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편을 죽여주세요-4화 (4/92)

4화

“비밀 친구…….”

“그래, 비밀 친구. 너도 내 비밀을 지켜 주기로 했잖아.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거. 그러니까 나도 네 비밀을 지켜 주는 거지.”

아이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아이에게 부모님을 잃었던 내 모습이 겹쳐진다. 그날 나는 남편에게도 버림받았다.

“우리 엄마는 노래를 잘 불렀어요. 아빠는 엄마가 노래를 부르면 피아노를 치셨는데……. 정말 정말 잘 치셨어요.”

“그랬어?”

“그러면 저도 엄마 옆에 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를 잘 부르나 보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엄마는 제가 제일 잘 부른다고 그랬거든요.”

“다음에 한 번 불러 줘. 나도 듣고 싶네.”

아이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피아노를 쳐 주실 거예요?”

“피아노……? 잘 치진 못하지만 노력해 볼게. 하지만, 아빠보다 못 친다고 화내면 안 돼.”

“안 그래요.”

아이가 부스스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외에도 아이는 제 부모와 있었던 일들을 조곤조곤히 늘어놓았다. 신나 보이기도 했고 어떨 땐 울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밖에서 에르긴이나 세리나와 어울리기보다는 아이와 있는 편이 더 즐거웠다. 그래도 이 아이는 나를 속이는 일은 하지 않으니까.

“……다음에도 우리 만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모는 이름이 뭔데요……?”

“내 이름을 묻기 전에 네 이름을 먼저 말해 줘. 그럼 말해 줄게.”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도 전이었다. 발코니 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들어섰다.

“여기 있었구나!”

“외숙부님!”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가 냉큼 남자에게 달려가 안겼다. 뭐야. 보호자인가?

“뭐 하고 있었어?”

“저기 이모랑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래. 이모랑 즐겁게 이야기 나누었니?”

“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이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말했다.

“이모, 이름은 뭐예요?”

“나?”

당황해서는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 미엘린…….”

“그럼 다음에 봐요, 이모!”

“고맙습니다, 부인.”

남자가 예를 갖추고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아……,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보이다니. 밖에 나가서 소문내는 건 아니겠지? 쥐가 나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 * *

내 삶에 이런 호사를 누릴 날이 오다니.

온갖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아름다워 보였다. 미엘린의 라스티나 자작 가가 다이아몬드 광산을 여러 개 보유한 대부호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이 많은 돈을 가지고 왜 불행하게 살았니, 미엘린.

가진 게 몸밖에 없었던 윤이나와는 다른데 말이야.

거울에 비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지금 나는 에르긴을 홀로 연회장에 떨궈 두고 메이크업 룸에 와 있었다. 아이반의 동선을 확인하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여기에서 기다리다가 아이반이 지나갈 때쯤 해서 나갈 계획이었다.

메이크업 룸 내에는 나 말고도 세리나도 함께였다.

‘미엘린, 어디 가는 거야? 나도 같이 가.’

에르긴의 음험한 시선을 피하고 싶은 듯 내게 들러붙던 세리나의 가련하기 짝이 없는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미엘린, 오늘 너 정말 아름다워.”

세리나가 청초한 얼굴로 말했다. 거울에 비친 세리나의 얼굴을 보다가 헛숨을 삼켰다.

에르긴이 김태진을 닮아 있었다면 세리나는 오지연을 닮아 있었다. 두 사람 다 환생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오지연은 윤이나에게 불륜을 들키던 날에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나야……. 나는 정말로 그럴 생각이 없었어……. 태진 씨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위로해 주려다가 본의 아니게 그리되고 말았어. 나는 널 배신한 게 아니야, 이나야.’

자신이 가장 불쌍하다는 척.

누군가가 자신을 음해한 거라는 듯이 애잔하게 말이다.

오지연의 음성이 세리나에게로 덮어씌워졌다.

싸늘함을 감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고마워, 세리나. 너도 오늘 참 아름다워.”

세리나가 부끄러운 듯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졌다. 저 드레스가 누구의 돈으로 산 건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르긴이 선심 쓰듯 안겨 준 물건이겠지.

오늘 오후에도 에르긴의 침대를 데운 세리나의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도망치듯 저택에서 빠져나가는 세리나를 창문 너머로 목격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뻔뻔하게 내 이름을 부를 수가 있다니. 세리나와 미엘린의 우정도 20년 가까이 이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부질없는 우정이 다 있나.

실소가 배어 나왔다.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미엘린…….”

세리나가 뺨을 붉혔다. 세리나는 발목이 드러나는 드레스에 천을 덧대어 입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연회가 있는 날이면 에르긴의 침대에 자발적으로 오르곤 했다. 그리고 에르긴은 그런 세리나를 즐기듯이 가지고 놀았다.

드레스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침대에서 나가는 세리나에게 포상을 내리기라도 하는 듯 쥐여 주었던 것이다.

세리나는 더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발목이 드러나는 드레스보다 친구의 남편과 놀아나는 일이 더 부끄럽다는 걸 왜 모를까.

“그래?”

그냥 여상하게 대답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자기 연민에 빠진 세리나를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바깥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옆방에 왕과 아이반에 들어가 있다는 걸 이미 시종에게 돈을 주고 확인한 후였다.

