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냥 몰랐으면…… 크리스, 그러면 나는…….”
이건 과거의 내가 하는 말이기도 했다. 김태진이 한 짓을 몰랐다면 나는 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었을까? 그 밤에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텐데. 그랬다면 나는 허울이라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이 후회고 슬픔이었다. 신은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을 내려 준다는데 이게 정말로 내가 견뎌 낼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 맞나?
괜찮다 싶다가도 이렇게 무너지는데.
전혀 괜찮아지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마음이 만 갈래로 찢어진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못나고 나쁜 생각만 드는지. 나의 미련일 것이다.
김태진을 사랑했던 과거의 나에 대한 미련. 우리가 행복했던 날들에 대한 미련. 그런 날들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하는 미련 말이다.
“나 어떡하지……. 크리스, 나 정말 어떡하면 좋지. 마음이 이렇게 아파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던 그 순간이었다.
머리를 새하얀 빛이 강타했다. 눈앞이 까맣게 점멸했다.
‘미엘린! 미엘린……! 네가 내 청혼을 받아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에르긴…….’
‘평생 잘 할게. 나는 정말 평생 네 노예처럼 살아도 좋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노예라니.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 그 정도로 기쁘다는 거야.’
미엘린과 에르긴……?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선명한 화면이 눈앞에 재생되었다. 마치 내가 겪는 것처럼 생생하게 모든 것이 전달되었다. 나의 오감이 미엘린에게 동화되었다.
윤이나와 미엘린은 본디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합쳐졌다. 미엘린이 눈을 깜빡였다. 미엘린은 윤이나였다. 그리고 윤이나는 미엘린이었다.
‘미엘린. 나는 평생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우리 결혼식을 어떻게 잊겠어?’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군요. 한 번쯤 나쁜 짓을 해도 용서해 줄게요.’
‘당신한테 그럴 리가 없잖아.’
사랑을 속삭이는 다정한 말들도 부질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에르긴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에르긴, 왜, 왜 이래요……?’
‘알아선 안 될 걸 알아 버렸잖아. 당신은 날 버리고 가 버리겠지? 그 잘난 재산들도 다 가져갈 거 아니야. 그런데 그걸 잃어버리긴 내가 너무 아깝거든?’
‘에르긴!’
‘죽어, 미엘린. 그냥 이번 삶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걸 보았고. 재수가 없어서 죽는 거야.’
‘에르긴……, 이러지 말아요!’
미엘린의 마음은 지옥이었다. 믿었던 친구와 남편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그걸 목격한 미엘린을 죽이려 하다니. 인생의 덧없음을 그렇게 깨달은 것이다.
미엘린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아득한 절망과 다시는 헤어나지 못할 지독한 공포. 그리고 좌절을 말이다.
그 속에서 미엘린은 침잠하고 있었다. 에르긴은 미엘린을 단순히 살해한 게 아니었다. 철저히 그녀의 감정을 죽이고 인격을 유린했다. 미엘린의 영혼마저 살해당한 것이다.
서서히 죽어 가는 미엘린을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빛을 똑똑히 보았다.
‘귀찮게 됐어.’
에르긴이 혀를 차갑게 내찼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 그 잘난 친구도 곧 같이 보내 줄 테니까. 후.’
마치 미엘린을 버러지처럼 보는 에르긴이 마지막이었다. 미엘린의 본디 마지막. 죽은 미엘린의 몸에서 하얀 영혼이 빠져나왔다. 새하얀 영혼은 눈물로 얼룩져 어둑어둑해졌다.
[어떤가요?]
미엘린이 내게 물었다.
[당신과 나, 비슷한가요?]
“이런 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뭐죠? 대신 복수라도 해 달라고? 걱정하지 말아요. 날 위해서라도 복수는 성공하고 말 테니까.”
그 인간들이 두 다리 뻗고 자는 걸 두고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흘린 피눈물만큼 그들도 그렇게 울었으면 좋겠다. 죽어 가면서 지난 삶을 되짚어 보고 후회할 때, 그 과거에 반드시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지 말걸.
그렇게 아프게 하지 말걸!
죽도록 후회하고 미안해했으면 좋겠다.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죽기를 바란다.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미엘린의 눈빛이 흐려졌다.
[……내가 하지 못한 걸 해 줬으면 좋겠어요. 행복해지는 것. 나는 내 인생 한 번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죽었어요. 나는 당신이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주길 바라요. 행복하고 평범하게 살다가 죽는 것. 그게 바로 내 염원이에요.]
숨이 턱 막히는 말이었다. 행복이라고……?
