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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5화 (5/92)

5화

“앗!”

의도적인 부딪힘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감출 생각도 없었고.

문에 부딪혀 넘어지려는 나를 아이반이 붙들었다. 나는 아이반의 팔에 몸을 기댄 채로 속삭이듯 말했다.

“공작님…….”

간절하게 그를 붙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백작 부인……? 아까 그…….”

왜인지 아이반이 말을 하려다 말았다. 뭐지?

하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내 용건을 해결하는 게 더 급했다.

“제 남편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저 좀, 저를 좀 도와주세요.”

아, 연기 좋고.

이게 김태진 바로 옆에서 갈고 닦은 연기 실력이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나를 보는 아이반의 얼굴에 혼란이 어렸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구해 주세요, 공작님. 저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공작님뿐이세요.”

아이반의 팔을 강한 힘으로 붙들었다.

그런 나를 세리나가 뒤에서 불렀다.

“미엘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게 다가오려는 세리나의 기척을 느끼고는 빠른 목소리로 아이반에게 말했다. 이 잠깐의 시간이 나의 운명을 가로지르게 될 것이다.

“저 여자와 제 남편이 바람피우고 있어요. 그리고 제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서 저를 죽이려고 하고 있죠. 저 좀 도와주세요, 공작님.”

나는 이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 세리나라는 패를 이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세리나를 힐끗 보고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무슨 일인지 짐작도 못 할, 자기 연민에 빠진 여자가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었다.

아마도 저 표정은 내 말과 맞물려 가증스럽게 아이반의 눈에 비치고 있을 테다.

어차피 어느 정도는 사실이 될 일이기도 하잖아?

죄책감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다행히도 내 속삭임에 아이반의 표정이 돌연 변했다.

“편하게 이야기하실 수 있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이반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지 못할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나를 완전히 믿진 못하더라도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겠지. 아이반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영애, 지금 귀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합니다. 혹 백작을 불러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 네! 지금 당장 다녀올게요……!”

세리나가 허둥지둥 달려가고 나는 아이반에게 안긴 채로 도로 메이크업 룸으로 들어왔다. 아이반이 나를 소파 위에 앉혀 준 뒤 문을 닫았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알아요, 공작님. 저는 제 남편의 외도를 확신하고 그들의 계획을 알게 된 바. 공작님께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아이반이 내 건너편에 경건한 자세로 앉았다.

“말씀하십시오.”

“……지금 공작님께서는 데이지 양의 양모가 되어 줄 사람을 찾고 있으시지요?”

아이반은 데이지를 그의 호적에 두고 싶어 했다.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데이지 양이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돌봐 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부인.”

“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압니까?”

“국법에 따르면 저는 제 남편보다 작위가 낮기에 저는 남편을 이기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더 큰 힘이 개입되면 달라지지요.”

그게 고리타분하더라도 이 나라의 법이었으니. 악법이라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이혼을 요구하더라도 귀족 재판에서 내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은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거기에 아이반이 개입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부인께서 백작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거라면 편을 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굳이 제 옆자리를 자처하지 않으셔도요.”

“그 이후는요? 제가 이혼을 한 이후에도 제 남편으로부터 제가 절 지킬 수 있을까요?”

이 낡은 세계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보다 낮았다. 이혼하고도 제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여자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을 아이반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에르긴에게 내 재산을 한 푼도 남겨 줄 생각이 없었다. 에르긴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건 당연한 미래였다.

“저는 확신할 수 없군요. 제 남편은 아까 그 여자와. 제 친구와 불륜을 저질렀고 제 재산을 가지고 싶어 해요. 만약 제가 제 재산을 가지고 이혼을 한다면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겠지요.”

“…….”

“그러니 뻔뻔하고 자격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공작님의 필요에 제가 적합하다면 저를 도와주세요.”

아이반의 눈이 흔들렸다. 사실 아이반의 조건에 세리나만큼 적합한 것이 나였다.

“저는 후계자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저는 데이지 양을 사랑하는 양모가 되어 줄 자신도 있어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지난 2년 동안 저와 남편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어요. 저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이에요.”

이건 진실에 가까웠다.

미엘린은 생리 주기가 불규칙한 편이었고 의사로부터 임신이 어려울 거라는 진단을 받은 바 있었다.

“제 남편은 후계자를 핑계 삼아서라도 언제든지 저를 농락하겠죠. 저는 그런 불행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억지로 제 곁에 계신다고 해도 행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최소한 목숨의 위협을 받는 불행은 피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세리나와 에르긴에게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세리나에게서는 구원자를 빼앗고.

에르긴에게는 더한 굴욕과 열등감을 안겨 줌으로써.

그것으로 이 결혼은 내게 충분히 완벽했다.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이 제안을 충분히 검토한 이후에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서둘러 주세요, 공작님. 제 남편이 저를 죽이기 전에요.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먹이를 던졌고 아이반은 그 먹이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아이반은 이 먹이를 물게 될 것이다.

곧 발생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에르긴과 함께 마차를 타고 백작 가로 귀가했다. 에르긴은 내게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게 조금도 나를 감동시키진 못했다.

더러운 자식.

아프다는 내게 조금도 닿지 않으려는 에르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자신의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쨌든.

아이반은 곧 내 미끼를 물게 될 것이 분명했다.

원작의 흐름에 따르면 그 사건은 곧 발생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아이반은 급박한 순간에 내 얼굴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 * *

“의도적인 접근이 분명해, 아이반.”

문밖에서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던 헨리가 아이반에게 말했다.

아이반도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반에게 미엘린의 첫인상은 그게 아니었다. 운 흔적이 역력한 데이지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모습이었지. 사실은 발코니 밖에서 미엘린과 데이지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고 있었다.

데이지의 외숙부가 그 애를 데리러 가기 전에.

그 모습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야. 자네는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정말로 백작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나? 그것도 부인의 오랜 지기와 말이네.”

헨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왕이 거느린 정보통들에 의하면 에르긴 크레스타와 세리나 세르미온이 지난 2년 동안 불륜 관계를 이어 왔다고 했다.

“그건 사실이네.”

“하. 정말 파렴치한 인간들이군.”

아이반이 머리를 쓸어올렸다.

혹시나 하였던 의혹에 확신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백작 부인의 몸 상태는?”

“아이를 못 가진다는 것 말인가?”

아이반이 맞는다는 듯이 헨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헨리라면 그것 또한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깃든 눈동자였다. 헨리가 이번에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의 진단이 있었지. 백작 부인은 아기를 갖기 힘든 몸이라는 사실이 맞네.”

미엘린이 한 말 중 대부분이 사실로 밝혀졌다. 게다가 미엘린의 재산으로 크로세타가 회생했다는 것도 사교계에 파다한 가십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에르긴과 세리나가 미엘린의 재산을 노리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크지 않나.

게다가 아기를 갖기 힘든 몸이라면 미엘린은 앞으로도 그녀를 보호해 줄 남자를 만나기 힘들 것이다. 후계가 중요한 귀족 가의 남자들이 그녀를 맞이할 리 없으니 말이다.

왠지 모르게 지독한 덫에 걸려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딱 적절한 시기에 알맞은 사람이 나타나는군.”

아이반의 보랏빛 눈동자가 우울함을 머금은 채로 반짝였다.

“아이반. 지금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으나…….”

“지금 결정한 것은 아니야, 헨리. 아직 내게는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심사숙고해 보겠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것으로 헨리와 아이반의 대화는 끝을 맺었다.

하지만, 아이반은 그 심사숙고를 그리 오래 이어 갈 수 없었다.

고작 4일. 그게 아이반이 고민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 다른 틸리언즈의 핏줄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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