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AW
“만약 헨리가 부당한 요구를 한다면 제게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헨리는 종종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곤 하거든요.”
“네.”
물론 내가 아이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가뜩이나 독이 올라 있는 뱀을 자극하는 일밖에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헨리 왕을 다루는 방법은 아무래도 아이반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헨리 왕은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에게까지 이를 드러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이에 반하여 내가 아이반에게 계약에 대해 알리고 그 일로 아이반이 분노를 표출하기라도 한다면?
전쟁이지, 뭐.
아이반은 나를 크리스티나의 저택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기다리던 크리스티나가 그런 적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뗐다.
언제나와 같은 밤이었다.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내 옆에서 자려고 드는 하녀와 그런 하녀를 뒤에서 조종하는 크리스티나. 내가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준비된 침대와 향초. 내가 지키고 싶은 일상이었다.
에르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가만히 있던 사람이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겪어 보라고.
에르긴에게는 긴 악몽이 시작되길 간절히 바라보았다.
* * *
에르긴이 욕설을 짓씹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피곤함이 급격하게 몰려들었다. 미엘린이 있을 때는 그가 일하다가 피곤해할 때면 꿀을 탄 물을 가져다주곤 했다.
‘단것을 마시면 조금 나아질 거예요. 이렇게 일이 많아서 어떡해요? 우리 남편 고생이 많네.’
그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더 티가 난다고 에르긴은 하루가 다르게 미엘린의 부재를 실감해 가는 중이었다. 에르긴은 이번 일로 자신의 감정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그는 미엘린을 마음에 담았다.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사이에 말이다. 처음은 미엘린의 조건이 먼저였는지 몰라도 그 후에는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조차 모르고 열등감으로 두 사람 사이를 망가뜨리고 있었던 거였다.
‘이렇게 멍청한 일이 있나.’
에르긴이 이를 아득 갈았다.
만약 이런 감정을 알았더라면 애초에 세리나를 만나는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멍청함에 욕이 봇물 터지듯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도 헨리 왕을 만나 사정을 설명하기도 했고 변호사들도 최고로 고용했다. 아마도 이번 이혼 소송은 보류가 되거나 미뤄질 가능성이 컸다.
한쪽이 이렇게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면 아무리 유책 사유가 있다고 해도 기회를 준 판례가 있었다. 그날 법정에 서서 읽을 편지도 직접 작성했다.
미엘린과 이혼하게 생겼다는 소문에 투자처들과 거래처들도 연락을 취해 왔다. 가장 큰 지분을 가진 미엘린이 이 사업에서 발을 뺄까 봐 걱정하는 거였다.
에르긴은 그들을 달래는 데도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혹여나 미엘린과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사업에 차질이 생기기는 힘들었다. 이미 크게 흑자를 내는 사업이었고 미엘린이 더 이상 지원을 않는다고 해도 사업을 이끌어 나갈 자신이 있었다.
에르긴이 눈을 깜빡였다.
다시금 미엘린이 보고 싶었다. 그 여자를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 왜 항상 깨달음과 후회는 늦는지. 에르긴이 차갑게 혀를 찼다.
그건 자신을 향한 비난이었다.
* * *
돌아온 아이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토끼처럼 눈을 비비는 데이지였다. 하품을 크게 하면서 말이다.
“왜 안 자는 거니?”
“……숙부…….”
데이지가 두 팔을 벌려 아이반을 끌어안았다. 어색하게 데이지를 안아 올린 아이반이 아이를 달랬다.
“잘 시간이 지났어, 데이지.”
“숙부가 안 와서어…….”
데이지가 웅얼거렸다. 잠을 이기지 못한 데이지의 머리가 아이반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금세 도롱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잠든 데이지를 아이반이 침실로 옮겼다.
부모를 한 번에 잃은 이후로 데이지에게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외출을 나간 아이반이 돌아오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주치의는 아이가 아이반의 부재에 불안감을 느낀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돌아오기 전에는 잠들지 못하는 거라고.
