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늑대왕 루프스-13화 (13/16)

Chapter 13. 거짓과 분노

포트리스는 슬퍼했다. 하워드 형제와 같이 스티폴로르의 화합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 모두 하워드 형제가 이 포트리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 알렉스는 무력으로, 그리고 프레드릭은 방어마법과 뛰어난 지식으로 포트리스를 위기에서 여러 번 구했었다.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전쟁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던 사람들도 들고 일어났다. 전쟁은 소모적이고 피해만 클 것이라고 필립과 페드로가 사람들을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그들의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포트리스는 이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려 하고 있었다.

헤임달은 그들을 위한 배를 손질하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멍청한 바론이 하워드 형제의 소식을 바로 전서구로 전해주는 바람에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빠르게 시작되려 했다.

“형님, 우리 배 하나는 숨겼어!”

알폰소가 손을 흔들면서 걸어왔다. 옆에서 사라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배를 숨기는 데에 세라의 능력이 필요해서 알폰소와 같이 보냈지만 워낙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은지라 한참을 다투고 온 듯 보였다.

“형님, 도울 일은 없소?”

알폰소는 배에 올라탔다. 배를 이용해서 토스 호무스의 뒤를 친다는 렉스의 작전은 꽤나 대담했다. 애초에 스티폴로르는 섬임에도 다른 곳과 교류가 없었기에 대륙의 내륙국처럼 배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기껏 어선 정도가 그들이 가진 배의 전부였다. 해안선의 대한 경비는 당연히 소홀했다. 그 덕분에 이런 작전이 가능한 것이다.

수인들 군사력의 대부분은 일족간의 경계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다. 토스 호무스는 스티폴로르의 서쪽 끝에 위치하여 뒤에는 바다를 두고 있었다. 배를 쓰지 않는 수인의 입장에서는 후방으로의 침입이 불가한 천하제일의 요새였다. 하지만 그 적이 인간들이 된 이상, 그들의 지리적 이점은 오히려 단점이 될 터였다.

“형님. 근데, 형님도 동행할 거야? 렉스가 형님의 항해술을 높이 치니 권유를 할 것 같던데?”

“아니, 난 안 가. 렉스에게 나중에 기습작전이나 식량 배급 쪽을 돕는다고 말해놨어. 우리 본거지는 여기야. 여기에 있어야 나중에 무슨 일이 터져도 해결 가능해.”

헤임달은 자꾸 목걸이를 내놓지 않으려는 헬라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그 돌조각이 뭐가 좋은 것인지 말만 꺼낼라 치면 발톱을 세우니. 헬라를 위해서라도 이곳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형. 레이라는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죽여야지. 란텔이 말하기를 프레드릭이 죽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고 했으니. 혹시 몰라서 아는 아편 받아먹는 놈들에게 프레드릭과 알렉스를 발견하면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놓았다고 하나, 형제 놈들이 살아 있다고 판단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면 안 돼.”

포트리스의 사람들의 쓸데없는 배려심은 이런 혼란한 상황에도 발휘되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레이라를 걱정하여 그녀에게 하워드 형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다. 레이라가 산후조리를 위해 주로 집에 있었기에 그녀의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만 입을 조심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알려질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레이라가 프레드릭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서 작전에 초를 치는 것은 막아야 했다. 활활 타는 불에 장작을 더하면 더했지 물을 끼얹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 장작 역할에는 레이라가 제격이었다.

헤임달은 출정이 얼마 남았는지를 손으로 꼽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바빠서 안 되겠고. 내일로 하자. 너는 레이라의 집을 감시해. 레이라가 이상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까.”

“형님 혼자서 배 손질할 수 있겠소? 이제 나이도 꽤 되면서 말이야.”

“헛소리 말고 어서 가서 감시나 해. 그리고 나 그 정도로 늙지는 않았다, 알폰소.”

헤임달은 늙었다는 말을 듣자 언짢은 기색으로 그를 타박했다. 알폰소는 낄낄거리며 배에서 내려왔다. 알폰소도 오를레앙 남작에게 동생을 잃었다. 뒷골목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면서도 동생의 출세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 넣어 동생을 남작의 시종 자리에 넣었다. 남작은 제 정적을 제거하려고 알폰소의 동생을 이용했지만, 곧 발각되었다. 남작은 알폰소의 동생에게 제 죄를 뒤집어씌웠고 알폰소의 동생은 귀족을 해하려 한 죄로 열넷의 나이에 형장에서 목이 잘렸다. 알폰소는 분노했다. 그러다 헤임달을 만나 함께 스티폴로르에 왔고 그는 남작에게 복수하려는 헤임달을 돕는 것이었다.

알폰소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잔혹한 짓을 하고서도 오를레앙은 여태껏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다. 무심한 하늘이었다. 최소한 오를레앙이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았다면, 하늘이 그 벌을 내려주었다면 자신들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알폰소는 터덜터덜 레이라 집 쪽으로 향했다.

레베카를 돌보느라 내내 집 안에만 있던 레이라는 밖이 심하게 어수선한 것 같아 베키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베키는 고개를 저으며 별일 없다고만 하였다. 그런 베키의 표정이 석연치 않아 레이라는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프레드릭이 무사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여기에서 무슨 일이 난들 걱정 없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레베카는 손목의 문양이 3분의 1쯤 지워졌던 그때, 그 가슴 철렁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레이라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날 잠도 자지 못하고 손목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양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레이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프레드릭은 아직까지 무사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기에 레이라는 레베카를 침대에 눕히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를 대신해 집안일을 봐주고 있는 베키 역시 그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라가 이 소식을 알면 정말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숨기고 있어야 하나 싶기도 했다. 나중에 알면 그만큼 더 충격이 클 테니 말이다.

“레이라, 안에 있나?”

렉스의 목소리에 베키가 얼른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어두운 얼굴을 한 렉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오늘 레이라에게 형제의 죽음에 대해 알리러 온 것이었다. 그들 형제와 가까웠던, 그리고 그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오지 못한 자신이 이 소식을 알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슨 일이세요, 렉스경?”

렉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한 표정의 레이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벨라토르가 프레드릭과 알렉스를 살해하였으며 그들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것.

레이라는 렉스의 말을 믿지 못했다. 레이라는 다급하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문양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에요, 렉스 경! 프레드릭은 살아 있어요. 보세요! 프레드릭이 제게 남, 남긴 건데…….”

레이라는 횡설수설했다. 프레드릭은 제게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 마법이 아직 온전한데 그가 죽었다니?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레이라는 고개를 저었지만, 렉스의 눈에는 그녀가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렉스는 레이라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다. 내 불찰이다. 정말 미안하다.”

렉스가 눈물을 보이자 레이라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베키도 뒤에서 눈물을 훔쳤다. 렉스는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는 집을 나섰다. 제가 여기 더 있어봐야 레이라에게는 고통뿐일 것이었다.

베키는 레이라가 혼자 있고 싶어 할 것 같아 먹을 것 좀 가져오겠다는 이유로 집을 나갔다. 혼자 남은 레이라는 손목을 바라보았다.

‘프레드릭은 나한테 거짓말은 안 해.’

라이라는 프레드릭을 믿었다. 벨라토르가 프레드릭을 죽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단 벨라토르가 그를 공격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잠깐 문양이 지워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프레드릭은 벨라토르를 피해 몸을 숨긴 것이 틀림없었다. 레이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아직 살아 있는 거야…….”

