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여우들의 땅, 울피누스 호무스[Vulpinus Humus]
“젠장할. 또 똑같은 곳이야.”
프레드릭은 표시를 위해서 매어놓았던 천 쪼가리를 내던졌다. 알렉스는 숨을 헉헉 내쉬며 좀 전의 개울에서 떠온 물을 프레드릭에게 건네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알렉스가 더 열을 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프레드릭이 더 불안해하였다. 프레드릭은 초조한 얼굴로 계속 손목에 새겨놓은 문양을 살펴보았다. 문양이 온전한 것을 보니 일단 레이라는 무사한 듯했다. 하지만 헤임달이 근처에 있으니 언제 레이라가 위험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레이라는 막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산모다. 혹여 헤임달을 피해서 지하실로 숨어들었는데,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레베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대책이 서지 않았다.
프레드릭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기억을 잃고 사라 할머니와 살 때에도 수인들을 피해서 숨어 살았었기 때문에 이 근처의 지리는 전혀 모르는 그들은 섣불리 이동할 수가 없었다.
“젠장. 그때는 대체 어떻게 왔지.”
“모르겠어, 형. 그땐 분위기가 워낙 흉흉해서 사라 할머니가 우리 보자기로 감싼 채로 이동시켜 주었었잖아.”
“그렇지. 젠장.”
프레드릭은 발을 굴렀다. 사라는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자기로 그들을 꽁꽁 싸맸던 탓에 제대 위치를 확인할 여유도 없었었다.
“형. 우리 조금만 침착하게 생각하자.”
알렉스는 오히려 더 냉정해지려고 했다. 프레드릭이 레이라와 레베카의 대한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지금, 저라도 그를 진정시키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야 했다. 길을 찾기 위해서라도 프레드릭은 진정해야 했다.
동생의 다독임에 프레드릭은 후 하고 한숨을 뱉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방법을 생각했다.
“추적 마법 같은 것은 못 써? 혹시 추적 마법을 쓰면…….”
“아!”
프레드릭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알렉스의 어깨를 움켜잡고 흔들었다.
“넌 천재야, 알렉스!”
“형 동생이 천재인 것 이제 알았어? 근데 우리 예전 이름 너무 이름에 안 붙는다. 그렇지 않아?”
“어쩔 수가 없잖아. 이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이 훨씬 긴데.”
프레드릭은 씁쓸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프레드릭은 알렉스에게서 단검을 빌렸다.
“뭐하려고?”
“피로 추적을 할 수 있는 마법이 있어.”
프레드릭은 바닥에 진을 그리고 알렉스의 단검으로 손목을 그었다. 가늘게 배인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서 진 안쪽에 고였다.
“Insecutio Ianthis.”
알렉스는 프레드릭이 스펠을 외는 것에 놀랐다. 프레드릭은 무언 마법에 능통했기에 어지간히 어려운 마법이 아닌 이상 스펠을 외지 않았다. 프레드릭의 스펠이 외자마자 진에서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마력 소모가 엄청난지 프레드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알렉스가 얼른 형을 부축했다.
“저건 뭐야?”
“스승님이 만든 마법.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을 찾는 마법이야. 이것을 이용하면 가장 근처에 있는 친척을 찾을 수 있어. 그럼 이 마법으로 찾을 수 있는 사람은…….”
“헤르티아 고모나 레베카가 되겠네.”
“그래. 이제 우린 길을 몰라도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는 거야.”
“이 좋은 방법을 왜 이제야 떠올린 거야! 이 방법이면 괜히 삽질을 안 해도 됐잖아!”
“누가 길을 찾는 데 추적 마법을 쓸 생각을 하냐. 상식적으로 추적 마법은 사람 찾는 것에 쓰지 길 찾는 데는 안 쓰잖아. 아무튼 다 네 덕이다. 발상의 전환이 탁월했어.”
“훗. 이제야 내 머리가 좋은 걸 인정하는 거야? 하기야 어릴 때는 내가 형보다 머리가 더 좋았는데 말이야.”
“그러게.”
프레드릭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 사건은 형제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다. 프레드릭은 자신이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마법과 정보, 학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알렉스는 자신이 지나치게 약해서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은 무의식적으로 어릴 적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럼, 다시 출발하자.”
알렉스가 프레드릭의 어깨를 툭 쳤다. 두 사람은 피로 만들어진 개의 뒤를 쫓았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블루벨, 얼마나 남았어?”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곧 도착이에요. 혹시 마을 분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목은 가리시고 로브는 꾹 눌러쓰세요.]
“알았어. 고마워, 블루벨.”
유채는 몸을 수그렸다. 익숙한 산길을 올라가는 블루벨의 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야. 이 개자식들아. 일을 이따위로 해!”
“누, 누님 한 번만 봐줘요. 나, 나도 실수할 수는 있는 것 아니오.”
블루벨은 집 근처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카넬리안과 집에서 머슴 노릇을 하고 있는 피터, 랄프의 목소리였다. 순간 유채를 업고 있는 것도 잊고 블루벨은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유채는 미끄러질 것 같아서 블루벨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어억! 유채님! 저 숨 막혀요!]
“미안해, 블루벨. 깜짝 놀라서 그만. 무슨 일이야?”
[도착했어요! 엄마랑 아저씨들이랑 싸우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정확히는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갈구는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블루벨은 신이 났는지 속도를 높였다. 유채는 심하게 흔들리는 블루벨의 등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위 아래로 흔들리는 덕에 멀미가 나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엄마!]
카넬리안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나사가 뭉텅이로 빠진 것 같은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건 피터와 랄프도 마찬가지였다. 셋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블루벨이 분명한 토끼가 촐싹대면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블루벨?”
카넬리안은 정보부 소속 특유의 빠른 정보 수집력으로 벽촌까지 오기 힘든 전쟁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카넬리안은 토스 호무스의 궁에 있는 블루벨이 걱정되었다. 들리는 소식에는 토스 호무스 궁 소속의 수인들은 모두 무사히 요새로 이동했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딸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피터는 카넬리안의 눈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괄괄한 카넬리안이었지만, 그녀도 결국은 엄마였다.
블루벨은 카넬리안을 만난 기쁨 때문인지 바로 동물화를 풀었다.
“엄마!”
“으악!”
블루벨이 팔을 벌리고 폴짝폴짝 뛰는 동안 그녀의 등에서 떨어진 유채는 바닥을 구르고는 신음소리를 냈다. 카넬리안의 눈이 커졌다.
“블, 블루벨? 저건 뭐냐?”
“아! 유채님이에요!”
카넬리안과 피터, 랄프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갔다. 루프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레티티아였다. 루프스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는 어찌 보면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다. 피터와 랄프는 서로 목숨줄을 걱정하는 눈빛을 교환했다.
유채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로브를 벗었다. 유채의 얼굴과 목에 건 파렌티아가 드러났다.
“와!”
랄프가 순간 감탄사를 내뱉었다. 남 외모 평가에 박한 카넬리안도 유채를 보곤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채는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잠시 헛기침을 하곤 셋에게 고개를 숙였다.
“엄마. 유채님이 엄마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으시대요. 엄마의 인키디움 시절의 경험이 필요하대요.”
블루벨은 카넬리안의 팔에 매달렸다가 화들짝 놀라서 떨어졌다. 그녀의 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엄마, 다쳤어요? 무슨 일로?”
“영광의 상처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
유채는 카넬리안에게 공손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한유채라고 합니다. 이름이 유채, 성이 한입니다.”
“카넬리안이다. 보시다시피 눈이 빨개서 붙은 이름이지. 토끼 일족이 대대로 네이밍 센스가 없어서 이런 종류의 이름이 많다. 반갑구나.”
카넬리안은 유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채는 카넬리안의 생김새에 적잖이 놀랐다. 블루벨과 달리 카넬리안은 루프스처럼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엉덩이 위에 토끼 꼬리가 달린 것과 붉은 눈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인간과 같았다.
카넬리안은 얼굴에 긴 흉터가 있어서 인상이 조금 험악해 보였지만, 블루벨의 어머니라 딸과 비슷한 구석이 많이 보였다. 크고 동그란 눈이라든지, 하얗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라든지, 입매라든지. 하지만 체형만큼은 군인처럼 다부진 몸의 소유자였다.
“데리고 있어봤자 손해인 손님이지만, 들어와라. 손님을 오래 세워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누, 누님 저희는 뭘 할까요?”
랄프가 카넬리안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카넬리안은 눈짓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손님이 배고프겠지? 얼른 가서 밥이나 해와. 마실 것도 내오고. 알았지?”
“예. 당연하지요, 누님.”
피터가 카넬리안에게 굽신거리면서 랄프를 끌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유채는 카넬리안의 카리스마에 몸을 떨었다. 과연 블루벨의 어머니인가 의심이 되었다. 블루벨은 카넬리안의 카리스마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통의 딸처럼 상처를 걱정하며 잔소리를 하였다. 당연히 카넬리안은 귀찮다는 듯이 대응했지만, 그녀도 딸을 걱정했던지라 블루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모정을 보였다.
유채는 모녀를 지켜보며 엄마를 떠올렸다. 먼 타국으로 와 사람들의 편견과 시댁의 구박에 시달리면서도 자매를 바르게 길러내신 엄마가 떠올랐다. 유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가씨, 눈물 닦아.”
카넬리안은 유채에게 손수건을 주었다. 블루벨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고생도 보통 고생을 한 암컷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카넬리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앳돼 보이는 유채의 얼굴에 속으로 많이 놀랐다.
블루벨은 동생들과 인사를 하겠다며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유채는 블루벨의 집 외관에 조금 놀랐다. 블루벨이 스스로를 시골에서 많은 동생들을 건사하며 자랐다고 하기에 그렇게 유복한 집은 아닐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커다란 집을 보아 블루벨은 예상과 달리 꽤나 부잣집 딸인 것 같았다.
“어때? 멋지지?”
“네. 블루벨에게 듣던 거랑 딴판이에요.”
“인키디움 시절에 여러 일족들의 수장고를 드나들면서 쓸어온 보석들로 지은 집이지.”
“그건 도둑질 아닌가요?”
“어. 근데 어차피 그놈들도 약탈로 모은 것들이라 별 차이 없어. 들어가, 아가씨.”
카넬리안은 유채에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권했다. 유채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곧 랄프가 시원한 차를 내왔다. 유채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자마자 피터가 식사 전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간식을 내어왔다.
“피터의 솜씨는 꽤 좋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쟤보다 솜씨 좋은 애가 있는데, 지금은 일단 얘로 만족해.”
“괜찮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누룽지와 비슷하게 생긴 과자는 달고 맛있었다. 유채는 그것이 입맛에 맞아 계속 과자를 집어 먹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댄 카넬리안이 턱을 쓸면서 물었다.
“그래. 나에게 무슨 일을 부탁하러 왔나? 우리 딸의 은인이니 나도 은혜를 갚고 싶어.”
블루벨이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마침 카넬리안은 다른 일로 바빠 딸의 일을 미처 듣지 못한 상태였다. 뒤늦게 보고를 받고서 카넬리안은 당장에 토스 호무스의 궁으로 블루벨을 구하러 가려 했으나 타이밍 좋게 유채가 먼저 나선 것이다. 카넬리안은 유채가 제 어깨까지 망가뜨려 가면서 제 딸을 살려준 것에 고마워하고 있었다.
“블루벨에게 듣기로 인키디움에서 뛰어난 실적을 올리셨다고요.”
“뭐, 그렇지. 트레모르가 레푸스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 녀석의 파트너였던 내 공적이니까. 난 레푸스 자리가 귀찮아서 거절했지만 말이야.”
“혹시 울피누스 호무스 궁의 수장고에도 들어가 본 적 있으신가요? 그곳의 지도를 갖고 계신가요?”
“그건 왜 필요하지?”
“제가 그곳에 들어가야 해서요.”
“창의적으로 죽을 방법을 깨달아서는 아닌 것 같고. 그렇지 않고서야 목숨 걸고 탈주를 하지는 않았겠지. 이유가 뭐지?”
“그건…….”
“분명하게 대답하거라. 난 울피누스 호무스의 수장고에 침입한 적은 있지만 지도는 없어. 내 도움을 받으려면 너는 나와 같이 수장고에 들어가야 해. 위험도가 높은 일인 만큼, 무엇이 목적인지 분명히 알아야겠어.”
“직접 도와주신다고요?”
“그래. 난 지도를 그릴 능력은 없어서 말이야. 게다가 아가씨 혼자 들어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아가씨는 모르지만 울피누스 호무스의 수장고는 궁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커. 아가씨 혼자 조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그것도 울페스 헤르티아를 상대로?”
“아니요.”
“그러니까 도와주겠다고. 내가 직접.”
유채는 엄청난 제안에 눈을 크게 떴다. 카넬리안은 씩 웃었다. 그녀는 이 분야의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블루벨은 내 얘기가 허풍이라고 했겠지만 그건 허풍이 아니라 사실이야. 아가씨 가방에 쑤셔 넣어진 그거. 나도 한번 머리에 써보기도 했어.”
카넬리안은 유채의 가방에서 삐져나온 보자기를 가리켰다. 유채가 이니투스의 보자기를 꺼내자 카넬리안은 그 보자기가 원래 있던 위치를 줄줄 설명했다. 유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넬리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유채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내 실력을 인정하지? 그러니까 이유를 말해. 네 이유를 듣고 도와줄 테니까.”
“제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곳에 있는 물건이 필요해요.”
“무슨 물건?”
“붉은 루비 조각이요.”
유채는 가방에서 리와인더 조각의 그림을 꺼냈다. 카넬리안의 눈이 커졌다. 이건 라일라의 죽음 이후 사라진, 그녀의 결혼 예물이었다. 카넬리안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유채를 바라보았다.
“이게 아가씨가 돌아가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나도 이 정도는 알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 같은데?”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넬리안은 모든 사정을 알아야 도와줄 것 같았다. 유채는 침을 삼키고 사정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신과 무슨 거래를 했는지, 지금 찾고 있는 물건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다 들은 카넬리안의 눈이 근심에 잠겼다.