‘숙부도 안 돌아오면 어떡해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아이가 던진 질문은 아이반의 가슴에 남았다. 한 번에 두 사람이 그렇게 허망하게 갈 거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고 틸리언즈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어린아이에게는 채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을 터였다.
그래도 잘 웃고 잘 지낸다 싶었는데 그런 형태로 데이지의 상처가 드러난 것이다. 아이반이 데이지를 직접 침실에 눕혔다.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고 입을 맞추는 것까지 했다.
처음에 아이반이 저택으로 왔을 땐 데이지를 보기 힘겨웠다. 데이지는 아돌프와 힐리아를 반반씩 섞어 놓은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데이지를 보면 아돌프가 연상되었다. 아이는 한 번에 부모를 잃었지만 아이반 또한 부모처럼 그를 돌봐주던 형을 잃었다.
데이지에게서 묻어나는 아돌프의 모습이 아이반을 힘들게 했다. 데이지를 보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아이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쪽은 데이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얼굴로 아이반에게 안겨 체온을 나눠 주었다.
데이지가 없었다면 아이반은 그 지옥 같은 슬픔을 이겨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던 데이지에게도 상처는 남았던 것이다. 아이반이 쓰게 미소 지었다.
아이에게 부모를 돌려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함을 돌려주고 싶었다.
“……데이지를 잘 돌보게.”
“예, 공작님.”
데이지를 돌보는 유모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내일은 데이지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네. 아침에 아이가 일어나면 내게 보내 주게.”
“예.”
내일은 데이지와 긴 이야기를 나눠야 할 듯했다. 곧 아이반이 미엘린과 결혼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데이지에게도 미엘린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아이에게 미엘린에 관해서 설명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이반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부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반도 데이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장담할 수 없었다. 미엘린을 잘 받아들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공기조차 무겁게 여겨지는 아침이었다.
아이반은 긴장된 얼굴로 데이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디 아이반은 어린아이와 이야기를 나눠 본 일이 거의 없었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스타티스 또한 어린아이를 겪어 본 적이 없어 이런 일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반이 긴장한 얼굴로 집무실을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숙부!”
데이지가 도착했다. 환한 미소를 가진 데이지가 집무실 안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아이반은 저도 모르게 허물어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좋은 아침이구나, 데이지. 잘 잤니?”
“네! 좋은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을 꿨는데?”
“우움…….”
데이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안 나요. 그냥 좋은 꿈이었던 것 같아요. 일어났는데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좋았어요.”
“좋은 꿈을 꿨다고 하니 다행이구나. 데이지, 숙부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보자고 했단다.”
“할 이야기요?”
데이지가 눈을 깜빡였다. 부모의 죽음으로 데이지는 어쩔 수 없이 또래보다 먼저 철이 들어야 했다. 떼를 쓰기보다는 어른스럽게 대화를 나누었고 나가 놀기보다는 책 읽기를 더 즐겼다.
유모와 주치의는 그게 청신호만은 아니라고 했는데 섬세한 아이의 감성에 상처를 줄까 걱정이 되어 아이반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이런 일까지 겹치니.
아이반이 혀를 내두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데이지, 가문을 이어받아 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있단다. 그게 뭔지 알고 있니?”
아이반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가주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거?”
이게 아닌가.
너무 어렵게 주제에 접근했나 싶었다. 가장 쉽게 설명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데이지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음. 그러니까…… 가문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문을 지탱해요? 지탱하는 게 뭐예요?”
아이반이 머리를 짚었다. 한 번도 아이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으니 곤란했다.
“그게……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가 있어야 한단다. 무슨 이야기인 줄 알겠니?”
데이지가 눈을 깜빡였다.
“……아, 숙부가 결혼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지!”
“그러면 숙모가 생기는 건가요?”
“그렇단다. 이 일에 대해서 데이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어.”
데이지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느리게 데이지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가뜩이나 커다란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