레이라는 안도했다. 그리고 당장에 렉스를 찾아가 진상을 설명해 주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쾅. 쾅. 쾅!

“레이라!”

헤임달의 목소리였다.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경고를 떠올리고는 덜컥 겁을 먹었다. 혹시나 싶어 레이라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레베카를 챙겨 안고는 창문 틈으로 바깥을 지켜보았다.

헤임달은 혼자가 아니었다. 알폰소와 헬라, 세라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레이라는 알폰소에 손에 들린 굵은 밧줄을 보고 비명을 삼켰다.

“형님. 반응을 안 하는데?”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레이라는 숨을 죽였다. 천만다행으로 레베카는 이 소란에도 깨지 않고 잘 자고 있었다.

“충격받아서 기절한 거 아니야?”

헬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문을 따고 들어가자. 기절한 거라면 더 잘됐지. 자살로 위장하기 쉬울 거 아냐?”

레이라는 헤임달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혼자서 저들 넷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고 더군다나 지금은 레베카가 있었다. 레이라는 문을 따기 위해서 문고리를 거칠게 돌리고 있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부엌으로 달렸다. 부엌에서 레베카를 위한 물건을 빠르게 챙기고 레이라는 바닥의 깔개를 들추었다.

“클라위스.”

바닥에 감춰져 있던 지하실의 문이 나타났다. 레이라는 그 안으로 들어가 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깔개를 문 위에 얹어두고 문을 닫았다. 레이라는 레베카를 안고 지하실 문 바로 아래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느새 집 안으로 들어온 헤임달 일당이 쿵쿵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드릭이 옳았다. 헤임달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는 것이었다. 레이라는 레베카를 꼭 끌어안았다.

어디 있는 거야, 프레드릭. 제발, 우리를 구해줘.

레이라는 눈물 섞인 기도를 프레드릭에게 전했다.

* * *

유채의 왼손 약지에는 블랑카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루프스는 그 반지를 힐끔 바라보았다. 별것 아닌 것에 두근거렸다. 유채는 저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루프스의 시선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루프스를 속이기 위해서 연기를 하느라 입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유채는 되도록 루프스 앞에서 생글생글 웃기 위해서 노력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작은 미소에도 설레어 하는 제가 한심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안해하고 노심초사하는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절대 이런 가슴 벅찬 감정은 가질 수 없어서였다.

“입맛에는 맞나?”

“괜찮은 것 같아요.”

유채는 루프스의 물음에 부드럽게 대답했다. 루프스는 이런 평범한 일상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이런 순간만 영원히 계속 되었으면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채는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이 일상도 그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시카리우스에게 들어오는 보고는 별 특별한 것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가져오는 것들도 그 붉은 루비 조각이 아니었다. 되도록 미노르 호무스에 가기 전에 일을 끝내고 싶었기에 루프스는 시카리우스를 닦달하는 중이었다. 제가 저지른 짓을 사죄하기 위해서도, 유채의 행복을 위해서도 그 물건이 필요했다.

유채는 서늘한 나무그늘 아래서 입맛에 맞지도 않는 음식을 씹어 삼켰다. 심사숙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말도 있었다. 조금 조급하게 결정을 내린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계속 고민만 하며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나았다.

루프스가 미노르 호무스로 떠난 바로 그 다음 날 움직일 것이다. 유채는 울피누스 호무스에 갈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 혹시나 걸어서 이동하게 될 것을 대비하여 로브와 돈이 될 만한 패물들도 챙겼다. 유채는 제 앞에서 점심을 같이하고 있는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잠깐.”

루프스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유채는 주춤거렸다.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저 남자가 의심을 하지 않게 될 때까지 조금만 더. 루프스의 손가락이 입가에 닿았다. 그는 유채의 입술 옆에 묻은 소스를 손으로 닦아내었다.

“입가에 묻었다.”

루프스는 냅킨에 손을 닦아내었다. 유채는 속에서 올라오는 역겨움을 억누르며 억지로 웃었다.

“고마워요.”

루프스는 유채의 옅은 미소를 보면서 가슴이 떨리면서 불안했다. 한 발만 더 내디디면 곧 깨어질 것 같은 살얼음 같은 분위기였다. 제게 여지를 내어주는 것 같기는 하였다. 분명히 제 앞에 웃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는데, 그게 어색해 보였다.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제게 그렇게까지 힘들게 맞춰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루프스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바람이 불면 흩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가득한데, 그렇게 말해 버리면 이 잠시의 평화로운 일상도 날아갈 것 같았다. 유채의 속마음이 무엇이든 간에 그저 그녀와 제가 공유하는 일상이 좋아서 루프스는 입을 다물었다. 불안해하며 안달복달하는 것은 저 하나면 그만이었다.

“처음에는 향신료 때문에 힘들었는데, 이제는 먹을 만하네요. 적응이 된 걸까요?”

“네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다. 매번 먹지를 못해서 말라가던 것이 걱정이었는데.”

유채는 전보다 훨씬 살이 붙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기준에는 심할 정도로 말라있었다. 여름이 다가와서 훤히 드러난 팔은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 루프스는 부러질 것 같은 유채의 팔이 불안하여 궁의 요리사들을 닦달했다. 그리고 유채가 뭐 하나라도 맛있게 먹으면 그 요리를 만든 요리사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내렸다.

“나 그렇게까지 마른 편은 아니에요. 평소보다 마른 것은 맞은데,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내 기준이나 다른 수인들 기준에는 너는 너무 말랐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군.”

“그거 칭찬으로 받을게요.”

유채는 작게 웃었다. 그늘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 여름이 다가오는 날씨임에도 꽤나 시원했다. 한국이면 이맘때 덥다고 엄마랑 에어컨 트는 문제로 한참을 싸웠을 텐데 말이다.

“여기 여름은 꽤나 시원한 편인가 봐요. 영국과 비슷한 위치라 그런가?”

“이니투스님이 더운 것을 싫어하셔서 셀레네님의 가호가 내린 것이다. 신의 힘으로 유지되는 날씨다.”

“예? 뭐라고요?”

유채는 셀레네를 정말로 한심하게 생각했다. 한 지역의 기후를 바꿀 힘이 있다면 그놈의 조각이나 처리하는 데에 신경 쓸 것이지 딴 일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그리고 언제는 인간들의 일에 간섭하고 세계의 법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했으면서 이런 사소한 것에 힘을 쓴 셀레네가 정말로 한심했다.

루프스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짓는 유채의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유채는 갑자기 호탕하게 웃는 루프스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후식을 가져오던 궁녀가 기겁을 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자 루프스는 겨우 웃음을 참고는 손짓을 하였다. 궁녀는 탁자 위의 빈 접시를 치우고 얼음을 띄운 시원한 차와 과자를 내려놓았다. 그 사이에도 루프스는 계속 웃고 있었고 유채는 바보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만 웃죠. 뭐가 웃기다고 웃는 거예요?”

“아까 셀레네님을 들며 한 말은 농이다. 사실 이것 때문이지.”

루프스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아쿠아마린으로 만들어진 세공품을 가리켰다. 유채는 그냥 장식품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을 살펴보았다.

“앗. 차가워.”

유채는 장식품을 손으로 건드려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찬 냉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레 위르들이 마법으로 만들어낸 물건이지. 시동어를 말하고 놔두면 일정 거리까지 냉기가 퍼져서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마법 자체도 어렵고 유지하는 데에 마력석도 필요해서 대량 생산은 힘들다고 하더군.”