“고서로 몇 번 읽은 적 있는 이야기인데, 그게 실제 사실일 줄이야.”
카넬리안은 턱을 쓸었다. 그러다가 붕대를 감은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왜 다쳤을 것 같아?”
“왜 다치셨는데요?”
“플로서스랑 부딪쳤거든. 알지? 늑대 일족의 2인자.”
유채의 눈이 커다래졌다. 플로서스라면 케릭스의 아버지라고 예전에 들은 기억이 났다.
“그의 집에 있는 서류가 필요해서 들어갔다가 들켰거든.”
“대체 무슨 서류였길래?”
“라일라를 죽인 진짜 범인을 밝혀내기 위한 진실. 라일라를 죽이라고 한 것은 로보가 아니야. 그건 내가 알아. 나는 베니니타스에게 그 사건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 몰래 조사를 했었거든. 하지만…… 부끄럽게도 난 다른 일로 바빠서 조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눈에 보이는 대로만 결과를 내서 베니니타스에게 알렸어. 그리고 그 사달이 났지. 로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어. 내가 진실을 밝히면 오히려 우리 토끼 일족이 위험해질 판이었지. 선대 레푸스는 이 일을 은폐할 것을 명령했어.”
카넬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자신이 초동 수사를 잘 했다면 이렇게 상황이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다 자신의 책임이었다. 카넬리안은 몇 년간 후회만 하다가, 후회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움직였다. 처음에는 진상을 파악했고 그 다음은 증거를 찾았다.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플로서스의 자택에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 아무리 안 좋은 일이라지만, 아무도 이 일에 의문점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보다 수상한 일이 많았을 텐데.”
유채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카넬리안은 자신이 찾은 자료를 유채에게 보여주었다.
“이 일은 늑대 일족이 벌인 건 맞아. 하지만 로보는 관계없지. 로보는 피해자야. 진짜 범인은 플로서스야. 그가 독단적으로 명령을 내렸고 완벽 범죄에 실패했지. 그리고 그가 이 사실을 은폐했어. 그놈은 은퇴를 한 게 아니야, 은퇴는 핑계고 제 죄를 감추기 위해 숨은 거지. 아주 추악한 놈이야.”
유채는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충격에 빠졌다.
“조사하면서 의외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이 사건에는 마레 위르 쪽 공범이 있다는 거. 살인을 한 것은 시카리우스가 확실하지만, 그 시카리우스가 침입하는 데에는 마레 위르가 관여를 했지.”
카넬리안은 이 일이 온전히 플로서스만 개입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다. 플로서스가 가지고 있던 서류에는 그 작전에 참여한 수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늑대 일족과 마레 위르의 혼혈인 란텔이었다. 카넬리안은 란텔을 추적했다. 시카리우스였던 그는 신분 세탁을 하고 벨라토르가 되어 울피누스 호무스에 있었다. 그리고 수상한 벨라토르들의 움직임. 그리고 란텔 놈이 포트리스에서 잠깐 살아서 마레 위르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한 면접 내용을 찾았다. 그래서 카넬리안은 생각했다. 어쩌면 플로서스를 이용해서 저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고 한 놈들이 있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늑대 수인 일족과 마레 위르 사이에 접점이 생기기엔 포트리스와 토스 호무스는 너무 멀었다. 그러니 친분이 있는 사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현재 있는 벨라토르 중 포트리스 출신으로 알려진 것은 란텔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둘이 공범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마레 위르는 우리 수인들의 세계의 붕괴를 원한 것이 확실하지 최근에도 그것을 위해서 착실하게 작전을 실행했지.”
카넬리안은 유채의 앞에 아편을 내놓았다.
“이것으로 벨라토르를 꼬여내고 헥터 놈과 거래를 튼 거야. 아가씨가 헥터에게 당할 뻔한 일도 이것하고 관련 있어. 그놈들이 헥터에게 바치는 아편에 카를리티오를 당기는 약을 섞었어. 다시 말해서 헥터를 이용해서 아가씨를 해하려 한 것이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러니까, 헥터가 저를, 그렇게…… 하도록…….”
“의도했다는 것이지.”
유채는 할 말을 잃었다. 소파 시트를 우그러지도록 움켜잡은 유채의 머릿속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무게추가 기울어지기를 바란 것이지. 무게추가 기울어지면 금방 혼란이 찾아오거든. 알잖아. 헥터가 일으킨 내전, 그리고 이번에 또 다시 일어난 전쟁.”
“전쟁이 또 일어났어요?”
“내 예상이 맞다면 이것도 그자가 꾸민 일이 틀림없어. 왜냐하면 이 정도의 병력을 벨라토르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거든.”
“그럼 그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건가요?”
“그건 모르지. 내가 그놈 속을 어떻게 알겠어?”
“그리고 제게 이것을 왜 알려주시는 거예요?”
“너, 헤르티아의 말이 거짓일 경우의 대비가 되어 있지 않잖아.”
카넬리안은 정곡을 찔렀다.
“헤르티아의 말은 꽤나 그럴듯해. 하지만 지금 마레 위르, 늑대 일족, 여우 일족 간 삼파전이 벌어진 이상 그게 함정일 가능성이 커. 루프스가 죽고 못 사는 너를 가만히 놔둔다는 것이 이상하지. 내가 헤르티아라면 너를 인질로 붙잡아 루프스의 행동을 제한하겠어.”
유채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헤르티아가 진실을 가지고 너와 협상하려 든 것일 수도 있어. 헤르티아는 네가 루프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니까. 그러니 도와주마. 너를 돕지 않으면 내가 사는 이 땅이 흔적도 없이 증발할 수도 있다는데 기꺼이 도와야지. 그리고 울피누스 호무스에서 조각을 찾지 못한다면 곧장 포트리스로 가도록 해.”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유채는 카넬리안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 정도로 협조를 해줄 줄은 몰랐다.
카넬리안은 괜찮다는 고갯짓을 하였다. 딸의 목숨의 은인인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세한 작전은 밥이나 먹고 다시 세우도록 하자.”
피터와 랄프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알렸다. 주방으로 들어가니 식탁 위에 닭 요리를 메인으로 갖가지 요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블루벨도 동생과 함께 식사를 하러 내려왔고 모두가 식탁 주위에 둘러앉았다.
카넬리안은 음식을 권하고 몇 숟갈을 뜨더니 박수를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말을 안 해줬네.”
피터와 올리비에, 블루벨, 유채가 카넬리안을 바라보았다.
“포트리스의 하워드 형제가 베니니타스의 아들들일 확률이 7할 정도는 돼. 모든 정황이 그들 형제를 가리키고 있거든. 일단, 나이와 외모가 비슷하고 형제가 스티폴로르 본토에서 살았고 그리고 수인 혼혈로 추측되는 뛰어난 신체능력 같은 것을 조합해 볼 때 어느 정도 가능성 있어.”
모두가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떨어뜨렸다. 카넬리안은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내가 바로 인키디움의 전설이야. 내가 찾기로 작정했다면 못 찾을 것이 없다고.”
유채는 스티폴로르에 셜록 홈즈가 있다면 카넬리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플로서스는 반역을 일으키고도 불안에 떨었다. 플로서스는 막사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했다.
“난 정당해. 난 잘못한 게 없어.”
플로서스는 막사를 돌아다니면서 불안한 목소리로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로보의 잘못이었다. 마레 위르에게 피해를 입은 일족은 고려하지도 않고 멋대로 화합을 추구한 로보가 잘못한 것이다. 제 아내가 어떻게 죽었는데! 모두 그 악마 같은 년 때문이다. 그년이 잘못한 것이다.
플로서스는 막사 안에서 정신없이 움직였다.
“난 잘못 없어.”
그는 수인들의 체계를 깨려고 하는 라일라를 벌한 것이었다. 일이 잘못되어서 내전이 일어났을 뿐, 절대 수인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건을 은폐했고 지금까지 그 비밀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카넬리안이 몰래 빼돌려둔 서류를 가지고 도망갔다. 시카리우스의 서류는 일정 기간 동안 파괴될 수 없도록 염소 수인들의 독특한 고유 속성이 걸려 있는 종이를 사용하는지라 플로서스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되는 그 서류를 빼돌려 집에 감추어두었다. 그가 은퇴를 하고 잠적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 서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카넬리안이 서류를 훔쳐갔으니 제가 한 짓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일 것이다. 헤르티아도 루프스도 저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할 것이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말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란텔을 보았을 때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때마침 마레 위르들이 토스 호무스에 침입했다. 플로서스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제 몸을 지키기 위해서 모아놓은 늑대 수인들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마레 위르에게 미쳐서 토스 호무스를 지키지 못한 루프스를 용납할 수 없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대었다.
‘이길 수 있어.’
플로서스는 루프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왼팔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는 거의 이니투스의 환생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절대적인 강함을 자랑했지만 왼팔을 못 쓴다는 것은 큰 약점이 될 터였다.
또한 보고에는 루프스가 앞뒤 재지 않고 마치 곧 죽을 수인처럼 달려든다는 말도 있었다. 루프스는 피투성이라는 그의 이명과는 달리 굉장히 우아하게 전투를 치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군더더기 없이 급소만을 노리는 깔끔한 방식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수인이 된 것처럼 움직인다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지.”
플로서스는 루프스의 이상 행동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 * *
오르페는 루프스의 왼팔 상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 그의 왼팔은 썩어문드러져 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도대체가 상처가 생기기만 하고 낫질 않으니 저도 이렇게 답답할 정도인데 정작 당사자인 루프스는 얼마나 속이 터질지 가늠도 되질 않았다. 문제는 팔의 상태가 적들에게 노출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루프스의 왼팔만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크윽.”
오르페는 팔의 상처를 소독했다. 루프스는 소독만으로도 고통스러워했다. 오르페는 루프스의 강한 마력 저항력이 이렇게 단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체 치유가 되질 않으니 마법적 치료라도 먹혀야 할 텐데 루프스에게는 그것마저 소용이 없으니 답이 나오질 않는 상황이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런 물리적인 처치뿐이었다. “당분간은 팔을…….”
“전쟁 통에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것인가?”
루프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팔을 옷에 끼워 넣었다.
“나가봐라. 수고했다.”
“예. 편히 쉬십시오.”
오르페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루프스는 오르페가 막사를 나가자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침대에 앉았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무려 세 개의 세력을 상대해야 하는 전투에 그는 지쳐 가고 있었다. 그는 그중 플로서스의 세력을 상대하는 것에 가장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그에게 케릭스도 동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하지만 루프스는 그런 생각을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다. 옛날부터 감정을 안으로 삼키는 일에는 능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루프스는 품속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손가락에 유채가 버리고 간 반지가 걸려나왔다. 루프스는 반지를 손에 쥐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유채가 옆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옆에 있었다면 저를 위로해 주었을까? 아니면 꼴좋다고 비웃을까?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었다. 제 옆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그녀가 뭐라고 하든 즐겁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힘들다.”
루프스는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눈을 뜨면 당연히 유채는 없을 것이고 저는 또 절망할 것이었다. 루프스는 그럴 바에는 눈을 감고 환상 속에서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몸도 아프고 정신적으로도 이제 한계에 몰렸다. 검은 물웅덩이에 온몸이 빠진 느낌이었다.
네가 떠나는 것이, 다른 이가 나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
“……무섭다.”
루프스는 일족을 이끌고 보살펴야 하는 자리였다. 애초에 이름까지 버리고 루프스의 이름을 얻는 것은 그 이전의 자신을 버리고 일족만을 위해 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오롯이 홀로 서서 남을 이끌었다. 아무도 그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불행을 겪고 공포를 감내하며 안으로 곪아갔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황홀한 위로였다. 황홀해서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는 위로였다. 눈에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내려 왔다. 그는 눈물을 닦지 않고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루프스는 있지도 않은 유채에게 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에리카를 잃었을 때 그는 자살 충동에 시달렸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살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닥치는 대로 싸움을 하고 다닌 것은 누군가가 저를 죽여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차마 스스로 죽을 용기가 없었다. 드미트리 일당에게 보복을 한 이후에는 더 심해졌다. 살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니니타스에게 혈혈단신으로 찾아간 것도 그가 저를 죽여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 이유가 되어주던 에리카의 복수마저 끝이 나니. 살 이유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런 무모한 짓을 했다. 스승으로서의 마지막 배려였을까? 베니니타스는 저를 죽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그가 더 강했기 때문에 베니니타스를 이긴 것이라고 했지만, 그와 상대해 본 루프스만이 알고 있었다. 베니니타스는 본 실력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저를 봐주었다는 것을. 루프스는 베니니타스 덕에 덤으로 얻은 삶을 꾸역꾸역 살아왔다. 스스로를 속여가면서 억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그때 제가 죽었다면, 어쩌면 유채에게는 더 나은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헤르티아는 유채를 제게 바치기 보다는 돌봐주었을 것이고 그녀의 아래서 유채는 크게 고생하지 않고 돌아갈 방도를 찾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를 믿은 모든 이들은 어떻게 하나.’
그를 믿는 수인들이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도 그를 따르는 수인들이 있었다. 그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이 루프스란 자리의 의무였다. 그가 덤으로 얻은 삶을 꾸역꾸역 살아갔던 이유는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뼛속 깊숙이 박힌 숙명 때문이었다. 일족을 지켜야 한다는 로보 가르침 때문에 루프스는 자신의 자리에서 도망가지 못했다.
“……큭큭큭.”
루프스는 갑자기 실성한 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유채가 저를 싫어하는 것이었다. 저는 그녀를 괴롭게만 했으면서 막상 제가 괴로울 때는 그녀에게 의지하려 했다. 한 번만 위로해 달라고, 한 번만 돌아봐 달라고, 그러니 유채는 제가 끔찍한 것이었다. 저도 스스로가 이렇게 끔찍한데 유채는 더 했을 것이다.
루프스는 얼굴을 두 손에 묻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억눌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지 마.”
