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됐어. 나 어려울 땐 네가 도울 거잖아. 그게 친구지.”
크리스티나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차를 홀짝였다. 그 모습에서는 아까의 걸걸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 오늘이었나?”
“……맞아.”
“아이반이라니. 그 철벽의 공작이 너하고 저녁을 먹는다니!”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크리스티나가 한껏 신난 얼굴로 웃었다.
“그냥 증인 때문에 부탁하려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미엘린. 정말로 그런 거라고? 그랬는데 공작과 네가 그렇게 친해 보였다고?”
“도와준 것뿐이지.”
“미엘린……, 이 깜찍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크리스티나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했다.
“큼!”
“네가 좋다면 괜찮지. 에르긴 같은 놈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인걸. 게다가 착실하기까지 하고. 여태 공작이 스캔들 한 번 내는 걸 못 봤어.”
그러니까 남자주인공이지. 이 소설의 매력은 청학동 선비 같은 아이반이었다. 가문과 조카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세리나를 선택했지만, 평생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엉망진창이었던 세리나의 삶이 구원받고 그녀 또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전부 아이반 덕분이었다.
그런 아이반을 세리나로부터 빼앗았으니 그 애는 망가진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리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에르긴이 세리나를 감옥에 보낼 일도 없어졌고 말이다.
“큼. 그보다 다른 걸 생각해야 해, 크리스.”
“다른 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만약 계약 결혼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크리스티나가 걱정할 게 분명했다. 이건 차차 이야기하면 될 듯했다.
“나는 에르긴과 세리나를 결혼시킬 생각이거든.”
“뭐? 대체 왜? 속도 좋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생각해 봐, 크리스. 에르긴은 전부 잃게 될 거야. 그리고 그 탓을 세리나에게 돌리겠지. 그리고 세리나는 아무것도 얻어 갈 게 없는 백작 가의 허울 속에서 시들어 가게 될 테지. 나는 괜찮은 복수라고 생각하는데.”
“……듣고 보니 괜찮은데?”
“그런데 에르긴이 지금 고집을 부리고 있는 상황으로 봐서는 순순히 결혼할 것 같지는 않아.”
“세리나는 장난감일 뿐 부인은 아니었나 보지.”
크리스티나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결혼을 진행해 줄 사람이 필요해. 국왕 전하를 뵈어야겠어.”
“국왕을?”
크리스티나가 경악한 얼굴을 했다.
“응. 세리나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돌고 있잖아. 그게 거짓말이 아니든 거짓말이든 상관없이 소문이 사그라들기 전에 일을 진행시켜야 해.”
“……아이반 공작님을 이용하는 건 어때?”
“아이반?”
그러고 보니 아이반이 왕과 사촌지간이었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망설여진다. 아이반에게 그렇게까지 부탁을 해도 되는 걸까? 이건 우리 계약에 없던 사항인데.
그러나 크리스티나의 말대로 얼굴 보기 힘든 왕을 볼 수 있는 가장 빠른 루트이기는 했다.
“그건…….”
“오늘 한 번 물어보기나 해 봐. 네 말대로 서둘러야 하잖아.”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었다.
……말 돌리는 거 알고 있었구나.
큼.
* * *
아이반이 말쑥한 얼굴로 레스토랑 앞에 내렸다. 미엘린의 제안에 따라 완전히 오픈된 장소로 오게 되었다. 그래야만 나중에 돌 수도 있는 추문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아이반도 동의했다.
“틸리언즈 공작……?”
“이런 곳은 일절 안 다니는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이지?”
“미엘린 백작 부인을 만나기로 한 것 아닐까요? 그 왜, 연회에서 증인이 되겠다고 선언하셨잖아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사람들이 아이반의 등장을 두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티나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는 미엘린이 탄 마차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고대했던 대로 미엘린과 아이반이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도 매우 사무적이었으며 일로 만난 사이처럼 보였다.
“그것 봐요. 증인 때문이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아이반과 미엘린은 타인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조곤조곤히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겁니까? 얼굴이 야윈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 완전히 잘 지낼 수는 없지요. 그래도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아이반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 남자가 부인을 찾아갔다고 들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고초를 겪었다던데.”
아이반이 눈만 움직여 미엘린의 손목을 보았다. 거기에는 이제 희미한 멍 자국만 남아 있음에도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상종 못 할 인간이군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죠.”
“앞으로 그놈이 부인께 닿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그게 우리 계약 조건이니.”
“좋아요.”