“마법은 정말 편하네요. 우리 쪽에도 공기를 시원하게 만드는 물건은 있지만 그건 이렇게 작지 않아서 휴대하기는 힘들거든요.”

유채는 그것이 정말 탐났다. 여름에 가지고 다니면 땀도 덜 나고 좋을 것 같았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도 된다. 아버지가 마레 위르의 물건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어서 같은 것이 몇 개 더 있다. 나도 어릴 적에 마법에 관심이 많아서 몇 개 구한 게 있고.”

“그쪽이 마법에 관심이 있어요?”

유채는 세공품을 내려놓고 물었다.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아버지께 졸랐었는데, 나는 재능이 눈곱만큼도 없다더군.”

“수인의 고유 속성을 다루는 건 마법과는 아예 상관이 없나 봐요?”

유채는 쿠키를 집어 먹고 차도 한 모금 마셨다.

루프스는 유채와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꿈만 같았다. 제가 말하는 것에 관심을 보여주고 조곤조곤 답해주면서 그 나이대의 소녀 같은 행동을 보여주는 유채가 정말 사랑스러웠다. 루프스는 이 시간이 계속 되기를 바랐다.

“고유 속성도 마법의 일종이긴 하다. 하지만 라일라님의 말에 따르면 조금 다르더군. 마레 위르들의 마법이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서 자연의 마력을 조종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마력 없이 자연의 마력을 바로 다루는 것이다.”

“차이가 뭔데요?”

“다양성과 정교함의 차이랄까? 마레 위르들은 원래의 속성과 다른 마법도 부릴 수 있고 정교한 컨트롤로 마법의 효능을 높일 수 있다면 우리는 그저 그 속성의 본래 역할만 사용 가능하다. 비유하자면, 마레 위르들은 칼로 모양을 내어 자를 수 있다면 우리는 주먹도끼로 내리 찍는 수준인 것이지.”

“말하는 것 보면 공부 잘했던 것 같네요.”

“네가 생각하는 수준 이상으로는 잘 했을 것이다.”

“뭐야? 자화자찬이에요?”

유채는 루프스의 농담에 저도 모르게 장난기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너는 잘했나? 열심히 책을 읽는 것을 보면 성실한 학생이었을 것 같은데.”

“언니가 워낙 잘해서 난 그렇게 잘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우리 쪽에서 의사가 되려면 전국 1%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해야 하는데, 우리 언니가 그랬거든요.”

“네 언니가 의사가 되고 싶었다면, 너는 무엇이 되고 싶었나?”

헤어짐을 전제로 담고 있는 질문이기에 루프스는 이 말을 꺼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제가 갈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유채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고 싶었다. 분명히 그 상상은 저를 더 괴롭게 만들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었다.

“약사가 되고 싶었어요. 우리 아빠도 약사거든요. 전에 한번 말했던가?”

유채는 머리를 긁적였다. 스티폴로르는 약사가 곧 의사고 의사가 곧 약사인 곳이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말하는 약사와 의사의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직업이 유채와 퍽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화에 걸린 수인들을 도와주던 모습을 떠올리니 더 그랬다.

“잘 어울린다. 네게 어울리는 직업인 것 같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루프스는 찻잔을 들어 시원한 차를 마셨다. 유채도 차에 달달한 과자를 같이 먹었다. 유채는 무심코 말을 흘렸다.

“이런 건 여기가 더 낫네.”

유채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떠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 같았다. 유채는 뜨끔해서 루프스의 표정을 살폈다. 저를 속이는 것에 아주 능한 사람이니 겉으로는 저렇게 굴어도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을지 몰랐다.

“그동안 괴로웠던 것만큼 여기서 마음 편히 보내라, 즐겁게.”

루프스는 유채가 떠날 것임을 알았다. 언니를 위해서 당연히 떠날 것이었고 돌아올지 아닌지는 유채의 선택이었다. 유채가 돌아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컸다. 그래서 루프스는 가더라도 유채가 이곳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좀 더 많이 가지고 가기를 원했다. 이곳을 떠올리며 눈물지을 기억보다 웃으며 좋은 추억으로 남길 기억이 더 많았으면 하였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게 말하고 불편한 것이 있어도 내게 말해. 네가 말하는 것이라면 언제나 경청할 것이니까.”

루프스도 부모님과 에리카와의 행복한 기억을 잊지 못했다. 유채도 같을 것이었다. 유채의 행복은 이곳에 없었고 루프스가 줄 수도 없었다.

“나는 그곳을 모르지만, 네가 그곳에서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한다. 그곳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이 일상만큼은 내가 가진 것을 다 바쳐서 지켜주겠다.”

사랑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받는 것도 행복하지만 이렇게 주는 것 역시 가슴 벅차도록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유채가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으로 행복했다. 이별의 가슴 아픔도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루프스는 웃는 모습의 유채를 마지막으로 추억할 수 있으면 하였다. 떠날 때 그래도 괴롭지 않았다고,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루프스는 당장이라도 바람에 흩날려 사라질 것 같은 유채를 보며 웃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해. 나는 괜찮으니.”

루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채의 앞으로 아쿠아마린 세공품을 밀었놓았다.

“일이 바빠서 돌아가 봐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곳까지 데려다주마.”

유채는 루프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박여 거칠고 한눈에 봐도 고생을 많이 한 그 손은 따뜻했다.

* * *

곧 루프스가 미노르 호무스로 떠난다. 유채는 벼르고 벼르던 기회가 찾아오자 준비해 둔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레티티아.”

유채는 루프스의 목소리에 허둥지둥 움직였다. 루프스가 방에 올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탈출할 때 쓸 물건들을 그가 보면 의심할 것이 분명하기에 유채는 얼른 발로 가방을 침대 밑으로 툭 밀어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으로 천연덕스럽게 행동했다.

“무슨 일로 왔어요?”

유채는 제 혀를 깨물고 싶었다. 행동부터 말까지 뭐 하나 수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연극배우도 아니고 말투까지 엄청 어색했다. 유채는 루프스의 눈치를 살폈다. 유채는 침대 밑에 숨긴 물건들이 그의 눈에 뜨일까 봐 침대에 앉아서 옷자락으로 그 앞을 가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옆에 약간 떨어져서 앉았다.

“곧 미노르 호무스에 간다. 혹시 따라갈 생각이 있느냐?”

“어, 그게…….”

너무 단호하게 말을 하면 의심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소니페스 호무스에는 갔다와 놓고서 안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또 괜한 의심을 살 것 같았다.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곳이니 힘들다면 무리해서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그냥, 여기 있어라.”

루프스는 유채가 미노르 호무스에 가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좋지 않은 기억만 가득한 끔찍하기 짝이 없을 그곳에 유채가 다시 가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루프스의 시선이 유채의 흘러내린 옷 틈으로 보이는 흉터에 닿았다. 볼 때마다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미안하다. 내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헥터란 놈이 이상한 놈이었지요. 내가 뭐가 마음에 든다고.”

유채는 루프스가 빨리 방을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던졌다.

“아름다워서가 아니겠나.”

유채의 볼에 루프스의 손이 닿았다. 유채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둘의 코끝이 닿았다. 유채는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본 암컷 중에 너보다 아름다운 이는 없다.”

