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제가 이 이혼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오늘 모든 사건을 목격했고 유책 사유가 에르긴 백작에게 있는 바, 그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 중에서도 몇몇 손을 들었다. 그렇지. 아이반만으로는 부족하지. 가장 앞장선 것은 크리스티나였다.
“저 또한 증인이 되겠습니다.”
돈과 권력이 꽤나 있다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혼에 대한 증인이 되겠다고 하니 에르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교계에서 인정한 이혼이다. 그리고 이런 이혼 사건은 어렵게 질질 끌지 않고 쉽게 해결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아이반은 방금 유책 사유가 에르긴에게 있다는 걸 확실하게 말했다. 에르긴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도 그의 편을 들어 주진 않았다.
이로써 나의 두 번째 이혼이었다.
“……내일 바로 이혼 서류를 보낼게요, 에르긴. 세리나의 배가 불러 오기 전에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요?”
“미엘린……!”
“다가오지 마십시오. 당신 따위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이건…… 이건 계획에 없던 대산데.
아이반이 나를 뒤로 당김과 동시에 날 그의 뒤로 밀어 넣었다. 나를 가리고 선 등이 거대하게 느껴진다. 아이반에게서는 인위적인 향이 아니라 산뜻한 비누 향이 풍기고 있었다.
“아이반 공작님! 물러서십시오! 저는 지금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례한 건 당연하고……. 정말이지 분수를 모르는 작자로군.”
아이반이 이를 갈 듯이 말하고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아이반은 에르긴에 비해서 덩치가 큰 편이었다. 에르긴은 아이반에게 완전히 가려져서 보이질 않는다. 나는 에르긴의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반의 목소리도.
“나는 부인의 보호자도 자처하겠소. 이런 무례하고 파렴치한 작자가 부인을 모욕하는 걸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군.”
아이반의 말이 짧아졌다. 그리고 목소리도 딱딱하게 굳었다.
이것 또한 계획에 없었던 이야기였다.
“아이반 공작님!”
아이반을 나를 데리고 그 엉망진창인 판에서 빠져나왔다. 크리스티나 또한 우리와 동행했다.
“……미엘린.”
아이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가 이렇게 편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 적은 처음이었다. 아이반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이다.
그리고 저 자유로움이 나를 보호해 줄 것 같았다.
“……왜 그랬어요? 약속한 대사가 아니었어요, 공작님.”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도 됩니다.”
“……아이반.”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에르긴 백작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당신이 그에 비해서 너무 작았어요.”
“그래서 지켜 줘야 할 것 같았나요?”
“내가 해도 되는 일이라면요.”
“……고마워요.”
덕분에 창피하지 않을 수 있었다. 위안이 되기도 했고. 여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엘린, 이만 가야지.”
“그래.”
“갈 곳이 있습니까?”
“다행히 그렇네요.”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스티나가 아이반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공작님.”
“……미엘린을 잘 부탁드립니다.”
크리스티나가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가 내 손을 붙들었다. 그 손을 잡고 크리스티나를 데리러 온 마차에 올라탔다.
“아…….”
왠지 모르게 허탈해졌다. 모든 게 끝났다.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엘린의 인생 전반전을 끝낸 것이다. 몸을 의자에 파묻었다. 이런 순간엔 항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번에 두 번째로 겪는 일인데도 그랬다. 멍하니 바깥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한숨을 삼킨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침대, 그리고 단 과자와 함께 마실 수 있는 술. 부드러운 목욕 가운하고 향유를 부은 욕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너를 위해서 무료로 제공할 것들을 이야기하는 거야.”
“크리스…….”
“……너는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이런 위로 같은 거 잘못해. 근데 그런 것들이 네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어쩌면 여태 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울고 싶은 걸 말이다. 왜 이렇게 인생은 비참하고 더러운 일투성일까. 엉망인 건 연회가 아니라 내 인생일지도 모른다.
“흐으…….”
어두운 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 바람처럼 내 인생도 나를 스쳐 지나가면 좋을 텐데. 내 앞을 틀어막은 채로 비켜 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흐어어어어엉…….”
그건 미엘린도 마찬가지였겠지.
이 몸을 내게 내준 게 미엘린이라면 그 여잔 이 바람을 뚫고 나갈 힘이 없었던 것일 테다. 누군가가 이 일을 해 주길 바랐겠지.
