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늑대왕 루프스-15화 (15/16)

Chapter 15. 포트리스 [Fortress]

하늘은 어둡고 새벽빛을 내고 있었다. 유채는 찬 바닷바람을 맡으며 포트리스에 발을 내디뎠다. 번화했던 토스 호무스와는 다르게 이곳은 소박한 풍경이었다. 유채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프레드릭이 알려준 집을 찾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프레드릭이 경고했던 대로 혹시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 했다.

‘어! 저기다!’

유채는 프레드릭의 집을 발견했다. 잠시 떨어진 곳에서 몸을 숨기고 그의 집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판단이 든 후에 유채는 빠르게 그 집으로 다가갔다. 창문 틈으로 안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부엌, 깔개 밑에 통로가 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간 유채는 프레드릭의 말대로 부엌의 깔개를 들추었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시동어를 읊었다.

“클라위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것 같던 바닥에 지하실의 문이 나타났다. 유채가 문을 열자마자 날카로운 창이 아래서 솟아올랐다.

“엄마야!”

유채는 가까스로 창을 피하고 옆으로 굴렀다. 자칫 잘못했으면 턱이 뚫릴 뻔하였다. 유채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계단을 올라오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화려한 금발머리에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여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여자는 올라오자마자 유채의 목에 창을 들이대었다. 유채는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올렸다.

“누구야?”

여자, 레이라가 낮게 물었다. 유채는 오해를 풀기 위해 다급이 입을 열었다.

“프레드릭 씨가 보내서 왔어요!”

“프레드릭?”

레이라의 창끝이 파렌티아와 부딪쳤다. 레이라는 여자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파렌티아였다. 그제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레이라가 창끝을 거두었다.

“레티티아? 아니 유채라고 불러야 하나요?”

“제 이름은 한유채예요.”

“난 레이라예요. 반가워요.”

레이라는 머뭇거리더니 아까부터 목 끝까지 차오르던 것을 물었다.

“프레드릭이랑 알렉스는 무사한가요?”

“예. 둘 다 무사해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안도한 레이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유채는 레이라를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레이라는 유채의 품에 안겨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알 것 같아서 유채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마나 프레드릭과 알렉스를 걱정하고 불안해했을까

한참을 울던 레이라는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유채의 어깨를 잡았다.

“누가 이곳에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지하실에서 이야기해요.”

“알겠어요.”

유채는 레이라보다 먼저 지하실로 내려갔고 레이라는 바깥을 경계하면서 유채가 덮개를 들추기 전의 상황으로 만들어놓고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실은 생각보다 아늑했고 넓었다. 마치 지하 벙커 같은 느낌이었다. 유채는 지하실을 둘러보다가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는 갓난아이를 보았다.

“내 딸 레베카예요.”

유채는 레베카가 깨지 않도록 숨을 죽였다. 아이는 엄마가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지 그저 새근새근 잠에 들어 있었다. 레이라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레베카를 돌봤다. 유채는 레베카를 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가방을 뒤졌다.

“프레드릭 씨가 이거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어줄 거라고 했어요.”

레이라는 유채가 내미는 손수건을 받아서 펼쳤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프레드릭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는 손수건이었다. 레이라는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프레드릭이 증거랍시고 내놓을 만한 것이었다.

“난 평생 사냥 일만 해서 수놓는 것 같은 여성스러운 일은 잘 못해요. 이건 내가 프레드릭에게 선물하고 싶어서 손가락이 겨우겨우 고생해서 만든 거예요.”

“아. 그런 거였구나.”

유채는 둘 사이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새벽에 왔으면 졸리겠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유채는 손을 저었다.

“그러지 말고 좀 자두는 것이 어때요. 지금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데요.”

유채는 레이라의 말에 눈두덩을 문질렀다. 독에 중독되어 있다가 겨우 해독제를 먹고 또 쉴 틈도 없이 움직였다. 피곤하지 않다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쉴 시간이 없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하기 위해서는 몸도 생각해야죠. 몸이 피로하면 어떤 일도 할 수 없어요.”

유채가 망설이는 사이 레이라는 그녀의 어깨를 매만졌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비쩍 마른 몸에 창백한 입술, 핏기 없는 얼굴색까지. 막 병석에서 일어난 병자라고 해도 믿을 꼴이었다. 이렇게 움직이다가는 금방 쓰러질 것 같아 보였다.

“좀 자요. 유채 양은 지금 쉬어야 해요.”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정 불안하면 내가 아침 준비할 때 깨워줄게요.”

지금껏 정신력으로 버텨온 유채는 결국 레이라의 말에 수긍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금세 깊은 잠에 빠져 곯아떨어졌다.

죽은 듯 미동도 않고 자고 있던 유채는 레이라가 깨우는 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레이라가 유채에게 스프를 건네었다.

“먹어요. 배고프잖아요.”

“감사합니다.”

유채는 간만에 잠도 실컷 자고 배도 채웠다.

레이라는 옆에서 레베카에게 젖을 물렸다. 순한 아이인지 칭얼대지 않고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유채는 아이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는 등 아이에게 재롱 비슷한 것을 떨었다. 레이라도 모처럼 기분 좋게 웃었고, 아이는 엄마의 젖을 먹고 또 다시 잠에 들었다.

“저, 레이라 씨…….”

유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레이라도 알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부인이니 그가 진짜 누구이고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놀라지 말고 잘 들으세요.”

레이라는 유채의 말에 머리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유채의 이야기를 들은 레이라의 표정이 점차로 심각해졌다. 프레드릭과 알렉스가 사실 베니니타스의 아들들인 벤자민과 프리드이며, 라일라는 헤임달의 공작에 의해서 죽었고, 형제는 헤임달의 하수인인 란텔에 의해서 위험에 처했다가 살아남아서 지금은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헤임달!”

레이라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자가 나도 죽이러 왔었어요!”

“예?”

놀란 유채에게 레이라는 그간 포트리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형제의 죽음이 한 벨라토르가 벌인 일로 알려지고 포트리스에서는 전쟁에 대한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레이라는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고 왜 이 지하실에 숨어들었는지를 설명했다. 유채는 헤임달 일당의 악행에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헤임달은 확실하게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레이라까지 자살로 위장시켜서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헤임달은 내내 알폰소와 세라를 보내서 이 집을 감시했어요. 나는 프레드릭이 걸어놓은 마법으로 밖을 살필 수 있었기에 알아요. 그들은 나를 죽이려 했고 지금 그들은 이곳에 있는 수인과 인간들 전부를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수인과 인간 전부를요?”

유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레이라는 대담하게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들은 당신을 인질로 붙잡아서 모든 수인들을 에클레시아로 불러들이고 마법을 이용한 폭탄으로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폭탄의 재료로 헬라의 목걸이를 사용해야 하는데, 헬라가 목걸이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아서 골치라고 하더라고요. 간신히 헬라가 목걸이를 주어서 서랍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 목걸이를 뺏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저 혼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어요.

“하. 세상에.”

유채는 외마디 탄식을 하였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라고 학살에 가까운 미친 짓을 벌이려는 것일까. 헤임달의 계획이 성공하면 이 스티폴로르는 끝장날 것이 분명했다. 지금 전쟁으로 리와인더의 조각이 얼마나 오염되었을지 알 수 없는데 그런 일까지 벌어지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게 분명했다.

한시가 급했다. 유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아야 했다.

“나도 같이 가요. 먼저 필립 장로님의 집에 들러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드려야 해요. 온건파 중에는 필립 장로님이 가장 행동력이 빠르시니까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에요.”

“필립 장로요?”

유채는 지난번에 본 적 있는 노인을 떠올렸다. 회담장에서 저를 깎아내리는 말을 했던 그 꼬장꼬장한 노인이 분명했다.

“괜찮아요. 성격이 괴팍해도 잔정 많으신 분이고 유채 양의 말을 믿어주실 거예요. 그러니 필립 장로님부터 설득하고 가요.”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레치아는 루프스의 막사에 들어가자마자 크게 놀랐다. 분명 어제의 싸움에서 잘려 나갔던 그의 왼쪽 팔이 완벽하게 원상 복구되어 있었다.

루프스는 왼쪽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루프스는 자신의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었음을 깨달았다. 본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를 잃는 대가로 회복된 몸에 쓰게 웃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하겠지만, 묻지 마라. 내가 나중에 알려주겠다.”

루프스는 제 입으로 유채가 저를 고쳐 주고 떠났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유채가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공격보다는 방어로 태세를 전환해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우 일족을 벌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피해를 줄이겠다는 말이다.”

유채의 말에 따르면 전쟁은 곧 멈출 것이다. 그리고 그 헤임달이라는 마레 위르를 처벌하고 과거, 독단적으로 명령을 내려 일을 키운 플로서스를 벌해야 했다. 그러니 더 이상의 희생은 불필요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전쟁을 빨리는 끝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전쟁은 곧 멈출 것이다.”

루프스는 제 입으로 플로서스와 헤임달의 관계를 폭로할 수 없었다. 로보의 아들인 제가 그런 말을 해보았자 자식이 부모의 허물을 감싸려고 하는 거라고, 수인들은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플로서스의 독단이라고 발표를 해도 로보가 명에 그가 죄를 뒤집어쓴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것이 뻔했다.

유채가 말했다. 곧 카넬리안이 인키디움을 통해서 정식 발표를 할 것이라고. 인키디움의 말이라면 수인들도 믿을 것이다. 전쟁은 멈출 수 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번 전쟁은 개인의 원한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니, 그 원한이 풀리면 당연히 멈추겠지.”

“예?”

루크레치아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만 혼자 있겠다. 일이 있으면 그때 불러라.”

루크레치아는 별말 없이 나갔다. 루프스는 루크레치아가 나가자 품속에서 반지를 꺼냈다. 울다가 지쳐서 잠든 것은 어릴 적 이후로 처음이었다. 루프스는 잠에서 깨자마자 유채를 찾았다. 모두 꿈이었기를 바랐지만 항상 현실은 그를 배반했다.

남은 것은 그녀가 두고 간 반지뿐이었다. 루프스는 그제야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을 직시했다. 루프스는 침대에 앉아 반지만 매만졌다. 이 반지가 그의 마음이었다. 그의 연정이었다.

“……너에게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다를 바 없겠지.”

루프스는 조용히 읊조렸다. 자신은 여기서 그녀의 불행을, 눈물을 모두 받아줄 것이니, 유채는 그곳에서 오롯이 행복 속에서 웃으며 살기를 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이름을 불러줄 것을. 그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유채’라고 부르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안 것이었다. 그녀를 ‘유채’라고 부르면 그날부터 그녀에 대한 소유권도, 그 무엇도 주장할 수 없음을. 그래서 겁이 나서 부르기 싫었던 것이다. 레티티아라는 이름은 유채를 그녀를 잡아둘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다. 그래서 루프스는 끝까지 유채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유채.”

차마 겁이 없어서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 이름에 그리움과 애틋함을 담았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눈물이 다시 비집고 올라왔다. 루프스는 반지를 꽉 쥐었다.

“유채.”

유채의 이름은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단어의 또 다른 표현이 되었다. 그의 눈앞에 유채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겁에 질려서 떨던 모습, 제게 화를 내던 모습, 차갑게 돌아서던 모습, 무표정하니 냉랭했던 모습, 저를 안쓰러워하던 모습, 울면서 애원했던 모습, 모두가 죄책감이 되었고 미안함이 되었고 슬픔이 되었다. 제가 기억하는 유채의 모습이 이런 것밖에 없다는 것에 미칠 것만 같은 후회가 밀려왔다.

