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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12화 (12/92)

12화

미엘린이 크리스티나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에르긴은 미엘린과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에 속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이들이 알음알음 전해 주었다.

미엘린이 크리스티나의 마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에르긴은 가진 옷 중에 가장 귀한 것을 골라 멀끔하고 금욕적인 모습을 꾸며 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제기랄.”

그 애인이라는 새끼를 제대로 간수 못 한 세리나 때문이다. 세리나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아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으리라. 먹고 탈 날 줄 알았다면 건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에르긴이 이를 아득 갈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세리나를 건드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가 짓쳐 들었다. 세리나는 에르긴에게 있어서 그저 새로운 재미에 불과했다. 미엘린은 부족한 것 없이 다 가진 사람이었다.

에르긴은 종종 미엘린과 함께일 때면 처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열등감이 에르긴을 못살게 굴곤 했던 것이다. 그 질척한 느낌을 세리나를 통해서 치유할 수 있었다.

‘다 저 때문에 그런 건데 이야기도 못 들어 주느냔 말이야. 내가 사랑하는 건 저뿐이라는데.’

에르긴이 억울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세리나로부터 위안을 얻는 대신에 미엘린에 대한 마음이 더 깊어질 수 있었다. 세리나는 그저 그렇게 수단이 되었을 뿐이었다.

“마차는 준비됐는가?”

“예, 백작님.”

집사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연회장에서 일었던 소란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다. 미엘린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났다 싶었다.

망해 가던 백작 가가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미엘린 덕분이었다. 미엘린이 가진 것이 많았기에!

미엘린은 에르긴에게 돈을 쓰는 걸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할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혼을 하게 되면 에르긴은 유책 배우자로서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미 연회장에 있었던 사람 모두가 증인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못이 박힌 것이다.

“혹시 모르니 변호사를 고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걱정하지 말게. 지금은 미엘린이 화가 나서 그렇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이대로 끝낼 리가 없네.”

그 말을 하는 순간 에르긴의 머릿속에는 에르긴과 닿자마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던 미엘린이 떠올랐다. 마치 에르긴이 폭력이라도 행사한 것처럼 굴던 미엘린이 말이다.

‘착각하는 거겠지.’

에르긴이 애써 생각을 덮어 버렸다. 그간 미엘린은 자신을 숨길 줄도 모르고 거짓말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에르긴이 고개를 내젓고는 미엘린을 찾아 크리스티나의 저택을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르긴은 미엘린에게 제대로 사과를 하면 받아 줄 거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진실로.

* * *

미엘린은 정말로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그런 친구였다. 이 정도면 인간에게 환멸이 나고 더 이상 사회생활도 불가능해질 정도의 트라우마가 생길 만도 한데 내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나를 깨우더니 한다는 말은 이랬다.

“일어나, 미엘린. 이렇게 늘어져 있으면 뭐 해? 쇼핑이나 가자.”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듯 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도 휩쓸려서 아침부터 밖으로 끌려 나왔다. 크리스티나는 입바른 말 한마디 하지 못했지만 내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이거 입어 봐. 이것도.”

크리스티나가 내 앞에 수북이 옷을 쌓아 주었다. 마치 내게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이걸 다?”

“원래 몸이 바빠야 생각을 덜 하는 법이야.”

크리스티나가 새침하게 말했다. 저렇게 말해도 눈빛은 나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만 입어 보면 돼?”

“응.”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크리스티나가 바라는 대로 옷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나를 저렇게나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데 고작 이 옷 하나 못 입어 보겠는가. 그리고 에르긴과 세리나 따위로 내 인생을 낭비하는 것도 싫었다.

마음은 무겁고 지옥 같았지만 그나마 잊히는 듯했다.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내 옷을 갈아입히는 점원들이 오늘따라 극성스럽게 굴었다.

“부인, 이 색도 잘 받으시는 것 같아요. 이 색도 입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부인, 머리 모양도 바꿔 보시는 건 어떨까요?”

“구두도 새로 바꿔 신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피부에 분홍빛이 돌아 그런지 이 드레스가 특히 잘 어울리시네요. 머리카락 색도 예쁜 분홍색이라 뭘 해도 사랑스러워 보이나 봐요.”

“그러게요. 거기다가 눈도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이라니! 사실 부인은 나이에 비해서 5살은 어려 보이세요.”

이들은 분명 크리스티나의 사주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여러 명이 동시에 말해서 정신없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옷도 갈아입게 했다.

