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AW
드디어 왔군. 오늘을 위해서 초대한 사람이었다.
아이반도 잘 도착해 있고 에르긴도 저기에 있다. 그리고 세리나는 여기에 있고. 좋아. 에르긴이 고상한 주인의 흉내를 내며 하인들에게 불청객을 쫓아내라고 명령을 내리는 게 보인다.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어렵게 모신 분인데.
“아니에요, 에르긴. 억울한 것 같은데 이야기는 들어 줄 수 있잖아요.”
“큼. 당신이 그렇다면야. 이럴 때까지 친절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손짓으로 하인들을 물렸다. 그러자 하인들 손에 막혔던 남자가 씩씩대며 그들을 뿌리쳤다.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우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오늘의 증인이 되어 줄 사람들이었다.
아이반의 위치를 확인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씩씩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흩뿌렸다. 의상실과 호텔,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끊어 준 영수증이었다. 남자가 외쳤다.
“이, 빌어먹을 연놈들 같으니라고! 세리나, 너 이 망할 년!”
“누, 누구신데 이러세요!”
“누구? 누구? 내가 누군지 몰라? 아, 저놈이 그놈이구나!”
남자가 에르긴에게 덤벼들었다.
“어맛!”
남자에게 부딪힐 뻔한 나를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고맙습니다.”
아이반이었다.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하고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좀 더 뒤로 잡아당겼다. 당신 친절한 편이구나? 괜히 남자주인공이 아니지.
“뭐야, 당신!”
“뭐야 당신? 네가 세리나하고 붙어먹은 새끼 아니야? 내가 다 봤어! 네가 저년 데리고 호텔 가는 것도 다 봤다고! 지금 저년 입고 있는 것부터 걸친 거까지 전부 네놈이 사 준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린가!”
에르긴이 남자를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의 힘을 이겨 내진 못했다. 에르긴이 볼품없이 남자의 손에 흔들렸다.
“유부남 주제에 내 애인하고 붙어먹어? 이 빌어먹을 새끼 같으니라고! 야, 너 이 새끼야! 너는 상도덕도 없냐!”
아, 웃을 뻔.
연기가 실감 나잖아. 누가 고용한 사람인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저 남자를 고용하기 위해서 들인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세리나 애인이다! 너지? 나 일하러 간 동안 쟤를 임신시킨 게 너지?”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세리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제대로 된 변명도 못 하고 덜덜 떠는 꼴이 보기 좋을 정도였다.
“미, 미엘린……!”
사람들이 바닥에 떨어진 영수증을 한 명씩 집어 들었다. 영수증에는 에르긴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구매한 품목에는 지금 세리나가 걸친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호텔과 레스토랑. 저 남자가 언급한 영수증들이었다. 에르긴의 이름으로 끊어진.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에르긴이 나를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생각할 테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미 사람들에게는 먹기 좋은 먹이가 던져졌다. 그리고 그 먹이를 먹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까. 사람들은 이미 흥미를 보이는데.
“나, 진짜 아니야……! 아니야, 미엘린!”
“뭐가 아닌데?”
그리고 이럴 때 꽤 좋은 무기를 나는 알고 있었다. 세리나가 눈물을 터뜨리기 전에 내가 먼저 눈물을 터뜨린 것이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세리나, 네가 어떻게…….”
“미엘린, 괜찮은 거야?”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의 품에 안긴 채로 크게 눈물을 터뜨렸다. 지금 이 비극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나였다. 남자는 난동을 부리며 에르긴을 몰아붙였고 사람들은 세리나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렸다. 정말 최고의 생일이지 않니, 세리나?
“크리스, 나 바람 좀 쐬어야겠어…….”
“좋아. 내가 데려다줄게.”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 품에 기댄 채로 세리나를 외면했다. 세리나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세리나는 반드시 나를 끝까지 쫓아오리라는 걸 말이다.
내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바란다면 세리나에게 에르긴이라는 불행을 선물해 줘야지.
크리스티나가 나를 발코니에 데려다줬다. 크리스티나가 문을 닫고는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미엘린.”
“응?”
“그만 우는 척해도 돼. 언제부터 안 거야?”
크리스티나가 내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크리스티나와 커튼에 가려 연회장 안쪽은 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크리스티나가 내게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뭘…….”
“그때 만났을 때부터 이상했지. 세리나가 에르긴하고 바람피우는 걸 그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년.”
크리스티나가 시원하게 욕을 하고는 어깨를 들썩였다.
“거봐. 내가 걔는 은혜를 모르는 애라고 그랬잖아.”
힘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그 말을 듣지 않았니, 미엘린.