유채가 환히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그녀의 미소는 루프스에게 기쁨이 되었고 행복이 되었고 사랑이 되었고, 아쉬움이 되었다. 조금만 빨리 알아차릴 것을,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줄 것을. 그랬다면 유채도 그렇게 수많은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채의 웃는 모습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보다 제가 유채에게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이 더 미안했고 슬펐다.

“사랑해.”

수없이 속삭였던 말을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넘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여기서 너를 위해 불행해지겠다.’

그렇게라도 해서 유채의 마음이 풀린다면, 그녀가 덜 괴롭다면 기꺼이 불행을 감내할 것이다. 그게 유채에게 사죄하는 길이고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면.

“네가 나를 스쳐 지나가도 나는 이곳에서 홀로 너를 그리며 살아가겠다.”

마치 유채를 앞에 둔 것처럼 루프스는 담담히 읊조렸다. 이 말을 들으면, 유채는 웃을까? 아니면 조금은 안타까운 얼굴을 할까? 아니, 이젠 어느 쪽도 상관없었다.

평생을 걸려도 잊지 못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그리움에 눈물을 흘릴 것이고 그녀의 흔적을 찾아 맴돌 것이다. 제 기억 속에 유채는 언제나 젊고 싱그러울 것이며 사랑스러울 것이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는 유채를 제 세상의 중심으로 기억할 것이다.

‘평생 너만을 사랑하고 너만을 그리며 살아가겠다.’

루프스는 감은 눈을 떴다. 그 어디에도 유채는 보이지 않았다. 막사 안에 남겨진 것은 그 혼자였다. 앞으로의 삶도 그럴 것이었다. 유채는 제 곁에 없을 것이고 그는 그녀를 추억하며 수없는 불면의 밤을 홀로 외롭게 보낼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곳에서 행복해라.”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슬프고 슬프지만 그의 진심이었다. 그것이 그의 남은 삶이었다.

* * *

블루벨은 케릭스가 있는 전선으로 왔다. 카신은 케릭스를 인질로 삼아 플로서스에 대적하려고 이곳까지 그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제 아들이 루프스 측에 인질로 있는 상황에도 플로서스는 별 동요가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대응에 대해 들었을 때, 케릭스도 마찬가지였다. 카신은 이렇게 삭막한 부자 관계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블루벨 양.”

카신은 저를 찾아온 귀여운 토끼 수인 소녀를 보면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케릭스를 만나게 해달라는 저 토끼 수인이 케릭스의 연인이라는 것은 카신도 알고 있었다. 그간 어찌나 케릭스가 싸고돌았는지 카신은 그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 것이다.

“케릭스를 만나고 싶다고?”

“예. 전해 드릴 말이 있어서요.”

순진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것인지. 카신은 해맑은 표정으로 케릭스를 만나겠다고 하는 블루벨의 말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못 만나게 할 것은 없지만, 저 아이가 저 해맑은 얼굴 뒤에 무슨 속셈을 숨기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블루벨은 카신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좀 전과 다를 것 없는 얼굴로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제가 케릭스님을 데리고 탈옥할까 봐 걱정되시면, 같이 계셔도 돼요.”

“왜? 케릭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개인적으로 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닌 건가?”

“모두가 알아야 하는 이야기이지만, 케릭스님이 가장 먼저 아셔야 하는 이야기예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블루벨은 케릭스가 플로서스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듣고 충격받기를 원치 않았다. 케릭스는 생각보다 마음이 여렸다. 만약 그가 아버지의 죄를 여과 없이 듣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힘들어 할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알려주고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플로서스를 막겠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블루벨에게는 그것보다 케릭스가 더 중요했다.

“그렇게 해라. 카신, 정 불안하면 그 아이 말대로 같이 가서 감시하면 되지.”

막사의 천막을 들추고 빅터가 들어왔다. 블루벨은 전대의 카니스인 빅터를 보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빅터는 블루벨을 힐끔 돌아보았다. 소문으로 듣기에 유채의 유일한 버팀목이라고 하였다. 이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곧 유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 분명했다. 빅터는 본의 아니게 유채가 다시 루프스에게 끌려가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것 같아서 그녀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를 다시 돕고자 하는 것이다.

카신은 블루벨이 여전히 탐탁지 않았지만, 빅터가 그러자고 하는 데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카신은 블루벨을 데리고 케릭스가 갇혀 있는 막사로 갔다. 막사 안에는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있는 케릭스가 있었다. 케릭스는 블루벨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블루벨!”

케릭스가 움직이자 무거운 추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케릭스는 얼른 블루벨의 앞으로 다가섰다.

“괜찮은 거냐? 어디 다친 구석은 없고?”

“예. 전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도 없어요. 유채님이랑 무사하게 궁을 빠져나왔는걸요.”

“다행이다. 다행이다.”

케릭스는 안도했다. 블루벨이 유채와 함께 달아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채에게 질투심이 들었다. 블루벨의 우선순위는 유채인 것 같아서, 자신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정말 비참하기도 했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반정까지 일으켰다는 데에 케릭스는 순식간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블루벨은 거뭇거뭇한 수염이 가득한 케릭스의 턱을 만졌다.

“관리 좀 하시지.”

“네가 걱정되어서 그랬다.”

“흠. 흠.”

카신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노총각인 그는 블루벨과 케릭스의 건전한 애정행각이 심히 거슬렸다. 카신은 헛기침을 두어번해서 주의를 제 쪽으로 돌렸다.

“블루벨 양. 얼른 용건을 말해주었으면 하는데.”

“아, 예. 죄송해요.”

블루벨은 케릭스에게 카넬리안과 프레드릭, 알렉스가 들려주었던 모든 이야기를 말했다. 케릭스뿐만 아니라 카신과 빅터도 그 이야기에 크게 동요했다.

케릭스의 손이 볼썽사납게 떨렸다. 그는 블루벨이 증거로 가지고 온 서류들을 벌벌 떠는 손으로 살폈다. 명백하게 플로서스의 짓이었다. 빅터 역시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서 있었다.

로보의 잘못이 아니란다. 로보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란다.

빅터는 로보가 라일라를 살해하라 시켰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베니니타스의 말에 넘어갔고,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로보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다. 빅터는 무고한 로보의 죽음을 사주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블랑카가 죽었다.

그때, 로보를 믿었더라면……. 블랑카의 일에 눈이 멀어 그를 믿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빅터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했었다. 베니니타스가 로보를 죽여주길 바랐다. 그때 제가 조금만 더 생각하고 그들을 믿었다면 이런 비극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 아버지가…….”

그래서 반역을 일으킨 것이었다. 케릭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는 결국 과거의 잘못이 드러나 제가 죽을까 봐 루프스에게 반기를 든 것이었다.

블루벨이 손이 케릭스의 볼에 닿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케릭스는 블루벨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역시 알고 있는 답을 다시 물었다.

“케릭스님이 생각하시기에 옳은 것을 선택하세요.”

블루벨은 케릭스의 볼을 잡고 들어 올렸다. 케릭스의 눈이 블루벨의 눈과 얽혔다. 케릭스는 블루벨의 손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내가 이 사실을 밝히면…… 나는 네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거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네게 맛있는 것도 제대로 사줄 수 없게 될 텐데 그래도 넌…….”

“사랑해요, 케릭스님”

케릭스의 눈을 번쩍 떴다.

“제가 케릭스님을 사랑한 이유는 케릭스님의 외모도, 재력도, 권력도 아니었어요.”

물론 먹을 것 때문에 가까워지기는 했지만요. 블루벨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케릭스는 먹먹한 눈으로 블루벨을 바라보았다. 블루벨은 예의 그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저는 보잘 것 없는 토끼 수인 궁녀가 죽을까 봐 냉궁을 몰래 살펴주시던 친절한 케릭스님이 좋았어요.”

그가 말한 것처럼 외모가, 재력이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였다면 이런 상황에서까지 일족이 다른 그에게 이렇게 절박한 마음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채를 위험하게 했던 케릭스를 마음에 담아서 수많은 번민에 휩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케릭스가 좋았다. 그의 순수한 마음과 배려가 좋았다.

“제가 좋아한 건, 보잘것없는 소녀를 배려해 주신 케릭스님이지, 늑대 일족의 차기 이인자가 될 케릭스님이 아니었어요.”

블루벨은 케릭스의 볼을 쓸었다. 케릭스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블루벨의 마음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래서 블루벨이 좋았다. 작은 호의에도 기뻐하고 그게 보답을 해주려 하는 블루벨이 좋았다.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케릭스님이 도와주셨잖아요. 이번엔 제가 도와드릴게요. 저한테 맛있는 것 못 사주시면 어때요. 이제는 제가 만들어 드리면 되지요.”

블루벨은 헤헤 웃었다.

“그리고 유채님 말이 저희 집 가난한 거 아니래요. 그러니까 저희 집으로 오세요. 엄마가 사위를 마음에 안 들어 해서 구박은 하시겠지만 제가 막아드릴게요. 그러니까 저희 집으로 오세요. 우리 둘이 살아요.”

생전 울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케릭스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블루벨은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케릭스는 블루벨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결심을 한 것인지 허리를 곧게 폈다.

“카신님.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뭐?”

“아들로서 아버지가 죗값을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하겠습니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그랬다가 네가 플로서스에게 붙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나? 플로서스는 네 아버지야! 너, 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있나?”

“아버지의 죄를 제게 책임지라 하신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대치를 끝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카신과 케릭스가 팽팽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그 사이에서 블루벨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케릭스님을 보내주시면 제가 인질이 될게요.”

“블루벨!”

케릭스가 고함쳤다. 블루벨은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전 케릭스님을 믿어요.”

“좋아. 저 아가씨가 대신 남는다면 너를 보내주지.”

카신은 블루벨이 케릭스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블루벨의 목숨을 담보로 삼으면 케릭스도 쉽게 플로서스 편에 붙지 못할 것이다. 케릭스 역시 늑대 일족의 수컷이니까. 카신은 단호한 눈동자로 케릭스를 바라보았다.

케릭스는 번민했다. 블루벨은 괜찮다며 웃었지만 여기에 블루벨을 혼자 두었다가 안 좋은 꼴을 당할까 걱정이 되었다.

“블루벨이 걱정이라면 내가 그 아이를 보호하마.”

빅터가 제안했다. 케릭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빅터를 믿어도 되는 것인가?

카신은 성급한 얼굴로 케릭스에게 말했다.

“어차피 저 아가씨가 다치면 레티티아님 때문에 나도 죽을 거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갔다 와. 나도 담보 하나는 있어야 널 보내주는 데 명분이 있을 것 아니냐.”

케릭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작별 인사는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카신은 케릭스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가 손목의 쇠고랑을 풀어주자 묵직한 철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손이 자유로워지자 케릭스는 블루벨의 볼을 붙잡고 입술을 맞추었다. 블루벨의 눈이 커졌다. 카신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케릭스는 블루벨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처음으로 하는 입맞춤에 블루벨은 당황했다. 하지만, 처음임에도 그가 얼마나 자제하고 신사적으로 나오는 것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긴 입맞춤 끝에 케릭스는 입술을 떼었다. 블루벨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금방 다녀오마.”

“기다릴게요.”

블루벨은 발돋움을 하여 케릭스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내내 기다리던 카신은 눈꼴셔 하며 이제 그만 좀 하고 얼른 떨어지라고 훼방을 놓았다.

빅터는 내심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래, 사랑이란 것은 그런 것이었다. 상대를 믿고 기다리는 것. 블랑카를 무작정 제게 데려오려고만 할 게 아니라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그녀가 스스로 제게 오게 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질투에 눈이 멀어 로보를 없애려는 마음을 풀었다. 그래서 블랑카는 저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 비극은 바로 자신의 잘못이었다. 빅터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제 죄를 갚아야 할 때였다.

