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편을 죽여주세요-18화 (18/92)

18화

“크리스!”

“걱정하지 마, 미엘린. 나는 지금 시험을 준비 중인 거라고.”

크리스티나가 책을 들어 보였다.

“진급을 위해서 시험을 봐야 하는데 그걸 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래서 겸사겸사 휴직한 거야. 원래 하려고도 했고.”

“하지만…….”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지만 걱정이 앞섰다. 원래 일하는 데 커리어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미안하고 고마워.”

“됐어. 너도 이렇게 했을 것임을 알아.”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렇지?”

“……물론이야.”

“사실 네 흉내를 내 봤어. 어떻게 하면 네가 그런 세상 다 산 표정을 그만둘까 고민을 해 봤거든.”

“……내 흉내?”

“내 성격에 이런 게 말이 되니. 그런데 그러고 싶지가 않더라고.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을 했지. 너는 분명 내 옆에서 절대로 떠나려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럴 것 같았다.

미엘린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절대로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로 에르긴과 세리나 같은 이들이 파생된 것이다.

만약 크리스티나가 비슷한 일을 겪었다면 아무리 냉전 중이고 절교를 했더라도 먼저 찾아와 위로를 건넸을 것이다. 미엘린은 크리스티나와 사이가 안 좋은 와중에도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임에 참석해서 다른 테이블에 앉았음에도 크리스티나를 힐끗거리곤 했다. 먼저 말 걸지 못했던 것은 크리스티나가 세리나로 인해서 불편할 것을 걱정한 탓이었다.

“너를 위해서 그래 보고 싶었어. 그러니까 얼른 기운 차려, 미엘린.”

크리스티나가 담백하게 말했다.

“응……. 고마워, 크리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이렇게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눈물이 늘었다.

크리스티나는 내 눈물을 모르는 척해 주었다. 잔뜩 상처받아 고름으로 가득 차서 단단해졌던 마음이 치유되어 가고 있었다. 눈물 속에 그 고름이 녹아 흘러내리는 듯했다.

연회 이후로 항상 시큰거리던 가슴이 조금씩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내게도 그토록 바라던 평화가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 * *

그날 저녁이었다.

나는 크리스티나 옆에서 책을 읽었다. 하루를 보내는 데 책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런 나와 크리스티나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 일어났다. 세리나가 찾아온 것이다.

대체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요새 불륜 남녀들은 왜 이렇게 당당한 건지 모르겠다. 크리스티나는 문도 열어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세리나를 안으로 들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다.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내 뜻을 들어주었다.

“……무슨 일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미엘린.”

세리나가 의자에서 미끄러지듯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무릎을 정갈히 꿇고 앉은 세리나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용서를 빌러 왔어. 내가 정말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러 왔어.”

세리나가 애처롭게 눈물을 떨어뜨렸다.

“내가 잘못했어, 미엘린.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정신이 나갔던 거야. 네게 더 이상 뭔가를 부탁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에르긴 백작님이 손을 내미셨고……. 거부할 수가 없었어. 그것뿐이야, 미엘린.”

입을 다물고 세리나가 하는 말을 들었다. 결국, 사랑은 아니었다는 변명을 하고 싶은 건가? 일이 이렇게 됐는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라고…….

“하아. 변명하러 온 거라면 됐어. 네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

“미엘린…….”

세리나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내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세리나가 정말로 미안했다면 나를 찾아올 수나 있었을까? 이렇게 뻔뻔하게 나를 찾아와 용서를 빌 생각을 할 수나 있었을까? 분명 아쉬우니 온 것이다.

미엘린이 주던 혜택들을 잃어버리게 생겼으니 찾아온 거였다.

“왜. 에르긴이 널 안 받아 주던?”

“……백작님은 너를 사랑해, 미엘린. 정말이야.”

미친 것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누가 그랬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심장을 난도질해 놓고 누가 사랑이라고 그랬대!

두 사람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에게 사랑은 돈이었다. 그저 돈!

나는 차갑게 세리나에게 뇌까렸다.

“그냥…… 에르긴은 너 해, 세리나. 너는 원래 내가 버린 거 잘 주워 먹잖아. 안 그래?”

세리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 미엘린!”

“너 가지라고. 두 사람 잘 어울려. 진심이야. 나는 그 사이에 끼고 싶지 않거든.”

“미엘린, 그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

“그랬겠지. 하지만, 나는 계속 이럴 생각이야. 두 사람 사이 축복해 주고 뒤로 빠지려고.”

