 때문이었다. 또 신전 근처에 사는 빈민층은 라일라를 구원자로 여겼다. 신전은 영악하게도 빈민들의 푼돈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라일라를 이용했다. 신전은 이따금 라일라를 빈민촌으로 보내서 그들을 치료하도록 시켰다. 라일라에 대한 믿음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든 빈민들이 낸 돈은 신전의 윗선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라일라는 항상 죄스러웠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저는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근데, 당신만큼은 나를 신녀로 봐주지 않았잖아요. 그냥 라일라란 여자로 나를 보았잖아요.”

라일라도 처음에는 베니니타스가 무서웠다. 하지만 함께 지내다보니 그가 다르게 보였다. 그는 제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포악한 사람이라고 들어서 당연히 제 말을 무시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제 말을 들어주었다.

베니니타스와 가까워진 뒤에 그가 가져다주는 작은 꽃 한 송이나 사소한 배려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라일라는 베니니타스가 좋아졌다. 베니니타스가 수인인 것은 아무 상관없을 정도로 그가 좋았다.

“멍청한 말 하지 말고 돌아가.”

베니니타스는 냉정하게 그녀를 내쳤다. 계속 듣다가는 그녀를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제 과오를 알고도 저를 안아주는 라일라를 보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친절함이, 그 고결함이 좋았다. 제 곁에 있으면 불행해지는 것은 라일라였다. 라일라는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 안 좋아해도 돼요. 그냥 곁에만 있게 해줘요. 곁에만 있을게요.”

“멍청한 소리.”

베니니타스는 주먹을 쥐고 뒤돌아섰다. 라일라는 달려가서 베니니타스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베니니타스의 셔츠가 눈물에 젖어 들어갔다.

“사랑해요.”

라일라가 베니니타스의 등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 보내지 마요. 제발…….”

베니니타스는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강하게 움켜줬던 주먹을 풀었다.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팔을 풀어내고 몸을 돌려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꽉 안으면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네가 가지 않겠다고 했다.”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베니니타스의 입술이 라일라의 입술을 덮었다. 라일라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진한 입맞춤 후 베니니타스의 입술이 떨어졌다. 라일라의 눈물 젖은 보라색 눈이 베니니타스를 올려다보았다. 베니니타스는 손으로 라일라의 얼굴을 감쌌다.

“네가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네가 돌아간다고 애원해도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좋아해요.”

베니니타스는 라일라를 다시 끌어안았다. 라일라의 눈물에 셔츠 자락이 젖어들어 갔다. 이제는 꽃길을 걸어도 되는 것이 아닐까. 한번쯤은 욕심을 내어도 되지 않을까.

베니니타스의 마음에 연심이라는 이름의 욕심이 꽃을 피웠다.

“그래서, 그 암컷한테 고백을 못했다? 이거 완전 숙맥이구만.”

“니가 할 말은 아니지. 로보.”

“뭐야, 빅터! 이놈 편을 드는 거야?”

베니니타스는 제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저와는 다르게 좋은 집에서 잘 자란 이들이었다. 로보는 이니투스의 후손으로 모든 수인들이 떠받들었지만 제 과거를 모두 알면서도 저를 경멸하지 않았다. 그는 광폭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의리가 있는 수컷이었다. 제 울타리 안에 있는 것들에게는 한 없이 자비로워지는 그런 이였다.

“야. 가서 그 암컷 허리를 한손으로 꽉 끌어안아.”

로보가 안주를 씹어 먹으면서 장난스런 얼굴을 하고 말했다. 빅터는 골치가 아픈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베니니타스는 실없는 농담일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말하는 거야. 내 아를 낳아도.”

제가 말해놓고도 웃긴지 로보는 깔깔대면서 웃었다. 토스 호무스의 남부 사투리를 익살스럽게 흉내 내는 것에 평소라면 웃어줄 수 있음에도 상황이 심각하여 베니니타스는 웃지를 않았고 빅터는 로보와 유머 취향이 맞지 않기에 로보에게 안주를 던지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너 설마, 블랑카에게 그렇게 했냐?”

광폭했던 로보를 바꾸어놓은 것은 언제나 올곧은 블랑카였다. 블랑카는 늑대개의 신분이기에 수많은 수인들이 반발했었지만, 로보는 그 반발을 누르고 블랑카를 비(妃)로 올렸다. 그리고 블랑카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모두의 인정을 얻어냈다.

