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편을 죽여주세요-2화 (2/92)

2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는 침실에서 모두를 몰아냈다.

내가 왜 미엘린의 몸에 빙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왕 주어진 삶 이전처럼 낭비만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윤이나가 김태진에게 벗어나기 위해서 걸린 시간은 3년.

그렇다면 미엘린이 에르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걸릴 시간은 얼마일까?

미엘린이 에르긴과 결혼한 것은 신분 때문이었다.

미엘린의 부모는 에르긴 크로세타의 백작 위를 탐냈다. 그리고 에르긴 크로세타는 부친이 남긴 빚을 갚아 줄 사람이 필요했고.

미엘린의 부모는 에르긴 크로세타를 딸을 위해서 ‘산’ 것이다.

그 후 그들은 마차 사고로 사망했고. 미에린에게는 에르긴만 남았다.

어쩜 이것까지 똑같은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거겠지? 그렇지, 미엘린?”

그렇다는 듯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이 언제 죽나 보기 위해서 소설을 읽었다. 끝내 그런 엔딩은 없었지만.

여자주인공 세리나 세르미온은 미엘린의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세리나는 에르긴과 바람을 피운 여자이기도 했다.

다만, 이 소설에서는 세리나에게는 에르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세리나는 남작의 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남작이라고 해 봤자 가진 거라고는 제 옷가지가 전부였던 세리나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서 색다른 재미를 바라던 에르긴에게 몸을 판 거였다.

참 웃기지.

제 친구인 미엘린에게는 자존심 때문에 굽히지 못하면서 그 남편에게는 몸을 내주면서까지 돈을 뜯어 가다니.

그러고 나서 훗날 에르긴의 죄목을 덮어쓰고는 철저한 진창에 빠지는 여자이기도 했다. 작가님은 그것으로 세리나의 죄를 세탁시키고자 했으나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세리나를 끝까지 욕했다.

근데도 행복해지는 걸 보면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

세리나를 구원해 멀쩡한 공작 부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이반 틸리언즈. 소설의 남자주인공이었다.

아이반 틸리언즈는 세리나를 감화시켜 인간으로 만들 정도로 아주 착실하고 바른 생활을 하는 남자였다.

남자주인공답게 다른 여자에게는 싸늘하고 내 여자에게는 다정한 면모를 보이는 완벽한 남성상.

내가 미엘린을 대신해 복수해야 할 대상은 두 명이다.

에르긴과 세리나.

전생에서 하지 못한 복수를 이번 생에서 다른 이를 위해서 하게 생겼으니. 하지만, 김태진을 닮은 에르긴이 내 복수심에 불을 붙였다.

이혼을 하는 순간 삶의 의욕을 잃었던 내게 새로운 생명력이 불어 넣어진 것 같았다.

미엘린 라스티나는 아직 이혼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미엘린은 이 몸을 내게 물려주면서 고맙게도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같이 물려주었다.

소설에 언급되지 않은 것들까지 나는 전부 알고 있었다.

핑크색 다이어리를 펼쳤다.

행복한 동화 속에 사는 듯한 미엘린의 일기를 대충 훑어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나보다 멍청한 여자가 너였구나.”

자조적인 중얼거림이었다.

그래, 다시는 이렇게 살지 말라는 경고라고 생각하지, 뭐. 그러고는 새로운 부분을 활짝 펼쳤다.

나는 전생에 비서로 일했다. 스케줄 정리하는 게 습관처럼 굳어져 있단 말이지.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보았다.

[궁극적인 목표 – 세리나와 에르긴에게 복수하기]

어떻게?

깃펜 끝을 만지작거렸다. 여기서 가장 쉬운 방법은…….

“아이반 틸리언즈…….”

그 남자를 이용하는 거였다.

[어떻게 아이반 틸리언즈를 이용할 것인가?]

이걸 정리하기 위해선 아이반이 세리나를 진창해서 구해내 공작 부인 자리에 세우는 이유를 파헤쳐 보아야 한다.

[아이반에게 세리나가 필요했던 이유.

아이반이 죽은 형 대신에 가문의 작위를 물려받기 위해서는 아내가 필요했다.

2. 죽은 형의 아이에게 차기 공작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후계자 자리를 탐내지 않는 아내가 필요했다.

3. 세리나와 결혼하기 전 계약서를 작성했다.]

단순한 이유지만 이 세계에서는 중요한 법칙이기도 했다.

고리타분한 관습이 대귀족과 왕족에게는 여전히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려가 없는 가주는 진정한 가주로 인정받지 못한다. 에르긴이 과거에 미엘린과 결혼을 서둘렀던 이유이기도 했다.

에르긴은 세리나를 철창신세로 만든 뒤 다른 여자와 급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가주 직 영위를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아이반 틸리언즈에게 내가 ‘세리나 대용’이 된다면?

