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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14화 (14/92)

14화

크리스티나가 기획한 다음 코스는 새로 생긴 레스토랑이었다. 브로슈어가 귀족 가를 한 바퀴 돌았기에 새 레스토랑이 오픈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미엘린이.

아까 미엘린과 만남 이후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엘린의 기억이 점차 내게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본디 하나였던 것처럼 뒤섞였다.

한 몸에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미엘린이 이 몸을 돌려받으려는 게 아니라 내게 과거를 내주는 듯했다.

“미엘린, 무슨 생각을 해?”

“아, 아니.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나? 황태자 전하의 생신 연회였지?”

“그랬지.”

크리스티나가 피식 웃었다. 이런 것까진 소설에 서술되지 않았던 사실인데 나는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미엘린은 정말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내게 내준 것이다.

이런 게 가능하구나.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맛은 괜찮은데? 다음에 한 번 더 와도 되겠다.”

“응.”

크리스티나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아까 하도 울어서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아, 여기에 있다는 걸 듣고 왔다 하지 않느냐.”

“백작님!”

다급하게 뜯어말리는 소리와 억지를 피우는 목소리. 익숙하기 짝이 없는 오만한 음성이었다.

“에르긴.”

크리스티나가 이를 바득 갈면서 그 이름을 읊조렸다.

고개를 돌리니 막무가내로 우리가 있는 쪽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는 에르긴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곤두섰다. 김태진이나 저 인간이나. 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포기하는 법을 모르는 거지?

끝까지 질척거리며 연락하겠다고 떠들어 댔던 김태진이 저 거머리의 얼굴 위로 덧씌워졌다.

“미엘린.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잠깐 시간을 내주겠어?”

“아니요.”

당연히 에르긴에게 내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저는 더 이상 당신과 나눌 대화가 없어요. 곧 변호사에게 공증받은 이혼 서류가 갈 거예요. 그것만 작성해서 법무청에 접수해 줘요.”

“미엘린!”

에르긴이 내 손목을 강제로 잡아 올렸다. 나를 끌어내듯이 자리에서 일으킨 에르긴이 뇌까렸다.

“할 말이 있다잖아.”

“그 말을 제가 들어 줘야 할 의무는 없잖아요.”

부러 울먹이면서 눈물을 주룩 흘렸다. 세상 비련은 다 끌어안은 것 같은 여자주인공처럼. 여기 보는 눈이 몇인데 이런 일을 벌여, 이 멍청한 인간아.

크리스티나가 짜증스럽게 급사를 불렀다. 급사들이 어찌할 수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백작 부인과 백작의 싸움에 함부로 끼어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놔요.”

“미엘린. 내가 잘못했다지 않아.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세리나가 유혹해서 벌어진 일이었고 나한텐 당신밖에 없어.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잖아, 미엘린. 한 번쯤은 용서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에르긴이 자기합리화를 늘어놓았다.

용서?

“크로세타 백작님.”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에르긴을 쏘아보았다. 내 눈빛에 당황한 얼굴로 에르긴이 한 걸음 물러섰다. 한 번도 미엘린이 내보인 적 없는 눈빛이겠지.

“미엘린…….”

“다시는 그런 이유로 저를 찾지 마세요. 오늘 이후로 대화는 변호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딱딱하게 말하고는 에르긴을 밀어 냈다. 다행히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쓰레기는 아닌 듯 에르긴이 순순히 밀려났다.

“당신은 내 영혼을 찢어발겼어요. 사람을 죽여 놓고 사과하면 용서해야 하는 건가요?”

에르긴이 어설프게 웃었다. 저 머저리는 내가 한 말을 통해서 희망을 발견한 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여전히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희망 같은 것 말이다.

“미엘린. 그래, 우리 분명 좋은 기억도 있었잖아. 내가 상처 준 거 평생 살아가면서 갚을 수 있어. 내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면 되잖아. 응?”

“제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요. 당신이 닿은 자리를 당장 씻어 내고 싶을 정도로 역겨워요.”

에르긴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 글자, 한 글자 쏘아붙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되새길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에르긴이 무슨 짓을 했는지 상기시켜 주었다.