“아니. 그랬다가는 나 블랑카에게 맞아 죽었을걸. 내가 이런 유머를 하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라이칸이 날 닮으면 내 책임이라고 입 다물래. 태교에 좋지 않다고.”

“벌써 이름까지 지어줬어?”

블랑카와 로보는 아직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일찌감치 이름을 지어주었다. 강하게 자라면 좋겠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그럼, 우리 아드님이신데. 이정도 이름은 가져야지.”

“딸이면 어쩌려고?”

“괜찮아. 확인했어. 그리고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때. 우리 아이인데.”

로보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실실 웃었다. 빅터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분위기 무르익어 갈 쯤, 취기가 올라서 얼굴이 붉게 물든 로보가 베니니타스를 돌아보았다.

“그 마레 위르 암컷이 좋으면 당장 잡아. 정치적 반발은 걱정하지 말고. 내가 도와줄 테니까.”

베니니타스는 벌게진 얼굴로 로보를 바라보았다. 로보는 그와 어깨동무를 하였다. 알큰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너를 위해서라면 예전처럼 성질 좀 부려주지. 블랑카에게 혼나긴 하겠지만 다 너를 위해서야. 사나이 우정을 위해서!”

혀가 꼬부라져서 발음이 샜지만, 도와준다는 뜻은 분명했다. 베니니타스는 로보를 바라보았다. 비참했던 인생에 찾아온 몇 안 되는 빛이었다. 하나는 동생인 헤르티아이고 다른 하나는 로보와 빅터이고 마지막은 바로 라일라였다. 이들만 있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 * *

베니니타스는 죽은 블랑카의 시신에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믿지 않았다. 로보가 그랬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자신과 라일라의 결혼을 가장 많이 축하해 준 수인이 로보였다.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저와 라일라와의 결혼을 가장 먼저 축복해 주었던 로보였다. 베니니타스는 모든 증거가 로보가 보낸 시카리우스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카넬리안의 보고로 베니니타스의 이성은 끊어졌다. 배신의 충격과 슬픔, 그리고 분노로 베니니타스의 머리가 잠식되었다. 이제 로보가 왜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로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과 라일라와 벤자민과 프리드를 죽였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베니니타스는 로보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았다. 로보를 지옥에 떨어뜨릴 방법만 찾았다. 늑대 일족은 평생을 하나의 암컷만 보고 산다. 그 암컷이 죽어버리면 지옥에 있는 것보다 더 괴로워한다. 늑대 일족에게 반려를 잃는다는 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다.

베니니타스는 교활하게 움직였다. 그는 빅터를 이용했다. 빅터가 오랜 시간 동안 블랑카를 사랑해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베니니타스는 빅터의 질투를 이용했다. 로보는 잘못을 저질렀고, 적합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했고 로보가 사라진다면 블랑카는 그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그를 유혹했다. 로보가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 길을 열어달라고 했다. 빅터의 도움으로 블랑카를 죽일 수 있었다.

“로보는 범인이 아니에요!”

피투성이가 된 블랑카는 입에서 피를 쏟아내면서 외쳤다.

“로보는 범인을 찾고 있어요. 시카리우스 내부에서 이상한 짓을 한 이들이 있다고 조사를 하고 있어요. 로보는 범인이 아니에요. 로보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아요?”

분노한 베니니타스에게 블랑카의 말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설령 로보의 잘못이라도 나에서 끝을 내줘요. 내 아이들. 내 아이들을 건들지…….”

블랑카는 아이들을 건들지 말라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로보는 분노했고, 베니니타스는 렉스의 도움을 받아서 로보를 죽였다. 하지만 로보를 죽였는데도 그는 복수를 했다는 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후련하지도 않았고 정의를 구현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네가 베니니타스냐?’】

바닥에 로보의 머리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경멸이 아닌 웃음을 보이며 제게 악수를 청했던 젊은 시절의 그가 떠올랐다. 장난기 어린 친근한 웃음이 떠올랐다. 로보를 죽이면 후련할 줄 알았다. 라일라와 벤자민과 프리드의 복수를 해서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 * *

베니니타스는 피투성이가 된 라이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순했던 아이가 저렇게 잔혹하게 변하였다. 베니니타스는 검은 감정이 넘실대는 차가운 청회색의 눈동자를 를 보았다. 그제야 로보를 죽이고 제가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슬픔이었다.

