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세리나가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참지 못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세리나가 굴욕감과 죄책감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다.
미엘린은 자신의 생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자신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세리나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미엘린에게 받은 것들을 갚지는 못할망정…….
‘쟤랑 어울리지 말라니까!’
날카롭게 울려 퍼지던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왜 지금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그때 미엘린은 세리나의 편을 들어 주었지만, 크리스티나가 옳았다. 세리나처럼 못된 계집은 미엘린 같은 친구를 얻을 자격이 없었다.
세리나가 코를 훌쩍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그녀의 욕심이 문제인지, 에르긴의 눈에 띄어 버린 것이 잘못인지.
* * *
이른 아침부터 수선을 떨며 저택을 깨웠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얼굴로 에르긴이 제 침실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미엘린, 잘 잤어?”
“그럼요, 에르긴.”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는데. 내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알면 에르긴은 깜짝 놀랄 것이다. 에르긴이 느물거리며 웃었다. 저 역겨운 얼굴을 보는 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오늘 세리나의 생일이잖아요. 진짜 즐거울 거예요, 그렇죠?”
“당신이 기뻐하는 걸 보니 나도 기쁘군그래.”
에르긴이 내 손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며 피했다. 더럽고 역겨운 걸 어디에다가 가져다 대는 거야?
“당신도 준비해요, 에르긴. 오늘은 정말로 완벽했으면 좋겠거든요.”
“당신 말대로 하지. 최고로 멋진 남편이 되어 보겠어.”
지랄이다.
속으로는 몇 번이고 욕을 해 줬지만, 겉으로는 웃어 보였다. 이 정도 내공쯤이야.
“세리나는 어디에 있니?”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마차가 들어오고 있어요!”
“그래?”
뭘 수고스럽게 그런 연극을 한대. 어젯밤, 내 드레스 룸에서 두 짐승이 뒹굴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문이 잠겨 있음을 확인했고 안에 든 것을 꺼내게 문을 열라고 명령하자 하녀들이 말을 어정쩡하게 돌렸다.
참, 그래 놓고도 안 들킬 거라고들 생각하는 건지.
그래서 아침부터 바빴다.
의상실을 돌면서 모든 걸 새로 맞추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른 시간이어도 그간 내가 쏟아부은 돈이 있어서 그런지 의상실 마담은 협조적이었다.
1층으로 세리나를 마중 나갔다.
“미엘린!”
세리나가 활짝 웃으며 나를 끌어안으려고 팔을 벌렸다. 그런 미엘린을 피하면서 자연스럽게 말했다.
“오늘 새로 맞춘 드레스야, 세리나. 구김이 잘 가는 소재라고 하더라고.”
“아아. 아침부터 의상실에 다녀온 거야?”
“응. 그랬지.”
너희가 내 드레스 룸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데 거기 있는 걸 입고 걸치겠니. 차가운 눈으로 세리나를 오시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세리나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내 취향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벼랑 끝에서 떠미는 거거든.
“잘 왔어, 세리나. 네가 일찍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 너는 치장을 도와줄 하녀들이 없잖아.”
“고마워, 미엘린.”
세리나가 볼을 붉히며 웃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준비해 준 것들 일색이었다. 어떻게 저걸 걸치고 다닐 생각을 하는 건지. 혀가 내둘러질 뻔뻔함이었다. 하긴. 저 드레스에 숨겨진 내력을 알게 되면 저런 얼굴 못할 테지만 말이다.
“별말을. 우리 사이에.”
하녀들이 내 지시에 따라 세리나를 데리고 드레스 룸으로 갔다. 세리나의 화장과 치장을 돕기 위함이었다. 나는 방 밖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녀들이 세리나의 시중을 드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저들은 돈을 받고 일하는 하녀들이다.
저들이 에르긴의 뜻대로 불륜을 숨겨 주는 것은 그 돈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그 돈, 조금 있으면 씨가 마를 텐데. 아, 그래도 여기 있는 걸 팔면 조금 연명을 하려나? 드레스 룸에 있는 거나, 혹은 내가 이곳에서 사용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으, 더러워.
“미엘린. 나 예뻐?”
세리나가 수줍은 얼굴로 물었다.
“응, 예뻐.”
저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얼른 보고 싶었다. 속 시원한 복수의 서막이 막 오르려는 참이었다. 기대되네, 조금 있다가 네가 어떤 얼굴을 할지.
