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운이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내 경우가 그랬다. 운이 얼마나 없으면 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갈려 나간 수준이었다.
빙의를 해도 이런 빙의를.
이왕 빙의를 할 거면 종이 한 장 차이라도 더 나은 삶에 빙의를 시켜 주는 게 신 된 도리 아닌가.
나는 전남편과 이혼 도장을 찍은 역사적인 날, 미엘린 라스티나의 몸에 빙의했다.
바람피운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미엘린 라스티나의 몸에!
* * *
드디어 이혼 도장을 찍었다.
안경테 너머로 나를 애처로운 눈으로 보는 전남편을 향해 조롱을 쏟아 냈다.
“원래 베푼 만큼 돌아온다는 말 알지? 한 번 바람피운 여자가 또 한 번 바람 못 피울까! 아, 너도 마찬가지겠구나? 한 번 바람피웠으면서 또 바람 못 피우겠어?”
김태진이 한숨을 길게 뽑아 냈다. 그러고는 내가 안타까워 미치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나야. 그렇게 말하면 속 시원해? 내가 말했잖아. 우리는 그냥 사랑을 했을 뿐이라고. 지연이는 우리가 이혼하길 바란 것도 아니었어.”
이런 미친 새끼를 보았나.
“그러면 내가 내 친구하고 붙어먹는 꼴을 보고서도 이혼 안 할 줄 알았니? 내가 그렇게까지 등신 호구로 보였어?”
끝까지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법원 앞에서 서늘하게 뇌까리는 나를 사람들이 연민의 시선으로 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기나긴 3년의 시간이었다. 그간 나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고 목구멍으로 물 한 잔 제대로 넘겨 본 적이 없었다.
내 20년 지기 친구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남편을 참아 온 세월이었다. 내가 김태진만 참아 왔을까!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20년 지기의 남편과 바람을 피운 오지연 또한 내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원흉 중 하나였다.
그런 두 연놈을 참아 온 게 3년이었다.
어찌나 철두철미하신지.
충분한 증거를 합법적으로 모으는 데 3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것이다. 나는 그간 오지연의 남편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두 연놈이 바람피우고 있다는 증거를 바득바득 모아 왔다.
오지연의 남편은 김태진에게.
그리고 나는 오지연에게.
상간남, 상간녀 소송을 걸었고 약소하나마 그 대가를 받아 냈다. 그리고 그다음 순서는 이혼이었다. 나는 상간녀 소송으로 받은 돈으로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했고 김태진의 재산을 위자료로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허전한 마음과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응? 이나야. 내 전화 꼭 받아.”
“……미친 새끼.”
김태진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말라비틀어진 심장과 함께 소멸했다고 생각한 눈물이 눈가가 짓무르도록 차올랐다. 내 부모님이 사고로 한날한시에 돌아가시던 그날도 김태진은 저 애처로운 얼굴로 내 곁을 지켰다.
‘이젠 내가 널 지켜 줄게, 이나야. 내가 네 부모님이고 남편이야. 이나야, 나만 믿어.’
심장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기분은 여전했다. 아직도 김태진과 오지연의 불륜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날 위해서 살겠다던 남자가 나를 가장 아픈 방법으로 배신한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내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으니.
끝까지 내 손목을 붙드는 김태진의 뺨을 시원하게 갈기고 나서 몸을 돌렸다.
저 남자와 닿는 것 자체가 소름이었다.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날이.
나를 다정하게 위로하던 저 남자가 내 뒤에서 오지연과 놀아난 것을 알게 된 날이었으니.
새벽 내내 빈소를 찾는 손님들을 배웅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 대신 자리를 지킬 테니 조금이라도 자라고 위로하던 김태진이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찾아 나섰다.
차에 뭘 가지러 갔나?
화장실에 간 건가?
그 당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김태진밖에 없었던 터라 무서운 줄도 모르고 장례식장 주차장까지 나갔던 내가 발견한 것은 김태진과 오지연이었다.
차가 들썩이는 것도 모르고 서로를 짐승처럼 탐하던.
“하.”
눈물과 함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속이 시원할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꽉 막힌 듯 답답한 것은 왜일까? 저런 금수보다 못한 놈인 줄도 모르고 부모님 반대를 이겨 내며 결혼하는 게 아니었는데.
엄마, 아빠.
정말 미안해. 내가 이런 꼴밖에 못 보여 주네.
흘러내리는 가방을 추스르며 땅을 보고 걷고 있을 때였다.
빠아아아앙!
영혼을 뒤흔드는 것 같은 경적 소리와 함께 내 몸을 산산조각 내는 고통이 찾아왔다.
교통사고였다. 하늘로 붕 뜬 몸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내팽개쳐질 때 나는 생각했다.
내 지옥 같았던 삶에서 드디어 구원받았다고.
그게 윤이나의 마지막이었다.
* * *
차라리 그렇게 끝났으면 나았을까?
허탈하게 얼굴을 비볐다.
불행은 여전히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나 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그리고 일기장 맨 위에 적힌 새로운 나의 이름을 다시 살펴보았다.