제가 스스로의 이기심을 통제하지 못하여 유채가 떠난 것이다.
“제발. 가지 마.”
보이지 않으니 더 유채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끅끅거리는 울음소리가 막사 안에 울렸다. 루프스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린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작전 회의에 참여할 준비를 했다. 붉어진 눈가를 위해 찬 수건을 얼굴에 올렸다.
“루프스님.”
루크레치아가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루프스는 그녀를 등지고 섰다.
“오시는 대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알겠다. 바로 가지.”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그는 한 일족의 수장이었다. 저들을 지키고 이끌기 위하여 루프스는 제 감정을 다시 아래로 눌러 삼켰다. 라이칸을 지우고 그 위로 루프스의 가면을 썼다.
유채는 잠이 오지 않아서 방에서 뒤척이다가 밖으로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는 얘기에 초조해졌다.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어떻게 될 것인지 셀레네가 경고를 했었다.
“여어. 잠이 안 오나 보지.”
유채는 카넬리안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히익.”
카넬리안의 빨간 눈이 어둠속에서 형형히 빛났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놀라는 유채의 앞으로 한 걸음 나온 카넬리안은 흥, 콧방귀를 뀌고는 그녀를 지나쳤다.
“따라와 봐.”
카넬리안은 유채를 데리고 부엌으로 갔다. 카넬리안이 등을 켜자 식탁 주위가 환해졌다.
“따뜻한 우유라도 줄까?”
“예? 괜찮아요.”
유채는 거절했지만 카넬리안은 그녀의 앞에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내주었다. 유채는 멋쩍은 듯 웃으며 우유 잔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소란스럽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카넬리안은 턱을 비스듬히 기대고 유채를 보았다.
“네가 뭘 했기에 루프스를 저렇게 바꾸어놓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평범한 소녀네. 뭐, 정확히 말하면 ‘평범한’ 소녀는 아니지만. 보기 드문 엄청난 미녀야.”
유채는 카넬리안의 말에 겸연쩍어졌다. 카넬리안은 칭찬이라고 덧붙인 뒤에 다리를 꼬았다.
“루프스가 왜 잔혹하다고 불리는지 이유를 아니?”
“아니요. 몰라요. 관심도 없었고요.”
“루프스는 딴 건 몰라도 병사들이 점령지에서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처벌은 확실하게 내린 편이야. 약탈이라든지, 겁탈이라든지 용서하지 않았어. 그중에서도 겁탈은 바로 즉결 처분을 할 정도로 싫어했지. 얼마나 고위 수인이건 겁탈만큼은 그가 직접 나서서 바로 처분했어. 그 점이 수인들의 지지를 받았지. 베니니타스 사후 다시 루프스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많은 수인들이 용인한 이유야. 그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아니?”
카넬리안은 또 다른 것을 물었다. 유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이건 아무리 그가 밉다고 해도 제가 말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몰라요.”
카넬리안은 유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물어도 되니?”
“예? 뭔데요?”
“네가 겪은 일의 일부는 블루벨을 통해서 들었단다. 또 개인적인 정보망으로도 들은 것도 있고.”
“뭐, 비밀도 아닌걸요. 뭐가 궁금하신데요?”
카넬리안이 손톱으로 책상을 톡톡 건드렸다.
“루프스는 너에게 푹 빠져 있는 상태가 분명해.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임에도 너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감수한 것이 많거든. 예를 들어 헥터를 제거한 것, 그를 공격하고 도망간 너를 용서한 것, 너를 죽이라는 여론에도 너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고집한 것, 그것들을 고려하면. 루프스가 너에게 홀딱 빠져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네겐 그게 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 기회를 날려 버린 것에 대한 이유가 궁금하네? 복수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어요.”
카넬리안이 예상한 답이 나왔다. 하지만 뒤이은 설명은 그녀가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내가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에요.”
유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피해자는 언제나 억울하죠. 하지만 그래도 난 내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그것을 권리로 다른 이들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복수를 위해 내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이게 내 최선이에요. 난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난 돌아가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갈 거예요. 그게 내 방식이에요.”
“풋. 그래서 루프스가 널 좋아한 모양이구나.”
카넬리안은 유채가 블랑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블루벨이 꽤 괜찮은 친구를 사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네가 어찌 생각할 것인지는 모르지만, 루프스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 맞단다. 그는 너로 인해 바뀌었다.”
로보가 블랑카로 인해 변했던 것처럼 그도 유채를 만나고 다른 수인이 되었다.
“라이칸은 루프스가 된 뒤에 딱 두 가지를 확실하게 지켰지. 명령 불복으로 인한 처벌, 벨라토르 파견을 통한 일족의 자치권 약화. 이 두 가지는 루프스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예시란다. 하지만 그 외에는 각 일족들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어. 가끔 의례적으로 보여주는 민생? 정도 외에는 말이야.”
카넬리안은 루프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랬던 그가 요새 이상한 일을 하기 시작했어. 인신매매단을 단속하고 관련된 자들을 모두 처벌했지. 그들 중 일부가 꽤나 고위 서열의 수인인지라 반발이 많았지만, 루프스는 각 일족 내에서 처벌이 힘든 그들을 본인이 직접 처벌했지. 그 다음으로 피해자들을 구해내고 그들에게 보상을 하였지. 동물화를 겪는 수인들을 지원하기도 했어. 뱀 수인 일족에게 치료를 받는 데 필요한 비용을 모두 부담하는 식으로. 빈민을 구제하려고도 하고 마레 위르와 수인간의 화합의 분위기를 만들고 저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보상을 하기 위해서 그들의 유족을 찾고 있기도 해.”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라는 건가요?”
“아가씨를 사랑하기에 루프스는 변하기로 한 거야. 제 잘못을 직시하고 바로잡기 시작했다는 것이야. 사죄하기 위해서.”
“그래서 제가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요? 그래요, 그 인간이 나를 사랑한다고 쳐요. 하지만 내가 그 사랑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확실히 말하는데,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내게 집착할 뿐이지.”
“아. 내가 말을 잘못 한 것 같구나. 내 말은 이거란다. 루프스가 너를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니 뜯어먹을 것이 있으면 열심히 뜯어먹으란 거야.”
“예?”
“이대로 당하고만 가면 억울하잖아? 루프스는 네가 원한다면 뭐든 다 해줄 거야. 그러니, 이왕이면 네 성에 찰 때까지 다 풀고 가란 소리야. 그놈은 그래도 싸.”
유채는 카넬리안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루프스가 미워도 한 가지는 기억해 둬. 늑대 일족은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일족이야. 아가씨에게 제 목숨 하나쯤은 기꺼이 바칠 수 있단 말이지.”
카넬리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애는 나를 모르겠지만, 난 그 애를 알거든. 나도 우리 블루벨 때문에 그 애가 곱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블랑카의 아들이니까 이렇게라도 말하는 거야. 난 블랑카와 친했었거든. 나는 마레 위르의 피가 좀 섞였고, 블랑카는 늑대와 개 사이의 혼혈. 또 결론적으론 그 애가 고아가 되게 만드는 데 내가 일조한 셈이라 약간 죄책감도 있고 해서 말이야.”
카넬리안의 어머니는 마레 위르와 토끼 수인의 혼혈로 태어났고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넬리안은 그것으로 온갖 따돌림을 받았다. 그때 그녀에게 구세주가 되어주었던 것이 블랑카였다.
“루프스의 진심이 싫다면 확실하게 거절을 해. 그 마음을 부정하지 말고. 가장 질 나쁜 짓이 불분명한 표현으로 희망을 주는 거야. 그러니, 루프스가 진심으로 부딪쳐 오면 그때는 거절을 해. 목숨 값 빚진 것 털어낸다 치고 분명하게 답을 해줘.”
“옛 친구인 블랑카를 위한 배려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 편할 대로 생각해도 돼. 나는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지지할 생각이란다. 그 애를 가지고 놀든, 그 애를 죽이든 말이야. 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들었거든. 그리고 루프스에게 뭔갈 뜯어낸다면 나한테도 조금 던져 주련? 요즘 저 식충이 까마귀 놈들을 데리고 사느라 생활비가 부족해서 말이야.”
“예. 그럴게요. 어려운 일일 텐데도 저를 도와주겠다 하셨는데 저도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블루벨이 이렇게 복덩이가 될 줄은 몰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쌍둥이로 낳을 걸 그랬어.”
유채는 박장대소했다. 카넬리안은 블랑카가 살아 있었더라면 유채를 며느릿감으로 찍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 내가 작전을 짜는 데 조금 오래 걸려도 한번 짜면 제대로 짜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
“감사합니다.”
카넬리안은 예전 울피누스 호무스에 침입했던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시간이 넉넉했으면 여유 있게 작전을 짜고 제이, 제삼의 대안도 만들고 밑작업도 했을 텐데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카넬리안은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들어가서 쉬어. 괜한 데 신경 쓰느라 체력 소모, 정신 소모 하지 말고. 그래봤자 도움될 거 하나도 없어.”
“감사합니다, 카넬리안…….”
유채가 존칭을 무어라 붙여야 하나 고민하면서 말을 늘이자 카넬리안이 박장대소하며 답했다.
“언니라고 불러. 씨는 딱딱하고 아줌마는 너무 나이 들어 보이니까. 나이 들면 이런 것도 예민해진다니까.”
“예, 카넬리안 언니.”
유채는 킥킥 웃었다. 카넬리안은 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도움이라면 무사히 울피누스 호무스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 * *
카넬리안의 집에 머문 지 거의 일주일이 다 되던 참이었다. 카넬리안은 작전을 세우는 것을 끝냈는지 유채를 불렀다. 유채는 요즘 들어 울적해 보이는 블루벨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지만, 블루벨은 여전히 우울해 하였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블루벨이 자꾸만 저를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유채 양. 누님이 불러.”
피터가 어깨를 두드리며 하는 말에 유채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루벨은 안 보고 있는 척을 하더니 유채가 방을 나가자마자 그녀의 뒤를 쫓았다.
“유채, 앉아.”
카넬리안은 식탁에 커다란 종이를 펴놓고 있었다. 블루벨도 자연스럽게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카넬리안은 보여주는 것은 울피누스 호무스의 수장고의 지도였다. 유채는 눈을 크게 떴다.
“유채, 네 능력이 뭔지는 확실히 이해했어. 이건 내가 기억하는 대로 그린 지도라 정확하지 않아. 그러니 이것 완전히 믿고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울피누스 호무스의 궁 근처로 이동하고 수장고까지는 직접 움직여야 해.”
카넬리안은 수장고 안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던 유채의 기대를 냉정하게 버렸다.) 카넬리안은 지도를 반으로 나누는 듯한 손짓을 했다.
“가능성이 높은 곳은 유채 네가 맡고, 그 외는 내가 할 거야.”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내가 너보다 발도 빠르고, 혹시나 헤르티아에게 들켜도 대처할 수 있어.”
“정말요?”
“유채님, 우리 엄마 말 믿으면 안 돼요. 허풍이 반…… 아앗!”
카넬리안이 블루벨의 머리를 콩 때렸다. 블루벨이 도끼눈을 하고선 대들려고 했지만 카넬리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너무나 평범한 모녀관계에 유채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내가 알고 있는 비밀통로가 있어. 궁을 증축하면서 폐쇄한 곳인데, 수장고와 연결된 길이 남아 있거든. 졸지에 비밀통로가 생긴 셈이지. 그곳으로 들어가면 돼.”
“그럼. 그 앞까지는 권능으로 이동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 덕분에 작전 짜기가 쉬워졌어.”
카넬리안은 수장고에 들어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을 했다. 유채는 영화 같은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비밀 통로로 들어간 후 유채는 카넬리안의 뒤만 잘 따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유채는 괜히 실망해서는 입술을 삐죽였다. 카넬리안은 유채의 마음을 안 것인지 설명을 하다가 풉 하고 웃었다.
“이봐, 아가씨. 이게 엄청나게 스릴 넘치는 일일 줄 알았어?”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그냥, 좀 심심하다고 해야 하나요? 그런 것 같아요.”
“원래 복잡할수록 좋지 않은 작전이야. 그만큼 변수가 많다는 것이니, 그리고 복잡할수록 움직이기 더 힘들어질 거야.”
카넬리안이 유채의 팔뚝을 주물렀다.
“근육은 있지만 몸을 움직이기 위해 개발된 근육은 아니야. 민첩함이 떨어지니 그런 것도 고려해야 하고. 달리기는 빠르지? 그거면 돼. 유채 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능력으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만 생각해. 그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
“하지만, 그건 너무…….”
“엄마, 나도 따라갈게요.”
블루벨이 갑자기 유채와 카넬리안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얘가 미쳤나.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가!”
“왜? 유채님은 되고 나는 왜 안 돼요? 나도 따라갈래요. 위험한 일이잖아요. 한 명이라도 더 가서 도울 수 있으면 되잖아요.”
“이게 지금 회전(會戰)이니? 머릿수로 승부하래? 인키디움 시험 대비할 때 내가 뭐라고 했어!”
“알아요. 근데, 엄마. 내가 인키디움에서 떨어진 건 마지막 면접때문이었지 신체 능력 부족이라는 판정을 받은 건 아니었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갈래요. 나도 도울래요.”
“블루벨.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네가 더 이상 나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것은 원치 않아. 그러니까 너는 여기에 있어. 난 괜찮아.”
“유채님도 절 못 믿으시는 거예요?”
블루벨의 귀가 축 늘어졌다.
“저 유채님이랑 엄마랑 하는 이야기 다 들었어요.”
블루벨은 사실 유채에게 속이 적잖이 상해 있었다. 유채에게 자신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신뢰를 주지 못했나 싶어 속상함과 동시에 유채는 저를 정말로 친구로 생각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유채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를 그저…….”
“난 블루벨이 안전했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너무 위험해서 혹시나 일이 잘못되면 블루벨에게도 피해가 갈 테니까. 블루벨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어.”
