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늑대왕 루프스-16화 (완결) (16/16)

Chapter 16. 약속

렉스는 저 멀리 보이는 에클레시아를 바라보았다. 무너진 옛 신전의 자리였다. 옛날의 영광의 흔적은 그것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 옛날, 라일라와 같이 처음으로 스티폴로르 깊숙이에 발을 디뎠을 때, 자신에게 성력을 준 셀레네님의 흔적을 바라보았었다.

【‘정말 덧없는 인생이야. 그렇지? 그러니까 안 좋은 감정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살아야 할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라일라는 렉스를 돌아보면서 웃었다.

【‘오빠. 오빠는 누군가를 원망하지 마. 그렇게 살면 불행해지는 것은 오빠뿐이야. 인생은 짧잖아. 그러니까 훌훌 털어버리고 누구보다도 힘차게 살아. 즐겁게. 그게 최고의 복수니까.’】

라일라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베르나도테 공작의 막내아들을 죽였다는 것을. 너를 그렇게 대한 신관이나 공작의 막내아들이 밉지는 않냐고 물을 때마다 라일라는 이렇게 말했다.

【‘용서 못해. 꿈에서는 수도 없이 죽였어. 근데, 그 쓰레기들을 원망하면서 내 남은 인생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서. 그래서 살아가는 거야. 나는 그냥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게 남은 소망이야.’】

“라일라. 나는 도저히 그게 안 돼.”

렉스는 주먹을 쥐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게 만든 로보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렉스는 복수를 선택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만하자.’】

루프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은 꽤나 아귀가 잘 맞았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들도 모두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로보가 범인이 아니라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삶이 그야말로 헛짓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루프스의 질 낮은 장난이라고 치부했다. 감히 제 조카의 이름을 들먹여 저를 흔들어놓으려는 술수라고 생각했다.

렉스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입술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은 그것이 진실이기를 바랐다. 라일라의 말이 맞았다. 이제야 왜 라일라가 그렇게 말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복수를 택한 그의 삶은 끔찍하기만 했다. 렉스는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몸을 곧게 편, 수없는 풍랑을 겪어낸 나이든 전사가 에클레시아를 바라보았다. 저 에클레시아의 모습이 지금 자신의 모습과 같아 렉스는 눈을 감았다. 그래, 여기가 자신의 무덤이 될 터였다.

* * *

루프스는 아리아의 보고를 받았다. 케릭스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여우 일족은 이상한 방향으로 퇴각을 했는데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인지 그저 정신없이 도망만 갔다.

“헤르티아는?”

“에클레시아로 향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렉스가 저를 유인한 곳도 에클레시아, 헤르티아와 여우 일족들이 향하는 곳도 에클레시아였다. 결국 양쪽에서 렉스와 헤르티아가 포위하려는 작전인 것을 루프스는 알아차렸다. 루프스는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렉스가 어디 숨어 있을까?

“조를 두 개로 나누어 한 조는 나와 같이 행동한다.”

“루프스님!”

병사 하나가 급하게 막사를 열고 들어왔다. 그는 예를 갖춰서 인사를 하곤 두 가지 소식을 전하였다. 인키디움에서 발표와 플로서스의 자백에 대한 것이었다. 라일라의 죽음을 사주한 것은 로보가 아니라 플로서스이며, 그 배후에 헤임달이라는 마레 위르가 있고 이 일로 포트리스도 피해를 보았다는 말이 온 스티폴로르에 퍼졌다. 유채가 말한 내용 그대로였다.

“이 소식, 렉스가 들었을 확률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숨어 있다면 모를 확률이 큽니다.”

“일단, 나와 일개 조는 렉스와 약속된 장소로 간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기하고 있다가 후방에 나타날 여우 일족이나 말 일족을 막아라. 완벽한 포위가 이루어지기 전에 대형을 깨야 한다.”

“알겠습니다. 카신 쪽에는 뭐라고 할까요?”

“카신과 케릭스는 렉스의 후방을 치라고 해라.”

루프스는 렉스가 있을 곳으로 의심 가는 곳을 지도에서 짚었다. 에클레시아는 평원이지만 서쪽 끝은 산맥과 연결되어 있어 병력이 숨을 만한 곳이 있었다. 렉스는 분명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럼, 이따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리아는 루프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동안 안 좋았던 몸이 모두 회복된 데다 며칠 동안 전투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최상의 몸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누구와 붙어도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몸과 달리 정신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단 것이었다. 지금 그는 마치 패잔병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일이 있으면 보고해라.”

루프스는 아리아가 나가자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피곤한 듯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더 이상은 전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렉스와 헤르티아가 진실을 알고 마음을 바꾸길 바랐다. 삭 인키디움에서 발표가 났으니 그것이 영 가망 없는 바람은 아닐지도 몰랐다.

“유채.”

그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숨만 붙어 있는 상황에서 구조되었다고 했다. 그 상태로 포로가 되었으니 그녀가 지금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된 것은 다 제 탓이었다. 스티폴로르에 유채에 대한 좋은 소문이 퍼진 적이 없기에 렉스도 같은 마레 위르지만 그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른 마레 위르들도 마찬가지였다.

루프스는 과거의 자신을 본다면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신경을 써서 유채의 평판을 무너뜨리지 말았어야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유채가 헥터에게 노려진 것의 원인은 어쩌면 유채에 대한 질 낮은 소문을 통제하지 못한 제게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안할 일만 많았다. 제가 했던 사소한 일들이 모두 유채의 피해로 돌아왔다. 유채에 대한 그런 저질스런 소문이 돌지 않았으면 헥터가 그녀를 노리지 않았을 것이고 제가 억지로 전쟁터에 끌고 다니지 않았으면 다시 헥터에게 붙잡힐 일도, 목숨이 경각에 달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축제 때 데리고 나가지 않았으면 인신매매단에 잡힐 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 작은 호의도 유채에게는 모두 폐가 되었다.

그때 잡았어야 했다.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할까 봐, 이젠 감시까지 했느냐는 가시 돋친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겨우 추스른 마음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그게 무서워서 유채를 그냥 보냈다. 그리고 그때의 그 선택이 결국 유채가 다시 고초를 겪게 만들었다.

제가 신뢰감을 주지 못했기에, 그녀가 저를 믿지 못했기에 저를 의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니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루프스는 뻑뻑한 눈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유채에게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주지 못한 제가 너무 한심했다.

“루프스님.”

루크레치아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화살이 하나 들려 있었다. 루프스는 화살대에 종이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오후 두 시, 메투스 산맥 자락으로 혼자서 올 것. 레티티아를 데리고 나오겠다.]

렉스의 글씨였다. 루프스는 종이를 움켜쥐었다. 유채가 이 앞에 있었다.

“오후 두 시까지 준비해라. 렉스를 만나러 간다.”

이게 마지막이다. 이번 일로 모든 것이 끝이 날 것이다.

* * *

“헤르티아님. 렉스 경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단테와 헤르티아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죽 읽어 내려갔다. 몇 시에 루프스를 만나기로 하였으며, 어떻게 작전을 전개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역시나 기밀 누출을 우려한 것인지 자세한 내용은 아니었다.

“우리도 이쪽으로 향하자.”

헤르티아가 종이를 접으며 말해다. 루프스 혼자 약속 장소에 가진 않을 테니 당연히 렉스 측과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먼저 가서 그들의 싸움을 말려야 했다.

“서두르자. 루프스가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렉스를 만나야 해.”

헤르티아는 혹시라도 잘못되어 일이 크게 커질 것이 걱정되었다. 더 이상의 피를 흘리는 것은 막아야 한다. 단테는 헤르티아의 불안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헤르티아가 올려다보자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잘될 거야. 걱정하지 마.”

“……그래.”

헤르티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르티아는 단테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복수에 미쳐 날뛰는 동안 그를 이용하기만 했다. 단테가 저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마음을 이용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제가 그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테는 순수하게 제게 사랑을 주었는데, 저는 그저 복수에 눈이 멀어 단테의 마음만 이용할 생각을 했다. 단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 마음 속의 슬픔과 분노가 더 컸을 뿐이었다. 헤르티아는 단테를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헤르티아.”

단테는 제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헤르티아의 이름을 속삭였다. 헤르티아가 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단테는 헤르티아의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피했다.

단테는 헤르티아의 왼손 약지에 입을 맞추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 말의 일족의 수장인 에쿠우스 단테. 베니니타스의 동생이자, 여우 일족의 수장인 울페스 헤르티아에게 말합니다.”

헤르티아는 단테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채고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단테는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손을 꽉 잡았다.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헤르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다. 제가 그간 무슨 짓을 했는데, 이건 아니었다.

“내게 미안하다면, 내 청혼을 받아줘.”

단테는 헤르티아의 손을 가만히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처음 너를 보았을 그때부터 너만을 사랑했고, 너만 생각했다. 너를 위해 한 일은 모두 내가 좋아서 한 것이지, 결코 내가 너를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야.”

“……그래서 안 돼. 나는…….”

“내게 미안해서, 내게 죄책감을 갖고 있다면 내 청혼을 받아줘. 난 과거의 네 행동보다 내 청혼을 거절하는 것에 더 상처받을 거거든.”

단테는 헤르티아의 손을 잡은 채로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헤르티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각자 일족의 수습이 끝나면,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일들이 모두 끝나면……. 우리, 자리를 내려놓고 떠돌아다니자. 빅터님처럼.”

“…….”

“나는 내 동생이 저질렀던 악행에 대한 속죄를 해야 하고 너는 네가 한 일의 속죄를 해야 하니까.”

단테는 헤르티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었다. 눈을 감은 헤르티아가 눈물을 흘렸다. 단테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니, 나랑 결혼해 줘. 평생 너랑 같이 갈게. 너를 결코 버려두지 않을게.”

단테는 헤르티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렀다. 단테는 그녀의 허락을 기다리듯이 한참을 가만히 그대로 있었다. 망설이던 헤르티아가 입술을 벌렸다. 서로의 숨이 얽혔다. 단테가 헤르티아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헤르티아는 단테의 뒷머리를 끌어안았다.

“같이 가. 나도 같이 갈게.”

헤르티아는 제가 복수를 위하여 지은 죄는 오롯이 자신이 다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테를 거절하려고 했다. 또다시 그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이미 만신창이인 단테를 다시 상처 입힐 수는 없었다.

“나도 같이 갈게. 네가 가려는 그 길.”

함께해 주겠다는 이가 있어 황홀한 결말이었다. 그러니 저는 더 깊게 죄를 속죄하고 갚아야 할 것이다. 헤르티아는 자신에게 찾아온 과분한 행복에 한없이 죄스러워졌다.

[아저씨, 에클레시아 내부로 들어가시는 건가요? 그 안은 확인된 바가 없어서 위험할 텐데요.]

란텔이 헤임달을 태우고 에클레시아에 접근하며 말했다. 헤임달은 손에 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깊숙이만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아. 어차피 이것을 숨기는 것이 목적이니까.”

[폭발 범위는 어느 정도 되나요?]

“아마, 에클레시아와 소니페스 호무스 일부를 날려 버릴 정도?”

헤임달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에 속이 후련해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였다.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매일같이 인사를 주고받던 마을 사람들의 처참한 시신들, 목이 부러진 채 죽은 아내와 딸. 그리고 칼로 난도질된 아들. 드디어 그 증오스런 오를레앙 남작을 제 손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끝이야.”

란텔과 헤임달은 에클레시아의 폐허로 들어갔다. 돌덩이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헤임달이 폭탄으로 만든 조각을 숨기려는 곳은 바로 유채가 루프스와 같이 들어갔던 에클레시아의 내부였다. 란텔은 혹시 모르는 위험에 대비해 에클레시아의 내부로 가는 문으로 가기 전까지 천천히 걸었다.

“Beatitas.”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땅이 갈라지고 흔들리자 란텔의 등에 올라타 있던 헤임달이 아래로 떨어졌다.

“으억!”

[아저씨!]

돌 더미 사이에서 웬 사람이 튀어나왔다. 유채였다. 유채는 헤임달에게 달려들어 그가 들고 있는 리와인더의 조각을 노렸다.

“꺄악!”

란텔은 재빨리 유채를 앞발로 밀어버렸다. 유채는 돌더미에 등을 부딪친 후 울컥 피를 토해내었다. 그나마 란텔이 경환이 없어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란텔이 헤임달의 앞을 가로막았다. 헤임달은 추락의 충격으로 뻐근한 목을 주무르다가 유채를 보고 경악했다. 분명 붙잡아놓았다. 한데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유채는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았다. 그리고 셀레네가 준 권능으로 상처를 치료했다. 통증은 그대로여도 몸의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네년이!”

“내가 당신에게 볼일이 있어서.”

유채가 에클레시아에 도착한 것은 하루 전이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에클레시아의 내부를 살폈다. 헤임달이 설마 폭탄을 땅에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곳은 평원이라 땅을 파는 게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한가로이 땅을 파고 있을 시간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눈에 덜 띄고 쉽게 폭탄을 숨길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생각해 보니 예상할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이었다. 그 누구도 들어가려고 생각하지 않는 에클레시아의 내부. 루프스는 유채와 에클레시아에서 나온 뒤에 신전의 입구를 막았던 돌을 치웠다. 그랬기에 유채는 아는 길로 에클레시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앞에서 헤임달이 나타날 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먼저 가세요.]

“란텔!”

란텔이 공격태세를 취하자 유채는 긴장했다. 아무리 강화 마법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했다고 해도 기술은 턱없이 부족했다. 루프스가 배운 호신술 정도로 과연 시카리우스 출신인 늑대 수인을 이길 수 있을까? 그리고 제 시간에 헤임달을 잡을 수 있을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이동하세요.]

“란텔, 하지만…….”

[어서 가세요! 아저씨는 제 은인이세요. 그러니 저는 그저 은혜를 갚는 것뿐입니다. 금방 따라갈 테니 얼른 가세요!]

란텔은 그 말을 마치고 유채에게 달려들었다. 유채는 헤임달에게 가기 위해서 몸을 굴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헤임달은 리와인더의 조각을 움켜쥔 채 란텔을 뒤로하고 뛰었다.

“아악!”

란텔이 유채를 물어서 돌더미로 던졌다. 돌더미에 부딪친 유채의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유채는 뇌가 흔들리는 듯해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구토감에 시달렸다. 권능을 사용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란텔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유채를 보고 머뭇거렸다. 대륙의 지원을 받기 위해 공작에게 넘겨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더 상처를 입히면 목숨을 보장하지 못할 것 같았다.

유채는 팔로 땅을 짚었지만 머리가 어지러워서 계속 앞으로 엎어졌다. 흘러내린 피에 시야가 가렸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후환은 제거하는 것이 낫겠지.]

탈출해서 여기까지 왔을 정도의 집념이라면 생포한들 끝까지 헤임달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공작에게 바치기로 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저 정도의 외모를 가진 암컷은 얼마든지 더 구할 수 있었다. 란텔은 엎어져 있는 유채를 향해서 아가리를 벌렸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유채는 란텔의 비명소리에 비척비척 고개를 들었다. 겨우 웽웽 울리는 것 같던 두통이 진정되었다.

[레티티아님!]

어디에선가 들어봤던 여자의 목소리에 유채는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거대한 갈색 말이 서 있었다. 란텔은 말에 뒷발차기에 걷어차인 것인지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절 기억하십니까?]

“……당신?”

유채는 저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했다. 소니페스 호무스에서 동물화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저를 공격했던 그 말 수인 여자였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 왔습니다.]

올가와는 소니페스 호무스에서 헤어졌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일까?

“여,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운이 좋았습니다.]

단테는 혹시 모르는 피해에서 소니페스 외각에 사는 수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펠레스 호무스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채의 도움을 받았던 펠레스와 올가도 펠레스 호무스로 이동하고 있었다. 펠레스 호무스로 이동하기 위해 올가는 에클레시아를 지나갔다. 그러던 중에 유채가 늑대 수인의 공격을 받는 것을 본 것이다. 올가는 유채를 돕기 위해서 정신없이 달려왔다. 말 수인의 속도는 수인들 중 최고라 다행히 제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잡것들이!]

정신을 차린 란텔이 올가를 공격하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어딜!]

[크악!]

이번엔 여우 수인이 달려들어 란텔을 물어뜯었다. 곧이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다른 수인들까지 모습을 보였다. 유채는 그들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소니페스 호무스에서 치료해 준 동물화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이었다.

수인들은 란텔에 맞서 유채를 보호했다. 하지만 시카리우스 출신인 란텔과 달리 그들은 민간인이라 당연히 그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레티티아님, 여긴 저희가 막을 테니 하시려던 일을 하세요!]

유채가 권능으로 겨우 몸을 치료하고 일어서자 올가가 그녀의 앞을 막으며 외쳤다.

“하, 하지만…….”

유채는 자신 때문에 괜히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여우 수인이 말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레티티아님께 입은 은혜를 이렇게 갚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가세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다른 수인들까지 어서 가라고 등을 떠밀자 유채는 눈을 질끈 감고 다리를 움직였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란텔이 유채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돼지 수인 하나가 그의 길을 막았다. 란텔을 에워싼 수인들은 한마음으로 그가 유채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유채는 헤임달을 쫓아 달렸다. 헤임달도 결국은 인간인지라 많이 뛰지는 못했다. 유채는 제 시야를 가리는 피를 닦아내고 헤임달을 쫓아갔다. 헤임달의 몸이 에클레시아의 내부로 들어갔다.

“우어어어어!”

유채는 갑자기 함성이 들리자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인간과 늑대 수인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회전이 시작되었다. 유채는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채는 손에 남아있는 권능의 양을 살펴보았다. 많아야 세 번에서 네 번이었다. 일단은 헤임달을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유채는 공간을 찢었다.

“헉!”

헤임달은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난 유채에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그는 곧장 허리춤에 맨 검을 뽑아 그녀를 향해 겨누고 휘둘렀다.

“아악!”

헤임달은 사냥감을 몰 듯 검을 휘둘렀다. 당연히 아무런 경험이 없는 유채는 그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어깨를 깊숙하게 찔린 유채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유채가 아무리 몸을 강화해도 헤임달을 힘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채는 불타는 것 같은 어깨의 통증을 참아내며 남은 권능의 양을 확인했다. 지금부터는 무조건 몸을 치료하는 데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했다.

“미친년이!”

헤임달이 다시 검을 휘두르는 것을 유채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막았다. 강화 마법 덕분에 맨손으로 검날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그쪽보다 미치지는 않았어!”

유채는 검을 붙잡아 온 힘을 다해 그를 집어던졌다.

“으억!”

헤임달이 벽에 처박힌 사이에 유채는 권능을 이용해서 어깨와 손바닥의 상처를 치료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입술을 깨문 유채는 저릿한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바닥에 쓰러진 채로 움직이지 않는 헤임달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그가 들고 있던 리와인더의 조각이 보이지 않았다. 유채는 당황해서 그의 주위를 살폈지만 조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악!”

헤임달은 저릿한 팔을 움직여 검을 휘둘렀다. 가까스로 유채는 헤임달의 검을 피했지만 유채의 배가 검에 배였다. 유채가 자세를 바꾸기 전 헤임달의 검이 유채의 다리를 찔렀다. 유채는 찾아오는 고통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헤임달은 유채의 어깨를 칼로 찔러넣었다. 유채가 숨을 헐떡이며 쓰러지자. 유채의 다리를 발로 밟았다.

“아아아악!”

유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유채는 핏기 없는 얼굴로 바닥에 엎어져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헤임달은 바닥에 쓰러져서 움직이질 못하는 유채를 뒤로하고 걸어갔다. 헤임달은 벽에 부딪치자마자 발로 밀어 돌 틈에 숨겨 놓은 목걸이를 찾았다.

“거기 숨겨두었구나.”

헤임달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유채는 헤임달이 물건을 찾는 동안 제 몸을 고치고 통증도 모두 없앴다. 유채는 멀쩡해진 몸 상태로 헤임달이 어디서 물건을 찾는지를 살폈다. 헤임달이 물건을 찾자마자 유채는 그를 쫓았다. 유채는 허리를 회전시켜서 체중을 실어서 헤임달의 얼굴에 그대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루프스가 알려준 호신술이었다. 체중을 실어서 주먹질을 하면 상대의 빈틈을 만들 수 있다고 루프스가 알려주었다. 유채는 충격에 비틀거리는 헤임달의 손에서 리와인더의 조각을 강탈한 뒤 미친 듯이 달려 그와 거리를 벌린 뒤에 공간을 찢고 그 틈으로 사라졌다.

“크아아아악!”

헤임달은 분노에 차 고함을 질렀다. 이제 다 왔는데! 이렇게 눈 뜨고 당할 수는 없었다! 헤임달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년은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 * *

처음에 짜놓았던 계획대로 유채는 석실로 이동했다.

“윽!”

유채는 석실에 도착하자마자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유채는 배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유채의 온몸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권능으로 상처를 치료하면 통증도 완벽하게 사라졌지만, 전에 겪은 통증에 대한 감각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유채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움직여야 하는데…….”

몸 상태는 최상으로 돌아왔지만, 권능으로 치료하는 동안 겪었던 고통과 앞선 전투에서 누적된 피로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헤임달이 언제 도착할지 몰라 잠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에클레시아에서 기다린 여파였다. 유채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벽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나 유채는 곧장 주저앉았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너무 힘들었다. 한숨만 자고 싶었다. 몸에 있던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밀려왔다.

“해야 하는데…….”

유채는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루프스는 렉스가 말한 대로 메투스 산맥 자락으로 찾아갔다. 단독으로 이동하는 척을 하고 약속 장소로 가니 렉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루프스는 렉스의 뒤를 살폈다. 유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약속은 지켰다.”

루프스가 앞에 서자 렉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저 건방진 놈의 얼굴이 구겨질 차례였다.

“유채는 어디 있나?”

“유채?”

“레티티아.”

루프스는 제가 붙인 이름으로만 그녀를 인식하는 상황에 다시 한 번 미안해졌다. 렉스는 약간은 비열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레티티아. 이름도 참 고상하게 지었더군. ‘아름다움’이라.”

“잡담을 떨 시간 없다. 나는 약속대로 왔다. 그러니 유채는 놓아줘라.”

“뭐, 아끼는 여자니 그런 이름을 붙여줬겠지.”

루프스는 인내심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렉스가 자꾸 말을 길게 끄는 것에 초조해졌다. 유채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실물로 봤다면 더 예뻤겠지.”

“뭐?”

루프스는 렉스의 말에 순간 정신이 나갈 뻔했다. 저 말은 결국 실제로 유채를 본 적은 없다는 뜻이었다. 분명히 상처 입은 유채를 구했다고 해놓고서!

렉스는 멍청한 표정을 짓는 루프스를 보면서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려서 웃었다.

“나는 헤르티아가 보여준 마법으로만 봤거든.”

“……그게 무슨!”

“죽었다. 포트리스 근처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서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더군. 시신이 너무 처참해서 두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끔찍했다지?”

“그, 그런…… 거짓말을 지금…….”

루프스는 렉스가 한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유채가…… 죽었다고? 아니, 아니다. 거짓말일 것이다. 포트리스 근처에서 죽었다는 유채의 옷을 그럼 렉스가 어떻게 얻었겠는가?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된다. 레티티아의 시신을 찾았을 때 하의는 입지 않은 상태였다더군. 이유가 뭘까?”

렉스는 루프스의 화를 더 돋우기 위해서 거짓을 덧붙여 더 자극했다. 그가 이성을 잃으면 잃을수록 상황은 렉스에게 유리해질 것이다. 베니니타스가 로보와의 대결 당시 그를 도발하여 이성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여럿이 유린하고 짓밟은 것 같다고 하더군. 반항이 심했는지…….”

“그 입 다물어라!”

루프스의 눈동자가 점처럼 작아졌다. 렉스는 루프스가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늑대 일족은 사랑을 잃으면 이성이 나가다 못해 미쳐 버리는 놈들이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이 최악의 일까지 당하고 개죽음까지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딴 거짓말은 그만하고! 빨리 약속을 지켜라!”

아닐 것이다.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렉스가 저를 자극하려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유채가 죽었다고? 지금 그걸 믿으라고? 루프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말아 쥐면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헤임달이라는 내 친구가 발견했지. 포트리스 근처에서…….”

렉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포트리스 근처에서 발견했다고 한다면 루프스는 인간들이 그랬을 거라 믿을 것이다. 헤임달이 전한 바에 따르면 수인들에게 쫓겨서 도망치다가 숨을 거둔 것 같다고 했지만, 진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루프스의 화만 돋우면 그만이었다.

“누가 네 펠릭스 다우스를 유린하고 죽였을까? 인간일까? 아니면 수인…….”

[크아아악!]

루프스가 거대한 은색 늑대로 변해서 달려들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분노로 번뜩였다. 급습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렉스는 볼에 큰 상처를 입고 뒤로 물러났다.

아리아는 일이 틀어졌음을 깨닫고는 부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루프스는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죽여!]

루프스의 살기는 굉장히 격렬하고 위압적이어서 렉스의 뒤에 있던 인간들뿐만 아니라 아리아와 늑대 수인들까지도 멈칫하게 만들었다. 루프스는 잔뜩 분노하여 명령을 내렸다.

[자비 따윈 필요 없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절규하는 루프스는 가장 먼저 렉스에게 달려들었다. 렉스는 검을 들어서 간신히 공격을 막았다.

아리아는 루프스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던 그가 미쳐 날뛰는 것이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루프스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전군, 공격!]

늑대 일족과 포트리스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헤르티아와 단테는 루프스와 렉스 사이에 전투가 시작된 것을 보았다. 생각보다 이르게 시작된 전투에 헤르티아는 얼른 여우의 모습으로 변했다. 빨리 루프스를 막아야 했다. 단테 역시 거대한 흑마로 변했다.

[전군 공격!]

헤르티아는 측면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크레치아였다. 단테가 루크레치아의 공격을 막았다.

뒤로 밀려난 루크레치아는 이를 갈았다. 여우와 말 일족이 나타날 거라는 루프스의 예상이 맞았다.

[잠깐 루크레치아.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헤르티아는 루크레치아를 설득하러 대화를 시도했다. 그녀 역시 인키디움의 발표를 들었으니 제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이었다. 루크레치아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지만, 분명히 설득할 수 있었다.

[인키디움의 발표를 듣지 않았나. 나는 그저 이 쓸모없는 전쟁을 막으려고 하는 거야. 그러니, 그만하고 빨리 저들을 막아야 해.]

[제가 어떻게 울페스 헤르티아님을 믿습니까? 헤르티아님이 루프스님에 대한 감정을 풀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믿기 힘들어도 믿어! 너도 이 전쟁이……!]

[크아아악!]

대치 상태에 있던 여우 일족과 늑대 일족 사이에서 늑대 일족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늑대 일족의 틈에 몰래 숨어 있던 란텔이 공격받은 듯한 연기를 한 것이었다. 란텔은 적당히 수인들을 상대하다가 헤르티아가 보이자, 헤임달의 작전을 돕기 위해 루크레치아의 군대에 숨어들었다. 루크레치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헤르티아는 란텔을 알아보고 분노했다.

[너!]

단테가 미처 막기도 전에 헤르티아가 늑대 일족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란텔은 웃었다. 이것이 헤임달이 바라는 것이었다. 루크레치아는 헤르티아의 말이 거짓이라고 판단했다. 루크레치아는 늑대 일족에게 명령을 내렸다.

[공격!]

헤르티아는 자신이 란텔의 도발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여우 일족과 늑대 일족은 교전을 시작했다. 헤르티아는 웃고 있는 란텔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 * *

유채는 시간이 조금 흐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몸을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찾아온 피로에 기절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잠깐 눈 좀 붙였다고 훨씬 더 움직이기 편했다.

유채는 손에 쥔 리와인더의 조각을 바라보았다. 붉은색의 루비 조각일 뿐이었다. 겨우 이것 하나때문에 그 고생을 했다는 것이 정말 허탈했다. 유채는 아까 이곳을 둘러볼 때 미리 이 석실에 옮겨놓았던 가방을 찾았다.

“이니투스의 보자기.”

유채는 가방 속에서 하얀색 천을 꺼냈다. 리와인더의 조각을 이니투스의 보자기로 감싼 유채는 상아함이 있는 중앙으로 향했다. 그리고 함을 꺼내려고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지난번에 이 앞에서 기절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어떻게 그 신관은 이것을 꺼냈을…….”

유채는 불현듯이 빅터가 준 목걸이를 생각해 냈다, 이게 열쇠의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유채는 가방에서 목걸이를 찾아 결계에 가져다 댔다. 핏 하는 소리와 함께 결계가 사라졌다. 유채는 함을 낚아채 그 안에 조각을 집어넣고 보자기로 감쌌다.

“이봐. 나 이제 당신한테 이거 보내.”

유채의 손등에 남아 있는 온전한 권능 하나가 빛을 내었다. 그 빛이 상아함을 감싸 안았다. 폭발하듯이 밝은 빛이 작은 석실을 채웠다.

“그러니, 당신도 약속 지켜.”

하얀 빛이 방을 채웠다. 유채는 눈부신 빛에 눈을 감았다.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자 유채는 슬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있던 상아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채는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에 긴장이 풀려 유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넋이 나가 있다가 유채는 불현듯 저를 도와준 수인들이 떠올랐다. 남은 권능은 이제 치유로 쓸 수 있는 것 약간과 단 한 번 이동할 수 있을 정도뿐이었다. 유채는 공간을 찢었다.

“괜찮아요?”

공간을 열고 신전 밖으로 나온 유채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수인들을 발견했다. 유채는 다급하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미, 미안해요. 나, 나 때문에…….”

그들은 란텔에게 당해서 모두 위르형으로 돌아와 있었다. 유채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오른팔이 잘린 올가가 유채의 눈을 쓸었다.

“괜찮아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레티티아님이 저희에게 베푸신 은혜는 신의 은총에 가까웠으며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니 울지 마세요.”

유채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유채의 손이 올가의 잘린 오른팔에 닿았다. 하얀 빛이 곧 올가의 팔을 완벽하게 고쳤다. 유채는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여기로 오세요. 제가 고쳐 드릴게요.”

유채는 자신의 옆에 모여든 수인들을 치료했다. 마지막 수인의 치료가 끝날 쯤에는 가지고 있던 모든 권능이 사라졌다. 유채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올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유채의 몸을 부축했다. 유채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난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

유채는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루프스를 막아야 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유채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올가는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유채의 몸을 붙잡았다. 유채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움직인 여파로 크게 지쳐 있었다.

“지금은 쉬어야 해요. 몸이…….”

옷은 이미 피로 물들어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상처가 심각했다는 증거였다. 눈이 이미 반쯤 풀린 상태에서도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고집을 피우는 그녀를 더 막지 못하고 올가는 말로 변해 그녀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제 목숨이 위험하더라도 이게 옳은 것이라 믿으면서.

[타세요.]

“하, 하지만.”

[그 몸으로는 움직이다가 곧 쓰러질 거예요.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 타세요.]

유채는 미안하다고 속삭인 뒤에 올가의 등에 올라탔다. 다른 수인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 때문에 머뭇거렸다.

“죄송합니다. 이 정도밖에 도움이 되지 못해서.”

돼지 수인 하나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유채는 괜찮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올가가 유채를 태우고 전쟁터 쪽으로 달렸다. 유채는 올가의 목을 꽉 끌어안고 몸을 기대었다. 수인들과 인간들이 얽혀서 싸우는 전쟁터에 다가가자 피 냄새가 훅 끼쳤다.

[레티티아님?]

말 수인의 등에 탄 유채를 발견한 아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죽었다고 한 마레 위르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니? 아리아는 경악했다. 유채는 아리아를 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리아 씨?”

[살아 계셨습니까?]

“예? 전 살아 있어요.”

아리아는 렉스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떤 경로로 레티티아의 옷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지만 루프스를 속인 것이다. 아리아는 루프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완전히 미쳐서 폭주하고 있었다. 제 몸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날뛰는 그를 말릴 수 있는 건 레티티아뿐이었다.

[지금 루프스님을 말릴 수 있으신 분은 레티티아님뿐이십니다.]

“알았어요. 갈게요.”

유채는 올가의 등에서 내려왔다.

[제가 모실게요, 레티티아님.]

올가가 걱정스러워했지만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올가를 전쟁터 한복판에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아리아는 유채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내고 부하들을 불렀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민간인은 빠져라. 있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올가 씨,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돌아가세요.”

올가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유채에게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하고 자리를 떴다.

아리아는 부하들과 유채를 보호하면서 루프스에게 다가갔다. 유채를 등에 태우고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었다. 힘들더라도 호위를 받으며 직접 걷는 쪽이 나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유채는 루프스를 발견했다.

“루프스!”

“렉스 삼촌!”

루프스는 렉스의 팔을 물어뜯으려던 차에 유채의 목소리를 들었다. 환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루프스는 홀린 듯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렉스 역시 갑자기 들린 알렉스의 목소리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알렉스가 서 있는 것을 본 렉스는 힘이 쭉 빠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알렉스가 렉스를 공격하려는 다른 수인을 막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삼촌. 저예요, 프리드.”

렉스는 루프스가 한 말이 장난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에 넋이 나갔다. 프리드와 벤자민은 살아 있었고 자신은 여태껏 둘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렉스는 의미 없는 신음만 흘렸다.

“유, 채……?”

루프스는 환청에 이어 이젠 환각까지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유채가 보였다. 아리아의 옆에 서 있는 건 분명 유채였다. 살아 있다. 죽은 게 아니다. 루프스는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 줄 알았다.

“루프…… 윽!”

