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데이지……?”
아이반이 당황한 목소리로 데이지를 불렀다. 잘 이야기를 나누나 싶더니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려는 것이다. 아이반이 당황한 채로 여태 나누었던 대화를 반추해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데이지를 울릴 만한 말은 없었던 듯했다. 데이지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면 데이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하녀들이 그랬어요. 숙부가 결혼하고 나면 데이지는 이곳에서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데이지는 방해가 될 거래요.”
“그게 무슨……!”
아이반이 숨을 들이켰다. 아이가 그런 말을 입에 담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아이반이 결혼하려는 것은 전적으로 데이지와 가문을 위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데이지가 방해될 리 있겠는가.
하녀들이 악의적으로 아이에게 그런 말을 떠들어 댔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저 잠깐의 수다거리로 삼는 것을 데이지가 들었겠지.
아무래도 아이 주변에 있는 이들을 다시 한 번 단속해야겠다.
“데이지. 그건 오해야. 나는 네가 방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단다. 너는 평생 한 가족으로 나와 함께 살 거야. 물론, 데이지가 바란다면 말이지.”
“숙부…….”
데이지가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분이 데이지를 미워하면 어떡해요?”
아이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않니. 우리 데이지는 이렇게 착하고 예쁜데. 누가 데이지를 미워할 수 있겠어. 이리 오겠니?”
아이반이 용기를 내서 데이지에게 팔을 벌렸다. 울먹이던 데이지가 그 품에 폭 안겼다. 눈물과 콧물을 아이반의 어깨에 문질러 닦으면서 엉엉 우는 아이의 등을 오래도록 토닥여 주었다.
이 작은 아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데이지의 서글픔이 아이반에게도 몰려드는 듯했다. 갑작스럽게 급변하고 있는 주변 상황에 적응하기도 벅찰 텐데 쓸모없는 고민까지 떠안고 있었다.
데이지의 작은 몸이 더 여리게만 느껴진다.
이 아이의 서러움이 아이반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아이반의 눈가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이반이 감정을 참아 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숙부가 미안해, 데이지. 데이지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해서 미안해.”
“으응…….”
데이지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뜨거운 체온이 아이반에게 각인처럼 남았다. 남들은 데이지를 두고 아돌프가 남긴 짐이라고들 말한다. 헨리 왕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반에게는 어색할지언정 데이지는 그가 세상을 살아가게 해 주는 동력과 같았다. 데이지가 있기에 아이반은 상실을 이겨 낼 힘을 얻었다.
데이지로 인해서 아돌프를 떠올리게 되어 힘들었지만, 그것을 상쇄할 힘이 되어 주었다. 데이지는 아이반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리고 데이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미엘린은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데이지,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숙모는 네 새로운 가족이 되는 거야. 절대로 너를 거기서 배제할 일은 없어.”
“정말? 데이지는 기숙학교에 안 가도 돼요?”
“기숙학교……?”
“하녀들이 그랬어요. 숙모가 오시고 나면 데이지는 기숙학교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데이지한테 직접 한 말이야?”
“으응……, 데이지가 몰래 들었어요.”
아이반이 한숨을 몰래 삼켰다. 확실히 사용인들의 입단속을 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아무래도 빈자리는 티가 나나 보다. 아이반이 살피지 못한 곳에서 이렇게 문제가 생기고 있으니 말이다.
보통 이렇게 거대한 저택은 부부가 나눠서 관리하곤 했다. 아이반이 홀로 관리를 하다 보니 사용인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 하녀장과 집사장을 불러 단단히 일러야 할 듯했다.
어린아이가 사는 저택에서 그렇게 입조심을 못 하고 있으니……. 게다가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제멋대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기숙학교라니?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데이지의 선택에 맡겨야 할 일이었다. 추후 데이지가 학업을 위해서 기숙학교에 가길 원한다면 보내 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사람을 들이려는 방편으로 기숙학교에 보내는 일은 없을 거였다. 데이지는 미래에 틸리언즈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숙학교는 안 가도 돼, 데이지. 나중에 데이지가 공부하러 가고 싶다면 그때 말하렴.”
“정말요?”
“물론. 데이지, 너는 나중에 이 저택의 주인이 될 사람이야. 그런 네가 이 저택을 두고 어딜 간단 말이니. 너는 원하는 한 이 저택에서 살아도 돼.”
