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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17화 (17/92)

17화

세리나가 심호흡을 하고는 백작 저에 발을 디뎠다. 아무도 그녀를 마중 나오진 않았지만, 이곳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미엘린 몰래, 혹은 미엘린의 초대로 수도 없이 드나든 덕분이었다.

사용인들이 자신을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세리나는 좀 더 당당해지기로 했다. 그들에게 그런 자신이 얼마나 뻔뻔하게 비칠지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외면하기로 했다.

세리나가 향한 곳은 지금쯤 에르긴이 있을 집무실이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인 데다가 사업에는 진심이라 일하는 시간에는 다른 짓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에르긴은 집무실 안에 있었다.

“세리나?”

에르긴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기에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은 이가 온 것이다. 에르긴은 지금 미엘린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 온 수를 다 짜내는 중이었다.

변호사는 연민을 자극해서 배심원단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와중에 세리나라니?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무슨 일이지? 얼른 돌아가 줬으면 좋겠는데.”

에르긴이 딱딱거리며 말했다.

세리나가 하얗게 질려서는 말을 토해 냈다.

“……에르긴 백작님. 보고…… 싶어서 왔어요.”

“보고 싶다고? 철없는 소리를 하는군. 이봐, 세리나. 네가 언제부터 내게 그런 애정을 가졌다고 떠들어 대는 거지?”

에르긴이 혀를 찼다. 서로에게 필요한 게 있어서 만난 사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인제 와서 애정으로 포장하려는 세리나가 가당찮았다.

“백작님!”

세리나가 새된 목소리로 에르긴을 불렀다. 이렇게까지 차갑게 외면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는, 저는…… 더 이상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이건 에르긴 백작님께서 책임지셔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

에르긴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네 사정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책임을 져야 하지? 잘난 애인 새끼나 찾아가!”

“애인이 아니에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고요.”

세리나가 눈물을 흘리며 진실을 말했다.

“그 사람 그날 처음 봤어요. 누군가가 저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사람이라고요.”

세리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게는 백작님뿐이었어요. 제가 만약 임신했다면 백작님의 아이예요. 저를 안은 사람은 백작님뿐이었다고요.”

“그러면 그 남자는 어디서 나왔다는 거지? 정말 기도 안 차는군.”

“……미엘린, 미엘린이 그랬어요.”

“그 이름 함부로 꺼내지 마!”

에르긴이 고함을 내질렀다. 세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간 에르긴은 미엘린을 업신여기는 말을 곧잘 하곤 했다. 그리고 미엘린의 행동을 못마땅해했다.

종종 미엘린이 자신을 집에서 키우는 똥개처럼 대한다고 말했다. 그래 놓고 인제 와서 미엘린의 이름조차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여자가 네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여자던가?”

에르긴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미엘린이 떠나고 나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미엘린은 이 저택을 밝히는 등불과 같았다. 항상 웃는 얼굴로 에르긴을 맞이해 주었다. 사용인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에르긴의 외도를 미엘린에게 숨긴 것은 에르긴의 협박 때문도 있지만,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미엘린이 상처받는 것을 그들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난리 이후로 미엘린이 떠나자 저택은 침몰한 배처럼 변해 버렸다.

사용인들이 떠드는 소리조차 잦아들었다.

그리고 미엘린은 에르긴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미엘린이 떠난 뒤 에르긴의 마음은 무너져 버렸다. 미엘린이 없는 저택에서 지내다 보니 보이는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그저 미엘린을 잃은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미엘린이 가지고 떠날 재산이 아까웠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것보다 아까운 건 미엘린이었다.

미엘린은 항상 에르긴에게 진심이었다. 최선을 다해 에르긴을 좋아해 줬다. 그 마음을 배신한 것이다.

“네까짓 게 입에 담을 수나 있는 사람이야? 현실을 봐, 세리나. 누가 너를 불러 주지? 너를 불러 주던 건 미엘린뿐이었어. 너는 그런 미엘린을 배신한 거야!”

“저, 전부 백작님 때문이었잖아요!”

세리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에르긴이 세리나의 양심을 자극한 것이다. 세리나도 전부 알고 있었다. 미엘린에게 그래서는 안 됐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미엘린을 배반해서는 안 됐다.

그런데도 에르긴이 내미는 선악과에 취해 넘어가 버렸다. 미엘린을 배신하고 그가 주는 이득을 취했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면서 말이다.

스스로가 치욕스러운 짓을 했다는 것을 절절히 절감하고 있었다.

“전부 백작님이 시키신 일이었어요. 싫다는 저를 끌어다가 저지르셨잖아요. 제가 싫다는데도…….”

“그래서 그다음은 없었나?”

에르긴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다음에 제 발로 찾아온 건 누구였지?”

세리나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에르긴의 말들이 가시처럼 세리나에게 박힌 것이다. 에르긴의 말대로였다. 세리나는 필요한 게 생기면 저도 모르게 에르긴을 찾았다.