“그럼 최소한 제게 말이라도 해주실 수는 있는 거잖아요! 왜 저한테는 얘기해 주신 적 없는 걸 저희 엄마에게만…….”
“블루벨, 너 사랑 싸움하니? 엄마 질투해?”
카넬리안이 끼어들자 블루벨은 입을 다물었다.
“그럼 묻자. 너는 왜 처형을 당하게 됐는데도 엄마에게 말을 하지 않았니? 연락이 힘들어서란 말은 하지 마라. 위급할 때 호출하라고 준 건 왜 안 썼어?”
“……엄마가 위험하니까요.”
“똑같은 거야. 유채도 네가 위험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던 거야. 너는 당연히 도와주겠다고 할 테니까. 엄마가 누누이 말했잖니. 정말 중대한 비밀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게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블루벨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거긴 루프스의 궁이야. 혹여나 누군가 엿듣고 루프스에게 알려 위험해질까 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거야. 안 그래, 유채?”
“예. 어느 정도는요.”
유채는 카넬리안의 통찰력에 크게 놀랐다. 카넬리안은 그렇게 블루벨의 불만을 정리하곤 계속해서 작전을 설명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블루벨이 슬쩍 말을 꺼냈다.
“엄마도 울피누스 호무스에서 찾는 게 있잖아요.”
“뭐?”
“엄마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완벽한데, 한 가지가 없어요. 그때 포트리스에서 누가 그랬는지에 대한 증거 그게 없으면 엄마가 사실을 밝힌들 오히려 공격을 받을 거예요. 엄마가 울피누스 호무스에 직접 들어가려는 거에는 그것도 있잖아요.”
순간 카넬리안은 대답을 못 하고 침묵했다. 유채도 그제야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카넬리안이 보여준 증거에는 플로서스가 독단적 명령을 내렸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결국 플로서스의 독단적 명령으로 위장한 로보의 명령이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유채는 헥터의 아편 공급책이 헤임달인 것을 알지만 그가 확실한 공범인 증거를 찾아야 했다.
“그러니까 나도 따라갈래요. 나도 가게 해줘요.”
“너, 케릭스 때문에 이러는 거니?”
이번에는 블루벨이 입을 다물었다.
“수컷에 미쳐서, 진실을 감추려고 해! 그놈이 플로서스의 아들이라고 감싸주려고? 네가 정말로!”
“케릭스님은 올바른 분이세요. 플로서스님과는 달라요. 엄마는 케릭스님을 보신 적이 없잖아요. 그분은 잘못을 아시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이에요.”
“그래서 네가 따라가서 뭘 하려고?”
“제가 유채님을 지키면서 엄마가 하려던 역할을 할 테니까, 그 사이에 엄마는 그 서류를 찾으세요. 그리고 그 사본을 제게 주세요. 제가 케릭스님을 통해서 플로서스님의 자백을 받아낼게요. 그게 가장 효과적이에요. 지금 이 내전을 막기 위해서는 헤르티아님이 먼저 원한을 풀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플로서스님의 자백이 필요해요. 케릭스님은 제가 설득할게요.”
“너 왜.”
“전쟁이 길어지면 스티폴로르가 더 빠르게 멸망한다면서요. 저도 그건 싫어요. 제게는 수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고 저와 같은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고 수많은 마레 위르들이 대륙의 전쟁을 피해서 안식을 찾은 곳이에요. 그러니까 따라가서 돕게 해주세요.”
“안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왜요!”
“너, 누굴 죽일 수 있니? 그럴 각오가 되어 있어?”
그 말에 블루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카넬리안은 거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거 봐. 넌 그냥 여기 있어라.”
“유채님은요!”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안전하게 피신할 능력을 가진 애와 너는 다르지.”
블루벨은 더 이상 엄마를 설득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유채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유채도 블루벨이 걱정이라 그녀를 외면해야 했다. 블루벨은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랐다.
“블루벨, 미안해.”
“유채님, 나빠요!”
블루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쿵쾅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늘어지게 한숨을 쉰 카넬리안이 유채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위선자지? 옳은 일을 하겠다는데 내 딸이라는 이유로 막고 있는 거잖아. 정작 관련 없는 너는 더한 위험에 몰아넣고.”
“엄마시잖아요. 제 엄마라도 그러셨을 거예요.”
“넌 정말 착한 아이구나.”
유채는 그저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카넬리안은 팔을 길게 늘이면서 탁자에 엎어졌다.
“나는 블루벨에게 인키디움 시험을 권하면서 동시에 그 애가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원했어. 내가 몸담았던 더러운 세상을 내 딸은 알지 않기를 원했어.”
카넬리안이 좋아했던 남편은 그런 수인이었다. 순박한 시골 청년. 작은 개미 한 마리도 배려하던 그가 좋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약해빠진 시골 청년과 사랑에 빠진 것은 그가 자신이 잃어버린 순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제가 저질렀던 잘못에 언젠가는 모두 용서를 구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트레모르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보낸 것도 있지만, 그래도 내 딸은 인키디움에 속하지 않기를 원했어. 나사가 빠졌네, 어쨌네 해도 나는 그런 블루벨이 내 딸인 게 좋았던 거야.”
유채는 딸에 대한 걱정으로 고뇌하는 카넬리안의 손을 잡았다.
“알아요. 블루벨도 알 거예요.”
카넬리안은 작게 웃었다. 왜 루프스가 저 아이를 좋아하는지, 블루벨이 저 아이를 저렇게 따르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 *
“루, 누나는 뭐해?”
카넬리안은 장비를 챙기면서 막내아들 루에게 물었다. 루는 헝겊 인형을 껴안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난 엄마한테 삐쳤다고 자겠대요. 자고 있어요.”
“그래, 알았어. 푹 자고 쉬라고 해.”
“엄마는 언제 돌아오는 거야?”
루가 칭얼대면서 물었다. 카넬리안은 루의 볼을 길게 잡아 늘이면서 대답했다.
“금방 돌아올게. 그러니까 아저씨들 말 잘 듣고 있어. 알았지?”
“피. 알았어요. 첫째 형도 곧 온다고 했으니까. 형 말도 잘 듣고 엄마 기다릴게요.”
“아이구. 우리 아들 기특해라.”
카넬리안이 루를 꼭 끌어안고 부드러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에 볼에 자신의 볼을 비비던 카넬리안이 아들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말했다.
“엄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의젓하게 기다려야 해. 약속.”
“알았어. 약속.”
카넬리안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루와 약속했다. 카넬리안 나름의 다짐이었다.
집 밖으로 나오니 유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나와 있었네. 옷은 잘 맞니?”
“예. 편해요.”
유채는 늘어진 상의를 꼭 여몄다. 나름 전투복이라 움직이기에도 편했다.
카넬리안은 유채의 머리에 꽂힌 머리 장식을 빼내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시 잡아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켜 주었다.
“얼굴은 왜 찡그리고 있어?”
“가방이 조금 무거운 것 같아서요.”
“기분 탓이야. 긴장하니까 사소한 것에도 위화감이 드는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많이 무거우면 내가 들어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들 만해요.”
모든 준비를 끝낸 후 유채는 카넬리안이 일러준 장소를 떠올리며 공간을 찢었다. 카넬리안은 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해하면서 겁도 없이 먼저 틈으로 들어갔다. 유채도 뒤이어서 틈을 통과했다.
공간을 넘어오자마자 울피누스 호무스의 궁이 보였다. 카넬리안은 유채를 뒤에 남겨두고 손으로 돌 벽을 더듬었다. 그녀는 곧 자신이 말했던 그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
“이쪽이야.”
카넬리안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유채는 주위를 살핀 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두운 폐광 같은 길이었다. 천장도 낮아서 네 발로 기면서 유채는 여기서 갇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덜덜 떨었다. 한 곳에서 멈춰선 카넬리안이 위쪽을 주먹으로 두드리더니 벽돌 몇 개를 움직였다. 돌이 치워진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카넬리안은 자신이 먼저 밖으로 나간 뒤에 유채를 끌어 올려주었다.
“수장고다.”
유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소니페스 호무스의 수장고와는 다르게 이곳은 해리포터에 나오는 소원의 방처럼 온갖 잡동사니가 한꺼번에 아무렇지 않게 처박혀 있는 듯했다. 카넬리안은 제 기억을 토대로 만든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유채가 가야 할 길을 일러주고 지도를 넘겼다.
“받아.”
카넬리안은 나뭇잎처럼 생긴, 붉은빛의 천 조각을 유채에게 주었다.
“뭔가요?”
“비상 연락용. 이걸 찢으면 나는 네가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이라 판단하고 네가 도망갈 수 있도록 퇴로를 뚫어줄 거야. 그러니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찢어. 알았어?”
“예, 그럴게요.”
“자, 그럼 시작해 보자.”
유채와 카넬리안은 반대쪽으로 갈라졌다. 유채는 바쁘게 움직였다. 카넬리안과 얘기한 대로 경비원들의 순찰을 돌지 않는 시간이라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했다. 정신없이 물품들을 뒤지고 있던 중 유채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멈칫거렸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자 유채는 긴장한 채로 뒤로 돌았다.
“꺄악!”
유채는 자신을 덮치려는 공격을 몸을 굴러서 피했다. 잔뜩 쌓여 있던 물건들이 쏟아지자 와장창 소리가 났다. 유채는 제 눈을 의심했다. 저를 공격한 것은 전에도 본 적 있는 수인, 볼프였다. 카넬리안에게 듣기로 헤르티아의 곁을 지키는 고위 수인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헉!”
얼른 몸을 일으킨 유채는 루프스가 알려준 대로 그의 급소를 차고 발을 밟았다. 제가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카넬리안이 준 천 조각을 찢기 위해서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지는데 그 사이 볼프가 다시 공격해 왔다.
유채는 볼프의 공격을 피하고 뛰었다. 마법을 쓰려고 하더라도 적당히 떨어진 공간이 필요했다. 유채는 죽을힘을 다해서 달렸다.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유채는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물건들 뒤에 숨어 숨을 골랐다.
“헉. 헉. 이제 다 따돌린 건가?”
“따돌리기는. 내 명령을 충실히 수행해 주어서 너를 이곳까지 몰아왔는데 말이야.”
유채는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제 뒤를 막아버린 여우 수인에 다시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유채의 주위를 여우 수인들이 포위했다. 맨 앞에 헤르티아가 있었다. 유채는 그제야 제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헤르티아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생각한 만큼 멍청하구나. 내 말에 그렇게 쉽게 속다니.”
유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야 알았니? 그건 나도 못 찾았어. 우리 오빠가 그렇게 찾아 헤맨 라일라 언니의 목걸이는 나도 못 찾았어. 늑대 놈들이 가지고 있겠지.”
“그 일은…… 로보가 시킨 일이 아니에요! 라일라를 죽인 건 란텔이라는 늑대 수인이라고요! 그는 지금 벨라토르예요!”
유채는 헤르티아를 설득해 보려 했다. 그녀만 설득할 수 있다면 일이 더 쉬워질 터였다.
“살아보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걱정 마라. 죽이지는 않으마. 하지만 너를 곱게 대해주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구나.”
“사실이에요!”
유채의 뒤에 있던 수인이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유채는 루프스가 알려준 호신술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여우 수인은 유채를 얕잡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허술한 호신술에도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유채는 이때다 싶어 급하게 마법을 시전했다.
“Beatitas.”
엄청난 화염이 주위를 뒤덮었다. 회오리 모양의 화염이 수인들을 쓸어버릴 기세로 몰아쳤다. 유채는 수인들이 당황한 틈을 타서 도망치려고 하였다. 카넬리안이 준 천 조각을 겨우 찾아 막 찢으려던 그때, 주위를 감쌌던 화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디를 가느냐?”
유채는 목을 움켜쥐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유채는 꺽꺽대면서 신선한 공기를 찾기 위해서 바닥을 기었다. 헤르티아는 숨을 쉬지 못해 몸부림치는 유채의 등을 지그시 밟았다.
“마법에도 차이가 있단다. 화염 마법이라니, 좀 놀라기는 했다만 감히 내 앞에서 마법으로 상대할 생각을 하다니 가소롭구나.”
유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유채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난 지금 네 주위의 공기를 없앴단다. 이건 꽤나 힘든 마법이야. 특정 공간만 지정해서 마법을 펼쳐야 하거든. 아무튼, 숨을 쉬지 못하면 당연히 죽겠지? 자, 이제 어떻게 해줄까?”
고통에 몸부림치던 유채가 바닥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러다 이내 눈을 감은 채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자 헤르티아는 곧바로 마법을 풀었다. 하지만 유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죽었습니까?”
“아니. 기절한 것뿐이야. 나도 그 정도는 조절할 줄 알아.”
헤르티아는 품에서 약병을 꺼내서 유채의 입안에 흘려 넣었다. 루프스에게 죽는 것보다도 못한 불행을 선사하기 위해 이 아이는 제 손에 있어야 했다.
헤르티아는 단도로 유채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내었다.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한손에 모으고 머리 장식까지 뜯어낸 헤르티아가 레아에게 명령했다.
“지하 감옥에 가둬. 마법을 쓸 수도 있으니 입에는 마개를 채우든 재갈을 물리든 하고.”
“알겠습니다.”
“저, 헤르티아님.”
아까 유채를 덮치려다가 반격당한 볼프가 멍든 가슴팍을 문지르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은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인질로 쓸 암컷이라면 제가 손을 대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의 속셈을 다 알고 있는 헤르티아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인질이라도 그런 더러운 짓을 하게 시킬 것 같으냐? 명하지. 너희들 중 누구든지 이 암컷의 손끝 하나 건드렸다가는 모두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레아, 이놈들이 레티티아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아라.”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볼프에게 닿았다.
“알겠습니다.”
볼프가 볼멘소리로 대답하곤 뒤로 물러났다.