왜 나였을까.
내가 이 더러운 일을 또 한 번 겪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혀 괜찮지 않았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에르긴을 죽이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김태진을 죽이고 싶었던 마음도 완벽하게 진심이었다. 결혼을 한다는 건 가족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나는 김태진과 완벽한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오지연보다 김태진에게 더한 배신감을 느꼈다.
가족에게 배신당하는 것과 친구에게 배신당하는 것.
내게는 전자가 더 큰 상처였다.
미엘린, 너도 그랬을까?
네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배신을 당한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손등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풍랑을 맞아 흔들리는 돛단배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 데도 의지할 데 없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돛단배. 그리고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었던 바람조차도 멈추게 되겠지. 그게 바로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크리스티나가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말 없는 그 행동이 나름대로 위로가 되었다.
“고마워.”
코를 훌쩍이며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내가 안 왔으면 어디로 가려고 했어? 공작 가?”
“호텔 많은데, 뭐.”
“미엘린.”
크리스티나가 한숨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
“알아. 내가 한심하지?”
“너보다는 그 사람들이 한심하지, 미엘린. 너를 잃는다는 게 어떤 뜻인지 모르잖아.”
퉁명스러운 그 말에 깊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정말 고마워, 크리스.”
“……알아.”
이 미쳐 버릴 것 같은 순간에도 위로가 되는 누군가가 있었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은 척 웃었다. 감춰질 것이 아니었지만.
* * *
미엘린과 크리스티나가 타고 있는 마차를 배웅한 아이반이 몸을 돌렸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스타티스가 서늘한 공기를 뚫고 그를 맞이했다.
“오늘 계획하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아마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신 겁니까?”
“글쎄.”
아이반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을 흐트러뜨렸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미엘린은 웃고 있었다. 대체 왜 웃고 있었던 걸까? 울 것 같은 눈을 하고서 말이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그런 마음을 안고서…… 왜 웃으려고 하고 있었을까.
그 순간, 미엘린은 누구보다 작아 보였다.
아이반에게 당돌한 제의를 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니. 아니면, 아이반이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엘린은 모든 순간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연회장에서 미엘린이 흘렸던 눈물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었던 거다. 그녀는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진실로, 울고 있었다.
그 얼굴이 마음에 콕 박혀서 떠나려 하질 않는다.
아까 미엘린을 막아섰던 것은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 순간 정말로 미엘린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녀를, 그 빌어먹을 놈으로부터. 애써 우는 연기를 하던…… 아니다. 정말로 울고 있었던 그녀를 지켜야만 할 것 같았다.
이건 애매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괜찮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앞으로 그녀는 괜찮았으면 좋겠다.
불행했던 만큼.
* * *
엉망이 된 곳에 에르긴과 세리나만 남았다. 세리나의 애인이라고 주장했던 남자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발코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세리나와 그녀 옆에 선 에르긴이 전부였다. 에르긴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기랄…….”
세리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에르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가지고 있었던 가장 값진 것을 잃었고 지금 그녀에게는 에르긴만 남았다. 에르긴이 세리나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세리나.”
그녀에게 모든 탓을 돌리는 에르긴이?
“네 애인 새끼 때문이잖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미엘린이 꾸민 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리나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을 생생하게 느꼈다.
이건 전부 세리나가 저지른 짓이었다.
미엘린을 기만하고 그녀를 속였던 모든 일 말이다. 분명 세리나에게는 에르긴이 내민 손을 거절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어려운 순간에 에르긴에게 기댈 것이 아니라…….
“하하하하.”
세리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받는 법밖에 몰라, 세리나.’
크리스티나가 쏘아붙인 말이 마음에 박혔다. 처음엔 아니었다. 처음부터 미엘린이 주는 것들이 당연하진 않았다. 그저 가랑비에 옷이 젖듯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미엘린이 베풀어 주는 것들이 당연해지고 고마움은 희석되는 일들이.
세리나는 눈물을 터뜨렸다. 이건 세리나가 당연히 달게 받아야 하는 벌이었다.
그녀가 바라든 말든.
“빌어먹을. 이대로 다 잃을 순 없지.”
에르긴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에르긴은 세리나와 생각이 다른 것 같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