수인들에게는 드문 밝은 색의 피부부터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며 뚜렷하고 우아한 이목구비. 천상에 살며 셀레네님을 보좌한다는 천인(天人)들이 바로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제 눈에 박히도록 아름다웠고 그랬기에 수많은 수컷들이 속으로 탐을 내는 미희였다. 루프스의 시선이 유채의 붉은 입술로 내려갔다.

미친 것 같았다.

눈은 유채만 좇았고 유채를 안고 싶었고 유채에게 입술을 맞추고 싶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붉은 입술을 삼키고 싶었다. 루프스는 침대 시트를 우그러지게 잡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들었다. 바로 그때, 유채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눈을 감았다. 루프스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시선이 제 입술에 닿은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그래, 딱 한 번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의심받지 않고 그를 보내려면 이 방법뿐이다. 강제로 당한 것이 몇 번인데, 한 번을 더 못 참을까.

루프스는 조심스럽게 유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예전과는 다르게 한없이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틀어서 유채의 입안을 탐했다.

달큰한 향이 혀에 감겨왔다. 오아시스의 물을 찾는 사막의 유목민처럼 루프스는 유채의 입술이 제 생명수라도 되는 양 갈급하게 탐했다. 유채의 턱을 잡았던 손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다른 손은 그녀의 뒷머리를 끌어안았다.

신사다웠던 입맞춤은 어느새 급하고 갈구하는 입맞춤이 되었다. 유채는 점점 더 숨이 가빠왔고 견디기가 버거웠다. 유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하아. 하아.”

루프스의 입술이 떨어지고 유채는 숨을 몰아쉬었다.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유채는 몸을 굳혔다. 그의 입술은 유채의 쇄골에 머물렀다.

이대로 안고 싶었다. 유채의 몸에 제 몸을 묻고 싶었다. 잊고 있던 욕망이 끓어올랐다.

루프스는 스스로에게 조소했다. 아직도 유채를 미친 듯이 원했다. 죽어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가는 발목을 꺾고 두 눈을 멀게 해서라도 제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저를 평생 원망해도 좋고 저를 평생 저주해도 좋다. 그녀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루프스는 눈을 감았다. 입술 아래서 그녀의 맥박이 뛰는 것을 느꼈다. 부드럽고 말캉한 촉감도, 고소한 우유 같은 체향도 모두 다 새겼다.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평생을 이 기억만 되짚으며 살아갈 것이다.

이별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차오르는 희망에 루프스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입맞춤 한 번 받아주었다고 감히 바라면 안 될 희망을 품다니.

혹시, 혹시…… 돌아오지 않을까? 여기에 남아주지 않을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이고 있지만, 루프스는 그 희망을 붙잡고 싶었다.

“저.”

“잠깐만.”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아주 잠깐만 이렇게 있어줘.”

이렇게 욕심내도 되는 것일까? 유채의 사랑을 바라도 되는 것일까?

사랑받고 싶었다. 유채의 행복이 그의 행복이었지만, 그도 수컷인지라, 유채의 사랑을 받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같은 침대에서 같이 눈을 뜨고 따뜻한 몸을 안고 잠이 들 수 있는 그런 보통의 일상을 원했다.

유채의 사랑을 원했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저기…….”

유채는 그의 아래에 깔려 난감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저를 몰래 속이고 있는 주제에 이렇게 구는 것 자체가 정말 소름끼쳤다.

“무거워요.”

유채는 말을 고르고 골랐다. 루프스는 그제야 그녀의 위에서 물러났다. 루프스가 부드러운 손길로 유채를 일으켜 세웠다.

“미안하다. 내가 조금 지나쳤다.”

유채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서 딴청을 피웠다. 루프스는 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것에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유채가 별말을 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무서워서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루프스는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 할 말을 억지로 생각을 했다.

“그럼 미노르 호무스에는 따라가지 않는 것인가?”

“예. 아무래도 좀 힘들어서요…….”

유채는 루프스가 먼저 꺼낸 이유로 둘러대었다.

“미노르 호무스에는 왜 가는 건가요? 지난번 전쟁 때문에?”

“소 일족은 원래 그렇게 강한 일족이 아니다. 소 일족은 저들끼리 치고받는 경향이 강해서 그렇다 보니 전력을 스스로 축내는 편이지.”

유채는 그제야 왜 수인들이 헥터의 악행을 알면서도 처리하기를 꺼려 했는지를 알았다. 헥터를 없애면 그 아래 있는 고만고만한 수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난리법석을 떨 것이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근처의 다른 일족들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필요악이었던 헥터가 없어졌으니 우려했던 뒷감당을 해야 하는 것이다.

“수장이 없으니 소 수인들이 난리를 치며 주위에 피해를 입히는 것은 막아야 해서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고 있다. 협정상으로는 위법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협정이요?”

“수인들이 최초로 맺은 협정이다. 원래 수인들의 첫 번째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일족의 구분 없이 살았다. 하지만 분쟁으로 일족 별로 떨어졌고, 마레 위르들의 스티폴로르 침략으로 서로 뭉치기 시작하면서 맺은 협정이다. 늑대 일족의 수장을 왕으로 인정하되, 일족의 일은 일족 내에서 해결할 것이며, 한 일족이 타 일족의 땅을 침략했을 때 늑대 일족은 침략당한 일족을 보호한다는 내용이지.”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건을 기회로 협정 내용을 조금 바꿔볼 생각이다.”

“바꿔요?”

유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니투스님 시대, 일족에 상관없이 섞여서 평화롭게 살던 그때로 돌아가 볼 생각이다.”

“당신이 그런 것도 생각해요?”

“어릴 적부터 생각하던 꿈이다. 서로 다른 수인들끼리 어울리면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그런 곳을 만들고 싶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네가 찾아준 꿈이다.”

유채를 사랑하면서 발밑에 넘실거리던 검은 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드미트리를 죽여도, 루프스의 자리에 올라도, 펠릭스 다우스를 길들여도 사라지지 않던 그 검은 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 루프스는 그 검은 뱀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가 돼서야 알았다. 검은 뱀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던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이었다. 그 혐오감을 저보다 약한 이들에게 풀어내고 있던 것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서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던 자신은 그 시절에 멈춰 버린 어린애였다.

“나는 네게 못 할 짓을 정말 많이 했지만, 너는 내게 정말 많은 것을 주는구나.”

대답을 바란 말은 아닌지 루프스는 혼자 중얼거렸다. 루프스는 입만 벙긋거리는 유채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채가 저로 인해 짐을 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고맙고 미안하다. 이만 가보마.”

루프스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유채는 침대 밖으로 삐져 나온 짐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가방이 끌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 같아서 움찔하는데 문고리를 잡으려던 루프스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유채는 미어캣처럼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채는 뻣뻣하게 돌아서 침구를 정리하는 척을 하였다.

“미노르 호무스에서 돌아오면 너에게 줄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오기 직전에 시카리우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미노르 호무스에서 벨라토르들이 붉은 루비 조각을 목에 걸고 있는 암컷을 보았다는 증언을 했다는 것이었다. 모양새도 그가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다고 했다. 루프스는 미노르 호무스에 가면 그 것을 직접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와 유채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기다려 줘. 내가 돌아올 때까지.”

루프스는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나갔다. 유채는 문이 닫히는 것을 본 후 긴장이 풀려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곤 손등에 새겨진 권능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걱정이 밀려왔다. 만약 헤르티아가 저를 잡으려고 한 거짓말이면 어떻게 하지? 그럼 다시 조사를 해야 하는데, 다시 토스 호무스로 돌아오기는 힘들 것이다. 루프스는 자신의 탈주를 알고 분노할 것이고 다시 그의 손에 잡히면 어떤 험한 일을 겪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유채는 작게 중얼거렸다.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움직여야 하는 때였다.