아이반은 왕이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을 거라는 소식을 내게 은밀히 전달했다. 나는 왕에게 가서 계획했던 대로 세리나와 에르긴의 결혼을 서두를 수 있도록 명해 달라고 그에게 청할 생각이었다.

정말로 두 사람 축복한다니까?

“미엘린, 제발…….”

“인제 그만 돌아가. 더 이상 내줄 시간이 없을 것 같네. 약속이 있거든.”

“미엘린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줘. 내가 다신 너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 알았어. 사과받았고 용서하는 건 내 마음이고. 나는 지금 너를 용서할 생각이 없고. 됐지?”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세리나가 울면서 고개를 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단호히 몸을 일으켰다.

응접실에서 나오니 크리스티나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잘했어.”

크리스티나가 두 엄지를 내게 치켜세웠다.

“정말 잘했어. 어휴, 속이 다 시원하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크리스티나가 해맑았던 탓이었다.

* * *

세리나는 그렇게 쫓기듯이 돌아갔다. 주인이 없는 응접실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세리나가 돌아가자 나는 외출 준비를 했다.

전에 사 왔던 드레스 중에서 가장 정중하고 깔끔한 것으로 차려입었다. 절대로 과하지 않은 치장에 장갑도 꼈다.

“어때?”

“흠. 귀부인 같아 보이네.”

“표정이 별론데?”

“정확히 말하면 네 나이보다 더 들어 보여.”

“좋아. 정확해.”

“왜 그래야 하는데?”

“조금 불쌍해 보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전하께는 이게 더 낫지 않을까?”

헨리 왕은 아이반에게 애착이 깊은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기 때문이었다.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왕은 아이반의 혼사에 관심을 가지고 간섭을 했다.

세리나를 과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차라리 법을 뜯어고치겠다고까지 했으니 말이다.

분명 왕이라면 아이반이 부적합한 이를 만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할 것이다. 왕은 아이반이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길 바랐다.

훗날 세리나를 헨리 왕이 받아들였던 것도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나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 화려하고 예쁘기만 하다면 내 마음을 의심하겠지.

조금이라도 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게 좋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 마차가 도착했다고 하니 나가자, 미엘린.”

크리스티나가 마차까지 나를 배웅했다.

“아이반?”

마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아이반이었다. 아이반이 내가 마차에 탈 수 있도록 도왔다.

“함께 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모르니…….”

아이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자신의 사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설마 전하께서 제게 해가 될 행동을 하시려고요.”

“그러시진 않으시겠지만 제 일에 과하게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서 걱정이 됩니다.”

아이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곤한 듯이 눈을 문지른 아이반이 몸을 마차에 기댔다. 왕은 작가가 세리나를 위해서 준비한 시련 중 한 명이었다. 너무 평온하기만 하면 소설이 재미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더해진 감초 같은 역할이었다. 세리나는 왕에 인해서 이혼 위기를 겪기도 하고 공작 부인 자리에서 쫓겨날 뻔하기도 한다.

그런 계략을 짤 줄 아는 사람이 왕이었다. 아이반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듯했다.

“혹시 전하께서 우리가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나요?”

“눈치챘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아이반. 전하께서 경우가 없는 분은 아니시니까요.”

사실 세리나는 반대해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세리나는 범죄자의 신분이 아니었던가. 절친한 친구를 죽였다고 누명을 쓴 범죄자. 게다가 친구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런 캐릭터를 여자주인공 삼은 작가가 대단하다 싶었는데 세리나는 그만큼 감정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굴렀다. 그중 대부분이 왕이 저지른 짓이었다.

왕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르겠지만 세리나에게 한 것처럼 악독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나는 그 여자만 아니면 돼. 그 빌어먹을 세리나란 여자만 아니면 된다고. 나는 그 여자가 너도 배신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치가 떨려.]

왕이 세리나에게 낙인찍었던 가장 큰 죄는 배신이었다. 친구도 배신 때리는 사람이 남편이라고 배신하지 못하겠느냐고.

왕의 자리에 있다 보니 그런 단어에 예민한 탓이었다. 게다가 왕은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그 자리에 앉아야 했다. 이복형제들과 칼을 겨누고 항상 뒤통수를 조심하며 살아야 했던 과거가 행복했을 리 없었다.

나는 그런 왕의 역린을 건드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왕은 나와 아이반을 그 정도로 반대하진 않을 듯했다. 게다가 왕은 가련한 피해자에게 동정표를 던질지언정 비난할 이는 아니었다.

내가 오늘 차림새에 더욱 신경을 쓴 까닭이기도 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아이반이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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