그냥 슬픈 것이었다. 이 운명이, 이 모든 것이. 복수에 미쳐서 저지른 제 죄가 모두 슬펐다. 블랑카의 마지막 부탁은 이것때문이었다. 피에 미쳐서 타락해 버린 라이칸을 보면서 제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알았다.

베니니타스는 라이칸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이 제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었다.

라이칸은 강했지만, 경험이 적어서 미숙하기도 했다. 베니니타스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라이칸의 급소를 노리지 않았다. 쉽게 죽어줄 수는 없다. 라이칸이 스티폴로르를 통합하기 쉽도록, 그의 강함을 알려야 하기 때문에, 대등하게 싸우는 척을 하다가 최후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라이칸에게서 로보가 보였고, 블랑카가 보였고, 에리카가 보였고, 라일라가 보였고, 프리드가 보였고, 벤자민이 보였다. 라이칸에게는 제 행복했던 과거가 있었다.

【‘전 스승님이 좋아요.’】

순박하게 웃던 아이를 망쳐 놓은 것은 누구일까? 자신일까, 아니면 로보의 경솔한 배신일까?

【‘로보는 범인이 아니에요.’】

베니니타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블랑카의 말을 조금이라도 믿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한 번 더 이성을 찾아서 로보를 찾아가 따졌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이런 파국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수많은 후회가 밀려왔다. 베니니타스는 로보와 닮은 라이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헉.]

라이칸의 이빨이 제 목줄을 뜯었다. 베니니타스는 이게 제 마지막임을 알았다.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부모님을 잃고 헤르티아와 도망 다니던 시절, 살기 위해서 할 짓 못 할 짓 가리지 않고 모두 뛰어들었던 일, 로보를 만났던 일, 라일라를 만났던 일, 그녀에게 청혼했을 때, 벤자민이 태어났을 때, 프리드가 태어났을 때, 둘의 죽음을 보았을 때, 블랑카의 마지막을 보았을 때, 로보를 죽였을 때, 그리고 지금.

짧지 않은 인생에 한도 많았고 기쁨도 많았다. 후회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건만 막상 죽음이 닥쳐 오니 수많은 일들이 후회가 되었다. 라일라에게 조금 더 일찍 다가갈 것을, 그때, 라일라와 같이 돌아갈 것을, 로보를 한 번만 더 믿어볼 것을. 수많은 후회가 그를 잠식했다.

[베니니타스.]

베니니타스는 흐리한 시야 사이로 라일라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당신은 너무나도 착해서 세상에 더할 나위 없는 악인인 나도 마중을 나와주는 것이구나.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에게 손을 뻗었다.

“라일라. 보고 싶었어.”

[같이 가요.]

베니니타스는 라일라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굴곡 많고 한도 많았던 베니니타스의 삶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

로보 외전

저 멀리 베니니타스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암컷처럼 부드러운 붉은색의 털. 로보는 베니니타스를 불타는 눈으로 응시했다. 제 뒤에는 서로를 끌어안고 벌벌 떠는 라이칸과 에리카가 있었다. 로보는 유독 라이칸에게 눈길이 갔다. 자신과 놀랄 만큼 닮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닮지 않은 아들이었다.

블랑카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의젓하게 제 곁을 지켜주었던 대견한 아들이었다. 라이칸만 보면 한없이 미안해졌다. 블랑카의 죽음에 분노하기 보다는 남은 가족들을 다독이는 것이 우선임에도 그는 제 분노에 취해서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다. 그동안 라이칸은 에리카를 돌봤고, 전쟁 상황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위해서 노력했다. 로보는 아들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이성적으로는 지금 남아 있는 가족을 먼저 챙겨야 함을 알아도 로보의 감정은 그 이성을 넘어서 버렸다.

로보는 똑같이 증오로 불타고 있을 베니니타스를 노려보았다. 그래, 블랑카가 맞았다.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전형적인 늑대였다. 빌어먹게도.

* * *

추수제의 중요 행사에는 라니스타(Lanista: 서열 결정전)가 있었다. 여기 에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서열의 수인에게 뒐룸(Duellum: 서열 쟁탈 싸움)을 신청하여 이기게 되면 서열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족의 수장 자리를 결정하는 것도 바로 이 서열 쟁탈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늑대 일족만은 다른 승계 과정을 거쳤다.

