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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6화 (6/92)

6화

아이반의 아버지가 저지른 부정의 증거가 등장했다. 자신이 틸리언즈의 핏줄임을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남자는 틸리언즈의 특색인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주장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게다가 남자는 한미하기는 하지만, 남작 집안의 차녀와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그 남자가 선선대 공작의 사생아라고는 하나 가주가 될 자격이 두 가지나 갖춰진 것이다.

보랏빛 눈동자와 배우자.

원작에서도 아이반은 이런 상황에 직면했다.

그에게는 고작 3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니 세리나라는 가련한 여자가 등장했을 때 그녀를 공작 부인으로 결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다.

이 새롭게 등장한 남자가 데이지에게 공작 가의 후계 자리를 물려줄 리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반이 누구를 떠올리고 있을까?

아직 등장하지 않은 세리나가 아니라 나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나보다 더 적합한 여자는 없을 거라고 여기겠지. 상황이 아이반을 몰아붙이고 있을 테니 말이다.

“마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요즘 건강이 안 좋으시더니……. 백작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셨어요.”

“그래? 그동안 푹 쉰 덕분에 괜찮아진 모양이야.”

하녀들이 재잘거리며 내 비위를 맞췄다. 거의 하루도 안 빼고 에르긴이 세리나와 놀아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뭘 내 걱정을 해.

미엘린이었다면 감격해서 제 남편에 대한 제 사랑을 견고히 했겠지만 말이다. 미엘린은 이렇게 에르긴이 만든 성에 갇힌 온실 속 화초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백작님께서 기뻐하실 거예요.”

“다행이구나.”

오늘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척을 한 것은 기다리던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아이반에겐 내게 몰래 연락을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터다. 이렇게 내 손에 그에게 온 쪽지가 들려 있는 것을 보면.

[오늘 뵐 수 있을까요, 백작 부인? 프리어릿가 38번지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데이지의 이름을 대시면 제게 안내해 줄 겁니다.]

이런 순간에도 정중하다니. 역시 세기말 남자주인공이라고 불리던 사람다웠다.

끝까지 자존감이 바닥인 채로 죄책감과 열등감에 시달리던 세리나를 두고서도 독자들이 소설을 끝까지 읽었던 것은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아이반에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반은 성실하고 다정다감한 남편이었다.

세리나의 상처를 보듬어 주려고 노력했으며 종내에는 세리나를 사람 만드는 데 성공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내 여자에게만 다정한 면모까지 갖췄으니 사람들이 홀려서 넘어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외출을 해야겠어.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좋은 생각이세요, 마님!”

왜. 오늘도 세리나가 와 있기라도 한 모양이지?

나는 실소를 흘리고는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아이반이 시간을 특정 짓지는 않았지만, 이 지긋지긋한 지옥 속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 *

[공작 가는 누구의 손에 갈 것인가?]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붙인 주간지를 아이반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연일 쏟아지는 기사의 헤드라인에 틸리언즈는 내내 붙박이로 박혀 있었다.

자신이 틸리언즈의 핏줄임을 주장하고 나선 가이스 덕분이었다.

그리고 아이반 또한 가이스가 아버지의 자식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에……. 아버지를 닮은 생김새라니.

하필 이럴 때 동장한 가이스 덕분에 실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가이스는 제 아내와 제 아들을 데리고 당당하게 공작 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에게도 정당한 후계권이 있음을 인정하시지요, 각하. 각하께서 3개월 안에 혼인을 못 하신다면 제게 그 자리가 돌아와야 한다는 것도요.’

가이스를 공작 가로 데려온 것은 뱀 같은 눈을 가진 틸리언즈의 가신이었다. 허수아비처럼 움직일 수 있는 공작을 세우겠다는 것이겠지.

이 귀족들의 노림수가 신물 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데이지가 있었기에.

가이스를 대면한 순간 떠올린 것은 미엘린이었다.

그에게 딱 맞춘 것처럼 떨어진 그녀가.

“부인.”

아이반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온 미엘린을 맞이했다.

“공작님.”

미엘린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 말라 있었다. 그건 아마도 남편의 배신을 미엘린이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미엘린에게 가지고 있었던 아이반의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옅어졌다.

아이반이 미엘린을 이용하려는 게 아니다. 아이반은 미엘린을 도와주려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제안해 온 쪽은 미엘린이었음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이반 특유의 강직함 때문이었다.

“……저를 도와주실 마음이 생기신 건가요?”

미엘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반에게 물어 왔다.

“아직까지 저를 필요로 하고 계신다면, 그렇습니다. 저 또한 부인이 필요하게 되었거든요.”

아이반이 쓰게 웃었다.

“부인께서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들어드릴 생각입니다. 제게 바라시는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부인.”

그게 미엘린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밖에 여겨지질 않았다.

웃고 있는 미엘린의 입술을 아이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바라는 거라.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뿐이지.

