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편을 죽여주세요-24화 (24/92)

24화

전부 아이반의 입장에서 적혀 있는 조건들이었지만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건 없었다.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이반과 데이지에게 좋은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이라는 항목이었다.

“아이반은 착실한 청년이지. 가족인 내가 봐도 그래. 결혼에 대한 별다른 환상은 없지만, 기본은 해야 하지 않겠나. 다시 말했지만 나는 아이반이 상처받는 게 싫네.”

헨리 왕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헨리 왕의 태도로 보건대, 아이반을 어린 동생이나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반이 곧고 바른 빛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수호천사 같다고나 할까.

그래도 이런 가족이 있어서 아이반은 좋을 듯했다.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 준다니.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라 도장을 찍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부인이 바라는 건 없나?”

“제가 바라는 건 아이반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알아도 되는 건가?”

어차피 말하지 않더라도 헨리 왕은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뭘 그렇게 돌아갈 필요 있나. 순순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에르긴 크로세타를 죽여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뭐?”

잠시간 정적 후 헨리 왕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나는 부인이 참 마음에 드는군. 에르긴 백작을 만나기 전에 아이반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할 정도야.”

이 말을 헨리 왕이 좋아할 거라고 이미 예상했다. 헨리 왕은 자신을 배신했던 전 약혼자에게 사형을 내린 전적이 있었다. 제일리나 왕비를 맞이하기 전, 그리고 왕이 되기 전의 약혼녀였다.

헨리 왕을 배신하고 헨리 왕의 손위 형제와 결혼했던 여자. 여러 가지로 보는 눈이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당시에 이미 헨리 왕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던 상태라는 거다.

소설에서 짧게 언급했는데 그 여자는 제 배 속의 아이를 약을 먹어 죽게 했다. 헨리 왕에게 그건 커다란 트라우마가 되었고 소설에선 세리나를 미워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

“정말로 죽여 달라고 했나?”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제힘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요.”

“그렇겠지.”

헨리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반이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하던가?”

“예,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그 애는 요령을 부릴 줄 몰라서 말이야. 부인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네. 나도 돕지.”

오랜만에 재밌는 장난감을 찾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제안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에르긴의 처절한 파멸이었으므로.

이번엔 내가 널 죽여 줄게, 에르긴.

* * *

이혼 재판의 날이 밝았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크리스티나가 핼쑥한 얼굴로 내가 준비하는 걸 지켜보았다.

“옷은 감색이 좋지 않겠어? 네 머리카락 색엔 그게 더 나아.”

“그러지 뭐.”

하나서부터 열까지 내 어머니라도 된 듯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런 크리스티나의 간섭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부모님은 언제 돌아오신다고 했지?”

“아.”

지금 인체스터 백작 부부는 하계 훈련을 위해서 북부로 떠나 있었다. 그리고 너무 더워지기 전에 제도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한 일주일 정도 남은 것 같은데.”

“내가 있으면 불편해하시지 않을까? 호텔로 가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에르긴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호위도 없는 호텔로 가겠대? 그리고 네 시중을 들어 줄 하녀도 아직 못 구했잖아.”

“……그러네.”

사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었던 이유는 내가 아이반과 결혼하면 나의 새로운 거주지가 될 틸리언즈 저택에 괜찮은 사용인들이 즐비했기 때문이었다. 본디 남주 버프를 받으면 주변에도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세리나도 잘 보살펴 줬던 이들이니 나도 잘 지낼 수 있을 듯했다. 만약 내가 지금 사람을 구하게 되면 나중에 그들과 부딪힐 수도 있고.

크리스티나 말대로 나를 보살펴 줄 사람 없이 혼자 나가서 지낸다는 건 무리 같았다. 일단, 나는 여기에서의 삶에 익숙하지 않았고 미엘린은 초특급 다이아몬드 수저로 태어나 그렇게 살다가 갔으니 말이다. 기억을 되찾았으면 뭐 하나. 거기에서 생활력과 관계된 기억은 조금도 없었다.