미엘린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은 에르긴으로부터 얻어 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미엘린은 이미 세리나의 바닥을 알고 있었던 거다. 가족들이 미엘린에게 다달이 돈을 받아 왔다. 그리고 에르긴으로부터는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 냈다.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아픈 동생의 치료비로도 쓰였을 것이고 그들이 먹고 입고 자는 데도 쓰였을 것이다. 세리나는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냈다는 것에 성취감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가족을 위해서라고.

아픈 동생을 위해서라고.

일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서라고!

그렇게 인간의 길을 저버렸다.

세리나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래요. 제가 찾아갔어요! 하지만, 백작님도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우리는 공범이에요. 미엘린이 우리를 용서할 것 같나요?”

“너는 몰라도 나는 하겠지.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금도 여전히 한 가족으로 묶여 있다고.”

에르긴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이번에 이혼 소송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승산이 있었다. 미엘린을 다시 이 저택으로 데려오는 거다. 그러면 허하게 비어 버린 이 마음도 다시 차오르리라.

“백작님, 착각하지 마세요. 미엘린은 절대로 안 돌아와요. 그 애는 착해 빠졌지만 한 번 결정한 걸 뒤집지는 않아요!”

“이혼만 막으면 돼. 그러면 언제든 기회는 있다고. 그만 돌아가지, 세리나. 더 이상 소문이 거지같이 나는 건 피하고 싶거든.”

“왜요? 미엘린의 귀에 들어갈까 봐? 하!”

세리나가 혀를 내둘렀다.

에르긴의 착각을 깨부수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차피 다음 주면 모든 게 결론이 날 것이다. 백작 부부의 이혼은 이슈가 되어 연일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세리나가 몸을 돌렸다.

에르긴에게 오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이럴 시간에 미엘린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에르긴은 틀렸다. 미엘린은 가족이었던 에르긴의 배신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세리나면 모를까.

* * *

“뭐 해?”

오르골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내게 크리스티나가 물었다.

“어, 왔어?”

“웬 오르골. 어릴 적 이후로는 쳐다도 안 보더니.”

“그야…….”

나와는 다르게 미엘린은 많은 오르골을 가졌다. 하지만, 넘치는 것은 부족한 것보다 못한 법. 미엘린은 무엇 하나에도 제대로 정을 주지 못했고 오르골들은 창고에 처박혔다.

그러나 나는 오직 하나를 가지게 된 것이다.

대단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오르골은 아이반이 내게 전하는 위로였다. 나는 그 위로에 흠뻑 빠져 버린 것이다. 선율은 아이반의 성정만큼이나 부드럽고 다정했다.

“……노래가 참 좋아서.”

“준 사람이 좋은 건 아니고?”

“크리스.”

경고하는 의미를 담아 크리스티나를 불렀다. 무조건 조심해야 할 시기에 저런 말은 금지였다.

“뭘 그렇게 예민해.”

크리스티나가 내 옆의 러그에 앉아서 침대에 등을 기댔다.

“너와 나밖에 없는데.”

크리스티나는 내가 여기에서 지낸 이후로 매일같이 내 옆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분명 크리스티나에게도 약속이 있을 것이고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말이다.

“크리스, 내 걱정은 그만해도 돼. 너도 네 일상이 있잖아.”

“내 일은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모임도 안 나가고 있잖아.”

“그깟 모임.”

크리스티나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지금 나가 봤자 다들 네 이야기만 물을걸. 그러느니 안 나가는 게 나아.”

“……내가 네게 피해를 끼치고 있네.”

“그런 뜻이 아니야. 우리는 서로에게 그래도 돼. 친구니까. 문제는 그 사람들이지. 왜 그렇게 남 일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어.”

친구니까 그래도 된다니. 절대로 폐가 아니라는 말은 않는다. 역시 크리스티나다웠다. 침대 위에 올려둔 오르골을 보고 있던 몸을 돌려 크리스티나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궁금할 수도 있지.”

“그래도 나한테 묻는 건 실례지. 나는 네 친군데. 나도 충분히 상처받았고 분노했어. 에르긴과 세리나를 저 벽에 거꾸로 매달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그런 나한테 그런 걸 묻다니. 정말 예의가 없지 않니?”

크리스티나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크리스티나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듯했다. 나를 가장 많이 위로해 주고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모임 같은 건 신경 쓰지 마.”

“……하던 일은?”

크리스티나는 기사단에서 행정직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가풍을 따라서 간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티나 자체가 검에 관심이 많기도 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

그저 정원의 꽃과 같았던 미엘린과는 달리 크리스티나는 진취적이었다.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미엘린과는 다르게 크리스티나는 기사단에서 가장 높은 이가 되는 게 꿈이었다.

펜이 검을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나.

“집에서 처리할 건 하고 있어. 나는 그동안 한 번도 쉰 적이 없다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쉬어 보겠니?”

“휴가를 쓴 거야?”

크리스티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휴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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