“그 전에, 공작님. 혹시 제게 바라시는 게 없으신가요? 저는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만약 공작님께서 원하신다면 다른 연인을 두셔도 괜찮습니다. 또한, 제게 공작 부인의 권리를 아무것도 내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 침실에 오시지 않아도 좋아요. 각하께서 바라시는 건 무엇이든…….”

“부인.”

내 말을 아이반이 잘라 냈다. 나를 보는 아이반의 눈동자에는 새파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왜? 나는 진심인데.

“저는 이 결혼의 신성함을 믿는 고리타분한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그 신성함을 배반할 수 있다고 해도 저는 아닙니다. 제가 부인과 결혼하게 되면 저는 부인께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 될 겁니다.”

사실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는데.

뭐, 그렇다고 하니…….

어차피 아이반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던 터라 지금 그의 반응이 놀랍지도 않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위안이 되네요…….”

의도된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바라는 건 부인께서 데이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그 애는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해요.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다정하게만…….”

“그건 자신 있어요, 공작님.”

본디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고.

전생에서도 아이를 갖고 싶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하긴 3년 동안은 잠자리도 회피했으니까.

이번 생에 미엘린이 되면서는 아예 포기해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차라리 데이지를 내 아이라고 생각하고 잘 키워 보는 게 낫지 않나.

“……고맙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한 가지뿐이에요, 공작님.”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편을 죽여 주세요.”

그게 내가 바라던 완벽한 목표였다.

* * *

아이반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의 표현이 너무 자극적이었나 보다.

“정말로 크로세타 백작의 죽음을 바라시는 겁니까? 물론 들어드릴 수는 있으나, 그 또한 백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기 때문에 성가시고 복잡한 일에 연루될 수 있습니다.”

사실 아이반의 염려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반은 가문을 무사하게 지켜 데이지에게 물려주는 것을 평생 목표로 삼아 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틸리언즈에게 살인 의혹을 덧씌우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겠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공작님. 제가 바라는 것은 에르긴을 사회적으로 매장해 달라는 거였어요. 에르긴은 제 자산을 바탕으로 사업을 꾸려 나가고 있어요. 그렇게 얻은 사회적 지위로 사람들과 어울리죠. 저는 에르긴이 저로 인해 얻은 모든 것을 거둬들이고 싶다는 거예요. 사회적인 죽음.”

에르긴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알량한 사업적 감각은 있었다.

미엘린의 부모님은 막대한 부를 딸 이름 앞에 남겨 놓았다. 그들이 가진 각종 보석 광산들과 돈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사업체들까지. 에르긴은 처음엔 그 알짜배기 사업체들을 욕심냈으나 미엘린의 부모가 쳐 놓은 방어막으로 인해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미엘린을 에르긴에게 팔아넘기면서 최소한의 보호 장치는 해 둔 것이다.

어쩌면 미엘린의 부모는 딸을 팔아넘긴 게 아니라 딸을 신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에르긴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에르긴은 스스로 사업을 새로 벌여야 했는데 그가 벌인 사업은 다름 아닌 고급 살롱 사업이었다. 에르긴은 사교계에서 다루는 값비싼 찻잎이 돈이 될 것임을 알아차렸고 획기적인 기획으로 돈을 벌어들였다.

물론 투자는 전부 미엘린이 했다.

그러면 거기에 내 지분도 있는 거 아니겠어?

그것까지 전부 받아 낼 생각이었다.

아이반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되는 겁니까?”

앞으로 3개월.

소설 속에서 가장 많은 것이 변하는 시간이었다. 한 달 뒤 결혼기념일을 기점으로 말이다. 그리고 두 달 후, 아이반은 세리나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 모든 운명을 이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 세리나는 손쉽게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이대로 그냥 아이반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원래 끼리끼리라잖아.

역시 나는 내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네. 그거면 돼요. 에르긴은 뽐내기 좋아하고 누리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것만으로도 죽고 싶을 거예요. 아니, 죽고 싶을 만큼 괴롭겠죠. 해 줄 수 있나요?”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부인을 도와 유책 사유만 인정된다면 금액 대부분을 회수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다.

아직 에르긴에게는 혼자 금액을 유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이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사업은 계속해서 투자처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러나 유책 사유가 발표되고 우리가 이혼하고.

거기에 에르긴에게 원한을 품은 내가 아이반과 재혼을 한다면?

좀 더 높은 권력과 결탁한 내 편에 설 이가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평판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잘못했다가는 내가 아이반과 바람피운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연극을 준비할 생각이에요, 공작님. 주연은 저와 에르긴, 세리나. 그리고 공작님. 이렇게 네 사람이에요. 제게 협조해 주실 수 있나요?”

“손을 잡기로 했으니 당연히. 제가 무엇을 도우면 되겠습니까?”

아이반이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를 보는 그의 시선에는 약간의 호의와 연민 같은 감정 외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아이반의 저 덤덤함이 좋았다. 저 시선에 아무런 감정도 담기질 않길 바란다. 영원히. 나 또한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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