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뾰족하게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니 화려한 노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여자의 인상을 좀 더 드세 보이게 했다.
전체적으로 세 보이는 인상에 화장도 진하게 해서 친근감보다는 거리감을 주는 여자였다.
누구냐, 너.
미엘린의 삶을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뭐야, 그 표정?”
“아, 누군가 해서. 화장이 바뀐 건가. 못 알아보겠네.”
여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들부들 떨면서 여자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크리스티나! 내 이름 크리스티나잖아!”
아,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
기억났다!
미엘린과는 오래된 친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미엘린과는 모종의 이유로 틀어졌던……. 아! 그것도 전부 세리나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미엘린이 가진 것 없는 세리나와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받는 것 없이 내주기만 한다면서 말이다. 미엘린은 크리스티나가 세리나를 차별한다고 생각했고 거리를 두게 되었다. 소설에서 말이다.
아, 미엘린. 그건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어.
크리스티나는 미엘린의 찐 친구였다. 친구에게 쓴소리를 해 가면서까지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 하다니. 미엘린은 원래 베풀기 좋아하고 세리나를 안쓰럽게 여겼다. 사실 세리나와 크리스티나, 미엘린은 알아 온 세월은 비슷했다.
그런데도 크리스티나는 알아본 세리나의 본성을 미엘린은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거지, 뭐.
이제부터 하나씩 되돌리면 될 일이다. 혼자 노는 것도 지쳐 가던 참이었는데.
“미안해, 크리스티나. 햇빛 때문에 네 얼굴이 잘 안 보였어.”
생긋 웃으며 크리스티나에게 앞자리를 권했다.
“같이 커피 마실래?”
“어, 어? 갑자기 얘가 왜 이래.”
크리스티나가 새침하게 목을 가다듬더니 내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커피만 같이 마셔 주는 거야. 커피만!”
그렇게 말하고는 크리스티나가 급사를 불러 제 몫의 커피를 시켰다. 그러고는 나를 힐끗 보더니 물었다.
“케이크 먹을 거야?”
“좋아.”
“지금도 초코 케이크 좋아해?”
“나쁘지 않지.”
“하여튼…… 어린애 같기는.”
퉁명스럽게 말해 놓고는 크리스티나는 내가 먹을 몫의 초코 케이크를 시켰다. 미엘린의 취향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라니. 이건 그린 라이트라고 볼 수 있겠지? 나는 미엘린이 이 몸을 내게 양보한 이유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바로잡으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크리스티나와의 관계도 바로잡아야지.
“큼.”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로 다리를 꼬고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두 팔을 괸 채로 얼굴을 받치고 크리스티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화장만 조금 연하게 하고 눈썹 모양만 바꿔도 훨씬 예쁠 것 같은데. 내 취향인가? 이 세계 미의 기준을 모르니…….
크리스티나는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약간 미엘린이 오밀조밀하게 생겼다면 크리스티나는 시원하게 생긴? 아무튼, 그런 느낌이었다. 미엘린이 되고 나서 가장 어색했던 게 사람들 생김새였는데.
그래도 지금은 그냥저냥 괜찮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크리스티나를 천천히 관찰하고 있었다.
“뭐, 뭘 봐!”
“그냥. 오랜만이라서.”
“……무슨 일 있는 거야?”
크리스티나가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원래 세리나하고 붙어 다녔잖아. 근데 혼자 있는 것도 이상하고. 뭔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절대로 걱정하는 건 아니야!”
뒷말은 굳이 안 붙여도 됐어, 크리스티나.
아무래도 혼자 있는 내게 먼저 말을 건 것은 내가 걱정됐기 때문인 듯했다. 크리스티나 말대로 세리나와 분리되어 혼자 있는 데다가 분위기도 확실히 변했을 테니. 미엘린을 아는 사람이라면 걱정할 수도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티나는 보기 드문 좋은 친구였다.
오지연이 그렇게 나를 배신 때렸을 때 내 편이 되어 함께 그들을 욕해 준 친구가 있었다. 내가 새벽에 밖을 헤매다가 찾아가도 따뜻하게 안아 주던 유일한 내 편. 민주가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겠지? 내 걱정 하고 있으려나…….
낯선 크리스티나에게서 민주의 향수가 느껴졌다.
“아무 일 없었어, 괜찮아.”
“……표정이 아닌 거 같은데.”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혹 세리나하고 무슨 일 있는 거면 나한테 말해, 미엘린. 내가 이런 말 하면 너는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걘 정말 고마운 걸 모르는 애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너도 조심…… 뭐?”
크리스티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 수긍한 거야?”
“왜, 이상해?”
“세리나 문제에 있어서 네가 나한테 동의한다고? 정말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변했나 보지, 뭐. 어! 케이크 나온다.”
크리스티나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하지만, 속에 든 영혼이 바뀌었다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초코 케이크를 먹어 치웠다.
“……이번 주말에 세리나 생일 파티 해 줄 거지? 매년 그랬잖아.”
“응.”
“후우. 변한 게 없네, 뭐.”
크리스티나가 볼을 부풀리고는 케이크를 크게 잘라 입 안에 욱여넣었다. 우물거리는 얼굴이 불만으로 가득했다.
“이번 주말에 올래?”
“내가 거길 왜 가.”
“그래도 와, 크리스.”
재밌는 일이 있을 거거든.
네가 좋아할 만한 일일 지도 모르지.