헤르티아는 흥,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아무리 복수심에 불타도 자신만의 선은 있었다. 그녀도 유채가 아무런 죄 없는 선량한 피해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붙잡아서 입에도 담지 못할 짓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헤르티아의 자존심이고 신념이었다. 헤르티아는 말 그대로 유채를 미끼로만 이용하고 일이 끝난 후에는 포트리스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헤르티아는 다른 여우 수인에게 유채의 머리카락과 머리 장식을 건네었다.
“루프스에게 보낼 선물이니 예쁘게 포장하렴.”
헤르티아의 눈이 광기 어린 기쁨에 번들거렸다.
* * *
루프스는 갑자기 찾아온 헤르티아의 사절에 의아해하면서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헤르티아의 심복인 레아가 화려하게 포장된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이게 무엇인가?”
“열어보시면 알 것입니다.”
루프스는 불안한 기분을 느끼며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상자 안에는 검은 머리카락과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이 들어 있었다. 머리카락에서는 유채의 체취가 났다. 루프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뭔가?”
“헤르티아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루프스님의 보물을 당신이 가지고 계시다고 말입니다.”
레아는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루프스의 몸이 분노로 떨렸다. 종이에는 유채가 감옥 벽에 결박된 채로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 유채의 머리카락은 다시 짧아져 있었다. 루프스는 이게 거짓이나 속임수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뭘, 원하는가?”
“루프스님!”
루크레치아가 소리쳤다.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늑대 일족에게 사랑이란 독과 같은 것이었다. 아니, 제 몸을 좀먹는다는 것을 알아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독보다도 더 심했다. 루크레치아는 발만 동동 굴렀다. 하지만 루프스는 이미 결심을 한 것처럼 결연한 표정이었다.
“살아 있는 레티티아를 만나고 싶다면, 이것을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레아는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었다. 검붉은 액체가 약병 안에서 찰랑거렸다. 루크레치아가 루프스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레아에게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너희가 레티티아님을 죽여놓고 우리를 속이고 있는 건지 어떻게 알지? 레티티아님을 직접 보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신다면, 헤르티아님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원한으로 다른 이들까지 건드리기 싫어서 그간 온건하게 대해주었는데, 나를 믿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레티티아의 시신을 보내겠다고, 말입니다.”
“이미 죽여놓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지?”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다음에 루프스님께서 받는 것은 레티티아의 시신일 겁니다. 저희는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늑대 일족이 반려를 잃는 게 어떤 고통인지 모두가 아는데, 헤르티아님도 루프스님을 그런 지옥에 던져둘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으실 것이라고 하셨으니까요.”
어차피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여우 일족이었다. 루프스는 이미 이성이 날아간 상태였다. 그는 유채의 모습이 투영된 종이와 머리카락이 담긴 상자를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루크레치아를 밀쳐내고 레아에게서 약병을 낚아챘다.
“루프스님!”
루프스는 망설이지 않고 약을 마셨다. 목이 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독약은 아닐 것이다. 헤르티아가 저를 그렇게 쉽게 죽이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었다.
“우욱!”
루프스는 피를 토했다. 검붉은 피를 왈칵 쏟아내고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루프스는 목구멍이 타는 듯한 고통을 억누르고 흉흉한 기색으로 레아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억! 루, 루, 루프…… 스, 님…….”
“가서 네 주인에게 전해라.”
분노에 차서 번들거리는 청회색 눈동자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그의 분노를 대변하였다. 루프스는 당장이라도 레아를 찢어서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유채가 죽을 수도 있었다. 루프스는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분노를 최대한 억제했다.
“만일, 레티티아의 작은 털 하나에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레아는 목을 움켜쥐는 손보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루프스의 얼음 같은 청회색 눈동자가 불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는 옛 정이고 뭐고 상관없이 갈기갈기 찢어서 늑대 밥으로 던져 주겠다고.”
루프스는 레아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레아는 목을 문지르면서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루프스의 기세가 흉흉했다. 분명히 약의 약효가 들고 있음이 분명할 것인데, 루프스는 조금의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먹인 것은 헤르티아가 만든, 신체의 재생 능력을 약화시키는 약이었다. 헤르티아는 루프스의 몸에 재생 능력이 약화시키는 마법이 박혀 있음을 간파했다. 해당 마법이 왼팔에만 적용되는 것을 보고 그 마법이 전신에 적용될 수 있게 하는 약을 만들었다. 물론 마법의 지속시간과 효능이 반감되는 단점이 있지만, 회복능력 약화라는 이점이 더 컸다. 당연히 엄청난 고통이 따를 텐데도 루프스는 피를 토한 것 말고는 멀쩡해 보였다.
레아는 여기 오래 머물다가는 루프스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자리를 떴다. 루프스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쥐고 있었던 주먹을 폈다.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루프스님.”
루크레치아가 급하게 오르페를 불러왔다.
“무슨 약을 드신 것입니까?”
“몰라. 검붉은 색이었다.”
루프스는 약간 느릿하게 대답했다. 목구멍에서 시작된 통증은 이제 온몸으로 퍼졌다. 루프스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통증에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루프스를 부축해서 막사로 들어갔다.
루프스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냄새는요? 무슨 냄새가 났습니까?”
“무취였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어.”
급하게 약을 먹었음에도 루프스는 그것의 모든 것을 기억했다.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으며 혀에 닿았을 때,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었다. 오르페는 루프스의 설명을 듣고 그의 옷을 헤쳤다. 왼쪽 어깨를 살피던 오르페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루프스에게 물었다.
“혹시, 프레드릭 군이 물건을 고치는 것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한 번. 유채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고치더군.”
“이런!”
오르페는 이제야 루프스의 왼쪽 어깨가 왜 이 모양인지 이유를 깨달았다. 예전 아르젠인 스승이 제게 일러준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마레 위르의 에어리얼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 데 그 중 바다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따금 이런 비슷한 증세에 시달리는 수인들을 간혹 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기에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프레드릭이 마법을 부린 것이었다. 유채가 왼쪽 어깨를 찌름으로써 그 마법이 루프스에게 심겨진 것이었다. 어떤 마법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재생 능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약은 제가 판단하기에 몸에 걸린 마법을 전신으로 퍼지게 만드는 약입니다. 주로 마법을 걸어야하는 데, 마력이 부족한 경우에 꼼수로 쓰는 경우에 속합니다.”
“마법?”
루프스는 팔다리가 비틀릴 듯한 고통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전에 유채 양이 왼쪽 어깨에 검을 박아 넣으면서 루프스님의 몸에 마법이 박힌 것 같습니다. 프레드릭 군이 지금 에어리얼 바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예전에 제 스승께서 설명하시기를 시간을 다루는 마법으로 회복 능력을 느리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루프스님이 왼팔이 유독 낫지 않았던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루프스님의 몸에 박힌 마법이 바로 몸에 재생시간에 영향을 미쳐서 지금 왼팔이 이 지경이 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닥터 오르페?”
루크레치아가 오르페의 설명을 듣고 아연실색한 얼굴로 물었다. 루프스는 빠른 속도와 고유 속성을 능숙하게 다루는 근접전 중심의 무사였다. 그와 같은 근접전을 주로 하는 수인들은 상처를 감수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데 오르페의 말대로라면 루프스는 싸움에서 상처를 입어도 그것이 낫지 않을 테니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예. 그래도 다행인 것은 원래 들어있던 마법을 넓게 퍼지게 만들었으니 강도가 약할 것이라는 것과, 마법의 지속시간이 짧아진다는 것 입니다. 프레드릭 군이 마력양을 얼마 넣어 놓았는지는 모르나. 몸 전체에 퍼진다면, 이제 마법의 지속시간은 5분의 1가량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큽니다.”
“이게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일단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게 절망적인 것도 아닙니다. 일단 원인을 알았으니 치료가 가능할 것 같기는 합니다. 구하기 힘든 약초가 들어가고 제조법이 힘들긴 합니다만 잘 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됐다. 결국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 아닌가?”
“예.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습니다.”
“하는 수 없군. 이제 그만 나가라. 머리가 울려서 골치가 아프군.”
루프스는 잠깐 사이에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오르페는 이거라도 먹으라며 진통제를 건네주고 버티고 있으려고 하는 루크레치아를 끌고 막사를 나갔다. 루프스는 그제야 신음소리를 흘리며 괴로운 기색을 보였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아팠다. 약이 온전히 다 퍼지게 되면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 말대로 잠시 후 고통이 잦아들자 루프스는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이게 벌인가 싶었다. 유채가 제 어깨에 검을 찔러 넣을 때에는 유채가 가장 힘들어했을 무렵이었다. 그래, 그때의 벌을 모두 받는 것이었다. 이게 유채가 주는 벌이었다. 이것으로 유채가 편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었다.
“……미안하다.”
지금 몸의 고통보다도, 앞으로 전투에서 불리해지는 것보다도, 그는 유채가 그동안 겪었던 고통이 더 중요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제 죄에 대한 벌은 받으면 그만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을 놓지 못했다. 헤르티아는 저를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유채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걱정되는 것은 헤르티아 아래에 있는 다른 수인들이었다. 유채를 구하기 위해서 헤르티아가 짜놓은 연극의 무대에 올라가야 했다. 극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무대에 올라가야만 유채를 구하고 이 전쟁도 끝낼 수 있을 터였다.
루프스는 쓰게 웃었다.
“네가 주는 벌이라 생각하고 달게 받으마, 네 눈에는 내가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루프스는 저릿저릿한 통증을 무시한 채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나는 너를 구해야겠다.”
헤르티아는 전황을 듣고 소리 높여서 웃었다. 루프스의 움직임이 둔해졌고 몸에 상처가 많이 보인다는 보고에 헤르티아는 제가 만든 약이 효과가 있었음에 통쾌해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제 예상대로 되어가는 것에 기쁘게 웃었다. 슬슬 제가 나서야 할 차례였다.
본래 루프스와 그녀의 전력 차는 둘이 맞부딪친다 한들 헤르티아의 마법이 루프스를 막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둘이 대등하게 붙기 위해서는, 루프스가 약해져야 했다. 헤르티아가 그를 누르기 위해서.
헤르티아는 왕의 자리를 원했다. 울페스가 수인들의 왕이 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로보에 대한 다른 방식에 대한 복수이며, 지배에 집착하는 루프스를 향한 최고의 복수가 될 것이 자명했다. 헤르티아는 루프스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사지를 자르고 지하 감옥에 가두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살게 만들 것이었다.
헤르티아는 루프스가 불행해지길 바랐다. 그러니 그가 죽음으로 도망치기는 원치 않았다.
“레아, 란텔은 어디 있나?”
헤르티아는 전쟁을 시작할 때부터 울피누스 호무스에 있던 벨라토르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두었다. 란텔은 저와 협력한 이였기에 그를 이중첩자로 쓰기 위해서 그를 찾았다. 문득 헤르티아는 유채가 란텔의 이름을 언급한 것을 떠올렸다.
“시카리우스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겼습니다. 금방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을 남겼습니다.”
헤르티아는 유채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아무리 루프스가 레티티아를 아꼈다고 할지라도 벨라토르의 배치 같은 기밀정보를 알려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란텔의 이름을 알았지?
헤르티아는 곰곰히 생각을 하다가 이내 머리를 저었다. 살아보려고 발악을 하다가 아무 말이나 지껄일 것일 확률이 높았다. 란텔의 이름은 이곳에 들어오다가 들었을 수도 있었다. 벨라토르인 란텔의 이름은 울피누스 호무스에서 유명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헤르티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다른 일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이제 출발하지. 루프스를 잡으러 말이야.”
헤르티아는 우아한 웃음을 지으며 빛나는 미래를 꿈꿨다.
* * *
“크흑!”
루프스는 고통에 몸을 들썩였다. 상처가 낫질 않자 오르페는 결국 그의 상처를 불로 지지는 방법으로 봉합하기로 결정하였다. 혹시라도 혀를 깨물 것을 대비했는데도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달군 인두로 상처를 지지자 루프스는 생살이 타는 고통을 참기 위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헉. 허어억.”
처치가 끝나자 루프스는 입에 물고 있던 천을 빼고 숨을 몰아쉬었다. 화끈한 고통에 머리가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오르페는 소독과 다른 조치를 취하였다.
“……물러가도 좋다.”
오르페는 루프스가 정상적으로 말하기 위해 모든 힘을 쥐어짜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그의 몸 상태는 누더기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각했다. 다른 수인들이라면 이미 죽어도 백번은 죽었을 상황을 루프스는 인내하고 극복하고 승리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강자 한 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기에 루프스는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않고 혼자 감내했다. 오르페는 그 어떤 말도 루프스를 위로할 수 없음을 알았다.
“나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시지요.”
루프스는 오르페가 나가자마자 침대에 기절하듯이 쓰러졌다. 루프스는 고통에 몸을 웅크렸다. 그는 유채의 머리카락과 머리 장식이 든 상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루프스는 상자를 열어 약간 마른 유채의 머리카락을 손에 모아 쥐고 코에 가져갔다. 유채의 향이 났다.
몸이 아픈 것보다 괴로운 것은 곁에 유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머리카락에 묻어 있는 향으로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고통을 잊었다. 이 향을 맡을 때면 유채가 제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힘들어.”
루프스는 눈을 감았다. 몸이 망가지는 것도, 지금 겪고 있는 상황도, 유채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 모두가 두려웠다.
“…… 너에게 투정부려서 미안하다.”
루프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유채에게 위로해 달라 조를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그는 유채가 마치 앞에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고는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집착 같고 변태 같지만 유채의 머리카락 한 올도 흘리기 싫었기에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다시 닫았다. 상자 위로 그의 눈물이 떨어졌다.
지친 몸과 약해진 마음은 눈물도 쉽게 보이게 했다. 루프스는 목에서 끓어오르는 울음소리를 삼켰다. 헤르티아에게 찾아가 빌고 싶었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 나를 죽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고 유채는 보내달라고 빌고 싶었다. 유채만 안전하게 그녀의 세상으로 보낼 수 있다면 제 남은 생은 헤르티아에게 기꺼이 맡길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의 소원은 소박했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 사랑하는 암컷과 오순도순 알콩달콩 살기. 그것마저 이룰 수 없게 된 지금, 루프스는 더 작은 것을 원했다.