그때,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유채의 목에 화살이 박혔다.

헤임달이었다. 유채를 노리고 활시위를 당긴 것은 바로 헤임달이었다. 그는 또 다시 날린 화살이 유채의 등에 박혔다. 루프스는 미친 듯이 달려갔다. 유채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엎어진 유채의 입에서 피가 울컥울컥 넘어왔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겨우 유채를 붙잡은 루프스는 혀로 그녀의 상처를 핥았다. 피가 너무 많이 났다. 유채가 죽을 것만 같았다.

[안 돼…… 안 돼……]

유채의 숨은 옅어졌고 눈꺼풀을 들 힘도 없는 것인지 눈이 느리게 깜박이면서 감기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결국 눈이 감기고 몸까지 축 늘어졌다. 루프스는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유채가 숨을 쉬지 않았다. 루프스는 늘어진 유채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직 따뜻했다. 그럼 아직 죽은 게 아니다.

“눈을 떠. 정신을 차려봐. 응?”

루프스는 유채의 볼에 제 볼을 비볐다. 시신은 차갑기 마련인데 유채는 아직 따뜻했다. 아직 죽지 않았다.

루프스는 숨을 쉬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는 건 애써 무시하고 온기에만 집착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이 식을세라 꼭 끌어안았다.

“나한테 복수하고 싶지 않나?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지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았나?”

루프스는 유채의 볼과 이마에 입을 맞추며 힘없이 늘어진 유채의 몸을 추켜 안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큭큭큭. 그년은 죽었어.”

알렉스의 손에 제압된 헤임달이 죽은 몸을 끌어안고 있는 루프스를 비웃었다. 제 계획은 실패해도 저년은 길동무로 삼았으니 이제 되었다. 헤임달의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루프스는 헤임달의 말에 이성이 끊겼다.

“안 죽었다! 안 죽었어!”

루프스는 현실을 부정하며 유채와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싸움은 멈췄다. 미쳐서 날뛰는 헤임달의 말로 주위의 수인들과 인간들은 루프스의 품에 안겨있는 작은 여자가 자신들의 목숨을 구했음을 알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마조마하며 지켜보고 있던 올가를 비롯한 다른 수인들은 한걸음에 달려와 바닥에 주저앉아서 통곡했다.

“……언니를 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루프스는 유채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하면 유채가 듣고 다시 눈을 떠주기라도 할 것처럼. 눈물에 젖은 청회색 눈동자만큼 목소리도 절박했다.

“가야 한다며, 돌아가야 한다며. 응? 그러니까 눈 좀 떠라. 응?”

유채의 몸이 식어가기 시작했다. 루프스는 벌벌 떨면서 그녀를 끌어안고 체온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보다 못한 케릭스가 루프스의 어깨를 짚었다.

“루프스님.”

루프스는 자꾸만 뒤로 넘어가는 유채의 뒷머리를 받치고 깊게 끌어안았다. 숨도 쉬지 않고 심장조차 멎어버린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꺼져 가는 온기를 붙잡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니다! 아니라고! 얼른 오르페를 불러와! 오르페!”

케릭스의 말에 분노한 루프스가 몸부림쳤다. 그 와중에도 유채의 몸은 꼭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저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런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안 죽었어…… 안 죽었어…….”

하지만 사실은 유채를 안고 있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끌어안고 있는 것은 유채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갑자기 이 세상에 홀로 떨어져 수없이 고통을 겪고 죽음마저 이렇게 허망한, 사랑하는 연인의 마지막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응? 내가 뭐든지 할게. 응?”

그때였다. 펑! 갑자기 큰소리가 나면서 에클레시아에서 빛기둥이 올라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스티폴로르의 전역에서 빛기둥이 올라왔다. 하늘 위로 솟구치는 빛기둥은 마치 하늘과 땅을 잇는 통로와 같아 보였다. 평원에 모여 있던 모두가 빛기둥을 보고 바닥에 엎드렸다.

높이 솟아오른 빛기둥은 하늘 위로 넓게 퍼졌다. 푸르른 하늘이 온통 하얗게 변하고, 마치 비처럼 빛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루프스는 차라리 이 빛기둥과 함께 유채가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안고 있다가 놀라서 고개를 내렸다.

“유채! 유채!”

유채의 심장이 미약하게 다시 뛰기 시작한 걸 느낀 루프스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는 아주, 아주 옅게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인간 마법사 스티브가 가까이 다가와 유채의 맥을 짚었다. 약하지만 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유채의 심장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주 약하게 퍼덕이고 있었다.

“빨리 아가씨를 치료해야 합니다.”

알렉스가 목에 꽂힌 화살을 빼려고 하자 스티브는 그를 막았다.

“안 됩니다. 이 화살이 지금 과다출혈을 막고 있는 거라 이대로 빼면 죽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루프스가 절박하게 물었다. 스티브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생명마법이나 타인의 수명을 이용한 마법으로 시간을 벌거나 아니면 시간 마법으로 몸의 시간을 정지시켜서 치료할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프레드릭 군도 없고 유일하게 생명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대지 에어리얼 소유자는 대륙에…….”

“내 수명을 써라.”

빅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제가 사랑하는 암컷의 위험에 정신이 나간 루프스와 그의 품에 안겨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해매고 있는 유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빅터님?”

케릭스가 놀라서 그의 팔을 잡았다. 수명은 결코 일부만 딱 떼어서 줄 수 없었다.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인사할 수 있는 2주에서 2달가량의 시간만 남겨두고 모조리 가져가는 것이 수명을 이용하는 마법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수명 마법은 그래서 대륙에서는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나도 이제 죄를 갚을 때가 되었지.”

빅터는 드디어 루프스의 눈을 마주했다.

“내가 네 어머니인 블랑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빅터는 자신이 로보를 질투해 베니니타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는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았다. 루프스는 이미 유채의 일로 넋이 나가 빅터의 말에 분노조차 하지 못했다.

빅터는 멍하니 제 말을 듣기만 하는 루프스를 보면서 쓰게 웃었다.

“정말 미안하다. 그러니, 나는 내 죄를 이렇게 갚겠다. 추악한 죄를 저지르고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이제 로보와 블랑카에게 사과를 해야 해.”

빅터는 제 팔을 스티브에게 내밀었다. 스티브는 머뭇거렸다. 한 사람의 목숨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마법이었다. 당연히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루프스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이미 얼이 빠져서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유채!”

루프스가 유채의 입가에 귀를 가져갔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잠시 멈추었었다. 이제 유채의 숨소리는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옅어졌다.

“어서!”

빅터가 스티브를 채근했다. 기적처럼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스티븐은 빅터의 팔뚝과 축 늘어진 유채의 가는 팔목을 잡아 그의 수명을 그녀에게 전했다. 그러자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고 심장도 전보다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루프스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빅터 역시 살짝 미소 지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지금은 처치할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제대로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늦어지면 이 아가씨는 정말로 죽습니다.”

[근처에 제 막사가 있습니다.]

란텔을 물고 온 헤르티아가 그를 헤임달 옆에 내던졌다. 피투성이가 된 란텔은 간신히 숨만 붙어서 헐떡였다. 헤임달이 란텔을 끌어안았다.

헤르티아는 저를 보고 있는 알렉스를 향해 웃었다. 겁쟁이 프리드가 저렇게 늠름한 청년으로 자랐다는 것에 눈물이 났다. 헤르티아는 루프스에게 몸을 돌렸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저에게 저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요, 루프스님.]

루프스는 그것이 헤르티아의 진심임을 알아차렸다. 헤르티아가 몸을 숙이자 루프스는 유채의 몸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고 그녀의 등 위에 올랐다. 그의 뒤에는 스티브가 앉았다.

“루크레치아, 빅터, 케릭스, 이곳의 정리를 부탁한다. 카신은 여우 일족 근처로 막사를 옮겨라.”

루프스가 먼저 떠나기 전에 명령을 내렸다.

“포트리스 측은 죄인인 헤임달, 란텔을 데리고 우리 쪽으로 와라.”

루프스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부상자들의 치료를 돕겠다.”

수인이 먼저 마레 위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느리게 뛰는 유채의 심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눈에서 떨어진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유채의 옷자락을 적셨다.

* * *

유채는 눈을 뜨자마자 핑 도는 머리를 짚었다. 유채는 기억을 되짚었다. 뭔가가 날아와 목에 박혔다.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비명도 지르지 못했었다. 그 후로도 등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었고 그대로 쓰러졌다.

“……죽은 건가?”

“그러면 나도 곤란해진단다, 아이야.”

유채는 익숙하면서 짜증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셀레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셀레네가 손을 내밀자 유채는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라 눈살이 찌푸려졌다. 셀레네가 조금 삭막하냐고 물은 뒤에 손가락을 튕겼다. 곧바로 눈앞에 유채꽃밭이 펼쳐졌다. 바람마저 살랑살랑 불었다.

“좀 걸을까?”

셀레네는 유채와 팔짱을 끼고 꽃밭을 걸었다.

“제가 죽은 건가요?”

“아니. 죽기 직전에 네 시간을 멈췄지. 저 아래에서 적당한 대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네 몸이 버틸 수 없을 것 같더구나. 그래서 내가 네 몸의 시간을 멈추고 네 영혼을 이곳으로 불렀단다. 아마 아래에서는 네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을 거야.”

“땅에 묻히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유채의 농담에 셀레네는 웃으며 그 전에는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미안하다. 네게 이렇게 힘든 일을 맡겨서.”

“알긴 아시네요.”

“멀리서 듣고 있기는 했지만, 너만큼 당당하게 날 욕하는 아이는 처음 봤다.”

“잘못하신 것은 맞잖아요.”

“그래, 내가 잘못했지.”

셀레네는 유채의 두 손을 잡았다. 셀레네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셀레네는 유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신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나, 시간과 운명을 관장하는 여신 셀레네. 부당한 부탁임에도 성실하고 올바른 길로 그 부탁을 이행해 준 이계의 여인, 한유채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와 경의는 됐고요. 전 제가 겪은 일에 보상만 받으면 되요.”

“고지식한 것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참 영악하단 말이지.”

혀를 내두른 셀레네는 유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한 가지만 묻자꾸나. 그렇게 힘든 일을 당했는데 왜 그들에게 네 원한을 풀어내지 않았느냐?”

“나한테 왜 그런 것만 묻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난 아무도 용서 안 했어요. 그들이 정당한 벌을 받기를 원하고 나는 그들에게 보상을 받기를 원해요. 내가 바라는 건 거기까지예요. 내가 피해자라고 뭐든 할 수 있다고 하면 그때부터 난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거예요. 난 용서하지도 않고 복수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놈들 원망하면서 살기에는 내 인생이 아까워요.”

“뭐든 네 마음이 편하면 그만이지. 그냥 궁금해서 물었다. 너를 만나고자 한 이들이 있어서 시간을 내어서 데리고 왔다.”

말을 마친 셀레네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혼자 남은 유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저, 아가씨.”

유채는 등 뒤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더 큰 키를 가진 건장한 체구의 여자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하얀색이었고 엉덩이에는 마찬가지로 하얀색의 꼬리가 달려있었다. 그 여자의 옆에는 회색 머리카락의 루프스와 꼭 닮은 남자가 서 있었다. 루프스가 선이 조금 굵다면 저런 얼굴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 하얀 머리카락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있었다.

유채는 그들이 바로 루프스의 가족임을 눈치챘다. 블랑카가 유채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블랑카는 눈물을 흘렸다. 죽어서도 자식들 걱정에 그녀는 편한 적이 없었다. 속이 깊고 정이 많은 아이가 거친 세상에 휩쓸려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져 내렸었다. 블랑카는 유채의 눈을 마주 보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유채가 없었다면 라이칸은 아직도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유채가 그 아이를 구했다. 블랑카는 유채에게 한없이 미안하면서 동시에 고마웠다.

유채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로보가 다가왔다. 로보는 시원시원하게 말을 꺼냈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 아들은 아직도 죄책감과 공포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겠지 네 덕에 그 아이는 그 늪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이의 부모로서 너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어떤 말을 하든 네 마음이 풀리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너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구나. 미안하다. 모두 그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나의 잘못이다.”

“그게, 제가 두 분께 사과받을 일은 아닌…….”

유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이 루프스를 성인이 될 때까지 기른 것이라면 아들 성격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이들의 사과가 마땅한 것이었지만, 그가 망가진 것은 부모를 잃고 세상에 홀로 떨어진 후였다.

유채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리던 블랑카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정말 염치없다는 것을 아는데, 나도, 한 아이의 엄마인지라……. 정말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요, 아가씨?”

블랑카의 손이 유채의 볼을 덮었다. 젖은 눈동자가 유채를 향했다.

“그 아이에게, 내 아들에게…… 한 번만…… 아니, 아니에요. 잊어버려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내가 죄인이에요. 내가……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아가씨…….”

블랑카는 남겨진 아들이 가여웠다. 유채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기꺼이 따라야 하지만, 그래도 블랑카는 일말의 희망을 담아서 유채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한 번만 제 아이를 좋게 봐줄 수는 없느냐고. 염치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채는 계속 미안하다고 하는 그녀를 묘한 눈으로 보았다. 로보는 울고 있는 블랑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로보의 옆에 서 있던 에리카가 유채에게 다가왔다.

“오빠에게 내 말을 전해줄 수 있나요?”

에리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유채는 에리카의 최후를 떠올렸다. 루프스가 평생을 짊어지고 있던 죄책감이었다. 에리카도 알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유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빠를 원망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더 이상 죄책감 갖지 말라고 해주세요. 그건 오빠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고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편해지라고. 나는…….”

에리카는 눈물을 삼키려고 하는 것인지 말을 잠깐 멈췄다.

“……나는 오빠가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오빠가 내 몫까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고 전해주세요. 그거면 돼요. 난 그걸 부탁하려고 여기에 왔어요.”

“아가씨, 내 이야기도 라이칸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전해주시오.”

에리카 다음은 로보였다.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그러니 떳떳하게 살라고.”

블랑카는 눈물 젖은 얼굴로 유채에게 말했다.

“사랑한다고, 엄마는 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전해줄 수 있나요?”

아들에게, 오빠에게 전하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서로를 품에 안았다.

“고맙고 정말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정말.”

유채는 마지막 인사를 들으며 그들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허리를 숙였다. 유채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은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돌린 유채의 눈에 셀레네가 보였다. 아래쪽을 쳐다보고 있던 셀레네의 손짓에 스티폴로르 전역에서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뭐하시는 건가요?”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았으니 땅에 남은 악기를 정화하는 것이다. 리네아가 지고 있던 부담을 덜어주어야지. 그리고 네 목숨 줄도 붙여놓아야 하고.”

셀레네가 손가락을 튕기자 빛기둥에서 작은 빛이 튀어나와 유채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 빛이 안으로 들어가자 유채의 심장이 뛰고 숨을 쉬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 세계에서 당신이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요?”

“나는 관리자일 뿐이란다. 인간이 세계의 법칙을 어겨 오류가 생기면 그것을 다시 원래대로 바로잡아, 세계가 멸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지.”

“그럼 당신의 피조물들은요?”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 뿐, 신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침범해서는 안 된단다. 신은 그들이 사는 곳을 관리하는 역할만 한단다. 내가 그것을 어겨서 벌을 받은 것이고.”

셀레네가 유채를 돌아보았다.

“신이라는 것은 사실 할 일이 별로 없어. 위대한 그분은 그분의 피조물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만들었고 우리는 그 일을 할 뿐이야. 나는 그 일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했기에 벌을 받아 힘을 빼앗겼지. 그 덕에 나는 내 딸을 소생시키지 못하고 소멸만 막고 있지. 내 벌은 내 이기심 때문에 고통받은 내 피조물의 고통을 똑같이 겪는 거라고 할 수 있지.”

셀레네는 인간처럼 보이는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우리 열두 명의 신은 모두 최초의 인간이었어. 어떤 이들은 벌을 받기 위해서 신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고귀한 신념으로 신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상황에 떠밀려 신이 되었지. 나는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이 길을 선택했고. 결국 나는 인간의 마음을 버리지 못해 내 이기심을 채우려 했고 그것은 내 고통으로 돌아왔지.”

셀레네는 손을 흔들었다. 셀레네의 손짓에 영화관 스크린 같은 것이 나타났다. 스크린에 유채를 간호하는 루프스가 비쳤다. 루프스는 유채의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얼마 있다가 오르페가 들어와 큰 고비를 넘겼다 말하고 돌아갔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루프스의 턱을 타고 그의 눈물이 뚝뚝 흘러내려왔다. 루프스의 눈물은 유채의 손에 닿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 네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거든.”

셀레네는 유채를 돌아보았다.

“고맙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처리해 주어서. 내 아이들을 지켜주어서.”

셀레네는 유채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노랗게 빛나던 꽃밭이 눈처럼 사라지고 셀레네는 유채에게 물었다.

“그래서 소원이 무엇이냐? 뭐든 들어주마.”

유채는 입을 열었다.

“내 소원은요.”

유채의 말을 들은 셀레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뒷목을 짚었다. 유채는 셀레네의 그런 반응에 굉장히 통쾌해서 하하하 웃었다.

* * *

“루프스님.”

블루벨이 유채의 침대의 옆에 앉아서 머리를 기대고 잠든 루프스의 어깨를 흔들었다. 루프스는 발작하는 것처럼 잠에서 깼다.

“유채는? 유채는?”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불편하게 여기서 이러시지 말고 편하게 주무세요. 요 일주일간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잖아요.”

루프스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침대 위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유채를 보았다. 그녀는 동화 속에 나오는 영원한 잠에 든 공주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화살에 맞아서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때도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스티브와 급하게 뛰어온 오르페의 활약으로 유채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목에 박힌 화살의 위치가 정말 아슬아슬했다고 그들이 전했다. 조금만 잘못 박혔어도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루프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유채는 살아 있는 시체에 가까웠다. 왼쪽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야만 느껴지는 심장의 뜀과 코 밑에 손을 대야 느껴지는 숨결이 그녀가 살아 있음을 겨우 말해주고 있었다.

루프스는 지극정성으로 유채를 간호했다. 전후 처리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상황에 루프스는 제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처리하면 곧바로 유채에게 와 그녀의 옆을 지켰다.

삼 일 전 갑작스럽게 원인 모를 열 때문에 유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는 루프스는 한숨도 자지 않고 찬 수건으로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모든 일을 다 했다. 그의 정성이 통한 것인지 유채의 열은 금방 떨어졌다. 블루벨은 루프스가 유채의 손을 부여잡고 통곡하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아니다. 너도 가서 쉬어라. 고생했다.”

블루벨은 루프스가 할 수 없는, 옷을 갈아입힌다든가 하는 시중을 들고 있었다. 블루벨은 막사의 바닥에 앉아 쪽잠을 청하면서까지 그녀의 옆을 지키려고 하는 루프스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막사를 나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외에는 없었다.

루프스는 프레드릭과 알렉스를 통해서 유채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들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유채는 이 스티폴로르를 지켰고 수많은 수인들과 마레 위르들의 목숨을 구했다. 천박한 암컷이라 손가락질하고 목을 베어 죽이라고 요구하던 이들을 위해서 유채는 스스로를 바쳤다. 그 대가로 유채는 지금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내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유채는 너무 작고 가녀렸다. 한 팔로도 감기는 유채의 몸은 꽉 쥐면 부서질 것 같았다. 이렇게 약한 몸으로 유채는 그간 엄청난 일들을 겪었다. 모두 제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한 것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이 약한 몸으로 모든 것을 견뎠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죽고 싶었을까. 얼마나 저를 죽여 버리고 싶었을까. 유채가 저를 죽이려 들어도 루프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일어나서 나에게 벌을 내려야지. 응? 눈 좀 떠봐.”

【‘앞으로 이틀 안에 일어나지 못하시면, 가망이 없으십니다.’】

오르페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이틀 안에 일어나지 못하면 유채가 죽는다는 말에 루프스는 발밑이 무너져 내린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루프스는 일주일 동안 신을 더 자주, 더 간절하게 찾았다. 제발 유채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유채가 이 스티폴로르를 구했는데 왜 그녀의 목숨을 이렇게 앗아가느냐 원망하기도 했다. 잘못은 제가 했으니 제게 무슨 벌을 내리든 다 받을 테니, 이 땅을 구한 유채만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줄줄 흘렀다. 루프스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유채의 하얀 손에 떨어졌다.

“루프스님.”

알렉스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전쟁이 끝난 지 일주일, 가까운 여우 일족의 궁으로 가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았지만, 유채의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는 말에 루프스는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포트리스에 남은 헤임달의 일당은 프레드릭의 도움으로 붙잡아 죄를 추궁했다. 루프스는 그들이 헥터에게 아편을 공급하며 카를리티오를 앞당기는 약을 섞어 유채를 겁탈하게 유도했다는 말을 웃으며 하는 헤임달에 분노했고 알렉스는 그를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를 눈으로 보았다. 악몽을 꾸고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는 일은 일상이었고 온몸에 지울 수 없는 상처도 입었다. 유채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다니…… 게다가 그들이 유채를 잡아서 대륙의 공작에게 정부로 바치려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때, 루프스의 눈빛은 헤임달을 죽여도 골백번을 죽일 눈빛이었다.

“알…… 아니, 프리드.”

루프스는 눈물 젖은 눈으로 알렉스를 보았다. 프리드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했다. 알렉스는 편한 대로 부르라고 하면서 루프스의 옆에 섰다.

“유채 양은 괜찮나요?”

“……아니. 별 차도가 없다.”

알렉스는 루프스의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려 십사 년 만에 만난 그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주고받았다. 베니니타스를 죽인 것, 형제를 알아보지 못한 것, 프레드릭을 고문한 것, 알렉스를 다치게 한 것.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을 빼앗은 것, 평생을 지옥에서 살게 한 것. 셋 사이에 파인 감정의 골은 한 번에 메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테지만 그와 비슷한 관계로는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있으니 유채 양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요.”

알렉스는 달빛이 가득한 정원에서 울고 있던 유채를 기억했다.

“웬 아가씨가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처음엔 귀신을 본 줄 알았다니까요.”

루프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유채가 심적으로 괴로워하던 때였다. 블루벨에 대한 죄책감과 제게 한창 휘둘릴 때라 가장 고생을 많이 하고 괴로워하던 때였다.

“웃으라고 말해줬었어요. 웃으면 정말 예쁠 것 같아서.”

“웃으면…… 정말. 아름다워. 세상에 다시 없을 만큼…….”

루프스가 물을 적신 수건으로 유채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알렉스는 루프스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속은 지금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알렉스 하워드가 아닌 프리드로 말하는 것이니 잘 들어줘요, 형.”

루프스는 잠자코 알렉스의 말을 들었다.

“이미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을 다른 길로 걸어왔어요.”

“안다. 알고 지낸 시간보다 모르고 지낸 시간이 더 길어졌지.”

“우리는 형이 죄책감을 갖지 않기를 원해요. 형은 우리에게 충분히 용서를 구했고 저희는 형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래도 나는 평생 너희에게 미안해하겠다.”

“저희도 그렇게 살 거예요. 제 아버지의 죄에 대해서요. 그러니, 저희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마세요.”

너무 복잡하게 얽혀 버린 사이라서, 알렉스는 루프스를 원망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루프스는 시대의 피해자였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거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이 죄라면 죄였다. 알렉스는 루프스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베니니타스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저희 형제에게 한 일이든. 그러니 알렉스는 그가 스스로를 너무 책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저와 형은 포트리스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같이 울피누스 호무스로 돌아가자던 헤르티아에게도 이미 말을 해두었다. 헤르티아는 아쉬워했지만, 형제의 선택을 존중하고 자주 놀라오라고 했다.

“그곳에서 수인과 인간이 화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거예요.”

“토스 호무스로 놀러 와라. 그, 벤자민의 아이도 같이.”

알렉스가 웃었다.

“그럴게요.”

“나도 노력하마. 포트리스와 수인들 간의 화해를 위해서.”

“유채 양은 금방 깨어날 거예요. 강한 사람이니까.”

알렉스는 루프스를 위로했다.

“형, 내 첫사랑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막사를 떠나기 전 물은 질문에 루프스의 표정이 무너지자 알렉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이 아니어도 돼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준비가 되면 들려줘요.”

알렉스가 떠난 후에도 루프스는 유채와 함께 남았다. 헤르티아와 빅터와의 일은 아직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빅터의 이야기는 믿기 힘들었고 납득하기도 힘들었다. 루프스는 잠든 유채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루프스는 유채의 손에 입을 맞췄다. 작게 들썩이는 가슴이나 옅은 숨소리마저 없다면 모두가 그녀가 죽었다고 믿을 것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 네가 일어나서 나에게 말을 해줘. 너는 현명하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않나.”

루프스의 눈물이 유채의 손에 떨어졌다. 유채는 깨어날 생각을 않고, 그는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내려놓고 그 옆에 얼굴을 묻었다. 침대 시트가 그의 눈물로 젖어들어 갔다.

“이봐요. 이봐요.”

루프스는 몸을 흔드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는 버릇처럼 유채가 누워 있는 침대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런데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루프스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거기 아무도!”

“나 여기 있으니까 소리 지르지 마요. 아, 머리 울려.”

너무나 그리워했던 목소리에 루프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채가 일어나서 앉아 머리를 손으로 짚고 있었다. 루프스는 이 기적 같은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도대체 얼마나 누워 있었길래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지, 유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루프스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의 팔이 덜덜 떨렸다. 일어나 앉아 말을 하고 저를 똑바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살아날 확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의 눈물이 유채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유채는 루프스의 들썩이는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시 동안 얌전히 있었다.

“나 안 죽었어요.”

“그래, 그래. 알아.”

루프스는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그는 기적 같은 일에 신에게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채는 아직 몸이 힘든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루프스는 유채가 눕는 것을 도와주고 자리를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당신은 안 자요?”

“내 걱정하지 말고 네 몸부터 생각해라.”

“그럼 나 자는데 귀찮게 굴지 마요. 나 지금 엄청 피곤해요.”

유채는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연신 손을 쓰다듬었다. 유채는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이게 귀찮은 일이에요. 당신 막사는…….”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가 루프스의 막사일 게 분명했다. 지금 그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반짝 눈을 뜬 유채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옆으로 움직여 한 사람이 더 누울 수 있을 공간을 만들었다. 루프스는 분명히 제가 잠이 들어도 옆을 떠나지 않고 이렇게 귀찮게 할 것이었다.

“올라와서 당신도 자요. 미리 경고하는데, 내 몸에 손끝 하나 가져다 대면 그때 당신 손가락이든지 어디든지 잘라줄 테니까.”

“괜찮다. 네가 불편하다.”

“그쪽이 그러고 있는 게 더 불편해요. 그러니까 올라와요. 나도 편하게 잠 좀 자게.”

루프스는 오랫동안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졸고 있던 사람인데 베개만 베면 틀림없이 곯아떨어질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태도가 너무 강경해서 결국 그 빈 공간에 모로 누웠다. 두 사람이 같이 눕기엔 침대가 좁아서 유채는 루프스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루프스는 유채의 마른 등을 먹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작은 몸이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내렸다.

이내 유채는 잠이 들었는지 몸이 고르게 들썩였고, 루프스도 잠시만 눈을 붙이자는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유채의 예상대로 금방 코까지 골면서 곯아떨어졌다.

유채는 루프스의 숨소리가 변한 것을 확인하고 돌아누웠다.

“진짜. 잠을 안 잤나 보네.”

얼굴에 살이 빠져서 보기 싫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수염도 깎을 시간도 없었는지 턱밑이 덥수룩했다. 유채는 조심스레 그의 턱선을 쓸었다. 블랑카, 로보, 에리카는 루프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했다. 유채는 깊은 근심에 잠겼다.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루프스가 편안히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유채는 마르고 거칠어진 루프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난 이제 당신한테 도박을 걸 거야.”

유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유채는 아직도 제 목에 걸려 있는 파렌티아를 만지작거렸다.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노예 신분임을 증명하는 물건이었고, 루프스 집착을 설명하는 물건이었다.

“내가 빈 소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이제 당신한테 달렸어.”

유채는 셀레네에게 빈 소원을 곱씹었다. 유채에게도, 루프스에게도 도박이 될 터였다. 유채는 그를 바라보고 누운 채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루프스는 깨어나자마자 수인들과 마레 위르들을 치료해 주는 유채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 곧바로 다친 이들을 치료하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얻은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채는 성력(聖力)으로 추정되는 능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팔이 잘린 수인은 팔을 얻었고 심각한 상처를 얻어 생사를 넘나들던 마레 위르도 살아났다. 기적을 본 그들은 모두 유채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유채는 귀찮은 내색 없이 그들을 모두 치료해 주었다. 하지만 체력적으로는 힘든 일인지 밤이 되면 유채는 기운 없이 휘청거리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루프스는 유채를 부축해서 막사로 데려왔다.

유채에 관한 이야기도 바뀌어가고 있었다. 몸으로 꼬여내서 루프스의 총애를 받는 더러운 창녀에서 신의 선택을 받고 내려온 성녀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니페스 호무스에서 유채의 도움을 받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소문의 시작이었다. 유채가 에클레시아에서 헤임달의 음모에서 스티폴로르를 구한 이야기가 퍼진 탓이었다.

유채는 과거 은가연과 같이 신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현신한 성녀로 여겨졌다. 유채는 변한 것이 없었다. 이전과 같이 친절했고 밝았다. 그런데도 유채를 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루프스는 씁쓸한 상황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간사한 마음이든 무엇이든 유채에게 좋은 일이면 그만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성녀 취급 받으니까 힘들어 죽겠네.”

유채는 일을 끝을 내고 막사로 돌아가기 전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진 하늘에서 별이 반짝였다. 유채는 별을 구경하기 위해 좀 더 걷기로 했다. 에클레시아, 폐허가 된 옛 신전은 밤하늘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었다.

누군가 뒤에서 유채의 몸을 끌어안았다. 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뒷목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유채는 이젠 놀라지도 않고 제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을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가득한 팔이었다.

“좀 놓아주시죠?”

유채는 루프스의 팔을 밀어내었다. 루프스는 순순히 유채에게서 떨어졌다.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

“괜찮아요. 내 몸 하나는 보호할 수 있어요.”

“거짓말. 매번 그렇게 말해두고 다쳐서 돌아오지 않느냐.”

루프스는 유채의 옆에 섰다. 더운 바람이 유채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루프스는 유채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니투스님은 은가연님의 호위로서 그분을 따라갔다.”

“호위요?”

“전통적으로 신의 사자가 나타났을 때, 우리 수인은 일족에서 가장 강인한 전사를 보내서 호위했다. 그래서 이니투스님이 오라클라의 명을 받아서 은가연님을 호위했다.”

유채는 폐허가 된 에클레시아를 향해 걸어갔다. 루프스는 유채가 걸어가는 길을 쫓아갔다.

“너도 은가연님과 같은 신의 사자이니, 내가 호위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이 가장 강한 전사라서요? 대체 무슨 자신감이에요?”

“네가 가장 잘 알지 않나? 나는 내 강함에 자신이 있다.”

유채는 커다란 돌 앞에서 멈춰 섰다. 무너져 내린 신전의 기둥이었다. 유채가 돌 위로 올라가려고 낑낑대자 루프스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서 도와주었다. 돌 위에 앉은 유채의 앞에 선 루프스가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유채의 왼손 약지에는 그가 그녀의 의식이 없을 때 몰래 끼워놓은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니, 어딜 가려거든 날 불러라. 내가 호위해야 하니.”

“당신이 내 호위라고요?”

“못 미덥나?”

“당연하지요. 난 그쪽 펠릭스 다우스 아니에요? 주인이 노예를 호위해 준다는 말을 처음 들어서요.”

루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루프스는 단번에 유채가 앉은 돌 위로 올라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유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루프스는 손가락을 뻗어서 별을 가리켰다.

“늑대꼬리자리다.”

“늑대꼬리자리? 여기도 별자리가 있어요?”

“있다. 한 늑대 일족의 전사가 제 강함을 자랑하며 너무 오만하게 굴자 한 용이 화가 나서 꽃게를 시켜서 그를 망신 주었지. 그는 너무 부끄러워서 잘린 꼬리를 하늘에 집어 던졌는데, 그 꼬리가 저 별자리가 되었다. 오만을 경계하라는 셀레네님의 뜻이지.”

“우리도 비슷한 이야기 있어요. 우리는 오리온자리라고 부르지만요.”

루프스는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유채를 위해서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박수를 치면서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루프스는 유채와 이런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져본 게 얼마만인가 싶어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덥지 않나? 여름인데.”

“이거 가져왔어요.”

유채는 주머니에서 주위의 온도를 낮춰주는 마법 물품을 꺼냈다. 이곳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게 바로 이것이었다.

“꼭 가지고 가려고요. 내가 사는 세상에는 이런 물건은 없어서 말이에요.”

“……그렇구나. 마음에 들었다면 되었다.”

루프스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유채가 일을 완수하였으니 이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돌아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언제 돌아갈 것이냐는 말을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유채가 돌아가는 날을 알고 싶으면서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함께하는 일상이 너무나 소중해서 이 꿈같은 시간을 제 손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

유채는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 부모님이랑 에리카를 만났어요.”

루프스가 고개를 돌렸다. 유채는 시선을 아래에 두고 중얼거렸다.

“나한테 미안하고 고맙대요. 못난 아들을 둔 죄로 할 필요도 없는 사과를 하시는 분들이었어요.”

유채는 루프스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당신 아버지는 당신이 자랑스럽대요. 떳떳하게 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답네.”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했어요. 많이 우시더라고요.”