내 수긍에 크리스티나가 피식 웃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알고 계시니까 그냥 지내.”

과거 크리스티나와 교류하고 지냈을 때 인체스터 백작 부부는 미엘린에게 두 번째 부모나 다름없었다.

“또 헛소리하면 정말 내쫓아 버릴 거야.”

“……그건 진짜 무섭네.”

“그러니까 치장이나 해. 감색 드레스로 입혀 줘.”

크리스티나의 손짓에 하녀들이 내 옷을 다시 갈아입혔다. 크리스티나에게 붙잡혀서 총 3벌을 갈아입은 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 위기에 처할수록 치장해야 한다나. 이것 또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전에 이혼할 때는 이 세상 불행을 다 끌어안은 여자처럼 하고 갔는데 ‘그러지 말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나와 함께 법정까지 가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에 연회에서 나를 위한 증인이 되겠다고 나섰던 귀족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 사이에 아이반이 있었다.

아이반과 눈이 마주친 내가 눈짓으로 인사했다. 아이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이 되어 주겠다고 나섰던 이들을 모아 준 것은 아이반이었다.

나와 약속한 대로 나를 돕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주었다. 크리스티나가 전해 준 말에 의하면 이미 일각에서는 섣부른 연애설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다고 했다.

이혼할 때까지는 너무 이르지만 나름 청신호였다.

“크리스, 가자.”

“그래. 많은 사람이 왔네. 다들 네 이혼에 관심이 많은가 봐.”

“기자들은 내가 불렀어.”

“왜? 관심받는 거 별로 안 좋아하더니.”

“증인이 많아야지 에르긴이 다른 소리를 못 할 테니까.”

“그러다가 이혼하지 못하면?”

크리스티나가 숨을 죽인 채로 물었다.

“배심원들이 네 손을 들어 주지 않을 수도 있잖아. 요새 에르긴이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돈을 뿌린다던데.”

“다 무용지물이 될 거야. 내 손을 잡은 건 헨리 왕이거든.”

“왕이?”

크리스티나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 의심 많은 작자가 네 손을?”

“그렇다니까.”

크리스티나가 내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귀여움도 선보였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 정말로 왕이 널 돕기로 한 거야?”

“응.”

“어째서?”

“내가 마음에 들었다던데. 아이반의 짝으로 말이야.”

“조심해, 미엘린. 왕은 조심해야 해.”

“알고 있어.”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나보다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위험하긴 하지만 내 편으로 만들면 왕처럼 편한 사람도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내 손을 붙들었다. 항상 도도한 모습을 보이던 크리스티나의 약한 모습이었다.

“나는 정말로 네가 걱정돼.”

“……고마워, 크리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때도, 그리고 오늘도.”

내 손을 잡아 줄 가족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곳에서 크리스티나는 유일하게 내 손을 잡아 준 사람이었다. 나도 크리스티나의 손을 꼭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에르긴이 도착했다. 세리나랑 함께 왔다면 꽤 재밌는 장면이 연출되었을 텐데 에르긴은 혼자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에르긴이 세리나를 내쳤다던데.

그럴 필요 있나.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게 될 사이였다. 이 나라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 중에 누가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있겠는가.

먹고 떨어지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에르긴은 법정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향해 직행했다.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얼굴까지 맞대려는 건지.

“미엘린.”

애틋한 얼굴로 나를 부르는 에르긴 덕분에 소름이 돋았다. 팔에 닭살이 돋아 도망치듯이 물러섰다.

“잘 지냈어?”

“덕분에요.”

차갑게 잘라서 대답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도 않았다. 에르긴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잠잠하던 마음속이 들끓고 일어나 살의가 드러났다.

‘죽어 버려. 너 같은 건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그렇게 외쳐 대면서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미엘린.”

“……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눈이 멀었나 봐. 만약 오늘 우리가 이혼하지 않게 된다면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

“세리나는 임신했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사 임신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는 사이라는 거잖아요.”

“이제 그 여자는 정리했어. 더 이상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다시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약속할 수 있어. 미엘린, 당신이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수 있어.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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