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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19화 (19/92)

19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왕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대한 상아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왕궁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왕궁에 집어삼켜지는 기분이었다. 내 인생에 이런 곳에까지 오게 되다니. 왕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다. 왕은 나와 아이반을 저녁 만찬에 초대했다.

왕이 내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했다.

“……소화제 챙겼어요?”

“혹시 몰라서 준비는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식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전쟁을 치르러 가는 기분이었다. 아이반의 에스코트를 따라서 길을 걸었다. 이상하게 우리를 마중 나온 이조차 없었다.

“오늘 만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

비밀을 지켜 주겠다는 건가.

우리가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왕은 도착해 있었다. 그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아이반. 그리고 백작 부인.”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아이반을 따라서 예를 취했다. 크리스티나와 급하게 연습했는데 괜찮게 보였으면 좋겠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고? 일단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군. 오늘 종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거든.”

“바쁜 일이 있었던 건가?”

“왕이란 늘 그렇지. 아이반, 일단 백작 부인을 에스코트하게.”

왕이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호의로 가득하긴 한데 저게 유지가 될지 모르겠다. 자신 있었는데 막상 만나고 나니 자신감이 깎여 나가는 듯했다.

아무 말 없이 식사 시간이 흘렀다. 더부룩하리라 예상했는데, 그럴 것을 대비해 부드러운 음식만 준비한 듯했다. 덕분에 음식이 술술 넘어갔다. 그러나 내가 낄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아이반과 왕이 간간이 나누는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숨만 죽이고 있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 왕이 어느 정도 배를 채웠는지 입가를 닦아 내더니 말을 꺼냈다.

“백작 부인께서 나를 보자고 하셨다고?”

“그렇습니다. 간청드릴 것이 있어서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얼른 식사하던 것을 그만두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깨작깨작 먹고 있었던 참이라 대답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무엇이지? 아이반이 사적으로 이런 부탁을 한 건 처음이라 꼭 들어주고 싶었거든.”

“……에르긴 백작과 세리나 영애의 결혼을 추진해 주십시오, 전하.”

왕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가 이런 소식을 알지 못했을 리 없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두 사람은 신성한 결혼을 더럽힌 죄인들이네. 오히려 벌을 줘야 할 마당에 결혼이라니.”

“세리나 영애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아주 역겹군.”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인은 부인을 배신한 두 사람이 용서되는 건가? 그래서 그런 간청을 하냔 말이야.”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아이를 위한 도리를 다하고……. 나름의 복수를 위함입니다.”

“복수라.”

왕이 눈을 반짝였다.

오히려 이쪽에 더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다.

“세리나와 에르긴을 저만큼 잘 아는 자는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은 자기합리화가 심하고 남 탓을 하기 좋아하지요. 제가 이혼하고 나면 크로세타 백작 가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유책 사유가 그쪽에 있으니.”

“그러고 나면 함께 파멸할 것이 분명하니 복수입니다.”

“……한 번에 끝내는 것보다 오래도록 괴롭히고 싶은 거군.”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왕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하던 왕이 옅게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에르긴 백작이 내게 청해 오더군. 사랑을 토로하면서 부인과의 이혼을 막아 달라고 했지. 하지만, 부부가 이토록 다른 청원을 하니…….”

에르긴이?

하지만, 왕이 배신자의 손을 들어 줄 리 없었다.

“나는 부인의 청원에 더 마음이 가는군. 두 사람이 원만한 이혼에 이를 수 있도록 손을 쓰겠네. 그리고 세리나 세르미온과 에르긴 크로세타의 결혼을 추진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부인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네.”

왕이 오만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나는 그리고 부인도 마음에 들어. 배신을 당한 사람은 그 기억이 아파서 배신하지 못하는 법이거든. 저 까탈스러운 놈이 제 아내 될 사람 고르는 방식도 독특하니 내가 뭘 어쩌겠나. 나는 아이반이 그나마 가장 나은 패를 골랐다고 믿고 싶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숨겨진 칼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왕은 내게 경고하고 있는 거였다. 지금은 더 이상 나은 패가 없으니 그대로 두겠지만 만약 아이반에게 상처 준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믿음을 배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뜻이 맞아 다행이로군. 부인이 얼른 원만한 이혼에 이르러 틸리언즈의 안주인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야. 이혼이 원만하게 끝나고 일주일 후, 내가 나서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도록 하지. 왕의 이름으로 말이야.”

왕의 말에 눈이 커졌다.

그건 왕이 나서서 우리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추문을 막아 주겠다는 말이었다. 맞선을 주선해 주겠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수익이었다.

아이반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헨리 왕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나, 아이반. 나는 틸리언즈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는 자네의 뜻을 존중했을 뿐이야.”

“……전하.”

왕이 아무런 의중도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왕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건 전부 얻었다는 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만찬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자, 그러면 자리를 정리하도록 하지. 오늘은 황후에게 가 봐야 하는 날이거든.”

“감사합니다, 전하.”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 * *

만찬장에서 나온 왕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에게 따라붙었던 시종장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오늘 왕의 기분이 정말로 좋아 보였던 것이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복수라.’

왕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고상하고 우아한가. 그 진흙탕에서 물러서서 그들이 뒹구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거였다.

오늘 왕은 미엘린을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아이반이 직접 나서서 미엘린과의 만남을 주선했으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아이반은 결국 미엘린을 고른 것이다.

후계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틸리언즈의 안주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여전히 아쉽기는 하지만 다른 이들보단 미엘린이 나을 듯했다.

똑 부러지게 제 의견을 밝히는 것도 그렇고 복수하는 방식도 그렇고. 그리고 말했던 대로 한 번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 아이반에게 쉽게 상처를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아돌프를 잃은 아이반에게 어떤 상처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직접 만나 본 미엘린이 꽤 괜찮은 느낌이라서 기분이 좋았다.

한시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항상 제 형의 그림자에 묶여 있던 아이반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영위하기를 왕은 진심으로 바랐다.

* * *

“괜찮습니까?”

얼굴이 왠지 모르게 하얗게 질린 것 같은 나를 아이반이 부축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라서 긴장했나 봐요. 괜찮아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아이반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이 나를 웃게 했다. 헨리 왕을 두고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니. 그건 마치 친구나 동생에게 연인을 소개해 주면서 하는 말 같았다.

“풉. 그렇군요.”

“정말입니다. 자기가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오늘 이야기한 것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마워요, 아이반.”

헨리 왕을 만나고 오니 마음의 짐을 한결 던 기분이었다. 헨리 왕이 나를 오롯하게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아니라 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헨리 왕은 내게 흠결이 있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감히 나처럼 흠결 있는 사람이 완벽한 아이반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나는 배신당한 뼈저린 아픔까지 있으니 그와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으리라 여길 것이고. 동시에 아이반이 내놓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여자라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

나처럼 한 번 결혼했던 이가 후계 자리까지 욕심내지 않으리라 생각했겠지. 그리고 헨리 왕 성격이라면 이 일을 계약서를 써서라도 공증하고 싶어 할 것이다.

결혼은 아이반이랑 하는데 계약서는 헨리 왕과 작성하게 생겼다. 그리고 나는 그게 어떤 불공정 계약이라도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다.

전생에서 나를 괴롭혔던 김태진의 어머니 대신에 이곳에는 헨리 왕이 있었다. 깐깐한 시누이 같은 자식.

아이반이 그 성격을 닮지 않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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