“……눈물이 많은 분이 아니신데.”

루프스의 대꾸를 들으며 유채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골랐다. 이제 에리카의 말을 전해야 할 차례였다. 루프스도 알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에리카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당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다는 것 자신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죄책감 갖지 말래요. 오빠가 제 몫까지 행복했으면 한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유채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다. 루프스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족을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열셋의 라이칸의 얼굴이었다. 눈물 많고 다정했던 그 시절의 얼굴이었다. 그를 십삼 년간 지배했던 것은 비겁하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과 그로 인한 공포였다. 이제 그 짐을 벗어버린 루프스는 겨우 예전의 얼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유채는 팔을 뻗어서 루프스를 안아주었다. 유채의 품에 안긴 것은 스물일곱의 루프스가 아니라 열셋의 라이칸이었다. 유채는 커다란 사내의 등을 쓸었다.

“……고맙다. 고마워.”

루프스는 목이 메어 울먹이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일찍 알았어야 했다. 고아가 되었다고 해도 가족의 사랑은 여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바른 길로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루프스는 열셋의 그때처럼 유채에게 매달려서 눈물을 쏟아내었다.

유채는 별이 수놓아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억 년 전에도 저 별들은 저 자리에서 반짝였을 것이다. 수많은 번민과 비극을 보았을 것이다.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년의 비극도 보았을 것이고 이곳에 떨어져서 괴로워한 유채의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유채는 오늘 하루만큼은 저 별들이 야속했다.

“……고맙다.”

루프스가 유채의 품에서 얼굴을 떨어뜨리면서 말했다.

“감사받을 일은 아니에요. 이제 돌아가요. 졸려요.”

루프스는 먼저 돌에서 내려와서 유채를 안아서 내려놓았다.

“눈물이 이렇게 많은데 호위로 믿어도 되는지 몰라? 강하다는 것은 다 뻥이고 사실 약해 빠진 거 아니에요?”

루프스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의 행복은 눈앞에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유채는 떠날 것이니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았다. 유채가 있는 동안 그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유채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게, 최소한 이곳에서의 마지막 기억만큼은 다시 곱씹어 볼 수 있게 행복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는 왼쪽 가슴 위를 손으로 짚었다. 언젠가 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유채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기를, 유채가 그곳에서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랄 수 있기를.

“돌아가자. 피곤하다 하지 않았나.”

유채가 저에게 다시 행복을 찾아주었으니, 그녀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곳에서 행복하기를. 그가 유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행복을 바라는 일뿐이기에.

루프스는 여름 밤하늘 아래에 선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것이면 되었다. 이것이면.

루프스는 웃었다. 셀레네 여신의 은총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야. 너 그 레티티아님 봤다고 했지.”

울피누스 호무스에서 일하는 너구리 수인 궁녀 하나가 유채의 막사에서 나오는 족제비 수인 궁녀를 잡아당겼다. 너구리 수인이 몰래 챙겨놓은 달달한 과자를 그 아이에게 내어주면서 슬며시 물었다.

“진짜 그렇게 예뻐? 막 여신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같이 생겼어?”

“어차피 곧 있으면 오라클라 리네아님이랑 제를 올리는 데에 나타나실 예정이시잖아. 그때 보면 되지.”

“야. 내가 서 있는 데서 얼굴이 보이기야 하겠냐? 지금 레티티아님 얼굴 보겠다고 몰려드는 수인들이 몇인데!”

유채가 정신을 차린 후 오라클라 리네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제는 전설이 된 고대 신녀의 등장에 모두들 놀랐다. 오라클라 리네아는 유채의 발밑에 엎드려 그 땅에 입을 맞추며 신의 명을 받고 내려온 사자에게 최고의 경의를 보여주었다. 스티폴로르의 모두가 이제 유채가 신의 가호를 받은 성녀임을 알게 되었다.

고대의 예법에 따라 유채는 의식을 올려야 했기에 스티폴로르 전역이 분주해졌다.

에클레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땅인 여우 수인과 말 수인들이 모든 준비를 도맡았다. 여우 수인 일족은 유채가 입을 옷을 준비하고 궁녀들을 차출해 의식의 전반적인 준비를 했고 말 수인 일족들은 의식에 쓰일 물건들을 준비했다. 양, 염소, 소 수인들은 여우와 말 일족을 돕는 보조 역할을 했고 거리가 멀어서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기 힘든 일족들은 나중에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다. 이례적으로 포트리스도 스티폴로르의 구성원으로서 마법사들을 보내 의식 준비를 도왔다.

“근데 아직도 목에 파렌티아 걸고 계셔? 이제는 푸셔야 하는 것 아닌가? 셀레네님의 대리자이신데.”

“어차피 곧 루프스님의 비(妃)가 되실 거니까…… 상관없지 않나? 알잖아, 레티티아님이 죽을 뻔하셨을 때 루프스님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호하셨다는 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수발을 다 들어주셨는데. 그리고 지금 파렌티아가 있으니 망정이니 그게 없었으면 거의 웬만한 수인들이 레티티아님을 차지하겠다고 달려들걸?”

“하긴, 늑대 수인들이 제가 사랑하는 암컷 잡으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던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그렇게 잡아놓지 않으면 다른 수인들이 덤벼드는 걸 처리하느라 루프스님은 잠시도 쉬지 못하시겠지.”

“내 말이 그거야. 루프스님도 어떻게든 제 옆에 붙잡아두시려고 파렌티아를 계속 채워두고 계신 거 아니겠어? 뭐, 이젠 말만 구속구지, 레티티아님께는 그냥 금목걸이잖아.”

“하긴 파렌티아를 차고 계셔도 누가 그분을 펠릭스 다우스로 생각하겠어. 이젠 완전히 루프스님의 연인인데.”

궁녀들은 저들끼리 숙덕거리다가 루프스가 막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그는 예전 이니투스가 은가연과 의식을 올릴 때 입었다는 예복을 입고 있었다. 궁녀들도 한창때의 소녀들이라 볼이 장밋빛으로 붉어졌다.

“솔직히 성정이 잔혹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루프스님만큼 잘생긴 분도 없지 않아?”

“뭐, 외모적으로는 선남선녀의 만남이지.”

그들은 그 나이대 소녀답게 수인들의 왕과 그의 펠릭스 다우스로 잡혀온 아름다운 소녀에 관한 낭만적인 이야기에 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실상은 그와 멀다는 것은 그녀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준비는 끝났나?”

루프스는 막사의 천을 젖히고 들어갔다. 유채의 짧았던 머리는 마법을 통해서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린 상태였다. 그 머리카락을 장식한 것은 루프스가 선물한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뿐이었다. 단출한 머리 장식에 붉게 칠한 입술 외에는 화장도 진하게 하지 않아서 유채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은 하얀 예복이 너무나 잘 어울려 루프스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예. 팔자에도 없는 공주 대접을 받는 게 이렇게 고생하는 일인지는 몰랐네요.”

유채는 옷이 갑갑해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다 얼굴에 뭘 발랐는지를 떠올리곤 냉큼 표정을 원래대로 돌렸다. 세상에 진주를 갈아 넣은 분이라니, 기가 찰 정도였다. 유채는 속이라도 시원해지려고 궁녀들이 가져다놓은 물 잔에 입을 대었다.

물을 마시는 붉은 입술이 색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처음이라 루프스의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당신, 거기서 뭐하고…….”

루프스가 갑자기 탁자를 짚고 고개를 숙이더니 손수건으로 유채의 입술을 닦았다. 유채는 당황하여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문 채 그녀의 입술연지를 지웠다. 사심이 잔뜩 들어간 움직임이었다. 이젠 베일로 얼굴도 가릴 수 없는데 이 이상으로 유혹적으로 보이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게 예쁘기만 하면 될 텐데 왜 다른 수인들의 눈에도 예뻐 보이게 만들어놓은 것일까.

“뭐하는 거예요?”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잡아서 밀어냈다. 그는 순순히 떨어지면서 손수건을 뒤로 감췄다.

“물 때문에 번져서 닦아준 것뿐이다.”

“뭐요? 번졌다고 말을 하면 되지 왜 그쪽이 닦아요?”

“내가 하나 네가 하나 마찬가지 아니냐?”

“다를 건 없겠죠. 근데 그쪽이 화장에 대해 뭘 알기는 해요?”

유채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촉촉했던 입술이 금세 마른 것이 입술을 다 닦아버린 모양이었다. 유채는 궁녀들이 놓아두고 간 입술연지를 찾았다. 붓을 꺼내 다시 입술에 색을 칠하려고 하는데 거울이 없어서 유채는 신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가만히 보고 있던 루프스가 그녀의 턱을 살짝 잡아서 올리곤 붓을 뺏어 들었다.

“입 다물어라.”

루프스의 손이 움직이자 붓이 살짝살짝 입술에 닿았다.

“뭐하는 거예요.”

“번지니까 가만히 있어.”

루프스는 신중하게 입술연지를 발라주었다. 아까 발려 있던 것보다 옅게 바르며 그는 내심 만족스러워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턱을 붙잡힌 채 가만히 있었다. 유채는 그가 이런 것을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불안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화장을 하실 때 도와드린 적이 있다. 에리카의 장난에 동참해서 에리카에게 발라준 적도 있고.”

루프스는 붓을 내려놓고 턱도 놓아주었다. 유채는 번지지 않았나 더듬대려다가 제가 손을 대서 더 망가질까 싶어 그만두었다. 거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루프스는 의자를 끌어와서 유채의 앞에 앉았다.

“당신도 옷이 바뀌었네요. 전에 에클레시아에 왔을 때 입은 건 그런 옷이 아니었잖아요.”

루프스는 은실로 수놓은, 검은색 제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금빛 허리띠를 맸는데 아래로 술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은발과 약간 그슬린 피부와 검은 옷은 예상보다 잘 어울렸다.

“그때는 루프스로서 한 자리고, 지금은 너의 호위로 참여하는 것이니 복장이 다르지.”

“은가연과 이니투스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나요?”

“둘은 서로 친한 친구였어. 알지 않나? 이니투스님은 늑대 수인이셨다. 만일 은가연님을 사랑하셨다면 평생을 홀로 사셨겠지.”

“그럼 이런 것은 왜 같이 한 거예요?”

“경의의 표시지. 은가연님은 신화의 시대에 이 세계를 구한 동시에 황제와 여제의 침략에 멸족당할 뻔한 일족을 구했다. 그랬기에 우리가 표했던 최고의 경의였지.”

“신화의 시대요?”

루프스는 궁녀들이 유채의 눈가에 살짝 뿌려놓은 반짝이는 가루를 손으로 털어냈다. 유채는 눈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그의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대륙에서 스티폴로르를 이주하기 전까지를 신화에 시대라고 부른다. 그 이후는 스티폴로르 시대라고 부르지. 대륙은 신화의 시대가 좀 더 길지. 코르페네즈 제국의 건국 전까지를 신화의 시대라 불렀다.”

“코르페네즈 제국이요?”

“생각보다 성실한 학생은 아니나 보네. 지금 대륙의 혼란은 코르페테즈 제국이 무너지고 여러 군왕들이 난립하면서 생긴 혼란이지. 듣기로는 이제 혼란의 끝이 보인다고 프레드릭이 말하더군. 동쪽에서는 펠로베 제국이 코르테스 소왕국에 의해서 멸망하고 코르테스 제국이 세워졌고 서쪽은 각각 발루아 백작과 베르나도테 공작에 의해서 세력이 재편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물론 내가 대륙과 교류를 해서 들은 정보는 아니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유채는 익숙한 이름에 몸을 굳혔다. 베르나도테 공작. 헤임달의 후원자이자, 헤임달이 저를 팔아넘기려고 한 사람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반응을 보고 그녀도 헤임달이 뭘 하려고 했었는지 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귀에 달린 귀걸이를 바로 잡아 주었다.

“헤임달의 자백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르나도테 공작은 스티폴로르의 프레눔을 노렸다고 했다. 헤임달은 프레눔을 담보로 공작의 지원을 받기로 했지. 그 프레눔은 대륙에서 전쟁에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거야. 베르나도테 공작은 최종적으로는 스티폴로르를 차지하기를 원했다고 헤임달이 말하더군.”

“다른 세상이라도 역사는 똑같이 흘러가네요.”

유채는 씁쓸하게 말했다.

“이번 의식이 끝나면 헤임달을 만나게 해줄 수 있나요? 그리고 헤르티아와 빅터도.”

지금껏 루프스는 유채가 그들과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왜지? 무슨 일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유채의 눈은 단호했다. 이미 결심이 선 눈이었다. 헤르티아와 빅터는 그렇다고 치고 헤임달까지 만나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루프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렇게 하마.”

막사의 천막을 젖히며 한 궁녀가 들어와서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전했다. 유채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사를 나가기 전, 루프스가 유채의 손을 잡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토스 호무스로 곧바로 돌아갈 생각이다.”

“알아요. 돌아간다고 궁녀들이 말해줬어요.”

한참 머뭇거리던 루프스가 어렵게 말을 꺼낸 것에 비해 유채의 대답은 간단했다. 루프스는 또 다시 한참을 침묵했다가 물었다.

“너도 갈 생각인가?”

같이 돌아가자는 말을 하기가 힘들어서 루프스는 넌지시 유채의 의사를 물었다. 차마 유채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유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끌고 갈 것 아니었어요? 아직도 난 파렌티아를 걸고 있는 그쪽 애완동물인데요.”

“네가 싫다면 데려가지 않으마. 네 선택에 따르겠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무슨 일인지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토스 호무스로 따라갈게요. 아직 끝나지 않은 게 있어서요. 헤임달의 처벌을 봐야하기도 하고.”

“알겠다. 궁에 연락을 넣어놓겠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채는 그 손을 잡자 루프스는 그녀와 함께 막사를 나왔다.

유채는 루프스의 안내와 함께 무너진 신전으로 향했다. 그곳에 오라클라 리네아가 꿇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채를 본 리네아가 무릎을 꿇자 기다리고 있던 수인들과 인간들도 고개를 숙였다. 루프스는 유채가 길게 늘어지는 옷자락을 밟고 넘어지지 않게 옆에서 부축했다.

유채가 제단에서 오르자 루프스 역시 리네아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시간과 운명의 여신 셀레네님의 신성한 딸로서 그분의 대리인으로 오신 분께 인사드립니다.”

의식은 예전 오페라티오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리네아는 긴 제문을 읊는 동안 유채는 제단에 서서 그것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리네아의 제문은 정말 길었다. 유채는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보다 긴 것 같은 제문에 간신히 하품을 참았다.

“일족을 대표하여 감사를 올립니다.”

리네아가 다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 유채의 차례였다. 유채는 리네아가 가르쳐 준 순서대로 향을 피우고 제단에 절을 했다. 그 옆에서 루프스는 유채가 비틀거리지 않게 부축해 주었다.

“아이고.”

유채는 절을 하고 일어서다가 치맛자락을 밟고 비틀거렸다. 루프스가 허리를 붙잡아준 덕에 유채는 몸을 바르게 세울 수 있었다. 유채는 물을 담아놓은 커다란 청동그릇 앞에 서서 루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프스는 흑요석으로 만든 단검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살짝 그었다. 유채는 슬쩍 얼굴을 찌푸렸고,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청동그릇으로 떨어졌다.

“이제…….”

오라클라 리네아가 맺음말을 하려는 순간 땅이 요동쳤다. 루프스는 진동에 비틀거리는 유채의 어깨를 붙잡아서 부축했다. 모여 있는 수인들과 인간들이 놀라서 웅성거렸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무너진 신전이 다시 솟아오른 것이다. 돌조각들이 모였다. 거대한 신전이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흙과 이끼가 잔뜩 낀 채, 신전은 제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신의 힘을 목격한 모두가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오라클라 리네아가 유채에게 다가왔다.

“셀레네님께서는 유채님의 도움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계십니다.”

“나도 알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을 불러서 이런 거대한 쇼를 하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나는 이제 정말로 신의 대리인 취급을 받겠군요.”

“합당한 대가입니다.”

오라클라 리네아가 자신의 옷자락을 젖혀서 멀쩡하게 돌아온 피부를 보여주었다. 리네아는 유채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손에 입술을 맞췄다.

“유채님의 사려 깊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도, 수인의 일원으로서도.”

유채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제단 아래에 있는 수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명히 이곳의 역사에서 전쟁을 막고 수많은 수인들을 구한 신의 대리자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유채는 그저 언니를 구하고 싶었던 열아홉 살의 평범한 계집애일 뿐이었다.

“나를 보자고 했더구나.”

빅터가 유채의 앞에 앉았다. 유채는 바실리사를 통해서 그가 어떻게 제 목숨을 구했는지 들었다. 그가 한 충격적인 고백도 함께였다. 빅터는 죽음을 가까이 둔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는 필요 없다. 나는 내 죄를 갚기 위해서 너를 도운 것뿐이다.”

“절 살리는 것이 왜 죄를 갚는 것인가요?”

“너는 루프스가 사랑하는 암컷이고 루프스는 블랑카와 로보의 아들이지. 너를 살리는 것이 루프스를 돕는 것이고 아들을 걱정하고 있을, 그리고 내가 죽음으로 몰고 간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전쟁을 막아준 너에게도 보답하는 것이고 말이다.”

“결국은 도망치고 싶으셨다는 말이네요.”

유채는 냉정하게 말했다.

“빅터님은 그저 도망치고 싶으셨을 뿐이에요. 루프스를 제대로 마주 하고 용서를 구할 용기가 없으니 스스로 죄를 갚았다 하고 도망치고 싶으신 거예요.”

“아니다. 나는…….”

“그럼 누군가 저 대신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제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전 평생 죄책감에 괴로워하겠지요. 나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죽었으니까요. 결국 빅터님은 본인 마음만 편해지면 그만이셨던 거예요.”

“아니다. 그때는 상황이 급해서…….”

“그럼 제가 뵙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고 고쳐 드리겠다 몇 번을 연락을 드렸는데 왜 오시지 않으셨나요.”

빅터는 입을 열지 못했다. 유채는 빅터의 볼로 손을 뻗었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안다면 도망치지 마세요. 본인이 만족하려고 하지 말고 피해자가 원하는 방법으로 사과를 하세요.”

유채의 손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유채는 빅터가 잃은 수명을 다시 돌려주었다.

“이건 목숨을 살려주신 데 대한 감사의 표현이자, 다시 한 번 드리는 기회예요.”

유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빅터를 두고 그의 막사를 나섰다. 앞으로 그와는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루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빅터와 루프스 사이의 일은 제가 참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유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르티아와는 토스 호무스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헤임달은…….”

“데려다주려고 왔다.”

루프스는 유채를 데리고 주둔지 구석, 삼엄한 경비 속에 있는 허름한 막사로 들어갔다. 피투성이가 된 헤임달이 기둥에 묶인 채 양 손목과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헤임달이 피투성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유채를 본 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이구. 신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는 성녀님이 오셨네.”

“오랜만이라고 하면 불쾌한가요?”

“불쾌할 것까지야. 친히 성녀님이 나를 보겠다고 행차까치 해주셨는데 말이야.”

유채가 그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자 루프스가 위험하다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유채는 그 팔을 떨쳤다.

“셀레네님도 정말 무심하시지. 왜 이런 여자애에게만 힘을 주셨을까. 내게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었다면 정말로 효율적으로 사용했을 텐데. 그런 힘을 겨우 그딴 데에 쓰다니!”

움직이지 못하는 만큼 분노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루프스 유채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아서 보호하려 했다.

“복수에 미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죠. 그래요. 당신이 오를레앙 남작에게 복수심을 품는 것은 정당해요.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 다른 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겠다고 한 순간부터 당신의 복수는 목적을 잃었어요. 당신은 살인자예요. 오를레앙 남작과 같은 살인자일 뿐이죠.”

“네가 내 심정을 알아? 내 복수의 상대가 그냥 보통 사람인 줄 알아? 그놈은 수없이 죄를 지어도 그 누구도 벌하지 못해!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그게 핑계가 될 수는 없죠. 당신은 당신 때문에 죽은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아요? 당신 때문에 헥터에게 성적으로 학대를 받다 죽은 여자들이나, 당신이 준 아편에 중독되어서 죽은 수인들이나, 라일라에게는 미안하지 않아요? 죄책감도 없어요?”

“악마를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야.”

헤임달이 피에 젖은 누런 이를 씩 드러내면서 웃었다.

“순진한 아가씨, 위선 떨지 마. 역겹군. 아가씨는 뭐 다를 것 같아? 똑같아. 아가씨도 탈출하겠다면서 루프스의 어깨를 찔렀다고 하지 않았어? 누가 누굴 나무라. 위선 떨지 마.”

유채는 입술을 깨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요. 나도 위선자예요. 나도 역겨운 년이죠. 그래도 최소한 당신, 나에게 사과는 해야 하지 않아요?”

“뭘? 배 찌른 것? 그건 정당방위지. 아가씨가 내 물건을 훔치려고 했잖아. 도둑에게 물건을 곱게 내주는 얼간이가 어디 있어.”

“내가 말하는 것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알지 않아요?”

헤임달은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유채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피를 토하기도 했으면서도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헤임달은 억지로 기둥에서 몸을 떼어 고개를 쭉 내밀며 유채를 비웃었다.

“헥터 놈이 끝까지 갔어야 했는데. 그래야 네년이 나를 방해 못 했을 텐데. 참 아까워. 사내 자식이 돼서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말이야. 헥터 자식은 소심……. 으헉!”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루프스가 헤임달을 턱을 부숴 버릴 기세로 움켜잡았다. 턱뼈가 조각조각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헤임달은 비명을 질렀다.

“한 마디만 더 꺼내면 불에 달군 집게로 네놈의 혀를 뽑아주지.”

“됐어요. 내가 괜한 시간 낭비 했네요. 당신 같은 쓰레기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내가 바보였어요.”

헤임달의 턱을 거칠게 놓은 루프스가 얼른 유채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고 있는 듯 보였다.

“당신, 지옥으로 갈 거야.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

유채는 그 말을 끝으로 막사를 나가 버렸다. 루프스는 얼른 그녀를 쫓아갔다. 팔을 잡고 돌려세우니 그녀는 펑펑 눈물을 쏟고 있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용서 못 할 거라는 건 아는데, 나도 알고 있는데…….”

유채가 울먹였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듣고 싶었어요. 용서해 주지도 못할 주제에 그런 말을 바란 것이 이기적인가요?”

유채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가 그렇게 큰 것을 바란 것일까. 사과를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말 한마디면 그 괴로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헤임달을 찾아갔다. 제가 겪은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그이니까. 그에게서 사과를 받고 싶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안았다. 유채는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루프스의 옷이 축축이 젖어들어 갔다.

“미안하다. 모두 내 잘못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고 그녀의 뒷머리도 부드럽게 감쌌다.

“헥터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너를 굳이 데리고 간 내 잘못이고, 너에게 호위를 붙이지 않은 내 잘못이다.”

루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헤르티아가 데려온 너를 내 과시욕으로 펠릭스 다우스로 삼은 내 잘못이다. 그러니, 너는 잘못한 것이 없고 이기적인 것도 아니다. 모두 내 잘못이다. 그만 울어라. 응?”

서럽게 우는 유채를 보면서 루프스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유채가 이렇게 된 에는 제 잘못이 가장 컸다. 루프스는 너무 마르고 약해서 부서질 것 같은 유채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그만 울어라.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 * *

유채는 다시 토스 호무스로 돌아왔다. 손님 자격이 된 유채의 생활은 이전과 비교해선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막아놓았던 창문을 다시 열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이젠 그 누구도 유채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이전과 같았다. 유채는 블루벨과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고 일 때문에 찾아온 바실리사나 에릭과 잡담을 떨었으며 이따금 궁 밖으로 나가서 동물화 환자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루프스는 헤임달의 일과 다른 일족들 간의 일을 처리하는 중이라 몸이 두 개여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헤임달 일당의 처벌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결정이 났지만, 그들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헤르티아와 벤자민, 프리드의 의견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그것을 상의하기 위해 루프스는 오늘 헤르티아와 만나기로 했다. 모든 진실을 알고 헤르티아와 단둘이서 대화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기에 루프스는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는 중이었다. 루프스는 늑대로 변해서는 정원에 숨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키기 싫어서 관목에 숨어 있을 수 있는 정도로 크기를 줄인 상태였다.

“어머. 너 벌써 이만큼 컸니?”

루프스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유채가 나타나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옆에 앉아서 늑대로 변한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콧잔등에 입술을 맞췄다.

“동물은 정말 빨리 큰다더니, 맞는 말인가 봐.”

루프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얼어 있다가 이내 얌전히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유채는 루프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 이제 곧 돌아가. 일을 다 마쳤거든.”

루프스는 놀라서 그만 유채에게 말을 걸 뻔하였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그는 슬금슬금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도 섭섭하지? 이제 오 일 정도 남았어. 너에게만 말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못 떠날 것 같거든.”

루프스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그녀가 떠날 거라는 건 알고 있고 있었지만 정확히 언제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루프스의 기분을 모르는 유채는 조금은 섭섭한 얼굴로 이야기를 조잘대었다.

“너를 데려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셀레네가 차원을 이동할 수 있게 허락된 것은 위대한 그분? 아무튼 셀레네보다 높은 신이 만든 중첩차원에 사는 이들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내가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래.”

루프스에게는 절망스런 선고였다.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는 유채는 뭔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헤어지지만, 나는 네가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랄게. 루프스에게 부탁을 해볼까? 나름 부자니까 너도 뜯어먹을 만할 거야.”

유채는 싱긋 웃은 다음에 이제 가야겠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프스는 멀어지는 유채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다가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앞으로 오 일 뒤면 완벽한 이별이었다. 루프스는 손을 들어서 제 눈을 가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루프스는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네가 가는구나.”

루프스는 실성한 수인처럼 그 말만 중얼거렸다. 루프스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용케 알현실을 찾아 들어갔다. 그 안에는 염소 수인 둘이 커다란 액자를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아. 전에 요청하신 물건의 중간 과정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염소 수인은 액자를 감싸고 있는 천을 벗겼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유채의 초상화였다. 스케치 위에 밑 색만이 칠해진 상태였다. 에클레시아가 다시 일어난 기적 후에 유채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루프스는 뭔가에 홀린 듯 그림 앞에 섰다.

“마음에 드십니까?”

염소 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프스는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만, 나가주겠나?”

염소 수인 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주고받더니 이내 방을 나갔다. 루프스는 유채의 그림 앞에 서서 굳은 입매를 움직여서 억지로 미소를 만들었다. 우는 것인지 웃는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잘 가라.”

간단한 한마디가 너무 어려웠다.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머릿속으로는 수천, 수만 번을 생각했었던 것인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루프스는 목 깊숙이 애원을 억눌렀다.

“……이곳에서의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 잊고,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내 몫까지…… 그곳에서 행복해라. 나 같은 이상한 수컷 만나지 말고.”

이렇게 연습을 하다 보면 마지막 날 울지 않고 유채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웃는 얼굴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루프스는 눈물을 꾹 참았다.

“잘 가라. 부디 행복해라.”

루프스는 그림 속 유채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는 유채의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살결을 떠올렸다. 유채는 영원히 초상화 속의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평생 그를 괴롭히고 벌을 줄 것이다. 이게 그가 받을 벌이었다.

루프스는 염소 수인들에게 미완성의 초상화를 들려 보내고 헤나를 불렀다.

“카날리스 호무스의 별장에 유채의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 궁관이 있다. 바실리사에게 전해서 그를 여기로 데려오게 해라.”

“알겠습니다. 한데, 그 궁관은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그의 그림 실력이 괜찮더군. 그림을 부탁하려고 한다.”

헤나는 뭔가 변한 것 같은 루프스의 명령에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기에 가까운 곳에서 축제가 열리는 곳이 있나? 여름에는 축제가 많다고 그러더군.”

“알아보겠습니다.”

헤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명령을 받았다. 루프스는 나가려던 헤나를 다시 한 번 불러세웠다.

“하나 더, 별이 잘 보이는 해변도 알아봐주게. 오늘 밤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후회하지 않을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지금 행복할수록 앞으로 그는 괴로워질 테지만 그럼에도 루프스는 유채와 보낼 마지막 오 일을 제 인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으로 남기고 싶었다.

이곳에서의 유채의 마지막 시간은 그동안 힘들었던 것을 모두 잊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답게 빛날 수 있기를 바랐다.

루프스의 등에서 내린 유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도 치는 소리가 시원한 여름밤의 해변이었다. 루프스는 위르형으로 돌아와서 유채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옮겨 받았다. 헤나에게 부탁해 알아낸 해변으로 밤 산책을 나온 것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라.”

루프스는 천을 펼쳐서 유채가 모래사장에 앉을 수 있게 했다. 유채는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그 위에 앉았다. 루프스도 그 옆에 앉아 바구니에서 마실 것들을 꺼냈다. 그런데 그가 유채에게 주는 것과 제 앞에 놓는 것이 달라 보였다.

“그쪽은 뭐 마셔요?”

“와인이다. 이런 날에는 와인이지.”

“나도 줘요. 오늘 같은 날은 술 한번 마셔보고 싶으니까.”

“나이가 안 되서 못 마신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는 마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줘요.”

루프스는 유채에게 술을 건넸다. 유채는 뚜껑을 열고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생각보다 단맛에 유채의 표정이 풀렸다. 술이 아니라 약간 톡 쏘는 과일 음료를 마신 기분이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나?”

루프스는 아직 유채의 나이조차 모르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유채는 술을 홀짝이면서 대답했다.

“당신하고 처음 만났을 때는 열아홉, 지금은 스물이에요. 그쪽은 스물일곱이죠?”

“맞다. 나와 일곱 살 차이네. 많이 어리구나.”

루프스는 술인 것도 잊은 것처럼 홀짝홀짝 병을 기울이는 유채를 말렸다. 병을 빼앗자 유채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원체 몸집 차이가 있다 보니 아무리 팔을 뻗어도 그가 들고 있는 술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유채가 도끼눈을 뜨고 루프스를 노려봤다.

“급하게 마시면 빨리 취한다. 처음 마시는 게 아닌가? 천천히 마셔. 무슨 일이라도 있나?”

루프스가 한숨과 함께 술을 돌려주면서 물었다. 유채는 겨우 술병을 손에 쥐고 넌지시 물었다.

“할 이야기 없으면 내 이야기나 들어줄래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루프스는 허리를 곧게 펴고 똑바로 앉아 유채를 바라보았다.

“안주 없어요? 술에는 안주가 있어야지. 이대로 술만 마시려고 했어요?”

루프스는 바구니를 뒤져서 육포 조금과 빵과 쿠키 등의 간식거리를 꺼내었다. 원래 술은 제가 마시려고 했던 거라 안주를 따로 챙긴 것은 없었다. 유채는 치맥은 집에 가서 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치맥?”

“그런 게 있어요. 내가 그거 사러 나갔다가 뺑소니 당해서 여기로 왔거든요. 그런데도 그게 먹고 싶으니, 내가 속이 없는 건가?”

“뺑소니?”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동물형으로 변한 수인이 마레 위르를 온 힘을 다해 쳐서 죽을 위험에 빠뜨리고는 무시하고 지나가는 경우라고 할게요.”

“뭐? 몸은? 몸은 괜찮은 건가?”

“빌어먹을 여신이 부려먹으려고 아주 말끔하게 고쳐 주었으니까 괜한 걱정 안 해도 돼요.”

유채는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이곳의 육포는 질기기 그지없었다. 유채는 육포를 꿀걱 삼키며 와인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어릴 때, 난 다른 애들과 달리 좀 특이하게 생겨서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내 눈에는 예쁘다.”

루프스는 예전에 작은 늑대로 위장하고 있을 때 들었던 이야기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해요. 무슨 아부를 그렇게 떨어요? 왜, 내가 그쪽 창고라도 털어갈까 봐 겁나요? 그리고 요즘 왜 이렇게 내 외모에 관심들이 많은지 정말 미치겠다니까요.”

“허언도 아니고 아부도 아니다. 너는 정말 아름다워.”

루프스가 유채의 턱을 가볍게 잡아서 제 쪽으로 돌렸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더위 때문인지 볼이 발그레했다. 유채는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루프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그의 손을 치우고 고개를 돌렸다. 루프스는 무릎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말했다.

“레티티아가 무슨 뜻인지 아는가?”

“……궁녀들이 떠드는 것 들었어요.”

“그 이름처럼, 넌 아름다워. 네가 사는 세계의 마레 위르들은 다들 동태눈깔인가 보군.”

“예쁘고 안 예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독특하게 생겼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어요. 난 얼핏 보아도 외국 혼혈이라는 게 티가 많이 나는 얼굴이라, 아이들 사이에 섞이기 힘들었거든요.”

“힘들었나? 많이?”

“그때는 그랬던 것 같아요.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엄마가 더 힘들까 봐 말도 못 하고 혼자서 삭였어요. 그러다가 엄마가 알게 됐는데,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엄마가 잘못했다고…… 아무것도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유채는 손에 든 병을 벌써 다 비우고 바구니 안에서 또 다른 술을 찾았다. 루프스는 이번엔 사과로 만든 과실주를 들려주었다. 맛을 본 유채는 와인보다 이게 더 마음에 들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힘들었는데, 엄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까 내 안에서 뭔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인 거예요. 그냥 누군가에게든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거예요.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거예요. 나중에 나를 괴롭혔던 아이에게서 사과를 받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루프스도 왜 유채가 헤임달을 찾아가 그와 마주하려고 했던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너는 아무 잘못 없다.”

