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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15화 (15/92)

15화

세리나가 우울한 얼굴로 음식을 깨작였다. 한순간에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게 스스로라는 사실이 환멸이 나서 식사조차 하기 힘들었다.

미엘린은 지금 얼마나 힘들까?

그 착한 애가 알고 있었다니……. 세리나는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미엘린에게 그런 상처를 준 것이 죄스러웠다.

“지금 네가 그런 죽상을 하고 있을 때냐?”

세리나의 부친이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혼삿길도 죄다 막힌 데다가 크로세타 백작 부인이 매달 보내 주던 돈도 끊겼다. 가문을 말아먹게 해 놓고 뭘 그런 얼굴이야!”

세리나의 부친이 그녀에게 그릇을 집어 던졌다. 세리나가 고개를 멍하니 들어 올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세리나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미엘린이 뭘 해 줘요?”

“큼!”

남작이 고개를 돌렸다.

“미엘린이 뭘 해 줬냐고 물었잖아요!”

“친구로서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우리의 어려움을 백방으로 살펴 준 아이 아니냐. 세리나, 너는 대체 그런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매달, 돈을 받았다고요?”

세리나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 먹고살기가 어려워 찾아갔더니 흔쾌히 내주더구나. 매달 돈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도 했지. 그런 친구가 어디 있겠니! 세리나, 얼른 가서 엎드려 빌거라. 미엘린이 널 용서할 때까지 말이야.”

남작 부인이 세리나를 살살 달랬다. 미엘린이 주는 돈이 없으면 당장 먹고사는 것조차 막막한 실정이었다. 세리나가 부풀어 오른 동공으로 부모님과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언젠가부터 부모님과 동생들은 생각도 못 했던 새 옷을 입게 되었다. 값비싼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승마 클럽에 들어갔다. 돈이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말 한 마리를 부양하는 데 드는 돈이 천문학적이라는 것은 세리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돈이 아버지가 번 게 아니었다고?

“너는 어차피 미엘린이 잘 챙겨 주니까 굳이 말하지 않았던 거지. 큼큼. 시즌마다 새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를 맞춰 주지 않았니. 너를 위해서 연회도 열어 주고.”

그리고…… 가족들도 부양해 주고?

세리나가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리스티나의 말에 조금도 틀린 데가 없었던 거다. 그녀는 미엘린에게 받기만 할 줄 알지 돌려주는 법이 없었던 지독한 친구였다.

세리나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로 몰랐던 걸까? 갑자기 집에 그런 변화가 생겨났는데 외면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미엘린에게 더 이상 미안하기 싫으니까,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고?

생각해 보니 자신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세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디까지 엉망으로 망가진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미엘린에게 들러붙어 기생하는 기생충이었고 그 와중에 세리나는 배신까지 했다.

“가서 얼른 빌어, 세리나! 미엘린은 착해서 용서해 줄 거다.”

“큼. 엄마, 다른 방법도 있어요. 들리는 말로는 세리나가 백작님 아이를 가졌다지 않아요?”

“그래서?”

“백작 부인이 되는 거죠! 미엘린은 이혼을 한다는데 세리나가 백작 부인이 되면 그 커다란 저택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동생이 철없는 소리를 하며 까르르 웃었다.

남작 부인이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구나, 세리나. 네가 차라리 백작 부인이 되면 그 재산이 다 네 것이 되는 것 아니겠니.”

“어머니…….”

“잘 생각해 보렴. 너도 이대로 이 저택에 만족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 지긋지긋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지 않느냔 말이야.”

세리나가 입술을 짓씹었다.

맞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다.

이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세리나는 그 진창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세리나를 봐 주지 않는 삶, 화려한 조명과 드레스가 없는 삶은 더 이상 생각도 나질 않는다.

오래도록 미엘린이 세리나를 길들인 결과였다.

어차피 미엘린의 고고한 성정에 백작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 나갈 것 같지도 않았다. 이 많은 가족을 부양하려면 세리나에게도 다음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로 앉아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 후에.

그 후에 미엘린에게 용서를 구하는 거다. 그 애의 분노가 누그러지고 이 일이 희미해질 때쯤이면 미엘린도 세리나를 용서해 줄 것이다.

그토록 절친한 친구였고 함께해 온 세월이 있으니 착한 미엘린이라면 용서해 주겠지.

그렇게 자신을 위안했다. 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세리나.”