* * *

파렌티아를 목에 걸고 온 계집애와 죽은 줄 알았던 레이라가 제 집에 나타났을 때, 필립은 그날이 제 제삿날인줄 알았다. 레이라가 죽었다는 말에 술을 마시며 얼마나 울었던가? 필립은 레이라를 아꼈다. 꼬장꼬장하고 괴팍한 늙은이라고 모두가 피하려고만 하는 그에게 유일하게 밝게 인사해 주고 말벗이 되어준 아이였다. 필립은 레이라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뻤고 헤임달이 저지른 짓에 분노했다.

“그러니까 아가씨 말은, 헤임달 놈이 십사 년 전의 내전부터 그 모든 일을 기획했다는 것이지? 레프스 사건까지?”

“예.”

“헥터를 조종해서 아가씨가 몹쓸 일을 당하게 해 수인들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것도?”

“예.”

필립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레이라라는 확실한 증인이 있고, 프레드릭과 알렉스라는 또 다른 증인도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고 프레드릭과 알렉스가 나타나 자신들이 살아 있음을 밝히기 전까지는 헤임달의 죄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무모하게 나섰다가 헤임달 놈이 역습을 하면 그것도 큰일이었다. 그가 무슨 힘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모든 전력이 지금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이상 일단은 몸을 사려야 했다. 온건파 장로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할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팠다. 필립은 노구를 의자에 앉혔다.

“일단 레이라 너는 내 집에 숨어 있어라. 아가씨도 마찬가지야.”

섣불리 나섰다가는 레이라의 목숨만 위험해질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벌인 배짱이라면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포트리스에 남아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할 수도 있고 유채를 붙잡아 루프스를 상대로 협박을 하려 할 수도 있었다.

“아니요. 전 헤임달의 집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 있어요.”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려는 사람에게 조각이 있다. 조각의 악기가 더 심해지기 전에 그것을 찾아야 했다.

필립은 턱을 쓸었다. 그놈들의 목적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저 아이는 아주 좋은 미끼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위험한 일을 하려 했다. 무엇 때문이냐고 물어도 유채는 대답을 하지 않다.

필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젊어서 무모한 것인지. 아니면 겁이 없는 것인지. 아무튼 요즘 젊은것들은 조심성이 없어요.”

“필립 장로님!”

필립이 이해를 못 하겠단 듯이 중얼거리는 말에 레이라가 질겁을 했고, 유채는 화를 내지 않았다.

“무모해서 그래요. 그리고 급한 일이라 지체할 시간이 없기도 하고요.”

“지금 아가씨 처지가 어떤지는 알아?”

필립이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지금 루프스가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즉 아가씨만 붙잡으면 루프스를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이야.”

“……저도 알아요. 그들에게 붙잡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죠.”

“제 분수를 잘 아는군. 그럼 몸이나 사려. 괜히 나서서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들지 말고. 헤임달 놈을 벌하고 싶거든 전쟁이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고 그 물건도 전쟁이 끝난 다음에 찾아도 늦지 않아.”

“그러면 늦을지도 몰라요.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필립은 끙 하는 소리를 내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확실히 강단 있는 아가씨였다. 아무리 말려도 하겠다고 결심했으면 몰래라도 나가서 할 아가씨였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위험할 가능성을 줄여주어야 했다.

“아가씨, 헤임달은 곧 배를 타고 고기를 낚으러 갈 거야. 그놈의 의동생인 알폰소가 같아 갈 거고. 그럼 집에는 헬라와 세라만 남고, 그 둘도 밭일을 나갈 거야. 그럼 그때 집이 비겠지.”

필립의 말에 유채는 눈을 크게 떴다.

“머리가 있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을 찾으면 어떻게 할 거야?”

“바다에 버릴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신은 일을 다 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은 한 적 없었다. 유채일이 끝나면 그녀가 곧장 저를 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셀레네가 제 힘을 조금이라도 아끼려면 유채를 빨리 돌려보내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유채는 블루벨과 마지막 인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가야 해요. 일을 마치면 전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거거든요.”

“유채 양, 그래도 유채 양 혼자 가는 건 위험해요. 그리고 위험해지면 우리가 구해줄 수도 없잖아요.”

“저 혼자 가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요. 헤임달이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길길이 날뛸 테니 제가 성공한 건 금방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실패하면 조용하겠죠.”

유채의 말에 필립이 덧붙였다.

“그건 걱정 마라, 레이라. 헤임달은 저 아이를 죽이지 못해. 루프스를 협박하려면 저 아이가 살아 있어야 하거든. 헤임달 고것은 지금 그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있고 전쟁을 더 크게 키우는 것이 목적이니. 저 아이를 붙잡으면 장로들에게 알릴 거야. 내가 잘 알아보마.”

장로들은 그녀를 이용하여 포트리스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한 방어 수단이 생겼으니 포트리스에 남겨놓은 병력마저 렉스에게 합류시킬 것이다. 전쟁이 더 커지는 것이 헤임달이 바라는 바이니 그는 분명히 유채를 잡으면 장로에게 알릴 것이다.

“그러면 다행이구요.”

“그렇다고 해도 위험한 건 사실이잖아요. 저랑 같이 가요.”

“아니에요, 레이라 씨. 레이라 씨는 레베카를 돌봐야죠.”

레이라는 유채가 레베카를 언급하자 입술을 짓씹었다.

“그럼 장로님. 혹시 장로님이 움직일 수 있는 병사라도 붙여주시면 안 되나요?”

“그건 위험할 거다. 병사들이 움직이면 헤임달이 눈치채고 오히려 우리가 당할 수 있어. 지금은 아무도 움직여선 안 되는 상황인데 저 아가씨가 지금 고집을 피우는 거다.”

“시간이 없다고요!”

남의 속도 모르고 움직이면 안 된다고만 하는 필립의 말에 유채는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리와인더의 조각이 악기를 품고 언제 터질지 몰랐다. 머뭇거리고 있을 틈이 없단 얘기였다.

“그래. 알고 있으니까 일단 때를 기다려. 오늘은 때가 좋지 않으니 내일 가. 오늘은 위험해. 네 입장에서도 더 안전한 것이 낫지 않니?”

“알겠습니다. 하지만 더는 못 미뤄요.”

유채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필립은 유채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채는 권능으로 헤임달의 집 근처로 이동했다. 헤임달의 집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멀리 동떨어져 있었다. 유채는 근처의 창고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그의 집을 살폈다. 이내 헤임달과 알폰소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집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사라진 후 이번에는 퉁퉁한 몸집의 여자 둘이 집에서 나왔다.

유채는 그들까지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헤임달의 집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창문 안쪽을 살피는데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유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꺄악!”

유채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에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고 바닥을 굴렀다. 빠르게 중심을 잡고 선 유채는 눈에 긴 상처가 있고 엉덩이에는 잘린 꼬리를 가진 수인을 보았다. 유채는 직감적으로 그가 바로 란텔임을 알아보았다.

“윽.”

란텔은 유채가 마법을 쓸 시간도 주지 않고 공격했다. 유채는 그를 피하려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유채는 덜덜 떠는 척을 하면서 앉은 채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뒤로 숨긴 손으로 흙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굳이 그를 이기려 할 필요가 없었다. 유채는 란텔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으윽!”

유채는 란텔의 얼굴에 손에 쥐고 있었던 흙을 뿌렸다. 그사이 유채는 집 밖으로 달아났다. 란텔을 따돌렸다고 생각한 유채는 곧장 공간을 열어 아까 보아둔 헤임달의 집 안으로 이동했다.

유채는 다급하게 물건을 찾았다. 설마 그런 물건을 가지고 다니진 않을 것이다. 분명히 이 집 안에 있을 것이다. 유채는 레이라의 말을 믿고 서랍을 뒤졌다.

“잡았다. 이 쥐새끼!”

미처 놀랄 틈도 없이 유채는 뒷목에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사내놈들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반반한 외모였다.

“형님 말이 맞았어. 진짜로 우리가 나갔을 때 찾아오네.”

일을 나가는 척했던 헤임달과 알폰소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알폰소는 유채의 몸을 뒤집었다. 투영된 그림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예뻤다.

“운이 좋았어. 안 그랬으면 큰일날 뻔했지.”

헤임달이 중얼거렸다. 유채가 무사히 프레드릭의 집으로 들어가 레이라를 만난 것은 알폰소가 세라와 교대를 위해서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만일 그 지하실에서 유채가 쉬지 않고 곧장 움직였다면 헤임달 등은 영영 유채가 포트리스에 온 것도, 레이라가 거기에 숨어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운은 헤임달의 편으로 돌아왔다. 알폰소와 교대하고 프레드릭의 집을 감시하던 세라는 프레드릭의 집에서 레이라와 웬 여자가 같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급하게 뒤를 쫓았다. 그들은 곧장 필립의 집으로 향했고, 세라는 도청마법으로 모든 것을 들었고 그것을 헤임달에게 알렸다.

헤임달은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분노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베니니타스의 아들들이 살아 있을 줄이야. 그가 정교하게 짜놓은 작전들이 그들의 생존으로 모두 망가지기 직전이었다. 헤임달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아직 기회가 있었다. 루프스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유채가 필요했다. 헤임달은 유채를 잡아들이기 위해서 집을 비우는 척을 했다.

다행히 란텔이 있었기에 일이 쉬워졌다. 헤임달과 알폰소는 배를 타러 나가는 척을 했고 헬라는 에어리얼 환영의 마법으로 자신과 세라가 집을 나가는 환영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전대로 유채를 붙잡았다.

“약부터 먹여서 몇 시간은 일어나지 못하게 해.”

헬라는 수면제를 꺼내서 유채의 입술을 벌려 목 안으로 흘려 넣었다.

“란텔.”

란텔은 늑대로 변해서 유채의 등을 깊게 할퀴었다. 피부가 찢어지며 유채의 등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헬라가 찢어진 옷을 거칠게 벗겨내었다. 그리고 그 옷을 등의 상처에 비벼 잔뜩 피를 묻혔다. 헤임달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바지는 그냥 둬?”

“그래. 알폰소, 확실하게 말해두는데 이 애를 건드릴 생각 마. 베르나도테 공작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이 애는 처녀인 상태여야 해. 란텔, 늑대로 변해서 저 옷을 물어뜯고 밟아서 망가뜨려. 알았지?”

란텔은 옷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헤임달은 작전을 바꾸었다. 그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수인과 인간을 죽이려는 것이었으나 일이 약간 틀어져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 대신에 주력부대와 실력자만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다 보니, 처음의 예상보다 더 많은 지원이 베르나도테 공작에게서 필요했다. 베르나도테 공작이 지원을 줄지 안 줄지 모르는 상황이니, 저 아이를 공작의 침실에 바쳐 그의 환심을 사야 했다. 일전에 유채의 그림을 공작에게 보였을 때 그는 분명 흥미를 보였었다.

“세라. 리차드가 어디쯤 도착했다고 했지?”

리차드는 헤임달이 세라, 란텔과 함께 기른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렉스의 부대에 있으면서 렉스의 일거수일투족을 헤임달에게 알려주었다.

“라나투스 호무스를 통해서 에클레시아로 가고 있어요. 에클레시아에서 여우 일족과 협공해 늑대 일족을 포위하기로 약속한 상태라 몰래 가서 함정을 준비하고 전열을 다듬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루프스를 에클레시아로 유도하는 것은 여우 일족이 맡기로 하고요.”