“그건 내가 가장 잘 알아요. 그런데 털어내려고 해도 그러지 못하는 게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밤마다 잠에서 깨요. 평생 이 기억을 털어낼 수 있을까 싶어요.”

“괜히 힘들게 잊으려고 하지 말고 힘든 만큼 내게 요구해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해줄 수 있다. 그러니 네가 겪은 모든 힘든 일은 다 내 잘못이니, 내가 보상해 주겠다. 그렇게라도 마음을 편하게 먹으면 안 되겠나?”

“나는 내가 물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아니더라고요.”

유채는 뒤로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헤르티아와 빅터는 만났나요?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헤르티아와는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기로 했다. 그것 외에는 딱히 할 것이 없더군. 헤르티아가 계속 미안해하며 사죄하고 싶어 하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예전처럼, 서로 교류하고 친하게 지내던 그때처럼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

“빅터는요?”

“솔직히…… 나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생을 내게 속죄하며 살겠다고 하는데…… 할 말이 없어서 돌려보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어.”

“잘했어요. 나처럼 괜한 것에 집착해서 머리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요.”

유채는 벌떡 일어나 앉아 사과주까지 벌컥 들이켰다. 루프스는 그녀가 술을 너무 급하게 마시는 것 같아서 말리려고 했지만 유채는 아랑곳 않았다.

“그렇게 마시다가는 취한다. 그만 마셔라. 술도 처음 마신다 하지 않았나?”

“고작 이걸로요? 나 말짱하거든요. 달달하니 맛있기만 하구만.”

유채는 몇 모금을 더 들이켜고는 다시 뒤로 누웠다. 루프스도 체념했는지 한숨을 쉬곤 그녀의 옆에 등을 대고 누웠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싶어 팔을 움찔거리다가 그녀가 원하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유채가 하늘로 손을 뻗었다.

“칙칙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좀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봐요. 별자리 이야기도 좋고, 뭐든 좋으니까 웃을 수 있는 이야기 좀 해봐요.”

“난 말재주가 별로 없다. 너도 알지 않나…….”

“그럼 횡설수설이라도 해봐요. 당신이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면서 멍청한 짓을 하는 것 보고 싶으니까.”

루프스는 없는 말재주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채는 가끔 벌떡 일어나 앉아 술을 마시고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벌써 그가 가지고 온 술의 절반 이상을 유채가 다 마셔 버렸다. 유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서 보다 못한 루프스는 더 이상은 안 된다며 술병을 뺏었다.

“왜요! 잘 마시고 있는데!”

“취했다. 이 이상 마시면 내일 고생할 거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것이 아니야.”

“내 마음이에요. 그리고 나 안 취했어요!”

유채는 벌떡 일어나서는 루프스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 과감한 몸짓에 루프스는 당황해서 술병을 놓쳤다. 유채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술병을 낚아챘다. 본인은 안 취했다고 하지만 이미 취한 것이 분명한 유채는 실실 웃으며 술병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헤헤.”

루프스는 제 허벅지 위에 앉아 몸을 가까이 붙인 유채에 당황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한 탓에 유채는 맨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과감히 벌이고 있었다.

“어때요? 이제 당신도 알겠죠?”

유채의 혀는 이미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루프스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술에 취한 자는 강제로 재우는 게 답인데 그가 유채에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채는 실실 웃으면서 그의 다리 위에 버티고 앉았다

“누군가 위에서 억지로 잡아 누르는 것이 얼마나 기분 나쁘고 무서운지 알아요? 당신도 당해보니까 알겠죠?”

유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붉어져서는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유채는 그의 위에 앉은 채로 연신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갑자기 흐느껴 울다가 문득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전형적인 술주정뱅이의 주사였다. 하지만 루프스에게는 마냥 귀엽기만 한 모습이었다.

“어? 술 다 떨어졌네. 더 없어요?”

유채의 말은 이제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루프스는 바구니를 뒤로 숨겨 유채에게 술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유채는 이제 그의 어깨를 때리면서 술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다 금세 또 술은 잊고 이제는 루프스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쪽이 강제로 키스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불쾌했는지 모르죠?”

“미안하다. 그러니 이제 좀 비키는 것이 어떠냐. 너무 많이 취했다.”

“나 안 취했다니까? 이렇게 멀쩡한데 왜 자꾸 취했다고 해요? 당신 부자라며? 술값이 그렇게 아까워요? 진짜 쪼잔하네.”

술 취한 이들은 자기가 취한 것을 모르는 법이었다. 루프스는 골치가 아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유채를 떨쳐 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내 이 주정을 계속 들어줄 수도 없었다.

“아니지. 직접 당해야 알려나?”

루프스의 입술에 유채의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그에 그의 눈이 커다래지던 순간이었다.

“으윽!”

루프스의 아랫입술을 물어뜯은 유채는 헤헤 웃는 얼굴로 자랑스럽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유채는 어안이 벙벙하여 아랫입술에서 피를 흘리는 루프스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보았다.

“복수했다. 와 진짜. 내가 그때 얼마나 억울하고 화나고 짜증나고 분하고 슬펐는지 알면, 이건 정말로…….”

유채는 눈을 깜박깜박 하더니 말끝을 흐리면서 앞으로 픽 쓰러졌다. 길고 길었던 술주정의 끝이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어깨에 기대어 작게 코까지 골며 잠이 들어버렸다.

루프스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흘렸다. 루프스는 유채가 불편하지 않게 고쳐 안고 주위를 정리했다. 그가 움직이는 중에도 유채는 깨지 않고 얌전하게 잠만 잤다. 도저히 방금 전까지 술주정을 부리던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앞으로 술은 마시지 마라.”

도수도 낮은 술에 이 정도로 취하는 거라면 술이 약한 것이 분명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등을 쓸었다. 그러자 유채는 불편한 것인지 잠깐 움찔움찔하다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술이 좀 깨면 움직이기로 하고 지금은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

어깨 위가 축축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유채가 루프스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눈물을 흘렸다. 루프스는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나이가 이제 스물이라고 했다. 이만큼 괜찮은 척을 하는 게 대견할 정도로 어린 나이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돌아가면 말이다.”

그는 유채의 귓가에 조근조근 속삭였다.

“이곳에서 겪은 안 좋았던 일은 모두 잊고, 부모님에게 위로받고 다시 평범한 일상을 보내라.”

루프스는 고개를 슬쩍 숙였다. 바로 앞에 유채의 입술이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입술이 닿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그동안에 즐기지 못했던 스티폴로르를 네게 보여주마.”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그런 두 사람을 하늘 가득한 별과 달이 품고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참으로 낭만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루프스는 한없이 슬퍼하고 있었다.

“여긴 어디예요?”

위르형으로 돌아온 루프스가 곧장 유채의 머리 위에 모자를 씌웠다. 유채는 헛기침을 하며 루프스의 손을 피하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어젯밤, 술에 취해서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분명하게 기억한 탓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유채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술이 원수였다. 그렇게 꿈이길 바랐는데 루프스의 입술에 피딱지가 진 것을 보고 유채는 절망했었다.

“바다 옆에 있는 이 마을에서 마침 축제가 열린다 하더군. 해산물 좋아하나?”

“늑대는 고기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짐승으로 변할 수 있을 뿐, 짐승인 건 아니다.”

“장난이에요. 근데 난 돈 없는 거 알죠? 당신이 다 살 건가요?”

“당연한 것 아닌가?”

루프스는 유채와 함께 축제가 한창인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운 좋게 전쟁을 피한 곳이라 예전처럼 축제를 열 수 있었다. 바다 근처라 그런지 먹을 것을 파는 게 거의 다 해산물이었다. 루프스는 헤나가 알려준 바다가 보이는 곳을 찾아갔다. 유채는 탁자 앞에 앉아 턱을 손에 기대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밤을 밝히는 등불에 유채의 눈이 반짝였다. 루프스는 적당한 음식을 사왔다. 그녀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그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술은 마실 생각 없지?”

“없어요!”

유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채는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은 채 버터에 구운 조개를 포크로 찔렀다. 루프스는 작게 웃으면서 술을 마셨다.

“이건 무엇을 위한 축제죠?”

“이곳은 많은 수인들에게 베풀면 그만큼 셀레네님이 그들을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특정한 기간 동안 싼값에 이런 해산물을 판다고 하더군.”

“그쪽, 이런 데 한 번도 온 적 없죠?”

“응?”

“누구한테 들은 걸 그대로 전달하는 느낌이에요. 헤나 씨인가?”

“헤나가 알려준 것 맞다. 귀신같이도 아네.”

“왜 그런 것 물어보고 여길 나를 데려와요?”

“겸사겸사 알아본 것이다. 나도 이 정도 여유는 즐겨도 되고. 그리고 너도 할 일이 없이 심심했을 텐데?”

“핑계는 그만 대요.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해요?”

“그게 아니라…….”

루프스는 그제야 유채가 제게 장난을 친 거란 걸 알아차렸다. 루프스는 결국 웃기만 한 채 술을 홀짝였다. 유채는 만족스럽게 접시를 비웠다. 두 개의 접시가 완전히 비고 난 후 루프스가 다른 음식을 가지러 일어나자 유채도 따라 일어났다.

“이번엔 내가 골라볼래요.”

“네가 혼자? 위험할 수 있다.”

“당신이 내 호위라면서요. 날 지켜준다더니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뒤로 빼는 거예요?”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괜찮으니까 돈이나 줘요. 불안하면 내 뒤에 있으면 되잖아요.”

유채는 손을 내밀자 결국 루프스는 품에서 돈을 꺼냈다. 유채는 돈을 꼭 움켜쥐고는 신이 나서 걸어갔다. 루프스는 혹시 모르는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유채는 죽 늘어져 있는 먹거리들을 찬찬히 살폈다. 유채는 맛있어 보이는 것들은 다 주문하고 보았다.

“아가씨.”

누가 어깨를 건드리자 유채는 뒤를 돌아보았다. 개 수인으로 보이는 남자 셋이 있었다. 유채에게 말을 건 것은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옆머리를 옆으로 쫙 넘기면서 멋을 부리는 척을 하고 입을 열었다.

“고양이 수인 일족 출신이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미인이 우리 수인들 사이에 있을 리가 없죠.”

개 수인은 유채의 머리카락을 한줌 움켜쥐고 입을 맞췄다. 유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의 손을 떨쳐 냈다. 괜한 난동을 부리고는 싶지 않았다.

“말씀은 감사한데, 제가 일행이 있어요. 그만 가주시겠어요?”

“예?”

“에이, 그러지 마시고. 저희랑 같이 노는 건 어때요?”

그중 하나가 유채의 팔목을 붙잡았다. 주위에는 딱히 도와주려는 사람도 안 보였고 루프스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타나지도 않았다.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마법이든 뭐든 쓰려고 입을 열려는 때 누군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미안하지만, 이 아름다운 암컷은 내 일행이다.”

강인한 손이 유채의 팔목을 잡고 있는 개 수인 남자의 손을 쳐 내었다. 그리고 제 옆으로 유채를 끌어왔다.

“내 부인은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만 나는 아닌데. 어디 가서 나와 격한 대화를 나눌 생각이 있나?”

“아, 아닙니다.”

개 수인 셋은 루프스의 협박에 조용히 물러났다. 유채가 올려다보자 루프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왜 당신 부인이에요?”

“그럼 내가 뭐라고 해야 했지? 내 여동생? 닮지도 않아서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호위라고 하면 되지, 그리고 왜 이리 늦게 나타나요?”

“나름 즐기는 것처럼 보이더군. 그래서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까지는 기다렸다.”

유채는 흥,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먹을 것을 찾아 움직였다. 이미 접시 위에는 먹을 것이 한가득이었는데 뭘 더 찾는 건지 유채는 두리번거렸다.

“뭐, 찾는 음식이라도 있나?”

“예. 여긴 회는 없나 보네요. 훈제한 생선이 있길래 회도 있을 줄 알았는데…….”

유채는 실망한 표정이었다. 루프스는 ‘회’라는 음식 이름은 처음 듣는 표정을 하였다. 그게 뭘까 생각을 하다가 예전에 뱃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먹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유채는 그것을 찾는 것 같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을 잡았다.

“따라와라. 여기는 아마 없을 거고, 지금쯤이면 밤낚시를 나갔다 돌아오는 어부들이 있을 테니 그쪽에 물어보면 될 거다.”

유채는 루프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선착장까지 오게 되었다. 유채는 접시 위의 음식을 흘릴까 봐 몸놀림이 조심스러워졌다.

마침 어부 한 명이 배를 선착장에 고정시키는 중이었다. 루프스는 배 가까이 다가가 어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손짓으로 유채를 불렀다. 나이든 늑대 수인 어부 부부는 배에 오르라고 손짓했다.

“접시.”

유채는 배에 먼저 타고 있는 루프스에게 접시를 건네었다. 부인이 그 접시를 받아서 배 안으로 들어갔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유채는 쉽게 배에 오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작고 낡은 배는 아무리 보아도 금방 무너질 것처럼 허술하기만 했다.

“안 위험해. 내가 받아줄 테니까 뛰어.”

“뛰었다가 배가 뒤집히면 어떡해 해요? 이거 너무 불안한데.”

“네 몸무게에 넘어갈 배라면 어떻게 여태껏 어업을 해왔겠나? 넘어와라. 내가 잡아줄 테니까.”

“싫어요. 무서워. ……꺄악!”

루프스가 유채의 팔목을 잡고 당기자 유채는 비명을 질렀다. 그 덕에 겨우 배 위에 오른 유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유채는 얼른 루프스의 가슴을 밀곤 헛기침을 몇 번 한 뒤에 그에게 물었다.

“갑자기 배에는 왜 타고…… 으악!”

유채는 누군가 갑자기 등을 두드리자 놀란 고양이처럼 털을 곤두세우곤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접시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던 부인이었다. 루프스가 쿡쿡 웃자 유채는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내가 이렇게 구는 데 당신 탓도 있거든요. 기습을 한두 번 당했어야지. 이런 상황에서 경계심만 높아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유채의 말에 루프스는 금세 시무룩해져 입을 다물었다. 유채는 그를 등지고 부인이 가리킨 선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다 루프스가 갑자기 유채의 손목을 잡았다. 유채는 뒤를 돌아보았다, 루프스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럼, 왜 나에게 그렇게 굴지 않는 것이냐? 그러니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왜 나는 경계하지 않는 것이냐? 마치…….”

희망을 주는 것 같았다. 유채가 떠날 거라는 걸 아는 그는 유채가 이러는 게 제게 더한 절망을 안기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었다. 유채가 그만큼 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프스는 한쪽에 미뤄두고 있던 생각을 애써 끄집어내었다.

“당신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했어요.”

유채는 씩 웃고는 그를 두고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루프스는 저 말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부정적으로 해석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선실 안에서 늑대 수인 어부는 갓 잡은 생선으로 회를 뜨고 있었다.

“내륙 수인들은 잘 모르는 별미인데, 아가씨는 뭘 먹을 줄 아는구만.”

어부는 씩 웃으면서 접시에 회를 담아서 건넸다. 그는 칼을 든 손으로 루프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청년이 아가씨가 회를 먹고 싶어 한다고 간곡하게 부탁하기에 특별히 주는걸세.”

“근데, 아가씨 정말 예쁘네. 청년도 정말 잘생겼고. 둘이 무슨 사이야?”

부인이 유채와 루프스의 사이를 궁금해했다.

“부부?”

“아니에요, 그런 사이!”

“지금은 아니라도 곧 그런 사이가 되겠지. 늑대 일족이 언제 사랑하지 않는 여인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것 봤어? 게다가 오죽 아가씨를 좋아하면 우리한테 이런 부탁까지 하겠어. 그만 튕기고 마음이나 받아줘.”

부인이 유채의 옆구리를 찔렀다. 유채가 뭐라고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어부는 다른 여러 생선들도 회를 떠주었다. 다행히 여기도 매운 맛을 내는 소스가 있어서 유채는 오랜만에 회를 즐길 수 있었다.

루프스는 생선회의 냄새가 비려서 먹지는 못하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유채를 바라보기만 했다. 유채는 제가 가져온 음식을 어부 부부에게 권했다.

“이거라도 드세요. 저 때문에 회까지 내어주셨는데.”

“에이, 괜찮아. 아가씨나 많이 먹어. 몸이 그게 뭐야, 피죽도 못 먹는 것같이 말라가지고 말이야. 이러니 청년이 직접 와서 음식 찾느라 저 난리지.”

유채는 부인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도 회를 권했다.

“안 먹어요?”

“입맛에 안 맞는다. 난 따로 챙겨 먹을 테니 맛있게 먹어라.”

“그래. 청년은 나랑 술 한잔하자고.”

어부가 어디선가 꺼낸 술을 루프스에게 권했다. 루프스는 그 술을 받아 유채가 들고 온 접시에 있는 음식을 안주 삼아서 먹었다. 유채는 루프스가 마시는 술을 보면서 가만히 물었다.

“그쪽은 생각보다 잘 마시네요.”

“일하다 보면 마실 수밖에 없지. 술 좋아하는 이들이 한둘이어야지 말이야.”

“그래도 그렇게 술이 강한 것 같지는 않던데?”

“너만 하겠나. 그 조금 마시고 취하는 건 뭔가?”

루프스가 어제를 떠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유채는 어제를 떠올리면서 얼굴을 붉혔다. 술주정도 술주정이지만, 어제 막판에 한 그 일은 정말로 제가 생각해도 못 볼 짓이었다.

“귀엽긴 했지만, 다른 수컷들 앞에서는 하지 마라. 나쯤 되니까 참은 것이지. 다른 놈들이면 무슨 일이 났을지 모른다.”

루프스는 약간 술기운이 올라. 평소보다 더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어제 아무 일도 없었거든요!”

유채는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했다. 루프스가 호탕에게 웃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웃음에 얼굴을 붉혔다. 루프스가 대범하게 유채의 허리를 자신의 팔로 감았다. 유채의 몸이 루프스의 가까이 끌려왔다. 루프스는 고개를 내렸다. 유채의 눈에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술이 보였다.

“그럼 내 입술이 이렇게 된 건 뭔가?”

“난 아무 상관없어요!”

유채가 루프스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루프스는 제 장난이 심했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짓씹었다.

“토라진 암컷은 바로 풀어줘야 해. 안 그럼 한참을 고생한다니까. 내 다 경험해 보고 충고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루프스는 일어서서 유채를 따라 나갔다. 유채는 뱃전에 걸터앉아 바닷바람을 쐬고 있었다. 루프스는 부르자 유채는 그를 돌아보고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루프스가 옆으로 다가갔다.

“화났나?”

“아니요? 내가 왜 화내요?”

“아까 전에 웃은 게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그냥 네가 귀여워서 그랬다.”

“별것 가지고 사과를 다 하네요. 화나지도 않았고 괜찮아요. 그냥 바람을 쐬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알았다. 그럼 들어가자.”

“싫어요. 내가 왜 당신 말을 따라야 해요.”

유채는 루프스가 손목을 잡고 당기자 발에 힘을 주고 버텼다. 유채가 정말로 싫어하는 것 같아서 루프스는 금방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런데 몸에 힘을 주고 있던 중에 갑자기 잡아당기는 힘이 없어지자 유채는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꺅!”

루프스는 유채가 바다에 빠지기 전에 얼른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유채는 놀라서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곤 루프스의 팔뚝을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검게만 보이는 바닷물이 넘실넘실거렸다,

“수영 못 하나?”

“수영 잘하는 거랑 물에 빠질 뻔해서 무서워하는 거랑 다른 거거든요? 봐봐. 여기 위험하잖아. 내가 이래서 통통배는 싫다니까.”

유채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루프스는 여기 더 있다가는 유채가 더 겁을 먹을 것 같아서 어부 부부에게 적당한 보수를 제공하고 다시 마을로 들어갔다. 유채는 피곤한 것인지, 자꾸 루프스의 몸 쪽으로 자신의 몸을 기대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부축했다

“피곤한가?”

“조금. 그래도 괜찮아요. 버틸 만해요.”

유채는 자신이 한 말과 달리 졸린지 눈을 껌벅였다. 루프스는 적당한 곳에 유채와 같이 앉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 머리를 제 가슴에 기대게 하였다. 유채는 버팀목이 생긴 것이 안정적인지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재밌네요. 먹을 것도 많고, 재미있는 것도 많고.”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다.”

“내가 특별히, 아주 특별히. 칭찬 하나 해줄까요?”

유채는 피로가 몰려와 졸린 것인지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해봐라.”

“당신, 잘생겼어요. 솔직히 외모만큼은 내 취향이랄까?”

이번에 붉게 물든 것은 루프스의 볼이었다. 유채는 붉게 물든 루프스의 얼굴을 보며 장난스런 미소 지었다.

“근데, 딱 외모만 내 취향이에요. 나머지는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뭐하러…….”

말꼬리가 흐려진다 싶더니만 이내 유채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많이 피곤했는데 유채는 금방 곯아떨어졌다. 루프스는 잠든 유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너도 예쁘다. 외모만큼은 정말 내 취향이지.”

유채는 루프스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근데, 나는 네 외모보다 네 성품이 더 좋다.”

루프스는 잠든 유채의 얼굴 가까이로 고개를 기울였다. 살짝 벌어진 말캉한 입술에 제 것을 가져다 댔다. 그냥 그렇게 맞대고만 있을 뿐인데도 너무나 가슴이 설레서 루프스는 오랫동안 그렇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 * *

유채는 늦은 아침을 먹고 오늘은 하루 종일 빈둥거리겠다고 다짐했다.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 편하게 누리는 여유였다. 그런데 또 막상 놀려고 하니 할 게 없었다. 하필 블루벨은 오늘 케릭스랑 놀러 가기로 했다며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내 딸도 아닌데, 왜 이렇게 딸 시집보낸 기분이지.”

유채는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서 뒹굴거렸다. 블루벨이 있으면 참 좋을 테지만, 블루벨에게도 사생활이 있는데 마냥 귀찮게 할 수는 없었다.

“저…… 레티티아님. 마실 것을 가져왔습니다.”

한 궁녀가 벌벌 떨면서 유채의 방으로 들어왔다. 유채는 그 궁녀가 누군지 기억했다. 처음 토스 호무스에 왔을 때, 저질스런 장난으로 괴롭히던 다람쥐 수인 궁녀였다. 그랬던 궁녀는 이제 유채의 지위가 바뀌자 그녀에게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궁녀는 유채에게 마실 것을 놓아두고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레, 레티티아님이 어떤 분인지 모, 몰라 뵙고 제가 가, 감히 그랬습니다.”

“나가요. 당신의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요. 내게 정말로 미안한 게 아니잖아요? 사과를 하려거든, 제대로 마음을 갖추고 하길 바라요. 그럼 나도 받아줄게요.”

유채는 사소한 것에는 신경을 끊기로 했다. 피곤해질 것 같은 일에는 애초에 관심을 보이지 않기로 했다. 유채는 궁녀가 가져온 붉은색의 음료수를 마시며 가련하게 몸을 떠는 궁녀를 외면했다.

“나가요. 눈앞에서 어슬렁거리지 마시고요. 아무튼 차는 고마워요.”

궁녀는 눈물을 훌쩍이면서 방을 나섰다. 유채는 이 정도로 만족했다. 딱히 저 궁녀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저이는 언제 벌이 내려질지 몰라 불안에 떨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복수가 될 터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는 드물게 헤나가 깨우러 왔었다.

* * *

헤나는 유채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곳의 옷은 혼자서 입기에는 많이 복잡해서 유채는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헤나는 유채의 가슴띠를 매어주고 옷매무새를 손봐주었다. 옷을 다 입은 후에도 헤나는 나가지 않고 유채의 앞에 앉았다.

“나한테 할 얘기가 있나요?”

“여기 남으실 생각이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질문에 헤나도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단호한 태도에 헤나는 금방 얼굴빛이 흐려졌다.

헤나는 최근 루프스의 이상 행동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었다. 루프스는 개 수인 궁관을 불러서 유채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염소 수인들에게는 얼른 초상화를 완성시키라고 재촉했고 갑자기 연인끼리 놀러갈 수 있을 만한 곳을 알아오라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정도로 일에 치여 쉴 시간도 없는 상태에서 늦은 밤까지 밖을 돌아다녔다.

본래 루프스의 수면 시간은 매우 짧은 편이었는데 요즘은 아예 잠을 자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원래 체력이야 좋은 수인이니 지금이야 괜찮다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면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지금도 낮게 꾸벅꾸벅 졸면서 루프스가 밤나들이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루프스님은 레티티아님을 연모하십니다.”

“……그게 내가 그 사람을 책임져야 할 이유가 되진 않아요. 그건 그 사람 감정일 뿐이에요.”

“책임지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그분의 호의를 거절해 주세요. 희망은 꿈을 꾸게 하고 행복하게 하지만, 절망하게도 합니다. 그러니 그분을 거절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분께 희망을 주지 말아주십시오.”

“헤나님은 왜 그렇게 루프스를 챙기나요?”

“블랑카님께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이 저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루프스님을 그분이 열다섯 살일 때부터 가까이서 모셔왔지요. 그렇다 보니 이제는 제 아들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니, 아들을 위한 걱정에서 하는 말로 들으시고 그분을 가엾게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헤나는 유채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블랑카의 반지를 보았다.

“블랑카님의 반지를 드릴 만큼, 그분의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분께 희망을 주지 마세요. 거절해 주세요.”

헤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유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아침나절의 대화를 곱씹고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채가 대답을 하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루프스였다. 그는 요새 전후 처리로 온갖 수인들을 상대하는 중이라 깔끔한 복장을 한 상태였다. 루프스는 성큼성큼 걸어와선 유채의 옆에 앉았다.

“심심하지 않나? 듣자 하니 블루벨은 바쁘다고 하던데.”

“연애하느라 바쁘죠. 딸 시집보낸 엄마가 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에요. 카넬리안 언니도 바빠서 직접 오지 못한다고, 인키디움 일을 해결하면 케릭스를 반쯤 죽여놓겠다 벼르고 계시더라고요.”

유채는 얼마 전에 카넬리안에게서 온 편지를 가리켰다.

루프스는 답답한지 상의의 단추를 여러 개 풀었다. 그러자 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반쯤 드러났다.

“그쪽은 은근히 예복 입는 걸 싫어하네요.”

“답답하니까. 난 몸에 열이 많은 편인데 이 옷은 보기에만 예쁘고 바람도 안 통하는 데다 무겁기까지 해.”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유채는 들고 있던 컵을 루프스의 볼에 대주었다. 루프스는 갑작스런 차가움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유채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땀이나 식혀요. 땀 냄새 나요.”

“나는 술 냄새를 싫어한다. 특히 술주정 부리는 마레 위르에…….”

“도대체 그때를 몇 번을 놀려먹는 거예요. 난 그때 처음 술 마셨다고요!”

“귀여워서 그런다. 귀여워서. 그때 좀 많이 귀여웠다.”

“난 기억하기도 싫어요!”

유채가 얼굴을 붉혔다.

“기억하기 싫다고 해서 그 일이 없어지는 것은……. 읍.”

유채는 루프스의 입을 막기 위해 그의 볼을 음료수 잔으로 꾹 눌렀다. 루프스는 몸을 옆으로 기울이면서 유채의 손을 잡았다. 루프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심심한가?”

“조금은요. 이렇게 뒹굴거리는 것도 조금 지루하네요.”

“나도 간만에 옛날처럼 모범생 노릇을 하고 있으려니 몸이 쑤시더군.”

루프스는 유채의 손에서 음료수 잔을 뺏어 탁자 위에 놓아두고 그녀에게 물었다.

“같이 나가겠나?”

“무슨 말이에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궁에서 무슨 꼴이 일어나는 지도 구경하고 놀러다는 거야. 나쁘지 않지 않나? 어차피 지루하잖아.”

“안 바빠요?”

“바쁘니까 하는 일탈이지. 따라가겠나? 축제 때에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볼 테냐? 궁의 동쪽에 구시가지가 있는데 거기에 볼 게 많다.”

“나나 당신이나 정체가 들통 나면 골치 아파지지 않아요?”

“그러니, 숨기고 가야지. 적당한 모자 쓰고 돌아다니는 거야. 스릴도 있지 않겠나. 여기서 가만히 앉아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유채는 한참을 고민을 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터라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붙잡아 일으켰다.

“그럼 출발하자.”

“지금요? 아무런 준비도 없잖아요?”

“원래 이렇게 급작스럽게 가는 게 더 재밌는 거다. 게다가 우물쭈물거리며 이것저것 준비하려다가 들키는 법이지. 어서 나와. 어차피 네가 입은 옷이 수수해서 정체가 들통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서 따라와.”

루프스는 유채를 안은 채로 열린 창을 통해 방 밖으로 나갔다. 궁에 익숙한 그는 이리저리 인적이 드문 곳으로 움직여 궁관들의 숙소를 찾았다. 그리고 유채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유채는 이곳이 뭐하는 곳인가 해서 까치발을 들고 창문 틈으로 슬며시 안쪽을 보았다가 화들짝 놀라서 쪼그려 앉았다. 유채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었다. 루프스가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유채는 당황해서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누르며 식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프스가 나왔다. 그는 평범한 수인의 복장을 입은 상태였다. 루프스는 한쪽 무릎을 꿇어 유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뭐 하나?”

“그쪽 기다리잖아요.”

유채가 루프스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귀엽다. 원래 이렇게 귀여웠나?”

유채는 붉어진 얼굴로 루프스를 올려다보고는 그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욕설을 뱉었다.

“난 칭찬했다. 아까처럼 놀린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이렇게 험악하게 구나?”

“됐어요. 이제 뭐 할 거예요?”

“이제 슬슬 움직이려고 슬슬 들통 날 때가 됐으니까.”

루프스의 말대로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고 뛰었다. 이리저리 병사들을 피해 몰래 움직이면서 유채는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루프스는 적당히 병사들을 따돌렸다고 생각한 것인지 유채의 몸을 들쳐 안았다.

“우앗! 지금 뭐하는 거예요.”

“이제 담을 넘어야 한다. 조용히 해라. 들키고 싶지 않으면.”

루프스는 훌쩍 담 위로 도약해 한 번에 건너편 땅으로 내려섰다. 그가 내려주자 유채는 밀려올라간 옷을 주섬주섬 끌어내렸다.

“왜 저렇게 병사들이 빠른 시간 내에 수색을 시작한 거예요?”

“뭐, 내가 장난을 좀 쳤거든.”

루프스가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데, 그것은 도장이었다.

“독수리 일족 수장의 도장이다.”

“이걸 왜 가지고 나와요!”

“그래야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마 케릭스라면 내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 것인데, 토끼 꼬마와 시시덕거리는 중이라 조금 늦게 나설 것 같군. 가자.”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유채에게는 귀를 가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모자가 필요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 위에 궁에서 가지고 나온 챙이 넓은 모자를 씌워주었다. 유채는 뭔가 루프스의 페이스에 말려버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우리 지금 범죄자가 된 거예요?”

“정확히는 나만이지.”

“나는 당신 때문에 공범이 된 것이고요?”

“지루한 일상에 이 정도면 괜찮은 일탈이 아닌가? 가자. 여기 시장에 재미있는 것이 많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고 인파 사이로 섞여들었다. 여름의 햇빛은 뜨거웠다.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유채는 온도를 낮춰주는 마법 물품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땀을 흘렸다. 유채가 너무 더워하자 루프스는 적당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실내로 들어가 햇빛을 피하니 좀 살 것 같았다. 루프스는 유채를 자리에 앉힌 후 직접 음식을 주문하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어릴 때 왔던 곳인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전쟁을 겪었는데도요?”

포트리스의 사람들에게 직접 점령되었었던 이곳은 아직 피해 복구로 한창이었다. 그나마 포트리스의 목표가 루프스가 있는 본대였던 탓에 점령보다는 진격에 중점을 두어서 금방 독수리 일족 측으로 빠져나간 탓이 컸다. 그럼에도 전쟁의 상처는 여러 군데에 남아 있었다. 지금 이 식당도 벽 여기저기에 판자를 덧붙인 흔적들이 보였다. 루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신기한 것이지. 가끔 아버지랑 나와서 음식을 먹고 돌아가곤 했었다.”

“당신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용맹하고 호탕하고 수컷다운 멋있는 분이셨지. 어머니는 자애롭고 밝고 쾌활하시며 정의로운 분이셨고.”

“당신 아버지랑 많이 닮았더라고요. 아버지 쪽이 선이 더 굵다는 것만 제외하면.”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아버지는 체격이 우람하셨는데 나는 마른 편이고.”

점원이 유채와 루프스의 앞에 쿠키와 붉은 빛깔의 음료수, 초기형태의 아이스크림에 가까워 보이는 먹을거리와 과일 샤베트를 가져왔다.

“그건, 이 쿠키에 이렇게 얹어먹는 것이다.”

루프스는 쿠키에 아이스크림을 발라서 유채의 입에 넣어주었다. 기대한 것보다 달고 맛있어서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르는데 루프스가 그녀의 입가에 묻은 가루를 털어주었다.

“맛있네요.”

“실수로 만든 것인데, 그것이 유명해져서 이젠 이곳의 명물이 되었지.”

유채는 루프스가 알려준 방법대로 쿠키 위에 아이스크림을 발라 먹었다. 유채가 맛있게 먹는 것을 지켜보다가 루프스가 슬쩍 물었다.

“이니투스의 보자기는 어떻게 되었는가?”

“셀레네에게 돌아갔어요. 리와인더의 조각을 보내는 조건에 필요한 것이 그 보자기였거든요. 훔쳤다고 생각한다면…….”