유채가 안전하게 돌아가기를, 유채가 그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마지막에 잘 가라고, 고마웠고, 정말로 제가 미안했다고 인사를 할 수 있기를.
* * *
유채는 자신이 벽에 결박되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얼마나 오래 시간이 지났는지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몸에 아무런 힘이 들어가질 않고 아래로 축 처지기만 했다. 대처할 방안을 생각해야 하는데, 머리도 멍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유채님!]
머릿속에 블루벨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채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흐릿한 시야에 작은 하얀색 토끼가 보였다. 토끼는 금세 수인 여자아이가 되었다. 하얀 토끼 귀에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는 열쇠로 철창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토끼 소녀, 블루벨은 유채에 입에서 재갈을 풀고 그녀의 입술을 벌려서 입안으로 액체를 흘려보내 주었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헤르티아님 몰래 작전을 다시 세우느라 오래 걸렸어요.”
헤르티아가 유채에게 먹인 약은 일족의 독이었다. 신경독으로 유채의 몸을 마비시킨 것이었다. 치사량은 아니지만 오래 노출되면 위험한 것이 당연했다.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몇 번이나 강제로 복용당했던 유채의 입술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해독제를 드셨으니 이제 괜찮을 거예요.”
“……조금.”
유채는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블루벨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엄마랑 유채님 둘 다 절 안 데려간다고 하셨으니까…… 작게 변해서 몰래 가방 안에 숨어 있었어요.”
블루벨은 따라가겠다는 말을 거절당하자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둘을 몰래 따라갈 수 있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과자로 막냇동생을 끌어들였다. 카넬리안이 루의 말이라면 믿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블루벨은 몰래 유채의 방에 들어가서 몸집을 줄이고 가방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다음 날, 유채가 가방이 무거운 것 같다고 할 때 들통이 나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울피누스 호무스의 수장고에 도착한 뒤에 유채가 물건들을 살피는 틈에 가방에서 몰래 튀어나왔다. 유채와 카넬리안 몰래 블루벨은 바쁘게 수장고를 뛰어다녔다.
유채의 비명소리를 듣고 다급하게 뛰어갔을 땐 유채는 이미 헤르티아에 의해 제압당하고 축 늘어져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블루벨은 당장에 그녀를 구하려 앞으로 나서려다가 멈칫했다.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카넬리안은 언제나 싸움은 유리할 때 걸어야 한다고 했었다. 저렇게 많은 여우 수인들 사이에서 유채를 구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섣부른 개입은 여기 어딘가에 있을 카넬리안의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었다.
블루벨은 이를 물었다. 지금은 이보 전진을 위해서 일보 후퇴해야 할 때였다. 블루벨은 카넬리안에게 배운 은신을 이용해서 레아의 뒤를 쫓았다. 유채를 감옥에 갇히는 것까지 확인한 블루벨은 카넬리안을 찾았다.
블루벨을 보자마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린 카넬리안은 화를 내려다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 속으로 화를 삭였다. 블루벨은 유채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했고, 카넬리안은 헤르티아가 유채를 속이고 붙잡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인 것은 헤르티아가 공범의 존재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카넬리안은 작전을 새로 짰다. 헤르티아가 궁을 비울 때, 블루벨에게는 유채의 구조를 맡겼고 그동안 카넬리안은 대놓고 서류를 훔치면서 병사들의 시선을 돌려서 그들의 탈출을 돕겠다는 것이었다. 카넬리안과 블루벨은 숨어서 때를 살폈다. 나흘이 지나자 드디어 헤르티아가 궁을 나갔다. 블루벨과 카넬리안은 약속대로 작전을 실행했다. 블루벨은 곧장 미리 구해놓은 해독제와 열쇠를 들고 감옥으로 달려온 것이다.
“유채님 물건은 미리 챙겨두었어요. 우리 얼른…….”
그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블루벨, 다시 문을 잠그고 숨어 있어. 지금 들키면 위험해.”
블루벨은 얼른 감옥 밖으로 나가 몸을 숨겼다. 유채는 온몸에 힘을 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척했다. 시간이 없어 다시 재갈을 물지 못한 것이 불안했지만 그것까지 가장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유채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 둘이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괜찮을까?”
“괜찮아. 어차피 좀도둑이야. 그리고 레아님이 자리를 비웠을 이때가 기회야. 지금 아니면 언제 저년을 가지고 놀아보겠냐?”
감옥 문이 열렸다. 둘은 유채를 보면서 야한 농담을 숙덕거렸다. 볼프와 간니오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둘의 손에는 유채의 팔목을 벽에 고정시켜 둔 수갑을 풀 열쇠가 있었다. 간니오가 볼프에게 열쇠를 던졌다.
“어차피 독에 중독돼서 꼼짝도 못하는 년이야. 기회가 왔을 때 즐겨야지. 도대체 어땠기에 루프스가 안달 나서 데리고 다녔는지 보자고.”
“맞는 말이야.”
볼프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유채의 수갑을 풀었다. 유채는 그 손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양쪽 수갑이 모두 풀릴 때까지 기회를 기다렸다. 한쪽 수갑이 풀리자 유채는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간니오가 다른 한쪽의 수갑도 마저 풀었다.
“억!”
유채는 수갑이 풀리자마자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 발차기로 볼프의 급소를 때렸다. 볼프는 무방비 상태에서 급소를 공격당하고는 허리를 숙였고 유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엎어서 매쳤다. 그리고 볼프의 위에 올라타 머리채를 잡아당기곤 난투 중에 깨진 약병의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목줄에 겨누었다. 볼프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이 남자의 목을 찌를 거야. 아무리 수인이라도 목이 베이면 금방 죽겠지? 안 그래?”
“이, 이년이!”
간니오가 볼프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유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한 채 그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간니오의 뒤에 블루벨이 서 있었다.
“유채님 빨리요! 저 수인 금방 일어날 거예요!”
유채는 눈을 딱 감고 볼프의 머리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낮게 비명을 지른 볼프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기절한 것 같았다. 아니면 그저 머리가 어지러워서 일단 정신을 추스르고 있던지. 채와 블루벨은 급하게 감옥을 나와 달렸다. 블루벨이 숨겨놓은 가방을 다시 찾은 유채는 얼른 그 안에서 호신용 단검을 찾았다.
“경비병이 올지도 모르니까 빨리 뛰세요.”
“알았어, 가자.”
유채는 블루벨을 따라서 감옥을 빠져나갔다. 감옥 안의 수감자들이 유채와 블루벨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블루벨은 계획이 틀어진 바람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원래는 감옥의 천장을 통해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볼프와 간니오가 나타나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꼼짝없이 입구를 통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카넬리안이 그 사이 병력을 많이 유인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기다 잡아라!”
소란을 눈치채고 온 것인지 한 무리의 간수들이 유채와 블루벨의 앞을 막아섰다.
“블루벨, 엎드려!”
블루벨은 유채의 말에 착실하게 따랐다.
“Beatitas.”
유채의 스펠과 함께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간수들이 바람에 날려서 벽에 처박혔다.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만반의 준비를 다한 유채는 빠르게 마법을 날릴 수 있었다. 블루벨은 앞이 뚫리자 유채를 끌고 빠르게 달렸다.
“유채님, 곧…… 조심하세요!”
블루벨이 유채를 밀쳐 내자 그 앞으로 여우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유채와 블루벨은 떨어져서 다른 쪽으로 굴렸다. 여우는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다. 두 마리의 여우가 씩씩거리며 유채와 블루벨을 포위했다.
[이 잡년들!]
간니오와 볼프였다. 유채는 단검을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찌를 각오였다. 간니오가 달려들자 유채는 몸을 굴려서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간니오가 바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간니오는 유채가 중심을 잡기 전에 그녀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서 움직였다. 유채는 반사적으로 단검을 치켜들었다.
[크헉!]
간니오의 비명소리와 함께 뜨끈하고 비릿한 액체가 쏟아졌다. 간니오는 다시 수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유채 양! 눈 감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유채는 눈을 감았다. 뭔가 툭 떨어지고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크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 유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유채 양, 괜찮아요. 나예요, 알렉스.”
유채는 알렉스의 목소리에 숨을 헐떡이면서 눈을 떴다. 눈앞에 정말로 알렉스가 서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프레드릭이 블루벨을 부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볼프는 그가 처리한 모양이었다.
“왜? 두, 두 분이 어떻게 여기에…….”
유채가 놀란 만큼 알렉스도 놀란 상태였다. 프레드릭과 알렉스는 헤르티아를 만나기 위해 어릴 적 베니니타스가 알려준 비밀통로를 이용해 궁 안으로 들어왔다. 비밀통로는 지하 감옥과 통하고 있었는데 몰래 들어오던 중 유채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본 것이었다. 알렉스는 앞뒤 재지 않고 곧바로 튀어나와 그녀를 구했다. 덕분에 일이 꼬이긴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알렉스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시 비밀통로로 들어가기는 이제 위험했다.
“서로 궁금한 게 많을 테지만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유채 양의 신변은 제가 보호하겠습니다.”
유채는 하워드 형제를 만나서 놀란 것도 있었지만, 그 형제가 베니니타스의 아들들일지도 모른다는 카넬리안의 말을 떠올렸다. 유채는 다급하게 알렉스의 팔목을 잡았다. 만일 그들이 과거를 기억한다면, 리와인더의 조각이 어디로 갔는지도 알고 있을 수 있었다.
“알렉스 씨. 저 혹시……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뭘 묻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피합시다. 병사들이 쫓아옵니다.”
알렉스는 유채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블루벨과 프레드릭도 상의를 끝냈는지 블루벨이 먼저 앞장서서 달렸다.
유채는 바닥에 쓰러진 두 수인의 시신을 흘낏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감정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유채는 마음을 다잡고 달렸다. 블루벨은 의외의 통로를 찾았다. 유채의 능력을 몰래 이용할 수 있는 지하 감옥의 깊숙한 곳으로 그들은 이동했다.
블루벨은 주위를 돌아보면서 유채에게 말했다.
“엄마가 유채님의 능력을 써서 헤어졌던 그곳으로 오래요. 거기서 엄마가 준 천을 찢으면 금방 찾으러 오겠대요.”
“알았어, 블루벨,”
유채는 공간을 찢었다. 프레드릭과 알렉스는 오라클라 리네아가 섰던 능력과 같은 것을 쓰는 유채를 보고 크게 놀랐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고 넷은 공간의 틈으로 들어갔다.
블루벨과 유채는 무사히 나왔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린 것인지 털썩 주저앉았다.
“유채 양! 일어서요. 숨어야 해요!”
프레드릭이 뭔가를 눈치채고 유채를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유채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데 블루벨도 상황을 파악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카넬리안의 탈출 경로를 보고 병사들이 궁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유채도 상황을 파악하고 우왕좌왕했다. 이동으로 사용하는 권능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블루벨의 유채의 가방에서 로브를 꺼냈다.
“이거 쓰세요. 번화가 쪽으로 가야 추적을 피할 수 있어요!”
유채는 어디에 그 리와인더 조각이 있는 지 정확하기 알기위해서는 카넬리안의 조언이 필요했기에 블루벨의 말에 따랐다. 형제들도 이미 넝마가 되어버린 로브를 최대한 끌어 써서 자신들의 정체를 감추었다. 넷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추적이 가까워지기 전에 얼른 다른 수인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야 했다.
“엇!”
블루벨이 약한 탄성을 지르며 유채를 잡아당겼다. 저 멀리서 한눈에 봐도 꽤나 고위급으로 보이는 수인들이 나타났다. 블루벨을 공격태세를 갖추려는 알렉스를 뜯어말리고 근처의 덤불 뒤로 끌고 갔다. 유채는 덤불 뒤에서 나타난 사람을 살폈다. 검은 머리카락, 까무잡잡한 피부, 루프스만큼 큰 키에 우람한 덩치의 미남. 유채는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에쿠우스 단테였다.
유채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덤불 뒤에서 뛰쳐나갔다. 블루벨이 막을 틈도 없었다. 유채는 단테 앞에 팔을 벌리고 멈춰 섰다. 그의 눈이 커졌다. 그는 헤르티아가 유채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루프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울피누스 호무스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유채가 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유채는 전에 단테가 저에게 사과했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단도도 그가 준 것이었다. 그가 저에게 언제고 보상을 할 것처럼 말했었기 때문에 도박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 나 알죠? 전에 미안하다고 했던 거, 이번엔…….”
단테가 갑자기 유채의 손을 끌어당겨서는 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조용히 속삭였다.
“에쿠우스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의 주인을 보러 왔는데,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을 늦게 들어서.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아닙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우 수인 병사는 에쿠우스의 품에 안긴, 암컷으로 보이는 수인에 관심을 보였다.
“외람되옵니다만, 지금 데리고 계시는 암컷은 누구입니까?”
“이 아이 말인가?”
단테는 이를 악물었다. 둘러댈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믿을지 믿지 않을지 장담을 할 수 없었다. 얼굴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할 수 있는 핑계는 이것뿐이었다.
“내 잠자리 시중을 드는 아이다. 헤르티아에게는 비밀이니 자네도 입 다물게.”
“잠자리 시중이요?”
여우 수인은 숙맥인지 얼굴을 붉혔다. 단테같이 점잖은 이이니 잠자리 시중이라 표현한 것이지 결국은 정부라는 것이었다. 수인들 중에서 잠자리에서 격하기로 소문이 난 것이 말 수인인데 저 작은 몸집의 암컷이 그것을 어찌 감당하는지 궁금했다. 여우 수인은 남 보여 주기 부끄러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헤르티아가 알게 되면 이 아이의 여린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 뻔하지 않겠나?”
“아, 예. 그렇습니까?”
단테는 시치미를 뚝 떼고 여우 수인에게 물었다.
“자네는 왜 갑자기 여길 돌아다니는 건가?”
“에쿠우스님, 혹시 가면을 쓴 토끼 수인 암컷이나, 마레 위르 암컷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네. 대체 무슨 일인가?”