“내 친구였던 세리나와 내 드레스룸에서도 관계를 했죠. 내 침실에서도 말이에요.”

“빌어먹을 자식.”

쏟아져 나온 욕설에 에르긴이 크리스티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을 가다듬으며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에르긴이 그게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미엘린. 어떻게 그렇게 참담한 생각을 할 수가 있어.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진짜야.”

에르긴이 뭐라고 떠들어 댄들 여기에 있는 누가 그 말을 믿어 줄까. 그리고 이미 나는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읊고 있을 뿐이었다.

“하녀들을 매수해서 내 관심을 돌린다고 모를 줄 알았나요?”

“미엘린!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면. 세리나의 치마 속에서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벌거벗고 내 침대 위에서 운동이라도 하고 있었나?”

에르긴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정말로 다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본 모양이었다. 그게 에르긴의 오만이었다. 완전히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오만.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크로세타 백작님. 곧 제 변호사가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에르긴이 눈을 굴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여기서는 물러설 생각인 듯했다. 아무도 에르긴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여론이 흘러가는 양상이 에르긴을 죽일 놈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짐은 가지러 올 거잖아. 그때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군.”

어처구니가 없네.

그 더러운 것들을 내가 왜 가지고 나와?

심지어 내가 데리고 있던 하녀까지 에르긴의 입김이 닿아서 나를 배신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뭘 가지러 가. 멍청한 자식아.

“다 버려요.”

깔끔하게 말했다.

“새로 사면 되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버려요.”

“……뭐?”

“내가 누군지 잊었나 봐요. 상관없지만. 크로세타 백작님, 그런 건 다 버려도 아무 상관 없어요.”

최고의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있는 데다가 곧 있으면 내 자산을 전부 돌려받을 수 있을 텐데 굳이 그런 물건들에 미련을 두겠는가.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그만 돌아가, 크로세타. 밖에 내가 데리고 온 기사들을 부르기 전에 말이야. 끌려나가는 건 모양새가 많이 안 좋지 않겠어?”

크리스티나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다음에 봐, 미엘린. 내가 찾아갈게.”

누가 반겨 준다고 찾아오겠다는 건지. 제 할 일도 바쁠 텐데. 문이야 안 열어 주면 그만이다. 백작 가를 지키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틸리언즈로 가게 되면 크로세타가 감히 어떻게 넘보겠는가.

나를 지켜 주겠다던 아이반이 문득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겠지.’

* * *

미엘린이 레스토랑에서 고초를 겪었다는 소식은 아이반에게도 흘러 들어갔다. 벌써 이틀이나 지난 일임에도 사교계에서 잊히지 않고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엘린과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약속한 일주일에 한 번이 말이다.

아이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눈물이 가득 고였던 미엘린의 눈동자도 말이다. 그날, 연회에서 무너질 것 같았던 그녀의 절망도 떠올랐다.

아이반의 주먹에 쥐어져 있었던 종이가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공작님?”

소식을 전한 스타티스가 당황한 얼굴로 아이반을 불렀다.

“그 자식은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 거지?”

“예?”

“그래도 백작 가의 자손인데 못 배워 먹은 건가?”

“……그런 망종도 종종 있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어떻게 좋은 것만 있겠습니까?”

“……은밀하게 크로세타의 약점을 알아보게. 크로세타 백작이 하는 사업에 대해서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타인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아이반이 관심을 가졌다. 이거야말로 스타티스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일모레, 선물을 준비해야겠네.”

“선물 말씀이십니까?”

“상심한 이에게 어떤 선물이 좋지? 위로가 될 만한 것 말이야.”

스타티스는 내일모레가 미엘린을 만나는 날임을 알아차렸다. 스타티스가 옅게 미소 지었다. 무려 아이반이 여자에게 줄 선물을 사는 날이 오다니.

가우스에게 이대로 작위를 빼앗기는 건가 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듯했다. 아이반이 마음을 고쳐먹게 한 미엘린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선물을 준비해 드리면 될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직접 준비하도록 하지. 무엇이 좋을지만 알아 와.”

이런 선물을 해 본 적이 없었던 아이반에게는 충직한 가신의 도움이 필요했다 스타티스가 자신에게만 맡겨 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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