“네가 달라고 했으면 그냥 주었을 것이다. 네가 셀레네님의 선택을 받았건 받지 않았건 그것은 네 것이었다. 그러니 걱정 마라. 너를 탓할 생각 없다.”

루프스의 말에 유채는 뭔가를 물어보고 싶어 입을 달싹거리다가 말았다.

“……케릭스는 왜 그딴 소리를 해가지고.”

유채가 중얼거리는 말을 용케 들은 루프스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케릭스가 이상한 소리를 했나?”

“아니요. 아주 일상적인 말이었어요. 몰라도 돼요.”

유채는 어깨를 으쓱였다. 루프스는 하루하루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갈 때마다 기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언제나 무표정하거나 화내거나 우는 얼굴만 보아서 잘 몰랐었는데 지금 보니 이제 갓 스물이 된 소녀다운 귀여운 구석도 많은 아가씨였다. 유채는 루프스의 시선에 눈을 살짝 치켜떴다.

“뭘 그리 빤히 쳐다봐요. 사람 먹는 거 처음 봐요?”

루프스는 손을 뻗어서 유채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으로 훔쳐 혀로 핥았다. 유채는 흠칫 놀라서는 몸을 뒤로 빼고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뭐가 묻었으면 말을 해요. 내가 닦을 수 있어요.”

“몰랐는데,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많구나. 이제는 우아하다는 말보다 귀엽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거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칭찬이다. 귀엽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나?”

“별 감흥이 없어서요. 근데 이거 이름이 뭐예요?”

“그냥 차가운 크림이라고 부르더군. 이 집 딸이 크림을 얼려 버렸다가 녹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유채는 살짝 웃었다. ‘차가운 크림’이라니, 아이스크림과 이름도 비슷했다. 그러던 중 루프스가 귀를 가리키자 유채는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또 뭐가 묻었나 싶었다.

“귀걸이는 왜 하지 않나?”

유채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귀 뚫는 게 무서워서요. 내 친구 중에 귀를 잘못 뚫어서 엄청 고생한 애가 있거든요. 걜 보니까 난 무서워서 못 하겠더라고요.”

“그럼 만일 무섭지 않고 아프지도 않게 해준다면 귀걸이를 할 생각이 있나?”

유채는 루프스의 귀를 보았다. 그의 귀에도 피어싱처럼 보이는 것 여럿이 붙어 있었다. 블루벨에게 듣기로 고대 수인들은 성인식에 귀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장신구를 달았다고 했는데 그 전통이 이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유채는 구멍조차 뚫지 않은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귀걸이를 해보고 싶기는 했다. 게다가 아프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게 해준다는데 한번 믿어볼까 싶었다. 유채는 남은 음료를 홀짝 마시고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프스는 곧장 일어나서 유채의 팔목을 잡았다.

“가자. 적당한 곳을 안다.”

“지금 바로 하자고요?”

“말이 나온 김에 헤야지. 근처에 귀금속을 파는 뱀 수인이 있다. 거기로 가자.”

루프스는 유채를 재촉해 식당을 나갔다. 그녀와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좋았다.

“응? 왜 그러나?”

잘 걷던 유채가 갑자기 멈춰 서서 루프스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몸을 달달 떨었다. 루프스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금방 원인을 알아냈다.

소 수인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것도 헥터와 형제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흡사하게 생긴 거구였다. 창백하게 질린 유채가 루프스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루프스는 유채를 단단히 끌어안고 그녀가 안심하게 속삭였다.

“저건 헥터가 아니야.”

유채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헥터의 유령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데 죽었다고 제게 거짓말을 한 걸까? 유채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루프스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연신 중얼거렸다.

“헥터는 죽었다. 내가 죽였어. 너를 건드린 죄로 그놈은 죽었다. 그러니 저건 헥터가 아니야.”

루프스는 유채가 불안하지 않게 아이를 달래듯이 그녀의 등을 쓸었다. 유채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불안해하지 마라. 걱정 마라. 내가 있다. 내가 지켜주마.”

루프스가 헥터와 닮은 소 수인이 멀리 지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유채에게 말해주었다. 그제야 유채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루프스는 허리를 숙여서 유채와 눈을 맞췄다.

“아직도 무섭나.”

아래로 내리깐 유채의 눈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루프스는 커다란 손으로 유채의 뺨을 감쌌다.

“이제 헥터는 죽고 없다. 그리고 이제 그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너는 우리의 성녀가 되었다. 수인의 왕이자 모든 늑대들의 왕인 내가 너를 지키고 있다.”

유채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루프스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제가 잘못해서 유채가 이렇게 된 것이다. 루프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걱정 마라.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러니 안심해라. 너는 그 누구보다 안전하다.”

루프스는 굽혔던 허리를 일으켜 세우고 유채를 이끌었다.

“가자. 예쁜 귀걸이를 사주마. 바실리사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뭐든 사면 기분이 풀린다고 그러던데 너도 예쁜 물건을 보고 기분이 풀렸으면 좋겠다.”

루프스의 노력 덕에 유채는 조금씩 불안감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래, 헥터는 죽었다. 이제 다시 제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채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본 루프스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그래, 감히 이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자. 자신은 유채에게 한없이 죄인이었다. 감히 유채에게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죄인이었다.

* * *

“잠, 잠깐만요! 그, 그거 소, 소독하신 것 맞죠?”

벌써 세 번째로 ‘잠깐’을 외치면서 유채는 뱀 수인의 팔을 잡았다. 그도 이제는 질린 것인지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고 숨을 죽이고 웃었다. 그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에 유채는 사나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루프스는 찔끔해서는 웃는 걸 멈추고 유채의 옆으로 다가왔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냥 조금 따끔하고 끝이지.”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아프면 어떻게 해요!”

루프스는 겨우 작은 바늘에 찔리는 것에도 호들갑을 떠는 유채를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헤임달이 그녀의 배와 어깨를 찔렀다고 했었다. 잠깐 바늘에 찔리는 것도 무서워하는 아이인데 그런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견뎠을까.

유채는 절대 싸움에 어울리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 유채를 싸움터에 밀어 넣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유채가 얼마나 무서워서 떨었을지를 생각하면 그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안 아파, 아가씨.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 아가씨가 어린애처럼 엄살이 왜 이렇게 심해.”

“엄살이 아니라, 내 친구가 귀 뚫고 고생했다니까요.”

“치유 마법으로 확실하게 고쳐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루프스는 유채에게 팔을 내밀었다.

“잡아라. 아프면 꽉 움켜쥐어도 돼. 네가 나를 미워하는 만큼 세게 잡아도 된다.”

유채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루프스의 팔을 잡았다. 루프스는 뱀 수인과 시선을 교환하고 유채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녀의 몸을 안았다.

“아앗. 앗!”

유채가 움찔거림과 동시에 귀에 금세 구멍이 뚫렸다. 뱀 수인은 능숙한 솜씨로 귀를 치료해 준 다음 유채가 호들갑을 떨고 있는 동안 루프스가 골라온 귀걸이를 보여주었다.

“청년이 안목이 좋아. 원래 미인은 자수정 눈동자를 갖는다는 말이 있거든. 아가씨 같은 미인에게는 그러니까 자수정 귀걸이가 최고지.”

루프가 골라온 것은 백금으로 세공된 몸체에 자수정이 달려 있는 우아한 디자인의 귀걸이였다. 유채는 아파했던 것도 잊고 금세 귀걸이에 시선을 빼앗겼다.

“우리 가게에서 제일 비싼 거야. 정말 귀한 거라고.”

뱀 수인이 유채의 귀에 귀걸이를 달아주었다. 루프스는 반대쪽 귀는 제가 하겠다며 귀걸이를 받았다. 뱀 수인이 거울을 가지고 오자 제 모습을 비쳐 본 유채는 귀걸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 방긋 웃었다.

루프스는 귀걸이와 한 세트인 목걸이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다. 유채의 하얗고 가는 목에 잘 어울릴 것 같았지만 지금은 줄 수 없었다. 그날 주기 위해서 남겨둔 물건이었다. 루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에 드나?”

“예. 마음에 들어요. 예뻐요.”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군. 가자. 근사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알아놓았다.”

루프스는 앉아 있는 유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채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혼자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프스는 민망해진 손을 거두고 유채의 뒤를 쫓았다. 간만에 큰 거금을 번 뱀 수인은 둘 사이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돈을 세면서 건성으로 인사했다.

유채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자기 저를 잡아끄는 루프스의 손에 이끌려서 골목으로 들어갔다. 유채는 골목의 벽과 루프스 사이에 갇혔다. 루프스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고 골목 밖을 내다보았다.

시카리우스였다.

“케릭스 놈이 일을 시작했군.”

“케릭스요?”

“그놈이 날 찾으라고 시카리우스들을 내보낸 거야. 지금쯤 길길이 날뛰고 있겠군. 쌤통이야. 나는 바빠 죽겠는데, 그놈은 연애질로 노닥거리던 중이니까. 간만에 고생 좀 해보라고 하지 뭐.”

루프스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카리우스가 유채와 루프스가 있는 골목 쪽으로 다가오자 그는 유채를 한 팔로 안아 올렸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범죄자답게 도망치기지. 케릭스 놈 고생 좀 해보라고.”

루프스는 유채를 안고 달렸다. 유채는 떨어질까 봐 루프스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시카리우스도 눈치를 챈 것인지 그들을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돌아가면 안 되나요?”

“내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시카리우스 따위에게 붙잡혔다고 돌아가나?”

루프스는 힘껏 뛰어올라 지붕 위로 올라갔다. 유채는 눈을 꼭 감았다. 루프스는 시카리우스 몇을 따돌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시카리우스가 골목에 숨은 루프스와 유채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그 앞을 지나쳐 갔다.

유채는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 느낌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프스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크게 웃었다. 유채는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재미있어요?”

“응. 아주. 나름대로 기분 전환이지.”

루프스는 웃옷을 벗고 땀을 식히려 했다. 마침 근처에 우물이 있어 둘은 그쪽으로 향했다. 유채는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서는 그를 향해 손짓했다.

“엎드려요. 내가 뿌려줄 테니까.”

루프스는 순순히 엎드렸다. 유채는 바가지로 루프스의 등에 찬물을 뿌렸다. 루프스는 시원하다는 듯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유채는 새삼 루프스의 등에 가득한 흉터들을 보면서 물었다.

“안 아파요? 이 상처들?”

“지금은 안 아프고 그때는 아팠지.”

대답 끝에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도 났다. 유채는 이럴 때 보면 완전히 늑대인 것 같기도 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루프스의 말에 유채는 물을 뿌리는 것을 멈추고 허리를 세웠다.

“죽고 싶어서 싸웠던 것 같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에리카에게 미안하고 아버지께 미안하고 어머니께 미안해서. 죄책감에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모두 잊기 위해서 싸웠던 것 같다.”

“……당신이 당신 가족들에게 잘못한 건 없어요.”

“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란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루프스는 바닥에 짚고 있던 손을 씻고 머리의 물기도 털어냈다. 유채의 검은 눈이 그를 응시했다.

“당신 가족들은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요.”

“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요. 최소한 당신 가족 일로는요. 뭐, 나한테 한 일로는 아주 많이 괴로워해도 되지만.”

루프스는 쓰게 웃으면서 루프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유채의 귀에 달린 자수정 귀걸이가 맑은 소리를 내었다. 그의 행복은 지금 그의 손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이제 보내줘야 했다. 내일이 유채와 마지막으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날이고 그 다음 날은 유채를 보내줘야 했다. 루프스는 아릿한 가슴을 꾹 누르면서 웃었다.

“내일 재미있는 축제가 하나 있다. 같이 갈 생각 있나?”

“뭐, 할 일도 없으니까…… 갈게요.”

“그럼 내일은 예쁘게 꾸미도록 해라. 내 눈이 멀 정도로 예쁘게.”

찬란하게 빛이 나는 모습만 기억할 수 있게. 이곳에서 자신은 홀로 늙고 병이 들어도 그 기억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게. 머릿속에, 기억 속에 남겨서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머지는 내가 다 준비하마.”

이제 남은 것은 그의 몫이었다. 그의 마음도, 그의 사랑도, 그의 행복도, 죄도, 죄책감도 이제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루프스는 불에 타 바스러지는 마음을 끌어안고 웃었다. 웃는 것 외에는 그녀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유채는 마음먹고 꾸민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분명히 깨달았다. 전에는 시키는 대로 입기만 했으니 적어도 정신적으로 피곤하진 않았었는데 오늘은 목욕할 때 띄울 꽃 하나부터 옷 색에 장신구까지도 모두 다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니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옷을 다 입고 화장까지 다 한 후에,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을 꽃으로 장식하는 것을 보자마자 유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으나 오늘 종일 선택권을 주었던 궁녀들은 이번만큼은 자기들 의견을 강행했다. 유채는 그나마 제가 고른 옷이 화려하지 않다는 것과 낮은 굽의 신발을 신을 수 있다는 데에 만족하기로 했다.

[왔나?]

밖으로 나오니 늑대로 변해 있는 루프스가 그녀를 맞았다. 루프스의 늑대 머리가 유채 쪽으로 기울어졌다. 유채가 그의 콧잔등을 한번 쓸어주자 루프스의 목에서 만족스러운 갸르랑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어딜 갈 건데요?”

[그렇게 먼 곳은 아니다. 케릭스의 고향은 토스 호무스에서 두 번째로 큰 마을인데 오늘은 그곳에서 축제가 열린다고 하더군.]

“케릭스 씨 고향이요?”

[그래, 본래 그의 본가는 그곳에 있다. 타라. 어서 가자.]

루프스가 엎드려 주자 유채는 그의 등 위로 올라탔다. 루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채는 복슬복슬한 털을 붙잡아 몸의 중심을 잡았다. 루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유채는 기껏 꾸며놓은 머리가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이내 내심 귀찮았는데 망가지면 장식을 다 빼버리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참을 달린 후 루프스가 멈춰 섰다. 언덕 아래에 축제때문인지 잔뜩 불을 밝히고 있는 마을이 보였다. 플로서스가 반란의 중심으로 삼은 지역이지만 오히려 다른 어떤 곳보다도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곳이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등에서 내려왔다. 아직 위르형으로 변하지 않은 루프스는 유채의 옆에 앉아서 불빛 가득한 마을 풍경을 바라보았다. 유채는 마치 커다란 인형에 기대는 기분으로 루프스의 다리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었다.

“와! 멋있네요. 무슨 축제예요?”

[이곳의 지명의 이름을 따서 콘라르 축제라고 부른다. 꽃 축제인데 여자아이들의 건강과 평화를 바라는 목적으로 열리지. 원래는 더 나중에 열리는 축제나 반란의 중심지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 케릭스 집안이 보다 일찍 열도록 주도했다고 하더군.]

“여기 이름이 콘라르에요? 그러고 보니 토스 호무스 궁 근처는 뭐라고 부르는 이름 없어요?”

[레지아 카푸트. 고대어로 해석하자면, 왕의 도시, 중심 정도 된다.]

“수도 이름이 예쁘네요.”

[다시 타라. 여긴 전경이 멋있다고 해서 보여주려고 온 것이다.]

유채는 다시 그의 등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그의 부드러운 털을 매만졌다.

“이럴 때보면 강아지 같아서 당신도 좀 귀여운 것 같네요.”

루프스는 고개를 돌리려다가 이 모습으로는 제 등에 탄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곤 다시 원래대로 앞을 보았다. 유채는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당신 정원에 살고 있는 어린 늑대가 있어요. 그 늑대를 돌봐줄 수 있어요?”

[돕겠다. 내가 찾는다면 돌보지.]

루프스는 까끌까끌한 혀를 움직여서 간신히 답했다. 유채가 말하는 늑대는 바로 자신이었다. 유채는 결국 그에게 그 자신을 부탁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늑대가 바로 루프스의 처지였다. 루프스는 제 기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썼다.

“펠릭스 다우스로 삼아서 잔인한 처벌에 이용하려고 하지 말아요.”

[그러마. 약속하지.]

언덕은 금방 내려왔다. 위르형으로 돌아온 루프스는 남색의 민소매의 금실로 수를 놓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유채가 입은 흰색과 금색이 섞인 원피스와 잘 어울렸다. 루프스는 바람에 흩날린 유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바람 때문에 떨어진 장미 꽃잎이 유채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었다.

“정말 눈이 부실 정도군.”

루프스는 유채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매일 보는 얼굴 아니에요?”

“네 얼굴을 보는 게 질릴 리가. 네 모습은 화가가 그린 최고의 명작과 다름없다.”

“낯간지러운 말은 그만하죠?”

유채가 얼굴을 붉히자 루프스는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내 얼굴은 보지 않을 건가? 전에 내 얼굴만큼은 네 취향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유채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내 얼굴이 이제 네 취향이 아닌가? 이거 섭섭하네. 그래도 나 스스로 이 스티폴로르에서 내가 가장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외모에는 자신 있는데.”

“잘생긴 거 인정해 줄 테니까 그만 입 닥쳐요.”

유채는 부끄러운 듯 루프스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엄살을 떨면서 뒤로 물러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칭찬으로 한 소리다. 나는 귀엽다는 말도 못 하나? 흰소리도 아니고, 진짜 네가 아름답고 귀여워서 하는 말이다.”

“그럼 그 얼굴에 가득 묻어 있는 장난기나 치우고 말하죠?”

“네 눈에도 내가 잘생겼나?”

“본인이 가장 잘 알지 않아요? 내가 누구 때문에 방향 잃은 엉뚱한 질투 때문에 고생했는데.”

“아무래도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은 아부성이 짙은 발언 같아서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다. 그러니, 공정하게 네가 답해봐라. 너라면 누구보다 냉정하게 답을 줄 수 있지 않나?”

“맨 입으로?”

루프스가 유채의 말에 싱긋 웃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마을 안으로 이끌었다. 꽃의 축제답게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다 꽃으로 장식하고 있어서 유채의 머리 장식도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루프스는 수인들과 부딪쳐 유채가 다칠까 봐 그녀를 품에 안다시피 한 채로 인파를 헤쳤다.

“뭐 파는 곳이에요?”

“꽃으로 잼을 만든다고 하더군.”

루프스가 상인과 이야기를 하더니 유채에게 잼이 발라진 빵을 내밀었다. 유채는 꽃으로 만든 잼이란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빵을 입에 넣었다. 향긋한 장미향이 입안 가득 들어찼다. 유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루프스는 유리병에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잼을 사주었다.

“이 정도면 뇌물이 된 것 같은데, 말해봐라. 내가 네 눈에도 잘생겼나?”

“잘생겼어요.”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단어라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것은 루프스였다. 유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말을 이었다.

“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수인들은 수명이 120년이잖아요. 노화도 늦나요? 당신은 스물일곱 살인데, 겉보기에는 이제 갓 스물이 된 것처럼 보여서요. 당신이 유별난 건가요?”

“아니, 수인들은 마레 위르보다 노화가 느리다. 참고로 케릭스는 노안이다. 그놈이 워낙 인상 쓰고 다녀서 나이가 좀 들어 보이지. 내가 항상 웃고 다니라고 말을 해도 그 모양이라.”

루프스는 유채의 잼이 든 봉투를 든 다른 손을 잡았다.

“가자.”

“그쪽도 웃어요.”

루프스는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엔 찌르면 얼음덩어리가 나올 것 같은 조각상 같아 보였는데, 웃으니까 살아 있는 사람 같아요.”

“내가 웃을 수 있는 것은…….”

유채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이미 움직인 그의 입은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말을 결국 내뱉고 말았다.

“네가 내 곁에 있어서였다.”

유채가 제 곁으로 왔기에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 즐거움이 무엇인지 다시 알게 되었다. 유채가 있어서 웃을 수 있었다. 루프스는 볼 안쪽을 깨물어 목 끝까지 차오른 가지 말란 말을 다시 삼켜냈다.

“가자. 놀려고 온 건데 이런 심각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나? 저쪽에 뽑기 놀이를 하는 곳이 있는 것 같군.”

“뽑기?”

“운을 가지고 하는 놀이지. 나와 내기를 해볼 텐가?”

“난 걸 것이 없는데요? 돈은 한 푼도 없는 거지인 데다가, 그쪽이 나한테서 얻어낼 것이 뭐가 있다고요.”

“진 쪽이 이긴 쪽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 하지. 어때?”

“내가 불리한 것 아니에요? 나는 당신에 비해서 힘도 없고 이곳에 대해서 아는 것도 적은데요?”

“그럼 네가 놀이를 골라라. 네가 이길 수 있을 만한 것으로 골라서 그걸 하도록 하지. 그럼 공평하지?”

유채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냥 하는 게임은 재미없었다. 뭔가 걸려 있으면 승부욕도 생길 것 같았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목을 잡고 걸었다. 이렇게 있으니 연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제게 의지하고 있는 유채, 아름답고, 그래서 더 슬펐다.

루프스는 유채가 인파에 휩쓸리지 않게 제 옆에 그녀를 딱 붙였다. 그는 등불에 비친 유채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웃었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 됐으면 했다.

* * *

“이건 사기야! 사기!”

유채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가판대의 주인은 유채가 열을 내는 것을 보면서 쿡쿡 웃었다. 운이 없어도 저렇게 없는 아가씨는 처음이었다. 유채는 옆에서 실실 웃기만 하는 루프스를 흘겨보았다.

“당신이 무슨 술수 부린 것 아니에요?”

“너는 내가 뭔가 술수를 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나?”

“맞네. 아가씨. 내가 장담하건대, 여기서는 그 어떤 도박꾼도 술수를 부릴 수가 없다고. 오히려 난 아가씨가 내리 세 판을 진 것이 더 신기하다니까.”

유채는 분해서 씩씩거렸다. 유채가 고른 것은 다른 실력은 다 필요 없고 오로지 운으로만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미리 번호를 뽑아놓으면 상인이 돌림판을 돌리며 구슬을 던지는데, 그 구슬에 놓인 숫자와 가까운 번호를 뽑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첫 판을 졌을 때, 유채는 이건 연습이라 주장하면서 한 판을 더 하자고 했고, 루프스는 수긍했다. 그러나 내리 세 판을 연달아 지게 되자 본인이 고른 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 함정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앞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그녀를 달랬다.

“더 할 건가? 돈은 충분하다만 여기서 다 쓰기는 좀 아까울 것 같은데?”

“알았어요! 당신이 이겼어요! 당신이 이겼어!”

유채는 심통이 난 듯이 손에 든 구슬을 내던지며 일어났다. 유채가 쿵쿵거리면서 다른 쪽으로 가버리자 루프스는 상인에게 급하게 돈을 지불하곤 그녀를 쫓아갔다.

유채는 볼을 부풀리고 심통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프스는 그런 유채가 귀여워서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건드렸다.

“약속은 약속이지 않나? 네가 고른 놀이를 나는 술수를 부리지도 않았고 무려 세 판이나 이겼다.”

“알았어요! 그래서 소원이 뭔데요?”

“오늘 하루만 내 부인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유채는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하려다가 너무나도 진지한 그의 청회색 눈동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늘 하루면 된다. 자정이 될 때까지만, 내 비(妃)가 되라. 그게 내 소원이다.”

단 하루라도 유채와 부부가 되고 싶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평생의 소원이니, 잠시만이라도 그녀와 부부였고 연인이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싶었다. 남은 생을 괴로움에 몸부림치더라도, 평생을 후회할지라도 오늘만큼은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유채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루프스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약속이니까. 단, 그렇다고 너무 과한 것을 할 생각은 하지 마요.”

“그 정도로 파렴치하지는 않다. 그럼 소원을 들어주는 것인가?”

“약속이니까요.”

루프스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유채의 허리를 당겨 끌어안았다. 유채는 당황해서 루프스의 어깨를 밀어냈다.

“당신 뭐하는 거예요.”

“당신이 아니라 라이. 오늘은 부부이지 않나? 라이라고 불러라.”

루프스가 유채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유채는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너무나 가까워진 얼굴에 유채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숨결이 가까이 닿았다.

“말해봐라. 말해야 늘지.”

“내가 왜 당신…….”

쪽.

유채의 입술에 루프스의 입술이 닿았다. 유채는 온 힘을 다해서 루프스를 밀어냈다. 유채는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그 바람에 입술연지가 다 번지고 말았다. 루프스는 그것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자 유채는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잠깐, 멈춰요. 뭐하는 짓이에요? 지금 갑자기…….”

“부부끼리 이 정도 닿는 건 가능한 것 아닌가? 그리고 계속 날 당신, 그쪽, 이렇게 부르면 나도 하는 수 없다.”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입을 맞추겠다는 뜻에 유채는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나보고 선택하라고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

루프스는 어깨를 으쓱이고 유채의 허리에 팔을 감아 그녀를 가까이 끌었다. 새삼 인식하고 나니 연인과 같은 포즈인지라 유채는 당황했다.

“그럼, 갈까?”

유채는 표정이 불퉁해져서는 루프스를 따라 걸었다. 루프스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유채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맞췄다. 이제는 일일이 반응하기도 번거로워서 유채는 그를 잠시 흘겨보기만 했다. 무엇보다 아까 아무 생각 없이 문지른 입술이 더 걱정이었다. 유채가 계속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있자 루프스가 먼저 적당히 쉴 만한 곳을 찾아 그녀를 이끌었다.

“이리 와라.”

카페와 비슷해 보이는 곳이었다. 루프스는 유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서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자비를 잡고 주문을 하러 갔다. 유채는 주변을 돌아보며 여기저기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것을 보곤 감탄했다.

금방 루프스는 돌아온 루프스의 손에는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라.”

루프스는 유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는 손길이 섬세했다. 화장을 정리해 준 후 그는 유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근데, 당신 안 바빠요? 이렇게 매일 놀러 나와도…….”

상체를 길게 뺀 루프스의 입술이 다시 유채의 입술에 닿았다. 유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아 유채는 짜증이 역력한 얼굴로 이를 악물고 물었다.

“안 바빠요, 라이?”

내용과 달리 말투는 정말 딱딱하기 그지없었으나 루프스는 유채가 이름을 불러준 것만으로 좋아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언제부터 성실했다고.”

“당, 아니, 생각보다 성실하잖아요? 정말로 그쪽이 국정운영에 신경을 조금도 쓰지 않는 폭군이었다면, 이렇게 안정적인 체제를 만들지 못했겠지요. 전쟁 피해도 빨리 복구 중이고, 내전 후에 벨라토르를 만든 것도 그렇고……”

“그동안 내가 한 것은 나에 대한 반발을 억누르는 것일 뿐이었지 진정한 통치는 아니었다. 안 하던 짓을 하느라 요새 좀 바빠지기는 했지만 갑자기 성실하게 일하려니 좀도 쑤셔서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럼 어울리지도 않게 왜 갑자기 성실한 척을 하는 건데요?”

“네가 있으니까. 네가 나를 변하게 하고 내 어릴 적 꿈을 찾게 해줘서. 그래서다.”

루프스는 애써 밝게 웃었다. 이렇게 황홀한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이런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밝은 이야기도 좀 해보자. 그러고 보니 나는 내 부인의 애교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여자만 애교를 떨어요? 그, 아니, 라이가 애교를 떨어봐요.”

“내가? 기겁할 텐데?”

“……그건 그러네요.”

루프스는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오른손으로 유채의 머리카락에 붙은 장미 꽃잎을 떼어주었다. 분홍색 꽃잎과 유채의 장밋빛 볼은 잘 어울렸다.

“매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네가 꽃보다 예쁘다.”

“나를 보고 할 말이 예쁘다는 말밖에 없어요?”

“예쁜 것을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인가? 정말 예뻐서 하는 말인데,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라면 말해봐라. 뭐든 해주마, 나의 부인.”

“……됐어요. 그냥 그 말만 들을게요.”

“근데, 정말 그곳에서 고백을 받아본 적이 없나? 그곳의 수컷들은 정말로 동태눈깔들 밖에 없나?”

“여고 출신이라서 주위에 남자들이 없기도 했지만…… 몰라요. 받아본 적 없어요. 애초에 내가 사교성이 좋지는 않거든요.”

점원이 갈린 얼음 위에 지난번 먹었던 차가운 크림을 얹은 접시를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그 옆에 색색의 시럽 병도 놓였는데 꼭 생긴 것이 빙수인 것 같아 유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프스 붉은빛의 시럽을 빙수 위에 뿌리면서 설명했다.

“꽃으로 만든 시럽이다. 이 얼음에 시럽을 뿌려서 같이 먹는 거지.”

루프스는 크림과 시럽이 뿌려진 얼음을 크게 한 숟갈을 떠서 유채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나도 손 있어요.”

“오늘은 부부라고 하지 않았나? 협조 좀 하지?”

유채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려서 루프스가 건넨 것을 받아먹었다. 입안에 차가운 얼음이 사르르 녹으면서 꽃향기가 입안에 퍼졌다. 과하지 않은 단맛과 꽃향기가 마음에 들어서 유채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루프스가 유채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내가 한 번 했으니, 이번에는 네 차례가 아닌가?”

루프스가 제 입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유채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은근히 오글거리고 유치한 것 좋아하는 것 알아요?”

“수컷은 커도 애라고 했다. 그러니 애를 돌보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 번만 해라.”

유채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결국은 루프스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루프스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유채가 먹여준 얼음을 씹어 먹었다.

“이제 끝이에요. 더 이상 이런 오글거리는 것 안 해요!”

“알았다.”

유채는 입술을 쭉 내밀고 빙수를 떠 먹었다.

“근데, 어제 케릭스랑은 잘 해결했어요?”

“잘 해결했다. 나만 이렇게 바쁜 것이 정말로…….”

“하지만 케릭스 씨한테 휴가를 준 것은 라이, 당신이잖아요? 플로서스의 일로.”

루프스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의 속눈썹이 내리깔리며 눈 밑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플로서스는 어떻게 처리했어요?”

“여우 일족에게 넘겼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베니니타스의 가족들이니.”

“당신도 피해자잖아요. 당신은 분하지 않아요?”

“분하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그래도 케릭스의 아버지인 것도 사실이다. 케릭스는 내 충신이며, 얼마 남지 않은 친구이기도 하다. 그를 위해서라도, 플로서스의 처벌은 내가 내릴 수가 없었다. 이런 내가 바보 같은가?”

“그래서 휴가를 주고, 블루벨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해주었으면서 뭐가 억울해서 어제 일을 벌인 거예요?”

“그놈도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야지. 그리고 나도 좀이 쑤시기도 했고.”

이번에는 루프스가 유채에게 물었다.

“너는 왜 케릭스의 눈을 고쳐주지 않았나?”

“케릭스가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케릭스는 이제 한 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다녔다. 그것을 본 유채가 치료를 해주겠다고 해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아무리 아버지의 죄가 엄중했다지만, 아버지를 상처 입힌 불효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계속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고.”

“그놈답군.”

루프스는 낮게 웃었다.

“프레드릭에게 우리 수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수인들의 동물형은 그저 싸울 때 뒤집어쓰는 외피에 불과하며, 지금 내 모습이 원래의 수인의 모습이라는 사실. 그리고 서로 다른 일족끼리 결혼해도 아무런 문제없다는 이야기. 그것이 정말인가?”

“뭐,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왜요?”

빙수를 다 먹자 루프스는 팁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더 이상 땅을 갖지 못해서 손해 보는 군소 일족의 불만을 없애고 싶다. 일을 하나 벌이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프레드릭의 말이 사실이어야 해서.”

루프스는 유채의 어깨를 감싸고 중앙광장으로 나왔다. 한창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중이었고 음악이 광장을 가득 채웠다. 쌍을 이뤄서 춤을 추는 수인들이 많았다. 루프스가 유채의 손에 잡고 광장 중앙으로 들어가려 했다.

“왜 이래요?”

“축제의 꽃은 춤과 음악이라고 누가 그러더군. 함께 한 곡 추지 않겠는가?”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유채의 손을 제 어깨에 짚게 하였다.

“나는 춤 출 줄 몰라요.”

“내가 이끌 테니까 그냥 따라와.”

“발 밟아도 내 책임 아니에요.”

말이 끝나자마자 루프스는 유채에게 발을 밟혔다. 하지만 루프스는 내색하지 않고 유채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그녀를 능숙하게 이끌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굳어 있던 유채는 몇 번을 빙글빙글 돌고 나니 춤을 추는 것이 재미를 붙였는지 꺄르르 웃기도 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빙긋 웃었다.

유채의 검은 머리카락이 넓게 퍼졌다. 루프스는 제 품에 있는 유채를 보았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유채의 얼굴은 생기 넘쳤고 눈이 멀 것처럼 빛났다.

경쾌한 음악이 끝나고 부드러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곧 자정이었다. 루프스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달콤했던 부부 노릇도 이제 곧 끝이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감고 있던 왼손으로 유채의 볼을 감쌌다.

“한 번은 연습이었다고 치면 내가 두 번을 이긴 것이니, 두 번째 소원을 빌어도 되나?”

“뭔데요?”

“저 시계탑이 자정의 종을 칠 때까지 가만히 있어줘. 그것이면 돼.”

“알겠어요. 근데 그건…… 읍.”

루프스는 한 으로 턱을 잡아 들어 올리고 입술 위에 제 것을 맞췄다. 다른 한 손은 유채의 왼손과 꽉 깍지를 끼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약탈적이고 강압적이며 갈급했던 키스와 달리 깃털처럼 부드러운 키스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고 따뜻하고 달콤한 입술을 탐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게 끝이었다. 그가 바란 모든 것이었다. 유채의 웃음을 마음껏 보았고 그녀를 안았고 입을 맞출 수 있었다. 유채에게 행복한 기억을 선사해 줄 수 있었다.