“그러십니까. 아! 헤르티아님이 혹시 단테님이 오시거든 모시라고 말씀하고 가셨습니다.) 일단 궁으로 가시지요.”
“이 아이와 잠시 볼일을 보고 알아서 들어가겠네. 그리고 자네 말이야.”
단테는 품에서 금화를 꺼냈다. 헤르티아와 마레 위르 혼혈인 정부 사이에서 줄을 타고 있는 수컷으로 가장을 했으니 마지막까지 그렇게 연기를 해야 했다. 병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금화를 받았다. 단테는 눈을 찡긋거리면서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함구해 주었으면 하는데. 가능한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병사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금화를 세었다. 사실 수컷 중에 첩을 두는 이들은 많았다. 단테도 어쩔 수 없는 수컷인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었다. 단테에게 정부가 있다는 것이 해가 될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럼 저는 라인하르트님께 단테님의 방문을 알리겠습니다.”
병사가 지나간 후에야 유채는 긴장해서 참고 있던 숨을 이제야 크게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유채 양.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리 둘러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에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루벨과 하워드 형제는 뒤늦게 덤불 속에서 나왔다. 단테는 하워드 형제를 보고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혹시 저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것이라면 자신 있게 헛소문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단테님. 그리고 더 중요한 소식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쭈어도 괜찮습니까?”
프레드릭이 단테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헤르티아와 친해서 어릴 때 잘 따랐던 형이었다. 형제는 언제나 소니페스 호무스의 과자를 잔뜩 가져다주던 친절한 말 수인으로 단테를 기억했다. 어쩌면 단테를 만난 것이 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단테는 정말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포트리스에서 전쟁을 결심하게 된 것은 저 형제들의 죽음 때문이었다. 단테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어머, 단테네. 오랜만이야?”
단테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엄마!”
카넬리안이 피 묻은 검을 털면서 유채와 단테 사이로 끼어들었다. 카넬리안은 삐에로 가면이 쓰고 있었다. 단테는 하워드 형제에 이어서 그녀의 등장에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갈 듯했다. 카넬리안은 단테의 표정을 보면서 낄낄댔다.
“아직도 심약한 애송이네. 몸집만 커선 말이야.”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실종되셨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실종은 얼어 죽을. 멀쩡히 살아 있는 수인이 뭘? 트레모르 놈이 이상한 소문을 냈나 보군.”
카넬리안은 답답한지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단테는 더 깜짝 놀랐다. 인키디움의 실력자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야만 위험한 일을 몰래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키디움에서 대외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수장뿐이었다.
카넬리안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내 딸이 너무 높은 곳에 있는 놈을 좋아해서. 이제 내가 레푸스 좀 돼보려고. 겁쟁이 트레모르보다는 내가 낫지 않겠어?”
유채가 무슨 짓을 한지는 모르겠지만, 단테를 이 편으로 끌어들인 것은 확실했다. 거기에 죽었다고 알려진 하워드 형제의 등장까지. 카넬리안은 턱을 쓸었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지. 호랑이 없는 호랑이 굴만큼 안전한 곳은 없지.”
카넬리안은 몰래 빼놓은 서류를 흔들었다.
“우리끼리 할 이야기도 많이 있고 말이야.”
모두가 카넬리안의 말에 동의했다.
* * *
형제와 블루벨과 유채는 궁관, 궁녀로 위장해서 몰래 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카넬리안은 알아서 단테의 거처로 찾아왔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고 들을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이라 누가 먼저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화통한 성격의 카넬리안이 앉은 대로 말을 하자고 하며 순서를 정해주었다.
첫 번째 순서는 프레드릭과 알렉스였다. 그들은 누구에게 위협을 받았는지를 밝히고 잊고 있었던 과거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가장 놀란 것은 단테였다. 단테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으로 형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형제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단테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게 그 증거입니다.”
알렉스는 루프스가 어릴 적에 제게 주었단 블랑카의 공예품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다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유채였다. 유채는 카넬리안에게 했던 것과 같은 내용을 털어놓았다. 알렉스는 스티폴로르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당황 했고 프레드릭은 구전으로 듣던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에 크게 놀랐다. 단테는 이제는 심장마비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유채는 가방에서 리와인더의 조각을 그려놓은 그림을 꺼내었다. 형제의 눈이 커졌다.
“제가 찾는 물건이에요. 혹시 행방을 아시나요?”
“이건 저희 어머니 목걸이입니다.”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자. 다음은 내 이야기를 듣고 하는 것으로 하지.”
이번에는 카넬리안이었다. 그녀는 다시 조사를 시작한 이유부터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까지 비교적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데에서 굉장히 우쭐해했다. 카넬리안은 가지고 온 증거들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유채는 혹여 단테가 기절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그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단테는 아까 전보다는 멀쩡했다.
“그러니까, 헤임달이 란텔을 이용해서 플로서스를 꾀어내었고 플로서스의 명령을 받은 란텔이 헤임달의 도움을 받아 라일라를 살해하고 그것을 로보의 잘못으로 덮어씌웠다는 것입니까? 거기다 중간에 껴서 이용당한 플로서스가 제 죄가 밝혀지면 죽을 것이 두려워, 그 사실을 은폐해서 지금까지 이 진상이 모두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단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알렉스와 프레드릭 그리고 카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더. 전, 현대 레푸스도 은폐에 동참했어. 이 일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피 보기 싫었던 인키디움의 이기주의가 이렇게 일을 그르쳤지.”
카넬리안은 베니니타스의 아들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내가 제대로 조사를 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너희도 아버지까지 잃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닙니다.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계속 조사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프레드릭은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윗선에서 막은 일이니 무시해도 되었던 일을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카넬리안은 프레드릭의 말에 평생을 지고 가려고 했던 죄책감이 조금은 녹아내렸다. 형제의 말 한마디는 강인한 카넬리안의 마음에 봄비처럼 와 닿았다.
“그리고 유채 양이 말한 이 리와인더 조각이라는 것을 못 찾으면…….”
“스티폴로르가 지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어요. 전쟁까지 일어났으니 그 시기는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크고요.”
“그럼 한시가 급하군요. 전쟁이 이 이상 심화되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단테의 말에 모두가 동의를 했다.
“어쩌면 이 사실로, 최소한 헤르티아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테는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졌다. 헤르티아가 루프스를 증오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루프스가 바로 로보의 아들이란 것. 헤르티아는 로보의 핏줄을 모두 끊어놓겠다는 각오로 살 아 왔다. 그런데 만약 원망의 대상이었던 로보가 무고하다는 것을 안다면 헤르티아는 당장에 행동을 멈출 수도 있었다.
“제가 가서 헤르티아 고모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말보다 직접 대면하는 것이 효과가 크겠지요.”
“거긴 나와 같이 가자꾸나, 벤자민.”
프레드릭은 오랜만에 타인에게 듣는 자신의 옛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전선(戰線)이 위험할 테니 내가 같이 가서 널 보호하고 헤르티아를 설득하는 것을 도와주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렉스 삼촌을 설득하러 가지요.”
알렉스는 렉스 뮈어를 찾아가겠다고 했다. 프레드릭이 혼자서는 위험하다고 반발했지만, 카넬리안이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냐고 묻자 입을 다물었다.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아. 하지만, 방법이 없어.”
“벤자민, 프리드에게는 내가 따로 병사를 붙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프레드릭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으나 납득은 한 듯하였다.
“그럼, 플로서스는?”
“저요. 제가 하면 돼요! 제게 케릭스님을 만나서 플로서스님을 설득하도록 얘기할게요!”
블루벨이 나서자 카넬리안은 이젠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플로서스는 내 딸이 책임지겠다고 하니 저쪽에 맡겨보자고.”
“루프스는 제가 맡을게요.”
유채는 짧아진 머리카락을 낯설게 만지작거렸다. 헤르티아는 저를 이용해서 루프스를 협박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헤르티아를 막는다고 해도 제 생사가 확인되지 않으면 루프스는 그만두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가서 루프스를 말려야 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유채님.”
“능력도 있겠다, 도망쳐 보지 뭐. 수면제나 재갈만 조심하면 나도 탈출에는 문제없어.”
유채는 이번에는 프레드릭과 알렉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때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정말 죄송하고 무례하단 것은 아는데, 이 목걸이의 행방을 알 수 있을까요?”
“헤임달의 여동생인 헬라가 가져갔습니다. 지금도 그녀의 수중에 있고요. 제가 봤습니다.”
프레드릭이 목멘 소리로 답했다. 헬라가 라일라를 죽이고 전리품처럼 가져간 것이 바로 그 목걸이였다. 헬라가 떡하니 그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프레드릭은 그녀와 헤임달에게 분노했다. 자신들이 저지른 살인에 일말에 죄책감도 없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목걸이를 보았음에도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자신이 정말로 한심했다.
“헬라는 아마 포트리스에 있을 것입니다. 헤임달이 워낙 동생을 아끼는 것도 있지만, 헬라 자체가 전투력이 강한 편이 아니라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유채는 루프스를 진정시켜 전쟁을 막고 포트리스로 향하기로 했다. 프레드릭은 그동안 걱정하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채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채 양, 포트리스에 간다면 레이라가 무사한지 확인해 줄 수 있습니까?”
프레드릭은 손목을 쓸었다. 레이라가 무사한 것은 마법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제 걱정을 하고 있을 레이라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유채가 고개를 끄덕이자 프레드릭은 자신의 집과 지하실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자, 그럼 이제 이동이 문제인데.”
단테는 지도를 펼쳐 헤르티아가 있는 곳과 다른 이들이 있을 법한 위치를 찍었다. 헤르티아는 라나투스 호무스에 있었고, 루프스는 유니티오 호무스와 라나투스 호무스의 경계에 있었다. 케릭스는 토스 호무스의 북부에 렉스 뮈어는 독수리 일족의 땅이었다.
“헤르티아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루프스나 렉스 뮈어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케릭스는 자신의 고향 근처에 있고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유채는 권능이 새겨진 손등을 들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여기 있는 이들을 보내고도 한, 두 번은 더 쓸 수 있는 양이 남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단테에게 카넬리안의 유채의 능력을 설명했다. 단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위치만 알려주시면, 제가 바로 공간을 열어드릴게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이동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곧 라인하르트가 이곳에 들어오면 저희도 숨을 길이 없으니, 지금 이동하지요.”
알렉스가 낸 의견에 모두가 동조했다.
“나는 레푸스 트레모르를 만나러 가야겠어. 인키디움의 이름으로 발표가 되면 다른 수인들도 쉽게 믿을 테니까.”
카넬리안은 가면을 다시 쓰기 전 블루벨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모녀의 붉은 눈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둘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는 눈빛만 봐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넬리안이 블루벨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쓸었다.
“엄마도 나이 드니까 약해지나 봐요. 걱정 마요. 무사히 다녀오고 케릭스님을 엄마 앞에 데려다 놓을게요.”
“몸조심해야 한다. 무리 하지 말고.”
“엄마나 조심해요. 괜히 까불다가 사고치지 말고.”
블루벨은 오히려 카넬리안을 걱정했다.
“우리 딸. 다 컸네. 엄마 걱정을 다하고.”
유채는 두 모녀의 대화를 들으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유채의 엄마도 돌아가면 고생했다고, 잘 돌아왔다고 저렇게 따뜻한 얼굴을 하고 맞이해 줄 것이다. 유채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카넬리안은 블루벨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른 이들도 준비를 끝낸 후 유채는 공간을 열었다. 블루벨과 알렉스가 먼저 이동하고 마지막 차례인 프레드릭이 유채를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그리고 몸조심해요.”
유채는 프레드릭을 향해서 마주 웃어 보였다.
“나도 고마워요, 프레드릭 씨. 프레드릭 씨도 몸조심하세요.”
유채는 이어서 단테에게도 인사했다. 그를 믿어도 되나 의심스러웠지만 카넬리안이 뭐라고 하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녀는 카넬리안의 판단을 믿기도 했고 헤르티아의 영역 안에서 저를 도와준 그를 믿어보고 싶었다.
“단테님도 몸조심하세요.”
“유채 양도요.”
프레드릭과 단테를 보내고 난 후 유채는 새로 공간을 찢었다. 그 틈을 넘자마자 진한 피 비린내가 풍겼다. 거기에 살갗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끔찍한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유혈이 낭자했고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유채가 밟고 선 땅 위가 전부 온전하지 않은 시신들 천지였다.
유채는 끔찍한 광경에 기겁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단테는 올바른 장소를 알려줬다. 단, 그 사이에 전장의 위치가 바뀐 것이었다.
크와왕!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뒤를 돌았다. 거대한 여우 한 마리가 덮쳐 오는 것을 보면서도 유채는 당황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유채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감는 일뿐이었다.
[크아악!]
누군가 유채를 품으로 끌어당김과 동시에 여우 수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로 옆에는 사람의 팔이 떨어져 있었다. 유채는 경악했다. 그리고 유채를 품에 안은 이가 그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그녀의 뒷머리를 손으로 눌러서 제 가슴에 얼굴을 묻게 했다. 건장한 체구에 단단한 가슴팍을 가진 남자였다.
“……가지 마.”
유채는 눈을 번쩍 떴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제발, 가지 마…….”
루프스였다. 그녀를 구한 것은 루프스였고 발치에 떨어진 것은 그의 왼팔이었다.
머리가 아득해지는 고통이 머리를 잠식했다. 루프스는 남은 오른팔로 유채를 끌어안았다. 왼팔은 팔꿈치 위에서 지저분하게 잘려나갔다. 이름 모를 여우 수인의 마지막 발악의 결과였다. 유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왼팔을 내어주어야 했지만 그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제 품의 유채가 안전하다는 데에 그는 안도했다.