“좋네.”

어차피 내가 죽지 않는 한 세리나는 벌을 받지 못할 테니 남자주인공을 빼앗는 것으로 내가 벌을 주는 거다. 그리고 나는 아이반 틸리언즈에게 새로운 계약 내용을 요청하는 거지.

[그렇다면 나는 어떤 계약 내용을 요구할 것인가?]

단 하나.

나는 최종적인 나의 바람을 적었다.

완벽하다.

* * *

아이반이 차가운 얼굴로 스타티스가 내민 서류들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스타티스.”

“이건 필요한 절차입니다, 공작님.”

“내 형님께서 돌아가신 지 3개월이나 지났나? 아직 형님께서 하시던 일을 다 파악하지도 못했어.”

아이반이 차갑게 뇌까렸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아이반의 보랏빛 눈동자가 스타티스를 향해 비난을 쏟아 냈다. 어릴 적부터 아이반 형제를 지켜봐 온 스타티스도 아이반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돌프 님께서 지켜 오신 이 틸리언즈 가문을 다른 이들의 손에 넘겨주실 겁니까?”

아돌프 님이라.

아이반이 입 안에 그 호칭을 굴려 보았다. 공작이라고 불리던 아돌프에게 이젠 이름만 남게 된 것이다. 아이반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나 죽음은 부질없다. 남은 이들은 죽은 이를 지운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타티스가 하는 말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스타티스의 말대로 아이반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는 틸리언즈 공작가를 계승할 자격을 잃게 된다. 그에게 지금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석 달. 고작 석 달 안에 그의 조건을 충족할 신부를 찾아내야 한다.

지금 스타티스가 아이반에게 내민 서류는 그가 추린 신부 후보들이었다.

아이반이 이마를 짚었다.

“물론……. 아돌프 님께서는 공작님께서 이런 결혼을 하기를 바라시진 않겠지요. 하지만…….”

“불가항력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네.”

스타티스와 아이반이 동시에 쓰게 웃었다.

“스타티스.”

“예, 각하.”

“이런 멀쩡한 영애들을 데려다가 내 조건을 맞추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아이반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스타티스가 아이반의 배우자로 추천한 이들은 미혼 귀족 여성들이었다. 얼마든지 좋은 결혼을 할 수 있는.

이런 귀족 여성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반은 아돌프가 남긴 아이를 후계자로 세울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온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서 이제 와 그 애가 받아야 할 권리를 빼앗을 수는 없다.

죽은 아돌프와 그의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아이반이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면 새로운 이들을 추천해 드려 볼까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영애면 좋겠군. 그렇다고 귀족 출신이 아닌 자는 가문에서 받아들일 리는 없으니.”

게다가 이 결혼은 전적으로 데이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신분이 너무 맞지 않는 결혼은 피해야 한다.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각하.”

“그래.”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가족을 추모하는 것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일이 있다니. 이보다 더한 희극은 없으리라. 아이반은 스타티스가 가져온 서류를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다.

* * *

기혼녀인 내가 아이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종의 핑계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행히 누군가가 나를 돕고 있는 모양이다.

국왕의 생일 연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국왕과는 친인척 관계인 아이반이 반드시 참석할 수밖에 없는 연회였다.

아이반에게 왕은 사적으로는 사촌 형이다. 그리고 크레스타 백작 부인인 나도 에르긴과 동행해 그 연회에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이미 초대장을 받았단 말이지.

나는 그 생일 연회에 참석해서 아이반과 접촉할 플랜을 세웠다.

아픈 척하면서 앓아누워 있던 내가 일어난 것도 그와 동시였다.

“미엘린, 이제는 괜찮은 건가요?”

다정한 척하기는. 속으로는 이죽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삼 일간 열심히 아픈 척했던 것은 물론 에르긴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미엘린 기억 속의 에르긴 크레스타는 건강에 집착하는 인물이었다. 에르긴의 아버지가 폐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에르긴은 언제든지 자신에게도 폐병이 생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아픈 척하면서 누워 버리니 곁으로 올 리가 있나.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피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얼마나 우습던지.

저렇게 저 자신만 소중한 사람을 미엘린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던 걸까?

“네.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요.”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은 척 연기하며 김태진과 3년 동안 살았던 나다. 이 정도가 뭐가 어렵겠는가.

아무리 에르긴이 나와 결혼함과 동시에 세리나를 제 침상으로 끌어들였던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간 걱정했어요, 미엘린. 이제는 아프지 않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곧 국왕 전하의 탄신일인데 혼자 참석하기는 싫었거든요. 제 삶은 미엘린이 있어야 완성된다는 거 알고 있죠?”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던 에르긴이 내 손에 키스했다.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미소는 깨어지지 않았다.

“알고 있어요, 에르긴.”

내가 정말로 네 삶을 완성시켜 줄 계획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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