댕. 댕. 댕.

시계탑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저는 유채에게 연인이 될 수 없었다. 유채의 밤과 낮을 차지하는 것은 다른 세상의 이름 모를 수컷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유채는 루프스가 죽을 때까지 그의 비(妃)로 남을 것이다. 그녀의 손에 끼워진 블랑카의 반지는, 비겁하지만 그것을 위한 흔적이었다.

댕. 댕. 댕.

마지막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그의 황홀했던 짧은 결혼도 끝이 났다. 루프스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안녕히. 나의 부인이여, 나의 여왕이여.”

안녕히. 나의 영원한 사랑이여, 나의 영원한 행복이여.

루프스는 붉은 눈을 하고서 저를 올려다보는 유채를 향해서 웃었다. 울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웃었다.

개 수인 궁관 출신인 세드릭은 루프스의 명에 따라 그린 그림을 소중히 품고 알현실로 들어갔다. 피곤한지 눈을 문지르고 있던 루프스는 세드릭에게 손짓을 했다. 세드릭은 완성한 그림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워낙 아름다우신 분이시라, 그림을 그리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루프스는 세드릭이 그려온 그림들을 살폈다. 초상화 속의 아름답지만 약간은 무감정해 보이던 유채와는 다르게 생기가 가득한 모습들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 작게 키득거리는 얼굴, 토라진 얼굴도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만졌다. 이제 유채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유채의 온기와 향기, 촉감은 잊지 않기 위해서 수없이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유채의 얼굴만은 드디어 영원히 남겨둘 수 있었다.

“이건…… 뭔가?”

루프스는 아직 덜 완성된 듯한 그림을 가리켰다. 그 그림에는 어제 축제에서 춤을 추었던 유채와 루프스가 그려져 있었다. 세드릭은 벌벌 떨면서 말했다.

“저……. 카니스 바실리사님께서 부탁을 하셨습니다. 성녀님과 루프스님이 같이 계시는 그림 한 장 그려주실 수 없으시냐고. 그래서 케릭스님의 도움을 받아 축제에 참여하신 두 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주제넘었다면 사죄드립니다.”

“아니다. 잘, 잘했다. 정말. 잘했다.”

루프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루프스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림만 쓸었다.

“미완성된 그림은 완성하여 가져와라. 내가 그 그림에 대한 값은 따로 지불하겠다. 나가봐라. 정말. 잘했다. 그림에 대한 값은 헤나가 줄 것이다.”

루프스는 세드릭이 나가자마자 무너져 내렸다. 그는 저와 유채가 그려진 그림을 품고 오열했다. 죽어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유채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요 며칠 간은 정말 행복하면서 동시에 가슴이 문드러지는 나날이었다. 수만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억지로 붙잡는들, 유채는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다. 그는 유채가 행복하기를 원했지만 그녀에게 행복을 줄 수는 없었다.

“사랑한다. 내가 너를 연모해.”

세드릭의 그림에는 루프스가 수없이 꿈꿨던 것이 들어 있었다. 루프스는 손으로 그림을 애잔하게 쓸었다. 이제 되었다. 슬픔도 비참함도 모두 그의 몫이다. 유채가 내려주는 벌이니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저 혼자면 충분하다. 유채는 행복 속에 살아가면 된다.

알현실은 한동안 그의 억눌린 울음소리로 꽉 채워졌다.

* * *

“이제 준비 끝인가?”

유채는 짐을 정리했다. 이곳에 올 때 입고 온 옷과 휴대폰을 찾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 외에도 갖고 갈 물건들이 많았다. 유채는 선물받은 것들 중에 마음에 들었던 장신구를 몇 개 챙겼다. 준비를 다 마친 후에는 왼손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유채는 문을 열었다. 궁녀 하나가 쟁반에 옷과 가방 등을 챙겨 들고 서 있었다. 유채의 눈이 커졌다.

“루프스님께서 이 옷을 입고 정원으로 나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어요.”

유채는 궁녀가 전해준 옷을 받았다. 상의는 제 것이 아니었지만 바지는 분명 제 청바지였다. 코트와 신발까지 그대로였다. 유채는 오랜만에 청바지를 입고 워커를 신었다. 코트 주머니에는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보관을 잘한 것인지 어디 망가진 구석도 없이 멀쩡한 것 같았다.

유채는 챙겨놓은 짐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늑대로 변한 루프스가 엎드려 있었다. 그는 유채가 나오는 것을 보고 제 등을 가리켰다.

[타라.]

유채는 루프스의 등에 탔다. 루프스는 아무 말 없이 유채를 태우고 어딘가로 달렸다. 그는 한참을 달린 후에야 멈춰 섰고 유채는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유채꽃?”

철지난 유채꽃이 들판에 가득 피어 있었다. 루프스는 몸을 굽혀서 유채가 편하게 내리게 해주었다.

이곳은 프레드릭에게 부탁하여 준비한 그의 선물이었다. 프레드릭은 일정 지역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마법이 담긴 마력석을 만들어주었다. 지금 이 때 아닌 유채꽃밭은 그 마법석의 힘이었다. 유채가 유채꽃밭에 정신이 팔려 있을 동안 루프스는 위르형으로 돌아왔다. “당신?”

유채는 루프스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누가 봐도 공을 들여서 꾸민 모습이었다. 항상 대충 풀어헤치고 다니던 은발은 앞머리를 뒤로 넘겨서 단정하게 정리했고 예복은 답답해서 싫다던 사람이 금실로 수놓은, 정말 답답해 보이는 예복을 단정하게 입었다. 루프스는 마지막만큼은 유채에게 가장 멋있는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다. 루프스는 유채에게 다가가 그녀의 목 뒤로 손을 뻗었다.

유채의 목에 채워져 있던 파렌티아가 딸깍 소리와 함께 드디어 풀렸다. 이제 유채를 이 땅에 붙잡을 수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유채를 이어주던 끈도 완전히 사라졌다.

루프스는 품속에서 지난번에 산, 자수정 귀걸이와 한 세트인 목걸이를 꺼냈다. 파렌티아가 사라진 자리를 자수정이 달린 백금 목걸이가 차지했다. 눈물을 참기 위해서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던 루프스가 유채의 검은 눈을 마주했다.

“유채.”

제정신인 유채에게는 처음으로 부르는 이름이었다. 가슴이 아파왔다. 루프스는 주먹을 쥐었다. 여기서 울면 안 된다. 끝까지 웃는 모습으로 보내야 한다. 루프스는 연습했던 대로 입꼬리에 힘을 주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가라.”

가지 말라는 말을 억누르는 것이 힘들었다.

“힘들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그 어떤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정말 미안하다. 평생 네게 지은 죄를 속죄하며 살아가겠다. 정말 미안하다.”

“…….”

“진심으로, 내 마음을 다 바쳐서 너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돌아가서 행복해져라. 나 같은 놈 만나지 말고, 나보다 더 잘난 놈을 만나서 행복해라.”

루프스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잘 가라. 그리고 행복해라.”

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채꽃 향이 확 풍기는 가운데 내내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유채의 입술이 열렸다.

“역시 그 늑대가 당신이었네요. 난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당신한테 작전을 다 털어놓은 거네요.”

루프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유채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모르는 척하지 마요. 내가 언제 떠날 거라고, 시간을 미리 알려준 것은 그 늑대밖에 없어요. 당신이 내가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나 했는데, 그 늑대가 당신이었네요.”

“속일 생각은 없었다. 그냥, 나는 너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어린 늑대라 생각해서 정을 주는 것 같아서……. 나란 것을 알렸다가는 네가 나를 더 경멸할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다. 속여서 미안하다.”

“난 당신이 가지 말라고 매달릴 줄 알았는데요.”

루프스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켰다.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수없이 자신에게 속삭인 뒤에야 루프스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유채의 질문에 되물었다.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을 것인가?”

유채를 똑바로 바라보는 루프스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슬픈 피에로처럼 그의 얼굴은 눈물을 참으려는 노력과 웃으려는 노력이 범벅이 되어서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지 않나? 너는 갈 것이다. 내가 네 발치에 엎드려 애원을 해도 너는 갈 것이지 않나. 이곳에 남으면 너는 행복해질 수 없겠지.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니, 가라. 나는 여기 남아서 살아가겠다. 부디 내가 너를 기억하는 것만큼은 허락해 주어라. 내가 여기서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만큼은 허락해 줘라. 그것이면 된다. 나는 너에게 받은 것이 많아서 이것이면 된다. 그러니, 뒤돌아보지 말고 잘 가거라. 이 말밖에 해줄 수 없어서, 이 이상의 것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

유채는 루프스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다가 주먹 쥔 그의 왼손을 잡아서 손바닥을 펼치게 했다. 그리고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그 위에 내려놓았다. 루프스의 청회색의 눈이 흔들렸다.

유채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루프스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이내 그의 눈빛이 번쩍이더니, 루프스는 유채를 거칠게 돌려세웠다.

“가져가.”

“싫어요.”

루프스가 간절하게 매달리는데도 유채는 팔을 비틀면서 그를 피했다.

“가져가라고!”

실랑이 끝에 루프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루프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는지 흐르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젠장할! 빌어먹을!”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은 울어버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앞에 무너졌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제발, 가져가.”

루프스는 울음 섞인 애원을 토해내었다. 유채꽃이 바람과 한 남자의 진득한 울음소리에 흔들렸다.

“왜, 왜……. 너는 나에게만 이렇게 잔인한가? 왜, 나에게만…….”

루프스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나에게만 잔인해…….”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붙잡고 반지를 쥐여주었다.

“그냥 가지고만 가. 팔아도 괜찮고, 버려도 괜찮다. 그러니 가지고만 가. 제발.”

어머니가 사랑하는 암컷에게 주라고 한 소중한 물건이었다. 늑대의 일생에 한 번 찾아오는 사랑에게 그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음을 알 수 있게. 네가 없어도 네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 내 곁에서 살아 숨 쉬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게.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아. 그냥 가져가.”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절박하게 잡았다. 물에 젖은 청회색의 눈이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기서 평생 괴로워하겠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어다오. 이것만은 가져가.”

그렇게 애원했는데도 유채는 결국 루프스의 손에 다시 반지를 돌려주었다. 절망한 루프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반지만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까지 외면당하는 이 비참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봐요.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요.”

유채가 약간은 안쓰러운 듯한, 그리고 묘하게 장난기가 섞인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유채는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내가 셀레네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알아요?”

유채는 셀레네에게 소원을 빌었던 때를 떠올렸다.

“내 소원은 당신이 내 소원 백 개를 들어주는 거예요? 어때요 아주 쉽죠?”

“뭐?”

셀레네는 듣도 보도 못한 소원에 경악해서 눈을 찌푸렸다.

“왜요? 내가 엄청 생각하고 도 생각해서 그래도 숫자를 낮춘 건데? 원래는 한 천 개쯤 들어달라고 하려다가, 당신이 내 목숨 구해준 것도 있고 해서 에누리해서 백 개로 줄인 거라고요.”

셀레네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표정으로 유채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통쾌한 듯이 하하하 웃었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동화를 읽을 때마다 항상 하던 생각이었다. 왜 동화 속의 주인공들은 딱 정해진 숫자의 소원만으로 만족했을까? 소원 숫자를 늘려달라고 빌면 그만큼 소원을 더 빌 수 있는 것 아닌가? 유채는 동화 속 주인공들을 대신해 소원을 빌었다. 셀레네의 표정이 볼만해진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왜요? 안 돼요?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 건 그쪽이잖아요? 생각해 봐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나를 살려준 것은 고맙지만, 당신은 나를 살려주고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잖아요. 내가 여기서 죽을 뻔한 게 대체 몇 번인데?”

“하나만 말해주자면, 내가 네 소원을 백 가지나 들어준다면, 나는 신의 자리에서 박탈당하고 소멸당할 것이다.”

“음…… 그건 문제네요. 나 때문에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싫어요.”

“그러니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을 말해.”

“좋아요. 인심 좀 더 쓰지 뭐. 오십 개.”

“안 된다.”

“아, 진짜 쩨쩨하네. 열 개”

“안 된다.”

“다섯 개!”

셀레네가 계속 고개를 흔들자 유채는 머리끝까지 짜증이 치밀어 오른 표정으로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였다.

“세 개. 나도 더 이상은 안 물러나요. 그러니까 당신이 포기해요.”

셀레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 정도만 해도 다행이었다. 셀레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유채는 소원의 수를 늘린다는 목적을 이루었기에 만족했다.

“그래서 무슨 소원을 빌 거냐?”

“첫째, 우리 언니, 부작용 없이 완치할 수 있게 해줘요.”

골수이식을 받아도 유하가 버텨낼 수 있을지 유채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일이 잘못되어서 부작용이라도 발생하면 더 큰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셀레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의 신인 그녀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이곳 사람들의 동물화 문제를 해결해 줘요. 당신 잘못이니까 당신이 해결하는 문제인 거 아니에요? 안 된다고 하지 마요. 내가 소원으로 빌었으니 신이 개입하면 안 된다는 룰에 어긋나는 건 아니지 않을 거 아녜요.”

“그건 소원으로 듣지 않으마. 내가 해야 할 일이니. 그러니 두 번째 소원을 말해봐라.”

셀레네가 자애롭게 웃자 유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요? 당신은 내 소원을 하나라도 줄여야 이득 아니에요?”

“그것은 너를 위한 소원이 아닌 남을 위한 희생이지 않느냐? 그러니 그것은 소원으로 세지 않으마. 자, 두 번째 소원은 무엇이냐.”

유채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을 오고가게 해줘요. 내가 살던 세상에서 이쪽으로 오고갈 수 있는 능력을 줘요. 그것이면 돼요.”

“꽤나 곤란한 소원을 비는구나. 너는 내가 이 소원을 이루어주면 내가 고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겠지?”

“당신이 말한 세계의 법칙이라는 걸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 자체가 바로 이 세상의 불순물이더라고요. 그러니 당신은 내가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그것을 해결해야 할 테죠? 여기서 만난 인연들을 끊어내지 않을 수 있고, 내가 고생한 만큼 앞으로 당신이 고생하게 될 테니 이게 두 번째 소원이에요.”

유채라는 이물질이 이 세상에 들어올 때마다 셀레네는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유채가 생각해 낸, 셀레네를 고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또한 이곳에서 얻은 인연을 놓지 않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동물화 관련 일이 쉽게 되겠구나.”

셀레네는 유채의 이마에 집게손가락을 가져갔다. 셀레네의 손가락에서 생긴 빛은 유채에게 흡수되었다.

“이곳에서 안정적으로 머무르고 싶다면 내 힘이 필요하지. 그래서 너에게 내 힘을 주었다. 다음번에 돌아올 때는 네 이마에 내가 선택한 성녀라는 뜻에 성흔(聖痕)이 생길 것이다. 권능보다 강력하지는 않지만, 성력(聖力)도 쓸 수 있게 해주마. 나의 대리인이 되어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렴. 다음번에 돌아올 때에는 그 성흔으로 그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 부상이네요. 궁금한데, 내가 얻은 능력을 내 세상에 돌아가서도 이용할 수 있나요?”

“너의 세상은 나의 창조주인 위대한 그분이시지. 내 신격이 아무리 높다 해도 그분에겐 미치지 못한다. 내가 네게 준 능력은 그분의 세상에서는 이용할 수가 없다.”

“아쉽네요.”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유채에게 셀레네가 물었다.

“이니투스의 자손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네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어찌되었든 마주칠 확률이 높을 텐데…… 원한다면 네 존재를 감춰줄 수도 있다.”

“그건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유채는 주먹을 쥐었다.

“아직 소원 하나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지요?”

셀레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유채는 무릎을 꿇은 루프스의 앞에 앉았다. 눈물이 범벅인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노라니 루프스가 유채의 몸을 끌어안았다. 유채는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서 그의 등을 쓸었다. 루프스의 등이 들썩였다.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차피 이곳으로 돌아오기로 결정을 했지만 원한다면 당신을 영원히 피할 수 있으니까. 당신을 이곳에 혼자 버려두고 떠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여줄 수 있었죠.”

유채는 루프스를 버리고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은 깨어 있음에도 자신을 잡지 않았던 그였다. 그의 팔을 고쳐주고 포트리스로 갈 때, 움찔거리는 손끝을 보고 알았다. 그때 그는 분명히 깨어 있었다. 그런데도 잡지 않았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저 남자에게 기회를 주어도 될지.

유채는 도박을 했다.

* * *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유채 양.”

깊은 잠에서 깨어난 후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니던 때 케릭스가 찾아왔었다. 유채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눈을 고쳐 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라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케릭스는 유채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 남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왜요? 당신의 주군이 나를 사랑해서? 나보고 그를 책임지라고 하는 거예요?”

“루프스님은 유채님이 리와인더의 조각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알아요. 그것을 바다에 버리라고 명까지 내려놨더라고요. 나도 다 들었어요. 그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죠. 그 사람은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게 집착하는 것뿐이에요.”

“루프스님은 그것을 찾아서 유채 양에게 줄 생각이었습니다. 받으면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것을 찾아 당신께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그만큼 진심이셨습디다.”

“거짓말.”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루프스님의 진심만큼은 매도하지 말아주십시오. 유채 양이 쓰러져 있을 때, 잠도 줄여가면서 간호하신 분이 루프스님입니다. 떠나시더라도, 부디 그분의 진심만큼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위선이에요.”

“저는 루프스님의 과오에 대해서 무어라 변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처벌은 유채 양이 내리는 것이니까요. 벌을 주셔도 됩니다. 하지만, 떠나실 것이라면 잔인할 정도로 밀어내 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유채는 그날 이후로 고민에 빠졌다. 루프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블루벨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인지라 오로지 혼자서만 생각하며 고민에 고민을 쌓았다.

심란한 마음에 정원을 거닐던 중 은빛 털의 새끼 늑대를 보았다. 유채는 반갑게 늑대에게 다가갔다. 안 본 새 늑대는 많이 자란 것인지 벌써 중형견만 한 크기가 되어 있었다. 유채는 늑대를 반가워하다가 우연히 기시감을 느꼈다.

유채는 수인이 아닌지라 당연하게도 수인의 동물형과 그냥 동물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일 수인이라 해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유채는 찬찬히 늑대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은빛 털의 늑대는 루프스 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유채는 설마 했다. 블루벨이 그랬던 것처럼 루프스가 몸집을 줄인다면 이렇게 보일 것도 같았다.

그때, 유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유채가 리와인더의 조각에 대해 입 밖에 낸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이 늑대도 있었다. 만일 루프스가 이 늑대라면, 그가 어떻게 자신이 조각을 찾는 것을 알아냈느지 설명이 되는 것이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늑대가 루프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만일 정말로 루프스라면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다.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셀레네는 유채가 준비하는 대로, 원하는 때에 언제 어디서든 상관없이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유채는 충동적으로 늑대에게 언제 떠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루프스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살폈다.

첫 번째 날, 루프스는 유채를 풍광이 아름다운 바닷가로 그녀를 데려갔다. 예상했던 상황과 너무나도 달라서 유채는 제가 잘못 착각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루프스라면 제가 떠난다고 하면 묶어놓지 못해 안달을 할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예상이 어긋났다는 데에 괜히 민망해져서 유채는 처음 마시는 술을 물 마시듯 들이켜다가 취해서 온갖 주사란 주사를 다 부리고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제가 루프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놀랐다. 동시에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기억이 났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일어나질 못했다.

루프스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는데 안겨 있는 상태에서 생각하기에도 그의 자세가 굉장히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저를 안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일어나야 하는 건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던 중에 유채는 그가 살짝 움직이자 오히려 찔끔해서는 더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아직도 자나?”

루프스는 조심스럽게 저를 안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수인들이 인간보다 빠르다고 해도 동물형으로 변했을 때보다 빠른 것은 아니었다. 늑대로 변하면 훨씬 빨리 갈 수 있을 텐데도 그는 유채가 잠에서 깰까 봐 그 상태로 걷기를 택한 것이다.

그 다음 날은 축제였다. 루프스는 그날도 그는 축제에 데려가 주었다. 제가 돌아가겠다고 했던 것과 관련된 일은 꺼내지도 않았다. 유채는 정말로 그 늑대가 루프스가 아닌가 싶었다.

피곤해서 곯아떨어진 상태로 궁에 돌아왔을 때, 왜 하필 그때 정신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 제 몸을 안아서 침대 위에 눕혀주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코 가까이 술 냄새가 섞인 숨결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움찔할 뻔한 순간 숨결은 금세 멀어졌다.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리고, 루프스는 한참을 그 앞에 서 있는 것 같더니 이내 제 귓가에 속삭이고 방을 나갔다.

“잘 자라. 나쁜 꿈꾸지 말고.”

유채는 루프스가 나가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인간이 뭐하자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은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는 장난을 쳤다. 독수리 일족의 도장을 훔쳐서 도망을 가자고 하질 않나, 시카리우스에게 쫓기면서도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 것인지. 루프스와 벽 사이에 갇혀서 시카리우스를 따돌렸을 때, 장난기 가득한 루프스의 미소에 유채는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저 남자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싶었다. 그때의 그는 한 일족을 지배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스물 중반의 평범한, 조금은 철없어 보이는 남자처럼 보였다. 그에게 닥친 비극이 아니었다면 그는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물가에서 본 그의 등에는 수없이 많은 상처가 있었다. 고아가 된 열세 살 소년이 가혹한 세상을 헤쳐 온 굴곡이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떠나기를 하루 남겨두고, 케릭스의 고향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그는 제게 뜬금없는 소원을 빌었다. 부인이 되어달라니. 그는 정말로 유채가 자신의 부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절정은 자정이 가깝던 중앙광장에서 춤을 출 때였다. 몇 번이나 발을 밟히면서도 그는 웃으면서 춤을 추었다.

“저 시계탑이 자정의 종을 칠 때까지 가만히 있어줘. 그것이면 돼.”

그 말에 온전하게 대답하기도 전에 루프스의 입술이 닿았다. 유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루프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댕. 댕. 댕.

마지막 종이 울리고 약속대로 루프스는 입술을 떼었다.

“안녕히. 나의 부인이여, 나의 여왕이여.”

그때 그는 웃고 있었다.

유채는 심란해졌다. 루프스인지 아닌지 모를 늑대에게 말한 날짜대로 유채는 떠날 채비를 했다. 블루벨에게는 미리 말을 해두었다. 돌아올 거라고 하자 블루벨은 활짝 웃으면서 그렇다면 인사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셀레네에게 빈 소원의 내용을 유채가 가장 먼저 알린 것은 헤르티아였다. 당신이 내게 진 빚은 돌아와서 받겠다고 했다. 대신 돌아오기로 했다는 사실은 루프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헤르티아는 충실하게 제 비밀을 지켜주었다

* * *

“나는 내가 떠난다는 걸 알게 되면 당신이 나를 잠재워서라도 붙잡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유채는 제 가슴에 안겨서 울고 있는 루프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프스는 어린아이가 제 엄마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유채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솔직히, 이제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유채는 루프스의 얼굴을 제 가슴에서 떼어내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루프스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 유채는 철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채꽃밭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거 당신이 만든 거예요?”

“……프레드릭의 도움을 받았다.”

루프스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전히 그는 고개를 들지를 못했다. 그의 눈물은 유채의 무릎에 떨어졌다.

“네가 좋아하는 꽃이 아니냐. 그러니까, 이곳에서 마지막에 보는 것이 이 꽃이기를 바랐다.”

“당신은 내가 왜 그렇게 좋아요? 난 당신을 다치게 하기도 했고, 당신에게 고맙다고 말한 적도 없고, 오히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악담까지 했었는데…….”

“말하지 않았나. 너라서 그냥 좋은 거라고. 소중한 이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네가 좋았다고, 나는 하지 못한 것을 하고자 하는 너를 동경했다고.”

루프스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니, 가서 행복해라. 나는 여기서 네 행복을 바라겠다.”

“내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면서요?”

“그것보다 네가 불행한 것이 더 싫다. 네 행복은 여기에 없고 나는 너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 네가 불행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내가 불행해지는 것이 낫다. 그러니, 가라. 나는 괜찮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따라갈 수 있다면 따라가고 싶고 붙잡을 수 있다면 붙잡고 싶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볼을 쓸었다. 눈물 젖은 입술이 유채의 입술의 나비처럼 붙었다 떨어졌다.

“난 이것이면 되었다. 그러니, 돌아가서 행복해져라.”

유채는 이제 결정을 내렸다. 그녀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당신에게 기회를 줄게요.”

만나지 않으려면 방법은 많았다.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유채는 그의 진심을 보았다. 저를 잡지 않고 보내주려 한 노력에 마음이 움직였다.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깊고 진심인지는 알 것 같아요.”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마주잡으며 미소 지었다. 루프스가 사랑하는 그 미소였다.

“난 다시 돌아올 거예요. 여신의 말로는 내 세계와 당신 세계 사이의 시간의 비틀림을 해결해야 해서 좀 시간이 걸릴 거라고 하더라고요. 내 세계에서는 짧은 시간이라도 당신의 세계에서는 긴 시간이 될지도 모른대요. 하지만 난 돌아올 거예요. 당신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거짓말.

루프스는 유채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거짓말이 황홀해서 그대로 믿어버리고 싶어졌다. 그 거짓말을 믿고 죽을 때까지 유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을 기다리느라 가슴이 졸아서 없어질지라도 영영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그리워하며 심장이 타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루프스는 유채가 제게 남겨준 자비에 감사했다.

“그러니까, 내가 다시 이곳에 돌아오면, 그때 힘껏 나를 유혹해 봐요. 하나 알려주자면 나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만큼 자상한 남자를 좋아해요.”

유채는 루프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루프스는 제 볼에 닿는 유채의 손길에 눈을 감고 그것을 느꼈다.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와서 당신이 날 어떻게 유혹하는지 볼게요. 내가 그 유혹에 넘어가면 그때, 이 반지 받을게요. 그러니까 잘 가지고 있어요.”

유채는 루프스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눈을 뜬 루프스는 환하게 웃고 있는 유채의 얼굴을 머릿속 가득 담았다.

“돌아올게요.”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나?”

“뭔데요?”

“잠시만 가만히 있어.”

루프스가 유채의 얼굴을 감싸고 짧지만 부드러운 키스를 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것이면 되었다.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유채를 그리워하며 이 꽃밭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하염없이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온기와 촉감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녀의 목덜미에 제 볼을 비볐다. 이내 그녀에게서 떨어진 루프스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유채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꽃밭에 가운데에 거대한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유채는 몸을 일으켰다. 루프스는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언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잘 지내요.”

“잘 가라. 기다리고 있겠다.”

해를 사랑한 해바라기처럼 평생을 기다릴 것이다. 이것이 유채의 거짓말이라도 그는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기다릴 것이다.

“잘 있어요.”

유채가 빛기둥 사이로 사라졌다. 그녀의 머리카락마저 빛기둥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본 루프스는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앞으로 달려갔다. 손끝에 머리카락이 닿기도 전에 유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프레드릭의 마법도 사라졌다. 유채꽃은 지고 다시 푸른 벌판만이 펼쳐져 있었다. 유채도 유채꽃도 모두 그가 만들어낸 환상 같았다. 루프스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 어디에도 없는 유채의 흔적을 찾았다. 미약하게 남은 꽃향기에 섞인 유채의 체향을 찾았다.

“기다리겠다. 죽어서도, 너를 기다리겠다.”

루프스는 블랑카의 반지를 손에 꼭 쥔 채로, 유채 앞에서 다 내뱉지 못한 울음을 토했다. 루프스는 그녀의 자비에 감사했다.

“사랑한다.”

아마 평생을 다 바쳐서 기다려도 유채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유채와 헤어진 이곳이 제 무덤이 될 것이다. 땅에 묻혀 차게 식은 육신으로라도 이곳에서 유채를 기다릴 것이다. 혼자여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봄마다 유채의 이름을 가진, 유채를 닮은 꽃이 피어서 그의 사랑을 위로하고 그의 기다림을 응원할 것이다.

“네가 내가 준 형벌이 기다림이라면, 나는 이곳에서 너를 영원히 기다리겠다.”

만일 신의 자비가 있다면 죽어서 영혼이 되어 유채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는 영혼의 소멸이라는 영원한 죽음이 찾아와도 상관이 없었다.

“기다리겠다. 기다릴 테니까, ……돌아와.”

루프스는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벌판에서 읊조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기다림의 증표와 황홀한 기다림이었다. 바람이 그를 위로하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루프스는 눈을 감았다. 바람에 유채의 향이 섞여왔다.

“평생을 너만 그리며 살아가겠다. 그러니, 너는 내가 사랑하는 마레 위르답게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행복해라.”

그의 조용한 고백만이 들판에 울려 퍼졌다.

* * *

유하는 초췌한 꼴로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손에는 오늘에서야 나온 유채의 수능성적표가 들려 있었다. 아빠는 엄마와 결혼하면서 의절했던 할머니까지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아들을 잘 키우겠다는 억척스러운 정신으로 엄청난 돈을 번 사람이었고 나름 높은 곳과도 연줄이 있었다. 아직도 엄마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는 할머니이지만, 그래도 손녀가 사라졌다는 말에 나서주었다. 할머니 덕분에 경찰은 이미 포기하려고 했던 사건을 이제까지 붙잡고 흔적을 찾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CCTV는 모조리 뒤져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채라고 의심되는 사람만 보여도 득달같이 달려갔지만 모두 아니었다. 유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엊그제 경찰이 전해온 말은 부모님을 무너뜨렸다.

【‘유채 양이 사라진 시점에 나타난 검은 봉고차가 하나 있었습니다. 성매매를 위한 인신매매의 일종으로 보고 수사 방향을 바꿀 예정입니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실신을 했다. 깨어나서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지금 유채가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 고초를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경찰들의 말 믿고 싶지 않았지만, 유채가 살아 있다는 가정 하에 남은 가능성은 그것뿐이었다. 유채가 죽어서 차디찬 땅 아래에 묻혀 있을 것이라는 가정보다는 나았다.

아빠는 생업도 포기하고 경찰을 따라다니거나, 혹여 유흥가에 유채가 있을까 봐 평소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던 곳을 밤낮으로 뒤지고 다녔다.

병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지친 아빠였다. 아빠는 병실로 들어와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채는? 유채는 찾았어?”

“……없어.”

아빠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럽게 말했다. 아빠의 턱밑에는 손질이 되지 않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붙어 있었다. 엄마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유채의 수능 성적표를 아빠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유채 성적 되게 잘 나왔다? 평소보다 점수 많이 올랐어. 유채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잘 나왔어.”

엄마의 눈물이 성적표에 떨어졌다.

“그러니까,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 유채만 돌아오면 되는데…… 돌아오면.”

아빠가 엄마를 끌어안았다. 유하도 눈물을 참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했다. 너무 착한 동생이었다.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던 너무나도 바보같이 착한 동생이었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유채가 얼마나 착하고 얼마나 의젓한지 알았다면 이렇게 대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악한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왜 유채에게 이렇게 가혹한 일이 생긴 것일까.

“우리 유채에게 해준 게 없는데, 엄마라고 뭐 해준 것도 없는데, 알아서 척척 하는 이쁘고 착한 우리 딸이 뭘 잘못했다고…….”

“유채는 살아서 건강하게 돌아올 거야. 경찰들도 찾을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아빠의 목 깊숙한 곳에서도 울음이 끓어올랐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희망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경찰도 이젠 사망 쪽으로 몰고 가려는 입장을 보였다. 아빠가 워낙 강하게 반발을 해서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유채가 뺑소니를 당하고 범인이 시신을 유기한 것이 아닐까 하고 조사를 하고 있었다.

“유채는 돌아와.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딸을 기다리면 되는 거야.”

아빠는 엄마에게 속삭였다. 엄마를 위로하는 말임과 동시에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었다. 유하도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울음을 참느라 유하의 코도 빨갛게 물들었다. 아빠는 유하를 위로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하는 지속적인 항암치료로 몸이 나무젓가락처럼 말라갔다. 골수이식을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목숨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두 딸에게 왜 이런 시련이 생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빠, 난 괜찮아. 그리고 유채도 괜찮을 거야.”

유하는 비쩍 마른 손으로 아빠의 거친 손을 쓸었다. 갑자기 닥쳐온 불행에 가족들은 서로를 의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 일상이었다.

갑자기 병실의 문이 열렸다. 간호사도 어지간해서는 들어오지 않는 깊은 밤중이었다. 무심코 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던 엄마는 너무 놀라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는 다 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아빠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엄마는 두 손을 모으고 통곡을 했다. 유하도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믿을 수 없게도 문 앞에는 유채가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지만 분명히 유채였다. 유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밝게 웃었다.

“내가 많이 늦었지, 언니?”

유채는 치킨과 맥주가 든 봉투를 들어 보였다. 유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채는 빨개진 코를 훌쩍이면서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유채의 말에 벌떡 일어난 엄마가 유채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유채도 그동안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쏟았다. 아빠가 달려와서 유채의 얼굴을 확인했다. 분명히 제 딸이었다. 아빠도 유채를 끌어안고 울었다.

유채는 엄마와 아빠의 품에서 오열했다.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모두 떠오르고 드디어 다시 가족을 만났다는 기쁨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왜 이제 왔어! 왜 이제 와!”

엄마는 유채의 얼굴을 손으로 정신없이 쓸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딸의 온기와 익숙한 촉감에 엄마는 이것이 꿈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무슨 험한 일을 당한 건 아니지?”

유채는 엉엉 우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괜찮아. 엄마는 유채가 돌아왔으면 됐어. 그거면 됐어. 우리 유채가 무사하게 돌아왔으니까 됐어.”