나는 지금 세리나의 눈앞에서 그녀를 구원해 줄 남자주인공을 낚아채려 하는 중이었다.

“미엘린,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요새는 차를 마시자고 하지도 않고……. 지금도 나와 눈도 안 마주쳐 주고…….”

세리나가 내게 다시 말을 걸어 왔다.

요새 불륜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뻔뻔한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세리나는 미엘린의 친구로서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을 놓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미엘린은 세리나를 자신의 세계를 끌어들이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세리나를 위해 값비싼 레스토랑과 살롱을 예약하고.

그녀를 위해 새 구두를 선물하는 등의.

세리나와 에르긴으로부터 받는 그 무엇 하나 놓을 수 없었던 세리나는 계속해서 제 친구를 농락하는 짓을 일삼았다.

근데 무슨 여자주인공.

때마침 밖에서 아이반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해!”

* * *

왕이 생일을 핑계 삼아 자신을 불러내리라는 사실을 아이반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연회를 피하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나. 아쉽게도 아이반은 헨리 왕의 왕국에서 사는 귀족일 뿐이었다.

연회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즈음 헨리는 아이반에게 눈짓했다. 뒤로 빠져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는 제스처였다.

만약 거기서 거절했더라도 헨리는 아이반에게 계속해서 시종을 보내 왔을 것이다.

‘하아.’

아이반이 속으로 탄식을 흘리고는 잔에 든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헨리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내 한마디면 너는 원하는 영애와 결혼을 할 수 있어, 아이반!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이를 배우자로 고르려는 거야.”

이 의견은 끝까지 좁혀지지 않으리라.

헨리는 아이반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에게 가문 좋고 호적도 깨끗하고 심성 고운 영애를 짝으로 맺어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이반의 생각은 달랐다.

“멀쩡한 영애 신세를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전하. 저는 제 배우자가 될 영애에게 아무런 미래도 약속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미래의 틸리언즈는 데이지가 물려받게 될 겁니다. 이미 정해진 미래를 받아들일 영애가 있답니까?”

아이반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데이지에게는 내가 새로운 가문을 내려 주마. 그러니…….”

“헨리!”

아이반이 뇌까리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반의 사촌 형이 그를 홉뜬 눈으로 응시했다. 헨리가 왕좌에 앉고 나서 아이반이 그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아이반은 하나 남은 그의 혈육이었다.

“그래, 아이반. 너도 내 마음을 헤아려 주면 안 되는 거냐? 너는 하나 남은 내 혈육이야! 네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내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냐?”

“헨리, 나는 아돌프에게 약속했어. 숨이 꺼져 가는 내 형님의 손을 붙들고 약속했다고. 데이지에게 반드시 그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아이반이 이를 갈며 말했다.

아돌프는 죽어 가는 순간에도 오로지 데이지 걱정뿐이었다. 데이지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데이지 친모의 신분!

아돌프는 오로지 사랑만으로 결혼한 사람이었다. 틸리언즈 가문은 대대로 철광석을 관리해 온 가문이었다. 철광석은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광석이기 때문에 왕국 내에서도 소유할 수 있는 가문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게 바로 틸리언즈다.

수 세기 동안 왕실과는 동맹 관계를 맺어 오며 강력한 우방이 되어 온 것이다.

아돌프는 후계자일 적에 광산으로 시찰을 나갔다가 데이지의 친모인 힐리아를 만났다. 서로에게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불같은 사랑을 했고 힐리아와 아돌프는 결국 신분 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하지만 힐리아의 신분은 데이지의 약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돌프는 힐리아를 위해서 데이지에게 공작가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6개월 전 힐리아가 둘째 아이를 출산하던 중에 아이와 함께 사망하자 아돌프는 뭐가 급했는지 그 뒤를 따랐다. 죽어 가면서 아이반의 손을 붙들고 한 말은…….

‘아이반, 네게는 정말 미안하다. 이런 짐을 주고 가서 미안해……. 하지만, 데이지 만큼은……. 그 애만큼은 지켜 다오! 하늘에서 그 애가 내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지켜볼 수 있게 해 줘!’

그것이었다.

아이반은 아돌프의 마지막 소원을 차마 저버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할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괜찮았다.

지금 아이반이 찾는 것은 배우자가 아니라, 그의 인생 동반자가 되어 줄 사람이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

“아이반……! 아돌프가 그건 무리한 요구를 한 거야! 그건 네 인생을 배제한 부탁이었다고!”

“물론, 알고 있어. 하지만, 아돌프는 내게 그래도 돼.”

아이반이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돌프와 아이반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형제지간이었다. 아돌프는 아이반보다 12살이 많았다. 이른 나이에 타계한 공작 부부를 대신해서 아돌프는 아이반을 돌봐 주었다.

아돌프는 아이반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했다.

아이반은 아돌프의 청춘을 잡아먹는 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아돌프는 단 한 번도 아쉬운 소리를 한 적 없는 착한 형이기도 했다.

그런 아돌프를 위해서 마지막 소원 하나쯤은 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는 헨리와의 의견 차이가 더 이상 좁혀지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따라서 방금까지의 화제 또한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다. 아이반이 문을 열고 나가면서 낮게 윽박질렀다.

“헨리, 그만해. 내 결혼은 내가 결정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