늑대 일족의 수장인 루프스의 자리는 언제나 이니투스의 후손들에게 허락된 것이었다. 다른 수인들은 셀레네님을 도운 이니투스를 향한 여신의 가호가 작용했기에 그 후손들이 강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니투스의 후손들을 부러워하였다. 보장된 권력을 부러워하였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로보는 전대 루프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늑대 일족이 자신의 부인에게 잘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부인에 대한 사랑이 아이들에게 이어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로보의 아버지인 전대 루프스는 아이들의 싸움을 부추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루프스의 자리는 하나고 전대 루프스는 자신의 아이들 중 살아남는 아이에게 루프스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자신도 그렇게 이 자리에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형제들은 가장 약한 형제나 아니면 될성부른 싹이 보이는 어린 동생들을 제거하려 들었다. 토스 호무스의 궁에서 살아가는 것은 생존을 향한 투쟁에 가까웠다. 전대 루프스가 아끼는 것은 가장 강한 자신의 자식과 자신의 비(妃)뿐이었다. 로보는 그런 아버지의 냉대 속에 태어난 막내아들이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로보는 루프스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둘째 형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형제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 약한 척을 하며 둘째 형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첫째 누나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돌격가 성향의 둘째 형보다는 영악하여 계략을 쓸 줄 아는 첫째 누나 쪽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승계가 끝나고 나면 루프스의 자식이라는 것을 영원히 감추고 궁 밖에서 조용히 살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녀에게 몸을 의탁했다. 로보는 첫째 누나의 앞잡이를 하였지만 그녀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로보의 어린 시절은 불안함과의 싸움이었다.

첫째 누나는 결국 둘째 형을 이겼다. 그리고 로보의 예상대로 그녀는 만만하게 보고 있던 막냇동생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로보는 첫째 누나의 아래서 온갖 막말과 하대, 그리고 경멸을 받아가면서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러내 그녀의 목줄을 끊었다.

첫째 누나의 명령으로 수없이 비열한 짓을 했지만, 이때만큼 기분이 더러운 적도 없었다.

그렇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로보가 형제들을 물리치고 자격을 갖추자 이제는 아버지가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늑대 일족만의 관례라면 관례였는데, 보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하여 다른 일족과 달리, 루프스로 결정된 자에게 심각한 결격사유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강함만 보장해준다면, 라니스타에서 뒐룸으로 몰아내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물러났다.

불행히도 로보의 아버지는 권력욕이 강한 자였고 그는 명백하게 저보다 실력이 강해 보이는 아들을 견제했다. 아들이 저를 죽일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로보는 처음 한두 번은 참았다.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드디어 아버지에게 뒐룸을 신청했다. 로보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던 강함을 가지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결국 아들에게 철저하게 패배했다. 패잔병처럼 제 앞에 널브러져 있는 생물학적 아버지를 보면서 드는 감정은 정말 복잡 미묘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걸했다. 어머니는 모성이라도 있었기에 아이들의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아도 사랑은 충분히 주었었다. 로보는 그 길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별장으로 내쫓았다. 로보는 열아홉의 나이로 루프스의 자리에 올랐다.

“축하한다.”

루프스의 자리에 오른 그날 빅터가 축하 인사를 했다. 루프스는 건성으로 사절단의 인사를 받다가 친구를 만나자 그제야 반색을 했다. 베니니타스는 무슨 일로 바쁜 것인지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먼저 보내온 참이었다.

“이게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축하라면 받아야 하지 않겠어?”

로보는 빅터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다 빅터의 뒤에 서 있는, 개 수인치고는 체격이 좋은 하얀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보였다. 로보는 술잔을 잡은 손으로 그 암컷 수인을 가리켰다.

“누구냐?”

“내 사촌의 정혼자의 친척이자 내 소꿉친구. 블랑카. 늑대개야.”

“늑대개?”

어쩐지 개 수인치고는 체격이 큰 편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루프스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눈에 띄게 아름다운 미인도 아니었다. 그냥 조금 예쁜 정도였다. 그런데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는 암컷이었다.

로보는 그저 기분 탓이라 생각하고 술을 마셨다. 로보는 그날 빅터와 대작을 하면서 진탕 술에 취해서 잠이 들었다. 잠이 들면서도 잠깐 스치듯이 보았던 블랑카가 뇌리에 떠올랐다.