미엘린이 쓰게 웃었다.
[나와 당신은 달라요. 나는 내 삶을 찾아볼 틈도 없이 죽었어요. 남편과 갈라서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고 했던 당신과는 달랐죠. 에르긴에게 홧김에 이혼하자고는 했지만 사실 나는…….]
미엘린의 표정이 흐려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숨겨진 진실이 있었던 건가?
[나는 겁이 났어요. 나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었죠. 나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서, 혹은 내 남편의 보호 아래서 살아왔어요. 그렇지 않은 삶 따위는 알지 못했으니 만약 남편이 용서를 구했더라면 모르는 척 눈감았을지도 몰라요.]
“……당신은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미엘린이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나는 세리나를 잃은 게 아팠고 에르긴을 잃은 게 무서웠어요.]
미엘린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러니 당신이 더 나은 삶이 있다는 걸 내게 보여 줘요.]
왜, 내가?
왜 당신보다 나을 거라고 믿지?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미엘린이 애달프게 흐느꼈다.
[당신이 내 삶을 지켜봤듯이 나 또한 당신을 지켜봤어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에르긴을 원망하기만 하던 나와는 달랐죠.]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미엘린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처럼은 못했을 거예요. 원래의 당신도 그랬죠. 증거를 확보하고 옭아맬 올가미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확실하게 이겨 냈어요.]
그렇다고 해서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웠고 김태진과 이혼하기 전까지 흘린 눈물이 한 바가지였다. 정말로 내가 이겨 낸 게 맞을까?
[무언가 스스로 해낼 생각을 한 거잖아요. 그건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에요. 나는 항상 누군가가 만들어 준 길을 걸어왔어요. 풍파 없이 단단한 평지와 같았죠.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처럼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옳았어요.]
투명한 미엘린의 몸체가 일렁였다.
[내가 여태 했던 선택 중에 가장 잘한 거였어요. 당신을 고른 것은. 나는……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 누구보다 더.]
“미엘린. 대체 나의 뭘 보고…….”
[당신은 나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에요.]
울컥 눈물이 넘어왔다.
[나는 사실 죽으려고 했어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나도 그랬어. 빌어먹을, 나도 그랬다고! 죽고 싶었다고! 그런데 당신은 나를 또 그런 절망으로 밀어 넣은 거야. 내 동의도 없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미엘린이 까맣게 죽은 눈동자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당신은 죽지 않았잖아요. 죽으려 하지 않았잖아. 나는 에르긴이 나를 죽이려는 걸 알고 있었어.]
미엘린이 숨죽인 목소리로 비밀을 뇌까렸다.
[그 개자식이 나를 죽일 걸 알았지. 그런데도 나는 방관했어. 죽고 싶었으니까! 나는 자살한 거나 다름없어. 당신은 당신을 그렇게 방치하지 않았잖아.]
미엘린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후드득 소리를 내며 눈물이 떨어졌다. 온갖 응어리진 감정이 담긴 눈물은 무거웠다. 그리고 어느새 나도 울고 있었다.
[당신은 자신을 구원하는 데 성공했지. 유약한 나와 다르게. 그러니 나보다 당신은 나은 거야.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
우리는 거울의 양면처럼 닮아 있었다.
[나는 내 불행을 당신에게 떠넘기기 위해서 고른 게 아니야. 당신이라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믿어서 당신을 골랐어.]
미엘린의 영혼이 점점 옅어졌다.
[행복해져. 내 몫을 다해서…… 부디.]
그리고 하얀 빛이 사라졌다.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드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나를 보고 있는 크리스티나가 보였다.
“괜찮은 거니? 집으로 돌아갈까?”
멍하니 크리스티나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목이 꽉 막혀서는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한참을 노력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괜찮아.”
“……괜찮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는 것 같은데…….”
“정말로 괜찮아.”
누군가가 나에게 불행을 덮어씌운 게 아니라 행복해지길 바라며 나를 선택했다는 게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내게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거였다.
내내 불행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속에 응어리져 엉망으로 엉켜 있던 실타래가 풀어진 느낌이었다.
“정말로 괜찮아.”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불행에 눈이 가려져서 그렇지 미엘린의 삶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진실한 친구도 있었고 먹고살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널뛰고 있어서 계속해서 괜찮으리라 장담은 못 하지만 지금만큼은 괜찮아진 듯했다. 그리고 미엘린의 말대로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한 평화에 도달하리라. 그렇게 믿기로 했다.
크리스티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야 할 것 같으면 말해. 언제든지.”
“응,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