에클레시아라면 여우 일족과 말 일족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수로 압도를 해서 루프스를 포위해 끝장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늑대 일족은 현재 세 무리를 상대하느라 루프스가 속한 부대는 인원이 적은 편에 속했다. 승산이 높았다.

“편지와 함께 옷을 리차드에게 보내.”

“알았어요.”

헬라는 귀중한 상품이 될 유채의 상처를 깨끗하게 소독해 주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둘러 치료해 주었다. 헤임달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프레눔으로 만든 마력 구속구를 유채의 목에 채웠다.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애초에 마법의 사용을 원천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채를 포대 안에 집어넣어 입구를 묶었다. 숨구멍은 뚫어놓았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이 아이를 제가 데리고 있다는 것을 감춰야 했다. 어업을 끝내고 들고 오는 포대자루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었다. 또 저 아이에게 물어볼 것도 많았다. 혹시 그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저 아이가 가지고 있을 지도 몰랐다. 헤임달의 유채의 몸이 들어있는 포대를 들쳐 메었다.

“헬라 너는 밭일 나갔다가 돌아오는 척을 하고는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호들갑을 떨어 알겠지?”

“알았어, 오빠.”

“형님. 공작이 안 받는다고 하면 나 주는 것 잊지 않았지? 너무 험하게 굴지는 마 숨구멍 제대로 뚫어놨지? 죽으면 안 된다고.”

알폰소는 포대 안에 들어 있는 유채의 몸을 더듬었다. 헤임달은 알폰소의 행동을 제지하고 배로 가서 포대를 거칠게 배 위에 내던졌다. 그리고 곧 배를 출항시켰다.

헤임달은 약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유채를 아편 창고 안에서 꺼냈다. 유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 헤임달은 혹시나 싶어 그녀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숨이 옅었다. 구멍을 뚫어놓았어도 포대 안에서 숨 쉬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헤임달과 알폰소는 유채의 손목을 묶어 천장에 매달아놓았다. 유채의 발이 허공에 떠서 흔들거렸다.

헬라는 약속대로 도둑이 들었다고 온 포트리스에 광고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 소문은 필립의 귀에도 들어왔다.

“헤임달 씨 집에 도둑이 들었나 봐요. 헬라가 목걸이가 없어졌다고 하소연하더라고요.”

“에이. 그 집도 참. 하여간 그 여편네는 칠칠맞지 못하다니까.”

필립은 혀를 차면서 속으로는 안심했다. 레이라도 소식을 듣곤 유채가 성공한 것에 안심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었다. 부디 유채에게 이제는 험한 일이 없기를 바랐다.

* * *

루프스는 호위로 아리아만을 데리고 렉스를 만나러 갔다. 렉스가 진실을 알아서 저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렉스는 자신의 최측근 몇만 데리고 서 있었다. 그는 저를 향해 걸어오는 루프스를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마른 것 같은 그 모습에 렉스는 제가 들고 잇는 것을 한번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이군, 렉스 뭐어.”

루프스는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로보의 억울함을 처음 알았을 땐 베니니타스와 렉스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를 마주하게 된 지금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 역시 누군가의 음모에 휘둘린 가련한 처지라는 것에 동질감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유채로 인해 닳고 닳아버린 마음이 더 이상 누군가를 원망할 정도로 회복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루프스는 렉스를 담담한 눈으로 마주했다.

렉스는 예상외의 태도를 보이는 루프스에 당황했다. 그가 왜 이렇게 차분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곧 생각을 바꿨다. 그가 어떤 태도를 보이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받아라.”

렉스는 그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던졌다. 루프스는 그가 던진 천 조각을 받았다. 루프스의 눈이 커졌다. 유채의 옷이었다. 흙바닥에 구른 듯이 망가지고 찢어진 데다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은 것인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루프스의 눈이 이글거렸다.

“……네가!”

“나는 아무 잘못 없다. 난 그저 다친 여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구해줬을 뿐이지. 네 녀석의 파렌티아가 걸려있는 여인이더군. 그 레티티아던가?”

루프스는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은가? 괜찮은 건가?”

“상처가 심각해서 숨만 겨우 붙어 있더군. 치료하고 포로들을 가두어놓는 곳에 두었다. 살아 있으니 걱정 마라. 좋은 인질이지 않나?”

렉스 엊그제 여우 일족으로부터 레티티아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어제 리차드를 통해서 헤임달의 편지를 받았다. 포트리스 근처에서 웬 여자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시신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라 얼굴도 확인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목에 파렌티아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마틴의 술주정으로 들은 그 레티티아가 아닌가 싶어서 도움이 될까하여 옷을 벗겨서 보냈다는 것이었다.

렉스는 그 편지를 읽곤 혀를 찼다. 레티티아의 존재는 장로들 중 몇몇만이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 가여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헤르티아에게 받아온 정보를 장로들에게만 넘겼는데, 마틴이 또 술김에 정보를 흘린 것이다. 그래도 나름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헤임달이 이런 귀중한 것을 보내지 못했을 테니까.

렉스는 왜 헤임달이 장로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나 싶었지만, 그는 그것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장로들에게 알렸다가는 신원을 확실하게 확인하자는 명목 하에 제때에 그 사실이 렉스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 겁이 났다는 것이었다. 제때 소식이 닿지 않아 리차드가 죽을까 걱정이 되어서 장로들에게 알리기 전 먼저 전한다고 적혀 있었다.

“예쁘더군. 네가 왜 안달을 내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지.”

“제발! 이제 그만하자!”

루프스는 유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괴롭히려면 저만 괴롭히면 될 것이지 왜, 유채까지 끌어 들이냐는 말인가!

“너도 듣지 않았나? 내 아버지는 라일라님을 살해하지 않았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두 렉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렉스는 그 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런 거짓말을 지껄이는 것인지. 렉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헛소리 집어치워!”

렉스가 쩌렁쩌렁 소리 질렀다.

“네놈이 알렉스와 프레드릭을 죽여놓고, 그 애들의 이름을 빌어서 거짓을 고해? 감히 나에게? 네놈은 정말 상종할 가치도 없는 놈이구나. 제 죄도 모르고…….”

“사실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굳이 너에게 하겠는가. 그러니, 이제 그만하자. 더 이상의 피는 무의미할 뿐이다. 그러니 이제 제발 그만하자.”

루프스는 잔뜩 지친 표정이었다. 렉스는 루프스의 연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저 가증스러운 입을 찢어놓고 싶었다. 렉스는 이를 갈았다. 감히 프레드릭과 알렉스의 이름을 올리며 그들이 프리드와 벤자민이라고 말하는 저 뻔뻔한 태도에 흔들리면 안 된다. 저놈의 세 치 혀가 하는 거짓말에 휘둘려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렉스는 검을 움켜쥐었다.

“네 소중한 여자를 돌려받고 싶다면, 앞으로 사일 뒤 에클레시아로 와라. 너 혼자. 그럼 그 여자를 돌려주마.”

이것은 함정이었다. 그리고 루프스도 바보가 아니니 그것을 알 것이다. 그래도 루프스는 올 것이다. 그게 늑대 놈들의 사랑이었다. 렉스는 그가 혼자 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혼자 오려고 하겠지만 늑대 수인들이 그를 혼자 보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렉스는 루프스와 그의 부대를 제거하는 데에 포트리스 병력의 절반을 소모할 각오까지 했다. 그만큼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렉스는 쓴웃음을 흘렸다.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출발한다. 목적지는 에클레시아다.”

렉스는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렉스와 함께 움직인 사람들 사이에 있던 리차드는 몰래 매를 날려 헤임달에게 보내었다. 이것이 헤임달에게 보내는 마지막 보고가 될 것이다.

루프스는 얼굴을 쓸어내었다. 여우 일족의 본진과 가까우며 심지어 여우 일족과 연맹관계에 있는 말 일족과 가까운 곳이 에클레시아였다. 분명히 포위 섬멸전이 될 것이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유채를 버려둘 수는 없었다.

“아리아.”

루프스는 아리아를 불렀다. 더 이상의 출혈을 바라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한 명의 수인이기 이전에 루프스였다. 늑대 일족을 책임져야 하는 군주였다.

“루크레치아에게 전해라.”

왜, 운명은 이렇게 가혹한 것일까? 폭력을 좋아하지 않던 소년을 살인자로 만들고, 친구를 원수로 만들고, 누구보다 착했던 여동생의 선량했던 오빠는 복수귀가 되었다. 루크레치아의 말이 맞았다.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여우 일족에 대한 공격을 다시 개시하고 말 일족의 개입을 막아라. 최대한 여우 일족의 병력을 줄여야 한다고 루크레치아에게 전해라. 그리고 플로서스를 막고 있는 병력의 일부를 끌고 와라.”

루프스는 유채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에클레시아에서 회전을 준비할 것이다.”

훗날 역사에 기록될 에클레시아 대회전(大會戰)의 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 * *

“젠장할!”

알렉스는 숨을 몰아쉬면서 욕지기를 뱉었다. 단테의 정보대로 공간을 넘어왔지만 렉스는 이미 그곳에서 이동한 후 였다. 알렉스는 전쟁으로 마레 위르에 대한 반감이 강해진 독수리 수인들을 피해서 몸을 숨겼다. 렉스가 어디로 이동했을지를 추측해야 했다. 알렉스는 몰래 훔쳐온 지도를 바위에 펼쳤다.

“미노르 호무스로 이동해서 포트리스의 지원을 받을 생각일까?”

아니, 렉스의 성격에 포트리스를 자칫 잘못하면 위험에 휘말리게 만들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라나투스 호무스(양 수인 일족의 땅)를 통과하는 것이 나았다. 양 수인은 비교적 온화한 편이고 전체적인 전투력이 양 수인이 소 수인보다 약했으며 쪽수도 적었고 전쟁에 대한 피해를 복구하는 중이라 혼란스러웠다.

“에클레시아? 아냐, 이렇게 되면 회전(會戰)이 되어서 오히려 불리한데.”

늑대 일족의 기동력과 전투력을 고려할 때, 인간들이 기습을 하려면 숨을 수 있는 지형지물이 많은 산 쪽이 더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수가 많은 루프스와 대적하면서 회전을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일 그가 정말로 에클레시아로 간다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었다.

“에클레시아 근처에는 말 수인과 여우 수인이…….”

알렉스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헤르티아가 언제 한번 전쟁이 일어나면 도와달라는 말을 했다고 단테가 그랬었다. 여우 일족과 렉스가 동맹을 맺었다면, 에클레시아만큼 조건이 좋은 장소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우 일족이 늑대 일족을 공격한 시기와 렉스가 늑대 일족을 공격한 시기가 절묘하게 맞았다. 단테가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은 헤르티아가 마레 위르와 연합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숨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라나투스 호무스는 산맥을 끼고 있으니까. 산맥을 잘만 타면 에클레시아로 큰 전투 없이 향할 수 있어.”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렉스는 라나투스 호무스를 통해서 에클레시아로 향하는 것이 분명했다. 알렉스는 렉스를 따라가기 위해 서둘렀다. 에클레시아에서 회전(會戰)이 벌어지기 전에 빨리 렉스를 막아야 했다.

* * *

유채의 탈옥 소식으로 열이 받았던 헤르티아는 렉스에게 온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루프스를 에클레시아로 이끌었고 자신은 미리 에클레시아에서 준비하고 있겠다는 말이었다. 렉스는 위치가 발각될 가능성이 있어 더 이상은 연락하지 않을 테니 에클레시아에 도착해서 보자고 했다. 헤르티아는 이제 복수의 마지막만이 남았다는 것에 기분 좋게 웃었다.

