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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22화 (22/92)

22화

나의 자산을 맡아서 관리해 주고 있는 회계사가 크리스티나의 저택을 방문한 것은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지내고 있음을 알게 된 회계사가 직접 연락을 취해 왔다.

“웨스턴 씨.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부인. 안 좋은 일을 겪으신 것 알고 있습니다.”

입 안이 씁쓸했다. 이런 미소를 언제까지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회계사가 내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의드릴 일이 여럿 있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부인의 변호사께서 제게 자산 관련 문의를 하셔서요.”

“……그렇군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부인께서 지금까지 자금을 운용해 온 것과는 다르게 하시길 원하실 듯해서요.”

회계사가 내 앞에 서류를 펼쳐 놓았다.

회계사가 내게 하나하나 짚어 가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달마다 지출하고 있는 금액과 가지고 있는 자산 규모, 그리고 이번 소송에서 이겨서 위자료로 에르긴이 가진 자산을 돌려받았을 때 늘어날 자산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고정적으로 지출하고 계셨던 이 부분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게 되셨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역시 비싼 회계사는 다른 건가? 고객의 니즈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파악할 줄 알았다. 그가 손으로 짚은 것은 에르긴과 세리나에게 쓰고 있던 금액이었다.

에르긴에게는 품위비 명목으로, 그리고 세리나의 가족에게는 생활 유지를 명목으로 막대한 돈이 흘러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내 자산에 저 금액이 큰 타격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더 이상 내가 쓸 이유가 없는 금액이었다.

“이 항목들은 지워도 되겠군요. 앞으로 그런 일로 제 돈이 빠져나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회계사가 항목 위를 펜으로 죽 그었다.

내 마음속에서 내가 두 사람의 이름 위에 먹칠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클로린 씨의 말씀에 따르면 에르긴 백작의 사업체의 지분을 일부 양도받을 수 있을 거라더군요.”

“……흠.”

안 그래도 사업을 해 볼까 했는데. 친정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업체들은 지금도 잘 굴러가고 있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들에게 손을 뻗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차라리 지금 막 덩치를 키우고 있는 사업을 빼내 오는 건 어떨까.

“그 지분이 어느 정도 될까요?”

“한 40퍼센트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사업 전반이 부인의 자금을 토대로 시작한 지라 승소한다면 그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 지분을 전부 포기하겠어요.”

“예?”

“대신 그만큼의 금액을 전부 돈으로 상환받았으면 좋겠군요. 이 이야기를 클로린 씨에게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예. 어차피 찾아뵈어야 합니다.”

“잘됐군요. 그 지분을 전부 돈으로 상환받고 저는 새로운 사업을 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사업을…….”

“살롱은 어떨까요?”

“그건…….”

회계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에르긴이 하는 사업도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에르긴보다 돈이 많아요. 굳이 투자처를 찾지 않아도 사업 정도는 벌일 수 있을 정도죠. 그러니 좀 더 많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말씀은…….”

보통 호캉스를 갈 때 비싼 호텔을 선호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좀 더 나은 서비스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브랜드 네임 정도 아니겠는가.

물론 누릴 수 있는 것도 늘어나야 마땅했다.

이왕 살롱을 한다면 호캉스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내게는 그런 걸 전부 실행할 수 있는 자산도 있었다.

내 이름을 딴 브랜드 네임을 만드는 거다. 예를 들어 프라X나 사X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크리스티나가 말했던 행복한 결혼 생활보다는 이 사업 이야기에 더 구미가 당겼다.

전국 각지로 뻗어 나가는 미엘린의 살롱이라. 이름도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차별화된 살롱을 만드는 거죠.”

이벤트로 쿠폰도 뿌리고 하면 괜찮은 데이트 코스로 자리 잡을 수도 있을 듯했다. 아니, 이러지 말고 그냥 호텔을 세워 버려?

살롱과 합쳐진 호텔로 말이다.

“지금 왕국 내에 있는 호텔이 몇 개 정도죠?”

“호텔 같은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편입니다. 수익을 보기 힘들어서요. 보통 호텔은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데 다른 지역으로 가지 않는 한 귀족들이 호텔에 머무는 일은 적어서요.”