드디어 다시 한 자리에 모인 네 가족이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

“괜찮아, 유채야. 울어서 마음이 풀리면 마음껏 울어. 돌아왔으니까 됐어.”

유채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눈물콧물 흘려서 엉망인 얼굴을 하고서 서로를 바라보곤 기쁨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유채는 눈물을 닦으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되게 많은 일 겪었다. 진짜진짜 꿈 같은 일들이었어. 이거 다 말하려면 하루도 모자랄 거야.”

엄마와 아빠, 언니가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유채는 제가 겪은 일들을 모두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뺑소니를 당해 죽을 뻔했는데 어떤 여신이 저를 굴려먹기 위해서 수인들이 사는 세상에 보냈고, 여우 수인들에게 잡혀서 애완동물로 루프스에게 바쳐졌고, 헥터라는 놈이 겁탈하려 한 것 때문에 한참을 고생하다가 탈출해서 여신을 만나 진상을 들었으며, 내전에 휘말려서 다시 죽을 뻔했고, 그러는 중에 저를 애완동물로 삼았던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았고,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헤임달과 싸워서 이겨서 세상을 구해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그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유채는 눈물을 삼키며 웃었다.

“나중에, 나중에 다 얘기해 줄게.”

유채는 제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기쁨을 만끽하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가 있고 언니가 있는, 원래의 세상에 돌아왔다는 기쁨을 느끼고 싶었다.

“나 돌아왔어.”

유채는 울면서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다시 가족의 곁으로,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유채는 가족을 끌어안았다.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했다.

* * *

이년 뒤.

“프레드릭, 뭘 그렇게 봐?”

레이라가 뒤에서 프레드릭의 목을 끌어안았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팔을 어루만지면서 서류를 보여주었다. 대륙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이제 대륙의 상황도 정리가 거의 끝난 거야?”

“그렇지 뭐. 아르젠은 원래부터 굳건했고, 그 아르젠 아래 베르나도테의 애첩의 아들이 세운 뤼벤이 기틀을 잡았고 그 아래에는 발루아 백작의 사생아 딸이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카롤리안 이란 새로운 가문을 세워서 황가로 삼고 아르망드를 세웠지. 코르테스는 기반을 닦는 중이고.”

“뭐 나라들의 시작이 그리 좋지는 않네.”

레이라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레이라는 이제는 한 나라의 수도가 된 레지아 카푸트(Regia Caput)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 년 전 루프스의 전폭적인 도움 아래에 포트리스는 전염병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인간과 수인 사이의 앙금이 조금은 풀어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세라가 란텔과 함께 탈옥을 한 것이다. 둘은 대륙으로 가 베르나도테 공작을 만났다. 그리고 스티폴로르의 수인들이 반쯤 괴멸되었다고 상황을 과장하여 전해 공작을 스티폴로르로 불러왔다. 세라와 란텔은 운이 좋았다. 유채가 리와인더의 조각을 여신에게 돌려보냈기 때문에 에퀘레우스가 바다의 소용돌이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도테 공작의 군대는 포트리스를 침략했다. 포트리스의 사람들 모두 힘껏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렉스와 프레드릭은 포트리스를 버리고 사람들을 모두 모아 여우 일족의 땅으로 후퇴했다. 베르나도테 공작은 직접 친정을 통해서 전후 처리 중이라 아직 혼란스럽던 미노르 호무스와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라나투스 호무스를 공격했다. 급작스러운 기습에 수인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때 나선 것이 루프스였다. 루프스는 직접 대륙의 군대를 상대하며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베르나도테 공작 측에는 루프스를 제대로 상대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루프스는 포트리스 사람들의 협력을 받아서 공작의 부대를 휩쓸었다. 퇴로를 차단하고 그들 모두를 포로로 잡았다. 친정을 왔던 공작도 잡혔다.

헤임달이 스티폴로르를 집어삼켜 결국은 공작에게 바치려고 했던 것을 알기에 루프스는 그를 직접 심문하고자 했다. 그 사이에 대륙의 세력 구도를 잘 아는 프레드릭은 훗날 뤼벤의 황제로 등극하는, 베르나도테 공작의 사생아, 프란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에게 이곳의 상황을 알려주고 공작의 뒤를 치라고 한 것이다. 베르나도테 공작가는 대륙에 있는 프란츠에게 맡기고 루프스는 느긋하게 공작을 심문했다.

베르나도테 공작은 발루아 백작을 치기 위해서 오를레앙 남작과 결탁하고 있었다. 헤임달에게 약속한 대로 오를레앙 남작에게 복수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 했던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 추국장에 울려 퍼지던 헤임달의 짐승 같은 절규가 생생했다. 공작은 헤임달을 이용해서 프레눔을 얻을 생각뿐이었다.

루프스는 심문을 통해 알아낸 결과를 프레드릭을 통해서 후일 아르망드의 여왕이 되는 카트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의 자리를 노리던 카트린은 아버지를 치고 오를레앙 남작에게 반역의 죄를 물어서 그를 그의 영지민에게 던져 주었다. 이미 많은 영지민들에게 원한을 샀던 오를레앙 남작은 분노한 그들에게 붙잡혀 사지가 잘리고 죽을 때까지 얻어맞다가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오를레앙 남작의 지위는 그의 세 번째 부인의 둘째 아들이 차지했고 그의 형은 카트린 1세의 부군이 되었다.

공작은 루프스에게 헤임달의 죄에 다 털어놓고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줄 테니 자신을 부하로 삼으라며 목숨을 구걸했다. 문제는 공작이 거기서 너무 나아가서 유채를 제게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정착해야 하니 새로운 처가 필요하다며 유채를 자신의 새로운 부인으로 요구했다. 공작의 이용 가능성을 점치던 루프스는 그 말에 불같이 분노하여 공작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공작과 그의 가신들은 처형대에서 목이 잘렸다. 잡힌 포로들은 공작의 처형 후 입장을 결정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들은 루프스의 강함에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기에 얌전히 투항을 결정했다. 그들 모두 죄의 경중에 따라 다른 형량을 받았다.

헤임달은 공작이 자신을 속였다는 데에 절망한 채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에 대한 처벌도 처형으로 결정이 났다. 그러나 그의 처형 날, 병사들은 아사한 헤임달의 시신을 발견했다. 루프스와 하워드 형제, 헤르티아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헤임달에게 가장 비참한 죽음임을 알았다. 제가 했던 일이 모두 무의미한 것이었고 다시 한 번 더 이용당했다는 사실은 그를 미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오빠의 죽음을 들은 헬라는 감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고 알폰소는 끝까지 살겠다고 발악을 하다가 처형장에서 늑대에게 잡아먹혀 죽었다. 세라와 란텔은 전쟁이 끝이 난 뒤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당연하게 포트리스를 점거할 줄 알았던 루프스는 평화적으로 포트리스 사람들에게 땅을 양도했다. 인간들이 루프스를 믿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더불어서 포트리스를 향한 수인들의 여론 역시 돌릴 수 있었다. 대륙의 군대에 밀려 위기 상황에 처한 수인들을 포트리스의 사람들이 도왔다는 점에서 수인들은 그들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두 집단 사이의 앙금이 풀릴 방법이 드디어 나왔다. 수인과 인간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인간들은 스티폴로르에 처음 도착했을 때 수인들에게 저질렀던 악행에 대해서 먼저 사과를 했고 수인들은 자신들의 세력 싸움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포트리스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서로 무고한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보상도 진행되었다.

루프스는 대륙처럼 스티폴로르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기를 원했다. 수인들은 서로간의 자치권이 강해서 연맹 같은 구조였기에 하나의 나라가 되기 힘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그의 계획에 도움이 되었다. 붕괴된 각 일족들은 루프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루프스는 그것을 이용해 쉽게 수인들을 통합할 수 있었다. 물론 자치권을 완전하게 뺏은 것은 아니고 일족의 수장에게 주어지는 권한을 축소했을 뿐이었다.

이 일에는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공작의 투항한 가신들의 도움을 받았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발악하는 그들은 루프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성실하게 그를 도왔다. 그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루프스는 대륙과 비슷한 행정 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대륙 출신 포로들은 그 어떤 특권도 받지 못했지만, 바라는 대로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년, 루프스는 나라의 기틀을 꾸렸다. 군소 일족들은 더 이상 땅이 없다는 설움과 거대 일족의 횡포에 휩쓸리지 않았고 포트리스의 인간들은 더 이상 한정된 자원에 허덕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많이 정리가 된 것 같아, 프레드릭.”

레이라가 프레드릭의 옆에 의자를 놓으며 앉았다. 프레드릭은 루프스의 부탁으로 포트리스의 대표로서 레지아 카푸트에 와 있었다. 모든 편의는 루프스가 보장했다.

헤르티아와 단테는 수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루프스의 부탁으로 각 수인 일족들 간의 갈등을 조율하는 일을 해주었다. 둘은 스티폴로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도왔다. 알렉스는 군대를 편제하면서 포트리스의 최고 사령관 의 지위로 레지아 카푸트에 있었다.

포트리스는 항구를 발전시켰다. 루프스는 슬슬 대륙과 거래를 트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티폴로르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프레눔과 마력석은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루프스는 대륙의 카트린 여왕과 프란츠 황제와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렇지? 아직 차별 문제라든가 행정적인 문제가 많이 있지만, 이 정도면 많이 안정된 셈이야.”

“유채 양은 소식 없어?”

“없네.”

유채는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설명한 것은 오라클라 리네아였다. 그녀는 유채가 신의 사명을 마치고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모두가 리네아의 말을 믿었다. 리네아는 다시 은둔했고 그 뒤로 리네아를 본 사람은 없었다.

“유채 양은 행복할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행복할 거야. 그리고 유채 양은 행복할 자격이 있어.”

“그렇지. 유채 양은 행복할 자격이 있지. 아, 루프스는 어때? 이제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하나?”

프레드릭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루프스는 멀쩡했다. 유채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가장 먼저 전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너무나 멀쩡하게 제 할 일을 했다. 프레드릭은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억지로 멀쩡한 척 가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괜찮겠지. 시간이 약이니까.”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분위기를 반전시킬 요량으로 그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동안 바빴으니, 프레드릭 씨도 이제 쉴 수 있으신가요?”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무릎에 앉아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유혹하는 거야, 레이라?”

“아내를 독수공방시킨 게 무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봐?”

“당신도 포트리스의 일로 바빴잖아.”

레이라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루프스는 레이라를 포트리스 쪽의 벨라토르로 임명했고, 당연히 레이라도 바빠졌다.

“그래서 오늘은 같이 있는 거야?”

레이라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어깨 아래로 옷을 끌어 내리면서 유혹적인 자세를 취했다. 프레드릭은 레이라의 귀여운 유혹에 킥킥 웃으면서 그녀의 콧잔등에 입 맞췄다. 곧이어 입술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레이라는 프레드릭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으아아앙. 으앙.”

하지만 모처럼 부부의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을 방해한 것은 레베카의 울음소리였다. 레이라는 프레드릭을 밀어내곤 얼른 레베카에게 달려갔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레베카는 낮잠에서 깨어나 엄마를 찾다가 넘어진 것이었다. 레이라는 얼른 레베카를 안아 올려서 달랬다. 프레드릭도 딸의 앞에서 재롱을 떨며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했다. 레베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방긋방긋 웃었다.

“레베카, 엄마가 동화책 읽어줄까? 「늑대와 소녀」?”

“「늑대와 소녀」? 그게 뭐야?”

“스티폴로르에 구전으로 돌던 이야기를 동화책으로 냈더라고. 그중에 가장 인기 있는 게 그 이야기야. 동굴에 사는 늑대와 마을에 사는 여자아이의 간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 말이야.”

레이라의 설명에 프레드릭이 갑자기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레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웃어? 물론 내용이 정말 허황되긴 하지만, 아이들에게 읽어주기엔 좋단 말이야. 표현이 되게 참신하고 섬세하던데.”

“그거 누가 쓴 건지 알아?”

“작자미상 아니야?”

“아니. 작가가 있어.”

프레드릭은 한참을 웃다가 레이라가 가져온 동화책을 보곤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를 기다리는 늑대랄까?”

루프스는 유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년이 지났는데 유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프스는 유채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루프스는 평생을 기다릴 것이었다. 제 인생을 다 바쳐서.

그것이 바로 늑대의 사랑이었다.

프레드릭은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게 갠 여름 하늘이 푸르렀다. 오늘은 유채와 루프스가 헤어진 바로 그날이었다.

* * *

“형.”

허리에 비스듬히 검을 차고 검은 예복을 입은 알렉스가 나갈 채비를 하는 루프스를 찾았다. 루프스는 제 옷매무새를 봐주던 궁녀들을 물리고 알렉스를 맞이했다.

“예의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이번 일은 서부 사령관으로 온 것이 아니라 베니니타스의 아들인 프리드 겸 알렉스로 온 것이라서요.”

“너희가 그냥 알렉스와 프레드릭이란 이름을 쓰기로 했을 때 놀란 것이 꽤 오래전 일 같은데.”

“옛날 이름은 너무 어색해서 말이지요. 이름이 무엇이든 우리가 우리 부모님의 아들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요.”

루프스는 다리를 꼬면서 의자에 앉았고 알렉스도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되게 멋있네요. 원래 형이 잘생긴 건 알았지만, 이렇게 가꾸지는 않잖아요. 무슨 일인데요?”

“기분 전환. 나라고 매번 편하게 다니는 건 아니야.”

“아직도 유채 양을 기다리는 것 아닙니까?”

알렉스는 루프스의 침실 한켠에 걸려 있는 유채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성녀의 초상화라고, 알현실에 붙어 있는 것과 똑같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루프스의 목에는 주인 잃은 반지가 걸려 있었다. 알렉스는 루프스가 아직도 유채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유채 양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알렉스는 이만 루프스가 유채를 보내주기를 원했다. 이 상황에 괴로운 것은 그 하나였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온다고 했다.”

루프스는 그렇게 기다리는 것 외에는 살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저 기다렸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어도 유채와 헤어졌던 곳으로 가서 기다렸다. 그 방법 외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라도 몸을 혹사시키지 않으면 그리움이 밀려왔다. 가슴을 누군가 칼로 저미는 것처럼 아파왔다.

“돌아온다고 했어. 블루벨도 그렇게 들었다고 했다.”

루프스는 이따금 블루벨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같이 유채의 추억을 공유할 수인은 블루벨 밖에 없었다. 블루벨은 유채와 있었던 이야기를 조잘조잘 털어놓았다. 그중에는 그가 모르던 이야기도 있었다. 블루벨의 이야기에는 펠릭스 다우스로 끌려온 유채의 고통과 슬픔이 가득했다. 루프스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유채에게 미안해했다. 그렇게 루프스는 유채를 추억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설령 거짓이라 할지라도.”

루프스는 알렉스에게 웃어 보였다. 알렉스는 그것이 루프스의 눈물로 보였다.

“나는 죽어서도 그 아이를 기다릴 것이다. 그것도 나의 선택이야.”

알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가시밭길을 걷기로 선택한 사람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는.

“블루벨 양은, 아니, 이제 콘라르 부인이라 불러야 하나요?”

“너희 마레 위르들은 성(姓)을 왜 이리 중요시 여기는 것인지 모르겠군. 졸지에 그런 귀찮은 것이나 붙이게 됐다.”

“대륙과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케릭스는 자신의 고향의 지명인 콘라르를 성(姓)으로 삼았고 루프스는 하는 수 없이 제 원래 이름을 되찾고 루프스는 성(姓)으로 해서 대륙에 사신을 보냈다.

“케릭스 씨는 깨가 쏟아지나요?”

“말도 마라. 내가 블루벨을 부르기만 하면 득달같이 찾아와서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다. 누가 보면 내가 케릭스 놈의 적으로 보일 정도다.”

루프스는 케릭스와 블루벨의 결혼을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서로 다른 일족 간 혼인을 해도 아무런 문제없음을 알리고 오히려 일족끼리 혼인을 할 경우 동물화의 위험이 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인키디움의 수장이 된 카넬리안은 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종종 괴롭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를 사위로 인정을 해주었다. 새로이 레푸스가 된 카넬리안의 지지와 루프스의 지지로 서로 다른 일족 간에 혼인을 하고 숨었던 이들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덕분에 루프스가 밝힌 동물화 문제의 비밀은 그동안 금기시 되었던 서로 다른 일족 간의 통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있었다.

“동부 사령관인 케릭스랑 좀 잘 지내보지? 매일 너희가 또 싸웠다는 말만 들으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총사령관인 루크레치아도 돌아버리려고 하더군.”

“제가 기억하기론, 저랑 케릭스 형은 원래 사이가 안 좋았어요. 어릴 때도 허구한 날 케릭스 형에게 당해서 울었던 기억이 많은데 플로서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플로서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형제는 부모님을 죽인 플로서스를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힘든 결정이었다. 그들은 플로서스를 죽이려 하기보다는 그가 평생 감옥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를 원했다. 형제가 자신들의 결정을 전하기 위해서 플로서스를 만나러 갔을 때 발견한 것은 목을 매서 자살한 플로서스였다. 플로서스가 남긴 것은 누구에게 보내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라는 쪽지와 아들과 딸에게 남긴 편지뿐이었다.

“원래 그놈이 그랬다. 그때 그놈은 참 거만했지.”

루프스는 알렉스를 위해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알렉스와 루프스는 헤르티아와 단테의 근황에 관해서 떠들었다. 헤르티아는 군소 일족들과 땅을 가진 일족들 사이에 갈등을 조절하고 제 마법을 이용해서 힘든 이들을 돕고 있었다.

“헤르티아 고모 임신했다고 단테 고모부가 전해오더라고요. 아무래도 고모의 나이가 있는지라 당분간은 정착해서 쉬겠다고 하던데요.”

“들었다. 그래서 토스 호무스에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지금 이리로 돌아오는 중일 거다.”

둘은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할 일이 있다면서 알렉스가 먼저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루프스는 유채의 초상화를 보고 섰다. 손가락으로 유채의 볼을 쓸었다. 이 끝에 부드러운 살결이 닿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는데 현실은 우둘투둘한 천과 물감의 촉감이었다.

“잘 지내나?”

루프스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는 초상화 속 유채에게 말을 걸었다.

“그곳은 어떤가? 여기는 날씨가 많이 덥다. 바람 습기가 가득 차 있어서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날 정도로 더워. 그곳은 어떤가? 더운가, 아니면 추운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루프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녀가 나타나서 대답해 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희망에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블루벨이 말하기를 비를 좋아한다던데, 나는 비에 관해서 좋지 않은 추억만 안겨준 것 같다. 그곳에는 비가 오는가?”

하나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얼굴은 그림을 남겨두어 언제든 볼 수 있는데,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것이었다. 목소리, 촉감, 향기, 무엇 하나 잊고 싶은 것이 없었는데, 희미해져 가는 것들이 있었다.

“……행복한가?”

루프스의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당연히 행복하겠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보내주었는데, 당연히 행복하겠지. 그토록 그리던 가족들 곁에서 행복하겠지.”

루프스는 유채의 입술을 쓸었다.

“좋은 수컷은 만났나? 내가 질투할 만큼 잘생기고 착하고 다정하고 나보다 잘난 수컷을 만났나?”

루프스는 유채의 입술에 입을 맞춘 뒤에 그림에 이마를 기대었다.

“나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매일이 바쁘다. 나를 찾는 이들도 많고, 대륙과 교류를 결정하고 마레 위르와 수인들 사이를 조절하느라 바빠. 그래서 그런지 너를 덜 떠올려서 덜 괴롭다.”

거짓말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찾아오는 기억에 루프스는 바보가 되었다. 그는 항상 주위를 돌아보면서 유채의 흔적을 찾았다. 기대하고 절망하는 것의 반복이었지만, 루프스는 그럼에도 기대를 품고 살아갔다. 유채의 모습이 꿈에서라도 보이면 그날은 잠을 설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루프스는 조금씩 그리움에 말라가고 있었다.

“언제가 돼야 이 그리움을 참을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아프기만 해. 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저 괴롭기만 해.”

루프스는 다시 똑바로 서서 초상화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아름다운 유채를 보면서 웃었다.

“그럼에도 네가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면 참을 만하다. 그러니 나는 괜찮아. 너만 행복하다면 나는 괜찮다.”

루프스는 애잔하게 유채의 초상화를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방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내궁 깊숙한 곳, 유채가 쓰던 방이었다. 문을 열 그 방은 유채가 사용하던 때와 하나 다름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루프스의 명으로 이 방은 매일 먼지를 터는 정도의 청소만 되고 정도였다.

벽에는 세드릭이 그린 유채의 생생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루프스는 그 그림들을 한참 쳐다보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 위에는 유채의 머리카락이 담긴 상자가 놓여 있었다. 루프스는 상자를 열어 이제는 만지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눈을 감으면 그녀는 항상 제 앞에 등을 지고 앉아 있었다. 웃고 있을까, 아니면 불퉁스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루프스는 그녀의 표정을 상상했다.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의 촉감은 유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루프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눈을 떴다,

“젠장.”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눈을 뜨면 그녀가 있기를 바랐다. 혹시나 기억 속에서 조금이라도 흐려질까 봐 하루에도 몇 번을 이 방에 찾아오는지 몰랐다. 유채의 웃는 표정이 어땠고 삐친 듯한 표정이 어땠는지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는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자꾸만 기억 속에서 유채가 흐릿해져 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루프스님.”

헤나가 찾으러 오자 루프스는 애써 멀쩡한 척을 하며 그녀를 보았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 급한 일은 알렉스나 프레드릭에게 말해서 처리하라.”

루프스는 헤나를 지나쳐서 궁을 나왔다.

* * *

“이것도 매번하니 이제는 실패하지도 않는군.”

루프스는 프레드릭의 힘이 담긴 마력석을 이용해서 들판에 유채꽃을 피웠다. 유채가 돌아온다면 제일 처음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었다. 루프스는 유채꽃을 활짝 피워놓은 다음에 그 사이에 앉았다. 혹여나 유채가 돌아온다면 초췌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오늘도 예전처럼 잔뜩 멋을 부렸다. 그는 목에 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벌써 이 년이구나.”

유채가 떠난 것이 이 년 전 오늘이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떠났던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시간을 낼 수 있을 때마다 이곳에 왔다. 매번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낙담하고 돌아가면서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떨어졌다. 뙤약볕 아래서 그늘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이 힘들 만도 한데 루프스는 돌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오지 않는구나.”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갔다. 허탈한 듯 중얼거리는 그는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루프스는 두 손을 들어서 얼굴을 묻었다.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었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유채가 돌아온다는 그 거짓말이 그를 옭아매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오지 않을까, 내일은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만 하며 루프스는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태양이 사라지고 달이 떴다. 루프스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

루프스는 답을 해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루프스는 마력석을 회수하기 위해 뒤돌아섰다. 그때였다.

“저기요? 거기 키 큰 아저씨.”

너무나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루프스는 몸을 굳혔다.

환청이다. 분명히 환청일 것이다. 루프스를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어깨를 딱딱하게 굳힌 채로 목소리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이봐요! 내 말 안 들려요! 나 짐 많단 말이에요! 나 혼자 여기서 어떻게 가라고!”

루프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환청인지 실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걸 믿고 뒤돌아섰다가 다시 실망하게 되면 이제는 도저히 마음을 추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루프스는 망설였다.

꿈에서 유채는 제 앞에서 서 있었고 제가 끌어안으면 유채는 항상 연기처럼 사라졌다. 허허벌판에 혼자 남는 것은 항상 자신이었다. 그렇게 꿈에서 깨면 그는 유채가 없다는 사실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에 빠졌다.

“이 아저씨가! 아저씨라 불렀다고 지금 그러는 거예요?”

바퀴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라이!”

루프스는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급하게 뒤를 돌았다. 루프스는 순간 얼어버렸다. 저 앞에 유채가 보였다. 제가 기억하는 모습과 달리 구불거리는 단발머리였다. 어깨를 훤히 내보이는 하얀색의 상의에 짧은 치마를 입고 굽이 있는 샌들을 신은 그녀의 한쪽 손에는 바퀴가 달린 커다란 분홍색 가방이 들려 있었다. 유채가 웃었다.

“여기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어요? 나는 아직도 스무 살이에요. 나는 이제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어요. 당신은 몇 살이에요?”

루프스는 생소한 단어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제 앞에서 종알거리는 유채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제 앞에 보이는 유채가 환상인지 아닌지를.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여기랑 내가 사는 세상이랑 같은 날짜로 차원의 문을 열려면 좀 복잡해서 오래 체류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짐을 많이 싸왔거든요? 이거 무겁다고요! 좀 들어달라고 이렇게 열심히 티내고 있는데 계속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을 거예요?”

유채는 분홍색의 캐리어를 끌고 한 걸음 다가갔다. 루프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의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랐다. 이게 환상이라면 평생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를 바랐다. ‘

유채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루프스는 다시 한 걸음 멀어졌다. 그녀와 가까워지면 이 꿈이, 이 환상이 깨어질 것 같아서 도저히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계속 한 걸음씩 멀어지는 루프스에게 다가가기 위해 유채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루프스는 유채에게 달려갔다. 환상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유채를 꽉 끌어안았다. 꿈처럼 유채는 품에 안겨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온기, 이 촉감, 이 향기, 모든 것이 기억하는 그대로 유채였다. 유채도 그를 마주 안아왔다.

환상이 아니다. 진짜 유채였다. 그녀가 돌아왔다. 루프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목이 메어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뱉을 수 없었다. 유채가 돌아온다면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많았는데,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서 연습도 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 돌아왔어요.”

사실은 믿고 있었다. 유채가 돌아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믿었다가 실망할 것이 두려워서 거짓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또 다시 절망하는 것이 두려워서 거짓말이라 부정했다.

그의 기다림의 끝이 다가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팔에 감겨오는 몸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유채는 루프스의 은빛 머리카락을 쓸었다.

“우리 언니 건강해졌어요. 이제 학교도 다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몸을 회복하고 있어요.”

유채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유채의 실종 사건은 할머니의 덕으로 단순 가출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유채는 정시를 준비하고 언니에게 골수이식을 할 준비를 하다가 우연히 엄마에게 등의 상처를 보이고 말았다.

엄마는 기겁했고, 그때가 돼서야 유채는 가족들 앞에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얘기할 수 있었다. 스티폴로르에게 가게 된 계기부터 그곳에서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당연히 가족들은 그 말을 쉬이 믿지 않았다. 가족들은 유채가 큰일을 당해 그것으로 인해 정신이 무너져 내릴까 봐 억지로 다른 이야기를 꾸며 그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유채의 정신과 진료까지 알아볼 정도였다.

유채는 자신이 겪은 일이 모두 사실임을 주장하던 중에 셀레네가 준 성력(聖力)이 갑자기 발휘되었다. 유채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제가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다 말하면 가족들이 충격받을까 봐 일부러 순화해서 말했었는데, 오히려 유채는 성력이 갑자기 발휘된 것에 제일 많이 놀랐다.

유채가 겪었던 일이 가족들의 눈앞에 영화처럼 펼쳐졌다. 셀레네가 말하기를 위대한 그분의 자비라고 했다. 위대한 그분이 유채의 진실을 가족들이 믿게 도와주기 위해서 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모든 일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유채가 말한 내용만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채의 말을 믿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우리 엄마랑 아빠랑 언니랑 내가 여기로 돌아간다고 하니까 엄청 뜯어말리더라고요. 그런 놈이 뭐가 이쁘다고 기회를 주냐고. 우리 아빤 당신을 만난다면 당신 찢어죽일 기세였어요.”

루프스는 유채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나 거기에서도 가끔 당신이 생각났어요. 그쪽이 내 미의 기준을 너무 올려놔서, 남자를 만나도 어지간한 얼굴은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내게 잘해주려는 남자들 도 자꾸 당신이랑 비교하게 되고. 내 일상 속에 이미 당신이 스며들어 있더라고요. 만날 수 없는 먼 차원에 있는 사람인데.”

유채는 루프스의 얼굴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의 청회색의 눈동자가 물에 번질거렸다. 루프스의 목에 걸린 반지가 눈에 띄었다.

“당신이 정말 밉지만, 당신이 가엽고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이 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요. 당신을 용서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것인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신과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유채는 루프스의 눈물을 닦아주며 환히 웃었다.

“그러니까 이제 기회예요. 내 혼란스러운 마음에 들어와서 나를 헤집어놓을 기회. 나를 유혹할 기회.”

유채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할 말을 고르는 듯했다. 루프스는 두근두근해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제부터 노력해 봐요.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니까, 열심히 유혹해 봐요.”

루프스의 고개가 약간 틀어지고 유채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유채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입술만 닿은 채로 루프스는 눈물을 흘렸다. 환상이 아니다. 진짜 유채였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진짜 유채였다.

“평생을 기다리려고 했다. 죽어서도 너를 기다리려고 했다.”

그는 유채의 볼을 감싸 안았다.

“사랑해. 내가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루프스는 목이 메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고맙다. 내게 기회를 주어서.”

루프스는 유채를 끌어안았다. 그의 행복이 지금 팔 안에 안겨 있었다. 그의 세상이 다시 찾아왔다. 너무나 어리석어서 놓칠 뻔했던 행복이었다. 이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루프스는 유채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유채의 손가락이 루프스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나 돌아왔어요.”

루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잡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행복이 돌아왔다.

밤하늘의 별이 유채와 루프스의 재회를 축복했다.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가 둘을 감싸 안았다. 멀고 먼 길을 돌아서 이렇게 다시 만났다.

약속을 지키러 다시 유채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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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엘제베른은 세상에 존재하는 국가 중에 가장 독특한 문화를 지닌 곳이다. 엘제베른의 시작은 대륙에서 스티폴로르 섬으로 이주해 간 수인들이 세운 나라로, 본디 스티폴로르 섬의 수인들은 각 일족들이 각자의 자치권을 가진 연맹국가의 형태였다. 이러한 형태의 존립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대륙의 혼란으로 인해 대륙의 사람들 유입되면서부터였다.

대륙의 이주민들이 스티폴로르의 수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으로 섬의 토착 수인들과 이주민들 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수인들은 가장 강한 일족인 늑대 일족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늑대 일족의 장인 루프스를 왕으로 삼고 그들은 대륙 이주민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이주민들은 포트리스라는 도시를 차지하고 그들에게 대항하였다.

포트리스와 수인들 간의 대치는 코르페네즈 제국의 멸망 이후 벌어진 전쟁만큼 길었다. 대륙 이주민과 수인들의 갈등이 심해지는 와중에 대륙의 아르망드와 뤼벤 접경지역의 신녀 출신의 여인이 스티폴로르에 들어왔고, 여우 일족의 수장인 울페스 베니니타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현명하고 자애로운 라일라의 존재와 그때 마침 대륙 이주민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던 루프스 로보의 덕에 곧 두 세력 사이 화합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베르나도테 공작의 하수인, 헤임달의 공작으로 라일라는 살해당했고 그에 대한 누명을 로보가 쓰게 됨으로써 수인들은 다시 한 번 내전을 겪었다. 내전 이후 이주민들과 수인들 간의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신비로운 소녀가 스티폴로르에 나타난다.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는 그 소녀의 출신에 관한 논쟁이 거세지만, 기록상 그 소녀는 지금까지도 엘제베른의 신성한 신전으로 여겨지는 에클레시아에서 빛기둥과 함께 나타났고 한다.

소녀는 당시 루프스이자 엘제베른의 초대 황제가 된 라이칸 1세의 펠릭스 다우스, 직역하지면 애완동물, 쉽게 말해서는 노예가 된다. 레티티아라는 이름을 얻고 루프스 라이칸의 노예가 된 소녀는 루프스 라이칸의 총애를 받는 위치에 올라선다. 이 소녀의 등장으로 스티폴로르의 운명은 크게 요동치게 된다.

지금까지도 엘제베른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베노르 콩레수스에서 수인 세계를 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벌어진다. 타우루스 헥터가 베노르 콩레수스 도중 레티티아를 겁탈하려던 사건이었다. 분노한 루프스 라이칸은 헥터의 다리를 자르고 스에게 공모한 유력자 토모스의 딸인 젤다를 처형했다. 그로 인해 자존심이 상한 헥터는 다시 내전을 일으켰고 그 내전으로 비롯된 혼란에서 헤임달은 다시 음모를 꾸며 수인들과 인간들을 멸족시키고 스티폴로르를 장악하려했다. 그의 목적은 스티폴로르에 묻혀 있는 막대한 양의 프레눔이었다.

루프스의 노예였던 소녀는 헤임달의 음모로부터 스티폴로르를 지켜내고 동시에 지도상에서 영영 사라질 뻔한 스티폴로르를 구했다고 고대의 역사는 전한다. 엘제베른의 역사서에는 루프스의 노예로 알려진 소녀 레티티아는 사실 셀레네 여신이 수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보낸 신녀 한유채이며, 그녀는 전설로 내려오는 아르젠의 초대 여제인 은가연과 같은 이계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스티폴로르의 무너진 신전인 에클레시아를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을 행한 뒤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뒤 스티폴로르는 놀라운 변혁을 거쳐서 엘제베른이란 나라로 재탄생하게 된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된 엘제베른의 초대 황제는 루프스 라이칸이었고 그 이후로 그의 후손들이 황제의 자리를 이었다.