미엘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긴은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스타일이었다. 아이반이 나서 준다면 에르긴은 굽힐 것이 분명했다. 아이반과 미엘린이 느릿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엄숙한 그들의 분위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곧 있으면 미엘린이 에르긴과 이혼을 두고 재판을 벌일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아이반이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제가 신경 써야 할 부분입니다. 이혼 재판은 언제 열리는 겁니까?”
“일주일 뒤에요. 크로세타 백작이 하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이혼을 막으려 드는 탓에 다음 주가 최선이었어요.”
미엘린이 쓰게 웃었다.
“전하께 부탁을 드려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증인을 자처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이반이 정중하게 웃었다. 미엘린을 하루라도 빨리 저 굴레에서 구해 내고 싶었다. 아프게 미소 짓는 것도, 서글픈 표정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미엘린은 위태로운 유리를 딛고 서 있는 듯했다.
“전하께…….”
미엘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전하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긴 해요.”
생기를 되찾은 미엘린이 눈을 반짝였다.
“어떤 겁니까?”
아이반은 미엘린이 에르긴을 죽여 달라거나, 내쫓아 달라거나, 작위를 박탈해 달라거나 하는 등의 요구를 하리라 생각했다. 요새 에르긴이 집요하게 변호사들을 쫓아다니며 자산을 은닉하고 있다는 걸 아이반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스타티스가 알아다 준 이야기였다.
“에르긴과 세리나의 결혼을 서둘렀으면 해서요.”
“……예?”
아이반이 눈을 홉떴다. 아이반과 세리나의 결혼이라니. 두 사람을 찢어 놔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두 사람의 결혼을 국왕에게 간구한다니?
물론, 미엘린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국왕에게 간청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미엘린은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멍청하게 들릴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미엘린은 에르긴이 어떤 사람인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물론 세리나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세리나가 얼마나 자기연민과 자기합리화가 심한 사람인지도 말이다. 하지만, 앞에 앉아 있는 아이반으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미엘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불행이 되는 걸 보고 싶어요.”
절대로 착한 마음으로 이런 걸 기획하는 게 아님을 밝혔다.
“오히려 행복해질 수도 있습니다.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불행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미래는 두 사람에게 없어요. 에르긴이나 세리나나.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타입이에요. 두 사람 다 제 재산에 기생충처럼 붙어서 살고 있었죠.”
미엘린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본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불행이 될 거예요. 서로를 헐뜯고 탓하다가 결국은 패망하게 되겠죠. 저는 그런 미래를 바랍니다.”
“……전하께서 분명 부인께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아이반.”
크리스티나의 말대로 아이반은 어렵지 않게 미엘린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왠지 든든한 뒷배가 생긴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미엘린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만 같은 기분.
“그러면 일주일 뒤에 법정에서 보게 되겠군요.”
“미엘린.”
“네?”
자리를 정리하려던 미엘린이 반문했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너무 오래도록 머물면 오해를 사기 마련이다. 두 사람은 아직은 비즈니스적인 만남이어야 했다.
“줄 것이 있습니다.”
눈을 깜빡이는 미엘린에게 아이반이 준비해 온 것을 내밀었다. 스타티스가 추천한 목록 중에서 아이반이 고심해 고른 거였다. 부피가 큰 것도 안 되고 너무 부담스러운 것도 좋지 않다.
그리고 위로가 될 수 있는 품목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아이반의 요청에 알맞은 물건으로 오르골이 선택되었다.
“이건…….”
미엘린의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는 앙증맞은 오르골이었다. 상자 안의 작은 공주님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함과 동시에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해 줄 것 같은 오르골이었다.
반짝이며 작은 선율을 흘려보내는 오르골을 미엘린이 멍하게 응시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무척이요.”
아이반은 안도했다. 이런 건 어린 숙녀들이나 좋아할 듯하다고 걱정한 탓이었다.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는 미엘린의 모습을 보며 아이반은 기특한 스타티스를 위해서 이번 달에 인센티브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엘린은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레스토랑에 흐르고 있는 음악에 묻혀 크게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를 잡아내고 나면 홀린 듯 빠져들게 된다. 미엘린의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것 같은 부드럽고 영롱한 소리였다.
“……고마워요. 진심으로.”
아이반의 위로가 미엘린에게도 닿았다.
그는 생각보다 따뜻했고 다정했다.
고작 계약일 관계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세리나의 운명을 훔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미엘린은 자신의 선택에 아주 만족했다.
오늘만큼은 특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