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에르긴 크레스타.
그는 자신의 아내를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돈 많은 가문에서 태어나 모자람 없이 살아왔으니 생각이 순진하고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른다.
결혼을 약속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작 부부가 사망한 것 또한 에르긴을 위한 일임이 틀림없었다. 하늘은 에르긴 크레스타를 위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에르긴의 눈에 세리나 세르미온이 들어온 것은 극히 우연한 일이었다.
꽃처럼 분홍색인 머리카락에 녹안을 가진 아내와는 완벽하게 다른 여자였다.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세리나. 게다가 가난하여 귀족 영애임에도 기운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에 참석한 여자이기도 했다.
그 여자의 눈동자에는 체념이 가득할 뿐 흔한 질투 같은 감정도 없었다.
그녀의 평범함은 에르긴에게 동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에르긴 역시 평범한 외모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 노름을 하다가 폐병이 걸려 죽어 버린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그런 에르긴이 미엘린을 선택했고 그는 삶의 주인공이 되었다.
빚을 갚은 것으로도 모자라 자산가가 된 것이다.
에르긴은 평범하고 불행한 세리나를 그가 선택함으로써 그녀도 변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세리나, 세리나.”
“흡…….”
입술을 앙다물고 신음을 삼키는 여자의 머리채를 붙들었다. 고귀한 공주님처럼 모시고 살아야 하는 미엘린과 세리나는 천지 차이였다. 미엘린은 에르긴을 구원한 여자였고 세리나는 그가 구원한 여자였다.
새하얀 침상 위를 덥히는 여름 햇볕이 따뜻하다.
에르긴이 세리나의 뺨을 희롱했다.
마치 신음을 흘리면 죽을 것처럼 꾹 눌러 참는 세리나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왜? 미엘린에게 들릴까 봐? 그 여자는 지금 새 드레스를 고르느라고 정신이 없을걸?”
세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입술 사이로 엄지로 밀어 넣은 에르긴이 세리나를 을렀다.
“소리를 내. 이 저택은 내 거야! 내가 내 여자를 안겠다는데 누가 뭐라 한다는 거지?”
“이, 이러지 마세요, 백작님…….”
세리나가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그 순종적인 눈물을 혀로 핥으며 에르긴이 저속하게 킬킬거렸다.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건 너야, 세리나. 내 침대에 알몸으로 기어 올라온 건 너라고!”
에르긴이 세리나의 기억을 되새겨 주었다.
손을 내민 것은 에르긴이었으나 그 손을 잡은 것은 세리나였다.
‘네 삶을 구해 주지, 세리나. 네게 돈을 주겠어. 그 돈이면 부모가 남긴 빚을 갚을 수 있을 거야. 그 빚을 갚지 못하면 늙어 빠진 자작 놈에게 팔려 가야 한다지? 네 빚을 가지고 있는 주인 말이야.’
‘하, 하지만……. 백작님은 미엘린의 남편이시잖아요!’
‘그게 어떻다는 거지, 세리나? 나는 너와 무엇을 하든 미엘린의 남편으로 남아 있을 거야. 네가 들키지 않는다면 말이지.’
새하얗게 질리던 세리나의 얼굴이 참 볼 만했는데.
하지만, 자존심을 굽혀 미엘린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늙은 자작에게 팔려 가는 대신에 그의 손을 붙든 것은 세리나 본인이었다.
“네가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지!”
“아!”
에르긴이 세리나의 입술에 진득하게 키스했다. 이 저택은 에르긴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부정을 알고 있는 사용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손발을 맞춰 미엘린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렇게 에르긴이 세리나를 끌어들이는 날이면 하녀들은 미엘린의 눈을 현혹할 일들을 벌이곤 했다.
의상실의 마담을 부른다거나.
저택 인테리어를 바꾼다거나 하는 식으로.
에르긴의 왕국에서 그를 해할 것은 없었다. 이게 미엘린의 재산으로 이룩된 왕궁이라고는 해도!
* * *
에르긴이 닿는 곳마다.
그에게 김태진이 겹칠 때마다 소름이 손끝부터 타고 올라오곤 했다. 그건 생리적인 반응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저 애써 숨기는 수밖에.
그것을 꾹 눌러 참고 수프를 입 안에 떠 넣었다. 오늘은 아이반 틸리언즈를 직접 만나는 날이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미엘린, 정말로 건강이 좋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이 저택에 스며든 아침 햇살을 한순간에 겨울바람으로 바꿔 줄 생각을 하는 나에게 에르긴이 말했다.
아마도 에르긴은 어제도 세리나를 저택에 끌어들여 뒹굴었을 것이다. 멀쩡한 가구를 들어낸다면서 수선을 피우던 하녀들을 떠올리면 말이다.