헤임달은 절벽에서 레이라가 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도와달라 말하며 온 포트리스를 돌아다녔다. 포트리스 사람들은 절벽에 남겨진 레이라의 신발에 아연실색했다. 레이라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 바다를 헤엄치던 병사들은 레베카의 포대기와 레이라의 옷자락을 발견하고 절망했다. 포트리스는 레이라의 죽음에 슬퍼했지만, 헤임달은 레이라를 찾지 못해서 당황했다. 일단은 레이라의 옷가지나 신발을 이용해서 정황상의 증거를 만들어놓았지만, 레이라가 갑자기 등장해서 자신이 죽지 않았다고 선언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헤임달은 레이라가 나오기 전에 전쟁을 시작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공들인 작전을 망칠 수는 없지.”

헤임달은 길게 연기를 내뿜고 담뱃불을 발로 비벼서 껐다. 무력행사가 가능한 사람들은 모두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들만 어떻게 보내놓으면 위기는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레이라가 살아 있다면 레이라가 전쟁이 시작된 후부터 그 전쟁이 불이 붙을 때까지만 나오지 않으면 되었다.

헤임달은 레이라의 집에 알폰소와 세라를 보내두었다. 알폰소와 세라가 집을 감시하고 있는 것을 알면 아이까지 보호해야 하는 레이라로서는 쉽게 나올 수가 없을 것이고, 나온다 치더라도 알폰소와 세라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지켜야 할 아이까지 있는 상태에서 레이라 혼자서는 둘을 상대하는 게 버거울 것이다.

“마지막이야.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

헤임달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서 프레눔 광산을 손에 넣어야한다. 헤임달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 수인들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아내를 지키지 못한 한심한 남편으로서,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못난 아버지로서 그들의 원한을 갚는 것이 자신에게는 먼저일 뿐이었다.

“나는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거야.”

그 지옥에 오를레앙이 먼저 가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그 지옥으로 향할 수 있었다.

* * *

레이라는 지하실에서 레베카를 달래면서 바깥 상황을 살펴보았다. 알폰소와 세라가 저를 찾기 위해서 집을 뒤지고 있었다. 레이라는 혹시 몰라서 지하실에 들여놓았던 제 창을 바라보았다. 이전이라면 저 둘 정도야 상대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출산의 여파로 붓기도 온전하게 빠지지 않은 몸에 지켜야 할 레베카까지 있었다.

“프레드릭, 어디 있는 거야.”

레이라는 두 손을 모아서 신에게 기도했다. 프레드릭이 제때 돌아와 주기를, 알렉스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레베카. 괜찮을 거야. 아빠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레이라는 새근새근 잠이 든 레베카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레베카에게 하는 말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 * *

루프스는 예전 카니스의 별장에서 만난 개 수인이 그린 유채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미노르 호무스로 가기 위해 토스 호무스를 떠나온 지 단 하루가 흘렀음에도 유채가 그리웠다. 하루 안 봤다고 이렇게 그리운데, 더 수많은 날들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얼마나 그리움에 사무치게 될 것인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이별도 연습을 하면 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번 미노르 호무스 행을 유채와의 이별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았다.

떠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유채를 만났다. 유채는 제 기억 속에 영원히 나이 먹지 않는 여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루프스는 이별 연습 삼아서 유채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노르 호무스에서 일이 잘 풀리면 유채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안아봐도 되겠냐고 묻자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채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루프스는 들썩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별을 한다면 유채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 웃는 얼굴로 보내주고 싶었다. 루프스는 그렇게 한참 동안 유채를 품에 안고 있다가 그녀가 불편해할 쯤 떨어졌다.

루프스는 막사의 침대에 앉아서 잠든 유채의 그림을 손으로 쓸었다. 돌아가면 화가를 고용해서 그녀의 모습을 그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수없이 눈에 담았음에도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림으로라도 그려서 남겨 두어야 했다. 기억이 흐릿해졌을 때 찾아볼 수 있도록, 사무치도록 그리워서 죽고 싶을 때 그림이라도 보면서 그 그리움을 달랠 수 있도록.

‘미련만 흘리고 한심하네.’

루프스는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림을 쓸면서 침대에 누웠다. 미노르 호무스의 일을 정리하고 빨리 그 루비 조각을 찾아야 했다. 유채가 무모한 고생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유채가 떠나기 전에,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유채는 요즘 전보다 자주 웃고 태도도 부드러워졌지만 오히려 그 전보다 더 단단한 막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웃어도 웃는 것 같지가 않았다. 조각을 찾아주고, 그녀의 진짜 미소를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루프스님!”

병사 하나가 갑자기 헐레벌떡 막사로 들어왔다. 루프스는 무슨 일인가 하여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숨을 몰아쉬는 병사의 손에는 잔뜩 구겨진 종이 쪽지가 들려 있었다. 전서구를 통해서 편지가 온 것이라면 미노르 호무스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미노르 호무스에 무슨 일이 생겼나?”

“헉헉…… 그게 아닙니다.”

병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충격적인 일이라 본래는 루크레치아나 케릭스에게 보고를 올려야 함에도 무례를 무릅쓰고 바로 루프스님에게 달려왔다. 병사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포, 포트리스에서 배, 배로 토스 호무스에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뭐!”

루프스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하필 제가 자리를 비운 이때에 포트리스가 움직이다니. 루프스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젠장!”

그는 발을 굴렀다. 토스 호무스는 원래 바다 쪽에는 군대가 별로 없고, 그나마 독수리 일족에게 맡기고 있었지만 지난 일로 독수리 일족의 피해가 상당하여 해안선 경비를 맡았던 독수리 일족을 모두 그들의 땅으로 돌려보낸 참이었다. 지금 경비를 지키는 놈들은 경험이 부족한 놈들이라 더 쉽게 뚫렸을 것이다. 지금은 미노르 호무스가 급한 것이 아니었다. 토스 호무스로 돌아가야 했다.

“어디까지 왔다고 하나?”

“저…… 그것이…….”

병사는 말을 더듬었다. 토스 호무스의 궁이 해안선에 가까이 있는 편이었지만, 마레 위르들의 진격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짐작을 하지 못했다.

“토, 토스 호, 호무스의 궁까지 들어왔다고 합니다. 아리아님은 카스텔룸으로 이동하셨다 합니다.”

“뭐라고!”

루프스는 어이없는 상황에 노성을 질렀다. 토스 호무스의 궁은 미노르 호무스의 궁처럼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 아닌지라 이런 상황이 생기면 궁을 비우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맞는 대처였다. 그게 바로 카스텔룸이었다. 아리아가 옳게 행동한 것은 맞았다.

“레티티아는!”

곧바로 유채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유채는 마레 위르에게 잡히면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프레드릭이나 알렉스가 그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놓았는지가 관건이었다. 유채가 제게 잡힌 포로라고 알고 있으면 다행일 테지만 제 정부 노릇을 했다는 소문이 마레 위르들에게 반감을 산다면……. 아리아에게 유채의 안전에 대해 일임해 둔 상태이긴 했지만 루프스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아리아님이 일족을 이끌고 카스텔룸으로 이동하긴 하였습니다만.”

“다만?”

병사는 루프스의 형형한 기세에 침으로 입술을 축였다.