“……봐서. 가고 싶으면 가고.”
크리스티나가 뾰로통하게 말하고는 남은 케이크를 전부 내 앞으로 밀어 주었다.
“이거나 다 먹어 치워. 나는 다이어트 중이라.”
이게 크리스티나 식 배려임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좋은 친구가 있었네, 미엘린.
크리스티나는 그나마 미엘린의 삶에 남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부분이었다. 아, 가장 큰 부분은 역시 돈이고. 큼.
* * *
“후우.”
검은 챙모자를 최대한 눌러 썼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전부 틀어 올리고 아무도 나를 알아볼 수 없도록 가린 것이다. 일부러 옷을 사 입기까지 했으니.
계약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주말에 있을 연극에 가장 중요한 조연을 고용한 것이다. 역시,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좁은 골목길에서 빠져나왔다. 밝은 거리로 나가기 전에 모자를 벗어서 쓰레기통에 대충 던져 넣었다.
“공작님……?”
작은 여자애랑 같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고 있는 아이반이 보였다. 저 여자애가 데이진가 본데. 보기 좋네.
나도 모르게 아이반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어딜 가는 거지?
아이는 기분 좋은 듯이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재잘거렸고 아이반은 웃는 얼굴로 아이의 말을 받아 주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옆모습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역시 인성 갑 남자주인공이라 이건가. 이 소설에서 세리나라는 여자주인공도 엉망인데 사람들이 사 읽었던 것은 전부 아이반 때문이었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마주칠 수 없는 환상 속의 남자, 아이반.
그러고 보니 그런 완벽남을 실물로 보고 있잖아. 그리고 어떤 이유건 간에 청혼하기도 했고.
“미엘린, 너는 저런 남자주인공을 옆에 두고 왜 몰랐던 거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뭐, 곧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 * *
가이스 틸리언즈.
정말 간신히 틸리언즈의 성만 빌려 쓰고 있는 남자였다. 먼 방계 출신이기도 한 데다가 한미한 자작 위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이스는 하루 벌어 간신히 하루 사는 인생이었다.
고된 일을 해서 번 돈은 도박판에서 날리기 일쑤였고 그렇게 남은 돈으로는 밤새 술을 마시곤 했다. 쾌락을 좇는 한심한 인생, 그게 바로 가이스의 인생이었다. 처자식을 건사하는 것은 전부 아내의 몫이었다.
닦달하는 아내와 한바탕 싸우고 나면 가이스는 입버릇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틸리언즈야! 그 대단한 틸리언즈라고! 그 이름을 여태까지 유지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내가 틸리언즈 직계로 나기만 했어 봐! 그깟 돈 뭐가 아쉬워!’
‘지금 당장 두 직계가 죽어 봐. 그 자리는 내 것이 될걸?’
허황된 꿈을 꾸며 현실을 잊었던 것이다. 가이스의 아내는 그런 그가 답답한 듯했지만, 술에 취해 난봉을 피우는 것보다는 낫다며 무시하곤 했다. 그랬던 가이스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아돌프가 죽고 미혼인 아이반만 남았다.
아이반이 3개월 안에 결혼하지 않는 이상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가이스에게 넘어오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이반은 그런 조건을 가지고는 결혼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공작 가 들어가서 살 준비나 하라고.”
가이스가 큰소리를 쳤다.
“헛소리도 참! 그 공작 가 재력에 사람 하나 못 살까!”
가이스의 아내가 소리쳤다.
“헛꿈 꾸지 말고 나가서 일이나 해요!”
“아, 그러지 말고! 그러니까 공작 가에 가서 감시 좀 하고 그러라니까!”
참다못한 가이스의 아내가 개고 있던 빨래를 집어 던졌다. 또다시 고함이 오갔다.
* * *
에르긴이 세리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휘감았다. 처음에는 거칠었던 머리카락이 비단결처럼 변해 있었다. 이건 전부 에르긴이 투자하고 변화시킨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했던 미엘린과 세리나는 달랐다.
오히려 부족하고 못났던 에르긴이 미엘린 덕분에 완벽한 신사로 났다면 이번엔 완전히 반대인 것이다. 그리고 에르긴은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이건 에르긴의 자존심을 충족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미엘린의 돈으로 무언가를 할 때마다 마음속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부터 나기를 고귀하게 난 것처럼 항상 고상하고 우아했던 미엘린과 달리 에르긴의 손끝은 갈라져 있었고 머리카락도 푸석했다. 그리고 과거의 에르긴과 세리나는 일견 닮아 있었다. 에르긴은 그래서 세리나를 선택했다.
“어때, 좋아?”
“흑……, 백작님…….”
세리나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눈물을 흘리는 세리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미엘린한테 들킬까 봐? 그 순진한 여자가 이런 일을 알 것 같아? 걘 너하고는 달라.”
“제발…… 그만…….”
에르긴이 세리나의 어깨에 이를 박아넣었다. 특히 에르긴은 미엘린의 장소에서 세리나를 품을 때마다 배덕감과 함께 통쾌함을 느꼈다. 주변에 화려하게 널려 있는 미엘린의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들이 쾌감으로 흐려진 눈동자에 흐드러지게 비쳤다.
“왜. 여기 있는 걸 전부 갖고 싶지 않아? 다 가지게 해 줄 수 있다니까?”
에르긴이 세리나를 을렀다.
“내일이 생일이지? 뭘 갖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