* * *

블랑카를 다시 만난 것은 마레 위르와 거래한 수인들을 처형할 때였다. 그들 중 개 수인이 있었는데, 각 일족들에게 처형에 관한 일을 일임받은 뒤의 일이었다. 로보는 어떤 처형으로 본보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를 곰곰이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안 됩니다. 블랑카님!”

어떻게 처형을 해야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로보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눈썹을 치켜들었다. 문 밖에서 몸싸움이라도 벌어진 것인지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봐야 하나 고민할 그때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엉망이 된 머리를 하고 있는 백발의 체격이 좋은 암컷이 씩씩대면서 들어왔다. 로보는 그 암컷이 빅터의 소꿉친구인 블랑카임을 알아보았다.

“루, 루프스님. 블랑카님께서 알현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범도 지키지 않으려고 하시기에.”

“그렇게 되면 너무 늦어서 그럽니다. 루프스님!”

블랑카는 씩씩거리면서 아직도 제 팔에 매달려 있는 궁관, 에른을 떨쳐 내었다. 로보는 에른에게 나가보라 손짓을 했고 그는 좋지 않은 표정으로 뒤를 힐끔거리면서 나갔다.

“무슨 일로 왔는가?”

“마레 위르와 거래 건으로 처형당할 수인들의 구제를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블랑카는 대강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로보는 등받이 뒤로 등을 기대었다.

“법에 명시된 내용이다. 마레 위르에게 이득을 주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그들은 마레 위르들에게 이득을 준 것이 아니라 이득을 받았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각 일족의 땅에서 내쫓겨 겨우 포트리스의 터전을 잡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불쌍히 여긴 마레 위르가 단지 그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준 것뿐입니다.”

“그게 바로 마레 위르들의 이득이다. 마레 위르에게 호의적인 수인들이 늘어나면 그들이 다시 예전과 같은 폭거를 부리겠지. 안 그렇겠나?”

“그렇게 될 것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없지 않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예상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레 위르를 향한 증오심에 근간을 둔, 마레 위르를 향한 수인들의 경계심을 세우기 위한 형식적인 처벌일 뿐 법에 근간한 처벌이 아닙니다!”

블랑카는 흉포하다고 소문난 로보의 앞에서 겁도 없이 그의 잘못을 꼬집었다. 로보는 심기가 불편한 것인지 살기를 내뿜었다. 블랑카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마레 위르에게 협력을 하게 되어 우리 스티폴로르에 위험을 끌고 온다면, 그들을 그런 상황으로 몬 자들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의 태반은 동물화를 겪고 있는 환자들입니다. 그들을 그곳으로 몬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을 벼랑으로 몰아서 스티폴로르에 위험을 끌고 온 자들도 결국은 책임이 있습니다.”

“뭐라?”

“바로 루프스님 아니십니까? 수인들이 강한 자를 수장으로 삼는 것은 강함을 중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루프스님은 그 가치를 지키셨습니까? 이니투스님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고귀한 전통을 지키셨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루프스님은 오히려 그런 자들을 벼랑으로 내모셨습니다. 만일 스티폴로르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것은 루프스님의 행동으로 기인한 것입니다.”

블랑카는 말을 골랐다.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서 마레 위르에게 식량을 받아서 간신이 목숨을 부지한 수인들이 아니라. 그들을 그 지경으로 몰고 간,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잊으신 루프스님이십니다. 그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법을 어겼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너! 너!”

로보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성난 걸음으로 내려왔다.

블랑카는 로보의 손찌검이든 뭐든 견딜 생각이었다. 억울한 수인들을 구할 수 있다면야 뭐든 할 수 있었다. 로보의 손이 높이 올라갔다. 블랑카는 저 손이 제 볼에 떨어질 것임을 알아도 눈을 감지 않고 오히려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네년이!”

로보는 블랑카의 한없이 당당한 눈을 보면서 팔을 부르르 떨었다. 티 없이 맑고 당당한 눈은 계속 제가 잘못을 했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로보는 높이 치켜든 팔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실 줄 아는 것은 이런 폭력뿐이시지요.”

블랑카는 비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그 강한 힘으로 약자를 찍어 누르고 짓밟으면서 제 권력을 공고히 하시고 반발을 누르시지요. 하지만 그 끝은 선대 루프스님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피는 피를 불러올 뿐,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블랑카는 로보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로보에게 뺨을 내밀었다.

“때리십시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을 겁니다. 때로는 폭력으로 꺾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저를 묶고 고문하셔도 저는 제 말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루프스님도 할 줄 아는 것은 그것밖에 없으시니 해보시려면 해보셔도 됩니다.”