분홍색 머리카락에 싱그러운 녹안. 어린 사슴처럼 사랑스러운 외양.
양장본으로 만들어진 분홍색 가죽 다이어리 위에 적힌 나의 새 이름.
‘미엘린 라스티나.’
팔자는 벗어날 수 없다는 건가?
실소가 배어 나왔다.
이 여자 팔자도 윤이나와 다름없는데 하필 들어와도 이 몸이다.
침실로 추정되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고전 영화 속에나 등장할 법 싶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방이었다. 김태진과 갔던 신혼여행지에서 본 유럽 궁전 같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입은 옷을 보라지. 화려한 레이스와 프릴투성이라니.
게다가 몸을 옥죄고 있는 코르셋 또한 생생하게 느껴졌다.
여기는 분명 <레이디 세리나의 화려한 결혼 생활>이라는 소설 속이었다.
내 허망한 결혼 시절 내내 도피처가 되어 주었던 여러 로판 소설 중 하나.
미엘린 라스티나는 제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멍청한 인물이었다.
왜 살해당하느냐고?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목격해 버렸거든. 순진한 미엘린은 제 남편을 인간이라고 착각했고 유책 사유를 물으며 가련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것도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 남편이 미엘린에게 어떻게 했게?
재산을 분할해 주기 싫다는 이유로 제 아내를 살해하고 그 혐의를 제 상간녀에게 덮어씌운다.
뭐, 이런 팔자가 다 있어.
내 상황을 비탄하기도 잠시. 침실 문이 열렸다.
“미엘린.”
그러고는 미엘린의 남편이라고 추정되는 남자가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야?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미엘린의 남편이라는 작가는, 크로세타 백작은 김태진을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김태진의 서양인 버전이랄까?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안경 너머로 나를 보는 부드러운 눈빛.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 잤어?”
에르긴 크로세타가 걸어와 내게 뺨을 맞추는 것을 뻣뻣하게 굳은 채로 응시했다. 간신히 떨쳐 버렸다고 생각했던 김태진이 내 발목을 붙들어 늪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연락 받아. 이나야.’
끝까지 나를 붙들었던 전남편이 나를 향해 뻔뻔하게 웃고 있었다.
“미엘린? 얼굴이 창백한데. 의사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어디가 안 좋은가.”
다정하게 내 이마를 짚어 보는 행동조차도 김태진이랑 똑같았다.
“오늘 사교 모임은 취소하는 게 좋겠어, 미엘린. 나 혼자 다녀오도록 할게. 너희는 마님을 제대로 모시도록 해라.”
“예, 백작님.”
다시 한 번 내 뺨에 키스한 에르긴이 침실에서 나갔다. 나는 그때까지 아무 말도 못 하고 벙쪄 있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겠어. 지금 이 상황도 이해가 안 가는데.
“마님, 좋으시겠어요. 저렇게 에르긴 백작께서 다정하시니.”
“그러니까요! 이렇게 두 분 금실이 좋으시니, 하녀들도 결혼하고 싶다고 난리 아니겠어요?”
이건 이제야 김태진에게서 벗어난 김이나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닌가? 분노도 말라비틀어져 버린 채로 3년이란 시간을 견뎌 온 내게는 말이다. 미엘린 이 여자는 제 몸을 내게 넘겨주고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심호흡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하녀들에게 물었다.
“……내가 결혼한 지 얼마나 됐지?”
“어머. 이제 2년 되셨잖아요. 곧 있으면 결혼기념일이신데. 그것 때문에 확인하시는 거군요? 아이참, 부러워라.”
하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결혼 2년 차의 결혼기념일.
그날이다. 미엘린이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 게.
아직 그날이 오지는 않았다는 건데.
“결혼기념일 선물은 뭐로 준비하실지 정하셨나요? 백작님께서는 마님께서 비렁뱅이의 신발을 가져다주셔도 좋다고 하실 거예요.”
“얘! 무례한 말은 말아야지.”
“앗. 죄송해요, 마님.”
“이제 한 달 정도 남았으니까……. 선물을 준비하시려면 빠듯하려나요?”
하녀들이 수다를 떨어 댔다.
한 달. 한 달이라.
결혼기념일 선물로 뭘 줄 거냐고?
뭘 줘야 할까.
비릿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거울에 비친 미엘린 라스티나의 위로 윤이나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 같았다. 한 번 한 이혼 두 번 못 하겠어?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이혼만 하기에는 억울하지.
김태진을 닮은 에르긴이라니.
이건 내게 칼자루를 쥐여 준 것과 다름없었다.
이곳은 현대 한국이 아니라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타레이나 왕국이었다. 현대의 법과는 다른 법이 적용되는, 신분이 있는 세계라는 거지.
그러니 에르긴 크로세타가 제 아내를 살해하고 다른 이에게 그 혐의를 덮어씌웠는데도 들키지 않은 것 아니겠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에르긴이 미엘린을 살해한 대로 허무하게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갚아 줘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번에 에르긴 크로세타에게 줄 결혼기념일 선물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