“그러게.”
“세리나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는 거지?”
“크리스?”
“나도 네가 벌인 판에 끼어들고 싶어졌거든.”
“뭐?”
“우린 친구잖아?”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그 애의 눈동자 안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런 친구가 인생에 한 명쯤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둘을 잃었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얻은 셈이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다시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중얼거리며 내게 도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에르긴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해. 세리나 다음으로 만나야 하는 사람이거든.”
“좋아. 미엘린.”
“왜?”
“오늘 끝나고 갈 곳이 있어?”
미엘린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가진 저택을 팔았다. 그러니 지금 미엘린에게는 갈 수 있는 곳이 없는 셈이다. 크리스티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와 가자, 미엘린. 내가 같이 있어 줄게.”
“……고마워.”
진심이었다.
크리스티나가 나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는 발코니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는 것과 동시에 세리나가 발코니 안으로 들어왔다.
크리스티나가 밖에서 문을 닫았다.
“미엘린…….”
세리나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저지른 짓을 전부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알까?
“왜?”
“내, 내가 잘못했어……. 나는 에르긴 백작이 나를 협박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절대로 널 배신할 의도가 없었어. 내가 네게 어떻게 상처를 줄 수 있겠어. 미엘린…….”
“이봐, 세리나.”
세리나의 눈높이에 맞춰서 바닥에 앉았다.
세리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미소 지으니 그에 희망이 생겼는지 따라 웃는다. 그만큼 미엘린이 세리나에게는 우스웠던 것이다. 진심으로 사과를 하면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지금 이 자리를 누가 마련했다고 생각해?”
“어……?”
“내 초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이 자리에 올 수 있다고 생각해?”
“미, 미엘린…….”
“잘 들어, 세리나. 인생은 항상 네가 준 만큼 돌려주길 마련이야. 내가 항상 당하기만 할 줄 알았어?”
“이, 이러지…… 마. 미엘린, 내가 잘못했어. 응? 다시는 안 그럴게. 에르긴 백작님의 연락도 안 받을 거고……. 절대로…… 나는 정말로 협박 때문에 그런 거야. 응?”
“아……. 세리나, 세리나. 너 정말 미친 거 아니니?”
왜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를 하는 거지?
누가 보면 내가 가해자인 줄 알겠다.
“나는 이제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세리나. 나는 에르긴과 이혼할 생각이거든. 네가 그 남자와 무슨 짓을 하든 전혀 상관없다는 거야.”
그 순간 세리나의 얼굴에 반짝이는 희망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나는 분명 보았다. 진짜 우습지도 않지.
“물론, 네가 그것들을 전부 누릴 수 있다면 말이야.”
“무, 무슨…….”
“다시는 보지 말자, 세리나.”
세리나의 어깨를 툭 치고는 일어났다. 인생이 참담하다 보니 눈물을 터뜨리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내 얼굴은 어느새 눈물에 젖어 있었다. 다행히 크리스티나는 타이밍을 아주 잘 맞춰 주었다.
에르긴이 내가 나가기 직전 발코니 문을 연 것이다.
“미엘린! 나는……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 다 저 여자가 매달려서 그런 거야.”
어쩜 저렇게 하는 말들이 똑같을까.
“다시는 이런 일 없어. 응? 미엘린, 내가 정말 잘못했어. 내가 정말 미안해.”
정말 왜들 이러는 거야.
에르긴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에 순순히 붙들려 주었다. 물론, 이건 전부 계획에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 손에 잡혀 주는 척하면서 뒤로 넘어졌다.
“꺄, 꺄아아악! 에르긴!”
“미, 미엘린!”
에르긴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꺄, 꺄아아악!”
몸을 웅크리며 그 손을 피했다. 사람들 눈에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는 당연히 계산상에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 둘, 셋.
“백작 부인?”
아이반이 등장해야지. 우리의 자연스러운 접점을 만들어 내기 위한 일이었다.
“공작님…….”
아이반이 경멸하는 눈으로 에르긴을 위아래로 보고는 내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나는 그 품에 기대 울면서 에르긴에게 선언했다.
“이, 이혼해요. 에르긴.”
“미엘린……!”
“세리나가 임신했다잖아요!”
사람들이 잊기 전에 못을 박아 줘야지. 사실 세리나가 임신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쳐 주기에 적절한 양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리나와 에르긴을 결혼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양념이기도 했다.
“이혼해요, 에르긴. 나는…….”
이 순간 에르긴의 얼굴에 김태진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나는 더 이상 당신하고 살기 싫어요.”
그리고 아이반이 계획된 대사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