로보는 블랑카의 말에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로보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윽.”

로보가 블랑카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래, 네년이 원하는 대로 그놈들의 목숨은 살려주마. 벌을 내리는 데는 사형 말고도 다른 방법도 많거든.”

로보는 목이 졸려 하얗게 질려가는 블랑카의 목을 놓아주었다. 블랑카는 신선한 공기를 급하게 들이마셨다.

“그놈들은 냉궁에 가두겠다.”

“냉궁이요!”

서서히 죽어가라는 뜻이었다. 로보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냉궁. 하지만 기회를 주마. 나를 설득해 보아라. 내가 너에게 설득당하면 그들을 풀어주지.”

로보는 블랑카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네 독사 같은 혀로 나를 설득해 보려고 노력을 하든지, 그 볼품없는 몸을 이용해서 나를 유혹해 보든지. 그건 네 마음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빠른 시일 내에 나를 설득하지 못하면 그들은 냉궁에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물론 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카날리스 호무스로 돌아가면 그들은 원래대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블랑카는 비열하게 웃는 로보를 주먹을 움켜쥐고 올려다보았다.

“어디 한번 노력해 봐. 잡종.”

* * *

로보는 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블랑카를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일까. 처음에는 블랑카를 괴롭히기 위해서 벌인 일이었다. 그녀가 좌절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블랑카는 포기하지 않고 저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겁을 주어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제 신념을 주장했다.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베니니타스, 빅터 외에 몇 되지 않는지라 로보는 그녀에게 흥미를 느꼈다.

가랑비처럼 젖어가던 마음은 어느새 그녀에게 제 괴로웠던 과거를 스스로 털어놓게 만들었다. 블랑카는 그를 위로해 주었다.

【‘당신도 그저 늑대 수인일 뿐이에요.’】

그 말이 로보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로보는 그제야 자신이 블랑카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답지도 않고 그렇다고 몸매가 뛰어나지도 않은 평범한, 기가 세고 정의관이 투철하여 겁 없이 대들기를 서슴지 않는 이 암컷에게 빠져 버린 것이다.

로보는 사실 그녀를 동경했다. 늑대개로 태어나 온갖 차별을 받았음에도 자신과 같은 약자를 위해서 행동하는 블랑카를 동경했다. 약자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저보다 더 약한 자를 짓밟으며 살아온 자신과는 다른, 찬란하게 빛나는 암컷이었다.

블랑카를 닮고 싶어서 로보도 변해갔다. 블랑카의 충고대로 빈민들을 구제하려 했고 마레 위르와 혼혈인 수인들의 차별 문제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물론 블랑카가 구제하고 싶어 했던 이들은 풀어주었지만, 그랬다가는 블랑카가 원래의 땅으로 돌아갈까 봐 로보는 그들을 치료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이용해서 블랑카를 붙잡아 놓았다. 로보는 궁의 정원에 앉아 풀을 뜯으며 책을 읽는 블랑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블랑카.”

“왜요? 루프스님.”

블랑카는 책을 덮었다. 로보는 최근 많이 변했다. 블랑카는 자신의 설득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난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

블랑카는 로보의 과거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다 없앨 수 있을까?”

“없어요.”

블랑카의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애초에 죄를 없애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에요.”

블랑카는 로보와 눈을 마주보았다.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끝까지 따라다니는 것이죠. 죄를 지은 수인이 해야 할 일은 피해자를 위해서 진심으로 사죄하고 사과를 하는 것 외에는 없어요. 사과는 피해자를 위한 것이지 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니까요. 끊임없이 속죄하며 자신의 죄를 스스로 갚으며 살아가야 해요.”

“난…… 방법을 모르겠어…….”

“알고 계세요. 너무 기초적인 것이라 스스로 생각을 못하실 뿐이에요.”

“알잖아. 내가 멍청하다는 것. 그러니까, 블랑카 네가 알려주면 안 돼? 넌 현명하잖아.”

“제가요? 저도 미숙한 수인이에요. 제가 어떻게.”

“나보다는 현명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내 스승이 되어줘.”

로보는 블랑카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화상 자국이 있는 블랑카의 손은 느낌이 조금 이상했지만, 그만큼 따뜻했다. 로보는 블랑카를 닮고 싶었다. 블랑카만큼 고귀하게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와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로보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나를 로보라 불러. 그게 내 이름이야.”