아이반은 그가 말을 잘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데이지 또래의 아이들과 이런 진지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한다고는 하는데 그의 최선과 아이의 최선은 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이반의 걱정이 무색하게 데이지는 그가 하는 말을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 좋아요. 데이지는 잘할 수 있어요.”
데이지가 작게 중얼거렸다.
“동생도 잘 돌봐 줄 수 있어요.”
“동…… 생?”
아이반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고 보니 결혼은 그저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었는데 그 부분은 조금도 고려하지 못했다. 그저 상황에 쫓겨서 결혼 자체만 생각하고 있었다.
“네, 동생이요. 저는 여동생이랑 남동생을 갖고 싶어요.”
“크, 큼.”
왜 그런 쪽으로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까. 두 사람이 부부가 된다면 잠자리를 가지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아이반은 공작 위에 있는 대귀족이었기 때문에 신전에서 이 일에 관여할 가능성도 컸다.
미엘린은 이 일을 고려하고 있을까?
말간 미엘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홍색 머리카락 덕분에 미엘린은 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곤 했다. 그래서 그런가. 미엘린과 밤은 전혀 연상되질 않는다.
미엘린은 이미 한 번 결혼도 했던 사람이었는데도.
결혼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는 것을 뒤늦은 지금에야 깨달아 버렸다.
* * *
아이반이 그렇게 곤욕을 치르고 있을 무렵, 크리스티나의 저택.
나는 크리스티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는 몇 명 정도 낳고 싶은데?”
“음……, 글쎄.”
사실 아이반과 잠자리를 가질지 가지지 않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와 아이반은 계약으로 묶인 관계였고 계약만 이행되면 굳이 잠자리를 가지지 않아도 된다.
아이반이 바란다면 모를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쪽이었다. 하도 별일 다 겪다 보니 인생의 욕구가 말살된 듯했다. 지금 나에게 넘쳐나는 것은 수면욕뿐이었다.
고갈된 마음을 다시 채워 넣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미엘린은 대부분 시간을 책을 읽거나 자면서 보내고 있었다. 에르긴과 세리나의 처우까지 결정하고 나니 깊은 탈력감이 찾아온 탓이다.
“이런 건 얘기도 안 해 봤단 말이야? 얘가.”
결혼의 달고 쓴 면을 모두 보았다. 인제 와서 어떤 기대가 생길 리 만무했다. 크리스티나가 나를 흘겨보면서 말했다.
“결혼이 장난이니.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알아? 아니라는 거 네가 더 잘 알면서.”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아주 상관이 넘치지! 무려 공작의 결혼이잖아. 그것도 국왕과 사촌 관계에 있는 유력가와의 결혼이야. 다른 이들이 토끼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을 텐데 왜 상관없다는 거야?”
크리스티나가 다다다다 쏟아 냈다.
“설마 에르긴 따위를 생각하느라고 ‘잠자리도 거부하겠어’ 하는 건 아니겠지?”
눈살을 찌푸린 크리스티나가 그것은 옳지 않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크리스티나가 내 손을 덥석 붙들었다.
“자유연애 시대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수절이야? 미엘린, 너는 네 인생을 즐길 자유가 있어. 게다가 그 인기 많은 아이반 공작이잖아? 아이반은 공작이 아니라 백작 시절부터 인기가 많았다고!”
“그런가?”
볼을 긁적였다.
크리스티나가 왜 이렇게 열정적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에르긴과의 결혼 생활로 인한 실망감으로 미래를 저버릴까 그러는 것일 테다.
결혼 생활에는 확실히 아픈 면도 있었지만, 행복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억을 떠올리고 곱씹어 보며 결혼 생활에 대한 꿈을 부풀릴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미엘린이 당부한 대로 나는 내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행복을 결혼에서 찾을 생각이 없을 뿐이지.
“미엘린! 그렇게 세상 다 산 얼굴 하지 말고. 새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네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에르긴이나 세리나 따위는 잊어버리고 말이야!”
흥분해서 테이블을 내리치는 크리스티나 덕분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노력할게, 크리스.”
“정말이지?”
“응.”
거짓된 약속이라도 이런 약속이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내 행복을 빌어 주는 친구를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