하긴. 이만큼 거대한 저택에 사는데 굳이 호텔에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텔을 통해 다른 걸 추구하려 한다면? 오히려 현대식 디자인을 접목하는 거다.

빈티지하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과는 다른 현대의 편리함과 실용성, 거기에 세련됨까지 가미한다면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을 듯했다.

“이건 이혼 이후에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군요. 웨스턴 씨와 클로린 씨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면 자금 문제는 그렇게 정리하면 될까요?”

“아. 지금 정기적인 지출이 꽤 줄어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그 금액을 후원하는 데 쓰고 싶어요.”

“어떤 후원 말씀이실까요?”

“저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건 어떨까요? 돈이 없어 이혼도 못 하고 부당함을 견디고 사는 이들에게요. 변호사 수임료를 대신 내는 거죠. 적당한 변호사 사무실을 셋 정도 골라 주시면 이 안을 추진하는 거로 해 볼까 해요.”

쓸데없는 데 돈을 쓰느니 그게 더 나을 듯했다. 이혼해 주지 않는 배우자와 소송을 진행할 돈이 없다는 이유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지속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클로린 씨께서 아주 흥미로워하실 겁니다.”

회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해당 부분을 체크했다.

“대상자는 잘 선정해 주시리라 믿어요.”

“예, 맡아서 잘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정도면 된 걸까요?”

“네. 법정에 오실 건가요?”

“예, 부인. 그곳에서 부인께서 승소하시는 걸 보고 싶습니다.”

“그럼 그날 뵈어요.”

회계사가 나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그의 방문은 내게 환기가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간 미엘린은 에르긴의 사업을 돕고 그를 잘되게 하는 일에 힘써 왔다. 미엘린은 에르긴이 잘되는 게 그녀도 잘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엘린은 백작 가의 영애로 태어나 내내 화초처럼 자라 왔으니 그런 사고방식을 지닌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다르지. 내가 잘되어야 내가 잘 사는 거다. 김태진과 갈라서면서 내게 남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을 땐 얼마나 허탈하던지.

그런 허탈함은 사양이었다.

아이반은 곧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남자주인공을 해 먹지. 아이반이 나와 이혼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내가 정말 엄청난 망나니라서 돈도 막 쓰고…… 이건 내가 채워 넣을 수 있고. 내가 인간쓰레기라 데이지를 때린다거나. 아니,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밥 먹고 숨 쉴 자격이 있는 건가.

흠. 아무튼, 내가 아이반의 한계점을 넘어서서 이혼에 이르게 될 가능성은 적었다. 남자주인공 버프를 타고 있는 아이반이 바람을 피울 리도 없고 왕이 말하는 대로 나 또한 배우자에게 그런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평생 아이반과 살아간다는 건데…….

이걸 이제야 생각하고 있다니.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그럴 수 있지 싶었다. 에르긴을 떼어 내느라고 급급하던 때였으니 말이다. 아이반은 검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을 가진 수려한 미남이었다.

남자주인공답게 밤하늘 같은 흑발과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랏빛 눈, 타고난 피지컬로 인해 태평양 같은 가슴팍, 백두산만큼이나 높은 콧대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얼굴형.

일단 겉모습은 평생 같이 살 동반자로서 100점 만점에 100점을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성. 인성은 말해 무엇하랴. 형이 남긴 데이지를 책임지고 결국 정말로 공작 위를 물려준다. 아무런 욕심도 없는 사람처럼.

게다가 세리나에겐 얼마나 잘하는지 본성부터 비틀어진 사람도 개과천선할 수준이었다. 그 정도면 인성도 100점 만점에 100점이다. 재력과 신분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었고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능력이 없는 남자주인공이 어떻게 인기를 얻겠는가.

이 정도면 함께 살아갈 사람으로서는 최고라고 말할 수 있었다. 어디서 이 남자 같은 남자 한 번 만나 봤으면 했는데 현실이 되어 버렸다.

크리스티나가 걱정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꽤 아이반과 잘 지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식적이고 예의 바른 사람을 좋아하거든.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남자주인공의 또 다른 조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자주인공 한정으로 보이는 절륜함이나 소유욕 같은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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