“예? 이미 버리신 이름을 왜. 제가?”

“너에게 진정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는 동안은 나도 루프스가 아닌 그저 하나의 늑대 수인일 뿐이야. 그러니, 로보라고 불러.”

블랑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보는 그렇게 블랑카와 시간을 보냈다. 블랑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갔다. 로보는 자신의 불찰로 죽은 이들에게 사죄했고 그들에게 보상을 했으며, 약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정책을 짰다. 로보가 조금씩 변해갈수록 블랑카를 향한 그의 사랑도 커져 갔다.

“비 오네.”

블랑카는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폭풍이 밀려오니 당연한 일이었다.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사랑해.’】

블랑카는 허둥지둥 토스 호무스를 떠나오면서 들었던 그 말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로보가 제게 반지를 내밀면서 제 마음을 고백했다. 블랑카는 로보의 고백을 듣자마자 답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이곳, 돌아가신 부모님과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블랑카는 아직도 쿵쾅거리면서 뛰고 있는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폭군도 이런 폭군이 없었다. 하지만 살려야 할 이들이 있기 때문에 그와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벽창호 같던 그는 점차 변해갔다. 그를 알아갈 수록 불쌍한 수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빅터에게 들은 그의 과거는 차별받던 제 과거보다 더 불행했다. 블랑카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부모님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로보는 부모에게마저도 버림받은 수인이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하여 강함이 최선이라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블랑카는 로보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로보는 변해갔다. 모성애인지 아니면 동정심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에 그녀는 흔들렸다. 그리고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는 그의 은근한 구애에 마음이 떨렸다. 그녀의 마음에 봄바람이 불어왔다.

“그래도. 그건 아니야.”

자신은 혼혈이었다. 로보의 정성에 마음이 흔들려 그의 옆자리를 욕심내게 되면 필연적으로 다시 예전처럼 경멸을 받을 것이었다. 블랑카는 수인들의 시선이 무서웠고 그로 인해서 로보가 피해를 입게 될까 봐 두려웠다.

똑. 똑. 똑.

누군가 규칙적으로 노크를 하였다. 블랑카는 누가 찾아왔나 싶어 문을 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블랑카는 문 앞에 서 있는 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로보가 비를 쫄딱 맞은 채로 손에 꽃을 들고 서 있었다. 블랑카는 로보가 들고 있는 꽃이 예전에 제가 예쁘다 했던 그 꽃임을 알아보았다. 절벽에 딱 한 송이 피어 있던 모습이 참 고결해 보였었다.

로보는 블랑카에게 비에 젖지 않은 꽃을 내밀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주제에 꽃은 어찌나 애지중지하였는지 어디 하나 흠집도 없었다.

“내 말이 장난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서 가져왔다. 이것 외에는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로보는 블랑카가 제 마음을 장난으로 받아들인 것인가 싶었다. 제가 멍청하여서 거절을 못 알아들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로보는 블랑카가 도망간 것이 이것을 그저 장난으로 생각했던 것이기를 바랐다.

“나는 아둔하고 멍청해서 어떻게 해야 진심으로 느껴지게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블랑카의 도망은 거절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로보는 이곳 왔다.

“나를 변하게 해준, 다른 방법으로 사는 법을 알려준 네가 좋다. 연모한다. 내가 많이 부족함을 알지만,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나? 내가 너와 동등해져 보도록 노력하겠다. 나는 멍청하니까, 나에게 조금만 도움을 주면…….”

로보는 횡설수설했다.

“너를 지켜주고 평생 아껴주겠다. 늑대 일족은 평생 한 암컷만을 보고 살아감을 알지 않나. 그러니…….”

“일단 들어오세요. 감기 걸려요.”

블랑카가 로보의 팔목을 잡았다. 싸늘한 로보의 몸에 블랑카의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로보는 블랑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로보는 그것에서 희망을 보았다.

* * *

“그래서 내가 네 아들놈의 스승이 되어달라고?”

로보는 잠든 라이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정이 고된 것인지 라이칸은 울피누스 호무스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베니니타스는 로보의 앞에 앉았다.

“그래. 내 친구 놈 중 네가 가장 똑똑하잖아. 너만큼 일반 수인들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녀석도 없고. 무엇보다 네 옆에는 라일라가 있잖아. 그러니까 네게 부탁하는 거야.”

“그게 무슨 이유야?”