엘제베른은 유일무이한 수인 국가로 대륙에 비해서 능력에 따라 신분 이동의 기회가 열려 있는 국가였다. 대륙과의 교류로 대륙의 신분제를 도입하기는 하였으나 초대 황제인 라이칸 1세의 이념에 따라서 그 신분제를 고정해 두지는 않았다. 이것이 대륙의 위대한 사상가인 레아 델피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극도의 순혈주의를 고수한 뤼벤과 아르젠이나, 앞의 두 국가보다는 정도가 낮아도 그래도 순혈주의를 고수한 아르망드는 엘제베른을 야만인의 나라라 배척하고 이류 국가로 취급하였다. 특히 뤼벤은 국부로 추대되는 프란츠 1세의 아버지인 베르나도테 공작이 스티폴로르 정벌 과정에서 전사하게 함으로써 엘제베른과 크게 척을 진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 혁명과 전쟁을 거치며 큰 혼란을 겪은 대륙과 달리 엘제베른은 황가가 먼저 권리를 내려놓으면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였고, 그 뒤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현대에 와서는 아르젠을 넘보는 강대국이 되었다.

이 놀라운 성장에는 엘제베른의 기틀을 닦은 라이칸 1세의 노력이 상당하였다. 라이칸 1세는 포트리스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의 융합을 위해서 노력했다. 수인과 인간 사이 차별과 증오범죄를 철저하게 처벌하였고 또한 보다 강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벨라토르와 같은 군사적, 행정적 기구를 설치하여 각 일족의 자치권을 약화시켰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센스를 보여서 라이칸 1세가 세운 군사체제는 후일 아르망드의 대 여제 카산드리아 1세의 정복 전쟁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그리고 가장 먼저 독립을 쟁취한 나라가 될 수 있는 근간을 만들어주었다. 그 외도 당시로는 파격적인 정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현대 국가와 같은 꼼꼼한 호구조사와 철저한 재산조사를 하고 그에 따라 차등을 두어서 세금을 거두었다. 일정 소득 이하의 국민에게는 나라에서 생활을 돕는 구휼제도도 있었다.

라이칸 1세의 업적은 그의 부인인 황후 한유채의 영향이 컸다. 루프스 라이칸의 펠렉스 다우스이며 성녀였던 그 여인이었던 그녀는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스티폴로르에 돌아와 라이칸 1세의 황후가 되었다. 한유채 황후는 최초로 민주주의와 삼권분립 등의 정치체제에 대한 개념을 소개했다. 황후가 소개한 체제는 현대에 적용시킬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 개념이었다. 비록 시대의 한계로 적용될 수는 없었지만, 황후의 주장은 기록으로 남아 후일 엘제베른의 위로부터의 개혁의 기본 토대를 제공하였다.

또한 황후는 엘제베른이 이류 국가 취급을 받을 때도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시기하였던 과학기술을 닦을 수 있었던 체계적인 실험과 검증이라는 법칙을 세웠다. 특히 황후는 약학 분야에서 엄청난 지식을 발휘했는데, 그것이 현재 제약 분야의 강국이 된 엘제베른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인권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고문의 금지, 차별금지법 같은 선진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황후는 교육제도를 정비하여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복지국가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것도 한유채 황후였다. 황후는 황제의 반려라는 한계와 시대의 한계에 부딪쳐 본인이 주장한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제안은 후일 위대한 사상가라 불리는 아르망드의 레아 델피와 니콜라 드 발루아 부부에게 영향을 미쳤고, 근대의 시민 혁명 사상의 토대를 제공했다. 한유채 황후는 엘제베른이 후일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기틀을 닦은 여걸이었다.

신녀가 되었다지만 여성이고 노예였던 그녀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수렴한 라이칸 1세의 결단력과 시대를 앞서간 한유채 황후의 통찰력이 없었다면 현재의 엘제베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이칸 1세와 황후는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젊었을 적 잔혹한 폭군으로 유명했던 라이칸 1세의 노예가 되어 그의 총애를 받고 마침내 그를 성군으로 변화시키고 스티폴로르를 구하고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그와 재회한 황후의 이야기는 이미 수없이 각색되고 영화화되었다. 둘의 로맨틱한 이야기는 뤼벤의 크리스틴 1세와 레온하르트 대공의 이야기와 함께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야기이다.

사실 아직도 한유채 황후의 진위 여부는 많은 말이 오간다. 학계에서는 그녀가 신의 선택을 받은 성녀가 아니라 라이칸 1세가 마레 위르와 수인간의 화합을 보여주기 위해서 상징적인 의미로 들인 황후이며, 노예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그런 신화를 만들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하지만 역사에 남은 수없이 많은 증거와 최근 발표된 유전자 감식의 결과 한유채 황후가 정말로 이계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서서히 힘을 얻고 있다. 수많은 일화와 증거들이 라이칸 1세와 그녀의 사랑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그리고 엘제베른 황실의 미남, 미녀 유전자도 말이다.

……(중략)……

최근 굉장히 놀라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엘제베른의 유명 전래 동화 「늑대와 소녀」의 저자가 라이칸 1세라는 것이다. 역사상 열 손가락에 꼽히는 무인 중 한 사람인 라이칸 1세가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썼다는 것에 학계가 들썩였다. 동굴에 외롭게 살던 늑대가 마을에서 올라온 소녀와 만나 우정을 쌓는다는 내용으로, 소녀가 아파서 동굴에 오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 늑대가 폭풍우를 맞으며 기다리다가 시름시름 앓게 되었고, 병이 나아 자신의 찾아온 소녀를 보고 기뻐하며 영원한 우정을 약속했다는 이 이야기가 라이칸 1세가 황후와 헤어졌던 이 년간의 슬픔을 풀어내는 방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대륙의 역사와 전래 동화의 기원 中 엘제베른 편에서 발췌]

* * *

“유하 선배.”

유하는 자신을 찾아온 후배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녀의 옆에는 제 동기들, 유하에게는 마찬가지로 후배가 되는 남학생 둘이 더 있었다.

“유하 선배, 동생 있으시죠?”

“응? 내 동생은 왜?”

“진짜 여배우 뺨치게 예쁘다고 했잖아. 어지간한 연예인들은 상대도 안 될 거라니까?”

남학생 중 키가 작은 쪽이 큰 쪽에게 말했다. 여자 후배가 유하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지난번에 선배 동생 왔었다면서요. 그때 다들 난리였는데 전 못 봤거든요. 동생 다니는 학교에서도 유명하다면서요? 사진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 돼요?”

“맞아요, 선배. 사진 한 번만 보여줘요.”

유하는 어쩔 수 없단 듯 웃으면서 휴대폰에 있는 유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을 본 키가 큰 남학생이 탄성을 지르며 유하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갔다.

“진짜 선배 동생이에요? 혹시 아이돌 준비해요? 아님 배우? 진짜 예쁘다. 완전 여신이네 여신.”

유하는 단호한 태도로 그에게서 다시 핸드폰을 뺏어왔다.

“아니. 약대 준비하고 있어. 어릴 때 길거리 캐스팅은 몇 번 당해봤는데, 본인이 싫다고 연예인 준비는 하지도 않았어.”

“선배, 저 동생 좀 소개시켜 주면 안 돼요? 진짜 예쁘다. 선배, 저 착한 거 알잖아요. 제가 복학한 선배 엄청 도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만 소개시켜 주시면 안 돼요? 곧 겨울방학이잖아요.”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 유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쓸 수 있는 핑계를 떠올렸다.

“걔 남자친구 있어. 이번 겨울방학 때 남자친구 만나러 외국 가.”

유하가 말하는 것은 루프스였다. 외국도 아니고 심지어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었고 말이다. 유채가 말하기를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고 남자 사람 친구에 가까웠지만, 유하는 후배를 떨쳐 내기 위해 약간의 거짓을 섞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유하는 루프스를 유채의 남자친구, 아니, 남자 사람 친구로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유채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되었는데 그런 놈을 뭐가 예쁘다고 봐준단 말인가. 어찌나 싫은지 유채가 지난여름에 그를 만나러 그쪽으로 넘어가겠다고 할 때 드러누워서 뜯어말릴 정도였었다.

아무리 그가 유채를 사랑하고 이제는 유채를 위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게 되었다지만 그래도 유하는 언니로서 그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약속했으니까 가야 해. 그리고 그 사람 이제 나 못 건드려. 말했잖아, 언니. 난 괜찮아.’】

유하와 마찬가지로 부모님도 유채가 그곳을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아빠는 유채를 따라가고 싶어 했다. 지난여름, 세계의 법칙인가 하는 것 때문에 유채 외에는 차원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아빠는 심하게 절망했다. 그러나 여름이 지난 후 다시 돌아온 유채는 여신이 편법을 써서 가족들을 배려해 주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차원의 틈이 안정되면 가족들도 오고 갈 수 있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이것은 피가 이어진 가족만이 가능한 방법이며 유하는 유채의 골수를 이식받았기 때문에 부모님보다 쉽게 오고갈 수도 있을 거라고도 했다.

아빠는 최근 운동으로 킥복싱을 시작하였는데 그게 아무래도 루프스를 만나게 될 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채는 아빠의 노력에 깔깔 웃어버렸다.

【“아빠. 그 인간이 맞아주기는 할 텐데, 때려봤자 아빠 손만 아플 거야. 내가 해봐서 알아. 차라리 검도 배워.”】

유채는 지난여름 이후 이번 겨울방학에도 그곳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었다. 물론 부모님과 유하는 반대했다.

“남자친구요? 외국인?”

“유럽 여행 갔다가 만났어.”

“에이. 저 소개시켜 주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아냐. 증거 있어.”

유하는 이럴 때 쓰려고 받은 건 아니었지만 유채가 준 루프스의 사진도 보여주었다. 사진으로도 인간이 아닌 티가 좀 나는지라 눈의 형태와 머리카락 색을 보정한 사진이었다.

“세상에. 모델이에요? 아님 배우?”

“CEO야. 이제 서른일걸? 동안이라 좀 어려 보이긴 하더라.”

거짓말은 아니었다. 회사를 경영하는 게 아니라 나라를 경영하는 게 차이이긴 하지만 말이다.

“대박이다. 역시 끼리끼리 노는구나. 진짜 잘 어울리네. 유하 선배, 혼혈이라고 했죠?”

“응. 근데, 나 이만 가봐야겠다. 동생 짐 싸는 거 도와주기로 했거든.”

유하는 핑계를 대고서 후배들을 떨쳤다.

“근데 선배 그 목걸이 어디서 사셨어요? 진짜 예쁘다.”

“이거? 유채 남자친구가 줬어.”

유하는 루프스가 보냈다는 선물들을 유채를 통해서 받았다. 종류도 다양한 것이 건강식품에서부터 귀금속까지, 하나도 귀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 없었다. 그중 마음에 든 것을 착용한 유하였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물론 그런 것으로 그를 못마땅해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진짜요? 대박이다.”

유하는 싱긋 웃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요즘 유채는 행복해 보였다. 루프스와 왕래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유채가 행복하면 그만이었다.

* * *

[유채 21살 루프스 30살]

“좀만 옆으로. 지금 아슬아슬하다고.”

유채는 마치 기수가 말을 재촉하듯이 발로 루프스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루프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옆으로 약간 움직였다. 유채는 휴대폰을 높이 들어 올리고 통화권에 들어갈락 말락 하는 수신 감도를 지켜보았다.

[말로 해라, 말로. 내가 무슨 말도 아니고.]

“왜? 말로 하면 또 말투 가지고 뭐라고 하려고?”

[내가 언제 그랬다고? 네가 도착하자마자 서로 말을 놓자고 할 때도 별말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나 그쪽한테 존대 안 해요. 이제 우리 동등하잖아요? 나이로 핑계 댈 생각 말아요. 그쪽이 나한테 잘못한 게 얼마나 많은데.”】

이 년 만에 돌아온 유채는 삿대질까지 하며 곧바로 말을 놓겠다고 주장했다. 루프스는 말이 편해지면 그녀가 저를 좀 더 편하게 대할 거라 생각했기에 군말 없이 허락했다. 가끔 너무 섣불리 결정을 내렸나 싶기도 했으나, 예상대로 유채가 저를 더 편하게 대하는 것은 확실했기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조금만 상냥하게 말해주면 안 되냐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건 네가 너무 나한테 쌀쌀맞게 말해서 한 소리였다.]

“됐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 움직여 봐.”

유채는 다시 발로 옆구리를 차는 대신에 이번에는 털이 북슬북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프스는 순순히 움직여 주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휴대폰은 통화권에 들지를 못하고 있었다.

셀레네의 배려로 차원의 문이 열리는 지역 근처는 통화권이 되었기 때문에 유채는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이렇게 루프스를 대동하고 나와서 갖은 노력을 다했다. 루프스는 언제 유채가 저를 불러낼지 몰라서 항상 빠른 속도로 일을 끝냈다. 모두가 칭송하는 엘제베른 황제의 빠른 일 처리의 배경은 한 남자의 구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었다.

“아, 근데 그 「늑대와 소녀」당신이 쓴 거야?”

[뭐?]

루프스가 화들짝 놀라서 몸을 뒤틀었다. 그 바람에 아래로 떨어질 뻔한 루프스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루프스가 목 졸리는 소리를 낸 후에야 유채는 미안하다 하곤 바로 팔에 힘을 풀었다.

루프스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연히 잠행을 나갔다가 만난 아이들에게 유채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완전 미화 장난 아니던데, 누가 보면 늑대가 소녀에게 제 순정을 몽땅 바친 것으로 알겠던데? 실제로 소녀는 늑대 때문에 죽을 만큼 괴로워했는데. 방에 갇히고…….”

[그냥…… 내가 너에게 원래 해주었어야 하는 일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누가 뭐랬나? 근데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면서 표현이 장난 아니던데? 동화책에 그런 내용을 실어도 되나? ‘소녀의 아기같이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은 늑대의 혀에 닿으면 사라질 크림 같아 보였다. 소녀의 장밋빛 뺨은 이 세상 그 어떤 색보다 고왔다.’ 너무 외설적인 것 아니야?”

유채는 루프스를 놀릴 요량인지 장난기 섞인 말투로 동화책 내용을 읊었다. 만일 위르형이었다면은 루프스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었다. 루프스는 약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 눈에는 네가 그리 보이고 그렇게 느껴졌다. 살결이 곱고 부드러워서 아기의 것 같고 장밋빛 뺨은 생기가 넘쳐서 화가가 심혈을 다해서 그린 그림을 보는 기분이었다. 미의 여신이 있다면 너라고 생각했다.]

그를 좀 놀리려다가 유채는 되레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에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유채가 아무 말이 없자 루프스는 이번엔 다른 화제로 말을 꺼냈다.

[네 부모님은 지난번에 드린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시던가?]

“음. 엄마랑 언니는 목걸이를 좋아했고, 아빠는 시큰둥하셔서 잘 모르겠네.”

[내가 한번 찾아뵐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리 아빠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긴 하는데.”

[잘됐군. 나는 그놈의 세계의 법칙 때문에 가지 못하니 한번 모시고 와라.]

유채는 루프스의 말에 박장대소를 했다. 유채는 한참을 웃더니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었다.

[왜 그렇게 웃나? 내 말이 우스웠나?]

“아니. 동상이몽이 웃겨서.”

[동상이몽?]

“우리 아빠는 당신 되게 싫어하거든. 그래서 당신을 만나면 손봐주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어. 아마 우리 아빠 만나면 당신 고생깨나 할걸? 어차피 때려봤자 아픈 건 아빠 손이겠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도 내고 싶으신가 봐.”

루프스는 유채의 말에 착잡해졌다. 그는 유채의 가족에게는 한없이 죄인의 신분이었다. 남의 집 귀한 딸을 험하게 대한 죄의 값은 받아야 하기에 그는 그들의 마음을 살 만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유채를 통해서 보냈었다. 루프스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라도 하면 마음이 풀릴 거라 하시던가? 아버님이?]

그렇다면 루프스는 기꺼이 그렇게 해줄 용의가 있었다. 유채는 어쩐지 축 늘어진 것 같은 그의 귀를 내려다보곤 싱긋 웃었다.

유채는 오늘은 날이 아닌가 싶어서 휴대폰을 든 손을 내리곤 루프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자기혐오와 죄책감에 빠져 있던 루프스가 고개를 돌렸다.

[왜?]

“나 그쪽하고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야. 우리는 그냥 친구 사이인데, 벌써 무슨 아버님? 곧 있으면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겠다?”

유채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를 놀렸다.

[친구의 아버지도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다. 내 말이나 선물들은 잘 전했나? 내가 네 개인 이동 수단 역할까지 하며 거의 하인같이 살고 있는 것은 아시나?]

“왜 그렇게 말하면 점수라도 더 받을 것 같아?”

[아니다. 그저 너희 가족의 마음이 편해졌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딸을 괴롭혔던 이가 하인 노릇 하고 있다는 이야기라도 들으면 통쾌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전화통화는 안 하나?]

아직 이곳의 언어로 전화통화라는 말이 없어서 루프스는 약간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말했다. 유채는 루프스의 어설픈 발음에 실실 웃었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점수를 따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루프스는 매 저녁마다 유채에게 한국어를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그는 성실한 학생이고 가르치는 보람이 있어서 유채도 가끔은 가르치는 데 열을 올리게 되었다. 물론 가르침을 빙자해 그를 구박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몰라. 포기했어.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

[좀 더 해보는 것이 어떠나?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실 것 같은데. 다 큰 딸을 늑대 굴에 보내놨는데, 걱정이 없으실 리가…….]

“아.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에 엄마가 그쪽하고 통화하고 싶다고…… 꺅!”

갑자기 루프스가 위르형으로 모습을 바꾸자 유채는 갑작스러운 추락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유채는 밑에 루프스를 깔고 앉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깜짝 놀랐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려다보는 유채의 볼을 부드럽게 감싼 루프스가 다른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부지불식간에 유채는 서로의 코끝이 닿는 거리에서 루프스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뭐가 그리 기쁜 것인지 루프스는 눈을 곱게 접고 있었다.

유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웃는 얼굴은 심장에 그리 좋지 않았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져 민망함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유채의 양 뺨을 감싼 채 루프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나와 통화하고 싶다고 하셨나?”

“응?”

유채는 예상하지 못한 루프스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커튼처럼 아래로 흘러내린 유채의 머리카락을 그가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나와 통화는커녕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싫어하는 분이 아니었나? 그래서 네가 가족들과 통화할 때 나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지 않았나. 그런데 나와 통화하고 싶으시다는 건…….”

루프스는 유채의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 기회가 생긴 것인가 싶은 마음에 물었다. 유채는 낮게 웃으면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우리 엄마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지. 근데 추운데 계속 이렇게 있어야 해?”

루프스는 그녀의 등을 감싸자 유채는 그의 품에 순순히 안겼다. 그의 왼쪽 가슴에 볼을 대고 누웠더니 곧 몸이 따뜻해졌다. 수인들은 보통 인간들보다 체온이 높기에 루프스의 몸은 유채에게 난로나 마찬가지로 따뜻했다.

“내가 안아주마. 겨울엔 내가 따뜻해서 좋다고 하지 않았나.”

“흠. 이건 좋네.”

루프스는 유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다시 만났을 때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짧은 상태였는데 요즘은 다시 기르는 모양인지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짧으나 기나 유채에게는 둘 다 잘 어울렸다.

루프스는 머리카락에 이어 유채의 등도 손으로 쓰다듬었다. 요즘처럼 행복한 때가 없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곤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근데 그 옷 말이다. 다른 옷은 열 벌이든 백 벌이든 만들어줄 테니, 그건 입지 않으면 안 되나?”

루프스는 유채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본래 세상의 옷을 입고 지냈는데 그곳의 옷은 루프스의 기준에서는 너무나 짧았다. 여름에는 어깨를 훤히 드러내는 상의를 입기도 했고 하의의 경우에는 엉덩이만 겨우 가릴 수 있을 것 같은 짧은 바지를 입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나마 겨울이라 좀 나아졌는데 그래도 치마가 짧은 건 마찬가지였다.

“춥다면서, 그 옷은 너무 짧지 않나? 더 따뜻하게 입는 편이 낫지 않겠나?”

“솔직히 말하지. 내가 짧은 치마 입는 게 싫다고.”

“그래, 싫다. 네가 그런 옷을 입고 있으면 수컷들이 얼마나 너를 쳐다보는지는 아나?”

유채도 눈치가 있기에 항상 챙겨 온 옷만 입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름에는 저도 할 말이 있는 것이, 이곳의 옷은 여름에 입기에는 정말 너무나 더웠던 것이다. 유채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그를 노려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게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야? 얼굴이 대륙에 알려진 뒤에 수많은 대륙의 유력가의 여자들이 당신 좋다고 쫓아온다며.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하잖아. 게다가 뭐, 듣기에 나 만나기 이전에는 궁녀들이나 고급 접대부들을 침실로 불렀다며. 그것만으로도 감점인데 지금 겨우 그 정도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루프스는 아차 싶었다. 베르나도테 공작의 일이 끝이 난 뒤에 종전 협상 건으로 대륙에 갔던 일이 있었다. 그때 랑체의 공주, 아르망드의 대공녀, 코르테스의 황녀와 혼담이 오갔다. 당연히 루프스는 제의를 모두 정중히 거절했으나, 랑체의 공주는 첫눈에 반했다 말하며 엘제베른까지 쫓아와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유채의 귀까지 들어간 것이다.

“나는 그 암컷들 얼굴도 기억 안 난다. 지금 내 품에 여신님이 안겨 계신데 그 어떤 암컷들의 얼굴이 생각날까?”

루프스의 아부에 유채는 온몸에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유채가 부르르 떨자 루프스는 유채가 기분을 푼 것인 줄 알고 낮게 웃었다. 유채는 루프스에게 한소리 하기 위해서 그의 멱살을 잡고 잡아당겼다. 그러나 힘 차이가 있는지라 오히려 제가 몸을 가져다 댄 셈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둘은 멈칫했다.

유채는 제가 스스로 한 짓이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굴렸다. 루프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는 유채 쪽으로 고개를 가져다 댔다. 입술이 닿기 바로 직전, 간발의 차이로 유채가 제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루프스의 입술은 유채의 손등에 닿았다.

“말했잖아? 내 허락 없는 입맞춤은 안 된다고.”

유채는 다시 몸을 일으켜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루프스는 유채의 코를 가볍게 잡았다.

“유혹을 해보라고 하면서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나보고 어떻게 유혹하라고.”

“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되면 되지.”

유채는 루프스의 턱을 강아지 다루듯이 간질였다. 그것마저 귀여운지 루프스는 씩 웃고는 그녀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눈이 덮인 벌판에 누워서 유채를 안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나 솔직히 말해도 되나?”

“뭔데?”

루프스의 입술이 유채의 볼에 닿았다.

“이따금씩 말이야 예전의 내가 튀어나오려고 해.”

“뭐?”

유채가 경악하며 루프스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상체를 일으켰다. 루프스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였다. 유채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루프스는 그녀의 뒷머리를 감쌌다.

“같잖은 수컷들이 너만 쳐다보지 않나? 특히 대륙에서 온 놈들이 네 손 한번 잡아보겠다고 하는 꼴이 정말 추잡해서 못 봐주겠더군. 예전 같으면 너를 내궁에 가둬두든지 아니면 그놈들을 죄다 쓸어버렸을 텐데, 이젠 그럴 수도 없고. 타는 건 내 속이지. 너는 태평하게 네 추종자 노릇 하는 수컷들의 낯간지러운 소리나 듣고 있고.”

“이봐요. 그쪽도 나한테 아부 떨지 않나?”

“그놈들하고 나는 분명하게 다르다.”

유채는 루프스의 질투에 킥킥 웃었다. 루프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난 후 놀라 동그래진 그녀의 눈이 귀여워서 루프스는 유채를 제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유채는 바르작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 얌전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루프스는 갸르랑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유채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어떻게 내 품에 이런 여신님이 안겨 계실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우아하고 도도하고 그 무엇보다 이렇게 귀엽기까지 한데.”

“봐봐. 또 아부하잖아.”

노골적인 아부에 유채의 얼굴이 붉어졌다. 유채가 루프스의 멀어지려 하자 그는 유채의 팔을 잡고 자신의 가까이 끌어당겼다. 코끝이 닿는 거리였다. 루프스는 유채의 장밋빛 뺨을 쓸었다. 아기같이 여린 피부라 만질 때마다 부드러웠다. 루프스는 유채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할 수 있는 유혹이 없으니 이렇게 아부라도 떨어서 네 환심을 사야 하지 않겠나? 같잖은 놈들에게 너를 뺐기지 않으려면.”

루프스가 찬바람에 붉게 달아오른 유채의 뺨을 따뜻한 손으로 감쌌다.

“안 춥나?”

“당신 몸이 따뜻해서 안 추워. 평생 이런 난로를 끼고 살면 겨울에 걱정 없을 텐데.”

“난 평생 네 난로가 되어줄 수 있다.”

“아부 좀 그만 떨어. 여신의 미모네 뭐든 해주겠네, 이런 입에 발린 소리도 하지 말고.”

쪽. 루프스는 유채의 입술에 또 다시 입을 맞췄다. 유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하지만 루프스는 아랑곳 않고 그녀를 안은 채 볼과 관자놀이에도 입을 맞췄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고 하니 방법이 있나. 아부라도 떨어야지. 그래야 네가 내게 넘어올 것 아닌가?”

“흐음. 그건 그렇네.”

루프스는 이런 관계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유채는 저쪽 세상에서 학교를 다니기에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유채가 그의 곁에 없을 때 돌아오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결국은 믿고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곧 블루벨 출산일이네.”

블루벨은 이제 스무 살이었다. 블루벨이 열아홉 살일 때 그녀와 결혼한 케릭스는 첫날밤을 미루고 미루다가 블루벨이 스무 살이 되자마자 드디어 첫날밤을 보냈고 단박에 아이가 생긴 것이었다.

“여자 손모가지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는 놈이 첫날밤 전날에 내게 와서 조원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웃겼는지.”

“그러고 보니, 당신 나 없는 동안 다른 여자들 만난 것 아니야?”

웃자고 한 말에 유채가 정색하고 물어오자 루프스는 당황하여 얼른 변명을 늘어놓았다.

“절대 아니다! 늑대는 사랑하는 암컷이 생기면 그 암컷에게만 반응한다. 내겐 너뿐인데 누굴 들였겠나. 너는 그런 나를 몇 년째 독수공방시키고 있는 거고. ……그러고 보니 케릭스 놈이 아니라 내가 더 불쌍하군.”

루프스의 한탄에 유채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유채는 루프스의 가슴을 짚고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눈이 진지했다.

“라이칸 씨, 내 이름은 한유채예요.”

루프스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손바닥 아래로 느껴졌다. 유채는 그의 심장박동을 느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하인 노릇 그만하고 내 남자친구 돼서, 나랑 연애 한번 해볼래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유채는 어느새 눈 위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뒷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맞췄다. 유채는 고개를 살짝 젖히고 루프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참을 유채의 입술을 탐하던 루프스의 입술이 이내 그녀의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자 유채가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뭐하는 거야? 난 연애하자고 했어. 키스가 아니라.”

“키스도 연애에 포함되는 것 아닌가?”

유채가 어깨를 밀어내자 루프스는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일어나 앉은 유채는 부끄러운지 약간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선 따지듯이 말을 했다.

“우리도 좀 풋풋하게 해보자고. 손도 허락 맡고 잡고 키스할 때도 머뭇거리고 부끄러워하고. 이런 것 저런 것 다…… 좀 서툰 것처럼 풋풋하게, 그게 연애잖아.”

루프스는 약간 토라진 표정의 그녀를 보자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깍지를 껴서 잡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뭐하는…….”

쪽. 쪽. 연달아 이어지는 가벼운 부딪침에 유채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루프스는 유채의 눈, 코 입, 모두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제게 온 가장 큰 선물이고 진흙탕 같던 제 인생에 찾아온 유일한 빛이었다.

“이 정도면 풋풋한 연애는 다 한 것 같은데. 우리도 나름 할 건 다 해본 사이가 아닌가? 침대 위에서 하는 것 제외하고.”

유채는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서 얼굴을 붉혔다. 루프스는 제 목에 걸고 있는 블랑카의 반지를 풀어내 유채에게 반지 안쪽을 보여주었다. 로보가 새긴 문구 옆으로 한글로 유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루프스직접 새긴 그 글자는 꽤나 엉성했다. 유채는 그가 이 작은 반지를 가지고 낑낑거렸을 모습을 생각하며 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리워 미칠 때마다 조금씩 새겨봤다. 이게 다 새겨질 쯤에는 네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어.”

유채는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루프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청회색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유채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네 용서를 바라며, 네 사랑을 바라며, 내 마음을 담아서 새겼다.”

루프스는 유채의 손을 꼭 붙든 채로 물었다.

“나를 용서했다고 생각해도 되나?”

루프스는 그렇게 물어놓고 자신이 없는지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청회색 눈동자 아래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유채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용서할 수 없었어. 나를 그렇게 다룬 당신이 너무 미워서 용서하기 싫었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진심 어린 사과가, 그의 진심 어린 마음이 그녀의 마음을 바꾸어놓았다.

유채는 제 왼쪽 가슴 위로 루프스의 손을 올렸다.

“그런데 당신의 진심이, 당신의 정성이, 당신의 절절함이 나를 움직였어. 잊어보려고도 했고 무시하려고도 했는데 당신이 계속 생각났어. 어느새 당신 말 한마디에 가슴이 떨리더라.”

밤중에 갑자기 선물이랍시고 들꽃을 꺾어 창문 너머로 건네주던 루프스가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으면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에게는 아부 떨지 말라고 타박했지만 그가 무심코 건네는 칭찬 한마디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도 했다. 어느새 그는 그녀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왔다. 유채가 제 마음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은 지난여름의 일이었다.

지난여름에 유채는 친선을 위해 대륙으로 떠나는 루프스를 따라갔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대륙에서 유채는 산적 패에 납치를 당했었다. 그때 유채는 루프스가 찾으러 올 것이라 믿고 기다렸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그는 새장 같은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을 찾아냈다. 그를 다시 보자마자 눈물이 펑펑 터져 나왔다.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그의 단단한 품에 안겨서 한참을 울었었다.

그때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평생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제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후로 유채는 그가 부담스러워졌다.

유채는 대륙에서 돌아오자마자 짐을 꾸렸다.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루프스는 당연히 붙잡았다. 하지만 유채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루프스도 결국은 그녀를 더 붙잡지 못했다.

미안하다. 더 일찍 찾지 못해서 미안하다. 너를 놓쳐서 미안하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 그는 내내 사과만 했다.

그에게 괜히 짜증을 부리고 스티폴로르를 떠난 유채는 남은 여름방학을 한국에서 보냈다.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이 혼란스러움도 잊힐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더 혼란스러웠다.

애써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추석 연휴에 다시 토스 호무스로 왔다. 예정이 아닌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토스 호무스도 추수제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돌아온 유채를 보자마자 루프스는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때 유채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 알아차렸다.

웃는 낯과 달리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유채는 그때 깨달았다. 이 남자는 돌아갈 때든 다시 만날 때든 웃는 낯으로 저를 보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돌아오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다른 나날을 보낸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유채는 자신이 무시하고 있던 심장의 떨림을 깨달았다. 왜 그가 제 일상에 스며들었던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는지를 깨달았다. 왜 갑자기 이곳에 오려고 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루프스를 만나고 싶었다. 그가 그리웠다.

다시 지구로 돌아와 그가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유채는 그게 사랑임을 깨달았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루프스도 따뜻한 봄바람처럼 유채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유채는 자신이 루프스를 용서했음을 알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손을 놓았다. 유채의 손이 약간은 따스한 루프스의 뺨에 닿았다. 유채는 스스로 눈물 흘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루프스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래서 당신을 용서했어. 당신은 삼 년에 걸쳐서 용서를 받은 거야.”

작은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져 마침내 바위를 부수는 것처럼 루프스의 진심 어린 사과와 사랑은 유채의 마음을 녹였다.

루프스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내년에는 내 꿈을 위해서 학교를 쉬면서 공부를 해야 해. 그래서, 당신이 또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서 미리 말하는 거야.”

그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아서 일찍 말해주는 거라며 종알거리던 유채는 잠깐 입을 꾹 다물고 루프스를 내려다보다가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다. 깃털과도 같은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짧은 입맞춤 후 유채는 붉어진 얼굴로 고백했다.

“사랑해. 먼 길을 돌아와서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되었네. 사랑해, 라이.”

“사랑한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너를. 내 영혼을 다 바쳐서 너를 사랑한다.”

유채의 뺨을 감싼 루프스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유채 양.”

루프스의 숨결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유채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이 가련한 추종자를 위해서 그대의 입술을 허락해 줄 수 있습니까?”

“예. 기꺼이.”

루프스의 팔이 유채의 허리를 휘감았다. 유채는 루프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맞춤을 받으며 유채는 눈을 감았다.

수없이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애초에 유채는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이 사람의 옆에 있어야 행복할 것 같아서 감정에 자신을 맡기로 한 것이다. 먼 길을 돌아온 유채의 선택이었다.

둘의 입술이 떨어지고 더운 숨결이 둘 사이에 오갔다. 유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루프스는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맙다,”

유채는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루프스는 유채가 추울까 봐 제 품으로 꼭 끌어안았다.

“나를 용서해 줘서, 나를 사랑해 줘서…….”

빛이라곤 존재하지 않을 것 같던 긴 어둠을 지나왔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 주저앉아 세상을 향해 땡깡을 부리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빛이었다. 저만의 여신님이다. 루프스는 유채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바보처럼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이제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유채만 곁에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한다, 유채.”

행복이 그의 품에 안겼다.

늑대왕 루프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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