“헤, 헤르티아님!”

병사 하나가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헤르티아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귀신이라도 봤느냐?”

기분이 좋아진 헤르티아가 농조로 입을 열었다. 희게 질린 병사의 뒤로 단테가 들어왔다. 헤르티아는 단테의 등장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다가 뒤이어 들어온 청년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헤르티아는 귀신을 본 듯한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단테는 헤르티아를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잘 아는 얼굴이지? 포트리스의 프레드릭 하워드라는 청년. 그리고……”

단테는 말을 골랐다. 헤르티아가 놀라지 않게 하고 싶었지만 이 문제에서는 어떻게 말을 해도 놀라지 않는 게 이상했다

“벤자민이야. 베니니타스님과 라일라님의 아들. 바로 네 조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단테!”

헤르티아는 단테가 질 낮은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숨을 몰아쉬는 헤르티아를 보며 프레드릭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고모. 제가 망가뜨린 고모의 꽃나무는 아직도 번개 맞은 듯한 모양인가요?”

“너. 그것을 어떻게…….”

헤르티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혼란스러웠다. 프레드릭을 처음 보았을 때 베니니타스와 닮았다고 생각하기는 했었지만 그가 벤자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프레드릭이 벤자민이라고?

프레드릭은 넋이 나간 헤르티아의 앞에 앉아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헤르티아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프레드릭을 바라보았다. 오빠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해서 악에 받쳐서 복수만을 좇던 헤르티아는 가족들의 죽음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여인일 뿐이었다.

헤르티아는 라일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울었고, 조카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으면서 다행이라고 속삭였고, 란텔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분노했다. 로보는 죄를 뒤집어썼으며, 블랑카는 억울하게 죽었으며, 에리카는 가련했고, 라이칸의 운명은 비참했다.

헤르티아는 이제야 제가 감정에 휩쓸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헤르티아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라이칸에게 내가, 내가…….”

그 아이는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오해로 억울하게 부모를 잃고 모든 고초를 겪으면서 홀로 외롭게 살아온 것이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하고 저를 노리는 비정한 세계에 맞서 온 힘을 다해서 싸워온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헤르티아,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헤르티아가 루프스를 죽이고 싶어 했던 것만큼 그도 복수를 하고 싶었을 텐데 그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과거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잔혹한 놈이 되었다고 생각한 루프스는 사실은 아직도 그 어린 날의 라이칸이었던 것이다.

“내가, 내가 그 아이에게…….”

헤르티아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밀려오는 죄책감과 다시 벤자민을 만났다는 기쁨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단테는 헤르티아를 껴안고 그녀를 다독였다.

“아직 늦지 않았어. 네가 잘못한 일은 그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면 돼. 그러니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

단테는 헤르티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 전쟁부터 멈춰야 해.”

그제야 헤르티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클레시아! 지금 거기로 루프스가 가고 있어. 레, 렉스 뮈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에클레시아요?”

“그래, 렉스가 레티티아의 옷을 구해서 그것으로 루프스를 협박했다고 했어. 그들을 위한 함정을 준비하기 위해서 에클레시아로 향했어.”

“설마. 알렉스는 아직 렉스 삼촌과 못 만난 건가?”

프레드릭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유채 양은 무사한가요? 아니 그 이전에 리와인더의 조각은요? 렉스 스승님이 보호 중인가요?”

“리와인더의 조각?”

프레드릭은 헤르티아에게 리와인더의 조각에 관해서 설명을 했다. 라일라가 가지고 있던 그 물건을 유채가 왜 찾는지 설명을 들은 헤르티아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자신은 언니를 구하기 위해서 세상 그 누구보다 절박한 아이를 데리고 장난질을 친 것이었다. 제가 베니니타스를 사랑했던 것만큼 그 아이도 제 언니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몸을 망쳐 가면서까지 언니를 구하기 위해서, 또 이 스티폴로르를 구하기 위해서 움직이던 아이에게……. 그 아이가 했던 말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헤르티아는 제가 저지른 악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나, 나도 몰라. 나는 그냥 옷을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의 편지만 받았을 뿐이야.”

“삼촌에게 매를 보내서 사실을 알려야 해요.”

“안 돼. 이동하는 곳을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서 아무런 편지도 받지 않겠다고 했어.”

당장 렉스와 루프스가 부딪치는 것을 막아야 하는 막막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유채의 행방도 찾아야 했다.

“일단은 우리도 에클레시아로 이동해요. 직접 렉스 삼촌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정신 차려요, 고모!”

“유채 양은 어떻게 하나?”

단테가 물었다. 프레드릭 역시 그게 막막했다. 유채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데는 추적 마법만한 것이 없는데 그걸 쓰기 위해서라면 그녀의 흔적이 남은 것이 ㅍ;필요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채 양의 소지품이라든지, 아니면 머리카락이나 피 같은 것이라도 있으면 소재를 추측이라도 할 수 있는데.”

“머리카락?”

헤르티아가 허둥지둥 움직였다. 혹시나 쓸 곳이 있을까 싶어서 가지고 온 물건 중에 유채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혹시, 쓸 곳이 있을지도 몰라 가지고 있던 거야. 이거면 가능하니? 벤자민.”

“가능해요. 추적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소재 파악은 할 수 있겠죠. 지도 있으세요?”

헤르티아는 지도를 가져왔다. 프레드릭은 바닥에 진을 그리고 그 위에 유채의 머리카락을 올리고 스펠을 읊었다. 마법진에서 빛이 나더니 지도에 위치가 표시되었다.

“살아 있는 것이냐?”

“살아 있고, 지금 포트리스에 있습니다. 그런데…….”

프레드릭은 말끝을 흐렸다. 지도에 표시된 방향을 보아서 헤임달의 창고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헤임달이 뱃사람들을 위해서 임시로 만들어준 소금 창고 겸 대피소였다. 육로로는 가기가 험해 주로 배로 접근하는 곳이었다. 유채가 안전한 것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헤임달의 창고예요.”

헤르티아의 기운이 사나워졌다. 결국 헤임달이라는 놈에게 놀아나 이때까지 날뛴 것이었다. 그놈 때문에 수많은 수인들이 목숨을 잃고 불행해졌다. 헤르티아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놈만큼은 잡아서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릴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헤르티아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 지껄이는 것일까? 제가 저지른 악행도 다 용서받지 못할 주제에.

“레이라는 무사한 건가…….”

프레드릭은 레이라에 대한 걱정에 미칠 것 같았다. 설마 레이라도 유채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프레드릭은 제 손목을 살폈다. 문양은 멀쩡했다. 레이라뿐 아니라 알렉스에 대한 걱정으로 프레드릭은 미칠 것만 같았다.

헤르티아는 프레드릭의 손목을 잡았다.

“왜 그러니, 벤자민.”

“레이라와 알렉스, 그러니까 프리드가 걱정이 되어서…….”

헤르티아는 프리드를 알렉스라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은 프레드릭을 보니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만큼 떨어져 산 세월이 길었다. 프레드릭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려 찾은 조카와 저 사이에 너무 깊은 골이 새겨진 기분이었다.

“벤자민, 일단 포트리스로 가렴. 레티티아도 구하고 네 아내와 아이도 살펴야지.”

헤르티아는 프레드릭을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베니니타스와 라일라를 빼닮았는데, 왜 진작 눈치채지를 못했을까.

“렉스와 루프스는 내가 말려보마.”

“고모.”

프레드릭이 헤르티아의 손을 잡았다. 프레드릭은 헤르티아의 눈에서 죄책감을 읽었다.

“도망치려고 하지 마세요.”

“…….”

“고모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알았다면, 그것을 깨달았다면 도망치지지 마세요. 다른 방법으로 속죄하려 하지 마세요.”

“내가 용서를 빌면, 그들이 받아줄까.”

“용서를 하는 것은 유채 양과 루프스님의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에요. 고모가 해야 할 일은 그분들을 위해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사과하는 일뿐이에요.”

“매번 생각하지만, 가장 기본이 가장 어렵구나.”

프레드릭의 말이 맞았다. 헤르티아가 해야 할 일은 그들에게 진실된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헤르티아는 그 이전에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자신의 원한이 너무도 커서 타인에게 해를 입혀도 저는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벌인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헤르티아는 주먹을 쥐고 일어섰다. 이 전쟁은 순수하게 제 잘못된 원한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나서서 멈춰야 했다.

“밖에 누구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레아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헤르티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에클레시아로 퇴각한다. 전쟁은 끝이다.”

“예?”

죗값을 치를 때였다. 헤르티아는 눈을 감았다.

* * *

유채는 손목을 단단히 구속하고 있는 가죽 수갑을 풀기 위해서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질긴 가죽은 아무리 움직여도 끊어지지 않았다. 목에 걸린 또 다른 구속구 때문에 마법도 쓸 수가 없어서 유채는 아무 능력 없는 평범한 소녀가 되었다.

벌써 이곳에 갇힌 지 이틀째였다. 헤임달이 리와인더의 조각을 가지고 란텔과 함께 에클레시아로 향한 것도 이틀이나 지났다. 유채는 어깨의 통증을 무시하고 탈출을 위해서 노력했다. 앞으로 딱 이틀 남았다. 그 안에 헤임달을 막지 못하면 스티폴로르가 사라질 것이다. 유채는 몸을 버둥거렸다.

“읍읍읍!”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유채의 외침은 재갈에 막혀 소리가 되지 못했다.

* * *

유채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날 밤 늦게였다. 어지럼증과 구토감을 느끼면서 유채는 눈을 떴다. 그리고 곧 자신이 공중에 묶여서 매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채는 빠져나가기 위해서 스펠을 급하게 읊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훗. 프레눔을 모르는 인간이 있다는 것도 의외군.”

그제야 이곳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유채는 화들짝 놀랐다. 창고 구석, 어두운 그림자 밖으로 나온 헤임달은 유채를 비웃었다.

“마력을 흡수하는 프레눔 가까이에선 어떤 마법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다니. 마법사로서 개념이 없군.”

유채는 지금 마법을 쓸 수 없다는 사실보다 제 앞에서 뻔뻔한 태도로 말하고 있는 헤임달에게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개새끼! 이 상종도 못할 쓰레기 새끼야!”

유채는 악을 섰다. 헥터에게 당할 뻔한 일의 배후에 헤임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 유채는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사람으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었다. 그깟 프레눔이 뭐라고! 제가 헥터에게 그런 일을 당해야했을까? 왜? 유채는 헤임달을 향해 이를 박박 갈았다.

“도대체 뭐가 사람보다 중요한데! 이 개새끼야! 넌 사람도 아니야!”

유채는 빽 소리 질렀다.

“당신 때문에 난 죽을 뻔했어! 당신이 인간이야? 인간이냐고! 이 쓰레기 새끼…… 어헉.”

헤임달의 억센 손이 유채의 목을 틀어쥐었다. 헤임달의 눈이 불에 타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헤임달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유채의 목을 꽉 움켜잡았다. 유채는 숨이 막혀왔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헤임달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의 눈에 분노의 눈물이 고였다.

“네가 내 기분을 알아! 개새끼 같은 오를레앙 남작이 내 아내와 여동생, 딸을 겁탈하고 내 가족을 모두 죽였는데, 그놈에게 복수도 하지 못하고 사는 이 비참함을 네년이 아냐고!”