“고마워요.”

“예쁘네요.”

나는 이런 말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되었다. 에르긴도 세리나도 잊힐 정도로 정신이 없는 건 확실했다. 지금 사교계를 핫하게 달구고 있는 이슈를 분명 이들도 들었을 텐데 내게는 한마디 묻지 않았다.

이 또한 크리스티나의 배려일까?

마음이 순간적으로 오그라들었다가 다시 활짝 펴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 옷도 예쁘네.”

크리스티나의 허락이 떨어지면 점원들이 새로운 옷을 입혔다. 그리고 새로운 옷은 계산대에 올랐고 계산 후에는 사이즈를 맞게 조절하기 위해서 수선실로 직행했다.

그렇게 다섯 벌쯤 입어 보고 다섯 번 머리 모양을 바꿨을 때였을 것이다.

후드득.

괜찮을 거라고 나를 설득했고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나를 속였다. 이것은 미엘린의 삶이고 나의 삶이 아니라고 나를…… 속였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삶이었고 전생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나는 미엘린에게 나를 대입한 지 꽤 되었다.

미엘린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 되었고 에르긴은 김태진이 되었으며 세리나는 오지연이 되었다.

멍하니 서 있는데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굵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미엘린.”

크리스티나가 속상한 얼굴을 했다. 그 후 그녀는 의상실 마담과 이야기해서 하루 매상을 채워 주는 조건으로 의상실 문을 닫게 했다. 그만큼 내 표정이 엉망이었다는 의미였다.

다행히 고급 의상실인 탓에 한 번에 한 손님밖에 받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크리스.”

나는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고 읊조렸다.

“괜찮…… 을 줄 알았어.”

내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오지연과 뒹굴던 김태진과 미엘린의 드레스룸에서 세리나와 뒹굴던 에르긴이 동시에 떠올랐다. 대체 나는 그들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모욕을 당해야 했던 걸까?

평생 갈 트라우마를 떠안은 채로 뻔뻔하게 내 앞에서 우정과 사랑을 논하던 그들을, 무슨 수로 마주 볼 수 있을까. 김태진으로부터 도망쳐 온 곳이 겨우 이런 곳이라니.

그 불행과 지옥을 피해서 도망친 곳이 또 다른 지옥이라니!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내게 이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엘린에게도…… 이래선 안 됐다. 무슨 이유가 되었건 몸을 내놓고 떠나 버린 미엘린의 몸속에 같은 불행을 떠안은 나를 끌어들이다니.

심장이 도끼로 쪼개지는 듯했다. 마음이 아프다 보면 몸도 아프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봇물 터지듯 쏟아져 버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렀다.

이제 복수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옅은 후련함과 함께 허탈함처럼 텅 빈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이 몸의 주인인 미엘린도 함께 느끼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벅차고 무거울 리 없었다.

나 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그런 고통과 아픔이었다. 이건, 내가…….

“죽을 것 같아.”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나를 크리스티나가 부축했다.

“네가 죽긴 왜 죽어.”

“크리스…….”

“죽어야 하는 건 그것들이지 네가 왜 죽어, 미엘린.”

괜찮은 척하며 아이반을 만나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나는 이렇게 약해 빠진 인간이었다. 미엘린의 이름으로 에르긴과 세리나를 함정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숨이 안 쉬어져, 크리스…….”

눈물을 폭포처럼 흘리며 내가 중얼거리자 크리스티나가 저속한 욕설을 짓씹었다. 그러고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세리나와 에르긴을 향한 저주를 퍼부었다.

“나 어떡해…….”

심장이 그대로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차라리 미치고 싶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 버렸으면 좋겠어. 못 봤으면 나았을까? 몰랐으면…… 괜찮았을까?”

“미엘린…….”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모르는 척했으면…….”

“그래도 지옥이었겠지. 그래도 지금 이건 지나가면 그만이야, 미엘린. 그런 것들 때문에 네 인생을 낭비할 필욘 없어. 너는 그냥…… 네 인생을 살면 돼.”

크리스티나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뜨문뜨문 말을 이었다. 크리스티나의 따뜻한 품마저도 춥게 느껴진다. 이 세상은 내게 혹한과 마찬가지였다.

나 홀로 남은 처참한 기분을 또다시 지울 수 없었다. 대체 왜, 나는 이런 일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던 걸까. 신은 무슨 의도로 이 몸을 내게 내준 걸까.

토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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