“지금 네 아버지를 보렴. 속이 타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해서 눈 밑이 거뭇하지 않니.”

윤기가 흐르는 남작을 가리키며 남작 부인이 호소했다.

“……네. 해 볼게요. 백작 부인도, 용서를 구하는 것도.”

“잘 생각했다!”

세르미온 남작 가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완전히 망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활로는 있었던 모양이다. 세리나가 똑똑하게 크로세타 백작을 잡았다니. 그 정도면 평생 먹고 놀아도 될 재산이 있을 것이다.

세리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이 주는 부담감과 생활의 압박감이 세리나의 죄책감을 희석시켰다. 당장 삶이 급급한데 그런 감정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이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 * *

며칠 동안 정말 바쁘게 살았다. 내가 보낸 이혼 서류는 반려되어 돌아왔다. 애초에 쉽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탓에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뻔뻔하게 나오는 에르긴을 보며 분노했지만 말이다. 애초에 순순히 나올 인간이었으면 바람도 피우지 않았을 것이다. 뻔뻔하게 서로에게 잘못을 미루던 두 사람에게 양심이 어디 있었겠는가.

나는 크리스티나의 극성스러운 보살핌 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태연하게 차를 마시는 나를 보며 크리스티나가 혀를 내둘렀다.

“변호사는 뭐래?”

“쉽지 않은 싸움이겠지만 질 싸움은 아니라고 하네. 내가 돌려받아야 할 건 전부 돌려받을 수 있다고 그랬어.”

“그나마 다행이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증인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만 열 명이 넘고 모두가 그 난장판을 지켜보았다. 유책 사유가 에르긴에게 있는 것이 분명한데 무슨 수로 판을 뒤집겠는가.

변호사는 그래도 빠르게 일을 진행하는 게 좋을 듯하다고 권했다. 에르긴이 움직이는 탓이었다. 그는 자산을 은닉하고 내게 돌아와야 할 몫을 훔치려는 중이었다.

“쯧. 그래도 변호사 한 명은 더 고용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왜? 무슨 일이 있어?”

크리스티나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아니. 에르긴이 자산을 은닉하고 있다고 하길래. 그걸 전문적으로 찾아 줄 변호사를 한 명 더 고용해서 일을 돕게 하는 게 어떨까 해.”

“……가지가지 하는군. 널 찾아와 그 난리를 피워 놓고 뒤에서는 그딴 짓을 해?”

손목에 시퍼렇게 든 멍을 크리스티나가 노려보았다. 애초에 에르긴에게 기대가 없었기에 분노보다는 환멸감이 치밀었다. 이중적인 가면을 쓰고 미엘린을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뒤에서는 세리나와 뒹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더러운 짓을 하는 것뿐이었다.

“양심 없는 새끼.”

크리스티나가 계속해서 욕설을 내뱉었다. 크리스티나의 가문은 대대로 무가였다. 크리스티나도 두 걸음을 떼면서부터 기초적인 검술을 배웠다. 기사들과 어울리면서 입이 걸걸해진 탓에 백작 부인의 걱정이 늘어졌는데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런 새끼가 있어서 사회에 발전이 없는 거야. 양쪽 불알을 터뜨려 버려야 정신을 차릴 텐데.”

“크리스티나…….”

“원한다면 내가 해 줄 수 있어. 해 줘? 그런 비실한 놈 뒤에서 처리하는 게 뭐가 어렵겠어.”

“안 그래도 돼. 네 손만 더러워지잖아.”

“너는 너무 물러.”

불만스럽게 말한 크리스티나가 테이블 서랍을 뒤적여 명함을 하나 내밀었다.

“아버지가 믿고 쓰시는 변호사야. 이쪽으로 연락해서 일을 도와달라고 해 봐.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편지를 미리 써 두도록 할게.”

“……고마워.”

크리스티나는 현명했다. 세리나는 받아 가기만 하는 친구였다. 돌아오는 피드백이 없으니 미엘린도 종종 지쳤다. 게다가 미엘린…… 이, 호구 같은…… 아니! 이 호구는 세르미온 남작 가에 돈을 대 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세리나가 상처받을까 봐 부득불 비밀로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퍼 주기만 하다가 지쳐 가던 찰나에 세리나와 에르긴이 놀아난 것이다. 인생에 타이밍도 엿 같지.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달랐다. 오히려 내게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나 또한 대부호의 딸로 태어나 가진 것이 많았다. 그런데도 크리스티나는 내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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