“레티티아님이 먼저 도망을 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뭐?”

루프스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반문했다.

“아리아님이 레티티아님을 모시러 갔을 때, 레티티아님은 이니투스님의 보자기를 훔쳐서 도망치시는 중이셨다 합니다. 레티티아님은 블루벨이라는 궁녀를 데리고 아리아님 앞에서 블랑카님의 반지를 바닥에 던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루프스는 순간 멍해졌다. 유채의 무사함에 안도를 표해야하는 것인지, 유채가 블랑카의 반지를 버렸다는 것에 슬퍼해야 하는 지 도통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 * *

“아리아님. 어떻게 합니까?”

아리아는 닥친 상황이 정말 거지같아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상황을 판단하고 일족을 이끌어야 했다. 병력으로는 이쪽이 우세하지만, 대형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닥친 적을 상대하기는 위험했다. 그리고 토스 호무스의 궁은 방어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궁을 버려야 했다.

“궁을 버리고 요새 카스텔룸으로 이동한다. 병사들과 궁녀들, 궁관들을 챙겨서 이동해. 저들을 막고 있는 동안 일족들을 빠르게 이동시켜. 알았어?”

“예. 그리하겠습니다. 카신님께 연락을 드릴까요?”

“그래. 올리에님께도 전서구를 보내. 독수리 일족의 땅도 충분히 위험하다.”

“그럼, 레티티아님은?”

“그 빌어먹을 암컷!”

아리아는 노성을 질렀다. 어머니가 떠나기 전에 누누이 당부한 것이었다. 루프스가 레티티아를 마음에 품은 듯하니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늑대 일족의 반려는 곧 그들의 약점이니 그 약한 암컷을 목숨을 걸고 보호하라는 것이었다. 늑대 일족의 차기 2인자 자리를 넘보는 아리아는 자신이 마레 위르 암컷 따위나 호위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으나, 루프스님을 위한 것이었다. 루프스님을 보좌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암컷도 보호해야 했다.

“헤나님이 먼저 움직이셨을 가능성이 높으니 일단 헤나님께…….”

“아리아 양!”

헤나가 저 멀리서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리아는 헤나가 저렇게 다급해하는 모습을 거의 처음 보는 것이라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병사들 가운데, 내, 내궁에 들락거린…… 아니지, 내궁 근처, 내궁에 돌아다닌 이들이 없습니까?”

“흥분하시지 말고 천천히 말하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레티티아님이 안 계십니다. 방에서 나간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방에 안 계십니다.”

“도서관에 계신 것 아닙니까?”

아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이 급박한 상황에 정말 도움은 조금도 되지 않는 암컷이었다. 헤나는 고개를 저었다. 헤나는 마음이 급해 발을 동동 굴렀다. 혹여나 그녀가 마레 위르에게 붙잡히면 루프스의 행동뿐만 아니라 늑대 일족 전체가 발에 무거운 추를 단 것과 마찬가지였다. 레티티아는 지금 늑대 일족이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존재였다.

“아리아님!”

사슴 수인 궁녀가 급하게 달려와서 그들에게 외쳤다.

“레티티아님께서 수장고에서 이니투스님의 보자기를 훔쳐서 도망치고 계십니다.”

헤나와 아리아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유채는 가방을 챙기고 벽에 몸을 감추었다. 블루벨이 갑자기 바빠져서 미리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탓이었다.

유채는 이니투스의 보자기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루프스가 미노르 호무스로 떠나고, 유채는 망설이지 않았다. 권능을 이용해서 이니투스의 수장고로 몰래 들어갔고 그곳에서 보자기를 가지고 나왔다. 유채는 벽에 숨어서 병사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가 도망친 게 벌써 발각된 것 같았다.

“꼭 이럴 때만 빠릿하게 행동한다니까.”

유채는 중얼거렸다. 블루벨을 찾아야 했다. 블루벨이 어디에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더 큰일이 날 뻔하였다. 유채는 보자기를 가방에 쑤셔 넣기 위해서 몸을 돌렸다.

“레티티아님?”

유채는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기겁했다. 유채는 보자기를 가방에 집어넣는 것을 포기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병사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유채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미친 듯이 달렸다. 유채는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보다 빨리 발각되었으니 블루벨을 만나자마자 이동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유채는 가방을 뒤져서 지도를 꺼내고 그 안에 이니투스의 보자기를 쑤셔 넣었다.

“일단 블루벨부터 찾는 거야.”

카넬리안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블루벨이 혼자 이곳에 남아 있다가 루프스에게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유채는 블루벨을 보호하기 위해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유채는 건물 모퉁이에 숨어 상황을 살핀 뒤에 다시 움직였다. 내궁은 원래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라 몰래 움직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유채는 블루벨이 있을 법한 곳인 연못이 있는 정원을 찾았다. 블루벨은 더위를 못 견디는 편이라 물가에 있는 것을 꽤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블루벨!”

블루벨은 유채가 가방을 멘 채로 저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유채님? 설마 지금…… 떠나시게요?”

연못에서 노닥거리던 중, 궁이 소란스러워졌다. 왜 저러나 싶었는데 소란의 원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블루벨은 얼른 유채를 끌어당기고 덤불 뒤에 몸을 숨겼다.

“어쩌시려고 이렇게 움직이세요. 얼른 나가셔야지 이러다 잡히시면 어떡하시려고요.”

“괜찮아, 블루벨. 블루벨,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유채는 블루벨의 앞에 지도를 펼쳤다. 스티폴로르의 전역을 그려놓은 지도였다.

“블루벨의 집이 어디쯤인지 지도에 표시해 줄 수 있어? 지금 우리 그쪽으로 이동할 거야.”

“예? 거기가 얼마나 먼 곳인데…….”

“괜찮아. 바로 갈 수 있어. 그러니까 어디인지 가르쳐 줘.”

블루벨은 유채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지도로 자신의 집이 있는 산을 찍었다. 유채는 그곳에 위치를 본 다음 권능을 이용하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레티티아님.”

유채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블루벨을 등 뒤로 감추고 뒤로 돌았다.

아리아는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그녀를 찾았다는 데에 안도했다. 이니투스의 보자기를 훔쳤든 뭘 어쨌든 이 암컷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이 암컷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루프스님이 마음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어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아리아는 혹여 마레 위르를 언급했다가 동족이라고 그녀가 그쪽에 붙어버리는 것을 경계했다.

유채는 아리아를 경계하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녀는 루프스가 궁에 남겨둔 수인들 중 가장 강했다. 이대로 잡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루프스님께서는 용서하실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저와 같이 가시죠.”

이니투스의 보자기를 훔친 것은 엄청난 죄이지만, 어차피 상황만 잘 해결되면 저걸 머리에 쓰고 혼례를 올려서 비(妃)가 될 암컷이었다. 저걸 훔쳤다고 루프스님이 저걸 트집 잡아서 뭐라 하지도 않을 것이다.

유채는 아리아의 말에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루프스의 집착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리아의 뒤에 병사 몇이 서 있었다. 여기서 권능을 사용해도 되지만, 공간을 여는 것이기 때문에 아리아가 저를 따라서 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랬다가는 루프스에게 위치가 발각이 될 수도 있다. 유채는 뒤를 살폈다. 아직 그쪽으로는 병사가 없었다.

수인들은 마력 저항력이 강해서 마법으로 타격을 입히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환상을 보여주는 것 같은, 그러니까 직접 몸에 닿지 않는 마법에는 마법 저항력도 소용이 없다. 유채는 적당한 마법을 골랐다.