나는 에르긴과 그를 옹호하는 저택의 특성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네, 다행이에요. 오늘 연회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좋은 모습을 말이다.
“오랜만에 미엘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겠군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는 에르긴을 실컷 비웃어 주었다. 에르긴이 부유하게 살아 온 미엘린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소설에도 서술된 부분이었으니까.
귀족 사회에는 화려한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가질수록 귀하다고 여겨지는 관습이 있었다.
에르긴에 비해서 미엘린의 희귀한 눈 색과 머리카락 색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칭송을 받았다. 에르긴이 미엘린에게 비해서 내세울 거라고는 허울에 불과한 작위뿐이었으니.
“에르긴도 멋있게 입어 줄 거죠?”
에르긴이 화려하게 비상할수록 그 추락은 더 비참하게 느껴질 테니.
“물론이죠. 자, 그러면 오늘 밤을 기약하고. 나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에르긴이 내 뺨에 키스하고는 식당에서 나갔다.
뭘 하든 열심히 하렴.
어깨를 으쓱하고는 홀로 남아 식사를 이어 나갔다. 오늘따라 수프가 고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오늘 저녁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 *
국왕의 탄신 연회가 열리고 있는 홀은 정말 넓었다.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아이반을 찾을지는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일전에 비서실에서 일했던 내 생각대로 아이반 주변에는 사람이 몰려 있었고 나는 그들 무리를 시선으로 쫓는 것만으로도 아이반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음……. 뭐랄까.
꿀에 몰려든 꿀벌들 같다고 해야 하나?
하긴. 아이반이 꿀단지이기는 하지.
저렇게 사람이 많을 때는 아이반에게 접근해 봤자 미엘린 이름에 먹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눈치를 살피며 연회장을 배회했다. 에르긴은 이미 그를 붙드는 이들에게 섞여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게도 말을 걸어 오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미엘린. 정말로 많이 아픈 거야?”
그럼에도 내게 접근할 수 있는 이는 있었다. 다름 아닌 세리나. 미엘린의 하나뿐인 친구.
“아. 그렇진 않은데 오늘은 조금 피곤해.”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세리나가 “그렇구나”라고 중얼거리고는 내 옆에 섰다.
오지연을 닮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정말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발코니에라도 나가 있을까. 아이반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을 보니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세리나를 뒤로 하고 발코니를 향했다. 거기까지 따라올 생각은 없었는지 세리나는 연회장에 남았다.
“하…….”
그래도 반짝이는 야경을 보니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야경이 좋은 건 여기나 저기나 똑같네.”
피식 웃으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나 자신을 달래 보고 있을 때였다.
“이모는…… 밤이 좋아?”
코를 훌쩍이는 작은 목소리였다.
“꺄!”
정말 깜짝 놀랐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질 않으니. 하지만, 나를 아래에서 잡아당기는 손에 그제야 아래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흐잉…….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이모.”
또박또박 말하는 여자아이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여기에 이런 어린아이가 있다고? 아직 어린 왕에게는 아이가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깜, 깜짝이야. 너는 괜찮니? 놀라진 않았어?”
일단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 자리에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괜찮아요.”
“다행이네.”
주변을 둘러보고는 아이가 있는 곳에서는 밖에서 보이질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그러고는 아이 옆에 두 다리를 편하게 뻗고 앉아 버렸다.
“어른은 그렇게 앉으면 안 되는데…….”
“지금 너밖에 안 보고 있잖아. 다른 사람한테 말할 거야?”
“말 안 했으면 좋겠어요?”
“응. 네가 말하면 나는 창피할 것 같거든.”
“그러면 말 안 할게요.”
“고마워. 그런데 너는 왜 여기서 울고 있었어?”
“……엄마가 보고 싶어서요……. 우리 아빠도 보고 싶어서요…….”
“엄마하고 아빠는 어디 있는데? 내가 데려다줄게.”
아이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고는 내 눈치를 본 뒤 고개를 저었다.
“왜?”
“엄마랑 아빠는 여기 없어요.”
왠지 눈물이 가득 고인 아이의 눈을 보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보통 이럴 때 잘못된 반응을 보이면 아이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어른도 상처받는데, 뭘.
“그럼 누구랑 같이 왔는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숙부님이요…….”
“숙부님? 그러면 숙부님한테 가면 되겠네.”
“숙부님은 너무 바빠요. 나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은데……. 그 말을 하면 숙부님이 너무 슬퍼하세요.”
“……그러면 그 얘기는 내가 들어 주는 게 어떨까?”
아이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네 엄마, 아빠 이야기는 내가 들어 줄게. 내가 네 비밀 친구가 되어 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