* * *
크리스티나와 미엘린이 틀어진 지 3년이 넘었다. 그간 크리스티나와 미엘린은 한 번도 한 곳에서 어울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하필, 크리스티나가 온 것이다. 세리나가 불안한 얼굴로 미엘린을 찾아 헤맸다. 크리스티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세리나를 벌레 대하듯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주눅 든 세리나가 미엘린이라는 방패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에르긴은 절대로 세리나의 편을 들어 주지 않으리라. 세리나가 바스락거리는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미엘린이 보였다. 항상 미엘린은 반짝였다. 오늘 주인공은 세리나인데도 미엘린이 주인공인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초대받은 사람들도 세리나보다는 미엘린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못난 생각이야, 세리나.’
세리나가 얼른 고개를 젓고는 미엘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엘린.”
미약한 세리나의 목소리에 미엘린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왜?”
세리나가 주춤 물러섰다. 미엘린답지 않은 차가운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인 듯 스쳐 지나가 버렸다.
‘잘못 본 건가.’
세리나가 어색하게 웃고는 미엘린과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세리나가 홀로 있을 때는 말도 걸어 주지 않던 사람들이 그제야 세리나를 무리 안에 끼워 주었다.
“백작 부인. 아시다시피 이번에 우리 자작님이 새로운 사업을 벌이잖아요? 에르긴 백작님이 보는 눈이 좋으시니까 한 번 살펴 주시면…….”
“그런 이야기는 다음에 공적인 자리에서 하도록 해요, 부인. 오늘은 즐기는 날이잖아요.”
“그런가요? 제가 눈치 없이 굴었네요.”
귀부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의도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엘린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미엘린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리나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오늘 주인공은 세리나니까요.”
그런 세리나를 미엘린이 끌어당겼다. 토닥이는 손길이 이전과 같이 다정하다.
“그, 미엘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응. 말해.”
세리나가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고는 말했다.
“혹시…… 크리스티나 말이야. 네가 초대한 거야?”
“아. 크리스티나? 응, 그랬지. 왜 문제 있어?”
미엘린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다는 순진한 표정이었다.
“아……, 그게…….”
세리나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크리스티나가 불편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자신 때문에 미엘린과 크리스티나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비난을 수도 없이 받아 왔다. 세리나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화해한 거야?”
“그랬지. 크리스티나하고 오해가 풀렸거든. 아, 크리스티나!”
미엘린이 크리스티나를 향해 우아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크리스티나가 귀찮다는 얼굴로 무리에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크리스티나를 끼워 주었다. 세리나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크리스티나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세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랜만이야, 크리스티나.”
세리나가 애써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래. 너는 여전하네.”
크리스티나가 차갑게 말하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크리스. 전에 먹었던 초코 케이크가 계속 생각나던 거 있지.”
“그러면 또 먹으러 가던가.”
미엘린과 크리스티나가 세리나는 모르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세리나가 미엘린에게 물었다.
“초코 케이크를 좋아했었어, 미엘린……?”
“아, 응. 단것을 좋아하는 편이야.”
미엘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크리스티나는 여태 미엘린이 좋아하는 케이크 하나 몰랐냐는 얼굴로 세리나를 보았다. 그간 미엘린은 세리나의 취향을 물었어도 세리나는 미엘린의 취향을 물은 적이 없었다.
세리나는 상대적 박탈감에 고개를 수그렸다.
“미엘린, 전에 네가 좋아하던 레스토랑이 이번에 새로운 메뉴를 선보인다던데 갈래?”
“좋아!”
크리스티나가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그린 듯이 어울렸다.
“아, 나도 같이 갈까?”
세리나가 용기를 내서 끼어들었다. 크리스티나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든지. 네가 사면 되겠네. 오늘 이 연회도 미엘린이 널 위해 준비했잖아. 그 정도 보답은 해도 될 거 같은데.”
크리스티나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 말에 떠들어 대던 귀부인들이 조용해졌다. 사람을 불쾌하게 할 정도로 직설적인 크리스티나지만 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지 뭐.”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는 하지 말고.”
항상 이런 일이 있으면 미엘린이 크리스티나와 부딪히면서까지 세리나를 구해 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 미엘린은 다른 귀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상해…….’
뭔가 기묘했다. 미엘린이 이럴 리가 없는데. 세리나가 뒷걸음질을 치려 할 때였다.
“내 애인이 여기에 있다니까!”
이런 곳에서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남자가 막는 이들을 뿌리치고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뭐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쪽을 보았다. 남자를 막기 위해 하인들이 몰려들었다. 미엘린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