“Beatitas.”

유채가 스펠을 외자 매캐한 연기가 아리아와 유채 사이를 뒤덮었다. 아리아는 갑자기 나타난 연기에 눈이 매워서 눈물, 콧물을 흘렸다. 유채는 그 사이에 블루벨의 손을 잡았다.

“뛰어, 블루벨.”

“예?”

유채는 블루벨을 데리고 아리아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뛰었다. 아리아는 유채가 뛰어가는 소리를 듣고 줄줄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그녀를 뒤쫓았다. 도대체 저 암컷은 무엇을 할 작정이란 말인가? 뒤늦게 찾아온 헤나도 아리아의 뒤를 쫓았다.

유채는 적당히 거리가 벌어지자 권능으로 공간을 찢었다. 블루벨은 공간이 일렁이며 찢긴 것에 기겁했다. 뒤에 선 아리아의 눈도 커졌다.

“레티티아님!”

헤나와 아리아가 부르는 소리에 유채는 그들을 보면서 블랑카의 반지를 빼서 던졌다. 반지가 땅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갔다. 헤나는 그 반지의 정체를 알고 눈을 크게 떴다. 로보가 블랑카를 위해서 만든 반지였다.

유채는 냉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인간한테 전해요. 그딴 거짓말이나 하면서 위선 떨지 말라고, 나도 당신 기분 맞춰주느라 정말 힘들었다고.”

“잠시만요, 유채 양! 루프스님이 유채 양을 속인 적은 없으십니다!”

헤나는 루프스의 측근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루프스가 유채 몰래 무언가를 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요즘 들어선 사소한 것 하나도 모두 그녀를 배려해 주려 했었다. 헤나의 말에 유채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 인간은 알걸요? 그리고 여기서 잘 먹고 잘 살라고 전해주세요.”

유채는 블루벨을 데리고 찢어진 공간을 통과했다. 헤나와 아리아의 눈이 커졌다. 아리아는 유채를 쫓기 위해서 달려들었지만 공간은 그녀의 손이 닿기 직전에 닫혀 버렸다.

헤나는 바닥에 떨어진 블랑카의 반지를 멍하니 보았다. 흙이 묻고 바닥에 긁힌 반지는 마치 거절당한 루프스의 마음 같았다. 아니, 그보다 최악이었다. 그를 속인 채 그의 마음을 가지고 논 것이 아닌가? 헤나는 사랑에 빠진 루프스를 동정했다.

아리아는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도대체가 도움이 되는 일이 없었다. 아리아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레티티아를 마레 위르에게 뺏긴 것은 아니니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차악의 상황에 기뻐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웠다.

병사가 달려왔다.

“일족들을 대피시킬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어찌할까요?”

마레 위르들의 빠른 진격은 여기서 끝이었다. 그들도 더 이상의 전진은 힘들다는 것을 알 테니 토스 호무스의 궁을 방어선 삼아 공격에 나설 것이었다. 일단은 요새로 이동한 뒤, 전열을 가다듬은 후 공격에 나서야 했다.

아리아는 명령을 내렸다.

“일단 루프스님께 보고를 올려라.”

이미 벌어진 일에 후회를 하면 앞으로 닥칠 일을 대비할 수 없다. 아리아는 저 멀리서 불어오는 피비린내를 맡았다.

“카스텔룸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마레 위르를 칠 준비를 한다.”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였다.

* * *

“세상에…… 유채님. 이거 뭐예요?”

“내가 받은 능력. 이제 반 정도 썼어. 빌어먹을 셀레네.”

“히익. 그거 모독죄예요.”

“괜찮아. 난 셀레네 욕할 자격 있고, 너희들도 셀레네를 욕할 자격이 있어. 지가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신이니까 욕을 들어도 괜찮아.”

유채는 주위에 펼쳐진 울창한 숲을 돌아보았다. 유채는 혹시라도 수인들을 마주칠 것을 대비해서 가방에서 로브를 꺼내 뒤집어썼다. 그리고 루프스가 준 아쿠아마린 세공품을 찾았다. 시동어를 읊으니 거기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블루벨이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선 물었다.

“그건 뭐예요?”

“주위를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물품.”

블루벨은 금세 주위가 시원해진 것을 느낀 것인지 눈을 반짝였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것인지 앓는 소리를 냈다. 블루벨은 귀를 끌어당겨서 제 눈을 가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 유채님, 이렇게 한가하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라구요.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지 알기는 하세요.”

아리아와 헤나를 따돌리고 궁을 탈출했다. 그것도 모자라 루프스에 대해 심한 말까지 했다.

“저는 상관없지만, 유채님은요? 혹시나 루프스님이 유채님께 나쁜 일 하시면 어쩌시려고요?”

“괜찮아. 어차피 이제 두 번 다시 볼일 없는 사람이거든.”

“예?”

“내가 찾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게 어디 있는지 알게 됐거든. 이번에 그 물건만 찾으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러니까 두 번 다시 루프스를 볼 일은 없는 거야.”

“떠나시는 거예요?”

블루벨은 이제는 울적해진 얼굴로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유채는 쪼그려 앉아서 블루벨을 끌어안았다.

“블루벨. 네가 많이 그리울 거야.”

“핏. 말로만 매일 이러시고.”

블루벨이 심통이 났는지 토끼 귀로 유채의 볼을 찰싹찰싹 가볍게 때렸다. 유채는 아프다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제 저희 어머니를 만나러 가실 거예요?”

“응. 내가 가진 능력을 활용하려면 그곳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토스 호무스에는 정보가 없어. 혹시 너희 어머니라면 알고 계실 것 같아서.”

“허풍이 반인 분이시라 믿기는 힘든데…… 아무튼 그래도 인키디움 출신이시니까요.”

블루벨은 자신의 어머니가 탐탁지 않은 것인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울피누스 호무스의 수장고에 들어가서 귀중한 것들 다 훔쳐와서 줄까? 그럼 블루벨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잖아.”

“울피누스 수장고요?! 거긴 왜요? 그리고 카악! 가져오기만 하세요. 저 그거 몽땅 강에 버려 버릴 거예요. 전 조용히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요.”

블루벨이 통통 튀면서 말했다. 유채는 쿡쿡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벨. 여기서 너희 집이랑 얼마나 멀어?”

“음. 좀 많이 올라가야 해요. 저희 마을이 높은 곳에 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 집은 더 높은 곳에 있거든요.”

“으악. 죽겠네.”

“걱정 마세요! 이 블루벨이 있습니다! 제가 모실게요.”

블루벨은 거대한 토끼로 변했다. 유채는 블루벨의 털이 북실북실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블루벨은 유채가 등 위에 타기 편하도록 몸을 웅크렸다.

[얼른 타세요. 이 블루벨이 빠른 속도로 모실게요!]

“블루벨. 근데 나 요즘 살이 쪄서 무거울 텐데.”

[유채님이 살이 쪘으면, 우리 수인들은 모두 뚱뚱보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올라타세요.]

유채는 킥킥 웃으면서 블루벨의 등에 올라탔다. 블루벨은 유채가 안전하게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하고 움직였다. 블루벨이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유채는 그녀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블루벨이 슬쩍 물었다.

[걱정되세요?]

블루벨은 유채가 이렇게 엄청난 일을 벌여놓고도 여유 만만한 것이 오히려 그녀의 불안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너무 불안해서 오히려 농담이나 하면서 불안을 떨치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채는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응. 아주 많이.”

