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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23화 (23/92)

23화

“너를 찾아오는 손님이 나를 찾아오는 손님보다 많은 듯한데, 그저 내 착각일까?”

크리스티나가 새침하게 말하고는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지금 밖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어. 아무래도 아이반 공작이 아닐까 싶은데.”

크리스티나의 눈빛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설렘이었나 보다. 그녀가 나를 보면서 짓궂게 미소 지었다. 크리스티나의 말대로 나를 찾아와야 하는 손님들이 전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고마워, 크리스티나. 이건…….”

“언젠가 갚을 일이 있을 거라고? 그러겠지.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나갈 준비나 해.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의 재촉에 초대장을 뜯었다. 겉면에 적힌 게 아무것도 없어서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편지를 펼친 나는 첫 줄을 읽자마자 올 것이 오고야 말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반이 아니라 왕이야.”

“왕……? 헨리 왕이 왜?”

“아이반 때문 아닐까?”

“전에 만나서 책잡힌 건 없었지?”

“절대.”

“후우. 조심해. 헨리 왕은 속을 잘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어. 위험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알았어.”

크리스티나는 몇 번이나 내게 당부를 하고 나서야 보내 주었다. 헨리 왕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약간 긴장감이 올라왔다. 이게 한국으로 따지자면 대통령을 만나는 거 아니야.

와. 이렇게 생각하니까 더 놀라운데.

나를 데리러 온 마부가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의 명을 받고 부인을 모시러 온 올리버라고 합니다.”

“반갑네, 올리버.”

역시 왕성에서 나온 사람이라 그런지 마부조차도 깔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나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마지막으로 마차가 출발했다.

이게 바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건가.

* * *

“세리나. 세리나! 문을 좀 열어 보렴. 간 일은 어떻게 되었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돈이 들어오질 않는데 지금 네가 그러고 있을 때니!”

남작 부인이 세리나의 방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세리나!”

세리나가 귀를 틀어막고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자신의 이름을 그만 불렀으면 했다. 가족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엉망이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저들이 없었으면 자신은 에르긴의 꾐에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미엘린을 배신할 일도 없었을 거다. 가장 좋은 친구를 잃지 않아도 되었다.

미엘린만 생각하면 심장이 터져 버릴 듯했다. 이대로 눈물을 토해 내고 바닥을 기어가 용서를 빌어도 미엘린은 받아 주지 않을 듯했다.

그 애가 그렇게까지 차가운 얼굴을 하는 걸 세리나는 처음 보았다. 그리고 세리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내가 버린 거 잘 주워 먹잖아.’

미엘린은 한 번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미엘린을 그렇게 만든 셈이었다.

“끄으…….”

세리나가 숨을 죽인 채로 오열했다.

“미엘린……. 미엘린.”

에르긴도 저주스럽고 이 생도 싫었다.

에르긴이 자신을 보던 눈빛을 떠올리면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똑같이 부정을 저지른 처지에 벌레 보듯이 보던 눈빛이라니. 미엘린도 에르긴도 똑같은 눈으로 세리나를 보고 있었다.

사실 에르긴이 어떤 눈으로 보든 간에 수치스럽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상처받을 일은 아니었다. 세리나를 서글프고 아프게 하는 것은 미엘린의 눈빛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세리나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세리나! 돈이 떨어졌다지 않니! 네 동생 약값은 어떡하고……. 그리고 보석상에 보석을 예약해 뒀는데 그건 어떡하니.”

“큼. 아직도 세리나는 나오지 않고 있소? 미엘린이 보내 주던 돈은?”

“그 계집애도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이렇게 뚝 끊어 버릴 건 뭐예요. 우리가 바람피우라고 했나.”

“그러게 말이오. 우리랑 인연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지.”

밖에서 들리는 대화는 세리나의 영혼마저 찢어발겼다. 고마움을 잊고 양심과 수치를 잊은 자들의 대화였다. 세리나가 그랬듯이 미엘린이 베풀어 주는 혜택에 푹 빠져 당연하게 여기게 된 거였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망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들도 처음에 이렇지는 않았다. 미엘린이 해 주는 것이 고맙고 그녀의 배려에 감동했다. 그러다가 점점 액수가 커지고 요구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세리나는 모르는 게 아니었다. 모르는 척했을 뿐이지. 그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미엘린이 베풀어 주는 것들을 받아 챙기는 편이 마음 편했다.