헤임달은 평범한 의사 겸 사냥꾼이었다. 헤임달은 오를레앙 남작령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고 이따금 마물이나 짐승을 사냥하는 일을 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의 에어리얼은 무효화였다. 무효화의 소유자인 그는 마법을 쓸 수 없었으나, 그 대신 마법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그 점을 이용하여 마물 사냥에 뛰어들었다. 또한 그는 약초학에 해박하여 마을 사람들과 마물 사냥꾼들을 다른 방면으로도 도왔다. 아내와 아이 둘, 여동생까지 단란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불행이 시작된 것은 마을을 시찰하러 온 오를레앙 남작을 아내와 함께 만났던 그 순간이었다.

오를레앙 남작은 호색한으로 유명했다. 그가 제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지만 헤임달은 설마 남작이 유부녀까지 노릴까 싶었다. 어느 날 오를레앙 남작은 헤임달을 사냥꾼으로 불러내어 마을로 오던 길에 봤던 마물을 잡으라고 했다. 헤임달은 그 마물에게 마을이 피해를 입을까 싶어 기꺼이 일에 응했다.

하지만, 그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본 것은 몰살당한 마을이었다. 간신히 숨어 있던 헬라에게서 헤임달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오를레앙이 집으로 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제일 먼저 아들을 죽이고 그 후 아내를 겁탈하고 딸과 헬라까지 겁탈한 뒤에 아내와 딸의 목을 부러뜨려 죽였다는 것이었다.

헬라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가까스로 도망쳤다. 도망친 그녀를 찾으러 기사들이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다. 헬라는 벌벌 떨면서 설명했다.

헤임달의 마을은 없어져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그랬기에 오를레앙 남작도 거리낌 없이 마을 하나를 없애 버렸을 것이다.

헤임달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려갔다. 이내 그의 분노에 찬 울부짖음이 텅 빈 마을을 울렸다. 헤임달은 지키지 못한 가족의 시신을 부여잡고 절규했다.

세상에 신은 없었다.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짓을 한 오를레앙 남작은 발루아 백작의 오른팔이 되어서 권세를 누리며 떵떵거리며 살았다. 남작은 헤임달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 전혀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헤임달은 복수를 다짐했다. 오를레앙 남작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는 못 할 짓이 없었다. 그렇게 베르나도테 공작의 하수인이 되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는 오를레앙 남작에게 직접 벌을 주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하늘이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저라도 벌을 내려야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개새끼야!”

유채는 간신히 트인 숨통으로 헤임달을 노려보았다. 세상은 참 잔인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였다.

“당신도 오를레앙 남작과 똑같아! 당신이라고 뭐 다를 것 같아! 죄 없는 여자들을 팔아치우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당신이 오를레앙 남작하고 뭐가 달라!”

“이익!”

유채는 반박하지 못하는 헤임달을 비웃었다.

“당신이 신이라도 된 것 같아? 당신이 피해자니까 남들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복수에 미쳐 버린 사람들은 그랬다. 자신의 복수가 정당하다고, 자신이 하는 모든 악행을 정당하다고 믿었다.

“라일라는 당신에게 뭘 잘못했어? 헥터에게 학대받은 여자들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아내를 잃은 로보는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어?”

유채는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 때문에 루프스는 부모를 잃었고, 평생을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했고, 당신 때문에 멀쩡했던 인생을 다 망쳤어! 당신이 만든 지옥에서 구르다 결국은 미쳐 버렸다고. 알아? 그게 당신 죄야!”

유채는 루프스를 동정했다. 그의 불우했던 삶을 동정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삶을 동정했다. 루프스는 상처입고 주저앉아서 세상을 향해 떼를 쓰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너무 상처가 커서 큰소리 한 번 못 지르는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루프스의 앞에서 매정하게 이별을 고하지 못하고 도둑처럼 도망쳤다.

“당신도 그 오를레앙 남작하고 똑같은 쓰레기야! 당신이 그놈하고 뭐가, 앗!”

헤임달이 씩씩거리며 유채의 뺨을 내리쳤다. 뺨에서 불이 나는 듯했지만 유채는 왠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유채는 약간은 건방진 태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내 말에 반박을 못 하겠어?”

“이년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헤임달은 씩씩거리면서 불에 달군 부지깽이를 들고 왔다. 저년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비는 꼴을 봐야지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헤임달은 유채를 향해 부지깽이를 들어 올렸다. 유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빠! 멈춰. 상품이야, 상품!”

헬라가 헤임달을 뜯어말렸다. 부지깽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빠, 잊었어? 공작의 침실에 진상하기로 했잖아. 예쁘게 꾸미면 꾸몄지, 흠집을 내면 안 돼. 그랬다가 공작이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떡하려고. 참아, 오빠. 저년은 입만 살아서 나불거릴 뿐이잖아. 참아. 응? 오빠가 상대할 필요 없다고.”

유채는 저를 또 팔아넘기려고 하는 헤임달의 질 낮은 짓에 이제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헤임달은 숨을 몰아쉬면서 유채의 턱을 거칠게 움켜잡고 으르렁거렸다.

“반반한 얼굴만 아니었으면 네년은 이미 걸레짝이 되어 있을 거야. 알아?”

헤임달은 란텔을 불렀다.

“이제 움직이자. 헬라, 목걸이 줘.”

“알았어, 오빠.”

헬라는 쭈뼛거리면서 리와인더의 조각을 헤임달에게 건네었다. 유채의 눈이 커졌다. 레이라가 말하기로 마법 폭탄은 보석에 마력을 담아서 만든다고 전했다. 유채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외쳤다.

“설마, 그걸로 폭탄을 만들려고?”

“그래, 이걸로 수인 놈들을 날려 버릴 생각이다.”

“당신 미쳤어! 그건 안 돼! 그게 무슨 물건인 줄 알고! 그걸 잘못 쓰면 당신도 죽어! 이 스티폴로르가 지도에서 사라진다고!”

“미친 것은 네년이겠지. 에클레시아까지 가는 데, 나흘. 오는 데, 나흘이니. 팔 일만 기다려라. 뭐, 나흘이면 이미 이것으로 에클레시아를 날려 버렸기 때문에 더 빨리 올지도 모르겠군. 잘 단장하고 기다려라. 새로운 주인을 만날 거니까.”

헤임달은 유채의 말을 미친년의 헛소리로 취급했다. 그는 유채의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창고를 떠났다. 유채는 간신히 발견한 리와인더의 조각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 * *

유채는 힘이 빠져서 버둥거리는 것을 멈췄다. 이제 이틀밖에 없었다.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기에 이틀 뒤에는 거사를 치른다고 했다. 유채는 한 켠에 놓여있는 제 가방을 보았다. 이니투스의 보자기는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유채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손목을 구속하고 있는 가죽 끈을 보았다. 저걸 찢어버리면 탈출할 수 있을 텐데……. 그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찢는다. 그런데 어떤 물건 위의 공간을 찢는다면, 그 위치에 있는 물건도 같이 찢기지 않을까? 그동안은 허공을 찢어보기만 했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를 것 같았다.

‘밑져야 본전이야.’

아무 것도 못하고 무력하게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시도하는 것이 나았다. 유채는 가죽 끈을 집중해서 보며 공간을 찢었다.

“윽.”

예상대로 유채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유채는 이때만큼 재갈이 고마운 적이 없었다. 재갈이 없었으면 비명을 질러서 일찍 들통 났을 테니까. 유채는 발이 묶인 상태라 바닥을 기어서 가방이 있는 곳으로 갔다. 천장에 매달린 줄을 끊은 것이기 때문에 여전 양손은 묶인 상태로 불편하게 가방을 뒤진 유채는 이니투스의 보자기가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단도를 꺼냈다. 유채는 단도로 발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잘랐다.

그때 창고 밖에서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창고 문을 연 것은 세라였다.

“아악!”

유채는 가방으로 세라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고 달렸다. 얼른 다시 공간을 찢을 만한 곳으로 이동해야했다. 뒤에서 알폰소와 헬라, 세라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양손이 묶여있는 지라 중심을 잡기 힘들어 유채는 몇 번이고 앞으로 엎어졌지만, 아픔 따위는 무시하고 죽을힘을 다해서 달렸다.

“읍!”

눈앞으로 절벽이 나타났다. 유채는 몸을 돌렸다. 헤임달과 헬라가 바로 앞까지 쫓아온 상태였다. 절벽 아래는 바다였고 이제는 막다른 길이었다. 유채는 덜덜 떨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바다로 떨어져라. 받아주겠다.]

귓가에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바다의 용 에퀘레우스이다. 내가 도와주겠다. 그러니 뛰어내려.]

셀레네가 말했던 용이었다. 리와인더의 조각을 바다에 버리면 셀레네에게 전해줄 대리인인 용 에퀘레우스(Aequoreus). 유채는 눈을 질끈 감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찰나의 시간 후에 유채의 몸은 푸른 바닷물에 잠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끈한 비늘을 가진 무언가가 유채의 몸을 마치 뱀처럼 휘감았다. 유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트레모르는 급하게 집무실로 걸어갔다. 트레모르의 손에는 토끼가 그려진 카드가 들려 있었다. 카넬리안이 쓰던 카드였다. 그녀는 현역 시절에 경고 목적의 암살을 할 때 무슨 자신이 괴도라도 되는 것처럼 이렇게 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휘갈겨 쓴 것을 작전지에 남겨두곤 했었다. 트레모르가 집무실 문을 열었다.

“아빠!”

실비아의 목소리에 트레모르는 깜짝 놀랐다. 실비아는 제 의자에 앉은 카넬리안의 무릎에 앉아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카넬리안이 손을 흔들자 트레모르는 이를 갈았다.

“아빠. 내가 아빠 보고 싶다고 하니까, 이 언니가 아빠 보게 해주겠다고 같이 왔어.”

“그래, 트레모르. 너 너무 못된 아빠 아니니. 세상에 이렇게 어린 딸과 잘 놀아주지도 않고 말이야.”

“카넬리안!”

트레모르는 카넬리안이 왜 이곳에 굳이 실비아를 데리고 들어왔는지 알아차렸다. 카넬리안이 실비아의 귀를 막았다.

“애 놀라게 왜 갑자기 큰 소리야.”

“실비아는 아무 잘못 없어! 대체 애를 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카넬리안은 실비아 몰래 칼을 보이고는 트레모르에게 서류들을 던졌다. 이를 갈면서 서류를 읽은 트레모르의 눈이 커졌다.

“선대 레푸스와 네가 레푸스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몰래 감추었던 것들이지.”

“이게, 대체…… 이게 사실이라고?”

“그래. 내가 선대 레푸스에게 살해 협박까지 받아가면서 밝히려고 했던 그날의 진실이자 지금 벌어진 모든 일의 발단.”

트레모르의 눈이 흔들렸다. 서류를 쥔 트레모르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카넬리안은 그의 반응을 살폈다. 트레모르는 야망 있는 이였지만, 그 반대로 심성이 유약하기도 했다. 잘만 구슬리면 그는 금방 넘어올 것이다.

“밝혀. 인키디움의 이름으로 진실을 발표해. 그래야 모두가 믿을 테니까.”

“이걸 밝히면 인키디움이 어떤 오명을 뒤집어쓸지 알면서 하는 소리야?”

“매번 생각하지만, 너는 정말 포장을 더럽게 못해. 이걸 그냥 발표하다니, 너 미쳤니?”

카넬리안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인키디움은 우연하게 계기로 라일라의 죽음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카넬리안을 조사관으로 임명해서 몰래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인키디움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서 이 정보를 공개한다, 라고 하면 되잖아.”

“그 이전에 인키디움이 돌을 맞게 될 것은 생각 안 하나? 정보기관인 우리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인정하면 앞으로는 어떡하라고!”

“그럼 다른 방법이 있지.”