일이 잘못될까 봐 겁이 났고 혹여나 헤르티아가 거짓말을 했을까 봐 겁이 났고 루프스에게 다시 잡힐 것이 무서웠다. 혹여나 블루벨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 걱정도 되었다. 유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블루벨의 목을 끌어안고 몸을 기대었다.

“일이 잘못되면 내가 널 인질로 삼아서 어머니를 협박했다고 해. 그러면 블루벨까지 건드리지는 않을 거야.”

[유채님.]

“……모두 다 잘될 수 있을까?”

유채가 조용히 물었다. 그 짧은 말에 유채의 걱정과 근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블루벨은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잘될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고마워, 블루벨.”

유채는 머리를 블루벨에게 기대었다. 자신은 절대 착한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언니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었다.

루프스는 카스텔룸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리아와 헤나에게 보고를 들었다. 궁을 점령한 것에서 마레 위르들은 진격을 멈추었다. 이 모든 일에 근원은 최근 헥터가 벌인 내전이었다. 내전에서 피해를 입은 독수리 일족이 해안 경비 일을 그만 두고 그 빈자리를 늑대 일족이 채우게 되었는데, 그들은 해안 경비에 아는 것이 없었다. 당연히 허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마레 위르들은 그 점을 파고들었다. 루프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눌렀다.

“루프스님. 지금 울페스 헤르티아님께서 돕겠다고 오시는 중이랍니다.”

“뭐라!”

루프스는 카신의 말에 놀라서 외쳤다. 울페스 헤르티아가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움직여야 하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 포트리스였다. 지금 온 전력을 이쪽으로 보낸 포트리스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여우 일족과 말 일족밖에 없었다. 포트리스와 근접한 나머지 일족은 전쟁의 여파로 회복에 모든 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쪽으로 온다고? 루프스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발을 굴렀다.

“당장 그쪽으로 병사들을 보내라. 울페스 헤르티아는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공격이 목적이다.”

카신과 루크레치아도 짐작한 일인지 크게 놀라지 않았으나 케릭스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케릭스는 지금 아무런 소식이 없는 아버지인 플로서스가 걱정이 되었다. 칩거 중이라고 하셔도 실력자였다. 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인지 걱정이 되면서 동시에 무서웠다. 루프스는 측근들과 다음 작전을 이야기했다.

“헤르티아 쪽은 내가 가지. 내가 가는 것이 여우 일족에게 투입되는 병력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헤르티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내가 정예를 뽑아서 여우 일족으로 움직일 테니, 나머지 병력은 마레 위르에게 집중해라.”

루프스의 말에 카신과 아리아가 반발했지만, 루크레치아는 루프스의 말에 동조했다. 토모스도 죽고 없고, 플로서스 놈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 것인지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레 위르와 여우 일족이 연합을 한 것인지 아니면 여우 일족이 때를 잘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로보 때의 수인 내전의 재림이 될 것이다. 빠른 진화를 위해서는 루프스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루프스님!”

갑자기 한 병사가 급하게 뛰어들어 왔다. 그는 급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플로서스님께서 반란을 일으키셨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플로서스의 아들인 케릭스를 향했다. 케릭스는 저도 모르는 사실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버지가 왜! 아버지가 갑자기 왜!”

케릭스는 아버지의 행동에 이해할 수가 없어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루프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일이 한꺼번에 닥쳐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모두 입 다물어!”

루프스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방에 있던 수인 모두가 부복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케릭스는 당분간 구속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까 세웠던 작전대로 행동해라. 모두 나가라. 혼자 있고 싶다.”

루프스의 표정은 황폐했다. 그 어떤 말도 그에게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루프스에 대한 충심만으로 어설프게 그를 위로하려고 하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자신의 딸을 데리고 나갔다.

플로서스의 배신과 토모스의 죽음으로 이제 옛 전우 중 남은 것은 루크레치아 하나였다. 루크레치아는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플로서스와는 많이 다투던 사이였다. 그래도 일족의 위기 앞에서는 늑대 일족을 위해 같이 움직였었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기에 이렇게 된 것인지 루크레치아는 하늘과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충성심 이전에 루크레치아는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루프스를 동정했다. 연인의 죽음 후 평생을 홀로 산 헤나는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 묻곤 했지만, 루크레치아도 잘 설명할 수는 없었다. 루프스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제 딸인 아리아가 그런 일을 겪었다면 저도 저승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을 것이다.

그 동정심의 발로인지 루크레치아는 모두가 칩거하거나 은퇴한 후에도 루프스의 측근으로 그를 도왔다. 그의 뒤틀린 성격에서 비롯된 실정들을 참을 수 없었지만, 마음에 난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여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그를 믿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대로 변하였다. 그가 변하게 된 중심에 그 마레 위르 암컷이 있었기에 루크레치아는 그 아이를 적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연인의 배신과 측근의 배신, 외세의 침략, 헤르티아의 복수. 아무리 루프스라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일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경험상 지금은 혼자서 마음을 추스르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루크레치아는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윗서열의 수인으로서 아래 서열의 이들을 움직였다. 카신은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인 케릭스의 신병을 구속했다. 아리아는 지휘관 명단을 짜기 위해 나갔고 루크레치아는 벨라토르와 시카리우스 실무자들을 찾았다.

루프스는 아무도 없이 조용해진 방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듯이 주저앉았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고 온갖 감정을 삼켰다.

머리가 복잡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포트리스의 공격과 헤르티아의 역습은 참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플로서스의 일은…….

루프스는 품속에서 블랑카의 반지를 꺼냈다. 유채가 버리고 갔다고 했다.

【‘루프스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고…….’】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붉은 루비 조각을 찾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안 것이었다. 루프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그 좋은 머리로 제가 저를 도와주기 위해서 찾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만큼 저를 믿지 못하는 것이었을까?

모두 제가 저지른 일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포트리스의 일도, 헤르티아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루프스는 몸을 웅크리고 울음을 삼켰다.

루프스가 반지에 담은 것은 그저 사랑이란 말로 표현하기에는 더 깊고 더 진한 감정이었다. 반지를 받아준 것도, 입맞춤을 받아준 것도 그저 저를 속이기 위한 것이었을까. 루프스는 유채의 잔혹함이 원망스러웠다. 유채가 그렇게 제게 잔혹할 수밖에 없게 만든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너는 왜…… 나에게만…… 잔인한가…….”

감히 유채에게 칭얼댈 수가 없어서 가슴 속으로만 삼키던 말이었다. 오열과 같은 울음소리가 입안 깊숙이 터져 나왔다. 루프스는 몸을 웅크리고 꺽꺽대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유채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제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하면…….”

가지 않을 수 있나.

그래. 자신은 정말 한심하고 이기적인 놈이다. 루프스는 유채가 버리고 간 반지를 끌어안았다. 거절당하고 부정당한 제 마음을 끌어안았다. 유채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가여웠다.

이래서 유채에게 자신은 역겨운 수컷 외에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가지 마.”

부정할 수 없는 본심이며 추악한 이기심이었다. 루프스는 마치 유채가 제 앞에 있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대었다.

“사랑해.”

루프스의 고백이 작은 방 안에 울렸다. 루프스는 제게 닥친 위험보다 유채의 거절이, 그녀의 거부가 더 마음 아팠다. 루프스는 아무도 위로해 줄 이 없는, 오롯이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조용히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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