배고프다고 우는 동생들을 볼 필요도 없었고 하루가 다르게 억척스러워지는 어머니를 보며 속상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다 한순간에 다 잃으니 보이는 것이다.

세리나는 미엘린에게 기생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애의 피를 빨아먹으며 고마움도 모르는 기생충.

그래 놓고 미엘린이 다시 받아 줄 거라고 자신했다니.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염치도 잊고 가서 다시 빌어 볼까 싶다가도 이렇게 미엘린의 인생에서 빠져 주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리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온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세리나가 귀를 더 꽉 틀어막았다. 제발, 이 치졸한 생이 끝나 버렸으면.

이 악몽이 내일 일어나면 전부 잊혔으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후회가 밀려들었다. 주책없이 미엘린이 보고 싶었다.

* * *

마부가 나를 내려 준 곳은 프라이빗 룸이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다른 이들과 단절된 곳에서 왕을 만나는 것이다. 커다란 챙모자를 쓰고 나온 보람이 있었다.

“왕을 뵙습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군. 잘 지냈나?”

“예, 전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렇게 인사치레할 것 없네. 부인이라면 오늘 내가 만나고자 한 이유를 짐작하고 있을 듯한데.”

“예, 전하.”

헨리 왕이 그제야 웃는 얼굴로 내게 자리를 권했다. 오늘 이 자리가 가치가 없진 않을 것임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만약 내가 여기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헨리 왕을 보았다면 쫓겨나지 않았을까?

“이곳 음식이 나는 입맛에 맞더군. 그래서 종종 왕비와도 나오곤 하는 곳인데 부인에겐 어떨지 모르겠어.”

“초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헨리 왕이 빙긋 웃었다. 그가 종을 울리자 이미 준비되었던 듯 음식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 대해서는 아이반은 모르고 있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앤 몰랐으면 하는데.”

“저는 오늘 외출한 사실이 없습니다, 전하.”

“말이 잘 통해서 좋군.”

헨리 왕의 눈에 만족감이 서렸다.

“그러면 식사부터 시작해 볼까?”

분명 목에 걸려서 넘어가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는 신경 줄이 튼튼한 모양이다. 오늘도 음식은 잘 넘어갔다. 그런 나를 헨리 왕이 뿌듯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오히려 본인은 식사에 별다른 미련이 없는 듯했다.

“……식사가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군.”

“감사합니다, 전하.”

“자, 식사가 마무리된 듯하니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 사실 한 가족이 될 사이라면 식사라도 먼저 대접하는 게 예의라고 왕비가 하도 그래서 말이야. 다음에 왕비를 만나면 식사 잘했다고 말해 줄 수 있겠나? 오늘 레스토랑도 왕비가 예약해 주었거든.”

그 제멋대로인 헨리 왕도 어쩌지 못하는 상대가 있다면 다름 아닌 제일리나 왕비였다. 소설에서 세리나를 헨리 왕이 받아들인 데 한몫한 이도 제일리나 왕비였다.

제일리나 왕비가 이번 생에서는 내게 도움을 줄 예정인가 보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하려는 모든 일이 술술 풀려 가고 있다고 느끼는 건 착각일까? 미엘린이 나를 지켜보면서 도와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큼.”

헨리 왕의 손짓에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시종이 치워진 식탁 위에 양피지를 올렸다. 양피지에 적힌 유려한 글씨는 계약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반과도 쓰지 않았던 계약서를 헨리 왕과 쓰게 생겼다.

“이 계약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유효할 거네.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계약이지. 잘 읽어 보고 생각해 주면 좋겠군.”

“……예, 전하.”

“혹 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헨리 왕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지금 저 눈빛 앞에서는 아무리 제일리나 왕비라고 하더라도 나를 구해 줄 수 없을 듯했다.

“아닙니다, 전하. 당연히 염려하실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헨리 왕의 조건은 나와 아이반이 나누었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데이지의 후계 자리를 보장할 것. 그 애를 내 호적에 올리고 양녀를 받아들일 것. 틸리언즈의 자산을 탐내지 않을 것. 만약 내가 유책 사유를 만들게 되어 이혼하게 되면 조용히 물러날 것. 그 외에도 상식적인 선 안에서 요구 사항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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