카넬리안은 실비아를 의자에 앉혀두고 트레모르의 앞으로 가 책상 위에 걸어가서 걸터앉았다.

“전대 레푸스의 짓으로 몰면 되지. 사실이잖아. 책임은 전대 레푸스가 지면 되는 거야.”

“그렇게 되도 우리의 권위는 실추돼!”

“진정한 권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고쳐 나갈 때 생기는 것이지.”

“그래서 잘못을 구하는 대신에 모든 책임을 전대 레푸스에게 몰자? 정의로운 척은 다 하면서 잘도 그런 비열한 짓을 하자고 하는군.”

“우리가 언제부터 정의의 사도였어?”

카넬리안이 인키디움에 들어온 이유는 단지 배가 고파서였다. 혼혈인 덕분에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카넬리안의 부모는 산골에서 화전을 하면서 살아갔다. 그러나 부모가 죽고 혼자가 된 카넬리안은 결국 죽 한 그릇에 인키디움으로 들어갔다. 카넬리안은 먹을 것을 준다는 말에 인키디움의 말단으로 들어왔다. 소모품으로 이용되기만 할 말단 중의 말단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죽을 생각은 없었던 카넬리안은 우연한 기회를 잡고 인키디움의 정식 요원이 되었다.

그 와중에 나쁜 짓도 많이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동료를 버렸고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수인들이나 마레 위르들을 죽였다. 아무렇지 않게 임무를 수행하던 카넬리안이 이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된 것은 인키디움에 방해가 되는 쥐 일족의 주요 요인 암살에서였다. 아무 죄도 없으나 명령이기에 죽였던 다섯 살 아이의 잘린 목을 보았을 때, 수없이 보아왔던 시신에 그날만큼은 구토감이 올라왔다. 그제야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저질렀던 죄를 깨달았다.

“암살과 첩보가 언제부터 정의였어? 인키디움은 정의의 단체가 아니야. 살아남기 위해서 모인 토끼들의 집단일 뿐이지. 너도 알잖아? 우리가 언제 정의로운 일을 해왔어? 거슬리는 정보는 알리지 않고 필요한 정보만 이용해서 줄을 탔지. 그로 인해 짓밟히는 다른 일족들은 상관하지 않고. 그게 정의라는 건 나도 처음 들어보는데?”

카넬리안이 차갑게 비웃었다.

“아! 그리고 이건 예전 파트너로서 충고가 아니라 협박이야.”

카넬리안은 다시 책상 뒤로 돌아가 잘 놀고 있던 실비아의 뒷목을 가격했다. 실비아는 기절해서 앞으로 고꾸라졌고 카넬리안의 아이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실비아!”

“좋은 말로 할 때 발표해. 그리고 한 가지 더.”

실비아의 목에 닿은 서슬 퍼런 날에 트레모르는 안절부절못했다.

“레푸스의 자리에서 내려와. 그 자리 내가 차지해야겠으니까.”

“뭐라고?”

“나도 이런 더러운 자리 관심 없는데, 내 딸이 결혼을 해야 해서 이 자리가 필요해졌거든. 은퇴하면서 그냥 나한테 자리 넘기겠다고 해. 간단하지?”

“내가 왜…… 실비아!”

카넬리안이 검이 실비아의 목에 붉은 선을 그었다. 카넬리안은 손을 들어서 트레모르의 행동을 제지했다.

“말했지.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라고.”

트레모르가 몸을 떨었다. 그래, 잊고 있었다. 카넬리안이 어떤 암컷이었는지. 그녀는 좋은 실력만큼 냉혹한 이였다.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못 하는 것이 없었다. 트레모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년.”

트레모르가 카넬리안을 향해 이를 갈았다. 카넬리안은 그 말에 비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여태껏 몰랐어? 생각보다 멍청하네.”

카넬리안은 실비아에게서 검을 거두고 트레모르에게 다가갔다. 한 번도 카넬리안을 이겨본 적 없는 트레모르는 그녀가 내뿜는 위압감에 뒷걸음질을 쳤다. 카넬리안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인키디움의 접대부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나야.”

카넬리안은 트레모르의 옷깃을 잡고 먼지를 털어주었다. 트레모르는 카넬리안의 행동에 소름이 돋았다.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고.”

카넬리안은 정의의 사도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제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저질러 왔던 죄에 대한 용서를 빌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카넬리안이 인키디움을 나가서 평범한 농부로 산 것도, 그리고 다시 돌아온 것도 모두 자신이 죽인 자들에게 용서를 빌고 제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키디움에서 놀라운 소식이 발표되었다. 라일라의 죽음의 배후와 그 진실에 대한 내용이었다. 범인은 로보가 범인이 아니라 플로서스라는 소식이 널리 퍼진 후 곧 플로서스가 제 죄를 모두 자백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수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 * *

“케릭스!”

플로서스는 아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 어려운 상황에 케릭스라는 엄청난 전력이 될 터였다. 루프스의 최측근이었던 케릭스가 제 편을 든다는 것은 플로서스에게 아주 유리한 일이었다.

케릭스는 아버지가 저를 저렇게 반겨 맞이하는 것을 난생 처음 본 것 같았다. 아버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

“고초가 많았다. 어서 들어와라.”

케릭스는 플로서스와 같이 막사로 들어갔다. 플로서스는 왜 루프스를 몰아내어야 하는지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케릭스는 언제 플로서스의 말을 끊어야 하는지 고민 중이었다. 플로서스의 말은 끝날 것 같지가 않았고 케릭스는 결국 아버지의 입을 막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께서 라일라님의 암살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뭐?”

플로서스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케릭스는 가지고 온 자료를 앞에 내밀었다. 플로서스는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카넬리안이 훔쳐간 바로 그 자료들이었다.

플로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잘못 없어! 나는 로보님이 선택하시지 못한 옳은 일을 한 것뿐이야!”

“그게 옳은 일이시라면 왜 당당하게 밝히지 않으셨습니까? 옳은 일을 하셨다면 당당하셔야지요!”

“그러면 내가 죽었을 거야! 로보님이나 베니니타스가 나를 죽이려고 들겠지!”

“어릴 적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의로운 이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하라고. 아버지가 하신 일은 죽음을 각오할 만큼 정당한 일은 아니었나 봅니다,”

“내가 그 말을 했다면 너희가 죽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시는 분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셨습니까?”

케릭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계속 핑계만 대고 계시는…….”

플로서스가 케릭스의 뺨을 후려쳤다. 케릭스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늑대 일족의 이인자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은 완력이었다. 케릭스는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로서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하려고 드느냐! 너는 내 아들이 아니냐!”

“아들이기에 아버지를 설득하러 왔습니다. 그만두십시오. 이제 다 밝히고 벌을 받으세요. 그게 아버지가 저지른 모든 일에 대한 속죄입니다.”

“내가 왜! 로보님이 먼저 한심하게 군 거야! 마레 위르와 힘을 합친다고? 너는 네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잊었느냐!”

케릭스는 악다구니를 쓰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보았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는 보통의 다정한 아버지였다. 그러니 어머니가 마레 위르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 뒤에 플로서스는 그야말로 미쳐 버렸다. 자신이 강하지 못했기에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식들에게도 강함을 요구했다. 케릭스는 플로서스의 가혹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고, 동생은 약하다는 이유로 버려질 뻔하기도 했다.

케릭스는 이제야 아버지가 복수라는 망령에 사로잡힌 수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내를 죽인 마레 위르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를 죽였던 마레 위르와 라일라는 다른 사람이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마레 위르들도 전혀 다른 사람인데도 플로서스는 같은 마레 위르라는 이유로 그들을 적대했다.

“추하십니다! 어머니께서 마레 위르의 손에 돌아가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라일라님은 그와 관련 없습니다! 그분이 수인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말은 그저 핑계일 뿐입니다. 아버지의 분을 풀어내려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부들부들거리던 플로서스는 곧 거대한 늑대로 변해 앞발로 케릭스를 내리쳤다. 케릭스는 간신히 바닥을 굴러서 피했다. 아버지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케릭스는 발톱에 찢겨서 피가 흐르는 배를 손으로 막으면서 소리쳤다.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아버지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죄를 고백하세요!”

[너는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

플로서스는 케릭스를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다. 케릭스는 이를 악물었다. 마찬가지로 회색 늑대로 변한 케릭스는 플로서스의 공격을 막았다. 둘의 싸움이 벌어지자, 병사들이 늑대로 변했다.

플로서스와 케릭스의 싸움은 격렬했다.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을 받는 플로서스이지만, 젊은 아들에 밀리지 않을 노련한 관록을 보였다. 케릭스보다는 공격보다 방어에 급급했다. 그의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차마 아버지를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싸움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케릭스님!”

케릭스는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블루벨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서 있었다. 블루벨은 카신, 빅터와 같이 있다가 갑자기 보이는 싸움에 놀랐다. 카신과 빅터는 이때가 습격에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급하게 군사를 불러모았고. 블루벨은 둘의 감시가 약해진 틈을 타. 케릭스에게 달려왔다. 그가 너무 걱정이 되었다. 플로서스의 공격을 받아내기만 해서 케릭스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플로서스의 시선이 블루벨에게 향했다. 케릭스가 옆에 끼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던 그 암컷 토끼 수인 같았다.

[저년이구나. 너를 변하게 만든 것이.]

플로서스는 케릭스의 어깨를 물어뜯고 블루벨을 향해 발을 뻗었다. 블루벨은 놀라서 팔을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주변에서 플로서스의 잔당을 처리하던 카신과 빅터가 블루벨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달려오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케릭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몸을 움직였다.

“크악!”

위르형으로 돌아온 플로서스의 팔 한쪽이 날아가고 없었다. 케릭스는 위르형으로 변해서 블루벨을 제 등 뒤로 숨겼다. 피가 철철 흐르는 오른팔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는 플로서스로 인해 부자간의 싸움은 아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케릭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아직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케릭스는 손톱을 세워서 자신의 왼쪽 눈을 찔렀다.

“케릭스님!”

블루벨이 놀라서 케릭스의 팔을 붙잡았다. 케릭스는 피가 흐르는 왼쪽 눈을 감고 오른팔을 잃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들로서 저지른 불효는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이것이 그 증표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속죄하시기를 바랍니다.”

플로서스와 케릭스가 싸우는 동안 카신과 빅터는 플로서스 일당을 모조리 제압했다. 케릭스가 시선을 끌어준 덕택에 기습이 가능했었다. 카신과 빅터가 플로서스를 포박해서 끌고 갔다.

케릭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케릭스는 블루벨을 끌어안고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블루벨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플로서스님이랑…… 정말 죄송해요.”

블루벨은 자신의 오지랖으로 케릭스가 고통받는 것 같아서 정말 미안했다. 케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블루벨이 옳았다. 잘못은 감추어서는 안 된다. 설령 가족이 잘못했다고 해도 그것을 감추고 은폐하면 안 되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지…….”

“케릭스님은 잘못 없어요.”

블루벨은 케릭스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는 아무 잘못 없다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케릭스는 피가 섞인 눈물을 흘렸다. 블루벨은 케릭스를 꼭 끌어안고 그를 위로해 주었다. 케릭스는 블루벨의 품에 안겨서 제 감정을 추슬렀다.

블루벨은 하늘을 보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예전에 유채가 말한 것을 떠올렸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다고 했다. 케릭스도 그럴 것이다. 꼬이고 꼬인 원한의 끈이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었다.

“제가 영원히 곁에 있을게요.”

블루벨이 케릭스에게 속삭였다. 케릭스는 고통도 잊고 블루벨을 더 꼭 끌어안았다. 슬픔, 죄책감 같은 감정이 몰려와서 혼란스러운 중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제 곁에 있었다.