유채가 나타난 것은 전쟁이 막바지에 치달은 상황에서였다. 여우 일족이 서서히 퇴각하고 있을 무렵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더니 그 사이에서 유채가 나타났다. 루프스는 처음에는 환상인가 싶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퇴각하고 있던 여우 일족 중 하나가 유채에게 달려들었다. 유채는 당황했는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루프스는 저를 막으려는 루크레치아를 뿌리치고 유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미 목숨을 잃게 된 마당에 지독히도 떨어지지 않는 여우 수인을 상대한 대가로 팔 하나를 잃게 되었지만 루프스는 개의치 않았다.
괜찮냐고 해야 할까?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
“……가지 마.”
빌어먹을. 빌어먹을. 괜찮냐고 물어야 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이기적인 마음은 동정을 바라고 소망을 털어놓았다. 이미 둑처럼 터져 버린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제발, 가지 마…….”
헤어지기 싫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유채를 보내기 싫었다. 한 순간도 유채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제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유채의 미소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유채가 있었으면 하였다. 유채가 저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았다.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뭐든 다해줄게…….”
어떻게 해야 유채가 저를 불쌍하게라도 여겨서 남아줄까?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보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 루프스는 비참했다. 수많은 애원도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루프스는 절박했다.
“무릎 꿇고 용서를 빌라고 하면, 무릎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빌겠다. 신발을 개처럼 핥으라 하면 언제나 그렇게 하겠다. 심장을 내놓으라 하면 내 가슴을 갈라 네 앞에 가져다주겠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든지…….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가져다주겠다.”
울지 않으려고 했건만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스러진 연심이었다. 불에 타서 재가 되어버린 가슴의 고통을 숨기고 그는 유채의 앞에서 항상 웃었다. 유채가 배신했건, 거짓말을 했건, 제 마음을 가지고 놀았어도 그는 웃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가 당장이라도 떠날 것을 알기에 그는 고통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웃었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목이 메었다. 하나 남은 오른팔이 덜덜 떨렸다. 왼팔이 잘려 나가서 겪는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루프스의 눈물이 유채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정말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채가 저를 떠난 잠깐 동안도 괜찮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던 것이었다.
“가지 마…… 나를 떠나지 마…….”
그가 사랑했던 이들은 모두가 곁을 떠났다. 이제는 유채도 떠난다고 했다. 이제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았는데, 과거의 그늘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유채를 사랑하기에 밝은 세상을 다시 걸어볼 용기를 냈다. 과거를 돌아볼 용기를 냈다. 그렇게 저를 그 세상에 남기고 왜 유채만 떠나는 것일까. 유채가 있기에 변할 수 있었는데 셀레네님은 잔인하게도 그에게 찾아온 가장 달콤한 것을 다시 가져가려고 했다. 루프스는 제게 닥친 운명이 야속했다.
“제발…… 가지 마…….”
애끓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루프스는 절박하게 유채를 끌어안았다. 하늘에 빛나는 별도 유채가 좋아하는 것이라 좋았고 들판에 피는 들꽃도 유채의 이름과 같기에 아름다워 보였다. 유채가 제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중심을 잃고는 세상을 살 수 없었다.
“네가, 나의 세상이다.”
빌어먹을. 이 말은 하면 안 되었다. 저 혼자 품은 마음을 유채에게 책임지라고 해선 안 되는 것인데. 빌어먹을. 젠장.
“네가, 네가…… 없으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갈 때까지 가버렸다. 애원도 통하지 않으니 이제는 유채의 동정을 바랐다. 유채의 착한 마음에 빌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이 단지 동정심뿐이라는 것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아도 루프스는 유채의 동정심에 빌었다.
“제발…… 가지 마……. 제발…….”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그녀가 떠나지만 않는다면 뭐든 할 자신이 있었다. 자존심 따위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유채의 머리 위에 떨어진 루프스의 눈물이 그녀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루프스의 목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오열이 유채의 귓가에 울렸다. 공포 그 자체였고 큰 산과 같았던 남자가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본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늑대 일족은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일족이야. 아가씨에게 제 목숨 하나쯤은 기꺼이 바칠 수 있단 말이지.’】
유채는 카넬리안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 루프스가 진심으로 부딪쳐오면 그때는 거절을 해. 목숨 값 빚진 것 털어낸다 치고 분명하게 답을 해줘.’】
빌어먹을.
유채는 카넬리안이 말했던 그때가 온 것을 직감했다. 내내 이 순간을 피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유채는 뻣뻣하게 손을 들어 올려서 들썩이는 루프스의 등을 쓰다듬었다. 예전보다 야윈 것 같은 등이 손에 닿자 유채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길에 더 서럽게 오열했다.
* * *
“헤임달 아저씨!”
헤임달은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하던 중이었다. 최소한 루프스만큼은 제거를 해야만 스티폴로르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다. 지금 모든 세력이 모이기 적당한 장소는 바로 에클레시아였다. 헤임달은 그들 모두를 에클레시아로 불러낼 방법을 고심했다. 그러던 중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란텔!”
헤임달은 밝은 목소리로 란텔을 향해서 두 팔을 벌렸다. 란텔은 어린아이처럼 헤임달의 품에 안겼다. 헤임달은 아들을 맞이하기라도 하는 듯 란텔을 꼭 끌어안았다.
그가 란텔을 만난 것은 스티폴로르에 처음 도착한 그날이었다. 스티폴로르와 대륙 사이의 소용돌이를 천운을 타고 건넜던 그날, 바닷가에 굶어서 쓰러진 아이를 만났다. 문헌 속에서나 읽던 수인이었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던 아이가 늑대로 변하자 기겁했지만, 이내 아이가 굶어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이를 살렸다.
란텔은 인신매매로 수인들에게 붙잡혀 간 인간 여인이 낳은 아이였다. 란텔의 아버지는 그녀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거금을 들여 그녀를 구해 돌봐주었다. 란텔의 아버지는 지극정성으로 구애하고 청혼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란텔의 어머니는 이미 수많은 성적 학대로 정신이 망가져 있었다. 그가 왜 그렇게 제게 지극정성인지, 그의 진심을 몰랐다. 사랑에 빠진 늑대 수인과 거부했다가는 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진 인간은 평생 서로의 마음을 몰랐다. 란텔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그날 목을 매서 자살했다. 란텔의 아버지는 슬픔에 시름시름 앓았고 란텔이 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 사망했다.
혼혈이라는 이유로 아버지 쪽 친척들은 그를 돌보는 것을 꺼렸고, 란텔은 버려졌다. 그렇게 떠돌다가 포트리스로 들어왔건만 상황은 똑같았다. 역시나 혼혈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학대받던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헤임달이었다.
헤임달은 란텔에게서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은 아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를 돌보았다. 란텔은 저를 맹목적으로 의지했고 결국 제 일을 돕기 위해 시카리우스에까지 들어갔다. 헤임달은 란텔을 쓰다듬었다.
“그래. 일은 잘 해결되었고? 몸은 괜찮으냐?”
“괜찮아요, 아저씨. 아저씨는 언제나 정정하시네요.”
“이 녀석 못하는 말이 없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일이 힘에 부치더구나.”
“설마요. 아직도 이렇게 정정하신데요.”
헤임달은 파이프에 담뱃잎을 꾹꾹 눌러 담았다. 란텔이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파이프에서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헤임달은 해가 지고 있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의 일도 저 지는 해처럼 얼마 남지 않았다. 가족의 복수를 하겠다는 열망으로 악귀가 되어서 아득바득 살아왔던 삶도 이제 정리할 때가 된 것이다. 그 가증스런 오를레앙을 드디어 제 손으로 벌할 수 있게 되었다. 헤임달은 허탈하게 웃으면서 란텔에게 물었다.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았던 곳이고 네 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동족인데, 안타까운 감정은 없느냐.”
“없습니다.”
란텔은 담담하게 말했다.
“모두 저를 버린 이들입니다. 한 번도 아쉬운 적 없었습니다.”
헤임달을 만나기 전의 비참한 삶 동안 그는 독기를 품었고 세상을 저주했다. 그러니 이딴 섬 하나쯤 없어져도 상관없었다.
“헤르티아가 그 계집애를 붙잡았다고?”
“예. 가서 몰래 빼올 생각입니다. 루프스와 렉스를 끌어들일 기회가 되겠죠.”
“렉스에게 루프스가 아끼는 암컷을 잡았다고 알려주면 루프스를 잡을 기회라고 좋아 할 테지. 적당하게 꾀어내어서 회전의 장소를 에클레시아로 정하면 되겠구나.”
“루프스도 제 암컷이 잡혀 있다는 것을 알면 눈이 돌아서 에클레시아로 달려올 것입니다.”
“헤르티아는 물론이고 마레 위르에게 제 성역이 더럽혀진다고 분노한 수인들도 달려오겠지.”
각 세력이 얽혀서 아수라장이 되었을 그때, 헤임달은 루비 조각의 힘을 이용해 그곳을 폭파할 생각이었다. 싸움에는 별 소질이 없는 아이였으나 여러 가지 잡다한 마법에 능했다. 세라는 자신의 고유 스펠을 이용해서 마력을 고도로 농축해서 넣어 그 힘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마법을 조각에 걸었다. 그렇게 된다면 루프스를 비롯한 수인들과 마레 위르들의 강자 대다수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왔니?”
“아저씨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란텔이 헤임달의 어깨에 기대었다.
“레티티아를 잡아오면 이젠 아저씨를 지킬게요.”
“그래.”
“우리 모든 일이 끝나면 모두 잊고 대륙에 가서 행복하게 살아요.”
란텔의 말에 헤임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유채는 치료받고 있는 루프스를 바라보았다. 오르페는 절단면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신체가 잘리는 고통은 상상이 안 갈 정도였다. 저 루프스마저 신음을 참지 못하는 것에 유채는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막사 안 여기저기를 훑어 보았다. 그러다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상자를 열었는데 그 안에 제 머리카락과 머리 장식이 들어 있었다.
“레티티아.”
치료를 마친 오르페가 막사를 나간 후 루프스는 유채를 불렀다. 유채는 어색한 동작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유채가 다가가자 루프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그의 한손에 가득 들어왔다.
“팔은…….”
“어디 다친 곳 없나?”
루프스는 유채의 말을 끊고 그녀의 몸을 살폈다. 그의 손가락이 유채가 목을 긁어서 생긴 상처에 닿았다.
“괜찮나?”
“별거 아니에요.”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치웠다. 루프스는 반사적으로 다른 손을 뻗으려고 하였으나 자신에게 남은 팔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씁쓸하게 웃었다. 루프스는 품에서 블랑카의 반지를 꺼냈다. 그가 한 손으로 다시 반지를 끼워주려고 낑낑거리는 것을 유채는 가만히 받아주었다.
“내 어머니의 유품이다.”
유채의 눈이 커졌다. 토스 호무스를 떠나며 이 반지를 바닥에 내던졌던 게 생각이 났다.
“사랑하는 암컷이 생기거든 그 암컷에게 주라고 말씀하시더군.”
루프스는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내 마음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받아달라는 것도 아니다.”
루프스는 눈을 감았다.
“그저 알아달라는 것이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넬리안의 말대로 거절을 해야 하는데,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채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나…… 라일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아요.”
유채는 루프스에게 프레드릭과 알렉스 그리고 카넬리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이야기를 끝낸 유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가해자에 가까운 그였지만, 이 일에서만큼은 그는 완전한 피해자였다. 유채는 차마 울지도 못하고 몸만 떠는 루프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울고 싶으면 울어요.”
루프스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유채는 그와 눈을 마주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도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슬프잖아요. 그러니까 울어요.”
루프스는 유채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당신은 울 자격이 있으니까.”
유채는 그를 위해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강한 팔이 유채의 허리를 안고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침대에 눕혀진 유채가 놀라서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등에 묵직한 무언가가 닿고 곧 어느 한쪽이 뜨거워졌다. 유채는 몸을 굳혔다.
“잠시만, 이렇게 있어줘.”
그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보가 저지른 짓으로 인한 라일라와 프리드, 벤자민 형제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로보의 결백을 믿지만 그것이 그저 아들로서 아버지를 믿는 이기심인가 싶기도 했었다. 진실을 알고 나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로보는 결백했다. 루프스는 마음 한켠을 붙잡고 있던 족쇄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등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동안 유채는 가만히 있어주었다. 시간이 흐르자 루프스의 울음소리도 점점 잦아들고 막사 안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이 풀리는 듯하자 유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이 든 것인지 눈을 감고 있었다. 유채는 그의 팔을 치우고 일어나 앉았다.
“이런 때 말할 수밖에 없는 내가 비겁하다는 거 아는데, 나한테는 이 방법밖에는 없네요.”
유채는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루프스가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으려고 했던 사실에는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저를 구하기 위해 팔이 잘리고도 제 안부만 물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조금은 봐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난 아직도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당신을 영원히 용서 못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그 마음은 분명히 진심이라는 것은 알겠어요.”
이제는 그에게 예의를 갖추어 확실하게 거절해야 할 때였다. 유채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 이제는 그도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미안해요. 난 당신 마음 못 받아줘요.”
유채는 루프스의 머리맡에 반지를 내려놓았다.
“당신하고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유채는 루프스의 왼팔 위에 손을 올렸다. 권능의 빛이 루프스의 왼팔을 감쌌다. 권능은 루프스의 내상은 물론이요 시간핵의 후유증까지 온전히 치료해 주었다. 유채가 손을 거두자 루프스의 팔까지도 원래대로 돋아난 상태였다.
“그동안 구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유채는 잠든 루프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요.”
유채는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뜬 루프스는 눈물만 주룩 흘렸다. 그는 머리맡에 놓인 반지를 움켜쥐었다.
유채를 붙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채는 제 진심에 답을 해주었다. 그는 유채의 답을 존중해야 했다. 유채가 그의 감정을 존중해 주었듯이. 루프스는 입술에 닿았던 유채의 감촉을 곱씹었다.
이게 결과였다. 그가 짊어져야 할 업보였다.
유채의 말대로 좋은 인연으로 만났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건데. 너무나도 후회가 되었다. 루프스는 보답받지 못할 마음을 끌어안고 눈물만 흘렸다.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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