베니니타스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로보는 내내 라이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쏙 빼닮은 라이칸은 성품은 블랑카를 닮았다. 올곧고 자비로웠다. 로보는 라이칸이라면 이 스티폴로르에 변화를, 안정을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았다.

【‘있잖아요, 아빠. 마레 위르랑 수인 사이에는 정상적인 아이들이 태어나요. 그리고 이제껏 다른 일족끼리 사랑에 빠지는 수인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났을 수도 있는데 이제껏 문제가 된 적이 없어요. 그러면 어쩌면 우리는 외관이라는 것에 속아서 서로 반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모두 같은 종이 아닐까요?’】

라이칸은 영특했다. 자신과는 달랐다.

“나는 수인들이 땅을 갈라서 서로를 배척하는 상황을 없애고 이니투스님의 시대처럼 서로 화합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

라일라가 말해준, 혼란에 빠지기 전의 대륙의 이야기를 들으며 품은 꿈이었다. 로보는 대륙의 것이 모두 옳다고는 보지 않았다. 누구에게 태어났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그 신분제라는 것이 옳다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대륙의 것도 옳은 것들이 있었다.

“포트리스의 마레 위르와 서로 화해하고 그들을 받아들여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국가라는 것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내 대에서는 불가능하겠지.”

자신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라이칸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라이칸은 똑똑했고 남을 상처 입히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렇지 이미 실력은 그 또래 이상이었다. 라이칸이라면 훗날 루프스의 자리에 올라 이니투스님의 사상처럼 약자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이 아이가 그런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해. 그리고 그런 세상이 이 아이의 꿈이야. 그래서 나는 이 아이를 위해서 걸림돌을 치워놓을 거야. 그러니 라이칸은 너에게 약자의 삶을 배우고 라일라에게 넓은 식견을 배워서 타인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기를 바라.”

로보는 베니니타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 부탁할게, 내 아들을. 내 아들의 스승으로서 올바른 길을 안내해 줘.”

베니니타스는 멋쩍게 웃었다. 로보는 친구였기에 그를 믿을 수 있었다. 제 아들을 맡길 수 있었다.

* * *

로보는 아들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믿었던 친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라일라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시신에 늑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로보는 범인을 잡기 위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시카리우스 쪽에서 사고를 친 것이다.

로보는 플로서스를 불러다가 시카리우스 중 이탈자가 있는지 물었다. 플로서스는 묘하게 떨면서 며칠 전부터 조사를 해보았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다고 보고를 하였다. 로보는 턱을 쓸었다. 제가 나섰다가는 범인이 도망갈지도 모르기에 로보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시카리우스의 총책임자인 플로서스와 시카리우스 최고 베테랑인 라울, 둘만을 이용했다. 로보는 알현실을 빠져나가는 플로서스를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독단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플로서스는 마레 위르를 증오하는 수인들의 우두머리나 마찬가지였다. 로보는 라울을 불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에른이었다. 그는 하얗게 질린 라이칸을 안고 있었다. 라이칸이 전한 소식에 로보는 얼어붙었다. 제 영혼이 죽어버리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로보는 절규했다.

단장이 끊어지는 고통이라는 것이 이런 것임을 분명하게 알았다. 로보는 블랑카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었다. 지켜준다 해놓고 지키지 못한 블랑카에 대한 미안함과 괜히 저와 엮여서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 자신에 대한 역겨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찾아오는 것은 베니니타스를 향한 배신감이었다.

저를 믿어주지 못한 그가 원망스러웠다. 저와 그 사이의 신뢰가 겨우 이 정도였다는 것에 로보는 절망하고 분노했다.

로보는 베니니타스와 일전을 벌이기 전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이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자신은 못난 아버지였다. 제 감정에 취해 아이들을 내팽개친,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죄를 지은 아버지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든 결착을 지어야 했다. 로보는 저를 향해 발을 구르는 베니니타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범인을 찾기보다 베니니타스에게 달려가서 그를 위로해 주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면, 친구로서 그를 달래주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로보는 부질없는 가정에 스스로에게 냉소를 흘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인생에도 만약은 없다. 그저 선택만 있었다.

로보는 제 선택의 결과를 마주했다. 이제 그 결착을 지어야 했다. 로보는 베니니타스에게 달려갔다. 이렇게 되어버린 결과에 한없이 슬펐다.

그의 눈물이 땅에 떨어졌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