“나는 이제 한쪽 눈도 없고, 명예도 잃을 것이다. 그래도 내 옆에 있어줄 건가?”

“예. 케릭스님이 싫다고 해도 계속 쫓아다닐 거예요.”

블루벨은 케릭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피에 옷이 젖었지만 블루벨은 케릭스를 놓지 않았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당신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표현을 몸으로 했다.

“토끼도 꽤나 질투가 강하거든요.”

“고마워…….”

케릭스는 블루벨의 배에서 얼굴을 뗐다. 하나 남은 눈으로 블루벨을 올려다보았다.

“사랑한다.”

케릭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 * *

“루프스님. 플로서스 쪽이 제압되었습니다. 케릭스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루프스는 잔뜩 지친 표정으로 보고를 받았다. 곧 에클레시아였다. 루프스는 병사를 내보내고 침대에 앉았다. 제 손으로 아버지를 멈추게 한 그가 지금 얼마나 참담할지는 짐작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숨을 내쉰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카락과 머리 장식, 망가진 옷, 그리고 그녀가 두고 간 블랑카의 반지까지 한꺼번에 넣어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든 것들을 바라보곤 루프스는 눈을 감고 유채의 모습을 상상했다.

‘너를 다시 만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렉스가 곧 유채를 데려올지도 모른다. 그때,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제 손안에 들어온 유채를 어떻게 해야 할까? 뭐든 해줄 테니 제발 남아달라고 다시 빌어볼까? 아니면 돌아갈 길을 찾아줄 테니 그때까지만 제 보호 아래에 있어달라고 할까?

만나면, 아무 말도 못할 것 같았다. 너 없는 동안이 내게는 지옥 같았다고, 가슴이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릴 것 같았다. 밤마다 찾아오는 너의 환상에 잠을 설쳤고 너에 대한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말을 모두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 그저 눈물만 흘릴 것 같았다.

제 마음을 고백했던 장소도 에클레시아였고 그녀에게 거절당했던 장소도 에클레시아였고 변하기로 결심했던 장소도 에클레시아였다.

그리고 유채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곳도 바로 에클레시아였다.

신을 모시고 신을 받들었던 신전이 이제 잔해로만 남은 곳. 그곳이 결착의 장소였다. 최초로 일어난 수인 내전의 끝도 에클레시아였다고 했다.

루프스는 그곳에서 무엇이든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에클레시아였다.

* * *

“으흠.”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뜬 유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웬 동굴 안이었는데 어울리지 않는 가구들이 갖춰진 모습이 꼭 예전에 TV에서 본 터키의 동굴 호텔 같았다.

“일어났네.”

바다에 떨어지기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금발과 금안을 가진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보였다. 그가 손을 흔들자 유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옷이…….”

유채는 토스 호무스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한 하얀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마법으로 갈아입힌 거니까. 걱정은 마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 퀘…….”

“에퀘레우스. 그게 내 이름이야.”

에퀘레우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탁자와 의자 가 앞으로 날아왔다. 에퀘레우스는 유채에게 자리를 권했다. 유채가 의자에 앉아 에퀘레우스는 이번엔 찻잔과 찻주전자를 불러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바다 아래 내 둥지지. 셀레네님의 가련한 종으로서 나는 내 일을 완수할 때까지는 여기서 살아야 하거든.”

“일이요?”

에퀘레우스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고개를 든 유채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탄성을 뱉었다.

“스티폴로르와 대륙 사이에 소용돌이를 만드는 것이 나, 바다의 용 에퀘레우스의 역할이거든. 리와인더의 조각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어. 내 동족인 대지의 용 헤르메아, 하늘의 용 발칸도 이런 일을 하고 있지. 발칸은 차원에 생긴 균열을 메우는 역할을 하고 있고 헤르메아는 리와인더의 여파로 썩어가고 있는 땅들을 다시 생명의 땅으로 바꾸고 있지. 셀레네님의 일을 보좌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야.”

“보좌요?”

“아무리 벌을 받느라 힘이 약해지셨다고는 하지만 저런 조각 하나 회수 못 할 정도는 아니야.”

에퀘레우스가 딴소리를 하였다.

“셀레네님의 따님을 본 적이 있지?”

“예.”

“셀레네님은 당신의 힘으로 따님이 소멸하는 것을 막고 계셔. 그렇기에 세계의 균열을 막는 일을 할 이들이 필요했고, 당신을 대신해 조각을 전해줄 인물이 필요하셨던 거야.”

“그러니까, 당신들 세 용이 세계의 균열을 막는 일을 한다고요?”

“그래, 원래는 멸족했어야 할 우리 용 중 우리 셋만 영생을 부여받아서 리와인더의 여파로 인한 세계의 균열을 막고 있지. 공간, 시간, 생명은 세계의 구성 요소야. 그렇기에 신(神)만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영역이지. 아무튼 공간이 하늘을 낳고 시간이 바다를 낳고 생명이 대지를 낳아서 비로소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하지. 우리는 신에게 각각의 세계의 구성 요소를 다룰 권한을 허락받아 그들을 고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에퀘레우스는 유채에게 차를 건넸다.

“자신의 힘으로 리와인더의 조각을 회수하려 하면 따님의 소멸을 막는 힘이 약해져 따님이 소멸하실 수 있지. 그래서 대리자를 찾은 거야.”

“결국 자신이 만든 세계보다 제 딸이 더 중요한 여자라는 건가요.”

유채는 셀레네에게 냉소적인 평가를 내렸다.

“뭐, 신도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건가요?”

“너를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이 필요하거든. 말했잖아. 나는 바다의 용이자 시간의 오류를 수정하는 용. 지금 이곳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달라. 나는 오류 없이 너를 돌려보내기 위한 때를 기다리는 중이야. 그러니 수다나 좀 떨자고, 몇 백 년을 처박혀서 혼자 외롭게 지냈다고. 이해 좀 해줘. 그리고 아가씨는 탈출한 다음 날로 돌아가게 되는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에퀘레우스는 말 못해 죽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개중에는 유채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가씨. 헤임달이란 녀석을 상대할 때에는 조심해야 해. 그 녀석은 무효화 에어리얼의 소유자야.”

“무효화 에어리얼이요? 마법이 안 통한다고요?”

수많은 에어리얼 중 태어남과 동시에 열린다는 단 두 개의 에어리얼 중 하나가 바로 무효화였다. 무효화의 소유자는 어지간한 마법에 절대 당하지 않았지만, 그 대가인지 평생 어떤 마법도 사용하지 못했다.

“무효화 에어리얼 소유자는 마력을 모두 흡수해서 무력화시키지. 다시 말해서 소유자가 흡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마력을 쏟아 붓거나 아예 에어리얼의 소유자의 신체 내부를 노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처치할 수 있지. 그래서 무효화 에어리얼의 최악의 상대는 공간을 다룰 수 있는 하늘 에어리얼 소유자이지.”

“전 공간 마법은 못 쓰는데요?”

“하늘 에어리얼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공간 마법은 모두 마력 리바운드를 각오하고 써야 하는 마법이야. 내가 말했잖아. 하늘, 즉 공간은 세계의 구성 요소라고. 신이 아닌 자가 마음대로 다룬다는 것은 즉 세계의 법칙을 어긴다는 것을 의미하지. 에어리얼은 신이 인간에게 자신이 만든 창조물을 자신의 뜻과 거슬러서 마음대로 이용해도 좋다고 내린 허락이야. 다시 말해 하늘의 소유자는 공간을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셀레네님께서 내려주신 것이지. 그러니 하늘 에어리얼의 소유자는 세계의 법칙을 어기지 않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야.”

유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헤임달에게서 어떻게 리와인더의 조각을 뺏을 수 있을까?

“마력만 흡수한다고 했지? 다시 말해서 마력만 흡수 못 하게 하면 그만인 거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효화 에어리얼도 맹점이 있다는 것이지. 예를 들어서 강화마법을 건 몸으로 그 인간을 두들겨 패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야. 무효화 에어리얼은 이미 걸린 마법까지 무효화시키지는 못해. 공기 중의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만 가졌으니까. 이제 내 말을 이해했어? 원래 싸움은 힘센 놈이 이기는 법이거든.”

유채는 에퀘레우스의 말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 그때 에퀘레우스는 위를 올려다보더니 아쉬운 듯 말했다.

“이런, 벌써 시간이 되었네. 이제 에클레시아로 보내줄게. 권능은 아껴야지.”

“당신은 공간 마법을 사용해도 괜찮은 건가요?”

“음. 아니. 나도 마력 리바운드가 오지만, 몸이 워낙 튼튼해서 견딜 만해. 자세히 설명하기는 복잡하지만, 네가 너를 보내는 마법은 동화 마법이야. 너를 물로 변환시켜서 수증기를 이용해서 너를 그 위치로 보내는 마법이지.”

에퀘레우스는 마법진을 그리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마법진에 위로 물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에퀘레우스가 유채를 돌아보았다.

“여기로 들어가면, 에클레시아에 도착할 거야. 정확히는 네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던 그곳이지. 에클레시아는 셀레네님의 힘이 강해서 내 힘으로는 뚫을 수가 없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같은 일 하는 동료끼리 돕는 것이지.”

에퀘레우스는 유채에게 그녀의 가방을 건네주었다. 그 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단도로 치맛자락을 움직이기 편하게 잘라낸 유채는 가방을 도로 등에 멨다.

에퀘레우스가 유채를 배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조금 영악하게 군다면, 너는 그냥 스티폴로르가 망하는 것을 지켜봐도 돼. 어차피 예정보다 빨리 리와인더의 조각의 악기가 심해져서 셀레네님과의 계약을 지키지 못해도 언니를 구할 수 있는 시간에 네 세상에 돌아갈 수 있지. 너는 살기 위해서 셀레네님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계약을 했지. 리와인더의 조각을 구하겠다는 계약을 한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인지 물어도 되나?”

유채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에퀘레우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물었다.

“이곳 사람들은 너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어. 너는 이곳에서 괴롭기만 했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왜 노력하는 것인지 물어도 되는 것인가?”

“내 원한이 생명보다 더 소중한가요? 내 복수가 생명보다 가치 있는 일인가요?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나요?”

에퀘레우스는 유채의 미소의 의미를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어요. 하지만 그들이 내게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게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조해도 되는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유채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리고 이곳에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 많아요. 나를 도와준 사람도 많고요. 그들은 이곳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에요.”

에퀘레우스는 왜 셀레네님이 이 소녀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은가연과는 다르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같았다.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이 소녀는 맡은 일을 반드시 해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내가 한 방 먹은 기분이네.”

에퀘레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채는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 물이 넘실거리는 마법진 위로 한 발을 내디뎠다.

“하나만 더 묻지. 셀레네님께는 무슨 소원을 빌 것인가?”

유채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

“뭐든지 잔뜩 뜯어먹을 수 있는 소원이요.”

“뭐?”

유채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두 발 모두 마법진 위로 올렸다. 물이 유채의 몸을 감싸 안았다. 유채는 몸이 흩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눈을 감았다.

볼에 약간 후덥지근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유채는 눈을 떴다. 탁 트인 평원이 보였다. 달빛이 흐드러지게 빛을 뿌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유채는 아래를 보았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누워 있었던 바로 그 바위였다.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여우 수인을 만났고 그 수인에게 이끌려서 루프스에게 진상되었고 루프스에게서 도망쳐서 진실을 알아냈고, 그리고 멈춰 서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와서 다시 이곳이었다. 유채는 결착을 지으러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다시, 에클레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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